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130412b-히2장6절(사람과 인자) - 이 근호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다윗에서 십자가를 경유해서 히브리서 오려면 결국 뭐가 다윗에 넘어가면서 다윗에 있는 것이 몽땅 다 십자가에 죽는데, 그냥 죽지 말고 십자가에서는 다윗의 모든 것이 죄 또는 다른 말로 죄인으로 죽어야 된다. 그러면 다윗이 믿은 것도 믿음이잖아요. 그러니까 믿음도 십자가에서 죄라고 규정받아서 여기에 그리스도에 의해서 해결될 그런 입장이라면 믿음자체가 성립이 안돼요.
인간이 믿는 믿음 있잖아요.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는 그 자체가 인정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믿음인데, 믿음 또는 사랑 있지요. 신명기에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되 니 몸과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라, 했잖아요. 사랑만이 하나님과 통하는 유일한 통로인데, 그게 십자가 사건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자기 사랑은 먹힌다고 생각하지요.
오늘 신약 성도들이, 신약에 있는 사람들이 성령을 받아서 십자가 영을 받기 전까지는 자기가 교회에서 충성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서 의미 있고 먹히고 복 받을 만한 짓이라고 하는 순간, 십자가의 피를 듣는 진짜 말씀이 덮치는 순간 지금까지 내가한 모든 헌금과 기도와 선교와 전도와 모든 설교와 강의 모든 것이 전혀 나를 구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의가 아님을 아는 거예요. 그러니까 시간적으로 구약만 어려운 게 아니라 오늘 신약도 마찬가지에요.
성령이 오게 되면, 뭐가 교체되느냐 하면, 내가 시작해서 구원받고자 하는 내부터 출발하는 그 출발점이 뭐로 바뀌더냐 하면, 예수님으로 바뀌어 버립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구원받는 거예요. 출발점이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라는 고백이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내 쪽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를 보여주기 위해서 나왔던 모델들이 누구냐 하면, 세리와 창기와 강도와 삭개오라는 사람, 이런 사람들, 바디매오 소경,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 38년 된 병자, 베드로의 장모, 3번씩이나 부인했던 베드로, 제자 다 마찬가지거든요.
그런 사람들을 죽~ 나열한 이유는 그쪽에서 뭔가 시작해서 구원받았다는 일반적인 구원의 논리를 십자가가 전부 다 뒤엎어 버립니다. 이게 바로 뒤집어 전입니다. 뒤집기. 뒤집어서 나의 잘나던 행함들이 십자가 밑에 깔리고 나는 오직 피만 죄를 향하여 평생 죄지를 나를 위해서 피만 흥건히 묻어있는 그 면만 우리는 성령을 통해서 볼 수 있지요. 그걸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께서 나타날 때, 그냥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온 피투성이 된 채 나타난 것과 같은 말이에요. “아이고, 주님, 누구한테 테러 당했습니까?” “깡패한테 맞았어요?” 하면 “니는 나를 핍박하는 자로다.” 니 죄 때문에 피를 흘린 줄 모르고 우리는 착한 내가 잘 섬기는데, 못된 인간들이 주님을 그렇게 괴롭힌 줄 아는데 사실은 우리 자신이 주님을 그렇게 피 흘리도록 만든 거예요. 우리는 우리 자신을 너무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이란 단어가 나왔는데,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사랑을 받는 게 아니고 우리의 사랑을 부셔버려요. 왜냐 하면, 우리는 내가 뭘 사랑했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타인들을 찾아다닙니다. 그래서 어느 남자가 나를 사랑해주게 되면, 어느 남자를 나를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내가 미처 모르는 사랑 받을 게 내게 있었나보다, 하고 자기 자신을 다시 살필 수 있는 기회가 돼요. 그래서 남자는 나 있는 그대로를 사랑해 주는데 사랑을 받는 여자는 평소에 자기가 미처 몰랐던 장점을 개발하게 되면 더욱 더 사랑을 많이 받을 수 있다고 여기고 사랑받는 짓을 해요. 그러니까 남자는 떠나는 거예요. 가만히 있으면 사랑받을 걸. 나대서 사랑하는 자 쫓아버려요. 사랑은 항상 내가 뭐지? 진짜 나다운 게 뭐지? 항상 미진해요. 결핍이고. 허전하고. “야, 정말 저 정도 같으면 내가 나한테 반할만하다.” 라는 것을 기어이 찾을 때까지 계속 헤매고 다닙니다. 모든 인간은.
그런데 문제는 내가 만족하겠다하는 목표점을 내가 모른다는 거예요. 어느 정도 돼야 내가 만족한지를 본인은 몰라요. 그러니 만나는 사람마다 물을 수밖에 없는 거예요. 묻는 게 뭐냐 하면, “내가 어떠하면 되겠어?” “얼마면 돼?” 내가 어떤 인간이 되면 당신에게 사랑 받을 수 있느냐? 그것은 당신에게 사랑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은 나를 사랑해, 하는 순간 ‘아, 내가 이 정도하면 사랑받을 수 있구나“를 내가 스스로 만족해서 이 떠돌이 생활을, 이 떠돌이 된 정신을 이제는 가라앉힐 수 있겠구나,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렇게 치매 걸린 이 인간들을 주께서 그 사랑을 인정해 줄까요? 택도 없는 소리. 문제는 그 타인 속에 누가 있느냐하면, 바로 하나님, 예수님을 거론한다는 거예요. 나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누구 좋아라고? ”니는 지금 나보고 사랑한다고 하는데 니가 사랑이란 단어를 알고 하는 것이냐?“ ”누구 좋아라고 사랑하는데?“ ”나를 좋아라고 사랑하지요.“ 그거는 사랑이 아닌 거예요.
밀양이라는 영화에 보면, 자기가 주님을 영접했다고 자신만만했지요. 남들이 기도하고 울고불고하니까 따라하면 지도 믿음 있는 줄 알고 울고불고 따라했지요. 그런데 자기 아들을 유괴한, 서울 살다가 밀양에 내려왔는데 아들을 유괴해서 죽여 버린 그 사형수를 이제는 자기가 전도하기 위해서 교도소가서 “비록 당신은 내 아들을 죽였지만, 나는 예수님의 사랑으로 당신을 이제는 용서하고 예수님을 영접하세요.” 전도를 하려고 하는데 그 사형수가 먼저 이리 이야기하는 거예요. “나, 벌써 예수님 영접했어요.”이러니까 화가 나서 “나, 이제 예수 안 믿어.” “예수 믿는 것은 다 거짓말이야.” 그 때 나온 노래가 뭐예요? 거짓말이야. 웃기잖아요. 생각해보세요. 믿는다는 것은 누구 좋아라고 믿는 거예요? 결국은? 자기 즐거움 때문에 예수를 믿은 거예요. 교회 가는 것도 즐거움 때문에. 그러니까 자기 즐거움에 대해서 일이 어긋나니까 빗나가니까 그 다음부터 누구든지 나를 건드리면 무조건 그것은 마귀로 간주하니까 예수님도 마귀네.
십자가라는 것은 결국은 뭐냐 하면, “니가 가짜인 것을 니가 아느냐?” 뜻이에요. “니가 나를 사랑한다는 그 사랑마저도 십자가 앞에서는 가짜로 들통날것을 니가 알고 있느냐?” 이 말이에요. “니가 나를 늘 믿고 하루도 안 빠지고 믿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너 같은 죄로 흘린 피가 피의 능력이 너로 죄인 되게 만드는 능력이 너를 구원한다.” 말씀이 옴으로 말미암아 히브리서4장에 보면, 벌거벗은 채 되지요. 벌거벗자, 하는 것은 무장 해제되는 거예요. 그렇게 될 때, 우리를 벌거벗게 하는 그 말씀이 우리를 구원하는 겁니다. 왜? 말씀 안에 뭐가 들어있기 때문에? 너의 죄를 위해서 이미 다 대가를 치뤘다는 그 말이 같은 바구니에 같이 담겨있기 때문에 그래요. 같이 담겨있어요.
이것을 가지고 뭐냐, 자기 부인의 영역입니다. 늘 십자가 안에서 피 안에서 우리는 자기를 부인해야 될 계속해서 반복되어야 되지요. 지난 수요일날 이야기했지요. 어제 믿음도 오늘 되면 새롭게 바뀌어야 된다. 어제 믿음은 어제 새롭게 된 것이기 때문에 어제 새롭게 된 것은 오늘까지 끌고 오면 안 된다, 이 말이에요. 그럼 어제와 오늘 가름하는 것은 뭐냐, 잠이에요. 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날이다. 그 날 속에 인간은 갇혀있어요. 낮과 밤사이에 뭐가 있느냐, 잠을 자잖아요. 잠자는 이것이 뭐냐 하면, 이미 인간은 죽은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징후라 하는 거예요.
병들면 병의 증상이 나타나잖아요. 증상 같은 거예요. 악한 성폭행 범이나 살인자들 잠자는 거 보세요. 천사 같아요. 그렇게 나쁜 인간도 잠잘 때 보니까 수면내시경해보세요. 이거는 간호사가 어떻게 만져도 할 수 없어요. 아무도 몰라요. 잠자면. 애들 잠잘 때 보세요. 천사 같지요. 어른들 잠잘 때보면 시체 같아요. 진짜 시체 같아요. 그냥 안 잡니다. 입 벌리고 잡니다. 근육의 힘이 없어서. 아, 이것이 바로 진솔한 내 모습이다. 이렇게 잠자면 아무것도 아닌데 남한테 자존심 세우려고 이렇게 하느냐, 박 근혜 잠 잘 때 시체에요. 깨면 대통령으로 착각하는 거예요. 대통령이라 하는 것은 역할을 맡은 거예요. 대통령 일을 제대로 못하면 대통령이라 인정을 못 받아요.
옛날 왕은 안 그래요. 왕은 못나도 왕, 잘나도 왕, 정박아 돼도 왕이에요. 왜? 인품보고 왕이 결정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왕 자리가 인품과 상관없이 왕을 만들어주지만 대통령자리는 사람들이 대통령 뽑을 때 기준이 있어요. 그 기준에 합해야 계속 대통령으로 유지될 수가 있어요. 국민들의 나라와 건강과 재산과 국토를 지킬 책임자가 대통령이거든요. 나라의 국민들의 재산과 신체의 생명과 영토를 지킬 책임자가 대통령이기 때문에 대통령 그 일을 수행 할 때만 대통령이지, 지금 이명박 나오면 대통령입니까? 아니잖아요.
왕은 그런 게 아니에요. 예수님은 왕입니까? 대통령입니까? 우리가 뽑았어요? 투표해서 우리가 예수님을 왕으로 뽑았습니까? 왕이기 때문에 우리의 어떤 잘못도 관계없이 은혜의 왕 노릇하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되는 겁니다. 그래서 백부장이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온다는 것은 제대로 하면 믿겠습니다. 이런 뜻이 아니에요. 제대로 하면 믿겠습니다, 하는 그런 식으로 우리가 왕한테 요청할 수 있는 권한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저 반드시 구원해 줘야 돼요, 라는 요청을 왕을 향하여 할 소리는 아니에요.
그걸 보여주는 재미있는 대목이 왕의 아들이 혼인잔치를 벌이는 대목입니다. 왕의 아들이 혼인잔치를 벌일 때, 그 초청된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본인결혼식이 있었어요. 본인 결혼식 미루고 남의 결혼식 가는 바보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의도적으로 본인결혼식하고 겹친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은 어디가야 됩니까? 본인 결혼식해야지, 남의 결혼식갑니까? 부주 내러 갑니까? 바로 그걸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이야기했을까요? 너는 왕이 아니고 이쪽은 왕의 아들의 결혼식이잖아요. 그러니까 너보다도 누가 더 중요하다? 너보다 더 중요한 분이 있을 때 너는 그 왕의 백성이 된다, 이 말입니다.
천국의 백성이 된다는 말은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고, 누가 제일 귀하다는 말입니까? 평소에는 내가 제일 귀한데 예수님만 생각하게 되면 나보다 더 귀한 분이 예수님입니다. 인간의 잠자는 것은 자기의 모든 행함을 중지하는 겁니다. 의지 소용없어요. 지 자존심, 체면 소용없어요.
잠잔다는 거, 인간은 이미 죽음에 의해서 규정되지, 살아있어서 어떻게 행동하느냐 가지고 규정되지 않습니다. 이미 죽기로 돼있는 거예요. 나쁜 짓해서 죽습니까? 아니지요. 나쁜 짓해서 죽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 하기 위해서 죽습니다. 이게 심판의 기준입니다. 그래서 구원 받는 사람은 행동을 똑바로 해서 구원받았습니까?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어서 구원 받았습니까?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어서 구원받은 거예요.
그리고 지옥 가는 사람은 무엇 때문에? 나쁜 행동한 게 아니고 행함 이외는 믿을 게 없기 때문에. 지 행한 것만 생각하기 때문에 지옥 가는 거예요. 그게 행위 책이에요. 이쪽은 생명책이라고요. 왜 요한계시록20장에 나오는가 하면, 앞에 선악과, 생명나무 그걸 염두에 두기 때문에 그런 말씀하신 거예요. 선악과 따먹은 자는 이유 불문하고 다 죽게 돼있고, 생명나무 따 먹은 자에 한해서만 생명을 얻는다, 이리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다 아는 이야기지만, 시장에 가서 반찬 고를 때, 갈치를 살까? 고등어를 살까? 그래, 생명은 고등어에 달린 게 아니야, 이렇게 사야 되는데, “아우, 갈치 살 걸”오면서 계속 후회하지요. 생명은 갈치나 고등어가 중요한 게 아닌데 “아우, 나는 치매, 장보러 나오면 안 돼!” 후회하지요. 후회하면서 또 기도하지요. “주여, 어찌 이럴 수가! 제가 무슨 잘못이 있어가지고 이런 재앙을.” 이리 나온다 말이지요. 갈치, 고등어 아무 상관없어요. 생명나무를 먹어야 생명입니다. 분명히 아는데 돌아서면 또 시장가면 딴생각하고.
자, 그 다음에 6절을 봅시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여기서 사람을 예수님으로 집어넣읍시다. “예수님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하나님께서 저를 생각해 주십니까?” 이렇게 되면 다윗 때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가 여기 십자가 이후에는 성부와 성자의 관계로 이미 거기서 확정되지요. 그 다음에 인간의 문제는 성부와 성자, 인간과 하나님 사이, 인간이 다윗이잖아요.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계시를 받아서 사람이 무엇이관대, 하는 것은 첫 째, 사람을 말하는 것이고, 인자가 무엇이관대, 하는 것은 인자는 다윗 본인을 말하는 거죠.
그러니까 사람과 인자에서 다윗은 무엇의 일부다? 사람의 일부라, 사람의 일부라는 말은 다윗이 인자가 되어서 어떤 계시를 받는다는 것은 나 빼놓고 다른 사람에게도 내게 받은 계시의 효과가 그들에게 전달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있다는 말이에요. 요게 사람과 인자의 관계가 그대로 십자가 이후에 예수님한테 장착이 돼버리면 예수님이 혼자 착해서 혼자만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과 관련된 구원받을 사람들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11절 봅시다.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여기 형제라 했지요. 형제라 부르시면서 그 앞에, 형제라도 남남이잖아요, 그렇게 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그 앞에 다 무엇에서 난다? 다 하나에서 나지요. 다 하나니까 근원적인 하나, 진짜 하나, 원래 하나가 있을 거 아닙니까? 누구란 말입니까? 인자되시는 예수님이다. 그게 시편에 있을 때는 다윗이 되던 게 그 말씀이 십자가를 뒤집어쓰니까 하나가 누굽니까? 예수님이 되는 거예요.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준적이 없다. 보혜사 이만희도 아니고 사도 바울도 아니고 다윗이름도 아니고 누구이름? 예수 이름 이외에는 다른 이름으로 구원 받을 자격이 없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 하나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구원이 나오고, 영생, 천국, 지옥, 하나에서 다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이 하나가 다윗이라면 다윗에서 나온 구원과 영생과 천국과 지옥, 다윗이 생각하는 천국과 구원 이런 게 있다면 이것은 어떻게 될까요? 다윗이 생각한 구원과 천국과 율법과 땅이고 하늘나라고, 지옥 이런 개념들은 어떻게 해야 됩니까? 어디서 다 폐기처분돼야 돼요? 십자가상에서. 다윗도 예수님 하나 앞에서 자기는 하나인 것을 접어야 되지요. 요거 접으면서 다윗 생각하는 구원, 영생, 천국, 사랑, 소망, 믿음 그것도 다 폐기처분해야 돼요. 그래서 아까 십자가 믿음 자체가 성립된다, 성립되지 않는다, 하는 그런 이야기를 해드린 겁니다.
10절에 보면,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라 할 때” 이 구원이라 하는 것이 우리가 먼저 옛날에 있었던 그 구원은 구원이 아니다, 이 말입니다. 옛날 구원은 왜 구원이 안 되어야 되는가 하면, 죽기 전에 구원은 왜 안 되느냐 하면, 그 구원의 주인공이 누굴 반드시 집어넣어요. 본인을 집어넣을 거 아닙니까? “주여, 구원받고 싶습니다.” 누굴 집어넣어요? “주여, 저 빼고 구원해 주세요.“ 이러지는 않는다, 말이지요. 아까 누구만의 하나라고 했습니까? 예수님만이 하나인데, 갑자기 우리 쪽에서 생각한다면 누구를 하나라고 들어가게 돼요? 결국 자기 자신을 집어넣으니까 이것은 십자가에서 탈락, 빼야 되는 겁니다.
이걸 보면, 오늘날 한국교회나 기독교라 하는 것이 얼마나 성경하고 아무것도 상관이 없는 인간의 종교적인 욕구들의 집합체라 하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죽어서 좋은데 가려하면 어떻게 해야 돼요?” “예수님 믿으세요.” “믿습니다.”하고 손들고 오는 이런 거. 그저 자기 유리하면 되는 거예요. 거기다가 어느 침례교회 목사처럼 “여러분, 은혜로 구원 받았기 때문에 사는 것도 은혜니까 여러분들이 살면서 어려운 것들이 있거든 주께 기도하면 은혜로 다 해결해 줍니다.” 이상하게 이야기가 이렇게 되어 버리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구원해준 은혜가 있기 때문에 그 큰 은혜가 은혜를 줬는데, 시시한 은혜는 안 주겠느냐,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생계문제, 정신문제, 어려운 일이 있으시면 뭔가 가게가 부도나면 기도하시면 가게 회복됩니다. 아직도 회복 안 되는데.... 구하려면 하루에 몇 시간, 8시 40분부터 9시간, 10시간, 몇 시간해야 성공이고 탈락인 거예요? 커트라인이 어디에요? 기도 몇 시간해야 돼요?
히브리서는 항상 예수님만 봐라. 항상 예수님만 바라봐라, 이겁니다. 예수님만. 항상 예수님만 봐라 바라, 이 말입니다. 히브리서 4장 1절 봅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 지 아니함이라” 그러니까 복음을 백날 들어도 지식으로 듣는 것이고, 직접 말씀이 우리 속에 지식을 째버리고 지식은 찢어져야 돼요. 압니다, 하는 것은 찢어져야 돼요. 지식이 안 찢어지면 “압니다.” 이렇게 되는데 지식을 찢어버리면 “주여, 주께서 구원하십니다.” 이리 나옵니다. “주님이여, 내 구원 받을 것은 요 정도, 요정도, 알아야 되겠지요?” 이리 나오는 게 아니고 내가 안다는 것도 의미 없어져야 돼요. 알아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님을 알 때면, 우리는 그냥 주께서 우리를 구원 하시는구나! 이리 사시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신앙생활 따로 없어요. 평소에 살아가는 게 다 신앙생활이에요. 자전거타고 운동하든 전부 다 이게 신앙, 신앙, 1시간 타고 오면서 신앙, 신앙, 전부 다 신앙생활이에요. 신앙 아닌 걸 무슨 수로 뽑습니까? 아닌 게 어디 있어요? 다 신앙인데. 잠자는 것도 신앙인데. 잠자는 것도 신앙생활하기 힘들어요. 잠을 깨워요. 신앙하고 또 자야 되는데.
본문6절 다시 봅시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야~ 이 질문 참, 진짜 이런 질문하기가 굉장히 힘든 질문이에요. 하나님 앞에 설 때, 이런 질문밖에 할 수 없어요. “주여, 누구십니까?” “주여, 내가 아무것도 아니잖아요.”그 질문,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 이렇게 해주세요, 하고 정반대지요. 그냥 덮쳐버릴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주여, 왠일이십니까? 이 누추한 곳까지.“ 이런 식이라. 손님이 올 때, ”아이고, 청소도 안했는데 갑자기 왠일이십니까? ”아무것도 아닌데 누추한 곳에 임하십니까?” ”어떻게 저를 생각해 주십니까?” 이리 되는 거예요.
이런 고백은 십자가와 더불어 나타날 때, 니는 나의 형제다, 이렇게 이야기할 때 더 이상 내 쪽에서 할 일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거예요. 내 쪽에서 구원 받기 위해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성경은 우리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벌거벗는 것도 주께서 다 벗겨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알아서 벌거벗을 필요도 없어요. 주께서 말씀으로 다 벗겨주십니다.
그 다음에 “저를 잠간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 씌우시며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케 하셨느니라“ 했지요. 이게 다윗 같으면 다윗 아래 전부 다 복종됩니까? 다윗은 만물을 복종시키는 게 아니고 오히려 복종을 받았어요. 다윗을 굴복한 게 뭐냐, 여러분들도 들어보면 아하! 그거! 다 아시지만, 말하기 전에는 상당히 난감하지요. 다윗을 굴복한 것은 ‘죽음’이고 다른 말로 하면 이게 ‘죄’입니다. 그래서 로마서5장에서는 죄의 왕 노릇이라고 해요. 이게 요번 주 설교에요. 죄의 왕 노릇.
아까 대통령과 왕의 차이를 이야기했지요. 대통령은 우리가 임의로 바꿀 수 있지만, 왕은 갇혀있는 셈이 되기 때문에 왕이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옵니다. 그런데 우리의 왕 이름은 뭡니까? 우리의 왕 이름은 ‘죄’ 다른 말로 하면 ‘죽음’ 어떤 인간도 죽을 수밖에 없어요.
2장 14절 봅시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이리되어 있지요. 사망의 세력이 어디에 작용한다 했습니까? 혈육에 작용하는 거예요. 주님께서 우리의 육신이 되지 않고 밖에 계시면서 “야, 야, 날 믿으란 말이야.” 이렇게 하면 우리는 혈육에 속했기 때문에 “예, 믿습니다. 믿습니다.” 해도 믿음의 실체가 없다니까요. 왜, 나는 늙어가고 있고 나중에 치매 걸리면 “누구십니까?” 이리된다고요.
혈육에 속했다는 말은 혈육조차도 우리가 관리대상이 안 된다는 겁니다. 혈육을 죽음이 왕 노릇해서 쥐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하는 게 아니고 혈육에서 작용하는 죄가 시키는 대로 우리는 말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어요. 그걸 한 자로 이야기해서 ‘욱’ 욱하는 거예요. 사람이 정도에 따라 다른데 욱하는 성질이 다 있어요. 사람이 기분 나쁜 일이 있을 때는 욱이 자주 되고 기분 좋은 일이 생기면 욱할 수도 있는 문제를 “그래, 잘 먹고 잘살아라.” 그냥 넘어가는 수가 있어요. 왜? 다른 기분 좋은 일이 있었기 때문에. 곗돈 탔다든지, 복권 당첨됐다든지, 기분에 막 쓰는 기라, 욕해도 ‘아~ 욕해라, 니 욕해도 로또1등 안됐지?’ 혼자 기분 좋아서. 그런데 로또 당첨 되는 줄 알았는데 번호를 착각해서 못 됐다. 그러면 아까 용서해줬던 걸 찾아가서 도로 용서 뺏어요. 인간의 육신에서 만들어낸 것은 육신과 더불어서 자기 한계에 이릅니다.
그래서 우리가 정말 기분 좋게 용서할 수 있으려면 우리가 육신과 벗어난 관계 속에서 해야 돼요. 내 육신과 벗어난. 육신에 대해서 어떤 것도 묻지 아니하고 구원해 주신 어떤 것. 내 육신이 이렇게 행동했다, 저렇게 행동했다. 묻지도 아니하시고 다른 육신에 의해서 구원됐을 때는 우리는 내 육신 때문에 내가 분노나 화를 가질 이유는 없지요. “그래, 알았어, 알았어, 잘 먹고 잘 살아” 이렇게 되는 거죠.
고린도전서에 보면, 너희들이 누가 교회에서 돈 빌려주고 돈을 떼어먹고 도망치더라도 고소하지 말라, 했습니다. 차라리 속는 것이 속이는 것보다 낫지 않느냐, 참, 사도바울도 마음이 넓어. “아이고, 속임 당해서 기분 나쁩니다. 정말 돈이 문제가 아니고 누구한테 속임을 당했다는 자체가 내가 너무 등신 같고 바보 같아서 살기가 싫습니다.” 그럼 주님께서 하는 말이 “니가 누굴 속였느냐?” “아니요.” “그러면 됐잖아.” 속고 속이는 세상, 육적인 세상 자체에서 구원이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잖아, 라는 뜻이에요.
아내 있는 자는 없는 자같이 하고, 돈이 있는 자는 다 쓰지 못 한 것같이 하라, 아마 불신자들이 그 이야기를 들었으면 교회 앞에 대기하고 있을 거예요. 신자들은 말씀대로 지킨다. 신자들은 분명히 오늘 그들이 신봉하는 목사들한테 돈을 다 쓰지 못한 것같이 하라는 말씀을 분명히 들었기 때문에 나올 때 통장 버리려고 다 나올 거다. 비밀번호하고 도장하고 다 버릴 거다. 그러면 나는 그 때 바구니 들고 그 돈 다 쓰지 못하고 남아있는 돈 회수하면 나는 부자 된다. 라고 생각해서 교회 앞에서 기다려봤자 교인들이 더 화를 내고 나간다는 사실을 그들은 불신자들은 모르지요. 오늘도 설교 이상한 거, 들었다. 그러면 불신자가 “아, 신자라도 말씀을 안 듣는구나!” 교인들이 하는 말이 “들을 것만 듣고 안 들을 거는 안 듣는다. 이게 교회야. 몰랐지? 너는.” “그러면 주님을 사랑 안하잖아.” “나만 사랑해. 이게 교회야.” 그냥 주님을 이용할 뿐이지, 어림 반 푼도 없지.
혈육에 속했다, 이 말은 우리 혈육에 대해서는 이미 이걸 수리하거나 개선할 의지가 전혀 없다는 뜻이에요. 예수님이 혈육에 속함으로 말미암아 이미 구원됐느냐, 안 됐느냐 결정은 내 혈육이 아니고 우리의 혈육에 속했던 예수님의 혈육에서 판단 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구원되려면 반드시 이겨야 될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2장 14절에 보면, 누굴 이겨야 돼요? 육신과 관련된 마귀거든요. 마귀를 이겨야 돼요. 그런데 우리는 육신에 속했기 때문에 마귀를 이길 수 없습니다. 왜냐 그러느냐 하면, 이미 우리가 선악과를 따먹어서 우리가 죽는 몸이 되는 이건 누구 말을 들어서 그런 거예요? 마귀 말을 들어서 됐기 때문에 우리 육신이 누구 말을 더 좋아하게 돼 있느냐 하면, 예수님 말보다도 마귀의 말에 결국 따라가게 돼 있어요. 뻗대도 결국은 따라가게 돼 있어요.
“자, 여러분,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닙니다. 오시면 설탕하고 밀가루 드립니다.” “아이고, 저거 분명히 건강기구 파는 거고, 노인들 꾀어서 하는 건데.” “60대 아줌마들 오세요, 젊은 사람들 오지 마세요. 이거 효도차원이기 때문에 60대만 넣어줍니다. 특별히 홍보차원에서 하기 때문에 그냥 무상으로 드립니다.” 이렇게 할 때, “그래, 한두 번 속나 안가. 안가.” 그런데 안가할 때마다 가고 싶은데 어떻게 합니까? 죄를 안 지으면 안 지을수록 죄를 지을 수 있는데도 안 지었기 때문에 마치 죄를 언제든지 지을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거예요. “주여, 많이 참았잖아요.” 이렇게 해가지고. 하여튼 핑계 없는 일은 없어요. 뭐든지. “주여, 남들은 금방 지었지만, 나는 일주일 버텼잖아요. 봐주소.” 이렇게 해서 짓게 돼요.
우리가 누구한테 한 소리 들으면, 그 들은 소리가 계속 우리한테 우리의 끊을 수 없는 유혹으로 계속 온다니까요. 하나님께서 마귀로 하여금 그렇게 일하도록 하셔요. 니가 아무리 죄 안 짓고 싶어도 결국은 너는 내 말보다도 마귀 말을 더 좋아하는 그런 육신을 니 몸이 지니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니 육신의 행함을 의지하지 말고 니의 죄로 죽으신 피, 죽어야 피가 나올 거 아닙니까? 니 죄 때문에 나와야 했던 예수님의 육신에서 흘려졌던 피, 그 피가 죄 많은 너의 육신마저 하늘에 속한 형상으로 바뀌게 만든다는 고린도전서15장의 말씀을 니가 믿어라, 이 말입니다.
우리가 안 한다, 안 한다, 두 번 다시 안 본다, 그 짓 안한다, 소용없습니다. 다만 그런 기회 되면 우리는 하게 되어 있고 하면서 그냥 하는 게 아니고 십년간 안했잖아요. 담배 10년간 안 피웠잖아요. 이런 거요. 예수 믿고 5년간 안 마셨는데 요건 마시겠습니다. 그래놓고는 5년 뒤에는, 그 때 5년 전에 마신 것은 어쩔 수없이 마신 거고, 지금은 마시는 거 아닙니다. 누가 술 안 마셔서 구원된다고 한 적이 있습니까? 괜히 자기가 자기 법을 만들어 놓고 그동안 지켰다, 안 지켰다, 이리하는 겁니다.
9절 끝에 봅시다. 예수님께서 천사보다 잠간 못하게 하셨음은 이는 다윗이 아니고 예수님이라는 이야기거든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게 하려하심이라, 그러니까 사람들이 생각하는 죽음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백날해도 맛볼 수 없습니다. 왜? 이유가 뭐라 했습니까? 아직 들 죽었으니까. 죽도록 충성하라, 그러면 생명의 면류관을 얻는다, 할 때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이 죽기 직전까지 말하는 것이 아니고 죽어봐야 돼요. 그러니 우리는 살아생전에 이 말씀을 못 지킵니다. 죽도록 충성하라는 살아서는 못 지키지요. 죽어야 지키니까. 살아있을 동안은 못 지키잖아요. 죽을 뻔 했다가 살아난 것은 안 쳐져요. 아직 들 죽었으니까.
죽음을 맛보게 함으로 말미암아 이미 모든 구원에 권한은 우리 선에서 이미 떠나갔습니다. 자, 이제 어렵습니다. 떠나갔을 때 우리 육신으로부터 우리의 지식으로부터 떠나가 버렸습니다. 떠나가면 우리 인간은 육신에서 내가 경험한 것만 기억하게 돼있는데 우리 육신을 떠나가 버리면 십자가 달린 분이 죽었다가 살았다, 를 우리가 무슨 수로 알아차립니까? 우리의 머리와 영혼과 모든 것에서 떠났는데. 모르잖아요.
모퉁이 길을 걷다가 동창생을 만났다. “야, 반갑다.” 할 때 우연히 골목을 돌다가 만나서 반가운 거 하고 2층에서 쓱 내려다보니까 동창생이 골목 돌아오는 것을 알고 1층에서 내려가지고 “야, 반갑다.” 연기하는 거 하고, 같을 수가 있습니까?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을 때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이런 경우는 없어요. 그거는 아직까지 십자가를 안 만난 사람이에요. 정말 십자가를 딱 부딪치면 “제가 무엇이관대 저를 구원하십니까?” 오히려 죽어야 되는데 살려주십니까? 하는 것이 한꺼번에 튀어나와요. 1초 직전 까지만 해도 살아야 돼 살아야 돼 하다가 갑자기 십자가 들어 받치는 순간 죽어야 되는데 살려주셨구나! 이미 내가 알던 그 사람의 노선과 다른 새로운 노선으로 천로가 바뀌어요. 구원받은 천로는 뭐냐 하면, “아, 내가 세상에 이런 복을 받다니?” 이런 노선이고, 구원 받지 못한 천로는 “주여, 얼마나 더 하면 더 드리면 내가 구원받습니까?” 헥헥 거리는 노선이라.
저 쪽 노선은 찾는 사람이 많아 비좁아요. 사람이 많아. 이 쪽 노선은 헐해요. 텅텅 다 비었어요. 그것은 그 만큼 주께서 뽑아준 사람이 적기 때문에 그래요. 참 복잡 안하고 널널하니 느리다고 해도 우리의 욕심은 이렇습니다. 찾는 사람이 많아 답답한 건 피해서 조용하게 혼자 믿게 해주면 고맙다고 안하고 “왜 이리 믿는 사람이 없습니까? 외로워서 미치겠습니다.” 외롭다고 난리에요. 조용하니 전셋집 다 비워놨는데. 주께서는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될지.
11절 다시 봅시다.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거룩하게 하시는 자는 누구지요? 예수님이지요. 10장 10절 읽어보세요.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보세요.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림으로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지요. 이게 얼마나 어려운 말인지 여러분들은 아셔야 돼요. 그리스도를 단번에 드렸다, 하는 것은 우리 몸이 아니잖아요. 주님 몸이잖아요. 주님 몸에서 일어난 그것이 어떻게 우리 몸이 거룩함을 얻지요? 그 중간이 뚝 떨어졌는데. 인간이 떨어져 있잖아요. 같이 딱 붙어 있던가요? 떨어졌는데. 뭐든지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간 것들은 몰라요. 지금 여기에서 5키로 떨어진 아줌마가 하는 이야기 목사님은 압니까? 난 모르지요. 5키로인데 들어봐도 모르지요. 내 몸을 떠났으니 모른다 말이지요. 내 시력 안에 있는 것 같으면 저 사람이 뭐하고 있구나 이리 아는데 내 시력밖에 있을 때 어떻게 알아요. 모르잖아요.
이 히브리서 이야기는 전부 다 우리가 모르는 이야기라니까요. 모르는 이야기인데, 우리가 이걸 읽었다고 해서 “아, 이런 일이 있었구나!” 하고 알지만, 그것은 지식이 된다니까요. 이순신 장군이 칼에 찔려 죽었잖아요. 그거 우리 알잖아요. 독도는 우리 땅 알지요. 이순신이 죽었다는 걸 알지요. 하지만 내 몸에 이순신 장군 영혼이 들어있습니까? 내 몸에 이순신장군 영혼 들어있으면 이리 안 있습니다. 이순신장군 모자 쓰고 그림하나 붙여놓고 앉아서 반말하면서 “뭐 때문인지 안다!” 순신이 장군, 아 오시는구나! 이리 있어야 돼요.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건 아는데, 독도는 동해바다에 있지, 내 안에 있지 않아요. 내 육신에 있지 않아요. 문신해도 소용없어요. 우리 몸밖에 있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성경에 이렇게 예수님이 했다는 것을 이런 일은 아는데, 이게 어떻게 내 안의 말씀으로 되느냐 이 말입니다. 내 안의 말씀으로. 이게 보통 어려운 문제 아니잖아요. 굉장히 어려운 문제 아닙니까? 불가능한 문제에요. 홍해바다 갈라져도 소용없어요. 홍해바다 갈라진다 해서 말씀이 내 안에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요단강 갈라져도 내 안에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산이 뽑혀서 바다에 빠져도 안 되는 거예요.
2장 봅시다. 2장 11절 끝에 봅시다.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형제라 부르시기를 그 다음에 뭡니까?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라는 말을 보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뭔가 우리 보기에 “아이고, 치사합니다.” 또는 “아이고, 낯 뜨거워라.” 라는 식으로 우리에게 작용한다고 볼 수 있지요. 주님이 영광스러워 보이지만 우리에게 나타날 때는 상당히 우리가 기피할 수 있는 인물이에요. 우리가 “앞으로 나보고 안다 하지 마세요.“ 이런 식으로 슬슬 밀칠 수밖에 없는 식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지요.
우리가 부끄러워하는 것. 그럼 우리의 부끄러워하는 것의 반대가 뭐죠? 우리가 자랑스러워하는 거죠. 결국 주님께서는 우리가 원하고 기대하고 갖고 싶어 하고 자랑스러워하는 것과 그런 것들로 나가는 것을 뒤에서 치마 자락이나 바지가랭이를 뒤로 잡아당기면서 뒤에를 봐라, 하고 우리로 하여금 ”아이, 부끄러워라.“할 정도로 뭔가 돌아보게 하는 작용 다시 말해서 말씀으로 우리를 부끄럽게 만드는 겁니다.
내가 주님은 재껴 놓고 “내가 평소에 이런 게 있어야 자랑스러운 내가 되겠습니다.” 하는 그 자체를 부끄럽게 만드는 말씀에 작용, 그것은 말씀이 들어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순신영이 들어온 겁니다. 독도의 영이 들어온 거예요. 결국 신앙생활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 누가 침범해 가지고 우리 전체를 장악했을 때 그 신앙생활 되는데, 장악해서 우리가 원하는 되고자 하는 노림수가 결국 뭐냐 하면, 앞으로 니가 예수님 못지않게 처절하게 왕창 망하는 인생을 산다 할지라도 니는 오히려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겨라, 하는 식으로 오신 거예요. 고난의 동참하는 식으로.
그 증거를 대라면 히브리서 11장에 소위 말하는 믿음의 짱! 거기에 보세요. 거기에 나오는 믿음의 조상들을 보면, 세상 적으로 사람들이 기대했던 자랑스러운 일들을 했던 분들이에요? 대통령했습니까? 대통령 떨어지니까 노원병가서 국회의원 되려고 나왔습니까? 그런 거 했어요? 아니면 TV팔고 스마트폰 팔고 부산에서 제일제당 세워서 설탕 팔아먹다가 제일모직하고 해서 재벌 된 그 사람 돼야 우리가 안 부끄러워요? 우리는 은연중에 그걸 기대하고 있지요. 육신이니까.
그런데 막상 정말 우리가 자랑스러워 할 것은 그저 세상만 쳐다보고 있는 우리를 뒤에서 치맛자락, 바지가랭이 잡아 가지고 “뒤를 봐, 뒤를 봐!” 볼 때 “주여, 제가 죄인입니다.” 고백케 하는 그 능력, 말씀의 능력, “제가 엉뚱한 것 가지고 자랑스러워했습니다.” 그런 걸 생각하면, 전목사님이 암벽을 타도 사람들 앞에서 동영상 찍고 있는데 미끄러져가지고 어떤 사람이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는데.” 그래서 또 올라가서 또 떨어졌어요. “아이, 원숭이가 아니구나!” 하여튼 뭔가 솜씨를 뽐내려하는데 일이 안되고 웃사스럽게 될 때 그런 뭔가 우리를 잡아당기는 낮은 곳에서 우리보다 더 낮은 자리에서 잡아당기는 주님의 능력, 그것이 바로 말씀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벌거벗게 만드는 거예요.
벌거벗게 만듬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우리가 배추밭 앞에서는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어요. 치매환자들 앞에서는 우리가 그들을 비위를 맞출 필요도 없고 안 맞출 필요도 없고 배추밭 인간들 앞에서 그들의 비위를 위해서 살 이유도 없고 그들을 의식할 필요도 없는 거예요. 아까 이야기했지요.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그것은 십자가 아는 순간 우리한테는 아무 의미 없습니다. 나 같은 인간도 구원하시다니! 이런 고백만이 세리와 창기와 삭개오와 바디매오와 저는 자와 병든 자, 그런 사람이 한 결 같이 그리스도만 찬양했던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 보내주셔서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것을 해결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를 뚜렷이 볼 수 있도록 우리가 엉뚱한데 바라보고 있으면 우리의 시선을 십자가로 돌이키시는 능력이 저희에게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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