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고린도전서90강-부활의 가시성(고전15;5-8) 160424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4. 28. 09:39

2016-04-24 12:43:37 조회 : 120         
   부활의 가시성160424 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부활의 가시성(고린도전서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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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6-04-24 13:31 
부활의 가시성

2016년 4월 24일                            본문 말씀: 고린도전서 15:5-8

(15: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15: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15: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15: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사람이 보고 싶을 때 얼마든지 상호 만날 수 있는 세상이 현 인간 세상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런 세계가 전부라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보이셨느니라’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즉 인간들은 저 세계에 들어갈 수 없지만 예수님께서는 부활의 세계에서는 인간 세계로 모습을 내밀 수가 있습니다.

이로서 인간들은 기존의 세계에서 감당할 수 없는 ‘부활 사건’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곧 인간의 세상 해석에 한계가 있음을 말해줍니다. 인간들이 내세우는 진실과 거짓의 기준 자체가 소용없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인간들이 내세우는 진리의 기준이란 기껏 기존의 세계, 즉 예수님 내쫓고 번영을 추구하는 이 세계에 국한되는 원리입니다.

이 인간 세계에서 아무리 신을 찾고 예수님을 말해도, 그것은 기존의 자기 위주의 세상에 대한 확장을 획책하는 행위에 불과합니다. 이것을 종교 혹은 기독교라고 합니다. 즉 예수님의 부활하심의 내용까지 담아서 본래의 그들의 생존 세계를 넓히려고 하는 겁니다. 정보투입이 기존의 세계의 확장으로 이어진다고 믿고 싶은 것입니다.

이는 인간이 내심 추구하는 것, 즉 ‘나의 세계 만들기’의 일종일 뿐입니다. 사람들의 꿈이란 ‘나의 세계를 만들고 그 안에서 자신을 절대존재로 세워두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게 ‘소망충족’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아무리 부활 세계마저 껴안고 기존의 세계와 결합시키고자 애를 쓰도 결국 실패하는 이유는, 그 두 개의 세계 사이에 십자가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두 개의 상충되는 세력의 현존’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꿈을 위해 사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깁니다. 하지만 성경에 보면 결코 자연스런 일이 아닙니다. 심지어 인간의 늙고 죽음마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인간의 세계는 ‘선악과 나무 훼손 이전’과 ‘선악과훼손 이후’로 나뉠 수가 있습니다.

‘선악과 나무’가 건재할 때에는 인간은 죽음의 계명에 예속되어 살았습니다. 아무 거나 무엇이나 에덴동산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선악과 나무 과실을 먹는 날에서 죽게 되어 있는 조건이 살아있는 그런 세계였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죽었다고 사흘만에 살아나므로서 ‘죽음 자체가 소멸되지 않고 본격적으로 힘으로 살아있는 원리’로 자리잡은 것은 같습니다.

성경에 보면 ‘환경 구조에 따라 인간도 다른 주체’로 변환합니다. 선악과 훼손에 의해서 에덴동산에서 추방되고 난 뒤에, 인간들은 이왕 이렇게 된 것, 자립해서 살고자하는 의욕이 일어납니다. 즉 자기를 위한 힘 구축에 나서는 방식으로 삶의 방식이 보편화됩니다. 이로 인해 현실이란 ‘나 중심으로 바라보기’에 따라 임의로 편집되고 조성됩니다.

동일한 환경 속에, 각자의 꿈과 소망에 따라 느끼는 현실감이 다들 다르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공통점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만든 세상 안에서 내가 신이 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꿈’입니다. 꿈에는 의식의 긴장력에서 풀려서 마구 쏟아지지만 실은 낮의 활동도 꿈의 연장입니다.

인간은 평생 꿈 속을 해맵니다. 이런 꿈의 성격을 보여주시고자 예수님은 ‘죽은 하나님’으로 오신 겁니다. 애초부터 영원토록 계신 하나님상은 인간들이 지어낸 것입니다. 참된 하나님은 오직 한 분 ‘사람에게 맞아 죽으신 분’ 그분뿐입니다. 곧 십자가 사건의 중심에 계신 하나님이 참된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자리에 오기까지 인간들은 그들이 원하는 신들을 창안한 것입니다. 그 신의 특징의 특징은, ‘인간들이 믿는 신’입니다. 즉 내가 믿고 가지는 신들이라는 점입니다. 하지만 십자가로 인하여 인간들이 믿는 모든 신은 다 가짜임을 들통났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선악과 훼손된 세상을 ‘죄’로 규정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죄된 자들이 납득이 되는 아이디어로서 신이 나왔으니 그 신마저 죄가 되는 겁니다. 여기서 예외로 할 위인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의인은 없습니다. 아무도 아닙니다. 모든 인간들은 한결같이 ‘자기 절대성을 품고 지니고 살아가는 꿈만 꾸는 정신병자들’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본인이 거짓이라는 점을 본인에게 궁극적으로 찾아낼 능력이 없는 자들입니다. 부활의 세계에서는, 인간 세계에서 건너오게 된 그 다리, 곧 십자가 사건을 인간 세계에 도로 쏘아대므로서 진정 모든 인간이 다같이 죄인이라는 점에서 한통속인 것으로 선포하게 됩니다.

즉 구원을 원하는 그들에게 대놓고 “너희들은 구원될 자격이 없어. 이 세상의 심판에 합당한 분위기로 무르익고 있어”라고 통고해주십니다. 무엇을 근거로 말입니까? 십자가를 근거로 말입니다. 그래서 부활 세계에서 쏟아져 나오는 능력은 십자가를 앞장 세우면서 일하시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십자가를 거쳐서 부활이 능력에 눈독을 들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소지하려고 합니다. 즉 “나는 저것을 갖고 싶다”는 말은 “나는 그것을 가진 내가 되고 싶다”라는 본심의 표시입니다. 그러니 부활의 능력은 인간들의 이런 자세가 인간들이 죄악에 눌러 살고 갇혀 산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가 됨을 알리는 식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따라서 부활의 능력이 임했다는 것은 ‘눙력을 소지한 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죄인이 항상 내 것으로 챙겨서 그 안에서 갑이 되고 싶어한다’를 고백하는 식의 현상을 보이게 됩니다. ‘선악과 훼손 전’과 ‘훼손 그 이후’라는 두 개의 환경 구조를 가지고 하나님께서는 ‘전적 죄’와 ‘전적 의’를 드러내시는 환경으로 사용하십니다.

즉 인간은 개인적으로 구원을 받아야 될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자로 뽑힐 자가 따로 있다는 말입니다. 당연히 이 의는 자기 소유가 아닙니다. 도리어 성도는 하나님의 의로 소용당해서 항상 하나님의 의의 완성도만 나타내게 되어 있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을 받아들인 사람은, 자신이 뭘하나 죄인됨을 인정합니다.

밤이나 낮이나 자신이 신이 되는 꿈을 인간은 버릴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부활의 능력이신 성령께서 오시게 되면, 자신의 모든 꿈이 무산되는 혜택을 쉴새없이 내려줌을 알게 됩니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 4:18)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부활의 능력은 십자가만 앞장 세운다는 사실을 가볍게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6-04-24 22:34 
186강-고전 15장 5-8(부활의 가시성)160424-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5장 5-8절입니다. 신약성경 281페이지입니다.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 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오늘 본문 말씀 보게 되면 예수님이 살아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요, 예수님이 이렇게 살아 있는 방식으로 인하여 두 종류의 살아 있음이 만들어졌습니다. 하나는, 6절에 보면,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보여줌으로써 비로소 볼 수 있는 형태의 살아 있음’이 있는 반면에 ‘보고 싶을 때 언제든지 볼 수 있는 식으로 살아 있는 형태의 살아있음’이 있겠지요. 인간들이 사는 세상은 내가 보고 싶을 때는 언제든지 찾아가서 볼 수 있는 그러한 세상입니다.



예수님이 살아났다고 했을 때, 살아났으면 우리가 예수님한테 뭔가 요구하고 싶은 생각이 있어요. 뭐냐 하면, 보여주실 때만 나타나지 마시고 같은 인간들처럼, 옆집에 사는 것처럼, 주님의 거주지로 주민등록이 되어 있어서 “주님, 잘 계셨습니까?” 하고 내가 보고 싶을 때는 언제든지 볼 수 있는 방식으로 우리와 함께 살아 있으면 참 좋겠다, 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살아 있으면서도 왜 그런 식으로 보여주실 경우에만 만나고, 안보여주시면 못 보는 그런 식으로만 살아 계십니까? 우리가 납득이 되도록 보고 싶을 때 언제든지 볼 수 있는 방식으로 살아계시면 참 좋겠습니다.’라는 생각을 갖기 마련이거든요.



주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가 있어요. 너희들 보기에 네가 있는 이 세상이 있는데 예수님도 이 세상 안에 함께 있다고 생각하게 되면 세상이 달랑 하나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이 생각하는 세상 말고 또 다른 세상이 있다면 그 세상은 분리되어 있는 거예요. 세상이 둘로 분리되어 있을 때, 저쪽의 예수님의 세상은 이쪽으로 뜻하는 대로 얼마든지 넘어올 수 있지만 이쪽 인간들이 살아가는 방식으로 구축된 이 세상에서는 주님 가신 세계로 갈 수가 없어요.



갈 수 없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 인간들이 사는 세상과 주님이 새로 만든 세상 사이에 십자가라는 것이 놓여 있다는 것, 주님은 그것을 강조하는 겁니다. 전에는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했잖아. 평생토록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했지만 네가 원한다고 해서 갈 수 없는 세계를 하나님 쪽에서 만들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아무리 애써도, 죽고 난 뒤에 내가 갈 세상, 천국인지 지옥인지를 내가 골라잡을 수 있는 입장이 못 된다면 우리는 헛짓한 겁니다.



저쪽의 영원한 미래까지 딱 손에 쥐고 보장이 되어야 지금 내가 하는 짓이 헛짓이 아니고 의미 있는 일이 되는데 아무리 여기서 설치고, 나대고, 큰소리치고, 재벌이 되고, 그래 봐야 그것은 인간들 세계에 한정해서, 똑같은 인간들 속에서나 난 것이고 대단한 것으로 보이지만 주님 가신 세계에 참여할 수 없다면 그동안 뭐 했어요? 그동안 뭘 한 거예요? 예수님의 부활 앞에서 인간들의 이런 저런 이야기, 북한 핵문제가 어떠니, 엘니뇨현상이 어쩌니 했지만 그것은 전부 잡담이고 헛소리입니다. 유엔본부에 모여서 회의해 봐야 그것은 다 쓸데없는 짓이에요. 청와대에서 회의하고 국회의원 뽑아놓아 봐야 그것은 아무 낙이 없는 짓입니다. 저쪽 세계에를 못가잖아요.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요. ‘저쪽 세계에 있는 것을 우리가 무시하자. 없다고 하자. 무슨 부활이 있어?’ 그렇게 무시하고 싶은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얘야! 저쪽세계가 있는 거야.” 이렇게 말로 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들에게 밀쳐서 저쪽세계에 갔거든요. 그 말은 뭐냐? 너희들이 저쪽 세계, 주님의 세계인 천국이 없다고 여기는 그것은 너희 태생, 본성 상 그 마음가짐 자체가 그쪽 세계를 부정하는 마음을 갖추었기 때문에 그 마음가지고는 저쪽 세계에 못간다는 거지요.



그 이유가 뭐냐? 저쪽 세계에서 오신 분을 너희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잖아요.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이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의 유일한 다리라고 한다면 이것은 “싫어! 나가 죽어버려.”라고 1순위로 제거해버린 그 분의 세계기 때문에 아무리 그분의 세계를 소개해줘도 인간의 마음자체가 그쪽 세계를 강하게 부정하고 밀어내게 되어 있어요. 다시 말해서 부활의 세계라는 것이 말로 해서 부활의 세계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사람에게 떠밀려서, 사람에게 타살당해서, 사람에게 죽임을 당해서 만든 세계라는 말은, 현재의 너의 세계에서 그쪽 세계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없다는 겁니다.



왜? 네 마음이 그 쪽 세계를 부정할 마음으로 가득 차 있기에 그렇다는 거예요.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께서 천국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예수님을 부정하고 밀어냈던 그 사람들의 사고방식 안에 뭐가 들어 있는가? 그들이 하나님 이름으로 그렇게 했거든요. 그들이 주장하는 하나님은 영원부터 살아계신 하나님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주장했던 하나님이. 이 말은 뭐냐 하면, 영원부터 살아계신 하나님은 애초부터 없던 하나님이에요. 사람에게 맞아죽지 않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그 어떤 분이 계실 것이고 그 계신 분은 영원부터 살아 있어서 인간보다 위대할 것이다. 얼마든지 인간들이 그런 아이디어를 끄집어내고 그런 말에 대해서 동의하고 싶지만 그런 하나님을 믿는 그 결과가 뭐냐? 진짜 하나님을 때려죽였잖아요. 이 말은 결국 뭐냐? 인간들이 신을 믿고 뭘 한다 할지라도 근본적으로 본인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체 인간은 진실을 끌어 모으면 그것이 진실에 가깝다고 자꾸 여기는 겁니다. 거짓된 것이 진실을 찾아봐야 그 진실을 찾는 행위도 거짓에서 나온 몸부림에 지나지 않아요.



이러한 인간의 거짓됨이 어디서 나왔는지는 인간 본인은 몰라요. 왜냐하면 본인은 입이 백 개라도 거짓되지 않기 때문에. “3+5=8, 맞잖아. 하늘에 별이 있고 바다에는 물고기가 있다, 내 말 맞잖아. 자꾸 맞다는 거예요. 나는 손가락이 열 개다, 헤아려 봐라. 1,2,3,4,5,6,7,8,9,10, 맞잖아. 내가 하는 말 중에 거짓된 것이 어디 있는데? 다 맞는 이야기인데. 오늘 황사가 있다, 맞잖아. 황사가 있잖아. 봄이 되면 라일락이 피고 여름이 되면 덥고 겨울이 되면 춥고, 틀렸으면 틀렸다고 해 봐!” 이러거든요. “틀렸으면 틀렸다고 해봐.”



이 말은, 도대체 나한테 거짓된 것을 찾으려야 찾아볼 수가 없어요. 성경은 인간이 찾아내지 못하는 거짓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선악과과 훼손되기 이전의 상황과 선악과가 훼손된 그 이후의 상황을 구분지어서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인간이 있다. 창세기 2장에 인간이 있었어요. 창세기 3장에 인간이 있었고, 창세기 4장에도 인간이 있었고, 창세기 5장에도 인간이 있습니다. 수요일 설교에서 창세기 5장, 6장을 하는데요. 우리 인간입장에서는 4장이나, 5장이나, 6장이나, 7장이나 똑같은 인간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뭐냐? 상황 따라서 인간의 주체가 달라진다는 사실을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구조가 다르면 인간도 그 구조에 편승해서 색깔을 달리하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선악과가 온전하게 있는 인간에 있어서의 인간은 뭐냐? 죽음에 예속되어 있어요. “따먹는 날에는 죽으리라.” 이것은 죽음이라는 것은 인간이 손대면 안 된다는 거지요. 오히려 죽음에 예속되고 죽음의 지배를 받는 거예요. “저거 따먹으면 죽는데.” 그 법칙이 계속 살아 있는 구조속의 인간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나대도 ‘선악과는 따먹어서는 안 돼.’라는 그 범위 안에서만 인간이에요.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게 되면 더 이상 인간이 아닙니다. 하나의 흙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마귀가 시키는 대로 선악과를 훼손시켰습니다. 훼손시키고 난 뒤에 그 때부터 자기 몸에, 자기 환경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환경에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은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몸에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은 점점 늙어간다는 사실이에요. 그리고 죽어서 흙이 되는 겁니다. 선악과과 훼손되기 전에는 죽음에 예속되어 있지만 죽음이라는 것을 온 몸으로 스펀지처럼 들어오지는 않았어요. 선악과를 훼손하지를 않았기 때문에.



훼손하고 난 뒤에는 죽음이 저기 있는 것이 아니고, 죽음이 수십 년 후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이미 죽음의 징표, 죽음의 증상들이 내 속에서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아까 윤 집사님이 이야기하는데 내 나이 또래의 친구들이 안 아픈 데가 없다는 겁니다. 아프다는 겁니다. 왜 아파요? 왜 아프지요? 기억나지 않는다? 왜 기억나지 않습니까? 3+5는 8, 잘 아네. 봄이 지나면 여름이 되고,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되고. 똑똑하네. 자동차 바퀴가 네 개고 오토바이는 네 개고. 진리답네. 그런데 왜 죽지? 몰라요. 그렇게 똑똑한데, 그렇게 똑똑한데 왜 기억이 안 나는지, 왜 자꾸 늙어 가는지? 몰라요.



늙어가는 것을 모른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거짓되다는 사실에 대해서 여전히 ‘무슨 소리지?’ 하고 오히려 반발이 강렬해집니다. 인간이 늙어 죽어가고 있는 것과 인간이 죄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새로운 구조가 등장할 때 아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는 모든 말씀은 모든 인간을 죄인으로 몰아세우는데 필요한 말씀을 줬어요. “간음하지 않더라도 생각으로 간음했으면 이미 간음죄다.” 이것은 네가 지킬 수 있는 범위 밖의 이야기에요. 인간은 갇혀 있는데 그 갇혀 있는 안에서는 어떤 짓을 해도 죄 아닌 것이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죄 아닌 것과 네가 늙어죽어 가는 것과 관련성이 있다는 겁니다.



누구 이야기입니까? 예수님 입에서 그 이야기가 나왔어요. 그 예수를 사람들이 죽여 버린 겁니다. 마치 선악과를 훼손하듯이.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달라진 변화가 뭐냐 하면, ‘그래. 이와 이렇게 된 것 우리 힘대로 살아야지.’ 자기에 대한 자립심이 생겨났습니다. 선악과가 훼손되기 전까지는 ‘죽으리라.’ 하는 그 말씀의 지배를 받았는데 선악과가 깨지고 난 뒤에는 ‘사태가 이렇게 된 마당에 내가 알아서 살아야지.’가 시작된 거예요. ‘열심히 살아서 내가 열심히 노동한 대가를 신에게 바치면 신과 끊어진 관계를 이어지게 해주시고 회복시켜 주실 거야.’라는 생각을 갖게 된 겁니다.



그런데 이사야 40장에서, 그것을 풀의 꽃 같다고 이야기해요. 풀의 꽃의 특징이 뭐냐? 꽃이 있었는데 얼마 가 보니 꽃이 없어졌어요. 그것을 두고 전도서에서 꿈같다고 해요. 꿈은 꿈의 일부에요. 꿈은 꿈이라고 말을 못합니다. 전체가 꿈인데 어느 한 부분을 떼어서 꿈이라고 할 수 있는 어떤 지점이 없어요. 꿈이 뭐냐 하면, 내가 만든 세상에서 내가 절대자가 되는 겁니다. 이게 선악과가 훼손되고 난 뒤에 그 상황 속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의 전부입니다. 줄이면 나의 세계, 꿈은 나의 세계에요.



그 꿈을 가지고 정신분석학에서 소망충족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꿈은 소망충족이다. 뭔가 밤에 꾸는 꿈은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이 있는데 그것을 꿈속에서나마 충족하기 위해서 그렇게 애를 쓰는 거예요. 그런데 꿈은 밤에만 일어난다는 거거든요. 그 말은 뭐냐? 낮에도 계속 꿈을 꾸고 있다는 뜻이에요. 낮에도 꿈을 꾸고 있는데 그게 꿈인지 모르는 이유는 눈에 보이는 할 일이 많아서 그런데 밤에 잠을 잘 때 할 일은 없고 의식은 있으니까 낮에 일어난 모든 소망이 꿈으로 등장하는 겁니다. 간단하지요.



이 말은 뭐냐? 낮에 어떻게 설쳐도 꿈속에서 설치는 겁니다. 마치 금붕어가 어항 물속에서 헤엄치듯이, 아무리 헤엄쳐봐야 물밖에 못나가듯이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봐야 꿈에서 못 벗어납니다. 북한의 김정은이 미사일 쏴 올리는 그것도 꿈이에요. 꿈이 꿈을 양산하고 꿈이 꿈을 낳는 거예요. 이게 인류의 역사입니다. 부처가 이야기한 것도 꿈이고 공자가 이야기한 것도 꿈이에요. 유대인들이 유대교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것도 꿈이었습니다. 꿈에서 깨려면 구멍이 생겨야 돼요. 그 구멍이 부활이에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지 않겠다는 것은 그냥 꿈속에 있는 자폐증 환자에요. 저는 이것을 정신병자라고 하는데 모든 인간은 정신병자입니다. 정도가 다를 뿐이지 정신병자에요. 입만 열면 자기 꿈이 나와요. 자기 소망충족이 나옵니다. “는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되어서 뭘 원하는데? “나만의 세계입니다.” 나만의 세계, 아무에게도 갑을 허락하지 않는 나만의 세계, 나만 갑이 되고 나 빼놓고는 모두 을이 되는 그런 세계.



누가 나보고 “너 그러면 죽으리라.” 하고 잔소리하고 지적 질하지 않는 세계, 나만의 자립하는 세계. 사람들이 교회 안 나오는 그것도 자기만의 세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선악과가 훼손되고 난 뒤의 인간상은 나만의 세계를 꿈꾸는 거예요. 어느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는 세계. 그런 세계 속에서 자기가 늙어가니까 슬슬 불안해 지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하는가? 신을 믿기로 작심합니다. 하나님 믿기로 작심하지요. 그래서 하나님을 믿고 그 하나님이 보냈다는 독생자 예수를 믿음으로 이 꿈꾸는 나를 천국에 가도록 만들겠다는 거예요.



이것도 꿈이거든요. 이러한 꿈이 어디서 삭제가 되고 제거가 되느냐 하면,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내 꿈은 날라 가버립니다. 내가 하나님 믿고, 예수 믿고 구원받겠다는 이 헛된 꿈은, 되도 않는 이 망발은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산산조각 나버려요. 이 종교, 기독교가 다 헛짓이라는 사실을 예수님의 부활 앞에서 다 들통나버리고 깨져버립니다. 그 이유가 어디 있는가 하면, 예수님의 부활은 십자가지신 당사자의 부활이에요.



예수님의 부활 앞에 십자가 있다는 말은, 모든 인간의 행동의 의미를 십자가로 응집을 해버립니다. 응집을 해버리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음’이 돼버려요. 죄인밖에 없어요. 모든 인간은 자기가 만든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있다는 그 말입니다. 정신병자라는 그 말이에요. 하나님을 믿든 여호와를 믿든 그 여호와를 믿는 자들이 예수님을 죽였잖아요. 하나님을 믿을 때 왜 믿었을까요?



나만의 세계에 하나님이 필요해서 믿은 거잖아요. 그게 종교잖아요, 종교. 내가 못하는 것을 절대자에게 의존해서 마저 채우는 그 소망충족, 내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을 믿은 것인데 그 모든 것들을 십자가가 다 거두어가서 그걸 죄라고 규정한 겁니다. 그 예수님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삼일 만에 부활시킴으로 말미암아 인간들이 생각지도 못한 의가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것은 무엇을 전제로 하는가 하면, 우리는 뭘 해도, 예수를 믿든 뭘 해도, “죄인이었을 뿐입니다.”라는 것을 전제로 해서 의가 나타나기 때문에 내가 예수 믿고 난 뒤에 의를 행하는 것이 아니고 그 의가 예수 믿고 난 나에 대한 주도권을 쥐고 있어요.



의 자체의 정당함을 보이기 위해서 주께서는 우리 죄인을 활용해주시는 겁니다. 의가 드러나야 되지 예수님의 의인된 내가 드러나는 것이 진짜 의가 아니에요. 그것은 여전히 죄 가운데 있는 거예요. 불신 가운데 있는 거예요. 자기를 절대자로 하는 자기 꿈속에서 자기 꿈을 꾸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의가 주도권을 갖고 있으면 ‘이래서 주님만이 의인이야.’를 드러내기 위해서 성령 받은 성도는 봉사하게 되어 있고 활용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 이래서 주님만이 의인이고 그 의로 말미암아 우리가 사는구나. 내가 의를 행해서 사는 것이 아니고 주님 주신 의로 사는구나.’라는 것, 그게 바로 예수님안의 성령의 세계, 천국에서 사는 삶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쪽 세계가 아니고 인간들의 세계가 뭐냐 하면, 자신의 꿈속에서 못 빠져 나오니까 꿈속에서 꿈을 꾸는 거예요. ‘내가 죽으면 천국 가리라.’ 개꿈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누가요? 누가 넣어주는데요? ‘천국 가는 이유는 내가 예수를 믿기 때문이다.’ 예수 믿은 그것도 헛짓 아니에요? 그걸 누가 믿는데요? 내가 믿었잖아요. 그러니까 그게 헛짓이 되는 거예요. 제 말을 지금 이해를 하고 있는지 어쩐지, 진도를 계속 나가야 되는지 말아야 되는지 걱정이 돼요. 쉽게 하겠습니다. ‘나 저거 갖고 싶다.’라고 할 때 ‘나 저거 갖고 싶다.’가 아니에요. ‘나는 저것을 갖은 내가 되고 싶다.’가 본심입니다.



어떤 남자가 아가씨 보고 “내가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이 말에 여자들이 속아 넘어가면 안돼요. 나는 당신마저 점령한 그런 멋진 사나이가 나의 소망이고 너는 나의 소망을 달성하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에요. 이제는 말한다. 예수를 믿어요? 예수를 소유해서 천국 가는 내가 그립고 내가 소망이 되는 것이지 주님이 좋은 것이 아니에요. 여전히 내가 좋은 거예요. 어디서 사기를 쳐요? 아까 혜민 스님이 강연회 한다는 것 가지고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중이 머리를 왜 깎는가?



원불교는 머리를 안 깎거든요. 원불교 중들은 결혼도 해요. 보통 중들은 머리 깎고 결혼도 안하는데 중이 머리를 왜 깎는가? 자기 욕정을 다스리기 위해서 머리를 깎는다? 두 가지잖아요. 하나는 내 욕심을 다스리기 위해서 머리를 깎는다. 그리고 이것이 불교의 전통이기 때문에 깎는다, 그렇게 되거든요. 그런데 불교교리에 모든 것을 버리라고 하거든요. 전통을 위해서 머리를 깎는다면 전통을 못 버린 것이 되고, 내 욕정을 다스리기 위해서 머리를 깎는다고 한다면 자기 욕정을 아직도 못이긴 것이 돼요. 이겼으면 머리를 길러야지.



이게 뭐냐? 바로 권력의 문제거든요. 내가 머리를 깎음으로서 남들이 나를 도 닦는 스님으로, 괜찮은 스님, 우리의 생각을 초월한, 우리보다 생각이 월등하고 윗선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 사람이 나에게 돈을 갖다 줘요. 결국 돈 먹고 권력을 얻기 위해서 그 짓을 하고 있는 겁니다. 평범한데서 튀겠다는 말은 자기한테 힘이 되고, 그 힘 속에서 자립할 수 있기 때문이고, 자립하게 되면 소망충족이 되고, 그 소망충족으로 만족한다는 것은 그 사람은 여전히 꿈속을 헤매고 있는 거예요. 나는 나로 인해서 살겠다는 겁니다.



천국은 의인만 간다니까 그 의가 탐이 나는 겁니다. 어떻게 의를 이룰 수가 있지? 예수 믿음으로 의롭다고 하니까 그 의인되려고 열심히 예수 믿는 거예요. 예수님이 좋아서가 아니라 예수 믿고 의인된 나, 그 미래의 내 모습을 앞당겨서 갖고 싶은 겁니다. 그런 내가 되고 싶은 거예요. 다들 그렇게 살아가니까 다들 나름대로의 꿈이 있잖아요. 서로가 아무리 쳐다봐도 거짓이라는 것이 티가 나지 않습니다. “3+5는 8, 아 동지여.” 그렇게 되는 거예요. “이웃을 사랑해야 되지요.” “사랑해야 되지요.” “어! 생각이 똑같네.” 그렇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 믿고 예수 믿자.” “믿자.” “어! 예수 안에서 형제네.”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게 전부 꿈속에서 헤매고 있는지도 모르고. 서로 꿈속에서 헤매는 거예요. 같은 인간들끼리 확인할 수밖에 없어서 인간들끼리 확인하는 거예요. 그 인간들끼리 확인하는 것을 가지고 기존의 교회에서 뭐라고 하는가 하면, 개혁주의전통이라고 하는 겁니다. 개혁주의전통, 인간들의 진리는 인간들에게 물어보라는 거예요. 어릴 때부터 부모에게 양육을 받은 자녀들, 다들 그렇지요. 어떤 위급한 상태, 또는 자기가 큰 실수를 했을 때나 구치소에 가게 되었을 경우에 속으로나 전화로 하는 말이, “엄마? 나 어떻게 하면 좋겠어?” 해요.



“엄마! 간섭하지 마. 난 친구만 있으면 돼.”라고 자신만만했던 그 장정들이 논산훈련소에 가서 설움 받고, 자고 싶을 때 자지 못하고, 먹고 싶을 때 먹지 못하고, 전화 하고 싶어도 못하고, 다 끊기고, 교도소인지 군대인지 분간도 안 되는 곳에 가서 있을 때 “엄마가~ 보고 싶어~!” 왜 그걸 엄마한테 물어봐요? 엄마가 뭘 안다고? 엄마는 군에 간 자식 때문에 가슴 아파 한다고? 천만에요. ‘속 시원하다. 눈에 안보니 속이 다 시원해’ 그러고 있는지도 모르고. ‘밥 공짜로 다 먹여주니 얼마나 내가 편한지.’



그걸 왜 엄마한테 물어봅니까? “그러면 목사님, 누구한테 물어봅니까?” 물어볼 사람이 이 세상에 없어요. 그래서 오늘 본문 7절에 보면,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보이셨다는 거예요. 누구 붙잡고 물어볼 사람이 없어요. 붙잡고 물어봐야 소용없습니다. 주님 쪽에서 보여주시는 거예요. 보여주는데 그냥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쪽 세계, 인간세계와 부활의 세계의 유일한 다리는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부활이 나타나는 현상은 부활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에요. 부활이라는 그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가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성령도 마찬가지고 십자가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봤다. 코는 이렇게 생겼고 얼굴은 이렇게 생겼다.” 이게 아니라 정말 부활이 나타나게 되면 “너 죄인이야.”라는 죄와 의의 문제를 가지고 우리에게 등장합니다. 그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사도라고 이야기합니다.



8절에 봅시다.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9절에 보면,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사도라는 것은 본인의 사견을 갖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부활의 능력에 의해서 입이 터져서 입에서 부활의 나라의 소식이 계속 터져 나오는 거예요. 그 터져 나오는 내용을 들어보니까 예수님의 희생에 대해서 언급하는 겁니다. 부활의 세계, 천국은 희생의 의미를 아는 사람의 단체입니다. 희생의 나라에요. 희생이 되려면 우리 스스로 희생을 할 수 없다는 내용이 있어야 되는데 그게 뭐냐? 죄에 갇혀 있기 때문에 죄에 갇혀 있는 사람이 자기 죄를 위해서 희생한다고 해서 자기 죄가 감해지거나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죄를 감하고 죄를 감해서 복 받을 생각은 오늘부터 중지하세요. 사기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구원하는 시도에 불과합니다. 이것, 가짜입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십자가의 가치를 훼손하는 마귀 짓만 될 뿐이에요. 부활의 세계가 나타날 때……, 이런 논리는 좀 어려운데요. 자, 천천히 해보겠습니다. 여러분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돌아서면 다 잊어버린다고 하니까. 예수님께서 부활의 세계에서 보여줘야 나타난다고 되어 있어요. 그런데 우리 생각은 뭐냐 하면, 내가 보고 싶을 때 언제든지 만날 수 있도록 내가 속한 이 세계에 함께 있었으면 좋겠다는 그런 생각을 갖고 있거든요.



그런데 분명히 주님은 우리와 함께 있어요. 분명히 함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 25절에 보면,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하리라.” 이미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우리 집에 있는 식구는 보고 싶을 때 언제든지 볼 수 있는데 왜 하나님은 함께 있으면서도 안 만나주고 안 보이는가, 그 말이거든요. 그것은 선악과가 훼손되고 난 뒤에 내 선에서 내 결정과 판단에 의해서 나만의 세계, 내 꿈을 이루려고 합니다. 그렇게 때문에 내가 실시하는 것, 이것을 원인이라고 하고, 실시한 대로 딱딱 내가 기대한 결과가 나오기를 바라는 성질을 그대로 갖고 있어요.



‘보고 싶다 – 원인.’ ‘아, 여기 있네. - 결과.’ 그렇게 되면 주도권은 누가 쥐고 있는가? 인생의 주도권은 내가 여전히 유지하는 셈이 되어버립니다. 그런데 보고 싶다고 해도 안보여줄 때 주도권은 저쪽에 가 있어요. 주님한테 가 있습니다. “보고 싶다~” 백날 노래 불러 봐도 쭈르르, 오는 것이 아니거든요. 주님께서는 주도권을 바꾸어 놓는 겁니다. 함께 계시는데 어떻게 계시는가? 주도권이 바뀐 자만 느낄 수 있도록 그런 식으로 주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거예요. 예를 들면, 평소에 우리가 먹고, 마시고, 자고, 노래하고, 춤추고, 운동하고, 길을 걷고, 등산하고, 이 모든 것, 그리고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의 모든 의미, 이 의미에 대해서 주도권이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가 되어야 됩니다.



그런데 ‘나는 잠들고 싶은데 왜 잠이 안 올까?’ 성경은 뭐라고 되어 있는가 하면, “잠들게 해야 잠이 온다.” 입니다. 이것은 주도권 싸움이에요. 왜 주님은 하찮은 우리를 위해서 주도권 싸움을 벌이는가? 우리가 하찮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하찮은가 하면, 우리의 주도권을 계속 강화시키는 우리의 배후의 악마가 있어요. 우리는 주님만 보고 싶어 했지 마귀가 보고 싶다는 생각은 별로 잘 안했잖아요. 사실은 주님만 함께 있는 것이 아니고 마귀도 함께 있는데 마귀가 자기 정체를 감추고 우리로 하여금 “주도권은 너에게 있어.”라고 자꾸 그렇게 부추기는 거예요.



우리에게 선악과가 훼손되었다는 사실을, 선악과가 훼손되고 난 뒤에, 마귀가 마귀 세상인 것을 인간에게 감추는 겁니다. 쉽게 하려고 했는데 점점 어렵게 되어서 참 골치 아픕니다. 쉽게 하겠습니다. 에서와 야곱이라는 두 형제가 있었어요. 에서는 그냥 저주받도록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에서의 일생을 아무리 봐도 저주받은 짓을 한 적이 없어요. 팥죽이 먹고 싶어서 장난으로 “야, 네가 장남해라. 대신 나에게 팥죽이나 줘.” 했는데 농담도 못합니까? 배고픈데 뭐든지 할 수 있거든요. “야자타임 하자. 팥죽만 준다면.” 그렇게 할 수 있거든요.



그런데 야곱은 죽음을 경험했어요. 하나님에 의해서 죽음을 경험했어요. 곧 자신의 죽음,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 됨을 경험한 겁니다. 차이가 딱 그거밖에 없어요. 진짜 내가 죽어야 될 거짓된 존재라는 사실을 진짜 하나님과 만나서 제대로 알게 된 사람이 야곱입니다. 그런데 에서는 허허, 사람 참 좋아요. 아주 겸손하고, 성격 푸근하고, 모난데 없고, 인간상 참 멋집니다. 그런데 에서는 지옥 갑니다. 지옥 가면 인간성 좋은 사람들 다 모여 있어요. 성철스님, 김수환 추기경, 한경직목사, 거기 다 있어요. 한경직 목사 지옥 갔다고 하면 기겁할 사람 많을 거예요.



사람 좋다는 사람은 다 가 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알 길이 없는데 어떻게 합니까? 죄인인 것을 알고 반성하면 반성할수록 점점 의로워지는데. 여전히 주도권은 내가 의롭다는 겁니다, 내가. 주도권은 내가 쥐고 있어요. 내가 의로워서 내가 구원받는다. 도대체 이 굴레를 벗어날 수가 없고 이 마당놀이를 중지할 수가 없는데 어떻게 합니까? 이 마당놀이, 내가 써놓고도 참 적절하다 싶은데, 이 마당놀이, 내가 멋지다는 그 놀이, 내가 평생 즐기는 그 놀이에서 손을 놓을 수가 없는데 어떻게 합니까? 그 재미로 사는데, 그게 꿈인데요. 그게 꿈이라 할지라도 그 꿈이 좋은데 어떻게 합니까?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러면 목사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야 되는데 사도바울은 만나주고 왜 나는 안 만나 줍니까?” 이렇게 불평을 하는데 주도권이 바뀌면 됩니다, 주도권이. 먹고 마시는 것부터 해서 아무리 해도 내가 죄인인 것을 몰라요. 그러나 그 십자가의 의미가 날라 와요. 그러면 우리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십자가 앞에서 죄인 됩니다. 1544 어쩌고 하는 그 보험광고처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죄인입니다.



고린도전서 11장 32절에 보면,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세상과 함께’입니다. 우리는 남이라는 권력에 한 덩어리가 되어 있어요. 아무리 다른 인간 만나고 도사를 만나도 너나 나나 다 같아요. 다 꿈꾸고 있어요. 너는 네 꿈을 꾸고 나는 내 꿈을 꾸고, 꿈과 꿈의 악수를 하는 것밖에 안돼요. 그게 뭐냐? 이미 정죄함을 받은 현상이라는 겁니다. 이미 저주받도록 확정된 현상이라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든 인간이 한 목소리로 예수님을 살해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죽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을 죽게 한 그 십자가를 부활의 주님께서 앞장세워서 우리에게 나타날 때 특별히 나쁜 짓을 해서 죄가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죄의 권력 속에 태어났다는 사실을 가벼운 마음으로 받아들이시면 되는 겁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그 가벼운 마음에 줄을 그어놓아야 돼요. 가벼운 마음으로. 짓지도 않았지만 죄인이에요. 그래서 늙어가고 있고, 그래서 ‘3+5=8’이지만 그것이 거짓이에요. 자동차바퀴가 네 개라고 정답을 말해도 그것은 거짓이 되는 겁니다. 왜? 어떤 진실로 나에게 영생주지 못하기 때문에. 나를 의롭게 할 것이 안돼요.



행복한 나라, 좋은 나라, 아름다운 나라, 하늘 밑의 천국 캘거리, 백날 가 봐도 내가 거기 가면 죄인 하나 더 첨가 되는 거예요. 그 좋다는 캘거리에 누가 갔느냐 하면, 두 개그맨이 갔어요. 거기 가서 까불어놓으니 캘거리는 두 개그맨이 까부는 동네가 되었어요. 그 점은 우리도 마찬가지잖아요. 어느 지역에 내가 가게 되면 내가 들어간 새로운 의미로 부여받으면서 그 세게는 내 중심으로 재편집됩니다. 내 중심으로 재편집되는 것, 다른 말로 하면 내 소망충족을 위해서 재편집되는 그것을 가지고 한 글자로 ‘꿈’이라고 합니다. 오늘 설교제목이 ‘부활의 가시성’인데 제목을 바꾸고 싶어요. ‘꿈’



꿈속에서 하여튼 무슨 짓거리든 다 합니다. 제가 엊그제 광주강의에서 이야기했습니다. 백일쯤 된 아이가 자리에 누워서 뒤집지도 못해요. 그저 손발을 파닥거리면서 울다가 웃다가, 그것밖에 못해요. 그런데 그것 한다고 해서 지진이 안 일어납니까? 우리가 내 꿈꾼다고 세상 달라질까요? 아니, 아니, 그것보다 중요한 것, 내가 의인이 될까요? 어림도 없는 소리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의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쓰레기에요. 쓰레기인 것을 왜 가볍게 못 받아들입니까? 십자가로 말미암아서만 이 세상과 보이지 않는 세상이 연결되기 때문에 십자가를 통해서만 부활의, 이미 죄를 이긴 의의 능력이 십자가를 통해서만 쏟아집니다.



그런데 기존교회에서는 그걸 말하지 않고, 십자가는 제켜버리고 부활을 믿음으로 부활의 능력이 온다고 착각을 하고 있어요. 그렇게 되어버리면 나의 꿈은 여전히 안 깨지고 살아 있어요. “천국에 가고 싶었는데 나, 간다.” 이렇게 돼 버려요. 천국에 가고 싶다는 말 자체가 죄입니다. 그런 구원에 대한 욕구라는 것 자체가 마귀가 뒤에서 부추긴 거예요. 죄인이 무슨 구원을 받아요? 율법으로 구원 못 받는데 십자가로 인해서 구원받는다고? 어떤 사람의 글을 제가 십자가 마을에 올려놨잖아요. 제목이 뭐냐? “구원론중심의 간증의 완판(결정판)” 그 사람이 처음부터 하는 이야기가, “나는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나는 지옥 가서는 안 된다.” 네가 뭔데 지옥 가서는 안 되는데요? 처음부터가 거짓이에요.



그 말은, “나는 지옥 가기 싫어.” 그 말은 지옥 없애라는 말이 아니고 “지옥 갈 사람은 나 말고 다른 사람 보내고 나는 지옥 안가겠습니다.” 그런 꿈을 나타낸 겁니다. 반칙입니다. 그게 마귀의 수작입니다. 끝까지 그 노선이, 그 사고방식이 변하지 않았어요. 끝까지 갑니다. 십자기 믿어도 마찬가지에요. 안 변했어요. 끝까지 가요. 다시 분명히 말씀 드립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성령 주신 것은 우리보고 구원받으라고 주신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의가 어떤 양상으로 우리에게 덮였는지를,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에게 성령 주셨지, 내가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고 의가 무엇인가, 의 자체,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가, 그것이지 내가 의를 소유했다, 소지했다, 그것은 주님을 이용하는 것밖에 안됩니다.



그런 가짜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끝으로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의의 능력이 오게 되면 우리의 꿈은 어떻게 되는가? 우리의 꿈은 소망충족이라고 했지요? 충족되기를 원하는 소망, 같은 이야기입니다. 충족되기를 원해서 날마다 소망하는 그것을 한 글자로 꿈이라고 하는 거예요. 낮에 설치는 것은 밤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낮에도 설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그 꿈, 소망은 어떻게 되는가? 고린도후서 4장 14절에 보면,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니.” 그리고 16절에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이것은 내가 내 꿈, 소망중심으로 이 세상을 재편하고 조성한 거짓 현실이 날마다 무너져 내리는 사태가 일어난다면 그 사람은 천국에 이미 속한 사람입니다. 내 뜻대로 안 되는 사람, 잠자고 싶어 하는데 잠이 안 오게 하실 때, “쉬고 싶어요.” 했는데 또 일하게 할 때, “돈 좀 그만 벌고 싶어요.” 하는데 또 돈 벌게 해주실 때, “난 이제 늙어 죽겠어요.” 했는데도 계속 살게 하실 때, 모든 매사가 내 꿈을 박살내면서, 그 박살내는 망치로 등장할 때, 내가 옛날의 나의 절대성을 담을 모든 소박한 단지를 탁, 깨부수어서 내 몸이 이 땅 어디에도 비빌 언덕이 없고 마음을 누일 자리를 일체 다 치워버릴 때,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 4:18)



고린도후서 4장 18절은 이 이야기입니다. “떠나자, 손잡고. 내가 갔던 길 네가 가고 있어. 내가 서럽고 외로웠다. 너도 서러워야 되고 외로워야 해. 거지 나사로를 봐라.” 돈 없지요. 가난했지요. 병들었지요. 개들이 핥을 정도니 친구도 없지요. 외롭지요. 거지 나사로는 아마 신이 났을 겁니다. 신이 났을 거예요. 안녕! 바이바이~! 하는 즐거움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부활 앞에서 모든 것이 헛짓이고, 농담이고, 잡담인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그 부활이 십자가로만 우리에게 복음으로 전파되어서 우리가 나기 전부터 이미 죄인으로 태어나라고 작정된 존재인 것을 이제는 가볍게, 편하게 나의 그 자체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