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강-신 14장 27-29절(부재)16052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14장 27-29절입니다. 구약성경 285페이지입니다.
“네 성읍에 거하는 레위인은 너의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자니 또한 저버리지 말찌니라 매 삼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의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레위인이 등장하는데, 레위인을 한마디로 말해서 부재를 나타내는 집단, 부재라는 말은 한마디로 말해서 없는 것, 보통 사람은 있는 것을 소유함으로써 살아가는 그것이 상식이고 이것이 당연한 걸로 여기는데, 그 당연한 것 속에 특이한 사람이 있습니다. 땅이 없고 아무것도 가진 자가 없는데, 아니 없도록,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는 자로 살아야 될 특이한 사람들이 등장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레위인입니다.
그럼 없는 사람을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비웃겠습니까? 얼마나 놀리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반대입니다. 없어야 된다는 이것을, 없이 살아야 된다는 이것을 너의 희망과 모델로 삼으라는 겁니다. 궁극적인 모델. 있어서 사는 것이 비정상적이고 없이 사는 것이 정상적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어느 쪽에 볼 때 그러냐 하면 하늘나라에서 볼 때 그것이 정상인 겁니다. 여기 29절에 보면 십일조를 거두되 우거하는 객과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삼년마다 거두는 십일조는 객과 고아와 과부들을 위해서 제공하라는 이 말인데, 나그네, 그리고 고아와 과부, 이들의 공통점이 뭐냐면 없다는 겁니다. 없이 산다는 겁니다.
결국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살아있음을 훼방하고 방해하는 쪽에 속한다 이렇게 보시면 되겠습니다. 나는 이만큼 재산이 있다는 그것이 도리어 하늘나라에 가는 길을 틀어막고 있는, 마귀처럼 틀어막고 있는 그러한 실패자적인 인생이 되는 거죠. 부자가 천국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 우리교회에는 전혀 해당되는 사항이 아닙니다. 부자가 없기 때문에 그렇죠. 부자가 얼마나 힘든지, 부자가 천국 간다면 정말 축하 할 일입니다. “아이구, 웬일이야? 니 같은 부자가 천국을 다가? 야! 이거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인데? 하나님 일처리 잘못하신 것이 아니에요? 어떻게 부자가 천국을 갑니까?” 근데 예수님께서 그 말씀을 확대시키죠.
부자가 천국 못가는 정도가 아니고, 사도바울이 오게 되면 부자 되려는 자는 다 천국에 못가죠. 부자가 천국 못가는 것, 그건 당연한 것이고 그 부자가 부러워서 부자 되려고 시도하는 사람들, 비록 지금은 가난하지만 내년에 보자! 이런 사람들, 뭔가 부자 쪽으로 방향 트는 사람, 천국은 없습니다. 제자들이 기겁을 했죠. 이 분을 계속 따라다녀야 되느냐, 마느냐, 고민이 발생된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 말씀을 하신 것은 마침 오늘 신명기 14장 본문과 관련해서 그렇게 된 겁니다. 그러면 어째서 그렇게 되느냐, 이것은 뭐냐 하면 레위인이 없이 산다는 것은 일종의 상처입니다. 예수님이 가졌던 상처에요. 모든 것을 가져야만 산다는 생각이 팽팽한 이 세상에 주님께서는 아무것도 없이 나타남으로써, 신명기 14장에 나와 있는 레위인의 완성으로써 이 땅에 오신 겁니다.
아무것도 없이는 못산다 할 때, 니는 가진 것 없이는 생명이 없다. 생명을 잃는다. 할 때, 그 생명이 가짜 생명이라는 거죠. 진짜 생명은 따로 있습니다. 근데 그 진짜 생명을 누가 틀어막느냐 하면 가짜 생명을 추구하다보니까 이게 막혀버린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상처가 나야 돼요. 상처가 나려면 긁혀야 되거든요. 긁힌 상처의 길 따라, 홈 따라 구원의 능력이 같이 흘러들어옵니다. 상처가 있는 곳에 구원도 함께 있는 거예요. 머리 좋은 사람은 팍팍 돌아가야 합니다.
아! 이게 부자 되었다고 지옥 가는 것이 아니고, 가난하다고 천국 가는 것도 아니고, 부자더라도 상처가 있으면 되는 거예요. 기쁜 소식이죠. 돈이 얼마가 있더라도, 부동산이 얼마가 되더라도, 상처가 있어야 돼요. “왜 이렇게 저에게 돈을 주십니까? 이 돈이 천국을 가로막지 않습니까? 정말 저는 이 돈이 저에게는 상처입니다.” 정말 이 말은 따라하고 싶다. 정말. “돈벼락이 상처인 것을, 너무나 아픕니다. 돈이 많아서.” 주께서 하신 말씀이 “그 상처를 따라서 구원이 들어올 것이다.” “그렇다면 제가......,챙기겠습니다.” 이렇게 돼요.
방금 제가 이렇게 돈을 많이 주시면 저는 천국 못가잖아요? 하는 말을 약간 바꿔보겠습니다. 이렇게 돈만 챙기는 마음으로는 천국에 못가잖아요? 라는 마음으로 바꾸어주시면 능력 없는 자나 이게 다 통용이 되겠죠. 그렇다면 이 레위인이 존재한다는 것은 아무것도 재산이 없어요. 중국에는 관군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게 빛의 군사들이라는 뜻이 아니고, 이게 땅 없는 사람, 땅 없는 사람인데 이게 확장되면 배우자가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에요. 중국에는 처자들이 전부 도시로 갔고, 애를 하나만 낳다보니까, 딸이면 죽이고 아들만 살려두니까, 이제 와서 성비가 112대 101정도로 엄청나게 균열이 일어났어요. 그래서 다큐멘터리에 보면 촌에 총각들이 우르르 모여 있어요. 땅도 없지, 땅도 없고 재산도 없으니까 처자가 시집을 오지를 않죠. 총각들만 모여 사는 거예요.
이게 없다는 것이, 없으면 없는 대로 살지. 인간은 이렇게 되지를 않아요. 없으면 없는 그 빈자리가 점점 더 늘어나게 되면 그 욕심도 같이 늘어나게 됩니다. 그 빈자리가 감추어지게, 뭔가 덮을 수 있는, 무엇을 더 달라는 요구사항이 늘어나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인간이 이렇게 자기가 없으면 안 된다, 뭔가 풍성해야 된다는 사고방식이 어디서 나왔느냐, 그것은 하나님과 땅을, 중간에 인간이 개입해서 자기가 이것을, 완성을 이루려고 한 겁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는 인간이 나서서 연결고리를 이룰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조화롭게 살 수 있다는 그러한 생각이 모든 민족들마다 다 생겼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주역인데요. 주역에 보면 하늘과 땅과 그 가운데 인간이 배치되어 있고 하늘은 음양으로 되어 있고 인간은 인과 의로 되어 있고 땅은 강함과 약함으로 이렇게 짜여져 있습니다. 그것이 조화를 이루어서 모든 변화가 일어난다는 거예요.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의 세계와 보이는 이 세상과 인간은 왜 있느냐, 인간이 중보자적 역할을 한다는 겁니다. 인도의 종교도 마찬가지에요. 인도의 종교도 우파니샤드라는 그런 책에 보면 보이지 않는 세계와 보이는 이 세상에 중매자로, 중간자로 인간이 나선다는 겁니다. 이 말은 쉽게 말해서 내가 잘 살고 풍성하게 되면 신은 좋은 하나님으로 나에게 비췰 것이고, 내가 못 살면 하나님의 무서움을 나를 통해서 보여주니까, 나는 어떻게 하든지 간에 복을 받아서 잘 먹고 잘 살아야 우리 하나님 찬양하는데 내가 보탬이 된다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많이 들었던 인식이잖아요? 30년, 40년, 교회 다녀도 맨 이 토대위에서 못 벗어나죠. 근데 레위인은 뭐냐, 이 구조를 폭파시키는 폭탄입니다. 사람이 갇혀 있으면 아무리 손톱이 빠질 정도로 긁어도 못 빠져나오죠. 오전에 이야기했듯이 문학이라는 것은 낙서에 불과하다고 했잖아요. 제가 우리나라 한강이라는 작가가 세계적인 유명한 상을 받았기에, 그 사람의 작품을 읽고 또 서평을 달려고 했어요. <채식주의자>는 다 매진됐고, 그 사람의 작품가운데 <소년이 온다>는 책이 있어요. 그건 최근에 쓴 책인데, 그걸 후딱 읽어봤죠. 다 읽어보니까 이건 뭐 그냥 낙서에요. 낙서. 인간의 폭력성, 5.18광주항쟁에 대해서 쓴 건데, 그냥 인간의 내부적인 폭력성, 그 폭력을 당한 피해자가 어떻게 사랑으로 극복했는가, 하는 그런 이야기에요.
이게 뭐냐 하면 하늘과 땅의 기운을 타서 내가 뭔가 균형을 맞추고 하늘에 있는 신의 저주, 가뭄이나 지진이나, 그런 폭풍이나 이 모든 것을 우리가 선하게 살게 되면 이게 자연도 회복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인간의 할 도리가 뭐냐, 신의 뜻을 알아서 이 땅을 평화롭게 유지하는 것이 인간의 할 도리다. 인간이 착하게 살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유토피아가 될 수 있고 잘 살 수 있다. 인간은 절망하지 말고 지가 하기 나름이다. 끝. 이 내용입니다. 어떤 교회에 말썽이 있으면, 그 교인들이 회개하게 되면, 하늘과 땅의 중간에 우리가 회개하게 되면, 하나님이 우리 회개하는 것을 봐서 그 교회를 다시 평온하게 하고 부흥케 하신다. 끝. 이거잖아요. 우리 가정에 문제가 있다. 막내아들이 문제를 일으켰어요. 그럼 그 부모가 막내아들을 때리면서 “이놈의 자슥아! 그렇게 순영이를 임신시키면 되느냐?” 하고 막 때리죠. 실은 아이 다섯 이야기입니다. “엄마 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 이렇게 회개할 때, 가정은 다시 원상복귀 되어 행복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이 하늘을 탓하지 말고, 하늘과 땅의 중간자, 인간이 어떻게 처신하느냐에 따라서 복은 오게 되어 있고 인간이 나쁜 행동하게 되면 저주가 오게 되어 있으니까 우리가 항상, 매일 주의하면서 신의 뜻을 따라 순종하게 되면 이 땅이 천국 같은 세상이 된다. 이게 바로 모든 인간 세계에 다 적용되고 있어요. 그게 바로 사기에요. 그게 엉터리에요.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만드신 거예요. 이스라엘은 오실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상처받은 제사장으로 오신 거예요. 이것은 뭐냐, 홀로 하신 거예요. 홀로 하셔서 인간의 환상적인 세계를 아주 폭발시켜버립니다. 왜? 폭발시켜놔야 이게 막장이 깨져버려요.
갇힌 모든 장벽이 무너지면서, 벽들이 다 무너지면서 거기에 뭐가 흘러들어오느냐, 바깥에 대기하고 있던 예수님의 공로가 이쪽으로 흘러들어 오게 되어 있어요. 깨진 그 폭파의 현장에 새롭게 흘러들어 온 것은 예수님에 의한 홀로 하신 공로만 은혜라는 이름으로 그냥 흘러들어 온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스스로 자기 모습을 보면서 상처를 받아야 돼요. 상처가 났다는 말은 우리 자신의 내부가 폭파되었다는 말이고 폭파를 시킨 당사자에 의해서 준비된 하나님의 의와 복과 그리고 자비와 용서가 흘러들어 오게 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날 때부터 소경된 자가 있었는데, 그 소경된 자는 그냥 소경된 것이 팔자려니 하고 살려고 합니다. 근데 주님께서 그 소경을 실로암 못에 가서 눈을 뜨게 했습니다. 그게 폭탄이에요. 폭탄이라고 해서 뭐 잘못됐다, 갑자기 망했다가 아니라 예상치 못한 쪽으로 내 인생이 끌려갈 때 그게 폭탄입니다. 눈 뜰 수 없다는 것이 명확한데 눈을 떠버렸어요. 그러니까 본인이 본인을 믿기지 않는 거예요. 내가 이렇게 달라질 줄을 본인이 믿기지 않는 겁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보면서 누구나 예수님은 비리비리한 분이고 별 가치가 없는 분이에요.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기대했다가 실망했습니다.
근데 실망한 그 분이 하늘로 승천하시고 그 분의 영이 우리에게 옴으로 말미암아 기억은 사라지고 그 분의 영이 현재화시켰어요. 그러면 나는 예수님과 교류하는, 내가 예상 못한, 자신도 그렇게 기대하지 않은, 놀라운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주님의 은혜와 주님의 공로가 계속 나의 행함의 공로를 자꾸 내몰고 갑니다. 우리의 가치 나의 착함, 나의 훌륭함을 전부 다 죄로 변화시켜서, 전부 다 바깥으로 방출시켜서 그 빈자리를 주님의 자비와 용서로 마구 채웁니다. 근데 우리가 내놓는 그 죄라는 것은 뭐냐, 남들이 가져가면 남들이 스스로 생존할 수 있는 힘이 되고 능력이 되는 거예요. 왜, 이런 것들을 갖다 버리는 거예요? 왜 이런 것들을? 이런 가치를?
“나는 우리 애 셋 키우는데, 하나는 판사고, 하나는 검사고, 하나는 변호사고, 왜 이런 죄인을 키우는지 모르겠어.” 하면 다른 쪽에서 “자식이 변호사면 얼마나 호강하는데....., 아이구 우리 집도 그런 것 좀 갖고 싶다.” 해서 가져갈 수는 없지만 가져가겠죠. 그게 바로 예상 못한 달라짐이에요. 너한테는 판사, 검사, 변호사가 있지만, 나는 너희들이 좋아하는 것들의 부재, 없는 거예요.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그러면 레위인들, 아무것도 없는 자들을 도와준다는 그 의미가 뭐냐, 십일조 안에 담겨 있습니다. 십일조는, 오늘 여러분들이 새롭게 아시기 바랍니다. 십일조라는 무엇이냐, 나의 마지막을 바치는 것을 십일조라 해요. 나의 끝을. 내가 살아있으면서 내가 노동한 것, 가진 것 가지고 살았지만 그 살았던 것은 쓰잘데기 없는 인생이었습니다. 이것을 하나님께 바칩니다. 끝을 바치는 거예요. 죽음 이후를 바치는 거예요. 미리.
그렇게 되면 역사와 역사의 문턱과 역사와 묵시의 문턱에다가 십일조를 내게 되는 거예요. 문턱에. 끝을 잡는 거예요. 십일조 내는 것은 내가 레위인처럼 살고 싶어요. 레위인이 사는 그 환경이 이제는 내 속의 환경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면서 내는 거예요. 십일조를 낸다는 것은 자기의 모든 소유가 의미 없음을 인정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어디에 나오느냐, 레위인의 십일조와 레위인이 결합된 최초의 계시가 창세기 14장 18절에 나옵니다.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20절,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그에게 내었더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봐도 이게 무슨 말인지, 전혀 무슨 말인지를 몰라요. 제가 설명해드리면 이렇습니다. 아브라함이 바친 십일조는 원래 아브라함 것이 아니고 숨어 있는 멜기세덱이 하나님과 기도해서 얻은 전리품이었습니다. 전리품 중에 십분의 일을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드립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아브라함이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내가 이렇게 전쟁에서 승리한 것은, 이거는 내 예상 밖이다. 이거는 내가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상황에 내가 놓여있다. 누구십니까? 나를 내가 예상 못하는 쪽으로 자꾸 몰아세우는 그 분은 누구십니까?’ 하고 있는데 길에서 만난 거예요. 누굴 만났느냐, 예루살렘의 왕 멜기세덱을 만났습니다.
그 사람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오니까, “바로 당신이죠? 당신이 내 대신 기도해서 이번 승리를 성취시켰죠?” 라고 하면서 십일조를 그 분에게 드리는 거예요. 근데 그 멜기세덱은 특징이 있어요. 아브라함과 병행될 수 있는 사람이 아니고 수직적으로 아브라함 인생에 꽂힌 사람이에요. 수직적으로 하늘에서 날카롭게 꽂힌 거예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물론 자식도 없어요. 그냥 홀연하게 도인처럼, 도사처럼 등장한 거예요.
결국 아브라함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아브라함이 우리에게 십일조를 낸다는 말은 뭐냐 하면, 위에서 꽂히거든 니 인생은 끝장나야 될, 아무 쓰잘데기 없는 인생임을 깨달아라. 쓸데없는 부재, 가치가 전혀 없는 니 인생을 가지고 주께서는 새로운 준비된 인생을 거기다가 담는 그릇으로 사용하는 구원받은 자의 조상입니다. 그리고 조상이라는 말은 연발, 연이어 일어나는 그런 사람이 출현될 거예요.
사람이 자기가 갖고 있으면요, 가진 것 가지고 희망을, 미래를 꿈꾸게 되어 있어요. 그거는 당연한 것입니다. 이거는 숨길 수 없는 거고. 그쪽으로 살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어디서 날라 왔는지, 뭔가 커다란 기둥 같은 것이 인생에 박혀버립니다. 내가 갖고 있어도 이게 내 것이 아니구나! 내 것이 아니구나! 나는 처음부터 내 것이 없었구나! 나는 레위인이구나! 내가 토지도 없고, 아무것도 없고, 그냥 아무것도 없는 자라야 됨을 이야기하는, 아브라함과 같은 맥락의 인생 쪽으로 주께서 몰아세우는구나! 그렇게 알게 되면 그 사람은 이미 십일조를 바친 묵시의 문턱을 잡은 사람이 돼요. 이 이야기가 히브리서에서 나옵니다. 멜기세덱이야기가 히브리서 6장 나오고 7장에서 나오는데 이 이야기하고 마치겠습니다.
히브리서 6장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멜기세덱은 뭐냐, 라고 하면서 한마디로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하나님의 맹세가 없는 자는 천국에 못 온다는 거예요. 히브리서 내용이 딱 하나에요. 이 세상에 천국 갈 수 있는 사람은 미리 하나님께서 예고한 사람만 천국에 들어올 수 있다는 겁니다. 근데 예고했다고 하면 되는데 맹세라고 하느냐, 하나님이 스스로 자기한테 맹세한 사람만 천국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 이게 멜기세덱이에요. 아브라함은 그 하나님의 맹세를 보여주는 증인으로서 이 땅에 살았습니다. 멜기세덱은 아비도 없고 족보도 없습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차원에 속합니다. 아브라함은 보이는 차원에 속해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의 전쟁에서 318명으로 이길 리가 없어요. 근데 전쟁에서 이겼습니다. 근데 이것이 자기가 예상 못한 인생으로 간다는 것이 너무나 기이했습니다. 누구십니까? 내 인생을 이렇게 내가 기대하지 않고, 내가 예상 못한 인생으로 가게 하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근데 보니까 멜기세덱이라는 사람이 자기에게 축복을 주려고 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모든 승리는 내 것이 아니고 바로 당신의 몫입니다.” 하고 십일조를 드리죠. 그 십일조가 창세기 지나서 오늘 본문 신명기에 오게 되면 그 십일조 받아야 마땅한 레위인이 집단화되어서 이스라엘 속에 담겨있습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이스라엘 속에 폭탄 들어있다는 겁니다.
소유하고자 하는 자는 폭파되지 아니하면 준비된 축복이 흘러들어 올 여지가 없다. 이걸 알려드리는 겁니다. 그래서 그 비슷한 사람이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들이에요. 아무것도 없는데, 없는 자를 일부러 그 속에, 한복판에 심어놓아요. 그러면 “아이구. 더러운 인간 니 팔자도 참 불쌍한 팔자다.” 이게 아니고 “주여. 제가 바로 저런 팔자입니다.” 라고 이야기하면서 “고아와 과부, 아무것도 없는데 하나님이 친히 살려주는 저 세계가 결국 내가 가야할 천국의 세계인 것을 미리 앞당겨 맛보게 해주니 감사합니다.” 하고 그들에게 삼년마다 십일조를 그들의 몫으로 제공하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그럼 이들이 십일조를 냈을까요? 안 냈을까요? 정답은 간단합니다. 미쳤습니까? 내게. 어떤 분하고 이야기를 하는데, 뭔가 예를 들게 되면 압력이 들어와요. 어떤 분이 이야기하는데 십일조를 낼 때 어떻게 내느냐 하면, 처음에는 남편의 월급의 십일조를 내다가, 가만히 보니 십일조 말고 딴 헌금도 있으니까, 교인들이 머리를 쓰는 거예요. 십일조를 내되 총금액이 십일조가 되도록, 감사헌금 얼마 내는 것까지 계산하는 거예요. 다 합쳐서 십일조 금액이 되도록 만들어 교회에 내도록 하는 겁니다. 이게 뭡니까? 이게? 이게 뭐하는 거예요? 왜 그런 식으로 헌금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그런 식으로 헌금하게 되면 자기가 예상한 인생을 꽉 쥐는 셈이 돼버려요. ‘십일조 냈으니까 설마, 참혹한 사태는 일어나지 않겠지.’ 미리 예상한다는 거예요.
근데 십일조는 미리 내는 것이 아니고, 예상하지 않은 인생이 터지고 난 뒤에, 폭탄 맞고 난 뒤에, “주께서 일을 이렇게 저질러놨습니다.” 하고 내는 것이 바로 십일조에요. 뭐냐 하면, 나는 전에는 저렇게 팔자 더럽다고, 땅도 하나도 없는데 우에 사노? 이렇게 했더니만, 내가 그 꼴인 것을 깨달아서 그들에게 내는 것이, 물론 구약입니다. 신약에는 십일조가 없으니까. 그들에게 내는 것이 바로 십일조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은 십일조 내지 마세요. 그냥 뭐냐 하면 매일같이 내가 원치 않는 인생을 살아가시면 그 덩어리 자체가 십일조 덩어리입니다. 주께서 먼저 십일조를 일으키셨고, 우리는 내 인생 자체가 십일조에요. 그 돈 가지고 뭐 맛있는 것을 먹든지, 크루즈여행을 가든지, 뭘 해도 이게 십일조에요. 부산의 이창섭 목사님이 크루즈여행을 간다고 지금 부풀어있는데, 한 이천오백만원이면 된답니다. 뭐 가셔도 그 크루즈여행이 상처가 되기를 간곡히 기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우리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상처 낼만한 짓을 하고 있음을 이제는 알았습니다. 주께서 인도하는 길은 따로 있는데 우리는 우리가 예상되는 길이 천국인양 착각해서 소유로써 나를 살리려는 가짜 생명에 얽매였습니다. 주님이여, 살아가면서 항상 예상 밖의 일을 주께서 일으키신다는 사실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