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신명기80강-되새김질(신14;3-7) 160424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4. 26. 07:19
2016-04-24 14:53:57 조회 : 42         
   되새김질160424 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되새김질(신명기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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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6-04-24 15:46 
되새김질

2016년 4월 24일                           본문 말씀: 신명기 14:3-7

(14:3) 너는 가증한 물건은 무엇이든지 먹지 말라

(14:4) 너희의 먹을 만한 짐승은 이러하니 곧 소와 양과 염소와

(14:5) 사슴과 노루와 불그스럼한 사슴과 산염소와 볼기 흰 노루와 뿔 긴 사슴과 산양들

(14:6) 무릇 짐승 중에 굽이 갈라져 쪽발도 되고 새김질도 하는 것은 너희가 먹을 것이니라

(14:7) 다만 새김질을 하거나 굽이 갈라진 짐승 중에도 너희가 먹지 못할 것은 이것이니 곧 약대와 토끼와 사반 그것들은 새김질을 하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니 너희에게 부정하고

하나님의 지시가 지속적으로 이스라엘에 쏟아집니다. 이것은 ‘선악과’에 대한 금지 취지가 멈추지 않고 떨어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계속해서 간섭하십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신에 대해서 편하게 생각하고 싶어합니다. “저는 신의 존재를 인정합니다. 그것으로 이쁘게 봐주세요”하는 식입니다.

인간들의 이러한 경향은 평소에 인간들은 가족 관계 속에서 살아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식이 부모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으로 부자 관계가 확고함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인간 관계도 동일한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즉 자식이 아버지보고 “저는 아버지를 아버지로서 인정합니다.”라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자식으로 봐줄 것이라는 기대를 유지하게 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지속적으로 말씀을 이스라엘에게 꽂아넣습니다. 그것은 먹을 거리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렇게 되면 생존에 가장 필수적인 먹을거리까지 ‘금지’의 취지에 노출되어 있게 됩니다. 잘못 먹어서 죽는 일이 생겨도 이스라엘 쪽에서는 할 말이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따라서 인간인 입장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세밀하신 개입은 부담이 되고 은근히 부화가 날 지경입니다. “제발, 내 먹고 싶은 것 마음대로 먹도록 내버려두세요”라고 항변하고 싶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먹을거리까지 관여하시는 이유는 의외로 ‘사람은 먹는 것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먹을 것이라는 것은 인간의 생존에 있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부인하기가 곤란할 것입니다. 이는 곧 사람들이 말할 수 있고, 숨쉴 수 있고, 활동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다 먹을거리에 토대를 두고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따라서 사람에게 있어 “생명을 주세요”라는 말은 “먹을 것을 주세요”라는 요구로 대체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이런 구조에 매여 있음을 아시고 진정한 생명을 먹을거리에 새겨 넣는 방식을 사용하십니다. 즉 음식에 새겨진 금지조항을 읽어내는 것이 참 생명이라는 겁니다. 만약에 그냥 먹을거리만 허락해버리면 몸 튼튼하게 살아있는 신체, 그 자체를 생명이라고 오해할 가능성이 농후해집니다.

잘 먹어서 건강한 것이 생명의 징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음식에다 ‘부정’ 곧 ‘더러움’의 취지를 담으십니다. 진정한 생명은 하나님 보시기에 더러움에 대한 해소와 관련지어서 나타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일방적으로 특정 가축과 짐승에 대해서 ‘부정하다’고 선언해버리십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이 분류에 종속되듯이 따라야 합니다. 그리고 그 분류하심과 연결되는 법 조항의 노선을 따라 전체 이스라엘이 이끌려야 합니다.  거기서 만나는 것이 바로 ‘죽음’이요 그 죽음을 통해서 ‘희생’의 취지를 이끌어내십니다. 즉 음식을 먹고 살아야 하는 이스라엘 자체가 하나님께서 벌리시는 희생작업에 휘말려들게 하시는 겁니다.

더러움과 거룩함의 구분에 이스라엘은 식생활로 동참케 하십니다. 그것을 통해서 자기네들이 생존하는 것이 곧 생명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뽑아내고자 하는 ‘거룩과 속함’의 차이성을 보여주는 활동성 자체가 생명에서 오는 활동임을 그들은 경험해야 합니다. 가축이나 짐승에게도 발이 있습니다.

그 발이 갈려져야 합니다. 그리고 먹는대로 삼키는 것으로 소화작용이 끝이 나는 짐승이 있는 반면에, 삼킨 것을 다시 토해내듯이 되새기는 소화작용을 보여주는 짐승도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구분하신 ‘속됨’과 ‘거룩함’의 구분작업에 연관있습니다. 속됨과 거룩함이 마련되어 있어야 하나님의 희생이 성립될 수 있습니다.

이 희생 속에서 비로소 영생이 나오고 하나님의 의가 나옵니다. 인간들의 모든 행위는 자아를 쪼개고 내부 마음을 다시 부정하는 태도를 나타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 내부에 자리잡은 ‘자기 의로움’이 밖으로 자꾸만 변명과 핑계를 뿜어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수치를 가리는 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림막이 없는 인간은 없습니다. 가림막 없이 사는 세월도 없습니다. 자아를 가리지 않고서는 한시도 살아갈 수 없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튼튼하게 힘 있는 가림막을 설치하려고 애를 씁니다. 무엇을 가릴까요? 그것은 ‘내가 하고 싶은대로 살고 싶은 욕망’을 가립니다. 내면적으로 인간은, 늘 신이 되고 싶어합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에 그 어떤 방해를 받고 싶지 않습니다. 지적이나 잔소리도 듣기 싫어합니다. ‘내가 하고 싶다는 것, 내가 했다는 것’ 그 자체를 절대화하고 싶어합니다. 이러한 욕망을 가리는 것이 바로 예의요 상식이요 양보요 겸손입니다. 정작 감추고 싶은 무한한 욕망은 타인에게나 하나님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다는 식입니다.

따라서 이 가림막을 쪼개져도 부셔져야 합니다. 욕망이 가림막을 앞에 더 설치하므로서 도리어 타인으로 하여금 ‘무한한 욕망적 시선’을 유발시키게 합니다. “너에게 뭔가 있어. 그게 궁금해죽겠어. 나는 너에게 관심을 끊을 수가 없어. 우리 같이 사귀자” 이렇게 해서 자기 주변에 힘을 모으는 겁니다. 그러면 자신의 가림막은 정치적으로 증강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욥은 고백합니다. “주신 자도 하나님이시오 가져가신 분도 하나님이다”고 말입니다.(욥 1:21) 즉 “하나님시여, 나의 가림막을 철거하셔서 저가 죄인됨이 드러나도 상관없게 하소서”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의와 생명은 죄와 희생에서 피어나는 법입니다. “나는 율법에서 먹지 말라는 것은 죽어도 안먹겠습니다.”고 버티는 베드로는 잘못입니다.(행 11:8)

사도 바울은 차라리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방신에게 바친 제물이라도 감사함으로 먹으면 아무런 탈 될게 없다고 말입니다. 그것은 우리 성도는 십자가로 인하여 무엇하나 죄 아닌게 없음이 다 들통났다는 뜻입니다. (고전 10:23-28) 자신의 죄를 타인에게 구태여 알릴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가 아니라고 여길 것조차 따로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더러움과 거룩함이 본인이 따로 구분 지을 권리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인간은 죄를 해결할 희생을 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림에도 지속적으로 변명들이 쏟아지니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모든 일을 깨트려 버리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욕망을 정당화하는 그 어떠한 환상을 다 깨뜨려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
 

 이근호 16-04-24 21:14 
80강-신 14장 3-7절(되새김질)16042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14장 3-7절입니다. 구약성경 284페이지입니다.

 “너는 가증한 물건은 무엇이든지 먹지 말라 너희의 먹을 만한 짐승은 이러하니 곧 소와 양과 염소와 사슴과 노루와 불그스럼한 사슴과 산 염소와 볼기 흰 노루와 뿔 긴 사슴과 산양들 무릇 짐승 중에 굽이 갈라져 쪽발도 되고 새김질도 하는 것은 너희가 먹을 것이니라 다만 새김질을 하거나 굽이 갈라진 짐승 중에도 너희가 먹지 못할 것은 이것이니 곧 약대와 토끼와 사반, 그것들은 새김질은 하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니 너희에게 부정하고”

성경에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 먹는 것 가지고 이렇게 세세히 관여할 줄은 우리가 생각을 못했죠. 하나님께서 먹는 것 하나하나까지 침투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우리에게 왜 낯서냐면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만 인정하면 천국 간다는 그런 편안한 마음을 평소에 우리는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것은 대단한 겸손처럼 느껴져서, “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니까 하나님의 아들 맞죠?” 라고 그렇게 윽박지르고 싶죠.

집에 아버지 계시고 본인이 자식이라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는 이상은 우리 관계가 부자父子관계 맞잖아요. 그러니까 아버지가 나를 설마 버릴 리가 없다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교회 올 때, 성경을 보는 것이 아니고 자기 집안에서 했던 그걸 그대로 하나님에게 이어가요. 자기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면 아버지가 고개 끄덕이듯이, 하늘에 대고 “아버지여!” 또는 경상도 말로 “아부지에! 하나님 아부지에 나 자식 맞죠?” 이러면 자식이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면 성경은 무슨 소용 있어요? 아무 소용없는 거거든요. 내가 아버지라고 인정해주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도 감동 먹고, “아이고, 내 새끼 여기 있구나!” 하고 이렇게 돌아봐주는 것, 그거는 성경에 그런 내용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내용이 없다 하더라고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해 준 것만 해도 뭐 대단한 일을 했으니까 거기에 대해서 이렇게 합격통지서를 보내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보내주신 합격통지서가 오늘 본문입니다. 신명기 14장 3-7절. 이것, 이것, 두 가지 조건이 있어요. 쪽이 갈라진 가축과 되새김하는 두 가지 조건을 갖춘 것만 먹어라. 둘 중의 어느 한 것이 빠져있거든 먹지마라. 그거는 가증한 것이고 더러운 것이다. 그렇게 나와요. 쪽이 갈라지고 그리고 되새김하는 것만 먹어라. 배고프다고 아무거나 먹지 말고. 쉽게 말해서 니 배고픈 거 해결하라고 짐승들이, 가축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니 주위에 있는 가축들 중에서 쪽이 갈라진 가축도 있고 되새김하는 가축들이 있는데, 그것은 가축을 위함이 아니고, 택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야 될 너희 백성을 위해서 이런 지시를 내릴 테니까, 쪽이 갈라지고 되새김하는 것만 먹으라고 하나님 쪽에서 우리에게 침투해, 개입해 들어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게 짜증이 나요. 왜? 사람의 먹을거리는 지 입맛에 따라서 지가 고르고 싶거든요. 근데 이것 먹어라, 저것 먹으라고 이렇게 간섭쟁이로 하나님이 나서버리면 사람의 참는 것도, 인내에도 한계가 있어요. 왜? 먹을 때마다 신경 쓰이잖아요. 사람은 신경 쓰이는 것을 귀찮아해요. ‘내가 먹고 싶은 거 내 먹는데 니가 와?’ 라는 말이 속에서 막 우러나오고 싶은데 하나님이라서 꾹 참고 있는 거예요. 이런 말 들으면 부아가 날려고 한다니까요.

그 뒤에 9절에 보면 돼지고기 먹지 말라고 하거든요. 한의사 들으면 화낼 이야기에요. 돼지고기가 인간의 몸에, 건강에 얼마나 좋은데. 돼지는 하나 버릴 것이 없을 정도로 몸에 좋은데. 이 좋은 것을 왜 먹지 말라고 하느냐? 이거는 선악과의 지시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선악과나무가 훼손되고 비록 에덴에서 쫓겨났지만 선악과의 지시의 취지는 여전히 우리에게 지시하고 둘러싸여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인간 만들기에 하나님이 직접 나서신 거예요. 부아 나고 짜증나더라도 우리는 그 취지에 대해서 알아야 됩니다. 그 취지가 뭐냐 하면 사람은 먹는 것으로 구원받지 못한다. 아무 것이나 니가 마음대로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사람은 먹는 것으로 생명을 얻는 존재가 아니라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이 말 듣고 “하나님 저는 양고기만 먹었어요. 하나님 저는 소고기만 먹었어요. 저 착하지요? 지금 죽으면 천국 가죠? 그렇죠?” 라고 우기지 마세요. 무엇을 안 먹고, 무엇을 먹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먹어서 구원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에요.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가려먹으라고 하느냐, 가려먹으라고 하는 것 안에 무엇이 담겨 있느냐 하면 쪽이 갈라지고 되새김하는 것, 그 내용을 먹는 음식에 심어놓은 거예요. 쪽이 갈라지고 되새김하는 것. 젓가락으로 먹든지 숟가락으로 먹든지 손으로 먹든지 뭘 먹을 때마다 뭘 생각하느냐 하면 ‘되새김, 쪽발이 갈라짐, 이게 무슨 의미지? 왜 하나님께서 이걸 못 먹게 하시지? 희한하네. 하나님 참 희한하네. 아무렇게나 니가 배고프면 뭐든지 먹으라고 할 만한데, 왜 의도적으로 쪽발이 갈라진 것과 되새김질하는 것을 못 먹게 하시지? 그 이유가 뭐지? 왜? 왜 그렇게 하지?’ 이러한 의문점이 들도록 주께서는 유도하신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먼저 하나님 쪽에서 시비 거셨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하나님 존재하시죠? 거기 계시죠? 나중에 만납시다. 오겡끼데스까?” 뭐 이렇게 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고, “오겡끼데스까? 거기 잘 계십니까?” 그게 아니고 먼저 거기 계신 분이, 그냥 하나님이 거기 계신 분이 아니고, 우리가 찾아가야 만나는 분이 아니고, 먼저 말씀가지고 우리에게 들이댔다 이 말입니다. 들이대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들이댐을 통해서 존재만 확인하고 평소에 내가 먹고 싶은 것 먹고 싶은데, 들이댄 하나님의 들이댐 속에 뭐가 있느냐, 쪽발 갈라지고 되새김하는 것만 먹고 나머지기는 절대 먹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에, 또 하나의 금지조치가 우리한테 주어진 겁니다.

금지된 조치가 우리한테 주어진 것은, 너라는 현재 인간으로서는 천국에 못 간다는 것을 암시해주는 겁니다. 되새김질해야 되고 쪽발 갈라짐을 음식 속에 왜 깊이 포함을 시키느냐 이 말입니다. 여기 7절 끝에 보면 “이것들은 새김질하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니 너희에게 부정하고” 부정하다는 것은 더럽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입장에서? 하늘나라 들어가기에 합당치 않을 정도로 더럽다는, 하늘나라 입장에서 볼 때 더러운 거예요. 뭐 돼지고기 먹는다고 인간들끼리 더럽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더럽다는 뜻을 하나님은 음식조항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하는 겁니다. “이런 것을 먹으면 너는 더러운 인간이야!” 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정리할 수 있어요. 그 앞에 3절에 보면 “너는 가증한 물건은 무엇이든지 먹지 말라” 되어 있거든요. 가증스럽다, 부정하다, 그 다음에 그걸 먹는 날에는 우리는 죽게 돼요. 더러운 것을 먹게 되면 우리는 죽게 됩니다. 없애버립니다. 죽는다는 것은 없애버리죠. 더러운 것과 죽음과 그것이 같이 엮어져있다는 말은, 생명이라는 것은 더러움과 죽음과 둘러싸였을 때에 비로소 생명이 거기서 나오는 겁니다. 먹을 것 안 먹고 해서 그런 것이 아니죠.

죽음과 부정 속에서는 생명이 나올 때 공통점이 있어요. 그게 뭐냐 희생이라는 것. 죽음과 더러움 속에서 나올 때는 희생을 통해서만, 희생의 모습으로만 이것이 의롭게 나오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죽음과 더러운 것과 희생이 이게 한 세트가 되어서 생명을 주는 하나의 순환구조가 되는 겁니다. 그 속에 너희들이 담겨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여기서 여러분들이 이 말을 들으면 별로 어렵게 느껴지지 않을 거예요. 그런데 이게 분명히 어렵지 않는 이야기인데, 제가 이야기하게 되면 갑자기 어려워져요. 뭐냐 하면 세상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더럽다, 추접하다, 죄다, 라는 것이 있어요. 뭐 보통사람들은 벌거벗은 몸을 보면 음란하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음란한 것을 감추기 위해서 옷을 입게 되잖아요. 근데 한 번 생각해보세요. 옷을 입은 것이 더 음란하다는 생각을 해보신적이 있습니까? 갓난 애기가 벌거벗었다고 음란하다고 느껴지지 않잖아요? 갓난 애기를 볼 때에.

우리가 갓난 애기 입장에서 벗어나서 어른이 되었어요. 우리는 아무 변화 없이 어른 됐다고 착각들을 하시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음란하게 살아가면서도 그걸 감추는 노련한 요령들만 익히면서 지금껏 살아왔습니다. 감추기 때문에, 감추인 그 뒤의 뒷부분이 더 음란한 쪽으로 우리를 끌어 땡기고 있는 그 장치에 우리가 말려 든 거예요.

어떤 만화를 본 적이 있는데, 상당히 사람의 심리에 대해서 예리한 만화에요. 해수욕장 탈의실에서 여성들이 옷을 갈아입는데, 남자들이 몰래 보고 싶어서 본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꺄악! 하고 이 짐승들아! 소리치면서 모래 던지고 내쫓고 해요. 원피스 벗고 하는데 왜 쳐다보느냐? 한다고요. 이거 한국만화 아니고 외국만화에요. 그러니까 남자들은 아이고, 미안합니다. 하고 나왔는데, 나중에 짜~안! 하고 나왔는데 더 벗었어! 옷 갈아입을 때는 많이 가렸는데 옷을 갈아입은 완료된 상태가 더 많이 벗은 거예요.

뭐냐 하면 당신네들, 남성들을 끌만한 욕망을 다 갖추기 전에 왜 미리 보느냐 이 말이죠. 내가 딱 입었을 때, 아, 아름답다! 끌렸다! 라는 욕망이 제대로 생산이 안 됐는데 보지 말고 욕망이 다 생산되거든 그때 마음껏 감상하라 이 말이죠. 내 몸매가 제대로 얼마나 빠졌는지를.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인간이 아무리 파헤쳐도 본인의 욕망이 자신의 죄를 계속해서 변명을 해줘요. 인간의 욕망이 계속해서 변명을 해줘요.

아들을 뺑소니쳐서 죽여 놓고 딱 부모 앞에 나타나서 범인이 하는 말이 그 범인이 자살했는데 사실은 내가 아무리 자수하라고 했는데도 내 말 안 듣고 자살했다고. 뻔뻔스럽게 거짓말을 해요. 눈물 줄줄 흘려가면서. 드라마 이야기입니다. ‘기억’ 이게 뭐냐 하면 자기 최선을 다해서 가리개 역할을 함으로써 상대방으로 하여금 나에 대한 혐의를 벗어버림으로 자기 욕망에 대해서 자기가 계속해서 품고 있으려고 하는 거예요. ‘누가 감히 내 욕망을 건드려?’ 이것 가지고 인간은 평생을 살아갑니다. “당신을 죄를 왜 지었습니까?” “나만 지었어요?” 딱 요 한마디에요. “나만 그런 짓 했습니까? 나만?” “왜 강도짓 했습니까?” “사회가 나를 그렇게 만들었어요.” “북한 김정은, 당신은 왜 핵을 만듭니까?” “국제사회가 그렇게 나를 몰아넣잖아요. 미 제국주의가.”

제가 오전에 한경직 목사를 언급했는데, 지옥 갔다고 언급을 했는데 들으면 화 낼 거예요. 그러나 그 사람 교회도 가보고, 교회 태극기 꼽지 말라고 해도 말 안 듣고, 그래도 이게 복음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결정적으로 제가 인간이 참 너무하다 한 것이 뭐냐 하면, 그 사람이 종교계에서 노벨상을 받은 사람이에요. 종교인들에게 주는 노벨상. 노벨상을 받으면서 매스컴이나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나는 사실은 신사 참배한 죄인입니다. 북한에 있을 때.” 그 사람이 북한에 있다가 넘어온 목사거든요.

“신사 참배를 한 죄인입니다.” 그 소리 듣고 제가 깜짝 놀랐어요. 저게 바로 이단인 거예요. 지 잘못한 것을 왜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죠? 이거는 정치적이고 권력적이에요. 정치와 권력이에요.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과거의 허점을 남한테 떠벌릴 필요가 없어요. 이게 얼마나 주님 의식 없이 사람들만 의식하면서 자기가 갖고 있는 권력이 손상대지 않고 오히려 존경으로 전환되기를 노리는 노림수아니겠습니까?

인간은 아무리 쪼개도 욕망이 그 쪼갬을 저지하고 방해합니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주님이여. 최선을 다했습니다. 말씀을 안 지키려고 한 것이 아니고 평생 지켜봐야 이것밖에 못 지키니 감안해주시옵소서. 주님이여.” 입만 열면 변명이에요. 어쩔 수 없었다고 맨날 변명하는 겁니다. 이 갈라짐, 쪼개짐이에요. 이 하나님의 율법은 그 쪼개짐을 의미하는 겁니다. 뭘 쪼개느냐, 나의 타고난 욕망을 우리는 계속해서 가림막으로 막고 있는데, 그 막고 있는 욕망은 내 힘으로 못 쪼개요. 마귀가 자꾸 니 수치를 가리라고 하는데, 무화과 잎으로 가리라고 하는데, 무슨 수로 그걸 쪼갭니까? 그거 없이는 ‘나’가 아닌데.

나라는 것은 계속해서 내 욕망을 감추기 위해서, 욕망을 안 들키기 위한 것들을 계속해서 생산해내면서 평생을 살아가는데, 그걸 그만두라는 말은 말도 안 되는 말이죠. 그래서 가림막이 없어질 때 자살하잖아요. 자기 가치 날라 갔다고. 한 번 생각해보세요. 이게 욥의 고백이거든요.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가져가신 자도 하나님이라 말이죠. 근데 보통 인간들은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가지고 자기 잘남을 뽐내기 위해서, 자기 허점을 가리는 가림막으로써 그 잘된 것을 앞에 떡하고 내세워요. “나 착하니까 이런 복 받았잖아.” 라고 내세운다고요.

그런데 욥은 말합니다.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그러니까 가리게 하신 것도 하나님이요, 가린 것을 홀딱 벗기게 만든 것도 하나님이다.” 욥이 왜 자살하겠어요? 자살 할 필요 없어요. 처음부터 나는 수치 그 자체인데, 죄 그 자체인데, 상한 심령 그 자체인데, 왜 내가 사람들 앞에서 나는 신사 참배했다고 그 이야기를 왜 그렇게 하는 겁니까? 사람들은 존경스럽다고, 저래야 천국 간다고, 그게 간사함 없는 거예요?

자신에 관해서 남한테 이야기 할 필요 없어요. 무엇에 관해서 이야기 하냐면 아무것도 아닌데 주님이 이런 것을 주셨다만 하면 돼요. 주님과 관련된 이야기만 하면 돼요. 주께서 이런 것 주셨고 주께서 하셨습니다. 주께서 그렇게 인도하네요. 이것은 우리 가운데 욕망의 가림막이 쭉 갈라진 거예요. 갈라졌다는 것은 더 이상, 먹어서 산다는 이 현실판이 지진이 일어나서, 지진이 강도 12라서 완전히 갈라졌어요. 이게 갈라짐이고.

되새김이라 하는 것은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 처음부터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한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어디에 갔다 와야 해요. 물속에, 홍해바다에 빠졌다가 나와야 돼요. 먹은 것을 다시 토해서 또 내놔야 해야 해요. 주께서 왜 그렇게 하셨느냐 하면, 쪼개지고 되새김한다는 것은 주께서 인간 속에 투입하시는 경로를 그런 식으로, 유치하게 먹는 것으로 표현해주는 겁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굉장히 유치한 사람들이거든요. 우리도 마찬가지지만. 이것 먹으면 돼요? 안 돼요? 맨날 묻는 것이 그런 식이라 말이죠.

먹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닌데, 이거 안 먹을 거 안 먹고, 먹을 거 먹으면 구원된다고 착각하는 사람이에요. 초대교회에 그런 사람들 많이 있었습니다. 이건 베드로도 마찬가지에요. 사도행전 10장 9절에 보면 베드로가 기도하는 시간에 무슨 보자기가 내려오는데, 보자기에 뭐가 있는가 싶어서 보니까, 거기에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는데, 이건 뭐 거미, 바퀴벌레, 못 먹는 것들만 있는데, 여기 신명기 14장에 근거해서 못 먹는 것들만 가득 담겨 온 거예요. 하나님이 “먹어라!” 했는데 베드로가 단번에 이야기했죠. “하나님. 못 먹습니다.”

참, 그동안 가려왔던 베드로의 가림막이 단단하죠. 하나님이 먹으라고 하면 먹어야 돼요. 하나님이 지으라는 죄는 지을 수밖에 없어요. 제가 위험한 발언을 하고 있는 겁니다. 한경직 목사가 신사 참배 했다면 그건 주께서 그렇게 하신 겁니다. 이런 말만 하면 되잖아요. 그게 죄입니다. 그게 죄이고 아니고는 니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에요. 우리가 신사 참배 안 했다고 해서 죄 아닙니까? 나쁜 짓을 안 했다고 해서 죄 아니에요? 죄 있는 것을 티내기 위해서 죄 짓게 한다면, “감사합니다. 죄인으로 드러내주셔서.” 이럴 뿐이지. ‘그때 조금만 참았으면. 그때 그 짓을 안 했으면.’ 니가 심판주 다 하고 창조주
다 해버려라.

왜 자기 인생을 조작하려고 합니까? 조작해봐야 극구 자기변명과 가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어요. 진짜 이거는 아이고야! 하는 말이 나올 만 합니다. 제가 마트에서 건빵을 두 개 샀는데, 건빵을 사는 데는 제가 노리는 것이 있어요. 뭐냐 하면 건빵 안에 별 사탕이 딱 들어있습니다. 근데 밖에 갔다 오니 건빵이 뜯어져 있어요. 보니까 별 사탕이 하나도 없고 건빵만 있어요. 이게 얼마나 극악무도한 죄입니까? 누가 먹었는가 하면, 식구 둘 중에 내가 안 먹었으면 누가 먹었겠어요? 세상에 별 사탕을 다 먹었어요. 내가 먹고 싶은 거. 이게 죄가 될까요?

그걸 탓하는 것이 이상한 것처럼, 주님 보시기에 죄인이 죄 짓는 것이 당연한데, 그걸 스스로 자기가 문제 삼는다는 것 자체가 이게 얼마나 건방떠는 거예요. 이미 죽은 존재기 때문에 죄 지을 수밖에 없어요. 근데 바르게 살면 착할 수 있다? 여지가 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인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지옥가야 해요. 쪼개져야 합니다. 그게 쪼개지는 것이고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더불어 되새김 당해야 합니다. 주와 함께 쪼개지고 주와 함께 되새김 당하는 것, 유치한 방법으로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걸 언급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베드로는 그것도 모르고 “이것 먹으면 돼요? 안 돼요?” 따졌지만, 신약에서는 뭐든지 먹어라! 개고기고 순대고 다 먹어라! 저는 못 먹습니다만. 다 먹어라! 단 조건이 있다. 죄인에게 이 먹을 것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거는 거미나 바퀴벌레나 뭐든지 먹어라! 왜냐하면 이미 십자가로 구원받은 사람은 뭐든지 먹는 것에 얽매이지 말아라! 심지어 우상제물 먹는 것도, 니가 감사함으로 먹으면 우상제물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양식이 될 것이다. 그런다고 갓바위에 올라가서 비빔밥 얻어먹지 마시고, 냄새가 이상해요. 나는 못 먹겠어요.

뭐든지 주는 대로 먹으세요. “주여, 이걸 이렇게 먹어도 생명이 아니죠?” 고백하면서 먹으세요. 생명은 먹어서 만드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희생, 죄와 부정과 희생의 순환고리에서 주께서 희생하심으로 구원받은 것입니다. 따라서 뭘 먹든지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주신 먹을 것이라는 것을 느끼고 감사하면서 드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자기 위장한다고 바쁘게 살고 있습니다. 이러면 멋있어 보이고, 저러면 오래 살 권리 있는 것처럼 보이고, 이렇게 살면 남보다 잘나 보이고, 그 가림막이 쪼개지고 깨어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