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140314b-히7장18절(멜기세덱과 율법) - 이 근호 목사
첫 번째 강의에서 한 거 정리한다면 율법이 없어도 되는데 왜 주어졌는가 하면, 아브라함에게는 율법이 있었다? 없었다? 없었잖아요. 없었는데 의인 되었다? 안 되었다? 의인 됐잖아요. 그만하면 됐잖아요. 믿음으로 한다면 율법 필요 없다 말이죠. 그런데 왜 436법을 줬느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갈라디아에서도 나오는 이 문제도 사람들이 회개를 못해요. 처음부터 믿음으로 했으면 끝까지 믿음으로 가야지, 왜 율법 줘서 헷갈리게 만들었냐 말이죠. 율법을 줄 이유가 없잖습니까?
그런데 제가 첫째시간에 이야기했죠. 율법은 우리 구원하려고 준 게 아니고 우리 구원의 바탕이 되는 분과 관련되어 있다 했습니다. 그 바탕의 되는 분이 이스라엘과 동행하시는 분이라 했습니다. 그 분이 바로 여호와의 이름, 출애굽기15장, 우리의 주님의 이름, 주의 이름입니다. 주의 용사는 여호와인데 그분은 여호와의 이름으로서 왔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름으로 왔다는 것을 무엇으로 아느냐, 언약이 구체적으로 발휘가 되면 아, 우리 속에 어떤 어르신네가 있는 줄 알면 돼요.
모세가 칼을 들고 안 설치고 모세가 그냥 지팡이를 잠시 들었을 뿐인데 산 밑에서는 전쟁을 이겼더라면 이것은 모세가 한 게 아니고 모세와 함께 있는 어떤 어르신네의 존재성을 그게 진짜 현실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밑에 전쟁에서 승리와 패배가 나누어지는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은 동행하면서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결과에 대해서 그 원인을 자기 쪽으로 몰아세우면 안 되고 우리와 동행하시는 주의 이름으로 엮여져야 되겠지요. 그런데 실제로 광야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렇게 엮였습니까? 안 엮였습니까? 물 달라 했고 양식 없다고 심지어 애굽으로 돌아가자 했지요. 그건 뭐냐 하면, 우리가 누구와 동행한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왜 우리를 이렇게 힘들게 하십니까? 라는 짜증내는 것과 관련되어 있지요.
그래서 제가 첫째시간에 뭐라고 했습니까? “너는 인간이 아니다.” 쉬운 말로 하면, “언약적 인간이 아니야.” 다른 말로 하면 “언약적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이 직접 너와 상대하지 않아.” 이리 되는 겁니다. 그걸 신약적으로 설명하면 “너는 중보자가 아니야.” 따라서 “하나님 아버지는 중보자 되시는 그 분만 상대해. 그 분은 바로 한 분이시니 그리스도 예수시니라.” 이리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를 믿으라고, 너 믿지 말라고, 하나님이 직접 나하고 상대하는 게 아니라는 점에서 우리로 하여금 어떤 우리가 원하는 결과나 예상한 사태를 우리에게 허락을 하지 않지요. 말은 참 쉬운데 실제 생활에서 우리는 자꾸 하나님하고 나하고 직접 연결하고 싶어 하지요.
분명히 기도해 놓고 마지막 기도이름을 누구 이름 붙입니까? 분명히 주의 이름 붙여 놓고 기도내용은 주님이 하신 일과 무관하게 직접 나하고 상대하려는 그런 잘못된 버릇이 자꾸 나와요. 그냥 습관처럼 주의 이름을 부를 뿐이지 정말 주님의 이름이 원하는 바를 기도내용으로 채우지 아니하고 내가 원하는 걸 채워놓고 그냥 상표 붙이듯이 가짜 구찌, 이거 찬 허리끈이 중국에서 산 가짜 구찌입니다. 이 허리끈이. 삼천원 줬더라.
그러니 주께서 자꾸 우리 자신이 가짜라는 것을 일깨워주기 위해서 주님이 성령이 우리와 함께 있는 거예요. 그래서 모든 설교와 모든 것은 책망이어야 됩니다. 책망 받는 즐거움이 대단한 즐거움이에요. 사람이 책망이 없으면 우쭐되기 마련이거든요. 성령을 통해서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책망을 하게 되면 그 책망 받는 그 즐거움에 우리는 그 기쁨에 이루 말할 수 없지요.
다시 하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믿음으로 의롭다 해놓고 왜 우리에게 율법을 주느냐, 결국은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은 “니가 인간이 되어가지고 하나님 저를 구원해 주세요.” 라고 니가 뭔데 우리를 구원해요. 그런데 우리는 구원 받을 자격이 있는지 따져보지도 않고 무조건 “인간이잖아요. 저를 건져주세요.” 하는 것은 주께서는 거부해 버리는 겁니다. “나는 너하고 상대 안 해. 천국은 현재 너 같은 인간으로 채워지지 않고 주의 이름으로서 변화된 달라진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 된 사람들과 내가 영원한 천국의 구성인물로 삼을 거야.” 라는 주님의 독자적인 계획이 언약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왜 주느냐, 율법은 바로 아브라함이 믿었던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됐다는 믿음자체가 의가 아니고 의가 나왔던 그 바탕이 있어요. 그 바탕이 어떤 인물로 구체화되면서 모든 율법을 다 이룬 분이기에 그 바탕위에 올라서면 우리는 다 이루지도 못하면서 율법을 다 이룬 사람으로 다루어지고 그렇게 인증 받는 효과로서 의인이 되는 겁니다. 갈라디아서2장에 보면 율법으로 우리가 의롭다고 할 것 같으면 율법을 십자가에 죽을 이유가 없다.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이미 율법주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말은 율법으로는 의롭다할 의인이 없고 십자가로 말미암아 의인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율법주고 십자가 줬다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지금 말을 바꿨지요. 아브라함 줬으면 율법 필요 없다고 했잖아요. 시작에서. 아브라함 주고 430년 후에 율법 줬는데. 사도바울은 십자가부터 출발해요. 십자가로 구원받는 의인된 이유는 그 전에 뭐가 있었다? 율법이 있었고 그 전에 아브라함이 있었다. 그래서 율법은 빠지고 아브라함과 십자가를 바로 연결시킬 때, 너 자신이 구원 받는다는 것도 같이 빠져야 되고 아브라함 자손과 율법을 이루고, 그 십자가이룬 효과로서 새삼스럽게 너희들이 그 효과에 말려 들어가면 너희들은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겁니다.
갈라디아서에서는 그 효과를 주는 연결고리는 뭐냐, ‘성령’이라 하는 겁니다. 갈라디아서에서는 율법으로 난 사람과 성령으로 난 사람을 두 언약이라는 이름으로 갈라놓지요. 하갈계통과 사라계통, 이것은 두 언약이다. 율법으로 난 사람이 성령으로 난 사람을 또는 약속으로 난 사람을 핍박을 했는데, 그것은 뭐냐 하면, 이 땅에 어떤 자식이 없다는 거죠. 그 점부터 출발하겠습니다.
없다는 겁니다. 이 땅에. 잉태치 못한 여인이죠. 잉태치 못한 여인이 하늘나라 가니까 왜 이리 자식이 많은지 모르겠어요. 잉태치 못했는데. 잉태치 못하면 자식 없음이죠. 없음의 형태로 올려 보내겠다는 겁니다. 없음의 형태로 올려 보낸다면 이곳에 비로소 있음이 있는 거죠. 그렇다면 이 땅에서 있음이라 하는 것은 그냥 어디로 보내느냐, 전부 다 지옥으로 보내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렇게 하는 근거가 뭐냐 하면, 구세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없어요. 예수님이 이 땅에 없음을 남겼습니다. 없다는 것을 남겼어요. 그걸 멜기세덱의 반차라 해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어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으면 뭐가 없는 거예요? 족보자체가 없어요. 족보 자체가 없는데 히브리서7장17절에서는 멜기세덱의 족보라고 이야기한 겁니다. 그래서 이 구절이 어려운 거예요.
족보라 하면 “그래, 그래, 그 조상이 자식을 낳고 그 자식 후손이 누군데?” 이리 되잖아요. 족보라 하면 이런 생각이 드는데 실제로는 멜기세덱 족보는 이 땅에 멜기세덱 족보가 없어요. 없다면 구원은 멜기세덱 족보로 구원받고 이 땅에 와서 멜기세덱 족보는 없고 그러면 없음에 끼어들어야 되거든요. 있음과 있음 사이에서 없음을 새로 만들어내야 될 필요가 있다 말이죠.
그러면 제사장은 어디에 있느냐, 레위지파에 있습니다. 그런데 레위지파만 있어요. 그런데 제사장이 없는 지파가 뭐냐, 유다지파에요. 레위지파에서 메시아가 오는 게 아니고 유다지파에서 메시아가 온다. 그리고 유다지파에서 분명히 제사장이 없는데 나중에 유다지파에서 난 메시아가 영원한 제사장이 되어버립니다. 영원한 제사장.
영원한 제사장이 나타났다는 증거가 뭐냐, 그게 십자가다. “에이~ 십자가는 정치범이야.”정치적 형태는 역사적으로 보면 뭡니까? 이거는 제사 형식이 아니고 그냥 정치범 처리한 거예요. 질서 문란 죄 사형 당하잖아요. 그런데 히브리서에서는 십자가를 뭐로 보는가 하면, 한 번으로 끝내버린 영원한 제사 일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뭐라 합니까? “레위지파와 연결이 안 되잖아. 왜 구라를 쳐. 구라를. 레위지파도 아닌데 왜 자꾸.” 예수라는 분은 어느 지파다? 레위지파가 아니고 유다지파거든요. “레위지파도 아닌데 그게 제사장 될 리가 없어.”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럴 때 사도바울이 유다지파는 이 땅에 레위지파가 없기 때문에 그것이 제사장이 된다는 거예요. 없기 때문에. 유다지파 제사장이 없기 때문에 기존의 모든 제사제도를 거부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기존의 제사제도에 묶여있으면 어떻게 되느냐 그게 뭐냐 하면, 그게 바로 믿음으로 의롭다 하는데 그것이 전혀 연결이 되지 않기 때문에 레위지파는 없는 거예요. 율법을 줬다. 주니까 율법이 제사 지내라 하니까 시키는 대로 지냈다. 그런데 그것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과 관계가 끊어진 상태다. 다시 말해서 끊어지라고 율법 준 거예요. 끊어지면서 어떤 인간도 끊어짐에서 돌파해서 이어짐으로 나갈 위인도 없다는 겁니다. 누군가 끊어짐을 이을 필요가 있는데 그 분은 기존에 있는 제사 직으로 사용하지 않고 분명히 제사 직이 없는 유다지파를 통해서 일방적으로 제사 직을 줘버린 거예요.
그러면 이 주장이 성사되려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과거, 현재, 미래로 나아가면 이건 성립이 안 됩니다. 어떻게 하느냐 하면, 예수님이 영원한 제사 직이다. 제사장이다. 그런데 그 분은 어느 지파로 왔다? 유다지파다. 그런데 유다지파는 제사 직이 없는데 왜 있느냐? 그것은 레위지파를 일부러 율법으로는 의롭다함을 받지 못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레위지파에게 율법을 시켰다. 라고 논리가 예수님부터 해서 유다지파로 가서 레위지파로 해서 방향이 반대로 전개해야 되겠지요. 이것을 히브리서가 쓴 거예요. 이제 히브리서 전체가 윤곽이 잡혔지요.
인간들은 자기 쪽으로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인데 히브리서는 십자가라는 것을 이미 완료된 걸로 보고 그 다음에 차례, 차례로 논리를 끄집어내는 거예요. 방향이 거꾸로 가는 거죠. 그러면 이쪽에 있는 과거, 현재, 미래에 있는 사람이 과거에 근거 없는데 당신이 그런 주장하니까 못 믿겠다고 하지요. 못 믿겠다는 거예요. 우리는 뭐라고 하는가 하면, 믿음에 합하지 않기 때문에 천국에 못 간다는 거예요. 둘이 대화가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대화가 안 되지요.
히브리서11장이 뭡니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라 해서 항상 믿음의 근거를 나중에서부터 거꾸로 잡아당기는 거예요. 그러면 시간은 이렇게 과거 현재로 흘러가는 게 아니고 거꾸로 흐르지요. 그걸 제가 대전강의에서 뭐라 했습니까? 시간의 역전. ‘시간의 역전’입니다. 시간의 역전이 좋은 점이 뭐냐, 이미 안심 푹 놓고 따져 들어간다는 거예요. 구원받기 위해서 애쓰는 것이 아니고 이미 구원 챙겨놓고 ‘이 구원이 어디서 왔지?’ 따지는 겁니다. 오늘 좋은 거 줬습니다.
“이렇게 하면 한라산에 들어갑니다.” 하는 것은 레위지파, 율법적 사고방식인데, 이쪽 회사에서 당신은 몇일에 한라산의 비행기표 주고, 당신은 비행기표가 어디서 나왔는가를 차후에 이걸 준다면 우리는 기분 좋게 인터넷 들어가지요. 100%보장된다면. 100%구원이 확정적이지 아니하면 성경보지 맙시다. 그건 바로 실패에요. 100%보장을 누가 해주느냐, 성령 받아야 된다는 거예요. 그 성령은 누가 주느냐 이 말입니다. 이미 성령줄 때는 이것이 땅에서 주는 것이 아니고 이미 위에 올라가서 “어이~ 산 밑에 어이, 나 지금 주님의 오른편이거든(아까 오른편이라 하는 것은 어떤 거인이 있다는 뜻이거든요. 거기의 오른손에 있잖아요.) 어이, 나 오른쪽에 왔거든. 주의 자리에 앉았거든. 너 빨리 올라와!” 하면서 스파이더맨 있잖아요. 거미줄로 좍~ 거미줄로 했기 때문에 거미줄은 뭐냐 하면 보증금이라, 아파트 살 때 보증금주지요. 보증금주면 이미 집주인이에요. 나중에 잔금만 주면 되니까. 계약서 쓰면 되는 거예요. 성령으로 보증한 거예요. 그걸 가지고 요한계시록에서는 하나님의 인, 도장을 맞은 거예요. 새로운 질서가 오기 때문에.
그 거미줄을 누가 끊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 핍박, 곤고, 기근, 스파이더맨의 거미줄은 놀라운 거예요. 끊어지지도 않아요. 그렇다면 왜 힘들게 살아갑니까? 세상에서 온갖 힘들게 하는 것을 봐야 이 줄이 얼마나 튼튼한지를 힘든 일을 당해봐야 확인이 되는 거예요. 내가 만든 믿음인지, 신념인지 아니면 선물로 준 믿음인지는 환난가운데 고난가운데 티가 나게 돼있습니다. 표가 나게 돼있습니다.
스데반집사가 죽을 때 성령이 충만했지요. 성령이 충만했다라고 한 뒤에 스데반집사가 돌아 맞는 장면이 나올 거예요. 뒤에 장면 모른다 치고 성령 충만함만 봤을 때는 ‘아, 스데반집사가 나중에 총회장 되겠다.’ 생각했지요. 그런데 성령 충만 받고 난 뒤에 돌에 맞아 죽었잖아요. 스데반집사가 슬퍼했습니까? 아니면 감사했습니까? 주와 함께 영원히 진짜 현실 진짜 어르신네를 만나서 그 때는 얼굴과 얼굴을 희미하게 보는 게 아니고 마주보아서 “야, 이제 제대로 된 현실 속에 있군요.” 하고 얼마나 만끽했겠어요. 그리고 너무나 불쌍해서 “주여, 저들의 하는 짓을 알지 못하니 그냥 봐주세요. 그냥. 모르고 한 짓이니 용서해 주세요.”라고 이야기를 해버리잖아요.
그 여유가 어디서 나왔습니까? 합격 받고 한 거예요. 이 한라산 비행기표 챙기고 한 거예요. 성령 받은 것은 돈으로 얼마주고 샀습니까? 여러분, 시몬은 그걸 무엇으로 사려했어요? 시몬은 돈 주고 사려했지요. 사도행전8장18절. 돈 주고 사면 이건희가 대번 돈으로 사서 팔아먹을 거예요. 돈 없어도 구원받아요. 값없이. 목사들부터가 귀한 걸 모르니까 딴소리하는 거예요. 돈 주고도 못사는 것을 가졌으면 이걸 이야기해야 되는데 육신의 정욕, 이생의 자랑거리를 전하니까 듣는 교인들이 쓰레기 같은 것만 주우려고 교회에 온 거예요. 정작 영생은 안 얻고 썩어질 만나보다 못한 걸 주워간다고요.
그러니 사명 받은 사람의 모든 성도가 다 목자라고 제가 이야기했지요. 오후설교 때 했지요. 모든 성도가 다 목자거든요. 목자가 됐으면 기죽지 말고 주눅 들지 말아야 돼요. 귀한 거 얻었으면 예수의 피를 받았으면 다 받아 챙긴 겁니다. 100%합격이에요. 그런 관점에서 히브리서를 보는 겁니다.
그래서 방금 이야기한 것은 이렇게 하면 됩니다. 연출하지 마세요. 그건 뭐냐 그냥 사세요. 믿는 척 할 이유 없어요. 연출한다는 것은 미흡하다는 뜻이고 어떤 속임수 같은 거거든요. 그냥 살아서 받은 모든 것을 그냥 툴툴 털어서 외치면 다음날 되면 또 채워줘요. 툴툴 털어낸 거 성령께서 또 채워준다고요. 그러면 그 다음날 또 툴툴 털어내고. 또 받아 챙기면 돼요. 왜냐 하면 이 일이 내 일이 아니고 누구일이기 때문에? 주님의 일이기 때문에. 그러면 그 일 안하게 되면 이젠 쓸모 짝이 없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오늘밤에 나그네 데리고 가지요.
고린도전서5장에 보면 무서운 이야기인지 아니면 정말 기쁜 좋은 이야기인지 모르지만 아버지 아내와 간음한 아들이 나와요. 하나님께서 지옥 보냈을까요? 천국 보냈을까요? 아버지의 첩과 간음한 아들을. 성경에 나옵니다. 육은 죽이고 영은 살리잖아요. 왜냐 하면 고 역할이 고 역할이거든요. 우리의 윤리 도덕관은 상상이 안 될 이야기입니다. 쓸데없이 윤리 도덕을 앞장세운다는 것은 아직도 구조가 육의 구조를 유지하고 있다는 거예요. ‘내가 이런 일을 했을 때, 남들이 얼마나 욕 하겠는가. 그러면 내 믿음을 보고 은혜 받던 사람이 은혜 깨지면 아이고, 안되지. 나는 주의 종이니까.’ 이것은 자기 단 도리고, 자기 과시고, 자기 의고, 여전히 선악구조를 그대로 지탱하고 있는 거예요. 이것은 마귀가 계속 조롱할 수 있는 여건이 돼버려요. “니, 하는 일을 내가 발각시킨다!” “그러면 안 돼!” 마귀한테 벌벌 떨고 있는 거예요. “니가 어제 지난 여름밤에 한 일을 내가 안다.” “아, 아, 안 돼! 마귀 그것만은 안 돼!” “아, 내가 얼마나 훌륭한 목사인데. 그건 안 돼!” 주님께서는 둘이 뭐하는 짓이냐 말이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며. 믿음으로.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아무리 외워도 실제 행동은 행함으로 살아요. 우리의 행함은. 바로 그 사실을 툴툴 털어내면 돼요. “제가 목사라도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인간입니다. 혹시 내가 험담 받지 않고 지금도 완벽주의로 신앙 자랑 질하면서 지금도 당신보다 내가 낫다고 자랑 질하는 그런 모습으로 이 강단에 섰습니다. 이것밖에 안 되는 인간입니다.” 툭툭 털어내 놓으면 그들은 예수님만 바라볼 거예요.
그러니까 연출하지 말고 그냥 사시면, 어떤 사람이 그냥 산다하니까 “목사님, 말은 좋은데 주님께서 만약에 내용을 안 주면 어떻게 합니까?” 그것은 자체가 지금 주님과 함께 있지 않은 게 돼버려요. 못 믿는 거예요. 주님이 내가 있는 것보다 더 나보다 더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본인이 안 믿는 게 돼요. 엠마오로 두 제자 내려갈 때, 주님 다시 만나고 헤어졌잖아요. 그럼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이 있는 존재입니까? 없는 존재입니까? 헤어졌어도 자기가 있는 것보다 더 생생하게 있지요. 왜냐 하면 자기가 있을 때, 찾아왔기 때문에.
자기가 찾아가지 못했는데 그 분께서 찾아왔다는 말은 이것은 대리운전보다 더 빨리 왔거든요. 전화하기 전에 먼저 왔거든요. 나의 존재보다 더 확실한 존재가 그 분의 존재지요. 그 분의 존재가 살아있을 동안에 계속해서 우리로 일을 시키니까. 털털 내어놓으면 돼요. “털털 내어놓을 게 없으면 어떻게 합니까?” 자꾸 그러지 말고 그럴 땐 이리 해야 돼요. “성도님, 오늘 내어놓을 게 없습니다.” 그러면 되는 거예요. 우리가 할 일은 목격담이지 내가 어떻게 할 일이 없는 거예요. 우리 집사님들도 남편이고 뭐고 아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냥 사세요. 그게 하나의 배치고 구조에 집어넣은 겁니다.
자, 그렇다면 율법이 뭔가를 해봅시다. 여기 뭐라고 되어있는가 하면, 7장19절에 보면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하게 못할지라)” 되어 있지요. 18절에 보면 “전에 있던 계명은 연약하고 무익하므로 폐하고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하게 못할지라.” 요 이야기를, 예수님 오신 것을 미래라면, 미래의 십자가의 관점에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과거에서 미래로 찾아가는 관점에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미 십자가에서 완료된 입장에서 그렇지요. 그러면 율법이 폐했다는 말은 어떤 자리에서만 외칠 수 있어요? 십자가 안에 있을 때만 외칠 수 있지요. 그러면 십자가 안에 있지도 않으면서 그걸 외쳐버리면 그걸 가지고 율법폐기론자가 돼요. 이제 그 궁금했던 율법폐기론자 풀렸지요.
이걸 이제 그림으로 봅시다. 인간은 도상의 존재라고 야스퍼스라는 철학자가 이야기했습니다. 마르셀이라는 실존주의도 그렇게 했어요. 마르셀의 실존주의가 하는 말이 인간은 도상이다. 쉽게 말해서 인간은 나그네다. 그게 무슨 말이냐 하면, 인간은 도착지점도 모르고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고 그냥 걸어 가라, 해답을 찾지 말고 목적도 의미 없고 그냥 걸어가라, 그게 인간의 전부 다라고 하는 겁니다. 말은 맞지만 별로 기쁘지는 않지요. 그런데 놀랍게도 실존주의 적인 철학이 오늘날 소위 교회하는 사람들이 다 이 지경이 돼요.
자, 성화론 봅시다. 갈수록 착해져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A라는 지점이 어제였습니다. 오늘은 B라는 지점으로 이동했습니다. 왜? 도상의 존재니까. 도상은 길, 길은 역사에요. 하루, 하루 역사니까. 이건 캘린더 보면 알잖아요. 캘린더의 숫자 나열해 보세요. 하나의 길이 되겠지요. 2월6일, 3월6일, 4월6일, 길이 되잖아요. 길 위에 살아가는 거예요. 걸어갈 때, A라는 지점에 왔을 때 A지점에서 B를 내다보면서 나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도상의 존재니까, 목적을 향하니까, 나는 뭔가 점선을 해서 나는 이러한 사람이 되고 싶어라, 하게 되면 여기서 뭐가 생기는가 하면, 결핍이 생기죠. 간격, 결핍, 모자람. 그러면 어디에 도착해야 이 결핍이 사라집니까? 절대로 결핍은 안 사라지지요.
B라는 지점에 와서 ‘이만하면 착하겠지‘ 했는데 갑자기 목사님 설교에서 손 양원 목사 이야기를 해버리네. 손 양원 목사 수준 되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아들죽인 살인자를 자기 양자로 삼았다는 이야기를 하니까 교인들은 그걸 들었다 말이죠. 듣고 집에 있는 아들을 생각했다 말이죠. 아들 대학 졸업하는데 3억 들잖아요. 요번에 폭설에서 무너졌잖아요. 5억 받았는데 사실은 남는 게 없어요. 3억 빼고 2억 남았거든요. 자, 3억들은 애가 갑자기 폭설에 죽어버렸다. 그런데 엉뚱하게 싸우다가 죽었다. 싸운 애가 같은 친구다. 아들 죽인 애에게 찾아가서 “친구 아들아, 이제부터 부모 없으면 내 아들 할래?“ 라고 해야 되잖아요. 해야 어느 정도 손 양원 지점까지 온다 말이죠. 가만히 보니까 그럴 자신은 없거든요. 머뭇하지요. 머뭇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 갭과 결핍이 계속 마음에 남지요. 남아가지고 뭔가 일이 꼬일 때는 ’그래, 맞아 내가 C지점까지 가야되는데 내가 지금 B지점에 머뭇하니까 벌을 받는구나!‘ 이렇게 되지요. 그러면 C지점까지 왔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걸로 족합니까? C지점의 특징은 뭐냐, C지점에 도착해야 비로소 D지점이 보인다는 사실,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주께서 이런 취지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만들어 놓고 그 다음에 수직적으로 누굴 투입시키는가 하면, 예수님을 투입시켰습니다. 그러면 이쪽의 역사는 뭐냐 하면, 그냥 터벅, 터벅 해보는 거죠. 그냥 갈 때까지 가보는 거예요. 잡히는 것도 없이 가보는 거예요. 여기에 예수님께서 투입했지요. 투입시켜버리면, 율법은 자기 지키라고 준 율법이 어디로 가버렸습니까? 예수님 오셔가지고 율법이 예수님 쪽으로 노선이 가버린 거예요. 예수님 쪽으로.
그러면 이들은 뭘 놔야 돼요? 율법을 따라왔으면 못 지키잖아요. 율법이 몽학선생이죠. 몽학선생을 다른 말로 하면 가정교사입니다. 가정교사는 정식학교 들어가기 전에 집에서 아이들을 양육하는 교사가 몽학선생입니다. 그럼 본궤도에 들어가면 가정교사가 계속 있어야 돼요? 필요 없어요? 필요 없어요. 그 이야기를 갈라디아서에서 하고 있는 겁니다.
믿음이 온 후로는 뭐가 필요 없다는 말입니까? 율법의 몽학 선생이 필요치 않다는 말이에요. 이 말은 어떻게, 어떻게 하면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니고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이여, 너희들이 온 길은 너희가 이해를 하던 안 하던 간에 너희들이 온 모든 길은 율법의 지배하에 있었던 바로 그 길이었드랬습니다. 라고 추후 통보해주는 거예요. 율법을 지켰습니다. 안 지켰습니다. 할 것도 없이 여러분들은 본인에 관계없이 무조건 모든 인간이라면 다 율법에 저주아래 놓여 있더랬습니다. 라고 알려주는 거예요.
그럴 때, 믿음 있는 사람들은 박수를 치게 되는 거예요. “그렇지, 그렇지, 바보같이 그것도 모르고. A지점에서 B지점, 아이고, 내가 완전 마귀에게 속았구나! 그런 헛된 짓을 했을까.” 라고 기뻐하는 반면에 성령이 오지 않은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아니야, 아니야, 율법노선 유지해야 돼!” 이리 되거든요. 그런 사람들이 주장하는 구절이 뭐냐 하면, 성령이 오고 난 뒤에는 온 율법을 새삼스럽게 터벅, 터벅 이 길로 가야 되는 거예요. 제가 하는 말 간단한 건 그거에요. 1노선인지, 2노선인지는 간단해요. 뭐냐 하면, 1노선은 성령을 받고 율법을 지켰다고 나서면 이 사람은 2노선에 포함되지 않아요. 십자가에서 나온 거꾸로 나온 노선이 아니고 예수님과 연관된 완성된 100% 구원된 노선이 아니고 그냥 80% 지가 해보는 대로 해보겠다는 지옥 가는 노선을 터벅 터벅 가고 있는 거예요. 1번 노선으로 해석하는 겁니다. ‘자, 성령 받았고 예수 믿었으니까 이제는 서서히 온유와 화평으로 성령의 열매를 한 번 맺어볼까?’ 이리 나오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한 번 봅시다. 여러분들이 놓치면 안 되는 중요한 구절 나옵니다. 갈라디아서5장 6절을 크게 한 번 읽어보세요. 굉장히 중요한 구절인데 사람들이 그냥 놓치는 경우가 많아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
사랑으로 역사하지요. 그것도 무슨 안에서? 예수 안에서. 100% 한라산 가기로 확정됐지요. 그것이 사랑이라는 거예요. 사랑은 뭡니까? 율법을 온전히 이룬 것을 상태를 가지고 뭐라고 합니까? 사랑이죠. 사랑은 용서받음이죠. 긍휼 받음 이죠. 용서를 지금 받고 있는 상태에서 믿음의 행함은 뭡니까? 받은 사랑을 퍼트리는 거예요. 나 이렇게 죄인인데도 뭘 받았다? “나는 이렇게 용서를 받았어요.” 라고 터트리면 그게 믿음의 합당한 행함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 안하고 1번 노선에 선 사람은 내가 성령을 받았으니까 내가 율법을 지키는 고 믿음에 해당되는 믿음으로 향한 행함이 되어야 야고보서2장에 나오는 그 믿음과 일치가 된다고 주장하는 거예요.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그래서 그들은 계속 믿음 받아 놓고도 계속 행함으로 나가는 거예요. 그런데 갈라디아서 5장 6절 뭡니까? 뭐로 해야 된다? 사랑으로. 사랑으로 일하는 겁니다. 사랑의 일이 나의 일이 아니고 나를 사랑한 그 사랑이 사랑으로 나타나는 그 행함이 바로 믿음에 합당한 믿음의 성령의 열매가 되는 겁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울면서 예수님 발에 향수를 뿌릴 때, 그대로 우리가 행할까요? 막달아 마리아의 향수를 사가지고 우리도 발 앞에 뿌리고 그 앞에서 울까요? 그러면 그게 뭐가 돼요? 모방에 대한 법이 돼버리죠.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가 하는 말이 “아저씨?” “왜?” 나는 그대로 하라는 게 아니고 연출하려고 한 것이 아니고 나는 내가 있는 형편상 받은 사랑을 그렇게 표현했지요. 받은 사랑을. 받은 사랑을 표현했는데 당신은 그 사랑을 흉내를 내는 거예요. 그러면 막달라 마리아는 니 방식대로 하라는 말이에요. 그러면 나는 내 방식으로 주께 있잖아요. 그럼 내 식대로 뭘 보여줍니까? “나, 이래서 용서받았습니다.” 내놓으면 누가, 누가 그걸 지적질해요. 그게 사랑인데.
안식 지키고 율법 지켜라, 누가 그걸 자꾸 지적하도록 우리가 왜 허용합니까? 안식일 지켰냐? 그걸 왜 남의 일을 간섭을 해요. 내 간섭을. 니나 알아서 잘하지. 나는 내가 알아서 잘 할 테니까. 내가 이래서 용서받았다는 것을 표현하는데 누가 개입합니까? 니 사정하고 내 사정 다른데.
히브리서7장에서 제가 어렵다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율법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잖아요. 왜 어려운가 질문을 통해서 할게요. 아무것도 온전치 못한데 왜 주었지요? 하나님이 주신 건 다 선하지요. 다 선한 것이 왔으면 우리가 선하잖아요. 온전하잖아요. 선하다는 것은 온전하다는 거예요. 왜 온전치 않다고 하는 이유가 뭐예요? 왜 이랬다 저랬다 하는 거냐구요. 로마서7장에서는 율법도 선하다 하잖아요. 여기는 온전치 않다 했다 말이죠. 앞뒤가 안 맞잖아요. 안 맞는데 로마서 믿을까요? 히브리서 믿을까요? 골라서 믿을까요? 둘 다 믿지 말까요? 이런 질문에 답변하기가 굉장히 난처해지는 겁니다.
그런데 뭐라고 합니까? 율법이 온전치 않다고 표현하는 그 지점이 어느 지점인가 하면, 2번 지점 내가 있는 지점이 아니고 주 예수 안에서, 주님 안에 있는 지점 같으면 더 이상 율법의 기능은 필요 없기 때문에 지금도 율법이 있어야 되는 거예요. 왜? 예수님 노선 자체가 계속 2번 노선이 있는 한 1번 노선도 같이 나란히 가야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 표현력이 이것밖에 안 되서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필요 없으면 지금도 필요 없어야 되는데 지금도 권면 있고 사도바울이 쓴 성경책이 전부다 권면이고 교훈이에요. 하라, 하지마라, 계속 연발 나옵니다. 용서받았나? 용서해야지. 새사람 입어라, 술 취하지 말라, 명령이에요. 명령. 니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라, 수시로 기도하라, 그리고 어려운 사람을 돌보라, 이건 할 게 율법으로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왜 그런 말을 하느냐 하면, 지금 이 세상이 멸망 안 당했잖아요. 이 세상이 지금 아직까지 천국, 지옥으로 완전히 갈라지지 않았잖아요. 지옥 갈 사람들이 남아있으니까 거기에 병행해서 천국 가는 노선에 같은 율법을 주고 생각지 못한 차이점을 구원받는 사람만 성령 안에서 그걸 알고 지옥 갈 사람들은 그걸 이야기해도 당체 못 알아먹는다는 겁니다.
그 못 알아먹을 때, 구별됨의 의미, 용서받은 효과가 얼마나 놀라운 줄을 너희들이 주께 찬양하라 이 말입니다. 나도 저 사람과 똑같은 인간이에요. 역시 나도 못 알아들을 인간이고 나도 알아들을 수도 없고 나도 욕할 필요 없고 나도 정신없을 때보면 매일같이 이 길을 가요. “이번에 일이 잘못된 것은 죄를 지어서 그렇구나, 주여 용서해주세요.” 매일 이 길로 간다고요. 이게 선악구조에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주님의 노선 보니까 그게 감사하라고 주신 노선인 것을 내가 사랑을 깜박, 깜박 잊어버려서, 사랑은 잊어버리고 성과만 따진 겁니다. ‘내가 이렇게 착하면 주께서 잘했다고 보너스 줄 거고 그 보너스 챙기면 옆 사람은 없는데 나는 있고 그럼 나는 믿음 좋은 사람으로 확인되고.’ 우리가 전에 했던 생각이 만날 살아나요. 날마다 육신은 죽이고 날마다 주께서는 영은 살리고 하는 작업이 십자가에서 이루어지는 걸 미처 모르고 주님 간섭하지 마시고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다시 이러한 세월을 우리를 반복을 통해서 주님의 십자가만 높이라고 이런 과정을 주신 거예요.
정리하면 멜기세덱의 반차는 분명히 없습니다. 없는데 지금 이 세상에 역사라는 게 있기 때문에 역사가 있는 한 그걸 비교해서 멜기세덱 반차가 동행하는 것으로 성경에서는 그렇게 묘사되고 있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역사밖에 없고 족보밖에 없어요. 족보밖에 없고 족보는 항상 미흡의 것이고 미완성이고 결핍을 낳고 모자람을 느끼고 갈 때까지 가보자는 식이에요.
그런데 이미 다 이루었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과 병행하면서 성령 안에서만 그것이 비로소 새롭게 느껴지도록 짝을 맞추어서 우리를 데리고 가면서 “나, 구원받았다!” 를 증거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이것밖에 안 되는 나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고 사랑하셨습니다.” 를 증거 하라고 마귀하고 싸워 이기라고 우리에게 이 말씀주신 거예요.
히브리서의 율법의 온전치 못한 이유를 알겠지요. 율법 자체를 두고 하는 것이 아니고 뭐와 비교한다? 이미 다 이루었다 함을 이미 도달지점에서 볼 때, 온전치 않은 것을 이미 쫙 깔아놓은 거예요. 마치 그게 온전한 것처럼 여기면서 자기 스스로 율법 지켜서 구원받겠다는 모든 시도가 그리스도의 방향과 다른 방향인 것을 쫙 보여주면서 “너도 그쪽 방향이었었었어.” 하지만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신 믿음으로 그 쪽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면서 그리스도를 증거케 하는 거예요.
이것은 그냥 제가 논리로 이야기했지만 11장에 보게 되면, 믿음의 조상들이 죽 나오지요. 11장에 대한 설교한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닙니다. 목사님치고 이것 설교 해가지고 석달간, 넉달간 설교제목 찾는데 힘들지 않고 그냥 때우려고 하는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니거든요. 목사님들이 되게 힘든 게 뭐냐 하면, 설교거리입니다. 그런데 이런 히브리서 강의해 버리면 적어도 3개월 정도는 충분히 그냥 때울 수가 있어요. 그러다보니까 히브리서11장에 대한 내용의 설교집이 유명한 목사치고 안 나온 게 없어요. 박선희 부터해서 많이 나와요. 거기서 그들이 이야기하는 게 뭐냐 하면, 믿음 이야기한다고요. 그러니까 이게 엉터리 되는 거예요.
왜냐 하면, 분명히 히브리서11장하기 전에 무슨 이야기해야 돼요. 히브리서7장, 8장 나와야 된다고요. 그러면 이 믿음은 뭡니까? 결국 해석에 의하면 사랑이죠. 사랑 안에 먼저 있기 때문에 그 뒤 소급해서 보니까 믿음에 합당한 행함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믿음에 합당한 행함을 행하면 그게 사랑에 도달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는 거예요. 그건 율법적 설침이 돼요. 율법적 설침이.
자, 믿음이 있다. 그 다음에 유지해야지. 이것은 믿음 자체가 율법 기능화 되어 버렸어요. 믿어라, 하는 게 그만 법이 되고 버렸어요. 믿어라, 하는 것은 법이 아니거든요. 선물인데 아니 선물을 가지고 새삼스럽게 선물에다가 장식내면 안되잖아요. 필요 없잖아요. 받은 걸로 감사해야 될 건데 그것가지고 거기다가 꽃 달고 리본 달면 선물 준 사람이 와서 다 떼라 하잖아요.
그래서 히브리서11장의 믿음은 바로 떼어내는 작업이에요. 고걸 뭐냐, 믿음의 본체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 시대에서 어떻게 장식되느냐 하면 믿는 사람 본인부터 그 시대 사람들도 아무도 예상 못한 거예요. 노아가 방주 만들었지요. 그 다음 사람 방주 만들면 믿음입니까? 아닙니까?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흉내 내서 연출해서 구원받는 식을 방법을 일체 사용하지 않습니다. 왜? 인간 자체가 역사의 과거에서 현재 미래로 나가는 방식이기 때문에 ‘과거사는 뭐했더라? 나도 그대로 해야지.’ 그리되는 겁니다.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사울 왕이 전쟁할 때, 제일먼저 뭐했지요? 제사 드려야 한다 했지요. 제사드릴 때 사무엘이 왔습니까? 안 왔습니까? 안 왔지요. 제사해야 승리한다는 그 방법은 어디서 배운 거예요? 전에 사무엘과 함께 있을 때 사무엘이 금식 드리니까 전쟁에 승리했잖아요. 그걸 누가 봤어요? 사울이 봤지요. 이미 과거사잖아요. 과거사인데 또 전쟁이 일어났잖아요. 그러면 자기가 아는 기껏 한 게 뭐냐, 제사했더니만 승리했잖아요. 그럼 기껏 한 방법은 뭡니까? 제사 드리면 승리할 거란 예상이죠. 그게 인간이에요.
그래서 성경은 니가 인간이라고 우기기 때문에 그게 레위지파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 인간이 아닌 거예요. 인간이라고 우기기 때문에 인간이 아닌 거예요. 사무엘이 와야 제사 드려야 되는 겁니다. 잡으니까 원단이 찢어졌잖아요. 그래서 나라가 둘로 쪼개지지요. 자, 그 다음에 문제 드립니다. 그 다음에 왕들이 선지자 불러서 제사 드리면 승리합니까? 안 승리합니까? 승리 안 해요. 왜냐, 이미 한물지나간 거예요.
그러면 그 시대에 뭐냐, 새롭게 주께서 십자가에서 주신 그 방식이 또 있어요. 그게 바로 ‘믿음’이에요. 믿음은 했던 것은 두 번 다시 써먹지 않는 거예요. 그러니까 날마다 주님께 몸을 드려야지 “아이고, 주님 압니다. 매일 이런 식으로 해서 써먹는 거 압니다.” 앞자리에 앉으니까 은혜 받으니까 매일 앞자리에 앉는 거예요. 찬송가 405장부를 때 은혜 받았지요? 두 번 다시 불러보세요. 은혜 왔는가. 안 오지요. 그게 바로 ‘우연성’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우연성과 우연성의 연결로 인생을 살게 해요. 매일같이 우발성이고 우연성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그걸 저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우리 자신이 하나의 사건화 된다. 주께서는 날마다 하나의 사건화 시켜버리는 작업을 합니다. 그게 바로 믿음이에요. 내가 살아있다는 자체가 예수님이 일으킨 사건으로 보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 생각 못하고 ‘어제도 있듯이 오늘도 있군요.’ 그리 생각하거든요. 어제, 오늘 잘라버리고 “주께서 오늘 있게 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하셨습니다. 매일같이 주께서 있게 하실 때 있습니다.” “전에도 걸었기 때문에 오늘도 걷습니다.“가 아니라 ”주께서 걷게 하셨고 지금도 걷게 하십니다.“ 전에도 머리카락 자라게 하셨고 오늘도 오늘분의 머리카락을 자라게 하십니다. 그래서 매일같이 주님이란 현재와 같이 혜택 입으면서 같이 동행한다는 의미가 그리스도 안이 되는 거예요. 그리스도 안.
아, 참 이게 조금만 우리가 역사를 주장한다면 우연성이 뭐로 바뀝니까? 필연성으로 바뀌어요. 우연성의 반대말이 필연성입니다. 필연성이 돼버리면 이게 우리와 함께 뭐가 돼버리는가 하면, 우상이 돼요. 빗나간 믿음이 되어버려요. 그러면 내가 주님을 믿는다 하는 것이 믿음의 대상이 되어버려요.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고 내가 믿었던 나를 믿어버리면 나는 나를 경배하게 되고 나를 좋아하고 나를 사랑하고 나를 섬기게 되고 나를 귀히 여기게 되고 내가 신앙의 대상이 되어버려요. ‘나 건드리기만 해봐라.’ 이리 된다고요. 그래서 주께서는 매일 우리로 하여금 죄인 만들어서 내가 나를 못 믿을 입장이 되게 만드는 작업을 합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남는 게 뭐냐, 남는 건 우리의 육신이 남아요.
그 다음에 봅시다. 23절 보세요. “저희 제사장 된 자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을 인하여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 그럼 제사장들이 제사를 드릴 때, 그 제사 행위가 결국 자기로 하여금 뭐로 이끌게 만들었다? 죽음으로 이끈 거죠. 그러니 제사장이 제사를 드린 게 아니고 죽음이 제사를 드린 겁니다. 제사장은 그걸 알았으면 참 좋았겠는데 알았으면 구원받지요.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연결시키라고 나로 하여금 죽어야 될 내가 죽음과 관련된 일을 한다고 했다면 그야말로 아브라함이 예수님 보기를 기뻐한 것처럼 그 제사장은 제사하면서 제사한 자기를 믿지 않고 누구를 보겠어요? 장차 이렇게 죽을 내가, 죽게 하시는 그 분이 오실 거라고 연결시키겠지요.
그래서 베드로전서1장에 보면 그리스도의 영이 미리 앞서서 마중을 나간 거예요. 구약 선지자들에게. 예레미야 이런 사람에게. 지금은 주의 영이 우리에게 온다면 우리가 아침에 설거지할 때 죽을 내가 설거지하면서 ‘예수님의 죽음을 생각하라고 이 일을 작업을 하는구나!’ 테니스 치면서 죽으라고 하잖아요. 죽으라고 치세요. 죽을 내가 지금 테니스 치면서 그리스도를 생각하라고 이걸 하게 하시는 거예요. 언제? 만만한 대상이라고 생각해서 10만원 걸고 했는데 분명히 내가 이겼는데 마지막 연달아 5개 이겨가지고 내 뜻대로 안 될 때, “주여, 저로 하여금 왜 이렇게 낭패하게 하십니까?” ‘아, 내가 내 꿈을 펼치는 것에 대해서 주께서 개입하셨구나!’ 내기 했는데 내가 바로 100%이겼다고 생각했는데 낭패했을 때입니다.
분명히 저 사람 다음 주 나오기로 약속하고 등록 다 했는데 그 다음 주 그 교인 다른 교회 등록했을 때, 결국 그동안 그 분이 올 때까지 기다린 것은 뭡니까? 죽을 내가 아니고 살아서 내 성과를 목격해야 될 대상자로 내가 이 만큼 나한테 괜찮은 대상자로 봤는데 그 분이 안 오므로 말미암아 나는 죽어 마땅한 것을 그동안 잊어버린 게 돼요.
주께서 보내줘야 오는데 우리는 내가 한 교인 건졌다고 여길 때, 이게 바로 죽어 마땅한 죄인이 되고 그것마저 사랑으로 용서를 해줬을 때, ‘주여, 이것밖에 안 되는, 말도 안 되는, 자기만 생각하는, 이런 인간 나 같은 강도도 십자가로 구원해 줄 때 다시 한 번 노선이 율법노선이 아니고 미흡의 노선이 아니고 완성된 노선인 것을 깨닫게 해 주는 은혜가 바로 온다해 놓고 안 올 때 사람 환장하는데 깨달아 보니까 ’아, 그것이 은혜인 것을.‘ 하고 감사하면서 눈물 흘릴 때, 문을 똑똑해가지고 ’사실은 등록한 게 아니고 일단 잠시 갔어요.‘ 하고 올 때 안 온다고 여겼는데 올 때 그거 누구의 은혜입니까? 나는 끊어져버리고 누구와 연결 돼있다? 주님의 뜻으로 오신 분이 되는 거예요.
목회 안 한 사람은 몰라요. 환장할 이 짓을. 홍해 건너갈 때 물 갈라져야 간다고 생각했는데 요단강 건너갈 때 “가만히 있어, 물 갈라지면 건너가자.” 절대로 안 갈라져요. 이게 바로 우리의 일상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참 어려운 대목 어려운 말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간단했습니다.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 그거였습니다. 믿는다고 자부합니다. 하지만 실제 생활에서 진짜 십자가와 동행하는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