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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79강-ㅡ죽음과 백성(신14'1-2) 160417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4. 19. 07:16
2016-04-17 14:54:21조회 : 62         
   죽음과 백성 160417 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죽음과 백성(신명기 14:1-2)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ZigdhZm7-vE, Hit:4

 이근호 16-04-17 15:35 
죽음과 백성

2016년 4월 17일                          본문 말씀: 신명기 14:1-2

(14:1)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자녀니 죽은 자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베지 말며 눈썹 사이 이마 위의 털을 밀지 말라

(14:2)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택하여 자기의 기업의 백성을 삼으셨느니라

모든 인간은 다 동일한 생각으로 살아간다 는 것은 보편화된 상식입니다. 별다른 생각이나 영웅이 나타나고 얼마 안가서 다시 세월에 묻혀버리고 현실 표면은 금세 고요해져버립니다. 별다른 생각이 없다고 여기는 바로 이 인간세계의 완고함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나라를 만들어 틈이 생기게 하십니다. 

즉 달리 살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명칭을 붙이십니다. ‘자녀’, 혹은 ‘백성’이라고 말입니다. 보통 자녀나 백성이라고 한다면 왕이나 어른으로부터 덕을 톡톡히 본 사례가 있어야 증명이 될 것 같아보입니다. 즉 “우리 임금님은, 혹은 우리 아버지는 나에게 이런 혜택을 베풀어 주었기에 나는 그분의 백성, 그분의 자녀가 맞다”라고 자부하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는 이런 인간의 요구를 밀치십니다. 거부하십니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인간들이 기피하는 이질적인 요소를 삽입시키십니다. 그것이 바로 ‘죽음’입니다. 오늘 본문은 ‘죽음을 애도’하는데 있어 이방민족처럼 해서는 아니된다는 겁니다. 죽음이란 존재의 마지막을 말합니다.

인간에게 있어 죽음, 그 뒤는 남아 있는게 없습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소멸로 봅니다. 소멸되는 것이 그토록 분통스럽고 억울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죽음의 지연시키고 삶의 폭을 보다 넓히기 위해 혼신의 힘으로 다 쏟아붓는 식으로 평생을 살아오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모든 활동이 의미가 있는 이유는, 그 행위로 인해 삶이 보장된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죽기 위해서 행동하라면 차라리 아무 것도 안하는 편이 쉽게 죽음에 이를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죽기 위해 하는 노력이 살기 위해 하는 노력보다 더 집중력을 갖추어야 하고 심리적으로 힘든다 는 것을 감안해봐야 합니다. 그만큼 인간을 태어나면서 줄곧 자기 죽음에 대해서 애도할 마음자세가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웃이나 동료의식이라는 것이 딴 게 아니라, 내가 나에게 있어 삶에 집착을 가진 만큼이나 타인에 대해서 나와 더불어 함께 살아남아야 한다는 집념으로 형성되는 겁니다. 만약에 같이 오래오래 해로하겠다고 마음먹고 결혼했는데 배우자가 버릇처럼 “나 먼저 죽을래”라고 나온다면 점차 동료의식이 감소할 것입니다.

인간의 신체 자체가 본능적으로 “나 살래”를 발산하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정신상태를 가지고 아무리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고, 예수를 믿는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나 백성다운 모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차라리 몹시 실망해야 합니다. 즉 ‘나 살래’를 옹호해줄 줄 알고 믿는 하나님과 그런 예수로부터 큰 실망을 당해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인간은 자기 자신이 처음부터 하나님의 자녀나 백성 될 자격이 없음을 알지 못합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자녀란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도 없습니다. 없는 것을 있게 만드시는 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몫이지 결코 인간들의 요구사항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는 필히 ‘건짐 받는’ 과정이 요구됩니다.

이 ‘건짐 받는’ 과정을 위하여 ‘버려지는 과정’도 필수적입니다. 즉 인간 스스로 노력해서 하나님의 백성이나 자녀가 되는 것을 하나님께서 거부하십니다. 그 거부의 과정 안에 개입시키는 것이 바로 ‘죽음에 대한 인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녀나 백성을 ‘마지막을 보여주어야 될 존재’로 사용하십니다.

마지막이란 살고 싶은 집념으로 똘똘 뭉친 존재가 별볼일도 없이 소멸되는 것을 말합니다. 에베소서 5:18에 보면,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되어 있습니다. 술취함의 반대말이 ‘술 안먹음’이 아닙니다. 같이 취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어디에 말입니까? “성령에” 말입니다.

성령에 취한다는 말은 자기 연민이나 자기 미련 상태에서 벗어난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이 술을 먹기 전부터 술먹었을 때에 가지는 몽롱한 쾌감을 그리워하게 됩니다. 몽롱한 쾌감은 취해있는 시간만큼은 세상이 주는 아픔이나 고통에서 벗어나게 된다고 여깁니다. 일종의 ‘죽어버린 상태’가 되는 겁니다.

자아가 빠진 현실은 자아가 죽어버린 현실과 유사하게 되는 겁니다. 고통을 당해야 될 당사자가 없는 현실에서, 현실이 아무리 혹독할지라도 자신과 상관없이 되는 것이 바로 ‘취한’ 상태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이 세상에 대할 때, 인간 자아가 처리하고 개입하고 설치는 것에서부터 자아가 빠져 있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자아를 마지막마저 타넘은 위치까지 옮겨놓는 작업이 필요할 것입니다. 이게 바로 ‘건져냄’에 담긴 내용이기도 합니다. 갓 태어난 모세가 자기를 죽이려드는 살벌한 현실에서 벗어나 바로의 공주로 말미암아 ‘건짐’을 받습니다. 로마서 15:7에 보면, 자녀가 아닌 자가 자녀가 되는 과정이 나와있습니다.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즉 하나님께서 중도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십니다. 그러면 죽음의 힘에 통치를 받는 자기 백성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도에 받아내십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 안에, 달리 말해서 성도의 자아가 성령에 취한 상태에서, 달리 말해서, 마지막을 넘어서 처지에서 세상을 다시 보게 됩니다.

전도서 7:1-2에 보면,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고 되어 있습니다. 성도란 ‘마지막’에 처한 존재가 어떤 자세이어야 하느냐를 보여주기 위해 살아가게 됩니다.

살고 싶다는 정신이 이미 족쇄로 작용하는 이 세상에서, ‘이미 죽었음’을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여서 세상을 ‘죽음 뒤에서’, 혹은 ‘위에서’ 다시 보는 안목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안목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기에 가능한 일이지, 예수님과 따로 존재하면서 얻을 수 있는 안목이 아닙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율법이 이스라엘을 신약쪽으로 몰고 갑니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성도가 지킨 말씀은 남아있지 않고 성도 속에 계속 스며들고 젖어드는 말씀이 성도로 하여금 자녀되게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실망을 통해서 평소에 우리 자신이 얼마나 반항아인지를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6-04-18 06:17 
79강-신 14장 1-2절(죽음과 백성)16041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14장 1-2절입니다. 구약성경 284페이지입니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자녀니 죽은 자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베지 말며 눈썹 사이 이마 위의 털을 밀지 말라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택하여 자기의 기업의 백성을 삼으셨느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사실은 이건 거짓말이라고 할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가 누구, 누구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우리같이 생긴 어떤 사람이 등장해야 해요. 왕이라고 하죠. 임금이라고 하고, 군주라고 이야기하는데, 백성이라고 하는 것은 나를 백성 되게 하려면 나와 같은 인간이지만, 나와 다른 별개의 신분을 가진 유일한 어떤 분, 왕, 세종대왕 임금이라든지 그런 사람. 그런 사람들이 등장할 때 “당신은 나의 왕이요. 나는 당신의 신하요. 백성입니다.” 가 성립이 됩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면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자녀니” 이거는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에요. 우리는 분명히 사람의 자녀입니다. 사람이 자식을 놓으면 자녀가 되고, 그 자녀가 자식을 놓으면 손자, 손녀가 되죠. 이게 우리가 아는 전부입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그건 미친 사람이죠. 근데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요, 라고 할 때 우리가 단박에 좋아하기는 뭐해요. 좋아하려면 근거가 있어야 하는데, 믿더라도 따지면서 받아들이겠다는 거예요. 따지면서. 왜 우리가 사람의 자녀도 아니고 사람의 백성이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지를 따지면서 받아들이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과 사람의 자녀가 되는 것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우리가 느끼고 싶어요. 적어도 하나님의 자녀라면 좀 멋있어 보이잖아요. 누구 집안의 자녀라고 하면 시시해보이지만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 급이 천사 급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 자녀를 건드리면 누굴 건드리게 되느냐 하면 하나님을 건드린 게 되어서 이거는 자동적으로 하늘에서 벌이 오든지 안 그러면 지진이 일어나든지 뭐 그런 수가 나야 되거든요. 건드리면 건드린 쪽이 다치게 되어 있는 그런 경험들이 일어나줘야 ‘아, 이건 나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지켜주는구나!’ 라고 이건 좀 티가 나는데, 그런 경험을 별로 우리는 해 본 적이 없고 아등바등 살고 해야 겨우 살아가는, 이건 뭐 하나님이 나를 도와줬다는 느낌을 전혀 받지 않아요.

내가 알아서 이만큼이나 살아왔지 내가 아니면 누가 책임져 줄 것인가? 책임져 줄 사람이 없어요.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아버지가 아버지라고 나서면 자식은 화가 납니다. 평생 동안 노름해가지고 엄마 애 먹이고 자식 버려놓고 뒤늦게 와서 온 천기가 안 아픈 데가 없이 와서는 “내가, 니 아버지다. 아버지야.” 그러니까 화가 나서 “나한테 아버지라는데 당신이 있을 자리가 못됩니다. 당신이 뭘 했다가 이럽니까? 우리는 고생했습니다.” 아버지가 하는 말이 “그러니까 고생, 고생, 없는데서 고생했으니까 니가 변호사가 됐지.” 이러거든요. 드라마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누구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끝까지 자기 잘했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자녀라고 한다면 뭔가 도와 준 게 있어야죠. 뭐 보태준 게 있어야죠. 아무것도 한 게 없이 뒤늦게 와서 나몰라 라고 팽개쳐놓고 “내가 하나님이다.” 그러면 우리는 뭐 합니까? 창조주면 답니까? 이렇게 나오죠. 그래서 이 본문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그거에요. 하나님과 예수에 대해서 실망을 하지 않으면 자녀가 될 수 없다는 겁니다. 내가 믿는 신에게 큰 실망을 당하고 낭패를 당해야 된다는 거죠. 은근히 기대했다고 기대가 와장창 무너져야 해요. 그럴 때 그게 하나님의 자녀의 시작입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고 했죠. 온 발등에 성한 데가 남아 있지 않아야 해요. 믿는 도끼에 늘 찍혀야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늘 나를 도와주는 분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것을 가지고 망상이라고 합니다. 일종의 병인데, 그 망상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보통 축복이 아니면 못 벗어나요. 아직도 한국교회는 이 망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빌면 도와준다는 거예요. 바치면 복 준다는 거예요. 이게 전부다 마귀에 의해서 반대로 더욱더 가짜로 살라고 그렇게 교회가 유도하고 있어요. 전부 다 가짜입니다. 진짜는 성경에 있어요. 이 신명기 14장은 이스라엘 백성들 보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자기 자녀들을 내팽겨 치듯이 팽겨 쳤습니다. 왜, 니가 생각하는 하나님을 바꿔치기 하시기 위해서. 나를 도와주시는 분이 정말 진짜 좋으신 분이시다는 그런 망상을 벗겨내고 끌어내기 위해서. 설교를 위해서 제가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자녀는 없습니다. 이게 정답이에요. 자녀는 없습니다. 자녀는 없는데 성경에서 하나님이 자녀라고 하니까 후딱 욕심이 동해서, 욕심이 과해서, 저 자녀 될래요? 하고 손들고 나왔습니다. 이게 문제에요. 자녀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요단강에서 세례 받으신 그 분밖에 없어요. 나머지기는 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고 마귀자녀에요. 마귀새끼들이라고 했어요. 마귀새끼.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전에 대구에서 어느 전도사로 있을 때, 하나님이 인간보고 마귀새끼라고 하니까, 전도사시절인지, 강도사시절인지, 강도사인 것 같아요. “강도사님. 그렇게 욕을 해서 되겠습니까?” 나는 뭐 생뚱맞게 욕 얻어먹게 생겼어요. 성경에 보니까 새끼라는 단어가 나와요. 너희는 마귀자식도 나오지만 마귀 새끼라는 단어도 썼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그 들은 사람이 생각하기를 설마 성경에 새끼라는 말을 쓸 리가 없다는 말입니다. 나는 뭐 풍문으로 들었소~ 분명히 나오는데......,

불순종의 자녀들입니다. 우리는 내 속에 하나님을 반대하는 힘이 작용하고 있어요. 내가 원하는 신이 아니라면 꺼져 라는 그런 힘이 작용하고 있다니까요. 태어날 때부터 내 안에는 나를 도와주지 않으려면 하늘의 하나님이라도 나한테 그런 헛소리하지 말라고 내치는 힘이 우리한테 있어요.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 속에는 진짜 하나님을 밀쳐내는 힘이 지금도, 오늘도 작동하고 있어요. 항상 내 편 아니거든 가라 이 말이죠. 자녀라 하는 것은 없는 거예요. 하나님의 솜씨가 어디에 있느냐 하면, 그런 자녀가 마귀새끼, 하나님을 내치는 자를 자녀로 만드는 그 과정 속에서 진짜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거예요. 진짜 하나님이.

정말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해야 돼요. “이럴 수는 없습니다.” 라는 것. “이렇게 망가진 자를 천국 보내려고 하는.. 이럴 수는 없습니다. 주여. 이런 짓을 저한테 해서는 안 됩니다. 저는 주님을 반대했던 자요, 주님한테 실망했던 자입니다.” 라는 이야기를 내뿜어내면서 우리는 천국 백성으로 이끌림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좋게, 좋게 만나는 법은 없어요. 그러면 십자가라는 것이 의미 없습니다. 하나님도 우리 사이를 좋게 만든다? 그런 법은 없습니다. 좋은 게 좋다. 그런 법은 없습니다. 좋은 게 좋은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우리를 미친 자로 간주합니다. 어디에 미쳤는가, 죄에 미쳤고 돈에 미쳤고 세상에 미친 자로 봅니다.

그것을 에베소서 5장 18절에는 한마디로 말해서 “술 취했다.” 술 취하지 말라는 거예요. 이 에베소서 5장 18절에서 술 취하지 말라는 것은 뒤에 술 먹지 말라는 것이 아니에요. 그래서 성경이 어려운 거예요. 술 먹지 말라의 반대말은 뭐냐, 성령에 취하라 이 말이에요. 여러분들은 신자니까 술 먹은 경험이 never, 전혀 없을 거예요. 신입생 환영회 때도 술 한 방울 먹은 적이 전혀 없을 겁니다. 술을 먹기 전부터 사람들은 알딸딸을 기대하게 돼요. 알딸딸한 게 혼미한 상태에 빠지게 되는 겁니다. 그것을 술 먹기 전에 은근히 기대를 해요. 좀 내 정신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이런 정신으로 내 상황을 감당 못할 테니까 내가 이런 상황에서 잠시 혼이 나간 상태로 만들려면 술 이외에는 뭐 다른 수가 없거든요.

술을 퍼마실 때 노리는 것이 있어요. 좀 이 영혼이 가벼워져가지고 알딸딸 해가지고 정신이 나가서 그만 세상을, 현실을 잊어버렸으면 좋겠다. 또 이 소리 듣고 술이 또 땡기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바로 그 상태를 취한 상태라고 그러거든요. 뭐냐 하면 현실이 있음에도 나는 빠져있는 상태를 취한 상태입니다. 현실이 현실이라고 느껴지지 않고 나도 없고, 나도 간 곳 없고 현실도 없는 곳, 그래서 고민하거나 고통을 느낄 여지가 완전히 사라진 상태, 잠시나마 술 취한 상태입니다.

이 술취함을 반대말로 성령에 취하라고 했다는 말은 성령에 취하게 되면 바로 그런 상태에 돌입되는 겁니다. 하나님보고 이거 내놔라 저거 내놔라 왜 나를 이렇게 꼬이게 할 수 있느냐? 이럴 수 있느냐? 할 때 그 입을 주께서는 술이나 농약으로 막 틀어막는 것이 아니고 성령으로 틀어막아요. 성령으로. “입 다물어! 자녀도 아닌 것이 왜 그리 말이 많아? 이 세상은 너를 위한 세상이 아니다.” 그러면 우리는 또 달려들죠. “날 위한 세상이 아닌데 왜 저를 태어나게 합니까?” 라고 하게 되면 “너를 자녀 만들기 위해서 만든 세상이다.” 라고 하죠. “글쎄, 나 자녀 되고 싶은데 왜 내 뜻대로 안 되게 하십니까?” 이렇게 되죠.

자녀가 되려면 우리가 생각하는 현실이 뭉개지고 뿌개지고 망가져야 되고 실망스럽게 날아가 버려야 됩니다. 날아가 버리게 되면 그 안에 있던 나도 같이 날아가 버려요. 이게 취한 상태, 내가 없어진 상태가 되는 겁니다. 그걸 가지고 오늘 본문에서는 죽음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죽음. 쉽게 말해서 우리는 왜 태어났는가, 마지막이 어떤 상황인지를 알리기 위해서 우리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거예요. 우리를 통해서, 마지막 모습을, 소위 백성을 통해서 만끽하면서 세상에 보여주는 겁니다. 세상에 끝이 왔을 때 우리는 이렇게 산다. 이걸 보여주라고 성도되게 하신 거예요. 마지막이 되었을 때.

저는 어떤 영화를 봤는데, 델마와 루이스인가, 여자가 평범한 가정주부인데, 남편이 델마에게 폭력을 휘둘러서 델마가 나도 싸울 줄 알고, 총질할 줄 안다고 설치다가, 아무것도 모르는 가정주부가 세상도 모르는 가정주부가 총질했다가 도망치는데 멕시코까지 도망쳐요. 계속 헬리콥터 떠서 이제는 항복해라! 포위됐다! 이제는 운전대를 놓고 자수하세요! 하니까, 그 평범한 가정주부 둘이 씩~ 웃으면서 절벽 끝에서 그냥 날아가지고, 그랜드캐넌 같은 그런 데다 차를 그냥 몰고 투신자살한 것이 마지막 장면입니다. 잠시 누린 자유를 잊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근데 그 자유를 누리는 방법이 뭐냐, 투신자살이었어요. 투신자살. 잡혀서 압사 당하느니 차라리 나 없다고 전해라~ 이거거든요. 나 이 세상에 없다고 전해라~ 잠시 이 세상의 연극무대에서 퇴장했다고 전해라~ 이게 자살입니다.

근데 자살하면 구원받습니까? 하나님은 자기 자녀를 자살하도록 유도하는데, 어디로 유도하느냐 하면 앞당겨서, 델마와 루이스처럼 마지막 차타고, 모든 사람들이 나를 볼 때에, 나는 그들 들 이 세상에서 볼 때에 실망스럽죠. 세상에 대해서 실망스럽다는 것은 뭐에 대해서 실망스럽다는 말인가 하면, 그동안 내가 믿던 하나님한테 배신당했다는 실망감. 마지막에 나타나는 것은 실망감 외에는 나타날 게 없어요. 그 실망감을 가지고 실망을 품는 그들을 바로 성도로,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는 작업을 주께서 하십니다. 이 사실을 아셔야 돼요. 교회 나오시는 이유가 하나님한테 실망하기 위해서 나와야 돼요. 사실은 실망하기 위해서.

기도해도 뾰족한 수도 없고 헌금해도 알아주지 않고 열심히 봉사해도 형편 나아지지 않고, 그게 껍질을, 우리가 마지막을 자꾸 기피하는데, 기피하지 말고 마지막에 그 용감한 모습으로 한발자국 나가라는 말이에요. 그 마지막 모습일 때, 그 모습이 진짜 내가 몰랐던 사탄의 종으로서 나의 마지막 모습은 실망과 그 실망의 선에서 내 안을 비로소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는 겁니다. ‘나 이것밖에 안 되는 존재구나!’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14장 1절에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자녀니 죽은 자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베지 말며 눈썹 사이 이마 위의 털을 밀지 말라”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 빼놓고요, 이스라엘 백성 빼놓고 모든 사람은 죽음에 대해서 애도합니다. 죽은 자에 대해서 애도하는 것, 죽은 자와 관련성이 있다는 이야기거든요.

지금 세월호 2년 동안 애도하고 있어요. 애도하고 있다는 것은 뭐냐 하면 죽은 니 사정이 안타깝다는 겁니다. 살아있는 내가 보기에 죽은 니 모습이 안타까워서 나는 니하고 같은 감정이라고 힘을 실어 부여해주는 거예요. 힘내라! 잊지 않을게! 뭐? 뭐? 뭐를 잊지 않겠다는 거예요? 뭘? 우리는 안 죽어야 되는데 억울하게 죽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을게! 이걸 지금 누구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세월호 죽은 사람한테 하는 것이 아니고 본인이 본인보고 날마다 부추기고 있는 거예요. 남은 죽어도 니는 살아야 돼! 니 알지? 니 잊지 마라! 남은 죽어도 너만은 살아야 돼!

일본에서 지진 일어나니까 어떤 사람이 이런 댓글을 달았어요. “한국 사람이여! 표정관리하세요.” 너무 좋아하지 말자 이 말입니다.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하는데 너무 좋아하지 말자. 솔직하게 고소해서 죽겠다는 이야기거든요. 그것도 죽음인가. 신이시여, 왜 인간을 죽입니까? 시위하고 있는 것이 애도입니다. 신이라고 우리를 죽일 권리가 있다는 것이 우리는 우리 입장에서 너무 억울합니다. 이왕 살아가는 거, 제발 죽이지 마옵소서. 죽이면 가만두지 않겠습니다. 이게 애도에요. 일종의 반발이고 반항이에요. 악마의 모습이에요.

죽은 자를 위해서 자기 몸을 벤다는 것은, 니가 죽는다는 것이 너무나 재수 없는 일을 당했기에 죽어도 우리는 한편이잖아. 그러니까 니 죽은 것이 아픈 만큼 내 몸도 아프게 내 몸에다가 죽죽 갈아서 나도 니 고통에 동참해줄게. 이게 뭐냐 죽은 사람의 발목을 잡고 둘이 합쳐서 죽음으로 찾아온 신에게 대항하고 항의하는 모습입니다. 이게 애도의 모습이에요. 이게 이스라엘 빼놓고 모든 민족들은 그렇게 해왔고 이스라엘도 포함해서 그렇게 해왔습니다. 이스라엘이 그렇게 안 했겠습니까? 애굽에서 이방나라에서 뽑아 나온 사람인데. 그런데 너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죽여 놓기는 하나님이 죽여 놓고 너희들은 거기서 슬프게 봐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지진을 누가 일으켜놨는가? 지진은 주님이 일으켜놓고 그 지진 일어난 것을 애도하지 말라는 거예요. 너도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너도 땅 딛고 있다고 너는 괜찮은 인간이고 지진 일어났다고 망해야 할 인간이고, 뭐 그런 것은 아니라는 거예요.

이러한 하나님의 입장을 이해한다면 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데 이유가 뭐냐, 그 마지막을 넘어선 자가 아니면 마지막을 둔 이유를 모르게 되어 있다 이 말이죠. 그 마지막마저 건너 뛴 사람이 아니면,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궁지로 몰아넣는지, 그 이유를 모르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 마지막마저 뛰어넘을 수 있는 재주가 인간에게 있느냐, 그런 재주는 인간에게 없어요. 그 마지막을 넘어 서야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데, 그걸 아무리 마지막이라고 자기가 해도 결코 그 마지막이라는 모양새가 자기 죽음에 대해서 스스로 자기가 슬퍼하고 아까워하고 애도하는 폼만 내뿜을 뿐이에요.

인간의 모든 행동은, 사실은 자기에 대한 연민입니다. 모든 행동이 자기를 너무 이쁘게 보는 모든 연민의 여러 가지 다양한 모습들이에요. 눈썹 사이를 밀라는 말도 그 당시 이방 민족들이 죽은 자 앞에서 자기 신체의 일부를 밀음으로서, “형제여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죽든 살든 우리는 같은 형제로 함께 있습니다.” 라고 위로하기 위해서 눈썹을 미는 거예요. 눈썹 미는 것 생각하니까 옛날에 우리 할아버지가 저를 얼마나 구박했는지, 눈썹이 붙었으니까 너는 어디가도 평생 복 못 받는다는 겁니다. 눈썹 붙었다고. 저는 그 소리 듣고 거울 보면서 얼마나 원망했는지. 다른 사람은 눈썹이 벌어졌는데, 눈썹 붙어 있으면 소가지(심성) 더럽고 복이 나오지를 않는 거예요. 그래서 눈썹 뽑는다고, 인위적으로 뽑아봤자 DNA가 이미 갖추어져 있는 것인데, 눈썹 뽑는다고 DNA가 바뀔 일은 없을 것이고. 그래서 손녀가 태어났을 때 제일 먼저 눈썹부터 봤어요. 야는 눈썹이 얼마나 먼지, 지 외할머니 닮았어요. 아이구 안심이다.

하나님의 건너오는 방식은 바로 로마서 15장 7절에 나와 있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이게 뭐냐 하면 철없는 아이, 마지막을 건너 뛸 수 없는 아이를 중간에 누가 개입을 합니다. 뛰어들어서 아기를 대신 받아줘요. 어린 모세가, 그때는 이름도 없었어요. 이름도 없는 모세가 동동 나일 강을 떠내려 옵니다. 이게 죽을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여기 미리암 누나가 딱 보니까 바로의 딸이, 공주가 그 아기를 불쌍히 여겨서 그걸 받아내면서 그때 처음으로 이름이 주어집니다. 물에서 건져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은 뭐냐 건져냄이라는 것이 자기 운명에 박혀있어야 돼요. 문신처럼.

건져냄이 있으려면 건져내기 이전도 있어야 되고, 건져낸 이후도 있어야 되고, 건져냄도 있어야 돼요. 그래서 우리는 죽음을 겁낼 수밖에 없는 육신을 갖고 있어야 돼요. 겁낼 때는 가끔 술 취하죠. 술 취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 오더라도 또 다음에는 뭐냐 하면 이미 그것을 의도적으로 너를 벌벌 떨게 만들어 놓았다. 왜? 이미 너는 다른 시각이 필요하기 때문에. 성령에 취한 겁니다. 내가 이 땅에서 벌벌 떠는 것은 이것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내 대신 나를 이렇게 물에서 건져내듯이 자기 품으로 건져내시는 분이 따로 주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다가 집어넣으신 거예요. 예수님을. 그렇다면 신명기 14장에서는 아직 예수님이 안 왔잖아요? 그때는 예수님이 오지 않았어요. 오지 않았지만 무엇이 왔느냐 하면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집니다. 약속이 주어졌다고 하면 우리는 에이, 말씀 몇 가지? 라고 하는데, 약속은요, 언어 몇 가지가 아니고 말씀대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쪽으로 유도당하고 인도받게 되어 있어요.

마지막으로 이 말씀하고 마치겠습니다. 전도서 7장 1절에 보면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2절,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 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 말씀이라는 것이 우리 밖에서 나보고 지키라고 준 말씀이 아니고, 지키라고 하기 전에 먼저 우리 속에 성경 속의 말씀이 쳐들어와버려요. 성도는 지킬 말씀이 남아있지를 않습니다. 말씀 지키라는 말을 지키지 마세요. 지키라는 말씀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스펀지는 스펀지 안에 물이 이미 차 있듯이 말씀이 우리 속에 스펀지로 삼아서 구석구석 들어와 있습니다.

전도서 7장 1절이 우리 속에 들어오게 되면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이러한 특이한 것이 그때부터는 감을 잡게 되어 있어요. ‘출생보다 죽는 것이 낫다? 왜? 죽으면 주님 만나니까.’ 출생은 죽는 날까지 70년, 80년 살아야 되니까 아직 멀어요. 근데 연세 많아서 곧 내일모레 하시면 좋겠네! 왜? 주님 만나니까. 라는 이런 생각이 들어요. 우리 어머니는 안 드는가 모르겠지만. 이런 생각이 가끔 들고 들어야 돼요. 어떤 경우에? 세상이 나를 실망케 하 고 내가 나를 실망케 하고 부끄럽게 만들 때. 이래 살아서 뭐하노? 그 양화대교나 마포대교 가지 말고 그냥 가만있어도 우리는 마지막을 보여주는 사람으로 살도록 이끌어주십니다.

그럴 때 구약에는 구약의 말씀이, 신약에는 주님의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마지막은, 마지막에 도달한 델마와 루이스는 이렇게 살아갑니다. 주신 자유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그냥 둘이 웃으면서 마지막 손잡고 운전대 놓고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처럼, 우리의 매일 삶이 세상은 있으나마나한 것처럼 공중 나는 사람처럼 살아가는 겁니다. 저는 그걸 드론이라고 합니다. 드론을 띄워서 공중을 한 50미터 가는 것처럼, 세상을 이렇게 마지막을 이미 벗어난 사람처럼 지켜보면서, 내려다보면서 살아가주시기 바랍니다. 죽음을 느끼면서도 초월한 안목으로 성령에 취하듯이, 이제는 주님의 안목에 취해서, ‘아, 주님도 이런 고생, 이런 실망을 했겠구나!’ 하시면서 자신과 세상을 보면서 만끽하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애도하지 말고 차라리 마지막 모습으로 살라는 주의 말씀은 오늘날 우리가 산다는 이 세상이 바로 질이 나쁘다는 세상인 것을 날마다 깨우치는 말씀인 것을 압니다. 우리가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이미 말씀이 그들을 완성시켰다는 것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