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고린도전서92강-죽음있는 부활(고전15;12-15) 160508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5. 11. 07:17
2016-05-08 12:54:30조회 : 125         
   죽음있는 부활 160508 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죽음있는 부활(고린도전서 15: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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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6-05-08 13:40 
죽음이 있는 부활

2016년 5월 8일                         본문 말씀: 고린도전서 15:12-15

(15: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15:13)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15:1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5:15)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하나님의 일관성은 ‘하나님 방식’으로 나타내십니다. 인간들이 기대하는 방식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인간이 부활한다는 사실은 구약 성경에 여럿 나옵니다. 이사야 26:19에 보면,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를 내어 놓으리로다”고 되어 있습니다.

물론 사도 바울도 이 내용을 알고 있습니다. 스스로 남김 말씀을 하나님께서 스스로 이루시는 것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유대나라에서는 기본 중에 기본이요 당연한 인식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사도가 되기 이전에서는 이 ‘부활’이라는 일관성에 대해서 달리 생각했습니다. 즉 인간이 기대하는 식의 일관성으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사도가 예수님을 만나고 부터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식의 일관성’으로 일하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기대와 이해를 비켜가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약속을 성실하게 수행하심을 알게 된 것입니다. 왜 그래야할까요? 왜 인간의 기대치를 비켜나가야만 하시는 걸까요?

그것은 인간들 본인들이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 대상임을 인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저 하나님의 약속을 이용할 생각만 하면서 말씀을 대하게 됩니다. 지금보다 형편이 더나아가지기를 바라면서 하나님의 기적을 갈구하게 됩니다. 이런 기대와 희망 속에서는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하심’이 빠져 있습니다.

골로새서 3:5-6에 보면,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땅에 대해서 집착이나 미련 갖지 말고 연연하지 말아라 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신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왜 하나님께서는 친히 만드신 세상을 스스로 구겨버리고 뭉개버리시는 지를 모릅니다. 왜 사람들을 태어나게 하시면서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으시는지를 모릅니다. 그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바로 모든 예언과 명령과 말씀은 전부 예수님에게만 적용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도가 되기 전에는 이 사실을 몰랐습니다. 즉 자신의 기대를 하나님께서 비켜가면서까지 사울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을 저주 쪽으로 이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네들의 삶과 부활의 세계 사이에 왜 구태여 죽음이 끼어 있는 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냥 지금처럼 살던 대로 살다가 계속 저 하늘나라에 그대로 올라가서는 살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생각이 저주받을 죄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진정한 예언과 말씀과 언약의 내용을 예수님의 활동을 통해서 드러내시게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분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죽음은 ‘아버지로부터 버림당하심’이라는 취지를 보여주시는 죽음입니다. 즉 죄에 대한 하나님의 처분은 가치없이 진행되고 실현시키십니다. 하나의 예외도 없이 말입니다.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마치 자신들에게 천국갈 기회가 부여된 줄 알고 들떠있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하나님에게 용서받을 방식마저 자신의 아이디어에서 내어놓습니다. 이러다보니 인간들은 가능성에 주목합니다. 즉 할 수 있는 것을 다 동원해서 신의 진노를 누그려뜨릴 방안들을 내놓고 그것에 매진합니다. 이런 태도와 행동들을 하면서 인간들은 그것이 저주받을 짓이라는 사실을 추호도 모르고 있습니다.

모든 만물의 활동이 예수님에게만 집중되는 바로 그점이 하나님의 일관성이었습니다. 따라서 인간들이 아무리 죽어도 부활의 세계에 나타나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품고 있는 바로 그 ‘하나님의 저주 안’에 들어갈 수 있어야 하나님 약속의 일관성에 의해서 부활에 참여됩니다. 평소에 인간들은 자신의 수치를 자신의 결과물로 위장하는데 주력해서 살아갑니다.

마치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와 하나님 앞에서 무화과 나뭇잎을 걸치고 숨어지는 것과 같은 형편입니다. 그러나 다니엘 3장에서 다니엘 세 친구에게 일어난 사태를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조치가 얼마나 획기적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니엘 세 친구는 우상에게 절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뜨겁게 따오르는 용광로 속으로 던져집니다.

얼마나 그 불의 온도가 높았든지 죄수들을 집어넣는 간수들이 타죽을 지경이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그들이 불 속에 들어가 모습을 보니 그토록 침착할 수가 없습니다. 도리어 불 밖에서 지켜보는 장소에서 패닉(공황상태)이 일어났습니다. 왕부터해서 모든 이들이 매우 당황했습니다.

이는 그들의 삶이 위기 때 당황할 수밖에 없는 방식으로 살아오고 있다는 점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하나님 만나는 삶의 위기를 벗어나야겠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구약의 이스라엘을 보세요. 그들은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매일매일 버티는 식으로 살았고 치열하게 살았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합당하게 성취하시는 분이 바로 그런 식으로 함께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성도가 매일 삶 속에서 고백해야 할 것은, “하나님 덕분에 나의 재물이 풍족하게 되었다”가 아니라 “내가 기뻐하는 것은 바로 주님과 함께 고생한다는 것뿐이다”는 고백입니다.

우리 자신들의 존재감 때문에 우리는 어린아이처럼 살지를 못하고 초조함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어린아이는 자기에 대한 존재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저 엄마만 찾습니다. 즉 자기로 인하여 자신이 살아가고 있지 않음을 아는 겁니다. 사람들은 기억 속에서 자신을 살린 권력을 구축하게 되는데 이것은 결국 ‘악마의 얼굴’을 나타내는 사인에 불과합니다.

자신에 대해서는 늘 실망하면서 십자가 앞에 서야 합니다. 자신이 모아놓은 세력은 먼저에 불과함을 알아야 합니다. 늘 자기 주제파악을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즉 십자가 안에 있는 자만이 자신이 저주받을 자에서 예수님의 공로로 의인되었음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이게 복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아무 것도 아닌 존재이기에 아무 것도 바라지말고 주님과 함께 있기를 소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6-05-09 05:46 
188강-고전 15장 12-15(죽음 있는 부활)160508-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5장 12-15절입니다. 신약성경 282페이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하나님께서 일하심 속에서 구원자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구원자를 보내실 때에 무슨 일을 하라고 보내셨는가? 죽음가운데서 부활하는 작업, 그 일도 그리스도에게 일어나도록 하나님께서 일관되게 일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사신 것은 이미 계획이 잡힌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런 식의 메시아만이 메시아라는 것을 이미 아시고 죽음 가운데서 부활시킨 거예요. 주님께서 죽으신 것도 하나님의 일관성에서 된 죽으심입니다.



그래서 죽으셨다가 부활됨이 없으면 이것은 전혀 하나님하고 상관없는 존재에요. 죽으셨다가 부활됨이 없는 식으로 하나님을 거론하는 것은 가짜입니다. 그거 하나님 믿어도 소용없는 겁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이 땅을 어떤 식으로 작업했는가? 어떤 이들은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천지를 창조한 것이라고 했어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 나는 그것을 인정함으로 하나님에게 인정받는 사람이 된다. 그렇게 성급하게 나섭니다.



그런데 그 창조가 구겨진다는 그것까지 아실런지 몰라. 만들어놓은 하나님이 만들어놓은 그것을 부순다는 것, 그 안에 들어 있는 동물과 식물, 그 모든 것을 부숴버리지요. 노아홍수에서 보여주듯이 사람마다 다 죽입니다. 만들어놓고 죽이고, 만들어놓고 부수시는 이유를 여러분은 아실는지 모르겠어요. 그런 식으로 성경이 기록되어 있는 거예요. 그런데 만들어놓고 부수시는 그 이유에 대해서 사도바울이 몰랐는데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 특히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부활한 것을 통해서 ‘아하,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 원래조치가 망가지라고 이 땅을 만들었구나.’ 다시 말해서,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것은 망가지라고 이 땅에서 살아가고 죽이기 위해서 인간은 이 땅에 태어났다는 사실을 아는 거예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일관된 계획 속에 잡혀 있는 겁니다. 그리스도는 그 일관된 계획에 따라서 이 땅에서 활동하셨던 분이고. 그래서 예수님 이전에 뭐가 우선인가 하면, 주님의 말씀이 우선이에요. 말씀대로 되거든요. 그 말씀을 다른 표현으로 하면 언약이라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앞장세워서 일하셨고, 예수님은 그 언약대로 일하셨고, 약속대로 일하셨고. 그 외 다른 하나님을 상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외 어떤 진짜 하나님도 없어요. 하나님이 약속대로 했고 그 약속의 비밀은 남들은 몰랐는데 이 땅에 오신 예수님만이 약속을 알아서 약속대로 이 땅에 펼쳤다는 말이지요.



펼치시고 그 펼치시는 모든 일이 사람들한테는 기괴하고 낯설게 보였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나는 죽으러 왔다.” 하는 그것도 굉장히 기이하게 들렸습니다. 왜? 모든 인간은 살고 싶어서 환장했기 때문에. 자기는 죽어야 된다는 거예요. 오셨으면 산채로 그냥 하늘로 가셔도 될 문제인데 왜 죽어야 됩니까, 하는 그 죽음문제, 십자가 죽음문제가 사람들에게는 걸림돌이 된 거예요.



이게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인간은 자기가 살아 있으면서 주님 따라서 산채로 천국 가려고 노렸다는 말이지요. 노렸는데 정작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은 우리를 산채로 천국 데려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삶과 예수님의 부활 사이에 예수님의 죽음을 집어넣은 거예요. 왜 집어넣는가, 그 문제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거예요. 죽음 없이 그냥 데려가셔도 충분한데 구태여 왜 죽음을 집어넣느냐는 말이지요. 예수님은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니라.”



그러면 사람들은, “내가 아는 하나님은 그게 아닌데? 우리 인간을 사랑하는 하나님인데.” 인간을 사랑하는 하나님이 아니고 인간을 죽이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이 낯설어 보이는 주님의 뜻입니다. 어떤 분이 그런 이야기를 해요. 음악교과서에 가스펠송이 하나 실리게 되었다는 겁니다. ‘당신을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 노래가 음악교과서에 실린다는 겁니다. 하여튼 마귀도 도사라. 마귀는 복음 아닌 것은 어떻게도 그리 잘 아는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고 난 뒤에 부활이에요. 그러면 예수님의 이 지상의 삶과 예수님의 다시 산 삶 사이에 죽음이라 하는 십자가를 집어넣은 이유가 십자가에서 아버지께 버림받았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의 진노가 있고, 하나님의 저주가 있고, 하나님의 심판이 십자가에서 드러나는 겁니다. 저주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부활은 어림도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들어가지 아니하면, 거기를 경유하지 않으면 천국은 없습니다. 다 가짜천국이에요.



그래서 진짜 사도처럼 천국으로 인도하고 외치는 사람은 오히려 부활의 세계, 천국의 세계를 말하지 말고 예수님의 진노 받으심, 우리의 죄 때문에 진노 받았다면 곧 우리가 진노의 대상이라는 것, “당신은 진노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 노래를 불러줘야 돼요. 교과서에 이런 노래는 실릴 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저주받아야 돼요.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입니다. 이걸 누가 알겠어요?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충동질했던 그 사탄이 모든 인간을 장악하고 있으니까 “너를 부정적으로 보는 모든 것들은 다 배척해라.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그런 식으로 엉뚱하게 반대로 가르친 거예요. 사람이 사는 것을 자꾸 우선시 하니까 뭘 자꾸 도외시하느냐 하면,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생한 것을 자꾸 도외시해요. 사람들은 말합니다. “내가 교회 나와서 하나님을 믿으니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늘 복을 주기를 원하고 모든 형편이 펴기를 원한다.” 하는 선입견이 있어요.



그러나 정작 구약을 보세요. 구약에서 하나님과 동행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습니까? 하루하루 버티기 작전이에요. 광야에서, 광야뿐만 아니라 약속의 땅에서. 배 두드리는 편안한 삶이 아니었습니다. 팔자 펴는 삶이 아니에요. 힘들어해요. 먹고 마시는 것을 늘 걱정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기대하는 것이 뭐냐? 하나님이 그런 식으로 동행하신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너만 고생한다고 여기는 그 길은 너만 고생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도 그 길을 가고 있다.” 하는 거예요. 누구와 함께? 죄인과 더불어서 함께 힘들고 힘든 인생길 가는 것을 고백할 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입니다. 그게 하나님과 성령과 함께 동행 하는 모습이에요.



기도하면 복 받고, 형편 펴고, 만사형통하고, 그런 것이 동행이 아닙니다. 나보다 더 힘들게 먼저 가신 주님의 길인데 고맙게도 나로 하여금 혹독한 이 세상의 그 찌든 삶을 경험케 하면서 주께서 가신 길이 그 길임을 성령께서 동행하면서 혹독하게 느끼게 하는 것, 그거 외에 다른 길 생각하지 마세요. 다른 길은 다 마귀가 하는 겁니다. 성경을 안보니까, 구약을 안보니까, 그저 교회 와서 목사 말만 들으니까 기도하면 만사형통하는 줄 알고, 전부 다 마귀가 그런 식으로 교회를 덮어놓았어요. 이상한 기운, 어두운 기운, 어두운 세력이 다 그렇게 만들어버렸어요. 성경을 안보고 들었던 상식 가지고 버티는 거예요.



제가 울산의 새순교회에서 강의할 때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여러분들은 무엇을 만회하려고 교회 왔습니까? 인생의 무엇이 망가졌기에 하나님을 믿어서 그것을 원상복구하고 만회하려고 교회를 오셨습니까?” 성경은 인생 만회하는 곳이 아니에요. 죄도 없으면서 나보다 더 억울하게 죄지은 모습으로 사셨던 그 분의 뒤를, 그 길을 성령이 동행하셔서 가게 하시는 겁니다. 다른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5월만 되면 가정의 달 때문에 골치 아파요. 어린이날 있지요. 어버이날 있지요. 스승의 날까지 있는데 5월 달이 아예 통째로 날라 갔으면 좋겠어요. 정말 귀찮아 죽겠어요. 5월 달을 달력에서 찢어버려야 돼요. 어린이날 놀이동산에 가 보게 되면 애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릴 때 누구나 한 번씩은 느꼈을 거예요. 재미있게 놀다 보니 엄마, 아빠, 자기 동생들이 옆에 없어요. 눈에 보이지를 않습니다. 세 살 네 살 때 갑자기 멍청하게 되고 말았어요. ‘여기가 어디지?’ 사람은 많은데 아는 사람은 없어요. 나를 책임져 줄 사람은 없습니다. 전부 다 낯선 사람밖에 없어요.



애는 울지요. 무섭고, 두렵고, 공포가 찾아오고 겁이 납니다. 그럴 때 엄마가 자기 이름을 불러주면 얼마나 반갑습니까? 오늘날 현대인들은 열심히 살기는 사는데 멍청해요.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몰라요. 분명히 친한 사람은 많고 아는 사람은 많은데 영원히 내 인생 책임져 줄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어요. 길 잘못 들었어요. 잘못된 길에 왔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없는 쪽으로 갔어요. 그걸 성경에서 넓은 길이라고 해요. 많은 사람이 찾는 쪽으로 갔어요.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 만으로 만족하지 않는 그런 인생이라면 여러분은 지금 엉뚱한 곳에서 헤매고 있는 중입니다. 정말 인생 제대로 된 길로 간다면 “그리스도만 있다면, 예수님만 있다면 저는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어요.”라고 돼야 돼요. 사도바울도 길을 잃은 사람이에요. 어떻게 살아야 될지 막 헤매던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이제 길을 알려줍니다. 하나님은 약속대로 실시하신 분이고 그 약속대로 실시한 분의 확실한 증거는 이미 메시아가, 구원자가 이 땅에 왔었다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제 그분을 만나고 보니까 모든 것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그분이 우리에게 다 보여줬는데 우리는 생각이 엉뚱한 곳에 있으니까 예수님이 우리의 책임자라는 것을 몰랐던 거예요. 하나의 예를 들면, 오늘 본문의 예를 들면,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죽었다가 살아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논조를 계속 유지하고 있는데요. 다니엘 12장 2절에 보면,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사야 26장 19절에 보면,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를 내어 놓으리로다.” 이게 이사야 26장 19절에 분명히 하나님의 약속된 된 거예요. 사람들은 기다렸지요. 자기가 죽었다가 살아날 것을. 그런데 뭐가 빠졌는가? 이 성경말씀을 철석같이 믿고 죽은 내가 다시 살아날 것을 기대하는 내가 뭔가 빠진 것이 있어요. 그렇게 기대하는 내가 저주받아야 될 나라는 사실이 본인에게는 들어있지 않았던 겁니다.



‘성경말씀대로 나는 죽었다가 부활해야지.’라는 그것조차 죄가 된다는 사실을 감히 생각하거나 상상하지도 못한 거예요. 성경을 믿겠다는 것은 내가 사적인 욕망, 사적인 이기주의, 여기서도 살고 저기 가서 또 살고, 그런 이기주의적인 죄라는 사실을 자신은 수용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 말씀 믿고 좀 이용해먹겠다는데 그것이 뭐가 나쁘냐는 겁니다. 그게 나빠요. 그게 뭐가 나쁘냐는 거예요. 천국 보내준대서 교회 나오는데 그게 뭐가 나쁘냐는 거예요. 그게 나쁜 거예요. 뭐가 빠졌다는 겁니다.



뭐가 빠졌는가? 하나님의 말씀 믿고, 부활을 믿고 기다리겠다는 그 사실이 거울 앞에서 내가 볼 때는 굉장히 대견스럽고 믿음 좋은 사람으로 보이지만 막상 구원자인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는 그게 저주받을 죄가 된다는 사실이 노출되는 겁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우리 자신들이 거부해요. 이사야 26장과 다니엘 12장에서 부활 이야기를 하면서 하나님의 취지는 이거였습니다. 이렇게 부활된다, 다시 살아난다고 제안을 하게 되면, 사람들은 창세기 2장, 3장에서 선악과 따먹은 것은 잊어버리고, 아담이 범죄 했다는 것은 잊어버리고 그저 욕심이 나서 살려준다니까 살기 위해서 나온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주님의 뜻은 이거예요. 용서받을 수 없는 자가 용서받기 위해서 어떤 시도를 한다는 그것은 용서받을 자에게서는 나와서는 안 될 나쁜 성품이라는 겁니다. 이 중요한 대목을 다시 천천히 하겠습니다. 용서받을 수도 없는 자가 죽어서 좋은데 가려고 용서받고자 어떤 시도를 하는데 ‘나는 용서받고 천국 가야지.’라는 그 시도 자체가 용서받을 수 없는 더러운 죄에서 유발된 거예요. 용서를 내가 받고자 한다고 해서 주께서 용서하는 게 아니에요. 용서하고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그 방식은 용서하실 분에게서 내려와야 되지 “내가 용서받고 싶습니다.” 한다고 해서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이거 아는데 수십 년 걸렸어요.



쉽게 말해서 하나님은 아무도 용서하지 않아요. 왜? 아무도 용서받을 자격이 없기 때문에. 그럴 권리가 박탈되었어요. 용서란 하나님의 언약, 약속이 구현되면서 용서받을 방법과 시기와 절차가 한꺼번에 터져 나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완성이 될 때 그게 나와요. 그게 부활로 인하여 십자가만이 용서가 되지 다른 것은 안 된다는 겁니다. 십자가만이, 예수님의 죽으심 안에 있을 경우에만 용서가 되고 그 외에는 용서가 되지 않습니다. 그걸 가지고 예수 안에서 의롭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예수 안에 들어올 때만 의로운 거예요.



그러나 우리 인간들 입자에서 부활이란 뭐냐? 여기서도 살아 있고, 부활의 세계니까 그 부활에서도 살아 있고, 여기도 살아 있는 세계고 저기도 살아 있는 세계라면 살아 있는 채로 죽 가면 될 것이지요. 그리고 죽을 수도 있는데 죽더라도 “야, 일어나.” 깨워서 가면 되지 않겠는가? 살아 있는 내가 저 나라에 가서 또 살겠다는 그것이 뭐가 그리 힘든 것인가? 이렇게들 생각하는데 여기 살아 있겠다는 그 내가 살아 있을 권리가 없거든요. 없으면 이 권리를 그대로 유지하고 천국 가서 이 권리를 행세하면서 또 살겠다는 거예요.



그러니 이것은 전혀 하나님 뜻이 아니고 마귀의 뜻이에요. 쉽게 말해서 “예수 믿으면 여러분이 천국 갑니다.” 이게 마귀 말이라는 거예요. 이게 마귀의 말이고 사탄의 말이에요. 예수 믿으면 천국 간다는 그 말이. 지금 뭐가 빠졌는가 하면, 중간에 십자가가 빠져버렸어요. “십자가 믿으면 천국 갑니다.” 이것도 마귀 말이에요. “당신은 이렇게 구원받습니다.” 이것이 마귀의 말이고 십자가가 뭐냐, 가 먼저 와야 돼요. 십자가가 먼저 들어와야 돼요. 십자가를 먼저 들이대게 되면, 우리는 처음부터 어떤 용서의 방법이나 어떤 구원의 시도도 예수님이 나 대신 죽을 수밖에 없는 죄가 된다는 사실을 파악을 해줘야 됩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게 바로 죄가 된다는 거예요. 그게 바로 죄에요, 죄. 어떤 권리의 요구. 주님께서 복음을 전할 때 그런 식으로 전한 이유가 있어요. 인간이 죄짓고 난 뒤에 어떤 현상이 있습니다. 창세기 3장 7절에,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이게 수치입니다. 인간의 모든 행동은 수치를 위장하는 쪽으로 행동이 나오게 되어 있어요.



“당신은 왜 그런 행동을 합니까?” “폼 나게 살고 싶어서 했습니다.” 이게 위장이잖아요. 품 나는 것. 여관에서 같이 일하다 만난 10살 위의 자기선배를 죽여서 안산시 대부도에 토막 내서 버렸습니다. 얼굴이 공개되었어요. 얼굴 공개되니까 철없는 아가씨들은 인물 괜찮게 생겼다고 팬클럽 조성할 가능성이 있어요. 문제는 왜 동업자를 죽여서 토막 살인을 해서 내버렸는가? 딱 한마디에요. 폼 나게 살고 싶어서, 인간답게 살고 싶어서.



그러면 왜 폼 나게 사는데 그렇게 억지를 부리는가? 뭔가 수치스런 것이 있기 때문에 그걸 감춰야 돼요. 인간의 모든 철학, 과학, 종교, 이 모든 것이 사실은 무화과 나뭇잎입니다. 자기 수치를 가리고 싶어요. 벤츠타고 윙! 그것도 뭔가 가리고 싶은 것이 있어요. 자꾸 위장하는 거예요. 실패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자꾸 길 잃은 아이처럼 엉뚱한데 가 있는 거예요. 세상전체가 전부 다 엉뚱한데 서 있어요. 아는 사람은 많고 악수는 하는데 헤어지면 둘 다 멍청해요.



하나님께서 이 멍청한 인간들 모아서 세상 만든 이유가 뭐냐? 이미지를 끄집어내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그걸 기호작용이라 합니다. 어릴 때 매스게임 한 적이 있지요. 북한에서 단체로 많이 하는 것. 매스게임 하는 애들은 그냥 종이판에 글자 써서 순서대로 A올리고 그 다음에 B올리게 되면 본부석에서 보게 되면 ‘새마을운동’ 이런 글자가 나와요. ‘민족을 살리자.’ 이런 글자들이 막 나와요. 우리도 초등학교 때 매스게임 많이 했어요. 올리라고 하면 무조건 올려요. 무슨 글자가 새겨지는지는 몰라요. 끝나고 난 뒤에 삼송 빵 두 개 받았어요. 대구분들은 알지요. 얼마나 유명한 빵인지.



본부석에서 보면 글자나 이미지가 나타나요. ‘새마을운동’ 이런 식으로. 그러나 흩어지면 새마을운동, 이런 글자나 이미지가 다 없어지고 각자 개인으로 돌아서 버려요. 네온사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번쩍번쩍, 하지만 가까이 가서 들여다보면 그냥 그 자리에서 불빛이 꺼졌다가 켜졌다가 해요. 그러나 멀리서 보면 하나의 이미지가 나오지요. 이 전체가 마귀의 이미지를 구성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매스게임을 벌인 거예요. 인간을 상대로 인간의 죄를 드러내기 위해서. 복음이 아닌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렇게 한 거예요.



전에 독일에 간 적이 있는데 쾰른대성당이 있고 그 옆에 루트비히 현대미술관이 있어요. 그 미술관에 딱 들어서게 되면 제일 먼저 나오는 리히텐슈타인의 작품이 있어요. 팝아트라는 현대미술작품인데 작품 한 점이 우리 돈으로 50억에서 70억이 되는 작품이에요. 그 작품을 보면 만화를 점으로 찍어서 그려놨어요. 분명히 만화에요. 만화를 크게 확대했어요. 가만 보면 점들의 조합입니다. 인간들은 각자 제자리에 있다 보니까 내가 너와 모여서 무엇을 보여주는지, 하나님은 각자가 모여서 어떤 이미지와 사인, 기표와 기호를 보여주는지를 우리는 몰라요. 그냥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 뿐이에요.



그런데 주께서 멀찍이 보면 그게 사탄의 얼굴입니다. 악마의 얼굴을, 전 세계를 통해서 그 이미지를 보여준 거예요. 그것이 약간은 짐작이 되는데요. 예를 들면, 우리 집에 교황의 역사라는 책이 있어요. 거기에 보면 교황을 선출하는 콘클라베에서 264명의 교황이 선출되었고 그거 없이 그거 없이 불법으로 된 교황이 39명이에요. 그렇게 교황이 선출된 것과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아무 관계없지요.



그런데 만약에요, 우리 외삼촌이 교황이라면 아무것도 아닌 그것이 갑자기 “우리 외삼촌이 교황이다.”라고 하는 순간 나에게 권력이 됩니다. 권력이라는 이미지가 돼요. 기억이란, 나의 기억이 될 때 그게 권력이 되는 겁니다. 우리는 각자의 권력이라는 그 매스게임을 하고 있는 거예요. “나 건드리지 말라. 우리 외삼촌 교황이야.” 이게 하나의 이미지로 등장하면서 우리는 마귀의 일부를 보여준 게 돼요. 내가 있는 자리에서 그 권력덕분으로 살겠다는 그것,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에요. “나는 이 권력덕분으로 사는 이상 나에게는 저주나 심판이나 하나님의 진노 이야기는 하지 마라. 나는 그거 없이도 내 힘으로, 내가 가진 권력으로 충분히 살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어릴 때부터 교육받고 양육 받아 왔습니다.



이게 뭐가 죄고 뭐가 사탄의 짓인지 아무도 옆에서 이야기해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교회 가면 교회 자체가 하나의 권력이 돼요. 기억나니까. 그런데 교황이 몇 명이 있든 자기와 관련이 없으면 그것은 먼지가 돼요. 나와 관련이 없는 모든 기억들은 먼지가 되어서 툭툭 털면 끝나는 겁니다. 왜? 내 권력에는 보탬이 안 되기 때문에. 그러니까 이 권력이 하나의 무화과 나뭇잎이 되어서 우리 수치심을 자꾸 가리는 거예요. 이걸로 통째로 부활의 나라까지 들어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다니엘 3장 25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왕이 또 말하여 가로되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네 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 왕이 우상에게 절하라고 하는데 다니엘의 세 친구가 절을 하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본때를 보인다고 다니엘 세 친구를 용광로 불속에 넣었어요. 그것도 아주 뜨겁게, 7배나 뜨겁게 해서 온도가 아마 2천도까지 올라갔을 거예요.



얼마나 뜨거웠는지 세 친구 불속에 집어넣던 간수가 불에 타버렸어요. 그 간수가 불에 안타게 나름대로 조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타버릴 정도였으면 얼마나 뜨거웠겠어요. 그런데 그 세 사람은 불 속에 들어갔습니다. 세 친구가 불에 들어감으로써 불 속의 세계와 불 바깥의 세계, 이렇게 두 세계로 분리가 되고 말았어요. 그런데 불 안에 들어간 세 친구가 되게 침착해요. 문제는 불 밖에 있는 왕과 바깥에 남은 자들이 패닉 상태에 빠졌습니다. 공황상태에 빠졌어요.



“세상에 저럴 수가 있는가? 뭐 저런 게 다 있어?” 불 속에 세 사람을 넣었는데 네 사람이 춤을 추고 있으니 기가 막힐 일입니다. 이 사람들이 당황한다는 말은, 패닉상태에 빠졌다는 말은 위기상태에서 침착할 수 없는 식으로 평소에 하루하루를 살아왔다는 거예요. 내가 저주받고, 내가 심판받고, 내가 하나님의 분노를 입었다는 상황에서도 침착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고자 주께서는 십자가를 언급한 거예요. 그렇게 되려면 우리 속에서 모든 우리 행동에 대해서 죄의 책임을 누가 가져가 줘야 돼요. 죄가 있는 곳에 저주가 오거든요.



평생 우리는 죄만 져야 돼요. 죄만 져야 되고 평생 그 죄만 짓는 그 죄는 어떤 특정 공간속에서 삭제되는 기쁨을 누려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침착할 수 없어요. 하나님의 저주 앞에서 침착할 수가 없습니다. 당황스럽습니다. 자기를 위장하기 위해서, 자기를 꾸미기 위해서,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권력을 동원하는데 그 권력에 약간의 침해현상이 일어나면, 깨지게 되면 패닉상태에 빠져버려요. “나 못산다. 나는 너 없이는 못산다.” 맨 날 가정에서 그런 이야기해요. “난 너 없이는 못산다.”고. “나는 너 미국가면 못산다. 나는 너 없이는 못산다.”



주님만 있어도 될 상황을 준비하지 못한 거예요. 그저 나와 나는 서로 하나의 권력이 되는 겁니다. 그것은 무화과 나뭇잎이 되고. 세상 그렇게 험해도 우리 둘이 껴안고 살면 살 수 있다고.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하나님의 분노 앞에서 견딜 수가 있습니까? 못 견딥니다. 우리를 가렸던 그것, 안전망, 그거 다 벗겨내야 돼요. 성도의 삶이라 하는 것은 그동안 주님 여기 계심을, 현존하고 있음을 까불대면서 가리는 역할을 한 거예요. 까불까불 거리면서.



동대구역에 가면 TV가 있거든요. 뉴스가 나오는데 사람들이 죽 앉아서 보고 있지요. 그런데 어떤 아주머니가 의식을 못해서 그 앞에서 막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아주머니보고 좀 앉든지 비키라고 했어요. 한 오지랖 하잖아요. 우리 인생은 없어요. 없는데 각자 자기 인생 가지고 주님의 십자가를 보여주는 이 현장에서 까불까불, “나는 출세했고, 나는 권력이 있고, 내가 아는 사람이 많고 ……” 너무나 까불고 있어요. 주께서는 “좀 치워라.” 좀 나오라는 말이지요. 네 배경에 누가 있는지.



이 세상은 예수님 중심으로 하나님께서 만든 결과물이에요. 주님의 결과물이에요. 주님의 결과물인데 우리는 내가 원인이 되어서 내 결과물을 자꾸 쥐려고 합니다. 내 결과물에 집착하고, 거기에 연연하고, 그거 없이는 막 죽을 것 같이 하고. 자, 그러면 하나님의 진노와 분노를 어떻게 아는가? 골로새서 3장 5절부터 보면,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라고 되어 있고 그 다음에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것들을 인하여. 뭔데요? 땅에 있는 것들에 집착하고 미련을 갖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너희에게 들이닥친다는 그 말입니다. 땅에 있는 것 때문에. 그렇다면 하나님의 진노를 미리 해결하기 위해서 자학을 할까요? 재산은 전부 교회에 주고 산속에 들어가서 죄 값 한다고 풀 잎만 뜯고 기도하면서 속죄의 길을 갈까요?



제가 초등학교 때 들은 노래가 있어요. 아버지 어머니가 유행가를 좋아하셨으니까 환경이 그래서 같이 부를 수밖에 없었는데요. 이게 또 남 탓이지만. 제일 슬픈 노래가 있었어요. ‘산장의 여인’ 어릴 때는 뭔지도 모르고 그 노래를 부르면 그렇게 슬퍼요. 산장의 여인. 60이상은 다 압니다. 나중에 가사를 새겨들어보니까 속죄한다는 의미에서 산속에서 홀로 산다는 거예요. 그러면 거기에 하나님의 진노가 들이닥치지 않습니까? “아이고, 속죄하고 있구나. 네가 알아서 용서하는 방법을 창안해서 네가 가능한 용서방법을 활용하는구나. 네가 알아서 기어 나오니까 내가 봐줄게.” 이런 하나님이신가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율법의 투입과 더불어서 함께 우리에게 찾아오게 되어 있어요. 율법이 주어지면, 하나님의 법이 주어지면 사도의 명령과 모든 권면이 진노가 나오는 원천이 되는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성령으로 해석하라.” 그렇게 되는 거예요. 모든 사도의 편지, 거기에 나오는 모든 명령과 권면은 성령으로 해석해야 되지 문자로 해석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문자로 해석하게 되면 자기의 무화과 나뭇잎을 또 만들어요. 자기의 수치를 가리기 위해서 윤리도덕으로 나와 버려요. “제가 이렇게 착하게, 성의 있게 사니 봐주세요.” 이렇게 나와 버려요.



그러나 성령에 의해서 사도바울의 권면과 모든 것을 해석해버리면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를 다시 한 번 거쳐서 나오게 하는 방식으로 이 말씀이 우리를 이끌어내게 되어 있습니다. 마치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했나?”하고 따질 때 그것은 우리가 할 수 없는 거예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어떻게 모르게 하는 겁니까? 우리는 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에요. “네가 무시로 기도하라.” 이건 성립이 안돼요. 사도바울의 어떤 말씀도 우리가 지킬 수 없는 말이에요. “썩어질 양식을 위해서 살지 말고 성령을 위해서 살아라.” 이게 어떻게 성립됩니까? 썩어질 양식을 위해서 살지 말라는데. 달걀 프라이 해보세요. 썩어버리지요. 그렇게 살 수가 없어요.



사도바울의 모든 말씀은 인간이 지킬 수 없는 말씀을 준 겁니다. 예수 믿고 살면 지킨다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이 말씀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문제는 이거예요. 내가 갖고 있는 수치가 수치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수치를 가리는 노림수가 같이 작렬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거예요. 우리가 죄를 알게 되면 죄에 대해서 선을 도입해서 그 죄를 덮으려는 시도도 같이 일어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것을 해결하지 않으면 결국 지옥갈 수밖에 없어요. 이것 자체를 멈춰야 돼요. 이런 짓 하지 말아야 돼요. 선을 행해서 악을 누르고 예수 믿는 선으로 죄 지은 그것을 누르려고 하지 마세요. 주님의 용서로 나의 죄를 갈려고 하지 마세요. 그게 죄에요.



그 모든 작업이 문제가 되는 이유가 바로 나라는 존재감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어제 늘 질문하던 그 목사님에게서 또 질문이 왔어요. 제 아내가 “여보! 또 질문 왔다.” 제 스마트폰의 문자는 이렇게 다 경유해서 저에게 오거든요. 보니까 “예수 믿는 성도는 날마다 죽어야 됩니까?” 이게 질문이에요. 아주 간단하게 했어요. 본인은 심각하지요. 간단하게 답을 했습니다. “사나 죽으나 상관없습니다.” 이게 답변이에요. 왜? 어린아이의 특징이 뭐냐? 자기 자신의 존재감이 없어요. 눈만 뜨면 엄마만 찾아요. 눈만 뜨면 그래요.



그냥 누워 자면 되는데 눈만 뜨면 찾아요. 이건 실제상황입니다. “엄마, 여기 있다!”하면 빙긋이 웃는 거예요. 그런 나이니까. 그냥 혼자 살면 되잖아요. “그냥 혼자 살아.” 그게 안 되는 거예요. 나의 존재감은 엄마가 대신해야 됩니다. 6개월에서 18개월 사이, 그것을 거울단계라 하는데 그 시기를 지나면 존재감이 생겨서 이제 엄마 없이도 돌아다니고 하지요. 그런데 그 때까지는 나의 여기 있어도 그것은 아무 의미 없이요. 엄마가 있어야 돼요.



새로운 피조물이 이런 겁니다. 성령을 받게 되면 현재 있는 내 손톱, 발톱, 눈, 모든 것이 내 몸이 아니고 주의 몸의 지체가 되는 거예요. 내가 움직인 것이 아니고 주께서 움직이게 하는 거예요. “예수 믿고 내가 날마다 죽어야 삽니까?” 하는 질문에 아무래도 상관이 없어요. 왜? 죽건 안 죽건 주님 앞에서는 그런 것은 신경 쓰면 안돼요. 그저 살려주는 대로 사는 이유가 뭐냐? 우리는 결과물이기 때문에, 주님의 결과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교회 와서 말씀 지키고 기도한다는 것은 뭐냐 하면, 내가 나의 결과물을 따로 창조하고 가공해서 따로 멋진 작품하나 만들려고, 나의 결과물을 만들려고 하는 거예요. 이게 교회에서 만드는 무화과나무입니다. 교회 오는 사람들에게 전부 기발한 무화과나무 만들기를 해줘요. 교회에서 그렇게 조성해줘요. “기도 몇 분 동안 할 수 있습니까? 방언 터질 수 있습니까? 전도는 몇 명 했습니까? 십일조 할 때 다리미질해서 했습니까?” 모든 것은 자기의 수치를 자기가 가릴 수 있는 방식으로 한다는 것이 문제가 돼요.



제가 가락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지요. 사람들의 문제점이 뭐냐? 가능성에 주목한다는 겁니다. 참 이거 정말……, 가능성에 주목한다는 자체가 틀려먹은 거예요. 지금 엉뚱한 곳을 헤매고 있는 겁니다. 부모 다 잃어버리고. 놀이동산에서 부모 다 잃어버린 것과 똑같은 거예요. 가능성을 주목하는 그 자체가 실패입니다. 본인이 의식되지 않아야 돼요.



진짜 끝으로, 그러면 본인이 의식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자기한테 실망하면 되지요. 어떻게 실망하면 됩니까? 죄지으면 되지요. 어떻게 죄지으면 됩니까? 그냥 사는 대로 막 살면 되지요. 어떻게 살아도. 제가 “여러분들은 교회 와서 여러분들을 치장하는 위장된 경건 된 행동을 하지 마세요.”라고 말해봐야 소용없습니다. 그것을 하기 마련이에요. 그러면 그냥 그렇게 하세요. 그렇게 하시되 주님이 만드는 매스게임이 있어요. 네가 어떤 짓을 해도 저주받아야 되고, 진노 받아야 되는 것이 마땅하다는 그 매스게임을 벌이는 겁니다. 자기 백성을 상대로. 새 이스라엘을 상대로 벌이는 거예요.



각자각자 사는데 모여 놓으면 “주여, 죄인일 뿐입니다.” 라는 그러한 기표, 기호의 이미지가 나오도록 하고 있습니다. 왜 사도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라는 말을 하는 이유가 하나님의 일관성은 십자가와 부활에 다 담겨 있다는 거지요. 담겨 있는데 너희들은 생각하기를 ‘여기서 사나 저기서 사나 사는 것은 다 같을 것인데 부활을 왜 그렇게 이야기하는가? 부활을 미리 이야기해버리면 여기서 사는 우리가 투자한 것이 있는데, 여기서 잘살고 성공하려고, 행복하려고 투자한 것이 헛짓한 것이 돼버리면 그동안 내가 공들인 것은 뭐가 되는가?’ 그 말이지요. 나의 존재의미가.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십자가를 말하면서, ‘너’라고 하는 그 나가 의미 없는 나로 그냥 허상, 환상을 꿈꿔 온 거예요. 인간은 날마다 환상을 만들어내요. 의식적인 것은 다 꿈입니다. 낮에 하는 것은 다 백일몽이에요. 전부 다 내가 주인공이 된 백일몽을 꾸고 있는 거예요. 그러나 제가 당부하고 싶은 것은, 인간은 기껏 그것밖에 못한다는 겁니다. 백일몽, 그 매스 게임 외에는 다른 것을 할 줄을 몰라요. 기껏 그거 하고 삼송 빵 두 개 얻어먹는 것. 월급 받고 연금타고 돈 벌고 사는 그것, 그것 외에는 할 줄 아는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할 줄 아는 것이 없는 나를 십자가로서 의인 만들었다고 고백하시면 되는 겁니다. 왜? 할 줄 아는 것이 그것밖에 없는 그것조차도 주님의 결과물이에요. 어린애가 자기 존재감을 확보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라는 결과물을 낳은 아빠 엄마를 찾는 것처럼 우리가 이 세상 어디 가든지 간에 찾기 바랍니다. “주께서 저를 이렇게 만들어놓았지요.”



얼마 전에 뉴스 보니까 캐나다에 대형 산불이 났다는 거예요. “꼭 지옥 같다. 지구의 종말 같았다.” 이런 기사가 났어요. 다른 때 같으면 ‘캐나다가 나하고 무슨 관계가 있나?’ 했을 텐데 ‘캘거리까지 번지면 안 되는데? 그러면 풍경 다 버리는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나는 거예요. 들을 귀 있는 분만 들으시면 돼요. 나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캐나다에 산불 난 것이 걱정이 되는 거예요. 이 방송을 지금 보고 있는 캐나다 분들은 알거예요.



이처럼 인간은 뭐 하나 알게 되면 그것이 나에게 권력이 되는, 막 사는 것 외에는 할 줄을 모르는,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가능성만 주목하면서 그것 모아서 수치를 가리는 무화과나무 제작, 그것밖에는 할 줄 모르는 그것을 십자가 앞에서 “주여, 이것이 평생토록 우리로 하게 하신 죄인이라는 결과물이군요.” 하고 고백하시면 우리가 어떠한 어려움 가운데서도 침착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조금만 무슨 일이 벌어지면 어쩔 줄 모르는 그 정도로 우리는 허약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혼자 잘난 체하면서, 부들부들 떨면서 손해 안 보려고 애쓰는 이 취약성을 차라리 그대로 공개해서 이것마저 주님이 그렇게 일부러 했다는 것을 십자가 앞에서 고백할 수 있는 영적 사람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