안양20140214a-히7장2절(십일조) - 이 근호 목사
십일조이야기입니다. 십분의 일만 내면 되죠, 라는 이야기죠. 십분의 이도 아니고 삼도 아니고 “십분의 일만 내면 더 이상 하나님 돈 요구 안할 거죠.” 그게 십일조거든요. 그러니까 십분의 일만 내고 더 이상 그 다음부터 십분의 이, 십분의 삼 강조 안 할 테니까 차라리 하나님께 세금 십분의 일이다. 그렇게 알고 있는 게 십일조잖아요. 하나님과 우리 관계를 돈 관계로 보는 거예요. 십분의 일이라는 것은.
돈을 주게 되면 십분의 구는 누구 것이 되죠? 우리 것이 되죠. 그럼 십분의 구가지고 우리가 뭐합니까? 나의 것을 따로 챙길 수 있다는 그러한 다짐이 되는 겁니다. 십분의 일은 뜯겼지만, 십분의 구는 더 이상 안 뜯길 것이라는 이것은 하나님이 와도 내거라는 확정된 십분의 구입니다. 그러니까 하나 뜯겼지만, 아홉이 남았으니까 남은 장사라고 여기는 겁니다.
거기다가 십분의 일을 줬다고 해서 거기다가 축복까지 준다고 하니까 말라기에 이게 얼마나 확실한 말이냐 하면, 아주 시험 테스트까지 해보라고 장담했으니까 누구 쪽에서? 하나님 쪽에서. 해보라니까 줬던 십분의 일보다 준 십분의 일이 근거가 되어서 추가적으로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면 100%에서 잠시만 90% 줄었다가 110% 늘어날 수 있는 장사라면 그거 괜찮은 장사지요.
그런데 그걸 주저하면 믿음 없는 거고 주저 안하고 해보면 믿음 있는 거고, 그러니까 내가 믿음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십분의 일을 내면 믿음 있는 거고, 믿음 있으면 그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했으니까 천국 가는 거고, 그 믿음 없으면 지옥 간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문제가 모든 것이 뭐냐 하면, 인식이 법적이죠. 율법적이죠. 이 십일조 법이 성립되려면 돈 내는 쪽이 있어야 되겠지요. 돈 받는 쪽이 있어야 되고. 돈 받는 쪽은 누구냐 하면, 바로 옛날 같으면 레위인들이 돈을 받았어요. 레위인들이 돈을 받았고 레위인들이 자기가 착복하는 것이 아니고 레위인들도 십일조를 제사장한테 바쳤고. 그럼 제사장도 다 착복하느냐, 다 착복하지요. 그걸로 마감 끝났어요.
십일조가 법인데 이 법이 내는 자있고 받는 자있다. 그러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하고 직접 관계 안 해도 되지요. 구원받는데 있어서 십일조 요구하는 사람에게 돈 십분의 일주는 걸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성사되었다고 그렇게 다짐을 할 수 있는 확정된 즐거움이 있잖아요. 십일조를 내게 되면. 목사가 와서 십일조를 가지고 갔다. 목사인지 교회인지 십일조를 가지고 갔다면 그것은 목사나 교회는 하나님의 대리자로 왔기 때문에 내가 십분의 일만 내면, 하나님께서 나의 것을 더 이상 요구하지 않을 것이고 그리고 십분의 일 줬다고 해서 연말정산 때 오히려 십분의 일보다 더 많은 걸 도로 주겠다니까 잠시 가져가지만 하나님께서 불려서 더 많이 주시겠다니까 절대로 내거 손해 보는 일이 없다 이 말이에요.
그리고 이러한 십분의 일이 달아나는 끊어지는 잠시 아픔도 더 많은걸 주겠다는 주님의 약속을 기대하는 것. 기대하면 더 추가적으로 주어지는데 요런데서 내가 인정하게 되면 그걸 믿음이라고 하고 결국 믿느냐, 안 믿느냐하는 것은 추상적인 문제가 아니고 십분의 일내느냐 그러면 믿음이고, 안내면 믿음 아니고 그렇게 되는 거죠.
따라서 믿음이라는 것도 결국은 뭐로 전환된다? 믿음이라는 것도 법으로 전환될 수 있다. 그리고 그 법은 내가 십분의 일내는 순간 법을 지킨 게 되니까 십분의 일, 십일조를 완수하게 되면 나는 믿는 게 확실하게 되지요. 그래서 이모저모로 교회에서 믿음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이야기해도 그것은 하나의 양심적이고 도덕적이고 추상적인 문제이지만, 구체적으로 교회라는 게 어떤 부동산을 안고 서있고 나는 참석해서 교회제도에서 십일조 있는 제도에다가 내면되니까 서로가 아주 탄탄하게 믿음이 흔들릴 필요가 없는 그런 입장에 있으니까 결국 이 말은 뭐냐 하면, 신앙 없이도 신앙생활 하는 것이 되는 비법이 바로 십일조가 되는 겁니다. 신앙이 없어도 신앙생활 되게 하는 것. 돈만 내면 되니까. 돈이 신앙생활 대신 해주니까 얼마나 편리해요. 참 편리하잖아요.
그런데 성경에 보니까 뭐냐 하면, 법이 있는 곳에 저주가 있다 했지요. 법을 준 것은 저주를 유발시키기 위해 있다. 그러면 그 법에 십일조가 포함될까요? 안 될까요? 포함되지요. 그럼 안식일, 주일성수도 안식일이라 하는데 안식일이 있는 것은 결국은 우리로 하여금 더욱더 저주를 유발시키기 위해 하는 거죠.
자, 그러면 여기서 난해하지만 생각해 봅시다. 십일조 하라고 함으로서 십일조 돈 내는 거니까 나도 할 수 있다고 여기는 그 순간 그들은 저주받은 자의 모델이 되는 겁니다. “법을 지켰습니다.”하는 자체가 저주받아 마땅함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저주 받는 이유가 뭐냐, 갈라디아서에 보니까 그들이 율법을 의지해요. 율법에 잔뜩 기대했다는 자체가 시선이 어디서 옮겨졌는가 하면, 십자가에서 옮겨졌다는 것을 의미하거든요. 그러면 십자가 보지 않고도 어디 간다? 천국 간다. 요거 마귀전략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마귀가 어디 있는지를 알려주기 위해서 법을 준 거예요. 법을 줌으로서 지킬 수 있습니다. 하는 순간 바로 그 곳에 마귀가 있는 곳이에요. 마귀가 아니면 그런 아이디어가 안 나오게 돼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에요. 율법의 완성은 십자가입니다. 다 이루었다 했으니까. 율법의 완성은 십자가고, 십자가 있는 곳은 사람이 못 들어가는 곳이에요. 사람이 육으로 못 들어가는 곳이고 하늘나라는 육으로 못 들어가는 곳이에요. 성령이 와야 들어갈 수 있는 게 하늘나라입니다.
지금 제 말이 틀린 게 아니지요. 육으로 못 들어가지요. 요한복음3장에 그렇데 돼 있다 말이지요. 영이 온다는 것은 곧 성령이 온다는 것이고 고린도전저 2장에 보면 성령이라 하는 것은 반드시 성령이 왔다, 안 왔다하는 것은 무엇으로 판정한다고 했습니까? 무엇을 알면 성령을 받은 것이고 무엇을 모르면 성령 못 받은 것이다? 십자가 알면 성령 받은 것이고 십자가 모르면 성령 안 받은 것이 되지요.
그렇다면 십자가를 안다는 것은 모든 율법은 십자가에서 이루었다, 이 노선이라 말이죠. 철로가 2개가 있다면, 이 노선이 천국 가는 노선이다 말이죠. 그러면 다른 노선은 뭡니까? 천국 가는 노선이 이미 하나로 확정돼 버리면 너머지 노선이 천개든 만개든 다 어디 가는 노선입니까? 지옥 가는 노선이지요.
그러면 천국 가는 사람은 지옥 가는 노선이 무엇이다, 라는 것을 알지요. 성령이 왔기 때문에. 성령 없이 천국에 가겠다는 인간들이 아는 아이디어가 바로 무엇이 없다? 십자가 통하지 않고 가겠다는 뜻이거든요. 그러면 십자가는 율법의 완성이다 말이죠. 십자가가 율법의 완성이 되면, 십자가 지신 분이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그럼 율법은 누가 졌어요? 예수님이 졌지요. 다 지시고 완성을 했잖아요. 그러면 그것이 성령을 통해서 십자가 의의가 우리에게 줬다는 말은 우리가 법에 대해서 지킬 필요도 없이 뭐만 오면 된다? 십자가의 능력만 임하면 그게 구원의 능력이에요. 십자가의 능력이 오면 우리는 구원되는 겁니다.
그 점에서 아직도 구약은 미흡해요. 십자가 지기 전까지는 구약은 아직도 미흡합니다. 만약에 어린양을 잡았다. 어린양 피 바르면 구원됩니까? 고 애굽에서는 구원되는데, 여전히 어린양 피 바른다는 그것도 전부 다 율법의 계속 추가적인 율법이 기다리고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할례를 행하는 자는 양을 잡아야 되고 그 다음 피를 발라야 되고 나중에 제사제도까지 되면 그게 반복돼요. 상번제로 반복해야 되고. 아직도 추가적인 법이 계속 기다리고 있어요.
한 코스 끝나고 어린양이 다 이루었다가 아니고 제사지내면 다 이루었다가 아니고 제사지낸 거 가지고 법이 또 추가돼요. 제사도 드려야 되고 십계명도 지켜야 되고 끝난 게 아니에요. 성전 지어야 되고, 율법시대라 하는 것은 계속 법이 추가되는 겁니다. 추가되면 추가 될수록 우리의 고집도 따라잡으려고 애를 쓰겠지요.
중학교 같은 경우에 여름방학 하는데 생물선생님 오셔가지고 학생여러분, 요번 여름방학 숙제는 딱 하나입니다. 나비 한 마리를 잡아오세요. 애들은 “야, 여름방학 때 나비 한 마리 잡는 거 그 것뿐이네. 그 것 뿐이네.” 이리 하거든요. 그 다음에 영어선생님이 오셔가지고 이번 방학숙제 딱 하나 밖에 없어요. 영어대화 600개 외우세요. 딱 그겁니다. 보세요. 영어선생님은 분명히 하나지요. 그런데 학생들은 몇 개입니까? 벌써 두 개 됐잖아요. 그 다음에 교련선생님, 체육선생님 와가지고 온갖 다 하게 되면 애들은 숙제가 늘어나잖아요. 구약은 계속해서 애굽에서 나왔는데 양을 잡았다. 그러면 되는데 계속 추가되어서 나중에는 뭐하느냐 하면, 민수기18장에 보면 십일조 해야 돼요.
그런데 민수기의 십일조이전에 레위인을 섬겨야 돼요. 그러니 숙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그런데 나중에 사도바울이 왜 이리 숙제가 많은가 보니까 이 숙제가 나보고 하라고 하는 숙제가 아니고 숙제하라 해놓고는 창세전에 이미 우리를 구원한 그 분이 해야 될 숙제를 가지고 우리는 창세 안에 들어있다는 이유 때문에 마치 나한테 숙제를 하라 한 것처럼 우리가 그렇게 착각을 했지요. 나중에 성령이 와서 보니까 법이 온 이유는 우리를 죄인하게 함이고, 그 법을 주께서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성령께서 모든 상황을 우리에게 다 알려줍니다.
에베소서1장17절을 봅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되어 있지요. 계시의 정신을 주게 되면 우리 또 숙제 있는 거예요? 계시의 정신을 줘가지고 우리를 알게 하면 그럼 알아야 될 숙제를 우리가 또 해야 됩니까? 그 숙제 못하면 지옥 가는 겁니까? 여기 계시의 정신을 준다는 것은 한꺼번에 다 알게 하시는 거죠. 그게 뭐예요? 십자가는 성령이 아니면 모른다고 했지요. 십자가 알면 성령 받은 사람이고 십자가 모르면 성령 안 받은 사람이잖아요.
그럼 계시의 정신은 뭐냐 하면, 모든 일은 주께서 다 이루었고, 우리는 그 덕분에 무슨 짓을 해도 어디 간다? 영생 얻는다. 그걸 아는 거예요. 그럼 살아가면서 계속 아는 것은 뭐냐 하면, 이 사실을 반복해서 아는 겁니다. 내가 어떤 짓을 벌리고 어떤 행동을 하게 되면, 그게 나는 분명히 정당한 행동인데 그게 왜 죄가 되는지를, 열심히 복음대로 설교했는데 그 설교가 왜 죄가 되는지를 설교하는 가운데 살아가면서 그걸 알게 되지요.
오죽했으면 예수님이 오른손이 하는 걸 왼손이 모르게 하라, 이건 또 나이 몇 살 먹어야 되는 겁니까? 나이 한 90되어서 치매 걸리면 왼손이고 오른손이고 다 잊어버릴 테니까. 치매 걸려서 다 잊어버렸으니까. 개그콘서트에 코미디 프로에 보면 이런 코너가 있어요. 16년째 여자 친구가 안 생긴다는 두 남자가 나와서 그런 이야기하는 게 있어요. 이래도 안 생기고 저래도 안 생기고. 인간은 무슨 짓을 해도 안 생겨요. 무슨 짓을 해도 성령이 안 생긴다니까요. 천국 갈수 있는 영이 우리 속에서 안 생겨요.
십일조라는 것은 율법에 포함돼 있고 그 율법 노선은 십자가를 겨냥해서 돼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강의한 것을 정리해 봅시다. 십일조는 무엇을 겨냥한다? 십자가를 겨냥한다. 십일조해석은 십자가로 해석하면 돼요. 그러면 십일조를 주면서 우리 인간에게는 저주에 저주를 유발케 하지요. 왜 저주 받는다 했습니까? 십일조는 예수님이 지키는데 우리는 마귀의 꾐에 내가 십분의 일을 돈 냈으니까 지켰고 지켰으니까 그게 믿음입니다. 라고 우기는 겁니다.
그 우기는 식으로 뭐를 대체하는가 하면, 십자가의 구원의 능력을 그걸 차버리고 그 자리에다가 십자가가 있을 자리에다가 십일조를 했습니다, 를 집어넣고 나, 믿음 있으니까 이제는 죽어도 천국 가겠죠, 라고 하는 반십자가를, 십자가를 헛되이 만드는 그러한 작용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런 현상이 바로 저주의 현상인데 그걸 다른 말로 하면, 지옥의 현상입니다.
성도로 하여금 이제는 지옥 구경 못해요. 하나님께서 아쉬웠는지 살아생전에 지옥 실컷 보고 오라고 우리 주변에 이런 지옥의 교회들을 날로 부흥케 하시는 거예요. 지옥이 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지옥이 보고 싶습니까? 큰 교회 한 번 예배참석해보세요. 그곳이 지옥입니다. 다 자랑 짓하는 자랑질의 경연대회. 자랑질의 K-팝, 자랑질의 서바이벌 대회 벌이는 그 곳. 그것은 인간이 갖고 있는 인간의 욕망의 구체화지요.
내가 갖고 있던 욕망이 실제로 교회라는 이름을 통해서 성스럽고 싶습니까? 성스러운 그 교회에 성스러움이 있고요, 감미로운 성가가 듣고 싶습니까? 수 백 명의 성가를 들으시면 그게 내가 갖고 있던 욕망의 현실화로 나타나지요. 웅장한 성가대, 파이프 오르간 소리, 감동, 그리고 은혜가 넘치는 것, 그 모든 것은 마귀가 깔아놓은 십자가를 가리기 위한 배치물들입니다.
십자가는 절대로 감동이 아니에요. 십자가는 그렇게 아름답지를 않습니다. 십자가는 외면하고 싶어요. 두 번 다시 보기 싫어요. ‘흥, 내가 죽으라고 했나?’ 이런 마음이 들 정도로. ‘내가 죽으라고 했어? 내가 죽으라고 했으면 진짜 큰 일 나겠네. 본인이 알아서 죽어놓고 저걸 가지고 보라 해. 나는 보기 싫어. 나는 내 하는 일의 성과만 보겠어. 당신이 알아서 한 일을 나하고는 관계없어.’ 라고 외면하고 싶지요.
그래서 우리의 남은 과제는 뭐냐 하면, 이 십일조가 어떻게 십자가와 연관되느냐, 율법 속의 십일조 드리는 십일조가 어떻게 십자가와 연관되느냐, 요 과정을 이제는 그것이 알고 싶다. 이제 추적해야 돼요. 법이라는 것이 우리를 지킨다고 하는데 사실은 우리 자신을 숨기지 못하는 내 가치가 빛나기를 원하는 숨어있는 욕구를 이 법이 성취시켜 줍니다.
“너는 착해, 지킬 수 있어. 할 수 있어. 니가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면 너는 이 믿음을 지킬 수가 있어.” 이리 하는 겁니다. 전에 있던 해외에 계시는 정 석훈 목사님이 이야기하는 가운데 어릴 때 이야기를 해줬어요. 어릴 때 부흥회를 하는데 부흥사가 하는 말이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면 산을 옮긴다는 그 소리를 듣고 박사교회 근처 모학산이 있어요. 자기는 시험을 해봤답니다. 산이 옮겨지는지를. 그 자리에 모학산 아직 있어요. 안 옮겨져요. 모학산 옮겨지는 일이 안 생겨요. 아마 여자분 같은 경우는 산 옮겨지라고 기도하지 않을 거예요. 젊어지라고 기도할 가능성이 있어요. 젊어지라고. 주여, 믿습니다. 겨자씨만한 믿음 있으면 다시 청춘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눈에 속눈썹 안 끼고 주름살은 보석효과 나겠지요. 이렇게 기도하는데. 백날해도 안 생겨요. 그런 일이 안 생겨요.
성경은 간단합니다. 죽는 게 기적이라는 거예요. 요나의 기적이거든요. 모든 기적은 요나의 기적으로서 최종정리가 돼요. ‘아! 내가 죄 값으로 죽는다는 사실은 내가 왜 평소에 이것이 놀라운 기적인 것을 말씀대로 되어가는 현상인 것을 내가 왜 몰랐던가! 바보같이.’ 이걸 깨닫는 게 기적입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갈비탕 먹으면 체하겠습니까? 안 체하겠습니까? 지금 하늘나라에 계시는 주님이. 안 체하지요. 나는 체하거든요. 왜냐, 육에 속했거든요. 이게 아담의 형상이거든요. 그러니 체하는 게 당연하다 말이죠. 오래된 썩은 것을 먹으니 체하지요. 그러니 이 얼마나 육에 속한 것이 없어져야 명품 몸으로 되는데. 바꿔치는 이것이 얼마나 기적입니까. 그러니 내 이 몸이 썩어 문드러진다는 사실이 하나님께서 지금 작업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그 자체가 기적이 되는 겁니다.
교회 없어도 초대교회 없어도 믿음으로 구원받았잖아요. 그렇다면 우리교회 없어지는 거 기적이고 감사할 일이에요. 하나, 둘 빠져나가고 다 빠져나가도 감사할 일이죠. 예수님만 있다면 괜찮아요. 그런데 교회가 막상 목회에 교인들이 빠져나가 보세요. 목사는 아주 된 통으로 스트레스 받아요. 안절부절 어쩔 줄 모릅니다. 심방 갔다가 철야했다가 기도원에 갔다가 갑자기 안하는 짓들을 하고 가관이라니까요. 사람이 기도를 열심히 하고 새벽기도를 나온다는 것은 노림수가 있어요. 아주 수상해요. 수상한 여인이라. 아주 이상해요. 뭐가 그렇게 집착이 있어가지고 그렇게 해야 됩니까? 죽음인데.
자, 이제 본격적으로 십일조가 어떻게 십자가가 되는가, 십일조 계명이 민수기18장에 나옵니다. 그리고 십자가 있지요. 우리 같으면 십일조에서 십자가 예수님 당시로 시간을 따라서 갈 수 있어요. 그런데 해석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십일조를 뒤로 돌아가서 위로 올라가게 만들어요. 해석이. 뒤로 돌아가서. 뒤로 돌아 갓!
민수기에 십일조 하라. 십일조하려면 아까 십일조 내는 자있고, 받는 자있지요. 내는 자, 받는 자 합해서 이스라엘이라 합니다. 십일조 내는 자는 어떤 자냐 하면, 제사에 종사하지 않는 자, 제사 작업에 종사 안 함. 받는 자는 제사 작업에 종사함, 이게 받는 거예요. 물론 지금은 십일조 없지요. 왜냐 하면, 제사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지금은 제사 받을 사람이 없다니까요. 누가 받는데요?
어디에 내는데요? 국세청에 낼까요? 낼 사람이 없는데요. 목사가 제사장이잖아요. 목사가 제사장하려거든 모든 성도가 다 제사장 하던지 목사만 제사장하는 건 없습니다. 그러니 십일조를 자기가 자기한테 내면 돼요. 왜? 자기가 제사장이기 때문에. 교회어디에 낼까요? 교회 화장실에 낼까요? 수돗가에 낼까요? 어디에 낼까요? 묻고 싶어요. 교회 앞자리에 낼까요? 강대상에 낼까요? 헌금 통에 낼 테니까 헌금 통 손도 대지 말라고 하세요. 헌금 통에 낼 테니 헌금 통 가만히 놔두라고 해. 손대면 안 돼. 십년 째 헌금 통 아무도 자물쇠 따면 안 돼. 도둑놈은 따겠지만.
제발 저를 좀 속여 달라는 거죠. 나는 신앙은 없고 성령을 안 받았으니까 법 밖에 모르니까 법이라도 내려주소서. 내가 믿음 있는 척이라도 할 수 있도록. 내가 믿음 있다는 걸 보장하는 법이라도 제공해 달라고 요청하기 때문에 목사가 맞장구 쳐서 한 거예요. 목사는 고수에요. 아니라~~오. 부르면 옆에서 얼쑤! 하잖아요. 아니라~오, 광대역. 할 때 얼쑤! 하잖아요. 그러니 판소리할 때 옆에서 얼쑤! 하는 것은 고수에요. 맞장구 쳐주는 거예요.
교회는 목사가 만든 게 아니고 교인들이 만들었어요. 자, 뒤로 가서 위로 올라간다 했어요. 뒤에 누가 있느냐 하면, 아브라함이 나와요. 창세기14장을 봐도 되고요, 히브리서7장 봐도 나와요. 여기에 누가 대기하고 있느냐 하면, 십일조를 뒤로 가니까 십일조 받는 자가 있었고, 주는 자가 있었습니다. 창세기14장에서는 주는 자는 아브라함이었고 받는 자는 멜기세덱이 받았어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십일조 한 그 십일조는 어디서 왔느냐 하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농사지었습니까? 아니잖아요. 아브라함이 노력한 게 아니지요. 십일조의 원조가 뭐냐 하면, 자기가 일하지도 않고 노동하지도 않았는데 얻은 거예요. 말라기의 십일조도 마찬가지에요. 말라기를 십일조하려면 의식이 뭐냐 하면, “내 것은 일체 없습니다.” 라는 것이 될 때만 말라기의 십일조가 성립이 되는 겁니다.
그런 인간은 결국은 이스라엘 내에 있었다? 없었다? 없었어요. 십일조라 하는 것은 어떤 인간도 십일조 지킬 인간은 이 땅에 없다 이 말입니다. 이미 이스라엘 선배들이 해봤어요. 유다 선배 해봤어요. 없어요. 십분의 일은 내고 나머지는 내거라는 생각을 지울 길이 없어요.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원합니다.” 할 때 집사님이 십일조 준다 말이지요. 방금 십일조를 챙겼어요. 또 “십일조를 원합니다.” 그럼 뭐라고 합니까? “아까 가지고 갔잖아요.” 이리 합니다. 그게 십일조가 아니고, 십일조 원합니다, 하면 예, 방금 받아놓고 또 돌아서 십일조 원합니다, 하면 다 가져가세요. 그런데 다 가지고 가는 것은 십일조 아니에요. 다 주는 것은 에이~씨, 니 다해먹어라, 이런 오기밖에 안되니까 그러면 안돼요.
아브라함이 냈던 것은 그 전에 전쟁이 있었어요. 창세기14장에 보면, 전쟁이 있는데 318명가지고 많은 군사를 이겨서 자기 조카를 구하고 전쟁에서 난 전리품이 있었습니다. 이기고 돌아올 때에 뭔가 어느 사나이가 등장합니다. 누구냐 물으니까 예루살렘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아브라함이 이번 승리에 대해서 본인도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이번 승리에 대해서.
그 전에 아브라함은 창세기12장에서 아브라함이 그냥 보통 인간이 아니고 창세기11장에서부터 본토 아비 집을 떠나야 됐지요. 떠날 때 갈 곳이 없어요. 그러면 결국은 자기 지방에서 떠났다 정도가 아니고 갈 곳이 없다, 라는 말은 육지에서 몇 미터 뛰면 하늘로 올라갈 수 있습니까? 팔짝 뛰면 됩니까? 아무리 땅에서 뛰어봤자 도로 중력에 의해서 떨어지잖아요. 그러니 하늘나라를 간다는 게 성립이 안돼요. 하늘 높이 올라가도 또 떨어지니까. 심지어 중력에 의해서 튀어나가도 그 쪽도 땅이에요. 결국은 갈 곳이 없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자기 본토 아비 집에 있어도 갈 곳이 없었고, 거기서 나와도 갈 곳이 없었고,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이 갈 곳이 어디 있느냐 하는 것은 자기 본토 아비 집을 떠나서 정처 없이 나그네 식으로 가는 그 과정, 과정 속에서 삽입하듯이 뭔가 순간, 순간 개입되는 사건들이 있어요. 그 사건들이 어디서 온 사건인가 하면, 결국은 아브라함이 죽어서 가야될 그 본향에서 투입된 사건들입니다. 창세기14장에서 5나라의 연합군이죠. 이 연합군과 싸워서 이겼습니다. 그러면 이 사건은 어디서 온 사건이냐 하면, 지극히 높은 나라에서 온 사건이에요.
자, 그러면 원인을 계속 추적해 따져봅시다. 롯이 만약에 그 다섯 왕에게 안 잡혔으면 아브라함이 전쟁을 벌이 까요? 안 벌이 까요? 벌일 필요가 뭐가 있어요. 그건 도박이지요. 해봐야 패배하는 전쟁을 왜 합니까? 안하지요. 그러면 애초부터 롯이 소돔과 고모라 땅에 살지 않아야 되지요. 김연아가 만약에 어릴 때 피아노를 잘 쳤으면 스케이트 하겠습니까? 안하지요. 피아니스트 되려고 애썼겠지요. 원인을 계속 추적해 보자 말이지요.
롯은 왜 소돔 땅을 원했느냐, 아브라함이 “얘, 조카야” “예” “너, 소돔 땅 가” 이렇게 했습니까? 아브라함은 롯한테 맡겼지요. 롯한테 맡겼다는 말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께 맡긴 거예요. 맡겼더니만 롯이 에덴동산 같아서 소돔 땅을 택했고 소돔 땅이 저주 있기 전에 했고, 그 땅이 좋으니까 탐을 냈고 그래서 포로 잡혔고 그래서 아브라함이 개입했고 승리했고 십일조했다 말이죠. 그러면 롯을 자기가 구원했지만 그 구원한다고 아브라함 본인이 구원받는 건 아닌데 그 롯을 구출하는 과정 속에서 뭐가 담기느냐, 롯 본인이 구원받을 수 있는 요소가 거기에 개입되어서 유발된 전쟁입니다.
나를 구원해주는 전쟁에 휘말린 거예요. 그 전쟁을 회오리바람으로 해봅시다. 토네이도라는 휙 감아 도는 그 바람 속에 이걸 대전에서는 사건이라 했는데, 사건 속에 휘말릴 때 그 휘말린 사건 속에서 발생된 게 뭐냐 하면, 십일조란 율법이 새롭게 발생된 거죠.
결국 십일조는 사건 일으킨 유발자와 관련성이 있다? 없다? 있는 거예요. 이제는 “십일조를 어떻게 합니까?”가 아니라 “십일조가 누구십니까?” “십일조를 제정한 분이 누구십니까?” 이리 되는 거죠. “십일조 드린 사람은 누구십니까?” 십일조 드린 자는 정해졌지요. 아브라함이 아니고 아브라함 되게 하는 하늘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개입이고 십일조 드린 자 되게 했고, 그럼 십일조 받는 사람은 누굽니까?
받는 사람은 그 근처 살렘왕 제사장이죠. 하지만 제사장은 그냥 제사장이 아니고 지극히 높으신 자의 제사장, 그러니까 받는 멜기세덱이나 드리는 아브라함 사이나 멜기세덱 제거하고 아브라함 제거하면 남는 건 뭐냐, 지극히 높으신 자의 주선, 왕 그것만 남는 겁니다.
그러면 멜기세덱이 지극히 높으신 자의 왕이요, 왕인데 그게 제사장이죠. 그러면 그 직분은 십일조가 담겨있는 어떤 인물의 특성을 두 가지 직책으로 이야기했지요. 그게 히브리서7장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멜기세덱은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같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되어 있지요.
히브리서7장21,24절에 보면, 네가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다. 되어 있지요. 영원한 제사장, 영원히 계신 분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십일조라 하는 것은 영원해야 돼요? 영원 안해야 돼요? 영원해야 돼요. 완성 태로서.
십일조는 영원하다는 말은 예수님이 영원히 계시다. 그러면 십일조가 영원하다는 말은 주는 자있고 받는 자 있지요. 십일조가 영원하다면 십일조 받는 분도 영원해야 되고 십일조 주시는 분도 영원해야 되고. 그러면 영원한 분을 묘사하기 위해서 영원한 분이 십일조 드렸고 영원한 분이 십일조 받았다면 그래서 십일조 영원하다면 거기서 누가 누락됩니까? 예수님 오신 후에는 인간이 십일조 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겁니다.
지금 설명하는데 40분밖에 안 걸렸어요. 십일조. 자, 그러면 봅시다. 십일조에서 십자가 가는 길에서 바로 가지 말고, 뒤로 돌아서 지극히 높으신 자를 만나라 했지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아브라함은 자기 갈 바를 몰랐지만, 아브라함이 갈 바를 몰라서 우왕좌왕하는 나그네 생활하는 그 과정에 순간, 순간 그게 개입되는 것이 아브라함이 가야 될 그 나라의 속성이 되고 요소가 되는 겁니다.
그 중의 한 사건이 뭐냐, 십일조 드리는 사건에 맞닥뜨린 거예요. 전쟁에 승리해서 전리품가운데 십일조를 드리면서 “이것은 제가 얻은 게 아니고 지극히 높으신 분이 주신 겁니다.” 결국 십일조 하는 법을 생산하기 위해서 전쟁을 일으켰고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주는 자, 멜기세덱으로 하여금 받는 자, 요런 세팅, 세트로 주어서 십분의 일이라는 게 성립된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왜 십분의 이가 아니고 십분의 삼도 아니고 왜 십분의 일이냐 하는 그 문제가 남아있지요. 그런 세밀한 문제는 아브라함이후에 민수기에서 밝혀집니다. 그럼 아브라함과 민수기사이에는 연결되어 가는 거예요. 그게 연결되는 게 히브리서에서는 어떻게 이야기하는가 하면, ‘허리’라고 하는 거예요. 허리.
허리라는 말은 창세기32장에 보면, 얍복강가 나오지요. 야곱의 허리에서 왕들이 나온다는 대목이 나와요. 야곱의 허리에서. 그러니까 이것은 허리라는 말은 뭐냐 하면, 자식을 계속 생산할 수 있는 신체의 특정부위를 말하는 겁니다. 야곱이 한 대 까였잖아요. 까여서 욱하고 지팡이 집게 되었습니다. 그 부분이 뭐냐 하면, 야곱이 자식을 생산하는 그 부위입니다. 남성의 힘이라 하지요. 그 쪽이 까인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뒤에 나올 후손들은 무엇의 되풀이고 반복이냐 하면, 야곱이 하나님의 사자를 만난 그 사건이 그 실 뭉치에서 풀리듯이 나오는 겁니다. 어릴 때 어머니께서 가을만 되면 벌써 실 뭉치를 사와가지고 드라마 보면서 떠요. 스웨터, 장갑, 조끼도 뜨고 일본 실뜨기 책이 있어서 보면서 잘된 것은 가게에 팔기도 했어요.
그런데 가만히 지켜보니까 실 뭉치인데, 뭔가 솜씨를 부리니까 어떤 조끼가 되는 거예요. 조끼는 형태일 뿐이지 구성성분은 뭡니까? 실 뭉치에요. 실 뭉치에 불과한 겁니다. 이스라엘이라는 것은 야곱에서 나온 거고 야곱이란 실 타래 속에서 이스라엘 나라가 나온 거예요. 야곱의 허리에서. 그러니까 야곱이라 하는 것은 야곱개인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 야곱과 만났던 지극히 높으신 분의 전략, 그걸 어려운 말로 ‘언약’이라 하는데 언약에 의해서 야곱은 새로운 경험이 되고 그 새로운 경험이 바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갈 바를 알지 못했던 그 갈 바라고 하는 갈 바에 해당되는 그 영원한 본향, 그 본향이 수시로 내려오지요. 그걸 요번에 저는 대전강의에서 존재라 하지 않고 ‘사건’이라 했지요. ‘언약사건’입니다.
언약사건의 특징은 뭐냐 하면, “나는 주님께 대드는 하나님의 웬수입니다.”라는 것을 느끼게 만드는 사건이에요.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라는 사건,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라는 사건, 갈비탕 먹고 아픈 사건, 왜 먹을 때 감사기도 하고 먹으면 되는데, 감사기도 대충했기 때문에 했긴 했는데 대충해가기고 주여, 아파도 좋습니다. 이거 먹고 죽겠습니다. 이런 기도 안하고 맛있게 먹겠습니다. 이래 가지고 일어난 사건, 나로 하여금 죄를 더욱 더 죄가 되게 하는 사건, 그것은 하나님과 만남이 이루어진 거죠. 거기서 만남을 통해서 나온 게 뭐냐, 바로 ‘죽음’입니다.
언약적 죽음만이 우리에게 생명을 줘요. 언약적 죽음 속에 들어가지 않으면 생명이고 뭐고 없습니다. 그냥 자살하면 안 되고요, 언약적 죽음. 어떤 목사처럼 그냥 자살하면 안 되고 언약적 죽음이에요. 언약적 죽음은 다른 게 아니에요. ‘나는 살아도 산 것도 아니고 죽어도 그만이다.’ 이런 생각, ‘아이고, 나 같은 인간이 살 필요 있나? 지금 죽어도 반항하지 않겠습니다.’ 그런 생각, ‘이렇게 욕심내고 이렇게 나밖에 모르는 인간이 살면 살수록 주님께 누를 끼칩니다.’라는 느낌, 그게 언약적 죽음이에요.
야곱은 분명히 죽었어요. 죽었는데 이스라엘은 다시 살아났잖아요. 살아도 야곱은 자기가 죽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아브라함 같은 경우에도 자식 죽이고 항상 자기를 죽인자라는 생각이 들 거라는 말이죠. 그것을 반복하기 위해서 어린양의 죽음을 이스라엘 내에 상번제로 드린 거예요. 멀쩡하게 이스라엘은 살아있어도 이스라엘 내부에서는 늘 이렇게 이스라엘은 죽어야 돼! 죽어야 돼! 하는 것이 늘 아침, 저녁마다 되풀이 되는 거예요. 제사로. 그 연기가 흠향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민수기라 하는 것은 이스라엘이고 이스라엘이라 하는 것은 원조가 야곱이고 야곱이 만났던 언약사건에 의해서 거기에 하나님께서 실타래 있으면 거기서 실이 줄줄 나와요. 나오면서 조끼가 이스라엘 나라가 돼요. 이스라엘 나라가 조끼가 되어야 돼요. 그 나라 속에서 야곱이 받았던 그 사건을 그 곳에서 반복하게 되어 있습니다.
실 원래 색깔이 빨강색인데, 조끼가 파랑색이면 있을 수가 없는 거죠. 말도 안 되는 소리죠. 실타래가 빨강색이라면 조끼도 빨강색, 예수님 피가 빨강색이면 우리는 빨갱이, 십자가 믿는 우리는 빨갱이, 성령 안에서 빨갱이, 같은 색깔입니다.
민수기에서 왜 십분의 일이냐 하는 거예요. 민수기를 봐야죠. 18장15절, “여호와께 드리는 모든 생물의 처음 나는 것은 사람이나 짐승이나 다 네 것이로되 사람의 처음 난 것은 반드시 대속할 것이요” 26절, “너는 레위인에게 고하여 그에게 이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취하여 너희에게 기업으로 준 십일조를 너희가 그들에게서 취할 때에” 십일조 드리죠. 여기 십일조가 제일 끄트머리 입니까? 제일 좋은 거예요? 김밥 썬 나머지 꽁지입니까? 아니면 김밥 제일 좋은 중간분이에요? 제일 좋은 부분이잖아요.
그러니까 이게 왜 십분의 이가 아니고 십분의 삼이 아니고 십분의 일이냐 하는 것은 하나님의 관심사가 십분의 일에 있다는 거예요. 십분의 일에. 그러니까 아브라함에게 승리하게 해서 멜기세덱에게 십분의 일을 드릴 때에 십분의 일을 드렸거든요. 드리는 것은 그것은 사건의 응어리체인데 사건의 응어리가 나에게 인간이 되면 예수님이 되는 거예요. 맏물이 돼요. 맏물.
예수님은 누구냐, 하나님의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입니다. 처음 낳은 거예요. 부활의 첫 열매가 누굽니까? 에녹이에요? 뭐예요? 엘리야 입니까? 에녹도 죽음을 보지 않았는데. 엘리야도 불 수레타고 올라갔는데. 부활의 첫 열매아니잖아요. 부활의 첫 열매는 누굽니까? 예수님이라고요.
부활의 의미는 십자가 지신 분만이 부활의 의미를 줄 수 있지, 에녹이나 엘리야는 부활의 의미를 줄 수가 없어요. 왜? 율법을 다 이룬 적이 없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다 이룬 적이 없기 때문에. 처음 난 것을 주목한다는 것은 나머지는 안 보겠다는 거예요. 처음만 있으면 전부가 있는 거예요. 처음 있고 나머지 있는 게 아니고 처음이 전부에요.
그 분만이 하나님의 아들이에요. 요단강에서 세례 받을 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나의 기뻐하는 자라, 그분만이 아들이에요. 그것은 뭐냐,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난 뒤에 하나님이 언약을 줄 때 언약 안에서 뭔가 인물이 꿈틀거리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꿈틀거리고 있어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오해해가지고 ‘야, 우리가 살겠다.’라는 생각을 하지요. 그 다음이야기는 10분 쉬고 합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