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강-신 14장 24-27절(택하신 곳)16051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14장 24-27절입니다. 구약성경 285페이지입니다.
“그러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 네게서 너무 멀고 행로가 어려워서 그 풍부히 주신 것을 가지고 갈 수 없거든 그것을 돈으로 바꾸어 그 돈을 싸서 가지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으로 가서 무릇 네 마음에 좋아하는 것을 그 돈으로 사되 우양이나 포도주나 독주 등 무릇 네 마음에 원하는 것을 구하고 거기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앞에서 너와 네 권속이 함께 먹고 즐거워할 것이며 네 성읍에 거하는 레위인은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자니 또한 저버리지 말지니라”
세상을, 사람을 둘로 나누고 있습니다. 하나는 거룩한 백성과 또 하나는 거룩하지 않는 백성. 하나님께서 이 사람의 종류를 둘로 나누는 것은 근거가 있습니다. 그 근거는 언약이란 이름으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언약이 없는 백성은 속되고 더러운 백성이고, 언약이 있는 백성은 거룩한 백성이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언약 속에 뭐가 들어 있느냐, 거룩이 들어있겠죠. 거룩함.
이 거룩함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전하는 소식에 의하면, 하나님의 계시에 의하면 그 거룩은 지상에는 없고 하늘에만 있는 걸로 그렇게 알려져 있습니다. 그것을 알려주는 그 증거가 이 지상에 여러 번 주어졌는데, 그 중에 하나가 노아의 홍수였습니다. 방주 안에 들어가는 짐승가운데 딱 두 종류가 있는데, 거룩한 짐승과 거룩하지 않는 짐승.
이 두 종류로 구분되고, 구분된 이 짐승과 동승했다는 것. 누가? 사람이 함께 동승했다는 것은, 노아가 함께 동승했다는 것은 짐승부터 함께 옆구리 차고 들어오면서 “너도 저와 같이 거룩한 백성이 되지 아니하면 멸망당한다는 이야기를 노아를 통해서 삽입시켜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단순히 윤리도덕이 아니고 실제적으로 무지개가 핌으로써, 세상에 너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대자연의 운행, 엘리뇨 현상이니, 뭐 라니냐 현상이니, 모든 이 세상의 천기의 현상은 하나님의 거룩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가실 때, 풍랑 속에서 예수님은 주무시고 제자들은 초조했고, 그런데 예수님께서 깨어나서 명령하니까 바다도 잔잔해지는 것. 세상에 주어지는 이 모든 현상이 예수님과 관련되어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과 왜 관련되어 있는가, 예수님은 언약의 중심에 있고, 언약에 중심에 있다는 말은 예수님만이 거룩한 분이시고, 이 거룩과 함께 모시고 거룩과 함께 있는 자는 이 세상이 멸망당해도 그 가운데서도 그들은 구출당하는, 구원이죠. 구원받아서 천국의 백성으로 살아간다는 겁니다.
디모데후서 2장 11절에 보면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그렇게 되어 있어요. 이 복음이 굉장히 극단적입니다. 내용이. 뭐 대충 하라는 것이 아니고, 윤리도덕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함께 죽는 조건하에서만 함께 산다고 돼있습니다. 로마서 4장 24절, 25절에 보면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우리 인생에서 보여주는 어떤 행위 같은 것은 전혀 우리를 살릴 수가 없습니다. 근데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분, 우리를 찾아오신 분, 예수님에게 일어났던, 그분의 죽으심과 살아나심이 우리에게 무엇으로 전수되느냐, 죄는 없애고 의로운 피조물로 살아나게 하는, 그렇게 만드는 작업을 우리 외부에서, 외곽에서 그렇게 실시를 하셨다는 겁니다.
방금 구약의 노아도 마찬가지고 신약의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을 한마디로 말하면 더러운 곳에 거룩한 것이 섞여있다는 거죠. 섞여있으니까 성도와 성도 아닌 사람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섞여있는 거룩을 찾아내는 그러한 안목을 얻게 된 거예요. 섞여있는. 불신자들은 그 섞여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똑같이 보지만. 우리 주님께서 주신 안목을 가지게 되면 ‘아, 저거는 언약의 완성이다. 거기에 비해서 우리 행동은 아무것도 아니구나.’ 그것을 파악하는 그러한 희한한 능력이 있는 겁니다.
제가 안양 공부를 할 때, 어떤 권사님께서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동영상을 봤는데 참 아름다운 광경을 봤다고 하는 거예요. 무슨 아름다운 광경이냐 하면, 어떤 젊은 분이 파리채 두 개를 들고 흔들고 있는 것을 봤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젊은 분 아닌데, 50대 중반인데, 전데 이상규 집사님이 파리채 두 개를 흔들고 있는 것이 동영상에 찍혔던 모양입니다. 상당히 이질적인데, 상당히 그 분에게 고마운 것은 그게 아름답다는 거예요. 파리채 흔드는 것이. 지금도 파리채 흔들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는데. 그 분 표현대로 하면 너무 예쁘다고 해요. “너무 예쁘다.” 저는 속으로 생각했죠. ‘그걸 예쁘게 보는 당신 마음이 예쁩니다.’ 상당히 평범한 건데, 그 이질적인 것이 뭔가 독특한 것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 사는 동네는 똑같다고 했는데 똑같지 않게 보는 겁니다. 그게 뭐냐, 택하신 장소가 나오는 겁니다. 특히 이 택하신 장소를 언급하는 그 대상자가 누구냐, 바로 모세고, 제사장이고, 레위 인입니다. 모세와 제사장, 레위인을, 그걸 한 그룹으로, 울타리를 쳤는데요. 방금 울타리라고 했는데, 울타리라는 개념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울타리라는 말은 그 안에서 어떤 행동을 해도 그 울타리의 효과는 계속 지속된다는 겁니다. 한정된 영역을 울타리 친다고 하거든요. 주님께서는 그걸 울타리를 쳐버려요. 해놓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선택받은 장소라고 이야기합니다. 선택받은 장소. 똑같은 땅이에요. 흙 파도 똑같은 흙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울타리를 쳐버리면 그게 선택받은 장소가 됩니다. 그 울타리 친 것을 오늘 본문 신명기 14장에서 그렇게 이야기를 했지만, 수요일에 하는 설교 창세기 6장에 보면 하나님의 동행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동행하는 것. 동행을 하게 되면 그 동행하시는 분에 의해서 새로운 울타리가 마련되는 겁니다. 그 울타리의 특징이 뭐냐, 그 안에 있으면 무조건 의롭고 무조건 완전한 자가 되는 겁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수요 설교에서 이미 심판이 완료된 상태에서, 미리 완료된 심판을 앞당겨서 이쪽 울타리 안에 적용을 시키는 겁니다. 뭐 어렵게 할 것 없이 간단히 해서, 죽음 전과 죽음 이후의 차이라 보면 됩니다. 성도는 죽음 이후의 상황을 미리, 벌써 미리 맛보고 있는 존재가 성도입니다. 죽음 이후에, 모든 것이 평정된 상황 이후에, 하나님이 주신 이질적인 혜택에 의해서 그것을 맛보고 있으면 그 사람이 속해있는 영역은 울타리 안이 되고 그것을 언약 안, 또는 약속 안이라고 사도바울은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어요.
저는 설교를 하면서 계속 뭔가 빼는 것이 있어요. 이거는 아닙니다. 이거는 아닙니다. 자꾸 빼는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우리들이 어떻게 행동해서 어떤 결과를 낳았는가, 그 논리는 아닙니다. 그거는 빼세요. 교회 와서 열심히 충성하고 봉사하고 하는 이거는 빼라는 거예요. 어떻게 착하게 살면 어떻게 효과 얻는다. 그거는 빼라는 거예요. 그거는 내가 만든 나의 울타리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내가 거룩하니까 너희도 거룩 하라는 말씀처럼, 내가 스스로 거룩한 것을 창안하고 어떤 결과물을 만들면 되지 않겠느냐, 우리는 이렇게 쉽게 설명하거든요.
제가 기독교 이천년 흘러온 신학 책을 보게 되면 전부가 오류인데, 그 대표적인 오류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베드로전서나 신명기 말씀대로 실천에 옮긴다고 본인이 스스로 거룩한 행동에 나서는 그것을 장려하는 식으로 교회의 존재의의를 갖더라 이 말이죠. 교회에 목사가 있고 장로, 집사가 있는 이유가 뭐냐, 거룩하지 않는 너희 여러분들을 거룩하게 만들어서 천국에 넣어주기 위해서 거룩을 장려하는 집단적인 행동 단체가 우리에게 있으니 거룩해지는 방식을 우리한테 배워서 여러분들도 구원받으세요. 하는 것이 이천년 동안 교회 역사가 꾸준히 정당성을 가지고 버티고 있는 겁니다.
그거는 왜 말이 안 되느냐 하면, 내가 상대방을 보는 것, 상대방을 보는 순간, 내가 상대방을 보고 있기 때문에, 상대방이 나를 보는 것을 내가 상대방을 보는 것으로 인하여 이게 차단이 되고 말아요. 내가 주님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주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것을, 내가 본다는 그것 때문에 이게 가로막혀 있습니다. 일방적이죠. 남녀 간에 사귈 때, “나는 당신을 사랑해.” 그러면 저쪽에서 “나도 사랑해.” 그러면 손가지고 입을 막아버려요. “니는 가만있어. 내가 사랑한다고 하면 사랑하는 거야. 니는 딴소리하지 마. 가만있어.” 입을 틀어막아버려요. 무조건 일방적으로요.
메시지 보내면서, 지금 너는 심심할거야. 내가 니가 심심한 것을 알기 때문에 교보문고에 데리고 가서 책을 사줄 거야. 책사고 청계천에서 같이 샌드위치먹자. 하는 식으로 일방적으로 메시지 막 보내요. 지금 가만히 있는 것을 보니까 그 드라마를 아무도 안 보는 모양인데. 순전히 이게, 사랑이라 하는 것이 자기 사랑에 자기가 환장을 해서 자기 기분에 도취가 되어 있어요. 인간은 자기 존재에 미쳐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이거는 전부 다 듣거나 보지도, 그런 것은 관심도 없어요. 내가 주님한테 퍼붓는 사랑만, 그것만 계속해서 자기 자신을 위선적으로 장식하고 있습니다. 아까 드라마 제목은 아이 다섯이라는 드라마에요. 그거는 참고로 하시고. 골프 선수가 어떤 여자를 사랑해서 지 맘대로 메시지 보내면서, 일방적으로 지가 억지를 부리는 거예요.
하나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니까 이제부터 어디에 도취되는가, 자기가 자기를 스스로 거룩하게 만드는 작업에 본인이 거기에 매료되어 버렸습니다. 그 매료된 사람에게 “당신은 죄인입니다.” 해보세요. 발작을 일으켜요. 아침에 이야기한 것처럼 까면 전부 다 쭉정이에요. 쭉정이만. 아무 무가치한 것만. 너무 정신이 밝아요. 자기가 자신을 거룩하게 하는 그 목표점을 자기가 정하고. ‘이쯤하면 거룩할 거야.’ 라고 측정과 점검과 검열을 본인이 해요. 본인이.
사람이 자기 행동을 검열하는 것은요,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에 의하면 어릴 때부터 가정교육환경이 초자아라는 양심으로 구축되어서 그렇게 늘 자기를 감시를 한다는 겁니다. 이거는 사람마다 다 다르거든요. 환경이 다 다르기 때문에 다 다른 거예요. 이거는 이질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게 뻔히 보인다는 것이 문제에요. ‘아, 조금만 노력하게 되면 저 거룩을 이룰 수 있는데.’ 그렇게 되는 거예요.
만약 어떤 교회에 공중기도를 하는데, 기도를 하면 너무 잘해요. 이거는 5분, 10분을 넘어서 목사가 종을 치고 싶을 정도로 한 번 발동이 걸리면 줄줄줄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히야! 기도 잘한다. 기도의 훈련을 얼마나 했으면 저렇게 되었을까?’ 이렇게 하는 순간, 다른 사람은 그 사람의 기도에 하나의 목적점이 돼버려요. 그렇게 할 때 거룩해지는 것처럼 착각을 하는 겁니다. 사람이 자신의 모델로 등장한 거예요. 그거는 이질적인 것이 아니고 눈에 뻔히 보이는 거예요. 그러면 오기 있는 사람, 아주 남한테 지기 싫어하는 사람, 뭐든지 다 알아야 하는 사람 같으면, 기어이 내가 저걸 알고야 말리라. 그럼 그거 알면 거룩해집니까?
스스로 그만 거룩해졌다고 착각을 하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잠을 많이 자는 아이에게 이솝우화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를 했거든요. 요즘 애들이 얼마나 똑똑한지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엄마 왜 토끼하고 거북이하고 같이 경쟁하는데? 이거는 불공정한 경쟁이라는 거예요. 토끼는 토끼대로 놀아야 되고, 거북이는 거북이대로 놀아야 되지. 경쟁이 안 되는 것을, 급이 다른데 왜 붙이느냐는 거예요. 그 말이 맞잖아요. 이솝우화 나온 지 이천 오백 년 되는데 아무도 그걸 시비 거는 사람을 못 봤는데 요 근래에 봤어요.
이게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교회 와서 천사처럼 되려고 해봅니다. 해보다가 안 되면 마지막 핑계가 뭐냐 하면 “주여, 부족한 죄인입니다.” 하고 끝나버려요. 자기가 문제내고, 자기가 채점해서 백점이고. 이거는 하나님이 뭘 거룩이라고 하는지를 도통 볼 줄을 몰라요. 하나님의 거룩이 뭐냐, 낮아지심입니다. 낮아지심이에요. 왜 그런데? 근거가 뭐냐,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시나 죄인이 되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낮아지심이에요. 방향이 다르잖아요. 방향이.
마귀 들린 우리들이 추구하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추구방법과 경건에 경건을 더하고 사랑을 더하라는 베드로전서에 나오는 이야기가 그 개념이 채택이 되고 채집이 될 때, 그 경건과 거룩을 자꾸 주위에서 찾는 거예요. 맨날 권사님이 되어가지고, 우리는 그런 권사님이 없어서 다행입니다. 바자회 열고, 고아원 방문하고, 기도하고, 돌보고 하는 열심, 하는 일이 없어서 그래요. 별다른 직업이 없어서 그래요. 교회에서 사랑받고 관심 끌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이거는 아니다 할 사람이 없이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인간은 어떤 행동을 하게 되면 거기에 대한 의미를 스스로 취소하고 포기하는 존재는 여태 없습니다. 인간 존재가 생겨나기를 그렇게 생겨났기 때문에. 어떤 경우라도 그런 경우가 없어요. 주께서 경건과 거룩을 언급하는 것은 니 주제를, 니 정체를 드러내라는 그런 호소입니다. 제발 니 정체를 드러내라. 경건과 거룩을 실천에 옮기면서 인간이 갖고 있는 그 폼이 얼마나 자기 위주인지를, 그 더러운 모습을 한 번 드러내라. 그러기 위해서 이 말씀을 주신 거예요. 그래서 말씀을 항상 십자가를 경유해서 해석하는 것이 영적사람 된 특징이라는 것을 지난 시간에 했거든요.
거룩이라는 것을 우리한테서 모델을 찾으면 안돼요. 근데 우리는 자꾸 찾는데, 심지어 예수님처럼 이라고 하는 이것도 상당히 위험한 겁니다. 예수님처럼. 이번 석가탄신일에 조계종에 내려온 표어가 뭐냐 하면 ‘부처님처럼’입니다. 어디서 많이 배운 것 같은, 너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는 그거인가요? 부처님처럼 이에요. 예수님처럼 할 때, 그 예수마저 우리가 이해하는 고상한 것 다 끌어 모아서 한데 집어넣은 가짜예수에요. 그런 인형 같은 예수가 되는 겁니다.
진짜 예수님은 우리가 찾고자 할 때는 그 현장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택한 자는 이동한다고 했지요. 택한 장소.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그 택한 장소는 자꾸만 이동한다. 그걸 다른 말로 출몰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근데 출몰하는 현상이 뭐냐 하면 본인이 예상 못한 실수나 죄가 새롭게 발췌됩니다. 완벽에 완벽을 구하는, 완벽에 완벽을 늘 찾는 내가 세상에 이런 실수와 죄성이 있는 것을 어떤 짜릿한 순간에 새롭게 알 때, 그게 바로 주님과의 만남의 순간입니다.
고상 떨고, 거룩 떨고, 경건 떨 때, 그거는 주님 말고 따로 놀고 있는 겁니다. 그럼 만나는 접촉 지점은 어떤 특징이 있느냐, 그게 뭐냐 하면 오늘 본문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레위인과 제사장 모세 같은 경우에는 본인의 힘으로 살아갈 수 없어요. 그냥 빌어 먹여주는 겁니다. 엘리야에게 까마귀가 와서 고기와 떡을 겨우 끼니 때우는 정도로 그렇게 주듯이 늘 얻어먹는, 주지 아니하면 못 사는 것을 새롭게 느끼게 만드는 그 순간이 주께서 택하신 공간입니다. 주의 만남의 공간입니다.
그런 공간이 되기까지 우리는 얼마나 내가 노동해서 얻은 풍요한 영역 속에서 자기의 행복한 미래를 꿈꿨겠습니까? 그것을 전부 다 삭제하는 거예요. 다 끊어버리는 거예요. 안양 강의에서 제가 수넴 여인과 사르밧 여인의 과부이야기를 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가뭄 들어서 끼니 때울 것이 없을 때, 그때 선지자가 찾아와서 도와주는 것이 아닙니다. 도와주는 것이 아니고 있는 것까지, 마지막 남은 떡과 고기까지 빼앗아가 버리죠. 그때는 ‘뭐야 이거?’ 이런 시추에이션, 너무나 터무니없는 거예요. 선지자가 왔으면, 힘든 걸 알았으면 도와줘야지. 그걸 뺏어가 버려요.
<김지하>라는 시인이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세월호 유족들한테 그런 돈 주지 말고, 그런 돈 있거든 무기나 구입해서 국방이나 방비하라고. 누구나 찾아오는 교통사고에 왜 그렇게 나라 전체가 매여 사느냐, 도대체 인간 속에 자기 완벽, 자기 철저함, 자기 실수를 자기가 땜질함으로써 괜찮은 정부라는 것. 국가라는 이미지가지고 국민에게 뭔가 동정표를 구하는 그런 얄팍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요. 언제까지 질질 끌려가느냐 말이죠. 교통사고, 지만 났느냐 말이죠. 옥시 가습기 사고, 평생 다 도와줘야 하느냐 말이죠. 졸음 운전하다 사고 난 사람, 평생 다 먹여 살려야 되고.
그놈의 이웃사랑이 문제에요. 이웃사랑이. 이웃사랑이 누굴 죽였는지 알아요. 이웃사랑의 최고의 강자가 누군 줄 알아요? 바리새인입니다. 그들이 누굴 죽였습니까?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왜? 뻔히 보이는 거룩이기 때문에. 뻔히 보이는. 예상하는 거룩이고, 예상하는 윤리도덕이기 때문에. 거기만 도착하면 하나님과 손닿는 줄 알았습니다.
니가 만약에 제사를 드릴 일이 있거든, 양을 몰고 가기에 너무 멀거든, 양을 돈 주고 사서 드릴 것은 드리고 하나님에게 부여받은 양고기는 맛있게 먹어라. 심지어 독주나 포도주까지 사서, 이것도 하나님이 주신 은혜라 생각하고 마음껏 먹으라는 것이 오늘 본문 내용이거든요. 그런데 이 오늘 본문 내용대로 적용시킨 자들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마가복음 15장 15절에서 18절에 보면 “저희가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아무나 기구를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치 아니하시고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이 저 인간을 어떻게 죽일까? 하고 의논하게 되었다는 거예요.
그들이 성전에서 돈을 환전을 하고, 환전한 돈 가지고 양을 잡고 하는 그것은 오늘 우리가 보고 있는 신명기 14장24-26절을 성취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거예요. 성취하면 뭐 할 건데? 성취하면 거룩해지니까. 왜? 하나님이 시킨 대로 했으니까. 근데 마가복음 11장에 보면 시키는 대로 했는데 그것이 바로 도적의 굴혈이고 강도의 본거지가 그렇다는 거예요. 나쁜 짓 한 사람이 강도의 본거지가 아니고, 착한 일 해보겠다고 모여든 그 현장이 바로 마귀의 본부가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령부가 된다는 이야기에요.
예수님이 죽으셨을 때 강도나 죄인에게 얻어맞아 죽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죽인 것은 가장 거룩 중에서 최고의 거룩을 추구하는 그들에게 죽었어요. 도대체 뭐가 문제입니까? 제가 아까 문제를 언급했어요. 내가 바라보기 때문에 정작 주님께서 바라보는 거룩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를 못하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거룩하게 보는 것이 하나님의 거룩이 아니라면, 전능하신 거룩이 아니라면, 그럼 하나님이 바라보는 거룩은 뭐냐, “그럼 뭐냐? 이야기를 해봐라. 그러면 알아들을게.” 라고 물으면 “가만있어봐. 니가 한 짓거리에서 니가 군화발에 밟힌 그것이 거룩이다.” 그러는 거예요. 주님께서.
거룩을 했는데, 거룩을 하면 할수록 진짜 거룩은 그 발에 밟히는 거예요. 죽임을 당하는 거예요. 어떤 거룩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거룩하다고 설치는 그 현장에서, 그 거룩에 의해서 미움 받고, 그 거룩에 의해서 배척받는 그 분이 바로 거룩 이에요. 그러니 거룩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섞여 있는 겁니다. 나 자신을 볼 때 이질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갖추는 거예요. 나 자신을 바라볼 때에.
다시 이야기합니다.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본인의 혼자 힘으로 못 살아요. 얻어먹고 살아요. 얻어먹고 살기 때문에 하나님께 늘 이렇게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야 된다는 거죠. 근데 얻어먹고 산다는 것이 한두 해 지나버리면 그게 뭐냐 하면 고마움이 아니고 당연한 권리주장으로 나서게 됩니다. 권리주장으로. 그럼 이거는 뭐냐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해서 본인만의 새로운 울타리를 쳐버리는 것이 돼요. 이것은 전혀 거룩한 것도 아니고 택해진 영역도 아닙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제가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장소가 자꾸 출몰한다, 이동한다는 이유가 우리 자신이 믿음직한 존재가 아니에요. 우리 자신을 안 믿으면 돼요. 우리 자신을 안 믿을 때 비로소 보이는 것이 뭐냐, 주께서 우리 자신을 보는 시선이 그때 보입니다. 죽자고 예수 믿고 하나님 믿고 용을 쓰니까, 용 써봐야 화장실 가고 싶은 생각만 더 들지만. 맨날 땀 삐질삐질 흘리면서 용을 쓰거든요.
아까 쉬는 시간에 이야기를 하는데, 지난번에 파리가 한 마리 있었는데, 그 파리 잡으려고 장정들이 애를 썼지만 못 잡았는데, 우리 어머니가 파리를 잡았답니다. 제가 농담 삼아 이야기를 했죠. 그 파리가 얕봤다는 거예요. 할머니라고 얕봐서 잡힌 거예요. 우리가 자기에 대해서 너무 가치를 높여놓아서, “마귀야 오너라. 한판 붙자. 내 실력이 이 정도다.” 마귀는 잽이 안 됩니다. 주님이 계신 곳이 십자가라면 그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는 아무 권리도 없고 어떤 요구할 수 있는 입장도 못 된다는 것을, 아예 놔버리면 온 천지가 거룩이고 온 천지가 경건인데, 온유와 화평과 자비인데, 이 온유와 화평과 자비를 자기 힘으로 용을 쓰면서, 바른 일을 하면서, 온갖 바자회를 열어가면서 그걸 실천하려고 하니까 이거는 바리새인 그 길로 가는 겁니다.
그거는 택한 장소가 아닙니다. 주께서 강도의 굴혈이라고 엎어버립니다. 오물을 걷어내듯이 우리 인생이라는 것은 주님이 친히 손대서 소위 거룩이라고 모아놓은 그것을 전부 다 깔끔하게 다 걷어내야 돼요. 그리고 그거만 명심하면 되는 겁니다. 우리는 돌아보면 다 실수고, 돌아보면 다 어설프기 짝이 없어요. 그런데 이거만 알면 돼요. 그걸 뭐 괜찮아! 완벽해! 저 사람보다 나아! 이러면 안 돼요. 기도할 때 뭐 5분, 10분 그렇게 오래하면 안 되지만, 좀 오래해도 괜찮아요. 그렇게 기도가 나올 때는 멈추지 말고 해야죠. 하는데, 끝나고 난 뒤에 “주여, 이것이 나의 들통 난 실수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그렇게 하시면 되는 거예요. 참 쉽죠. 정말 인생 너무 쉬워요. 인생 너무 쉽다고요.
그게 뭐냐, 같은 울타리에 있는 거예요. 거룩한 주님과 죄인이 한 울타리에 있을 때, 주님의 혜택을 입고 있기에, 내가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따사롭게 보시고, “이 불쌍한 인간아! 나 아니면 니는 안 돼!” 라는 시선을 오뉴월에 따뜻한 햇볕에 개처럼 누워가지고, 그 따스한 햇살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딴에 열심히 하고 바르게 한다는 그것이 어느새 나의 의가 되었고 나의 장기가 되었고 내가 나를 위장하는 위장술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것으로 인하여 참된 거룩이 핍박을 받고 무시당함을 항상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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