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마지막에(히1;1) 130111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3. 26. 07:26
2013-01-12 01:50:14조회 : 1504         
마지막에 130111 이름 : 이근호 (IP:119.18.69.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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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은주 (IP:211.♡.100.169)13-01-31 14:26 

안양20130111a-히1장1절(마지막에) - 이 근호 목사

시작합시다. 오늘부터 히브리서 1장1절 시작합니다. 히브리서1장1절에 보면,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그렇게 되어 있지요. 여기에서 우리가 묻고 싶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왜냐 하면, 아들을 바로 보내면 되는데 미리 사전에 여러 모양, 여러 부분으로 그렇게 뜸들일 필요가 뭐가 있느냐,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낼 때,  가슴에 간판 크게 걸고 명함 크게 박아서 앞에 모자에다가  하나님 아들 크게 적어서 주머니에  하나님 나라 공장 프린트해서 각자 길가면서 “내가 아들입니다.” 하고 명함 나눠주면 되잖아요.

안 믿는 사람은 듣게 풀어서 뭐를 원해? 돈을 원해? 돈을 주면 믿겠습니다. 하면 돈 주고 믿게 하면 되고, 그렇게 자기 팬들을 자기 사람들을 그렇게 많이 모으면 되잖아요. 그리고 사람을 누가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이 만들었지요. 하나님이 만들었으면 자기가 만든 사람들을 구원을 하시려면 누구는 빼주고 누구는 구원해서 남겨두고 이렇게 하면 무책임한 하나님 아닙니까? 자기가 자식을 열 명 낳는데, 그 중에 세 명은 좋은 집에 살고, 나머지는 내 팽겨 치고 방치하고 이거는 나쁜 아버지죠.

지금 제가 방금 언급한 언어도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한 번 정리해 보면, 하나님께서 아들을 바로 보내시면 되는데 왜 여러 모양으로 여러 부분으로 보내느냐 하는 그런 질문했고, 두 번째 제가 질문한 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아들을 보냈으면 명함 파서 아들입니다. 아이고, 못 믿겠네요.  하면 믿도록 역량을 발휘해서 “자, 이제 믿겠습니까?” “아! 이제 믿겠네요.” 그렇지요

모든 인간에게 인간은 하나님이 만들었으니까 자기가 만든 하나님이 믿게 하시면 되잖아요. 그만한 능력 있으시잖아요. 왜 그렇게 하지 않느냐 하는 그런 문제점, 세 번째 이야기하자면, 아들을 안 보내고요, 아들을 귀찮게 보낼 필요 없이 있는 세상 그대로 천국으로 만드시면 안 되겠습니까? 아들 보내서 믿게 해가지고 그거 다 귀찮은 일이거든요. 아들 보내서 믿게 하지 말고,  술 먹던 뭘 하던 무슨 짓을 하던 환경만 이렇게 천국으로 바뀌면, “오우! 깨끗한 환경에서 몸도 깨끗해야 되겠네.” 사는 게 힘들어서 술도 퍼먹고 하지만 만약에 모든 게 풍족하고 아쉬운 게 없으면 사람은 누구나 양심대로 살면 그게 살기 좋은 천국 아니겠습니까?

남자가 여자를 밝힌다. 그러면 여자를 아내라 하지 말고, 원 없이 여자 밝히도록 해 주는 게 그게 천국이고,  돈이 없다. 그러면 하늘나라에서 돈을 마구 찍어내는 거예요. 사람들이 스트레스 안 받도록 하고, 자식이 애를 먹인다 하면, 자식을 낳데, 전부 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자식만 낳으면 그런 능력이 하나님께 있다면 천지를 창조했으니까 창조가 뭡니까? 없는데서 있게 하잖아요. 없는 것도 있게 하는 재주라면 착한 자식 낳고 돈 만들고 재물 많이 만들고 바나나 많이 하고, 이렇게 하는 재주도 이렇게 추울 때, 보일러 왜 땝니까? 우주 자체가 따땃하게 아열대 지방으로 27도 주어지면 물탱크 터질 일도 없고, 가끔 눈이 보고 싶다 하면, 따로 자리를 마련해서 이곳은 눈 오는 방해서, 눈싸움 하고, 나와서 온천에서 온천도 하고 얼마든지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왜 그렇게 안 하느냐 말이에요. 이 세 가지의 답변은 간단합니다. 정답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것은 바로 아들을 위함입니다. 우리를 위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를 인간으로 만들어 놓은 것은 아들을 위해서 인간을 만들어 놨지, 만들어진 인간을 위해서 하나님도 있고 예수님도 있는 그런 하나님은 없습니다. 애초부터 그런 하나님은 없습니다. 그게 바로 2절에 나와요. 2절에 보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그 다음에 3절에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지요.

하나님께서 자기의 자존심을 가장 완벽하고 절대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영광, 예수님의 하시는 예수님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는 그 방법만이 하나님의 영광을 전부 다 보여주는 겁니다. 전부 다 보여주기 때문에 아까 처음에 했던, 3가지 이야기는 기각되는 겁니다.

첫 번째, 세 번째 기억 잘 안 나거든 다시 보세요. 다 나옵니다. 뭐라고 말했는지, 다 기각되지요. 첫 번째 하나님께서는 아들 부르지 말고 바로 구원하지, 왜 아들을 보냈느냐, 두 번째는 왜 나누느냐, 세 번째는 결국 인간이 원하는 그런 세상을 하나님이 친히 만들지 않느냐, 하는 그런 문제거든요. 

바로 예수님을 보냈는데 뭔가 모든 모양과 형태로 미리 깔아놓고 보내서 만약에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 같으면 구원 못 받게 하는 그런 조치가 왜 하나님께서는 그런 조치를 하셨는가, 그것은 예수님의 하시는 것이 영광에 광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 히브리서는 구약에서는 히브리서가 나오지 않고 예수님 오시고 난 뒤에 이 히브리서가 있어야 될 이유를 알겠지요. 구약에서는 아들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구약에서는 나타나지 않았으니 뭐로 나타났습니까? 부분과 모양으로만 나타났지요. 신약에서 예수님 나타났으니까 그게 뭐냐 하면, 세상에 마지막 때입니다. 2절에 보면 이 모든 날 그 다음 뭐로 되어있지요? 마지막에.

사람이 마지막하면 섭섭해요. 드라마도 마지막하면 좀 섭섭합니다. 드라마 재미있게 보다가 오늘이 최종회하면 섭섭한 게 있거든요. 드라마뿐만 아니고 이 세상이 그렇습니다. 예수님 오시고 난 뒤에 모든 것이 드라마 보는 최종회 최종 마지막, 그동안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는  그 마지막 자막 올라올 그 시점에 우리가 지금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딴 것, 저 딴 것 필요 없이 예수님만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마지막 때는 바로 마지막다운 그런 믿음의 내용을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줬습니다.  이것저것 생각하지 말고 예수만 믿어라, 그럼 이것저것 생각하지 말고 하는데, 이것 버리고 저것 버리는데 버려야 될  내용 중에 반드시 포함되는 게 있어요. 

이것저것 버리고 예수님만 믿어라, 했을 때에 이것저것 해당되는 것이 뭔지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기 딴에는 버렸다고 하는데 정작 버릴 것은 안 버리고 계속 이것저것이 예수님께 붙어있으면 곤란하잖아요. 예수님만 남기고 이것저것 빠지려면 정말 예수님만 남기는 법, 그리고 예수님 것에서 이것저것 안 붙어있는 법, 그걸 아셔야 되지 않느냐 말이지요. 그래서 히브리서 내용은 간단합니다. 예수그리스도만 남기고 이것저것 붙어있는 것을 떼어내는 그러한 내용들이 이 히브리서의 내용입니다.

마지막 날에 아들로 이야기했다. 그러면 이것저것 붙어있는 게 뭐가 붙어 있는가 하면, 2절에 의하면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이 붙어있지요.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제가 한 때 왼쪽 발꿈치 뒤에 사마귀가 있었습니다. 굉장히 아팠어요. 병원에 가서 물약으로 한 달 반 정도 바르니까 구멍이 나면서 분화구처럼 뚫리면서 이것저것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이것저것이.

히브리서는 계속해서 물약처럼 사마귀에게 바릅니다. 뭐하라고? 이것저것 떼어지라고. 딱 떨어지니까 구멍이 있지요. 구멍자리에 뭐가 있었다? 떨어져야 할 것들이 지 자리라 하면서 버티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은 이 마지막 때는 있을 필요가 없어요. 마지막 때는 들어붙어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떨어져 나가야 되거든요.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은 무엇과 결부되어 있는가 하면, ‘나’와 결부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또는 예수님께서 예수님만 남기고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을 떼는 그 방법으로 오직 하나의 방법만 제시했습니다. 그 방법이 뭐냐 하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살려는 자는 다 떨어져야 돼요. 십자가의 양쪽에 달렸던 강도 다른 새끼 십자가는 옆에 있는 사이드에 있는 십자가는 둘 다 뭐하고 있었습니까? 십자가 셋이 뭐하고 있었어요? 십자가는 뭐하는 기구입니까? 죽이는 거 아닙니까? 그 죽음에 동참한 거예요.

장 미란이라는 역도 선수가 은퇴하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보지는 않았지만. 왜 웁니까? 뭐가 아쉬운 거예요. 자기가 생각했던 그것이 안 돼서 하잖아요. 그러면 장 미란이 예수님 때문에 죽었습니까? 장 미란이 울면서 떨어져나간 게 있지요. 자기가 대표라 하는 것이 떨어져 나가고 금메달 따는 게 떨어졌지만, 안 떨어지고 남아있는 것이 뭡니까? 여전히 자기 자신이지요. 그러면 그 자기 자신은 어디서 떨어져 나가야 돼요? 이것은 울어도 안 되고, 웃어도 안 되고, 진짜 이것은 부흥회한다고 될 문제도 아니고 무슨 수로 자기를 자기에게서 떨어냅니까? 

그때는 함께 있어야 돼요. 함께.  혼자서는 안 돼요. 누구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와 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 것이다. 그리스도가 산 다는 말은 그 안에 무슨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가 하면, 그냥 그리스도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날마다 나를 죽이는 방식으로 그리스도가 살아있어요. 날마다 나를 죽이는 방식으로. 자꾸 바깥으로 기어올라 와요. “내 안에서 내가 살아야지, 왜 니가 살어?” 밟으면서 그런 식으로 사는 거예요.

그래서 십자가라 하는 것은 예수님 당시에 옆에 세 개의 십자가가 있었고, 그 십자가에 달린 사람은 전부 다 죽은 겁니다. 그 죽었다 하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자체적으로 끝이에요. 여러분, 세상 끝이 아쉽습니까? 지 죽는 것이 아쉽습니까? 자기 죽는 것이 아쉬워요. 자기 죽고 난 뒤에 세상이 그대로 있다 하는 것은 약 오를 일입니다. 왜 나는 내 사랑하는 여자와 헤어졌는데 왜 태양은 빛나는가? 왜 해는 빛나고 왜 물결은 치고 있느냐 말이에요. 나는 내 사랑과 헤어져 슬픈데. 나는 울고 있는데 아이들은 골목에서 까불고 웃고 있느냐 말이지요. 왜 골목 웃음소리가 넘치느냐 말이지요. 세상 끝인데. 그 이가 없으면 나는 더 이상 살 이유가 없는데 왜 세상은 내가 아픈데도 너는 웃고 있느냐 이 말입니다. 약 오르게.  정말 죽여 버릴까보다 하게.

제가 동영상 녹화 중에 ‘죽음의 접지’라는 게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도는 마치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누워있으면 밑에서 뭐가 올라옵니까? 냉기가 올라오지요. 항상 죽음의 냉기가 올라옵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이 세상이 마지막이 되면, 그 세상 속에 누구도 포함되어 있습니까? 나도 포함되어 있거든요. 그러면 세상만 마지막이고, 나는 마지막이 아니다.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같이 마지막의 티를 내줘야 돼요. 같이 마지막이란 티를.

그런데 그냥 내가 나를 죽여 버리면 이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죽음이고, 진짜 올라오는 냉기는 뭐냐, 세상을 해체시키고 멸망시키는 그 하나님만이 아는 그 죽음이 냉기처럼 올라올 때, 그게 진짜 십자가의 죽음과 접지되어 있는 만남이 접속되어 있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은 망해도 망하는 줄 모르고 지만 살려고 애를 쓰다 보니까 기껏 생각하는 것이 세상이 망하는데서 오는 힘으로 망하는 것이 아니고 “아이고, 다 꼴 보기 싫은데 콱 죽어버리지.” 지가 평소에 생각했던 자기 죽음으로 음독자살하려고 “에이, 나 혼자 죽기 억울하다. 에이, 집에 불 놔서 죽여 버리자.” 해서 자기 죽고, 마누라 죽고, 자식 죽고, 심지어 위층까지 죽고. 아무 죄 없는 2층, 3층까지 불타서 죽고. 그것은 뭐냐 하면, 자기 죽음을 모르는 거예요.

그렇다면 히브리서 1장1절에 보면,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여기에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이라 하는 것은 방금한 이야기를 총괄해 보면, 마지막 때에는 누가 돌아가신다? 하나님의 아들이 돌아가신다. 그렇다면 그것이 확실하다면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 속에 뭐가 포함되어 있다? 뭔가 장차 마지막 때에 하나님이 메시아가 죽는 죽음의 모양과 죽음의 부분이 이 안에 이미 당겨서 들어있다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했던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바로 선지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선지자들은 무엇의 감을 잡았습니까? 그 시대만 보는 것이 아니고 마지막 때와 연결시켜서 우리는 이렇게 이런 메시아의 죽음과 엮여져 있다고 감 잡은 사람만 선지자 되겠고, 그런데 성신을 받지 못한 일반 사람들은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살면서도 거기에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이 왜 되는 줄 모르고 그냥 코앞에 눈앞에 있는 지 자식이나 남편이나 아내나 살피고 밥그릇이나 저녁 찬거리나 챙기고 그렇게 자기만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죽음의 기운이라 할까, 그런 것을 못 느끼고 사는 거예요. 옛날이나 요새도 마찬가지이고.

그러니 그들이 언제 죽음을 느끼는가 하면, 장례식에 갔을 때나 자기 몸이 아플 때, 만사가 자기 뜻대로 안될 때, “세상이 뭔가 왜 이러지?” “나는 세상을 좋아하는데, 세상은 나을 슬프게 만들지?” “나는 니가 그렇게 좋아서 단풍 보며 사진 찍고 했는데 나는 겨울이 좋다고 그렇게 외쳤는데, 이 겨울이 왜 나를 감기들 게 하는지, 도대체 이게 뭐야?” “나는 도대체 이 자연과 이 세상과 뭔가 어긋나게 살아가는가?” 이렇게 되잖아요.

세상의 자연이라 하는 것은 죽음의 바탕 위에서 있는 겁니다. 없는데서 있고, 죽은데서 창조되기 때문에 자연 속에 없음이 항상 내재되어 있어요. 그걸 파악하지 못하고 자연을 논해 버리면 불교 승려가 돼요. 혜민 스님, 법륜이라든지, 자연이 뭔지도 모르고 그냥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그러면 다 해결 되는 줄 이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게 아니에요. 사람이 망치가 있을 때는 의미를 모르다가 망치를 막상 찾다가 없을 때, 망치의 존재를 느끼잖아요. 

그런 것처럼 인간이라 하는 것은 항상 없다는 것과 비교함으로서 내가 왜 있지? 라는 의미가 발생되는 겁니다. 내가 지금 죽어서 없다고 봅시다. 내일되면 내가 차사고로 죽어서 없다고 봅시다. 그걸 내가 미리 당겨서 안다고 봅시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왜 삽니까? 이거 녹화는 왜 합니까? 내일 죽는데. 내가 죽는데 뭐하려고? 관 속에 누워서 보세요. 관 속에서 탁! 탁! 못 박는 소리를 내가 듣고 있다고 봅시다. 점점 답답해 오고  숨이 차오르고 있는데 바깥에서는 자식들이 모여서 부의금 몇 프로 갖는다고 그 이야기하고 있고. “아이고, 시원히 잘 보냈다. 아이고! 호상입니다. 호상” 기뻐 즐거워하고 있고 지금. 사람은 누구나 죽습니다.

로마서 6장에 보면 사람이 죽는 것은 값으로 죽지요. 뭘 한 값으로 죽어요. 무슨 값이냐 하면, 죄의 값으로 죽게 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이라 하는 것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죄 덩어리로 죄를 뒤집어 쓴 채 있는 거예요. 마치 아이스크림이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초콜릿시럽이 통째로 뒤집어 쓴 채 아이스크림이 있는 것처럼, 인간은 완전히 죄로 뒤집어썼고 뒤집어 쓴 죄로 말미암아 인간은 죽음으로 해체되어 가는 겁니다.

이것은 본인 행동이 나빠서가 아니라 뒤집어 쓴 거 때문에 그래요. 이것은 벗겨 낼 수도 없어요. 이것은 하나의 운명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매일같이 하루를 살면 하루만큼 우리는 해체됩니다. 로봇 해체하는 것처럼. 자동차 부속품 하나, 하나 해체하잖아요. 자고나면 이것 뜯기고, 자고 나면 저것 뜯기고. 한 번 보자, 하고 실험대에 있는 청개구리처럼 오늘은 이거 잘라볼까? 조금씩, 조금씩 모든 것이 뜯겨져 나가고 있어요.

왜 그렇게 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법칙 때문에. 하나님의 법칙은 죄 지은 자는 반드시 필히 죽는다. 죄 지은 자는 죽는 것이 마땅한 거예요. 죽는 게.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죽어야 될 것을 그 죄 문제를 용서를 해줬으니까 그 귀한 수천만 넘는 그 귀한 향수병도, 그 향수병이 자기를 영생 준 게 아니잖아요. “에라! 이 향수병으로 의지하며 살려하는 내야! 나는 이미 살았어! 하고 나는 이미 이 분 때문에 살았어!” 하고 울면서 머리카락으로 발을 씻으면서 주님 때문에 제가 살았습니다. 라고 할 때, 아직도 죄 용서를 받지 못한 바리새인들은 비웃고 있었습니다. “행실이 더러운 여자야!” 그렇게도 예수님은 간파하지 못하고 저 여자가 얼마나 소문난 나쁜 여자인 줄 모르고 그 사람의 봉사를 그렇게 흔쾌히 받느냐, 소위 거룩하다고 하는 사람이.

예수님은 그래요. “뭐가 거룩인데?“ 예수님의 진짜 거룩은 죄 없이는 생산되지 않습니다.  죄가 모아서 거룩이 된다는 사실을 너는 모르지, 죄를 멀리함으로서 거룩 된다, 하는 것은 구약 성경에 의한 인간적인 발상이고 인간적인 해석에 불과합니다. 더러운 것은 다 모여라, 거기서 거룩을 내가 만들어 내리라, 그래서 예수님은 찬양받아야 합당한 어린양입니다.

주께서 거룩을 만들어 내는 것은 로마서에서는 거룩을 ‘하나님의 의’라고 하지요. 하나님의 의를 만드는데 재료로 쓰였던 그 죄에 우리가 기꺼이 포함됐다면 여러분들은 장땡입니다. 여러분들은 땡잡은 겁니다. 로또보다 더 큰 걸 잡은 겁니다. 그래서 저는 성경을 뭐로 보는가 하면, 방앗간이다! 성경은 방앗간이다. 왜? 고추를 넣으면 가루로 만들어 버리고 쌀 넣으면 쌀가루로 만들어 떡 해 먹고, 섞여 들어간다는 것, 그냥 섞이는 게 아니고 가루가 되어서 섞여 들어가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복음을 이야기할 때, 사람들이 제일 이해하지 못하는 게 뭐냐 하면, 십자가 안이 방앗간이기 때문에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방앗간에 들어가는 것인데, 우리는 방앗간에 안 들어가고 방앗간 사진만 찍어요. 복음을 안다 찰칵! 십자가 안다 찰칵! 지 몸은 전과 똑같은 몸이 돼가지고 똑같은 마음이 돼가지고 그냥 구경만 하고 관광만 하고 그냥 가버려요. 방앗간에 가루가 돼야 되는데 가루가 안 되는 거예요. 로마서9장에 보면 나오지요. 십자가라 하는 것은 우리를 가루로 만드는 거예요. 가루가 돼야 재료가 된다니까요. 박살나는 즐거움!

자기는 멀쩡하게 예수 믿고 난 뒤에는 멀쩡하다고 예상하고 십자가에 오지만, 십자가는 블랙홀과 같아서 모가지 쥐고 십자가에 집어넣으면 우당탕탕 튀어서 전부 다 칼날이 산산조각 되어버려요. 아브람으로 들어가서 아브라함으로 튀어나와요.  잘난 욥으로 들어가서 이제는 유구무언의 욥으로 튀어나온다 말이지요. 나는 착한 일했다. 내가 나쁜 짓 뭐했는데? 하나님 잘 섬기고 자식들을 위해서 기도했다. 그렇게 입이 있어 말을 놀리다가 막상 고난이란 방앗간에 집어넣으니까 죄만 뒤집어쓰고 할 말이 없어 나오니까 딸 셋이 그렇게 예쁘고. 재산은 옛날보다 곱빼기로 있고. 그걸 믿겠습니까? 아니면 찾아오신 하나님을 믿겠습니까? 역시 찾아오신 하나님을 믿지요. 저 예쁜 딸들과 저 많은 재산들은 내 행함으로 얻은 게 아닙니다, 하는 것을 아는 거죠. 탕자가 다시 집에 와서 지가 입었던 옷, 지가 먹었던 쇠고기, 가락지 꼈던 것, 이 모든 것이 자기의 어떤 행함에 근거해서 주어진 게 아니다 라는 겁니다.

다음의 페이스 북에 보면 임 창길이라는 사람이 이 근호 목사에 대해서 비난을 해놨어요. 이 근호목사의 문제점이 뭐냐, 그 사람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이 근호 목사는 믿음으로 한 것까지 다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동안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 다 떠나버렸다 이렇게 해놨어요.  전 목사님이 댓글로 써놨는데, 그 글에는 아직까지 답변을 안 해주셨는데 팬 관리하시는지...ㅎㅎ

그 말을 한 번 분석해 봅시다. 인간은 죄인 것은 맞지만, 믿음으로 행한 것까지는 죄가 아닌데, 이 근호 목사는 그것까지 죄라고 해버리면,  그러면 우리한테는 죄밖에 없지 아니한가, 그래서 그것은 복음이 아니라서 소위 많은 사람이 떠나고 말았다. 이리 이야기 하더란  말이지요. 그러면 안 떠난 사람들은 뭡니까? 곧 떠나려고 보따리 싸고 있는 중이에요?

방금 전에 관람한다, 관광한다, 그 이야기 했지요. 그러면 그것을 그대로 해봅시다. 십자가라는 방앗간에 내가 그냥 관람만 하고 되돌아서게 되면, 관람한 대신에 자기가 죄를 안다고 치는 거예요. 해가지고 십자가 앞에 가면 이 죄가 용서받는다 하지요. 그러면 1단계 내가 현재 죄를 알고 있다. 그런데 십자가는 뭐한다? 죄를 용서하는 것이니까 나는 예수의 피를 믿는다, 라고 하지요.  1단계, 믿는다. 그러면 죄가 없어졌잖아요.  믿고 난 뒤에 다시 그것을 그대로 가지고 오게 되면, 믿는 사람이 어떤 행함을 보이게 되면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는 행함이다, 이리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것은 십자가 안에 들어왔습니까? 안 들어왔습니까? 맛도 안 봤어요. 구경하고 오는 거예요. 지금 이 사람이 겁을 내는 것은 이 사람 문제점이 뭐냐 하면, 십자가에 들어오기 전에 지는 죄를 이미 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면 자기가 본인이 죄를 아는 것은 의로운 거예요? 의롭지 않은 거예요? 본인이 이미 죄라고 아는 것은 그 자체는  나쁜 짓이에요? 안 나쁜 짓이에요? 그 쪽 본인에 의하면 그것은 착한 짓이라 하는 거예요. 그 사람은 이것은 죄다, 하지만 죄를 아는 것을 내가 알기 때문에 그것마저 죄는 아니기 때문에 전적으로 죄인인 것은 아닌 게 돼 버려요. 전적으로.

그러면 사도바울 같은 경우를 봅시다. 사도바울은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그 사람은 성령이 없기 때문에 그런 논리로 하는데, 성령을 받으면 성령은 그냥 주는 게 아니고 마지막 때는 무엇을 근거로 줍니까? 십자가 졌던 그 효과로 주어지지요. 성령은 무슨 영이 돼요? 십자가 안으로 잡아당기는 영이 되지요. 그러면 진짜 성령 받은 사람은 관람하고 싶어도 관람 못하고 여기서 뭐가 나옵니까? 여기서 손 같은 게 나와서 강제로 어디다 집어넣어요? 십자가 안에 집어넣어버리면 갈라디아서 2장이 되지요. 내가 그리스도 십자가 안에서 죽었나니 내 안에 사나니 그리스도가 살지요.

그러면 이렇게 십자가 안에 죽음이 되는 그 인간은 어떤 인간이었습니까? 바로 임 창길 그 사람처럼 나는 죄를 안다. 예수님이 용서하게 되면 그래서 용서받고 난 뒤에 행함은 착하다. 이걸 어떻게 합니까? 이 자체가 뭐가 된다? 이 자체가 죄가 된다는 것을 진짜 십자가 안에 있는 사람은 그걸 아는 거예요. 그러면 십자가 복음을 안 떠난 사람은 뭘 알아요? 성령을 받은 사람은 뭘 압니까? 십자가 안에 있기 때문에 나는 뭐만 나온다? 모든 게 죄라는 것만 나온다는 거예요. 그것도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죄만 나오니까 이젠 예수 믿고 난 뒤에 난 행함은 나의 착한 행함이라는 것을 믿어요? 안 믿어요? 그것은 내가 십자가 알기 전에 죄가 뭔지도 모르고 까불던 그 때, 그 시절의 생의 감각이었잖아요.  그게 바로 마지막 죄라는 것을 아는 거예요.  이걸 자기 부인이라 하지요. 십자가를 져라, 그리고 너는 너를 부인하고 누굴 따라라, 나를 따라오라, 그러니 임 창길라는 그 사람은 늘푸른교회 교인인데 그 사람은 만날 이 장우 목사를 선전하면서 내놓고 하는 말이 뭐냐 하면, 매일 전 목사님 댓글에 달려들어서 우리는 뭘 해도 죄인입니다. 그걸 내세우고 하는 거예요. 뭘 해도 죄인이라고 우기면서 우리는 뭘 해도 죄이니까 매일 회개하면서 주를 따라 갑니다. 라고 하면서 십자가마을 이 근호 목사 다 떠나버렸다, 이리 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 근호 목사 안 떠난 사람은 지처럼 모든 걸 죄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그 사람은 둘 중에 하나를 해야 돼요. 그야말로 십자가 마을 떠나지 않고 십자가 안에서 나는 날마다 죄라고 하던지, 안 그러면 십자가 안에서 전적으로 죄가 아니고 이제는 의로운 게 있다고 하면서 십자가마을 떠나면서 우리는 날마다 죄로 회개하거나 용서할 필요 없다. 이제는 우리가 바른 행동하면 되지, 모든 게 죄가 되는 건 아니다. 라고 하던지, 우리는 뭘 해도 죄가 아닙니다. 라고 해서 떠나던지, 안 그러면 우리는 뭐든지 죄입니다. 라고 하면서 십자가마을 안 떠나던지 해야 될 건데, 이 사람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십자가 마을 떠났다. 그리고 하는 말이 우리는 뭘 해도 죄입니다. 라고 하면서 지적하는 것은 이 근호 목사는 뭘 해도 죄라고 이야기했기 때문에 이 근호 목사는 복음이 아니다 하는 거예요.

지금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이걸 다시 댓글 달아보세요. 의도를 몰라도 못 읽어도 양쪽 다 보는 사람이 있잖아요.  그 사람을 설득하는 게 아니고 양쪽 다 비교해서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 말 다시 해 볼게요. 그 사람은 전 목사가 달아 놓으면 그 뒤에 줄줄이 달아놓아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뭘 해도 죄입니다. 그렇게 달아놓고 이 근호 목사는 문제점이 많은데 뭐냐 하면,  예수 믿고 난 뒤에 전적으로 죄라고 하는 게 문제입니다.

그러면 결국 그 사람 말은 뭐냐 하면,  날 좀 알아달라는 거예요. 믿는 나를 알아 달라는 거예요. 그것은 십자가 들어가기 전에는 관광객, 십자가 구경하러 온 사람은 자기는 여전히 자기 잘되기 위해서 십자가 믿고 예수 믿은 거예요.  왜, 역시 나는 예수 믿어줘서 착하다. 라고 할 경우에는 “봐라, 예수님도 알아줬는데 십자가 마을도 알아 줘” 이리 되는데 진짜 십자가를 알아버리면 이제 자기 자신은 예수님만 높이게 돼요.

“나는 뭘 해도 죄인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 마을에서 이 근호 목사의 말이 맞습니다. 떠난 놈이 이단입니다.” 이리 나와야 되지. “떠나면 이단입니다.” 왜 떠났는가, 그건 예수님이고 하나님이고 관심이 없고 자기 교회를 내거라는 거예요. 내거 건드리면 예수건, 하나님이건 다 죽여 버린다는 거예요. 나는 아무리해도 내거 포기하는 그런 의사 없다는 뜻입니다. 날 좀 알아달라는 거예요.

1절에 봅시다. 옛적에 선지자들이 나오는데,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 했잖아요. 선지자들이 여러 부분, 모양 전할 때에 곱게 전했습니까? 우당쾅쾅 전했습니까? 아~ 엄청나게 싸웠지요. 선지자를 멱살 쥐고 흔드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아예 돌로 쳐 죽여 버렸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까? 이것은 포도원 비유에 나오지요. 주인이 처음에 종을 보냈어요. 농부들이 반 죽여 놨습니다. 마지막에 아들 보내니까 아예 죽여 버렸지요. 선지자는 반쯤 죽였지만, 아들은 아예 죽였어요. 결국 선지자와 장차 올 아들과 연계되어 있다는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마지막에 아들을 보내기 위해서 종들을 미리 깔아놓은 거예요. 이 세상에.

그러면 깔아 놓으면 예수님의 십자가라 하는 것은 예수님이 오셨는데 아무도 십자가 안지면 이상하잖아요. 가룟유다가 날 배반해야 되는데, “가룟유다야, 날 배반해라” “선생님 배반 안 해요.” 이리 말하면 일이 안되잖아요. 세상은 어둡잖아요. 어두우면 어두운 값을 해야 돼요. 어두운 값을 하기 위해서는 이것은 악마의 앞잡이가 돼 가지고  예수님을 물어뜯어야 됩니다.  이것은 선지자도 마찬가지이고.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이 설교 잘하고 말이 멋들어지게 이래 가지고  여러 부분이 아니고 매일같이 쉬지도 않고 우당탕탕 싸움이 벌어진 거예요. 가만히 있어도 시비가 온다니까요. 고요하게. 고요하게 거룩한 밤은 찬송가 123장에 나오는 거고. 이 세상은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없어요. 아기 예수 태어난다고 알아가지고 헤롯군대가 쫓아오는 입장에서 뭐가 고요하고 거룩한 밤이에요. 동방박사 죽을 판인데.

마지막 때라 하는 것은 여러 부분이라, 여러 모양이라 하는 것은 결국은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만드실 때에 무에서 유가 있게 하실 때, 그 무도 사라지지 않고 함께 있는 방식으로 바탕으로 자리 잡겠다, 죽어야 될 것은 살게 했는데, 그 죽음이 소멸되고 취소되는 것이 아니고 이제 없는 것이 아니고 살게 된 그 죽음과 병행해서 생명도 같이 있게 만들었어요. 그리고 죽음에 속한 사람과 생명에 속한 사람이 부딪기는 가운데서 비로소 생명은 생명으로서 그리고 저주받을 죽음은 죽음으로서 드러내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비로소 지옥이 무엇이며, 천국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나타낼 수 있는 겁니다.

아까 한 거 다시 한 번 정리하게 되면, 우리는 뭘 해도 항상 죄밖에 없으니까 회개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됩니다. 그렇게 댓글 달아놓고 이 근호 목사의 문제점은 우리가 뭘 해도 그걸 의라고 인정하지 않고 죄라고 인정하니까 그것은 이 근호 목사는 이단이고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라고 했다 말이지요. 그 두 이야기가 어떻게 돼요? 그 두 이야기가 앞 뒤 안 맞지요? 안 맞지요. 이 근호 목사의 말이 전적으로 맞는다면 우리는 뭘 하든지 죄라고 하던지, 정말 전적으로 죄라고 솔직하게 한다면 저를 옹호하던지 해야 되는 거예요.

결국 그 둘 사이에서 나왔다는 말은 나도 내 믿음 좋다는 것을 좀 알아줘, 그 의도 외에는  니만 주의 종인가, 나도 종이다, 니만 성령 받았는가? 나도 성령 받았다는 그것을 남들이 알아달라는 거예요. 알아 달라하는 것은 십자가 밖에서는 있을 수 있는데, 십자가 안에서는 있을 수 없다 이 말이지요. 안이 방앗간이기 때문에 갈아버리면 나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어요.

하나님께서 구원할 때, 있는 것에서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있음을 무로 집어넣어서 유로 만들어 냅니다.  잘난 나를 뭐로 만든다? 죄인으로 만들어 놓고 그 죄인에서 하나님의 의를 끄집어내는 식으로 해서 구원하거든요. 그럴 때, 그냥 그걸 구경하는 쪽은 내가 죄인 됐는데 다시 의인되었으니까 그러면 나는 이제는 의인이다. 까불고 “이제 의롭게 살아야지.” 이렇게 나와요.  이게 관람하고 근처에만 가니 그런 거예요.

겨울에 아이들이 장난치면서 유리창에 코를 납작대면 갑자기 돼지 코가 되지요. 돼지 코가 돼서 납작 올라가잖아요. 관람과 구경하는 사람은 지 딴에는 십자가에 들어가려고 애쓰는데 내가 보기에는 돼지 코에요. 유리라는 그 얇은 관을 통과를 못했기 때문에 항상 돼지 코처럼 일그러진 모습으로 뺨 대면 뺨이 다 미끄러져 가지고, 이쪽에서는 다 보이는데. 그 억지, 의롭지도 않으면서 의로운 채  하는 그 행동, 회개도 안 하면서 회개하는 척 하는 것.  나는 부족합니다. 나는 뭐든지 반성하고, 내가 하는 건 다 죄입니다.  이따위 식으로 하면서 십자가는 안 믿고 하는 그것, 다 보인다 말이지요. 

결국 십자가의 원수가 남이 아니고 매일같이 우리 자신이에요. 전목사님이 그런 댓글을 못 다는 이유가 그 임 창길이라는 사람이 뭐라고 다느냐 하면, 목사 니는 왜 그리 잘났다고 합니까? 이리 나오거든요. 지 잘못은 감추고 똑같이 묻어가려고 하는 거예요. 왜냐 하면, 그리스도가 없는 인간들은 니가 잘났나, 내가 잘났나, 그것만 바짝 신경 쓰기 때문에, 전목사님 같은 경우는 개 같은 것에 진주를 던지지 않겠다는  마음으로서 그런 댓글을 그 귀한 단어를 쓰고 싶지 않은 거예요. 내가 나서서 변호했습니다마는. 그 사람들은 책도 안 보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책 본 사람들은 떠났느냐, 그 사람들은 책이 중요한 게 아니고 복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 교회 단도리하고 내 교회 유지하는 그게 최종 목적이에요. 왜? 그게 자기 자존심이기 때문에 그래요.

목사라 하는 것은 뭐냐, 예수를 믿는 사람이 아니고 지가 남긴 그 교회가 자기의 생애를  같이 죽고 같이 사는 거예요. 예수와 더불어 죽고 사는 사람이 아니고. 지 가게 지 상점하고 같이 죽고 사는 사람들이라니까요. 그래서 십자가마을에 답변할 때, 이렇게, 이렇게 하는 것은 결국 교회 장사라니까요. 그렇게 이야기해줘도 사람들은 그걸 믿지를 않아요.


3절에 봅시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사람들은 본체라는 말을 제일 싫어합니다.  왜? 지가 본체니까. 태양도 나를 위해 비쳐요. 내가 없으면 태양이 비취건 말건 무슨 상관이 있는데. 내가 없는데 태양이 뜨겁다. ‘잘됐다. 내가 없는 사이에  다 불타버려라.‘ 인간은 평소에 마음가짐이 자기가 본체에요. 마귀가 선악과 따먹을 때, 우리한테 부탁한 게 있었습니다. “니가 신으로 좀 살아줘!” 이걸 부탁했어요. 그걸 이미 신처럼 살아달라고 우리한테 자꾸 호응을 보내고 있다 말이지요. “니 선악과 알았잖아.” “하나님만 아는 것도 니 알았잖아.“ 그렇다면 니도 자립해서 니가 신이 될 수 있는데 그 노력을 포기하지 말라 이 말 이거든요.

그러니까 지금 관심사가 내가 어떻게 하면 선한 것을 가지고 내가 신이 될 수 있는가, 본체가 될 수 있는가, 그게 관심 있는데 성경은 뭐라 합니까? 본체를 애초부터 나를 비켜가요. “뭐~ 이런 뼈다귀가 다 있어.” 치워버리고 그 분이 본체시나, 그럼 나는 뭐고? 그러면? 그 분이 본체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나는 본체가 아니무니이다. 나는 절대로 이 세상은 내 위주로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를 이야기해야 돼요. 

제가 십자가마을에 글 올렸잖아요. 새해에는 저주 많이 받으라고. 저주 자리에 가야 이미 주신 복이 보입니다. 이미 주신 복이 보여요. 저주의 자리에 안 가게 되면 2013년도에 저주의 자리에 안 가게 되면 우리는 그 자체가 저주입니다. 저주의 자리에 가버리면 비로소 처음부터 우리는 복을 받고 있었던 거예요. 2013년도가 매일같이 복된 나날이 되는 겁니다. 저주의 자리에 갔을 때.

‘새해 저주 많이 받으세요.’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새해 복을 보세요.’ 이미 받은 복이 엄청나다는 걸 체득하고 체험하세요. 그런 이야기이다 이 말이지요. 새롭게 복을 받을 생각을 하지 말고 2013년도에 추가적으로 복을 받지 말고 이미 받은 복이 천하보다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으랴, 했잖아요. 홍 나리가 몇 조돼도 삼성 이건희가 몇 조돼도 그건 복이 아니에요.

그런데 그 사람이 몽땅 다 잃어버렸을 때, 성령이 왔을 때, 비로소 그동안 살아온 것도 복이라는 것을 안다 말이지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저주케 하셔서 비로소 복이 보이게 하시는 겁니다. 그게 십자가 자리지요. 십자가 자리에 가려면 아까 뭐라 했습니까? 이것저것을 계속해서 털어내야 되겠지요. 그러니 그리스도만 복인데 그리스도한테 어떤 혜택보고자 하고 달라붙는 새끼나 아주 겸손해 하는 척하면서 주님께 달랑 붙어 있어서 콩고물 얻어먹어가지고 지금 받은 것은 성에 안 차. 원래는 예수 믿고 추가적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더 받아 챙기려하는 달라붙은 코딱지 같은 거 뜯어내야 내가 본체가 아니고 내가 붙어 있으면 주의 영광을 가린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선지자들이 여러 모양과 여러 부분으로 할 때는 선지자 속에 있는 그 무엇이 그리스도와 연결되기 때문에 선지자는 주변에 의해서 계속 자기는 부인당하고 고생하면서 엘리야 같은 경우는 밥도 제대로 못 먹었어요. 그런 식으로 엘리사도 마찬가지이고요. 욕만 디리 얻어먹고요. 왕한테.  엘리사 만나면 죽일 거야. 하면서 왕이 그렇게 욕했어요. 당신이 나라꼴을 지킨다고 좋~다, 아람군대가 이렇게 포위하도록 뭐 했노? 기도 안고 뭐했어? 니 월급주지 말까? 이런 식으로. 월급 준 것도 아니지만.

“당신이 그렇게 기도했으면 우리 집안이 잘 돼야 되는데 왜 이렇게 집안이 안 되는 거야, 당신이 복음 안다 해놓고 되는 것이 없어.”라는 수모를 복음 아는 여러분들이 얼마나 많이 받겠습니까? 아들한테 그런 원망의 소리를 들을 수가 있어요. 복음 안다 해놓고 나아질 기미도 안보이고 이런 식으로 말이지요. 뜯어내는 겁니다.  진짜 복음은 오늘 죽어도 나그네 가는 기쁨입니다. 10분 쉽시다.

 공은주 (IP:211.♡.100.169)13-01-31 14:34 
안양20130111b-히1장1절(마지막에) - 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합시다. 첫 시간 끝에 본체의 형상이라 되어 있어요. 자, 여기서 어려워요. 형상이라는 말은 재료가 있고 재료를 조립하니까 어느 모양새 나온 걸 형상이라 합니다. 구리가지고 사람 상을 만들었다. 그럼 구리는 뭐가 되겠어요? 재료. 구리를 그냥 놔두면 사람모습 아니잖아요. 다듬으니까 모양새가 나왔지요. 그럼 모양 자체는 재료입니까? 아닙니까? 아니지요. 재료는 구리고, 그 모양새 이것을 형상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거 이해되시지요.

그 다음 문제 질문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그 생각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참 어렵지요. 귤이 있지요. 이게 식물세포로 돼 있지요. 그럼 식물세포가 다 귤입니까? 대나무도 있고, 코스모스도 있지요. 아니지요. 식물세포 중에서 이렇게 다듬어지니까 이걸 우리는 귤이라 부르지요.  그러니까 귤 모양새는 형상이라 하고 재료는 뭐다? 그냥 식물세포지요. 이 생각 맞습니까? 틀립니까? 그 생각은 틀렸습니다.

모든 상식으로 합당하고 그러니 인간은 죄인이라 하는 것은 그 순간 잊어버려요.  “아, 구리는 재료, 형상은 하나님이 봐도 맞는 거다.” 라고 할 때 깜빡 뭐를 잊어요?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잊어버리는 순간이 되는 거예요. 귤은 식물세포로 돼 있고 재료로 돼 있고, 모양새는 둥그렇고 작게 돼 있다.  크면 호박 되니까 아니다.  이렇게 작아야 귤이다. 이게 귤의 형상이다. 이리 보거든요. 주의 형상 다르고 곰의 형상 다르고 사람의 형상 다르듯이 재료는 같더라도 모양새는 다르다. 이 생각이 틀린 생각입니다. 그러면 이게 틀린 생각이라면 그러면 바른 생각은 뭐냐, 이렇게 질문해요. “너는 그것이 왜 옳다고 생각했는가?”를 추궁을 해요.

이것이 구리로 만들었고, 형상은 동상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고 하는 근거는 뭐냐 하면, ‘그러니까 하나님 저를 벌하시면 안돼요.’ 라는 게 담겨있어요. 인간에게서 나온 것에 대해서 하나님 벌하시면 안 됩니다. 라는 것이 깔려있다 말이지요. 그런데 선악과 따먹은 존재는 어떻게 된다? 죽으리라 했지요. 그러면 구리가 재료고 구리로 만든 동상도 형상이라고 여겼던 내가 어떻게 된다? 저주 받아서 지옥에 가야 되는 거예요.

헨델이 메시아를 작곡했잖아요. 놀라운 찬양곡을 했지요. 그런데 만약 헨델에 성령이 안 오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작곡하고 어디 가야 돼요? 지옥 간다니까요. 본인은 얼마나 억울합니까? 천재적인 재능가지고 음표해서 하나님께 할렐루야! 할렐루야! 찬양했는데 가기는 지옥 갔다. 하나님께 “저는 하나님께 메시아로 영광 했는데 왜 안 됩니까?”  그거는 영광이 안 된다는 거예요.

왜냐 하면, 3절에 보면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지요.  영광은 누구만 영광이 돼요? 아들만 영광이 되는 거예요. 여기에 대해서 만약에 그런 생각을 했다면 헨델은 도전한 겁니다. 악마의 심보로 도전한 거예요.  아까 첫 째 시간에 그 사람과 똑같은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만 영광인데 예수 믿는 나도 영광에 착한일할 수 있고 선한 일할 수 있다고 끼려고 하는 거예요. 예수님만 붙어있어야 할 곳에 이것저것이 달라붙어 있는 형국이다 말이지요.

3+5=8이다, 맞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은 참 잘했다고 ㅇ표를 해요. 어떤 사람은 3+5=9라 해요. 이것은 x표 하지요.  참 못 했어요. 잘라버리는 거예요. 우리의 기준은 3+5=8이 되어야 되고, 3+5=9는 틀린다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은 이것이 다 틀렸다는 거예요. 그러나 틀린 이유를 인간이 압니까? 모릅니까? 아무도 모르지요. 인간이 십자가에 들어가기 전에 지가 아무리 바르게 예수님 믿고 해도 그 자체가 틀렸다는 사실을 내가 예수님 십자가 믿는 게 틀린다는 사실을 본인은 몰라요. 성령을 받지 않으면 그걸 몰라요.  하나님 믿고, 삼위일체 믿고 이 모든 게 죄라는 사실을 몰라요. 내가 도둑질하는 것은 나쁜 짓이고, 예수 믿는 것은 착한 짓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 자체가 나쁜 짓인데. 거기에 뭐가 들어있는가 하면, “하나님, 저를 벌하시면 안돼요.” 이게 들어있어요.  “십자가는 예수님 혼자 지시고 저는 십자가 안 져도 되지요?” 라고 하는 거예요.

만약에 우리보고 주님께서 십자가 진다면 질만한 이유가 있어 지라고 했잖아요. 십자가 안 지고도 구원 받을 계략을 우리가 꾸미는 거예요. 십자가 안 지고도 구원 받을 계산한다 말이지요. 그냥 십자가 믿어주는 걸로 때우자 이 말이거든요.  이게 마귀가 마지막 카드입니다. 마귀가 마지막 던지는 조카가 뭐냐 하면, 예수님 믿어 주는 거예요. 마지막 카드 예수님 믿어 주고, 성령 받았다고 우기고, 그러면서도 마음속에는 예수님 없고, 내가 이 정도까지 하는데 설마 날 버리겠는가, 하는 겁니다.

그러나 히브리서11장을 미리 당겨서 이야기하면,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믿음의 선배들이 있지요. 공통점이 있어요. 자기가 하나님을 믿은 적이 없어요. 믿음이 나를 만들어내는 거예요. 믿음이란 분이 예수님인데, 예수님이 나를 만들어가다 보니까 내가 했다하는 게 없다는 거예요. 내 뜻이라 하면 나는 절대로 바로 공주의 왕자로서 만족하지 고난 받지 않습니다. 내가 내 뜻이라면 절대로 방주 만들지 않고, 내 뜻대로 하면 절대로 할 수 없어요. 내 뜻이 아니기에 방주 만들었어야 했고, 내 뜻이 아니기에 바로 공주의 아들 됨을 청함을 거부했어야 했고, 내 뜻이 아니기에 톱에 켜임을 받은 거예요. 미쳤다고 톱에 켜임을 받고, 태어날 때부터 이사야 돌 잔치할 때부터 “니 실 쥘래? 책 볼래?  돈 쥘래? 톱 쥘래?” 이런 거 없잖아요.

예를 들면 이사야가 톱에 잘렸다면 이것은 절대 본인의 의사가 아닙니다. 다윗이 돌 못 던져서 환장해서 ‘아이 씨~ 돌 던질 데 없나?“ 하고 환장해서 골리앗과 싸운 게 아니에요. 대구강의에서 했잖아요. 만군의 하나님이 개입했다고요. 그러면 도대체 나보다 누가 더 세다? 믿음이 더 센 거예요. 그게 바로 믿음이에요. 그러니까 나보다 더 센 것을 선악과 따먹은 인간으로서는 용납이 안 됩니다. 따먹은 값을 한다고 마귀가 요번에는 뭐 될꼬? 신 될게. 마귀는 나에게 힘을 줘야 돼! 알았어. 이리 되는 거예요.

나보다 더 센 분에게 일방적인 뜻에 의해서 나는 일방적으로 놀아난다는 것이 얼마나 우리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지요. 잠언서에 나오지요. 부한 자도 누가 지으시고? 가난한 자도 하나님이 지었다. 우리는 이왕이면 부자 돼서 구원받고 싶지요. 그러나 부자 돼서 구원받는 사람도 있고, 부자 돼서 지옥 가는 사람도 있고, 가난해서 구원받는 사람 있고, 가난해도 지옥 가는 사람 있는 거예요.  그런데 가난한 자나, 부자나 공통점이 있어요. 내가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수용하는 사람들이에요.

나보다 누가 더 세다? 누가 더 넓다? 하나님이 더 크시고 넓은 거예요. 누가 주를 이기랴, 고린도전서에 나오지요. 누가 감히 주를 이기겠는가? 누가 주보다 강하겠는가? 올 한 해 2013년도에도 늘 주님이 강해지시길 바랍니다.

여기에 보면, 3절 끝에 봅시다.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다, 했지요. 우리 중에 누가 하나님 우편 중에 앉아있습니까? 아무도 없지요. 그러니까 보세요. 우리가 주님을 따라 잡으려고 애써도 주님 하는 것을 우리가 흉내 낼 수가 없습니다. 격이 달라요. 노는 게임이 달라요. 우리가 하는 찬양, 기도 그 정도 수준 아니고 아예 하나님 우편에 앉아버립니다.

그 다음에 3절에 보면, 죄를 정결케 하시는 일을 하시고 우리는 죄 용서 받을 뿐이지 우리 스스로 우리 죄를 정죄할 수 있는 그런 재주가 없어요. 정화수 떠 논다고 우리 죄가 없어지고 하지 않잖아요. 그러면 죄를 많이 지면 정화수 한 드럼을 놓겠다. 풀장을 만들지. 정화수를 국립과학수사대에 분석해 보세요. 그게 얼마나 박테리아 대장균이 많은지. 그게 무슨 정화수입니까?

인간에게는 인간의 지평이라는 게 있어요. 지평이라는 말은 인간의 한계성을 두고 지평이란 말을 해요. 인간의 한계가 있다. 이런 말 보다는 현대철학에서는 인간의 지평이 있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인간의 한계가 있다와 인간의 지평이 있다, 와는 다릅니다. 한계가 있다하면 여기까지 한계네, 하고 한계를 알 수가 있어요.

그런데 지평선을 보세요. 지평선을 만나려고 아무리 가다서도 지평선을 가면 지평선도 같이 분명히 한계는 있는데 손에 잡히지를 않아요. 달을 잡는 거와 같아요. 여기 지평선이 있었는데, 가보면 마치 지평선은 저리 가있어요. 시크릿 가든의 OST있잖아요. 한 발자국 다가서면 두 발자국 물러서고, 바람 같은 사랑, 이 거지같은 사랑, 나오잖아요.  보세요. 한 발자국 다가서면 물러가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어디에 있다? 여전히 뭔가 지평에 있다. 내가 요 정도하면 착한 일이라 하는 것은 고 정도 지평선이 고 정도 밖에 안돼요.

그런데 예수님의 지평선은 어디까지입니까? 태초부터, 창조 전 부터, 세상이 끝날 까지 그 지평선이 다를 보잖아요. 다를 보시는 그 입에서 나오는 멘트, 그 말씀을 지 코앞에서 붙들고 있는 인간이 그걸 지켜낸다 이 말입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예요. 여기 떡이 있는데요. 떡이 맛있을 때, 떡 만든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한다고 합시다.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떡을 잘 만든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뒤에서 뒤통수 날아옵니다. 왜 그렇게 이야기합니까? 지가 아는 지 동네, 인덕원 근처에서 안양근처에서 떡은 최고지요. 그런데 세계 떡 대회 해봤습니까?

어느 가수가 선배가수 앞에서 이런 소리합니다. ‘내가 세계에서 노래 잘 부르는 10명의 가수 중에 한 명입니다.‘ 라고 했다가 욕 되게 얻어먹었어요. 선배가 ’야, 야, 니가 세상을 모른다.“ 그 소리에 후배가 쏙 들어갔어요. 지는 젊을 때, 한창 잘 나갈 때, 그 소리하는 것은 자신감이 있어 했거든요.  인생을 살아보니까 날고 기는 사람의 국내에서도 안 보여주는 노래다 말이지요. 해외에는 놔두고.  인생을 나중에 40대, 50대 지평가지고 인생을 논한다. 나중에 죽을 때 되면, 사람은 결국은 한 마디에요. 소고기 먹으면 뭐하노? 그거라니까요. 잘났다 못났다 도 죽음이란 그 앞에 인간은 똑같아요. 똑같아.

죄 값은 사망이다. 뭐만 진리입니까? ‘죄 값은 사망이다.’ 라는 말씀만 진리에요. 우리는 그 진리 안에 지평선 안에 우리는 거기에 들어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증거 할 것은 나 이만큼 믿었다, 잘 지켰다, 하지 말고 내 행한 거, 착한 거, 이 따위 소리, 이제는 착한일 할 수 있다, 이게 아니고 오직 말씀만이 진리입니다. 나는 그 앞에서 나의 현재의 지평선 밖에 모르기 때문에 그 격차가 뭐다? 결국은 죄이다. 나는 뭘 해도 죄인입니다.

그 말씀의 주인공이 누구냐, 모든 말씀은 누구를 소개하고 있습니까? 예수님 소개지요. 그래서 그걸 합쳐서 보면, 예수님 안에 모든 말씀이 들어있고 곧 예수의 말씀이고, 말씀이 예수님이니까 그 앞에서 우리는 뭘 해도 죄인이고, 그 우리가 미처 몰랐던 죄까지 주님께서는 3절에 보면,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신 겁니다. 이걸 여러분들이 아신다면 우리는 히브리서를 통해서 도대체 나는 내 지평선을 벗어난 적도 없고 기껏 생각한 것이 우물 안의 개구리밖에 안 되는 요 정도밖에 모르는 죄인인데, 어떻게 그 죄를 무슨 수로 정결케 했습니까? 라고 묻게 되면, 그 다음 내용이 히브리서 내용의 전부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오직 찬양 받으실 분은 누구 밖에 없습니까? 예수님 밖에 없다는 겁니다. 올 해 2013년도 우리는 정결케 받은 자로서 푸짐하고 그냥 무던하게 푸근하게 그저 세월아 내월아 하는 대로 사시면 되는 겁니다. 우당탕탕하던 집구석 불나던 관계없어요. 그냥 살면 항상 저주의 자리에 가게 되어 있습니다. 저주의 자리에 가있으면 주께서 말씀대로 이미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게 하시고 알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할 때도 아주 넉넉하고 자리 쭉 펴고 편안하게 강의 들으시면 되는 겁니다.

그 다음에 5절 봅시다. 1절부터 4절 이해되셨지요? 오직 그리스도 앞에는 이것저것을 벗겨낸다는 것. 쓸데없는 거 다 벗겨내고 오직 그리스도만이 원형이다. 본체의 원형이 되는 겁니다. 자, 그러면 원형 또는 형상이라는 말이 나왔으니까 아까 그 형상하고 우리의 형상하고 잘못됐다, 했습니다. 구리로 동상 만드는데 동상의 모양새는 형상이고, 구리는 재료다, 하는 그 생각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입니다. 그건 우리 인간들의 상식이지요. 그건 잘못됐다하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이라 하는 것은, 뭐가 없느냐 하면, 재료라는 것이 여기서는 허용치 않습니다. 형상 있으면 재료가 있다, 이런 생각은 예수님한테는 허용이 안 됩니다. 그러면 뭐가 되느냐 하면, 형상은 하나님의 일을 그대로 베껴서 지상의 일을 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형상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 하는 것은 우리는 그냥 모양새잖아요. “야, 니 형상 좋다.” 하는 이 말은  니 모양 좋다 하는 말이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은 형상이 없으신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일만 하시는 분이에요. 이 지상에서. 물론 하늘나라에 보좌가 있지요. 그러나 이 땅에서는 형상에서는 일로서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요한복음에 나오는 말씀처럼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내 하는 일을 통해서 아버지를 알라, 이리하는 거예요.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사람들은 아버지를 보이라 했거든요. 도마라는 사람이. 보이라는 말은 지한테 눈이 있고 눈의 기능이 뭡니까? 보고 눈에 띠이면 믿던지, 말던지 지가 결정 하겠다 이말 이거든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면 제가 믿을 용의가 돼 있다, 이 말이거든요. 그런데 예수님은 뭐냐 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었잖아. 그런데 나를 보고도 아버지를 왜 보이라 하느냐?”라고 했다 말이지요. 그건 뭐냐 하면,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게 되면, “에이, 마리아 닮은 사람, 키는 몇 센티” 이리 나오는 거예요. 왜냐 하면 평소에 사람의 형상대로 보는 식으로 예수를 보기 때문에 그냥 예수님의 형상을 빤히 보는 거예요. 보고, 하나님일까? 아닐까? 저건 선생님인데, 이리 생각한다니까요. 본인의 형상화 생각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에 잘못된 시선가지고 예수님을 보니까 예수님의 형상인 것이 안 보이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님의 형상인데, 사람의 눈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예수님의 형상이 아니에요. 예수님께서 내 하는 일을 통해서 내가 아버지와 함께 있다는 것을 네가 알라, 이 말이에요. 보고서 믿을 생각하지 말고 내 하는 일을 통해서 니가 믿어라, 이 말입니다. 

그런 적당한 예는 아닌데요. 쉽게 하기 위해서 예를 들게 되면, 선을 부모가 알아서 보고 자식들에게 인계하듯이 그냥 결혼시킨 경우가 많이 있잖아요. 실제로 대구의 봉화에 근무할 때, 봉화의 어떤 공무원인데, 어릴 때 부모가 가문의 하나의 전통으로서 어른들이 선보고 좋다 해서 아들한테 떠맡긴 거예요. 아들은 부모한테 효도한다는 기본적인 양심에서 결혼해 놓고, 애까지 낳아놓고 정말 살기 싫은 거예요. 보기는 봐도 보기 싫은 거예요. 그래서 서울에다가 진짜 사랑하는 여자 만나서 이 여자랑은 그만 뒀지요. 왜냐 하면, 마음에 안 드는 걸 어떻게 합니까? 지가 선택했거든요. 강제로.

그런데 만약에 예수님을 봅시다. 진짜 여자가 예수님처럼 생겨서 너무 마음에 안 들어요. 그런데 그 여자가 막상 와가지고 얼굴도 보기 싫고 영 마음에 안 드는데 하는 일을 보니까 항상 자기가 예상 밖의 놀라움을 제공하는 일을 합니다. 항상 지가 예상했던 지평, 아마도 내가 이렇게 하면 여자는 이렇게 나올 것이다. 하는 남편이 생각하는 지평이 있잖아요. 지평 외에 속하지 않는 다른 일을 했을 때, 남자는 깜짝 깜짝 놀라는 거예요. 잠언서에 나오지요. 아내를 주신 자는 여호와가 줬다. 니가 생각하는 지평 넘어 어떤 세계가 있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아내를 준 거예요. 그걸 지평의 융합이라 합니다. 두 개의 지평이 서로 만나는 거예요.

지평의 융합을 하게 되면, 이제는 나의 세계가 아니라 너의 세계마저 나의 세계 되면서 자기 한계 속에 자기 지평 안에 있던 한계를 상대방을 통해서 극복할 수가 있어요. 극복한다는 말은 뭐냐, 나는 내 안에서 잘했다 하는 짓인데, 당신을 만나고 보니까 내가 얼마나 마음이 높았고, 교만했다는 것을 깨닫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봉화에 있는 공무원은 다른 여자 찾지 말고, 비록 마음에 안 들더라도 살아가면서 내가 미처 생각 못한 다른 일을 발견하는 그 재미로 부부생활을 해야 되는데, 그것마저 없다 그 말이에요.  이야기 들어보니까 정말 살기 싫어. 정말 보기 싫어요. 보고 싶다가 아니고 정말 너무 보기 싫어. 서로가 불행해져요. 결국은 갈라섰습니다. 아~ 참, 아버지한테 효도하지 말라 그 말이에요. 왜 그 당시에는 효도할 수밖에 없는 게 지 지평이 우리는 유교집안이니까 아버지 말을 들어야 복이 온다는 거, 사실은 맘에 드는 게 아니고 혹시 살아계신 어떤 우주의 신께서 아버지에게 효도했다고 복 줄게, 하는 이런 자기 이익과 관련이 있어요. 말은 안 해서 그렇지 다 있다고요. 사람들이 복하는 것도 다 지 잘해달라는 그런 노림수 때문에 당하는 거예요. 누구 핑계 댈 것도 없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은 눈으로 목격해서 믿는 게 아니라 했지요. 그럼 방금 제가 한 말 정리하게 되면, 예상 밖의 일, 그런데 예상 밖의 일은 항상 우리를 놀라게 하는데, 기쁨으로 놀라게 할까요? 슬픔으로 놀라게 할까요? 그거는 그 때 그 때 달라요. 그거는 몰라요.

휴대폰을 놔두고 왔다. 아, 미치겠다. 슬프지요. 하나님께 원망되지요. 하나님이여, 그 때 내 머리를 자극해서 챙기도록 못 해주시고 왜 안 챙깁니까? 하나님께서 내 머리를 주관하지 않으셔서 잊어버렸잖아요. 했는데 그 휴대폰이 주머니에서 나왔을 때, 아! 하나님께서 잃었다가 얻었다는 기쁨을 주시려고 잠시 잃었다고 착각할 뻔 했구나! 주께 감사합니다. 이리 되는 거예요. 그것도 예상 밖의 일이에요. 그런 것도 앞으로 건망증 생겨서 부지런히 일어날 겁니다. 계속 그런 일이 깜짝 깜짝 놀랄만한 일과 더불어서 그 놀랄만한 일이 내 예상하지 못한 다른 식으로 해결될 때 오는 그 기쁨을 이건 또 보너스에요. 예상 못한 기쁨을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머리가 허옇다고 고민하고 있는데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는데 “니, 우리 머리에 비해서 완전히 새까맣다.“ 할 때 갑자기 예상 못한 칭찬을 받을 때 갑자기 업그레이드되는 이 기쁨! 주께서 주신 기쁨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 그러니까 우리는 그냥 하나님이 갖고 노는 노리개에요. 노리개. 웃었다가 울었다가 사랑할 때가 있으면 미워할 때가 있고, 좋고 기쁠 때가 있으면 울 때가 있고, 전쟁할 때가 있으면, 화평할 때가 있고, 세상은 마치 파도처럼 돼서 우리는 그 안에 떠있는 물 분자에 지나지 않아요. 결국은 주님의 지평과 우리의 지평이 다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다음에 6절 봅시다. 4절 끝에 보면,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심이니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네가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이리 되어 있는데, 여기서 기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요새 하도 자본주의에서 기업하니까 회사를 이야기하는데, 이 기업은 회사가 아닙니다. 저는 처음에 교회 갈 때, 기업이라 하니까 아브라함 때 무슨 기업체가 있었는가 했는데, 기업이 그런 기업이 아니고 이것은 유산, 유산을 줬다. 

그런데 유산과는 좀 달라요. 유산은 아버지 것을 “얘! 아들아, 오너라 아버지 것을 이제는 네 거다.” 어떤 물건을 넘겨주는 것이 유산이잖아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유산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물건을 넘겨주는 게 아니고 우리 자체가 유산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유산을 받아서 소유하는 게 아니고 나는 새로운 피조물을 내가 받아서 새로운 피조물 내가 소유하는 게 아니고 내 자체가 그냥 하나님의 믿음에 의해서 믿음의 증인으로서 만들어져가는 관리대상이 되는 겁니다.

내가 주님을 관리하는 게 아니고 주님이 나를 다듬는 관리대상이 되는 거예요. 다듬는 관리대상으로 삼는 거예요. 그래 놓고 우리를 내가 만든 기업이다 하는 거예요. 구약에 보면, 아브라함의 기업이 뭡니까? 아브라함의 유산이 누구지요? 이삭이지요. 아브라함이 키웠던 양, 소가 아닙니다. 그걸 주는 게 아니고 이삭 자체가 유업이에요. 왜? 아버지의 믿음 때문에 생긴 거니까.  이삭이 있고 받는 게 아니고 이삭 아예 없을 때에요. 사람이 있어야 받지, 본인도 없는데 뭘 받아요. 없는데 이삭을 낳음으로서 이삭 자체에 유업이 되는 겁니다.

그 다음에 이삭의 유업은 누가 됩니까? 에서가 됩니까? 야곱이 됩니까? 야곱이 되는 거예요. 아브라함, 이삭, 야곱, 이 계열이 뭐냐? 요게 바로 약속의 기업이라, 약속의 유업이라  되는 거예요. 죽었더라가 죽었다가 아니고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나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 자의 하나님이라 하는 이 말은 현재 살아있는 사람의 하나님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살려 줄 경우에만 나의 약속의 열매로서 비로소 산자고 그 산 자를 살게 하신 것이 바로 하나님이고, 그럴 때 하나님과 너 사이는 유산의 관계다, 유업의 관계다, 이 말입니다. 그게 아브라함의 언약입니다.

그냥 사시면 된다니까요. 그냥 사시면 알아서 유업으로 만들어 내요. 뭐라고? 내가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이 고백이 자발적으로 나오도록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자발적으로 나오는데 그걸 하루 열 대 번 미리 당겨서 해버리니까 이거는 전혀 새롭지도 않고 그저 내 지평 안에 있는 내 주머니 밖에 안돼요. 성경 안다고. 여호와 증인처럼.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 하는 것은 내 지평에서 나오면 안 되고 내 넘어 있는 지평에서 일이 터져서 나와야 내 지평마저 몽땅 그 분에게 안길 수 있잖아요. 네 거는 내게 아니고 주님의 겁니다. 나의 나 된 것은 주님의 것입니다. 이리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가난하다 생각하지 말고 받친다는 생각에서는 부자나 가난한 자나 차이가 없습니다. 귤 밭이나 사과 밭이나 마찬가지에요. 돈 바치나 종이 바치나 마찬가지에요. 누구를 향하여 라는 점에서는 같은 기업의 모습이기 때문에 현재 내가 가진 게 얼마나 가지고 너무 낙담하거나 좌절하거나 인생 실패했다고 그렇게 슬퍼하거나 노하지 마세요. 엮어져야 돼요. 자기 과시하지 말고 자기를 인도하신 주님을 증거 하면 되는데 우리는 그것을 가위로 다 잘라버리고, 니만 십자가마을 복음 십자가 아나, 나 좀 알아줘 하는 식으로 나오니까 그건 들어주면 안돼요.

오늘 오다가 기차간에서 이단들이랑 상황이 벌어졌어요. 넷이 모여서 여호와 증인 같아요. 앉아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내가 시끄럽기를 기다린 건 아니지만, 떠든 거 지나가는 안내양 보고 조용하라고 전했어요. 그런데 지날 갈 때는 안 떠들거든요.  불러서 지금까지 계속 떠들었는데 저 쪽에 있는 인간 전화까지 했습니다. 안내양은 안 가려해서 내가 가서 조용히 하라고 해버렸어요. 넷이 발끈했어요.  나중에 대전에서 내리면서 나보고 가면서 학식도 많아 보이는데 떠들어서 미안합니다. 지금 내를 비꼬는 거 같은데. 비꼬는 게 아니고 진심으로 미안합니다. 그런데 너무 학식이 많아서. 이렇게 하는 기라, 진작 비꼬려면 입 다물고 그냥 가세요. 그 소리한 여자가 데리고 갔는데.

그런 일들에 대해서 제가 굉장히 아낍니다. 귀하게 여기는 것이 복음 연구에 그 일을 발생시켰잖아요. 발생시킨 일을 여기다가 집어넣어 버려요. 예약감이 되도록 주께서 만들어 놨어요. 내 지평 바깥에. 예상 못한 바깥에. 그렇게 이 말씀을 전하도록 조치를 이렇게 하신다니까요. 얼마나 감사한지.

그 다음에 내가 너를 낳았다, 해서 하나님의 유업으로서 아들이 이 땅에 오신 거예요. 왔는데 그걸 누가 알아봤느냐 하면 7절에 보면, 천사들이 경배했지요. 천사들이 경배했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뉘앙스가 이런 언급을 하시는 이유가 천사 빼놓고는 없었다, 이 말이에요. 왜냐 하면 천사도 경배했지만, 알아보고 경배한 사람이 있다하면 무슨 사건이 터지지 않습니까? 십자가가 터지질 않아요.  십자가 안 터져버리면 이건 누가 좋을 일입니까?

자, 예수님께서 오셨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안 터져 버리면 누가 알아봐서 잘 모셨다 이리 되잖아요. 그러면 현재 인간이란 이 지평이 긍정이 됩니까? 부정이 됩니까? 부정이 안 되고 전적으로 긍정이 되잖아요. “내가 벌주려고 왔더니, 아이고, 세상에 요 인간 세계도 예수님 알아보는 인간이 있네.” 아이고, 그러면 내가 벌주면 모순되잖아요. 의인 50명 있어도 벌주니까 아브라함이 계속 카운트다운 내려갔잖아요. 10명이 있어도 벌 내리면 안 되잖아요, 할 때, 열 명도 없다고 한 거예요. 그러면 내려온 것이 10명으로 내려왔으니까 10명마저 없다는 말은 결국 한 명도 있다? 없다? 한 명도 없는 거예요. 결국. 하늘에서 유황불 내린다는 말은 아무도 없었다는 것을 다른 말로 표현한 것이 유황불 내리는 거예요. “에이, 다 타죽어라, 씨~” 되는 거예요.

유황불을 준비했다는 말은 이런 게 어려운데, 잘 들어보세요. 나쁜 짓하고 나쁜 일하고 해서 유황불 떨어진 것이 아니고 유황불은 원래 준비한 거예요. 언제까지? 한 명도 없을 때까지. 하나님은 일을 그리 하십니다. 그러면 의인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아는 순간은 의인 없지 하는 것이 의인 없는 게 아니고 그 안에 예수님을 보내야 돼요. 예수님을 살짝 보내보면 지 본색이 드러나요. 왜? 인간의 지평은 마귀가 원했던 지평이거든요. “어쨌든 니가 노력해서 하나님처럼 돼라.” 이런 노력이 신나게 이루어지는 판에 내가 하나님이다, 하고 들어왔으니까 인간은 용서될 대상이 안 되지요. 우리가 하나님 되려는 모든 노력은 완전히 조다가 되잖아요. 이것은. 부정되잖아요.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하나님과 엮였던 관계는 완전히 사기라는 게 들통 났잖아요. 지금 하나님하고 사다리를 놨다고 착각했는데 진짜 하나님과 통하는 사람이 와 버리면 그럼 이 노선은 뭐가 돼요? 이거는 가짜가 되잖아요. 자기가 가짜 안 되는 수는 무슨 수밖에 없습니까? 진짜를 죽이면 되는 거예요. 진짜를.

제가 십자가마을에 글 쓰고 평소에 설교를 하면서 저도 생각합니다. 이렇게 과격할 필요가 뭐가 있는가 하는 생각,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해놓고 저주이야기를 해야 되는데, 처음부터 과격하게 티를 내야 되느냐, 이래서 나 잘났고 나 믿음 좋고 그런 티를 꼭 내야 될 필요가 있겠는가를 생각 안 할 수가 있어요? 늘 생각하거든요. 하는데 만약에 “그래, 해도 좋다.” 해 버리면 이것은 뭐냐 하면, 뭘 긍정하게 되느냐 하면, 현재는 내가 알고 있는 것이니까 일이 잘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자기 지평에 대해서 이걸 감싸 주려는 기색이 아주 강합니다. 인간은. 굳이 말썽을 일으킬 필요가 없잖아요. 굳이.

그냥 감사합니다. 주께서 주신 은혜 감사합니다. 하고 살면 되지 굳이 말썽을 일으킬 이유가 없다 이거예요. 굳이. 그렇다고 굳이 말썽을 일으키기 위해서 일을 저지르는 그것도 내가 아는 지평선 내에서 그냥 일시적으로 몸부림치는 거 밖에 안 되거든요.  주께서 시키시는 대로 살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주께서 시키신다고 해서 잘난 것은 아니지만 돌아서면 또 내 지평 안에 들어가서 내 자랑 되는 게 뻔하기 때문에, 하더라도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할 수밖에 없어요. 다만 하고 싶다는 것이 욕망대로 하는 게 아니고 복음과 관련된 하고 싶은 것. 복음을 위해서 뭐라도 다 해야 된다는 것. “주여, 이거는 내가 이리되면 내 자존심 상합니다.” 이런 것이 있으면 안 되는 겁니다. 복음을 위해서 뭐라도 해야 된다는 것.

천사이외에는 아무도 없었지요. 십자가 사건이 난 것이, 그럼 천사는 어디에 속합니까? 이 지평에 속하지 않고 하늘의 지평에 속했기 때문에 결국은 천사와 다퉜다 이 말은 이 세상 아무도 예수님을 알아 모실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마리아하고 시몬하고 그 여자 선지자 안나하고 이런 사람들은 어떻게 알아봤느냐, 성경에 누가복음에 보세요. 그 사람들에 뭐가 임했다고 했습니까? 성령이 임했잖아요. 성령이 임했을 때는 그 사람을 칭찬하면 안 됩니다. 성령을 칭찬해야지요. 성령을 칭찬하지 말고 성령은 누구 따라 논다? 예수님, 하나님 따라 노니까 결국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지요. “아이고, 세례요한아! 너는 착하구나! 성령 받아서 그렇게 했으니까 너는 착해!” 이리 돼 버리면 세례요한은 “그래, 그래, 나는 착해 왜, 성령이 했기 때문에”. 그 사람은 성령을 소유한 게 돼 버려요. 그것은 아까 논리에 내 지평 안에 성령을 가둬놓은 셈이 되는 겁니다. 

성령은 우리 지평 밖에 나가 있어요. 예수님이 이런 이야기했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안 믿는 것은 용서를 받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오는 세대까지라도 용서 없다는 겁니다. 성경을 찾아봅시다. 로마서 3장 8절 봅시다.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저희가 정죄 받는 것이 옳으니라” 다 보셨지요. 질문합니다. 복음이 있는 시대에 정죄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복음이 온 이 시대에, 복음이 이미 찾아와서 완성한 이 시대에 정죄함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지요. 우리는 로마서 8장에 보면, 복음 안에서는 정죄함이 없지요.

그런데 방금 로마서 3장 8절에 보면 뭡니까? 정죄함이 있지요. 그럼 이 정죄함은 어디서 나온 정죄함입니까?  주께서 무조건 정죄함을 없애주는 게 아니지요. 그러면 분명히 정죄함이 있어야 되겠지요. 그러면 정죄함이 있기 위해서 복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정죄함이 없기 위해서 복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복음이라는 것은 결국은 양발차기로 필히 복음은 오냐, 오냐 해주는 것이 복음이 아니고, 구걸하는 것이 복음이 아니고, 필히 뭘 남겨야 된다? 정죄할 자를 기어이 정죄하는 능력으로만 복음이 전파되어야 돼요.

목사들이 교회에서 막 봐주기로 그냥 감싸주고 “아이고, 한 맺힌 세상 얼마나 고생 많습니까? 여러분들 이제 복 받습니다.” 이렇게 감싸줄 생각을 하지 말고 복음을 전했으면 반드시 이 복음을 안 믿는 자에게 반드시 정죄함이 꼭 따라야 되겠지요.

그러면 그 정죄함을 따라야 된다면, 그러면 그 사람의 정죄함을 안 받은 사람들, 주님 믿는 사람은 자기 지평선 내에서 믿을 능력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항상 예상 밖으로 옵니다. 지가 미리 준비해서 “야, 요 정도 믿으면 나 믿을 준비 하겠다.” 하게 되면, 그거는 믿을 수 없는 내용이 와 버려요. “하나님이여, 내가 세 바퀴 던집니다. 여기서 많이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뭐라 합니까? “니가 바위에서 나무가 뽑혀서 동해바다에 빠뜨려라.” 이런 것은 우리가 출제한 것이 아니잖아요. 주님이 출제해 놓고 믿어라, 하잖아요. 그것도 안 믿으면 겨자씨만한 믿음도 없는 게 된다고요.

항상 우리가 믿을 수 있는 믿음의 내용은 지평선 안에서는 없는 거예요. 그렇다면 묻습니다. 그렇다면 정죄 받는 사람이 못 믿는 것은 그 사람의 실력으로 믿거나, 못 믿거나 그 사람이 결정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결정이 안 되지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오셨다는 말은, 천사만 찬양했다는 말은 이 세상의 인간들의 지평선 안에서는 결정문제에서는 이미 그 안에 잘 잘못과 상관없이 외부에서 이미 결정을 내리고 따지면서 분류작업 들어간다 이 말입니다.

이거 연초부터 기분 좋은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잘못했다고 저주받는 게 아니고 이거는 우리 지평선에서 “아! 바보같이 내가 이런 잘못을 하다니! 그동안 예수 믿고 구원 받는다고 해놓은 스펙 다 까먹었다.” 자꾸 이러지 말란 말이지요. 우리가 관리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에요. 구원을 우리가 마음대로 좌지우지 가위로 끊을 수 있는 그런 능력이 우리 지평선 에서는 없습니다.

외부에서 그냥 작대기 가지고 쑤셔 버리는데, 그러면 욱! 하고 들어오는 거죠. 아까 유리창 돼지 코 했잖아요. 그걸 예수 안으로 봅시다. 예수 안에 있는 사람과 예수 밖에 있는 사람과의 차이는 예수 밖에 있는 사람은 절대 안에 있는 사람을 몰라요. 왜, 예수 안의 세계는 그들에게는 없는 세계입니다. 자기 지평선 안에 없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밖에 있다가 안에 들어갔기 때문에 지평이 넓어졌어요. 저거는 바로 옛날의 내 모습이고, 지금은 천지 창조한 예수님 안에 태초부터 너를 예정하사(태어나기 전에 이미 정해버렸다.) 이미 정해진 지평선 안에서 내가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 라고 보는 관점에서 그 지평의 융합이라 했지요. 그 지평이 융합되니까 저쪽 바깥에서 돼지 코 만들고 저 혼자 까부는 거 “우리끼리 믿음 좋지!”저희끼리 믿음 좋다고 하는 부흥회, 그 허세가 다 보인다니까요. 수가 보여요. 수가.

목사들 저리 해도 다른 거 없고 성화론은 결국 교회 장사고 사람들 끌어 모으고 빈 손 말고 돈 들고 오라하는 교회 영업하는 그거, 이게 뻔히 다 보인다니까요. 자꾸 그 사람들은 그게 아니고 순수하게 우리도 니들처럼 복음 알아서 영광 돌린다. 그냥 감사드린다고 백날 우겨도 돼지 코라, 유리창 안에 못 들어오는 거예요. 도 닦는 바리새인하고 동일하다 보면 돼요. 

그 다음에 7절 봅시다. “또 천사들에 관하여는 그는 그의 천사들을 바람으로, 그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는다.” 했지요. 천사한테 가만히 앉아서 경배 받는 것이 아니고 친히 뭐를 다루신다? 천사들을 다루시는 거예요. 천사를 다룰 때, 천사를 위해서 다루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자신됨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뭘 드러내는가? 영광의 광채시오, 본체의 형상임을 눈으로 보는 게 아니고 아버지의 일로서 이 땅에 펼치는 겁니다. 그 일이 이 땅에서의 십자가 죽으심입니다. 이게 바로 마지막 때에 선지자로 했던 이것이 마지막 때, 아들을 통해서 이것을 전부 다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아들만 처다 봐라, 이것뿐이에요. 

그리고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선진들도 누굴 처다 봤습니까? 그 힘들고 어려운 인생 속에서 “누굽니까? 나 이렇게 힘들고 내 뜻대로 안 되는데?” “어! 아들이시네.” 그렇게 엮어진 그것가지고 믿음의 선배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한 것들의 실체니라, 그 본체, 실체는 우리의 지평선 바깥에서 우리의 안을 다루고 있는 겁니다.

천사들을 부리시고, 8절에 보면,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  보좌 홀이니까 보좌라는 말이 나오고 다음에 홀 나오지요. 보좌 홀 하는 것은 지팡이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보좌 홀이니까 보좌는 의자를 말하고, 의자와 지팡이, 이것이 봉건국가에 가면 어디에 한 세트로 있습니까? 왕궁에 있지요. 그러니까 이런 말씀조차도 하나님께서는 왕 노릇한다고 보면 되겠지요. 왕 노릇하니까 결국은 지상에 있는 모든 왕들도 결국 부분, 모양새로 사실은 하늘의 구조 체계를 뭔가 흉내 내고 있다 하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왕궁에 있거든요. 왕이 있다. 왕이 뭐냐 하면, 알다시피 절대 권력자지요. 절대 권력자라 하는 것은 왕은 권력 있습니다. 우리는 권력 없습니다. 이 정도 아니고 절대 권력자라 하는 것은 모든 백성들을 왕자신이 원하는 대로만 다루어질 수 있는 권한이라 이리 보면 됩니다. “아이고, 왕이시여! 왕이니까 왕만 대접하고 우리는 간섭하지 마세요.” “이건 소박한 초가집의 우리 살림이니까 왕이라는 이름으로 함부로 밤중에 들어오고 하지 마세요.” 라는 것이 허용이 안돼요. 나의 지평 안에 소박하게 사는 거 용납이 안 됩니다. 들이 쑤시고 들어옵니다. 다 깨놓고 내 인생을 위풍이 많게 다 뚫어버려요. 비닐로 막아도 다 뚫어버려요. 바람이 슝~슝 불어요. 그야말로 바람 같은 사랑, 또는 거지같은 사랑, 내 뜻대로 안되니까. 거지같은 사랑, 사랑은 사랑인데 영 내 마음에 안 드는 바람이 휭휭 통하는 그런 사랑, 그런 절대 왕권으로 행사하셨다.

그 다음에 9절에 보면, “네가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였으니” 여기서 너는 누구를 이야기 하는 겁니까? 예수님이지요. “그러므로 하나님 곧 너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네게 부어” 여기에 기름이란 말이 나오지요. 제가 여기 기름부음이란 논문을 길게 쓴 게 있는데, 기름이 있다, 라는 말은 다른 계열, 다른 영역에 속했다, 다른 지평에 속했다, 라는 거예요. 그래서 기름 부었다, 라는 말은 이 땅에 속한 자가 아니라는 소리에요. 성도가 뭐로 기름 붓습니까? 성령으로 말미암아 기름 부었다, 라는 말은 그들은 이 세상에 속한 자 이다? 아니다?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다, 라는 말이에요.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니까 마치 격이 천사와 같은 격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천사가 우리를 오히려 지켜준다 하지 않습니까? 중국의 무협지에 보면, 수호천사 있듯이. 수호천사가 지켜주는 것은 우리 때문이 아니고 우리가 있는 자리 때문에, 주님의 상속, 우리 자체가 예수님의 상속이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를 귀히 보는 이상으로 누가 더 귀히 봅니까? 주님이 우리를 더 귀하게 보는 겁니다. 주님은 내 걱정 안한다고 그렇게 원망하는데 그건 너무 터무니없는 생각입니다. 자식들이 흔히 말하지요. 부모는 내색 안한다 하지만, 그건 부모의 마음을 몰라서 그래요. 오히려 부모가 자식이 생각하지 못한 것을 더 챙기지요. 왜? 지평이 다루니까.

오늘 이거 하나 분명히 합시다. 넓은 지평에 계신 분이 철딱서니 없는 우리가 요것가지고 성공이니 실패니 까불고, 찢고, 좌절하고, 죽어버릴까 하는 이것을 넓은 지평에서 “아이고, 놀고 있네.” 이렇게 한다 말이지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 온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에서는 끊어지지 않는다. 이것이 주님의 기업이라면 우리는 그 말씀에 오늘도 우리를 영생으로 강제로 질질 끌고 가고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세상에 속했다고 자꾸 생각합니다. 그런데 말씀에 의하면 속한 게 아닌데, 왜 자꾸 우리는 이 세상에서 승부를 보려하고 남한테 안 지려하고 비교해서 이기려하고 왜 자꾸 좁은 지평 안에서만 자기를 바라보는지, 이런 눈이 다시 열려서 주님의 열매요, 주님의 작품인 것을 이 자리가 얼마나 귀한 자리인 것을 천국에도 가야 될 자리인 것을 저희들이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