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존재의 힘(히6;19) 140111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6. 5. 09:24

2014-01-11 00:41:13 조회 : 1646         
존재의 힘 140110 이름 : 이근호 (IP:119.18.9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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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20140110a-히6장19절(존재의 힘) - 이 근호 목사

히브리서6장19절하겠습니다.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이리 되어 있지요. 히브리서6장19절 이야기가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인데 왜냐 하면, 뭔가 닻을 걸으려면 단단한 어떤 디딤돌이 있어야 거는데 여기서 건다는 것은 히브리서에서는 약속에다가 장치를 한다는 뜻이거든요. 약속에다가. 

약속이라 하는 것은 자체가 이 세상에서 붕 떠 있는 겁니다. 옷 벗을 때 옷걸이 있잖아요. 옷 걸 때 아무것도 없는데 걸면 떨어지잖아요. 그렇지요? 이 약속이 지상에 머물러있는 것이 아니고 약속이 붕 떠 있는 거예요. 거기다가 만약에 옷을 건다면 다시 지상으로 도로 떨어지게 돼 있지요.

그래서 여기서 소망을 둔다 할 때, 소망을 어디다가 소망을 둘 것이냐, 하는 그 문제에 있어서의 실제 바탕은 이 세상에서 찾을 수가 없다 이 말입니다. 찾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교회에서는 소망을 어디다가 두는가 하면, 교회 부흥에 두는 거예요. 왜? 교회라는 게 부동산 아닙니까? 지적도 나오잖아요. 그게 교인수가 많아서 확장되면, 부동산이 늘어나겠지요. 건물도 늘어나고. 그러면 눈에 보이지 않습니까. 돈이 현금으로 직결되고 눈에 보이니까 그게 목회에 소망처럼 여겨지잖아요.

신년1월1일 설교할 때나 송년 예배할 때 항상 그 소망이 무슨 소망입니까? 약속에다가 소망두지 않지요. 보이는 곳에 교회에 부흥되라고 하잖아요. 그리고 교회부흥과 더불어서 여러분 가정에 잘 되기를 바라잖아요. 그런데 여러분 가정이 뭐냐 하면, 이 세상과 결합돼 있다 말이지요. 우리들 가정이 약속이 아니잖아요.

무슨 말인지 처음오신 분이 있어서 이해가 안 되는데, 나의 가정이 구약에 어디 나옵니까? 안 나오지요. 이 근호 가정이 구약에 나옵니까? 안 나오잖아요. 그럼 누가 어떤 사람보고 “아이고, 목사님 가정이 잘되기를 원합니다.” 하면 그거 성경에 없는 소리를 왜 하느냐 말이죠. 성경에 없는 것은 약속이 구축하는데, 약속을 모으는데, 거기에 재료가 될 수 없어요.

왜 나의 가정이 천국에 가야 됩니까? 천국은 약속의 구현인데, 약속에는 약속되지 않은 것은 천국에 직결이 안 됩니다. 알곡과 가라지가 빼내어서 약속된 것만 오게 되어 있어요. 약속된 것만 모으기 때문에 약속 안 된 것은 다른 말로 성경에 아닌 것은 천국에 가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제가 강의 다시 처음으로 할게요. 약속은 뭔가 소망이라 하는 것은 뭘 걸어야 되는데, 걸어야 될 그 소망은 지상에 있다? 없다? 없는 겁니다. 지상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에서 여러분 가정이 잘되고 교회가 잘되고 전부다 이것은 지금 성경 없는 소리를 하는 거예요. 이것은 소망해서는 안 될 겁니다.

예를 들면, 거지 나사로가 신년 예배 참석했을 때 소망이 뭐겠습니까? 빨리 몸 죽어서 어디 가는 겁니까? 죽는 거잖아요. 낙원에 가는 거잖아요. 그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앞집에 사는 부자가 만약에 신년 예배에 참석했다면 돈 많은데 미쳤다고 죽습니까? 돈이 많은데. 마저 쓰고 가야지요.  아마 부자가 지옥을 가서 그러는데 지옥가기 전에 오늘도 내 동생 다섯 명이 있는데 어쨌든 간에 불구덩이 피는 이 지옥은 오지 말아야지. 라고 살아생전에 자기가 소망했겠어요? 안 했겠어요? 안 하지요. 그러니까 지옥 갈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한 번 정리해 봅시다. 소망이라는 것은 어디서 나온다? ‘소망의 기초는 약속이다’ 이거 하나 초반부터 다잡고 갑시다. 소망의 기초는 약속입니다. 약속이 약속답게 펼쳐지기를 원합니다. 그거 해야 돼요. 하늘의 뜻이 이루어지길 원합니다. 그걸 해야 되지 땅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지길 원합니다. 하면 안 됩니다. 우리의 뜻이 하늘에 도달되면 안 돼요. 그건 약속이 아니란 말이지요.

그런데 소망의 기초가 약속인데 약속은 여기 히브리서 1장 15절~18절 보면, 그 소망, 그 약속을 누가 짊어지고 있지요. 누가 짊어지었는가, 아브라함이 짊어지고 갑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는 저주 받는다. 이리 되어 있거든요. 창세기 12장3절에. 만약에 아브라함을 보고 시큰둥하면 그 사람은 자동적으로 뭐가 오게 돼 있습니까? 저주가 오게 돼 있지요. 그러니까 가만히 있다가 저주받는 거예요. 굳이 아브라함 안 찾아갔는데 저주받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지정하기를 참으로 말이 어려워요. 하나님의 약속으로 약속이라 하는 게 이 세상에서 구체화하게 되면 움직이는 어떤 인물, 인물에다가 약속을 담아 실어버리는 거예요. 그러니 아브라함이 리아카를 끌고 간다고 보면 돼요. 요새로 하면 1톤 트럭 운전하는 걸로 보면 돼요. 좀 더 크다 하면 컨테이너 운전사. 여기에 약속이 아브라함과 더불어 같이 움직이는 거예요.

움직일 때, 아브라함을 주의 깊게 보고 거기에 하나님의 복이 거기에 있다고 인정한 사람만 구원받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구원 안 받는 정도가 아니고 저주를 받는다니까요. 제가 지난 수요일 날 이야기했지요. 십일조를 안 해도 된다는 말이 아니고 하는 게 죄가 된다고 했지요.

주일 성수를 하게 되면 죄가 돼요. 주일 성수를 안 해도 된다는 게 아니고 주일 성수를 하면 안돼요. 하게 되면 죄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주일 성수하고 싶어 해요. 왜? 신앙인 티를 내려고. 집구석에 있으면 신앙인 아닌 것 같아. 그러니까 이것은 죽을 때까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거예요. 가만히 집에 앉아 있으면 몸살 나. 가야 되겠어. 가까운 교회라도.

그러니까 스스로 신앙인 아니면서도 신앙인 티를 내는 걸로 신앙생활을 대체하려하는 그런 시도가 있지요. 이게 아브라함에게 복과 저주가 독점돼 있으니까 아브라함에게 뭐가 실렸다 했습니까? 약속이 실려가지고 움직이는 거예요. 움직이니까 사람이 자기 일도 바쁜데 아브라함 일까지 신경 쓸 수 없잖아요.

그런데 아비멜렉 집에는 아예 아브라함 가정이 일부러 찾아들어요. 찾아들어서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에게 관심 없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그 분들이 찾아 들음으로 말미암아 아비멜렉 가정에 임신이 안 되는 거예요. 그 때 아브라함의 위상을 새롭게 알았지요. “야, 보통 분이 아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각각 자기 살기에 바빴어요. 그런데 소돔과 고모라에 아브라함의 조카가 투입되면서 거기에 조카를 보면서 기도를 열 번씩이나 기도하면서 뭔가 아브라함의 요소가 집결되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 소돔과 고모라에서 아브라함의 위력을 실감하는 사건이 벌어지지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건졌다. 이 대목이 창세기 19장29절,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그 엎으시는 중에 내어보냈지요. 이것은 우리네 상식과 다릅니다. 왜냐 하면, 우리가 보기에는 롯이 구원받은 것은 롯 본인의 개인적인 믿음이잖아요. 우리가 다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아브라함이 천사를 영접한 게 아니고 누가 영접했습니까? 롯이 영접했고 롯이 천사 말을 들었고 롯이 불량배를 내쫒았고 그리고 롯에 의해서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지만 두 딸은 시인했고 따라와서 구원받았고, 모든 일이 롯이 알아서 한 걸로 되어 있는데 창세기 19장 29절에서는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엎으시는 중에 내어보낸다 말이지요.

그러니까 이게 성경이 우리의 성급함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구원 받은 본인의 선한 행동, 바른 경건 된 행동, 신앙적 행동이 본인을 구원했습니다. 라고 알고 있는 우리에게 생각을 엎어버리는 거예요.

자, 박 집사님 천국 가게 될 때에 앞에 수위천사가 묻습니다. “어떻게 여기에 오시게 되었습니까? 묻는다면 뭐라 해야 돼요? ”제가 신앙생활 잘 했습니다.”하게 되면 이것은 창세기 19장 29절과 안 맞지요. 미리 연습합시다. 누구를 생각하사 우리를 구원한다고요? 아브라함은 옛날 언약이고, 새 언약에서는 예수님을 생각하사 (아무개)를 이 세상에서 구원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을 연습만해서 되는 게 아니고 이 세상 살아가면서 실제적으로 그러한 교체가 일어나도록 사태가 일어납니다. 계속 사태가 일어나지요. 또 한 가지 예를 들면, 다윗이 골리앗을 붙을 때, 다윗이 골리앗을 이겼다. 이건 어린아이도 다 알잖아요. 그런데 다윗 본인은 절대로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어요. 뭐냐 하면, 이 골리앗 앞에 내가 있는 것이 아니고 누가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계신다.

이것은 사도행전 3장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미문에 앉은뱅이를 낫게 할 때에 그 베드로와 요한은 자꾸 다른 분이 부활해 계시다고 이야기해요. 우리는 목격자라고 이야기하는 이유가 목격자라 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분을 보이는 분보다 더 있는 존재로 삼았을 때는 목격자가 돼요.

남들 보기에 보이지 않는 분인데 그 분이 모든 사태를 다 시나리오를 짜고 일부러 사태를 유발시킨 거예요. 안 가려고 했는데 베드로를 밀어서 가라고 했고 그 애보고 지시하라고 했고 베드로가 지시한대로 나사렛 예수 이름대로 하고 눈치 봤고, 베드로와 요한은 항상 주님 눈치보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베드로와 요한의 능력으로 이 사람을 병 낫게 했다. 아, 병 낫는 은사를 가졌다. 이렇게 생각한 거예요. 그러니까 부활했다는 거죠.

오늘 소망, 약속 언급하면서 반드시 생각해야 될 텐데, 부활했다는 말은 두 가지 절차가 있어요. 하나는 뭐냐 하면, 예수님이 살아있다는 거예요. 두 번째가 어려워요. 두 번째 아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예수님이 살아있다는 것은 지식으로는 알고 있거든요. 부활? 죽었다가 살아났잖아. 다 아는데.

두 번째가 뭐냐 하면, 살아 있다가 예수님에게 속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는 죽어 있다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났다가 부활의 의미의 되풀이, 반복입니다.  부활은 누가 살아있어서 살아있는 우리에게 합류하는 게 부활이 아니고 우리를 죽은 자로 간주하고 확인하기 위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의 손에 의해서 죽임당한 분이 살아남으로 말미암아 살아나온 자가 우리한테 임하므로 우리는 살아있어도 이것은 살수 없는 스스로는 살 수 없는 죽은 자라는 것을 확인해주는 의미로 예수님이 부활한 거예요.

부활했으면 여기서 뭐가 나오는가 하면, 기능이 나오거든요. 이 기능이 뭐냐, 부활의 기능이라는 겁니다. 십자가마을에서 이 풍호라는 분이 질문을 했지요. 마지막 답변이 그거였어요. 에녹과 우리의 예수 안에서 어떻게 연결됩니까? 했을 때, 이렇게 했습니다. 로마서 8장 10절, 11절 이야기했지요.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되어 있어요. 성령의 안목에서 보면, 우리는 완전히 죽을 존재에요.

성령이 왔다는 말은 성령께서 이렇게 안경 쓰고 보실 때, 요걸 언제 살려내지? 요렇게 보시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살아있다고 여길 때, 성령님이여, 살아있는 나에게 복을 주옵소서. 성령이여, 이런 식으로 자기가 자꾸 살아있다고 착오를 벌이는 겁니다. 성령은 우리를 죽은 자로 보고 우리는 살아있는 인간이 살아있는 성령을 마음에 모시면 되는 줄 알고 있어요. 그것은 바로 로마서8장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 부활이 중요한 것은 반복한다는 게 중요해요. 반복할 때 실제적으로 우리의 모든 사건,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죽어있는데 오늘도 이렇게 눈뜨고 있는 것은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시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아직도 심장은 뛰고 아직도 몸은 부지해야 될 그러한 힘든 숙제를 안고 있는 겁니다.

이 시간 죽으면 참 좋겠는데, 그러한 혜택은 우리한테는 안 주고 그냥 자식 낳고 딸 결혼 시키고 죽어도 되는데 그러한 혜택은 주께서 허락을 안 하시고 계속 못 죽도록 살려내고 있어요. 사도바울이 그걸 알고 내 소원이 있는데 이 몸을 떠나서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했어요. 제대를 하는데 병장 달고 오래 갈 수도 있어요. 북한이 내려오면 제대 보류, 연기할 수가 있어요.

자, 지금까지는 서론이고 쉬운 거고요, 지금부터 어려운 거 합시다. 뭐가 어려운가하면, 어떻게 세상과 결합되지 않는 약속이 거기다가 소망에 갈고리를 걸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왜냐 하면, 우리는 세상에 속했기 때문에 세상 것을 소망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스스로 내가 내 소망을 내가 스스로 그걸 거두어버리고 거기다가 약속이라는 소망을 대체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한테 있느냐, 턱도 없는 소리지요.

애를 둘 낳고 나이 한 50돼서 별 할 일 없으면 늦둥이 한 번 볼까, 그 정도로 우리는 세상 적으로 소망하는데, 늦둥이도 이쁘다던데, 그럼 늦둥이 낳고 미운7살 되면 또 임신해가지고 하나 더 낳아? 하는 식으로 자꾸 뭔가 우리의 몸이 세상적인 것을 소망하다보니까 하나가 뭔가 완료가 되면 완성이 되면 또 세상적인 것에서 소망거리를 만들어내지 않으면 우리가 너무 허전해 해요. 우리 마음이 허전해져요. 우울증 걸리고. 등산 다니는 것도 한 두 번이지 관절 안 좋으면 다니지도 못하고.

그래서 지금 숙제가 뭐냐 하면, 히브리서에서는 약속에다가 소망을 걸으라고 했는데 말씀은 우리한테 무책임하게 이야기하는데 우리는 그럴 자격도 없고 그럴 마음도 없고, 그럴 능력도 없고 우리는 그냥 세상만 바라보는데 성경에서는 약속에다가 소망을 걸으라, 이렇게 되어있다 말이죠. 그 소망은 이 세상에 없는 것이고 추적해보니까 소망은 한 자리에 있으면 우리가 찾아가겠는데 이게 아브라함과 이동하고 있는 거예요.

아브라함에 하나님의 약속이 묻혀서 그 약속이 아브람을 아브라함 되게 변화시켰다고 지난시간에 이야기했잖아요. 약속이 사람을 바꿔요. 제가 지난  주일 설교에 그런 이야기했지요. 옷 맞춰놨으면 그 다음에 가봉해야 된다고 했지요. 가봉. 오랜만에 듣는 소리 아닙니까. 가봉한다는 말은 옷을 입을 때  맞추잖아요. 천국의 맞춤. 천국에 합당한 인간되기 위해서 이 땅에서 가봉 작업을 하는 겁니다. 바늘로 꼽아서 피팅 작업을 하는 거예요. 맞춰야 하니까. 이 몸 가지고서는 안 되니까.

그래서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바꾸고 야곱을 이스라엘로 바꾸는 거예요. 피팅작업을 해야 되니까. 그렇다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그런 식으로 그 나라에 갔다면 우리라도 예외가 아닌 거예요. 베드로가 자기가 뭘 좀 알았다고 생각했지만 결국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씩 부인했잖아요. 그걸로 끝났습니까? 다시 성령이 찾아오셔서 피팅작업을 해가지고 베드로로 하여금 원치 않는 길로 가서 기어이 천국에 가게 해내시는 겁니다. 사도바울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이런 작업들이 오늘날 어떻게 이루어지느냐 하는 것에 대해서 지금부터 제가 강의하겠습니다.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에 이렇게 먼저 깔아놔야 돼요. 다 같이 열왕기상11장 1절,3절 찾아봅시다. “솔로몬왕이 바로의 딸 외에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하였으니 곧 모압과 암몬과 에돔과 시돈과 헷 여인이라”  3절, “왕은 후비가 칠백인이요 빈장이 삼백인이라 왕비들이 왕의 마음을 돌이켰더라” 되어 있지요. 왕비들이 왕의 마음을 어떻게 했습니까? 돌이켰다고 되어 있지요. 약속에다가 닻을 걸어라, 우리 같으면 아이고, 믿지 뭐, 굉장히 쉬운 거 같은데 하나님께서 이 구약에 또 솔로몬 왕을 이렇게 사건을 제시하는 것은 어떤 인간도 육신으로부터 약속 쪽으로 얼굴을 돌린다던지 마음을 거기다가 돌린다는 것이 어느 정도 어려운 가를 아주 끈질기게 버티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을 이 육신이 얼마나 안 떠나려고 꽉 쥐고 있다는 것을 구약을 통해서 낱낱이 보여줍니다. 욥이란 사람은 대단한 신앙인이잖아요. 그런데 자식 죽을 때도 주신자도 하나님이시고 재산 날아갈 때도 이렇게 했는데 몸이 아플 때는 기어이 반항하잖아요. 끈질기게 마지막 반항.

심지어 예수님도 쓴잔을 마시라 했을 때 뭐라고 했습니까?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이 그냥 넘어가게 하옵소서. 그러니 우리에게 히브리서6장에서 약속을 믿으라고 굉장히 쉬운 말로 약속의 소망 걸으라, 너무나 간편하게 툭! 던지듯이 이야기하는 이야기가 우리한테는 불가능한 겁니다.

그런데 불가능 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왜 하느냐, 이 말은 우리보고 약속을 믿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고 평소에 우리가 이 말씀 들을 때에 갑자기 마음에 빗장을 걸어버리고 빼꼼히 얼굴 뵈면서 지금도 내가 약속을 믿습니다, 하고 잠시 내뱉고 쏙 다시 들어가는 절대로 남한테 안 빼앗기려는 자기만의 본부를 아주 다지고 다지면서 자기 사수와 방어에 더 굳세게 나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뭔가 빼앗으려고 훅 달려들면 우리는 후후후 안돼요. 하고 움찔거리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교회 다니면 다닐수록 우리는 빼앗기고 싶지 않은 귀중한 것을 더욱 깊숙한 곳에다가 금고에다가 하루에 비밀번호 12번도 바꿔가지고 하나님도 비밀을 못 풀도록 우리는 숨어들어가는 게 있어요.

그게 뭐냐, 솔로몬처럼 살아보겠다는 거예요. 솔로몬 이야기 나왔을 때, 남자가 돼가지고 평생을 한 여자만 사귄다는 것이 도대체 이게 남자인가! 천명까지는 아니어도 세 명 정도는 아, 진짜 미치겠다. 이러고 싶은 거예요. 그러나 세 명되어 보세요. 세 명 해봐, 열 명 정도는 돼봐야겠다. 이건 남자뿐만이 아니고 여자도 마찬가지에요. 갱년기 해가지고 보기만 봐도 꼴 보기 싫고 등짝 때리고 싶은 그런 남편보다도 이 50나이에 한번 다시 청춘을 낭만을 한 번 불태워 봐! 그러고 싶은 거예요. 그것도 단 한명만. 그런데 단 한 명만 해보세요. 이제 한명 안돼요. 남편이 다섯이 있고 지금 사귀고 있는 남자는 6번째입니다. 요한복음4장에 나온다니까요. 사마리아 여인 될 수 있어요. 사마리아 여인 돼도 괜찮아요. 구원받으면 됐지.

이게 윤리 도덕이라는 것은 자아를 느낄 때는 반드시 마귀가 그렇게 시켜요. 윤리 도덕이라는 것은 내가 어떤 존재일까? 할 때 갑자기 마귀가 윤리 도덕으로 확 덮치게 돼요.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선악과 딴 인식을 가지고 덮치기 때문에 이러한 포위망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다섯 번째 남자 사귀고 지금 여섯 번째 사귀고 있습니다. 하는 이게 주님 귀에는 아무 의미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착하지 마시고 착하다, 나쁘다가 의미 없어야 돼요.

의미 없으려면 방법 하나밖에 없어요. 알려드릴게요. 오늘 잘 오셨습니다. 내가 안 사라지면 윤리도덕이 찾아오고 내가 사라지면 윤리도덕이 아무 의미 없어요. 그래서 진짜 주께서 원하는 것은 우리가 없는 거예요. 우리가 있으면서 착하게 사는 게 아니고 내가 너무 작아져서 먼지가 되는 거예요. 작다, 작다, 해도 너무 작아가지고 나중에 부셔져가지고 후 불면 날아갈 정도로 하나의 가루가 될 때, 가루가 착한일 한들 바람을 피운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욥기에 나와요. 

주여, 연약한 인간이 선하게 살고 악하게 산들 주님보시기에 하나님의 거룩  앞에서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제대로 욥이 이야기한 거예요. 그 말이 맞아요. 욥의 잘못은 아무 의미가 없는데, 자기가 하나님 저를 의롭게 봐  달라, 하는 그게 잘못이었어요. 성경을 그만큼 봐도 욥의 잘못을 모르겠지요? 이제는 아시기 바랍니다.

욥은 의미 없는데 내가 착하다는 그 문장을 놓치기 싫어서 그걸 금고에 넣어놓고 나는 착해. 나는 어떤 경우라도 의로워. 그거 하나 안 다치려고 마지막 버티는 거예요. “주여, 저 의롭잖아요. 의로운데 왜 고난주십니까?” 하나님께서는 니가 있다고 여기니까 의로 우냐, 안의로 우냐, 계속 문제거리가  돼버려요. 말썽꾸러기가 돼버려요. 결국은 욥이 믿는 것은 하나님, 하나님 하다가 믿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게 아니고 내가 의롭다는 그것을 마치 약속에 들어가는 것처럼 그렇게 오인한 거예요.

나는 약속에서 뺍시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게 약속이거든요. 약속은 내가 죽고 나는 의미 없이 죽고 내가 의미 있는 것은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그것만이 의미 있다는 그것이 약속이다 말이죠. 그게 갈라디아서2장20절이잖아요. 그러니 18절,19절 뭐냐 하면, 왜 사람들은 율법을 가지고 구원받고자 하느냐 하는 이야기를 먼저 깔아요. 율법이 문제가 아니라 율법이 주어지게 되면 율법 앞에서 다음에 누가 등장하느냐 하면, 내가 지킬게요. 하고 나와요. 그러니 반드시 율법에서는 “내가 지킬게요.” 라고 나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글씨를 써서 바리새인들을 간음한 여인 앞에 다 쫒아 낼 때에 뭐라 했습니까? 죄 없는 너희는 남고 죄 있는 너희는 나가라는 뜻이거든요.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할 때 그 ‘죄 없는 자’가 날아오는 표창 같은 거예요.  주님께서 중국영화에 나오는 표창 같아서 던지니까 다 꼽히는 것처럼.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할 때 도망가면 안돼요. 바리새인들이 그 소리를 들을 때 “나, 없다.” 이러면 끝나는 문제를 도망가 버린 거예요.

주님은 우리를 구원할 때 주님만 있고 나를 없애기 위해서 우리를 뽑아 세운 겁니다. 참, 이 말 하는데 오랜 세월 걸려요. 이 말 알아듣는데. 주님한테 이렇게 멱살을 쥐어야 돼요. 여러분, 정육점에 가면 불쌍한 모습 있지요. 고기 덩어리가 S자로 만든 고리에 걸려가지고 턱~ 늘어져 있잖아요. 이게 주께 매인바 된 존재입니다. 이게. 예수 안에 매인바 된 존재에요. 베드로가 이 꼴 됐습니다. 원치 않는 길로 가면서 이런 식으로 질질 끌려갔어요.

우리가 그 모습을 제가 이야기한다고 믿어지는 것은 아니고요, 제가 아까 아브라함이 아비멜렉 집에 찾아왔다고 했지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면서 일이 벌어져요. 우리는 항상 주님 앞에 대적하려고 해요. 마르다 같아. 자꾸 주님 맛있는 거 대접하면서 도망치고 있는 거예요. 요거 받으시고 요거는 손대지 마시고.

그럼 주님께서는 대접받고 더 깊숙이 안방까지 쳐들어오십니다. 나중에는 우리가 더 이상 물러설 때도 없고 완전히 난감하지요. 나중에는 이리 되지요. 요나처럼 차라리 물에다가 집어넣었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리 되지요. 요나의 일은 요나가 고국에 있을 때 일한 것이 아니고 요나가 도망쳐야 돼요. 도망쳐서 자기 본색을 드러내고 추격자인 하나님에 의해서 붙잡혀서 바닷물에 빠지는 거, 빠졌다가 고래배속에 들어갔다가 사흘 있다가 나오는 거, 이 모든 것이 요나가 기획한 게 아닙니다. 요나가 상상한 게 아니지요.

그러면 오늘 본문 다시 돌아봅시다. 소망한다는 것은 뭡니까? 우리가 기대한 소망은 소망이 아니지요. 소망이라는 하나의 흔적만 남고 소망의 내용을 채우는 것은 이것은 주께서 찾아와서 어떻게 나를 가지고 어떤 영화를 만드느냐, 그것은 주님 손에 달린 문제지, 우리가 미리 상상하지 맙시다.

‘아, 이따가 내가 강의하다가 암에 걸렸는데, 내가 죽게 되어서 기도하는 가운데 갑자기 암이 나아가지고’ 자꾸 이렇게 상상하지 마세요. 그것도 어디서 들은바 간증집회에서 들은 바를 가지고 자꾸 멋있게 포장하는데 그래서 간증집회가 나쁜 게 있어요. 고난 받는 것도 자꾸 조작이 돼요. 흉내나 모방을 한다고요. 고난 받는 것을 흉내내가지고 고난 받는데서 오는 쾌락 같은 거. 마조히즘 심리학이라 하는데. 얻어맞는데서 오는 어떤 쾌락 같은 거.

예수 복음으로 고난 받으면서 자기는 즐거워하고 있어요. “주여, 지금 이 아픔 주께서 주신 아픔이지요?” 주께서 “놀고 있네. 어디서 상상하고 있어.” 자꾸 테레사 수녀, 한 경직 목사 자꾸 그런 걸 모방하지 마세요. 지금도 신사참배 일이 벌어져가지고 다른 사람은 다 천황한테 절하는데 혼자 절 안하는 이 멋드러진 모습을 막 상상하고 그러지 마세요. 멋있게 살려고 하지 마세요. 전혀 멋있지 않습니다.

열왕기상11장5절에 보면, 이제부터 본격적입니다. “이는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을 좇고 암몬 사람의 가증한 밀곰을 좇음이라” 밀곰이 어디서 서식하는 곰입니까? 곰 아닙니다. 그냥 발음대로 밀곰이에요. 그 다음에 7절에 보면, 그모스 나오지요. 모압의 가증한 그모스, 암몬족속의 가증한 몰록 신 나오고. 자, 열왕기상11장에 나오는 내용은 이겁니다.

솔로몬이 여자들 때문에 마음을 돌이켰지요. 돌이켜서 그 다음부터는 뭘 섬겼다 했습니까? 아스다롯을 섬기고, 밀곰, 그모스, 몰록 라는 신들이 나와요. 그모스와 몰록과 밀곰과 아스다롯의 각자 차이는 뭐냐, 이것은 의미 없어요. 뭐냐 하면, 우상의 특징이 뭐냐, 하나로 묶을 수가 있어요. 언약이 없습니다.

우상의 특징은 인간이 우상을 제조했기 때문에 우상을 섬길 때의 그 소망은 그 내용은 어디서 만들어 내느냐 하면, 본인이 마음속에서 품고 있던 욕망에서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그모스, 아스다롯, 밀곰, 이것을 요즘말로 하면 점치기, 점보기, 궁합보기, 사주팔자보기, 이런 겁니다. 요새로 더 말할 것 같으면, 교회 다니기도 포함되지요.
 
왜냐 하면, 사람이 자기 나름대로의 희망과 소망 없이 교회 다니는 사람 있겠습니까? 없지요. 그저 교회 안 나오는 우리 남편도 나와 같이 성경책 갖고 같이 출석하면 얼마나 좋겠느냐, 이렇게 소망하는데. 얼마 전에 기사한 번 받는데요. 시립대 부총장하다가 퇴직한 사람인데 마누라를 개패듯해가지고 고소당한 거 했어요. 짧은 기사에 보니까 남자가 괴팍해가지고 술만 먹으면 아내를 베개 해놓고 때리고 그 중에 기사가 재미있는 게 교회 갈 때도 아내가 늦장 부린다고 시계재서 다시 집에 갔다가 선착순 뱅뱅이 시켰다는 거예요. 교회 갈 때도. 도대체 이 사람이 교회를 어떻게 믿으면 마누라를 그렇게 구박하면서 교회 갈 때 아내를 그렇게 훈련시키는가, 무슨 교회신앙이 그런 신앙이 다 있는가 아주 신기했었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교회 올 때, 남편과 같이 교회 온다는 게 굉장히 소망이 되지만, 그것은 밀곰이나 아스다롯, 그모스, 몰록, 이런 것들을 섬길 때 특징은 다 나의 소망의 구체화란 말이죠. 나의 소망의 구체화. 나의 욕망의 구체화. 솔로몬은 하나님 나라가 와야 되기를 원치 않았어요. 그게 잘못이에요. 하나님의 언약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어떤 나라입니까? 하나님의 나라 되잖아요. 솔로몬은 어느새 이스라엘이 누구 나라가 됐습니까? 자기 나라된 거예요.

사울이 다윗을 구박할 때, 구박한 이유가 뭐냐, 이 이스라엘은 누구나라여야 한다? 바로 사울, 내 나라이어야 한다. 구약에서 그 이야기할 때 그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에게 뭘 시사하는 겁니까? 사람이 아무리 하나님, 예수님 믿어도 자기 나라가 무너지고 붕괴되지 않는 이상은 반드시 자기 나라를 위해서 신을 섬기는, 우상 숭배자로 전락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구약이 이야기하는 겁니다.

제가 지금 이야기하는 게 뭐냐 하면, 약속 위에다가 뭘 담아라? 소망을 담아라, 그 이야기하면서 계속 지금 솔로몬 이야기하고 있지요. 우리는 약속 위에 소망하라, “약속 믿지 뭐” 그거 아니에요. 약속 믿는 게 쉬운 게 아니에요. 뭔가 아브라함이 아비멜렉 집을 찾아오듯이 주께서 그냥 부활만 하시면 안 되고 부활한 주님이 우리 인생에 개입해줘야 돼요. 이거 아니면 우리 실패합니다. 우리는 구원에 성공할 수 없어요.

그러면 나의 소망으로 구원되는 게 아니고 주님의 소망 가운데 우리가 포함되어야 우리가 구원되는 거예요. “너, 구원되어야 돼!” 라는 것이 내 숙제가 아니고 주님의 숙제고 내 소망이 아니고 주님의 소망이에요. 그래서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믿음, 소망, 사랑은 영원하다, 이 말은 소망도 수입해야 돼요. 소망도 국산은 안돼요. 프라다 쯤 되어야 돼. 명품, 이태리에서 와야 돼요. 구찌. 이런 명품들처럼 명품이 명품답게 명품은 일련번호가 있어요. 딱 그 번호가 유지해야 돼요. 괜히 명품에다가 재봉틀해서 실밥 더 박으면 이거 완전히 명품 가치 날아가 버립니다. 믿음, 소망, 사랑이 명품입니다.

우리가 만든 믿음, 소망, 사랑은 가품이 돼가지고 재봉틀로 하던지 작두로 잘라내던지 조치를 해야 돼요. 그런데 우리는 아깝다고 내 믿음, 소망, 사랑을 절대로 안 자르지요.

사랑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흔히 세상에서 말하는 사랑은 어떤 사랑이냐 하면, ‘나를 혼자 두지 않는 것’ 이게 사랑이에요. 그러니까 누가 보디가드처럼 지켜줘야 되지요. 나를 지켜달라는 거예요. 여자가 결혼하는 이유가 뭔데요? 나를 그냥 놔두면 안 돼! 그게 약속이에요. 결혼식 때 머리가 파뿌리 되기까지 그거 다 쓸데없는 소리에요. 혼자 둘 거야, 말거야, 출장가면 전화 할 거야, 말거야, 하여튼 지금까지는 나 혼자 살았지만 당신 만난 이후는 당신이 어디 있더라도 나를 지켜줘야 돼! 그것보고 여자는 남자보고 “당신, 나 사랑해?” 라고 하는 거예요. 그 말을 알아들을 남자는 없습니다. 빨래 잘 해야 돼, 맛있게 요리해야 돼, 그렇게 이해하지 여자의 마음을 헤아릴 것 같으면 남자가 아니지. 그건 타락된 남자가 아닙니다.

세상의 사랑이라 하는 것은 나를 혼자 두지 말라는 거고, 천국의 사랑이라 하는 것은 나를 혼자 두지 말라고 앙앙거리고 앵앵거리는 그 인간을 제거하는 게 사랑입니다. 죽여 버립니다. 내가 안 죽고 번데기처럼 계속 살아있으면 구더기처럼 살아있으면 구더기가 발악을 해요. 앙앙거리면서. “하나님, 내가 하나님을 내 남편으로 여겼는데 내가 하나님을 믿고 제가 얻은 게 뭡니까?” 앙앙거리고 있어요. 그러니까 죽여 버려야 돼요.

십자가가 그겁니다. 같이 죽고 같이 사는 거예요. 십자가가 분명히 예수님 혼자 달렸다고 생각하는 그 십자가가 나중에 사도바울은 같이 죽은 십자가라고 로마서 6장에 나옵니다. 세례를 설명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혼자 죽은 십자가가 아니데이. 요게 바로 세례라는 거예요. 참, 어렵지요. 연합해야 된다는 것. 아무리 십자가 봐도 누가 연합한 적이 없었거든요. 이 십자가는 나 혼자 죽은 것이 아니고 살 사람을 연합해서 죽었던 십자가고 그것이 사건이다. 

그러면 그 십자가는 한 사건에서 있으면 안 되고 십자가가 쭉 쭉 늘어나야 되겠지요. 그림으로 그리면 바짝 야윈 십자가인데 로마서6장에서 사도바울이 말하는 십자가는 갑자기 뚱뚱해진 십자가, 쭉쭉 늘어난 십자가, 택한 백성을 전부 다 거두어서 집어넣을 수 있는 십자가, 그리고 이 십자가가 되려면 이것은 물리적 크기로는 안 되겠지요. 십자가를 예수님 키 재서 해야 되니까 안 되잖아요. 그래서 이걸 뭐로 바꾸느냐 하면, 사물의 십자가, 나무덩어리인 십자가를 ‘사건’으로 바꿉니다.

그러면 말씀이 뭐로 바뀌느냐, 모든 말씀의 해석은 반복 가능한 사건으로 바뀌어야 되지요. 솔로몬이 섬겼던 아스다롯, 밀곰, 그모스, 몰록, 이게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되면 나를 위하여, 나의 욕망을 위하여, 내 소망을 위해서 교회 가서 기도하는 것 그게 바로 우상숭배로 사건화 되는 겁니다.

구약은 솔로몬 살아있어요. 지금도 살아있고 솔로몬의 오류도 우리와 함께 살아있고 말씀은 이처럼 늘 살아있어야 돼요. 그래서 하이데거 철학자는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내가 말하지 말고 말이 나를 가지고 말을 상대방에게 건네야 된다. 이런 말 했어요. 말이 말하게 해야 된다.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했어요.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 나를 가지고 본인이 하고 싶은 말을 나를 통해서 내질러져야 된다는 그런 뜻이에요. 어째서 그것이 가능한가 하면, 철학적으로 보면 이게 가능해요. 뭐냐 하면, 누가 나에게 저녁때가 됐는데도 아무도 나에게 식사를 안 해줄 때 애가 그럴 때, 엄마한테 “엄마, 언제 오는데?” 무슨 뜻입니까? 배고프니까 밥 해 달라 했지요. 그러면 엄마가 제때 오지 않은 그 상황이 나를 통해서는 말이라는 것 “엄마, 언제 집에 오는데?” 라는 말로 바뀌어 진 거예요.

그 상황이 말로 표현된 것뿐이지요. 그러니까 나는 “엄마 언제 오는데”를 말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고 상황이 그렇게 몰아친 거예요. 멀쩡한데 “아, 왜 이리 아프지.” 이런 사람 없어요. 누가 발로 차면“왜? 아이고, 아파” 그러잖아요. 아프게 하는 상황이 우선이고 나는 그 상황에 말려들었고 따라서 내 입에서 나는 아파, 이런 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다 말이죠.

그러니까 인간이라 하는 것은 서로 서로가 말을 건네고 서로 건네는 그러한 상황이 세상 내에 존재라고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이라는 책에 나와 있어요. 제가 시민대학 강의할 때 보면 거기에 나와 있어요. 철학가들도 그걸 알아요. 짐작을 해요. 그래서 불트만이라는 신학자는 하이데거의 철학자의 말을 따가지고 그렇다! 해서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을 그런 식으로 설명을 했어요. 불트만도 대단한 신학자입니다.

방금 말씀이 우리를 가지고 했지요. 그러면 그걸 그대로 요한복음1장에 적용시키면 태초에 뭐가 있었다? 말씀이 있었고 그 말씀이 오늘날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고 싶은 말을 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잠시 있다가는 풀의 꽃 같고 우리는 풀의 꽃같이 다 지지만, 무엇은 영원히 서리라?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이사야40장에 나오는 그 말씀을 하이데거 철학을 이용해서 그렇게 설명한 거예요. 하이데거 나오니까 갑자기 철학가는 왜 하시는가 하지만, 그게 다 일리가 있어요.

다시 한 번 정리해 봅시다. 약속이라 하는 것은 과거의 일이 아니고 반복된다. 무엇으로? 사건으로. 그러면 우리가 그 소망을 갖는다는 것은 내가 약속을 믿는 게 아니고 그 말씀이, 그 약속이, 우리를 쳐들어오게 되면 나는 말씀의 폭풍에 휘말리게 되고 내가 살아가는 모든 것 가운데서 이건 내가 원하지 않는 소망인데 주님의 원하는 소망인데 그게 우리의 소망으로 나를 통해서 등장되는 그런 사태가 일어날 때 그게 바로 말씀이 우리를 가지고 말씀이 말씀화 되는 그런 일인 것입니다. 정리 되었지요.

그래서 발걸음을 그냥 걷는 것도 되지만, 지금 발걸음을 세시는 분이 내가 아니고 주님께서 발걸음을 지금 걷도록 해주신다. 이런 마음으로 살아가는 그것이 바로 거지 나사로가 사는 삶과 같은 삶이 되겠어요. 아니 발걸음을 세는 것이 우리의 소망이었습니까? 아 맞춰야 되는데. 오늘 저기까지 256걸음 맞춰야 되는데. 그걸 소망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만약에 우리가 거지 나사로가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오락가락할지 모른다면, 지금 내가 걷는 것도 누구의 은혜다? 주님의 주신 힘으로 걷는 것이다. 이게 바로 거지 나사로의 삶이잖아요. 그것도 모르고 지나가면 부자가 놀리지요. “부자는 몰라, 니는 몰라” 부자는 왜 모르느냐 하면, 본인 자기가 있잖아요. 솔로몬처럼. 자기가 있으니까 자기가 부자 된 것은 다 누구 덕입니까? 자기가 자기 덕이 되는 거예요.

스피노자가 그런 이야기했어요. 인생을 만드는 것은 내가 만든다. 했어요. 이것은 너무나 상식적이고 너무나 일리 있어가지고 멍하지요. 내 인생은 누가 만든다? 내 인생은 내가 만든다. 이게 기본이고 그럼 내가 교회 가는 것도 내가 교회가야 내가 잘되겠다하는 누가 그걸 기획하고 누가 그 작전을 꾸민 거예요? 내가 꾸며서 교회 갔고 내가 알아서 예수 믿고 천국가고 천국 가는 모든 공로가 나로부터 시작해서 나로 말미암아 나에게로 가는 그 업적으로서 나중에 구원받는 셈이 되어 버려요.

거기에 대해서 목사가 칭찬을 늘어지게 해버리면 우리는 교회 가서 드디어 존재의 의미를 알고 칭찬받는 재미로 교회 간다니까요. 교회에 사람들이 왜 오는 줄 알아요? 누가 자기를 인정해주고 자랑해주고 칭찬해주고 격려해주는 거예요. 알아주는 거예요. 그럴 때마다 생각하는 것은 노아가 설교를 어떻게 했습니까? 잘했지요. 교인 수 몇 명이었습니까? 자기 식구 빼놓고 없어요. 제로. 자기 식구 빼놓고 한 명도 없어요.

노아는 단 한 명에게도 전도 못한 그것이 전도에요. 노아의 전도에요. 노아가 만약에 한 명 전도했으면 노아는 지옥 갈 뻔했어요. 제대로 안전했다고. 천국 오지도 말아야 될 인간을 같이 데리고 왔느냐고 아마도 꾸중 들었을 거예요. 노아가 제대로 전도했기 때문에 아무도 전도하지 않았어요. 아무도 구원받지 못하고 달랑 자기 식구들밖에 없었고 자기 식구들도 다 믿었습니까? 함은 나중에 이상한 소리하지요. 그게 바로 주의 소망입니다. 방주에 8명 이외에는 절대로 타서는 안 되느니라, 하는 소망을 노아는 몰랐어요. 퉁탕 퉁탕 지으면서 장충체육관 넓게 지으니까 수천 명 들어올 줄 알았지.

퉁탕 지을 때, 처음부터 자기 식구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렇게 짓지를 않았을 거예요. 소망을 몰라요. 주께서 이끌어주실 때 우리는 나의 소망은 철저하게 묵살되고 주의 소망만 철저하게 살아나는 그것을 증언하는 그걸 나의 소망과 어긋나는 소망을 주신 것에 대한 그 고백과 찬미와 영광을 돌리려고 우리로 하여금 허접스러운 우리를 오늘도 우리를 가지고 다루시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공은주 (IP:218.♡.193.179) 14-02-07 17:09 
안양20140110b-히6장19절(존재의 힘) - 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이름의 힘이라 할 때, 힘과 이름, 관련성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한데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할 때, 이게 보통 어려운 말씀이 아닌 게 왜 그러느냐 하면,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할례는 마음에 받아야 할례지 육신으로 받는 할례는 소용없다 했지요. 그러면 여기서 문제가 생겨요. 마음에 할례를 받고 거기다가 추가해서 이름을 불러야 구원받습니까? 아니면 마음에 할례는 안 받고 주의 이름을 불러야 구원받습니까?

구원받는 조건에서 마음에 할례를 받으라가 들어가 버리면 누가 밀리게 돼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가 밀리게 돼버리지요. 이 의문점을 어떻게 해결할 거예요. 마음에 할례를 받아야 참된 구원받은 자라고 했을 때, 마음에 할례를 받으려고 애써버리면 우리가 다시 어디로 돌아가는 겁니까? 옛날 유대교로 되돌아가는 거죠.

차라리 사도바울이 마음에 할례 같은 거 필요 없어. 예수만 믿어. 이러면 차라리 편하겠는데. 마음에 할례를 받으라, 로마서10장13절에서는 주의 이름을 불러라, 이렇게 하니까 우리는 갑자기 할 게 너무 많아지는 거예요. 그래서 한국교회에서는 뭐냐, 개혁주의에서는 예수 이름을 일단 부르고 난 뒤에 그것 가지고는 모자라다는 거예요. 그것도 모자라고 그 다음에 돈을 사랑하지 않아야 되고 나그네 대접해야 되고 교회 봉사도 해야 되고 돈도 내야 되고 여러 가지 해가지고 이렇게 해야 구원을 받든지 상급을 받든지 보너스를 받든지 이리 받는다는 거예요.

왜 그렇게 마음에 할례를 받으라, 주의 이름을 불러라, 이 말을 하는 사도의 이유가 뭐냐 하면, 이름이라는 게 우리에게는 이름이 없어요. 우리한테 이름이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이름이 주어지는 겁니다. 왜냐 하면, 이름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뒤에 뭐가 붙느냐 하면, 이름의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이름은 살리는 능력이 아니고 죽는 쪽으로 가게 만들어요. 우리의 이름이. 그 이름이 무슨 이름이냐 하면, 바로 ‘아담’입니다. 아담. 아담이름 제가 지었습니까? 여러분이 지었습니까? 누가 지었지요? 창세기에서는 아담이름을 하나님이 지었다고 했잖아요. 이번 대전강의에서는 그걸 세척해버리면, 누가 지었는가 하면, 예수님이 짓게 되었어요. 창세기에서는 하나님이 창조했지요. 창세기 세척을 해버리면, 예수님이 천지를 창조한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한 것은 그것은 옳지 않은 생각이 돼버립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성경이 주어진 이상은 성경은 고상한 그냥 중립에 있는 아무 탈이 없는 우리에게 성경을 준 게 아니고 우리에게는 이미 다른 힘이 있어요. 다른 힘. 무슨 힘? 악마의 힘. 다른 악마의 힘에 의해서 우글거리고 있는 입장에서 성경을 줬기 때문에 성경을 준 것은 우리로 하여금 성경을 지켜라가 아니라 니 속에 있는 니 힘이 너를 앞장세우게 하라, 니가 나서지 말고 니를 장악하고 니를 조정했던 힘이 너를 앞장세우고 니는 뒤로 빠져라, 이 말입니다.

바리새인보고 주께서 하신 말이 “너희 아비는 마귀다.” 했을 때에 “내가 너하고 상대하는 게 아니야.” “바리새인인 너하고 상대하는 게 아니야.” “빨리 너 배후, 너를 장악했던 그 배후 빨리 나오라 해! 빨리 나와!” 고 내용이 반복되는 사건화 될 때 그게 요한계시록이에요. 주님께서는 요한계시록은 누구하고 상대합니까?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하고 상대하잖아요. 우리는 빠지면 돼요.

두 번째 시간은 의외로 간단한 겁니다. 우리가 스스로 힘을 쓰지 마세요. 자기한테 힘주지 마시고 “우리는 힘없습니다.” 하고 뒤로 빠지면 돼요. 빠지면 우리를 앞장세우고 숨어있던 그것이 “빠지기는 뭘 빠져!” 하고 우리를 쥐고 십자가하고 정면대결에 나서면 우리가 사전에 미처 몰랐던 나보다 더 힘센 내가 나를 장악하고 있다는 힘이 나를 데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과 대치하는 그러한 상황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방금 이야기한 거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①②③으로 해볼게요. ①신이 있다. ②신이 없다. ③신은 무의미하다. 성경을 보면서 지금 우리가 오늘 히브리서6장20절하려고 하는데, 20절하면서 지금 약속에서 20절 넘어오는 그 과정을 설명하는 겁니다. 할 때, 우리는 항상 이 성경을 보면서 ‘꼭 이걸 봐야 돼?’'안 봐도 생활에 지장 없잖아!’ 라고 할 수가 있어요.

우리가 성경을 늘 보면서도 ‘참 지금 뭐 부엌에 내가 주전자에 물 얹어 놨지.‘ 그렇게 생각할 때 지금 물 얹어놓은 게 더 중요해요. 성경보다. 물 얹어놓은 것은 현실이고 성경 보는 것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그만인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신은 우리 일상에서 무의미한 거예요. 무의미한 것에서 신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이리 되는 겁니다.

따라서 성경을 해석할 때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하면, 신이 없다, 로부터 출발해야 나의 실상이 드러나는 겁니다. 신이 없다면 이 성경도 볼 필요도 없는 거죠. 그게 우리 몸에 맞아요. 보다가 안 봐도 되는 이유가 신은 애초부터 없기 때문에 요 성경은 신이 있다고 우기는 사람이 지은 소설이기 때문에 없는데 그 애들이 뭐라고 하는지 보자. 완전히 마르다예요.

신은 원래 없는데 혹시나 그들이 하는 소리에 있을 수 있다 해서 보는 거 이렇게 볼 때, 해석을 할 때, 신은 네가 아무리 있다고 해도 신은 없는 거야, 라는 마음을 가지고 성경을 봐야 됩니다. 그 증거가 7장 3절에 봅시다.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없다가 몇 개있어요? 5개 있지요. 없는데 이름이 뭐냐, 멜기세덱이죠. 이름의 힘입니다.

왜 자꾸 없다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보고 하는 거예요. 너희들이 아무리 성경을 봐도 너는 하나님이 없다고 여기면서 성경을 그냥 건성건성 보잖아. 따라서 내 쪽에서 너희에게 다가갈 때도 너희들이 아무리 잡아도 없이 보이는 사람을 내가 앞장세우겠다는 겁니다. 없이 보이는 사람들.

그러면 우리는 있어야 믿잖아요. 그런데 하나님 쪽에서 제시하는 것이 없는 분을 가지고 믿어라, 할 때 우리는 믿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그러면 하나님이 없다고 여기는 사람이 기껏 혹시 있을까 잡는 방법이 뭐냐, 있는 사람들을 봐요. 나도 아브라함처럼 되어볼까, 다윗처럼 되어볼까, 전부다 있는 사람이잖아요. 있는 사람을 다윗처럼 될래, 나는 예수님처럼 될래, 사도바울처럼 될래, 라고 한 것은 결국은 멜기세덱의 의미를 나는 안 믿겠어. 하는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죠.

정작 믿음은 없으면서도 누굴 본받음으로 말미암아 나도 믿는 대열에 합류했다고 함으로서 만약에 신이 있을 때를 대비해서 보험하나 들어놓는 거예요. 히브리서11장 미리 한 번 봅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지요. 그러면 여기에 나오는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 모든 사람은 보이는 걸 봤다는 말입니까? 보이지 않는 걸 봤다는 말입니까? 보이지 않는 걸 봤지요. 이게 일반상식에서는 안 통한다 말이지요.

일반상식에서는 내가 여기 있음에 내가 있기 때문에 내가 평소에 여기 있는 것을 보는 그 방식으로 어디 있는 것을 내가 잡는 방식으로 내 소유화시키고 믿으려한다 말이죠. 하나님이 있으면 눈으로 보여주세요. 믿지 말래도 믿겠습니다. 하나님을 자꾸 믿으려고 하는데 나타나지는 않고 나보고 보이지 않는 것을 믿으라고 하는 것은 억지입니다. 나보고 더 어떡하라고? 어쩌라고? 보여줘.

제가 아주 젊을 때 본 영화가운데 ‘사랑과 영혼’이란 고스트 영화가 있었어요. 데미무어가 나와 가지고 도자기 굽고 하는 유명한 노래가 나오지요.  사랑과 영혼을 하면서 영혼은 있다. 죽고 난 뒤에 데미무어의 사랑하는 사람이 천국 가있다는 것을 표시하기 위해서 기껏 보여준 것이 동전밀기입니다. 동전밀기, 지하철 사고 직전에 구출하기, 그렇지 않으면 김 수현처럼 차가 절벽에 떨어지는데 힘을 다해서 차를 밀어내니까 전 지현을 살려내잖아요. 별에서 온 그대. 기껏 공중으로 사라졌다가 나타나는 것. 그럴 때 믿는 거예요. 야, 기적이다! 그 기적이 오늘날 기독교를 만든 거예요. 그 기적을 원하는 사람에게 기적을 말하면서 기독교를 만든 거예요. 대표적인 것이 순복음교회이고, 4가지 축복해가지고.

여러분, 그 기적을 눈에 보이도록 만들어 제공하겠습니다. 저처럼 따라 하기만 해봐라~~ 하면 방언도 터지고 병도 고치고, 부자 되고,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 하면 안되는 게 없고, 그거 바로 마귀가 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잡혔다 하면 도망쳐버립니다. 절대로 봤기 때문에 믿겠습니다. 하는 소리가 두 번 다시 안 나오게 만들어요. 볼 수 있는 것은 다 치워버려요. 내가 믿을만한 기적 같은 것은 다 치워버립니다. 이래도 믿을래? 이래도 너 믿는 거야? 안 믿는다고 자백해. 나는 믿지 않았다. 자백하란 말이야. 아이고, 아직도 성질 살아있네. 계속 믿을 수 있는 것 다 치워버려요. 남편이 교회 다니는 게 주의 기적이라고? 기도의 응답이라고? 다음 주에 남편 교회 안 나올 거야.

일체 내가 믿었기 때문에, 기도했기 때문에 이런 응답을 얻었습니다. 이런 걸 다 치워버려요. 다 치워버리고 도대체 나는 어떤 걸 봤기에, 어떤 것이 내 뜻대로 되었기에 믿습니다. 라는 말을 일체 하지 못하도록 하는 거예요. 왜? 우리 배후에는 뭐가 있기 때문에? 마귀가 있기 때문에. 나는 니하고 상대 안 해. 마귀가 무엇을 제거하고 싶은가 하면, 반복된 십자가의 사건을 흐지부지하는 걸로 계속해서 마귀는 갑니다.

왜냐 하면, 십자가에 의하면 이미 마귀는 결정 났어요. 이건 확정됐습니다. 유황불 들어가는 게 확정됐기 때문에 마귀가 남은 할 일은 마귀가 베드로보고 밀 까부르듯 베드로를 찾아온 이유가 자기는 확정되었고 주님의 사랑하는 자들을 빼내어서 독수리같이 우는 사자같이 빼내어서 자기 지옥에다가 혼자는 못 죽겠다는 거예요. 혼자는 못 죽겠다. 같이 당하자. 하고 하나님의 사람을 집어넣게 하는데 그 작업방법이 뭐냐 하면, 성도로 하여금 보고 믿게 하고 기적 받아서 그것을 근거로 믿는 것, 보이지 않는 십자가 능력 말고 다른 걸로 십자가를 대체함으로서 지옥백성 되게 하는 그 작업을 하는 겁니다.


대표적으로 십자가를 대체하는 게 뭐냐 하면, 교회 부흥되기, 선교사 많이 보내기, 교회 헌금 늘어나기, 교인 수 늘어나기, 사람이 십일조가 왜 죄가 되는가 하면, 십일조가 그냥 공중으로 날아가게 되면 사람은 그나마 십일조를 안 해요. 그런데 마귀가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자기 믿는 척하는 것이 들통 안 날까봐 싶어서 십일조가 모아서 결국 교회 부흥으로 이어지게 만듭니다.

그러니 사람은 자기가 행한 것을 잊지를 못해요. 자기가 하나님께 드린 것을 잊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제가 분명히 사도행전17장에서 수십 번 언급했지만, 다시 언급하지만, 하나님은 절대로 사람에게 안 받습니다. 일체 안 받아요. 골프 회원권도 안 받고, 돈도 안 받습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시기 바쁘기 때문에, 친히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지 받아 챙기는 분이 아니에요. 받았으면 뻔뻔스럽게 지밖에 몰라. 내놔! 이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주시는데, 백합도 키우고 안 믿는 사람에게도 햇빛, 공기 다 주시는데, 제일 마지막에 주신 게 뭐냐 하면, 자기 아들의 피를 주시는 거예요. 피를 줬다는 말은 더 이상 너희에게 안 받겠다는 뜻이에요. 원래 죄 용서하는 제사가 있었어요. 옛날에는. 속죄제, 번제 있는데 히브리서10장18절에 보면 나오지요.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 더 이상 죄를 씻어주는 제사가 이제는 없는 거예요. 이 말은 안 받겠다는 뜻이에요. 받아서 용서하는 그러한 거래와 흥정은 이미 안하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안 받겠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구원해 달라고 할 때 구원할 의무가 있다? 없다? 없어요. 없고 누가 구원되고 안 되고는 어느 누구도 받아 챙기지 않았기 때문에 구원 되고 안 되고 권한은 누구한테 있는 겁니까? 주님 자기 마음대로에요. 이게 믿어져야 돼요. 에서는 미워하기로 작정하고 야곱은 구원하기로 했으면 그것은 주님의 고유권한인데 거기에 왜 시비를 겁니까? 마귀가 시비를 걸지요. 마귀가.

하나님 그러면 공평치 못합니다. 그럴 때 사도바울이 누가 감히 토기가 토기장이를 힐난하느냐, 어떻게 그것이 부정하다고 감히 이야기하느냐, 내가 사랑받기로 작정된 자는 따로 만들고 미움 받기로 작정된 자를 따로 만드는 권한이 없겠느냐,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권한이 있습니다. 그걸 알면 그 입 다물라.

구원은 그냥 할당제입니다. 그냥 주시는 거예요. 그냥 공짜로 주시는 거예요. 주시고 그 다음에 낚아채는 거예요. 주시고 난 뒤에 따로 사는 게 아니고 줘놓고는 그걸 몽땅 하나님의 공짜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인으로서 평생을 이제는 굴리시는 겁니다. “나 구원 공짜로 받았다!” 이 소리 하라고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 내세우는 겁니다.

십일조 한 적도 없고 십일조 원래 한 적이 없어요. 왜냐 하면, 돈 내는 것도 주께서 주셔서 돈 내는 것이기 때문에 십일조 한 적이 없어요. 내가 주일성수, 교회 간적도 없고 교회 간적도 없어요. 주께서 교회가게 했기 때문에. 내 의지로 가게 한 적은 없습니다. 모든 내가 사는 것은 주께서 지금 허락하셔서 사는 것이다, 라는 것을 증거 하게 만드는 겁니다.

자, 멜기세덱 봅시다. 멜기세덱에 대해서는 이게 얼마나 어려운지 여기 5장12절에 보면,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상당히 보통 어려운 게 아니라는 것을 미리 낌새를 주시고 그 다음에 나온 이야기가 멜기세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멜기세덱에 관한 이야기는 너무나 어렵다는 이야기가 히브리서 5장11절에 미리 언지를 해놨지요. 멜기세덱에 관해서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이 어렵습니까? 쉽습니까? 해석이 어렵지요. 과연 어느 정도 어려운지 요번 시간에 해봅시다.

벌써 어려운거 했어요. 멜기세덱에 없다가 5번 들어가지요. 없다가 한 개만 들어가도 없는 존재인데, 멜기세덱은 5개나 들어가요. 멜기세덱은 우리 세계에 있는 존재입니까? 없는 존재입니까? 없는 존재가 됐어요. 그러면 해석을 어렵게 하겠습니다.

인간들이 이렇게 모여 있으면 인간들은 하나하나가, 멜기세덱에서는 없다고 되어 있지요. 없다고 되어있으니까 우리가 멜기세덱을 해석하려면 뭐부터 출발해야 되는가 하면 있다 부터 해야 돼요. 있다 부터 출발해서 있다가 없다 로 바뀌지 아니하면 멜기세덱 해석 못하게 됩니다. 있다가 없다 로.

그러면 있다는 것은 뭐냐 하면, 그냥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되잖아요. 뭐가 붙어요. 무엇 무엇이 있다가 돼요. 책상이 있다. 책상이 있다할 때 “야, 여기 있다! 있네.”하고 좋아하는 사람 없어요. 뭐라고 좋아하는가 하면, 책상보고 좋아하지 “야, 있음이 여기 있네.”하고 좋아할 사람 없잖아요. 그러니까 우리의 해석에서는 곤란한 거예요. “멜기세덱이 어디 있어? 믿어야지.” 우리는 보통 이리 나오잖아요. 그리 나오면 안 된다니까요. 그럼 해석이 쉬운 해석이 되어버려요.

멜기세덱이 없다. 없다가 중요한 거예요. 없다가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왜냐 하면, 예수님은 사라져야 되니까. 이건 주일 낮에 이야기했어요. 예수님은 주가 되시기 위해서 있다가 없어졌어요. 사라졌어요. 있다가 사라졌기 때문에 예수님이 다시 나타난 것은 그냥 있음으로 오신 게 아니고 사라지신 분이 오신 거예요.

그래야 예수님은 주님이 돼요. 우리와 같이 낚시하시고 하면 주님이 아니에요. 같이 계시다가 홀연히 사라져버려야 돼요. 사라지고 난 뒤에도 주님이 안돼요. 사라지고 난 뒤에 사라짐을 내용으로 해서 우리에게 나타나버려야 돼요. 그러면 우리가 주님 쪽으로 다가갈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여기 없다 또 나와요. 없어요.

이미 우리는 그 분을 사라지게 만든 원인제공자가 됐기 때문에 아무리 추적해도 주님을 찾을 수 없게 돼있어요. 그걸 미리 보여주기 위해서 두 사람이 나와요. 하나는 모세, 다른 또 한 사람은 엘리야, 엘리야 같은 경우 봅시다.

엘리야가 엘리사와 함께 있었습니다. 우리는 잠시 수사반장 됐습니다. 형사인데 지금 모세 부인이 지금 신고 들어왔어요. 남편이 사라졌다는 거예요. 남편이 사라졌을 때 어떻게 합니까? 개구리소년 어떻게 했습니까? 경찰, 의경대 삼천 명 동원했잖아요. 수사경찰서에서 수사과가 동원되어야 되지요. 그게 바로 있음이 통하는 이 세계의 상식입니다. 우리는 이 세계에 못 빠져나와요. 누가 실종됐으면 찾아나서야 되잖아요.

지금 선지생도가 수사 신고 들어왔어요. 우리 선생님 엘이야 찾아달라고 1월6일자로 신고 들어왔어요. 그래서 지금 수사과에서 찾았는데. 72시간 동안 찾았습니까? 열왕기하2장17절입니다. 못 찾았지요. 그 수사과 형사들 가운데서 “아하, 반장님” “왜?” “그 엘리야 구름타고 불말 타고 하늘나라로 올라갔습니다.” 이리 이야기하면 사표내야 돼요. 그것은 만화에 나오는 무협소설에 나오는 이야기지 이 세상 있음의 세상에서는 고런 말 안하기! 우리끼리 있을 때는 그런 말 안하기! 그것은 바보 되기! 바보지요.

엘리야가 불 수레 타고 시체 없이 갔다는 것을 누가 먼저 이야기했습니까? 함께 있던 엘리사가 먼저 언급했지요. 그럼 엘리사는 뭡니까? 이 쪽 세계에서 바보지요. 예수님이, 사람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날 수 있습니까? 못 살아나지요. 그 거 이야기하는 사도들, 바보. 그 말을 듣는 사람도 바보, 성령을 통해서 그걸 믿는 사람들, 바보.

그러니까 오늘날 교회는 바보가 안 되어야 부흥됩니다. 예수 믿고 부자 되어야 교회가 부흥되거든요. 병이 나아야 돼요. 죽은 엘리야가 찾아와서 뭐할 건데? 이미 죽은 예수 찾아서 뭐할 건데? 막상 지금 내가 믿을 수 있는 것을 제공해줘야 그 교회가 부흥돼요. 방언 해보시라고. 터지는가, 안 터지는가. 터지거든요. 졸면서 할렐루야 1000번 해보세요. 터지게 돼있다니까요. 루루랄라 터지게 돼있어요.

실제로 뭔가 믿을만한 증거, 병 고친다든지 기도해서 병이 낫다든지 어떻든 뭔가 업적과 실적이 있을 때 그 실적으로 말미암아 내가 믿는 자 맞구나! 하는 것이 확신들 때 비로소 우리는 그것을 신앙이라고 간주하는 있음의 세계 속에 살고 있어요. 멜기세덱의 해석이 어려운 이유가 논리가 어려워서가 아니라 우리는 우리 자신이 믿을만한 것만 믿겠다는 우리의 본성이 이미 마귀로부터 장악 당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자, 이제부터 어려운거 더 어려운거 합시다. 왜 없음과 있음을 대조시키느냐, 멜기세덱이 없다, 없다, 없다, 다섯 번하는 이유가 뭐냐,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없어진 나무가 무슨 나무입니까? 선악과나무가 없어졌지요. 그런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뭘 없앴는가 하면 생명나무를 없는 곳으로 보냈어요. 그러면 사람들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뒤에 뭐가 없어요? 생명나무가 없는 거예요.

그러면 없는 생명나무를 만들려면 어디서 만드느냐 하면, 선악과에 기초해서 생명나무를 찾아가야 돼요. 그런데 그들이 쫓겨난 이유가 뭐냐 하면, 선악과에 기초해서 생명나무를 따먹을까 싶어서 하나님께서 그걸 의도적으로 추방을 시켜놨잖아요. 추방시켜 놓고 난 본성이 뭐냐 하면, 우리가 착해서 생명나무 따 먹으러 나가세. 영생 얻으러가세. 라는 그런 방식 외에는 아무런 방식이 없어요. 인간에게는. 인간의 선택은 오직 하나밖에 없어요. 착해서 착한 사람 영생 얻기! 착해서 죽어서 천국가기! 그것밖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가인의 제사가 어떤 제사입니까? 착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제사. 받은 생산물을 홀라당 자기 것으로 하지 않고 그것을 하나님께 귀한 것 드리는 그 아주 가상스러운 그 경건하심. 아주 고상하심. 아벨의 제사할 때는 아주 훌륭했지요. 아벨의 제사가 이건 장난도 아니고 완전히 제물을 완전히 난도질 쳐놨어요. 아주 깔끔하게 드리면 될 텐데. 아벨의 제사는 양을 씻어가지고 깨끗하게 리본머리에 해가지고 이렇게 드리면 되는데 아벨의 제사는 이게 제물이 아니고 쥐가 뜯어먹은 거 같아요. 피가 흥건해. 이건 사람이 봐도 영 받고 싶지 않은데 하나님이 받을 리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안 받지요.

히브리서11장에서 말하기를 아벨은 자기가 그렇게 제물을 하고 싶은 게 아니고 장차 오실 분을 증거 하라고 자기에게 어떤 암시를 줬다는 겁니다. 그 암시를 줘가지고 제물을 드렸다는 거예요. 노아가 방주 만들 때 자기의 아이디어가 아니고 오실 분이 암시를 줘가지고 방주를 그렇게 만들었다는 거예요. 그걸 베드로전서에서는 뭐냐 하면, 선지자에게는 그리스도의 영이 이미 들어가 있었다고 이리 설명하지요.

이제 어렵다는 것은 결국은 있음에서는 없음의 나라로 갈 수가 없다. 선악과에서는 생명나무 따먹을 수 없다는 원리를 하나님이 철저하게 고소를 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그래도 구원을 받은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있어요. 있는데 그 사람은 뭘 통과했는가 하면, 이걸 통과했습니다. 없음을 통과했어요.

그것에 대해서 한 번 봅시다. 7장11절 봅시다.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 (백성이 그 아래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좇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별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뇨” 라고 했지요. 이러한 문장을 오늘날 교인들이 이걸 보면서 하나님 꼭 이 말씀을 우리가 받아야 구원받습니까? 이 어려운 말을 우리에게 왜 이렇게 힘들게 하십니까? 라는 불평이 나올만해요.

이게 뭐냐 하면, 제사장이 레위지파로 분명히 시작했잖아요. 한번 시작했으면 쭉쭉 가야지 이게 무엇으로 바뀌었습니까? 레위지파로 가다가 유다지파로 바뀌었어요. 그러면 레위지파 제사장이 있어도 그게 뭐가 됩니까? 없음이 되지요. 그럼 레위지파가 구원받으려면 뭐해야 됩니까? 뭐를 경유해야 돼요?

우리가 제사 드린 거 소용없다. 뭐하는 것도 없다. 뒤에 없다. 우리 제사장 있는데 없다. 우리가 양 바쳤는데 소용없다. 없다. 반드시 없다를 경험해야 돼요. 내가 제사장 잘 먹으라고 십일조 했는데 십일조도 없다. 내가 감사헌금 한 것도 없다. 안 통하더라. 이것도 안 통해. 저것도 안 통해. 저것도 소용없어. 이것도 무용지물. 그것을 경유해야 돼요. 그것을 경유하지 않으면 별다른 지파의 존재의미를 몰라요.

내가 있잖아요. 있음에서 나온 것은 있음에 행함이 됩니다. 하나님의 있음과 엮이려고 하는 모든 시도가 탱하고 중간에 쇠줄이 끊어져야 돼요. 이 끊어지는 아픔을 여러분들은 아마 많이 경험했을 거예요. 우리 박 목사님도 자처하면 이렇게 될 수 있어요. 큰 교단에서 끊어지는 아픔. 아직까지 목사해서 끊어지는 아픔은 아니겠지만. 탱하고 끊어지는 것. 특히 여자 분들은 이혼. 뭔가 믿었던 줄이 끊어질 때 자유낙하입니다. 그야말로 그냥 어떻게 할 수 없이 그냥 막 나락으로 떨어지는 거예요. 떨어질 때는 바람 부니까 시원하지요.

떨어지면서 뭐가 걱정됩니까? 얼마나 아프겠는가. 이혼할 때는 그냥 한 소리해. 그래! 이혼하자. 그런데 조금만 지나보면 이혼했다. 한 달 인터넷 값부터 시작해서 나오는 서울에서 살려면 기본 250만원인데, 이거 누가 주나. 주는 사람 없잖아요. 그 때 뻥하고 뒤로 헤딩할 때 그 아픔. 그 아픔은 이루 말할 수 없지요. 반창고 붙일 사람도 없고. 아이고, 아프지? 해 줄 사람 없을 때 이게 뭐야? 젊었으면 돌씽이나 하겠다만. 돌씽도 안되고 늙어서. 새끼도 있고 보통 문제가 아니지요. 한 때 기분으로 갈라서! 갈라서! 니 없으면 못 사나. 기분은 좋았다마는 술 깨고 보니 완전히 뒤퉁수 때려서 정신이 없는데.

죽음보다 더 아픈 것은 두려운 것은 죽음직전입니다. 죽는 것은 별로 안 아파요. 그런데 죽음직전 때 가까이 가면 갈수록 점점 더 죽음이 무섭게 다가와요. 내가 미처 모르는 것. 그래서 이 말입니다. 선악과 따먹었으면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말씀이 그렇잖아요. 그걸 경험을 해야 돼요. 그 경험 안하고 생명나무는 어림도 없습니다. 믿습니다. 하는 그런 거짓말은 안 통해요. 경험해야 돼요.

히브리서5장13절 다시 봅시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그 다음 뭐가 됩니까? 경험하지 못한 자지요. 그러니까 말씀이라 하는 것은 공부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고 “공부했습니까?” “예, 됐습니다. 이제 말씀하십니다.” 절대로 그거 쳐주지 않아요. 이제는 집에 가있어. 이제는 이 말씀이 얼마나 엄중한 말씀인지 집에 가있어. 말씀대로 한 번 일으켜 볼게. 그게 뭐냐, 탱하고 쇠줄 끊어지는 거예요. 그 믿었던 쇠줄이 끊어지는 거예요.

자기의 의미, 자기의 의로움, 자기의 가치, 자기의 자존심, 자기의 상상했던 꿈과 비중이 땡하고 다 끊어져 버리지요. 그러면 목사님, 구원받으면 이혼해야 됩니까? 천만에 말씀. 지금 같이 남편과 알콩달콩 헤헤거리면서 이불속에서 까불면서 잘 해도 까불면서 순간순간 왠지 낯설다. 하고 돌아서야 돼요. 같이 웃으면서 이불속에서 짝짜쿵 하면서도 왠지 낯설다. 그게 늘 느껴져야 된다니까요. 지금 내가 웃는 게 무슨 의미지? 내가 왜 웃지? 내가 뭐가 좋아서 웃지? 십자가 보고 웃는 게 아니잖아요. 지금 내가. 내가 왜 웃지? 애가 결혼한다고. 아이고, 기분 좋아. 내가 왜 기분좋아하지?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러면 안 돼.

그런데 주례선생님이 목사님이 하신 말씀이 믿음으로 살리라. 로마서 1장17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서 경수 목사님이 그걸 설교하신다 할 때 야, 본문 참 잘 정했다. 결혼으로 마음이 들뜰 때 그걸 완전히 죽을 확 씁니다. 그게 무슨 의미 있느냐, 산다는 의미는 믿음으로 살아야지. 2월 8일날 김 을수 집사님 주례사는 미리 정해놨습니다. 로마서3장 23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 본문을 할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이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할 때 어떻게 됐습니까? 갑자기 뭐가 옵니까? 홍수가 들이 닥쳤잖아요. 그 말씀이 우리의 생명이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는 이것은 있어도 없어도 그만인데 우리는 매일 우리의 몸둥아리가 어디에 푹 빠져있습니까?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24시간 이거 빼놓고 생각하는 게 뭐가 있습니까? 아무 생각이 없어요. 거기에 24시간 다 보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살리시기 위해서 그 속에다가 왠지 낯설다. 내가 지금 재미나는 이것이 오히려 나에게는 나한테는 안 맞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는 느낌 주는, 느낌을 그 세계에서 속속 뽑아내는 경험을 할 때 그게 말씀의 경험이 되고 이게 탱하고 세상과 끊어지는 그런 순간이 된다 이 말입니다. 이해되십니까? 이거 안 되면 멜기세덱해석 못해요. 

멜기세덱은 족보가 없습니다.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어요. 그러나 나한테는 뭐가 있습니까? 족보가 있어요. 경주이씨고 안동권씨고 있어요. 족보가 있는 인간이 족보가 없는 쪽에 합류한다는 것은 이것은 인력으로 안 됩니다. 이건 믿을 수가 없어요. 이건 말씀이 경험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정답은 내 쪽에서 정답이 있는 게 아니고 이미 멜기세덱 쪽에 가있는 거예요. 그런데 내 쪽에서 저 쪽으로 다가갈 수 없는 걸 어떻게 합니까?

그럴 때 하나님께서 나를 뭐로 만드는가, 레위지파로 만들어버려요. 레위지파로 만든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떤 일을 시킨다는 말입니다. 일을 시키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 하면 “네, 알겠습니다.” 집사는 술에 인박히지 아니하고 “예, 집사 돼서 술 먹지 않겠습니다.” 성경에 얼마나 많아요. 아내 된 자는 남편에게 순종하라. “예, 순종하겠습니다.” 부모는 자식들 가르칠 때 주 안에서 양육하라. “예, 양육하겠습니다.” 전부 다 뭐냐 하면, 예, 하겠습니다. 예, 하겠습니다. 모이기에 힘쓰라. “예, 모이기에 힘쓰겠습니다.” 하면서 우리는 전부다 레위지파가 되어야 돼요.

레위지파에 들어가야 그 다음에 무슨 지파가 나옵니까? 유다지파가 나오거든요. 전에 수련회에서 했잖아요. 바늘에다가 실을 꼽아서 누비이불에 꽂잖아요. 내려가야된다니까요. 말씀을 가지고 내려가야 돼요. 내려가게 되면 우리는 레위지파 되는 거예요. 하나님 이만큼 잘 지켰습니다. 성경보라 해서 성경 봤고, 기도하라해서 시간에 맞춰서 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거 응답했습니다. 탱하고 내가 기도한 응답, 내가 했던 모든 수고가 아무 짝에도 소용없다는 게 뭔가 레위지파에서 탱하고 끊어지는 경험을 하게 하십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내가 시킨 대로 했다는 게 뭐가 돼요? 아무 소용이 없는 거예요. 그러면 그 때 뭐가 보입니까? 왜 저는 안 됩니까? 왜 저는 거룩인데 레위지파는 안됩니까? 할 때에 히브리서7장10절에 봅시다.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니라”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어디에 있습니까?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니 조상이 나보고 이 근호, “왜 저는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 뜻대로 안됩니까?” “내가 니 조상부터 먼저 만났어.” 이리 되거든요. “저하고 상대하지요.” “나는 니와 상대 안 해.” 니는 하나의 노선이고 니 조상이 누구냐 하면, 레위지파의 조상이 누구죠? 아브라함이지요.

어려운 게 두 가지 나와요. 아브라함이 누구를 만났습니까? 멜기세덱을 만났지요.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이고. 히브리서6장13절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무엇을 줬습니까? 약속과 맹세를 줬잖아요.

아까 첫 시간에 이야기했지요. 약속과 맹세를 줬다고요. 컨테이너 화물차라고요. 약속을 메고 계속 움직이는 거예요. 또 한 가지 어려운 게 뭐냐 하면, 조상의 어디에 있습니까? 조상 허리에 있다. 제가 경주이씨입니다. 경주이씨는 산수공파 경주이씨인데, 이 율곡이에요. 원래 유명한 스타 등장하면 스타 밑으로 새로운 노선이 깔리거든요. 이 율곡 있었을 때 제가 있었습니까? 말이 안 되잖아요. 

그런데 성경은 말이 안 되는 이야기를 해요.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을 만날 때 아브라함 허리에 누가 있었다? 레위지파가 있었다. 무려 400년 후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1700년경에 이야기가 1642년에 외계인 타고 김수현이 왔을 때에 21세기에 이 모습으로 사는 거예요. 부동산 투기해서 돈 많이 벌어가지고 목동에 아파트 촬영한다고. 그건 드라마 이야기고 이게 드라마는 되는데 이게 말이 되는 이야기입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가 생각하는 있다, 할 때 왜 이게 해석이 안 되는가 하면, 우리가 뭐든지 있다 할 때, 별이 있고 달이 있다 할 때에 항상 그 있음을 어디다가 뽑아내는가 하면, 내가 여기 있다는 것에 시작하는 거예요. 내가 여기 있잖아. 내가 여기 있는데 어! 달이 있네. 이리 되거든요.

내가 여기 있는데 달이 있다고 본 거예요. 그럼 달이 있으면 달에 뭐가 있습니까? 존재가 있는데 달에 있음은 달에 속한 것이고 내가 있으면 나에게 속한 것이고 나는 하나의 실체고, 나의 실체의 있음이란 속성, 존재란 속성이 있고 달은 하나의 실체인데 달에게 존재란 속성이 있고 각자 매달려 있다. 같이 있다. 이리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요 있음을 다 거두는 거예요. 있음 내놔! 너 있음, 별 있음, 달 있음 다 내놔! 이거 누가 만들었지? 누가 있음에 만들어졌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있음에 이게 만들어졌거든요. 골로새서1장 16절, 모든 만물은 누구를 위하여? 주를 위하여. 주가 하나님이 아니고 누굽니까? 예수님이에요. 요한복음1장에서 태초에 천지를 만들 때 누가 있었습니까? 말씀이 있었지요. 그리고 잠언서8장에서 천지 창조할 때 지혜가 있었지요.

예수님이 만들었을 때 있음은 누가 갖고 있느냐 하면, 우리가 가지면 안 되고 예수님이 유일하게 있음이고 우리가 있으려면 그 분의 있음한테 분배받아야 돼요. 그의 있음에 배당받아야 돼요. 그걸 가지고 예수 안에서의 구원이라 하는 거예요. 설명이 더 어렵네.

이걸 이방민족은 몰라요. 이스라엘에게만 이걸 알려줬고 이스라엘에게 알려줬기 때문에 이스라엘에게만 레위지파가 있는 거예요. 레위지파가 제사 드리면 다른 민족 같으면 박수칩니다. “아이고, 당신들이 제사지내가지고 우리가 구원받고 감사합니다.” 하면 레위지파가 하는 말이, 진짜 레위지파 믿는 사람 같으면 “아니에요. 우리가 지금 제사 지내는 것은 이 율법을 지키는 분은 따로 있고 우리가 율법 지키는 것은 우리가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율법을 지키지를 못하면 우리가 살아있으면 안돼요. 죽어야 돼요. 율법에 의하면 못 지키면 나가도 저주받고 들어와도 저주받아야 돼요.

우리는 없음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잠시 동안 있음으로 행세한 것밖에 안돼요. 진짜 있음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진짜 있음으로 인정하는 분은 따로 있어요. 그 분은 매체가 연결이 멜기세덱이라는 분을 통해서 연결되는 겁니다. 멜기세덱은 실제로 예루살렘의 제사장입니다. 분명히 있어요. 있는데 히브리서7장에 보면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분명히 있는데, 있는 분보고 뭐라 합니까? 그 분은 시작한 날도 없고 이 말은 우리는 시작한 날도 있다고 하지요.

우리가 시작한 날이 있다는 말은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그 분은 족보도 없지요. 우리는 족보가 있지요. 족보가 있다는 이것은 거짓말입니다. 잘못된 족보입니다. 있어도 소용없는 족보에요.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다. 하나님의 아들의 모형이다. 이렇게 되지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뭐냐, 진짜 있음을 말하기 위해서 있다가도 없어져야 될 사라져야 될 모형입니다. 이스라엘의 특징은 있다가도 사라져야 되지요. 제가 아까 강의할 때 이 땅에 있다가 사라진 분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죠.

그래서 이스라엘은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스라엘이 미리 있었던 겁니다. 있다가도 사라지고 있는 나라가 아버지한테 저주받았지요. 아버지께 저주받은 사람은 누굽니까? 예수님이지요. 이스라엘은 출애굽기4장에 보면, 내 아들입니다. 내 아들 할 때 이스라엘은 기분 좋았지요. 내가 아들이란다. 아버지를 보여주는. 보여주기는커녕 내 아들 이스라엘을 저주받게 하심이라. 그것은 장차 오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마태복음27장에서 저주받지요.

그 저주받는 저주가 앞당겨서 보여주기 위해서 이스라엘로 저주받게 하는 거예요. 멸망하는 거예요. 이스라엘은 저주받게 되면 거기에 수요일날 설교한 것처럼 물건사고 난 다음에 현금영수증 모으지요. 이스라엘은 저주받았단다. 가 곧 이스라엘은 구원받을 수 있는 자리가 확보된 거예요.

저주받지 아니하면 누구도 구원 못 받습니다. 레위지파가 제사드림으로 말미암아 레위지파 제사는 엉터리라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면 유다지파가 제사 드리면 되잖아요. 유다지파가 제사 드리면 이건 무슨 꼴이 나는가 하면, 레위지파가 반복해서 제사지낸 꼴과 똑같은 꼴이 돼버려요.

그러면 유다지파에서의 제사는 뭡니까? 레위지파가 한 제사처럼 되지는 않지요. 어떻게 하느냐, 단 한번으로 끝내버려요. 1이란 숫자는 무슨 뜻을 가지고 있느냐 하면, 오늘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건데, 1이란 숫자는 2,3,4,5,6을 전부 다 이걸 부정해버리는 숫자가 1이에요.

귤 하나 주세요. 귤이 몇 개 있습니까? 두 개 있잖아요. 이게 의미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두 개가 아니고 하나에요. 왜냐 하면, 둘 다 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질로 보잖아요. 질로 보는데 우리는 개수로 본다고요. 왜 개수로 보느냐, 내 몸이 내 육체가 나한테는 하나기 때문에. 1을 나부터 시작한다고요.

우리가 숫자 셀 때, 수메르왕국에서 처음으로 숫자가 60진법이 처음 나와요. 농사짓기 위해서. 우리는 내가 하나기 때문에 1을 나부터 시작해요. 하나, 둘, 셋, 넷... 그게 잘못이에요. 숫자는 어디서부터 세는가, 예수님1, 우리는 둘이 아니에요. 우리는 없는 거예요. 제로. 주님만 있음이에요. 왜? 하나님의 있음은 창조에 합당해요. 하나님의 법에 합당해야 되고, 율법을 지켜야 되고, 하나님 앞에 의로워야 되고, 하나님 앞에 거룩해야 돼요.

거룩하지도 않고 더러운 인간은 숫자로 치지도 않습니다. 그게 뭐냐, 예수님이 천지를 만든 이름의 힘이에요. 이름이라 하는 것은 아담이 짐승에게 이름을 지어줄 때 아담이 이름을 지을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아담은 모형이에요.    

예수님께서 우리 이름을 그리스도인으로 지어주지 아니하면 구원 없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이 이름을 지음으로서 어떤 효과를 보이는 것처럼 장차 우리의 이름을 우리의 이름 말고 더러운 흙 이름 말고, 아담 말고, 새로운 이름으로 우리에게 붙여주게 되면 그것은 효과가 있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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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기세덱은 분명히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멜기세덱을 지상에서 찾지 마세요. 왜? 지상에서는 이름이 의미 없습니다. 그런데 하늘나라 멜기세덱은 뭐냐, 하나님의 아들이에요. 그래서 족보가 뭐냐, 멜기세덱의 족보에요. 멜기세덱을 아무리 분석해 봐도 이것은 우리는 알 수가 없어요.

왜냐 하면, 그것은 내가 나를 분석하듯이 분석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그냥 멜기세덱의 반열을 통해서 그냥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오시는 거예요. 그래서 결론을 내리면 이렇습니다.

멜기세덱이란, 이 쪽 세계, 인간으로부터 추방된 예수님의 세계 전부를 이 지상을 향하여 대변할 때 사용되는 그 이름이 멜기세덱이에요. 대변할 때. 그리고 인간은 바로 예수님에게 갈 수 없고 반드시 자기의 족보를 부정당하면서 멜기세덱 족보에 합류가 되어야 구원받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류가 되는가, 멜기세덱과 만난 사람 있어요. 누굽니까? 아브라함이에요. 아브라함 허리에 누가 있었다? 레위지파 있었지요. 레위지파가 있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을 만났을 때, 모든 걸 버렸어요. 축복은 당신에게서 옵니다. 하듯이 제대로 레위 인으로 구원받으려면 나는 죽어 마땅합니다. 내 몸은 주를 위해서 있지 나를 위해 있지 않습니다. 몽땅 갔다 바칠 수 있도록 자기 자신으로부터 탱하고 끊어져야 돼요. 존재로부터. 내 있음으로 끊어지고 멜기세덱이 있음에 내가 있음. 새로운 있음을 우리가 받아 들여야 되겠지요. 

6장 20절에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 했잖아요. 그렇게 하고 7장에 들어가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라 해서 시작이 되는 겁니다. 요 한 가지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멜기세덱은 누구 왕이라고요? 살렘. 살렘이란 지역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실제로 있지요. 예루살렘 실제로 있잖아요. 실제로 있을 때 우리는 뭐로 본다? 있음으로 보는 거예요. “아, 여기는 안양, 저 쪽은 예루살렘.” 여기는 안양 있고, 저기는 예루살렘 있고. 그걸 주께서는 탱하고 끊어버립니다.

저기 예루살렘 있거든 여기 안양 없는 거고, 예루살렘 허리에 있는 거고, 만약에 여기 안양이 있다고 우긴다면 멜기세덱은 없는 거고, 그래서 해석은 어려운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약속 위에 소망을 해야 되는데 그 약속 지금 우리에게 찾아오셨습니다. 탱하고 우리 자신의 존재를 끊어버리고 이제는 내 몸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주의 몸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