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130111a-히1장1절(마지막에) - 이 근호 목사
시작합시다. 오늘부터 히브리서 1장1절 시작합니다. 히브리서1장1절에 보면,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그렇게 되어 있지요. 여기에서 우리가 묻고 싶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왜냐 하면, 아들을 바로 보내면 되는데 미리 사전에 여러 모양, 여러 부분으로 그렇게 뜸들일 필요가 뭐가 있느냐,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낼 때, 가슴에 간판 크게 걸고 명함 크게 박아서 앞에 모자에다가 하나님 아들 크게 적어서 주머니에 하나님 나라 공장 프린트해서 각자 길가면서 “내가 아들입니다.” 하고 명함 나눠주면 되잖아요.
안 믿는 사람은 듣게 풀어서 뭐를 원해? 돈을 원해? 돈을 주면 믿겠습니다. 하면 돈 주고 믿게 하면 되고, 그렇게 자기 팬들을 자기 사람들을 그렇게 많이 모으면 되잖아요. 그리고 사람을 누가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이 만들었지요. 하나님이 만들었으면 자기가 만든 사람들을 구원을 하시려면 누구는 빼주고 누구는 구원해서 남겨두고 이렇게 하면 무책임한 하나님 아닙니까? 자기가 자식을 열 명 낳는데, 그 중에 세 명은 좋은 집에 살고, 나머지는 내 팽겨 치고 방치하고 이거는 나쁜 아버지죠.
지금 제가 방금 언급한 언어도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한 번 정리해 보면, 하나님께서 아들을 바로 보내시면 되는데 왜 여러 모양으로 여러 부분으로 보내느냐 하는 그런 질문했고, 두 번째 제가 질문한 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아들을 보냈으면 명함 파서 아들입니다. 아이고, 못 믿겠네요. 하면 믿도록 역량을 발휘해서 “자, 이제 믿겠습니까?” “아! 이제 믿겠네요.” 그렇지요
모든 인간에게 인간은 하나님이 만들었으니까 자기가 만든 하나님이 믿게 하시면 되잖아요. 그만한 능력 있으시잖아요. 왜 그렇게 하지 않느냐 하는 그런 문제점, 세 번째 이야기하자면, 아들을 안 보내고요, 아들을 귀찮게 보낼 필요 없이 있는 세상 그대로 천국으로 만드시면 안 되겠습니까? 아들 보내서 믿게 해가지고 그거 다 귀찮은 일이거든요. 아들 보내서 믿게 하지 말고, 술 먹던 뭘 하던 무슨 짓을 하던 환경만 이렇게 천국으로 바뀌면, “오우! 깨끗한 환경에서 몸도 깨끗해야 되겠네.” 사는 게 힘들어서 술도 퍼먹고 하지만 만약에 모든 게 풍족하고 아쉬운 게 없으면 사람은 누구나 양심대로 살면 그게 살기 좋은 천국 아니겠습니까?
남자가 여자를 밝힌다. 그러면 여자를 아내라 하지 말고, 원 없이 여자 밝히도록 해 주는 게 그게 천국이고, 돈이 없다. 그러면 하늘나라에서 돈을 마구 찍어내는 거예요. 사람들이 스트레스 안 받도록 하고, 자식이 애를 먹인다 하면, 자식을 낳데, 전부 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자식만 낳으면 그런 능력이 하나님께 있다면 천지를 창조했으니까 창조가 뭡니까? 없는데서 있게 하잖아요. 없는 것도 있게 하는 재주라면 착한 자식 낳고 돈 만들고 재물 많이 만들고 바나나 많이 하고, 이렇게 하는 재주도 이렇게 추울 때, 보일러 왜 땝니까? 우주 자체가 따땃하게 아열대 지방으로 27도 주어지면 물탱크 터질 일도 없고, 가끔 눈이 보고 싶다 하면, 따로 자리를 마련해서 이곳은 눈 오는 방해서, 눈싸움 하고, 나와서 온천에서 온천도 하고 얼마든지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왜 그렇게 안 하느냐 말이에요. 이 세 가지의 답변은 간단합니다. 정답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것은 바로 아들을 위함입니다. 우리를 위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를 인간으로 만들어 놓은 것은 아들을 위해서 인간을 만들어 놨지, 만들어진 인간을 위해서 하나님도 있고 예수님도 있는 그런 하나님은 없습니다. 애초부터 그런 하나님은 없습니다. 그게 바로 2절에 나와요. 2절에 보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그 다음에 3절에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지요.
하나님께서 자기의 자존심을 가장 완벽하고 절대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영광, 예수님의 하시는 예수님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는 그 방법만이 하나님의 영광을 전부 다 보여주는 겁니다. 전부 다 보여주기 때문에 아까 처음에 했던, 3가지 이야기는 기각되는 겁니다.
첫 번째, 세 번째 기억 잘 안 나거든 다시 보세요. 다 나옵니다. 뭐라고 말했는지, 다 기각되지요. 첫 번째 하나님께서는 아들 부르지 말고 바로 구원하지, 왜 아들을 보냈느냐, 두 번째는 왜 나누느냐, 세 번째는 결국 인간이 원하는 그런 세상을 하나님이 친히 만들지 않느냐, 하는 그런 문제거든요.
바로 예수님을 보냈는데 뭔가 모든 모양과 형태로 미리 깔아놓고 보내서 만약에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 같으면 구원 못 받게 하는 그런 조치가 왜 하나님께서는 그런 조치를 하셨는가, 그것은 예수님의 하시는 것이 영광에 광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 히브리서는 구약에서는 히브리서가 나오지 않고 예수님 오시고 난 뒤에 이 히브리서가 있어야 될 이유를 알겠지요. 구약에서는 아들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구약에서는 나타나지 않았으니 뭐로 나타났습니까? 부분과 모양으로만 나타났지요. 신약에서 예수님 나타났으니까 그게 뭐냐 하면, 세상에 마지막 때입니다. 2절에 보면 이 모든 날 그 다음 뭐로 되어있지요? 마지막에.
사람이 마지막하면 섭섭해요. 드라마도 마지막하면 좀 섭섭합니다. 드라마 재미있게 보다가 오늘이 최종회하면 섭섭한 게 있거든요. 드라마뿐만 아니고 이 세상이 그렇습니다. 예수님 오시고 난 뒤에 모든 것이 드라마 보는 최종회 최종 마지막, 그동안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는 그 마지막 자막 올라올 그 시점에 우리가 지금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딴 것, 저 딴 것 필요 없이 예수님만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마지막 때는 바로 마지막다운 그런 믿음의 내용을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줬습니다. 이것저것 생각하지 말고 예수만 믿어라, 그럼 이것저것 생각하지 말고 하는데, 이것 버리고 저것 버리는데 버려야 될 내용 중에 반드시 포함되는 게 있어요.
이것저것 버리고 예수님만 믿어라, 했을 때에 이것저것 해당되는 것이 뭔지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기 딴에는 버렸다고 하는데 정작 버릴 것은 안 버리고 계속 이것저것이 예수님께 붙어있으면 곤란하잖아요. 예수님만 남기고 이것저것 빠지려면 정말 예수님만 남기는 법, 그리고 예수님 것에서 이것저것 안 붙어있는 법, 그걸 아셔야 되지 않느냐 말이지요. 그래서 히브리서 내용은 간단합니다. 예수그리스도만 남기고 이것저것 붙어있는 것을 떼어내는 그러한 내용들이 이 히브리서의 내용입니다.
마지막 날에 아들로 이야기했다. 그러면 이것저것 붙어있는 게 뭐가 붙어 있는가 하면, 2절에 의하면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이 붙어있지요.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제가 한 때 왼쪽 발꿈치 뒤에 사마귀가 있었습니다. 굉장히 아팠어요. 병원에 가서 물약으로 한 달 반 정도 바르니까 구멍이 나면서 분화구처럼 뚫리면서 이것저것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이것저것이.
히브리서는 계속해서 물약처럼 사마귀에게 바릅니다. 뭐하라고? 이것저것 떼어지라고. 딱 떨어지니까 구멍이 있지요. 구멍자리에 뭐가 있었다? 떨어져야 할 것들이 지 자리라 하면서 버티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은 이 마지막 때는 있을 필요가 없어요. 마지막 때는 들어붙어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떨어져 나가야 되거든요.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은 무엇과 결부되어 있는가 하면, ‘나’와 결부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또는 예수님께서 예수님만 남기고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을 떼는 그 방법으로 오직 하나의 방법만 제시했습니다. 그 방법이 뭐냐 하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살려는 자는 다 떨어져야 돼요. 십자가의 양쪽에 달렸던 강도 다른 새끼 십자가는 옆에 있는 사이드에 있는 십자가는 둘 다 뭐하고 있었습니까? 십자가 셋이 뭐하고 있었어요? 십자가는 뭐하는 기구입니까? 죽이는 거 아닙니까? 그 죽음에 동참한 거예요.
장 미란이라는 역도 선수가 은퇴하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보지는 않았지만. 왜 웁니까? 뭐가 아쉬운 거예요. 자기가 생각했던 그것이 안 돼서 하잖아요. 그러면 장 미란이 예수님 때문에 죽었습니까? 장 미란이 울면서 떨어져나간 게 있지요. 자기가 대표라 하는 것이 떨어져 나가고 금메달 따는 게 떨어졌지만, 안 떨어지고 남아있는 것이 뭡니까? 여전히 자기 자신이지요. 그러면 그 자기 자신은 어디서 떨어져 나가야 돼요? 이것은 울어도 안 되고, 웃어도 안 되고, 진짜 이것은 부흥회한다고 될 문제도 아니고 무슨 수로 자기를 자기에게서 떨어냅니까?
그때는 함께 있어야 돼요. 함께. 혼자서는 안 돼요. 누구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와 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 것이다. 그리스도가 산 다는 말은 그 안에 무슨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가 하면, 그냥 그리스도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날마다 나를 죽이는 방식으로 그리스도가 살아있어요. 날마다 나를 죽이는 방식으로. 자꾸 바깥으로 기어올라 와요. “내 안에서 내가 살아야지, 왜 니가 살어?” 밟으면서 그런 식으로 사는 거예요.
그래서 십자가라 하는 것은 예수님 당시에 옆에 세 개의 십자가가 있었고, 그 십자가에 달린 사람은 전부 다 죽은 겁니다. 그 죽었다 하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자체적으로 끝이에요. 여러분, 세상 끝이 아쉽습니까? 지 죽는 것이 아쉽습니까? 자기 죽는 것이 아쉬워요. 자기 죽고 난 뒤에 세상이 그대로 있다 하는 것은 약 오를 일입니다. 왜 나는 내 사랑하는 여자와 헤어졌는데 왜 태양은 빛나는가? 왜 해는 빛나고 왜 물결은 치고 있느냐 말이에요. 나는 내 사랑과 헤어져 슬픈데. 나는 울고 있는데 아이들은 골목에서 까불고 웃고 있느냐 말이지요. 왜 골목 웃음소리가 넘치느냐 말이지요. 세상 끝인데. 그 이가 없으면 나는 더 이상 살 이유가 없는데 왜 세상은 내가 아픈데도 너는 웃고 있느냐 이 말입니다. 약 오르게. 정말 죽여 버릴까보다 하게.
제가 동영상 녹화 중에 ‘죽음의 접지’라는 게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도는 마치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누워있으면 밑에서 뭐가 올라옵니까? 냉기가 올라오지요. 항상 죽음의 냉기가 올라옵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이 세상이 마지막이 되면, 그 세상 속에 누구도 포함되어 있습니까? 나도 포함되어 있거든요. 그러면 세상만 마지막이고, 나는 마지막이 아니다.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같이 마지막의 티를 내줘야 돼요. 같이 마지막이란 티를.
그런데 그냥 내가 나를 죽여 버리면 이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죽음이고, 진짜 올라오는 냉기는 뭐냐, 세상을 해체시키고 멸망시키는 그 하나님만이 아는 그 죽음이 냉기처럼 올라올 때, 그게 진짜 십자가의 죽음과 접지되어 있는 만남이 접속되어 있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은 망해도 망하는 줄 모르고 지만 살려고 애를 쓰다 보니까 기껏 생각하는 것이 세상이 망하는데서 오는 힘으로 망하는 것이 아니고 “아이고, 다 꼴 보기 싫은데 콱 죽어버리지.” 지가 평소에 생각했던 자기 죽음으로 음독자살하려고 “에이, 나 혼자 죽기 억울하다. 에이, 집에 불 놔서 죽여 버리자.” 해서 자기 죽고, 마누라 죽고, 자식 죽고, 심지어 위층까지 죽고. 아무 죄 없는 2층, 3층까지 불타서 죽고. 그것은 뭐냐 하면, 자기 죽음을 모르는 거예요.
그렇다면 히브리서 1장1절에 보면,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여기에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이라 하는 것은 방금한 이야기를 총괄해 보면, 마지막 때에는 누가 돌아가신다? 하나님의 아들이 돌아가신다. 그렇다면 그것이 확실하다면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 속에 뭐가 포함되어 있다? 뭔가 장차 마지막 때에 하나님이 메시아가 죽는 죽음의 모양과 죽음의 부분이 이 안에 이미 당겨서 들어있다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했던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바로 선지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선지자들은 무엇의 감을 잡았습니까? 그 시대만 보는 것이 아니고 마지막 때와 연결시켜서 우리는 이렇게 이런 메시아의 죽음과 엮여져 있다고 감 잡은 사람만 선지자 되겠고, 그런데 성신을 받지 못한 일반 사람들은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살면서도 거기에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이 왜 되는 줄 모르고 그냥 코앞에 눈앞에 있는 지 자식이나 남편이나 아내나 살피고 밥그릇이나 저녁 찬거리나 챙기고 그렇게 자기만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죽음의 기운이라 할까, 그런 것을 못 느끼고 사는 거예요. 옛날이나 요새도 마찬가지이고.
그러니 그들이 언제 죽음을 느끼는가 하면, 장례식에 갔을 때나 자기 몸이 아플 때, 만사가 자기 뜻대로 안될 때, “세상이 뭔가 왜 이러지?” “나는 세상을 좋아하는데, 세상은 나을 슬프게 만들지?” “나는 니가 그렇게 좋아서 단풍 보며 사진 찍고 했는데 나는 겨울이 좋다고 그렇게 외쳤는데, 이 겨울이 왜 나를 감기들 게 하는지, 도대체 이게 뭐야?” “나는 도대체 이 자연과 이 세상과 뭔가 어긋나게 살아가는가?” 이렇게 되잖아요.
세상의 자연이라 하는 것은 죽음의 바탕 위에서 있는 겁니다. 없는데서 있고, 죽은데서 창조되기 때문에 자연 속에 없음이 항상 내재되어 있어요. 그걸 파악하지 못하고 자연을 논해 버리면 불교 승려가 돼요. 혜민 스님, 법륜이라든지, 자연이 뭔지도 모르고 그냥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그러면 다 해결 되는 줄 이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게 아니에요. 사람이 망치가 있을 때는 의미를 모르다가 망치를 막상 찾다가 없을 때, 망치의 존재를 느끼잖아요.
그런 것처럼 인간이라 하는 것은 항상 없다는 것과 비교함으로서 내가 왜 있지? 라는 의미가 발생되는 겁니다. 내가 지금 죽어서 없다고 봅시다. 내일되면 내가 차사고로 죽어서 없다고 봅시다. 그걸 내가 미리 당겨서 안다고 봅시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왜 삽니까? 이거 녹화는 왜 합니까? 내일 죽는데. 내가 죽는데 뭐하려고? 관 속에 누워서 보세요. 관 속에서 탁! 탁! 못 박는 소리를 내가 듣고 있다고 봅시다. 점점 답답해 오고 숨이 차오르고 있는데 바깥에서는 자식들이 모여서 부의금 몇 프로 갖는다고 그 이야기하고 있고. “아이고, 시원히 잘 보냈다. 아이고! 호상입니다. 호상” 기뻐 즐거워하고 있고 지금. 사람은 누구나 죽습니다.
로마서 6장에 보면 사람이 죽는 것은 값으로 죽지요. 뭘 한 값으로 죽어요. 무슨 값이냐 하면, 죄의 값으로 죽게 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이라 하는 것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죄 덩어리로 죄를 뒤집어 쓴 채 있는 거예요. 마치 아이스크림이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초콜릿시럽이 통째로 뒤집어 쓴 채 아이스크림이 있는 것처럼, 인간은 완전히 죄로 뒤집어썼고 뒤집어 쓴 죄로 말미암아 인간은 죽음으로 해체되어 가는 겁니다.
이것은 본인 행동이 나빠서가 아니라 뒤집어 쓴 거 때문에 그래요. 이것은 벗겨 낼 수도 없어요. 이것은 하나의 운명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매일같이 하루를 살면 하루만큼 우리는 해체됩니다. 로봇 해체하는 것처럼. 자동차 부속품 하나, 하나 해체하잖아요. 자고나면 이것 뜯기고, 자고 나면 저것 뜯기고. 한 번 보자, 하고 실험대에 있는 청개구리처럼 오늘은 이거 잘라볼까? 조금씩, 조금씩 모든 것이 뜯겨져 나가고 있어요.
왜 그렇게 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법칙 때문에. 하나님의 법칙은 죄 지은 자는 반드시 필히 죽는다. 죄 지은 자는 죽는 것이 마땅한 거예요. 죽는 게.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죽어야 될 것을 그 죄 문제를 용서를 해줬으니까 그 귀한 수천만 넘는 그 귀한 향수병도, 그 향수병이 자기를 영생 준 게 아니잖아요. “에라! 이 향수병으로 의지하며 살려하는 내야! 나는 이미 살았어! 하고 나는 이미 이 분 때문에 살았어!” 하고 울면서 머리카락으로 발을 씻으면서 주님 때문에 제가 살았습니다. 라고 할 때, 아직도 죄 용서를 받지 못한 바리새인들은 비웃고 있었습니다. “행실이 더러운 여자야!” 그렇게도 예수님은 간파하지 못하고 저 여자가 얼마나 소문난 나쁜 여자인 줄 모르고 그 사람의 봉사를 그렇게 흔쾌히 받느냐, 소위 거룩하다고 하는 사람이.
예수님은 그래요. “뭐가 거룩인데?“ 예수님의 진짜 거룩은 죄 없이는 생산되지 않습니다. 죄가 모아서 거룩이 된다는 사실을 너는 모르지, 죄를 멀리함으로서 거룩 된다, 하는 것은 구약 성경에 의한 인간적인 발상이고 인간적인 해석에 불과합니다. 더러운 것은 다 모여라, 거기서 거룩을 내가 만들어 내리라, 그래서 예수님은 찬양받아야 합당한 어린양입니다.
주께서 거룩을 만들어 내는 것은 로마서에서는 거룩을 ‘하나님의 의’라고 하지요. 하나님의 의를 만드는데 재료로 쓰였던 그 죄에 우리가 기꺼이 포함됐다면 여러분들은 장땡입니다. 여러분들은 땡잡은 겁니다. 로또보다 더 큰 걸 잡은 겁니다. 그래서 저는 성경을 뭐로 보는가 하면, 방앗간이다! 성경은 방앗간이다. 왜? 고추를 넣으면 가루로 만들어 버리고 쌀 넣으면 쌀가루로 만들어 떡 해 먹고, 섞여 들어간다는 것, 그냥 섞이는 게 아니고 가루가 되어서 섞여 들어가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복음을 이야기할 때, 사람들이 제일 이해하지 못하는 게 뭐냐 하면, 십자가 안이 방앗간이기 때문에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방앗간에 들어가는 것인데, 우리는 방앗간에 안 들어가고 방앗간 사진만 찍어요. 복음을 안다 찰칵! 십자가 안다 찰칵! 지 몸은 전과 똑같은 몸이 돼가지고 똑같은 마음이 돼가지고 그냥 구경만 하고 관광만 하고 그냥 가버려요. 방앗간에 가루가 돼야 되는데 가루가 안 되는 거예요. 로마서9장에 보면 나오지요. 십자가라 하는 것은 우리를 가루로 만드는 거예요. 가루가 돼야 재료가 된다니까요. 박살나는 즐거움!
자기는 멀쩡하게 예수 믿고 난 뒤에는 멀쩡하다고 예상하고 십자가에 오지만, 십자가는 블랙홀과 같아서 모가지 쥐고 십자가에 집어넣으면 우당탕탕 튀어서 전부 다 칼날이 산산조각 되어버려요. 아브람으로 들어가서 아브라함으로 튀어나와요. 잘난 욥으로 들어가서 이제는 유구무언의 욥으로 튀어나온다 말이지요. 나는 착한 일했다. 내가 나쁜 짓 뭐했는데? 하나님 잘 섬기고 자식들을 위해서 기도했다. 그렇게 입이 있어 말을 놀리다가 막상 고난이란 방앗간에 집어넣으니까 죄만 뒤집어쓰고 할 말이 없어 나오니까 딸 셋이 그렇게 예쁘고. 재산은 옛날보다 곱빼기로 있고. 그걸 믿겠습니까? 아니면 찾아오신 하나님을 믿겠습니까? 역시 찾아오신 하나님을 믿지요. 저 예쁜 딸들과 저 많은 재산들은 내 행함으로 얻은 게 아닙니다, 하는 것을 아는 거죠. 탕자가 다시 집에 와서 지가 입었던 옷, 지가 먹었던 쇠고기, 가락지 꼈던 것, 이 모든 것이 자기의 어떤 행함에 근거해서 주어진 게 아니다 라는 겁니다.
다음의 페이스 북에 보면 임 창길이라는 사람이 이 근호 목사에 대해서 비난을 해놨어요. 이 근호목사의 문제점이 뭐냐, 그 사람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이 근호 목사는 믿음으로 한 것까지 다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동안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 다 떠나버렸다 이렇게 해놨어요. 전 목사님이 댓글로 써놨는데, 그 글에는 아직까지 답변을 안 해주셨는데 팬 관리하시는지...ㅎㅎ
그 말을 한 번 분석해 봅시다. 인간은 죄인 것은 맞지만, 믿음으로 행한 것까지는 죄가 아닌데, 이 근호 목사는 그것까지 죄라고 해버리면, 그러면 우리한테는 죄밖에 없지 아니한가, 그래서 그것은 복음이 아니라서 소위 많은 사람이 떠나고 말았다. 이리 이야기 하더란 말이지요. 그러면 안 떠난 사람들은 뭡니까? 곧 떠나려고 보따리 싸고 있는 중이에요?
방금 전에 관람한다, 관광한다, 그 이야기 했지요. 그러면 그것을 그대로 해봅시다. 십자가라는 방앗간에 내가 그냥 관람만 하고 되돌아서게 되면, 관람한 대신에 자기가 죄를 안다고 치는 거예요. 해가지고 십자가 앞에 가면 이 죄가 용서받는다 하지요. 그러면 1단계 내가 현재 죄를 알고 있다. 그런데 십자가는 뭐한다? 죄를 용서하는 것이니까 나는 예수의 피를 믿는다, 라고 하지요. 1단계, 믿는다. 그러면 죄가 없어졌잖아요. 믿고 난 뒤에 다시 그것을 그대로 가지고 오게 되면, 믿는 사람이 어떤 행함을 보이게 되면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는 행함이다, 이리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것은 십자가 안에 들어왔습니까? 안 들어왔습니까? 맛도 안 봤어요. 구경하고 오는 거예요. 지금 이 사람이 겁을 내는 것은 이 사람 문제점이 뭐냐 하면, 십자가에 들어오기 전에 지는 죄를 이미 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면 자기가 본인이 죄를 아는 것은 의로운 거예요? 의롭지 않은 거예요? 본인이 이미 죄라고 아는 것은 그 자체는 나쁜 짓이에요? 안 나쁜 짓이에요? 그 쪽 본인에 의하면 그것은 착한 짓이라 하는 거예요. 그 사람은 이것은 죄다, 하지만 죄를 아는 것을 내가 알기 때문에 그것마저 죄는 아니기 때문에 전적으로 죄인인 것은 아닌 게 돼 버려요. 전적으로.
그러면 사도바울 같은 경우를 봅시다. 사도바울은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그 사람은 성령이 없기 때문에 그런 논리로 하는데, 성령을 받으면 성령은 그냥 주는 게 아니고 마지막 때는 무엇을 근거로 줍니까? 십자가 졌던 그 효과로 주어지지요. 성령은 무슨 영이 돼요? 십자가 안으로 잡아당기는 영이 되지요. 그러면 진짜 성령 받은 사람은 관람하고 싶어도 관람 못하고 여기서 뭐가 나옵니까? 여기서 손 같은 게 나와서 강제로 어디다 집어넣어요? 십자가 안에 집어넣어버리면 갈라디아서 2장이 되지요. 내가 그리스도 십자가 안에서 죽었나니 내 안에 사나니 그리스도가 살지요.
그러면 이렇게 십자가 안에 죽음이 되는 그 인간은 어떤 인간이었습니까? 바로 임 창길 그 사람처럼 나는 죄를 안다. 예수님이 용서하게 되면 그래서 용서받고 난 뒤에 행함은 착하다. 이걸 어떻게 합니까? 이 자체가 뭐가 된다? 이 자체가 죄가 된다는 것을 진짜 십자가 안에 있는 사람은 그걸 아는 거예요. 그러면 십자가 복음을 안 떠난 사람은 뭘 알아요? 성령을 받은 사람은 뭘 압니까? 십자가 안에 있기 때문에 나는 뭐만 나온다? 모든 게 죄라는 것만 나온다는 거예요. 그것도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죄만 나오니까 이젠 예수 믿고 난 뒤에 난 행함은 나의 착한 행함이라는 것을 믿어요? 안 믿어요? 그것은 내가 십자가 알기 전에 죄가 뭔지도 모르고 까불던 그 때, 그 시절의 생의 감각이었잖아요. 그게 바로 마지막 죄라는 것을 아는 거예요. 이걸 자기 부인이라 하지요. 십자가를 져라, 그리고 너는 너를 부인하고 누굴 따라라, 나를 따라오라, 그러니 임 창길라는 그 사람은 늘푸른교회 교인인데 그 사람은 만날 이 장우 목사를 선전하면서 내놓고 하는 말이 뭐냐 하면, 매일 전 목사님 댓글에 달려들어서 우리는 뭘 해도 죄인입니다. 그걸 내세우고 하는 거예요. 뭘 해도 죄인이라고 우기면서 우리는 뭘 해도 죄이니까 매일 회개하면서 주를 따라 갑니다. 라고 하면서 십자가마을 이 근호 목사 다 떠나버렸다, 이리 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 근호 목사 안 떠난 사람은 지처럼 모든 걸 죄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그 사람은 둘 중에 하나를 해야 돼요. 그야말로 십자가 마을 떠나지 않고 십자가 안에서 나는 날마다 죄라고 하던지, 안 그러면 십자가 안에서 전적으로 죄가 아니고 이제는 의로운 게 있다고 하면서 십자가마을 떠나면서 우리는 날마다 죄로 회개하거나 용서할 필요 없다. 이제는 우리가 바른 행동하면 되지, 모든 게 죄가 되는 건 아니다. 라고 하던지, 우리는 뭘 해도 죄가 아닙니다. 라고 해서 떠나던지, 안 그러면 우리는 뭐든지 죄입니다. 라고 하면서 십자가마을 안 떠나던지 해야 될 건데, 이 사람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십자가 마을 떠났다. 그리고 하는 말이 우리는 뭘 해도 죄입니다. 라고 하면서 지적하는 것은 이 근호 목사는 뭘 해도 죄라고 이야기했기 때문에 이 근호 목사는 복음이 아니다 하는 거예요.
지금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이걸 다시 댓글 달아보세요. 의도를 몰라도 못 읽어도 양쪽 다 보는 사람이 있잖아요. 그 사람을 설득하는 게 아니고 양쪽 다 비교해서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 말 다시 해 볼게요. 그 사람은 전 목사가 달아 놓으면 그 뒤에 줄줄이 달아놓아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뭘 해도 죄입니다. 그렇게 달아놓고 이 근호 목사는 문제점이 많은데 뭐냐 하면, 예수 믿고 난 뒤에 전적으로 죄라고 하는 게 문제입니다.
그러면 결국 그 사람 말은 뭐냐 하면, 날 좀 알아달라는 거예요. 믿는 나를 알아 달라는 거예요. 그것은 십자가 들어가기 전에는 관광객, 십자가 구경하러 온 사람은 자기는 여전히 자기 잘되기 위해서 십자가 믿고 예수 믿은 거예요. 왜, 역시 나는 예수 믿어줘서 착하다. 라고 할 경우에는 “봐라, 예수님도 알아줬는데 십자가 마을도 알아 줘” 이리 되는데 진짜 십자가를 알아버리면 이제 자기 자신은 예수님만 높이게 돼요.
“나는 뭘 해도 죄인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 마을에서 이 근호 목사의 말이 맞습니다. 떠난 놈이 이단입니다.” 이리 나와야 되지. “떠나면 이단입니다.” 왜 떠났는가, 그건 예수님이고 하나님이고 관심이 없고 자기 교회를 내거라는 거예요. 내거 건드리면 예수건, 하나님이건 다 죽여 버린다는 거예요. 나는 아무리해도 내거 포기하는 그런 의사 없다는 뜻입니다. 날 좀 알아달라는 거예요.
1절에 봅시다. 옛적에 선지자들이 나오는데,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 했잖아요. 선지자들이 여러 부분, 모양 전할 때에 곱게 전했습니까? 우당쾅쾅 전했습니까? 아~ 엄청나게 싸웠지요. 선지자를 멱살 쥐고 흔드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아예 돌로 쳐 죽여 버렸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까? 이것은 포도원 비유에 나오지요. 주인이 처음에 종을 보냈어요. 농부들이 반 죽여 놨습니다. 마지막에 아들 보내니까 아예 죽여 버렸지요. 선지자는 반쯤 죽였지만, 아들은 아예 죽였어요. 결국 선지자와 장차 올 아들과 연계되어 있다는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마지막에 아들을 보내기 위해서 종들을 미리 깔아놓은 거예요. 이 세상에.
그러면 깔아 놓으면 예수님의 십자가라 하는 것은 예수님이 오셨는데 아무도 십자가 안지면 이상하잖아요. 가룟유다가 날 배반해야 되는데, “가룟유다야, 날 배반해라” “선생님 배반 안 해요.” 이리 말하면 일이 안되잖아요. 세상은 어둡잖아요. 어두우면 어두운 값을 해야 돼요. 어두운 값을 하기 위해서는 이것은 악마의 앞잡이가 돼 가지고 예수님을 물어뜯어야 됩니다. 이것은 선지자도 마찬가지이고.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이 설교 잘하고 말이 멋들어지게 이래 가지고 여러 부분이 아니고 매일같이 쉬지도 않고 우당탕탕 싸움이 벌어진 거예요. 가만히 있어도 시비가 온다니까요. 고요하게. 고요하게 거룩한 밤은 찬송가 123장에 나오는 거고. 이 세상은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없어요. 아기 예수 태어난다고 알아가지고 헤롯군대가 쫓아오는 입장에서 뭐가 고요하고 거룩한 밤이에요. 동방박사 죽을 판인데.
마지막 때라 하는 것은 여러 부분이라, 여러 모양이라 하는 것은 결국은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만드실 때에 무에서 유가 있게 하실 때, 그 무도 사라지지 않고 함께 있는 방식으로 바탕으로 자리 잡겠다, 죽어야 될 것은 살게 했는데, 그 죽음이 소멸되고 취소되는 것이 아니고 이제 없는 것이 아니고 살게 된 그 죽음과 병행해서 생명도 같이 있게 만들었어요. 그리고 죽음에 속한 사람과 생명에 속한 사람이 부딪기는 가운데서 비로소 생명은 생명으로서 그리고 저주받을 죽음은 죽음으로서 드러내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비로소 지옥이 무엇이며, 천국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나타낼 수 있는 겁니다.
아까 한 거 다시 한 번 정리하게 되면, 우리는 뭘 해도 항상 죄밖에 없으니까 회개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됩니다. 그렇게 댓글 달아놓고 이 근호 목사의 문제점은 우리가 뭘 해도 그걸 의라고 인정하지 않고 죄라고 인정하니까 그것은 이 근호 목사는 이단이고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라고 했다 말이지요. 그 두 이야기가 어떻게 돼요? 그 두 이야기가 앞 뒤 안 맞지요? 안 맞지요. 이 근호 목사의 말이 전적으로 맞는다면 우리는 뭘 하든지 죄라고 하던지, 정말 전적으로 죄라고 솔직하게 한다면 저를 옹호하던지 해야 되는 거예요.
결국 그 둘 사이에서 나왔다는 말은 나도 내 믿음 좋다는 것을 좀 알아줘, 그 의도 외에는 니만 주의 종인가, 나도 종이다, 니만 성령 받았는가? 나도 성령 받았다는 그것을 남들이 알아달라는 거예요. 알아 달라하는 것은 십자가 밖에서는 있을 수 있는데, 십자가 안에서는 있을 수 없다 이 말이지요. 안이 방앗간이기 때문에 갈아버리면 나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어요.
하나님께서 구원할 때, 있는 것에서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있음을 무로 집어넣어서 유로 만들어 냅니다. 잘난 나를 뭐로 만든다? 죄인으로 만들어 놓고 그 죄인에서 하나님의 의를 끄집어내는 식으로 해서 구원하거든요. 그럴 때, 그냥 그걸 구경하는 쪽은 내가 죄인 됐는데 다시 의인되었으니까 그러면 나는 이제는 의인이다. 까불고 “이제 의롭게 살아야지.” 이렇게 나와요. 이게 관람하고 근처에만 가니 그런 거예요.
겨울에 아이들이 장난치면서 유리창에 코를 납작대면 갑자기 돼지 코가 되지요. 돼지 코가 돼서 납작 올라가잖아요. 관람과 구경하는 사람은 지 딴에는 십자가에 들어가려고 애쓰는데 내가 보기에는 돼지 코에요. 유리라는 그 얇은 관을 통과를 못했기 때문에 항상 돼지 코처럼 일그러진 모습으로 뺨 대면 뺨이 다 미끄러져 가지고, 이쪽에서는 다 보이는데. 그 억지, 의롭지도 않으면서 의로운 채 하는 그 행동, 회개도 안 하면서 회개하는 척 하는 것. 나는 부족합니다. 나는 뭐든지 반성하고, 내가 하는 건 다 죄입니다. 이따위 식으로 하면서 십자가는 안 믿고 하는 그것, 다 보인다 말이지요.
결국 십자가의 원수가 남이 아니고 매일같이 우리 자신이에요. 전목사님이 그런 댓글을 못 다는 이유가 그 임 창길이라는 사람이 뭐라고 다느냐 하면, 목사 니는 왜 그리 잘났다고 합니까? 이리 나오거든요. 지 잘못은 감추고 똑같이 묻어가려고 하는 거예요. 왜냐 하면, 그리스도가 없는 인간들은 니가 잘났나, 내가 잘났나, 그것만 바짝 신경 쓰기 때문에, 전목사님 같은 경우는 개 같은 것에 진주를 던지지 않겠다는 마음으로서 그런 댓글을 그 귀한 단어를 쓰고 싶지 않은 거예요. 내가 나서서 변호했습니다마는. 그 사람들은 책도 안 보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책 본 사람들은 떠났느냐, 그 사람들은 책이 중요한 게 아니고 복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 교회 단도리하고 내 교회 유지하는 그게 최종 목적이에요. 왜? 그게 자기 자존심이기 때문에 그래요.
목사라 하는 것은 뭐냐, 예수를 믿는 사람이 아니고 지가 남긴 그 교회가 자기의 생애를 같이 죽고 같이 사는 거예요. 예수와 더불어 죽고 사는 사람이 아니고. 지 가게 지 상점하고 같이 죽고 사는 사람들이라니까요. 그래서 십자가마을에 답변할 때, 이렇게, 이렇게 하는 것은 결국 교회 장사라니까요. 그렇게 이야기해줘도 사람들은 그걸 믿지를 않아요.
3절에 봅시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사람들은 본체라는 말을 제일 싫어합니다. 왜? 지가 본체니까. 태양도 나를 위해 비쳐요. 내가 없으면 태양이 비취건 말건 무슨 상관이 있는데. 내가 없는데 태양이 뜨겁다. ‘잘됐다. 내가 없는 사이에 다 불타버려라.‘ 인간은 평소에 마음가짐이 자기가 본체에요. 마귀가 선악과 따먹을 때, 우리한테 부탁한 게 있었습니다. “니가 신으로 좀 살아줘!” 이걸 부탁했어요. 그걸 이미 신처럼 살아달라고 우리한테 자꾸 호응을 보내고 있다 말이지요. “니 선악과 알았잖아.” “하나님만 아는 것도 니 알았잖아.“ 그렇다면 니도 자립해서 니가 신이 될 수 있는데 그 노력을 포기하지 말라 이 말 이거든요.
그러니까 지금 관심사가 내가 어떻게 하면 선한 것을 가지고 내가 신이 될 수 있는가, 본체가 될 수 있는가, 그게 관심 있는데 성경은 뭐라 합니까? 본체를 애초부터 나를 비켜가요. “뭐~ 이런 뼈다귀가 다 있어.” 치워버리고 그 분이 본체시나, 그럼 나는 뭐고? 그러면? 그 분이 본체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나는 본체가 아니무니이다. 나는 절대로 이 세상은 내 위주로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를 이야기해야 돼요.
제가 십자가마을에 글 올렸잖아요. 새해에는 저주 많이 받으라고. 저주 자리에 가야 이미 주신 복이 보입니다. 이미 주신 복이 보여요. 저주의 자리에 안 가게 되면 2013년도에 저주의 자리에 안 가게 되면 우리는 그 자체가 저주입니다. 저주의 자리에 가버리면 비로소 처음부터 우리는 복을 받고 있었던 거예요. 2013년도가 매일같이 복된 나날이 되는 겁니다. 저주의 자리에 갔을 때.
‘새해 저주 많이 받으세요.’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새해 복을 보세요.’ 이미 받은 복이 엄청나다는 걸 체득하고 체험하세요. 그런 이야기이다 이 말이지요. 새롭게 복을 받을 생각을 하지 말고 2013년도에 추가적으로 복을 받지 말고 이미 받은 복이 천하보다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으랴, 했잖아요. 홍 나리가 몇 조돼도 삼성 이건희가 몇 조돼도 그건 복이 아니에요.
그런데 그 사람이 몽땅 다 잃어버렸을 때, 성령이 왔을 때, 비로소 그동안 살아온 것도 복이라는 것을 안다 말이지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저주케 하셔서 비로소 복이 보이게 하시는 겁니다. 그게 십자가 자리지요. 십자가 자리에 가려면 아까 뭐라 했습니까? 이것저것을 계속해서 털어내야 되겠지요. 그러니 그리스도만 복인데 그리스도한테 어떤 혜택보고자 하고 달라붙는 새끼나 아주 겸손해 하는 척하면서 주님께 달랑 붙어 있어서 콩고물 얻어먹어가지고 지금 받은 것은 성에 안 차. 원래는 예수 믿고 추가적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더 받아 챙기려하는 달라붙은 코딱지 같은 거 뜯어내야 내가 본체가 아니고 내가 붙어 있으면 주의 영광을 가린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선지자들이 여러 모양과 여러 부분으로 할 때는 선지자 속에 있는 그 무엇이 그리스도와 연결되기 때문에 선지자는 주변에 의해서 계속 자기는 부인당하고 고생하면서 엘리야 같은 경우는 밥도 제대로 못 먹었어요. 그런 식으로 엘리사도 마찬가지이고요. 욕만 디리 얻어먹고요. 왕한테. 엘리사 만나면 죽일 거야. 하면서 왕이 그렇게 욕했어요. 당신이 나라꼴을 지킨다고 좋~다, 아람군대가 이렇게 포위하도록 뭐 했노? 기도 안고 뭐했어? 니 월급주지 말까? 이런 식으로. 월급 준 것도 아니지만.
“당신이 그렇게 기도했으면 우리 집안이 잘 돼야 되는데 왜 이렇게 집안이 안 되는 거야, 당신이 복음 안다 해놓고 되는 것이 없어.”라는 수모를 복음 아는 여러분들이 얼마나 많이 받겠습니까? 아들한테 그런 원망의 소리를 들을 수가 있어요. 복음 안다 해놓고 나아질 기미도 안보이고 이런 식으로 말이지요. 뜯어내는 겁니다. 진짜 복음은 오늘 죽어도 나그네 가는 기쁨입니다. 10분 쉽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