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140411a-히7장21절(죄의 발견) - 이 근호 목사
히브리서의 전체 내용 중에서도 이제는 심장 또는 엔진 핵심부분에 드디어 접근하기 시작합니다. 그 전의 이야기는 그냥 예수님이 존재하신다. 그러면 사람들은 예수님의 존재를 믿으면 되는가, 예수님의 존재를 인정하면 되는가, 공자의 존재를 인정하면 공자의 사상을 다 아는 겁니까? 아니지요. 누가 어떤 사람이 옛날의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살았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면 그 소크라테스하고 생각이 같은가요? 아니지요. 예수님이 옛날에 계셨다. 이 땅에 오셨다. 그러면 된 겁니까? 안되지요.
그래서 제가 수시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분이 존재했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분이 무슨 일을 했는가? 존재라는 것보다도 그 분이 하신 기능, 하신 임무 이게 중요한 거예요. 그래서 교회에서 설교자가 예수님의 존재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믿는다고 하거든요. 그런데 그 분의 기능에 대해서 이야기하려하면 그만 안 들으려고 하는 겁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내가 무슨 일을 해야 내가 무슨 복을 받습니까?” 그거 물으러 왔는데, 나한테 무슨 지시를 하고 맡기면 그대로 할 용기도 있는데 우리 자신을 비켜가서 예수님이 무얼 하셨습니다. 이리 돼버리면 자기가 원래 교회에 와서 하나님에게 얻어내려는 그 축복이라는 것이, 본래의 목적이 성취 안 될 수가 있거든요. 예수님이라는 남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온 게 아니다, 이리 되는 거예요.
성경은 예수님의 하는 일이 우리가 포함됐다고 이야기합니다. 이게 남의 이야기가, 남의 일이 될 수가 없어요. 남이 될 수가 없거든요. 예수님은. 우리 살림살이가 있다고 할 때, 우리 집 살림살이가 이게 나의 살림살이냐 그러면 불신이고, 주님의 살림살이라고 보면 신자가 되고 이런 겁니다.
따지고 보면, 믿음이라는 것은 굉장히 간단하거든요. 믿음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지식이 아니고 소속감이에요. 이것 알고 저것 알고 가게에서 물건 고르듯이 아는 것 마구 담는다고 해서 그게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고, 내가 이거 담기 이전부터 어디에 소속돼있다. 주님에 소속돼 있다. 그렇게 되면 내가 인생을 살아가는 것도 이것이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다. 내 것이 아니다. 그러한 의식, 그러한 생각 그것이 바로 신앙생활, 믿음생활이라는 겁니다.
남북 이산가족 모일 때 보세요. 한국에서 간 사람은 개인적 자격으로 오잖아요. 그러나 북한에서 상봉하겠다고 온 사람들은 그 사람은 개인 자격이 아니고 북한의 인민공화국 어버이 수령의 지시를 받고 오게 됩니다. 완전히 종교라니까요. 완전히. 그 자리에서 김정은 이야기할 자리가 아닌데 그 자리에서 이야기를 해버리죠. 그래서 북한에서 내려온 사람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자유를 찾아 내려왔다 그래요. 자유를 찾아 내려왔다 하는데 그 자유가 무슨 자유냐, 사적인, 개인적인 자유를 말하거든요. 개인적인 자유를 누가 욱박하느냐, 북한 당국이 욱박하겠지요. 욱박하겠는데 그걸 간단히 말하면, 소속되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제가 방금 한 이야기가 오늘 설교, 성경 구절과 관련이 있어요. 관련이 있기 때문에 미리 언급을 해드리는 겁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히브리서 7장, 8장, 9장, 10장 이 내용이 히브리서에서는 아주 핵심부분으로 들어가는데 그 핵심부분에서 예수님은 계시다, 이 정도로 끝나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하셨으며 그 하시는 일과 구약 전체와 어떠한 연결점을 가지고 그리고 성취를 보셨는가, 그 분이 어떤 일을 성취를 했는가에 대한 내용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한 번 물어봅시다. 어떤 사람이 요 앞에서 하수공사를 한다. 하수 공사하는 작업인부들이 말하기를 “야, 오늘 오후까지 일을 다 마무리해야 돼!" 이렇게 한다고 합시다. 과연 그 하수공사가 오늘 마무리했습니다. 그러니 어떤 인부가 와서 마무리 했으면 그건 일종의 다 이루었다가 되지요. 그럼 다 이루었으면 여기에 있는 우리는 구원 받는 겁니까? 어떻게 되는 겁니까? 관계없지요. 하수공사 마무리한 거와 내 구원과 무슨 관계가 있어요? 그건 당신의 일이고, 내 구원은 딴 일이다, 말이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다 이루었다 했잖아요. 그게 하수도 공사였습니까? 자, 신자다. 나는 교인이다. 나는 하나님의 성도다. 그러면 주님과 연관성이 있어야 되는데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다 이루었다고 했다 말이죠. 다 이루었다. 그런데 다 이루었다는데 나는 구원받은 적이 없다. 이리 나오면 이상하지요. 미리 봅시다. 히브리서10장 봅시다.
히브리서10장10절에 보면,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거룩함을 얻었다고 되어있지요. 이게 굉장히 난해한 거예요. 왜냐 하면, 이 동네 하수 공사하는 작업인부가 하수 작업을 다 끝냈다고 해서 내가 우리 몸의 변화가 일어나고 우리의 팔자가 달라지고 이런 거 아니잖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단번에 몸을 드림으로서 우리가 뭐가 됐다고 했습니까? 우리가 단번에 거룩함을 얻었지요.
그러면 우리가 옆에서 인부가 작업을 다 이루었다고 해서 우리가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면 만약에 내 친구가 공부를 잘한다고 해서 나도 덩달아서 성적이 1등 되는 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 천국은 어떻게 관계져있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서 지금 우리는 어떤 관계를 가지고 모든 걸 살아가느냐를 생각해야 되지요.
이 세상은 어떤 사람이 일을 하게 되면, 그 사람이 한 일이 되어버리지 그 사람 한 일이 내 것이 됩니까? 안 됩니까? 이 세상에서는 이게 안 되는 거예요. 남의 이빨이 아프다. 그럼 나도 덩달아 아파야 됩니까? 그럴 수 없는 거죠. 누가 증명사진을 찍는다면 그 사진에 내 얼굴 나옵니까? 안 나오지요. 이게 뭐냐 하면, 이걸 실존주의라 합니다.
실존주의라 하는 것은 상식이니까 그냥 들어놓으세요. 실존주의는 샤르트르, 하이데거 철학자들이 이야기한 건데. 실존주의라 하는 것은 뭘 하느냐 하면 존재주의는 아니다, 이 말이거든요. 사람이란 덩어리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그 사람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그걸 증명하는 입장에서 여러 사람들이 있는 것, 여러 사람들이 있지만, 여러 사람들을 한데 모으면 그건 하나의 사람이 되는 것. 사람이란 존재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실존주의는 뭐냐 하면, 존재가 먼저가 아니고 내가 먼저라는 거예요. 실존이 먼저라는 거예요. 그러면 그 존재의 입장에서는 우리가 돼요. 이게 오늘 강의가 중요하기 때문에 해야 돼요. 여러분들이 이야기가 어렵더라도 이건 제가 억지를 부리겠습니다. 그동안 이 사회는 우리가 돼요. 우리. 우리가 된다고요. 양반 같으면 양반끼리 우리가 되고 상놈은 상놈끼리 우리가 돼요. 실존주의는 그게 안돼요. 누구 마음대로 우리야? 누구 마음대로 우리인데? “우리는 다 같이 한민족” 하면 이민 간 사람이 “누구 마음대로 한민족이라 해? 나는 우리가 우선이 아니고 내가 우선이야.” 이게 실존주의에요. 내가 우선이거든요.
아버지가 있다가 “애들아! 다 모여봐라. 이 아버지가 사업을 하다가 부도가 났다. 할 수없이 너희한테 미안하다. 이제부터 아껴 쓰자. 우리는 한 가족이잖아.” 하면 아들이 있다가 “누구 마음대로 우리에요? 나는 내 쓸 거 쓰겠어요. 스마트폰 사주세요. 나는 내 쓸 것 쓰겠어요.” 이게 실존주의에요. 우리라는 것은 추상적이고 관념으로 보는 거예요. 실존으로 봐서는 우리는 관념이고 추상입니다.
현대 세대에게 어느 말이 옳겠어요? 실존이 옳겠어요? 우리가 옳겠어요? 실존이 먼저 있고 실존이 모였을 때, 그것은 후차적으로 우리라고 집어넣자, 이렇게 하는 거예요. 내 조건에 맞을 때, 그렇게 되면 그 우리는 우리의 진정한 우리가 아니고 내가 거기에 대해서 동의하는 기간까지만 우리가 되는 겁니다. 내가 동의할 때까지만 우리가 돼요.
아버지, 엄마, 우리 형제, 우리는 한 식구 우리는 옛날에는 존재였어요. 태어났기 때문에 식구라고 본 거예요. 그런데 요즘은 그것이 아니고 나를 힘들게 한 아버지라면 “저는 아버지라고 간주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사랑하는 여자와 헤어지라고 하면 저는 아버지를 보지 않겠습니다.” 드라마에 보면 그런 말 나오잖아요. 그게 실존이에요.
철학적으로 실존과 존재를 다시 정리하게 되면, 존재에서는 실존보다 존재가 우선이고 존재를 위하여, 존재의 명예를 위하여, 우리 집안의 명예를 위해서 이 말입니다. 대한민국을 위하여, 보다 큰 범주를 위하여, 우리 집단을 위하여, 하나 희생해야 되는 것을 강요할 때는 존재주의입니다. 그럴 때 윤리가 되고 도덕이라는 게 성립이 돼요.
그러나 실존은 뭐냐 하면, 존재가 먼저가 아니고 실존이 먼저다. 그러면 거기에서는 윤리 도덕이라는 게 아니고 그걸 가지고 공리주의, 실용주의라 한다는 거예요. 벤담의 공리주의 또는 존 스튜어트 밀의 공리주의 하는 게 철학에 보면 있거든요. 사람은 다수의 쾌락을 위해서, 즐거움을 위해서, 사회가 있다는 것. 그런 논조로 한 거예요. 공리주의는 이 사회라 하는 것은 각자의 이익을 위해서 시장에서 모든 것이 형성된다. 시장에서 아담스미스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서 그런 이야기가 있어요. 그게 여러분들한테는 생소하게 보이지만 간단히 말하면 자본주의에요.
자본주의는 존재위주가 아니고 실존위주입니다. 쉽게 말해서 실존위주는 뭐냐 하면, 진리라 하는 것은 나한테 이익이 되면 진리이고, 나한테 이익이 안 되면 그건 진리가 아닌 거예요. 따라서 실존주의에서는 무엇이 날아가 버려요? 희생? 희생 같은 것은 없습니다. 희생하는 척은 해요. 왜? 어느 회사에서 착한 사람 뽑습니다, 하면 착한 척은 해요. 그게 나름대로의 희생이라, 하지만 착한 척은 진짜 자기 이익을 위한 하나의 방법이고 수단일 뿐이지 정말 희생을 위한 희생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에서.
모든 철학은 자본에서 형성되거든요. 경제 위주가 된 이상은 뒤에 나오는 국가라든지 윤리도덕이라 하는 것은 돈에서 뒤따라 나오는 겁니다. 돈이 잘 굴러가기 위한 도덕과 윤리가 나오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의 현대 세대라 하는 것은 존재위주가 아니고 실존위주가 되는 겁니다. 그런 쪽으로 주변사람들이나 가정에 한 번 평가해 보시면 쉽게 납득이 돼요. 뭐든지 정리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 명분이라 하는 것은 없습니다. 아예 명분이라 하는 것은 나한테 이익이 있을 때만 명분을 챙기지만 손해가 된다 싶으면 명분도 집어던져 버려요. 명분도 우리 집안이 어떤 집안인데 하는 그것도 집어던져 버려요. 시대가 그런 시대에요.
왜 그런 시대가 되었는가 물으면, 경제가 빨리 돌변하는 이 경제, 시장구조에 거기에 같이 합류하지 않으면 우리 주머니에 돈이 들어오지 않게 되어 있어요. 빨리 바꿔야 돼요. 가게를 세웠습니까, 옛날에는 가게하고 30년 대대로 했잖아요. 지금은 인테리어를 바꿔주어야 되는데 인테리어를 바꾸는 동기가 같은 업종에 있는 라이벌 가게들이 생기기 때문에 그래요. 옛날에는 거의 독점이었는데, 옛날 우리 젊었을 때 부자가 딱 3종류였어요. 방앗간, 과수원, 양조장하면 부자였습니다. 독점이라니까요. 잘사는 방앗간 주인이 했던 드라마 이름이 ‘아들과 딸’ 하는 게 있어요. 거기에 보면 양조장 나오거든요. 요새로 하면 재벌이지만.
그것이 왜 다 망해버렸습니까? 방앗간, 과수원, 양조장 왜 망했습니까? 빨리 돌아가는 자본주의 변화에 세계화에 적응하지 못해서 망해버린 거예요. 옛날에는 퇴직하고 난 뒤에 퇴직금 받아가지고 제과점 했으면 한 20년은 먹고 살았어요. 요새는 동네 제과점 안 됩니다. 파리바게트도 안 될 정도인데 동네 제과점이 될 리가 있겠습니까? 왜 그러느냐 하면, 계속 인테리어를 바꿔줘야 되고 커피점도 계속 바꿔줘야 돼요. 바꿔주려면 인간이 실존이 되어야 돼요? 존재가 되어야 돼요? 이제는 실존이 되어야 돼요. 매일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도 몰라야 돼요. 너무 자주 바꾸다 보니까. 자기가 계속 돈 버는 부속품으로 계속 자기 스스로 변신에 변신을 계속 하다 보니까 내가 누군지도 몰라요. 이게 바로 바깥어른들 돈 벌기 위해서 오늘도 이 짓하고 있는 겁니다. 혼자만 머리 씁니까? 남은 머리 안 써요? 같이 머리 쓰는데. 그러니 이게 한마디로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라는 말이 맞아요.
왜냐 하면, 산다는 말이 두 종류거든요. 존재로 사는 게 있고요, 하나의 실존으로 사는 게 있는데. 실존으로 살면 이건 사는 게 아닙니다. 이건 완전히 동물이고 적어도 진짜 돈만 밝히다가 이제는 뭔가 초연한 것처럼 살아가려면 나는 존재로 살아가야 되는 겁니다. 이 실존은 임시적입니다. 단기적이에요. 그런데 존재로 산다하는 것은 나라는 인간은 적어도 이 정도로 길게 보는 겁니다. 요새 자기 자신을 길게 볼 수 있는 그런 여건을 경제가 용납을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길게 보면 나가라 합니다. 사표내고 나가라 합니다. “어디서 회사에서 꿈꾸고 있어?” 이렇게 합니다. 지금 꿈 꿀 시간도 없어요. 전부 다 단타에요. 단타. 단타 주식 들어가듯이 들어가고 빼고, 들어가고 빼고 수수료만 받는 증권회사만 좋아하지. 전부 너무나 급작스럽게 돌아가는 거예요.
옛날에는 교회에도 제자훈련하면 그만이에요. 제자훈련해서 먹기 좋았는데. 옛날 방법이라. 다락방도 한물갔어요. 이건 계속해서 사업 아이템을 바꿔줘야 돼요. 왜? 전부 다 곳곳에 교회들이 경쟁 업체가 있으니까. 교회가 파리바게트라. 그러니 오늘 본문에 한 번 봅시다.
히브리서 7장17절에 보면, “증거하기를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였도다” 영원히죠. 영원히. 그 다음에 21절을 보세요. 저가 영원히 제사장 된다 했지요. 그 다음에 23절 봅시다. 저희 제사장 된 자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을 인하여 항상 있지 못한다,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제가 하는 말은 존재는 누구한테만 쓸 수 있다? 예수님에게만 존재를 말할 수 있고 나머지는 뭡니까? 왜 우리는 존재가 영원한 존재가 될 수 없었는가 를 보여줘야 될 기능을 하는 겁니다. 기능인이 뭐냐 하면, 옛날에 구약의 제사장이다 말이죠. 오늘날 우리고. 우리는 죽어줘야 돼요.
우리의 이 몸이 죽어줘야 흙에 속한 몸은 난타라니까요. 흙에 속한 이 몸은요, 치고 빠지도록 되어 있어요. 이 몸은. 이 몸을 너무 찍어 바르고 하지 마세요. 이 몸은 그냥 등장했다가 다 폐기처분하고 찢어버려야 될 용도라니까요. 옛날 구약하고 똑같아요. 제사장이 많다는 말은 그 자체가 이미 하나, 하나가 가짜라는 겁니다. 실존은 가짜고 그 실존이 보여줘야 될 존재만이 영원하고 진짜고.
그래서 존재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이 이미 존재를 선점하고 있고 이미 독점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말을 할 수가 없어요. 내가 산다는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산다는 말의 비밀이 이제야 풀립니다. “내가 여기 살아있습니다.” 라는 말을 할 수가 없어요. 산다, 앞에 나를 여기다가 집어넣을 수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우리는 수동성입니다. 누군가에 의해서 살려진다는 겁니다. 고거 바꾸기가 거듭남이에요. 그거 바꾸는 게. 랄랄라 방언하는 게 거듭남이 아니고 뜨겁다가 거듭남이 아니고 고거 바꾸는 거예요. 지금 히브리서 핵심부분에 도달했어요. 그만큼 어렵고 난해합니다.
자, 이러한 일을 할 때 바꾸어주는데. 바꾼다. 바꾸는 건 좋다. 그러면 아까 히브리서 10장이야기 다시 해봅시다. 10장 이야기할 때, 제가 존재와 기능 이야기했지요. 다시 이야기하게 되면 이 동네 누가 하수 공사하는데 하수공사 인부들이 오후5시에 끝나고 하는 말이 다 이루었다, 했다 말이죠. 하수 공사 다 이루었다 하면 우리가 구원받습니까? 없지요. 왜? 실존이기 때문에. 지는 자기 하수 공사했지, 하수 공사했다고 수돗물은 잘 나오겠는데 내가 천국 가는 건 아니잖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꼬부작 뭐하시더니만 십자가에서 뭐라 했습니까? 다 이루었다 했거든요. 그런데 그 다 이루었다 함이 예수님 혼자 구원 받으려고 다 이루었다 하는 겁니까? 아니지요. 바로 구원될 수도 없는 우리에게도 구원이 완료됐다는 것을 의미하는 통보다 말이죠.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통용하는 실존적인 관계망 말고, 그 관계성 말고 천국에서나 통용되는 관계망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최초로 우리에게 적용이 되었다 이리 보시면 되는 거예요. 그 적용되는 그 관계성을 이제 찾아봐야 되요. 우리가. 우리가 지금 공부해서 해야 될 일이에요. 그러니까 인간세계에서 인간들이 인간들과 이야기하는 그 원리와 법칙하고는 성경의 원리 법칙 해석하고는 맞아요? 안 맞아요? 전혀 안 맞지요.
이겁니다. 예수님이란 그 한 분이 했는데. 어떻게 해서 그 효과가 우리한테 우리의 효과가 되는 고 메카니즘 그 과정, 절차는 어떻게 되느냐 하는 그걸 놓치면 안 된다 말이죠. 그걸 찾아봐야 된다 말이죠. 그러면 그것을 다시 7장으로 봅시다. 원래 10장에서 이야기할 수 있어요. 10장16절에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새 언약을 이야기하지만, 10장이니까 그건 이미 7장, 8장, 9장 거쳤기 때문에 지금 그리 이야기하면 안 되고요, 7장부터 보는 거예요.
22절에 보면, 그 이유가 이렇게 나와 있어요. 해답이 뭐냐 하면, “어떻게 한 사람의 이룬 일이 다른 사람에게 효과를 미치느냐? 어떻게 합니까?” 그게 질문이었고 답변은 22절로 답변이 된다 말이죠.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그 다음이 뭡니까? 더 좋은 그 다음 뭡니까? 언약. 약속. 언약, 약속 때문에 그러하다는 거예요. 약속 때문에 그러했다는 겁니다. 들어보면 우리가 익히 아는 것처럼 느껴져요. 언약이란 말을 하도 많이 들었고 많이 설명을 해드렸기 때문에. 하지만 그래도 뭔가 찝찝하게 설명되지 않는 게 미진한 게 남아있는 것의 느낌은 우리가 이것은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거든요.
그 이유를 알지요.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자, 약속이란 걸 했다 말이죠. 약속. 예수님 계시고 우리가 있다 할 적에 예수님께서 언약이니까 약속입니다. 언약이란 말을 잘 안 쓰기 때문에 그냥 약속이라 합시다. 예수님께서 약속을 하십니다. 내 몸을 아버지께 바침으로 너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10:10절) 라고 약속을 했다 말이죠. 약속을 했는데 이 약속이 예수님의 입에서 나와서 여기까지 도달하는데 거리가 있고 시간도 걸린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이 느낌은 무슨 느낌이냐, 아무리 주님께서 약속을 해도 주님은 주님 따로 고 나는 나 따로 라는 실존적 느낌을 우리가 지울 길이 없다 말이죠. ‘고맙기는 한데 이게 도달 안 되면 나는 망치지 않습니까?’ 라는 생각을 어쩔 수 없이 되는 거예요.
실제로 저와 한 시간 동안 하면서 질문하신 분도 있어요. 어제. 한 시간 동안 했어요. “주님이 오시지 아니하면 구원 못 받는 겁니까?” 그 질문가지고 한 시간 동안 질문하는 거예요. 목사님 설교 들어보니까 주님의 영이 오지 않으면 그럼 우리는 구원받지 못한다. 이 말이잖아요. 하는 그 뉘앙스가 ‘주님이 어떻게 하면 오실 수 있습니까?’ 그걸 애타게 찾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제가 받았어요. 느낌 아니까. 목사님 말이 틀렸다는 말이 아니고 성령이 와야 거듭남을 인정하는데 성령이 안 온 사람에게 오게 하는 방법은 뭡니까? 라는 그걸 애타게 찾고 있는 듯한 뉘앙스를 보였다 말이죠.
그런 질문도 주님께서 허락하신 질문이기 때문에 그걸 못 받는 건 할 수 없고, “안녕히 계세요. 정 태호씨!(개그콘서트에 나오는 맨트)” 하고 성령도 안 받았으면 끝났지, “내가 성령 줍니까? 나보고 붙들고 하지 마세요.” 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럴 수는 없고 분명히 그런 질문을 하신 것은 그만한 해답이 그 자체 안에 들어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게 뭐가 문제가 되는가 하면, 자 한번 봅시다. 사람이 이리 서 있잖아요. 예를 들어서 이걸 엄마라 하고 4살 먹은 어린애라 합시다. 있는데 엄마하고 애하고 같이 버스 기다리면서 서있는데 갑자기 엄마 신발이 축축한 느낌이 들어요. 보니까 애가 참다 참다 못 참고 오줌을 싼 거예요. 뜨듯한 오줌이 엄마의 발까지 내려왔어요. “야야, 오줌을 쌌구나! 집에 있을 때 오줌 싸라고 해도 그렇게 괜찮다고 해놓고 여기서 오줌을 싸면 어떻게 해. 아이고, 애 때문에 못 살겠어.” 하잖아요.
보세요. 애하고 엄마하고 실존으로 분명히 떨어져있지요. 떨어져있는데 애가 오줌을 싸니까 엄마는 갑자기 애가 오줌 싼 효과를 보고 있는 거예요. 신발이 축축한 거예요. 죄를 누가 졌습니까? 아담이 졌지요. 아담이 지은 오줌이 어디까지 흘러가느냐 하면 예수님 발바닥을 적시는 거예요. 예수님은 본의 아니게 죄 책임도 지을 필요 없는 분이 같이 죄 안에 있어버리게 되었어요. 이게 바로 예수님은 아담의 오실분의 표상이라, 로마서 5장14절에 나옵니다.
지금 뭐냐 하면, 어떻게 하면 성령이 올 수 있습니까? 나도 실존이고 주님도 실존인데. 그럼 나는 안 오면 못 만나는 거고 오셔야 된다면 만약에 안 온다면 그럼 끝났네. 어떡하지? 어떡하면 좋겠어? 이런 식이다 말이죠. 그런데 이미 오줌은 쌌잖아. 자꾸 이리 돼요. 뭐냐, 질문 자체가 나쁘다고 평하는 게 아니고 인간은 자기 구원이라는 욕망에서 욕구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거예요. 관심사가 ‘어떻게 하면 나는 죽어서 천국가지.’ 자기 구원에 신경 쓰다 보니까 지가 질질 흘리고 있는 오줌에 대해서는 신경을 안 쓰고 있는 거예요.
우리의 죄는요, 우리가 이렇게 건사하거나 다룰 관리 대상을 넘어서 버렸어요. 아담이 선악과 따먹었다고 했지요. 사실은 선악과가 아담 하와를 유인한 셈이 되어 버렸지요. 그렇잖아요. 먹음직도 탐스럽게 보암직도 하고 선악과가 그냥 바보 등신이 아닙니다. 아담 하와는 무엇을 좋아하고 뭘 먹고 싶어 하고 뭘 탐내고 있다는 사항을 미리 다 간파를 해서 먹을 수밖에 없게 만드는 요소가 이미 선악과나무에 그게 이미 입혀져 있다 말이죠. 하나의 속성으로 본질로 차있는 거예요. 물론 보자마자 “와! 먹어보자.” 이리 하고 먹지는 않았을 거다 말이죠. 자기 딴에는 참으려고 참잖아요.
제가 글을 써볼게요. ‘안 아프니 아픈 줄을 모르겠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이걸 문자적으로 하면 문장의 뜻이 안 되지요. 같은 말 반복 밖에 안 되잖아요. 그걸 동어 반복이라 하는데. 안 아프니 아픈 줄을 모르겠다. 이걸 문자적으로 보게 되면, 성경해석을 문자적으로 보게 되면 설명이 안 된다는 것을 예를 들기 위해서 이 문장을 한 거예요. 안 아프니 아픈 줄을 모르겠다, 한 경우가 이게 의미 있게 되려면 오십 견을 걸려야 돼요. 팔이 4년 동안 아파봐야 돼요. 4년간 팔이 아프다가 요 근래에 팔이 안 아파요. 제 팔이. 오른팔이. 안 아프니 아픈 줄을 모르겠는 거예요.
모든 성경해석이 다 이런 식이에요. 우리가 분명히 문자적으로 보면 성경해석이 안 풀리는데 체험되어 버리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체험해 버리면 성경말씀이 다 풀리게 되는 겁니다. 그 체험이 뭐냐 하면,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고 다윗이 경험했던 게 뭐예요? 다윗은 내가 죄를 지을 때만 내가 죄인 된다고 우겼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밧세바와 간음하고 그 우리아 장군을 살인할 때만 나는 살인자가 된다. 그럼 살인 안하고 간음 안했으면 나는 멀쩡하게 괜찮은 사람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 다윗이었단 말이죠.
그런데 성신이 오고 나단 선지자가 와서 성신을 받을 때는 갑자기 뭐가 됐어요? 죄 문제에 대해서는 이게 내가 본래의 자리로 찾아가야 되는데 본래의 자리가 내 자리인 동시에 내 자리가 아닌 거예요. 안 아프니 아픈 줄을 모르겠다. 이 말은 그 본래의 죄인의 자리가 내 자리인 건 맞는데 내 자리가 아닌 거예요. 말이 굉장히 어렵지요? 본래의 자리는 내가 생각한 그 자리는 아니고 따로 주님께서 마련한 본래의 자리인데 그 자리에 들어가니까 이게 내가 만든 자리가 아니라서 나의 자리라고 우길 수가 없다 이 말입니다. “나는 본래의 자리로 찾아가야지!” 이건 성립이 안 되는 거예요.
우리는 이미 본래의 자리에서 냄새를 팍팍 피워대요. 꼭 20살 먹은 19살 먹은 아들 냄새 나듯이. 성장호르몬 때문에 냄새나듯이 커 가면. 이건 애가 있음 자체에서 냄새가 나는 거예요. 일부러 냄새를 피우기 위해서 목욕 안한 것도 아니고 활동하다보면 육체에서 나잖아요. 마찬가지로 우리도 죄를 풀풀 피우는 거예요. 다윗이 그걸 알게 된 겁니다. 죄에 대해서 우리가 능동적이 아니고 수동적이다 말이죠.
아까 능동, 수동 이야기했지요. 존재는 누가 차지하고? 주님 홀로 차지하고, 우리는 존재를 증거 하기 위해서 하나의 임시적인 실존에 불과한 거예요. 성경해석을 이런 식으로 안 하면 성경해석 하나도 못합니다. “어떻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매일 이런 거 하다가 결국 구원 못 받고 지옥 가는 수가 있어요. 죄 문제에서 아담이 오줌을 쌌으면 이미 싸기 전부터 예수님은 이미 죄를 아셔요. 알고 죄의 존재를 인정합니다. 왜냐 하면, 십자가라 하는 것은 창세전에 이미 계획되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보기에는 미래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그 미래가 창조 이전부터 있었던 미래에요. 그걸 가지고 뭐냐, ‘먼저 온 미래’라 합니다.
별에서 온 그대가 아니고 먼저 온 미래. 별에서 온 미래라 보시면 됩니다. ‘창세전부터 온 미래’ 이게 적당합니다. 우리는 미래를 기다리는데 막상 미래에 참여해보니까 창세전인 걸 미처 우리는 몰랐지요. 왜 우리가 현재, 과거, 미래에 고충이 되는가 하면, 우리는 실존인데도 불구하고 내 존재는 영원하다고 이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잘못된 거예요.
그러니까 결국은 구원을 방해한 자가 누굽니까? 결국은 주님에 의해서 구원 받을 수밖에 없는 내가 평생 살면서 내 구원을 내가 방해해요. 내 구원을 내가 방해한다고요. 시장통에서 어린 애들 가면, 내가 자꾸 시장통하는 것은 내가 어려서 그렇게 해서 그래요. 시장통에 가가지고 만두 사달라고, 만두 사달라고, 찡찡대면서 시장 보는데 30분 내내 만두 사달라고 만두 사달라고, 엄마는 절대로 만두 안 사주거든요. 기어코 만두 안사고 집에 가보니까 할머니가 이미 만두 100개를 만들어 놓은 거예요. 그것도 모르고.
구원해 달라고, 구원해 달라고, 어떻게 하면 성령님이 나한테 오십니까? 매일 이렇게 하면서 집에 가보니까 벌써 구원이 다 된 걸 가지고. 구원 다 됐어. 왜? 오줌을 쌌거든 우리가. 우리가 계속 오줌을 싸놨거든요. 죄를 지었거든요. 그 죄가 우리를 본래의 자리로 인도해 주신 고마운 죄에요. 죄가 또 고마운 죄가 다 있네. 아주 고마운 죄에요. 우리의 본래의 자리로 우리가 미처 몰랐던 본래의 자리로 찾아가게 하시는 고마운 죄. 실존이면서 존재인 척 하는 거. 내가 마치 내가 구원이 되어야 하나님도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것처럼 착각하는 그 죄.
다시 이야기할게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이전에 무수한 많은 제사장들이 나타났고 제사를 지냈고 하지만 그들은 숫자가 많다는 이유가 뭐냐, 그들은 진정한 제사장이었다? 아니다? 진정한 제사장도 아니고 그들이 무슨 짓을 해도 우리 구원은 되지를 못해요. 아무리 제사장해도 우리의 죄 용서가 되지를 않습니다. 그들이 제사장으로 제사를 지내도 그 제사장이 지낸 것 가지고 구원받지 못해요.
아브라함이 아들 바쳐서 구원받는 것 아닙니다. 모세가 지팡이 들고 설친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 아닙니다. 이제 여기서 제사 이야기를 이제 죄를 확대시키겠습니다. 첫째시간 가운데서 중요한 레벨을 올려보겠습니다. 십자가라는 것이 존재에서 나와서 실존의 저질러 온 죄를 이미 존재차원에서 창세전부터 이미 있었던 그 이야기까지 했잖아요. 이젠 더 업을 해보겠습니다. 죄가 어떻게 퍼지는가 보세요.
죄가 어떻게 퍼지는가 하면, 여기는 예수님이고 이쪽은 우리입니다. 우리는 죄가 이웃에게 한다고 했지요. 죄가 이웃에게 전달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이웃에게 죄를 지으면서도 이게 방향성이 있어요. 목표가 있어요. 목표가 뭐냐 하면, 절대국가에요. 국가적으로 죄를 짓게 되어 있어요.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이렇습니다.
제가 ‘선오브갓’이란 영화를 보고 어제 한국에 첫 개봉했거든요. 첫 시간이 조조도 아니고 낮15시5분이었어요. 첫 회에 그걸 보고 줄거리를 올려놨어요. 그 영화에서도 강조하지만 제 인상은 뭐냐 하면, 처음에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갔을 때, 그 영화를 여러분들이 보시면 좋겠어요. 예루살렘이 어떻게 생겼으며 성전이 어떻게 생겼는가를 나와 있어요. 성전에 예루살렘에 들어갔을 때 성전은 예루살렘 도시 안에 들어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안에 들어갔을 때에 종려나무가 어떻게 생겼는가가 나와요. 종려나무 밑에 깔고 당나귀를 타고 가요. 성경에서는 나귀타고 간다 하는데 영화에서는 당나귀해서 헐씬 더 잘 다뤘어요. 당나귀를 어떻게 타는가 보니까 주님께서 옆으로 타요. 너무 작으니까. 이랴, 이랴 이게 아니라니까요. 쉽게 내릴 수 있도록. 완전히 티코로 보시면 됩니다.
사람들이 왜 환호를 했는가 하면, 예루살렘이 수도잖아요. 서울이잖아요. 지방에서 이미 예수님이 유명인사가 되고 말았어요. 특히 갈릴리 지방에서 귀신 쫓아내고 병고치고 죽은 자 살려내고 물위를 걸었고 오병이어했다는 그 소문에 막 서울로 예루살렘으로 모여든 거예요. 보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분위기가 이미 떴어. 분위기가 이미 무르익은 채로 드디어 예루살렘에 왔으니까 완전히 그야말로 김수현 중국 가는 거 이상으로 우리나라의 연예인이 중국공항에서 환영받는 것처럼 완전히 종려나무 깔은 것이 완전히 유명인사에요. 이미 유명인사가 됐고 팬들도 많은 거예요. 소문 듣고 보고 싶어 가지고. 배 용준이 왔다고. 자진해서 옷 깔고 했다 말이지요. 그 많던 환호했던 사람들이 막상 판결이 십자가 처형하기로 판결을 내리고 난 뒤에 즉각 처벌되는 거예요.
강도 둘도 십자가 끌고 가고 예수님도 십자가 무거워하면서 내려올 때 그 주변 사람들은 누구하나 십자가 들어주는 사람 없다는 거예요. 싸늘하지요. 싸늘해요. 그리고 거기다가 여러분들이 알다시피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씩 모른다 할 때, 가야바제사장의 용병이 있어요. 고용인 요새로 하면 경찰이지요. 경찰한테 걸려서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영화에서. 여인이 또 옆에서 거들었고 그건 영화니까. 그걸 따지는 게 아니고. 어쨌든 간에 십자가 매고 갈보리언덕 올라가는 그 과정에서 누구하나 십자가 들어주는 사람 없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야, 어이~” 시커먼 흑인한테 어이, 대신 들어줘! 할 때 나는 성경에서는 흑인 그 사람이 십자가를 들고 예수님이 빈손으로 올라가는 줄 알았는데 영화에서는 같이 지는 걸로 되어있어요. 그것도 영화니까.
하여튼 올라갔을 때, 그 냉담함, 사람들은 아무도 환영하지 않을 때, 주님께서는 인간성을 보여주면서 아, 배신당했다. 환호가 뭐로 바뀌었어요? 배신으로 바뀐 거예요. 베드로도 마찬가지고 12제자도 다 흩어지고 가룟유다도 예수님 팔아먹고. 그게 바로, 보세요. 예수님 십자가 질 때 아무도 안 도와줬지요. 그러면 거기에 있는 아주머니들, 아저씨들, 그 사람들은 각자, 각자 자기 일이 있는 거예요. 그 시간에 설거지도 하고 빨래도 해야 할 있다 말이죠. 그러면 빨래하는 게 죄입니까? 죄 아닙니까? 죄 아니지요. 밥 먹었으면 설거지해야지, 설거지 안하는 게 죄지, 설거지 하는 게 죄 아니지요.
그런데 뭘 놓쳤어요? 설거지하면서 빨래하면서 뭘 놓쳤어요? 지금 우리가 사는 이 동네에 누가 십자가지고 간다? 예수님이 십자가지고 가는 그 방향성과 그 의미와 취지에 대해서 그들은 동조를 안 하고 싶지요. 왜냐 하면, 자기는 예수님이 그렇게 사형 판결 난 뒤에는 자동적으로 본인들은 예수님 편에 서는 게 아니고 예수님을 사형판결 시켰던 그 당국자, 권력 편에 자동적으로 소속이 되어버렸지요. 그게 바로 죄인 거예요. 설거지해도 죄고 빨래해도 죄가 되는 거예요. 그 아줌마들이 죄인이고, 그 아저씨들이 죄인인 거예요.
그래서 요한복음15장22,24절에 보면, 내가 오기 전까지는 너희가 죄가 없었다. 하지만 내가 등장하고 난 뒤에 부터는 죄가 시작된 거예요. 그래서 주께서는 죄를 만드시는 거예요. 일부러. 어떻게? 주님 존재로서. 아니에요. 주님의 기능으로. 뭐로? 십자가로서. 그 전에 많은 사람이 오병이어 떡을 먹었잖아요. 그리고 귀신도 많이 쫓아냈지요. 병도 나았지요. 12제자 다 주님 나라온다고 기다렸잖아요. 십자가 질 때 다 가버렸어요. 영화에서는 십자가 밑에 사도요한, 막달라 마리아와 마리아 세 사람이 있고 나머지는 다가버렸어요. 그 영화에 보면 마리아가 예수님 닦아주는 대목이 나오는데 성경에는 없는 대목이지만, 그 때 사람들이 많이 울어요. 훌쩍, 훌쩍. 나도 약간 훌쩍.
내가 오기 전까지는 죄가 없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는 내가 어느 소속인지, 마귀 소속인지 몰랐다. 예수님 오시고 난 뒤에 마귀에서 벗어났습니까? 벗어난 게 아니에요. 비로소 죄를 알게 된 거죠. 그리고 내가 소속된 이 세상에서 나는 어떻게 해도 빠져나올 수 없는 존재다. 죽을 때까지.
지금 만약에 예수님이 피를 흘리면서 이 문으로 들어오면 우리는 신고할 거예요. 정말. 어디로? 경찰한테. 왠 젊은 낯선 청년이 피 흘린 채 들어왔다고. 그분이 내가 메시아라 하면 우리는 안 믿습니다. 왜? 우리는 이미 소속이 따로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수도공사하고 우리는 그냥 이용할 뿐이지, 예수님만이 십자가 졌는데 그게 나한테 구원의 효과가 주는 그러한 관계망의 세계를 우리는 낯설어 해요. 그건 우리한테 익숙지가 않습니다. 어색해요.
내가 뭔가 기도하고 헌금할 때는 그 관계가 익숙해졌어요. 내가 바쳐야 복 받는다, 이게 익숙해졌어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십자가 진 그것으로 이미 나는 본래의 내 자리, 아무것도 안 해도 구원되는 내 자리에 들어간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아요. 니고데모가 실수한 거예요. “어떻게 하면 하늘나라를 봅니까?” 본인은 실수인지도 모르지요. 주께서는 이렇게 하라, 하는 말은 주께서는 이렇게 하라는 말이 비로소 믿어질 경우에는 뭐냐 하면, 지금에 있는 실존의 자리에서는 안돼요. 니고데모가 정말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자기의 본래의 자리, 다시 말해서 나는 아무것도 하기도 전부터 나는 죄의 자리가 원래 내 자리인 것을 아는 순간 그 자리에 갔을 때, 비로소 주의 말씀이 이해돼요.
니가 거듭난다는 말은 내가 할 이야기가 아니고 주께서 그렇게 해주시고 우리는 수동적으로 그 효과를 주께서는 일을 다 해주시고 우리는 그냥 받기만하는 그러한 자리에 주와 함께 있는 거예요. 주와 함께. 그 영화를 보면서 대사에 대해서 충격 받은 대사가 그겁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다시 찾아왔잖아요. 베드로가 하는 말이 “주님, 이제 돌아오셨네요.” 라고 하니까 “돌아온 게 아니고 내가 너를 떠난 적이 없다.” 돌아오신 게 아니고 떠난 적이 없어요.
우리는 실존으로 생각하지만, 내 실존으로 생각하지 마시고, 따로 따로 생각하지 마시고, 우리가 오줌 쌌고 주님의 그 오줌을 밟아서 오줌 싼 나를 찾아온 거예요. 성령은 내가 저지른 죄에 대해서 성령은 죄라는 자갈길을 통해서 우리에게 오는 거예요. 그래서 성령은 우리의 기도를 안 들어주시는 거예요. 내 기도 들으라고 하시는 거예요. 우리가 내놓는 모든 기도 속에는 뭐가 들어있기 때문에? 성령을 탄식할 수밖에 없는 내용들이 담겨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그 기도라도 해야 될 이유가 그렇게 죄를 퍼트려 줘야 양탄자에 깔려가지고 그 죄를 죄라고 규정하시면서 찾아오시기 때문에 그래요. 10분 쉽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