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사람과 인자(히2;6) 130412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4. 13. 07:16
2013-04-13 01:00:52조회 : 1374         
사람과 인자 130412 이름 : 이근호 (IP:119.18.69.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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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은주 (IP:218.♡.193.250)13-04-22 21:06 
안양20130412a-히2장6절(사람과 인자) - 이 근호목사

히브리서2장6절부터 할 차례입니다. “오직 누가 어디 증거하여 가로되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이것은 시편 8편4,5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이렇게 나와 있거든요. 창조에서 마지막 심판까지 이어집니다. 시편은 어디 있느냐 하면, 시간이 흘러간다면 시편이 여기 있었고 히브리서 2장은 십자가 이후에 여기에 히브리서가 있습니다. 있는데, 히브리서 쓰신 분이 하나님이 성령에 의해서 시편내용을 히브리서에 기록을 했어요. 기록을 할 때는 십자가라는 것을 우회로 넘어서서 가는 게 아니고 십자가를 통과해서 가야 되겠지요. 십자가 사건이 무의미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십자가라 하는 것은 앞에 있는 모든 성경 말씀을 다 이룬 것이 십자가잖아요. 그래서 그 말씀 가운데 시편이 들어있으니까 히브리서 할 때는 십자가를 통과하게 되는 겁니다. 어릴 때 촌에서 개들이 사람들이 있으면 좋아서 까불고 재롱부리고 하잖아요. 추수가 되어 짚단이 있으면 개들이 짚단 속에 뛰어 들어가면 들어갈 때는 개 몸체로 들어갔다가 짚단 속에서 나올 때는 짚단을 뒤집어쓰고 나오지요.  온 털에 짚단 다 묻어있지요. 시편이 십자가를 들어갈 때는 말끔하게 나오는 법이 없지요. 십자가사건을 뒤집어쓰고 히브리서에 도착하는 겁니다.

이렇게 될 때, 시편의 내용이 여기에 보면 인자라는 말이 나오지요. 인자, 하나님의 아들, 인자라는 시편의 내용이 여기 십자가 이후에 이 내용은 뭐로 바뀌느냐, 반드시 바뀌게 돼 있지요. 예수님으로 시편에 먼저 기록이 돼 있고 그 인자라고 하는 또는 인간, 참된 인간의 모습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다 보여주시고 그 짚을 뒤집어쓰시고 히브리서에 등장하시는 겁니다. 사람들은 해석을 할 때, 십자가사건을 걷어치우고 그냥 시편에서 히브리서로 연결해 버리면 이걸 보고 있는 관객 또는 관찰자, 언젠가 안양에서 했는데, 우리는 그 시편을 내가 외워가지고 히브리서 내용을 내가 그냥 들어가 버려요. 내가 들어가 버리면 여기 십자가 사건이 없어져버려요.

그러면 성경에 가서 구원 받는 식이 돼버려요. 몇 구절 외웠어요? 40구절 외웠어요. 그럼 40구절 외운 사람은 탈락이고, 41절 외운 사람은 합격이고, 그렇습니까? 성경구절이 있는데 그 단어를 내용을 알면 합격이고 모르면 불합격이고 그런 겁니까? 네 생물이 무엇이냐? 그걸 알면 구원이고, 그거 모르면 지옥 가는 거예요? 그러니 그 자체가 뭐가 빠졌어요? 십자가가 빠진 상태에요. 빠져버린 상태에서 이것저것 외워서 챙겨서 바구니에 슈퍼에 가서 물건 담듯이 중량 달아서 높으면 천국 가되 좀 높은 곳으로 가고 낮으면 지옥가고 이리 되면, 굉장히 곤란하지 않습니까? 그런 식으로 구원받겠다, 하는 것은 옛날에 바리새인들이 그 짓을 해왔어요. 사두개인들이.

그들의 애비가 마귀거든요. 마귀는 안 보이는데 마귀의 자식들이 하는 짓은 왜 그리 잘 보이는지. 마귀는 안 보여도 마귀 자식들이 마귀의 졸개들이 하는 짓들은 온 천지에 다 깔려 있어요. 그걸 통해서 우리는 배후에 마귀가 이런 식으로 일한다는 것을 간파할 수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것저것 다 끌어 모으는 것은 자기 구원받기 위해서 하는 건데, 자기가 구원 받으려고 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게 아닙니다. 구원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이 원하는 사람을 건지지요. 자기 구원을 원하는 본인이 구원 받는 건 아니에요. 예수님이 원하는 자. 바디매오 속에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찾았잖아요. 그것은 이미 바디매오가 예수님이 원하는 자이기 때문에 바디매오에게 예수님을 찾는 믿음이 발생된 겁니다. 내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믿음은 이미 그 전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 믿음을 집어넣었다 생각하시면 됩니다. 주께서 집어넣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집어넣은 그 믿음을 가지고 그리스도로 나아갈 수 있도록 조치를 그렇게 하신 겁니다. 소경이 아무리 한다고 해서 주님을 원한다는 것은 주님의 뜻이 있어야 되지, 성경 공부한다고  주님을 원하는 것이 아니에요. 성경공부를 한 자기 자신을 더 이쁘게 보고, 대단하게 섬기게 돼있지, 주님을 그리워하지는 않아요.

그래서 말은 이렇게 간단하게 시편에서 십자가를 경유해서 그렇게 히브리서에 왔습니다.  말은 그렇게 간단한데, 십자가를 경유한 것과 경유하지 않을 때, 그런 차이점이 뭐냐 라고 생각해 볼 때, 그걸 알아야 되겠지요. 십자가를 경유하게 되면 9절 끝을 봅시다.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간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지요?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그러면 해답 나왔지요? 십자가를 경유하는 것은 무엇을 맛보는 것이다? 죽음을 맛보는 것이다.

그런데 살아있는 사람이 죽음을 맛볼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죽음이란 게 특수한 경험이 돼가지고 예를 들어서 음식 맛을 보게 되면, 요리를 새롭게 했다. 동치미를 했다. 맛 있는가  맛보세요, 하면 맛을 봤다. 맛보기 전에 맛보려고 하는 나도 살아있고 동치미 먹고 난 뒤에 아, 맛있네. 시원하네. 라고 맛 볼 때 나도 살아있지요. 뭐든지 경험하려면 경험하기 전의 나도 살아있고 그 인간이 경험 후에도 살아있을 때, 경험이란 게 의미가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동치미 먹으려고 하는데 권사님이 독약을 풀어가지고 동치미를 먹는 순간 “윽, 감히 짐을.” 해가지고 “독살하려고 하느냐” 해가지고 죽어버리면, 깨어가지고 아저씨, 동치미 맛은요? 개 거품 물고 죽고 있는데 동치미 맛이 나옵니까? 불이 얼마나 뜨거운가, 하려면 데인 후에도 살아있어야 하는데 불 속에서 죽어버리면 죽은 사람 붙들고 “불이 얼마나 뜨겁던가요?” “흐으, 보고도 모르느냐” 이럴 수 없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제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은 죽음을 맛 볼 수 없다는 뜻이에요. 왜? 맛보는 순간 인간은 죽어버리니까. 죽고 난 뒤에 “야~ 참, 죽음 무섭데이.” 이런 이야기를 할 수가 없어요. 왜? 이미 죽어버렸으니까.

그런데 어떤 사람이 죽어가면서 “아, 죽음은 괴롭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그것은 죽은 게 아니고 아직 들죽은 거예요. 이 죽음이란 것이 우리에게 아주 특수한 겁니다. 아담에게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이렇게 했는데 그 말이 사실은 성립이 될 수가 없어요. 왜냐 하면, 그 전에 한 번 죽어봐 가지고 “야, 죽음이 이렇게 힘들구나!” 아는 사람에게 “전에 한 번 죽어보니까 힘들지? 그러니까 이거 따먹지 마. 힘들어.” 라는 말이 성립이 되는데 죽음이 뭔지도 모르는데 “그거 따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따먹지 마” 그 따먹지 마라, 고 하는 그것이 방어책이 될 수 있느냐 그 말이에요.

예를 들면, 화장품이 있는데 아들보고 “화장품 건드리지 마! 니 건드리면 얼굴에 울긋불긋 종기가 난다.” 애는 종기를 경험해 보지 않은 애한테는 그 이야기가 아무 실효성 없는 거예요. 제가 어릴 때 이야기인데요. 사촌하고 같이 살게 됐어요. 어느 날 숙모가 나한테 화를 내는 거예요. “왜 창호가 고추장 먹도록 그냥 놔뒀느냐?” 그 때 창호가 3~4살 됐어요. 고추장이 빨갛잖아요. 애들이 호기심이 많아서 자꾸 부엌에 들어가는데, 옛날 부엌은 높아서 넘어지면 큰일 나거든요. 애보라 하는데 자꾸 가는 거예요. 다른데 보고 있으면 고추장 보고 가는 거예요. 그래서 애가 한 번 먹어보면 매워서 안 먹겠지 싶어서 맛을 보여주니까 애가 매워서 하고 물주고 해서 살긴 살았어요. 화를 내는 거예요. 그 때 처음 알았지요. 아, 여자는 자기 새끼 건드리면 보통 문제 아니구나.

여러분, 약간 어렵지만 잘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선악과 따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했지요. 그러면 말씀이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도 인간 속에 이미 들어왔습니다. 그러면 아담이 이마에 땀을 흘리고 고생하게 되었습니다. 선악과 따 먹었으니까. 여자는 해산을 고통을 하고. 그게 죽음이 다입니까? 죽음의 징후일 수는 있는데 그게 죽음의 끝이냐 말이지요. 아니지요.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은 들어왔는데 이 말씀의 끝은 어디냐 하면, 예수님이 우리 대신 보여주신 겁니다. 왜냐 하면, 9절에 보면,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그러면 먼저 죽었던 우리 조상들은 그 사람들은 실제 죽었기 때문에 죽음을 맛볼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목숨 끊어져 죽었으니까. 그 죽음은 죽음도 아니에요. 진정한 죽음은 목숨 끊어져가지고 죽음이 아니고 진짜 죽음은 예수님만 맛봐요. 설사 죽는다 할지라도 온전하게 맛보지를 못해요. 영원한 저주, 오직 예수님만이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 예수님이 느꼈던 느낌을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해 주지요.

그러면 인간은 이것 참 어려운 말인데, 살아있기 때문에 죽는 게 아니고 이미 죽었기 때문에 죽는 것이다. 한 번 적어 보겠습니다. 언젠가 한 거 같은데 주일 오후에. 사람에게는 죽음이 정상이고, 사는 것이 비정상이다. 사람은 죽는 것이 당연한 거고요. 지금 우리가 살아 있잖아요. 살아있는 게 이상해요. 왜 살아있지? 사는 이유가 뭐지? 사는 목적이 뭐지? 살아 있기 때문에 이런 거 다 챙겨야 된다니까요. 차라리 콱 죽어버리면 이런 거 안 챙겨도 되는데, 진작 죽어야 되는데 어제 들풀은 죽었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아직 살아있거든요. ‘어, 들풀이 있었는데, 아침에 말라버렸네. 주께서 죽였구나!’ 그런데 주님께서 들풀은 죽였는데 나는 왜 안 죽이지. 안 살아야 되는데 왜 살지? 이 의문점.

안 살아야 되는데 왜 살지? 거기에 대해서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은 내가 왜 죽어야 되지? 이리 되잖아요. 계속 나는 살아있어서 딸 시집가는 것도 봐야 되고 아들 취직하는 것도 봐야 되고, 할 게 너무 많은데 왜 나는 점점 머리카락이 희어지고 머리카락이 빠지고 테이프로 해서 늘 머리카락 주서야 하고. 도대체 나는 아픈데도 많고 이빨도 박아야 되고 왜 자꾸 모든 게 자꾸 죽는 모습을 드러내지. 나는 더 살고 싶은데. 요거 마귀의 생각입니다. 마귀는 우리보고 더 살아라, 더 살아라, 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선악과 따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라는 말씀이 내 안에 내장 되어 있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그래요. 사람보다 말씀이 우선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말씀보다 자기가 우선이라고 본 거예요. 나를 위해서 말씀이 있다는 것은 마귀의 생각이고, 말씀이 말씀되게 드러내기 위해서 차후에 우리가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성령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모든 구원이나 천국은 말씀에서 나오는 그것이 천국이지, 살아있는 내가 더 살고 싶어요. 죽어서도 더 살고 싶어요. 이런 욕구에서 나온다면 그것은 마귀생각입니다.  그건 죄입니다.

성경적으로 봐서 신앙생활해서 구원받는 건 아니에요. 구원은 예수님의 능력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그러면 신앙생활 하겠다는 것은 결국 믿음이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믿음이 없다는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이야기해 보세요. 천 날 만날 이야기해도 아무 대꾸 없습니다.  질려 버려요. 대꾸 없는 하나님 앞에 질려버리니까 하나님 대신 답변을 누가 준비했는가 하면, 내가 답변해요. 내가 때우는 거예요.

왜 하나님이 답변 안하시는가 하면,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님보고 뭐라 했습니까? “진리가 무엇입니까?” 답변 안했지요. 왜 답변 안하는가 하면, 이미 우리 몸 자체가 주님의 답변이기 때문에 그래요. 선악과 따 먹는 날에는 어떻게 된다? 정녕 죽으리라. “봐라 니가 오늘 아침도 벌써 푸석푸석하잖아.“ 니가 50쯤 되면 20대 피부는 아니다 말이지요. 인덕원 내렸는데 나이가 한 50쯤 된 아주머니가 치마를 입었어요. 다리가 20대 다리가 아니라. 피부가 말랐어요. 촉촉하지를 않아요. 그래서 40대부터 여자들이 스타킹을 신는 이유를 알았어요. 60넘은 할머니가 생머리 했잖아요. 보기에 별로 안 좋았어요. 왜 여자가 파마를 하는 줄 알았어요. 예전 같지가 않아요. 왜 이OO이 프로포폴을 그렇게 맞는지. 아프니까. 뭐한다고? 카복신이란 그걸 넣어서 지방흡입 탄산가스 요소를 집어넣어서 자동적으로 지방을 분해하는데 가스를 집어넣으니까 피부가 부풀어 올라 찢어지니까 아프잖아요. 그걸 마취하기 위해서 프로포폴을 맞는 거예요. 여자배우들이 왜 자꾸 그걸 맞는가 하면, 내 몸은 내가 관리해서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본인들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자기 몸은 늙어가면서 자아는 일정하기를 원한다. 그러니 세상에 이게 마귀 아닙니까? 말씀대로 안개가 돼야 되는데 기어이 안개가 안 되려고 김 안개, 최 안개, 박 안개, 이런 거.

안개가 되어야 되는데 우리는 뒤에 안개 떼어버리고 계속 이 OO, 이 OO 계속해서. 그러니 모든 피부에서 물기가 마르고 푸석푸석해지는 거예요. BB바르고 화운데이션 바르고, 온갖 발라도 나중에 나이 많으면 발라도 붕 떠서 피부층하고 화장품층하고 따로따로 놀아요. 우리는 새삼스럽게 신앙생활 할 필요가 없는 것이 이미 우리 몸 자체가 주님의 말씀이 이렇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험대상이 돼버려요. 우리는 그걸 감사해야 되지요. 왜? 말씀에 의하면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죽는 말씀가지고 너무 화내지 마시고 그 뒤에 말씀, 죽었다가 다시 산다는 말씀을 받아주신 분이라면 앞에 거 백날 늙어죽어도 괜찮습니다. 이리 나와야지. 이리 망하고 저리 망하고 이리 데쳐먹고 저리 데쳐먹고 하여튼 우리를 어떻게 찢어먹던 부대찌개를 해먹던 어떻게 해먹던 그것도 말씀대로 된 것인 줄 범사에 감사해야 돼요.

그러면 다른 사람이 말하죠. 당신은 그러면 그렇게 엉망진창인데 당신은 누구를 믿나? 이리할 거 아닙니까? 우리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러니까 예수님의 하신 일을 믿는다는 거. 그래서 본인의 신앙생활은 구원에 아무 상관도 없이 신앙이 없는 티를 감춰보려는 일종의 BB크림입니다. 밑에 바르는 화운데이션 정도 그렇다고 보면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한다면 다른 사람이 “예수님이 너한테 해준 게 뭐가 있는데?” 하면, 말씀대로 우리를 해서 9절에 보면,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여기 모든 이라 하는 것은 각계각층사람, 어떤 인간을 두고서는 차별하지 않는 그런 모든 사람, 전부 인간 모두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들이 인간을 생각하는 차별화, 그 차별화를 하나님은 거기에 동조하지 않는 방법으로 건지신다 이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뭘 생각합니까? 유대인들은 구원 받고 유대인 아닌 사람은 지옥 간다, 있잖아요. 그 차별화, 그 차별화를 그 경계를 허물어 버리는 식으로 주님께서는 구원하기에 바빴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맛보신 이것을 그러면 여기서 모든 사람은 누굴 이야기하느냐에 대해서 16절에 읽어보세요.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보세요. 여기 나오잖아요. 아브라함의 자손이 모든 이에요. 모든. 전부. all. 아브라함 자손에 해당하는 사람 모두.

한 번 써볼게요. 오늘도 어려운 거 한다. 안양은 항상 어려운 거 해. ‘모든’은 아브라함 자손의 모든 이다. 그러면 아브라함 자손은 모든 입니까? 모든 아닙니까? ‘모든’은 아브라함 자손이다. 그럼 바꿔서 아브라함 자손은 모든 이다. 맞습니까? 틀립니까? 틀리지요. 이게 인간의 언어의 한계에요. 여기에서 모든 할 때는 16절에 의하면 9절의 ‘모든’은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라고 할 수 있는데, 아브라함 자손이라고 모두 구원 받는 것은 아니다 라는 말이지요.

예를 들면, 삼단 논법에서 원숭이는 잠을 잔다. 영화배우 이승연도 잠을 잔다. 따라서 이승연은 원숭이다. 말이 됩니까? 안 되지요. 이게 인간의 언어로서 진리를 표현해 낼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인간의 언어가 하는 것은 뭐냐, 진리를 다 포함하지 못한다면 언어는 무엇 때문에 있는 것이냐, 언어는 언어를 사용하는 자기 자신의 잘난 맛을 위해서 사용되게 돼 있어요. 자기 삶을 위해서. 예를 들어서 이 매직이 파란색이죠. “집사님, 이 매직이 파란색이네.” “예, 파란색 맞습니다.” 이렇게 답변이 나올 수도 있는데, “집사님, 이 매직이 파란색이네.” “어쩌라고?” 똑같은 말을 했거든요. 이 매직이 파란색입니다. 했는데 예, 그렇군요. 이렇게 나올 수도 있고 파란색이네. 어쩌라고? 옆집 아저씨가 “아, 오늘 봄꽃 잘 폈네요.” 하면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돈이나 갚으세요.” 이리 나온다면. 그러니까 말하는 사람 생각 따로 듣는 사람 생각 따로 인간은 전부 다 생각이 다 달라요. 생각이 다 달라서 인간사회는 어떻게 소통이 되고 어떻게 만나야 될까요? 생각이 다 다른데, 참 이 시대에 신기한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생각은 다 다른데 동일하게 유일하게 소통되는 그 창구는 하나 있어요. 크게 쓸게요. ‘돈’입니다.

예를 들어서 시장에서 콩나물 팔면서 “아이고, 오늘 손님 횡재한 줄 아세요. 막판이니까 2000원어치 이만큼입니다. 다 가지고 가소.” 이렇게 했다 말이지요. 그러면 손님이 “아이고, 할머니도 말은 그렇게 해도 안 남는 게 어디 있어. 다 남고 팔지.” 하면서 2000원내고 받지요. 결국 진심은 뭡니까? 2000원이 진심이에요. 이쪽은 2000원 가치 있다고 보고 저쪽도 2000원 가치 있다고 봤기 때문에 2000원을 가지고 콩나물하고 교환이 가능했던 겁니다. 돈이 진실이에요. 돈 액수가 진실이에요. 앞뒤 이야기하는 미사어구들 전부 다 그것은 위장술이에요. “아이고, 오늘도 밑지고 판다.” “아이고, 거짓말하지 마소. 이건 쓸데없는 소리입니다. 당신 거짓말하면 안 되잖아요.” 생략하고, 결국 말을 하는 것은 돈으로 말하는 거예요. 지난 수요일날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아이고, 목사님 은혜 됩니다. 목사님! 설교 너무 좋습니다. 목사님은 주의 종입니다.” 목사는 그 소리를 듣고 싶은 게 아니고 “돈 가지고 와! 돈 가지고 와!”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돈 가지고 와!” “은혜스럽거든 헌금 통에 돈 넣어.”  돈으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돈으로.

교인들도 은혜스럽습니다, 라는 말은 줄 돈도 없고, 말로 때우는 거예요. 모든 말은 마지막은 돈이에요. 돈 내면 훌륭한 신앙인이고, 백날 말로 떠드는 것은 신앙인이라 간주 안 해요. 예수님께서 그랬잖아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시대가 그런 시대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바리새인보고 말했잖아요. 너희들은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한다. 주님께서 다 아시고 한 거예요.  인간세상에서 이처럼 지금 자본주의에서도 예수님 당시에서도 이미 돈으로만 이렇게 모든 것이 돈에 진심을 담기는 거예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분명히 자기 땅 판돈을 바친다고 했다 말이지요. 해놓고 어떻게 했습니까? 부부가 짰지요. 반만 내놨는데, 반을 내어놓을 때, 그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느냐 하면, 베드로도 인간이고 나도 인간인데 현재 이 집에 우리 둘밖에 없는데 베드로도 없다 말이지요. 베드로가 눈이 뿅 해가지고 창문열고 날아와서 들여다보면 안 되지만, 베드로는 지금 교회에 있잖아요. 베드로가 알 리가 없다 말이지요. 그래서 베드로님, 이거 땅 판 돈 가지고 왔습니다. 하니까 베드로 입에서 불쑥 뭐라고 하느냐 하면, “어디 감히 나를 속이려고?” 이런 소리 한 게 아니에요. “어디 감히 성령을 속이느냐?” 이리 되는 거예요.

 그 소리했다고 베드로가 그 집 아나니아 삽비라 가정 말고 모든 교인들 집을 다 알고 있는 게 아니에요. 북한의 미사일이 몇 개고, 언제 쏠지 베드로 몰라요. 베드로는 모르는데 어떻게 알았어요. 성령이 양쪽 다 작용했어요. 그러니 알아맞힌  베드로도 고민이에요. 다음에 또 누가 와서 “베드로님, 저 번에 맞혔잖아요. 우리 남편 출장 갔는데, 지금 뭐하는지 알아 맞춰보세요.” 이리 나오면 또 곤란하다 말이지요. 어디 베드로가 천리안입니까? 그러니 기적을 베풀어도 문제에요. 늘 할 줄 안다고 여기는 거예요. 사도 바울의 손수건가지고 살린다고 해서 아예 사도바울의 손수건을 개성공단에 해서 생산해 내지, 수천 장 수 만장 만들어내면 그만 기적이 굉장히 퍼지겠네요? 기적의 의미는 너희들이 이런 걸 믿지 말라고 하는 거예요.  기적을 베풀어 주는 것은 두 번 다시 이런 것 좀 믿지 말라, 이런 거예요. 시시거운 거 믿지 말라, 이 말이에요. 기적 받았다고 구원 받는 거 아니라는 거 보여주기 위해서 기적을 베풀어 주는 겁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하면요. 진짜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우리의 죽음을 맛봐야 돼요. 그런데 성령이 와야 맛볼 수 있지, 다른 것은 와야 맛볼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뭐가 기적인가 하면, 평소에 우리는 하나님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이렇게 기도한다 말이지요. 우리의 기도 제목을 죽 보면 딸 결혼 좀 성사되게 하옵소서 하지만 그 말을 추적해 나가다 보면 다른 게 아니에요. 더 살게 하옵소서 그런 뜻이에요. 모든 것은 어쨌든 살아있으니까 내일도 살아 있게 해주옵서, 이런 이야기를 다른 걸로 이렇게 비비꽈가지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하나님, 나라가 잘 되게 하옵소서, 무슨 뜻입니까? 나라가 아니고, 내가 잘 되게 잘 살게 하옵소서, 하는 거예요.

그러니 나 살게 해달라는 이야기를, 자기 살겠다는 이 심보를 바꾸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갑니다. 왜냐, 우리는 말씀대로 하면 이미 선악과 따먹은 이상 우리는 뭐 돼요? 진작 죽어야 되는데, 입에서 나오는 것은 행동이 나오는 것은 항상 버스 안에 소녀의 기도처럼 ‘오늘도 무사히’ 하는데, 무사히 해서 뭐할 건데. 무사히 해서 한 번 살아보겠다는 거잖아요. 살려니까 돈이 필요하고, 그러니까 우리는 돈 벌게 해달라고 하는 거고, 돈 벌게 해달라고 기도 안하고 주여, 돈보다 주님이 더 좋습니다. 이런 거짓말해가면서 그렇게 하면 돈 생길 줄 알고.


시편에 있는 인자에서 이미 십자가를 거쳐서 히브리서에 왔을 때 어느 인간도 예수님이 그냥 인자라면 죽음을 통과하지 못합니다. 부활하는 거 없어요. 다윗이 부활했습니까? 시편에서 이렇게  “사람이 무엇이관대” 하면 다윗의 시거든요. 그렇게 이야기했던 다윗이 살았습니까? 죽었습니까? 이렇게 해놓고 죽었잖아요. 그러니까 이게 다윗의 시가 아니고 다윗 속에 있는 주님의 영이 다윗의 입을 통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걸 선지자의 입을 통해서 이야기했다, 하는 거예요. 선지자의 입을 통해서 하는 말씀을 지금 이 때에 응하게 함이라, 마태복음, 마가복음에 나와요. 요한복음도. 말씀을 응하게 함이라.

우리가 지금 성경공부 할 때 있지만, 성경공부 끝나고 난 뒤에 인덕원 밖에 나가보세요. 전부 다 한 사람, 한 사람 움직이는 것이 어찌하면 오늘도 살아 볼꼬, 살라하면 돈이 있어야 하는데, 어떻게 살지, 아이고, 내 자식 공부도 못하는데 어떻게 해서든지 공부해서 살려야 되는데, 항상 모든 방향이 어떻게 하면 지금 이대 로를 유지시켜 나가느냐, 여기에 모든 것을 집중해서 쏟아 붓습니다. 다윗도 그렇게 살았지요.

다윗이 그렇게 할 때, 다윗이 아마 생각한 것이 이거에요. 하나님이여, 지금은 내가 이렇게 고생하지만 언젠가는 이 고생이 낙이 있을 때도 있겠지요. 겨울 되면 꽃은 떨어지지만, 봄이 되면 꽃은 피어나듯이 언젠가는 이것도 빛을 볼 때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걸 가지고 잠시 인자가 무엇이관대 천사 보다 못하게 하시고, 잠깐 동안 쭈그려 앉아라, 고생해라, 나중에 니 보상해 줄게. 언젠가는 희망이 있을 것이라는 이러한 포부를 가지고 지금 고난을 이겨내 보겠다는 흔히 말하는 인간의 인생론, 카네기의 인생 처세술, 그런 식으로 할 건데 그렇게 해도 소용없어요. 인간은 죽게 돼 있는데 뭐 잠시 고생하고, 낙을 봐서 뭐하는데? 죽는데 무슨 낙을 봐. 인간 왜 이래, 무슨 낙을 봐. 원래 죽게 돼 있는 것이 죽어야지.

죽고 난 뒤에 낙을 보리라, 이건 종교에요. 그건 종교단체에서 하는 거예요. 말씀은 그렇게 하지 않아요. 죽고 난 뒤에 사흘 만에 살아난 사람은 누구 밖에 없어요? 예수님 밖에 없어요. 엘리야는 안 죽었잖아요? 엘리야가 살아난 게 있잖아요. 그게 죽음의 형체에요. 에녹이 죽었다가 하늘나라에 갔잖아요. 그것이 에녹 나름대로의 새로운 양식의 죽음이라니까요. 산다는 것은 예수님이 부활해야 살아요. 일종의 대기상태에 있는 거죠. 그냥 시체가 이 땅에  없다 그것뿐이지 만찬가지에요. 에녹이 죽은 것이 살아났으니까 여기가 좋사오니, 이렇게 합니까? 좋으면 니 한 번 살아봐라. 안되지요.

십자가 지시고 부활하셔서 성령 받아서 죄용서 돼야 그게 천국이지, 죽어서 올라간다고 그게 천국이 아닙니다. 부활의 첫 열매는 에녹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에요. 베드로의 장모가 부활의 첫 열매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에요. 예수님이 부활될 때, 이미 죽은 자도 산다. 이게 시간적 순서가 아니고 논리적 순서에요.

따라서 죽음 이후는 누구 몫이다? 예수님의 몫입니다. 죽음 이후가 예수님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나라에 누구를 보내 줄지, 안 보내 줄지는 누구 마음대로입니까? 오야 마음대로. 예수님 마음대로에요. 예수님 마음대로 구원합니다, 를 믿는 사람은 구원 받습니다. 역시 간절히 기도했더니만 구원받았다, 이게 아니고 내가 구원받고자 하는 것도 예수님의 뜻이었습니다. 주님의 뜻이 아니면 구원 받고자 하는 생각도 아예 없었습니다. 일괄해서 소급해서 원인까지 말끔하게 털어서 전부 다 예수님의 공로요, 은혜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9절에 보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주님께서 오셨지요. 우리가 오시라 했습니까? 우리가 모여서 날자 정해서 오시라 했습니까? 그 날과 그 때는 니 소관이 아니라, 는 무슨 뜻이냐 하면, 구원은 니가 안다고 해서 안는 거 쥐고 있다고 니가 그걸로 구원되는 게 아니라는 뜻이에요. 어떤 사람이 복음을 안 받아 들이거든 인간은 자기 자체의 능력으로 복음을 거부할 능력이 인간에게는 일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능력을 너무 크게 점수 많이 주지마세요. “그런 십자가 이야기 하지 마라.” 그 사람이 그럴 능력 없어요. 주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녹음해보세요. 그 이야기대로 이미 하늘나라에서 그 소리하도록 녹음 돼있다니까요.

그래서 때가 되매, 그 사람은 구원받게 돼있지 때가 안됐는데 미리 아무리 욱박질러 봐야 예수 믿을게, 하는 그 것은 다 빈말입니다. 우리는 다만 기도할 뿐이지만. 또 기도할 뿐이란 말도 애매해요. 기도한다고 때가 되는 것도 아니고. 다만 기도 시키는 것은 주의 뜻이니까 기도할 뿐이지만, 기도한다고 해서 자식을 위해서 기도한 어머니가 있으면 자식은 잘되고, 엄마의 기도가 없으면 자식은 못되고, 그런 거 아니거든요.

사무엘이 자식을 위해서 얼마나 기도했겠습니까? 하지만 사무엘의 자식은 사무엘답지 않았어요. 사무엘이 애초부터 목사보다 못했어요. 왜? 목사는 지 가정을 잘 다스렸는데, 사무엘은 지 가정도 못 다스렸어요. 그러니 성경이 요리, 요리하면 구원된다는 그런 일은 생각하지 마세요. 성경은 오직 누구에 의해서 구원된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피 능력으로 구원되는 거예요. 이미 십자가에 피를 흘렸다는 말은 건질 자를 건지는데 조금도 모자람이 없다는 뜻이에요. 내가 십자가에 피 흘린 이상은 니 구원에 대해서 니가 초조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초조합니까?

내가 임의로 상정해 놓은 아마 구원되었으면 요 정도는 돼야지, 자기가 자기를 어떤 구원 이미지 모델을 본인이 그렇게 따로 작성을 해놓으니까 지가 법을 만들어놨어요. 지가 규칙과 법을 만들어 놓으니까 지 법에 지가 어긋났으니까 지가 초조한 거예요. 자기가 생각한 어떤 결심, 내가 요번 달에는 담배 끊는다. 담배 끊는다는 말은 누가 만들었어요? 지가 만들었어요. 담배 못 끊으니까 미안해서 아내한테 잘해준다. 그러니까 어떤 잘못을 저질르니까 잘못에 대한 책벌도 지가 정해요. 이 법을 자기가 만들어 놓고 판정도 자기가 하면서 ‘아, 내가 오늘은 내가 너무 나쁜 짓 많이 했어.’ ‘나, 오늘 너무 착했어. 너무 착하면 천사되지. 미치겠어.’ 자기가 판단해 놓고 ‘오늘 이거 회개해야지.’ 회개하는 방법도 자기가 또 지어내요. ‘오늘은 성경 석장 더 읽는다. 내 스스로 벌 내리는 입장에서 오늘 손들고 성경 봐야지.’ 자기가 해요. 왜? 그렇게 하면 기분이 좋아지니까. 피 앞에서 무슨 짓인고.

가만있으면 상 받을 건데 꼭 설쳐서 욕봐요. 우리는 꼭 설쳐요. 뭔가 초조하고 불안해서 뭔가 쫓기고 두려워서. 목사가 돼서 교인들 다 빠져나가 보세요. 불안합니다. “주여, 제가 뭐가 잘못 돼서 교인들 다 빠집니까?” 교인들 빠진다는 말은 돈 빠진다는 말이에요. 노후대책 안되지요. 겁이 나지요. 갑자기 죄 끄집어내요. 닦달내지 마세요. 생각 중입니다. 무슨 죄를 지었더라? 내가 버스 운전하면서 과속했구나, 경찰한테 안 들키려고 미리 과속했는데 주께서 알아챘네. 아! 미치겠다. 이런 거, 온갖 다 해요.

설교시간에 유행가를 부를 걸, 미소 속에 그대를 부를 걸, 이 유행가 속에도 전도서에 나오는 내용 많아요. 시간이 흘러 어디로 가는지, 너는 알 수가 없잖아요. 시간을 강물에 비유한다는 거예요. 시간이 흘러 어디로 가는지 누가 압니까? 시간이 흘러 어디로 가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걸 니가 왜 생각하느냐 말이에요. 결국 인간은 선악과 따먹고 죽은 존재의 티를 팍팍 내는 거예요. 살아있는 내가 시간을 파악해서 저 시간이 흘러 어디로 가는지 알아서 따라가면 나도 영원히 살 텐데. 결국 차 떼고 포 떼고 보니까 남는 게 뭐라 했습니까? 나 우이하면 더 살지? 이것만 남는 거예요. 그걸 고상하게 다시 돌려버리면 시간이 흘러 어디로 가는지, 이렇게 되는 거예요.

또 하나 예를 들어볼까요. 혜은이의 ‘당신은 모르시나요?’ 그거 왜 묻는데? 내가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는지. 이게 뭐냐 하면, 내가 살아있는 나를 내 속에 당신이 사랑스러우니까 나를 더욱 더 기쁘게 살기 위해서 당신도 계속해서 좀 살아서 내 기쁨이 되어 달라 그거에요. 이거 떼고 저거 떼면 뭐만 남습니까? 나도 살아야 된다, 이 말이에요.

이것이 선악과 따먹은 하나의 말씀과 계속해서 배치가 되는 겁니다. 이렇게 하다가 유행가 평론 돼 버리겠어요. 그러니까 어느 누구도 죽음을 통과할 수 없지요. 죽음을 통과할 수 없지만 죽게 되니까 사람은 그 때부터 자기 사는 방책을 상상해서 만들어내기 시작하는 겁니다. 천국, 성령, 메시아, 예수, 하나님, 모두 걸 다 만들어내요. 백날 만들어내고 그걸 외워봐야 그건 죽음입니까? 죽음 아닙니까? 죽음을 맛본 게 아니에요. 성경 말씀 달달 다 외워도 그건 말씀이 아니에요. 모든 말씀은 통달한 예수님이 말씀이어야 되는데 이 시편의 말씀도 십자가를 통과하게 되면 뭐로 나타나는가, 십자가 지신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기에 그 분이 십자가 지심으로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겁니다.


우리가 성경구절 몇 구절을 압니까? 50구절 압니까? 그럼 50구절 알면 탈락이고, 51구절 알면 합격이에요? 우리가 만약 2000구절 압니다. 2000하면 탈락이고, 2500하면 합격입니까? 구원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오직 예수의 피로 구원받는 거예요. 확실하지요. 시편에 뭐가 있고 히브리서 달달 외워도 실제로 말씀이 말씀되는 것은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십자가라는 응축된 것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거예요. “그 피 입니다.” 이리 되는 것이지, “나, 어느 구절 압니다.” 이리되는 건 아니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공부하고 마치고 나가면 또 우리는 나도 마찬가지고 저들도 마찬가지고 그저 세상사는 것만 분주하게 사는 겁니다.
‘어이, 아저씨!“ 길거리에서 부르면 아저씨가 돌아볼 때, 어떤 마음으로 돌아보는가 하면, ”뭐, 돈 주려고?“ 이러면서 돌아본다고요. 사람이 누구를 부를 때는 반드시 자기 이익을 줄 사람이냐, 아니냐를 먼저 평가하는 마음이 들게 돼있어요.  ”아저씨?” 하면 “저, 말입니까?” 그 내면에 담겨있는 게 뭐냐 하면, ’나한테 내가 원하는 거 줄 거요? 안 줄 거요?‘ 라는 마음을 담고 “저, 말입니까?” 이렇게 나와요.

길에서 경찰이 “어이, 아저씨!” 하면 ‘아, 또 5만원 뜯겼네.’ 이런다고요. 항상 내가 나 살아가는 방식은 나를 어쨌든 살려내야 된다는 방식이 꾸준하게 평소에 있기 때문에 외부에서 타인이 어떻게 이야기해도 이런 마음의 연장선에서 그 사람과 관계에 나서게 되어 있습니다. 주변에서 교회에 나와서 예수 믿으세요. 하면 어떤 생각입니까? ‘안 그래도 요새 사업 안 돼서 힘든데 웬만하면 하나님이 내 응답해줄려고?’ “내 기도가 미흡해서 결혼이 자꾸 미루어지는데 엄마 뭐 하노? 엄마, 그렇게 복음 알면 나 기도발하라고 기도해주지.“ 모든 게 자기 사는 거와 관련해서 교회에 나오고 이젠 신앙생활 해봐, 이렇게 나온다 말이에요.


그 때, 말씀이 와서 성령이 오게 되면 아,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의 유인책이었다는 사실, 우리는 나밖에 모르는 죄인인 것을 철저하게 만들어 놓고 그것과 피를 죽음을 초월한 이미 죽음의 생명을 얻은 그 분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주어질 때, 우리는 죽은 자임을 기뻐하면서 영생을 얻는 사람 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공은주 (IP:211.♡.116.220)13-04-25 14:46 
안양20130412b-히2장6절(사람과 인자) - 이 근호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다윗에서 십자가를 경유해서 히브리서 오려면 결국 뭐가 다윗에 넘어가면서 다윗에 있는 것이 몽땅 다 십자가에 죽는데, 그냥 죽지 말고 십자가에서는 다윗의 모든 것이 죄 또는 다른 말로 죄인으로 죽어야 된다. 그러면 다윗이 믿은 것도 믿음이잖아요. 그러니까 믿음도 십자가에서 죄라고 규정받아서 여기에 그리스도에 의해서 해결될 그런 입장이라면 믿음자체가 성립이 안돼요.

인간이 믿는 믿음 있잖아요.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는 그 자체가 인정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믿음인데, 믿음 또는 사랑 있지요. 신명기에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되 니 몸과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라, 했잖아요. 사랑만이 하나님과 통하는 유일한 통로인데, 그게 십자가 사건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자기 사랑은 먹힌다고 생각하지요.

오늘 신약 성도들이, 신약에 있는 사람들이 성령을 받아서 십자가 영을 받기 전까지는 자기가 교회에서 충성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서 의미 있고 먹히고 복 받을 만한 짓이라고 하는 순간, 십자가의 피를 듣는 진짜 말씀이 덮치는 순간 지금까지 내가한 모든 헌금과 기도와 선교와 전도와 모든 설교와 강의 모든 것이 전혀 나를 구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의가 아님을 아는 거예요. 그러니까 시간적으로 구약만 어려운 게 아니라 오늘 신약도 마찬가지에요.

성령이 오게 되면, 뭐가 교체되느냐 하면, 내가 시작해서 구원받고자 하는 내부터 출발하는 그 출발점이 뭐로 바뀌더냐 하면, 예수님으로 바뀌어 버립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구원받는 거예요. 출발점이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라는 고백이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내 쪽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를 보여주기 위해서 나왔던 모델들이 누구냐 하면, 세리와 창기와 강도와 삭개오라는 사람, 이런 사람들, 바디매오 소경,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 38년 된 병자, 베드로의 장모, 3번씩이나 부인했던 베드로, 제자 다 마찬가지거든요.

그런 사람들을 죽~ 나열한 이유는 그쪽에서 뭔가 시작해서 구원받았다는 일반적인 구원의 논리를 십자가가 전부 다 뒤엎어 버립니다. 이게 바로 뒤집어 전입니다. 뒤집기. 뒤집어서 나의 잘나던 행함들이 십자가 밑에 깔리고 나는 오직 피만 죄를 향하여 평생 죄지를 나를 위해서 피만 흥건히 묻어있는 그 면만 우리는 성령을 통해서 볼 수 있지요. 그걸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께서 나타날 때, 그냥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온 피투성이 된 채 나타난 것과 같은 말이에요. “아이고, 주님, 누구한테 테러 당했습니까?” “깡패한테 맞았어요?” 하면 “니는 나를 핍박하는 자로다.” 니 죄 때문에 피를 흘린 줄 모르고 우리는  착한 내가 잘 섬기는데, 못된 인간들이 주님을 그렇게 괴롭힌 줄 아는데 사실은 우리 자신이 주님을 그렇게 피 흘리도록 만든 거예요. 우리는 우리 자신을 너무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이란 단어가 나왔는데,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사랑을 받는 게 아니고 우리의 사랑을 부셔버려요. 왜냐 하면, 우리는 내가 뭘 사랑했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타인들을 찾아다닙니다. 그래서 어느 남자가 나를 사랑해주게 되면, 어느 남자를 나를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내가 미처 모르는 사랑 받을 게 내게 있었나보다, 하고 자기 자신을 다시 살필 수 있는 기회가 돼요. 그래서 남자는 나 있는 그대로를 사랑해 주는데 사랑을 받는 여자는 평소에 자기가 미처 몰랐던 장점을 개발하게 되면 더욱 더 사랑을 많이 받을 수 있다고 여기고 사랑받는 짓을 해요. 그러니까 남자는 떠나는 거예요. 가만히 있으면 사랑받을 걸. 나대서 사랑하는 자 쫓아버려요. 사랑은 항상 내가 뭐지? 진짜 나다운 게 뭐지? 항상 미진해요. 결핍이고. 허전하고. “야, 정말 저 정도 같으면 내가 나한테 반할만하다.” 라는 것을 기어이 찾을 때까지 계속 헤매고 다닙니다. 모든 인간은.

그런데 문제는 내가 만족하겠다하는 목표점을 내가 모른다는 거예요. 어느 정도 돼야 내가 만족한지를 본인은 몰라요. 그러니 만나는 사람마다 물을 수밖에 없는 거예요. 묻는 게 뭐냐 하면, “내가 어떠하면 되겠어?” “얼마면 돼?” 내가 어떤 인간이 되면 당신에게 사랑 받을 수 있느냐? 그것은 당신에게 사랑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은 나를 사랑해, 하는 순간 ‘아, 내가 이 정도하면 사랑받을 수 있구나“를 내가 스스로 만족해서 이 떠돌이 생활을, 이 떠돌이 된 정신을 이제는 가라앉힐 수 있겠구나,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렇게 치매 걸린 이 인간들을 주께서 그 사랑을 인정해 줄까요? 택도 없는 소리. 문제는 그 타인 속에 누가 있느냐하면, 바로 하나님, 예수님을 거론한다는 거예요. 나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누구 좋아라고? ”니는 지금 나보고 사랑한다고 하는데 니가 사랑이란 단어를 알고 하는 것이냐?“ ”누구 좋아라고 사랑하는데?“ ”나를 좋아라고 사랑하지요.“ 그거는 사랑이 아닌 거예요.

밀양이라는 영화에 보면, 자기가 주님을 영접했다고 자신만만했지요. 남들이 기도하고 울고불고하니까 따라하면 지도 믿음 있는 줄 알고 울고불고 따라했지요. 그런데 자기 아들을 유괴한, 서울 살다가 밀양에 내려왔는데 아들을 유괴해서 죽여 버린 그 사형수를 이제는 자기가 전도하기 위해서 교도소가서 “비록 당신은 내 아들을 죽였지만, 나는 예수님의 사랑으로 당신을 이제는 용서하고 예수님을 영접하세요.” 전도를 하려고 하는데 그 사형수가 먼저 이리 이야기하는 거예요. “나, 벌써 예수님 영접했어요.”이러니까 화가 나서 “나, 이제 예수 안 믿어.” “예수 믿는 것은 다 거짓말이야.” 그 때 나온 노래가 뭐예요? 거짓말이야. 웃기잖아요. 생각해보세요. 믿는다는 것은 누구 좋아라고 믿는 거예요? 결국은? 자기 즐거움 때문에 예수를 믿은 거예요. 교회 가는 것도 즐거움 때문에. 그러니까 자기 즐거움에 대해서 일이 어긋나니까 빗나가니까 그 다음부터 누구든지 나를 건드리면 무조건 그것은 마귀로 간주하니까 예수님도 마귀네.

십자가라는 것은 결국은 뭐냐 하면, “니가 가짜인 것을 니가 아느냐?” 뜻이에요. “니가 나를 사랑한다는 그 사랑마저도 십자가 앞에서는 가짜로 들통날것을 니가 알고 있느냐?” 이 말이에요. “니가 나를 늘 믿고 하루도 안 빠지고 믿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너 같은 죄로 흘린 피가 피의 능력이 너로 죄인 되게 만드는 능력이 너를 구원한다.” 말씀이 옴으로 말미암아 히브리서4장에 보면, 벌거벗은 채 되지요. 벌거벗자, 하는 것은 무장 해제되는 거예요. 그렇게 될 때, 우리를 벌거벗게 하는 그 말씀이 우리를 구원하는 겁니다. 왜? 말씀 안에 뭐가 들어있기 때문에? 너의 죄를 위해서 이미 다 대가를 치뤘다는 그 말이 같은 바구니에 같이 담겨있기 때문에 그래요. 같이 담겨있어요.

이것을 가지고 뭐냐, 자기 부인의 영역입니다. 늘 십자가 안에서 피 안에서 우리는 자기를 부인해야 될 계속해서 반복되어야 되지요. 지난 수요일날 이야기했지요. 어제 믿음도 오늘 되면 새롭게 바뀌어야 된다. 어제 믿음은 어제 새롭게 된 것이기 때문에 어제 새롭게 된 것은 오늘까지 끌고 오면 안 된다, 이 말이에요. 그럼 어제와 오늘 가름하는 것은 뭐냐, 잠이에요. 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날이다. 그 날 속에 인간은 갇혀있어요. 낮과 밤사이에 뭐가 있느냐, 잠을 자잖아요. 잠자는 이것이 뭐냐 하면, 이미 인간은 죽은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징후라 하는 거예요.

병들면 병의 증상이 나타나잖아요. 증상 같은 거예요. 악한 성폭행 범이나 살인자들 잠자는 거 보세요. 천사 같아요. 그렇게 나쁜 인간도 잠잘 때 보니까 수면내시경해보세요. 이거는 간호사가 어떻게 만져도 할 수 없어요. 아무도 몰라요. 잠자면. 애들 잠잘 때 보세요. 천사 같지요. 어른들 잠잘 때보면 시체 같아요. 진짜 시체 같아요. 그냥 안 잡니다. 입 벌리고 잡니다. 근육의 힘이 없어서. 아, 이것이 바로 진솔한 내 모습이다. 이렇게 잠자면 아무것도 아닌데 남한테 자존심 세우려고 이렇게 하느냐, 박 근혜 잠 잘 때 시체에요. 깨면 대통령으로 착각하는 거예요. 대통령이라 하는 것은 역할을 맡은 거예요. 대통령 일을 제대로 못하면 대통령이라 인정을 못 받아요.

옛날 왕은 안 그래요. 왕은 못나도 왕, 잘나도 왕, 정박아 돼도 왕이에요. 왜? 인품보고 왕이 결정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왕 자리가 인품과 상관없이 왕을 만들어주지만 대통령자리는 사람들이 대통령 뽑을 때 기준이 있어요. 그 기준에 합해야 계속 대통령으로 유지될 수가 있어요. 국민들의 나라와 건강과 재산과 국토를 지킬 책임자가 대통령이거든요. 나라의 국민들의 재산과 신체의 생명과 영토를 지킬 책임자가 대통령이기 때문에 대통령 그 일을 수행 할 때만 대통령이지, 지금 이명박 나오면 대통령입니까? 아니잖아요.

왕은 그런 게 아니에요. 예수님은 왕입니까? 대통령입니까? 우리가 뽑았어요? 투표해서 우리가 예수님을 왕으로 뽑았습니까? 왕이기 때문에 우리의 어떤 잘못도 관계없이 은혜의 왕 노릇하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되는 겁니다. 그래서 백부장이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온다는 것은 제대로 하면 믿겠습니다. 이런 뜻이 아니에요. 제대로 하면 믿겠습니다, 하는 그런 식으로 우리가 왕한테 요청할 수 있는 권한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저 반드시 구원해 줘야 돼요, 라는 요청을 왕을 향하여 할 소리는 아니에요.

그걸 보여주는 재미있는 대목이 왕의 아들이 혼인잔치를 벌이는 대목입니다. 왕의 아들이 혼인잔치를 벌일 때, 그 초청된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본인결혼식이 있었어요. 본인 결혼식 미루고 남의 결혼식 가는 바보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의도적으로 본인결혼식하고 겹친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은 어디가야 됩니까? 본인 결혼식해야지, 남의 결혼식갑니까? 부주 내러 갑니까? 바로 그걸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이야기했을까요? 너는 왕이 아니고 이쪽은 왕의 아들의 결혼식이잖아요. 그러니까 너보다도 누가 더 중요하다? 너보다 더 중요한 분이 있을 때 너는 그 왕의 백성이 된다, 이 말입니다.

천국의 백성이 된다는 말은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고, 누가 제일 귀하다는 말입니까? 평소에는 내가 제일 귀한데 예수님만 생각하게 되면 나보다 더 귀한 분이 예수님입니다. 인간의 잠자는 것은 자기의 모든 행함을 중지하는 겁니다. 의지 소용없어요. 지 자존심, 체면 소용없어요.

잠잔다는 거, 인간은 이미 죽음에 의해서 규정되지, 살아있어서 어떻게 행동하느냐 가지고 규정되지 않습니다. 이미 죽기로 돼있는 거예요. 나쁜 짓해서 죽습니까? 아니지요. 나쁜 짓해서 죽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 하기 위해서 죽습니다. 이게 심판의 기준입니다. 그래서 구원 받는 사람은 행동을 똑바로 해서 구원받았습니까?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어서 구원 받았습니까?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어서 구원받은 거예요.

그리고 지옥 가는 사람은 무엇 때문에? 나쁜 행동한 게 아니고 행함 이외는 믿을 게 없기 때문에. 지 행한 것만 생각하기 때문에 지옥 가는 거예요. 그게 행위 책이에요. 이쪽은 생명책이라고요. 왜 요한계시록20장에 나오는가 하면, 앞에 선악과, 생명나무 그걸 염두에 두기 때문에 그런 말씀하신 거예요. 선악과 따먹은 자는 이유 불문하고 다 죽게 돼있고, 생명나무 따 먹은 자에 한해서만 생명을 얻는다, 이리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다 아는 이야기지만, 시장에 가서 반찬 고를 때, 갈치를 살까? 고등어를 살까? 그래, 생명은 고등어에 달린 게 아니야, 이렇게 사야 되는데, “아우, 갈치 살 걸”오면서 계속 후회하지요. 생명은 갈치나 고등어가 중요한 게 아닌데 “아우, 나는 치매, 장보러 나오면 안 돼!” 후회하지요. 후회하면서 또 기도하지요. “주여, 어찌 이럴 수가! 제가 무슨 잘못이 있어가지고 이런 재앙을.” 이리 나온다 말이지요. 갈치, 고등어 아무 상관없어요. 생명나무를 먹어야 생명입니다. 분명히 아는데 돌아서면 또 시장가면 딴생각하고.

자, 그 다음에 6절을 봅시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여기서 사람을 예수님으로 집어넣읍시다. “예수님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하나님께서 저를 생각해 주십니까?” 이렇게 되면 다윗 때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가 여기 십자가 이후에는 성부와 성자의 관계로 이미 거기서 확정되지요. 그 다음에 인간의 문제는 성부와 성자, 인간과 하나님 사이, 인간이 다윗이잖아요.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계시를 받아서 사람이 무엇이관대, 하는 것은 첫 째, 사람을 말하는 것이고, 인자가 무엇이관대, 하는 것은 인자는 다윗 본인을 말하는 거죠.

그러니까 사람과 인자에서 다윗은 무엇의 일부다? 사람의 일부라, 사람의 일부라는 말은 다윗이 인자가 되어서 어떤 계시를 받는다는 것은 나 빼놓고 다른 사람에게도 내게 받은 계시의 효과가 그들에게 전달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있다는 말이에요. 요게 사람과 인자의 관계가 그대로 십자가 이후에 예수님한테 장착이 돼버리면 예수님이 혼자 착해서 혼자만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과 관련된 구원받을 사람들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11절 봅시다.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여기 형제라 했지요. 형제라 부르시면서 그 앞에, 형제라도 남남이잖아요, 그렇게 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그 앞에 다 무엇에서 난다? 다 하나에서 나지요. 다 하나니까 근원적인 하나, 진짜 하나, 원래 하나가 있을 거 아닙니까? 누구란 말입니까? 인자되시는 예수님이다. 그게 시편에 있을 때는 다윗이 되던 게 그 말씀이 십자가를 뒤집어쓰니까 하나가 누굽니까? 예수님이 되는 거예요.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준적이 없다. 보혜사 이만희도 아니고 사도 바울도 아니고 다윗이름도 아니고 누구이름? 예수 이름 이외에는 다른 이름으로 구원 받을 자격이 없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 하나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구원이 나오고, 영생, 천국, 지옥, 하나에서 다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이 하나가 다윗이라면 다윗에서 나온 구원과 영생과 천국과 지옥, 다윗이 생각하는 천국과 구원 이런 게 있다면 이것은 어떻게 될까요? 다윗이 생각한 구원과 천국과 율법과 땅이고 하늘나라고, 지옥 이런 개념들은 어떻게 해야 됩니까? 어디서 다 폐기처분돼야 돼요? 십자가상에서. 다윗도 예수님 하나 앞에서 자기는 하나인 것을 접어야 되지요. 요거 접으면서 다윗 생각하는 구원, 영생, 천국, 사랑, 소망, 믿음 그것도 다 폐기처분해야 돼요. 그래서 아까 십자가 믿음 자체가 성립된다, 성립되지 않는다, 하는 그런 이야기를 해드린 겁니다.

10절에 보면,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라 할 때” 이 구원이라 하는 것이 우리가 먼저 옛날에 있었던 그 구원은 구원이 아니다, 이 말입니다. 옛날 구원은 왜 구원이 안 되어야 되는가 하면, 죽기 전에 구원은 왜 안 되느냐 하면, 그 구원의 주인공이 누굴 반드시 집어넣어요. 본인을 집어넣을 거 아닙니까? “주여, 구원받고 싶습니다.” 누굴 집어넣어요? “주여, 저 빼고 구원해 주세요.“ 이러지는 않는다, 말이지요. 아까 누구만의 하나라고 했습니까? 예수님만이 하나인데, 갑자기 우리 쪽에서 생각한다면 누구를 하나라고 들어가게 돼요? 결국 자기 자신을 집어넣으니까 이것은 십자가에서 탈락, 빼야 되는 겁니다.

이걸 보면, 오늘날 한국교회나 기독교라 하는 것이 얼마나 성경하고 아무것도 상관이 없는 인간의 종교적인 욕구들의 집합체라 하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죽어서 좋은데 가려하면 어떻게 해야 돼요?” “예수님 믿으세요.” “믿습니다.”하고 손들고 오는 이런 거. 그저 자기 유리하면 되는 거예요. 거기다가 어느 침례교회 목사처럼 “여러분, 은혜로 구원 받았기 때문에 사는 것도 은혜니까 여러분들이 살면서 어려운 것들이 있거든 주께 기도하면 은혜로 다 해결해 줍니다.” 이상하게 이야기가 이렇게 되어 버리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구원해준 은혜가 있기 때문에 그 큰 은혜가 은혜를 줬는데, 시시한 은혜는 안 주겠느냐,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생계문제, 정신문제, 어려운 일이 있으시면 뭔가 가게가 부도나면 기도하시면 가게 회복됩니다. 아직도 회복 안 되는데.... 구하려면 하루에 몇 시간, 8시 40분부터 9시간, 10시간, 몇 시간해야 성공이고 탈락인 거예요? 커트라인이 어디에요? 기도 몇 시간해야 돼요?

히브리서는 항상 예수님만 봐라. 항상 예수님만 바라봐라, 이겁니다. 예수님만. 항상 예수님만 봐라 바라, 이 말입니다. 히브리서 4장 1절 봅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 지 아니함이라” 그러니까 복음을 백날 들어도 지식으로 듣는 것이고, 직접 말씀이 우리 속에 지식을 째버리고 지식은 찢어져야 돼요. 압니다, 하는 것은 찢어져야 돼요. 지식이 안 찢어지면 “압니다.” 이렇게 되는데 지식을 찢어버리면 “주여, 주께서 구원하십니다.” 이리 나옵니다. “주님이여, 내 구원 받을 것은 요 정도, 요정도, 알아야 되겠지요?” 이리 나오는 게 아니고 내가 안다는 것도 의미 없어져야 돼요. 알아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님을 알 때면, 우리는 그냥 주께서 우리를 구원 하시는구나! 이리 사시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신앙생활 따로 없어요. 평소에 살아가는 게 다 신앙생활이에요. 자전거타고 운동하든 전부 다 이게 신앙, 신앙, 1시간 타고 오면서 신앙, 신앙, 전부 다 신앙생활이에요. 신앙 아닌 걸 무슨 수로 뽑습니까? 아닌 게 어디 있어요? 다 신앙인데. 잠자는 것도 신앙인데. 잠자는 것도 신앙생활하기 힘들어요. 잠을 깨워요. 신앙하고 또 자야 되는데.

본문6절 다시 봅시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야~ 이 질문 참, 진짜 이런 질문하기가 굉장히 힘든 질문이에요. 하나님 앞에 설 때, 이런 질문밖에 할 수 없어요. “주여, 누구십니까?” “주여, 내가 아무것도 아니잖아요.”그 질문,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 이렇게 해주세요, 하고 정반대지요. 그냥 덮쳐버릴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주여, 왠일이십니까? 이 누추한 곳까지.“ 이런 식이라. 손님이 올 때, ”아이고, 청소도 안했는데 갑자기 왠일이십니까? ”아무것도 아닌데 누추한 곳에 임하십니까?” ”어떻게 저를 생각해 주십니까?” 이리 되는 거예요.

이런 고백은 십자가와 더불어 나타날 때, 니는 나의 형제다, 이렇게 이야기할 때 더 이상 내 쪽에서 할 일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거예요. 내 쪽에서 구원 받기 위해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성경은 우리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벌거벗는 것도 주께서 다 벗겨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알아서 벌거벗을 필요도 없어요. 주께서 말씀으로 다 벗겨주십니다.

그 다음에 “저를 잠간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 씌우시며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케 하셨느니라“ 했지요. 이게 다윗 같으면 다윗 아래 전부 다 복종됩니까? 다윗은 만물을 복종시키는 게 아니고 오히려 복종을 받았어요. 다윗을 굴복한 게 뭐냐, 여러분들도 들어보면 아하! 그거! 다 아시지만, 말하기 전에는 상당히 난감하지요. 다윗을 굴복한 것은 ‘죽음’이고 다른 말로 하면 이게 ‘죄’입니다. 그래서 로마서5장에서는 죄의 왕 노릇이라고 해요. 이게 요번 주 설교에요. 죄의 왕 노릇.

아까 대통령과 왕의 차이를 이야기했지요. 대통령은 우리가 임의로 바꿀 수 있지만, 왕은 갇혀있는 셈이 되기 때문에 왕이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옵니다. 그런데 우리의 왕 이름은 뭡니까? 우리의 왕 이름은 ‘죄’ 다른 말로 하면 ‘죽음’ 어떤 인간도 죽을 수밖에 없어요.

2장 14절 봅시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이리되어 있지요. 사망의 세력이 어디에 작용한다 했습니까? 혈육에 작용하는 거예요. 주님께서 우리의 육신이 되지 않고 밖에 계시면서 “야, 야, 날 믿으란 말이야.” 이렇게 하면 우리는 혈육에 속했기 때문에 “예, 믿습니다. 믿습니다.” 해도 믿음의 실체가 없다니까요. 왜, 나는 늙어가고 있고 나중에 치매 걸리면 “누구십니까?” 이리된다고요.

혈육에 속했다는 말은 혈육조차도 우리가 관리대상이 안 된다는 겁니다. 혈육을 죽음이 왕 노릇해서 쥐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하는 게 아니고 혈육에서 작용하는 죄가 시키는 대로 우리는 말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어요. 그걸 한 자로 이야기해서 ‘욱’ 욱하는 거예요. 사람이 정도에 따라 다른데 욱하는 성질이 다 있어요. 사람이 기분 나쁜 일이 있을 때는 욱이 자주 되고 기분 좋은 일이 생기면 욱할 수도 있는 문제를 “그래, 잘 먹고 잘살아라.” 그냥 넘어가는 수가 있어요. 왜? 다른 기분 좋은 일이 있었기 때문에. 곗돈 탔다든지, 복권 당첨됐다든지, 기분에 막 쓰는 기라, 욕해도 ‘아~ 욕해라, 니 욕해도 로또1등 안됐지?’ 혼자 기분 좋아서. 그런데 로또 당첨 되는 줄 알았는데 번호를 착각해서 못 됐다. 그러면 아까 용서해줬던 걸 찾아가서 도로 용서 뺏어요. 인간의 육신에서 만들어낸 것은 육신과 더불어서 자기 한계에 이릅니다.

그래서 우리가 정말 기분 좋게 용서할 수 있으려면 우리가 육신과 벗어난 관계 속에서 해야 돼요. 내 육신과 벗어난. 육신에 대해서 어떤 것도 묻지 아니하고 구원해 주신 어떤 것. 내 육신이 이렇게 행동했다, 저렇게 행동했다. 묻지도 아니하시고 다른 육신에 의해서 구원됐을 때는 우리는 내 육신 때문에 내가 분노나 화를 가질 이유는 없지요. “그래, 알았어, 알았어, 잘 먹고 잘 살아” 이렇게 되는 거죠.

고린도전서에 보면, 너희들이 누가 교회에서 돈 빌려주고 돈을 떼어먹고 도망치더라도 고소하지 말라, 했습니다. 차라리 속는 것이 속이는 것보다 낫지 않느냐, 참, 사도바울도 마음이 넓어. “아이고, 속임 당해서 기분 나쁩니다. 정말 돈이 문제가 아니고 누구한테 속임을 당했다는 자체가 내가 너무 등신 같고 바보 같아서 살기가 싫습니다.” 그럼 주님께서 하는 말이 “니가 누굴 속였느냐?” “아니요.” “그러면 됐잖아.” 속고 속이는 세상, 육적인 세상 자체에서 구원이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잖아, 라는 뜻이에요.

아내 있는 자는 없는 자같이 하고, 돈이 있는 자는 다 쓰지 못 한 것같이 하라, 아마 불신자들이 그 이야기를 들었으면 교회 앞에 대기하고 있을 거예요. 신자들은 말씀대로 지킨다. 신자들은 분명히 오늘 그들이 신봉하는 목사들한테 돈을 다 쓰지 못한 것같이 하라는 말씀을 분명히 들었기 때문에 나올 때 통장 버리려고 다 나올 거다. 비밀번호하고 도장하고 다 버릴 거다. 그러면 나는 그 때 바구니 들고 그 돈 다 쓰지 못하고 남아있는 돈 회수하면 나는 부자 된다. 라고 생각해서 교회 앞에서 기다려봤자 교인들이 더 화를 내고 나간다는 사실을 그들은 불신자들은 모르지요. 오늘도 설교 이상한 거, 들었다. 그러면 불신자가 “아, 신자라도 말씀을 안 듣는구나!” 교인들이 하는 말이 “들을 것만 듣고 안 들을 거는 안 듣는다. 이게 교회야. 몰랐지? 너는.” “그러면 주님을 사랑 안하잖아.” “나만 사랑해. 이게 교회야.” 그냥 주님을 이용할 뿐이지, 어림 반 푼도 없지.

혈육에 속했다, 이 말은 우리 혈육에 대해서는 이미 이걸 수리하거나 개선할 의지가 전혀 없다는 뜻이에요. 예수님이 혈육에 속함으로 말미암아 이미 구원됐느냐, 안 됐느냐 결정은 내 혈육이 아니고 우리의 혈육에 속했던 예수님의 혈육에서 판단 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구원되려면 반드시 이겨야 될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2장 14절에 보면, 누굴 이겨야 돼요? 육신과 관련된 마귀거든요. 마귀를 이겨야 돼요. 그런데 우리는 육신에 속했기 때문에 마귀를 이길 수 없습니다. 왜냐 그러느냐 하면, 이미 우리가 선악과를 따먹어서 우리가 죽는 몸이 되는 이건 누구 말을 들어서 그런 거예요? 마귀 말을 들어서 됐기 때문에 우리 육신이 누구 말을 더 좋아하게 돼 있느냐 하면, 예수님 말보다도 마귀의 말에 결국 따라가게 돼 있어요. 뻗대도 결국은 따라가게 돼 있어요.

“자, 여러분,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닙니다. 오시면 설탕하고 밀가루 드립니다.” “아이고, 저거 분명히 건강기구 파는 거고, 노인들 꾀어서 하는 건데.” “60대 아줌마들 오세요, 젊은 사람들 오지 마세요. 이거 효도차원이기 때문에 60대만 넣어줍니다. 특별히 홍보차원에서 하기 때문에 그냥 무상으로 드립니다.” 이렇게 할 때, “그래, 한두 번 속나 안가. 안가.” 그런데 안가할 때마다 가고 싶은데 어떻게 합니까? 죄를 안 지으면 안 지을수록 죄를 지을 수 있는데도 안 지었기 때문에 마치 죄를 언제든지 지을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거예요. “주여, 많이 참았잖아요.” 이렇게 해가지고. 하여튼 핑계 없는 일은 없어요. 뭐든지. “주여, 남들은 금방 지었지만, 나는 일주일 버텼잖아요. 봐주소.” 이렇게 해서 짓게 돼요.

우리가 누구한테 한 소리 들으면, 그 들은 소리가 계속 우리한테 우리의 끊을 수 없는 유혹으로 계속 온다니까요. 하나님께서 마귀로 하여금 그렇게 일하도록 하셔요. 니가 아무리 죄 안 짓고 싶어도 결국은 너는 내 말보다도 마귀 말을 더 좋아하는 그런 육신을 니 몸이 지니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니 육신의 행함을 의지하지 말고 니의 죄로 죽으신 피, 죽어야 피가 나올 거 아닙니까? 니 죄 때문에 나와야 했던 예수님의 육신에서 흘려졌던 피, 그 피가 죄 많은 너의 육신마저 하늘에 속한 형상으로 바뀌게 만든다는 고린도전서15장의 말씀을 니가 믿어라, 이 말입니다.

우리가 안 한다, 안 한다, 두 번 다시 안 본다, 그 짓 안한다, 소용없습니다. 다만 그런 기회 되면 우리는 하게 되어 있고 하면서 그냥 하는 게 아니고 십년간 안했잖아요. 담배 10년간 안 피웠잖아요. 이런 거요. 예수 믿고 5년간 안 마셨는데 요건 마시겠습니다. 그래놓고는 5년 뒤에는,  그 때 5년 전에 마신 것은 어쩔 수없이 마신 거고, 지금은 마시는 거 아닙니다. 누가 술 안 마셔서 구원된다고 한 적이 있습니까? 괜히 자기가 자기 법을 만들어 놓고 그동안 지켰다, 안 지켰다, 이리하는 겁니다.

9절 끝에 봅시다. 예수님께서 천사보다 잠간 못하게 하셨음은 이는 다윗이 아니고 예수님이라는 이야기거든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게 하려하심이라, 그러니까 사람들이 생각하는 죽음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백날해도 맛볼 수 없습니다. 왜? 이유가 뭐라 했습니까? 아직 들 죽었으니까. 죽도록 충성하라, 그러면 생명의 면류관을 얻는다, 할 때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이 죽기 직전까지 말하는 것이 아니고 죽어봐야 돼요. 그러니 우리는 살아생전에 이 말씀을 못 지킵니다. 죽도록 충성하라는 살아서는 못 지키지요. 죽어야 지키니까. 살아있을 동안은 못 지키잖아요. 죽을 뻔 했다가 살아난 것은 안 쳐져요. 아직 들 죽었으니까.

죽음을 맛보게 함으로 말미암아 이미 모든 구원에 권한은 우리 선에서 이미 떠나갔습니다. 자, 이제 어렵습니다. 떠나갔을 때 우리 육신으로부터 우리의 지식으로부터 떠나가 버렸습니다. 떠나가면 우리 인간은 육신에서 내가 경험한 것만 기억하게 돼있는데 우리 육신을 떠나가 버리면 십자가 달린 분이 죽었다가 살았다, 를 우리가 무슨 수로 알아차립니까? 우리의 머리와 영혼과 모든 것에서 떠났는데. 모르잖아요.

모퉁이 길을 걷다가 동창생을 만났다. “야, 반갑다.” 할 때 우연히 골목을 돌다가 만나서 반가운 거 하고 2층에서 쓱 내려다보니까 동창생이 골목 돌아오는 것을 알고 1층에서 내려가지고 “야, 반갑다.” 연기하는 거 하고, 같을 수가 있습니까?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을 때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이런 경우는 없어요. 그거는 아직까지 십자가를 안 만난 사람이에요. 정말 십자가를 딱 부딪치면 “제가 무엇이관대 저를 구원하십니까?” 오히려 죽어야 되는데 살려주십니까? 하는 것이 한꺼번에 튀어나와요. 1초 직전 까지만 해도 살아야 돼 살아야 돼 하다가 갑자기 십자가 들어 받치는 순간 죽어야 되는데 살려주셨구나! 이미 내가 알던 그 사람의 노선과 다른 새로운 노선으로 천로가 바뀌어요. 구원받은 천로는 뭐냐 하면, “아, 내가 세상에 이런 복을 받다니?” 이런 노선이고, 구원 받지 못한 천로는 “주여, 얼마나 더 하면 더 드리면 내가 구원받습니까?” 헥헥 거리는 노선이라.

저 쪽 노선은 찾는 사람이 많아 비좁아요. 사람이 많아. 이 쪽 노선은 헐해요. 텅텅 다 비었어요. 그것은 그 만큼 주께서 뽑아준 사람이 적기 때문에 그래요. 참 복잡 안하고 널널하니 느리다고 해도 우리의 욕심은 이렇습니다. 찾는 사람이 많아 답답한 건 피해서 조용하게 혼자 믿게 해주면 고맙다고 안하고 “왜 이리 믿는 사람이 없습니까? 외로워서 미치겠습니다.” 외롭다고 난리에요. 조용하니 전셋집 다 비워놨는데. 주께서는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될지.

11절 다시 봅시다.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거룩하게 하시는 자는 누구지요? 예수님이지요. 10장 10절 읽어보세요.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보세요.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림으로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지요. 이게 얼마나 어려운 말인지 여러분들은 아셔야 돼요. 그리스도를 단번에 드렸다, 하는 것은 우리 몸이 아니잖아요. 주님 몸이잖아요. 주님 몸에서 일어난 그것이 어떻게 우리 몸이 거룩함을 얻지요? 그 중간이 뚝 떨어졌는데. 인간이 떨어져 있잖아요. 같이 딱 붙어 있던가요? 떨어졌는데. 뭐든지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간 것들은 몰라요. 지금 여기에서 5키로 떨어진 아줌마가 하는 이야기 목사님은 압니까? 난 모르지요. 5키로인데 들어봐도 모르지요. 내 몸을 떠났으니 모른다 말이지요. 내 시력 안에 있는 것 같으면 저 사람이 뭐하고 있구나 이리 아는데 내 시력밖에 있을 때 어떻게 알아요. 모르잖아요.

이 히브리서 이야기는 전부 다 우리가 모르는 이야기라니까요. 모르는 이야기인데, 우리가 이걸 읽었다고 해서 “아, 이런 일이 있었구나!” 하고 알지만, 그것은 지식이 된다니까요. 이순신 장군이 칼에 찔려 죽었잖아요. 그거 우리 알잖아요. 독도는 우리 땅 알지요. 이순신이 죽었다는 걸 알지요. 하지만 내 몸에 이순신 장군 영혼이 들어있습니까? 내 몸에 이순신장군 영혼 들어있으면 이리 안 있습니다. 이순신장군 모자 쓰고 그림하나 붙여놓고 앉아서 반말하면서 “뭐 때문인지 안다!” 순신이 장군, 아 오시는구나! 이리 있어야 돼요.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건 아는데, 독도는 동해바다에 있지, 내 안에 있지 않아요. 내 육신에 있지 않아요. 문신해도 소용없어요. 우리 몸밖에 있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성경에 이렇게 예수님이 했다는 것을 이런 일은 아는데, 이게 어떻게 내 안의 말씀으로 되느냐 이 말입니다. 내 안의 말씀으로. 이게 보통 어려운 문제 아니잖아요. 굉장히 어려운 문제 아닙니까? 불가능한 문제에요. 홍해바다 갈라져도 소용없어요. 홍해바다 갈라진다 해서 말씀이 내 안에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요단강 갈라져도 내 안에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산이 뽑혀서 바다에 빠져도 안 되는 거예요.

2장 봅시다. 2장 11절 끝에 봅시다.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형제라 부르시기를 그 다음에 뭡니까?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라는 말을 보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뭔가 우리 보기에 “아이고, 치사합니다.” 또는 “아이고, 낯 뜨거워라.” 라는 식으로 우리에게 작용한다고 볼 수 있지요. 주님이 영광스러워 보이지만 우리에게 나타날 때는 상당히 우리가 기피할 수 있는 인물이에요. 우리가 “앞으로 나보고 안다 하지 마세요.“ 이런 식으로 슬슬 밀칠 수밖에 없는 식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지요.

우리가 부끄러워하는 것. 그럼 우리의 부끄러워하는 것의 반대가 뭐죠? 우리가 자랑스러워하는 거죠. 결국 주님께서는 우리가 원하고 기대하고 갖고 싶어 하고 자랑스러워하는 것과 그런 것들로 나가는 것을  뒤에서 치마 자락이나 바지가랭이를 뒤로 잡아당기면서 뒤에를 봐라, 하고 우리로 하여금 ”아이, 부끄러워라.“할 정도로 뭔가 돌아보게 하는 작용 다시 말해서 말씀으로 우리를 부끄럽게 만드는 겁니다.

내가 주님은 재껴 놓고 “내가 평소에 이런 게 있어야 자랑스러운 내가 되겠습니다.” 하는 그 자체를 부끄럽게 만드는 말씀에 작용, 그것은 말씀이 들어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순신영이 들어온 겁니다. 독도의 영이 들어온 거예요. 결국 신앙생활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 누가 침범해 가지고 우리 전체를 장악했을 때 그 신앙생활 되는데, 장악해서 우리가 원하는 되고자 하는 노림수가 결국 뭐냐 하면, 앞으로 니가 예수님 못지않게 처절하게 왕창 망하는 인생을 산다 할지라도 니는 오히려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겨라, 하는 식으로 오신 거예요. 고난의 동참하는 식으로.

그 증거를 대라면 히브리서 11장에 소위 말하는 믿음의 짱! 거기에 보세요. 거기에 나오는 믿음의 조상들을 보면, 세상 적으로 사람들이 기대했던 자랑스러운 일들을 했던 분들이에요? 대통령했습니까? 대통령 떨어지니까 노원병가서 국회의원 되려고 나왔습니까? 그런 거 했어요? 아니면 TV팔고 스마트폰 팔고 부산에서 제일제당 세워서 설탕 팔아먹다가 제일모직하고 해서 재벌 된 그 사람 돼야 우리가 안 부끄러워요? 우리는 은연중에 그걸 기대하고 있지요. 육신이니까.

그런데 막상 정말 우리가 자랑스러워 할 것은 그저 세상만 쳐다보고 있는 우리를 뒤에서 치맛자락, 바지가랭이 잡아 가지고 “뒤를 봐, 뒤를 봐!” 볼 때 “주여, 제가 죄인입니다.” 고백케 하는 그 능력, 말씀의 능력, “제가 엉뚱한 것 가지고 자랑스러워했습니다.” 그런 걸 생각하면, 전목사님이 암벽을 타도 사람들 앞에서 동영상 찍고 있는데 미끄러져가지고 어떤 사람이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는데.” 그래서 또 올라가서 또 떨어졌어요. “아이, 원숭이가 아니구나!” 하여튼 뭔가 솜씨를 뽐내려하는데 일이 안되고 웃사스럽게 될 때 그런 뭔가 우리를 잡아당기는 낮은 곳에서 우리보다 더 낮은 자리에서 잡아당기는 주님의 능력, 그것이 바로 말씀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벌거벗게 만드는 거예요.

벌거벗게 만듬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우리가 배추밭 앞에서는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어요. 치매환자들 앞에서는 우리가 그들을 비위를 맞출 필요도 없고 안 맞출 필요도 없고 배추밭 인간들 앞에서 그들의 비위를 위해서 살 이유도 없고 그들을 의식할 필요도 없는 거예요. 아까 이야기했지요.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그것은 십자가 아는 순간 우리한테는 아무 의미 없습니다. 나 같은 인간도 구원하시다니! 이런 고백만이 세리와 창기와 삭개오와 바디매오와 저는 자와 병든 자, 그런 사람이 한 결 같이 그리스도만 찬양했던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 보내주셔서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것을 해결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를 뚜렷이 볼 수 있도록 우리가 엉뚱한데 바라보고 있으면 우리의 시선을 십자가로 돌이키시는 능력이 저희에게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