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강-고전 15장 9-11(사도의 고백)160501-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5장 9-11절입니다. 신약성경 281페이지입니다.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그러므로 내나 저희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나는 잃어버린 자를 찾으러 왔다.” 찾으러 왔다는 것은 인간 쪽에서 천국은 갈 수 없습니다. 그러면 천국 간 사람들은 무슨 빽으로 갔는가? 주께서 발굴했지요. 찾아낸 겁니다. 서해안에 개불이 나온다는 거지요. 개불 잡는 것을 보면 바닷가에 개불이 없어요. 없는데 막대기를 가지고 구멍을 쑤시니까 거기서 개불이 올라오는 거예요. 성도라는 것, 천국 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주께서 복음막대기로 쑤시게 되면 “너 여기 숨어 있었잖아. 빨리 기어 나와.” 주께서 찾아와서 우리를 건지는 방식을 사용하십니다.
그 이유가 뭐냐? 본인 쪽에서 나서서 가겠다는 사람이 나무 많아서 그래요. 많은 정도가 아니라 전부 다지요. 살아 있을 때는 엉망으로 살아놓고는 죽어서는 좋은데 가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걸 몽땅 다 거절하고, 내가 찾아내는 사람만 잃어버린 이스라엘이 되고요, 그 이름이 이스라엘이 되면서 건져가는 겁니다. 우리가 있을 때는 한국사람, 필리핀 사람, 자기 나라가 이렇게 따로 있어요. 우리가 찾아냄을 당하기 전까지는 미국사람, 인도사람, 중국사람, 다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에 의해서 복음으로 찾아냄을 당하게 되면, 국적도 바뀌고, 호적도 바뀌고, 주민등록도 다 바뀝니다. 국적은 이스라엘이고, 호적은 아브라함자손이고, 주민등록은 이 땅에서는 의미 없이 되어버려요. 0000이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주민등록과 동일한 주민등록을 받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름도 바뀌어요. 아무개가 아니라 그냥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살아가게 되는 겁니다. 이것은 나의 인생이 나의 인생이 아니고 모래사장 안에 숨어 있을 때부터, 처음부터 주님의 것으로 있었고 우리는 그 모래사장에 있으면서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했지요.
이 모든 것이 우리 인생의 끝이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주께서 찾아오셔서 건지는데 찾아내는 방식이 뭐냐? 오늘 본문에서 사도를 통해서 찾아내시는 겁니다. 사도가 등장함으로써 예수님이 인간을 찾아왔던 그 하나님의 일관된 작업이 고린도교회의 시대는 사도로 전환이 되고 사도가 열두 명인데 다 죽고 난 뒤에는 무엇으로 전환되는가? 말씀으로 전환됩니다. 구원은 말씀을 들음으로 구원된다는 겁니다. 로마서 10장 17절이지요.
그 말씀 작성자가 누구냐? 말씀 작성은 성령을 통해서 사도가 하게 되어있어요. 사도는 사실 배후의 성령께서 시키는 대로 썼을 뿐이고 그 말씀이 사도가 죽고 난 뒤에 확정되었습니다. 더하지도 말고 빼지도 못하도록 확정이 되고 그 확정된 말씀이 개불사냥에 도입되는 겁니다. 우리 주보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주보 맨 위에 ‘대한예수교장로회’ 이것은 별 의미 없는 거고요. 그 밑에 ‘우리교회’라고 되어 있고 그 밑에 표어가 ‘복음으로 구원’이라고 되어 있어요.
12년 전부터 한결같아요. ‘복음으로 구원’ 그런데 ‘복음으로 구원’이라는 이 문구를 큰 글자로 박아놓은 이유가 뭐냐? 교회로 구원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우리교회 등록한다고 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는 거지요. 교회를 부수어서 그 안에서 복음을 끄집어내야 돼요. 그것은 뭐냐? ‘교회’라는 것을 ‘일상’이라는 버전으로 바꾼다면, 우리의 일상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일상 속에 들어 있는 복음으로 구원받지요.
우리는 일상 속으로 자꾸 기어들어가요. 자꾸 일상 속으로 숨어들어가요. 주말이 되고 연휴가 되니 또 일상으로 기어들어가지요. 주말이나 연휴에 어디를 가도 괜찮아요. 중요한 것은 그 일상 속에서 복음을 끄집어냄을 당하면 돼요. 주께서 동행하시기 때문에. 가야산, 주께서 동행하십니다. 태백산, 주께서 동행하십니다. 놀라갈 핑계대기 좋아요. 어딜 가도 주께서 동행하시니까. 온천가도 주께서 동행하십니다. 그리고 안가도 동행하셔요.
오늘 아침에 동행을 또 한 번 일상 속에서 찾았습니다. 아침에 동네 한 바퀴 도는데 근처 백 미터 쯤에 주민 센터가 있습니다. 갈 때는 몰랐는데 한 40분쯤 걷고 돌아오는데 구급차 두 대에 경찰까지 동원되었어요. ‘혹시 주민 센터에서 공무원들이 화투를 치다 걸렸나?’ 하면서 보니까 어떤 할아버지가 나무에 축 늘어져 있어요. 제가 느낀 것이 뭐냐? 이것이 하나님의 판결이에요. 판결은 나중에 오는 것이 아니라 벌써부터 판결이 되는 겁니다.
결국은 누구나 그와 같이 판결 받을 것이라는 말이지요. 느낀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누구나 판결 받는다는 것, 또 하나는 축 처진 것을 보고 중력의 법칙을 느꼈어요. 뉴턴의 법칙을 거기서 봤습니다. 모든 인간은 결국 저렇게 끝날 것을, 저렇게 판결을 받을 것을 뺀질이처럼 그저 돌아다닌다고요. 사도가 전하는 이 복음을 뭐라고 하는가? 비밀이라고 해요. 그 비밀은 골프로 하면 홀컵이에요. 비밀이 홀컵이라면 골프선수가 골프를 치는 이유가 뭐냐? 공을 홀컵에 집어넣기 위해서 치는데 맨 날 그걸 못 집어넣어서 구멍을 벗어나서 이쪽에도 떨어지고 저쪽에도 떨어진다고요.
사도가 전하는 것은 복음의 비밀이고 그 비밀로 개불을 찾아내듯이 주께서는 자기 백성을 찾아내는데 우리는 그 비밀 속에 들어갈 생각은 안 하고 맨 날 그 비밀 주변을 맴돌아요. 그 홀컵 속에 들어가면 되는데, 그 비밀 속으로 끌려 들어가면 되는데 그 비밀 근처를 맴돌면서 생겨버린 것이 교회입니다. 내가 그 비밀의 구멍, 홀컵을 막고 있어요. 교회생활하고 친목도모하고, 특히 교회에서 “주님, 성화해서 갈게요. 도 닦아서 갈게요.” 하는데 그럴 필요 없어요.
찾아낸다는 것이 뭡니까? 그냥 있는 그대로, 죄인 그대로 오면 돼요. 도 닦거나 성화할 필요가 없습니다. 깨끗하게, 대충이라도 정리해서 갈게요. 정리하지 말고 그냥 오라는 겁니다. 그 비밀에서 새로운 직분을 가지고 나타나는 분이 계시는데 두 자로 사도라고 하는 겁니다. 비밀에서 기어 나온 사람들, 열두 제자지요. 그 비밀에서 나옴으로 말미암아 사도는 보통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하는 말만 내뿜게 되어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네가 감히 어딜 천국에 와? 오지 마! 내가 가서 복음의 비밀로 꼬챙이를 가지고 쑤실 때 창세전부터 영생주기로 작정된 사람만 복음과 결합되어서 올 것”이라는 겁니다. 사도가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하는 이유가 있어요. 오늘 본문 9절에 보면,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했다는 거예요. 핍박했다는 말은 은행 털었다는 게 아니에요. 무슨 창고 털었다는 것도 아니고 교회를 공격한 거예요.
교회를 핍박했다는 말은 내가 알아서 예수를 믿으려고 한 적이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대단히 중요한 거예요. 우리의 현재의 자질을 다시 한 번 정리해야 될 그 고백을 하고 있는 겁니다. 쉽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네가 언제 교회를 핍박한 적이 있느냐?” “핍박한 적 없는데요?” “그러면 가!” 그런 뜻이에요. 교회 유리창 깬다고 해서 다 구원받는 것은 아니지만 교회 핍박한 적도 없이 교회 다닌다는 이것이 굉장히 수상한 거예요. 이것은 가짜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면 목사님,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제가 방법을 가르쳐 드릴게요. 주님께 배신당해 보세요. 내가 믿는 주님께 배신을 홀딱 당해 보세요.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혀 주시기 바랍니다. 예수를 믿었는데 그 예수가 나를 망하게 하는 경험을 당해야 돼요.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배신당해보라는 겁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했는데 주님은 전혀 나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내 인생을 구겨 버릴 때 우리는 절로 교회를 핍박하지 않을 수 없는 마음이 생겨나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데 어떻게 주님을 배신해?’ 우리 인간 힘으로는 안돼요. 주께서는 그렇게 하고 계십니다. 어떻게 하느냐? 뭐든지 내 뜻대로 안되게 만들어요. 울화통이 터지도록 주께서는 차분하게 우리를 이끌고 갑니다. “이래도 날 배신 안할래?”라고 우리한테 윽박지르는 것 같아요. “이래도 아직도 믿을래? 미쳤어, 미쳤어. 너는 배알도 없어? 내가 이렇게 모질게 했는데 아직도 날 믿는다는 말인가? 믿을 구석이 있어야 믿지. 믿고서 나에게 얻은 유익이 뭐가 있는데?” “없습니다.” “없잖아, 봐라.”
인간 쪽에서 시작해서 예수 믿는 것, 백퍼센트 가짜입니다. 이것은 나의 노력이 내가 구원받는데 가미되어 있어요. 이것은 제가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개불 찾듯이 찾아내는 방식과 전혀 다른 거예요. 9절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게 했다는 겁니다. 누가? 주님이. 왜? 사도바울 자신은 창세전부터 선택받은 자이기 때문에.
앞뒤가 말이 이상하게 안 맞지요? 창세전부터 구원받기로 작정된 자가 나인데 내가 지금껏 한 일은 뭐냐? 주님의 교회를 핍박하는 일을 하게끔 주께서 뒤에서 조종했다는 거예요. 왜 그래야 되는데? 내 쪽에서 내 구원에 보탠 일이 하나도 없음을 말끔하게 털어내기 위해서. 말끔하고 깔끔하게 털어내고 다 씻어내기 위해서. 그러면 교회마다 핍박한다고 바쁘겠네요? 바쁜 게 아니고 그냥 사세요. 살게 되면 그 틈새 속에서 뭘 느끼는가 하면, 이상스럽게 내가 생각한대로, 내가 기대한대로 안되도록 내 인생이 어긋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걸 통해서 내가 뭔가 소망한다는 것도 내가 뭔가 소망하고 싶어서 소망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소망케 해놓은 겁니다. 주께서 우리를 붕 띄워놓아요.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니 이런 아이디어를 주시는구나. 이런 멋진 계획이 있는 것을 몰랐네.’ 이렇게 붕 띄워놓고 그대로 박살나게 만들고, 주의 뜻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는데 믿었던 주님한테 철석같이 배신당할 때……, 시작부터 끝까지 주님께서 개입하십니다.
이것을 10절에서 사도바울은 두 자로 간단하게 이야기합니다. 그것을 은혜라고 이야기합니다. ‘내가 아니오.’라는 말로 표현되는 은혜. 은혜가 주어지게 되면 지금 내 모습은 내가 아니라는 겁니다. 이쯤 설교하면 처음에 한 것 다 잊었을 거예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모래사장에 개불이 있을 때 그것을 찾아서 끄집어낸다고 했습니다. 끄집어내면서 이제는 내 인생이 아니고 주의 인생으로 바뀐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이야기 듣고 바빠요. “주여, 이제는 내 인생 아니고 주의 인생입니다.” 말로, 그냥 말로 때우는데 바빠요. “이렇게 하면 됐지요? 이제는 내 이름으로가 아니라 주의 이름으로 산다고 고백하게 되면 주님이 좋아하시겠지요? 내가 새사람 된 티가 팍팍 나지요?”
백날 해 봐야 그것은 껍데기에 불과하고 그것은 모방에 불과한 겁니다. 그런 소리는 아무 소용이 없어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비밀을 준비했어요. 복음의 비밀, 그 복음의 비밀, 보통 사람들은 갈 수가 없고 구원 받은 자만이 그 비밀에 끌려가는데 그 비밀에서 솟구쳐 나온 사람이 사도고요, 그래서 자신은 주의 종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사도가 구멍을 준비해놓고, “나처럼 교회 핍박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 앞에 배신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주님을 배신하고 주님이 나를 배신했다는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창세전에 구원받은 자임을, 구멍에서 나오는 개불 채집하듯이 구원받는 사람만 하나님께서 사도처럼 은혜 받은 사람 되게 하신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해도 사람들은 이 복음의 비밀에 대해서 관심을 별로 갖지를 않습니다. 저는 논산훈련소 출신은 아닙니다. 대구 50사단 출신인데 삼일일칠팔삼구, 얼마나 군대생활이 지겨웠으면 그걸 아직도 외우고 있겠어요. 저는 가볍게 그냥 입소했어요. 머리도 들어가서 깎았어요. 그런데 훈련소에 들어갈 때 꼭 이런 애들이 있어요. 교관이 “자, 빨리 들어오세요.” 아직 훈련소 정문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말을 높여줘요. 일단 들어오면 바로 말을 낮추고 욕부터 하지만.
“빨리 들어오세요!” 하면 막 약을 올리는 거예요. “안 들어가요!” 정문 주변에서 계속 술 먹고 놀면서 “아직 시간 안 되었습니다!” 해요. 8시 10분쯤에 와서 마음껏 거기서 노는 거예요.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그러면 교관이 약 올라서 “빨리 안 들어와! 넌 들어와서 죽는다!” 그래도 안 들어가요. 우리가 주님의 복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도 철조망 앞에서 까불거리면서 안 들어가요. 세상 즐거움에 계속 탐닉하고 “골프 더 치고 갈게요.” 이런 식으로 계속 자기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놀고 싶은 것 다 놀면서 사도와 천사를 약을 올려요. 입소의 시기를 자꾸 늦춰요. 결국은 들어올 걸. 결국은 들어올 거잖아요.
모든 인간은 누구나 판결 받습니다. 누구나 심판 받아요. 축 처지든지, 아니면 천당 가든지, 누구나 판결 받는데 그 판결 장소에 빨리 와야 되지 않습니까? “천국과 지옥은 어떤 기준으로 판결됩니까?” 판결 기준이 있는 곳으로 와야 되잖아요. 그걸 들어야 되잖아요. 그것은 사도의 입에서만 나오고 다른 사람 입에서는 안 나옵니다. 사도를 등장시킨 이유는 딱 한가지에요. 사람하고 비교하지 말라는 거예요. 보통사람들하고 비교하지 말라는 겁니다.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사람을 믿지 말라는 거예요. 철조망 앞에서 까불거리면서 노는 애들 왜 봅니까? 여기 교관이 있는데. 사도는 교관이에요. “들어와, 들어와, 들어오라고!” 해도 “시간 아직 안됐습니다. 교관님!” 나중에 들어와서 걔 많이 맞습니다. 그 까부는 거 많이 맞아요.
그냥 군대 입대하는 식으로, 이젠 천국행이다, 이런 식으로 그냥 구멍 안으로, 그 비밀 속으로 들어와 버리면 이게 왜 비밀인지, ‘아, 이래서 비밀이구나.’ 하는 것을 절감하게 되면, 세상에서 골프치고, 맛있는 거 먹고, 술 먹고, 그렇게 즐기는 것이 하나도 즐겁지 않아요. 비밀도 모르고 까불었구나, 하는 것을 아는 겁니다. 이 비밀의 소식을 아는 사람 같으면, 첫 째 특징이, 사람을 믿지를 않습니다. 두 번째, 사람을……, 참, 이런 소리 하면 안 되지만, 두 번째, 사람을 이용합니다. 아주 얍삽해요. 이제는 사람을 갖고 놀아요. 어차피 믿지도 못할 인간, 어차피 헤어질 대상자인데.
전에는 사람을 믿어가지고 “당신 없이는 못살아요.” 찔찔 짜고 하다가 복음을 알고 난 뒤에는 ‘쓸데없는 짓 했네. 구원은 내가 행함으로 아닌데 왜 내게 도 닦아야 된다고 생각했는지, 왜 내가 거룩해야 된다고 착각을 했는가?’ 공동체 생활한다고, 바른 교회 한다고, “우리교회헌금은 70퍼센트를 선교지로 보낸다.” 이런 되지도 않는 작당 짓, 노닥거리는 짓,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했어요. 복음의 비밀을 빼돌리기 위해서, 복음 쪽으로 가는 모든 길목에 거대한 교회들이 있어서 사람들을 전부 다 빼가고 있어요. “우리교회 오면 참 재미있습니다.” 노래방이 있는가? 왜 재미있지?
앞으로 교회가 사람들을 계속 붙잡아두려면 교회가 사람들이 세상에서 원하는 것을 다 구비하고 있어야 해요. 제 아이디어인데요. 교회 안에 면세점이 있으면 되겠다 싶어요. 이것은 제 아이디어입니다. 화장품부터 커피, 필요한 모든 것을 다 구비한 면세점으로 교회를 만들게 되면 사람들이 떠나지 않을 거예요. 노래방은 기본이고, 놀이방, 공부방, 노인방, 이런 것은 이미 다 있는 거고요. 방도 왜 그리 많은지 그런 것이 다 있는데 면세점 하나 추가하고 골프회원권도 서비스하게 되면 떠나지 않을 겁니다.
내가 납득이 되는 이야기를 하는 그런 것들, 그런데 주께서 그런 것들도 다 허락하셨어요. 왜? 그렇게 해서 빠져나가야 하는 것들은 다 빠져나가라고. 오직 개불 찾는 것은 사도가 알고 있는, 핍박했음에도 불구하고 구원받는 이 비밀, 분명히 주님을 내가 핍박하고 저주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저주를 축복으로 바꿔주는 그 능력이 있는 곳, 그것은 교회가 아니고 복음입니다. 십자가복음.
저는 면세점을 생각했는데 중국에서 저보다 더 좋은 아이디어를 만들어냈어요. 깜짝 놀랐습니다. 제가 시대에 뒤쳐져 있다는 것 때문에 자존심이 좀 상하려고 했어요. 중국에서는 절에 로봇을 구비했어요. 알파 승(僧), 알파+스님, 세 글자로 알파 승, 인공지능스님을 준비했습니다. 인공지능 스님과의 대화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고뇌가 있는 분은 뭐든지 물어보세요.” 그 알파스님을 부처자리에 놓습니다. 모습도 스님처럼 똑같이 만들었어요. 신도들이 물어요. “일하기 싫어요.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하니까 알파스님(인공지능)이 이렇게 답합니다. “굶어죽기 싫거든 열심히 일하세요.”
다음 질문, “사랑이 뭐예요?” 인공지능이 말하기를, “스스로 만족 못하여 생겨난 집착이 사랑입니다.” 쉽게 말하면 결핍을 채우기 위해서 사랑을 갈구한다는 뜻이에요. “삶의 의미가 뭡니까?”라고 신도들이 물으니까 “고통에서 벗어나서 행복해 지는 것이 삶의 의미입니다.” 교회에서 늘 하는 설교가 이거 아닙니까? 복음의 비밀을 가리는 교회에서. 그 다음에, “아내의 성격이 나쁜데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중국여자들이 좀 세답니다. 알파 승이 하는 말이, “그래도 살아야지 어떻게 합니까?” 이게 답변이에요.
그 다음에 청소년이 물었어요. “엄마가 잔소리가 심해요. 어떻게 하면 좋아요?” 답변은, “엄마는 어르신이니 네가 참아라.” 그 다음에 마지막 나온 질문이 “시진핑이 누구입니까?” 하니까 알파 승이 하는 말이, “로봇은 사람을 알지 못합니다.” 이게 답이에요. 알파 승이 나왔으니 알파목사가 나올 거예요. 제복 입혀서. 그래서 나는 신부나 목사가 제복을 입는다는 것은 알파목사의 전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여러분이 제복을 통해서 어떤 심오한 지혜를 원하지요? 제가 입어드리겠습니다.” 해서 유니폼을 입는 거예요.
인간이 자기가 여기 있음의 의미 있음을, 의미가가 있다는 그것을, 그 의미개념을 주님께서는, 복음의 비밀은 뭘 로 바꾸는가? 힘의 개념으로 바꾸어주는 겁니다. 내가 여기 있음에 모든 것은 비로소 의미가 생긴다고 하는 그 생각, 그 의미 자체가 완전히 무산되는 것은 바로 복음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네가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 네 중심, 너밖에 모르는 사고방식이 늘어나서 그게 의미가 되었거든요. 따라서 복음의 비밀은 그 의미 있음을 없애는 힘, 능력이 은혜입니다. 구원의 능력, 은혜의 능력이 있는 곳이 복음의 비밀이에요.
그 힘은 나에게 어떠한 논리나 어떠한 가치를 추구하더라도 그것이 무의미……여기서 무의미하다는 것은 허무하다는 뜻이 아니고 구애받지 말고 멋대로 자유롭게 살라는 뜻입니다. 어떤 행위를 하더라도, 잘났든 못났든, 착하든 안착하든 묻지를 않아요. 허무하다, 허무하다, 그런 뜻이 아니고 “너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해. 그것마저 내가 익히 알고 있고 내가 너를 그렇게 몰아넣은 거”에요. 정말 성령이 임한 사람은 결국 예수님을 배신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 의지해서 하는 것보다 내가 알아서 하는 것이 훨씬 간편하다는 생각을 몸소 체득하게 될 거예요. 예수에 한 다리 걸치고 그 다음에 내 일하는 이것보다는 주님께 걸쳤던 다리 하나 그냥 치워버리는 것이 속 시원하고 속 편할 때 “그게 바로 너야.” 그게 바로 너였다는 말이지요. “믿기는 누가 믿어? 너는 믿을 사람이 아니야. 너 외에 아무것도 믿을 존재가 아니야. 괜히 예수 믿는다고 걸쳐놓고 집사, 장로, 목사 되었다고? 그런 헛다리는 진즉에 치워버려야지.”
그게 예수님 십자가 죽음 앞에서 비로소 들통이 나요. 우리가 교회 열심히 봉사하는 척 하는 이것은, 남을 눈속임하면 하나님까지도 속일 수 있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 때문에 그런 짓을 한 겁니다. 우리교회는 봉사하는 사람만 봉사해요. 그런데 제가 봉사해주세요, 라고 부탁하지 않는 이유가 있어요. 이것은 진리가 아니고 제경험인데요. 하여튼 교회 모든 문제는 봉사하는 사람에게서 나와요. 그러니까 이것은 주님을 위해서 봉사한다고 말은 그렇게 해놓고 “너는 왜 노는데?” 결국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자기 잘난 맛으로 봉사했어요. 헌금도 그렇고 모든 봉사도 그렇고.
그럴 것 같으면 차라리, 차라리 하지 마세요. 그래서 우리는 차라리 안하잖아요. 하나님의 복음 안에 담겨 있는 그 비밀을 길지만 짧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할 때는 없는데서 창조했습니다. 창세기 1장에, 아무것도 없었어요. 인간이라는 흔적도 없고 인간이라는 말도 없어요. 그냥 1, 2, 3, 4, 5, 6일째 인간이 만들어졌습니다. 인간을 만들 낌새하나 보이지 않았습니다. 인간 빼놓고 다 만들었어요. 그 가운데 인간은 없습니다. 인간은 없는데서 만들었어요.
그런데 창세기를 지나 여호수아에 오게 되면 이것이 어떻게 되는가? 죽음에서 건져내는 것이 새로운 창조의 의미가 되는 겁니다. 죽음에서 건져내는 것. 예수님께서 “나는 잃어버린 양을 찾는다.” 할 때 그 구원받은 양의 특징이 뭐냐? 앞에 뭐가 붙어요. ‘잃어버렸다’는 것이 붙어서 구원을 받아요. 구원을 받게 되면 꼬리표가 붙어 나오는데 그 꼬리표에 ‘잃어버렸던 적이 있는 존재’ 이것이 붙어있어요. 잃어버린 거예요.
그것은 구원받아놓고 떼면 안돼요. 그게 계속 나와야 돼요. “나는 잃어버렸던 자인데 내 힘이 아니고 주의 힘으로 구원받았다.” 그 꼬리표가 계속해서 늘 달려 나와야 됩니다. 탕자가 아버지에게 환영받고 난 뒤에, “양복도, 소고기 먹은 것도, 가락지도 다 내가 돌아온 덕분입니다.” 이렇게 까불거리지 않았어요. 가락지 받고, 양복 받고, 아버지의 환영을 받으면 받을수록 ‘나는 잃어버린 자였는데, 나는 잃어버린 자였는데……’ 그것이 계속 새록새록 생각나게 하지요.
쉽게 말해서 뭘 특별히 하라는 말이 아니고, 봉사하라, 전도하라, 그런 말이 아니고 지금 있는 그대로 몽땅 다 바꾸세요. 주의 것으로 바꾸세요. 그리고 거기다가 무슨 징표를 남기는가? ‘잃어버렸던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만 전부 다 일상에서 뽑아내시면 되는 겁니다. 우리 애도 없었는데, 잃어버렸는데 생겼다. 모든 것, 자식도, 손자도, 모든 것이 없어도 되는데 주셨다. 잃어버린 나에게 주께서 선물로 주셨다고 몽땅 다 바꾸세요. 도 닦지 말고, 착실하게 살기, 바르게살기, 이런 도 닦지 말고 매일같이 몽땅 다 뒤바꾸세요.
그러면 그것이 가능한가? 무너져야 됩니다. 여호수아 6장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20절에,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듣는 동시에 크게 소리 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여호수아는 구약에 있습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다는 것은 신약의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구약과 신약사이가 텅텅 비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뭘 로 꽉꽉 채워져 있어요. 뭘 로 채워져 있는가? 무너지지 않으면 새로운 것은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로 가득 채워져 있어요.
여호수아 6장에서는 여리고성이라는 이 단단한 성곽이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구약의 마지막이 되면 이스라엘나라자체가 무너져요. 이스라엘 무너졌을 때 여리고성 무너지는 그 원리원칙이 그대로 적용되면서 무너지는 겁니다. 어렵게 해서 죄송합니다. 쉽게 풀이하면 이렇습니다. 여리고성이 무너지면서 여리고성의 목전에 있었던 백성들은 무엇을 얻었느냐는 거예요. 여리고성에서 물건을 가져왔다, 금을 가져왔다, 외투를 가져왔다, 여리고성을 하나님께서 무너뜨렸기 때문에 여리고성의 모든 보물은 우리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아간입니다.
여호수아 7장에 넘어가면 아간이 그거 건지다가 돌에 맞고 돌무더기에 파묻혀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리고성이 무너지고 난 뒤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얻은 것이 뭐냐?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가 이스라엘이라는 그 의미를 얻은 거지요. 나는 이스라엘이라고 생각했던 그 이스라엘은 가짜였습니다. 여리고성이 무너지고 난 뒤에 왜 우리가 행하지도 않았는데 이 성이 우리 것이 되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그 의미를 새롭게 앎으로써 내 자체에 대한 의미가 몽땅 바뀌는 것을 얻게 되는 겁니다.
전에는, “나는 여기 있다. 하나님 덕분에 이것, 이것, 복 받았다.” 이랬는데 이제는 내가 여기 있던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애초에 주님의 것으로 여기 있었는데 그 전에는 내가 여기 있었다고 오해를 했었다. 그런데 여리고성을 통해서 뭔가 내 앞에 하나님에 의해서 강제로 판결을 받아서 완전히 무너지는 자를 보면서, ‘나도 무너져야 되는데 왜 나는 안 무너지지? 아하, 주께서 우리를 이런 식으로 건져냈구나. 무너짐 속에서 새롭게 잃어버린 자를 찾아내는 방식으로 자기 백성을 건지는구나.’ 하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새롭게 파악하게 되는 겁니다. 그게 건진 거예요.
나 자신의 주제파악을 하면서 건짐 받은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를 파악하는 겁니다. 이것이 구약 내내 원리로 잠기면서 나중에 이스라엘 자체가 다 망해버려요. 이스라엘 자체가 다 망하면서 그 속에서 잃어버린 이스라엘이 새롭게 등장하는 겁니다. 이 구약전체를 압축을 시켜놓으면, 아무 죄도 없는 예수님이 아버지 앞에서 무너져요.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사랑하는 아버지에게 배신당했습니다. 누가? 예수님이. 설교 처음에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예수님에게 배신당하라는 말이지요. 아버지 앞에 배신당했어요.
배신당함으로써 예수님은 자기 안에 있는 죄의 무게와 죄의 위상을 알게 되는 겁니다. 무너져버렸어요. 무너진 그것을 주께서 사흘 만에 다시 찾아냈습니다. 아하, 무너지게 해놓고 찾아내는 방식은 없는데서 있게 하는 방식의 그 의미를 더욱 더 깊숙하게 내려가는 거예요. 최종적인 바닥까지 치는 겁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데서 살아남으로 주가 되신다는 진리의 바닥, 마지막 담겨 있는 그 비밀, 바로 복음의 비밀, 죽었다가 살아나는 분만이 진정한 하나님이라는 그 복음의 비밀, 인간이 상상하는 하나님은 가짜고 죽었다가 살아나는 분이 진짜 하나님이라는 그 복음의 비밀을 앞당겨서 우리에게 그 원리를 적용시키는 대상자로서 ‘개불’로 구출해서 당겨온 겁니다.
복음이 들어왔을 때 복음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에요. 복음이 일찍부터 우리를 소유하는 겁니다. 우리는 복음한테 소유당한 거예요. 그래서 오늘 본문 10절에 보면,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10절 끝에 보면 사도바울이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내가 아니요, 라고 하는 겁니다. ‘나’라는 것이 분명히 의식되면서도 의식되는 이유가 ‘아니요’라고 붙이기 위해서 나는 ‘나’라는 것을 죽을 때까지 버리지 못하고 안고 가야 돼요. 뭐하라고? ‘아니요’라는 말을 늘 내뱉기 위해서.
“그러면 목사님! 사도바울이 ‘아니요’라는 말만 하게 되면 사도바울은 구원받습니까?”라고 물으면 지금 사도의 구원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 그 사도자체가 남을, 하나님의 잃어버린 양을 건지는 복음의 막대기로서 사도를 사용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성령 받은 성도도 다른 잃어버린 개불을 찾기 위해서 복음의 막대기로 사용하는 겁니다. 어떻게? “나는 아니요. 저 구원받았거든요. 그런데 저는 한 것이 없습니다.”라는 것이 복음의 비밀로부터 능력받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능력은 힘을 의미하는 겁니다. 힘은 강제성이에요. 그 강제성을 일상 속에서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설거지하다가 접시를 깼다. ‘아이고, 다음에는 이런 실수를 안해야지.’라고 하지 마시고 굉장히 쉽게 생각하세요. ‘주께서 힘주어 깨뜨리게 하셨구나.’ 그렇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힘 속에 우리가 놓여 있는 겁니다. 제가 마트에 뭘 사러 가보니 젤리가 있어요. 젤리 안에 복숭아조각도 들어 있고 어떤 것은 귤 조각도 들어 있어요. 이게 뭔가 싶어 보니 이름이 요고젤리, 요구르트처럼 떠먹는 말랑말랑한 젤리에요.
그 젤리의 특징이 뭐냐, 투명해요. 안에 뭐가 있는지 다 보여요. 복숭아, 딸기, 숟가락으로 퍼먹으면 딸기부분까지 접촉이 될 거예요. 주님께서 구원받은 성도를 자신의 젤리로 만들었습니다. 우리 외부는 힘으로 가득 차 있어요. 구원의 힘으로, 예수님께서 건져준 복음의 힘, 비밀의 힘으로 가득 차 있고 우리는 그 안에서 안에 들어있는 복숭아나 딸기 같은 과일조각처럼 흔들리고 있는 거예요. 그걸 스냅사진으로 찰칵 찍어버리면 우리는 몇 년을 살든지 상관없어요. 항상 주 안에서 복음 안에서 그렇게 살아온 겁니다.
이걸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사도바울 때는 요고젤리가 없었거든요. 내가 교회를 핍박한 것도 주께서 그렇게 하게 하신 은혜라는 말입니다. 세상에 이런 뻔뻔스러운 작자를 봤습니까? 내가 어떤 나쁜 짓을 해도 요고젤리에요. 주께서 이미 익히 아시고 그렇게 했다는 겁니다. 왜? 창세전부터 구원받기로 작정되었기 때문에. 이게 바로 비밀 속에 있는 사람이에요. 자꾸 훈련소 철조망 바깥에서 안 들어가려고 까불거리지 마세요. 어차피 조교한테 끌려 들어올 거예요. 이 자리에.
걱정거리, 고민거리, 초조했던 것, 집안에 우환이 있다는 것, 그것 내가 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그렇게 하게 하신 거예요. 저는 성도를 보면서 제일 주의할 것을 이야기하라면 제일 주의할 것이 뭐냐? 내가 잘못해서 이런 벌을 받는다는 생각은 마귀 생각이라는 겁니다. 절대로 그런 생각 가지면 안돼요. ‘내가 이런 행동을 했기에 이런 벌을 받는구나. 앞으로 조심해야지.’ 절대로 그렇게 살지 마세요. 그것은 지금 훈련소 안 들어온 거예요. 철조망 바깥에서 여전히 자기한테 의미를 두고 있는 겁니다.
자기한테 의미를 두고 있는데 의미개념에서 힘 개념으로 바꿔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젤리 안에 갇혀 있어요. 그런데 젤리가 딱딱하지 않고 말랑말랑해. 그래서 우리는 까불기가 한정이 없어요. 왜?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주님은 간섭을 안 하니까. 우리는 진짜 주님을 말랑하게 보고 있습니다. 무슨 짓을 해도 괜찮으니까. 그런데 주께서 손대는 것은 뭐냐? 네 멋대로 살고 막살아라. 단 뭐만 확인해라? 모든 것이 내 뜻대로 안되고 일이 어긋나서 ‘이제는 내가 예수 믿나 봐라.’ 하고 울화통이 터지도록 이끄신다는 것, 그게 바로 예수님이 허락 없이 몽땅 다 가져가셔서 해결 본 우리의 죄 성입니다.
우리는 그 죄 성, 나에게 의미를 두는 그 죄 성, 내 힘으로 해결해 보려고 얼마나 교회에서 도 닦고, 성화하려고 얼마나 애썼습니까? 왜 성화하려고 합니까? 착하게 살면 진즉에 내가 원하는 것 의미 있게 주실 것이다. 왜? 그래야 내가 의미가 있으니까. 내 행위가, 내기도가 의미 있고, 내 전도가 의미 있고, 내 선교가 의미 있으니까, 내 공동체가 의미 있으니까 자기 의미 찾기 위해서 그 짓 한 것, 다 무의미한 거예요.
심지어 사도는 교회를 핍박까지 했습니다. 이 말은 뭐냐? 주께서는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지 네가 용쓴다고 구원하시는 그것은 아니다. 이 복음의 비밀을 자꾸 들락거리세요. 홀 컵은 여기 있는데 공 엉뚱한데 쳐놓고 공 찾으러 다닌다고 해매고 또 새로 시작하지 말고 그냥 홀컵에서 나가노는 식으로, 홀컵의 능력가지고 마음 놓고 바깥에서 야유회를 가든지, 놀러 가든지, 태백산에 가든지 마음대로 돌아다니세요. 그러면 그 현장에 주께서 함께 하심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10절 마지막에 보면,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라고 되어 있어요. 우리가 이 복음의 비밀을 믿어서가 아니라 주께서 우리에게 역사합니다. 미국의 어떤 연극배우가 흑인역할을 할 사람을 뽑는다고 해서 왔는데 연극의 연출자가 흑인역할을 위해서 검은 칠을 준비했는데 어떤 사람이 그 검은 칠을 치워버렸어요. “왜 흑인 역할인데 검은 칠을 안 합니까?” 하니까 “당신은 흑인이잖아요.” 흑인인데 거기에 또 칠을 할 필요가 뭐가 있어요?
우리는 죄인이잖아요. 죄인인 우리가 일부러 또 죄를 지을 필요는 없어요. 그냥 살면 돼지. 지금 머리 나쁜 사람은 무슨 말인지……. 그냥 살면 그것이 죄인으로 사는 거예요. 그걸 주께서 의도하신 겁니다. 교회를 핍박하도록 사도바울에게 그렇게 유도하신 거예요. 뭐하라고? “나 아니요, 주님의 은혜덕분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힘 덕분에, 십자가안의 요고젤리, 십자가의 젤리덕분에 살았습니다.” 왜 그 자유를 우리는 자꾸 외면하고자 합니까? 젤리 같은 십자가복음이 지금 현재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복음을 비밀이라고 했는데 우리는 그 비밀을 알려고만 했지 내가 비밀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비밀은 가지는 것이 아니고 비밀은 오히려 소유당하는 상태로 구분된다는 사실을 이제는 정립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