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고린도전서93강-사실과 의미(고전15'16-19) 100515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5. 16. 07:25
2016-05-15 12:30:25조회 : 80         
   사실과 의미 160515 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사실과 의미(고린도전서 15:16-19)

음성 동영상1 동영상2

Youtube1 Youtube2

 링크 : https://youtu.be/9dwsMic0Z7s, Hit:8
 링크 : https://youtu.be/EpQnmytctdg, Hit:2

 이근호 16-05-15 13:12 

사실과 의미

2016년 5월 15일                                본문 말씀: 고린도전서 15:16-19

(15:16)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15: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5:18)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15: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실fact이라고 말합니다. 이 사실들의 집합을 사람들은 현실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현실이라고 여기는 것들이 현실의 전부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현실이란 살아있는 자들만의 집합이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들은 단지 ‘흙’으로 돌아갈 뿐이다 고 주장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망하는 자’라고 표현을 사용합니다. ‘망한다’는 말은 ‘망하게 하시는 분이 의도적으로 상대를 망하게 하시는 그 작업이 결과성이 실제로 일어남을 전제로 하은 겁니다. 즉 망하게 하시는 분이 따로 계시고, 그분으로 인해 망하게 된 자가 따로 생겨나게 된다는 겁니다.

사람이 사는 것이 이 금생뿐이라고 한다면 이는 망하는 자라서 그러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망하는 자’들이 ‘세상은 이 금생뿐이다’고 주장하는 것도 나름대로 논리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그 논리를 계속 통용하게 되면 그 논리에 수긍하는 자들은 결국 같이 망하는 자들이 됩니다.

여기서 다른 논리가 수입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단순히,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만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이 실제적으로 무슨 작업을 여태껏 벌리고 계시는가까지도 알리고 계신다고 합니다. 즉 눈에 보이는 것만을 가지고 현실의 전부라고 여기는 자들에게는 도저히 알 수 없는 내용이 지금 주님으로부터 계속 주어지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20:5-6,13-14절에 보면,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실만 고집하는 자들에게 있어 ‘죽음’이란, 그동안은 잘 살다가 숨끊어진 상태를 두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런 논리에 의할 것같으면 부활이라는 것은 그 죽은 자로 도로 살아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이렇게 되면 이것은 기껏 살아있을 때의 ‘사실적 논리’를 연장한 것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복음은 이 논리를 거절합니다. 마치 추위와 더위를 방지하기 위해 창을 이중으로 하듯이 하나님께서는 죽음도 2중으로, 부활도 2중으로 행사하십니다. 그것은 기존의 논리를 걸려내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이 현재 살아있고, 죽을 때만 죽는다는 이 사실적 논리로서는 도저히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 살해를 주도했던 바리새인들이 이런 논리를 펼친 자들입니다. 그들을 사람의 부활을 믿습니다. 하지만 ‘죽고 난 뒤에 부활’을 믿습니다. 이것은 가짜 복음입니다. 복음에 대적하는 내용입니다. 참된 복음은 2중 죽음과 2중 부활로 구성되어 되게 되어 있습니다. 죽음이 이중으로 하신 이유는, 부활에 대해서 일체 인간들의 행함이나 지식이나 의지나 노력과 무관하게 진행됨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그게 바로 ‘망하는 자’라는 개념 사용에 함유되어 있습니다. 즉 이 인간 사회에서는 단순히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죄가 덮쳐져서 지배하고 있는 형국이라는 겁니다.즉 망하는 것을 기정 사실화해야 한다는 겁니다. 사실적으로 볼 때, 마치 사람들은 생에 마지막에 죽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의 복음에 의하면 인간의 죽음은 ‘죄의 삯’입니다. 태어나면서 평생토록 행했던 모든 행함과 생각들이 집대성되어 그 본인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사태와 연계되어있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사람이 죽는 것이 죄와 관련된 의미가 부여됩니다. 즉 구원이란 ‘사실의 구원’이 아니라 ‘의미와 가치의 구원’인 겁니다.

마치 음식점에서 아무리 음식을 먹고 빈 그릇을 남겨도 다음날 그 식당에 가면 벌써 자신이 먹었던 그릇은 치워져 있는 것처럼, 사실적으로 보면 죽음이란 그저 소거되는 것이고 사라지는 것이고 없어지는 겁니다. 이는 참 허무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보실 때, 사실로 보시는 것이 아니라 의미와 가치체로 봅니다.

아무리 넓은 평수의 아파트를 소지해도, ‘평당 500만원’이라는 가치체제를 유지하듯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나름대로의 가치와 의미로 세상을 재단해버리십니다. 문제는 첫째 사망과 둘째 사망은 인간의 행함대로 심판하시지만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은 인간의 행함이 개개재되거나 개입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즉 인간은 뭘해도 실패할 수밖에 없고 의로울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죄의 통치성을 전제로 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첫째 사망’이란 단지 숨 거둘 순간만이 아니라 이것을 역으로 확장시켜야 합니다. 먹고 마시고 사는 모든 것이 이미 죽기 위해 부지런 떤 겁니다. 이미 망하는 짓들을 해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첫째 부활’을 확장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미와 가치를 ‘첫째 죽음’과 동반해서 같이 ‘첫째 부활’을 확장시키기 위함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사실로 확장시키시는데 그 능력이 바로 십자가가 원천이 됩니다. 그 이유는, 바로 예수님의 죽으심 안으로 이미 자기 백성의 죄가 흡입되어 있기에 부활을 통해서 그 의미성이 온 세상에 토해서 퍼뜨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은 일체 인간의 능력에서 비롯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합세해서 이미 예수님은 ‘인간들의 사실의 세계’에서 추방시켰기 때문입니다. 즉 추방되었던 그 소식이 새삼스럽게 예수님이 부활의 능력으로 깔아놓기 위해 세상에 개입하시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홀로 행하시는 ‘예수님의 전도’입니다.

고린도후서 2:14-16에 보면,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해놓으시면 사도는 ‘패까기’에 들어갑니다. 이것이 확인작업이요 해석작업입니다. 이처럼 복음이란 예수님 홀로 다 이루어나가신다는 진정한 현실을 능력을 실제로 쏟아놓으면서 전파됩니다. 성도는 이처럼 십자가의 ‘재현자’가 된 것입니다. 즉 나의 행함이 아니라 주님의 행함으로 벌써 첫째 부활에 참여했음을 증거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여전히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만이 지배하는 그런 현실인 것을 알고 범사에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6-05-16 05:51 
189강-고전 15장 16-19(사실과 의미)160515-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5장 16-19절입니다. 신약성경 282페이지입니다.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망한다는 이야기가 나왔어요. 사람보고 망한다는 이야기는 실례입니다. 나름대로 한평생 열심히 산 사람보고 “당신은 망합니다.”라고 하게 되면 상대방이 하는 말이 “당신은 무슨 근거, 어떤 조건, 어떤 기준에 의해서 이렇게 한평생 열심히 살아가는 나를 보고 그렇게 혹평할 수 있는가? 너무 모질지 않은가? 너무 함부로 막 대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당연히 공격할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은 그들에게 묻습니다. “우리가 사는 것이 이 금생뿐인가?”라고 묻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살아온 체험, 경험들을 근거로 해서 묻는 거예요. “우리가 사는 것이 금생, 그것이 다인가?” 그러면 저쪽에서 말하기를 “금생, 이것이 다지. 죽으면 그만이지 뭐가 또 있는가?”라고 하지요. 그러면 사도바울이 이야기합니다. “나도 그런 줄 알았고 나도 그게 옳다고 생각했었는데 예수님이 죽고 난 뒤에 부활함으로서 그게 틀렸다는 사실을 내가 알게 되었다.” 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것이 단순히 ‘아하, 이 눈에 보이는 세상이 다구나, 라고 했는데 그게 아니네. 또 뭐가 있네.’ 이 정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사는 이 세상 이것이 다라면 우리는 망하는 자라는 겁니다. 망하는 자. 이것은 단순하게 미안하다, 몰랐다, 이렇게 그칠 문제가 아니고 망해야 되는 식으로 지금 살아가고 있다는 거지요. 그러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망하지 마세요.” 하는 취지에서 복음을 전하는 겁니다.



어버이 날, 교회도 모르고 하나님도 모르는 어머니에게 용돈 봉투에 넣어서 줄 때 “얘야, 봉투 이렇게 챙겨주니 고맙다.” 할 때 “어머니, 봉투 챙긴다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어머니는 지금 망하고 있습니다.”라고 주제 넘는 이야기, 상대방에 대한 모독적인 발언, “어머니, 망합니다.” 말은 ‘어머니’라고 하지만 “당신은 지금 망하고 있어요.”라고 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복음을 모르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모르면 아무리 자식한테 효도 받아도 소용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야기하세요. 그게 바로 자식으로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이라고. 돈이나 주고 크루즈여행이나 시켜준다고 그것이 효자가 아닙니다. “제가 지금 할 수 있는 최고의 효도는 이것밖에 없습니다. 어머니는 지금 망하고 있습니다.” 하는 그 이야기. 그래서 성도는 굉장히 억울한 비난을 많이 받아요. 교회에 사람 꾀이려고 그렇게 전도들을 해대는데, 물론 그런 교회가 태반이지만, 진정으로 하는 사랑은 교회 오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복음을 전파하는 겁니다. 복음을 전파하면서 교회 다니면 복 받고, 잘 되고, 그런 이야기하지 말고, 나도 당신과 같이 망하는 자였습니다, 하는 그 이야기를 해야 돼요. “나도 세상 적으로 견줄 데 없고, 부족한 것이 없고, 남 보기에 사람 사는 것처럼 당당하게 사는 데 실은 이것이 망하는 길이었습니다.”라고 언급하는 거예요. 이것은 직업과 상관없어요.



사도바울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서 이렇게 할 때 약간 관심 있는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할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 오늘날 어떻게 나의 부활과 연관되어 있는가? 그 과정을 설명해주세요.”라고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사람은 그렇게 나올 겁니다. 그냥 무턱대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으세요.”라고 해버리면 그게 왜 안 되는가? 그냥 “믿습니다.” 해버리면 믿는다는 것이 하나의 지식의 전달밖에 안돼요. 지식의 전가. 지식 말고 실제로 내가 뭔가 어떤 일을 추구한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잖아요.



이 생 말고 저 생이 있다는 이것은 불교에서도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 생 말고 저 생이 있는데 그 저 생을 부활의 세계로 본다면, 죽었다가 부활한다, “그러면 내가 그거 인정할게.” 그러면 부활 됩니까? 이것이 십자가와 부활에 담긴 복음입니까? 그런 식의 부활은 진짜 부활을 방해하는 겁니다. 오늘 설교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부활이 부활을 방해한다는 것. 부활이 부활을 훼방하고 있다는 것. 여기서 살다가 죽으면 다른데 간다는 그 사고방식이 전혀 부활되지 않는 방식이고 오히려 부활이 있는 곳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마귀가 내몰고 있다는 것이 사도의 본문을 통해서 밝혀져야 되는 겁니다.



어떻게 그것을 밝힐 것인가? 사도바울의 복음을 들어보면 논리는 굉장히 간단해요. 사도바울이 복음을 이렇게 간단하게 설명하는 이유가 단순화시키는 겁니다. 예를 들면, 죽음이라는 것이 뭐냐? 죽음이라는 것은 쉽게 설명하면 이런 거지요. 어떤 중국집에 가서 음식을 시켜서 다 먹고 나왔어요. 그런데 그 다음날 가게 되면 내가 먹었던 그 음식그릇들이 테이블에서 이미 없어졌습니다. 죽음이 바로 이런 거예요. 내가 실컷 음식 맛있게 먹었는데 그 다음날 가면 깨끗하게 다 치워놓아 버렸어요.



죽음이란 치워버리는 거예요. 이 땅에서 사라지게 하는 겁니다. 삭제시키는 거예요. 소거하는 겁니다. 제거하는 거예요. 사람들이 이해하는 죽음이 바로 사라지는 것이니까 죽음을 미리 당겨보면 사는 것도 굉장히 허무해져요. 어차피 맛있게 먹어봐야 내일 되면 다 없어질 것인데, 나라는 것이 없어지는데 살아서 뭐하는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말하기를 “사라지는데 보험하나 들어놓으세요. 십자가 보험하나 들어놓으시면 나중에 천국 갑니다.”라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십자가와 부활의 본질에 들어가지 않고 자기 이익대로 아무렇게나 생각하는 겁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교회에서 상품화시키고 미끼상품으로 해서 그렇게 거짓말을 하는 거예요. 죽었다가 부활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예수 믿고 죽었다고 해서 부활되는 것이 아니에요. 그 ‘나’를 빼야 돼요.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고, 나를 위해서 부활한 것이 아니고, 십자가와 부활을 위해서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 관계를 그렇게 바꿔줘야 합니다. 그렇게 바꿔주는 복음에 대해서 요한계시록 20장에 보게 되면, 거기에 나와 있어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간단하다고 이야기했는데 간단하지만 워낙 사람들이 오해를 하기 때문에 이걸 설명하는데 약간 복잡하게 설명할 수밖에 없는 것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제가 그런 것이 아니고 사도요한이 마찬가지고요. 요한계시록 20장 5절과 6절에 보면, 여기에 첫째 사망과 둘째 사망이 나오고,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이 나와요. 벌써 복잡해졌지요? 우리가 교회 와서 들은 상식은 뭐냐? 죽고 난 뒤에 부활이 있다. 굉장히 간단한데 요한계시록 20장 5절과 6절에 보면, 첫째 사망이 있고 첫째 부활이 있고, 둘째 사망이 있고 둘 째 부활이 있더라는 말이지요.



이것을 설명하는 방법은 뭐냐? 이중창을 만드는 것, 창을 이중으로 만드는 거예요. 유리창이 단면으로만 보이는데 이중으로 되어 있는 창이에요. 단열하기 위해서. 첫째 사망과 둘째 사망,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 이렇게 죽음을 이중으로 하고 부활을 이중으로 하는 이유는, 걸러내기 위함입니다. ‘내가 죽었다가 부활의 나라 가야지.’ 이런 것들은 다 걸러내는 거예요. 그 걸러내는 대상중의 하나가 바로 부활을 믿는 바리새인들입니다. 자신의 부활을 구약대로 믿으면서 실제로는 지옥 간 사람들의 집단, 그게 바리새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니까 이 땅에서 고생 되게 했다고 이제 보너스 주는 양으로 “죽어서는 좋은데 가거라.”해서 부활을 마련했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지옥보내기 위해서 이중창을 만든 겁니다. 첫째 사망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사망이에요. 사람이 목숨 끊어지면 죽는다고 하는 것. 그런데 첫째 사망으로 바로 부활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첫째 사망은 어디와 연결되느냐? 둘째사망과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죽어서 좋은데, 부활의 나라에 가려고 시도를 했는데 그게 성사되지 못하고 첫째 사망에서 둘째 사망으로 떨어지는데 둘째 사망이 뭐냐 하면, 지옥의 유황불에 들어가는 거예요.



부활은 어림도 없는 겁니다. 방법은 뭐냐? 첫 번째 사망에서 첫 번째 부활로 들어가야 돼요. 첫 번째 부활로 들어가는 사람만 두 번째 부활에 참여됩니다. 첫 번째 부활에서 두 번째 부활로. 거기에 참여하는 사람은 어떤 관점이 되느냐 하면, 부활에는 두 개의 단계가 있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어야 돼요. 죽음도 두 개의 죽음이 있다는 것을 미리 알아야 돼요. 죽음도 두 개의 죽음이 있고 부활도 두 개의 부활이 있다는 것을 알려면 이 눈에 보이는 현실을 있는 그 사실들의 묶음으로 보면 안 되고요, 가치와 의미의 묶음으로 봐야 돼요.



사람이 늙어죽었다, 숨이 끊어졌다, 스마트폰으로 죽는 모습 찍었다, 그래봐야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실이에요. 지금 동영상장치가 저장하는 기능이 고장 났어요. 그래서 제 아내가 50분 동안 팔 아프게 들고 따로 찍고 있어요. 팔 많이 아플 거예요. 그처럼 우리가 보는 세상은 그게 사실이냐를 보는 겁니다. 그러나 사실이라 함은 숨 끊어지면, 음식물 걷어치우면 그대로 끝나는 거예요. 내가 거울에 비추면 나오잖아요. 이건 동영상으로 찍으면 그대로 사실이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자기 눈에 보이는 그것이 전부라고 한다면. 여러분이 화장실 급할 때 다른 것이 보입니까, 안보입니까? 안보이지요. 돈 벌어먹고 살려고 할 때는 ‘안 죽어야지.’ 하는 그것만 사실로 보이지, ‘내가 무슨 목적으로, 무슨 가치를 위해서 이렇게 하지?’라는 것이 눈에 들어오지를 않아요. 그저 밥 먹고 살아야지, 돈 벌어서 살아야지, 그것뿐입니다. 사실과 의미의 차이에 대해서 찬송가 269장 3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웬일인가 내 형제여 제물만 취하다 세상물건 불탈 때 너도 타겠구나.” 못 들으신 분, 또는 안 듣고자 하는 분을 위해서 다시 합니다. “웬일인가 내 형제여 제물만 취하다 세상물건 불탈 때 너도 타겠구나.” 세상물건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불탈 때 지옥에 가는 그것은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의미인 거예요.



별로 인기는 없는 영화인데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이라는 영화에 보면, 초등학교 2학년 애들이 7인승 차에서 이동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맨날 주차위반 딱지 끊으면서 살아요. 그 애들이 소원이 있는데 내 집 마련을 얼른 하는 겁니다. 부동산에 보니 “평당 500”이라고 되어 있어요. 그 애는 이해하기를 평당에 가면 500만 원짜리 집이 있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평당 500만원이라는 말은, 미국에서도 평당 500만원, 어디에 가도 평당 500만원입니다.



그런데 그 애는 그걸 몰라요. 그 애는 평당이라는 지역에 가야 그런 집이 있는 줄 알고 있어요. 제가 지금 예를 든 것이 더 어렵지요? 평당 500만원이라 하는 것은 35평인지 40평인지 관계없이 1평당의 그 가치가 500만원이라는 뜻이에요. 주님께서는 가치가지고 우리를 구원하는 겁니다. 우리는 몇 평대에 사는가, 그것을 자꾸 사실로 보는데 주님의 사실은 뭐냐 하면, “너는 평당 얼마짜리인가? 평당 어떤 가치가 있느냐?” 그걸 보는 거예요.



그 가치는 뭘 로 결정하느냐? 목적으로 결정합니다. 내가 왜 사는지 목적가지고 부활의 세계와 둘째 부활로 연관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첫째사망과 둘째사망, 첫째부활과 둘째부활을 구분하는 것은 모든 사실적인 것은 전부 다 없애버리기 위함입니다. 만약 인간이 죽는 것이 그냥 내가 사라지는 그것이 죽음이라면, 그 사실됨, 그 있음, 눈에 보임, 그것이 전부일 거예요. 그러면 죽었다가 부활, 이걸로 끝나야 되는데 이것이 이중창이 되어서 첫째부활이 있고 둘째부활, 첫째사망이 있고 둘째사망이 있다는 말은, 이 땅에서 너는 눈에 보이는 대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뭔가 의미와 가치, 둘째부활과 연관되어 있는 가치와 의미를 가지고 그걸 내다보면서 살아야 된다는 것을 뜻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이 이 땅에 살아가면서 가치와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고 있어요. 있는데 사람이 뭘 하든 간에 모든 의미와 가치가 순전히 내 좋은 쪽으로, 내가 잘 되는 쪽에 의미와 가치를 일방적으로 결정해 있다는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겁니다. 무슨 행동을 해도 나한테 좋으면 좋다는 것으로 후딱 오거든요. 이렇게 되면 우리는 이중창 속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이 죽어도 계속 살기 위해서 보험하나 들어놓는 식으로 교회 나오는 것 밖에 안돼요. 그것이 진정한 부활을 방해하는 것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생각해 봐야 될 것은……, 여기부터 좀 어려운데요.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려운 이유가 있어요. 사람이 살다가 숨 끊어지면 죽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살아 있는 것을 두고 살았다, 숨 끊어지는 것을 두고 죽었다는 그 근거는 뭐냐, 하고 물으면 사람들은 “내가 여기 있잖아. 내가 그렇게 느끼잖아. 내가 그걸 눈에 보고 있잖아. 뭘? 사실을.”



자기는 지금 사실대로 산다고, 현실대로 산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거예요. 사도바울의 복음은 이렇게 합니다. 죽을 때 죽는 것이 아니고 그 죽음을 늘여버리는 거예요. 어떻게 늘이는가? “네가 행동하고 살아온 모든 것이 다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네가 살아 있을 때라도 사실은 죽음과 관련된 죽음의 역으로 된 확장이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그것을 어떻게 확장하는가 하면, “네가 살아온 모든 것이 죄가 되었고 그 죄의 값으로 네가 죽는 것이 되니까 네가 죽기 전부터 너는 이미 죽은 모습, 죽음과 관련된 의미와 가치를 네가 뿜어내고 있다.”고 보는 거예요.



그래서 망한다는 말은, 특별히 어떤 나쁜 짓을 해서 망하는 것이 아니고 살아온 모든 것이 집대성되어서 너를 망하게 하는 거예요. 지금 사는 것이 망해가고 있는 중입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에게 복음을 들어서, 예수님에게 직접 배워가지고 그걸 전부 다 ‘죄의 지배아래 있다.’는 용어를 써요. 모든 것이 죄의 통치 아래 있다. 죄의 통치 아래 있다는 말은, 특별히 어떤 특별한 나쁜 짓을 해서 그것 빼놓고는 착하다는 그것이 아니고, 네가 살아온 전체가 죄의 지배아래서, 죄에서 못 빠져 나오기에 너는 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 식으로 사도바울은 복음으로 우리를 몰아세웁니다.



왜? 사실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이 인정하는 의미와 가치를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부여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나는 교회 나왔으니까 죽으면 부활되어서 천국 가겠지.’ 이게 바로 복음을 막아서고, 복음을 희석시키고, 복음을 반대하는 거예요. 인간은 눈으로 봐야 살과 뼈, 그리고 내장밖에 없습니다. 뼈와 살, 이런 것으로 뭘 해봐야 소용없어요. 예를 들어 다리에 어떤 상처가 있다. 상처가 있으면 피가 난다. 피가 나오면 헤모글로빈작용에 의해서 딱지가 앉지요. 어떤 애는 장난삼아 자기 몸에 생긴 딱지에 이름을 써요. 저도 그런 적이 있습니다만. 몸은 아프지 심심하니까 그런 장난을 하는데 이름 써놓아 봤자 딱지 떨어져 나가면 그 이름도 같이 떨어져 나가요.



분리 될 수밖에 없는 것에다 우리 자신의 이름을 걸고 평생 살아온 겁니다. 의사, 박사, 교수, 교사, 농사, 백수, 목사, 장로, 집사, 거기다가 목숨을 걸고 그게 나의 가치고 의미라고 해 봤자 딱지 떨어질 때 같이 다 떨어지는 거예요. 그게 첫째 사망의 원인제공을 한 겁니다. 그 첫째사망은 둘째사망, 지옥불과 관련되어 있어요. 네가 살아생전에 살았다고 여겼지만 사실은 죽었다는 사실을 왜 몰랐는가, 그 말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실 때 그냥 죽은 것이 아니에요. 인간의 죄를 모아서 죽으신 겁니다. 그러면 인간이 죄를 몇 번 지었는가? 몇 번 지은 것이 아니지요. 인간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전부 다 죄인데. 죄의 범위를 확장시키는 겁니다. 지난 목요일에 <곡성(哭聲)>이라는 영화를 봤어요. 광주모임에 나오시는 조 집사님 사시는 곳이 전남 곡성(谷城郡)이라는 곳입니다. 그 곳에서 광주모임을 한 적도 있어요. 영화제목도 그렇지만 거기서 찍은 영화라는데 어찌 반갑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그 영화를 보고 줄거리를 전처럼 써서 평까지 다 달아서 올리려고 했는데 그게 스릴러 영화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요. 끝을 다 알려주니까. 어떤 분이 진지하게 항의했던 적이 있어요. “영화줄거리를 다 이야기해 버리면 어떻게 합니까? 영화 평 읽고 나서 영화 볼 마음이 없어집니다.” 일리 있다 생각했었어요. 그 <곡성>이라는 영화에서 제가 본 핵심이 뭐냐? 인생은 결국 실패라는 겁니다. 곡성에 있는 그 마을에 이유 없는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몸이 아프고, 순진한 애가 귀신이 들려서 미치고, 그런 사건들이 번질 때 수상한 일본인이 산속에 있는 거예요.



사람들은, 저 일본인영감 때문에 이런 재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고 했는데 사실은 그 일본영감이 곡성 땅의 악마를 쫒아내기 위해서 구원자로 왔다는 겁니다. 하지만 마을사람들이 구원자를 못 알아보고 경찰이 죽인다고 달려들지요. 그것을 누가 밝히는가? 일광이라는 박수무당이 사실을 밝히면서 “그 사람은 악마가 아닙니다. 악마같이 보여도 진짜 악마는 따로 있습니다.” 해서 굿을 하는데 그 광경을 너무 실감나게 잘 찍었어요. 그래서 칸 영화제에 초청되었어요.



악마를 쫒기 위해서 귀신들린 딸을 눕혀놓고, 이것은 사실입니다. 그 살과 뼈와 몸이 있으니까요. 그 딸을 눕혀놓고 박수무당이 염소 잡아서 피를 흘리면서 악마로 상징되는 나무에 징을 때려 박는데 때리면 때릴수록 산속의 악마가 거리가 먼데도 고통당하고 있어요. 죽은 염소, 나무, 귀신들린 딸, 이 모든 것이 눈에 보이잖아요. 이것은 두 자로 ‘사실’이에요. 사실인데 악마는 영이라는 말이지요. 사람들이 하는 것이 뭐냐? 사실을 가지고 악마를 내쫒을 수 있다는 가능성, 이게 바로 기독교고, 이게 천주교고, 이게 불교고, 이게 무속신앙이고, 이게 바로 미신이에요. 모든 종교는 미신인 겁니다.



내가 악바리로 기도해서 마귀를 쫒아낸다든지, 성경을 째서 도배를 한다든지, 마늘과 파, 어떤 멘트같은 것, “주 예수 이름으로 물러가라.” 혹은 십자가를 이마에 들이대는 것, 이것 자체가 주술행위고 이것 자체가 실패로 끝난다는 것이 곡성이라는 영화에요. 이게 다 실패로 끝나요. “그냥 인간은 죄만 짓고 살아라.” 이게 곡성이라는 영화입니다. 나중에 용한 박수무당도 마귀가 되어서 사진 찍고 있어요. 마지막 장면이 그거예요. 같이 봤던 아주머니들이 “이게 뭐지? 끝이 왜 이래?”하는데 마귀를 이기지 못하고 실패로 끝나요. 마귀는 그냥 곡성지역에 그대로 있어요. 곡성의 그 사실적인 공간에 가 보세요.



인간들이 교회 나오고 예배드리는 그 짓거리가 자기 속에 있는 공포와 불안을 못 쫓아내니까 대충 때우기 위해서 교회 오는 거예요. 예수 믿고 기독교 믿는다는 것이. 아무짝도 소용없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말하는 복음은 그냥 죽으라는 겁니다. 그냥 살다가 죽으라는 거예요. 제발 기독교나 불교나 천주교나 이슬람교나 이런 종교에 속아 넘어가지 마세요. 전부 다 돈만 챙기는 곳이에요. 돈 빼내기 위해서, 돈 얻기 위해서 그 짓하는 겁니다. “여러분, 예수 믿으면 죽어서 천당 갑니다.” 다른 버전으로 하면 돈 내놓으라는 이야기에요.



백날 예수 믿어도 소용없어요. 나중에 치매 걸리면 예수가 누구냐고 하는데 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자기 아들도 못 알아보는데 무슨 예수까지 알아봐요? 그 옛날 사람을? 무당만 욕하지 마세요. 살아 있는 모든 교회 안에 무당이 있어요. 목사라는 이름의 무당들이 있어서 장사하고 있는 중이에요. 백날 믿어봐야 딱지 떨어질 때 같이 떨어져요. 딱지에 “난 25년 동안 목사 질 했다.” 그거 딱지 떨어질 때 같이 다 떨어져요. 의미 없어요. “난 연금 받는다.” 연금 받아봐야 의미 없어요. 연금 받아도 다 죽어요.



처음부터 인간은 죽어 있다는 것을 벌써 수용하라는 이야기입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정리하면, 살아 있다가 이 땅에서 예수 믿고 죽어서 부활하는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러면 뭐냐? 첫째부활로 가야돼요. 그냥 둘째 부활로 막 가는 것이 아닙니다. 첫째부활로 가는 거예요. 부활이 첫째부활과 둘째부활로 갈라졌다는 그 사실자체가 걸러내기 위한 겁니다. 죄 지은 주제에 ‘사실세계에서 혹독하게 당했는데 죽어서라도 편케 살아야지.’ 이런 자신의 행복에 대해서 은근히 기대하는 이런 이기주의자들 다 걸러내기 위해서 첫째부활과 둘째부활이 있습니다.



첫째부활과 둘째부활은요, 사람의 행위와 무관합니다. 이거 오늘 설교의 포인트입니다. 줄 쫙 그어놔야 돼요. 죽는 것은 모든 행함에 따른 죄로 죽을 수밖에 없지만, 둘째사망도 행한 대로 저주받아 지옥가지만, 부활에 관해서는 아무리 인간들이 주여, 주여, 발악하면서 부르짖는다 해도, “귀신아, 물러가라.”고 백날 해도 그것은 자기 의미, 곧 사실이죠, 사실에서 나와서 기대하는 것이 자기 잘났다는 그 사실로만 연결되기에 그것은 다 엉터리입니다. 첫째부활과 둘째부활은 인간의 행함과 관계없이 주님의 행하심으로 주어지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한다면, “사도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우리를 향하여 지금 편지로 전도하고 선교하고 있는데, 전도나 선교가 의미가 없지 아니한가? 뭔가 설득해서 그 한사람 건져낼 때 하늘나라에서 기쁘다고 하는 것이지, 우리의 어떤 행동, 믿는 것마저 삭제해버리면, 그것마저 죄가 되어버리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건지는 방법 자체가 단절되고 아예 다리가 끊어지는데 엘리야같은 사람은 어떻게 천국 갔는가?” 이런 질문이 들어왔을 때 여러분은 답변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수천 번 답변했습니다만 돌아서면 다 잊어버리니까.



제가 친절하게 알려드리겠습니다. 패를 뒤집는 거예요. 두 개의 패가 있습니다. 전도나 선교는 누가 하는가? 첫째부활, 둘째부활은 우리의 행함과 관계없습니다. 우리의 행함, 나를 넣어주세요, 한다고 해서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부활의 세계는 주님이 알아서 따로 구성하거든요. 구성한다는 말은, 주께서 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부지런히 일을 하시는 거예요. 일을 하시는데 우리가 어떻게 일을 했는지 그걸 알아챌 수는 없어요.



그런데 주의 성령이 임해서 사도에게 전하면 사도가 전도나 선교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확인하고 해석하는 거예요. 이것은 금요일에 의존교회에서 했는데 고린도후서 2장 15절에 보면,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이렇게 되어 있어요. 화투 깔아놓으면 내용이 뭔지 몰라요. 그런데 패를 까보는 거예요. 복음을 전해놓고 “우리가 뭘 해도 그 모든 것이 죄인인 것을 드러내고 망할 수 없는 식으로 살아갑니다. 어떤 행동을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나와서 기도해도 소용없습니다.”라는 사실을 전하는 거예요.



그럴 때 그 사람들이 “그러면 십자가에서 예수님 죽은 것은 사실입니까? 의미입니까?”라고 물으면 그게 의미지 사실로 끝날 문제가 아니에요. 예수님은, 네가 그렇게 죄지은 것을 내가 담당했기 때문에 주께서는 그 담당한 상태에서 다시 토해놓는 겁니다. 이렇고 이런 죄를 지었다. 살려고 하는 것이 죄였다. 자기가족과 자기생명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죄였다. 이웃을 사랑한다고 자랑 질하는 것이 죄였다. 간음 안한다고 마음속으로 자랑하는 것도 죄였다. 오른 눈이 범죄 하는데도 뽑아버리지 않은 것도 죄였고,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도록 하지 않은 것도 죄였고, 하겠다고 맹세한 것도 죄였고, 남을 비판하는 것도 죄였다. 이런 식으로 다 빼보면 죄 아닌 것이 어디 있어요? 다 죄지요. 형제를 미워하는 것도 죄였다. 그것은 살인이었다.



이것을 주님이 알고 있는, 인간의 행함으로서는 단절되어 있으니까, 주님이 알고 있는 입장에서 그걸 다 토해놓는 거예요. 토해놓는 입장에서 “그게 현실이네요. 아하, 상황을 그렇게 보면 아주 단순하네요.” 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예수님이 부활했잖아요, 첫째부활로 말미암아 이미 참여가 되어서 그 사람은 죽어가고 있으면서도 이미 첫째부활에 참여한 자가 됩니다. 그렇게 되면 성도는 이중창이 돼요. 십자가와 부활을 현재화시키는 겁니다. 죽어가면서도 첫째부활에 참여한 자가 됩니다.



‘아하, 이게 십자가 앞에서 그렇구나. 십자가 앞에서 뭘 해도 죄가 되고 막 사나 안사나 다 죄구나.’라는 사실을 받는 것은 이미 부활되었고, 이미 구원되었기 때문에 갖고 있는 여유요, 느긋함입니다. 이것은 종교가 아닙니다. 종교란 내 쪽에서 해야 되는 것이거든요. 그러면 그 사람은 기도하는가? 기도해요. 헌금합니다. 전도도 하고 다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죄가 도 된다는 사실을 알아요. 헌금 하면서도 그것이 죄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요. 어떤 의미에서? 느긋한 의미에서, 신나는 기분으로 하는 겁니다.



뭘 해도 죄가 되니, “그럼 난 안할래. 죄가 되는데 왜 합니까?” 하고 안하고, 뭘 빼고말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요. 에이, 그냥 네 맘대로 사세요. 그냥 사세요. 왜 그런 자신감이 없습니까? 곡성 한 번 해보렵니까? 좀 되면 좋아하다가 좀 안 된다 싶으면 통곡하고, 곡성하고, 언제까지 그렇게 살 거예요, 언제까지! 언제까지 그렇게 살 겁니까? 어차피 실패할 거! 성공은 없어요. 어떻게 사실이 의미의 차원에 있는 악마를 내쫓습니까? 악마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반대하는 것이 악마인데. 내가 악마 짓을 하는데 내가 어떻게 악마를 쫓아내요. 나한테 내가 징을 세 개 박을까요?



그 영화 <곡성>의 마지막 장면에서 보면, 징을 세 번째로 박아서 완전히 악마를 작살내려고 하는데 아이가 너무 아파하니까, 애가 곧 죽을 것 같으니까 아버지(경사)가 화가 나서 “무당 다 치워!” 했어요. 그 말은, 자식에 대한 사랑이 악마의 추방을 방해했다, 그런 메시지를 던져요. 하여튼 영화 희한해요. 자식사랑이 자식을 버려놓았다는 그 말이에요. 세상 사랑이 세상을 버린 거예요. 나라 사랑하는 독립군이 나라를 버려먹는 것이나 똑같은 거예요. 교회를 사랑하는 교인이 교회를 지옥으로 만드는 것이나 똑같은 원칙이에요.



해답 없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사실들이 집합된 것이 현실이라면 그 현실에서는 어떤 해답도 나오지 않아요. 그러면 어떻게 해답을 얻는가?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죽음과 부활 자체가 해답이에요. 그 외 다른 해답은 없습니다. 그걸 지금 사도바울은 이야기합니다. 주 예수 앞을 가리지 마라. 너의 존재, 너의 가치가 예수님의 가치를 가리지 마라. 늘 우리는 어떤 행위를 하게 되면, 그 행위가 나의 가치로 되돌아오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어떤 행위를 하게 되면 본래의 자기 쪽으로 되돌아오게 되어 있어요.



그것에 대해서 예수님의 고귀함을 나의 고귀함으로 가리고 있다는 것을 통분하는 겁니다. 통회하는 거예요. 이 나쁜 놈, 나쁜 놈, 하는 거예요. 왜 자꾸 귀한 가치를 따로 놔두고 내가 가치 있다고 우기는지. 천하에 못된 것은 나밖에 없음을 자부할 때 모든 주어진 현실에 대해서 범사에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엄청난 은혜를 주시다니, 이것은 은혜의 폭탄이라고 해야 돼요. 모든 것이 은혜의 폭탄입니다. 우리는 감당할 수 없는 은혜들을 받은 겁니다.



정리해봅시다. 우리가 죽어서 죽은 것이 아니고 이미 죽음을 늘려놓아 버렸습니다. 살아 있는 것이 이미 첫째사망에 속합니다. 둘째사망인 지옥이 있고요. 유황불인 지옥이 둘째사망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늘여놓은 이유가 뭐냐? 첫째부활, 십자가에 죽고 부활한 그 의미가 여기에 발리지요. 저는 그것을 후버댐이라고 하는데, 미국에 유명한 세계적인 댐이 있거든요. 그 후버댐이 터지면 가두어졌던 물이 아래로 다 넘쳐버리잖아요.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라는 것이 뭐냐? 후버댐이 터진 거예요. 그 십자가복음의 의미가 우리는 아무것도 행한 것이 없는데 그냥 우리에게 그냥 덮치고 말았습니다. 덮치고 마니까 우리는 이미 살아 있어요. 살아 있는데 뭘 로 살아 있는가? 부활의 십자가복음의 재현체로 살아 있습니다. 재현 자, 또는 재현체로. 그래서 이게 이중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남들은 지금 죽어가고 있는데 우리는 지금 둘째부활로 가고 있는 중이에요. 둘째부활에 가기 위해서 첫째부활에 동승해서 둘째부활로 끌려가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그런 현상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아까 고린도후서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패를 까는 거예요. 이거 하고 마치겠습니다. 동영상 저장한다고 팔이 많이 아플 건데……. 사도바울이 패를 까지요. 내가 전하는 이야기가 이 사람에게 향수로 들리는지, 아니면 악취가 되어서 “저리가! 그런 소리 하려거든 저리 가!” 하는 악취로 들리는지 한 번 해보자, 하고 복음을 전합니다. 십자가복음을 전해요. 우리가 망한다고 되어 있는데 망하는 이유는 나쁜 짓을 해서 망하는 것이 아니고 죄의 지배아래 있기에 망하고, 그 죄의 지배에서 우리가 사실적인 행동을 해도 그 죄의 권세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실패할 수밖에 없고, 아무리 잘해도 죽을 때 곡성이 나고 울잖아요.



이걸 전하는 패를 까지요. 패를 까게 되면, 놀라운 현상이 일어나요. 전에는 그냥 건성건성으로 십자가를 알았는데 아, 십자가의 능력이 나에게 임했군요, 라고 하는 사람은 이미 첫째부활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사도입장에서, ‘음, 나도 한 구찌 건졌구나.’ 한 구찌 건진 것이 아닙니다. 그게 아니고 이미 주님께서 일을 다 해버렸어요. 이미 영생 받을 자와 영생 못 받을 자를 다 이미 깔아놓았는데 복음을 안전하니 이게 노출되지를 않았던 거예요.



패 까는 것, 이미 추수는 주께서 다 하시는데, 씨 뿌리고 기르시고 하는 그 모든 것은 주께서 알아서 다 하시는데 우리는 추수에 참여할 뿐이에요.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 만날 때 그런 이야기했어요. 인간들은 뭘 해도 제자리나 밟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의 열 두 제자가 있습니다. 열 두 제자가 사실적으로 주님을 따라갈 때, 자신들이 천국 다 간 것처럼 여겼습니다. 나중에 보니 제자리에서 못 벗어났어요. “에이 씨! 예수 믿다가 신세 조질 뻔 했네. 고기나 잡으러 가자.” 인간은 그것뿐이에요.



장로, 목사, 집사 되어서 개척교회 열 곳 했다. 백날 해 봐야 결국 그 모든 것은 결국 안 죽고 밥 먹고 살려고 한 짓으로, 제자리로 돌아와요. 저는 어떻게 되는지를 사도바울에게 묻지 마세요. 사도바울은 구원자가 아닙니다. 사도바울은 십자가진적이 없어요. 사도바울은 패 까는 사람이에요. 확인하고 해석하는 자지요. 제발 당신이 구원받았을 때 이 사도바울 덕에 구원받았다는 소리를 일체 하지 말기. 이것이 복음의 향수 속에 포함되어 있어요.



“에이, 사도바울이 산 넘고 물 건너서 왔잖아요.” 그러지 말라니까! 그러면 안돼요. “주께서 이미 구원한 것을 그저 패만 깠을 뿐이에요.”라는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됩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가 보낸 자를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 살린다는 거지요. 그런데 주의할 것이 있어요. 패 한 번 깠다고, 한 번 거부했다고 해서 ‘에이, 너는 아니야.’ 하지 마세요. 또 까세요. 눈치 봐서 한 넉 달 뒤에 또 까보시기 바랍니다. 안 그러면 가족들하고 못살아요.



내가 미처 모르는 것을 성령께서 주시겠지, 해서 일 년 뒤에 또 패 까보고. 자식이 결혼했을 때 복음 한 번 또 전해보고, “아버지! 저는 돈 버는 게 우선이고 저는 그런데 관심이 없습니다. 저는 사실에서 사실로 갈 겁 겁니다.” 하더라도 ‘그래, 3년 뒤에 다시 오마.’ 하는 마음으로 패 까세요. 그리고 아버지로서 내가 아들에게 전도했다고 하지 마세요. 전도는 주님만 하시고, 헌금도 주님만 하시고, 기도도 주님만 하시고, 모든 것은 주님만 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확인만 할 뿐입니다. 그 확인 속에 우리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열 두 제자가 희망에 넘쳐서 곧 천국 갈 것이라고 장담했건만, 실패였습니다. 하지만 성령 오셨을 때, 그들은 그 실패가 주님의 부활의 능력이고, 십자가의 능력이고, 복음의 능력인 것을 뒤돌아보면서 확인했듯이 날마다 이미 구원받았음을 십자가를 통해서 확인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