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130308b-히2장1절(낙하산 구원) - 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2절에 보면,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하지 아니함이 공변된 보응을 받았거든”이리 되어 있거든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올 때는, “어이, 니 조직 잘 크나?” “부흥되나?” “잘 먹고 잘사나?” 이걸 하는 게 아니고 우리가 계속 우리 죄를 가리는 쪽으로 죄를 지어놓고 그 더하기 그 죄마저 죄 안 진척 하는 모든 작용을 우리가 분주하게 벌리거든요. 그렇게 하다 보면 뭐냐 하면, 주님의 말씀이나 복음보다도 내가 벌인 사업체나 내가 지금 신경 쓰고 있는데다가 집중하게 돼요. 이사를 한다든지, 딸애 곧 결혼식을 앞에 두고 있을 때는 말씀이 전혀 생각이 안 납니다. 그리고 주례를 할 때 이 주례는 내가 꾸민 이 결혼식을 빛내고 “아이고, 결혼식 참 좋습니다.” 그거 맞는 주례를 원하지 누구같이 주례를 예수님 복음이야기해서 갑자기 사경 만들고 이런 것들과 겁이 나는 겁니다. 사람이 겁나는 것은 현재 내가 내 죄를 숨기는 작업에 차질이 일어나면 ‘하나님 그러면 안 되기‘ 이런 식으로 하다보니까 지금 천사들의 분주함의 활동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거예요.
그래 놓고 우리는 “그래도 바쁜 가운데 열심히 믿으려고 해요.” 이렇게 하거든요. 바쁜 가운데, 그 바쁨이 우리가 무엇을 위한 바쁨이며, 누구를 위한 바쁨이며, 누구 좋아라고 일을 벌이고 있느냐, 누구 좋아라고. 제가 십자가마을에 글 올린 거 보셨지요? 베네수엘라 대통령 차베스가 마지막 한 말이 뭐냐 하면, 제발 살려달라고 하지요. 그 글을 쓰면서 그 사람이 살려달라는 말은 평소에 자기가 살아왔잖아요. 살아온 것과 마지막 끝의 죽음과 자기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본 거예요. 계속 살아왔으면 계속 살아온 그것으로 살아와야 되는데 죽음이 왔으니까 그만 죽음아 비켜라, 계속 사는 식으로 살겠다. 이리 나오는 겁니다.
그럼 그동안 죽음이란 것을 한 곁에 제켜놓고 도대체 무슨 일을 벌려온 겁니까? 차베스가 한 일이 뭐예요? 계속해서 죽음을 자기는 나라를 걱정하고 국민을 위해서 행복한 나라로 만들겠다고 하지만, 주님이 보시기에는 주님의 것인 죽음을 계속 지우는 짓을 한 거예요. 계속 죽음을 치운 거예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인간을 만든 것은 딴 목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고 죄를 생산하는 기계로 만들기 위해서 인간을 만들었거든요.
아브라함을 만드신 이유는 아브라함을 만들어서 아브라함의 경건치 않음과 일 하지 않음과 죄를 끄집어내어서 아브라함과, 요한복음8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누굴 기다리는가 하면 예수님을 기다렸거든요. 예수님과 자기 자신을 비교해서 어떻게 구원될 수 없는 내가 주님이 무슨 일을 하셨기에 내가 구원되느냐와 연결되는 그걸 믿음이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다 이 말이에요.
아브라함은 자기 일을 한 것이 아니고 자기 일이 뭐냐 하면,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관련된 일을 한 거예요. 평소에 ‘양 쳐서 시장에 팔아야지.’ 가 아니라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하면서 양을 쳤고 염소를 친 거예요. 모든 하는 일이. 그리고 아들 바치는 것도 이 아들을 바치는 일이 분명히 그리스도가 나타날 일과 관련 있다고 해서 아들을 바친 겁니다. 그 관계가 믿음이라는 거예요. 그걸 신약에서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주의 영광을 위해 하라,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 작업에 대해서 여기 ‘공변’이란 말이 나오는데, 상당히 안 쓰는 말인데 ‘이미 판정 난 정의로움‘이에요. 이미 하늘나라에서 정의는 이것이다. 다른 정의는 없다. 고로 공히 이게 의야, 판정 난 것을 공변이라 합니다.
그러면 판정 된 공변, 이것은 1절에 보면 뭐냐 하면, “모든 들은 것.” 성도들이 이미 들었잖아요. 하나님은 이렇고, 복음은 이렇고, 십자가는 이렇고, 다 들었잖아요. 그게 뭐냐 하면, 공변 이에요. 이미 정의로움으로 판정난 거예요. 이것이 예수님 중심으로 천사와 예수님 중심으로 일을 이루었잖아요. 그러면 그 나머지는 죄지 뭐예요. 따라서 천사가 하는 일은 주님이 일으킨 일을 우리에게 덮쳐버려서 우리로 하여금 공변된 정의 안에 합류시키려하는 작업을 하는 겁니다. 지금도 그 일에 굉장히 바빠요. 주님께서는. 지금 주님께서는 얼마나 바쁘신지 우리의 세상 기도 안들을 정도로 바빠요. 주님의 자신의 일에 몰입하시기 때문에 쓸데없는 우리의 기도는 안 듣습니다. 왜? 주의 일에 지금 분주하시기 때문에.
그런데 우리가 주님 앞에 공변된 의를 알고 복음을 알고 다시 한 번 우리의 죄를 안다면, ①그 순간 우리는 우리가 갖고 있던 시간대가 무너지거든요. 시간대가 무너지면 우리가 기다렸던 어떤 우리 딸의 결혼식, 이사 가는 날, 뭔가 복권사고 이번 토요일에는 대박날거야, 라는 기다림. 모두 시간에 구성된 그것이 와르르 아이스크림 녹듯이 이게 다 녹아져 버리면 우리의 고민과 걱정과 희망과 모든 것도 다 쓸데없는 것으로 녹아져버리고 녹아져버리면 우리는 ②나의 자아도 주체도 같이 녹아져버려요. 그러면 우리는 ③주님 안에 있는 주님의 일을 하는 하나의 기계, 하나의 도구가 되는 겁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그 때 우리는 비로소 안식을 얻습니다. 히브리서4장 3절,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이리 되어 있지요. 하나님이 그냥 우리를 쉬게 하려하는 거예요. 니가 니한테 시달려도 너무 시달렸다는 거예요. 니한테. 너의 희망에 시달렸고, 너의 믿음 유지한다고 힘들었고, 믿음을 유지하려고 하니까 우리 믿음은 체험이나 경험 된 거라 했지요. 그러면 그 경험한 것을 간직할 이름으로 계속 우리의 기억을 저장해야 돼요. 저장하다 보니까 편집이 돼서 과장되게 편집돼서 오버 되지요. 분명히 고등학교 때 1:1로 싸워 놓고 17:1로 싸워 물리쳤다고 이런 이야기 나오고. 무조건 지 첫사랑 이뻤고. 와서 보게 되면 아무것도 별거 아니고. 첫 사랑을 우리 권사님에게 보여주면 “에이, 못 생겼네.” 그런데 그 추억은 계속해서 저장이 돼 있고 그게 될 때 나는 나름대로의 안식이라고 본 거예요.
그 안식과 진짜 안식을 바꿔치기 하는 그 작업이 광야라는 겁니다. 이건 아주 어렵고 무서운 말이에요. 왜냐 하면, 분명히 광야는 40년이잖아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40년을 40년으로 간주하지 않아요. 제자리 뛰는 40년으로 보는 거예요. 우리는 여기서 저기로 건너가는 40년으로 보는데 주님께서는 귀 잡고 군에서 나쁜 짓했을 때, 토끼뜀 뛰지요. 그거 하는 40년 이었어요.
애굽에 있는 피자 먹고 싶다. 자장면 먹고 싶다. 짬뽕 먹고 싶다. 하니까 맨날 주는 것이 메뉴는 항상 동일해요. 학교 급식소도 아니고 말이지요. 만나. “엄마, 내일은 뭐야?” “만나” “모레는 뭐예요?” “만나” 만나가 한결같다는 말은 시간의식을 지워버리는 겁니다. 내일 돼봐야 또 만나인데. 내일은 자장면, 그 다음은 팔보채 나오면 기다리잖아요. 피자 이리 나오면. 똑같은 음식이 나오면 그 다음부터는 시간의 살맛이 안 납니다.
제가 지금 강의하는 것은 뭐냐 하면, 살맛을 바꾸는 작업이 천사가 우리한테 도와주는 작업이에요. 그래서 천사는 고함지릅니다. “니 뜻대로 안 해줘!” 매사에 범사에 우리 뜻대로 안 해줍니다. 살맛을 다른 맛으로 바꿔주는 무슨 맛? 뭘 해도 우리는 죄밖에 안 나온다는 죄인인데도 불구하고 봄빛을 느끼다니, 이 봄빛, 이 죄인에게 허용되지 않는, 죄인은 겨울만 있어야 돼요. 영하 25도. 죄인은 그게 합당해요. 벌벌 떨고 구멍새는 데서 이래야 죄인이 합당한 거예요. 그런데 죄는 지어놓고 따뜻한 봄빛이 왠 은혜입니까? 노란 개나리는 왠 보너스입니까? 분홍빛 목단은 또? 세상에 이런 복이 어디 있어요? 만약에 수갑 차고 사형수가 끌려 갈 때, 따뜻한 오월에 낮잠 자게 만드는 그 따뜻한 빛을 보세요. 얼마나 기분 좋겠어요? 사형으로 끌려가면서 기분 좋아져요. 그 순간 몇 발자국 뒤에 5분 뒤에 사형 당한다는 시간적 개념이 사라질 때, 그리고 뭘 느낀다? 햇빛만 만끽될 때, 그 기쁨은 이루 말 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
요번에 박 근혜 지지했던 김지하가 감옥에서 쓴 수기가 있어요. 뭐냐 하면, 민주화를 외쳤고 독재를 부르짖었지만 정작 내가 뭘 몰랐는가, 그 창틀 너머로 넘어온 어떤 씨앗이 창틀 앞에서 꽃을 피울 때, 세상에 저 꽃이란 생명이 그렇게 귀한 줄 내가 무슨 짓하느라 이제서 발견했느냐 말이에요. 들풀보다 더 못한 꽃이에요. 그런데 주체가 깨지니까, 꽃보다 아름답다고? 꽃이 웃겠습니다. 인간은 꽃보다 아름답지 않아요. 꽃이 더 아름다워요. 꽃이 더 순수하다고요. 들풀이 더 순수해요. 참새가 인간보다 더 깨끗해요. 솔로몬의 입은 옷이 들풀보다 못 합니다.
주님은 말합니다. 그 나라 의를 구하라, 무슨 뜻입니까? 염려 속에 모든 게 무너져라, 모든 게 전부 다 와르르 무너져버리라, 너는 무너져야 비로소 니가 상상도 못할 생명의 세계가 보인다 이 말입니다. 안 무너지려고, 죽으면 안 돼, 죽기 싫어, 그러니까 지가 벌린 일이 자기가 주님을 가리는 소경, 장님으로 만드는 겁니다. 내가 벌린 목회 일이 내가 하는 목사일이 주님을 못 보도록 가려 온 거예요. 집사 때 보이던 주님이 권사 되고 난 뒤에 안 보이고, 장권사 때 보이던 주님이 장로 되니 교회만 보이고, 그게 전부 다 마귀 짓이고 그 마귀 짓을 허용한 것도 주님이 하신 거예요. 천사가 한 거예요.
매사에 우리는 예수님을 대용한 어떤 즐거움, 아주 나쁜 경우가 술이고, 도박이고, 마약이고 그런 거죠. 사업이고 이런 거. 나쁜 경우가 그렇습니다. 나쁜 경우가. 약간 좋아 보이는 경우가 목회고, 교회 다니고, 그것도 나쁜 거예요. 하여튼 인간은 집에서 가만히 두러 누워 낮잠 자고 있는 우리를 “일어나, 일해야지.”하고 깨울 때 비로소 또 다시 내 뜻대로 안 되는 거예요. 낮잠 자는 것도 내 맘대로 안 될 때, 비올 때 햇빛 나고, 햇빛 날 때 비와 버리는 거, 애들 오랜만에 수학여행가고 소풍가려고 하는데 비가 와서 미루다 결국 못 갈 때. 모든 것이 내 뜻대로 안 되게 하는 것. 주님의 기도의 응답입니다. 아버지 앞에 예수님의 기도가 어떻게 됐습니까?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안식할 때 어려운 것이 뭐냐 하면, “우리는 이스라엘입니다. 안식 들어갑니다.” 아니지요. 이스라엘? “나는 누구입니다.” 는 못 들어가요. “나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못 들어갑니다. 무엇 때문에 못 들어가느냐 하면, ‘나’가 앞에 박혀있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이 나를 사랑합니다. 주님이 주체가 될 때만 받습니다. 주님이 나를 사랑하면 구원받아요. 그러니까 성령께서 천사께서 뭐합니까? 주님 앞에 나를 내세우는 것을 나를 어디다 집어넣습니까? 주님의 작품으로 뒤에다가 집어넣는 이 작업을 매일 우리 삶의 현장에서 내가 하는 설거지에서 잠자리에서 매일같이 집어넣어요.
우리는 눈뜨면 매일같이 언제 벌써 내가 주님 앞에 와있어요. 어제 은혜로 꿈꿨다! 누가? 내가! 이렇게 나온다고요. 주께서 꾸게 하신거지, 내가 꿈꿨다는 거예요. 내가. 참~ 안식 들어가는 게 힘들어요. 결국. 믿음에 화합 지 아니 하면 안식에 못 들어간다고 분명히 3장 4장 나와 있지요. 그러면 그 믿음이 뭐냐 하는 것은 히브리서 11장에 나와요. 왜 4장에서 11장이냐, 그 중간이 뭐냐? 중간에서는 바로 말씀이 들어가서 말씀으로 우리를 벌거벗은 채 다 끄집어냅니다.
4장12절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살아있는 기계거든요. 파쇄기계. 파쇄기계는 왜 살아있어야 합니까? 우리로 하여금 믿음에 화합하기 위해서 그 쪽에 가기 위해서는 중간에 우리한테 무슨 작업을 해야 돼요. 부셔야 되지요.
제가 여러 번 써먹습니다마는, CF에 이런 게 있잖아요. 튀김 닭 CF에 “도대체 이 닭이 무슨 짓을 한 거야?” 그 CF 기억납니까? 차 태희가 나와서 놀래가지고 “이 닭에다가 무슨 짓을 했기에 이렇게 맛있는 거야?” 이 말을 하거든요. 천국 갔을 때, 주님이 우리한테 무슨 짓을 한 거예요? 이렇게 맛있어서 뼈까지 다 잡수시는 이런 사람을 만드는 작업은 주님의 보이지 않는 천사가 말씀을 작용할 때, 우리는 내 뜻대로 안 될 때, “천사가 또 무슨 짓 했지요?” “주님, 성령님, 무슨 짓했지요? 나한테.” 주의 나라에 안식하기 위해서 우리를 오히려 힘들게 만드는 안식을 부셔버리는 작업을 해주시지요.
우리는 그 순간 맨날 울고불고, 그 깊은 뜻을 모르고, 우리는 아침에 눈 뜨면 울 생각부터 먼저 하잖아요. 또 뭐하고 울꼬? 사람이 우는 이유는 웃었기 때문에 그래요. 웃지만 않았으면 울 일도 없는데. 먼저 웃었던 일이 있었거든요. “아이고, 이거 좋은 일이네.” 좋다고 까불다가 넘어져서 울고. 그래서 의사들이 하잖아요. 애가 우는 이유는 엄마 태반에 있을 때, 그 좋은 환경에서 나왔기 때문에 환경이 바뀌어서 그래요. 그런데 그 안에 들어앉아있어서는 엄마와 같이 죽어요. 그래서 엄마는 애를 살리기 위해서 애를 내보내야 돼요. 내보내면 엄마와 함께 있었기 때문에 엄마 대용품을 찾습니다. 그래서 나이가 25살, 30쯤 되면 엄마 닮은 여자와 결혼하고, 아버지 닮은 남자와 결혼하려고 하고. 했다는 게 아니고 하려고 하고. 천사가 와서 와장창 부셔놓고. 엉뚱한 사람과 하고 그렇지요.
우리 주변에 들어보면 참 희한합니다. 분명히 여자는 참 좋은데 막상 결혼하고 보니까 쇼핑하는 병이 들어서 월급을 다 날려버렸어요. 월 500만원인데 쇼핑에 400만원 쓰고 이건 지도 못 고쳐. 지가 고칠 것 같으면 지가 알아서 고쳤지요. 고쳐지질 않아요. 그런 이야기 들어보면 끔찍해요. 그런 이야기 들으면 콩나물 아까워하는 아내가 얼마나 감사한지. 평소에는 당연히 아끼는 줄 알았더니만, 그런 이야기 들으면 또 감사해지지요.
여기 3절에 보면, 우리는 이같이 구원이 아니고 무슨 구원이라 했습니까? 구원이 아니고 무슨 구원? 큰 구원. 우리는 이 큰 구원을 그 다음에 뭐했다? 등한히 여겼다. 뭐한다고 그 큰 구원을 등한히 여깁니까? 고마운 것은 큰 구원을 큰 구원되게 하도록 천사가 주님과 함께 부리시는 천사가 성령께서 우리에게 계속해서 작업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얼마나 감사한지요.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너희가 어찌 피하리요, 라는 말씀 요 멘트, 요 문장, “야, 야, 근호야, 니가 큰 구원을 안 좋아했지? 한 번 혼나봐라.“ 라는 요 멘트, 매일같이 달려든다는 그 고마움입니다. 니가 그런 시시한 거 말고, 큰 구원을 등한히 여겼다. 암벽 좀 미끄러줘. 큰 구원 있으면 그건 상관없습니다. 어찌 등한히 여기리요, 애들 공납금 못 내도 큰 구원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돌아서면 큰 구원을 시답지 않은 구원으로 팽개쳐 버리고 내가 생각했던 내가 마음잡았던 나의 시간 속으로, 시간이 괴물이에요. 내 시간 속으로 들어가서 내 시간 속에서 어떤 결정을 내리려 해요.
사람이 아무리 욕을 얻어먹고 해도, 강호동이 어떻고 해도, 강 호동 떠들어 치지요. 6개월만 지나면 다 잊어버립니다. 요 때만 참으면 다 잊어버려요. 과거에 부정한 국회의원도 3개월 지나면 다 잊어버려요. 뉴스 날 때, 타이밍이 좋아야 돼요. 무슨 사건해서 다루고 하다가도 북한의 핵문제 나오면 뉴스에 들어가지도 않아요. 뉴스에서 빠져버립니다. 그러면 그 다음은 신나는 거예요. 시시한 뉴스거리 없으면 교통사고 일어난 그런 거 하지만, 마침 큰 거 터져버리면 작은 거 저절로 다 묻혀버리지요. 그거 다 누가 했어요? 주님이 하신 겁니다.
여러 번 했습니다만, 하도 이 말씀이 좋아서 다시 한 번 읽어 볼게요. 요한복음 17장2절,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만민 중에서 김정은이도 포함돼 있어요. 북한의 모든 핵문제, 오바마 대통령의 모든 문제가 지금 이름도 없고 유명하지 않는 사람에게 영생주기 위해서 지금 천사가 그 만큼 악마가 김정은을 지금 일하고 있는 거예요. 모든 것은 엮여져 있어가지고 어느 것이 원인이고 어느 것이 결과인지 따로 뽑아낼 수 없어요. 원인은 따로 있습니다.
인간은 제자리 뛰기라고 했지요. 제자리 뛰면서 뭘 보느냐, 제자리 뛰는 나를 봐요. 어제도 은혜 받았다. 오늘도 은혜 받았다. 남는 것은 주님이 안 보이고 계속 은혜 받았다고 여기는 나가 보이지요. 그러면 지금 은혜 받은 것이 S1, 그 다음 은혜 받은 것이 S2, S3...S4합시다. 그러면 이거 다 합하면, 이게 나냐 이 말입니다. 점선이 있잖아요. 점선이 되게 되면 미지의 은혜 S4가 되겠지요. 이리 되면 이건(S1~S3) 다 지나가게 된 겁니다. 이리 봐가지고는 어느 게 나인지, S1이 나인지, S2가 나인지, 모르지요. 어떨 때는 과거에 했던 글을 보고 이러면 ‘아, 내가 어떻게 믿음이 좋아서 이렇게 했을까?’ 한다고요. 지금 보면 ‘이건 믿음도 아니야.’ 그리 되거든요. 그런데 또 내일 은혜 받으면 어제 것은 또 믿음이 아닌 거예요. 그러면 S1, S2, S3, S4 속에 어느 것이 내 모습이에요? 어느 게 내 믿음입니까? 모르지요. 이걸 가지고 아까 해수욕장의 부표라 했지요. 그냥 파도치면 하는 거예요. 그럼 파도는 누가 치는데? 이건 바로 위에 있어요. 위에. 이것은 보이지 않는 거예요. 이것은 위에서 밑으로 조정하는 거예요. 이걸 가지고 뭐냐, 히브리서에서는 ‘그림자’라고 하는 거예요. 이게 뭡니까? 실체가 되겠지요.
보이는 것은 뭐만 보이겠어요? 그림자만 보이지요. 실체는 안 보이지요. 만약에 보이는 실체라면 그건 뭐 돼요? 그러면 S5가 돼요. 왜냐 하면 우리는 보이는 실체를 우리가 본받았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약에 이 약통이 칼디라는 비타민제라고 봅시다. 이 약이 있다면, 비타민 먹어야지, 하면서 우리는 이 약을 먹는다는 거예요. 먹는데, “그거 말고 다른 거”하면 그러면 이 거 말고 다른 거라면, 일단 이것은 아니라고 하지요. 아니라고 할 때, 또 다른 거 쥐잖아요. 그러면 “그거 말고 다른 거야.” 하면 계속해서 하늘나라에서 하나님께서 우리가 “저, 비타민 먹었습니다.”가 제대로 먹은 게 아니기에 하시는 거예요. 오늘 강의제일 중요한 대목입니다.
“나는 이 말씀을 지켰습니다.“가 나중가면 ”그건 지킨 게 아니었구나.“를 알게 만드는 작업을 위에서 해요. 우리는 이 비타민제를 먹게 되면 우리는 비타민을 먹은 사람이 돼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건 비타민이 아니었어. 내가 지적한 비타민이 아니었어.“ 되면 우리는 비타민 안 먹은 사람이 되는 거예요. 계속해서 주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나는 뭘 했다가 안 되게 하는 일을 성사시키는 겁니다. 내가 선악과 따먹은 죄를 죄로서 해야 돼요. 선악과 따먹었기 때문에 선악과 따먹은 것은 영원히 생명나무 못 따먹는다는 것을 우리를 통해서 곱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이건 완전히 공변된 정의, 완전히 확 규정지으려 하는 거예요. 선악과 따먹은 놈은 어떤 경우라도 생명나무 못 따먹는다는 것을 분명히 하시는 겁니다. 니가 선악과 따먹은 거기다가 또 생명나무 따먹어서 구원되는 법은 없게 만드는 겁니다. 그러면 구원은 뭐냐, 구원은 생명나무를 따먹은 자에게는 절대로 생명나무를 따먹게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우면서 우리를 구원하는 방법은 아까 안전유리처럼 우리를 붙들 수밖에 없어요.
자, 제가 만약에 방송국 카메라 감독이라면, 공중에서 뛰어내리는 장면을 찍고 싶다. 같이 뛰어내리는 거 찍는다. 훈련 받은 적도 없고, 낙하산도 이용 안한다. 그 카메라는 쥐어야 된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됩니까? 간단하지요. 낙하산 전문가가 나를 어떻게 하면 돼요? 같이 묶으면 되는 거예요. 참 쉽지요. 이게 믿음이거든요. 그러니 땅으로 낙하산 뛰어내리면서 사람들 박수 칠 때, 절대로 내가 낙하산 조정했다든지 내 힘으로 낙하산 했다든지, 자기를 땅에 와서도 해야 돼요? 하지 말아야 돼요? 하지 말아야 돼요. 그런데 지가 알아서 했다는 게 뭐냐, 개혁주의고 그래서 막 살아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죽은 목사가 한다는 거 아닙니까?
모든 인간은 막 살게 되어 있다. 이 말은 뭐냐, 내가 막 안 살아서 구원 받는다는 게 아니라고 했는데 그걸 우려하는 목사는 뭐냐, 그러면 교인들이 막 살아버리면 교회가 안 된다는 그거지요. 주님의 합당한 사람이 안 된다는 그 말아닙니까? 왜냐, 그 사람 주장은 뭐냐, 성경에 하라, 하는 것이 분명히 있는데 왜 하라, 하는 것을 빼놓고 막 살아도 된다고 니 맘대로 바꾸느냐? 그게 걱정되는 거예요.
지가 주님의 말씀을 지가 걱정 다하고 있어요. 주의 말씀은 우리가 걱정한다고 될 문제고 안 될 문제가 아니에요. 주의 말씀은 우리가 관리하라고 주신 말씀이 아니고 관리자가 따로 있다고 주신 말씀이에요. 주의 말씀을 줬기 때문에 우리가 관리하겠다는 것은 죄 짓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인 겁니다. 우리가 말씀을 관리하고 있는데, 왜 자꾸 우리보고 악마가 관리하고 있다고 하느냐, 왜 자꾸 우리 애비가 마귀라고 하느냐, 당신이 해도 너무 심하다.
아~ 참, 한국교회 문제에요. 성도라 하는 것은 우리가 안 믿을 수 있는 은혜를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아까 시작 전에 집사님한테 물어봤어요. “낮잠을 주무십니까?” 하니까 이렇게 이야기 했지요. 중요한 이야기라서 적어놨어요. 체질적으로 낮잠을 못 잔다고 했지요. 그게 얼마나 믿음의 예화로서 적당한가 하면, 나는 낮잠 잔다, 안 잔다, 둘 다 내 맘대로 안 된다는 거예요. “나는 낮잠 안 잡니다.”가 아니라 잔다, 안 잔다가 체질이니까 내가 통제할 입장이 못 되는 거예요. 낮잠만이 아니고 우리 인생 전체가 그래요. 인생 전체가.
“천국 간다, 안 간다가 내 손에서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하는 것은 낙하산이 같이 묶인 분을 그렇게 증가할 수밖에 없어요. 우리가. “나는 아무리 해도 예수님을 못 믿습니다. 안 믿습니다.” “못 믿게 하기 위해서 은혜 주셨습니다.” 내 곁에 누가 묶였다? 주님이 묶였다는 것을 그렇게 고백하는 거예요. 어디서 믿는다고? 어디서 자기 자신을 믿으면서 말이죠.
사도바울이 주님 만나고 알게 된 것이 이런 것을 알게 됐기 때문에 좋아도 너~무 좋은 거예요.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맞아도 괜찮고 도적을 만나도 괜찮고, 도둑을 보내신 분도 주님이니까, 도적을 만나든, 강도를 만나든, 폭풍이 치든, 모든 게, 범사에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거예요. 모든 걸.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해 주세요.”가 아니라 못하게 하는 환경 속에서 있을 때 주께서 하신다는 게 눈에 들어온다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사도에게 보이는 것은 뭐냐 하면, 나는 뭐든지 할 수 없다는 게 들어오지요.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이 말이에요. 이 말은 곧 주님이 다 하게하고 계신다 이 말입니다. 살든 죽든, 죽든 살든, 그리고 자기가 결혼 못한 것도 주께서 그렇게 결혼 못하게 하신 거예요. 노총각의 푸념이 아닙니다. 노총각의 변명이 아닙니다. 이것은. 구차한 변명이 아니고 진짜로 주께서 하신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도 마태복음19장에 보면 사람이 날 때부터 고자로 태어날 사람이 있다. 그것은 사람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가 스스로 고자 하겠다고 또 내시 만들지 말고, 그런 짓하면 안돼요. 그런 육체적인 내시를 말하는 게 아니거든요. 그러니 중들이 머리 깎는 것이 얼마나 나쁜 짓이에요. 그냥 머리 기르는 대로 살면 되는데 머리를 홀라당 깎고 옷도 특이한 유니폼을 입고 신부처럼, 인간 자체가 그것들이 조상기도하고 앉아있는 것도 가관이라니까요. 짐승을 옹립해 놓고 거기다가 아침 먹으니 맛있겠지. 회비 많이 냈어요. 밥값 많이 치른 겁니다.
자, 3~4절 봅시다.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뭐했느니라? 증거했느니라. 따라서 철공소 차렸다고 매일 쇠만 붙드는 거기에다 몰두하는 사람은 방금 읽은 히브리서 3절, 4절 눈에 들어옵니까? 안 들어옵니까? 안 들어오지요. 안 들어오는 것을 들어오게 만드는 것은 간단해요. 쇠붙이 하다가 손 다쳐버리면 돼요. “아이고, 씨~” 그걸 가지고 또 하나님 앞에 불만을 들어내지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걸 뭐라고 했느냐 하면, ‘불평문화’라 했어요. 이 세상의 현대 문화들은 불평할 거리를 찾아내는 문화라는 거예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불평문화가 생겨버리면 뭘 받느냐 하면, 이걸 보상을 받거든요. 요 보상으로 밥 먹고 사는 시대에요. 비행기장이 있다. 소리가 시끄럽다. 불평을 하는 이유는 불편해서 불평하는 것이 아니고 뭘 노리고 한다? 보상을 위해서. 블랙 컨슈머라 하지요. 질 나쁜 소비자. 자꾸 불평을 해가지고 “바꿔 줘! 바꿔 줘! 물어! 물어!” 해가지고 계속해서 불평을 해서 뭘 기대한다? 보상을. 남의 보상 덕분으로 지가 한평생 살아보겠다는 그러한 인식이 날로 확대되는 시대에요. 이 시대는.
그걸 4자로 무슨 문화? 불평문화. 그런데 이런 불평문화가 하나님까지 계속 가는 거예요. 하나의 예를 들면, 오늘 어려운 거 많이 한다. 창세기18장에 아브라함이 기도를 해요. 천사를 만났는데, 천사의 낌새가 별로 안 좋아요. 소돔과 고모라의 불바다 만들려하는 천사다 말이지요. 중요한 것은 소돔과 고모라에 불 질러도 좋은데, 거기에 누가 있습니까? 지 조카가 있는 거예요. 조카가 있으니까 급한 거예요. 이제 아브라함이 따지지요. 의인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심판을 내리는 것은 악인을 위해서 심판하는 것이 맞지 않습니까? 벌이라 하는 것은 죄를 만나서, 죄를 겨냥해서 쏘기 위해서 벌이 있는 거다 말이지요.
악인만 있으면 몽땅 벌 내리는 것은 아무 문제없는데, 악인 속에 의인이 섞여 있을 때 지금 천사의 태도를 봐서는 이것은 몽땅 다 뽑아내야 되거든요. 의인이 악인과 함께 벌 받을 수 있느냐, 하는 그 문제를 제시하는 겁니다. 세계에서 제일 어려운 문제에요. 이거 철학자들이 이거 풀려고 2000년 걸렸습니다. 지금도 못 풀었어요. 풀 수가 없어요. 하나님은 의롭다고 생각하잖아요. 우리가 아는 하나님은.
의로운 분이 악인을 뭐 취급한다? 죄인 취급 해버리면 하나님이 스스로 의가 아닌 것으로 자멸하는 셈이 돼요. 왜냐 하면, 서로 반대 아닙니까? 죄와 의는, 의와 죄는 서로 반대거든요. 반대쪽으로는 논리가 되려면 좋은 쪽은 한꺼번에 다 모이고, 다 나눠줘야 되는데 나쁜 쪽을 좋은 쪽에 섞어버리면 순수한 게 나쁜 것도 아니고, 좋은 쪽을 나쁜 쪽에 섞어버리면 순수한 의로운 것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최후의 징벌을 한다는 말은 전부다 나쁘다는 이야기인데, 그 나쁜 쪽에 의인이 섞여 있을 경우를 아브라함 자기로서는 납득이 안 된다는 이야기죠.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기다렸던 모양이죠. 이게 납득이 돼야 돼요. 자, 그럼 이 문제를 예수님은 어떻게 해결했겠습니까? 간단했습니다.
이거였습니다. 악인 멸망 받는데 의인이 끼어드는 이유는 악을 더욱 더 그 자체적으로 희생자로서의 의와 그 나머지가 악이라는 것을 더욱더 드러내기 위해서. 하늘에서 보기에 악하잖아요. 그런데 의인을 악인 속에 심어져버렸을 때, 하늘에서 보기에 악 정도가 아니고 그 가까이 이웃에 있는 의인을 얼마나 학대하고 미워했느냐를 통해서 악을 더욱 더 궁극적으로 몰아넣는 거예요. 이왕 어려운 거 더 어려운 거 해봅니다.
아까 여기에 그림자라 했지요. 그림자 S1, S2, S3 했잖아요. 악인도 마찬가지로 S1, S2, S3인데 악의 원리는 숨어있어요. 악마는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지요. 안 보이지만 악한 자들은 있지요. 이것도 마찬가지에요. 악의 실체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여기에 뭐가 필요한가하면, 의의 실체 자가 악의 실체를 드러내기 위해서 악 속에 합류될 필요가 있어요. 그러면 악은 의의 실체되시는 분을 죽이는 악까지 저질러야 되겠지요.
이 사람들은 누구의 지시를 받아요? 악마의 지시를 받지요. 악마에 도달될 수 있는 악마를 이 현황 속에 불러일으키는 동기가 바로 의인이 희생물이 될 수밖에 없어요. 그게 요한계시록11장에서 두 증인이에요. 두 증인. 스룹 바벨과 여호수아지요. 두 증인을 파견시켜서 요새로 말하면 누구인가 하면, 성도에요. 성도로 하여금 사람들로 미움 받게 하지요. 지난 수요일날 들었다 했지요. 제목이 ‘일치된 마음’이지요. 일치된 마음에서 마지막대목에서 이렇게 말했지요. 우리 인간들끼리의 일치된 마음은 소용없다고 했지요. 하나님이 성소 되기 위해서 성령을 주신 일치된 마음은 뭐라 했습니까? 우리끼리 하는 것은 단합대회 하는 거지, 주께서 인정하는 집단이 아니지요. 주께서 어떻게 하느냐, 제자들에게 요한복음 15장에 복음으로 인하여 미움 받게 하는 거예요. 교회로 인하여 미움 받는 게 아니고 복음으로 인하여 예수님으로 인하여 미움 받게 하는 이유가 세상은 이미 교회를 미워하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을 미워하는 겁니다. 심지어 교회마저 누구를 미워하겠어요? 예수님을 미워하는 거예요. 그거는 교회에다가 예수님을 이야기해 보면 알아요.
제 집사람이 일을 나가면서 설교를 듣는데 돌아서면 예화만 남는다는 거예요. 무슨 예화가 남느냐고 하니까 우리 엄마가 빨래하고 세수하는 그게 나온다는 거예요. 그 예화가 너무 강렬해 버리니까 주제가 기억이 잘 안 난다는 거예요. 에이, 핑계. 어쩠든 간에 사람들은 주님을 할 때 설교를 들으면서 주님의 큰 구원이 그렇게 크게 다가오지를 않아요. 언제 크게 다가오느냐 하면, 우리가 복음으로 애매한 미움을 받을 때 그 때는 과연 내가 큰 구원을 크게 생각 안했다는 자책감을 들게 만들면서 다시 주님과 하나 되게 그 느낌을 보이지 않는 분이 보이게 느끼는 느낌이 오지요. 그게 믿음이에요. 믿음의 세계입니다. 주께서 그 작업을 하시는 거예요. 그 작업을 위해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미움 받을 수밖에 없는 일을 하는데, 결국 우리가 뭐냐 하면, 희생자 되는 겁니다.
아브라함 기도 자체를 봅시다. 아브라함이 기도할 때는 롯을 살려달라고 기도하지요. 50명만 있으면, 45명만 있으면, 40명, 30명, 자기 딴에는 간절한 기도고, 자기 딴에는 의미 있는 기도인데, 목적이 상당히 수상해요. ‘어쨌든 간에 조카는 살려주세요.’라는 기도한 거죠. 증거가 뭐냐, 다 심판 끝나고 난 뒤에 롯이 산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의 기도를 응답하사 살려냈다 이리했기 때문에 롯에게 찾아간 천사가 다 배후에 아브라함하고 하나님하고 이야기가 돼있기 때문에 산거예요. 천사가 “나가! 나가! 빠져나가! 너는 이제 면제됐어.” 하는 식으로 하는 것은 아까 처음에 한 것처럼, 천사가 바쁘다니까요. 매일같이 우리보고 나가래요. 뒤돌아보지 말고, 쟁기잡고 뒤돌아보지 말고 자꾸 나가래요. 우리는 이 세상이 좋은데. 아들 장가도 보내야 되고, 바쁜 일이 많은데 나가래요.
바로 아브라함이 자꾸 살려달라고 했는데, 주님입장에서는 롯을 뭐로 사용합니까? 그냥 살려주는 게 아니고 소돔과 고모라가 이렇게 심판받았다는 것을 증거 하는 증인인 동시에 그 다음 시대에 그 증거를 가졌다는 것 때문에 희생자가 되지요. 딸과 관계해서 모압과 암몬을 낳지요. 자기 속에서 또 새로운 비 복음적은 요소를 봐야 돼요. 그렇다고 롯이 지옥 간다는 그런 뜻이 아니고 주께서 철저하게 사용되는 희생자가 되는 거예요. 그런 희생은 원형이 따로 있어요.
이러한 S1, S2, S3 소돔과 고모라에서 잘 살았던 롯-S1, 천사가 찾아왔던 롯-S2, 천사가 찾아와서 아내와 같이 나왔던 롯-S3, 그런데 마누라는 뒤돌아봐서 중간에 빠져버렸다-S4, 우리는 이 땅에서 자꾸 뭔가 변화가 일어나지만, 그러나 그렇게 하게 하신 원형은 누구십니까? 십자가 지신 예수님입니다. 똘똘 우리를 뭉쳐놓고 우리를 낙하산에 태우든지, 카메라로 찍든지, 울고불고하던지 간에 이미 묶인 것은 우리 힘으로 풀 수가 없다는 이 행복, 세계 최고의 행복입니다.
사랑의 줄로 꽁꽁 묶인 것처럼 하는 노래가 있지요. 이 세상에 사랑으로 노끈으로 해서 꽁꽁 묶여 있는 것, 이건 내가 묶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풀 수가 없어요. 우리는 맨날 울고불고 하지만, 우는 자가 복이 있다, 하는 말씀이 있지요. 누가복음에. 울어라. 울 때 비로소 묶인 노끈이 그 때 보일 것입니다.
또 예를 들면, 힘세던 삼손-S1, 잘 챙겼다-S2, 밝히기는 어떻게 그렇게 밝히는지-S3, 여자 때문에 힘자랑하다 혼났다-S4, 그래서 머리 홀라당 깎이고, 힘도 빠졌다-S5, 에라 죽는 거 같이 죽자 해서 희생물 되는 것, 이스라엘을 위해서 희생될 때-S6, 그 중에서 어느 것이 삼손이냐, 진짜 삼손은 삼손 되게 했던 진짜 삼손은 예수 그리스도가 삼손이지요. “삼손아!“ 해 놓고는 예수님이 자기가 자기보고 임무를 맡기는 이야기입니다. 소리입니다. ”삼손아, 이거 하라.“ 이 말은 ”주여! 아버지여! 제가 이 일을 하겠습니다.“ 삼손이 했던 일 아버지가 했고, 모세가 했던 일 아버지가 했고, 그게 어디에 나오는가 하면, 3장 5절에 나옵니다.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그 다음에 뭡니까? 사환이죠. 사환으로 했는데 충성했는데, 그리스도는 뭡니까? 그 집 맡은 아들이죠. 집 맡은 아들이라 하는 것은 집 주인이란 뜻이에요. 아버지 있다, 라는 말이 아니고 집 주인이란 뜻이에요. 그러면 아들이 살집이거든요. 왜? 하늘나라는 아들의 나라니까. 아들 살 집에 모세가 일했으니까 그럼 모세는 누구 말들은 거예요? 바로 주의 이름 아들 말 들은 거예요. 예수님 말 듣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모세 하는 일은 모세 본인은 만날 울고불고하지요. 자기 뜻대로 안되니까 만날 반항하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고 얼마나 속이 상했으면 자기도 성질 나가지고 엔돌핀이 확 돌았는지 작대기가지고 못해먹겠다고 친 거예요. 못 해먹겠다고. 그래서 주께서 하지 마라해서 귀싸대기 그만하라고. 못해먹겠다면서 그러면 니는 약속의 땅 못보고 여기서 살다 죽어라, 해서 죽었지 않습니까? 딱하긴 뭐가 딱합니까? 또 변화산에서 예수님하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좋다고 소고기국 먹고 있는데.
주님께서는 이렇게 묵시에서 역사밖에 모르는 인물을 철저하게 이용했다니까요. 하나의 레고의 부속품처럼. 지금도 우리를 이용해요. 그런데 이 사실을 우리가 자기가 하는 일에 몰두하게 되면 이걸 까맣게 잊어버려요. 치매도 보통치매현상이 아니라. 잊어버려요.
똑같은 전화를 하루에 10번을 받아보세요. 기가 찹니다. 완전히 개그콘서트에 나오는 니가? 내가? 진짜 똑같아요. 똑같아. 돌아서면 몰라요. 돌아서면 또 전화하고. 또 전화하고. 우리가 치매환자입니다. 주께서 낙하산을 끈으로 사랑의 끈으로 꽁꽁 묶어줬으니까 한 거예요. 그래서 요한일서에서는 성령이 임하게 되면 그 사랑의 끈이 보일 것이다. 그러면 됐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너는 됐다는 거예요. 이 말을 듣는 사람은 하나님께 속한 자고, 이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이제 성경이 뚫리지요. 성령이 임하면 뚫리지요. 이건 지식이 아니고, 우리가 체험된 몽땅은 다 엉터리 체험이기에 하게한 그 체험, 그림자라 하니까 S1, S2, 맨날 체험에 울고불고한 그것을 그런 체험을 주신 분은 바로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 되도다, 하는 거예요. 이것은 믿음장에 가면 히브리서11장에 보면, 믿음이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한 것들의 증거라고 해서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지요.
그런 이야기를 제가 앞서서 이야기하는 것은 앞의 이야기가 함축돼서 그렇습니다. 하나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5절에 “하나님이 우리가 말하는 바 장차 올 세상을 천사들에게 복종하게 하심이 아니니라 그러나 누구인가가 어디에서 증언하여 이르되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여기에 사람이 등장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예수님이 천사와 함께 있는 것은 천사를 위함이 아니고 오는 천국을 천사들만 소복이 쌓아 놓고 만든 것이 아니고 그 자리에 누구를 넣어준다?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사람을 넣어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
그런데 여기에 9절에 보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한다”는 말은 예수님이 죽음을 맛본다는 말은 사실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사람은 산자가 아니고 무슨 자다? 죽은 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와서 삶을 사시면서 보여주는 거예요. “봐라, 이게 내 인생이 아니고 사실은 니 인생이야. 니 인생을 내가 낙하산에 묶기 위해서 니가 가야 될 길을 내가 가고 있는 거야.” “자, 봐라.” 봐야 뭘 압니까? 나중에 모른다고 하는데. “나는 모른다.” 성령이 오지 아니하면 베드로도 대책 없습니다.
아까 처음에 이야기했지요. 인간은 자기가 만든 형식이기 때문에 자기가 나는 괜찮은 사람인데, 여자애가 “아저씨도 갈릴리사람이죠?” “아저씨와 같이 있었지요?” 하니까 무엇이 위태 받아요? 자기가 만든 옷, 자기 수치를 가리는 옷, 그 형식, 이 정도 돼야 나라는 그것, 그래야 나는 잘난 사람이라는 그것, 그것 때문에 예수고 하나님이고 다 버리잖아요. “주님이 누군데?” “내가?” 치매현상이에요. 치매현상. “언제 은혜 받았는데?” “나는 은혜 받은 적 없어.” “수요일날 무슨 설교했는데?” 다 잊어버려요. 말씀을 다 잊어버려요. 본문이 뭐더라~
그냥 맡기세요. 낙하산은 맡기라고 준 낙하산이지, 낙하산을 지가 낙서하고 그러지 마세요. 그냥 몸짓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성령이 오게 되면 믿어집니다. ‘주님 저와 함께 있지요? 그래서 내 뜻대로 안되게 하셨지요?‘ 이렇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의 뜻인데 우리는 몰랐습니다. 우리가 깨어질 때, 내 뜻이 안 될 때, 주의 뜻이 나타남을 감사히 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