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멜기세덱과 율법(히7;18) 140314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6. 12. 09:36

2014-03-15 00:48:07 조회 : 1291         
멜기세덱과 율법 140314 이름 : 이근호 (IP:119.18.9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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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은주 (IP:218.♡.193.179) 14-03-18 18:06 
안양20140314a-히7장18절(멜기세덱과 율법) - 이 근호 목사

멜기세덱에 대해서 마지막 정리시간으로 생각해 봅시다. 히브리서7장17절에 보면, “증거 하기를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였도다. 전엣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케 못할지라)” 이리 되어 있지요. 여기 세 가지 단어가 얽혀 있어요. 굉장히 어려운 단어인데. 뭐냐 하면, ‘영원한 멜기세덱’이 나오지요. 그 다음에 ‘반차’가 나오지요. 족보가 나온다 말이지요. 이게 안 맞아요. 영원함과 족보가, 영원함의 족보가 있다는 자체가 이상스러워요. 또 하나 뭐냐 하면, ‘제사장’있지요. 멜기세덱과 제사장이 왜 결합되느냐 그거 알아야 되고 그 다음 마지막 어려운 게 뭐냐 하면, 율법이 어떻게 여기에 관련성을 잇느냐 이 내용입니다.

이 내용을 한 번 수풀 속으로 들어가 봅시다. 참, 어려운 수풀 속인데. 우선 “멜기세덱 당시에 율법 있었습니까?” 라고 먼저 묻고 싶어요. 멜기세덱 당시에 율법 있었습니까? 율법이 없지요. 그러면 갈라디아서 3장에서 율법이 430년 후에 오지요. 아브라함 이후에 430년 뒤에 율법이 주어지잖아요. 그러면 그 말은 뭐냐 하면, 아브라함이 율법 없어도 의로움이 될 수 있다? 없다? 율법 없이도 의롭게 되는 거예요.

율법 없이도 의롭게 된다는 말은, 의롭게 되는 근거가 없다는 말이 아니고 율법이라는 것이 굳이 의롭게 될 수 있는 근거로서 굳이 꼭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가 되는 겁니다. 율법 없이도 의롭게 됐으니까. 그러면 여기서 문제가 뭐냐 하면, 처음부터 율법 없이 의롭게 됐으면 애초부터 그 후에도 율법 없이 의롭게 되면 이야기가 간단하게 끝날 문제가 아닙니까. 그렇지요?

십일조 없이도 복 받는다. 십일조가 율법에 속합니다. 율법에 속하는데 그러면 율법 없이 구원을 받는다면 십일조 없이도 복을 받는다가 되지요. 십일조해서 복 받는다는 것은 말라기에 나오는 차후의 문제이고, 그 원판 원래주신 원판에는 십일조 없어도, 믿음으로 십일조 지키는, 행함 없이 믿음으로, 이미 복을 받은 게 됩니다. 복을 받은 게 되니까 그 뒤에 추가되는 십일조해서 복 받는다는 말은 충돌이 돼버립니다. 이것은 원래 믿음의 조상 믿는 사람은 이러해야 된다는 모델케이스는 십일조 없이도 율법 없이도 안식일 없이도 이미 의롭게 되고, 후에 나오는 후손들은 십일조 해야 되고 안식일 지켜야 된다면 우리 인간보기에 쓸데없는 안 해도 되는 짓을 주께서 일부러 부과한 셈이 되었다 말이죠.

그럼 우리는 차라리 어디가 수월해요? 차라리 율법 없어도 아브라함처럼 되고 싶은 마음이 들겠지요. 그 문제는 이렇게 풀리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복을 받았습니까? 복이 된 겁니까? 아브라함이 뭘 해서 복의 근원이 된 거예요? 아니면 아브라함 자체가 복의 근원입니까? 복의 근원이죠. 이걸 가지고 뭐냐 하면, ‘~~ 되기’에요. 

내가 만약에 여자다. 여자인데 어떤 남자와 결혼했다. 그럼 그 남자의 아내가 됐지요. 그런데 그 집에 가니까 어떤 젊은 총각이 하는 말이 형수님이라고 불러줬다 말이죠. 그러면 형수 되려고 결혼했습니까? 아니지요. 그 질서 속에 들어가니까 졸지에 뭐가 돼요? ‘형수 되기’가 되어버렸지요. 내가 가기 전에 이미 질서의 구조가 짜여 졌는데 들어가니까 형수님! 하고 밑에서는 형님! 하고 며느리! 하고 내가 예상치 못한 것이 와르르 다 쏟아지는 거예요.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이 되고 싶어서 환장한 것도 아니고 자기가 믿음으로 구원받겠다는 생각도 사전에 애초에 그런 발상을 가진 것도 아닌데 주님이 날름 딱 집어가지고 그 속에 집어넣은 거예요. 그러면 복의 근원은 내가 아니요, 나를 집게 한 바탕에 이미 복의 근원은 따로 있었던 겁니다. 따로 있는 겁니다. 따로 있는데 나를 거기다가 세워버리니까 그 밑에 있는 기가 올라와 가지고 졸지에 나는 본인의 원치 않는 복의 근원 노릇을 해야만 되는 거예요.

그럼 아브라함은 나 의인되었다, 자랑질 합니까? 아브라함은 누구를 지목합니까? 손가락으로. “내가 아니요, 내 바탕을 유지하는 그 분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뭐냐 하면, ‘나는 아무것도 일한 게 없는데 내가 언제 의인되었지? 아, 내가 아니고 내 바탕이구나!‘ 그러면 바탕 자체적인 흐름과 그 연속성 속에서 뭐가 필요한가 하면, 율법이 동원되는 거예요.

그러면 아브라함은 바탕에 섰다는 것 때문에 효과를 본 것뿐이지 자기보고 복의 근원입니다. 라고 해버리면 자기가 한 것도 없으니까 그냥 믿었을 뿐인데 딱 세워놓으니까 그리 된 거예요. 전선이 있는 곳에 어두웠는데 여기다가 전구하나 딱 놓으니까 예수님이 만든 전구 놓으니까 갑자기 전구에서 빛이 빛나면서 “야, 전구다! 빛이 들어왔네.” 하면 전구가 하는 말이 “아니야, 왜들이래요. 나 아니에요.”라고 설레발 지어야 돼요. “아이고, 왜 이래요. 저 빛 아니에요. 바탕보세요. 바탕. 그 바탕에 당신들도 갈 수 있습니다. 유독 저를 잘났다고 합니까? 저는 아닙니다.” 라고 거부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증거 할 수 있어야 된다 말이죠.

그러니까 이것은 히브리서에서 7장, 8장에서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율법이 모든 법이 어떤 인물과 엮어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겁니다. 율법이 인물과 엮어져 있다. 설명하기 참 힘들어요. 설명하기 힘들지만 설명하려고 합니다. 파란불에서는 건너가시고 빨간불에는 횡단보도 건너가지 마시오. 이게 인물입니까? 이것은 법이지요. 법은 너와 나 사이에 있는 약속정도다 말이지요. 약속.

빨간불에는 건너가지 마시고 파란불에 건너가세요. 분명히 약속은 그냥 규율이고 규칙에 불과한데 그 규칙이 어떤 사람과 연결됐다는 것은 우리로서는 상상도 못할 희한한 일입니다. 도저히 우리 세계에서는 있을 수가 없어요. 규칙 지킬 사람은 이해되는데 규칙 자체가 사람이 된다는 것은 율법이 곧 사람이 된다는 것은 이것은 성사가 되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게 법이 사람이 돼요. 거기에 동원되는 것이 뭐냐 하면, 바로 ‘맏물’이라는 겁니다. 맏물.

예레미야2장3절을 봅시다. “그 때에 이스라엘은 나 여호와의 성물 곧 나의 소산 중 처음 익은 열매가 되었나니” 그 때에 이스라엘은 나 여호와의 성물 곧 나의 소산물 중 처음 익은 뭐가 됐습니까? 처음 익은 열매가 됐지요. 맏물이 되지요. 맏물은 출애굽기나 신명기에 보면 이게 십일조를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십일조는 10%의 의미가 있는 게 아니고 지난번에 했잖아요. 10%의 의미가 아니고 제일 첫 번째 난 소산물이 맏물입니다. 그러면 알기 쉽게 이야기할게요.

모든 세상이 지옥입니다. 모든 세상에 죄에 묶여있고 죄밖에 없어요. 그래서 거기서 뭐가 나와도 전부 다 죽음밖에 나올 수 없어요. 죽음의 세계니까 죽음밖에 나올 게 없어요. 만약에 죽음의 세계에서 누가 새싹이 솟아난다면 그 새싹은 죽음의 세계에서 유일하게 처음으로 등장한 첫 열매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약속의 땅에서 십일조가 먼저입니까? 아니면 약속의 땅이 먼저에요? 약속의 땅에서 뭔가 첫 열매를 맺을 때, 그 다음에 십일조를 통해서 “내 놔! 첫 번째 것은 내거야.” 라고 “내가 가져가야 돼!” 라고 가져갈 수 있는 그런 여건이 조성이 되겠지요. 그러면 약속의 땅은 어떻게 됩니까? 전멸해야 되고 그게 죽음이어야 돼요. 사람들이 이걸 이해 못해요. 사람이 이스라엘 땅에 가니까, 이스라엘도 이해 못했지요. 사람이 사는 땅이니까 살만 하겠지요. 보니까 전부 다 약속의 땅에 있는 사람은 포도를 운송하는데 너무나 포도가 잘되어가지고 두 사람이 가지에 묶어 다닐 정도로 ‘야, 우리가 가게 되면 저 포도나무는 우리 거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 맞구나!’ 라고 생각했지요. 오해였습니다. 그 땅은 죽음의 땅이에요. 아무것도 열릴 수가 없습니다.

그게 신명기에 나와요. 네가 만약에 그 땅에 가서 말씀을 어겨버리면 그 땅은 열매는커녕 그 땅은 아주 황폐하고 가뭄이 있어서 니가 거기서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라. 하지만 니가 내 언약대로 준수한다면 그 땅이 마구 마구 젖과 꿀을 제공할 것이다. 그러면 이스라엘의 노동력은 거기에 의미가 없지요. 그러면 뭡니까? 땅 자체에 누군가가 작용해서 땅 자체에서 열매가 맺어야 되겠지요. 그러면 그 이스라엘 나라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약속의 땅은 죽은 땅이에요? 산 땅이에요?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에는 죽음의 땅이에요. 죽은 땅인데 약속의 백성이 들어가면서 매치가 되고 만나면서 그 땅이 드디어 죽음의 땅이 아니고 산 땅이 되어서 젖과 꿀이 흐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그 땅은 이스라엘 백성과 마주하느냐, 아니면 이스라엘과 동행하는 어떤 분과 관련되어 있습니까? 이스라엘 동행에 누가 동행하는가 하면, 이 분이 동행해요. ‘주의 이름’이 동행합니다. 모세가 이미 말했어요. 주와 함께하지 않으면 저는 절대로 이 백성 데리고 어디 못 갑니다. 제가 무슨 수로 이 사람들을 데려 갑니까? 설득을 어떻게 설득해요? 삐져버리면 대책 없지요. 니도 인간이고 나도 인간인데 니가 왜 데려와서 고생시키느냐, 물어내. 이렇게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하면 무슨 대책이 있습니까? 그러니까 모세도 알고 있어요. 

이 백성을 이끌어 내신 것은 결코 본인이 해야 될 수행할 일이 아니다 라는 것을, 자기는 그냥 우리 곁에 남아있는 것이 아니고 내 옆에 누가 계십니다, 를  늘 소개하고 증거 하는 역할을 할 뿐이지 모세가 이들을 데려갈 수 없다는 겁니다. 왜냐 하면 그 절차가 언약과 약속이 아니면 뚫리지 않는 그러한 칸막이들로 연속되는 거예요. 이걸 어려운 말로 뭐냐 하면, 약속의 땅은 거기 있는 것이 아니고 약속의 땅은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뭐와 함께? 이스라엘과 함께. 누가 있기에? 이스라엘과 함께 동행 하시는 주의 이름으로 약속의 땅을 만드는 것이지 약속의 땅은 가나안 땅이라고 가기 전부터 이미 존재하는 그 땅은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만약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갔다가 언약을 위반하면 졸지에 그 땅은 뭐냐 하면, 그 땅은 저주의 땅이, 죽음의 땅이 되는 겁니다. 이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약속의 땅을, 천국을 소지용으로 소유용으로 삼을 대상이 아니라는 거예요. 내가 여기 있고 내가 존재하고 있고 존재는 채워야 맛이거든요. 존재는 빈털터리면 존재란 존재는 가치가 없어요. “너, 뭐야?” 하면 나, 이것 갖고 있고 이것 직업 있고 나는 키가 몇 센티고 뭔가 자기 속성을 이렇게 담겨있는 걸 풀어낼 때, 아 니가 그런 사람이구나! 하고 알듯이 존재란 존재만 있는 것이 아니고 뭔가 그걸 채워지는 그것들을 풀어내야 그게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언젠가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나무는 나이테로 이야기한다고요. 나무를 쪼개보면 뭐가 있습니까? 긴 역사로 만들어진 나이테가 있지요. 나라는 존재는 그냥 나라는 존재가 아니고 살아온 역사나 이런 것들이 나를 만드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그런 식으로서는 약속의 땅에 못 가는 겁니다. 왜냐, 내 살아온 인생은 약속이 아니고 나의 존재에 속하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는 약속의 땅에 결합되지 못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바뀌어야 돼요? 나라는 존재는 주님이 만들어낸 나이테로 일괄 바뀔 필요가 있잖아요. 바뀌어야 돼요. 태어난 것부터 죽을 때까지 전부 다 주님의 솜씨로 솜씨의 나이테로 바뀔 필요가 있다 말이죠. 그럼 나의 존재를 부정하고 이 존재는 주님의 존재가 되려면 나를 그 분에게 모든 것을 맡겨야 돼요. 그 맡기는 과정에서 그들은 약속의 백성이 됩니다.

만약에 40만중에 우리가 포함됐다 봅시다. 같이 텐트치고 동행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우리가 동행은 하고 있어요. 하지만 내가 인생을 그 분에게 맡기지 않는다면 우리는 동행해도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가요. 들어갈 수가 없어요. 갈렙과 여호수아는 들어가요. 그러나 우리는 못 들어가요. 같은 인간이라고? 같이 홍해바다 들어가요? 아니에요. 주님께 맡기는데, 주님께 맡기는 방식을 주님은 뭐라고 했느냐 하면, 내게 맡겨라, 가 아니라 어디에 맡기느냐 하면, 바로 언약궤입니다.

그들과 함께 지금 뭐가 동행하느냐 하면, 요단강 건너 갈 때 뭐가 안치되어 있어요? 언약궤가 있었지요. 언약궤. 그러니까 결국은 뭐냐 하면, 지금 이스라엘이 중요합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 언약이 중요합니까? 언약이 중요하고 싫으면 가라, 이 말입니다. 싫으면 죽던지, 애굽으로 돌아가던지 니 맘대로 해! 나는 너희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뭐가 중요하다? 언약이 중요한 거예요. 

그러면 언약은 무엇과 연결되어 있는가, 장차 어떤 인물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스라엘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과 동행하는 언약의 성취될 그 분이 중요한 거예요. 이스라엘은 오해했습니다. 출애굽기 15장을 봅시다. 이게 설명되어야 되는데, 출애굽기 15장에 보면 홍해바다 건너와서 좋다고 노래 부르는 장면이에요. 노래 부를 때 여기 3절에 보면, 여호와는 용사지요. 지금 이 대목이 난해한 것은 뭐냐 하면, 그들이 지금 홍해를 건너오면서 누구하고 싸웠습니까? 오징어하고 싸웠습니까? 고래하고 싸웠습니까? 홍해 건너올 때. 그들이 칼을 쥐었습니까? 돌멩이를 쥐었습니까?

전쟁이 내가 전쟁하지도 않으면서도 이상한 전쟁에 말려든 거예요. 이상한 전쟁인데 적은 누구냐 하면, 적은 애굽이 적이잖아요. 그러면 애굽이라는 것과 현재 자기 자신과 건너온 이스라엘과 애굽과의 적인데, 전쟁하면 적이 있어야 되니까. 차이점이 있어요? 없어요? 애굽사람들은 모양새가 이상하고 히브리인들은 코가 세 개 네 개가 아니지요. 차이가 없지요. 차이가 없는데 차이 나게 하신 분이 있지요. 

그래서 신앙이라 하는 것이 어떨 때는 우리가 억울해요. 안양에서 그냥 조용히 살고 싶어요. 그냥 내 욕망대로 내 욕구대로 그냥 살고 싶어요. 우리는 전쟁하고 싶은 마음 없다니까요. 갑자기 딩동 해가지고 주차문제가지고 멱살 쥐고 싶지를 않아요. 우리는 그냥 조용히 살면 돼요. 그런데 우리로 하여금 나의 전쟁, 나의 사적인 전쟁에 말리는 것이 아니고 내가 예상치도 않는 내가 생각지도 않는 다른 전쟁에 말려드니까 그 때부터 헷갈리는 것이 나의 적이라는 사람과 내가 살아가는데 하루 세 끼 먹은데 전혀 차이가 있어요? 없어요? 내가 차이를 모르겠다니까요. 저 사람은 악하고 내가 착한 게 아니다 라는 말이죠. 저 사람은 거짓말하고 나는 안하고, 이게 아니라는 말이라니까요. 이스라엘 전쟁에 휘말리게 된 거예요. 그 말은 뭐냐, 좀 어렵게 이야기해서 우리를 사람 취급을 하지 않습니다. 이게 오늘 강의 첫 번째 나오는 포인트에요.

우리가 사람이니까 “이상하게 법이 인물 돼? 법이 사람으로 오신다는 말이야? 그럴 리가 없어. 규칙이 어떻게 사람이 돼?” 이리되는 거예요. 내가 사람이라고 우기니까. 사람 여기 있습니다. 하고 나서니까 우리 말고는 사람이 없어요. 우리 말고는 인물이 없다니까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람취급 안 해버리면 비로소 나는 인간 아니요, 그대만이 진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물 그 분입니다. 라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거예요.

구약, 신약을 하는 교수 카톨릭 신학교 가가지고 도서관에 가서 책 찾고 방배동에 신학교가가지고 책 찾고 구약의 흐름과 그 사상의 언약의 노선을 찾기 위해서 박사학위 논문 여호와 전쟁 개념, 뒤집어 보면서 그걸 찾아보면서 제가 결론은 뭐냐, 이 사람들이 성경에 대해서 박사들이 전혀 모른다. 이유는 단 한 가지, 내가 인간입니다, 부터 출발한 거예요. 

내가 인간이니까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주께서 어떤 분을 보내주시면 우리가 고맙게 여기겠습니다. 나 같은 인간은 지옥갈 수 없지요. 나 같은 인간은 천국가야 됩니다. 나를 천국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나 같은 인간되어서 보내주시옵소서. 우리가 다 아는 흔히 말하는 2000년 역사 기독교 신학이 그거에요. 그러니까 구약에서 그들이 뭘 못 찾는가 하면 동행하는 여호와 이름 있잖아요. 여호와 이름이 그냥 이름인 줄 알았어요. 그냥 이름이지, 어떤 분의 어르신네라는 사상은 아무리 해도 나올 수가 없어요. 어떤 어르신네.

자기는 인간이라고 생각하니까 인간은 인간끼리 알아보잖아요. 그런데 만약에 내가 인간이 아니고 돌멩이라면 주님께서는 우리보고 의논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의논 안합니다. 우리보고 계획 잡겠습니까? 계획 안 잡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유일하게 상대하시는 인간은 하나님의 이름이라면 우리는 늘 죽어야 되지요. 죽었는데 그분이 살아있기 때문에 그분이 하신 일 때문에 우리는 비로소 죽은 데서 깨어나서 “누구십니까? 나를 죽은 놈을 이렇게 깨어나게 하신 분이?” “어? 아이고, 안녕하십니까? 당신 덕분에 살았습니다.” 라고 비로소 찬양하고 증거하고 고백하고 또 씩씩하고 “너희들은 다 죽었어! 우리 힘이 아니야. 너희 블레셋 다 죽었어. 이제는. 우리 싸움이 아니야. 그 분이 친히 용사시고 그 분의 이름이 친히 나서서 싸우는 거야. 너희들 눈에는 우리만 보이지? 우리는 인간도 아니야. 그 분이 참된 살아있으시는 분이야. 우리는 그 분 덕분에 매일같이 사는 거야.”라고 증거 하게 되는 겁니다.

그것을 출애굽기 15장에서 그 내용이 나온 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뭐냐 하면, 전리품이에요. 15장3절 다시 보면,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 여호와가 용사라 하는 것은 만군의 하나님 다 아는 이야기고 그 다음 중요한 것이 여호와의 이름이죠. 그런데 모세는 주의 이름이 함께 있다고요. 주의 이름이. 이 주의 이름이 뭔가를 찾기 위해서 제가 도서관을 다 뒤지고 했는데 거기에 대한 정답을 못 내리더란 말이죠.

우리한테는 이름이 있잖아요. 이름이 중요합니까? 내가 중요합니까? 이 근호 안 중요해요. 이 근호 몸통이 중요하잖아요. 그러나 주님은 몸통은 없어요. 뭐만 있어요? 이름이 중요해요. 그 말은 주님 이름 앞에 내가 중요하다는 이 자체가 주님 보기에는 그건 인간 같지도 않은 거예요. 내가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주여, 제가 중요하고 이름은 안 중요합니다.” 라고 할 때 주의 이름이 “나는 이름이 중요하지 너는 안 중요해.” 이리 되는 거예요. 이제부터 이름을 바꿔야 돼요. 내 이름이 있잖아요. 바꿔야 돼요. 주의 이름으로 소속된 이름으로 바꿔져야 돼요. 이제는 이스라엘 이름이 돼야 돼요. 내 이름 되면 안 돼요. 사적인 이름은 의미 없어요. 주의 이름으로 바꿔질 거예요. 왜냐 하면, 주의 이름이 되어야 저주와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 버틸 수가 있어요.

야곱의 이름이 뭐로 바뀝니까? 이스라엘로 바꿔져야 브니엘, 내가 죽었다가 비로소 생명을 얻었다. 가 성사된다니까요. 이름 자체가 바뀌어져야 되는데 왜 바뀌어져야 하는가, 그 이름 자체가 무슨 이름이냐 하면, 바로 ‘언약의 이름’이에요. 언약의 이름이라 하는 것은 나와 주님이 언약을 한다는 게 아니고 나하고 언약을 맺지 않고 나로 하여금 이름 바꿔진 그 분과 하나님과의 이야기해서 그 결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거예요. 모든 것이 성부와 성자, 그 둘만의 이야기에서 그 선에서 모든 것이 다 끝나는 겁니다.

그 이름이 지금 이스라엘과 동행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제 해답 나왔지요. 성경에 있는 모든 율법은 사실은 누구이름? 주라는 인물을 구체화하기 위해서 엮여져야 되고 그 과정 속에서 율법은 제가 지키겠습니다. 하는 것은 인간도 아니야, 하고 추방시키는 작업이 동행하면서 이스라엘 역사가 진행되는 겁니다. “니는 멸망해야 돼! 어디 인간도 아닌 게 어딜 인간 행세해! 니 같은 인간은 하나님이 상대 안 해.” 하고 배제하고 배척하는 방식 중에 하나가 율법을 주고 율법을 못 지켰을 때는 나오는 결과는 뭡니까? 율법을 못 지켰을 경우에는 소비되는 거죠. 그냥 물체 화되고 사물이 되는 거예요. 죽여 버리는 거예요.

늘 우리를 율법을 통해서 저주받아 죽임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우리가 죽었을 때, 등장하는 것은 우리가 아는 그 분의 이름만이 아니라 어떤 어르신네, 하나님과 유일하게 내통하시는 분이 그동안 우리하고 동행하고 계셨고 율법은 그 분을 겨냥해서 계속 나오는 거예요. 스파이더맨에서 뭐가 나오지요? 거미줄이 나오지요. 주의 이름에서 율법이 좍좍 나오는 거예요. 주의 이름이. 거미줄로 해서 이쪽 빌딩에서 저쪽 빌딩으로 휙 휙 날아다니잖아요. 뛰고 날고 악한 놈 나오라고 쳐부수고 하잖아요.

이스라엘 전체가 주의 이름이 스파이더맨 되셔가지고 하시는 작업인데 우리는 자신을 “나도 율법 지킬 수 있습니다.” 에 주장하면서 하다 보니까 이게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주의 이름은 하나도 안 보이고 조금 배부르다 싶으면 조금 편안하다 행복하다 싶으면 곧장 우리는 어디로 갑니까? 다른 같은 인간인 이방나라에 우상섬기고 그들과 함께 같이 율법이고 다 버리고 친하게 지내고 결혼도 왕끼리 정략결혼하고 그렇게 나온다 말이죠.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출애굽기15장 12절에 보면 “주께서 오른손을 드신즉 땅이 그들을 삼켰나이다.” 오른 손을 든다 했지요. 제가 책을 찾아 봤어요. 오른손이 뭐냐, 내가 찾아본 책이고 논문이고 오른손이 무언가를 아무도 이야기한 사람이 없었어요. 주께서 오른손이죠. 그러면 보통 왼손, 오른손이 거북이한테 쓰입니까? 거미한테 오른손이 쓰입니까? 누구한테 오른손, 왼손이란 말을 씁니까? 사람이죠. 그러면 누구만 유일한 사람이에요? 주의 이름만 유일한 사람이에요. 우리 오른손 의미 없다니까요. 우리 오른손은 취급도 안 해요. 흙덩어리이죠.

주께서 오른손을 드신즉, 이란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상대하는 유일한 인물은 바로 주의 이름으로 시작해서 몸통이 보여주는 그 분, 그분이 오른손이에요. 그러니까 오른손이 이야기하거든 니가 오른손이라는 것을 느끼는 이상으로, 니 오른손이 움직이는 것을 현실이라 보지 말고 이것은 그냥 흙덩어리 움직이는 것으로 보고 진짜 오른손은 따로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에게 오른손이 있는 것으로 봐라 이 말이죠. 진짜 오른손에서 일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냥 달고 다니는 오른손이에요. 그러니까 인간이 인간인 이유가 있어요. 진짜 인간을 보이고 자기는 은퇴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인간의 모습을, 인간의 탈을 쓴 겁니다. 흙이 되기까지 인간의 모양새를 갖춘 거예요.

정리하면, 모든 율법은 한 인물에 속합니다. 모든 성경은 누구한테 증거 한 것이다? 모든 율법과 성경은 모두 다 예수님을 증거 하는 것이다. 요한복음5장39절에. 그럴 때 그것도 참지 못하고 우리는 “율법 제가 지킬게요.” 우리의 오른손 들잖아요. 그 오른손을 우리가 들어버리면 무슨 오른손이 안 보입니까? 주의 오른손 덕분에 우리가 공짜로 천국 간다는 이 놀라운 언약적 원칙이 우리가 너무 설치다 보니까 눈에 보여요? 안 보여요? 눈에 안 보이는 거예요.

오른손이 한 군데만 나오는 게 아니고 시편에 좍 깔려버렸어요. 주의 오른손이, 주의 오른손이, 그 오른손의 정체가 뭐냐 하면, 요한복음 1장이나 사도행전2장에 보니까 베드로 설교가운데서 주께서 죽었다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어디에 앉히시니? 주의 오른편에 앉히시니. 주의 오른편에 앉히시니까 이는 여호와하나님도 우리보다 더 인간이라. 우리가 오른손이기 때문에 인간이잖아요. 그런데 주님의 오른손이니까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의 오른편이니까 하나님도 우리의 뜻보다 더 인간이죠.

그러면 이 세상은 우리만 인간인 줄 알았는데 이 말 자체가 어패가 있지만,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만 인간인 줄 알았는데 우리만 인격체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우리는 인격체를 증거 하기 위한 임시 땜방의 인격체, 잠시 살다가 안개처럼 사라질 그런 흙으로 돌아갈 임시 땜방의 잠시 잠간의 임시변통의 인간이라고 행세할 뿐이죠. 진짜 아들은 주님밖에 없어요. 우리는 양자에요.

인간이 있다면 인간 속에 뭐가 있지요? 인간 속에 족보가 있지요. 지금 제가 강의 설교 처음하면서 뭐가 난해 하느냐 하면, 영원한 멜기세덱이라 했는데 반차가 왜 있느냐, 영원함과 족보가 있다는 게 앞뒤가 안 맞는 거예요. 족보라 하는 것은 이 지상에서 순서대로 죽고 태어나서 애 낳고 죽고, 애 낳고 죽었기 때문에 죽은 사람 빼놓고 자식이 그 족보를 따르게 되잖아요. 그러면 그 족보는 뭐냐, 애초부터 조상의 족보의 반열, 반차라 할 수 있다 말이죠.

그러면 결국 반열, 족보, 반차라 하는 것은 이것은 영원한 묵시의 소리가 아니고 역사 속에서나 통용될 그런 개념들이고 내용들이다 말이죠. 그러니까 영원한 멜기세덱 해놓고 그 다음에 족보가 있다니까 이게 앞뒤가 안 맞는 거예요. 영원함이라 하는 것은 역사가 아니고 묵시로 초월한 입장인데 초월한 입장에서 다시 족보를 언급하니까 족보 속에 들어가면 초월이 아니잖아요. 시간 속에 매이게 되고. 시간 속에 안 매이게 되면 족보가 없어야 되는데 어떻게 해서 멜기세덱이 영원하다 해놓고 왜 족보가 있느냐 말이죠.

멜기세덱은 뭐라 했습니까? 시작도 없고 끝도 없지요. 시작도 없고 끝이 없는데 족보는 시작도 있고 끝이 있다 말이죠. 태어나고 애기 낳고 죽고 그 다음에 또 자식이 크면 또 죽고, 그 영원한 족보를 하나님이 율법으로 그 연관을 시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바로 ‘맏물’이에요. 맏물.

예레미야 다시 한 번 봅시다. 예레미야 2장 3절에 “이스라엘은 나 여호와의 성물 곧 나의 소산 중 처음 열매가 되었나니” 제가 어렵게 하지 않고 쉽게 하겠습니다. 농사로 땅을 갈았습니다. 첫 번 감자가 나오고 고구마가 나왔습니다. 그럼 첫 열매는 뭡니까? 처음에 나온 감자와 고구마죠. 다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농부가 인물입니다. 땅을 갈았습니다. 땅 나오지요. 농부 있고 땅 나오고 갈았더니만 비 내려서 첫 열매가 나오지요. 우리가 열매라 하는 것은 바로 농부 있고 땅이 있고 농사짓고 나온 첫 열매잖아요.  이건 인간 세상에서 통하지요. 그러면 고구마 감자는 이해됩니다. 그리고 양을 낳았는데 첫 새끼다. 이해되지요.

그런데 사람이 첫 열매라, 이건 사람이 아니고 이스라엘이지요. 이스라엘이 첫 열매라 했을 때는 이스라엘 자체가 첫 열매가 되려면 이스라엘을 낳은 분이 따로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따로 있잖아요. 내가 자식을 낳았다. 그것은 가능하지요. 그럼 내가 이스라엘을 낳았다. 이건 말이 안 되지요. 내가 남자를 낳았다. 여자를 낳았다. 이건 말이 되는데 내가 이스라엘을 낳았다는 것은 말이 안돼요. 왜냐 하면 이스라엘은 뭐를 포함하고 있느냐 하면, 모든 죽음을 초월한 초능력을 지녀야 이게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 만들 때, 하나님께서 무엇을 통과하게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천사가 와서 모든 집안에 맏이를 다 죽였잖아요. 그런 것 가운데서 피 때문에 통과가 된 거잖아요. 그럴 때 나온 게 이스라엘이잖아요. “너, 너, 이스라엘” 이건 아니고 심지어 이스라엘은 유월절하기 전에 이미 할례를 당했습니다. 이미 피를 냈어요. 피 내고 피 바르고. 그랬더니만 그 살아남은 무리가 집단이 이스라엘이란 말이죠.

그 이스라엘을 우리 가정에서 임신해가지고 회임해가지고 됩니까? 안 됩니까? “오, 이스라엘이네.” 이게 돼요? 안 돼요? 안되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안 되는데 우리와 똑같이 생긴 어떤 인물이 있어가지고 인물이 뭐를 만들어낸다면 그는 뭐가 된다? 이스라엘이 되는 거예요. 그럼 그 분은 어디에 속했느냐, 바로 멜기세덱의 족보를 따르는 그 분이라는 거예요. 제가 어렵게 하는 게 아닙니다. 성경자체가 어렵게 하는 거예요. 성경 자체가.

영원한 멜기세덱 해놓고 밑에 족보가 있더란 말이죠. 그 멜기세덱에 속한 어떤 자식들이 낳다 말이죠. 그러면 이 영원함과 성립이 안돼요. 왜냐 하면 인간은 태어나면서 늙어죽으니까. 그럼 늙어죽으면 뭐가 안돼요? 영원함이 안 되잖아요. 늙어 죽으면 무슨 영원함입니까? 살다 죽으면 그만이니까. 제가 왜 이렇게 어렵게 가는 이유가 뭐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걸 몰랐던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은 레위지파 알잖아요. 유다지파 알잖아요. 레위지파, 유다지파 알면 뭐합니까? 레위지파 사람들 다 늙어죽었는데. 유다지파 알면 뭐합니까? 유다지파에서 태어났다. 성장했다. 늙었다. 죽었다. 이게 무슨 영원함입니까?

다시 정리합시다. 지금 이스라엘 사람들은 레위지파 알아요. 다 알아요. 유다지파 압니다. 베냐민지파 알아요. 그런데 그들 가운데 멜기세덱 지파 어디 있습니까? 없지요. 그런데 성경은 누가 구원받아요? 멜기세덱의 족보만 받아요. 이거 누구 약 올립니까? 우리가 아는 것은 경주이씨 알아요. 안동권씨 알아요. 그게 우리의 족보입니다. 뻔히 알아요. 이항복 경주이씨 우리 족보입니다. 알아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멜기세덱의 족보가 아니면 그 영원한 세계에 못 간다는 거예요. 영생을 얻지 못한다는 거예요. 어쩌라고? 우리는 대책이 없는 거예요. 기껏해야 붙드는 것은 레위지파고 지금도 유대인들은 자칭 나라가 유다지파 아닙니까. 베냐민 유대지파. 이스라엘은 유다지파가 대표하거든요. 유대지파 붙든다 말이죠. 붙들면 뭐합니까? 멜기세덱 지파가 아닌데. 제가 어렵게 한다고 비난하지 마세요. 성경에서 대책이 없다니까요. 괜히 성경에서 멜기세덱 지파 이야기해서 골치 아파요.

족보가 어딥니까? 베냐민지파입니다. 아이고, 이스라엘이네. 그럼 구원받습니다. 이러면 얼마나 수월해요. 멜기세덱지파를 집어넣음으로서 이스라엘 자체가 망해야 된다는 사실을, 왜 망해야 되느냐 하면 살았다가 죽으면 그거 사람 아니다, 라는 거예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 사실은 사람이 아니라는 겁니다. “아, 우리는 사람인데요.” 그거는 니들끼리 이야기고. 하늘에 계신 주님 보시기에는 사람이 아니올시다. 그냥 흙이에요. 잠시 보였다가 사라질 약간의 사람 흉내, 사람인 척, 또는 사람 역할, 사람의 가면, 사람의 마스크, 실제는 흙인데. 실제는 흙인데 사람이 약간 노력하다가 결국 흙으로 돌아가는 임시방편의 하나의 땜방처리 밖에 안 되는 거예요.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존재다. 사람이다. 그러니 제발 사람이라고 하지 말고 그냥 아담에 속해서 그냥 흙이라고 보라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사람은 우리가 사람이라고 우기는 이상 사람이 안 되고 그리고 우리는 흙이기 때문에, 제가 사람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담이 죽었잖아요. 흙이 됐잖아요. 우리도 아담 속에서 흙 됩니다. 여기서 구원? 넘보지 마세요. 이건 안 됩니다. 영생? 안 됩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에요. 끝났어요. 구원은 희망사항일 뿐이지 이거 우리에게 해당사항도 없고 어떻게 애쓴다고 될 수가 없습니다. 안 되지요.

안 되는 걸 되게 하시는 겁니다. 무엇으로? 언약으로. 언약 속에 뭐가 들었는데? 멜기세덱 반차, 족보를 심는 거예요. 무엇을 경유해야 돼요. 그 경유하는 그 분이 얼굴이 사람의 형체는 없지만 그 분이 형체는 없는데 이름이 붙어있어요.  그 이름이 이스라엘과 함께 동행을 하시는 거예요. 동행을 해서 이상스런 현상들이 일어나요. 분명히 우리는 애굽을 못 이깁니다. 이스라엘 백성 어디 군사훈련 했습니까? 애굽 이기려고. 그들은 노예들이에요.

주께서 시험을 칩니다. 애굽 너 나와! 히브리 너 나와! 시험문제가 뭔지 공부를 합니다. 자, 시험 친다. 내가 죽음의 사자가 심판 할 테니까 심판에 이긴 사람은 합격 패스고, 심판에 못 이긴 사람은 그냥 지옥 가! 죽어버려! 그 시험문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잖아요. 양쪽 다 못 풀기 마찬가지잖아요. 일방적으로 이쪽에는 컨닝을 사전에 시험을 유출해요. 피 발라, 문설주에 피 발라, 이건 반칙입니다. 이건 정말 짜고 치는 고스톱이에요. 문설주에 피 발라! 왜요? 이론은 따지지 마! 어떤 논리로? 논리도 따지지 마! 어차피 너는 죽을 놈이야. 그러니까 내가 시키는 대로 해! 피 바르고 할례행하고 어린양 발라. 어떻게? 따지지 말고 결과만 보자는 거예요.

에이 씨~ 발라 보자. 발랐더니만 한 쪽은 다 죽었는데 이쪽은 다 살아났습니다. 그것이 홍해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신나서 출애굽기15장 찬송 불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백합니다. 절대로 우리가 이긴 것이 아닙니다. 아! 참, 이 고백이요, 정말 중요한 고백입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당신이 하지도 않았는데 이겼어?” 우리 안에 누가 계십니다. 누군데? 니 안에 지도자 이름 대라! 하니까 이름 대는 이름이 무슨 이름입니까? 여호와의 이름인데. 그 사람의 무기가 뭔데? 수류탄이야? 무기가 뭐야? 오른손이었습니다. 아니, 그 분 오른손에 뭐가 쥐어있는데? 그건 메시아까지 온데요. 메시아까지 와야 된다. 그게 무기고 성령이거든요. 십자가 근거란 말이죠.

십자가 죄의 용서가 유일한 영생 얻는 무기가 될 줄이야. 지금도 마귀는 그 무기를 그 십자가라는 복음의 무기를 써먹지 말라고 마귀가 매일 우리한테 빕니다. “너, 똑똑하잖아, 신학 했잖아, 니 설교 잘하잖아 그거 써먹어, 그거 써먹으라고. 제발 십자가라는 건 쓰면 안 돼! 우리가 납득되는 거 해, 기적 일으키는 거, 병 고치는 거, 기적 써 먹어.“ 유대인들은 기적을 원하고 헬라인들은 똑똑함으로 할 때 우리가 증거 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은 오직 어리석게 보이는 십자가 피 능력 밖에 없습니다.

지금 히브리서에서 사도바울이 썼다고 친다면 사도바울은 그야말로 본인이 행하는데 너무 어려워서 젖 먹는 애는 모른다 했거든요. 지금 너무 어려운 과제를 이 시간 줬어요. 영원한 멜기세덱의 반차와 그 다음 뭐가 나온다? 율법. 율법이야기는 아직 손도 안댔어요. 너무 어려워서 못합니다. 일단은 영원함과 족보 이야기만 했을 뿐이지 율법은 그 다음 시간에 할 거예요. 이건 우리가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자꾸 인간이니까 하나님이 저를 만들었으니까 건져내세요. 이리 하니까 이게 레위 족보, 유다 족보 하는 거예요.

히브리서 한 번 봅시다. 7장11절에 보면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백성이 그 아래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좇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별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뇨” 이리 되어 있지요. 그렇게 해놓고 14절에 보면, 우리 주께서 유다로 좇아 났지요. 지금 이 흐름이요, 흐름이 뭐냐 하면, 레위지파라는 제사장이 제사장 값을 한다? 안 한다? 제사장직을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제사장이 주의 이름이거든요. 그 분의 흉내를 미리 앞당겨서 폼을 내는 자들이 있었다, 라는 거예요.

그게 누구냐, 그게 제사장인데 그 제사장직으로 멜기세덱의 족보와 엮여질 수 있다? 없다?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레위지파가 한계선을 드러내고 레위지파 안 되는구나! 하고 레위지파에서 노선이 바뀌어져야 돼요. 서울서 대전까지 왔던 기차가 목포나 광주로 가려면 그 철도원이 노선을 바꿔져야 돼요. 이걸 가지고 별다른 지파에요. 별다른 지파.

제사장은 레위지파입니다. 유다지파는 제사장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또 골치 아파요. 유다지파는 제사장이 없어요. 제사장이 없어요, 라고 제사장 앞에 지워보세요. 그럼 뭐가 됩니까? 없어요. 그러니까 이 땅에 아무도 없어요. 없는 분이 우리를 천국에 데려가는 겁니다. 현재 없으니까 내가 여기 있어도 나는 없어요. 나는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있어요. 내가 없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 있어요. 나는 안동권씨, 경주이씨 집안인데 그 족보는 소용없어요. 레위지파 소용없습니다.

조건입니다. 제사 없이 구원 없다. 그런데 이 땅에서는 제사는 누가 독점한다? 레위지파가 독점한다. 그런데 레위지파가 한계를 드러내면서 레위지파로 구원이 성사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줬다. 그럼 보여주는 것이 뭐냐, 제사장이 없는 지파로 보여줬어요.

유다지파는 제사장이 없지요. 그럼 레위지파는 제사장이 있지요. 있는 것은 없이 돼버리고 없는 유다지파에 제사장이 있다면 유다지파에 누가 섞였다는 이야기에요. 누가 섞였는가? 하늘에 있는 멜기세덱의 족보를 따르는 분이 유다지파를 이용해가지고 그 안에 스며든 거예요. 스며들면서 하는 말이 “레위지파는 아니야.” “레위지파는 아니야.” “레위지파는 아니야.”자꾸 외치는 거예요.

사도바울은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유다지파로 온 이유라는 겁니다. “어이, 바리새인” “예” “어이, 사두개인” “예” “너희들 제사는 누가 드리지?” “우리에게는 레위지파가 있습니다.” “글쎄, 그게 아니라니까.” 주님께서는 그런 식으로 해서 노선 바꾼다니까 “에이씨, 니가 죽어라.” 해서 죽인 사건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어느 지파요?” “유다지파요.” “유다지파는 제사가 없는데.” 제사가 없는데 그게 제사라는 거예요. 너희들 보기에 없음 자체가 영원함이기 때문에 제사가 된다는 거예요. 단 한번으로 제사가 끝났기 때문에 너희들 보기에는 반복이 안 되니까 마치 제사가 없는 것처럼 그렇게 보인다는 겁니다. 이제 조금만 하고 10분 쉽시다.

이제 더 이상 이해 안 돼도 소용없습니다. 그러면 레위지파는 제사장은 율법이 완성되는 거니까 율법이 오기 전에 그러면 뭐냐, 율법이 오기 전에는 누가 관리하는가, 누가 관계 하는가 ‘맏물’입니다. 맏물이 누구냐 하면, 바로 멜기세덱이에요.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당신은 맏물입니다.” 하고 십일조 드림으로 말미암아 멜기세덱 소속의 아브라함이 속해버리고 그 아브라함 소속에 레위가 허리에 있으니까 레위지파가 속해져 버리고 그 아브라함 소속에 유다지파가 속해져있고 그 아브라함 자손 되시는 예수님이 소속돼버려요.

그런데 전에 이야기했잖아요. 자손이 누구를 건진다? 자손이 선조를 건져요. 그러니까 수직적으로 멜기세덱의 영원한 그 분의 족보가 지상에 흐르고 있는 인간들이 유다족보에 흐르는 역사와 접점지점을 이루면서 유다지파에서 난분이 유일하게 하나님 앞에 맏물이 되면서 그분이 바로 율법 없이도 구원받는 조건을 우리에게 제공하신 분이에요.

여러분, 출애굽 이길 때, 이스라엘이 율법 지켜서 홍해 건너왔습니까? 율법 없이 구원받았잖아요. 꼭 그 식으로 아무 법도 우리가 지키지도 못하고 지키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함께 있는 그 분 때문에 그 분의 오른손 때문에 우리는 구원받았을 때, 율법 없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는 그 대원칙이 짜여 지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공은주 (IP:218.♡.193.179) 14-03-22 12:31 

안양20140314b-히7장18절(멜기세덱과 율법) - 이 근호 목사

첫 번째 강의에서 한 거 정리한다면 율법이 없어도 되는데 왜 주어졌는가 하면, 아브라함에게는 율법이 있었다? 없었다? 없었잖아요. 없었는데 의인 되었다? 안 되었다? 의인 됐잖아요. 그만하면 됐잖아요. 믿음으로 한다면 율법 필요 없다 말이죠. 그런데 왜 436법을 줬느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갈라디아에서도 나오는 이 문제도 사람들이 회개를 못해요. 처음부터 믿음으로 했으면 끝까지 믿음으로 가야지, 왜 율법 줘서 헷갈리게 만들었냐 말이죠. 율법을 줄 이유가 없잖습니까?

그런데 제가 첫째시간에 이야기했죠. 율법은 우리 구원하려고 준 게 아니고 우리 구원의 바탕이 되는 분과 관련되어 있다 했습니다. 그 바탕의 되는 분이 이스라엘과 동행하시는 분이라 했습니다. 그 분이 바로 여호와의 이름, 출애굽기15장, 우리의 주님의 이름, 주의 이름입니다. 주의 용사는 여호와인데 그분은 여호와의 이름으로서 왔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름으로 왔다는 것을 무엇으로 아느냐, 언약이 구체적으로 발휘가 되면 아, 우리 속에 어떤 어르신네가 있는 줄 알면 돼요. 

모세가 칼을 들고 안 설치고 모세가 그냥 지팡이를 잠시 들었을 뿐인데 산 밑에서는 전쟁을 이겼더라면 이것은 모세가 한 게 아니고 모세와 함께 있는 어떤 어르신네의 존재성을 그게 진짜 현실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밑에 전쟁에서 승리와 패배가 나누어지는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은 동행하면서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결과에 대해서 그 원인을 자기 쪽으로 몰아세우면 안 되고 우리와 동행하시는 주의 이름으로 엮여져야 되겠지요. 그런데 실제로 광야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렇게 엮였습니까? 안 엮였습니까? 물 달라 했고 양식 없다고 심지어 애굽으로 돌아가자 했지요. 그건 뭐냐 하면, 우리가 누구와 동행한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왜 우리를 이렇게 힘들게 하십니까? 라는 짜증내는 것과 관련되어 있지요.

그래서 제가 첫째시간에 뭐라고 했습니까? “너는 인간이 아니다.” 쉬운 말로 하면, “언약적 인간이 아니야.” 다른 말로 하면 “언약적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이 직접 너와 상대하지 않아.” 이리 되는 겁니다. 그걸 신약적으로 설명하면 “너는 중보자가 아니야.” 따라서 “하나님 아버지는 중보자 되시는 그 분만 상대해. 그 분은 바로 한 분이시니 그리스도 예수시니라.” 이리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를 믿으라고, 너 믿지 말라고, 하나님이 직접 나하고 상대하는 게 아니라는 점에서 우리로 하여금 어떤 우리가 원하는 결과나 예상한 사태를 우리에게 허락을 하지 않지요. 말은 참 쉬운데 실제 생활에서 우리는 자꾸 하나님하고 나하고 직접 연결하고 싶어 하지요.

분명히 기도해 놓고 마지막 기도이름을 누구 이름 붙입니까? 분명히 주의 이름 붙여 놓고 기도내용은 주님이 하신 일과 무관하게 직접 나하고 상대하려는 그런 잘못된 버릇이 자꾸 나와요. 그냥 습관처럼 주의 이름을 부를 뿐이지 정말 주님의 이름이 원하는 바를 기도내용으로 채우지 아니하고 내가 원하는 걸 채워놓고 그냥 상표 붙이듯이 가짜 구찌, 이거 찬 허리끈이 중국에서 산 가짜 구찌입니다. 이 허리끈이. 삼천원 줬더라.

그러니 주께서 자꾸 우리 자신이 가짜라는 것을 일깨워주기 위해서 주님이 성령이 우리와 함께 있는 거예요. 그래서 모든 설교와 모든 것은 책망이어야 됩니다. 책망 받는 즐거움이 대단한 즐거움이에요. 사람이 책망이 없으면 우쭐되기 마련이거든요. 성령을 통해서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책망을 하게 되면 그 책망 받는 그 즐거움에 우리는 그 기쁨에 이루 말할 수 없지요.

다시 하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믿음으로 의롭다 해놓고 왜 우리에게 율법을 주느냐, 결국은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은 “니가 인간이 되어가지고 하나님 저를 구원해 주세요.” 라고 니가 뭔데 우리를 구원해요. 그런데 우리는 구원 받을 자격이 있는지 따져보지도 않고 무조건 “인간이잖아요. 저를 건져주세요.” 하는 것은 주께서는 거부해 버리는 겁니다. “나는 너하고 상대 안 해. 천국은 현재 너 같은 인간으로 채워지지 않고 주의 이름으로서 변화된 달라진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 된 사람들과 내가 영원한 천국의 구성인물로 삼을 거야.” 라는 주님의 독자적인 계획이 언약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왜 주느냐, 율법은 바로 아브라함이 믿었던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됐다는 믿음자체가 의가 아니고 의가 나왔던 그 바탕이 있어요. 그 바탕이 어떤 인물로 구체화되면서 모든 율법을 다 이룬 분이기에 그 바탕위에 올라서면 우리는 다 이루지도 못하면서 율법을 다 이룬 사람으로 다루어지고 그렇게 인증 받는 효과로서 의인이 되는 겁니다. 갈라디아서2장에 보면 율법으로 우리가 의롭다고 할 것 같으면 율법을 십자가에 죽을 이유가 없다.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이미 율법주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말은 율법으로는 의롭다할 의인이 없고 십자가로 말미암아 의인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율법주고 십자가 줬다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지금 말을 바꿨지요. 아브라함 줬으면 율법 필요 없다고 했잖아요. 시작에서. 아브라함 주고 430년 후에 율법 줬는데. 사도바울은 십자가부터 출발해요. 십자가로 구원받는 의인된 이유는 그 전에 뭐가 있었다? 율법이 있었고 그 전에 아브라함이 있었다. 그래서 율법은 빠지고 아브라함과 십자가를 바로 연결시킬 때, 너 자신이 구원 받는다는 것도 같이 빠져야 되고 아브라함 자손과 율법을 이루고, 그 십자가이룬 효과로서 새삼스럽게 너희들이 그 효과에 말려 들어가면 너희들은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겁니다.

갈라디아서에서는 그 효과를 주는 연결고리는 뭐냐, ‘성령’이라 하는 겁니다. 갈라디아서에서는 율법으로 난 사람과 성령으로 난 사람을 두 언약이라는 이름으로 갈라놓지요. 하갈계통과 사라계통, 이것은 두 언약이다. 율법으로 난 사람이 성령으로 난 사람을 또는 약속으로 난 사람을 핍박을 했는데, 그것은 뭐냐 하면, 이 땅에 어떤 자식이 없다는 거죠. 그 점부터 출발하겠습니다. 

없다는 겁니다. 이 땅에. 잉태치 못한 여인이죠. 잉태치 못한 여인이 하늘나라 가니까 왜 이리 자식이 많은지 모르겠어요. 잉태치 못했는데. 잉태치 못하면 자식 없음이죠. 없음의 형태로 올려 보내겠다는 겁니다. 없음의 형태로 올려 보낸다면 이곳에 비로소 있음이 있는 거죠. 그렇다면 이 땅에서 있음이라 하는 것은 그냥 어디로 보내느냐, 전부 다 지옥으로 보내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렇게 하는 근거가 뭐냐 하면, 구세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없어요. 예수님이 이 땅에 없음을 남겼습니다. 없다는 것을 남겼어요. 그걸 멜기세덱의 반차라 해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어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으면 뭐가 없는 거예요? 족보자체가 없어요. 족보 자체가 없는데 히브리서7장17절에서는 멜기세덱의 족보라고 이야기한 겁니다. 그래서 이 구절이 어려운 거예요.

족보라 하면 “그래, 그래, 그 조상이 자식을 낳고 그 자식 후손이 누군데?” 이리 되잖아요. 족보라 하면 이런 생각이 드는데 실제로는 멜기세덱 족보는 이 땅에 멜기세덱 족보가 없어요. 없다면 구원은 멜기세덱 족보로 구원받고 이 땅에 와서 멜기세덱 족보는 없고 그러면 없음에 끼어들어야 되거든요. 있음과 있음 사이에서 없음을 새로 만들어내야 될 필요가 있다 말이죠.

그러면 제사장은 어디에 있느냐, 레위지파에 있습니다. 그런데 레위지파만 있어요. 그런데 제사장이 없는 지파가 뭐냐, 유다지파에요. 레위지파에서 메시아가 오는 게 아니고 유다지파에서 메시아가 온다. 그리고 유다지파에서 분명히 제사장이 없는데 나중에 유다지파에서 난 메시아가 영원한 제사장이 되어버립니다. 영원한 제사장.

영원한 제사장이 나타났다는 증거가 뭐냐, 그게 십자가다. “에이~ 십자가는 정치범이야.”정치적 형태는 역사적으로 보면 뭡니까? 이거는 제사 형식이 아니고 그냥 정치범 처리한 거예요. 질서 문란 죄 사형 당하잖아요. 그런데 히브리서에서는 십자가를 뭐로 보는가 하면, 한 번으로 끝내버린 영원한 제사 일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뭐라 합니까? “레위지파와 연결이 안 되잖아. 왜 구라를 쳐. 구라를. 레위지파도 아닌데 왜 자꾸.” 예수라는 분은 어느 지파다? 레위지파가 아니고 유다지파거든요. “레위지파도 아닌데 그게 제사장 될 리가 없어.”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럴 때 사도바울이 유다지파는 이 땅에 레위지파가 없기 때문에 그것이 제사장이 된다는 거예요. 없기 때문에. 유다지파 제사장이 없기 때문에 기존의 모든 제사제도를 거부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기존의 제사제도에 묶여있으면 어떻게 되느냐 그게 뭐냐 하면, 그게 바로 믿음으로 의롭다 하는데 그것이 전혀 연결이 되지 않기 때문에 레위지파는 없는 거예요. 율법을 줬다. 주니까 율법이 제사 지내라 하니까 시키는 대로 지냈다. 그런데 그것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과 관계가 끊어진 상태다. 다시 말해서 끊어지라고 율법 준 거예요. 끊어지면서 어떤 인간도 끊어짐에서 돌파해서 이어짐으로 나갈 위인도 없다는 겁니다. 누군가 끊어짐을 이을 필요가 있는데 그 분은 기존에 있는 제사 직으로 사용하지 않고 분명히 제사 직이 없는 유다지파를 통해서 일방적으로 제사 직을 줘버린 거예요.

그러면 이 주장이 성사되려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과거, 현재, 미래로 나아가면 이건 성립이 안 됩니다. 어떻게 하느냐 하면, 예수님이 영원한 제사 직이다. 제사장이다. 그런데 그 분은 어느 지파로 왔다? 유다지파다. 그런데 유다지파는 제사 직이 없는데 왜 있느냐? 그것은 레위지파를 일부러 율법으로는 의롭다함을 받지 못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레위지파에게 율법을 시켰다. 라고 논리가 예수님부터 해서 유다지파로 가서 레위지파로 해서 방향이 반대로 전개해야 되겠지요. 이것을 히브리서가 쓴 거예요. 이제 히브리서 전체가 윤곽이 잡혔지요.

인간들은 자기 쪽으로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인데 히브리서는 십자가라는 것을 이미 완료된 걸로 보고 그 다음에 차례, 차례로 논리를 끄집어내는 거예요. 방향이 거꾸로 가는 거죠. 그러면 이쪽에 있는 과거, 현재, 미래에 있는 사람이 과거에 근거 없는데 당신이 그런 주장하니까 못 믿겠다고 하지요. 못 믿겠다는 거예요. 우리는 뭐라고 하는가 하면, 믿음에 합하지 않기 때문에 천국에 못 간다는 거예요. 둘이 대화가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대화가 안 되지요.

히브리서11장이 뭡니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라 해서 항상 믿음의 근거를 나중에서부터 거꾸로 잡아당기는 거예요. 그러면 시간은 이렇게 과거 현재로 흘러가는 게 아니고 거꾸로 흐르지요. 그걸 제가 대전강의에서 뭐라 했습니까? 시간의 역전. ‘시간의 역전’입니다. 시간의 역전이 좋은 점이 뭐냐, 이미 안심 푹 놓고 따져 들어간다는 거예요. 구원받기 위해서 애쓰는 것이 아니고 이미 구원 챙겨놓고 ‘이 구원이 어디서 왔지?’ 따지는 겁니다. 오늘 좋은 거 줬습니다. 

“이렇게 하면 한라산에 들어갑니다.” 하는 것은 레위지파, 율법적 사고방식인데, 이쪽 회사에서 당신은 몇일에 한라산의 비행기표 주고, 당신은 비행기표가 어디서 나왔는가를 차후에 이걸 준다면 우리는 기분 좋게 인터넷 들어가지요. 100%보장된다면. 100%구원이 확정적이지 아니하면 성경보지 맙시다. 그건 바로 실패에요. 100%보장을 누가 해주느냐, 성령 받아야 된다는 거예요. 그 성령은 누가 주느냐 이 말입니다. 이미 성령줄 때는 이것이 땅에서 주는 것이 아니고 이미 위에 올라가서 “어이~ 산 밑에 어이, 나 지금 주님의 오른편이거든(아까 오른편이라 하는 것은 어떤 거인이 있다는 뜻이거든요. 거기의 오른손에 있잖아요.) 어이, 나 오른쪽에 왔거든. 주의 자리에 앉았거든. 너 빨리 올라와!” 하면서 스파이더맨 있잖아요. 거미줄로 좍~ 거미줄로 했기 때문에 거미줄은 뭐냐 하면 보증금이라, 아파트 살 때 보증금주지요. 보증금주면 이미 집주인이에요. 나중에 잔금만 주면 되니까. 계약서 쓰면 되는 거예요. 성령으로 보증한 거예요. 그걸 가지고 요한계시록에서는 하나님의 인, 도장을 맞은 거예요. 새로운 질서가 오기 때문에.

그 거미줄을 누가 끊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 핍박, 곤고, 기근, 스파이더맨의 거미줄은 놀라운 거예요. 끊어지지도 않아요. 그렇다면 왜 힘들게 살아갑니까? 세상에서 온갖 힘들게 하는 것을 봐야 이 줄이 얼마나 튼튼한지를 힘든 일을 당해봐야 확인이 되는 거예요. 내가 만든 믿음인지, 신념인지 아니면 선물로 준 믿음인지는 환난가운데 고난가운데 티가 나게 돼있습니다. 표가 나게 돼있습니다.

스데반집사가 죽을 때 성령이 충만했지요. 성령이 충만했다라고 한 뒤에 스데반집사가 돌아 맞는 장면이 나올 거예요.  뒤에 장면 모른다 치고 성령 충만함만 봤을 때는 ‘아, 스데반집사가 나중에 총회장 되겠다.’ 생각했지요. 그런데 성령 충만 받고 난 뒤에 돌에 맞아 죽었잖아요. 스데반집사가 슬퍼했습니까? 아니면 감사했습니까? 주와 함께 영원히 진짜 현실 진짜 어르신네를 만나서 그 때는 얼굴과 얼굴을 희미하게 보는 게 아니고 마주보아서 “야, 이제 제대로 된 현실 속에 있군요.” 하고 얼마나 만끽했겠어요. 그리고 너무나 불쌍해서 “주여, 저들의 하는 짓을 알지 못하니 그냥 봐주세요. 그냥. 모르고 한 짓이니 용서해 주세요.”라고 이야기를 해버리잖아요.

그 여유가 어디서 나왔습니까? 합격 받고 한 거예요. 이 한라산 비행기표 챙기고 한 거예요. 성령 받은 것은 돈으로 얼마주고 샀습니까? 여러분, 시몬은 그걸 무엇으로 사려했어요? 시몬은 돈 주고 사려했지요. 사도행전8장18절. 돈 주고 사면 이건희가 대번 돈으로 사서 팔아먹을 거예요. 돈 없어도 구원받아요. 값없이. 목사들부터가 귀한 걸 모르니까 딴소리하는 거예요. 돈 주고도 못사는 것을 가졌으면 이걸 이야기해야 되는데 육신의 정욕, 이생의 자랑거리를 전하니까 듣는 교인들이 쓰레기 같은 것만 주우려고 교회에 온 거예요. 정작 영생은 안 얻고 썩어질 만나보다 못한 걸 주워간다고요.

그러니 사명 받은 사람의 모든 성도가 다 목자라고 제가 이야기했지요. 오후설교 때 했지요. 모든 성도가 다 목자거든요. 목자가 됐으면 기죽지 말고 주눅 들지 말아야 돼요. 귀한 거 얻었으면 예수의 피를 받았으면 다 받아 챙긴 겁니다. 100%합격이에요. 그런 관점에서 히브리서를 보는 겁니다.

그래서 방금 이야기한 것은 이렇게 하면 됩니다. 연출하지 마세요. 그건 뭐냐 그냥 사세요. 믿는 척 할 이유 없어요. 연출한다는 것은 미흡하다는 뜻이고 어떤 속임수 같은 거거든요. 그냥 살아서 받은 모든 것을 그냥 툴툴 털어서 외치면 다음날 되면 또 채워줘요. 툴툴 털어낸 거 성령께서 또 채워준다고요. 그러면 그 다음날 또 툴툴 털어내고. 또 받아 챙기면 돼요. 왜냐 하면 이 일이 내 일이 아니고 누구일이기 때문에? 주님의 일이기 때문에. 그러면 그 일 안하게 되면 이젠 쓸모 짝이 없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오늘밤에 나그네 데리고 가지요.

고린도전서5장에 보면 무서운 이야기인지 아니면 정말 기쁜 좋은 이야기인지 모르지만 아버지 아내와 간음한 아들이 나와요. 하나님께서 지옥 보냈을까요? 천국 보냈을까요? 아버지의 첩과 간음한 아들을. 성경에 나옵니다. 육은 죽이고 영은 살리잖아요. 왜냐 하면 고 역할이 고 역할이거든요. 우리의 윤리 도덕관은 상상이 안 될 이야기입니다. 쓸데없이 윤리 도덕을 앞장세운다는 것은 아직도 구조가 육의 구조를 유지하고 있다는 거예요. ‘내가 이런 일을 했을 때, 남들이 얼마나 욕 하겠는가. 그러면 내 믿음을 보고 은혜 받던 사람이 은혜 깨지면 아이고, 안되지. 나는 주의 종이니까.’ 이것은 자기 단 도리고, 자기 과시고, 자기 의고, 여전히 선악구조를 그대로 지탱하고 있는 거예요. 이것은 마귀가 계속 조롱할 수 있는 여건이 돼버려요. “니, 하는 일을 내가 발각시킨다!” “그러면 안 돼!” 마귀한테 벌벌 떨고 있는 거예요. “니가 어제 지난 여름밤에 한 일을 내가 안다.” “아, 아, 안 돼! 마귀 그것만은 안 돼!” “아, 내가 얼마나 훌륭한 목사인데. 그건 안 돼!” 주님께서는 둘이 뭐하는 짓이냐 말이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며. 믿음으로.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아무리 외워도 실제 행동은 행함으로 살아요. 우리의 행함은. 바로 그 사실을 툴툴 털어내면 돼요. “제가 목사라도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인간입니다. 혹시 내가 험담 받지 않고 지금도 완벽주의로 신앙 자랑 질하면서 지금도 당신보다 내가 낫다고 자랑 질하는 그런 모습으로 이 강단에 섰습니다. 이것밖에 안 되는 인간입니다.” 툭툭 털어내 놓으면 그들은 예수님만 바라볼 거예요.

그러니까 연출하지 말고 그냥 사시면, 어떤 사람이 그냥 산다하니까 “목사님, 말은 좋은데 주님께서 만약에 내용을 안 주면 어떻게 합니까?” 그것은 자체가 지금 주님과 함께 있지 않은 게 돼버려요. 못 믿는 거예요. 주님이 내가 있는 것보다 더 나보다 더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본인이 안 믿는 게 돼요. 엠마오로 두 제자 내려갈 때, 주님 다시 만나고 헤어졌잖아요. 그럼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이 있는 존재입니까? 없는 존재입니까? 헤어졌어도 자기가 있는 것보다 더 생생하게 있지요. 왜냐 하면 자기가 있을 때, 찾아왔기 때문에.

자기가 찾아가지 못했는데 그 분께서 찾아왔다는 말은 이것은 대리운전보다 더 빨리 왔거든요. 전화하기 전에 먼저 왔거든요. 나의 존재보다 더 확실한 존재가 그 분의 존재지요. 그 분의 존재가 살아있을 동안에 계속해서 우리로 일을 시키니까. 털털 내어놓으면 돼요. “털털 내어놓을 게 없으면 어떻게 합니까?” 자꾸 그러지 말고 그럴 땐 이리 해야 돼요. “성도님, 오늘 내어놓을 게 없습니다.” 그러면 되는 거예요. 우리가 할 일은 목격담이지 내가 어떻게 할 일이 없는 거예요. 우리 집사님들도 남편이고 뭐고 아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냥 사세요. 그게 하나의 배치고 구조에 집어넣은 겁니다.

자, 그렇다면 율법이 뭔가를 해봅시다. 여기 뭐라고 되어있는가 하면, 7장19절에 보면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하게 못할지라)” 되어 있지요. 18절에 보면 “전에 있던 계명은 연약하고 무익하므로 폐하고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하게 못할지라.” 요 이야기를, 예수님 오신 것을 미래라면, 미래의 십자가의 관점에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과거에서 미래로 찾아가는 관점에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미 십자가에서 완료된 입장에서 그렇지요. 그러면 율법이 폐했다는 말은 어떤 자리에서만 외칠 수 있어요? 십자가 안에 있을 때만 외칠 수 있지요. 그러면 십자가 안에 있지도 않으면서 그걸 외쳐버리면 그걸 가지고 율법폐기론자가 돼요. 이제 그 궁금했던 율법폐기론자 풀렸지요.

이걸 이제 그림으로 봅시다. 인간은 도상의 존재라고 야스퍼스라는 철학자가 이야기했습니다. 마르셀이라는 실존주의도 그렇게 했어요. 마르셀의 실존주의가 하는 말이 인간은 도상이다. 쉽게 말해서 인간은 나그네다. 그게 무슨 말이냐 하면, 인간은 도착지점도 모르고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고 그냥 걸어  가라, 해답을 찾지 말고 목적도 의미 없고 그냥 걸어가라, 그게 인간의 전부 다라고 하는 겁니다. 말은 맞지만 별로 기쁘지는 않지요. 그런데 놀랍게도 실존주의 적인 철학이 오늘날 소위 교회하는 사람들이 다 이 지경이 돼요.

자, 성화론 봅시다. 갈수록 착해져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A라는 지점이 어제였습니다. 오늘은 B라는 지점으로 이동했습니다. 왜? 도상의 존재니까. 도상은 길, 길은 역사에요. 하루, 하루 역사니까. 이건 캘린더 보면 알잖아요. 캘린더의 숫자 나열해 보세요. 하나의 길이 되겠지요. 2월6일, 3월6일, 4월6일, 길이 되잖아요. 길 위에 살아가는 거예요. 걸어갈 때, A라는 지점에 왔을 때 A지점에서 B를 내다보면서 나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도상의 존재니까, 목적을 향하니까, 나는 뭔가 점선을 해서 나는 이러한 사람이 되고 싶어라, 하게 되면 여기서 뭐가 생기는가 하면, 결핍이 생기죠. 간격, 결핍, 모자람. 그러면 어디에 도착해야 이 결핍이 사라집니까? 절대로 결핍은 안 사라지지요.

B라는 지점에 와서 ‘이만하면 착하겠지‘ 했는데 갑자기 목사님 설교에서 손 양원 목사 이야기를 해버리네. 손 양원 목사 수준 되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아들죽인 살인자를 자기 양자로 삼았다는 이야기를 하니까 교인들은 그걸 들었다 말이죠. 듣고 집에 있는 아들을 생각했다 말이죠. 아들 대학 졸업하는데 3억 들잖아요. 요번에 폭설에서 무너졌잖아요. 5억 받았는데 사실은 남는 게 없어요. 3억 빼고 2억 남았거든요. 자, 3억들은 애가 갑자기 폭설에 죽어버렸다. 그런데 엉뚱하게 싸우다가 죽었다. 싸운 애가 같은 친구다. 아들 죽인 애에게 찾아가서 “친구 아들아, 이제부터 부모 없으면 내 아들 할래?“ 라고 해야 되잖아요. 해야 어느 정도 손 양원 지점까지 온다 말이죠. 가만히 보니까 그럴 자신은 없거든요. 머뭇하지요. 머뭇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 갭과 결핍이 계속 마음에 남지요. 남아가지고 뭔가 일이 꼬일 때는 ’그래, 맞아 내가 C지점까지 가야되는데 내가 지금 B지점에 머뭇하니까 벌을 받는구나!‘ 이렇게 되지요. 그러면 C지점까지 왔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걸로 족합니까? C지점의 특징은 뭐냐, C지점에 도착해야 비로소 D지점이 보인다는 사실,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주께서 이런 취지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만들어 놓고 그 다음에 수직적으로 누굴 투입시키는가 하면, 예수님을 투입시켰습니다. 그러면 이쪽의 역사는 뭐냐 하면, 그냥 터벅, 터벅 해보는 거죠. 그냥 갈 때까지 가보는 거예요. 잡히는 것도 없이 가보는 거예요. 여기에 예수님께서 투입했지요. 투입시켜버리면, 율법은 자기 지키라고 준 율법이 어디로 가버렸습니까? 예수님 오셔가지고 율법이 예수님 쪽으로 노선이 가버린 거예요. 예수님 쪽으로.

그러면 이들은 뭘 놔야 돼요? 율법을 따라왔으면 못 지키잖아요. 율법이 몽학선생이죠. 몽학선생을 다른 말로 하면 가정교사입니다. 가정교사는 정식학교 들어가기 전에 집에서 아이들을 양육하는 교사가 몽학선생입니다. 그럼  본궤도에 들어가면 가정교사가 계속 있어야 돼요? 필요 없어요? 필요 없어요. 그 이야기를 갈라디아서에서 하고 있는 겁니다.

믿음이 온 후로는 뭐가 필요 없다는 말입니까? 율법의 몽학 선생이 필요치 않다는 말이에요. 이 말은 어떻게, 어떻게 하면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니고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이여, 너희들이 온 길은 너희가 이해를 하던 안 하던 간에 너희들이 온 모든 길은 율법의 지배하에 있었던 바로 그 길이었드랬습니다. 라고 추후 통보해주는 거예요. 율법을 지켰습니다. 안 지켰습니다. 할 것도 없이 여러분들은 본인에 관계없이 무조건 모든 인간이라면 다 율법에 저주아래 놓여 있더랬습니다. 라고 알려주는 거예요.

그럴 때, 믿음 있는 사람들은 박수를 치게 되는 거예요. “그렇지, 그렇지, 바보같이 그것도 모르고. A지점에서 B지점, 아이고, 내가 완전 마귀에게 속았구나! 그런 헛된 짓을 했을까.” 라고 기뻐하는 반면에 성령이 오지 않은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아니야, 아니야, 율법노선 유지해야 돼!” 이리 되거든요. 그런 사람들이 주장하는 구절이 뭐냐 하면, 성령이 오고 난 뒤에는 온 율법을 새삼스럽게 터벅, 터벅 이 길로 가야 되는 거예요. 제가 하는 말 간단한 건 그거에요. 1노선인지, 2노선인지는 간단해요. 뭐냐 하면, 1노선은 성령을 받고 율법을 지켰다고 나서면 이 사람은 2노선에 포함되지 않아요. 십자가에서 나온 거꾸로 나온 노선이 아니고 예수님과 연관된 완성된 100% 구원된 노선이 아니고 그냥 80% 지가 해보는 대로 해보겠다는 지옥 가는 노선을 터벅 터벅 가고 있는 거예요. 1번 노선으로 해석하는 겁니다.  ‘자, 성령 받았고 예수 믿었으니까 이제는 서서히 온유와 화평으로 성령의 열매를 한 번 맺어볼까?’ 이리 나오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한 번 봅시다. 여러분들이 놓치면 안 되는 중요한 구절 나옵니다. 갈라디아서5장 6절을 크게 한 번 읽어보세요. 굉장히 중요한 구절인데 사람들이 그냥 놓치는 경우가 많아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


사랑으로 역사하지요. 그것도 무슨 안에서? 예수 안에서. 100% 한라산 가기로 확정됐지요. 그것이 사랑이라는 거예요. 사랑은 뭡니까? 율법을 온전히 이룬 것을 상태를 가지고 뭐라고 합니까? 사랑이죠. 사랑은 용서받음이죠. 긍휼 받음 이죠. 용서를 지금 받고 있는 상태에서 믿음의 행함은 뭡니까? 받은 사랑을 퍼트리는 거예요. 나 이렇게 죄인인데도 뭘 받았다? “나는 이렇게 용서를 받았어요.” 라고 터트리면 그게 믿음의 합당한 행함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 안하고 1번 노선에 선 사람은 내가 성령을 받았으니까 내가 율법을 지키는 고 믿음에 해당되는 믿음으로 향한 행함이 되어야 야고보서2장에 나오는 그 믿음과 일치가 된다고 주장하는 거예요.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그래서 그들은 계속 믿음 받아 놓고도 계속 행함으로 나가는 거예요. 그런데 갈라디아서 5장 6절 뭡니까? 뭐로 해야 된다? 사랑으로. 사랑으로 일하는 겁니다. 사랑의 일이 나의 일이 아니고 나를 사랑한 그 사랑이 사랑으로 나타나는 그 행함이 바로 믿음에 합당한 믿음의 성령의 열매가 되는 겁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울면서 예수님 발에 향수를 뿌릴 때, 그대로 우리가 행할까요? 막달아 마리아의 향수를 사가지고 우리도 발 앞에 뿌리고 그 앞에서 울까요? 그러면 그게 뭐가 돼요? 모방에 대한 법이 돼버리죠.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가 하는 말이 “아저씨?” “왜?” 나는 그대로 하라는 게 아니고 연출하려고 한 것이 아니고 나는 내가 있는 형편상 받은 사랑을 그렇게 표현했지요. 받은 사랑을. 받은 사랑을 표현했는데 당신은 그 사랑을 흉내를 내는 거예요. 그러면 막달라 마리아는 니 방식대로 하라는 말이에요. 그러면 나는 내 방식으로 주께 있잖아요. 그럼 내 식대로 뭘 보여줍니까? “나, 이래서 용서받았습니다.” 내놓으면 누가, 누가 그걸 지적질해요.  그게 사랑인데.

안식 지키고 율법 지켜라, 누가 그걸 자꾸 지적하도록 우리가 왜 허용합니까? 안식일 지켰냐? 그걸 왜 남의 일을 간섭을 해요. 내 간섭을. 니나 알아서 잘하지. 나는 내가 알아서 잘 할 테니까. 내가 이래서 용서받았다는 것을 표현하는데 누가 개입합니까?  니 사정하고 내 사정 다른데.

히브리서7장에서 제가 어렵다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율법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잖아요. 왜 어려운가 질문을 통해서 할게요. 아무것도 온전치 못한데 왜 주었지요? 하나님이 주신 건 다 선하지요. 다 선한 것이 왔으면 우리가 선하잖아요. 온전하잖아요. 선하다는 것은 온전하다는 거예요. 왜 온전치 않다고 하는 이유가 뭐예요? 왜 이랬다 저랬다 하는 거냐구요. 로마서7장에서는 율법도 선하다 하잖아요. 여기는 온전치 않다 했다 말이죠. 앞뒤가 안 맞잖아요. 안 맞는데 로마서 믿을까요? 히브리서 믿을까요? 골라서 믿을까요? 둘 다 믿지 말까요? 이런 질문에 답변하기가 굉장히 난처해지는 겁니다.

그런데 뭐라고 합니까? 율법이 온전치 않다고 표현하는 그 지점이 어느 지점인가 하면, 2번 지점 내가 있는 지점이 아니고 주 예수 안에서, 주님 안에 있는 지점 같으면 더 이상 율법의 기능은 필요 없기 때문에 지금도 율법이 있어야 되는 거예요. 왜? 예수님 노선 자체가 계속 2번 노선이 있는 한 1번 노선도 같이 나란히 가야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 표현력이 이것밖에 안 되서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필요 없으면 지금도 필요 없어야 되는데 지금도 권면 있고 사도바울이 쓴 성경책이 전부다 권면이고 교훈이에요. 하라, 하지마라, 계속 연발 나옵니다. 용서받았나? 용서해야지. 새사람 입어라, 술 취하지 말라, 명령이에요. 명령. 니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라, 수시로 기도하라, 그리고 어려운 사람을 돌보라, 이건 할 게 율법으로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왜 그런 말을 하느냐 하면, 지금 이 세상이 멸망 안 당했잖아요. 이 세상이 지금 아직까지 천국, 지옥으로 완전히 갈라지지 않았잖아요. 지옥 갈 사람들이 남아있으니까 거기에 병행해서 천국 가는 노선에 같은 율법을 주고 생각지 못한 차이점을 구원받는 사람만 성령 안에서 그걸 알고 지옥 갈 사람들은 그걸 이야기해도 당체 못 알아먹는다는 겁니다.

그 못 알아먹을 때, 구별됨의 의미, 용서받은 효과가 얼마나 놀라운 줄을 너희들이 주께 찬양하라 이 말입니다. 나도 저 사람과 똑같은 인간이에요. 역시 나도 못 알아들을 인간이고 나도 알아들을 수도 없고 나도 욕할 필요 없고 나도 정신없을 때보면 매일같이 이 길을 가요. “이번에 일이 잘못된 것은 죄를 지어서 그렇구나, 주여 용서해주세요.” 매일 이 길로 간다고요. 이게 선악구조에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주님의 노선 보니까 그게 감사하라고 주신 노선인 것을 내가 사랑을 깜박, 깜박 잊어버려서, 사랑은 잊어버리고 성과만 따진 겁니다. ‘내가 이렇게 착하면 주께서 잘했다고 보너스 줄 거고 그 보너스 챙기면 옆 사람은 없는데 나는 있고 그럼 나는 믿음 좋은 사람으로 확인되고.’ 우리가 전에 했던 생각이 만날 살아나요. 날마다 육신은 죽이고 날마다 주께서는 영은 살리고 하는 작업이 십자가에서 이루어지는 걸 미처 모르고 주님 간섭하지 마시고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다시 이러한 세월을 우리를 반복을 통해서 주님의 십자가만 높이라고 이런 과정을 주신 거예요.

정리하면 멜기세덱의 반차는 분명히 없습니다. 없는데 지금 이 세상에 역사라는 게 있기 때문에 역사가 있는 한 그걸 비교해서 멜기세덱 반차가 동행하는 것으로 성경에서는 그렇게 묘사되고 있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역사밖에 없고 족보밖에 없어요. 족보밖에 없고 족보는 항상 미흡의 것이고 미완성이고 결핍을 낳고 모자람을 느끼고 갈 때까지 가보자는 식이에요.

그런데 이미 다 이루었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과 병행하면서 성령 안에서만 그것이 비로소 새롭게 느껴지도록 짝을 맞추어서 우리를 데리고 가면서 “나, 구원받았다!” 를 증거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이것밖에 안 되는 나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고 사랑하셨습니다.” 를 증거 하라고 마귀하고 싸워 이기라고 우리에게 이 말씀주신 거예요.

히브리서의 율법의 온전치 못한 이유를 알겠지요. 율법 자체를 두고 하는 것이 아니고 뭐와 비교한다? 이미 다 이루었다 함을 이미 도달지점에서 볼 때, 온전치 않은 것을 이미 쫙 깔아놓은 거예요. 마치 그게 온전한 것처럼 여기면서 자기 스스로 율법 지켜서 구원받겠다는 모든 시도가 그리스도의 방향과 다른 방향인 것을 쫙 보여주면서 “너도 그쪽 방향이었었었어.” 하지만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신 믿음으로 그 쪽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면서 그리스도를 증거케 하는 거예요.

이것은 그냥 제가 논리로 이야기했지만 11장에 보게 되면, 믿음의 조상들이 죽 나오지요. 11장에 대한 설교한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닙니다. 목사님치고 이것 설교 해가지고 석달간, 넉달간 설교제목 찾는데 힘들지 않고 그냥 때우려고 하는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니거든요. 목사님들이 되게 힘든 게 뭐냐 하면, 설교거리입니다. 그런데 이런 히브리서 강의해 버리면 적어도 3개월 정도는 충분히 그냥 때울 수가 있어요. 그러다보니까 히브리서11장에 대한 내용의 설교집이 유명한 목사치고 안 나온 게 없어요. 박선희 부터해서 많이 나와요. 거기서 그들이 이야기하는 게 뭐냐 하면, 믿음 이야기한다고요. 그러니까 이게 엉터리 되는 거예요.

왜냐 하면, 분명히 히브리서11장하기 전에 무슨 이야기해야 돼요. 히브리서7장, 8장 나와야 된다고요. 그러면 이 믿음은 뭡니까? 결국 해석에 의하면 사랑이죠. 사랑 안에 먼저 있기 때문에 그 뒤 소급해서 보니까 믿음에 합당한 행함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믿음에 합당한 행함을 행하면 그게 사랑에 도달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는 거예요. 그건 율법적 설침이 돼요. 율법적 설침이.

자, 믿음이 있다. 그 다음에 유지해야지. 이것은 믿음 자체가 율법 기능화 되어 버렸어요. 믿어라, 하는 게 그만 법이 되고 버렸어요. 믿어라, 하는 것은 법이 아니거든요. 선물인데 아니 선물을 가지고 새삼스럽게 선물에다가 장식내면 안되잖아요. 필요 없잖아요. 받은 걸로 감사해야 될 건데 그것가지고 거기다가 꽃 달고 리본 달면 선물 준 사람이 와서 다 떼라 하잖아요.

그래서 히브리서11장의 믿음은 바로 떼어내는 작업이에요. 고걸 뭐냐, 믿음의 본체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 시대에서 어떻게 장식되느냐 하면 믿는 사람 본인부터 그 시대 사람들도 아무도 예상 못한 거예요. 노아가 방주 만들었지요. 그 다음 사람 방주 만들면 믿음입니까? 아닙니까?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흉내 내서 연출해서 구원받는 식을 방법을 일체 사용하지 않습니다. 왜? 인간 자체가 역사의 과거에서 현재 미래로 나가는 방식이기 때문에 ‘과거사는 뭐했더라? 나도 그대로 해야지.’ 그리되는 겁니다.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사울 왕이 전쟁할 때, 제일먼저 뭐했지요? 제사 드려야 한다 했지요. 제사드릴 때 사무엘이 왔습니까? 안 왔습니까? 안 왔지요. 제사해야 승리한다는 그 방법은 어디서 배운 거예요? 전에 사무엘과 함께 있을 때 사무엘이 금식 드리니까 전쟁에 승리했잖아요. 그걸 누가 봤어요? 사울이 봤지요. 이미 과거사잖아요. 과거사인데 또 전쟁이 일어났잖아요. 그러면 자기가 아는 기껏 한 게 뭐냐, 제사했더니만 승리했잖아요. 그럼 기껏 한 방법은 뭡니까? 제사 드리면 승리할 거란 예상이죠. 그게 인간이에요.

그래서 성경은 니가 인간이라고 우기기 때문에 그게 레위지파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 인간이 아닌 거예요. 인간이라고 우기기 때문에 인간이 아닌 거예요. 사무엘이 와야 제사 드려야 되는 겁니다. 잡으니까 원단이 찢어졌잖아요. 그래서 나라가 둘로 쪼개지지요. 자, 그 다음에 문제 드립니다. 그 다음에 왕들이 선지자 불러서 제사 드리면 승리합니까? 안 승리합니까? 승리 안 해요. 왜냐, 이미 한물지나간 거예요.

그러면 그 시대에 뭐냐, 새롭게 주께서 십자가에서 주신 그 방식이 또 있어요. 그게 바로 ‘믿음’이에요. 믿음은 했던 것은 두 번 다시 써먹지 않는 거예요. 그러니까 날마다 주님께 몸을 드려야지 “아이고, 주님 압니다. 매일 이런 식으로 해서 써먹는 거 압니다.” 앞자리에 앉으니까 은혜 받으니까 매일 앞자리에 앉는 거예요. 찬송가 405장부를 때 은혜 받았지요? 두 번 다시 불러보세요. 은혜 왔는가. 안 오지요. 그게 바로 ‘우연성’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우연성과 우연성의 연결로 인생을 살게 해요. 매일같이 우발성이고 우연성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그걸 저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우리 자신이 하나의 사건화 된다. 주께서는 날마다 하나의 사건화 시켜버리는 작업을 합니다. 그게 바로 믿음이에요. 내가 살아있다는 자체가 예수님이 일으킨 사건으로 보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 생각 못하고 ‘어제도 있듯이 오늘도 있군요.’ 그리 생각하거든요. 어제, 오늘 잘라버리고 “주께서 오늘 있게 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하셨습니다. 매일같이 주께서 있게 하실 때 있습니다.” “전에도 걸었기 때문에 오늘도 걷습니다.“가 아니라 ”주께서 걷게 하셨고 지금도 걷게 하십니다.“ 전에도 머리카락 자라게 하셨고 오늘도 오늘분의 머리카락을 자라게 하십니다. 그래서 매일같이 주님이란 현재와 같이 혜택 입으면서 같이 동행한다는 의미가 그리스도 안이 되는 거예요. 그리스도 안.

아, 참 이게 조금만 우리가 역사를 주장한다면 우연성이 뭐로 바뀝니까? 필연성으로 바뀌어요. 우연성의 반대말이 필연성입니다. 필연성이 돼버리면 이게 우리와 함께 뭐가 돼버리는가 하면, 우상이 돼요. 빗나간 믿음이 되어버려요. 그러면 내가 주님을 믿는다 하는 것이 믿음의 대상이 되어버려요.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고 내가 믿었던 나를 믿어버리면 나는 나를 경배하게 되고 나를 좋아하고 나를 사랑하고 나를 섬기게 되고 나를 귀히 여기게 되고 내가 신앙의 대상이 되어버려요. ‘나 건드리기만 해봐라.’ 이리 된다고요. 그래서 주께서는 매일 우리로 하여금 죄인 만들어서 내가 나를 못 믿을 입장이 되게 만드는 작업을 합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남는 게 뭐냐, 남는 건 우리의 육신이 남아요.

그 다음에 봅시다. 23절 보세요. “저희 제사장 된 자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을 인하여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 그럼 제사장들이 제사를 드릴 때, 그 제사 행위가 결국 자기로 하여금 뭐로 이끌게 만들었다? 죽음으로 이끈 거죠. 그러니 제사장이 제사를 드린 게 아니고 죽음이 제사를 드린 겁니다. 제사장은 그걸 알았으면 참 좋았겠는데 알았으면 구원받지요.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연결시키라고 나로 하여금 죽어야 될 내가 죽음과 관련된 일을 한다고 했다면 그야말로 아브라함이 예수님 보기를 기뻐한 것처럼 그 제사장은 제사하면서 제사한 자기를 믿지 않고 누구를 보겠어요? 장차 이렇게 죽을 내가, 죽게 하시는 그 분이 오실 거라고 연결시키겠지요.

그래서 베드로전서1장에 보면 그리스도의 영이 미리 앞서서 마중을 나간 거예요. 구약 선지자들에게. 예레미야 이런 사람에게. 지금은 주의 영이 우리에게 온다면 우리가 아침에 설거지할 때 죽을 내가 설거지하면서 ‘예수님의 죽음을 생각하라고 이 일을 작업을 하는구나!’ 테니스 치면서 죽으라고 하잖아요. 죽으라고 치세요. 죽을 내가 지금 테니스 치면서 그리스도를 생각하라고 이걸 하게 하시는 거예요. 언제? 만만한 대상이라고 생각해서 10만원 걸고 했는데 분명히 내가 이겼는데 마지막 연달아 5개 이겨가지고 내 뜻대로 안 될 때, “주여, 저로 하여금 왜 이렇게 낭패하게 하십니까?” ‘아, 내가 내 꿈을 펼치는 것에 대해서 주께서 개입하셨구나!’ 내기 했는데 내가 바로 100%이겼다고 생각했는데 낭패했을 때입니다.

분명히 저 사람 다음 주 나오기로 약속하고 등록 다 했는데 그 다음 주 그 교인 다른 교회 등록했을 때, 결국 그동안 그 분이 올 때까지 기다린 것은 뭡니까? 죽을 내가 아니고 살아서 내 성과를 목격해야 될 대상자로 내가 이 만큼 나한테 괜찮은 대상자로 봤는데 그 분이 안 오므로 말미암아 나는 죽어 마땅한 것을 그동안 잊어버린 게 돼요.

주께서 보내줘야 오는데 우리는 내가 한 교인 건졌다고 여길 때, 이게 바로 죽어 마땅한 죄인이 되고 그것마저 사랑으로 용서를 해줬을 때, ‘주여, 이것밖에 안 되는, 말도 안 되는, 자기만 생각하는, 이런 인간 나 같은 강도도 십자가로 구원해 줄 때 다시 한 번 노선이 율법노선이 아니고 미흡의 노선이 아니고 완성된 노선인 것을 깨닫게 해 주는 은혜가 바로 온다해 놓고 안 올 때 사람 환장하는데 깨달아 보니까 ’아, 그것이 은혜인 것을.‘ 하고 감사하면서 눈물 흘릴 때, 문을 똑똑해가지고 ’사실은 등록한 게 아니고 일단 잠시 갔어요.‘ 하고 올 때 안 온다고 여겼는데 올 때 그거 누구의 은혜입니까? 나는 끊어져버리고 누구와 연결 돼있다? 주님의 뜻으로 오신 분이 되는 거예요. 

목회 안 한 사람은 몰라요. 환장할 이 짓을. 홍해 건너갈 때 물 갈라져야 간다고 생각했는데 요단강 건너갈 때 “가만히 있어, 물 갈라지면 건너가자.” 절대로 안 갈라져요. 이게 바로 우리의 일상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참 어려운 대목 어려운 말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간단했습니다.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 그거였습니다. 믿는다고 자부합니다. 하지만 실제 생활에서 진짜 십자가와 동행하는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