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140110b-히6장19절(존재의 힘) - 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이름의 힘이라 할 때, 힘과 이름, 관련성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한데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할 때, 이게 보통 어려운 말씀이 아닌 게 왜 그러느냐 하면,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할례는 마음에 받아야 할례지 육신으로 받는 할례는 소용없다 했지요. 그러면 여기서 문제가 생겨요. 마음에 할례를 받고 거기다가 추가해서 이름을 불러야 구원받습니까? 아니면 마음에 할례는 안 받고 주의 이름을 불러야 구원받습니까?
구원받는 조건에서 마음에 할례를 받으라가 들어가 버리면 누가 밀리게 돼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가 밀리게 돼버리지요. 이 의문점을 어떻게 해결할 거예요. 마음에 할례를 받아야 참된 구원받은 자라고 했을 때, 마음에 할례를 받으려고 애써버리면 우리가 다시 어디로 돌아가는 겁니까? 옛날 유대교로 되돌아가는 거죠.
차라리 사도바울이 마음에 할례 같은 거 필요 없어. 예수만 믿어. 이러면 차라리 편하겠는데. 마음에 할례를 받으라, 로마서10장13절에서는 주의 이름을 불러라, 이렇게 하니까 우리는 갑자기 할 게 너무 많아지는 거예요. 그래서 한국교회에서는 뭐냐, 개혁주의에서는 예수 이름을 일단 부르고 난 뒤에 그것 가지고는 모자라다는 거예요. 그것도 모자라고 그 다음에 돈을 사랑하지 않아야 되고 나그네 대접해야 되고 교회 봉사도 해야 되고 돈도 내야 되고 여러 가지 해가지고 이렇게 해야 구원을 받든지 상급을 받든지 보너스를 받든지 이리 받는다는 거예요.
왜 그렇게 마음에 할례를 받으라, 주의 이름을 불러라, 이 말을 하는 사도의 이유가 뭐냐 하면, 이름이라는 게 우리에게는 이름이 없어요. 우리한테 이름이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이름이 주어지는 겁니다. 왜냐 하면, 이름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뒤에 뭐가 붙느냐 하면, 이름의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이름은 살리는 능력이 아니고 죽는 쪽으로 가게 만들어요. 우리의 이름이. 그 이름이 무슨 이름이냐 하면, 바로 ‘아담’입니다. 아담. 아담이름 제가 지었습니까? 여러분이 지었습니까? 누가 지었지요? 창세기에서는 아담이름을 하나님이 지었다고 했잖아요. 이번 대전강의에서는 그걸 세척해버리면, 누가 지었는가 하면, 예수님이 짓게 되었어요. 창세기에서는 하나님이 창조했지요. 창세기 세척을 해버리면, 예수님이 천지를 창조한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한 것은 그것은 옳지 않은 생각이 돼버립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성경이 주어진 이상은 성경은 고상한 그냥 중립에 있는 아무 탈이 없는 우리에게 성경을 준 게 아니고 우리에게는 이미 다른 힘이 있어요. 다른 힘. 무슨 힘? 악마의 힘. 다른 악마의 힘에 의해서 우글거리고 있는 입장에서 성경을 줬기 때문에 성경을 준 것은 우리로 하여금 성경을 지켜라가 아니라 니 속에 있는 니 힘이 너를 앞장세우게 하라, 니가 나서지 말고 니를 장악하고 니를 조정했던 힘이 너를 앞장세우고 니는 뒤로 빠져라, 이 말입니다.
바리새인보고 주께서 하신 말이 “너희 아비는 마귀다.” 했을 때에 “내가 너하고 상대하는 게 아니야.” “바리새인인 너하고 상대하는 게 아니야.” “빨리 너 배후, 너를 장악했던 그 배후 빨리 나오라 해! 빨리 나와!” 고 내용이 반복되는 사건화 될 때 그게 요한계시록이에요. 주님께서는 요한계시록은 누구하고 상대합니까?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하고 상대하잖아요. 우리는 빠지면 돼요.
두 번째 시간은 의외로 간단한 겁니다. 우리가 스스로 힘을 쓰지 마세요. 자기한테 힘주지 마시고 “우리는 힘없습니다.” 하고 뒤로 빠지면 돼요. 빠지면 우리를 앞장세우고 숨어있던 그것이 “빠지기는 뭘 빠져!” 하고 우리를 쥐고 십자가하고 정면대결에 나서면 우리가 사전에 미처 몰랐던 나보다 더 힘센 내가 나를 장악하고 있다는 힘이 나를 데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과 대치하는 그러한 상황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방금 이야기한 거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①②③으로 해볼게요. ①신이 있다. ②신이 없다. ③신은 무의미하다. 성경을 보면서 지금 우리가 오늘 히브리서6장20절하려고 하는데, 20절하면서 지금 약속에서 20절 넘어오는 그 과정을 설명하는 겁니다. 할 때, 우리는 항상 이 성경을 보면서 ‘꼭 이걸 봐야 돼?’'안 봐도 생활에 지장 없잖아!’ 라고 할 수가 있어요.
우리가 성경을 늘 보면서도 ‘참 지금 뭐 부엌에 내가 주전자에 물 얹어 놨지.‘ 그렇게 생각할 때 지금 물 얹어놓은 게 더 중요해요. 성경보다. 물 얹어놓은 것은 현실이고 성경 보는 것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그만인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신은 우리 일상에서 무의미한 거예요. 무의미한 것에서 신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이리 되는 겁니다.
따라서 성경을 해석할 때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하면, 신이 없다, 로부터 출발해야 나의 실상이 드러나는 겁니다. 신이 없다면 이 성경도 볼 필요도 없는 거죠. 그게 우리 몸에 맞아요. 보다가 안 봐도 되는 이유가 신은 애초부터 없기 때문에 요 성경은 신이 있다고 우기는 사람이 지은 소설이기 때문에 없는데 그 애들이 뭐라고 하는지 보자. 완전히 마르다예요.
신은 원래 없는데 혹시나 그들이 하는 소리에 있을 수 있다 해서 보는 거 이렇게 볼 때, 해석을 할 때, 신은 네가 아무리 있다고 해도 신은 없는 거야, 라는 마음을 가지고 성경을 봐야 됩니다. 그 증거가 7장 3절에 봅시다.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없다가 몇 개있어요? 5개 있지요. 없는데 이름이 뭐냐, 멜기세덱이죠. 이름의 힘입니다.
왜 자꾸 없다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보고 하는 거예요. 너희들이 아무리 성경을 봐도 너는 하나님이 없다고 여기면서 성경을 그냥 건성건성 보잖아. 따라서 내 쪽에서 너희에게 다가갈 때도 너희들이 아무리 잡아도 없이 보이는 사람을 내가 앞장세우겠다는 겁니다. 없이 보이는 사람들.
그러면 우리는 있어야 믿잖아요. 그런데 하나님 쪽에서 제시하는 것이 없는 분을 가지고 믿어라, 할 때 우리는 믿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그러면 하나님이 없다고 여기는 사람이 기껏 혹시 있을까 잡는 방법이 뭐냐, 있는 사람들을 봐요. 나도 아브라함처럼 되어볼까, 다윗처럼 되어볼까, 전부다 있는 사람이잖아요. 있는 사람을 다윗처럼 될래, 나는 예수님처럼 될래, 사도바울처럼 될래, 라고 한 것은 결국은 멜기세덱의 의미를 나는 안 믿겠어. 하는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죠.
정작 믿음은 없으면서도 누굴 본받음으로 말미암아 나도 믿는 대열에 합류했다고 함으로서 만약에 신이 있을 때를 대비해서 보험하나 들어놓는 거예요. 히브리서11장 미리 한 번 봅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지요. 그러면 여기에 나오는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 모든 사람은 보이는 걸 봤다는 말입니까? 보이지 않는 걸 봤다는 말입니까? 보이지 않는 걸 봤지요. 이게 일반상식에서는 안 통한다 말이지요.
일반상식에서는 내가 여기 있음에 내가 있기 때문에 내가 평소에 여기 있는 것을 보는 그 방식으로 어디 있는 것을 내가 잡는 방식으로 내 소유화시키고 믿으려한다 말이죠. 하나님이 있으면 눈으로 보여주세요. 믿지 말래도 믿겠습니다. 하나님을 자꾸 믿으려고 하는데 나타나지는 않고 나보고 보이지 않는 것을 믿으라고 하는 것은 억지입니다. 나보고 더 어떡하라고? 어쩌라고? 보여줘.
제가 아주 젊을 때 본 영화가운데 ‘사랑과 영혼’이란 고스트 영화가 있었어요. 데미무어가 나와 가지고 도자기 굽고 하는 유명한 노래가 나오지요. 사랑과 영혼을 하면서 영혼은 있다. 죽고 난 뒤에 데미무어의 사랑하는 사람이 천국 가있다는 것을 표시하기 위해서 기껏 보여준 것이 동전밀기입니다. 동전밀기, 지하철 사고 직전에 구출하기, 그렇지 않으면 김 수현처럼 차가 절벽에 떨어지는데 힘을 다해서 차를 밀어내니까 전 지현을 살려내잖아요. 별에서 온 그대. 기껏 공중으로 사라졌다가 나타나는 것. 그럴 때 믿는 거예요. 야, 기적이다! 그 기적이 오늘날 기독교를 만든 거예요. 그 기적을 원하는 사람에게 기적을 말하면서 기독교를 만든 거예요. 대표적인 것이 순복음교회이고, 4가지 축복해가지고.
여러분, 그 기적을 눈에 보이도록 만들어 제공하겠습니다. 저처럼 따라 하기만 해봐라~~ 하면 방언도 터지고 병도 고치고, 부자 되고,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 하면 안되는 게 없고, 그거 바로 마귀가 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잡혔다 하면 도망쳐버립니다. 절대로 봤기 때문에 믿겠습니다. 하는 소리가 두 번 다시 안 나오게 만들어요. 볼 수 있는 것은 다 치워버려요. 내가 믿을만한 기적 같은 것은 다 치워버립니다. 이래도 믿을래? 이래도 너 믿는 거야? 안 믿는다고 자백해. 나는 믿지 않았다. 자백하란 말이야. 아이고, 아직도 성질 살아있네. 계속 믿을 수 있는 것 다 치워버려요. 남편이 교회 다니는 게 주의 기적이라고? 기도의 응답이라고? 다음 주에 남편 교회 안 나올 거야.
일체 내가 믿었기 때문에, 기도했기 때문에 이런 응답을 얻었습니다. 이런 걸 다 치워버려요. 다 치워버리고 도대체 나는 어떤 걸 봤기에, 어떤 것이 내 뜻대로 되었기에 믿습니다. 라는 말을 일체 하지 못하도록 하는 거예요. 왜? 우리 배후에는 뭐가 있기 때문에? 마귀가 있기 때문에. 나는 니하고 상대 안 해. 마귀가 무엇을 제거하고 싶은가 하면, 반복된 십자가의 사건을 흐지부지하는 걸로 계속해서 마귀는 갑니다.
왜냐 하면, 십자가에 의하면 이미 마귀는 결정 났어요. 이건 확정됐습니다. 유황불 들어가는 게 확정됐기 때문에 마귀가 남은 할 일은 마귀가 베드로보고 밀 까부르듯 베드로를 찾아온 이유가 자기는 확정되었고 주님의 사랑하는 자들을 빼내어서 독수리같이 우는 사자같이 빼내어서 자기 지옥에다가 혼자는 못 죽겠다는 거예요. 혼자는 못 죽겠다. 같이 당하자. 하고 하나님의 사람을 집어넣게 하는데 그 작업방법이 뭐냐 하면, 성도로 하여금 보고 믿게 하고 기적 받아서 그것을 근거로 믿는 것, 보이지 않는 십자가 능력 말고 다른 걸로 십자가를 대체함으로서 지옥백성 되게 하는 그 작업을 하는 겁니다.
대표적으로 십자가를 대체하는 게 뭐냐 하면, 교회 부흥되기, 선교사 많이 보내기, 교회 헌금 늘어나기, 교인 수 늘어나기, 사람이 십일조가 왜 죄가 되는가 하면, 십일조가 그냥 공중으로 날아가게 되면 사람은 그나마 십일조를 안 해요. 그런데 마귀가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자기 믿는 척하는 것이 들통 안 날까봐 싶어서 십일조가 모아서 결국 교회 부흥으로 이어지게 만듭니다.
그러니 사람은 자기가 행한 것을 잊지를 못해요. 자기가 하나님께 드린 것을 잊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제가 분명히 사도행전17장에서 수십 번 언급했지만, 다시 언급하지만, 하나님은 절대로 사람에게 안 받습니다. 일체 안 받아요. 골프 회원권도 안 받고, 돈도 안 받습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시기 바쁘기 때문에, 친히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지 받아 챙기는 분이 아니에요. 받았으면 뻔뻔스럽게 지밖에 몰라. 내놔! 이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주시는데, 백합도 키우고 안 믿는 사람에게도 햇빛, 공기 다 주시는데, 제일 마지막에 주신 게 뭐냐 하면, 자기 아들의 피를 주시는 거예요. 피를 줬다는 말은 더 이상 너희에게 안 받겠다는 뜻이에요. 원래 죄 용서하는 제사가 있었어요. 옛날에는. 속죄제, 번제 있는데 히브리서10장18절에 보면 나오지요.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 더 이상 죄를 씻어주는 제사가 이제는 없는 거예요. 이 말은 안 받겠다는 뜻이에요. 받아서 용서하는 그러한 거래와 흥정은 이미 안하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안 받겠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구원해 달라고 할 때 구원할 의무가 있다? 없다? 없어요. 없고 누가 구원되고 안 되고는 어느 누구도 받아 챙기지 않았기 때문에 구원 되고 안 되고 권한은 누구한테 있는 겁니까? 주님 자기 마음대로에요. 이게 믿어져야 돼요. 에서는 미워하기로 작정하고 야곱은 구원하기로 했으면 그것은 주님의 고유권한인데 거기에 왜 시비를 겁니까? 마귀가 시비를 걸지요. 마귀가.
하나님 그러면 공평치 못합니다. 그럴 때 사도바울이 누가 감히 토기가 토기장이를 힐난하느냐, 어떻게 그것이 부정하다고 감히 이야기하느냐, 내가 사랑받기로 작정된 자는 따로 만들고 미움 받기로 작정된 자를 따로 만드는 권한이 없겠느냐,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권한이 있습니다. 그걸 알면 그 입 다물라.
구원은 그냥 할당제입니다. 그냥 주시는 거예요. 그냥 공짜로 주시는 거예요. 주시고 그 다음에 낚아채는 거예요. 주시고 난 뒤에 따로 사는 게 아니고 줘놓고는 그걸 몽땅 하나님의 공짜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인으로서 평생을 이제는 굴리시는 겁니다. “나 구원 공짜로 받았다!” 이 소리 하라고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 내세우는 겁니다.
십일조 한 적도 없고 십일조 원래 한 적이 없어요. 왜냐 하면, 돈 내는 것도 주께서 주셔서 돈 내는 것이기 때문에 십일조 한 적이 없어요. 내가 주일성수, 교회 간적도 없고 교회 간적도 없어요. 주께서 교회가게 했기 때문에. 내 의지로 가게 한 적은 없습니다. 모든 내가 사는 것은 주께서 지금 허락하셔서 사는 것이다, 라는 것을 증거 하게 만드는 겁니다.
자, 멜기세덱 봅시다. 멜기세덱에 대해서는 이게 얼마나 어려운지 여기 5장12절에 보면,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상당히 보통 어려운 게 아니라는 것을 미리 낌새를 주시고 그 다음에 나온 이야기가 멜기세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멜기세덱에 관한 이야기는 너무나 어렵다는 이야기가 히브리서 5장11절에 미리 언지를 해놨지요. 멜기세덱에 관해서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이 어렵습니까? 쉽습니까? 해석이 어렵지요. 과연 어느 정도 어려운지 요번 시간에 해봅시다.
벌써 어려운거 했어요. 멜기세덱에 없다가 5번 들어가지요. 없다가 한 개만 들어가도 없는 존재인데, 멜기세덱은 5개나 들어가요. 멜기세덱은 우리 세계에 있는 존재입니까? 없는 존재입니까? 없는 존재가 됐어요. 그러면 해석을 어렵게 하겠습니다.
인간들이 이렇게 모여 있으면 인간들은 하나하나가, 멜기세덱에서는 없다고 되어 있지요. 없다고 되어있으니까 우리가 멜기세덱을 해석하려면 뭐부터 출발해야 되는가 하면 있다 부터 해야 돼요. 있다 부터 출발해서 있다가 없다 로 바뀌지 아니하면 멜기세덱 해석 못하게 됩니다. 있다가 없다 로.
그러면 있다는 것은 뭐냐 하면, 그냥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되잖아요. 뭐가 붙어요. 무엇 무엇이 있다가 돼요. 책상이 있다. 책상이 있다할 때 “야, 여기 있다! 있네.”하고 좋아하는 사람 없어요. 뭐라고 좋아하는가 하면, 책상보고 좋아하지 “야, 있음이 여기 있네.”하고 좋아할 사람 없잖아요. 그러니까 우리의 해석에서는 곤란한 거예요. “멜기세덱이 어디 있어? 믿어야지.” 우리는 보통 이리 나오잖아요. 그리 나오면 안 된다니까요. 그럼 해석이 쉬운 해석이 되어버려요.
멜기세덱이 없다. 없다가 중요한 거예요. 없다가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왜냐 하면, 예수님은 사라져야 되니까. 이건 주일 낮에 이야기했어요. 예수님은 주가 되시기 위해서 있다가 없어졌어요. 사라졌어요. 있다가 사라졌기 때문에 예수님이 다시 나타난 것은 그냥 있음으로 오신 게 아니고 사라지신 분이 오신 거예요.
그래야 예수님은 주님이 돼요. 우리와 같이 낚시하시고 하면 주님이 아니에요. 같이 계시다가 홀연히 사라져버려야 돼요. 사라지고 난 뒤에도 주님이 안돼요. 사라지고 난 뒤에 사라짐을 내용으로 해서 우리에게 나타나버려야 돼요. 그러면 우리가 주님 쪽으로 다가갈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여기 없다 또 나와요. 없어요.
이미 우리는 그 분을 사라지게 만든 원인제공자가 됐기 때문에 아무리 추적해도 주님을 찾을 수 없게 돼있어요. 그걸 미리 보여주기 위해서 두 사람이 나와요. 하나는 모세, 다른 또 한 사람은 엘리야, 엘리야 같은 경우 봅시다.
엘리야가 엘리사와 함께 있었습니다. 우리는 잠시 수사반장 됐습니다. 형사인데 지금 모세 부인이 지금 신고 들어왔어요. 남편이 사라졌다는 거예요. 남편이 사라졌을 때 어떻게 합니까? 개구리소년 어떻게 했습니까? 경찰, 의경대 삼천 명 동원했잖아요. 수사경찰서에서 수사과가 동원되어야 되지요. 그게 바로 있음이 통하는 이 세계의 상식입니다. 우리는 이 세계에 못 빠져나와요. 누가 실종됐으면 찾아나서야 되잖아요.
지금 선지생도가 수사 신고 들어왔어요. 우리 선생님 엘이야 찾아달라고 1월6일자로 신고 들어왔어요. 그래서 지금 수사과에서 찾았는데. 72시간 동안 찾았습니까? 열왕기하2장17절입니다. 못 찾았지요. 그 수사과 형사들 가운데서 “아하, 반장님” “왜?” “그 엘리야 구름타고 불말 타고 하늘나라로 올라갔습니다.” 이리 이야기하면 사표내야 돼요. 그것은 만화에 나오는 무협소설에 나오는 이야기지 이 세상 있음의 세상에서는 고런 말 안하기! 우리끼리 있을 때는 그런 말 안하기! 그것은 바보 되기! 바보지요.
엘리야가 불 수레 타고 시체 없이 갔다는 것을 누가 먼저 이야기했습니까? 함께 있던 엘리사가 먼저 언급했지요. 그럼 엘리사는 뭡니까? 이 쪽 세계에서 바보지요. 예수님이, 사람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날 수 있습니까? 못 살아나지요. 그 거 이야기하는 사도들, 바보. 그 말을 듣는 사람도 바보, 성령을 통해서 그걸 믿는 사람들, 바보.
그러니까 오늘날 교회는 바보가 안 되어야 부흥됩니다. 예수 믿고 부자 되어야 교회가 부흥되거든요. 병이 나아야 돼요. 죽은 엘리야가 찾아와서 뭐할 건데? 이미 죽은 예수 찾아서 뭐할 건데? 막상 지금 내가 믿을 수 있는 것을 제공해줘야 그 교회가 부흥돼요. 방언 해보시라고. 터지는가, 안 터지는가. 터지거든요. 졸면서 할렐루야 1000번 해보세요. 터지게 돼있다니까요. 루루랄라 터지게 돼있어요.
실제로 뭔가 믿을만한 증거, 병 고친다든지 기도해서 병이 낫다든지 어떻든 뭔가 업적과 실적이 있을 때 그 실적으로 말미암아 내가 믿는 자 맞구나! 하는 것이 확신들 때 비로소 우리는 그것을 신앙이라고 간주하는 있음의 세계 속에 살고 있어요. 멜기세덱의 해석이 어려운 이유가 논리가 어려워서가 아니라 우리는 우리 자신이 믿을만한 것만 믿겠다는 우리의 본성이 이미 마귀로부터 장악 당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자, 이제부터 어려운거 더 어려운거 합시다. 왜 없음과 있음을 대조시키느냐, 멜기세덱이 없다, 없다, 없다, 다섯 번하는 이유가 뭐냐,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없어진 나무가 무슨 나무입니까? 선악과나무가 없어졌지요. 그런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뭘 없앴는가 하면 생명나무를 없는 곳으로 보냈어요. 그러면 사람들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뒤에 뭐가 없어요? 생명나무가 없는 거예요.
그러면 없는 생명나무를 만들려면 어디서 만드느냐 하면, 선악과에 기초해서 생명나무를 찾아가야 돼요. 그런데 그들이 쫓겨난 이유가 뭐냐 하면, 선악과에 기초해서 생명나무를 따먹을까 싶어서 하나님께서 그걸 의도적으로 추방을 시켜놨잖아요. 추방시켜 놓고 난 본성이 뭐냐 하면, 우리가 착해서 생명나무 따 먹으러 나가세. 영생 얻으러가세. 라는 그런 방식 외에는 아무런 방식이 없어요. 인간에게는. 인간의 선택은 오직 하나밖에 없어요. 착해서 착한 사람 영생 얻기! 착해서 죽어서 천국가기! 그것밖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가인의 제사가 어떤 제사입니까? 착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제사. 받은 생산물을 홀라당 자기 것으로 하지 않고 그것을 하나님께 귀한 것 드리는 그 아주 가상스러운 그 경건하심. 아주 고상하심. 아벨의 제사할 때는 아주 훌륭했지요. 아벨의 제사가 이건 장난도 아니고 완전히 제물을 완전히 난도질 쳐놨어요. 아주 깔끔하게 드리면 될 텐데. 아벨의 제사는 양을 씻어가지고 깨끗하게 리본머리에 해가지고 이렇게 드리면 되는데 아벨의 제사는 이게 제물이 아니고 쥐가 뜯어먹은 거 같아요. 피가 흥건해. 이건 사람이 봐도 영 받고 싶지 않은데 하나님이 받을 리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안 받지요.
히브리서11장에서 말하기를 아벨은 자기가 그렇게 제물을 하고 싶은 게 아니고 장차 오실 분을 증거 하라고 자기에게 어떤 암시를 줬다는 겁니다. 그 암시를 줘가지고 제물을 드렸다는 거예요. 노아가 방주 만들 때 자기의 아이디어가 아니고 오실 분이 암시를 줘가지고 방주를 그렇게 만들었다는 거예요. 그걸 베드로전서에서는 뭐냐 하면, 선지자에게는 그리스도의 영이 이미 들어가 있었다고 이리 설명하지요.
이제 어렵다는 것은 결국은 있음에서는 없음의 나라로 갈 수가 없다. 선악과에서는 생명나무 따먹을 수 없다는 원리를 하나님이 철저하게 고소를 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그래도 구원을 받은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있어요. 있는데 그 사람은 뭘 통과했는가 하면, 이걸 통과했습니다. 없음을 통과했어요.
그것에 대해서 한 번 봅시다. 7장11절 봅시다.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 (백성이 그 아래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좇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별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뇨” 라고 했지요. 이러한 문장을 오늘날 교인들이 이걸 보면서 하나님 꼭 이 말씀을 우리가 받아야 구원받습니까? 이 어려운 말을 우리에게 왜 이렇게 힘들게 하십니까? 라는 불평이 나올만해요.
이게 뭐냐 하면, 제사장이 레위지파로 분명히 시작했잖아요. 한번 시작했으면 쭉쭉 가야지 이게 무엇으로 바뀌었습니까? 레위지파로 가다가 유다지파로 바뀌었어요. 그러면 레위지파 제사장이 있어도 그게 뭐가 됩니까? 없음이 되지요. 그럼 레위지파가 구원받으려면 뭐해야 됩니까? 뭐를 경유해야 돼요?
우리가 제사 드린 거 소용없다. 뭐하는 것도 없다. 뒤에 없다. 우리 제사장 있는데 없다. 우리가 양 바쳤는데 소용없다. 없다. 반드시 없다를 경험해야 돼요. 내가 제사장 잘 먹으라고 십일조 했는데 십일조도 없다. 내가 감사헌금 한 것도 없다. 안 통하더라. 이것도 안 통해. 저것도 안 통해. 저것도 소용없어. 이것도 무용지물. 그것을 경유해야 돼요. 그것을 경유하지 않으면 별다른 지파의 존재의미를 몰라요.
내가 있잖아요. 있음에서 나온 것은 있음에 행함이 됩니다. 하나님의 있음과 엮이려고 하는 모든 시도가 탱하고 중간에 쇠줄이 끊어져야 돼요. 이 끊어지는 아픔을 여러분들은 아마 많이 경험했을 거예요. 우리 박 목사님도 자처하면 이렇게 될 수 있어요. 큰 교단에서 끊어지는 아픔. 아직까지 목사해서 끊어지는 아픔은 아니겠지만. 탱하고 끊어지는 것. 특히 여자 분들은 이혼. 뭔가 믿었던 줄이 끊어질 때 자유낙하입니다. 그야말로 그냥 어떻게 할 수 없이 그냥 막 나락으로 떨어지는 거예요. 떨어질 때는 바람 부니까 시원하지요.
떨어지면서 뭐가 걱정됩니까? 얼마나 아프겠는가. 이혼할 때는 그냥 한 소리해. 그래! 이혼하자. 그런데 조금만 지나보면 이혼했다. 한 달 인터넷 값부터 시작해서 나오는 서울에서 살려면 기본 250만원인데, 이거 누가 주나. 주는 사람 없잖아요. 그 때 뻥하고 뒤로 헤딩할 때 그 아픔. 그 아픔은 이루 말할 수 없지요. 반창고 붙일 사람도 없고. 아이고, 아프지? 해 줄 사람 없을 때 이게 뭐야? 젊었으면 돌씽이나 하겠다만. 돌씽도 안되고 늙어서. 새끼도 있고 보통 문제가 아니지요. 한 때 기분으로 갈라서! 갈라서! 니 없으면 못 사나. 기분은 좋았다마는 술 깨고 보니 완전히 뒤퉁수 때려서 정신이 없는데.
죽음보다 더 아픈 것은 두려운 것은 죽음직전입니다. 죽는 것은 별로 안 아파요. 그런데 죽음직전 때 가까이 가면 갈수록 점점 더 죽음이 무섭게 다가와요. 내가 미처 모르는 것. 그래서 이 말입니다. 선악과 따먹었으면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말씀이 그렇잖아요. 그걸 경험을 해야 돼요. 그 경험 안하고 생명나무는 어림도 없습니다. 믿습니다. 하는 그런 거짓말은 안 통해요. 경험해야 돼요.
히브리서5장13절 다시 봅시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그 다음 뭐가 됩니까? 경험하지 못한 자지요. 그러니까 말씀이라 하는 것은 공부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고 “공부했습니까?” “예, 됐습니다. 이제 말씀하십니다.” 절대로 그거 쳐주지 않아요. 이제는 집에 가있어. 이제는 이 말씀이 얼마나 엄중한 말씀인지 집에 가있어. 말씀대로 한 번 일으켜 볼게. 그게 뭐냐, 탱하고 쇠줄 끊어지는 거예요. 그 믿었던 쇠줄이 끊어지는 거예요.
자기의 의미, 자기의 의로움, 자기의 가치, 자기의 자존심, 자기의 상상했던 꿈과 비중이 땡하고 다 끊어져 버리지요. 그러면 목사님, 구원받으면 이혼해야 됩니까? 천만에 말씀. 지금 같이 남편과 알콩달콩 헤헤거리면서 이불속에서 까불면서 잘 해도 까불면서 순간순간 왠지 낯설다. 하고 돌아서야 돼요. 같이 웃으면서 이불속에서 짝짜쿵 하면서도 왠지 낯설다. 그게 늘 느껴져야 된다니까요. 지금 내가 웃는 게 무슨 의미지? 내가 왜 웃지? 내가 뭐가 좋아서 웃지? 십자가 보고 웃는 게 아니잖아요. 지금 내가. 내가 왜 웃지? 애가 결혼한다고. 아이고, 기분 좋아. 내가 왜 기분좋아하지?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러면 안 돼.
그런데 주례선생님이 목사님이 하신 말씀이 믿음으로 살리라. 로마서 1장17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서 경수 목사님이 그걸 설교하신다 할 때 야, 본문 참 잘 정했다. 결혼으로 마음이 들뜰 때 그걸 완전히 죽을 확 씁니다. 그게 무슨 의미 있느냐, 산다는 의미는 믿음으로 살아야지. 2월 8일날 김 을수 집사님 주례사는 미리 정해놨습니다. 로마서3장 23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 본문을 할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이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할 때 어떻게 됐습니까? 갑자기 뭐가 옵니까? 홍수가 들이 닥쳤잖아요. 그 말씀이 우리의 생명이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는 이것은 있어도 없어도 그만인데 우리는 매일 우리의 몸둥아리가 어디에 푹 빠져있습니까?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24시간 이거 빼놓고 생각하는 게 뭐가 있습니까? 아무 생각이 없어요. 거기에 24시간 다 보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살리시기 위해서 그 속에다가 왠지 낯설다. 내가 지금 재미나는 이것이 오히려 나에게는 나한테는 안 맞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는 느낌 주는, 느낌을 그 세계에서 속속 뽑아내는 경험을 할 때 그게 말씀의 경험이 되고 이게 탱하고 세상과 끊어지는 그런 순간이 된다 이 말입니다. 이해되십니까? 이거 안 되면 멜기세덱해석 못해요.
멜기세덱은 족보가 없습니다.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어요. 그러나 나한테는 뭐가 있습니까? 족보가 있어요. 경주이씨고 안동권씨고 있어요. 족보가 있는 인간이 족보가 없는 쪽에 합류한다는 것은 이것은 인력으로 안 됩니다. 이건 믿을 수가 없어요. 이건 말씀이 경험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정답은 내 쪽에서 정답이 있는 게 아니고 이미 멜기세덱 쪽에 가있는 거예요. 그런데 내 쪽에서 저 쪽으로 다가갈 수 없는 걸 어떻게 합니까?
그럴 때 하나님께서 나를 뭐로 만드는가, 레위지파로 만들어버려요. 레위지파로 만든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떤 일을 시킨다는 말입니다. 일을 시키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 하면 “네, 알겠습니다.” 집사는 술에 인박히지 아니하고 “예, 집사 돼서 술 먹지 않겠습니다.” 성경에 얼마나 많아요. 아내 된 자는 남편에게 순종하라. “예, 순종하겠습니다.” 부모는 자식들 가르칠 때 주 안에서 양육하라. “예, 양육하겠습니다.” 전부 다 뭐냐 하면, 예, 하겠습니다. 예, 하겠습니다. 모이기에 힘쓰라. “예, 모이기에 힘쓰겠습니다.” 하면서 우리는 전부다 레위지파가 되어야 돼요.
레위지파에 들어가야 그 다음에 무슨 지파가 나옵니까? 유다지파가 나오거든요. 전에 수련회에서 했잖아요. 바늘에다가 실을 꼽아서 누비이불에 꽂잖아요. 내려가야된다니까요. 말씀을 가지고 내려가야 돼요. 내려가게 되면 우리는 레위지파 되는 거예요. 하나님 이만큼 잘 지켰습니다. 성경보라 해서 성경 봤고, 기도하라해서 시간에 맞춰서 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거 응답했습니다. 탱하고 내가 기도한 응답, 내가 했던 모든 수고가 아무 짝에도 소용없다는 게 뭔가 레위지파에서 탱하고 끊어지는 경험을 하게 하십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내가 시킨 대로 했다는 게 뭐가 돼요? 아무 소용이 없는 거예요. 그러면 그 때 뭐가 보입니까? 왜 저는 안 됩니까? 왜 저는 거룩인데 레위지파는 안됩니까? 할 때에 히브리서7장10절에 봅시다.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니라”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어디에 있습니까?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니 조상이 나보고 이 근호, “왜 저는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 뜻대로 안됩니까?” “내가 니 조상부터 먼저 만났어.” 이리 되거든요. “저하고 상대하지요.” “나는 니와 상대 안 해.” 니는 하나의 노선이고 니 조상이 누구냐 하면, 레위지파의 조상이 누구죠? 아브라함이지요.
어려운 게 두 가지 나와요. 아브라함이 누구를 만났습니까? 멜기세덱을 만났지요.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이고. 히브리서6장13절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무엇을 줬습니까? 약속과 맹세를 줬잖아요.
아까 첫 시간에 이야기했지요. 약속과 맹세를 줬다고요. 컨테이너 화물차라고요. 약속을 메고 계속 움직이는 거예요. 또 한 가지 어려운 게 뭐냐 하면, 조상의 어디에 있습니까? 조상 허리에 있다. 제가 경주이씨입니다. 경주이씨는 산수공파 경주이씨인데, 이 율곡이에요. 원래 유명한 스타 등장하면 스타 밑으로 새로운 노선이 깔리거든요. 이 율곡 있었을 때 제가 있었습니까? 말이 안 되잖아요.
그런데 성경은 말이 안 되는 이야기를 해요.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을 만날 때 아브라함 허리에 누가 있었다? 레위지파가 있었다. 무려 400년 후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1700년경에 이야기가 1642년에 외계인 타고 김수현이 왔을 때에 21세기에 이 모습으로 사는 거예요. 부동산 투기해서 돈 많이 벌어가지고 목동에 아파트 촬영한다고. 그건 드라마 이야기고 이게 드라마는 되는데 이게 말이 되는 이야기입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가 생각하는 있다, 할 때 왜 이게 해석이 안 되는가 하면, 우리가 뭐든지 있다 할 때, 별이 있고 달이 있다 할 때에 항상 그 있음을 어디다가 뽑아내는가 하면, 내가 여기 있다는 것에 시작하는 거예요. 내가 여기 있잖아. 내가 여기 있는데 어! 달이 있네. 이리 되거든요.
내가 여기 있는데 달이 있다고 본 거예요. 그럼 달이 있으면 달에 뭐가 있습니까? 존재가 있는데 달에 있음은 달에 속한 것이고 내가 있으면 나에게 속한 것이고 나는 하나의 실체고, 나의 실체의 있음이란 속성, 존재란 속성이 있고 달은 하나의 실체인데 달에게 존재란 속성이 있고 각자 매달려 있다. 같이 있다. 이리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요 있음을 다 거두는 거예요. 있음 내놔! 너 있음, 별 있음, 달 있음 다 내놔! 이거 누가 만들었지? 누가 있음에 만들어졌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있음에 이게 만들어졌거든요. 골로새서1장 16절, 모든 만물은 누구를 위하여? 주를 위하여. 주가 하나님이 아니고 누굽니까? 예수님이에요. 요한복음1장에서 태초에 천지를 만들 때 누가 있었습니까? 말씀이 있었지요. 그리고 잠언서8장에서 천지 창조할 때 지혜가 있었지요.
예수님이 만들었을 때 있음은 누가 갖고 있느냐 하면, 우리가 가지면 안 되고 예수님이 유일하게 있음이고 우리가 있으려면 그 분의 있음한테 분배받아야 돼요. 그의 있음에 배당받아야 돼요. 그걸 가지고 예수 안에서의 구원이라 하는 거예요. 설명이 더 어렵네.
이걸 이방민족은 몰라요. 이스라엘에게만 이걸 알려줬고 이스라엘에게 알려줬기 때문에 이스라엘에게만 레위지파가 있는 거예요. 레위지파가 제사 드리면 다른 민족 같으면 박수칩니다. “아이고, 당신들이 제사지내가지고 우리가 구원받고 감사합니다.” 하면 레위지파가 하는 말이, 진짜 레위지파 믿는 사람 같으면 “아니에요. 우리가 지금 제사 지내는 것은 이 율법을 지키는 분은 따로 있고 우리가 율법 지키는 것은 우리가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율법을 지키지를 못하면 우리가 살아있으면 안돼요. 죽어야 돼요. 율법에 의하면 못 지키면 나가도 저주받고 들어와도 저주받아야 돼요.
우리는 없음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잠시 동안 있음으로 행세한 것밖에 안돼요. 진짜 있음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진짜 있음으로 인정하는 분은 따로 있어요. 그 분은 매체가 연결이 멜기세덱이라는 분을 통해서 연결되는 겁니다. 멜기세덱은 실제로 예루살렘의 제사장입니다. 분명히 있어요. 있는데 히브리서7장에 보면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분명히 있는데, 있는 분보고 뭐라 합니까? 그 분은 시작한 날도 없고 이 말은 우리는 시작한 날도 있다고 하지요.
우리가 시작한 날이 있다는 말은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그 분은 족보도 없지요. 우리는 족보가 있지요. 족보가 있다는 이것은 거짓말입니다. 잘못된 족보입니다. 있어도 소용없는 족보에요.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다. 하나님의 아들의 모형이다. 이렇게 되지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뭐냐, 진짜 있음을 말하기 위해서 있다가도 없어져야 될 사라져야 될 모형입니다. 이스라엘의 특징은 있다가도 사라져야 되지요. 제가 아까 강의할 때 이 땅에 있다가 사라진 분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죠.
그래서 이스라엘은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스라엘이 미리 있었던 겁니다. 있다가도 사라지고 있는 나라가 아버지한테 저주받았지요. 아버지께 저주받은 사람은 누굽니까? 예수님이지요. 이스라엘은 출애굽기4장에 보면, 내 아들입니다. 내 아들 할 때 이스라엘은 기분 좋았지요. 내가 아들이란다. 아버지를 보여주는. 보여주기는커녕 내 아들 이스라엘을 저주받게 하심이라. 그것은 장차 오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마태복음27장에서 저주받지요.
그 저주받는 저주가 앞당겨서 보여주기 위해서 이스라엘로 저주받게 하는 거예요. 멸망하는 거예요. 이스라엘은 저주받게 되면 거기에 수요일날 설교한 것처럼 물건사고 난 다음에 현금영수증 모으지요. 이스라엘은 저주받았단다. 가 곧 이스라엘은 구원받을 수 있는 자리가 확보된 거예요.
저주받지 아니하면 누구도 구원 못 받습니다. 레위지파가 제사드림으로 말미암아 레위지파 제사는 엉터리라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면 유다지파가 제사 드리면 되잖아요. 유다지파가 제사 드리면 이건 무슨 꼴이 나는가 하면, 레위지파가 반복해서 제사지낸 꼴과 똑같은 꼴이 돼버려요.
그러면 유다지파에서의 제사는 뭡니까? 레위지파가 한 제사처럼 되지는 않지요. 어떻게 하느냐, 단 한번으로 끝내버려요. 1이란 숫자는 무슨 뜻을 가지고 있느냐 하면, 오늘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건데, 1이란 숫자는 2,3,4,5,6을 전부 다 이걸 부정해버리는 숫자가 1이에요.
귤 하나 주세요. 귤이 몇 개 있습니까? 두 개 있잖아요. 이게 의미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두 개가 아니고 하나에요. 왜냐 하면, 둘 다 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질로 보잖아요. 질로 보는데 우리는 개수로 본다고요. 왜 개수로 보느냐, 내 몸이 내 육체가 나한테는 하나기 때문에. 1을 나부터 시작한다고요.
우리가 숫자 셀 때, 수메르왕국에서 처음으로 숫자가 60진법이 처음 나와요. 농사짓기 위해서. 우리는 내가 하나기 때문에 1을 나부터 시작해요. 하나, 둘, 셋, 넷... 그게 잘못이에요. 숫자는 어디서부터 세는가, 예수님1, 우리는 둘이 아니에요. 우리는 없는 거예요. 제로. 주님만 있음이에요. 왜? 하나님의 있음은 창조에 합당해요. 하나님의 법에 합당해야 되고, 율법을 지켜야 되고, 하나님 앞에 의로워야 되고, 하나님 앞에 거룩해야 돼요.
거룩하지도 않고 더러운 인간은 숫자로 치지도 않습니다. 그게 뭐냐, 예수님이 천지를 만든 이름의 힘이에요. 이름이라 하는 것은 아담이 짐승에게 이름을 지어줄 때 아담이 이름을 지을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아담은 모형이에요.
예수님께서 우리 이름을 그리스도인으로 지어주지 아니하면 구원 없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이 이름을 지음으로서 어떤 효과를 보이는 것처럼 장차 우리의 이름을 우리의 이름 말고 더러운 흙 이름 말고, 아담 말고, 새로운 이름으로 우리에게 붙여주게 되면 그것은 효과가 있는 거예요.
멜기세덱은 분명히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멜기세덱을 지상에서 찾지 마세요. 왜? 지상에서는 이름이 의미 없습니다. 그런데 하늘나라 멜기세덱은 뭐냐, 하나님의 아들이에요. 그래서 족보가 뭐냐, 멜기세덱의 족보에요. 멜기세덱을 아무리 분석해 봐도 이것은 우리는 알 수가 없어요.
왜냐 하면, 그것은 내가 나를 분석하듯이 분석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그냥 멜기세덱의 반열을 통해서 그냥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오시는 거예요. 그래서 결론을 내리면 이렇습니다.
멜기세덱이란, 이 쪽 세계, 인간으로부터 추방된 예수님의 세계 전부를 이 지상을 향하여 대변할 때 사용되는 그 이름이 멜기세덱이에요. 대변할 때. 그리고 인간은 바로 예수님에게 갈 수 없고 반드시 자기의 족보를 부정당하면서 멜기세덱 족보에 합류가 되어야 구원받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류가 되는가, 멜기세덱과 만난 사람 있어요. 누굽니까? 아브라함이에요. 아브라함 허리에 누가 있었다? 레위지파 있었지요. 레위지파가 있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을 만났을 때, 모든 걸 버렸어요. 축복은 당신에게서 옵니다. 하듯이 제대로 레위 인으로 구원받으려면 나는 죽어 마땅합니다. 내 몸은 주를 위해서 있지 나를 위해 있지 않습니다. 몽땅 갔다 바칠 수 있도록 자기 자신으로부터 탱하고 끊어져야 돼요. 존재로부터. 내 있음으로 끊어지고 멜기세덱이 있음에 내가 있음. 새로운 있음을 우리가 받아 들여야 되겠지요.
6장 20절에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 했잖아요. 그렇게 하고 7장에 들어가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라 해서 시작이 되는 겁니다. 요 한 가지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멜기세덱은 누구 왕이라고요? 살렘. 살렘이란 지역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실제로 있지요. 예루살렘 실제로 있잖아요. 실제로 있을 때 우리는 뭐로 본다? 있음으로 보는 거예요. “아, 여기는 안양, 저 쪽은 예루살렘.” 여기는 안양 있고, 저기는 예루살렘 있고. 그걸 주께서는 탱하고 끊어버립니다.
저기 예루살렘 있거든 여기 안양 없는 거고, 예루살렘 허리에 있는 거고, 만약에 여기 안양이 있다고 우긴다면 멜기세덱은 없는 거고, 그래서 해석은 어려운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약속 위에 소망을 해야 되는데 그 약속 지금 우리에게 찾아오셨습니다. 탱하고 우리 자신의 존재를 끊어버리고 이제는 내 몸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주의 몸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