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형제와 소자(히2;12) 130510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4. 13. 18:17
2013-05-11 00:49:40 조회 : 1656         
형제와 소자 130510 이름 : 이근호 (IP:119.18.69.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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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20130510a-히2장12절(형제와 소자) - 이 근호 목사

히브리서2장 차례입니다. 2장 11절, 12절 그 내용은 예수님께서 고난 받는 것이 예수님 고난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런 내용이잖아요. 그런데 그 예수님의 죽음이 예수님의 죽음으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효과가 누구한테 미쳤다는 겁니다. 도달된다는 겁니다. 그게 누구냐 하면 11절 끝에 보면, 형제라 부르시기에 형제라 되어있습니다. 이 내용이 난해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자기가 하는 행동이 남한테는 효과가 없어요. 같은 침대에 잠을 자도 한 쪽 꿈꾼 것이 다른 쪽에 효과가 없습니다. 상상은 할 수 있을지 몰라요. 어제 밤에 당신 꿈꾼 거 오늘 이어서 연속 꿨다, 이러면 되는데 자기가 직접 꿈꾼다는 것은 이것은 없는 거지요.

방금 한 예를 다시 한 번 정리해 볼까요. 두 사람이 잠을 잤는데, 한 사람이 꿈을 그 다음날 이어서 연속극처럼 바톤이어서 꿈을 꿀 수가 없지요. 없다는 이유가 이렇습니다. A, B라는 두 세계가 있다면, A라는 인간이 만든 세계는 여기서 파생되어 나왔거든요. B라는 세계에서 인간은 자기 상상에서 계속 나온 거지요. 그래서 이것을 A에서 B로 갈 수 없는 겁니다. 이것을 철학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개별자’라고 합니다.

‘개별자’ 의미는 뭐냐 하면, 내가 한 것을 저 쪽에 전달이 안 된다는 겁니다. 내가 만약에 머리를 감았잖아요. 그러면 다른 사람이 머리 안 감아도 머리가 말끔하게 감겨져 있습니까? 안 되지요. 왜? 몸이 따로 이기 때문에 안 되잖아요. 한 쪽이 아내가 구원 받았다. 그러면 남편이 구원 받습니까? 안 되지요. 전염은 바이러스가 이동하는 겁니다. 전염병 걸렸다는 것은 걸린 것이지, 내가 전염병을 만든 것은 아니거든요.

전염병이라 하는 것은 그 주체는 바이러스에요. 이쪽에 감기 걸렸다가 이동해서 저쪽에 에취! 해서 감기 걸리잖아요. 그러니까 이 쪽 사람들은 감기 걸렸다는 결과만 갖고 저쪽에서도 감기 걸렸다는 결과만 되지요. 그러면 방금 A에 의하면 두 사람이 같은 감기에 걸리려면 양쪽 다 똑같은 효력을 발생시키는 바이러스가 있어야 되지요. A도 아니고 B도 아니고 제삼자, 제삼자가 작용을 해줘야 동일하게 되는 겁니다.

고린도전서12장에 보면, 모두 다 한 성령을 마심으로서 교회가 되지요. 그럴 때 그 성령 마신사람 자신이 원인입니까? 결과입니까? 결과지요. 내가 예수 믿어서 구원 받은 건 아니지요. 왜냐 하면 결과이기 때문에. 만약에 내가 예수 믿어서 구원받았다고 한다면 “아이고, 나는 예수 믿어서 구원 받는데, 당신은 왜 안 되지?” “그러게, 나는 믿음이 없어.” “나는 믿어지는데 왜 안 되지?” 이걸 누구보고 닦달 낼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럴 필요가 없는 거예요. 왜냐 하면, 내가 믿어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제삼자가 있고 그 분의 작용에 의해서 결과물이잖아요. 그러면 저 사람이 나 말고 저 사람이 예수 믿으려면 내가 닦달 낸다고 믿어지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나한테 찾아온 것처럼 똑같이 찾아와서 믿게 해줘야 구원받는 겁니다.

만약에 둘 다 똑같이 그렇게 예수님 찾아와서 구원받았다면 내가 당신보고 믿게 했다는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없겠습니까? 없지요. 전도란 사기다. 전도는 사기지요. 주체가 내가 전도했다는 게 사기입니다. 교회가 만들어낸 사기지요. 교인들을 영업사원으로 만들어버렸어요. 실적가지고 그리고 실적 많이 하면 하늘나라 상급을 보너스로 받는다는 식으로 사기를 치는 겁니다.

개별자 세계는 만들어낸 세계지요. B라는 세계는 B라는 세계가 만든 세계지요. 그러면 말씀의 세계는 누가 만들었는가, 제 삼의 인물 예수님께서 만들어낸 세계지요. 그 세계가 무슨 세계냐 하면, ‘말씀의 세계’입니다. 말씀의 세계는 원인자와 결과 자가 동일하게 예수님한테 해당되는 겁니다. 빛이 있으라, 할 때 결과가 빛이 생겼어요. 그런데 빛이 소급해서 “하나님, 나보고 빛이 있으라 했지요?” 라고 할 수가 없어요. 왜? 자기는 결과기 때문에. 아빠! 엄마! 왜? 어버이 날인데 나를 왜 이렇게 만들었어? 자식이 부모보고 나를 왜 이렇게 쌍꺼풀 없는 눈으로 만들었냐고 다구 칠 수가 없어요. 왜, 이미 존재하기 이전에 있었던 그 과정에 대해서 존재한 결과가 차후에 끼어들 수가 없습니다.

주께서 명령하는 명령은 어느 세계냐 하면, 제삼의 세계, 예수 그리스도가 주로부터 말미암아 주로 마감 짓는 그 세계에 속한 논리원칙입니다. 그래서 전도하라고 하게 되면 그 말씀에 의해서 부름을 수단으로 쓰여질 사람들이 채용이 돼요. 채택이 되면서 그 사람의 특징은 뭐냐 하면, 전도하라고 하면 A와 B가 양쪽 다 귀가 있으니까 듣습니다.

전도하라고 하면 제삼의 인물이 했던 명령이 A와B로 각각 들어오게 돼요. 들어오게 되면 A는 뭐가 기다리는가 하면, A라는 사람이 상상해서 만든 자기 주체가 된, 자기 세계가 있습니다. 이 세계의 주인공은 뭐냐 하면, 자기가 주인공이에요. 주인공에게 전도하라고 들어오게 되면 ‘이거 내가 할 거야.’ 라는 반응을 나타내고 B라는 세계에 들어오면 전도하라, 하면 “나도 너 못지않게 나도 할 거야.” “누가 많이 하는지 시합해보자.” 이렇게 나온다 말이지요.

그게 뭐냐 하면, 이 말씀의 원래 주인공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순간 이쪽세계에서는 오해가 발생되는 겁니다. 내가 그 말씀을 이루는 주체라고 행세해 나가려고 얼른 마중을 나가요. 양쪽 다 마중을 나오면서, 마중 안 나오는 인간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자체적으로 마중 나갈 만반의 준비가 돼있습니다. 마중을 나오면서 전도를 나름대로 한답시고 해봐요. 하면서 거기서 뭐냐, 그 사이에 전도하라는 명령을 손수 일으키시는 예수님과의 마주치면서 충돌이 일어나요.

내가 이 말씀을 지켰다고 지켰는데, 막상 해보니까 이게 나의 의가 나오고 모든 공로를 내게로 돌리고 그러면서도 자기를 부인하라, 해서 전도하면서 전도한 자체를 부인하고 애쓰는 그 부인하는 자체가 내가 대견스러워지고 ‘아, 그래 이것은 주님의 공로야, 주님의 은혜야, 성령의 역사로 한 건데 이건 내 공로가 아니야‘ 라고 말을 내뱉으면서 내 뱉는 그 이미지, 그 자태를 보며 자기를 흐뭇해하고 깔끔하게 마무리 정리가 안돼요. 자기를 부인하는 그것마저는 부인할 수 없다는 거예요. 불교에서 말하는 무한대행이죠.

끊임없이 자기를 부인하는데 부인하는 그게 부인했을까, 안 했을까, 판정하는 나를 또 설정해야 되고.  그게 바로 인간이 안고 있는 딜레마인 거예요. 이 딜레마를 보면서 주님의 진짜 전도하라는 명령 뒤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전에 화투장을 예로 들었지요. 화투에 단풍, 난초 죽 있지만, 그 앞면은 똑같은 칙칙한 벽돌색이지요. 인간이 자기 딴에는 화려하게 하는데 그 뒤에는 칙칙한 모든 것을 자기 공로로 돌리는 아담에 붙은 죄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전도하라 명령한 것은 우리가 감추고 있었던, 우리가 미쳐 빼돌렸던 내가 뒤에 안 들키고 싶어서 빼돌렸던 나의 근본적인 나만을 위한 내 자신의 존재성과 명예와 자존심을 위해서 설치는 이것을 전도하라는 명령의 말씀을 들어서 들통 내면서 ‘주여, 나는 전도하면서 내 의만 챙기고 이래가지고는 내가 도저히 주의 말씀을 지킨다는 자체가 말이 안 됩니다.’ 할 때 주님께서는 그것을 겨냥해서 십자가 피로 다가서지요.

전도하라 하는 것은 죄인을 더욱더 죄인 되게 함으로서 전도하라는 명령에 담겨있는 배후에 담겨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음의 능력을 나한테 덮치기 위한 사전의 작업이었지요. 그렇게 되면 사도바울처럼 뭐라 하느냐 하면, 실컷 일해 놓고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나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뭘 하면서? 말씀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다 순종하면서 순종하는 가운데서 지가 미처 몰랐던 바닥이 다 들추어내는 하나님의 놀라운 묘책에 걸려든 겁니다.

그래서 모든 공로는 면류관도 주 앞에 반납하고 모든 영광은 누구만 받아야 돼요? 그리스도만 받아야 됩니다. 요거 3초갑니다. 요거 3초 지나고 다시 돌아서면 그렇게 고백했던 그것이 어디로 장착됩니까? A라는 세계의 장기로 또 훈장처럼 자랑하면서 교회에서 떠벌리고 있고 목사는 또 좋다고 자랑하고 있고 강대상에서 난리하지요. 이것은 인간의 시간에 종속된 인간들은 늘 이렇습니다. 롤러코스터예요. 자기를 부인했다고 해놓고 돌아서면 기억이 있기 때문에 그 기억에 의하면 남이 부인한 것이 아니고 내가 부인했기 때문에 나는 구원받을 거라는 다시 자기 것으로 자기의 구원의 바탕으로 다시 그걸 잡아당기는 그런 또 죄악된 솜씨를 또 부려요.

또 까불락 거리다가 또 주님께서 말씀을 줘가지고 이번에는 전도하라고 하는 게 아니고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다, 라고 그 소리를 들이대면 또 망가지고 이것은 성경구절이 이것 들어갔다고 지키고 저것 들어갔다가 몇 달 전에 들어간 게 또 들어가면 성경말씀가지고 가시처럼 쑤셔버리면 도대체 우리는 말씀 앞에서 감당이 돼요? 안 돼요? 이것 지켰는데 이것 못 지키고, 저것 지켰는데 이것 못 지키고, 기도해서 응답받았다고 하는데 처자식을 미워하라했는데 이것도 안 되고 좋다고 웃으니까 우는 자여, 니가 화있도다 해가지고 울어라하고 또 우니까 운다고 회개냐고 하고 즐거워하라하고 감당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들은 얼마나 자기 정당성을 하는지 지킬만한 것은 소꿔내 뽑지요. 아줌마들 집안에서 콩나물 키워놓고 컸다 싶으면 키 큰 것만 뽑아서 콩나물국에 두부 넣어서 짖어야지 하고 뽑아내는 것처럼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 자기 정당화해서 필요한 것만 요건 내가 지키고 지켰다고 호응해서 다른 옆 사람하고 옆에 집사님하고 니가 맞을까 내가 맞을까 싸우고.

그래서 지금 A, B라는 세계에서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개별자’라 했지요. 개별자는 A바탕에서 B바탕으로 넘어갈 수가 없습니다. 자, 그러면 그건 알고 제가 문제를 던지지요. 만약에 이 B가 옆 사람이 아니고 예수님이라면, 이 A라는 사람이 자기 세계를 구축하거든요. 인간의 두뇌는 피질에서 상상력을 발휘합니다. 자꾸 세계를 만들어내요. 하이데거라는 사람은 말하기를 그렇게 만들어내는 것을 모으는 것을 대상하는 것을 그 중심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주체’라고 한 거예요.

인간은 살아온 모든 경험을 가지고 경험의 저장고에 가만히 두지를 않고 항상 거기서 새로운 이미지를 발산시킵니다. 이미지라는 것은 인간의 현실을 만들어내요. 똑같은 바닷가인데, 똑같은 등산을 가도 다음에 그 좋아하는 등산을 가도 재미없어요.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데, 거기에 5년 전에 갔던 나하고 5년 뒤에 갔던 내가 달라졌어요. 단순히 늙어서 달라진 게 아니고 5년 전에 구상했던 그 때하고 5년 후에 구상했던 그 구상이 다르다니까요. 처참한 예를 들자면, 5년 전에는 남편하고 손잡고 갔는데, 5년 후에는 남편하고 이혼하고 갔다면 똑같은 나무요, 똑같은 산이고 똑같은 정상이고, 똑같은 해지만, 한 쪽은 웃으면서 올라갔고, 5년 후에는 울면서 올라가서 바위에서 뛰어내릴까, 사람은 자기가 경험한 것이 자기를 조작한다니까요.

인간은 자기는 변화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루 다르게 늘 변화고 심지어 구름 한 끼도 변해요. 흐린 날은 왠지 무엇인가 그리워지지요. 맑은 날은 놀러가고 싶지요. 흐린 날은 왠지 이문세 노래 틀어놓고 조용히 창가에 가서 다리 꼬고 앉아서 커피 마셔가면서 테라스에 가서 안 입던 바바리 입고 폼 잡고 생각나는 거예요. 그러다가 새로운 사건이 투입되면 후닥닥 그 꿈에서 다 깨져버리고. 전기세 갚으세요, 하면 꿈이고 뭐고 현실로 돌아와서 다 깨지고.

인간이라 하는 것은 자기가 만든 세계인데, 문제는 이 세계에서 예수님 세계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 들어갑니다. 왜? 인간은 벽을 밀어도 벽이 밀릴 뿐이지, 벽을 넘어갈 수는 없어요. 이게 샤르트르의 실존주의라 하는 겁니다. 내가 머리 깎는데 니가 머리 깎을 수는 없고, 내가 목욕할 때 니 몸은 깨끗하지 않고. 내가 꿈을 꿔도 내 꿈이지, 니 꿈이 아니라는 거예요.

인간은 남하고 타협하고 단합한다고 하는데 전부 다 거짓말이라는 겁니다. 두 사람이 각각 갑, 을 계약할 때 의미가 달라요. 우리는 합의했습니다. 합의 같은 소리하네. 니는 나한테 이용당했어, 저 쪽도 니는 나한테 이용당했어, 서로 이용당했다는 거예요. 남양분유 갑을이 계약할 때 갑을이 계약서에 나오는 용어 아닙니까? 심지어 같이 손잡고 가락지 끼우는 결혼식장에서도 신부의 노림수와 신랑의 노림수가 다른데요. 주례할 때 봐요. 둘의 노림수를 본다니까요. 남편은 감격스러워서 울고요, 남편은 좋아서 울고 있는데, 신부는 뭐하고 있느냐 하면, 가만 있어보자, 신혼여행 계약이 제대로 됐나, 아마 그 여자 살림 잘하고 살 거예요. 남자는 분위기에 취해있는데 여자는 실용적인 거 생각한다니까요. 주례하면서도 다 보여요.

우리가 예수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만든 예수를 내가 벽에다 그림 그려놓고 그 그림을 보고 내가 그린 그림이기 때문에 내가 했기 때문에 그냥 믿어주는 거예요. 그것은 백설 공주와 똑같은 거예요. 지가 보고 있는 거울보고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지?” 지가 지보고 못났다고 누가 하겠어요. 못 났다하면 깨어버릴 텐데. 거울 안 깨지려면 똑바로 이야기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매일같이 기만하면서 살잖아요. 믿지도 않으면서 믿는다고 기만하고. 응답된 적도 없는데 주께서 응답할거라고 자꾸 그렇게 반복적으로 하는데 이 반복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심리학에서는 ‘학습효과’라 하는 거예요.

모든 교육은 교회든 성당이든 학습효과에 대한 이미지에 불과한 겁니다. 계속해서 반복하면 뭐라도 믿어지는 것처럼 느껴져요. 실제와 믿음 관계없어요. 계속해서 반복하면 주기도문 천 번만 해 보세요. 훌라라 튀어나오고 방언 튀어나오지요. 기도 못하는 사람들, 기도 못해요. 교육을 받아보세요. 잘하지요. 우리교회 저녁에 기도 안하잖아요. 다 기도 잘했던 분들이에요. 대중기도 10분씩 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교회 와서 기도하라니까 그 다음부터 못한다고 다 빼버려요. 만날 나만 기도하고.

진리는 고통 속에서만 외침으로 나와요. 그런데 고통이라 하는 것은 어떤 고통인가 하면 아프다, 이 정도가 아니라 자기가 자기 세계관의 무너짐, 그동안 나를 포근히 감쌌던 나의 궁전이 화재, 부도, 사고, 또는 배우자의 사별, 자식의 교통사고 하여튼 어떤 일도 좋아요, 그게 와르르 무너질 때, 비로소 거기서 진리가 고통 속에서 나옵니다.

어떻게 나오느냐 하면, 질문형식으로. 영어로 하면 Why, 왜? 하필이면 왜 접니까? 신이시여, 하필이면 왜 접니까? 사울이 뭐라 했습니까? 주여, 누구십니까? 다른 말로 하면, 왜 하필이면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주님말씀은 더욱 가관입니다. “니가 나를 핍박했잖아.” 세상에! 좋은 관계로 화목해서 구원 받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항상 그거잖아요. 그런데 그게 아니고 핍박의 대표자, 누구보다도 핍박했기에 구원에 적절하다 이 말이에요.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이는데 적절하다 이 말이지요. 정말 적합한 존재지요. 집사님은 “저는 핍박한 적 없는데요.” 이리 이야기할 거예요. 매일 같이 핍박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가 관계되면 ‘아하, 눈만 뜨면 핍박하고 있구나!’ 아실 거예요.

사도바울보고 하는 게 “네가 나에게 핍박하는 자다.” 결국 질문형식으로 말미암아 진리는 그 사람에게 타고 들어오는 겁니다. 꿀통 밑바닥을 쑤셔버리면 꿀이 와르르 쏟아져가지고 그 쑤신 젓가락에 다 타고 들어오지요. 주님께서 뭔가 내가 주 예수를 믿는다는 자체를 완전히 밑 둥지부터 터트려 버려야 돼요. 터트리면 폭발하지요. 폭발하면서 우르륵 쏟아지는 그 무엇, 그것은 뭐냐 하면, 내가 예수 믿는 게 아니고 주께서 나를 믿게 하지 아니하면 구원 못 받는 사실, 내가 주님을 찾아간 능력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찾아오는 능력, 그 능력이 나를 윗 층에서 나에게 물을 확 부어버리면 나는 어~푹! 하지요. 물을 온 천지에 뒤집어 씌듯이 주의 능력이 피의 능력이 뒤집어씌우게 되면 그것이 거룩입니다.

이제는 거룩을 뒤집어썼기 때문에 그때부터는 질문입니다. “나는 왜 죄인입니까?” “나는 어떻게 해서 죄인 되었습니까? 라는 것. 언젠가 어떤 분이 저한테 질문한 게 있잖아요. 이렇게 질문하면 잘한 겁니까? 잘못된 겁니까? 질문 왔을 때 제가 답변하기를 잘못이고 잘했다는 그것이 상관없는 근거를 가져보세요. ‘내가 이건 참 잘했어.’ ‘이건 참 못했어.’ ‘이건 죄야.’ ‘이건 의야’ 라고 그런 구분조차 필요치 않는 어떤 다른 근거를 제시해 보라고 했습니다. 나쁜 일 했기 때문에 벌주고 착한 일했기 때문에 복주는 그런 근거 말고 선악 근거 말고 착하던 안 착하던 관계없이 계속 은혜주시고 복주는 그 근거가 있어야 돼요.

사실 우리 인간이 사는 게 바르게 살아서 사는 게 아니고 우리가 주님 앞에 한 것보다도 더 많은 은혜를 지금 누리고 있어요. 나쁜 짓해도 오늘 은혜 받고 사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꼭 나쁜 짓 적게 하고 착한 일했기 때문에 보너스로 하루치 인생을 마치 부여받은 것처럼 생각하기를 좋아해요. 우리가 그렇게 자기 나름대로 해야 자기 위신도 살고. 그리고 또 하나님께서 주고받는 게 있어야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라. 우리가 주님 앞에 해준 거 없어도 너무나 많고 크게 우리의 행동, 생각 보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그냥 주시는 은혜로 우리는 매일같이 살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거기서 내린 결론은 뭐냐 하면, ‘더 살 이유 없다.’ 내가 더 살 이유가 없어요. 그러면 그 말은 자살하라는 말이 아니고 내가 살 이유를 내 쪽에서 찾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나를 살려내시는 쪽에서 이유를 찾아내야지 내가 더 살아야 돼! 무슨 이유 때문에? 자식 때문에. 5월 달에 상견례 하는데 부모 없으면 안 되니까 더 살아야 돼! 그건 말이 안돼요. 더 살 이유 없습니다. 그냥 주님이 자기 계획 잡으려고 우리를 억지로 살려주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에 있는 모든 말씀의 특징이 뭐냐 하면, 말씀 해석의 능력이 뭐냐 하면,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떼어 내게 하는 눈이 있어야 돼요. 모든 목사들의 성경해석은 뭐냐 하면, “자, 우리 손 털고 그만 떠납시다!” 하는 그런 붕붕 뜨는 느낌을 제공해야 돼요. 저는 그걸 물결 또는 파도라고 하는데 성경의 설교 말씀을 들으면 우리가 자꾸 시동 거는 것처럼 부릉! 부릉! 떨어져 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아야 돼요. 이 세상 자체에서. “아이고, 일이 안 되도 할 수 없지 뭐.” 이런 식으로. 나를 억매고 귀신이 내 발목을 붙잡는 것이 말씀 들으면 그 붙잡는 힘이 맥이 없어지면서 툭툭 떨어지는 것 같은 마치 먼지 털 듯이 “됐어! 됐어! 그만 붙들어!” 하는 식으로 떨어져 나가야 됩니다. 그게 말씀해석이에요. 그래서 떨어져 나가는 사람에게만 은혜 되는 말씀, 그게 복음입니다.

복음이란, 죄 많은 세계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떨어져나가게 하는 겁니다. 애굽이거든요. 출애굽. 애굽 같은 이 세상에서 떨어져나가게 하는 떼놓는 그런 능력, 그런 능력이 있을 때 우리가 그동안 절망이고 고민거리고 걱정근심거리가 그게 근심 걱정됐던 이유가 우리가 거기에 목 달고 거기서 어떤 결정을 지으려고 내가 짐 싸들고 거기에 쳐들어갔기 때문에 오히려 말려든 거예요. 마귀 장난에 말려든 거예요. 떨어지면 되는데 인생에 같이 말려든 겁니다.

젊은 사람들의 슬픔이란 게 그거에요. 자기가 선택한 일에 칡넝쿨처럼 자기가 꽁꽁 묶어져 버렸어요. 내가 선택했고 내가 결정해서 막상 들어가 보니까 그 쪽에서 나를 식물인데 동물처럼 곤충들을 감아쥐는 삼키는 그런 것처럼 내가 저 회사 취직은 내가 결정했어. 내가 주인공이야, 내가 하나의 크리스마스트리처럼 행동할 거야, 했는데 들어가 보니까 그 회사에 자기가 빼도 박도 못 하게 말려들어가지고 이제는 나는 이런 짓하면 회사 그만 둘 거야, 사표 낼 거라고 다짐하고 회사 들어갔는데 막상 어느새 5년 지나면 자기가 자발적으로 그 일에 무섭게 매달리고 뿐만 아니라 새로 들어온 신입사원한테 그걸 오히려 독려하고 “회사 다 그런 거야.” “눈 감아, 그런 거 모른 척해! 이것저것 따지면 세상 못살아. 여기에서 나가면 이런 월급 어디서 주는데?” 스스로 자기를 기만하면서 존재의 의미, 인생의 의미도 없으면서 돈, 돈, 돈만 보고 말려들어 살아가는 거예요. 모든 인생이 다 그렇습니다.


슈바이처처럼 의사하겠다고 떡 개업해 놓고는 나중에 뒷돈으로 제약회사에서 돈 받아먹은 사람이 한 두 사람이 아니잖아요. 그 사회가 내가 결정한 그것이 나는 주도권이 있다고 자부했는데 막상 들어가 보니까 이미 저쪽에서 주도권을 쥐고 나를 마음껏 부리고 있는 거예요. 그 세계가. 그 세계를 누가 아시느냐, 우리 주님께서는 아시는 겁니다. 제가 지금 이렇게 길게 이야기했지만 아직 무슨 이야기를 안했느냐, 형제란 말을 아직 안 꺼냈습니다. 너무 난해한 말이라서.

분명히 형제라는 말은 원래 개별자는 서로가 소통될 수가 없어요. 따로 노는 거예요. 그런데 11절 끝에 보면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형제라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말이에요. 예수님을 부르면 형제 되는 겁니까? 아니지요. 형제간들이 서로 하나가 되는 겁니까? 여기 형제 앞에 뭐가 전제 되는가 하면, 하나라고 되어 있지요. 하나에서 낳기 때문에 형제라는 말이지요. 방향을 잘 봐야 돼요. 하나이기 때문에 형제지, 형제라고 해서 하나로 환원될 수 없습니다.

구약성경은 바로 형제에서 하나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책이 구약성경이기도 해요. 이삭에서 아들 몇 명 태어났지요? 둘이지요. 그것도 쌍둥이로 동시에 태어났지요. 누가 봐도 뭡니까? 누가 봐도 하나지요. 쌍둥이로 태어나게 해놓고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누가 봐도 하나에서 태어났는데 그게 결과적으로 도저히 맞지 않는 완전히 갈라서야 될 둘로 만들어서 둘이 하나 될 수 있는 방법은 애시 당초 없었더라 하는 것을 알려 줍니다.

에서하고 야곱하고 손잡고 우리 하나 하자, 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너희 둘이 화합했나? 그러면 내가 하나로 쳐줄게.” 이런 거 없습니다. 하나에서 나지 않으면 하나 될 수 없습니다. 둘이 됐다는 말은 그 둘은 하나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둘에서 나온 거예요. 둘에서 나왔는데 창세기26장에 보면 분명히 원천은 이삭과 리브가 하나로 돼 있는데, 그러면 이야기가 어떻게 되는 거예요? 한 형제인줄 알았는데 한 형제가 아니었다 말이지요. 한 번 적어보지요.

둘로 가봅시다. 하나라고 여겼는데 하나는 이삭이거든요. 부인이름은 리브가고요. 이삭이 하나인데 둘되었으니까 하나에서 둘은 되긴 되었는데, 둘에서 하나로 가는 길은 끊어졌어요. 나오는 길은 됐는데, 돌아가는 길은 없는 희한한 일이 벌어진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이삭이 뭐로 갈라져요? 이삭이 둘로 갈라져야 되겠지요. 이삭 하나 있고, 이삭을 이삭 되게 하는 또 하나의 이삭의 자리가 있어야 하지요. 이것은 에서와 야곱 낳기 전에 이미 보여줬습니다.

창세기 22장에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보고 아들을 죽이라고 되어 있지요. 그럼 처음에 죽어야 될 자가 누굽니까? 이삭입니까? 이삭 말고 또 누가 있습니까? 이삭이죠. 그런데 막상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진짜 죽긴 누가 죽어요? 이삭이 죽지 않고 수풀에 있던 수양이 죽지요. 어? 양이 등장해요. 그러면 수양이 갑입니까? 이삭이 갑입니까? 수양이 갑이고, 이삭이 을이 돼 버린 거예요. 이삭은 누구 때문에 살았어요? 하나님은 수양을 잡고 이삭을 대신 살려준 셈이 된 거죠. 여기서 벌써 부활의 의미가 생깁니다. 이게 로마서 4장에서는 수양이 예수님입니다. 이삭은 예수님 때문에 살았다 이렇게 되잖아요. 왜냐 하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자의 하나님이니까 살아야 되거든요. 맹세에 의해서.

그러면 그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이삭은 죽어야 된다는 말이지요. 죽어야 되는데 어떤 분 때문에 살았다 이리 되는 거죠. 그러면 처음부터 이삭은 살아야 될 가치가 있다? 없다? 없다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삭에서 나온 야곱과 에서도 둘 다 죽어야 된다는 거죠. 그러면 이삭도 죽어야 되고 이삭 계통에서 나온 에서와 야곱도 죽어야 되고, 이 죽어야 되는 것을 가지고 사도바울은 ‘육’이라고 하며, 육의 죽어야 될 원인을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죄라는 것을, 죄라는 개념을 말하기 위해서 인류를, 역사를 계속해서 추진시켜 왔고 이끌어 온 거예요. “신체 육질로 돼 있습니까?” “그럼, 죽어야 되겠네요.” 그럼 우리 생각은 “죽어야 될 걸 왜 만들어놨어?” 이리 나온다고요. “죽으려면 애초부터 태어나지 말지 왜 만들었습니까?” 라는 그 주제, 그 주제가 욥의 주제입니다. “하나님이여, 이유 없는 고난이 올 바에야 차라리 거기서 죽었으면 좋을 뻔 했습니다. 왜 저를 살려줘서 어른 돼서 이런 수모를 당하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라고 욥이 하나님에게 원망 투로 질문을 하지요. 제가 아까 강의할 때 뭐라 했습니까? 진리는 어디서 나온다? 고통에서 나오고 고통이라 하는 것은 질문형식을 통해서 해답이 주어지지요.

결국 인간은 아무리 기도안하고 입 다물어도 하나남으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시는 거예요. 성경에서 말하는 기도는 오직 기도를 인정하는 방식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기도하게 하시는 기도만 인정받기 때문에 뒤에다가 뭘 붙이라고 합니까?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라하시는 겁니다. 그럼 문제가 풀리는 겁니다.

왜 우리 기도는 우리가 했는데 왜 주님의 이름으로 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아무도 거기에 대해서 질문하는 사람 없고 질문할 생각도 없었지요. 왜, 하나의 남녀호랑개교 같은 주문 같으니까. 예수이름으로 해야, 아멘하고 빨리 끝낼 텐데 그거 안하고 있으면 계속 언제까지 기다려야 되는가, 일종의 주문 됐어요. 그거 빠지면 응답 안 되는 것처럼. 그러니까 말씀과 진리하고 아무 상관없는 자기세계, 아까 자기 개별자의 세계의 자기 한 맺힘을 푸는 것밖에 안 되는 거예요.   

주께서 기도하게 하시는 거, 로마서 8장에서는 성령께서는 탄식으로 기도하게 하시는 겁니다. 성령께서 기도하게 하실 때 그 사람의 응답은 뭔 줄 알아요? 응답은 기도하는 당사자 그 자체가 응답이에요. 기도하라, 에 말씀에 해당되는 응답을 주께서는 기도하게 하셔서 이루어내시는 거예요. 기도해서 응답받자, 하잖아요. 응답 받는 거, 그거 응답받는 거 아니에요. 지가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 해요. 왜? 기도해놓고 뭔가 얻어야 기도한 보람이 나니까. 사실은 그게 응답이 아니고 기도하게 된, 기도하는 여기에 내가 말려든 자체를 자기가 믿는 거, 그게 기도응답입니다. 왜냐, 그때부터 주의 말씀에 쓰여 지기 때문에.

전에는 주의 말씀을 가져다가 내가 잘되기 위해서 이용해 먹을 생각을 했는데, 어떤 고통 가운데 있어보니까 내 사적인 모든 것은 허물어지고 주의 말씀의 용도에 맞추어서 주께서 강제로 우리를 거기다가 동원시키더라 말이지요.

예를 들면, 야고보서4장 마지막에 보면, 인생은 무엇이냐, 인생은 안개지요. 안개를 우리가 어떤 식으로 체험해야 되지요? 말씀을 체험하라 하는데. 무슨 수로 안개를 체험할까요? 어떻게 해야 내 인생이 안개를 알까요? 안 되지요. 자기를 높여서 토막 내면 안 되지요. 안 되면 말씀은 응답되지 못하는 겁니까? 아닙니다. 바로 인생은 안개라는 게 내 식으로 실천이 안 된다는 것을 깨닫는 그것이 바로, 고 모습이 바로, 안개의 모습인 거예요. 주께서는 성공한 거예요.

우리는 그 말씀에 실패하고, 옛날에 학교 때 읽었던 단편소설에 호손이란 사람이 지었던 ‘큰 바위 얼굴’ 있지요. 큰 바위 얼굴이 있는데, 마을사람들에게 희망을 제공하는 거예요. 언젠가는 저 얼굴을 닮은 사람이 와서 이 마을을 살릴 것이다. 그런데 진짜 온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마지막 노을빛에 마을 사람을 돌본 사람은 누구냐, 바로 큰 바위 얼굴 같은 사람이 올 것이라고 믿고 기다렸던 본인이었지요. 다른 사람들이 그걸 인정해 주었잖아요.

성경말씀이라 하는 것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이걸 지키려고 해요. 왜, 지켜야 영광 돌리고 하나님께 기쁘게 하는 것이 인간의 피조물의 합당한 존재의 의미라고 우리는 교회에서 그렇게 배웠거든요. 조직신학에 나온다고요. 인간은 뭐냐, 인간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감사케 하기 때문에 그 감사하는 방법은 뭐냐, 말씀을 지키면 된다. 우리는 다 배운 거예요. 마치 바리새인들이 배우듯이, 바리새인들이 유대교에서 배웠듯이, 유대교방식이고 바리새인방식이라 하는 것은 어느 누구도 이야기해준 사람이 없어요. 왜, 인간은 누구나 그러고 싶으니까. 그게 잘못됐다는 건 자체가 쉐마, 쉐마, 들어라, 들어라 해가지고 묻고, 듣고, 지키면 영혼 된다고 다들 그렇게 하는 거예요. 왜냐, 교회는 양육하고 양육해야 지도자가 지도자 값을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난 수요일날 설교시간에 뭐라 했던가요? 마태복음 23장 이야기했지요. 마태복음 23장에서 지도자가 누구냐, 아비가, 지도자가 누구라 했던가요? 중요한 말 했어요. ‘하나’라 했지요. 하나라 했다 말이에요. 만약에 메시아가 지도자라 하면 쥐나 개나 다 등장할 거예요. ‘하나’라는 말은 다양성은 좀 나가줘! 이 말이에요. 다양성은 나가줘!

오직 지도자와 아비는 ‘하나’에서 나온다. 그 하나에요. 말씀을 지킨다는 것, 오늘 본문과 같이 형제가 된다는 것, 이것은 형제가 된다고 할 때는 우리는 이 말씀 듣고 가만히 있을 우리가 아닙니다. 형제 될 수 있는 모든 종교적인 방법과 신앙적인 방법 등 다 아이디어를 끄집어내요. 다~ 끄집어냅니다. 다 끄집어내놓고 그 끄집어낸 모든 것이 바로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것이라는 것을 추궁 받는 식으로 형제가 되는 겁니다.

간단한 문제입니다. 여기 예수님은 몇 분입니까? 한 분이죠. 예수 믿는 사람은 누굽니까? 예를 들어서 ‘나’라고 합시다. 그러면 여기에서 몇 개의 하나가 나왔어요? 예수님 한 분 계시고, 또 하나는 남이 믿으면 안 되잖아요. 내가 믿어야 구원받잖아요. 개별자니까. 저 사람 믿어서 내가 구원받는 건 아니잖아요. 내가 믿을 때 내가 구원받는다. 그럼 내가 믿으니까 나도 하나로 쳐주어야지요. ½입니까? 말이 안돼요. ⅓입니까? 아니거든요. 하나가 하나니까 하나가 갑자기 둘이 되는 거예요. 이걸 가지고 철학에서는 ‘주체’라고 하는 겁니다.

주체는 그 수로에 종속되는 겁니다. 종속된다, 그런 투로 말했어요.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사람은 반드시 뭘 할 때, 예를 들면, 병이 있는데요. 내가 이 병을 들었다. 맞았어요? 틀렸어요?  내가 병을 들었다.  “당신이 들었지 내가 들었어?“ 맞는 이야기잖아요. 이게 틀렸다는 거예요. 뭐가 틀렸는가 하면, 병이 들리 건 맞지만, 거기 ‘나’라는 것은 병과 나는 이렇게 같이 연결될 수 없는 거예요. 어떤 손이 와서 들었다. 이것은 되는데 ”내가 들었다.”라고 할 수는 없다는 거죠.

예를 들면, 꿈속에서 내가 맥주병을 들었다. 그러면 실제로 들은 거예요? 안 들은 거예요? 꿈속에서는 내가 분명히 들은 걸로 돼 있어요. 그러니까 실제로는 병을 든 적이 없지요. 인간이라 하는 것은 반드시 모든 것에 꼭 자기를 집어넣어서 하는데, 니체는 그걸 ‘무법적인 습관’이라 잘못된 거라 이 말입니다. 하나의 습관에 불과한 것이지, 가장 쉬운 예는 ‘배가 고프다.’ 하면 누가? 내가 배가 고프다. 그것은 말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냥 배고픈 상태가 있을 뿐이지 내가 배가 고프지는 않는다, 이리 보는 거예요. 배고픈 상태에서 내가 말려든 거다, 이리 보는 거예요. 말 참 어렵지요.

왜냐 하면, 모두 다 하나인데, 사람들은 이 하나를 거부하고 나만의 하나를 추구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배고프다, 하면 너도 배고프고, 나도 배고프고, 배고픈 상태는 하나밖에 없잖아요. 그런데 내가 배고프다, 하면 마치 나만 배고픈걸 아는 것처럼 그렇게 느껴지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뭡니까? 너 따로, 내 따로 이리 되는 거예요. 너 따로, 내 따로 이리 돼버리면 상대방은 나의 배고픔에 니의 배고픔은 무조건 내 앞에 무시당하는 겁니다.

“나, 예수 믿는다.” 이 말은 뭔 뜻이에요? “니가 믿는 것은 예수 믿는 거 아니다.“ ”어디서? 엉터리 믿으면서 감히 나 믿는 것처럼 어디 같이 맞먹으려고?“ 제가 말을 노골적으로 했지만, 사실은 다들 그래요. 다들.

그러니까 전체주의, 히틀러가 생긴 거예요. 전부 나한테 꿇어! 내가 대변인이다. 술이 한 잔 들어갔다. 그래서 인턴 대학생 엉덩이 움켜줬다. 그게 뭐가 문제인데? 그게 뭔데 사퇴해야 돼! 엉덩이 만질 걸로 왜 사퇴해야 되는 건데? 그게 뭐냐 하면, 어떤 아가씨도 어떤 손이 와서 움켜줬다. 10초 줬다. 10초 후에는 떨어졌잖아요. 떨어졌으면 과거일 아닙니까? 그런데 경찰에 신고를 왜 하는데? 왜 문제가 되는 거예요? 이게 뭐냐, 기억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기억은 누굴 위해 봉사하는 거예요? 누굴 섬기기 위해서 기억하는 거예요? 자기. 세상의 돌아가는 모든 것이 내가 박근혜인데, 박근혜 정권에 니 같은 개망나니가 술 먹고 그런 짓하면 나라꼴이 어떻게 되나? 대번에 사표 내! 누구 때문에 그렇습니까? 나의 자존심 때문에 그런 거예요. 니체는 말하기를 모두 가 뭐가 들어갔어요? 주체가 들어갔어요. 그 주체는 누구라 했습니까?

왜 세상은 니 중심으로 돌아가야 되는가, 이유를 대봐라, 세상이 니 중심으로 돌아가는 이유를 대봐라, 그래서 형제라고 할 때, 우리의 오해는 뭐냐 하면, 다 누구를 좋아라고 형제라고 부릅니까? “예수님으로 우리는 형제입니다.” 누구 좋아라고? 나 좋아라고. 이걸 제거해야 됩니다.

나에게서 출발하게 되면 에서꼴 돼요. 자기는 하나님 잘 믿고 동생 때문에 손해 봤지만, 그래도 하나님한테 응답받고. 이스마엘 같은 경우는 하나님께 응답받았잖아요. 그러니까 날 구원하실 거라, 구원하기는커녕 저주 받아요. 그러면서도 자기는 살아갈 이유가 있다고 본 겁니다.

우리가 만약에 가룟유다라면 우리가 이스마엘이고 우리가 에서가 아니라는 보장이 있습니까? 우리가 가룟유다 아니라는 보장을 증거 대 보세요.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까 인간은 자기로부터 출발하게 되면 전부 다 주님의 말씀에 오해를 유발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제거하는 해석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그것은 10분 쉬고 봅시다.

 공은주 (IP:218.♡.193.250) 13-05-22 08:45 

안양20130510b-히2장12절(형제와 소자) - 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입니다. 문제는 그거예요. 현실은 이거다. 문제는 그게 해답이 아니거든요. 해답은 이겁니다. 뭐냐 하면, 형제가 그 뒤에 있으니까 말씀이 무효 될 수 없는 거고 분명히 예수님께서 니는 형제라고 했다 말이지요. 우리는 예수님을 형제라고 해도 아무런 관계없이 니가 나를 어떻게 부르든 상관없이 나는 너를 형제라고 간주하기 때문에 형제라고 이미 돼 버렸을 경우에 그것은 어떤 논리에 의해서, 어떤 작용에 의해서 그렇게 되느냐, 그게 중요한 거예요. 이걸 알아야 되잖아요.

여기에서 아까 이삭 옆에 수양이 있지요. 아까 이삭을 육이라 했습니다. 육이니까 옛 야곱과 에서가 다 나오는 거예요. 여러분, 야곱이 구원받았다 했으면 그냥 구원받은 게 아니고 야곱이 뭐로 바뀌는가 하면,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뀌면서 구원받았어요. 야곱은 이스라엘로 바뀌면서 그 안에 뭐가 타느냐 하면, 언약이 그 속에 삽입이 되는 겁니다. 언약이 담깁니다.

그러면 야곱의 인생은 끝나고 이제는 무슨 인생으로 다루어지느냐, 이스라엘 되어야만 하는 그런 인생으로 바뀌어 지는데 그 작업은 야곱이 한 작업이 아니고 이름을 이스라엘로 지었던 그 하나님이 떠나지 않음으로서 계속해서 엉겨붙어가지고 기어이 야곱으로 하여금 이스라엘로 되게 만드시는 그 작업을 하는 겁니다.

시편134편에 나오거든요. 이스라엘은 내가 택했다. 네가 택한 것이 아니고 내가 택하여 내 백성이다. 이것은 일방적인 하나님의 선언이고, 그것은 누구도 취소 못해요. 그러니까 우리가 지옥입구에 가더라도 지옥은 들어가질 못해요. 심지어 지옥 가더라도 지옥에 살 수가 없어요. 끄집어내시는 강력한 힘이 우리로 하여금 천국에 들어갈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는 뭐냐 하면, 자신의 무능함을 언급하면서 하나님의 가능성을 언급하는 게 그게 신자의 특징입니다. 신자는 두 개가 다 있어야 돼요. “나, 예수 잘 믿는다.” 이렇게 하는 게 아니고 “나는 예수를 늘 믿는데, 늘 실패해. 그 실패한 것을 주워 다가 늘 성공케 하셔.” 이렇게 해서 모든 주인공을 예수님께 돌려드리는 거예요.

제가 방금 무능성이라 했는데, 인간의 무능성,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부자연스러움이 되겠지요. 우리교회 같은 경우는 그런 경우가 별로 없는데, 다른 교회 보면 십자가 이야기하고, 복음 이야기하고, 예수님 영광만 이야기하는데 굉장히 부자연스러워요 뭔가. 옷이 제 옷이 아니라. 누가 입던 옷을 주워 다가 입어 놓으니까 옷은 예쁜데 안 맞아. 안 맞아도 너무 안 맞아.

 인생사는 것이 신앙생활이 자연스럽지를 못해요. 얼마나 부자연스러웠으면 철야하면서 울부짖겠습니까? 얼마나 옷에 안 맞았으면, 품이 안 맞으면 얼마나 주여! 주여! 부르겠어요. 정말 몸에 딱 맞아버리면 부르짖을 이유도 없고 그냥 밥 먹고 살아가고 잠자고 자연스러운 신앙생활인데 따로 신앙생활을 해야 된다는 것, 그것도 시간대가 과외 받듯이 따로 해야 된다는 자체가 안 맞아요. 너무 안 맞아.

자기 현실은 자기가 주인공인데, 성경말씀의 현실은 예수님이 주인공이잖아요. 그러니까 이게 안 맞는 거예요. 맞질 않는 거예요. 맞추려고 애는 쓰는데, 대표적인 것이 청교도예요. 청교도 특징이 안 맞아요. 젊을 때 청교도 믿어놓고 늙어서 다 버립니다. 젊을 때는 취직도 안했지 대학공부도 아직 안 끝났지, 세상 물정을 몰라서 그래요. 그런데 끝나고 취직해서 회사 가버리면 청교도가 도움 되던가요? 택도 없는 소리. 청교도하면 애들 성적 오릅니까? 안 되거든요. 그 때는 다시 전보다 더욱 위선자로 달라지지요.

그래서 아까 제가 분명히 이삭은 육이라 했는데, 여기서 육을, 이삭을, 육 말고 다른 의미로 씁니다. 아~ 유명한 말 나온다. ‘유일자’에요.  이것은 유일자가 어디서 나왔는가 하면, 무한에서 나왔어요. 모든 유한은 전부 다 개체 자 돼요. 무한은 이러한 개체 자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나는 니 없이는 일 못하겠어.” 이런 거 없어요. 이것은 유일자예요. 특히 증거가 뭐냐 하면, 이삭 이전에 아브라함이 자식이라고 생긴 자식이 있었어요. 누구지요? 이스마엘 이지요. 이스마엘과 대비되면서 이삭입니다.

이삭의 특징은 뭐냐 하면, 없는데서 나왔어요. 없는데서 나왔고 창세기22장에서는 거기다가 속성이 하나 붙습니다. 없는데서 나왔다는 증거가 뭐냐, 죽은 데서 살아났다는 거예요. 없는 데서 나왔다는 걸 가지고 실체라 하고 실체에 대한 속성이 뭐냐 하면, 죽은 데서 살아났다. 죽은 데서 살아났다 하는 것은 니가 아무리 따라와도 인간은 아무리 따라 붙여도 사람이 살아있을 때만 따라 붙이지, 죽고 난 뒤에는 무슨 따라 붙일 게 있어요? 운동하고 뛸 수가 있습니까? 주님께서 “따라 오려면 따라와!” 하고 죽어서 들어가니까, 죽음 속까지는 따라오지를 못해요. 왜? 죽음이 끝이니까. 삶의 끝은 죽음이 끝입니다.

끝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죽음으로 모든 걸 종결시켜 놓고 그 다음에 천국 가는 사람은 뭐냐, 죽음과 이 쪽 죽음과 터널을 뚫어요. 공사를 한다고요. 터널을 뚫어가지고 이 쪽 죽음을 재료로 사용해서 여기에 하나님의 언약의 죽음이 덧붙여져 버리면 이것이 죽은 목숨이 아니라 영생의 목숨으로서 천국에 합류시켜 줍니다. 개구멍이라~ 죽음이란 터널로 가는 거예요.

누구든지 날 따라오려거든 어떻게 오라? 날 따라오려거든 살 준비해서 따라오는 게 아니고 뭘 지고 따라오라? 자기 십자가가 뭡니까? 옛날의 십자가는 뭐예요? 그냥 죽는 게 아니고 죄인으로서 죽는 게 십자가예요. 그냥 죽는 게 아니고. 니는 뭘 해도 니는 죄야! 인턴 대학생 엉덩이를 쥐든 뭘 하든 쥐기 전부터 니는 죄인이었어. 이리 된다 말이지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 그냥 십자가 지고 가면 안돼요. 예수님을 따라 가야 돼요. 그러면 합류가 되지요.

그러면 정리해 봅시다. 예수님과 우리의 합류, 형제라고 부를 수 있는 합류의 조건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언약적인 죽음’ 그냥 죽음이 아니고 자살하면 안돼요. 베드로가 자살해서 주님 따라 간다고 하니까 주님께서 말렸잖아요. 오지 마라, 그런 식으로 안 간다 했지요. 베드로가 닭이 울 때 유명하잖아요. 유럽에 성당에 보면 닭 우는 게 있어요. 베드로가 닭이 울 때, 회개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것은 베드로가 그 전까지는 개별자였습니다. “주님이여, 제가 목숨 바쳐서 따라가겠습니다.” 개별자였습니다.

여러분, 닭이 우리가 보기에는 개별자지요. 닭은 닭이고, 개는 개잖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닭이 울기 전에 3번 부인하는 그 말씀 속에 볼 때, 그 닭은 개별자가 아니고 어느 속에 담깁니까? 닭장속의 닭이 아니고, 말씀 속의 닭이지요. 말씀 속의 닭이니까 닭은 울어야 돼요. 그것처럼 베드로가 구원받으려면 베드로가 개별자를 떠나서 어느 속에 들어가야 돼요? 말씀 속에, 언약 속에 들어가야 됩니다.

그 언약 속에 들어가는 방법이 뭐냐, 그냥 자살하면 안 되고 주께서 죽여주는 죽음 속에 들어가야 돼요. 이걸 구약에서는 레위기에서는 그 방법이 뭐냐, ‘제사’라는 겁니다. 그게 제사에요. 레위기 17장 14절, “모든 생물은 그 피가 생명과 일체라 그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어느 육체의 피든지 먹지 말라 하였나니 모든 육체의 생명은 그 피인즉 무릇 피를 먹는 자는 끊쳐지리라” 끊어진다 했지요. 여러분들이 이 레위기 보면서 이상한 생각 안 듭니까? 우리는 성경이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있는 성경이라 하잖아요. 오늘 강의 제일 어려운 부분이니까 잘 들어보세요.

지금 우리의 생각은 뭐냐,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영생 주시려고 우리를 살려주시려고 주신 말씀이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러면 새삼스럽게 끊어진다는 것이 필요치 않지요. 끊어진다는 것은 언제 쓰이는 경우냐 하면, 일단은 불러놓고 일단은 살려 줄게, 해 놓고 다음에 뭡니까? 너는 아니였었어, 하고 내놓을 때 끊어지는 거죠. 그러면 우리 주께서 우리 부를 때는 합격된 줄 알고 있잖아요. 우리 몸은 서울대학교에 합격했다 말이지요. 우리 몸은 서울대라 생각했는데, 서울대학 총장이 하는 말이 피를 먹는 자는 끊어지리라, 하면 서울 대학은 우리의 몸을 요구한 게 아니라는 말이지요. 몸을 요구했으면 다 구원해야 되니까 몸을 요구한 게 아니고 피의 언약을 인정안하면 추방이다. 결국은 피의 언약 하나를 모으기 위해서 여러 몸들을 서울대학으로 모으는 셈이 된 거죠.

결국 주님께서는 끊어지리라, 말을 쓴 것은 뭘 하나 남기려고? 다시 하면, 너희들을 구원시켜주려고 구원한 건 아니다. 너희들 구원의 요지가, 네 하나님 존재하는 이유가, 너희들을 구원하는 게 하나님 존재하는 이유가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세우신 언약, 언약을 세우기 위해서 잠시 사용했다가 갔다 버리는 거예요.

제가 어릴 때, 나무젓가락 꽂아놓고 모래로 덮잖아요. 돌아가면서 모래를 헤쳐가지고 제일 마지막에 안 넘어지는 사람이 1등하기 했잖아요. 주께서는 이거 하나 세우기 위해서 나무젓가락 세우기 위해서 계속 파헤치는 거예요. 이미 애굽에서 홍해 건너온 사람들 모아 놓고 계속해서 뭔가 추방해서 끝으로 보내지요. 안식일 남아 있어, 안 돼! 안 돼! 너는 안 돼! 결국 남고자 하는 게 뭐냐, 최종적으로 뭡니까? 생명은 어디에 있다? 피에 있기 때문에 이 생명은 너희들이 요구한 대로 줄 수 없고 내가 요구한 자리, 하나의 자리, 자리가 결정해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언약의 자리가 거기서 구원의 효과가 비로소 주어지는 겁니다. 받고자 하는 사람은 내 몸이 가면 안 되고 내가 어떤 자리에 가야 돼요. 우리는 주님만 쳐다보고 가는데, 주님께서 이 땅에 왔던 그 자리가 뭐냐, 옆에 강도 바로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온 게 아니고 죄인의 자리인데, 주께서 죄인 되게 하는 언약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생소하게 죄인임을 근원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그 자리입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간음했지만, 나는 사람에게 죄지은 것이 아니라는 건방진 고백을 해요. 나는 사람에게 죄지은 게 아니다. 나는 하나님께 죄지었다. 그것도 아주 즐겁게 이야기해요. 나는 하나님께 죄지었다. 이 말은 뭡니까? 나는 죄지을 때만 죄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고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바보같이 이제야 그걸 알았느냐, 이 바보야! 이런 뜻이거든요.

교회 다니면 새삼 구원될 줄 알았지만, 교회 다니니까 나는 처음부터 원천으로 되돌아 갈 수 있게 되었다. 말씀을 듣고. 이것도 은혜를 받아야 되지, 교회 다 다닌다고 되는 건 아니고. 처음부터 주님께서 우리를 죄인으로 다루었던 사실을 모르고 우리는 죄 안 지으려고 말씀 순종 얼마나 해댔습니까? 바로 그런 오류, 그 자체가 바로 죄가 되는 거예요. 우리가 우리 자리 지키려고. 우리의 자리는 이미 죄인의 자리로 규정이 났는데, DNA자리지만, 그나마도 건전한 자리, 죄인이라도 같은 죄인이 아니고 좀 우수한 죄인, 남들은 회개안하지만 나는 회개했으니까 반성 잘하는 아주 착한 죄인. 인간들은 꼴에 꼴을 다해요. 그래서 그거 알았다고 하늘나라 보너스 상급 준다고 사람 꼬셔대고.

철학에 두 가지 인생이 있습니다. 하나는 비극적 인생, 인간이 있는 반면에 또 다른 하나는 이론적 인간 있습니다. 처음에 그리스 로마의 인간은 비극입니다. 왜 비극인 줄 아느냐 하면, 누구한테 치였냐 하면, 신들의 횡포에 치인 거예요.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신들은 사실은 변덕스러운 자연 환경과 옛날에는 인간의 마음이 따로 있었던 게 아니고 자연과 인간이 서로 교류했기 때문에, 자연이 변덕스럽잖아요. 태풍치고, 비오고, 뿐만 아니고 인간 마음도 변덕스러워요. 그걸 신으로 표현한 거예요. 그래서 그리스 로마의 신들은 질투도 잘하고 화도 잘 내고 성질도 개떡 같고 좋은 것은 남한테 안 빼앗기려하고 욕심 많고 그래요.

인간은 이 세상 자체 산다는 게 뭐냐 하면, 슬픔이라는 거예요. 그러다가 그냥 이유도 없이 죽어버리고 죽으면 그렇게 요란스럽고 번잡 떨고 내 여기 있다고 외쳐도 죽으면 잠잠해 가지고 결국은 안 죽는 신들만 남아있는 셈이에요. 결국 그리스 로마신화에서 인간은 뭐냐, 신들이 잠시 갖고 노는 노리개 감으로 즐기다가 그 다음에 “봐라 인간들아, 안되지 까불지 마, 니 죽어” 또 없애버리고 인간 만들어 놓고 또 그 짓하고. 그런 비극적 인간형에서 탈피한 것이 과학의 출발입니다. 그 다음이 이론적인 인간입니다.

인간은 무엇이냐, 인간은 지. 정. 의로 되어 있다. 지의 지식과 정의 감정과 의는 의지인데 인간의 혼은 이 세 가지 요소로 되어 있다. 이걸 가지고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지혜와 용기와 절제라고 했습니다. 이게 로마의 건국이념이에요. 사나이다운 사나이, 지혜와 용기와 절제, 이 3가지를 갖출 때 로마 군인들은 이걸 갖추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슈퍼인간, 최고인간, 그 인간이 이론적 인간됐지요.

그러면 나머지는 뭐만 남았어요? 이제 목표가 정해졌으면 나머지 인간들은 그걸 반복적으로 학습 받고 가정교육, 국가교육 받아가지고 지혜와 용기와 절제를 해가지고 따라 붙이면 그 사회는 어떤 사회가 되느냐, 이상적인 국가가 성립되는 거예요. 이게 플라톤의 국가이론이에요. 그리고 그 뒤의 모든 국가들은 요 국가관이 전부다 해답이 돼있어요. 지금 사법고시 합격한 사람들, 준비하는 사람들, 전부 이 공부 다 합니다. 어떻게 하면 지도자가 어떻게 하면 지혜와 용기와 절제를 할 수 있는가. 지금 그 대변인은 절제가 안 되서 그래요.

그러면 백성들은 지도자를 본받아서 따라 붙이면 나라가 전부 다 이성적인 훌륭한 인간이 되는 거예요. 이게 뭐냐, 비극적인 인간에서 뭐로 변합니까? 이론적인 인간되지요. 그럼 뭐가 탈락됐습니까? 이동하면서 뭐가 떨어져 나갔습니까? 신이, 하나님이 떨어져 나갔어요. 하나님의 신을 믿는 것은 형이상학적 오락입니다. 이건 교회 다니면서 오락이에요. 뭐냐 하면, 내가 지혜를 얻고, 용기 얻고, 절제되는데 신이 나한테 뭔가 아이디어를 제공하면 그거로서 충분히 헌금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보는 겁니다. 모든 세상이 그렇게 다 달라졌어요.

그렇다면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이 육으로 하나를 축했습니다. 왜, 전부 다 아브라함 혈통이기 때문에. 육으로 축을 했거든요. 하나로 만들었다 말이에요. 육으로 하나를 하면, 그들은 어떻게 하느냐, 여기서 자기 나름대로의 역사를 하나로 묶었어요. 이미 책이 나왔거든요. 에스라, 느헤미야 속으로 요번 주일되면 보낼 거예요. 거기에 보면 유대인들이 말라기 이후에 뭘 만들었지요? 역사를 만들었지요. 그 역사는 통합하는 역사에요. 역사를 만들 때, 역사를 만드는 그 자료로 근거로서 구약성경 구절이 다 동원되는 겁니다. 말라기 마지막 선지자 이름이 말라기이죠. 말라기 마지막에 보면, 그 때 누가 온다고 했지요? 엘리야가 오지요. 엘리야가 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자식의 마음을 아비에게 돌리지요.

그렇게 말라기가 오게 되고 또 다니엘에서는 구름타고 인자가 와야 되잖아요. 그러면 그렇게 온다는 것은 초월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인간은 손 못 대잖아요. 그러면 밑에서 맞을 준비를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맞을 준비하기 위해서 그들은 뭘 했느냐 하면, 에스라, 느헤미야를 이용해서 말씀으로 하나로 단결되어 있으면 필히 메시아는 우리를 찾아올 것이라고 그렇게 믿은 거예요. 밑에서 말씀을 준비하게 되면.

그런데 그 말씀이 뭐냐 하면, 모세의 율법가지고 충실하게 지키고 있으면 오는 겁니다. 특히 모세의 율법 중에서 중요한 것이 2가지 있는데, 특히 중요한 거예요. 이방인들도 이 2가지 지키면 유대인 됩니다. 하나는 안식일 지키는 것과 또 하나는 할례를 지키는 겁니다. 할례를 지켜야 될 이유는 창세기 17장에 보면, 누구든지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내 백성에서 끊어지리라, 되어 있고 출애굽기12장에 보면, 할례 받지 않은 사람은 유월절에 참석을 못 합니다. 반드시 유월절에 참석하는 사람은 할례 받은 사람이 참석해야 되거든요.

안식일 같은 경우는 출애굽기에 나와요. 이 안식일의 규례는 영원하다고 되어 있고 에스겔에 보면 또 다시 영원하다고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제7일 안식교 있지요. 거기서는 바로 구약에서 그런 본문을 떼어가지고 다른 구절은 예수님이 다 완성했지만, 뭐는 완성 못했다? 안식일은 필히 지켜야한다 해서 예수 믿기 더하기 안식일 지키기 그래야 구원받는다. 하는 것이 그쪽 종교의 특징입니다.

그 2가지를 지켜가지고 하나로 만들었습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결과는? 그 역사에 하나님은 인정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인정 안했지요. 마태복음 8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도 모르고 할례도 안 지킨 이방인보고 천국은 니가 차지할 것이고 그리고 자칭 자기가 천국의 백성이라 여기는 자들은 천국에서 다 쫓겨난다. 그리고 세례요한은 말하기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가까이 왔다,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직접 오면 기회가 없다는 뜻입니다. 만약에 바로 왔으면 뭐할 기회가 없다? 회개할 기회가 없다 이 말이거든요.

그러니까 가까이 왔다는 말은 얼마나 몇 미터 왔다는 말이 아니고 지금 마지막 기회를 준 거예요. 그런데 마지막 회개할 기회가 되려면 직접 올 분이 지금 와야 회개가 돼요. 이해가 되십니까?

예를 들어서 “내가 지금 가도 되지만 나중에 갈게.” 예를 들어서 경리과 감사를 한다. 사장님이 직접 가기 전에 먼저 경리부장이 감사팀이 먼저 경리부에 부정이 있다. 감사부장이 하는 말이 “회개하라, 지금 너희들 모든 걸 조사할 날이 가까이 왔느니라.” 이렇게 했다는 말은 마지막 기회를 준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그 말이 문제가 있는 것이 사장이 직접 나타나야 뭐가 옳은지 뭐가 그른지를 알 수 있잖아요. 그냥 감사부장 와가지고는 회개해 봐야 “에이~ 감사부장이 지적한 건데.” 직접 와서 지적하는 거하고 다르고, 같은지 안 같은지 모르잖아요.

그래서 회개할, 천국이 가까이 왔다, 라는 말은 이미 메시아가 와 있다는 겁니다. 직접 심판을 끝내도 되는데 회개하기 위해서 먼저 세례요한과 그만큼 유보를 준 거예요. 그렇다면 마지막 회개하라고 오신 분은 결국은 세례요한도 사라졌으니까 누가 회개시킨 자고 누가 구원자입니까? 예수님 본인이 마지막 회개시킨 분이지요. 왜냐 하면, 예수님 말씀이 기준이 돼야지, 세례요한이 말한 것도 기준이 되면 안 되거든요. 예수님께서 소경된 자 건지니까 세례요한이 뭐라 했습니까? 자기가 오히려 의심해가지고 “오실 자가 당신 맞습니까?“ 회개하라 해놓고 본인 자체도 지금 당사자가 헷갈리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의 방식은 뭘 깨는 겁니까? 역사에서 이미 유대인들은 나름대로의 자기의 신학을 체계했잖아요. 이 체제에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이쪽에서 죽음을 당하십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은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모세율법을 연구했는데 실제로 언약은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언약을 이룬다고 자부했던 그 인간들에 의해서 상처를 입은 그 상태가 곧 언약의 완성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주여, 우리가 하늘나라가면 얼마나 높은 자리에 갑니까?” 할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뭐예요? 니는 나의 무엇을 마셔야 된다? 나의 쓴잔을 마셔야 된다. 쓴잔이 달콤한 잔이 아니거든요. 그 쓴잔이 누가 유발시킨 쓴잔입니까? 소위 메시아를 기다린다고 하는 그 쓴잔을 마셔야 하는 거예요. 그 말은 뭐냐 하면, 예수를 팔아먹지는 않았지만 예수님을 팔아먹는데 거기에 동조까지는 안했지만, 부정적으로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한 사람이 누구였어요? 제자들이지요. 제자들 본인이 저지른 그 쓴잔을 누가 마신다? 본인들이 마셔야 되지요.

그러니까 성도는 날마다 자기가 자기를 용서해야 될 존재입니다. 오랜만에 복음 듣지요. 날마다 자기를 용서해 주세요. 주기도문에 나오잖아요. 제발 자기 죄를 용서해 주세요. 자기 죄를 닦달하지 마시고. 베드로가 양을 치기이전에 먼저 예수님께서 물어보죠.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 했지요. 그럴 때 베드로가 주께서 아시나이다, 해서 자기가 뭘 실패했다는 걸 자인합니까? 주님의 양을 내가 건사하지 못하고 내가 주님의 양을 목양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을 알잖아요. 왜냐, 자기들끼리 따로 고기 잡으러 갔으니까. 완전히 주님하고 결별했으니까. 주님께 찾아왔으니까 바로 그 점이 내 손으로 절대로 목양 못한다는 그 점이 그게 뭐냐, 베드로에게 쓴잔이 되는 겁니다.

이 쓴잔을 아는 사람만이, 자기 죄를 아는 사람만이 목양할 수 있어요. 내가 매일같이 예수님을 배반하는 배반자라는 것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만이 주님의 양을 양육할 수가 있습니다. 어느 목사가 내가 배신자요, 하는 목사가 어디 있습니까? “나는 매일같이 주님에 대한 배신자입니다.” 라고 자백하는 사람이 십자가마을 빼놓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나의 양이 아닙니다. 나는 여러분의 목자가 아니고 목자는 따로 있습니다.”라는 말을 목사가 해야지요. 그러면 다른 사람이 “당신은 왜 이렇게 잘 가르치는데 목자가 아닙니까?” “나! 나 말입니까? 당신이 나에 대해 알기나 알아요? 주께서는 아십니다.” 이렇게 나오지요.

“주께서는 아십니다.” 이 말은 누가 했지요? 베드로가 했지요.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이야기하죠. “니가 띠 띠고 니가 원치 않는 길로 내가 몰아갈 것이다.” 베드로가 하는 말이 “쟤는요?” 예수님께서 “쟤가 재림할 때까지 죽지 않고 있던지, 말던지 니가 상관할 바가 아니고 너는 따로다.” ‘따로’ 이게 바로 ‘형제’입니다.

결국 형제라 하는 것은 형제 되기에 모든 노력이 다 허사로 끝남을 아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찬송가 부르면서 울면서 백날해도 소용없어요. 우리는 절대로 형제가 아닙니다. 우정의 무대에 나오지요. 뒤에 계신 우리 어머니가 아닙니다, 그것처럼. 우리는 여기 모여도 절대로 형제가 아닙니다. 만약에 여기서 돈 좀 벌면 우리는 다 무시할겁니다. 이런 집에서 사니까 그렇지 우리가 좋은 집에 살면 우리는 들어오지 말라고 개 열 댓 마리 풀어 놓을 수도 있고 어디 감히 좋은 집에 너희들이 들어 와! 하고 이제부터는 가난한 사람하고 안 논다고 나올 가능성이 있어요. 로또1등 돼 보세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우리는 절대로 인간끼리 단결해서 절대로 형제가 될 수 없습니다. 형제가 되는 것은 오직 하나에요. 똑같은 고백이에요. 뭐냐 하면, “내가 주님의 배신자입니다.” “나는 내 인생만 생각하지 주님인생은 생각해 본적 없습니다.” 주께서 매일같이 찾아와서 이불 완전히 활짝 제치고 박살내는 그런 과정 때문에 우리는 그 순간만큼은 ”주님이여, 제가 죄인입니다.“ 소리하지 돌아서면 또 마찬가지로 헤헤거리면서 우리는 우리만 챙길 인간밖에 안 됩니다. 라는 고백을 할 때 그게 바로 같은 몸의 같은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

모일 때는 누구이름만 부르겠어요? 주의 이름만 부르지요. 그래서 두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내가 너와 함께 있다고 하는 거예요. 그것도 모르고 모여가지고 삼창한다고 주여! 주여! 주여! 삼창해가지고 우룰룰 해가지고 주와 함께 있는 줄 알고. 나의 이름이 부정당하는 곳에만 주의 이름, 구약에서 주의 이름이 들어오는 체제는 항상 나의 이름을 부정시키는 식으로만 오시지, 그냥 나를 안 건드리고 오시는 주의 이름은 없습니다. 왜? 언약을 이루어야 되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마땅한, 죄 값으로 죽어 마땅하다는 것을 앞장세우면서 십자가로 앞장세우면서 찾아오기 때문에 항상 우리의 이름이 그렇게 당하는 그 이름이 주의 이름의 자리에요. 그걸 마태복음 25장에서는 아주 어려운 말이지만, 이걸 ‘소자’라고 합니다. “내가 언제 주님 목마를 때 언제 마시는 걸 줬습니까?” 본인도 몰라요. “언제 옷 벗었을 때 입을 거 언제 줬습니까? 나는 나만 생각했는데.” 분명히 그 사람은 목마
를 때 마실 물을 주지 않았고 배고플 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옥에 갇혔을 때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주께서 이 소자를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럴 때 이 소자는 이 아무개, 최 아무개, 김 아무개 사라지고 뭐로 통일됩니까? 전부 다. ‘소자’로 통일되는 거예요. 이게 바로 본문에 형제라는 개념형성입니다.

형제는 내 개인의 자격으로 들어갈 수 없고 주님한테 혼남을 당했을 때, 그리고 내 자신이 죄인인 걸 깨달았을 때, 내가 내 중심을 예수님을 이용해 먹으려고 한 그런 파렴치한 인간이라는 것을 고백함으로서 주께서는 우리를 형제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형제가 모였을 때는 오직 누구 이야기합니까? 주님이야기만 하는 거죠. 이게 단일성입니다. 이게 언약의 단일성이에요.

언약의 단일성 때문에 우리는 다양해야 됩니다. 절대로 남의 신앙을 모방하지 마세요. 나는 저 집사님처럼 돼야지, 나는 테레사수녀처럼 돼야지, 나 주 기철 목사처럼 돼야지, 절대로 그러지 마세요. 각자 인생, 각자가 주께서 만드신 자리, 다양한 자리입니다. 우리가 다양한 자리를 만남으로서 우리끼리는 절대로 일치할 수 없다는 것을 혹독하게 느끼게 만들어요. 내가 언제 암벽을 타겠어요? 목 아파가지고 언제 암벽을 타겠어요? 암벽타도 천당 가면 되잖아요. 그렇지요? 통장해도 구원받으면 되잖아요. 제가 언제 통장 하겠습니까? 언제 통장해서 월급20만원 받겠습니까? 보너스 4만원 받고 언제 있겠습니까? 회비 3만원 내고. 언제 윤집사님처럼 당구 칠 수 있겠어요? 안 되지요.

그러니까 각자 자리에서 그냥 사시라니까요. 띠 띠고 원치 않는 길로, 주께서 만든 자리인데 절대로 남하고 개별적으로 유지하세요. 우리는 절대로 남하고 의견일치가 안 됩니다. 될 수가 없어요. 과일 중에 참외 있고 키위 있는데 저는 키위 별로 안 좋아하거든요. 참외 좋아한다고요. 또 어떤 사람은 귤 좋아하는 사람 있고. 어떤 사람은 다 좋아하는 사람 있고, 다 싫어하는 사람 있고. “아이고, 집사님은 내가 차려준 이게 별로인가 본데, 그냥 먹지 안 먹고 그러세요.”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저는 이거 못 먹거든요. 못 먹은 채로 구원 받았습니다.”이러는 거예요. 항상 제발 오버하지 마시고 객기 부리지 마세요.

주일 낮에 설교하면서 은혜 받았어요. 예수님은 마귀가 성전에 올라가서 뛰어내리라 할 때, 뛰어내렸습니까? 안 뛰어내렸습니까? 안 뛰어내렸지요. 제발 뛰어내리지 마세요. 그 예로 부흥회 때, 헌금 뜯어내는 이야기했지요. 장로 5천만원 내고, 집사 3천만원 내라고, 그 이야기 듣고 부흥사는 여자들에게는 안하고 남자에게 해요. 남자들은 되지도 않는 객기가 있어가지고 그래도 남자라고 주제에 무조건 손들고 갑니다. 그게 마귀의 시험이에요. “저는요, 헌금할 여력도 없고 헌금할 마음도 없고, 저는 얼굴이 너무 뻔뻔하고 두꺼워서 돈 한 푼 안내고 천국 갈 랍니다.” 이리 나와야 돼요. 그래야 돼요.

주님께서 헌금 받고 구원하지 않습니다. 돈 받고 구원 안 해주잖아요. 이리 이야기하면 “그래가지고는 교회 운영이 안 되잖아요.” “교회 운영 안 되도 구원받으면 되잖아요.” 교회 운영 안 되도 구원받으면 되지, 왜 교회운영을, 말로는 교회머리는 누구라고요? 주인은? 말로는 주님 해놓고 걱정은 왜 하는데? 아니 주인이 걱정을 안 하는데 종이 왜 걱정을 하는데?

형제라고 할 때는 로마서 8장을 생각해야 돼요. 로마서8장29절에 보면, 성령께서 기도하사 우리로 하여금 뭐 되느냐 하면,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형제 중에서 뭐가 됩니까? 맏아들 되게 하시는 거예요. 지금 그걸 설명하려 하는 거예요. 지금 이스라엘 백성 있습니다.

이제부터 쉽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이 사람들 다 육입니다. 육인데, 육으로 난 것은 천국 못 갑니다. 영으로 바뀌어야 돼요. 육이 영으로 바뀐다는 말이 요한복음3장에 나오는데 구약의 용어는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약속의 땅에 간다, 똑같은 말이에요. 이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살려면 이 육이 수정받아야 돼요. 탈락될 자는 탈락되고, 구원받을 자는 구원받는데 육에서 탈락시키는데 이스라엘 전체를 개인으로 보지 않고 이걸 집단으로 전체로 봐요. 전체로 보면서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아들’이라 해요. “이는 이스라엘은 내 아들이라” 아들들이 아닙니다. 그냥 아들이에요. 하나에요.

아들이 어떻게 아들 되는가 하면, 육에서는 아들 안됩니다. 여기에 언약이 들어가요. 여러분들이 여름에 팥빙수 할 때, 얼음만 갈아서 내 놓으면 손님이 화내지요. 팥만 넣었다, 화내잖아요. 국물이 맛이 없다. “아하, 우유를 안 넣었구나!” 우유 넣었다. 화냅니다. 뭐? 알록달록한 거! 그 다음에 제리도 넣고 찹쌀떡도 넣고 미숫가루도 넣고 숟가락 꼽아가지고 아이스크림도 올려서 놓고 이렇게 해줄 때, “야, 이 맛이다!” 하잖아요. 이게 뭐냐 하면, 계속 뭐가 투입되는가 하면, 언약이 계속 투입돼요.

언약이 투입되고 언약가지고 속에서 뭐냐 하면, 홉니와 비느하스는 쫒아 내어버리고 엘리 중심, 애기 못 낳는 여자가 있었고 이름은 한나 였고, 거기서 애기 잘 낳았다고 우기는 브린나하는 여자 생기게 만들고, 그래서 여자가 기도할 때 어떻게 기도한다 했습니까? 기도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지요. 가만히 있으면 기도 안 할 건데 브린나가 불을 일으켜가지고 술 취하듯이 기도해가지고 응답받아서 만약에 그 여자가 그냥 낳았으면 자기애예요. 조건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애기 주시면 이 애기를 바치겠습니다. 이름을 사무엘지어서 사무엘을 갔다 바쳤고 그 사무엘이 사무엘을 통해서 기존의 모든 육적인 교육으로서 왕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일러줘요. 엘리제사장 아들 교육 잘못되어서 죽지요. 까불다가 엎어져서 죽지요. 그러면 사무엘 아들 교육 잘 시켰습니까? 아버지는 훌륭한데 아들은 엉망이란 말이지요. 사무엘 부인이 아들교육 어떻게 시켰는지 모르겠어요. 이것은 교육문제가 아니고 육의 한계를 들추어내는 거예요.

사무엘로 하여금 사무엘계통이 아니고 다른 계통으로 뜁니다. 다윗 계통으로 뛰어버리지요. 다윗계통 뛰고 사무엘 통해서 됐던 사울이 하나님의 원수로 변하고 내부적인 갈등을 일으켜가지고 이 모든 것이 언약이라는 것을 작대기하나 세우기 위해서 계속 언약 비스므리 한 것들을 계속해서 들추어내면서 잘라내는 작업을 계속해서 하고 있는 거예요. 결국 그건 뭐냐, ‘하나’예요. 하나.

그 하나가 바로 언약의 하나인데, 제가 지금 아들이야기 했잖아요. 다윗에 와서 드디어 아들 등장합니다. 다윗이 사무엘하7장14절에서 뭐라 하느냐 하면, “내가 니 아들 되게 해줄게.” 어떻게? 내가 나서서 아들 되게 해줄게. 그럴 때, 다윗은 “말씀대로 순종하겠나이다.” 순종해서 아들 되는 게 아니고 내가 니 되어줄게. 순종 하겠나이다, 이게 앞뒤가 안 맞아요. 그런데 언제 아느냐 하면, 그 뒤에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했고 밧세바 남편을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을 저질르지요. 고의 아닌 것처럼 느끼는 고의에서 살인 저질렀을 때에 하나님께서 억울하게 아들 만든 식으로만 아들 되게 하는 겁니다. 그 상처. 고통. 억울함 속에 그 자리에 있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는 거예요.

그리고 그 억울함 속에서 나온 아들은, 요셉이 굉장히 억울했잖아요. 그런데 마지막 창세기 끝에 보면 요셉보고 뭐라고 합니까? “아버지 죽었다고 당신이 내치려고 하지?” 하니까 “아닙니다. 형들이여,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들이 나를 판 것은 당신의 마음이 나빠서 판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야곱의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일부러 나를 앞서 보냈습니다. 염려하지 마소서.” 해가지고 요셉혼자만 잘된 게 아니고 덩달아 형제들도 잘 되는데, 그 형제들 하나같이 요셉이 팔려갔을 때 반대한 사람이 아니고 전부 다 찬성한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만유의 주가 되게 하시는 거예요. 예수님한테 상처를 입힌 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주신 피의용서와 은혜로만 하늘나라를 새로 구성합니다. 그 앞에서는 받았던 면류관도 전부 다 반납합니다. 내가 잠시 써놓고 써보니까 아니거든. 써보니까 미안해서 이것은 하나로 모아야 돼요. 내가 각자 쓸 문제가 아니고 이것은 하나로 모아야 됩니다. 그걸 누가 하느냐, 24장로들이 해요. 24장로들이 누구냐 하면, 신구약의 모든 순교자들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 사람들이 보좌에 둘러서서 전부 다 면류관을 던지니까 그 면류관이 어디에 집합하겠어요? 어린양의 발 앞에, 보좌 앞에 다 모이겠지요. 거기서 생명수가 흐르면서 그들은 천국을 강가의 생명나무 만끽하면서 천국을 이루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지점이 있잖아요. 그 지점. 하나라는 지점이라는 것은 결국 오늘 강의를 마무리하면서 하나 되는 지점은 누구라도 그 앞에서 의롭다 할 수 없게 만드는 그 지점이 성도를 하나 되게 만드는 지점입니다. 강도나 세리가 한 형제이고, 그게 바로 십자가지점입니다.

끝으로 하나 더 하지요. 형제라고 했을 때, 형제 아님을 쌍으로 불러와야 돼요. 여러분 장갑 만들 때, 한 짝만 만드는 공장 봤습니까? 아니지요. 반드시 왼쪽장갑 있으면 반드시 오른쪽 장갑 짝을 이뤄야 서로가 의미가 발생돼요. 오른쪽이 뭐냐, 왼쪽이 아닌 게 오른쪽, 왼쪽이 뭐냐, 오른쪽이 아닌 것. 양은 뭐냐, 그냥 양만 있으면 의미 없어요. 염소가 있을 때, 양이 의미가 있고 천국은 지옥이 있음으로서 같이 끌어당겨서 천국을 설명합니다. 거지 나사로 설명할 때 그렇게 하지요.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주되심이라 하는 것은 건진다고 주가 아니라 반드시 심판을 해주셔야 주가 돼요. 심판과 구원을 병행해서 보면서 “누가 너를 이렇게 지옥 안 보내고 천국 보내지?” “주님이십니다.” “그래, 그럼 저 사람은 누가 천국 안 보내고 지옥 보내지?” “그것도 주님 이십니다.” 달음박질로 되는 것도 아니고 부르짖는다고 구원해 주시는 것이 아니고 토기장이가 토기를 만들 때, 천한 그릇과 귀한 그릇을 마음대로 만들 수 있는 권한은 오직 1, 하나지요.

하나에게만 하나의 권리가 최종적으로 다 가있습니다. 그 하나 때문에 우리의 다양성은 마음껏 다양해도 괜찮아요. 제가 다양성이라 해서 다른 사람과의 다양성만 이야기했는데 좀 더 깊이 나가면 우리의 같은 인간에 10년 전과 1년 전과 5년 전과 5년 후의 다양성도 포함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이 어떻게 망가지고 어떻게 스스로 잘났다, 못 났다, 그런 것과 상관없이 우리는 해바라기처럼 하나를 바라보는 주님에 의해서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으로 가는 겁니다.

끝으로 12절 봅시다. 이러므로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주의 이름을 누구한테 합니까? 내 형제에게 지요. 그러면 형제라 하는 것은 뭐의 이름만 모이게 돼 있습니까? 주의 이름만 부르게 돼 있어요. 이것은 기적입니다. 성령의 은사를 받지 아니하면 부를 수 없는 거예요.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오지요. 누구든지 성령을 받지 아니하면 예수님을 주시라 할 수 없다, 했지요. 그러면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말은 무엇을 포기한다는 말입니까? 자동적으로 자기이름을 포기하는 거죠. 육에서 영이 되기 때문에 육을 육이라고 신랄하게 지적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한테 있는 겁니다. "주님, 저 육입니다." 영이 되게 하신 것은 주의 이름 때문에 그렇지, 내 이름, 내 이름은 기능이죠. 내 인생, 내 이름 때문에 그런 건 아닙니다. 늘 주의 이름만 높일 수가 있는 겁니다.

13,14절에 봅시다. "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사망을 통하여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이렇게 되어 있지요. 여기에서 사망을 없애고, 사망을 두렵지 않고, 사망을 무서워하지 않고 마귀라는 존재가 우리한테 터치하지 못하게 한다는 그러한 개념들이 떠오를 경우는 어떤 경우냐 하면, 우리가 혼자 있을 때는 떠오를 수가 없고 떠오르지도 않아요.

언제 개입할 때, 주의 이름이 사건화 되어서 우리에게 찾아올 때 뭐도 같이 옵니까? 무서워 할 필요 없다, 그 다음에 마귀도 그냥 우리 구원하기 위해서 있는, 섬기는 종이 바로 마귀구나! 이걸 아는 거예요. 그런데 주의 이름이 안 오고 그냥 나만 덜렁 있어버리면 마귀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존재가 돼 버려요. 이 세상에 마귀라는 게 없다고 여기지요.

우리가 평소에 마귀 생각합니까? 동사무소에서 호적등본 떼어 주세요. 마귀야! 이렇게 합니까? 안 하지요. 평소에 마귀 없이 인간으로 보는데, 언제 왔을 때 우리는 마귀를 느낍니까? 주의 이름을 할 때, 마귀는 주의 이름을 못 믿도록, 주의 이름을 생각지 못 하게 그동안 계속 파괴해 왔다는 사실을 소급해서 우리가 느낄 수가 있어요.

'야, 마귀가 또 또 내 자존심이 중요하다고 해가지고 주의 은혜를 또 잊어버리게 만들었구나!' '야, 마귀가 나를 떠나지 않네.' 다시 한 번 우리가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마귀에 대해서 인정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또 돌아서면 결국 마귀 인정도 안 되고 그저 돈 떼어먹은 놈만 마귀지, 내가 평소에 마귀하고 친하다는 사실을 모르잖아요.

우리는 십자가가 은혜 되면, 그 때만 우리는 마귀하고 한 통속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깨닫고 또 다시 십자가를 잊게 되면, 또 내가 잘 잘못가지고 내일은 복 좀 주셔야 됩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자체가 주의 거저주시는 은혜를 또 우리가 짓밟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지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사랑을 우리는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계속해서 사태가 터지고 사건이 터져야 비로소 알게 됩니다. 얼마나 평소에 우리만 사랑하고 우리 잘난 것만 자랑하는지 이게 마귀 짓인 것을 깨달았사오니 주님께서 우리의 맏아들 되셔서 우리로 작품을 만들어서 주님만 증거 될 수 있는 천국생활이 지금부터 시작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