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신명기81강-권리 양도(신14;21) 160501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5. 2. 07:34


2016-05-01 14:51:15조회 : 40         
   권리 양도 160501 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권리 양도(신명기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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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6-05-01 15:42 
권리 양도

2016년 5월 1일                            본문 말씀: 신명기 14:21 

(14:21)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무릇 스스로 죽은 것은 먹지 말 것이니 그것을 성중에 우거하는 객에게 주어 먹게 하거나 이방인에게 팔아도 가하니라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에 삶지 말지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일상적 삶 속에 하늘의 정보가 들어와 있습니다. 그 무늬는 바로 ‘하늘과 땅’의 확고한 구분입니다. 그 예로서 이스라엘인들이 먹는 음식물을 들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 속에 음식물의 조항이 들어 있습니다. 이는 그저 입맛대로, 건강을 위해서 먹는 것이 거룩한 성민이 먹을 음식을 대하는 태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즉 스스로 자신을 성민으로 만들 재간을 부르지 말라는 겁니다. 구원이란 늘 불가능함을 나타냅니다. 스스로 거듭나고, 스스로 거룩해지는 수는 없습니다. 이는 인간쪽에서 바라보는 천국과, 천국에서 바라보는 하나님의 뜻이 같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세상에서는 그냥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으로 좋은 복을 받을 요건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신으로 인해 내가 존재하고, 나는 그 창조성을 인정하는 것으로 좋은 관계가 성립되었다고 한다면 이 두꺼운 율법은 왜 주신 겁니까? 율법에 담겨 있는 내용은 인간이 바라보는 신과 하나님이 바라보는 인간의 관점이 상호 다르다는 사실을 알리는 내용입니다. 물론 그 결말은 십자가 사건이라는 대충돌를 야기시켰습니다.

상호 같지 않음에도 천국 간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곧, 구원이란 기적에 해당된다는 말입니다. 불가능함을 심화시키는 쪽으로 율법은 투입됩니다. 즉 “내가 먹고 싶은 대로 먹을랍니다. 왜 먹게 하십니까?”라는 반발을 유도되게 하십니다. 이럴 때 하나님의 준비된 답변은 이것입니다. “너희는 거룩한 백성이니까”

즉 거룩한 백성됨에 있어 율법 투입은 필수적이다 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율법의 내용은 인간이 평소에 땅의 생활에서 터득한 의식과는 전혀 납득하기 힘든 내용입니다. 바로 여기서 ‘차이’가 뚜렷하게 등장하게 됩니다. 이 차이성이 ‘먹을 수 있는 음식’과 ‘먹을 수 없는 음식’으로 구분되는 기준이 됩니다.

즉 하늘에 속했으면 뚜렷하게 하늘에 속해라는 겁니다. 애매모호하게 이것도 아니요 저것도 아닌 것은 먹지 말라는 겁니다. 날개가 있으면 날든지 해야하는데, 날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날지 못하는 메뚜기는 먹지 말라는 겁니다. 물 속에 사는 것은 비늘과 지느러미가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런 것을 갖추지 못하는 오징어는 먹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정체를 분명히하라 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죽은 것’은 먹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 것은 나그네나 이방사람들에게 주어라 고 하십니다. 이는 곧 이스라엘은 거룩한 ‘하늘에 속한 자들’이기 때문에 그러하다는 겁니다.

이러한 차이성의 극단은 예수님에게서 나타납니다. 요한복음 3:31에 보면,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모든 음식에 관한 율법은 예수님 자체를 겨냥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왜 이런 음식만 먹어야 하고 왜 저 음식은 먹어서는 아니되는지를 지상에서 아무리 연구하고 음식물 자체를 탐색해도 그 해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그 탐색하는 주체자의 의도가 정당한 것이라고 우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차이 자체를 보여주지 못하는 해석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을 나타내지 않는 해석은 다 오류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에 삶지 말지니라” 동정심 때문일까요? 아니면 잔인함을 보이지 말라는 뜻일까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오해를 갖고 있습니다. 즉 “나는 거룩한 성민이니 이 땅에서 고상한 품격있는 성품을 가져야 구원된다”라는 생각말입니다. 그러다보니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에 삶지 말라“라는 것을 인간과 연계해서 이해하려고 합니다. ‘삶은 것’은 안 좋은 일이고 죽음을 맞이한 불행한 일인데 이 일은 인간 세상에서도 냉혹하게 처리해서는 망자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소위 거룩한 백성이라는 거룩에 합당해서 최상의 예우로서 죽을 자를 대해야 한다는 식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만큼 자신들의 성품이 고상하고 거룩하다는 티를 내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비슷한 구절이 레위기 22:28과 신명기 22:6에도 나와 있습니다.

“ 암소나 암양을 무론하고 어미와 새끼를 동일에 잡지 말지니라”, “노중에서 나무에나 땅에 있는 새의 보금자리에 새 새끼나 알이 있고 어미새가 그 새끼나 알을 품은 것을 만나거든 그 어미새와 새끼를 아울러 취하지 말고” 그렇다면 이 본문의 담고 있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룻기 3:9에서 해답이 풀립니다.

“가로되 네가 누구뇨 대답하되 나는 당신의 시녀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으로 시녀를 덮으소서 당신은 우리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 이 말씀은, 그 마을에서 유력한 자인 보아스의 잠자리에 룻의 시어머니인 나오미가 룻에서 몰래 들어가라면 지시하면서 가르쳐준 말을 룻이 실행에 옮기는 대목입니다.

여기에는 ‘당신의 옷자락으로 시녀를 덮으소서’라는 말은 “우리 집안의 권리를 당신 보아스가 가져 가세요”라는 말입니다. 원래 집안에 있는 모든 것은 그 집안 구성원의 공통 소유입니다. 하지만 권리를 한 곳으로 치우치게 되면, 다른 이들은 그 권리가진 자에게 종속이 되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땅에 속한 자가 하늘에 속한 메시야에게 납치당해서 구원얻는 방도입니다. 염소의 젖이라는 것은 염소 어미와 염소 새끼의 공통 소유입니다. 거기에 인간은 재 3의 자격으로 개입하면서 충돌을 야기하게 됩니다. 이럴 때 하나님께서는 염소의 권리와 새끼의 권를 따로 구분지을 것을 명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 중간에 차이성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 차이성을 성민인 이스라엘은 자신의 입장과 연결 지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일상은 곧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 양도하는 식으로 살아가기에 하늘에 속한 민족인 것을 수용해야 한다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만 챙기는 식으로 일생을 살지 말고 도리어 날마다 쪼개짐을 당하는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우리교회 16-05-01 23:54 
81강-신 14장 21절(권리 양도)16050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14장 21절입니다. 구약성경 285페이지입니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무릇 스스로 죽은 것은 먹지 말 것이니 그것을 성중에 우거하는 객에게 먹게 하거나 이방인에 팔아도 가하니라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에 삶지 말지니라”

“아멘.” 저 혼자 아멘을 했고 여러분들은 안 했습니다. 그게 솔직한 거예요. 이게 무슨 뜻인지,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해야 되는지를, 생뚱맞다는 이야기를 하죠. 그냥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인정하면 되지 않습니까? 왜 그렇게?? 그걸로 미흡하다는 거죠. 나 여기 있고 하나님 저기 있으니까 하나님 좀 있다 만납시다. 이러면 그걸로 구원받는 거 아니에요? 하나님이 저를 창조했으니까 창조한 것에 대해서 인정하겠습니다. 그러면 구원되는 거 아닙니까?

왜 이렇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두꺼운, 백과사전보다 더 두꺼운 말씀이 주어졌느냐는 거죠. 그것은 우리가 쳐다보는 하늘에 가 있는 내 모습과 정작 하늘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다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다르다는 것, 그 차이 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친절하게도 이 세상에, 피조세계 속에, 특히 이스라엘 그들이 접하고 있는 그런 음식물이나 주변 환경 속에 그 차이점을 이렇게 깔아두었어요. 하나의 징후나 정보를 미리 깔아둔 겁니다. 범인이 지나가고 난 뒤에 범인의 흔적이 남아있는 것처럼, 천국의 흔적이 이렇게 이스라엘 삶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오전에 일상 속에서 복음을 찾으라, 뽑으라고 했죠. 일상 속에서 복음을 뽑기 위해서 깔아놓은 것이 있습니다. 그 깔아놓을 때에 어떻게 찾아내느냐가 문제인데, 그 찾아내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하늘과 땅은 달라도 많이 달라야 된다는 겁니다. 하늘과 땅은 다르다. 하나님 생각과 너희 생각은 다르다. 너희가 어떤 생각을 하던 간에 그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거부당할 것이다.

그 말은 너는 이미 거부당하는 생각 속에서 너는 살아왔다. 그렇게 보시면 깔끔하게 정리됩니다. 그러면 하늘 생각을 엉터리로 하고 제대로 못한다면 어떻게 천국을 갈 수 있습니까? 라고 묻게 되면 바로 이것은 홍해가 이야기해줍니다. 땅에 있는 자는 바다에 가면 죽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바다 건너편에 있는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까? 라고 물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약속 믿고 참여하라! 그러면 뭔가 수가 날 것이다.

그런데 그 수를 인간은 미리 감 잡지 못해요. 그런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이러면 우리가 죽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니가 그리던 생명은 죽음 속에 들어있다는 거예요. 죽음을 헤쳐야 그 속에 아, 생명이 여기 들어있구나! 하게 되는 거예요. 우리는 죽음을 치워버리면 생명이 딴 데 있는 줄 아는데, 생명이 딴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죽이는 그 현장 속에 비로소 생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어떻게 죽입니까? 하는데, 자살하고 목숨을 벤다고 해서 생명이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숨이 끊어져서 죽음이 아니고,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죄가 등장할 때, 그 죄가 바로 우리가 생명이 아님을 이야기해줘요. 우리가 죄 지을 때. 그래서 쉽게 말해서 죄 지으라고 하는 겁니다. 죄를 지음으로써 우리는 생명이 아니고 이미 죽은 목숨이라는 것을 계속해서 확인할 수가 있죠.

그래서 이 십계명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지킬 수 없는 것을 주었어요. 아무리 해도 지킬 수 없습니다. 탐내지 말라고 하는 것은, 이것은 기계보고 하는 소리지 사람보고 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기계 같으면 탐내지 않죠. 아마 개도 탐내지 않을 거예요. 그러나 인간 속에는 탐낼 수밖에 없는 내용이 인간을 껍데기로 삼아서 작용하기 때문에 본인이 탐을 내는 것이 아니고 탐심이 인간을 갖고 놀죠.

스스로 위로합시다 우리. 내가 죄가 많아서 탐을 내는 것이 아니고 탐심이 그냥 보기만 봐도 탐이 나게 되어 있어요. 지리산에서 혼자 살겠다고 해도, 그래도 가끔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읍내에 나와야 되거든요. 읍내에 5일 장날에 가게 되면 거기에 나이키 신발 있습니다. 자기 신는 고무신하고 질이 다르죠. 보게 된 이상 자기 가슴을 두드리면서 그럴 수 없느니라 백날해도 가슴만 아플 뿐이지, 다음에는 약초 캐서, 팔아서 나이키 사야지. 이 또 탐심이 일을 개시했어요. 

인간은 탐심을 절제하거나 조절할 수가 없습니다. 탐심으로 하여금 우리를 세상에 밀어 넣고 그 세상에 나가서 와장창 깨지게 되어 있는 것이, 이게 하나의 계획 잡힌 거예요. 이래서 안 된다고 하면서도 벌써 탐심의 자리에 가 있고, 가 있으면서 너만 있는 게 아니고 나도 있고, 서로 탐심들이 충돌하면서 상처받고 피곤한 인생을 가지고 또 다시 원위치로 돌아와서, 아이고 괜히 욕심냈네..하고 후회하죠. 후회한다고 해서 될 인간 같으면 다 인간됐습니다. 그냥 후회만 할 뿐이죠. 또 계속해서 새로운 후회를 할 뿐이지, 반성한다고 사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런 음식물을 통해서 하늘이면 하늘인지 땅이면 땅인지를 분명히 하라. 그 차이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 이렇게 해서 그 차이를 분명히 드러내는 음식물을 먹되, 차이가 불분명하게 드러나는 음식물은 절대로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물고기면 물고기고 새면 새지, 날개는 있으면서 날지도 못하는 메뚜기는 먹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근데 저는 메뚜기 되게 좋아하거든요. 어릴 때 메뚜기 반찬은 참 반가웠습니다. 우리의 구미 땡기는 것하고 주께서 먹으라고 하는 것 하고는 달라요.

그리고 비늘이 있으면 비늘이 있는 거지, 비늘이 있고 지느러미가 있어야 그게 물에 사는 물고기답지, 이게 뭐 물고기냐, 이건 오징어를 먹지 말라는 거예요. 또 오징어 참 좋아합니다. 보통 수루미(오징어 혹은 말린 오징어를 의미하는 전라도 사투리)라고 하는데, 수루미하면 미치죠. 오징어가 가십거리인데 그걸 왜 먹지 말라고 하는 거예요? 제가 지난 시간에 했습니다. 구원받아 놨거든 이제는 지난 것 생각하지 말고 마음껏 먹으라고. 절에 가서 비빔밥도 먹으라고 했죠. 마음껏 먹어라. 이제는 안 먹는다고 해서 그런 걸로 구원이 확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예수님 때에는 구원받는데,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는 하늘에 속한 것과 땅에 속한 것을 분명히 구분해야 된다는 거죠. 그런 구분 가운데 최고의 구분은 예수님 자신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3장에서 이런 이야기했습니다. 너희가 백날 듣기는 들어도 사람 말로 들리지 너희는 못 알아듣는다. 왜? 땅에 속한 자는 땅의 말만 하고 하늘에 속한 자는 하늘에 말만 하기 때문에 내 말을 못 알아듣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런 말을 우리가 들으면, 우리가 못 알아들으면 주님의 모든 목회는 실패로 끝나지 않습니까? 주께서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기적이다. 기적.

왜 기적으로만 구원해야 하느냐 하면 인간의 가능성 가지고 천국에 못 들어오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의 가능성을 다 틀어버려요. 그냥 불가능한, 이건 있을 수 없는 거야. 자기가 자신보고 그렇게 이야기할 때까지, 그렇게 고백할 때까지, 인간의 모든 가능성은 계속 주 앞에 거부당합니다. 이럴 수 없어! 그런데 구원됐다면 그것은 전부 다 백퍼센트 주님의 몫이 되는 겁니다.

땅에 속한 인간을 하늘에 속한 인간으로 바꿔치기 하는 거예요. 꼭 마술 같아요. 새로운 피조물이라 하는데, 바꿔치기 하는 거예요. 그 바꿔치기 하면서 거기에 들어가는 내용이 뭐냐, 구약에 있는 이러한 조항들이 들어가는 겁니다. 여기 14장 11절에서 18절에 보면 “무릇 정한 새는 너희가 먹으려니와 이런 것은 먹지 못할지니 곧 독수리와 솔개와 어응과 매와 새매와 매의 종류와 까마귀 종류와 타조와 다호마스와 갈매기와 새매 종류와 올빼미와 부엉이와 따오기와 당아와 올응과 노자와 학과 황새 종류와 대승과 박쥐며” 도대체 이런 용어조차도, 번역 자체도 곤란할 정도로 이스라엘 시대에 있었던 여러 가지 생물들입니다. 이런 걸 먹지 말라고 한 겁니다. 

특히 8절에 보면 “돼지는 굽은 갈라졌으나 새김질을 못하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니 너희는 이런 것의 고기를 먹지 말 것이며” 돼지고기도 먹지 말라. 그러면 삼겹살은? 회식은 돼지고기 안 먹고 뭘로 해요? 그러면 한우 먹을까요? 비싼데? 이런 것은 우리가 생활에 입맛 돋우고 이 땅에서 어떻게 잘 사느냐가 아니라, 우리는 인간이지만 다른 민족하고는 다르다는 그 차이점을 뚜렷이 하는 것에 계명들이 죽 들어가 있는 거예요.

이러한 하늘과 땅의 구분은 여기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21절, 오늘 본문에 보면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성민이라 하는 말은 거룩한 백성, 다른 말로 하면 하늘에 속했지 땅에 속한 것이 아니다. 아니기 때문에 죽은 것은 먹지 말라. 이미 시체가 되어 있는 것은 먹지 말라. 살아있는, 낙지도 그냥 죽은 낙지 말고 산 낙지. 산 낙지가 많이 비싸요. 죽은 거 말고 살아있는 것 먹어라.

그러면 죽은 것은 누가 먹느냐? 죽은 것은 성중에 있는 이방민족에게나 나그네한테나 주라. 그들 몫으로 주라 이 말이죠. 왜, 죽은 자는 이미 죽은 것을 먹어도 괜찮은데 너희들은 그쪽과는 이미 분리되어야 하고 따로 나와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본문이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 계속해서 하늘의 요소를 심어주고 있기 때문에 너희가 거룩한 성민이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 삶 속에서 땅에 것 말고 하늘에게서 새롭게 투입된 하늘의 것을 뽑아내는 식으로 살아가면 되죠. 그건 이해되는데, 그 중에 이해하기 힘든 것은 뭐냐 하면 “너는 염소새끼를 그 어미의 젖에 삶지 말지니라” 이 대목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사람들은 해석을 앞에 있는 것과 연관시키지 못해요. 앞에 있는 것도 해석을 못하지만 특히 이 대목, “너는 염소새끼를 그 어미의 젖에 삶지 말지니라” 라고 하니까 이걸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면 어미를 세상에 엄마로 보고 염소새끼를 지 자식으로 보는 거예요.

자식으로 봐가지고, 귀하고 예쁘게 키웠는데, 딸랑이 주면 딸랑이 흔들고 이 얼마나 예쁜데, 요 이쁜 것을 보는데서 죽이면 그 사랑의 감정이 얼마나 애틋하겠느냐, 진짜 죽일 일이 있더라도 분리해서 죽여야 한다. 그만큼 가정의 동정심을 살려줘야 한다는 식으로 해석을 해버려야 돼요. 하늘과 땅으로 해석해야 될 것을 갑자기 인간의 동정심이 툭 튀어나왔어요.

인간의 동정심을 그렇게 살리려면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 버리는 것은 뭡니까? 아브라함이 지 자식 죽이는 것은 뭐예요? 천하의 나쁜 살인자가 남의 자식 죽이면 죽였지 지 자식은 왜 죽입니까? 그것도 사랑한다면서. 사랑하는 자식을 그렇게 내쳐야 되고 그렇게 죽여야 되고 미국 보내야 되고 꼴 보기 싫다고 내쳐야 되는 겁니까? 그게 사랑일까요?

레위기 22장 28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암소나 암양을 무론하고 어미와 새끼를 동일에 잡지 말지니라” 이것도 그런 식으로 해석해야 되는가, 그런 생각이 들고. 신명기 22장 6절에 보면 “노중에서 나무에나 땅에 있는 새의 보금자리에 새 새끼나 알이 있고 어미새가 그 새끼나 알을 품은 것을 만나거든 그 어미새와 새끼를 아울러 취하지 말고” 7절, “어미는 반드시 놓아 줄 것이요 새끼는 취하여도 가하니 그리하면 네가 복을 누리고 장수하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방금 이야기한 레위기 22장 28절의 말씀이나 신명기 22장 6절의 말씀이나 그리고 오늘 본문 신명기 14장 21절 말씀이나 이 세 가지의 뜻은 무엇인가? 이제부터 그걸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이 비밀은 룻기 3장 9절에 가야 풀리는데요. 9절 말씀에 보면 “가로되 네가 누구뇨 대답하되 나는 당신의 시녀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으로 시녀를 덮으소서” 나오미라는 여인이 자식 죽고 남편 죽고 난 뒤에 팔자 고치려고 모압에서 데려온 자기 며느리를 재벌인 보아스와 동침케 해요. “그가 누울 때에 그 눕는 곳을 알았다가 들어가서 그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라” 누웠을 때에, 그 재벌이 하는 말이 “아가씨 누구에요? 아줌마 누구에요?” 라고 묻거든 “그저 당신의 옷자락으로 시녀를 덮어주소서.” 이렇게 이야기하라는 거예요. 꽃뱀이에요? 뭐 팔자 고치겠다는 이야기거든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권리를 양도해주세요. 당신이 갖고 있는 나에 대한 권리를 옷으로 덮음으로써 내 권리는 이미 당신에게 넘겨졌습니다.” 라는 뜻이 됩니다. 권리 양도에 대한 표시입니다. “이제는 저는 내 권리로 살지 않겠습니다. 내 권리를 취하는 쪽에, 가져가는 쪽에 소속되어서 살겠습니다.” 하는 뜻이에요. 신약에서는 먼저 예수님 쪽에서 우리에게 찾아오지만 이거는 구약이기 때문에 그렇게 제시를 해야 돼요.

이게 왜 오늘 본문을 해결하는 열쇠가 되느냐 하면 모든 자식의 권리는 어미가 갖고 있어요. 근데 어미가 문제성이 있어요. 어미가 땅에 속한 거예요. 저주 받아야 될 죄를 품고 있어요. 죄를 품고 있는 것을 도중에 하늘에서 납치를 하지 아니하면 이거는 구원이 되지를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잡을 때, 하나님께서 이삭을 내놓으라는 말은 아브라함의 소유의 자식을 이제는 하나님의 자식으로 바꿈으로 말미암아 누가 누구를 살리느냐 하면 하늘에 속한 자식에 의해서 도리어 아브라함 아버지가 자식 덕분으로 하늘에 속한 자로 구원을 받는 방식을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방식으로 우리에게 제시한 겁니다.

음악을 보게 되면 전주가 나오죠. 전주를 보고 본 음악이 뭔지 대박 알아챕니다. 딴따라단딴찬~ 딴따라단딴 찬~ 몰래한 사랑입니다. 유명한 전주거든요. 전주 보면 노래를 알듯이, 전주가 뭐냐 하면 아브라함이 전주고 본 음악은 이삭입니다. 제물로 바치는 어떤 누군가 본래의 음악이 되고, 그 전주로 빰빠라빰빠~해서 아브라함이 나오는 거예요. 아버지가 자식을 살릴 권한이 없다는 겁니다. 자식은 엄마가 살리는 것이 아니에요. 엄마가 자식을 살려내면 자식은 하나님께 바쳐야 됩니다. 예수님께 내놓아야 됩니다. 내놓는 방식이 뭐냐, ‘주께서 너를 인도할 줄로 믿습니다.’ 하고 내놓아야 해요. 아주 무책임하죠. 무책임 한 거 다 아는데 좀 뻔뻔스러워야 해요. ‘주께서 너를 지키기를 원한다.’ 이렇게 하고 내놓아야 해요.

이 말은 뭔 뜻이냐 하면 “내가 너한테 물려 줄 것은 죄밖에는 없다.” 라는 것을 스스로 자인하는 겁니다. 주여, 엄마와 자식 관계를 끊게 하옵소서. 부모와 자식 관계를 끊게 하옵소서. 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와 손녀 사이를 끊게 하옵소서. 이미 우리는 끊었어요. 주께서 그 아이를 어떻게 옹알이 하게 할 것인지를 지켜보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딸랑이 흔들고 웃고 하는 그것을 주의 솜씨로 지켜보기만 하면 돼요. 그러나 세상은 이게 안 됩니다. 그저 내 자식, 내 자식해서 초등학교 2학년 애가 고등학교 수학을 배우지를 않나, 세상에 그런 과도한 선행학습이, 논문 쓰면 유리하다고, 목적고에 간다고 논문 한 편 쓴다고 육백만원주고 하는데 그런 논문은 제가 깎아 주고 쓰면 안 되겠죠. 십자가 마을에 논문 수도 없이 많고 논문 덩어리에요.

그저 죽을 때까지 내 자식이라. 나의 가치와 명예가 너한테 달려있다는 거예요. 얼마나 자식이 스트레스 받겠어요. 내 허락 없이는 니는 아무것도 못한다는 겁니다. 끝까지. 그게 뭐냐 그 자식이 엄마의 죄의 열매가 돼버려요. 부모는 자기 욕망을 주체를 못하고 그저 땅에 있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세상에서 잘나 보이는 그것이 전부입니다.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아담 때부터 해가지고 모든 인간이 다 그렇거든요.

그걸 주께서는 하늘에서 와서 납치해가는 거예요. 부모가 돼서 자식을 죽이는구먼! 하고 납치를 해가 버려요. 그 자식을 중간에 하나님께 바침으로써, 그 자식의 모습을 통해서 자기 속에 내장되어 있던, 내가 아무리 쳐다봐도 모르는 내 죄가 이제 바깥에서 실효성 있고 실제적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자식이 그렇게 못한 것, 다 어미 탓이다. 내 탓이다.’ 그저, 그저 바깥에 나가서 출세하겠다고. 평소에 엄마가 자식에게 뭐라고 했느냐 하면 “너만 믿는다. 나는 니만 믿는다.” 그렇게 하니까 그 자식이 바깥에 나가서 서동그룹에 회장 되려고 그런 못된 짓은 다하고. 해놓고 마지막에 자식이 하는 말이 엄마가 나한테 그랬잖아요? 나는 니만 믿는다고 했으니까 엄마한테 보란 듯이 온갖 악행을 다 저질러서 서동그룹에서 쫓겨나서 결국은 내일도 승리 드라마는 끝났지만, 드라마이야기에요.

그저 말 한마디가 “나는 니만 믿는다.” 주님 믿어야지 왜 그 자식을 믿어요? 얼마나 부담되겠습니까? 권리를 구분 짓는 겁니다. 엄마와 권리와 자식의 권리를 구분지어서 따로따로 구분 짓는 그 차이점을 주목해라. 그 차이점을. 세상 사람들은 엄마의 젖이고 새끼 젖이고 인간을 위해서 있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새끼 젖을 따로 뗌으로 말미암아 그 젖의 의미가 그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맛있게 우유 먹으라고 하는구나, 인간을 위함이 아니고 젖을 먹는 니 자신이 하늘에 속한 자라면 이 권리가, 마땅한 권리가 아니고 기적 같은 권리, 이거는 백퍼센트 줄 필요도 없는데 백퍼센트 주시는 용서해 주는 권리로서 니가 엄마의 젖을 먹어라. 단 새끼는 분리시켜 놓은 뒤에, 니가 젖을 먹든지 삶든지 해야 된다 이 말이죠. 아주 그 세밀한 가운데서.

그래서 이러한 분류가요, 특히 남자도 여자도 마찬가지에요. 남자, 여자를 구분 짓는 이유가 여자의 후손이 인간의 근원적인 구원을 실시할 수 있습니다. 뱀, 인간을 지배하는 사탄은 여자의 후손과 싸웁니다. 그래서 남자, 여자를 구분하는 거예요. 이것도 모르고 그리스도의 정방정교에서는 여자한테 사제를 주지를 않아요. 지금까지도 마찬가지에요. 동방정교 처음 들었죠? 러시아, 그리스 그쪽이 믿는 기독교를 동방정교라고 합니다. 옛날 교회가 둘로 쪼개졌거든요. 그 교회가 여자한테 사제를 주지 않는 이유가 월경을 하기 때문에, 땅에다 피를 흘리면 재수 없다는 거예요. 재수 없어서 안 준다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에서는 땅에 피를 흘리고 죽음을 흘리는 것은, 이것은 하나님의 보복이 들어온다는 그러한 미신 같은 것이 작용을 해요. 그러나 땅에 피를 흘리는 것은 그러한 보복의 미신이 아니고, 땅 자체가 이미 죽음의 땅이라는 것을 증거 하는 용도로 필요한 피는 희생의 피에서 따로 마련되어져 있어요. 따라서 그 피와 희생의 피를 구분 짓게 하기 위해서, 차이 나게 하기 위해서 니는 땅에서 함부로 피를 흘려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희생의 피, 주께서 원하시는, 하늘에서 주어지는 독생자의 피는 마음껏 이 땅에서 뿌려져야 되는 겁니다. 그 의미를 아는 자가 바로 이미 하늘에 속한 자라는 거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도 없느니라.” 그 피는 아무나 흘리는 피가 아니고 하늘에서 내려온 그 분의 피만이 땅에 있는 우리를 납치하듯이 해서 천국으로 데려가는 겁니다.

이게 거룩한 의미에요. 거룩은 행함이 아닙니다. 이미 거룩을 얻어 챙긴 거예요. 거룩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거룩이 우리를 매일같이 소유하면서 그 차이남을 일상 속에서 뽑아내는 작업을 주께서 동행하시면서 우리에게 실시시킬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런 일 하면 재수 없다, 이러면 우리 가정이 안 된다는 미신에 얼마나 휩쓸렸습니까? 이제는 뭘 먹든지 간에 우리는 이미 예수님 안에서 차이 나는 거룩한 성도되었음을 확인하는 식으로 일상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