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아들과 천사(히1:10) 130215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3. 27. 08:16

2013-02-16 02:15:19 조회 : 1398         
아들과 천사 130215 이름 : 이근호 (IP:119.18.69.144)

음성1              음성2

 

동영상1           동영상2

 공은주 (IP:61.♡.205.105) 13-03-02 08:48 

안양20130215a히1장10절(아들과 천사)-이 근호 목사

히브리서1장 계속해 봅시다. 어제 우리교회에 질문하나 들어왔지요. 안상홍에 다니는 사람이 질문을 했는데, 하나님을 어머니하나님으로 믿으면 안 되느냐, 하는 질문이 들어왔어요. 그래서 답변을 했는데, 요지는 그겁니다. 예수님한테는 어머니하나님이 없다는 사실이에요. 예수님이 어머니하나님이라고 부른 적이 없지요. 뭐든지 질문을 했을 때, 성경적으로 복음적으로 정답을 내놓으려면 예수님께서 아버지하고 어떻게 했는가, 그게 정답이에요.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도 있고 또는 어머니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했는가가 중요한 이유가 원래 하나님은 예수님만 알게 돼있고 다른 사람은 하나님을 모르게 돼 있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하나님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종교라는 것이 다른 말로 하면 우상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사람이 자기가 믿고 싶은 신을 자기가 만들어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분명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잖아요. 그 말은 하나님은 예수님만 아시고 그리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실 분도 오직 예수님만 부를 수 있어요. 이것은 분명히 성경에 나와 있는데, 사람들은 성경내용을 어떻게 읽었는지 이 사실을 모릅니다.

하나님이라고 부르면 아들 되는 줄 알고 있어요. 그림으로 설명할게요. 하나님이 여기 계십니다. 있는데 사람한테는 어떤 생각이 있느냐 하면, 사람에게는 아버지가 있고 자기 있고, 자기 아들도 있겠지요. 아버지란 의미가 뭐냐, 자기를 낳아준 분이다. 아버지는 있을 때, 자기는 없었고 아버지가 자기를 낳았을 때, 비로소 자기는 존재했고, 따라서 요 관계가 아버지라고 사람들은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을 가지고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무엇이 확대됐는가 하면, 아버지와 나 사이의 관계를 확대, 확대, 확대 키워나가면 결국 하나님이 우리보다 먼저 있었고 그 분에 의해서 만들어지게 되면 우리는 자동적으로 아들의 관계가 된다, 라고 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우상이고 이게 바로 엉터리에요. 이게 엉터리 우상이에요. 이게 왜 엉터리냐 하면, 나로부터 출발해서 내가 알고 있는 아버지, 어머니 이런 관계를 그냥 키워나가면 그것이 하나님에게도 통하지 않겠느냐하는 생각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런데 이미 사람은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입장이래서 생각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되지를 못합니다. 로마서 3장 23절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사람들이 죄를 범했으매’ 그 다음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이르지 못했다, 분명히 나오지요. 사람이 죄 지을 때만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인간이 죄를 범한 이상은 인간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신학을 하고 어떤 공부를 해도 어떤 행동을 해도 영광이 되지를 못 합니다. 틀렸다는 말입니다. 정답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은 뭐냐, 이러한 아버지와 아들 관계는 하나님께만 통하는 아버지와 아들 관계는 따로 있어요. 하나님 아버지, 또는 하나님의 아들, 누구한테만 해당 되느냐, 예수님에게만 해당되고 우리한테는 해당이 안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들은 누구만 아들이다? 예수님만 아들이고, 우리는 아들이 아니에요.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하면 믿지를 안 습니다. 전혀 믿지를 않아요. 그러니까 처음부터 난관에 봉착해요. “우리는 하나님을 모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닙니다.” 이리되면 화를 낼 수밖에 없는 게 모든 출발점을 하나님 아버지가 만들었으니까 하나님 아버지 아들 맞습니다, 하고 출발했던 그 자체가 거부당하니까 그 다음 이야기는 아예 들을 생각을 하지 않는 거예요.

우리는 하나님을 모르게 돼 있고 하나님을 몰라요. ‘하나님을 알되’ 하는 것은 하나님도 아닌데 하나님이라고 우긴다는 뜻입니다. 로마서1장에 보면, 저희가 하나님을 알되, 영화롭게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지 맘대로 정해 놓고 전혀 영광 돌릴 수도 없는 자기 자체의 딜레마에 빠졌다하는 그 이야기를 로마서1장에서 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을 아는 게 하나님을 안다고 우기지요. 아들이 아닌데 어떻게 아버지를 알아요. 그리고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을 모르면서 무슨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버지를 모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데, 하나님께서 아들을 이 땅에 보냈습니다. 보내니까 이 아들을 핍박한 자들이 누구인가하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우기는 자들이 하나님 아들을 핍박했어요. 이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우기는 근거는 어디 있느냐, 출애굽기 4장22절에 보면 나오지요.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출애굽기 4장 22절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이라, 했으니까 “우리는 이스라엘이니까 하나님의 아들 맞잖아!” 라고 한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요한복음 8장 44절에서 “너희 아비는 마귀다.” 이리 하신 거예요.
자, 너희 아비는 마귀니까 마귀와 같은 말이 악마란 뜻이에요. 귀신하고 악마는 다릅니다. 귀신은 악마의 졸개들이고, 마귀, 옛 뱀, 악마, 사단, 같은 동의어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뭐라 하느냐 하면, 너희들은 악마의 아들이다. 유대인들은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자, 서로 의견이 다릅니다. 두 가지 의견이 나왔어요. 여러분에게 물어볼게요. 둘 중에 여러분들이 그 당시 사람들이라면 어느 쪽을 채택하겠습니까?

너희애비는 마귀다, 이쪽을 좋아하겠습니까? 유대인들처럼 우리는 성경의 출애굽기4장에 의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어느 쪽을 하겠습니까? 분명히 우리는 유대인하고 동조가 되겠지요. 유대인과 동조가 되는 순간에 우리는 무엇을 차버리느냐 하면, 결코 우리 애비는 악마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자기의 주장을 드러내는 거예요. “예수님이여, 당신은 우리 애비가 악마라고 하는데 나는 생각하기를 절대로 우리 애비는 악마가 아닙니다. 우리 이로서 헤어집시다.” 이리 하겠지요.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이렇게 인간 쪽에서 하나님께 나아 올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부산강의에서 역사에서 묵시로 점프하는 길이 없어요. 이게 신학자들은 제일 큰 딜레마입니다. 비행기의 활주로는 달리는데, 이상하게 비행기가 뜰 줄을 모를 때, 활주로는 시속 1000Km를 달려도 이게 뜨지를 않네. 계속 열심히 날기를 시도할 뿐이지요. 천국가기를 열심히 애쓰는데 이게 날지를 않네요. 날지 않는 것은 날개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날개가 뭐냐, 성령입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성령으로 나면 나는 정도가 아니고 본인이 안 날고 싶어도 땅에 다니는 게 귀찮아요. 닭은 나는 게 귀찮고, 던져봐야 찌~익 해서 날개 다 찢어져서 지붕위에 턱 앉아 있지요. 그런데 공중에 나는 독수리는 앉는 게 귀찮아요. 나는 게 더 재미있어요. 성령 받은 사람은 특징이 나는 재미입니다.  날면서 밑을 내려다보는 재미에요. 저기 의왕이고, 저기가 과천이고, 보는 재미가 있어요. 그 즐거움으로 문자 보내면 반응이 오지요. 친구들한테서. 헐~하는 사람도 있을 거고 빠져도 너무 빠졌구나, 하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어쨌든 채택가운데서 결정을 해야 되는데 진짜 우리 아비가 악마인지, 그래서 악마의 자식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자식인지, 분별을 해야 되는데, 문제는 이거에요. 하나님은 인간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수용이 되는데, 악마가 사람을 만든다? 악마가 아비니까. 악마가 사람을 만든다? 이것은 도저히 납득이 안 되지요. 아무리 예수님 말씀이지만 너희 애비는 악마니라, 할 때 악마가 어떻게 사람을 만들지? 그것은 좀 거북스럽다 이 말이지요. 역시 손톱, 발톱 만든 것은 하나님 쪽이 만들었지, 악마 전공은 만드는 게 아니고 꾀는 게 전공인데, 만들었다 하니까 이 문제가 어떻게 해결되는지 봅시다.

그 해결점이 여기에 히브리서 1장5절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네가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이렇게 나와 있지요.  ‘너를 낳았다.’고 했을 때, ‘만들었다’ 하고 ‘창조했다’ 하고 ‘낳았다’ 하고 하나님은 구분하십니다. 하나님이 낳아야 아들이고, 그냥 만드신 것은 아들이 아니에요. 만드신 것은 아들이라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을 만들었다고 해서 그 사람을 아들이라고 칭하지 않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취지입니다. 상당히 중요한 문제에요. 하나님이 낳아야 아들이지, 하나님의 아버지 되기 위한 조치로서 아들이어야 되지, 만들어졌으니까 아버지라고 부르면 새삼스럽게 아들관계가 엮여지는 건 아니라는 말입니다. 엮여지는 게 아니에요.

우리 인간 사회도 그렇잖아요. “내가  니 애비다.” 하면 자식이 드라마에서 뭐라 합니까? “애비 됐으면 애비 구실을 해야 날 길러줘야 애비지, 다른 여자와 도망가 놓고 날 버리면 이게 애비입니까?” “얘야, 내가 니 엄마다. 너를 낳아준 엄마야.” “나의 사전에 엄마는 없습니다. 나의 엄마는 길러준 엄마가 나의 엄마입니다.” “날 낳아 놓고 도망쳐버린 그런 엄마는 엄마가 아닙니다. 엄마라고 부르지 마세요. 이 아줌마야!” 그리 나오잖아요. 정답을 말씀드릴게요. 하나님의 언약대로 실천에 옮겨야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존재론적으로 신의 존재 있고 그 존재로서 우리가 세포분열 하듯이 모세포 있고 딸세포 있어서 따로 떼어내면, 이게 아들이다, 이게 아니고 아들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에 맞춤, 언약에 합치해야 아들입니다. 언약에 합치해야 아들이 나오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실 때, 아들 만들기를 시도한 거고 그 아들을 만들 게 되면 왜, 아들을 만드는가? 아버지가 아버지 되기 위해서 아들이 있어야 돼요. 이 이야기는 오직 하나님과 예수님, 그 두 분에 대한 관계이지, 우리는 빠집시다. 인간은 거기에 개입이 안 됩니다.


그러면 방금 정답 나왔어요. “목사님, 그러면 사람은 왜 있습니까?” 사람은 아들을 아들 되기 위해서 있는 겁니다. “아, 우리가 아들이다. 이 말이죠?” 그 말이 아니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진짜 아들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들러리로 우리 인간들이 만들어진 겁니다. 

전에 이야기했지요. 선악과, 생명나무가 사람보다 우선이라고. “아이고, 요 이쁜 거 생명나무, 선악과나무” 이렇게 이야기하지, “아이고, 이쁜 거 인간”이렇지는 않거든요. 정신이 미친 부모가 장난감을 사왔다 말이지요. 브라우니 인형을 사왔다 합시다. 그러니까 아들은 오해한 거죠. ‘엄마가 나를 너무 이뻐해서 개 인형을 사줬구나!’ 이렇게 오해를 한 거예요. 그런데 개 인형 사가지고 아들이 화나는 게 있어서 개보고 화풀이하고 때리니까 엄마가 완전히 돌았지요. “아이고, 불쌍한 내 개야. 왜 때려? 왜 때려? 집 나가!” 그게 창세기 3장 이야기에요. “니, 나가 생명나무 따먹으면 안 돼! 나가!” 우리가 생각했던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는 타락이후에 하나님을 생각하기 때문에 ‘설마 하나님이 직접 우리를 만들어 놨는데, 우리보다 더 귀한 게 있을까“ 이리 생각한 거예요. 성경에 보니까 오히려 그 생명나무가 뭐라고, 우리가 나무보다 못한 인간입니까? 나무가 뭐라고 나무 다칠까 싶어서 선악과나무과실 따먹고 다쳤다고 그것도 화나고, 생명나무도 다칠까봐 ”나가, 나가“ ”아니, 인간을 이렇게까지.“ ”니는 인간도 아니야. 흙이야.“ 스스로 하나님의 창조를 무효화시켜 버려요. 흙에서 인간을 창조했잖아요. 그걸 하나님이 화가 얼마나 났던지, 창조의 과정을 역행해 버려요. 다시 환원시켜 버립니다. 뒤로 돌아 갓! 흙아!

이름도 뭡니까? 흙, 아담. 너는 흙이니까 흙으로 돌아가라, 너는 아담이니까 아담으로 돌아가. 그러면 여자는? 여자는 남편에서 나왔기 때문에 여자도 역시 흙으로 돌아가는데 여자 이름은 생명이라고 해서 뭔가 하나님이 그냥 아무것도 건지지도 않고 에이~ 흙으로 돌아가라, 이게 아니고 흙으로 돌아가게 하면서 흙으로 돌아간 훼손된 창조의 영광을 약속이라는 뱀의 후손, 여자의 후손, 약속의 영광으로 이걸 바꿔치기 하면서 죽어가는 것을 재료로 해서 그걸 어제는 폐기물이라 했지요. 폐기물을 재료로 해서 약속의 영광을 돌출해내는 손해 보지 않는 장사를 주께서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손실되는 일이 없어요.

어쨌든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은 인간 위주가 아니었다는 것. 하나님은 인간 위주가 아니고 약속 위주였다는 것. 그게 신명기 9장에 나옵니다. 내가 이스라엘을 인도하고 지켜주고 보호해 주니까 너희들은 마치 너희가 잘나서 보호해 주는 줄 아는데, 그게 아니고 너희들은 목이 굳은 백성이고 죄 많은 인간이다. 하지만 너희들을 가지고 적들을 물리치고 보호해 주는 것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내린 하나님의 약속, 약속은 하나의 캡슐 같아요. 누가 들어 있게요? 예수님이 들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버지가 아들을 낳아서 아버지와 아들의 세계에 필요한 조치들을 해놓았는데 그 중에 하나가 인간이 만들어진 겁니다. 그리고 천사들도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5~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네가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뇨 
또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든 천사가 저에게 경배할찌어다 말씀하시며 또 천사들에 관하여는 그는 그의 천사들을 바람으로, 그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시느니라 하셨으되“ 5절, 하나님께서 그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그리고 6절 끝에 보면, 하나님의 모든 천사가 그에게 경배하지요. 7절에 보세요. 천사들에 관하여 나와 있지요.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이여, 내가 성경 볼 테니까 나한테 복주세요.‘ 하는 그런 기분으로서 보다가 인간은 자꾸 안 나오고 빠지고 이 대목에서 자꾸 천사가 들어가니까 살짝 기분 나쁠 뻔 한다 말이지요. 아니 인간이 중요하지 왜 천사가 중요 하냐, 천사가 중요한 게 아니고 우리보다도 더 중요한 게 있으니 예수님이다 말이지요.

그러면 우리는 내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잊어야 하는 겁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일의 순서를 적어드릴게요. 성령이 우리를 찾아오게 되면, ①번째, 죄를 짓게 하고 ②번째, 그 지은 죄를 잊어라, 요구하게 되고 ③번째, 못 잊어서 잊는 방법을 만드는 죄를 짓게 하고 마지막으로 용서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모든 우리의 움직임을 통해서 죄를 생산해 냅니다. 그러면 사람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자꾸 선한 쪽으로 자기를 몰아가려고 하거든요. 그런데 내가 원치 않는 죄가 내부에서 자꾸 발생되잖아요. 선을 원하지만 나보다 더 센 괴물이 있어가지고 결국 죄를 짓게 하는 거예요. 성령께서. 율법을 보내던지 어떤 사태를 보내서.

우리는 선하고 싶은데 죄가 나오니까 자체적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거예요. 해결을 어떻게 합니까? 더 많은 의를 해서 선한 것을 해서 더 많은 의로 상쇄시키려는 그러한 시도를 하게 됩니다. 그걸 가지고 뭐라 하는가 하면, 지은 죄를 잊고 싶어 하는 거예요. 잊고 싶다고 또 성령이 요구하고.

죄를 잊어라, 죄를 지어라 하는 것보다 잊어라하는 게 더 무서운 명령이에요. 지를 지을 때는 무심코 짓지만, 지은 죄는 잊어지던가요? 안 잊혀 지지요. 그러니까 주께서 무리한 요구를 하는 거예요.  “죄 지었나? 잊어라.” 무슨 수로 죄를 잊습니까? 이미 했는데. 20년 선한 생활하다가 단 한번 거짓말한 것은 그 다음 20년 동안 시효가 만료되지 않습니다. 틈만 나면 “니 20년 전에 거짓말했잖아.” 그 때부터 신뢰도가 확 떨어졌다. 뭘 해도 나 안 믿는다. 이런 식으로.

그걸 보상하고 잊으려고 명품사주고 잘해주고, 얻어먹는다고 잊어집니까? 그걸 못내 못 잊어서 상처가 됐던 걸 가지고 트라우마 라고 하지요. 정신적인 상처, 프로이드에 의하면. 주일 낮에 이런 설교가 있어요. 인생이라 하는 것은 유리창에 있는 먼지와 같아서 한번 비바람 불면 말끔히 다 씻겨내려 가잖아요. 그러니까 아무리 잘나도 비오면 다 없이 되고 해변 가에 글씨 썼다 했지요. 눈 그리고 코 그리고 입 그리고 점하나 까지 그렸지만 파도가 치면 싹 쓸려가지요.  그것처럼 우리도 내 죄지은 것을 싹 쓸어 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상처가 있어요.

성령께서는 상처를 냄으로 말미암아 다 모든 게 쓸려가도 상처는 안 쓸려가게 만드는 거, 니가 죄인이라는 사실, 마치 모래에 박혀있는 말뚝과 같아서 파도가 쳐서 딴 것은 쓸려가지만, 말뚝 근처에 한 나의 낙서는 쓸려가도 말뚝은 건재 하는 것처럼. 뭔가 깊이 있는 상처. 그 상처가 내 상처가 되면 안 되고 하나님과 아들과 함께 받은 상처가 될 때, 쓴 잔인데, 그럴 때는 사도바울이 내가 십자가와 같이 못 박혔다 해서 말뚝을 박아 둔 것이지요. 십자가와 못 박혀서 이제는 내가 죽이신 분이 당신입니다. 라는 그 말뚝, 실제로 사도 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 죽였고 또 그렇지 않더라도 예수님에 대해서 육신인 채로 아는 모든 사람은 예수님을 모독하게 돼요. 육체로 아니까. 고린도후서 5장 16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나는 옛날에는 예수님을 육체로 알았다.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모든 내 근거리부터 생각하서 해 뜨고 해 지는 것이 십자가에서 나온 은혜인 줄을 몰랐다 하는 거예요.

유대인들은 해 뜨고 해지고 비오고 하는 것을 노아의 은혜로 알았던 거예요. 그런데 노아한테 물어 보세요? 노아 할아버지, 당신의 은혜지요? 하면 노아가 뭐라 합니까? “장차 오실 예수님의 은혜입니다. 그 분이 십자가 지심입니다. 내가 드린 제사는 장차 오실 십자가를 앞당겨 보여주는 모형으로서 제사를 지냈습니다.” 이럴 거 아니겠습니까? 노아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것은 “아이고, 아브라함씨, 믿음 좋습니다. 어떻게 아들이삭을 바쳤습니까?” 하면 “그렇지요. 내가 아들이삭을 바쳐서 구원 받습니다.“ 이렇게 말하겠어요? 아브라함이. 우리 후대 사람은 창세기22장보고 ‘그래, 아브라함이 아들이삭을 바쳤더니만...’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아브라함은 누구를 기다립니까? 예수님 오기를 기다렸다가 보고 기뻐했다 했지요. 요한복음 8장에.

사람들은 지가 해석하면서 엉터리로 해석 하는지 모르겠어요. 제가 주일 낮에 설교한 것처럼 아브라함 같은 사람, 다윗 같은 사람, 일한 것도 없이 일을 아니할지라도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일을 아니하실지라도 경견치 않은 자를 일한 것도 없이 3종 세트 아닙니까? 구원의 3종 세트.

아브라함이 이삭 바치는 게 얼마나 큰일입니까? 큰일인데, 복음에 보면 그건 일을 한 거다? 안 한 거다? 일 안한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일 시킨 거예요. 참, 말 어렵다. 그렇지요? 실컷 일 해놓고 하는 말이 “주여, 저 일 안했습니다.” 라고 하는 거예요. 왜? 그게 자기의 상처가 되어야 될 일이기 때문에. 내 잘남을 보여줄 일이 아니고 이 일은 마땅히 나를 끌어내야 되고 뜯어내야 될 그 일을 한 거예요.

아브라함이 결국 일한 것은 “나는 일했다는 것을 저장하거나 실적을 누적할 자리조차도 나는 합당치 않습니다.” “나는 할 때마다 죄가 겹으로, 겹으로 양파껍질처럼 쌓여 있다는 것을 알아서 감히 그 입으로 내가 일 했다는 소리를 못 합니다.” 할 때 그게 믿음의 조상이에요. 믿음의 조상이라 하는 것은 그만큼 폐기물입니다. 아브라함처럼 자기를 폐기물로 여기지 아니하면 구원 못 받는다는 뜻입니다. 아들을 바칠 때, 아브라함은 실은 내가 버림받아야 된다는 사실, 이것은 오늘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버림받을 때, 그걸 보면서 사실은 내가 버림받아야 됩니다, 하고 믿는 사람 그게 바로 십자가에 있을 때, 백부장의 믿음이었습니다.

성경이 이렇게 두꺼워도 털어내고 떨어내고 뜯어내면 결국 남는 게 뭐냐 하면,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이게 진솔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벌거벗은 듯이 말끔하게 다 나옵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예수님의 그 십자가를 가지고 내가 전한 복음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이악한 세대에서 저주를 받으리라,

 

이 세대 자체가 그동안 가려왔던 거예요.

하나님과 아들사이를 가려왔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내가 아들이라고

마구 선전한다고 아들 되는 게 아니고

 

십자가 버림받음으로서

진짜 아들은 어두움의 세계에서는

어두움을 충분히 드러내는 식으로

억울하게 죽는 죽음으로서,

대신 죽는 죽음으로서

하나님의 언약을 완성시킨 겁니다.

여러분들이 잊어버릴까 다시 말할게요. 하나님의 아들이란 낳았다고 아들이 아니고 언약을 완성해야 아들입니다. 우리 인간과는 관계없는 거예요. 우리 인간세계는 아버지가 아들 낳으면 아들이 아들답지 않더라도 아들로 간주하잖아요. 그런데 하늘나라는 그게 통하지 않습니다. 아들로서 언약을 완성할 때, 아들 되는 이유가 비로소 그 때, 아버지가 아버지 값을 하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 본인이 아버지 되기 위해서 아들은 아들로서 언약을 완성해야 됩니다. 이게 바로 그동안 몰랐던 창세부터 비밀로 유지돼 왔던 그 비밀의 핵심입니다. 천기누설이에요.

그러니까 천사라 하는 것은 천사의 자존심을 위해서 천사가 있는 것이 아니고 천사는 전부 다 한 결 같이 고개 들고 한 곳을 보라고 천사 만든 거예요. 우리가 아는 천사라 하는 것은 착하다, 이쁘다, 그 정도잖아요. 그런데 하늘나라 진짜 천사는 한 곳만 쳐다본다고 천사에요. 누굴 쳐다보겠어요? 예수 그리스도를 쳐다보는 거예요.

이게 바로 6절에 보면, 하나님의 모든 천사가 저희에게 뭐한다? 경배한다. 그러니까 뭐냐, 천사처럼 돼라, 이 말입니다.  천사처럼 돼라하면 모두 나쁜 짓 안하고 착한 일하고 고운 것만 생각하고 아름다운 것만 생각하는 그런 것이 아니고 예수님만 쳐다보는 것이 천사에요. 물론 날개 있으면 날개 짓도 해가면서.

7절에 보면, “또 천사들에 관하여는 그는 그의 천사들을 바람으로, 그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시느니라 하셨으되” 이 말은 아들이 스스로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모든 천사를 관리 하에 두고 있다 이 말입니다. 우리가 성경 한 번 찾아봅시다. 요한복음 17장2절,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차사고, 비행기 사고, 애인을 죽이는, 남아프리카의 장애자 선수,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누가 손댔습니까? 예수님이 영생 줄자에게 영생 주기위해서 남아프리카에 그런 사건을 일으킨 거예요. 경찰관이 자기를 해고한 것에 동료경찰관과 간부 경찰관의 딸을 죽이고 그거 왜 일어나는가? 영생 받을 자에게 영생주기 위해서 저 멀리 태평양 건너 그런 일들을 일으킨 거예요.

미국에 있는 경찰관이 살해한 것과 예수님과 관련해서 논리를 연결시켜 볼까요? 요 구절이지요. 요한복음 17장 2절.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바시락~ 하는 풀잎 소리 하나도 영생 줄  자에게, 자기 백성입니다. 생명책 명단에 있는 백성에게 영생주기 위해서 풀잎소리와 아침이슬이 있게 하시는 겁니다. 그 모든 권한은 주님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풀잎에다 이슬을 만든 겁니다.

옷깃에 스치는 모든 바람, 그래서 히브리서 1장 7절에 보면, “천사를 바람으로” 하는데, 다른 말로 하면 천사의 모든 활동이 얼마나 생생한지 바람과 같다 이 말입니다. 바람이 시도 때도 없이 늘 상 불듯이 주께서 부리는 천사도 시도 때도 없이 잠도 안 자, 천사가 잠자는 거 봤습니까? 천사만 잠 안자는 게 아니에요. 40일 동안 안 잔사람 있어요. 불려가서 시내 산 에서. 밥도 안 먹고 물도 안마시고 거기서 뭐했어요? 혼자서 TV보고 책을 보고 혼자서 영화보고 혼자서 노래하고 울고불고 그런 거 했어요? 그냥 천사와 같이 누굴 쳐다봤어요? 그냥 하나님 쳐다보고 주님 쳐다본 거예요. 듬뿍 종합선물 안고 내려왔지요. 오다가 다 팽개쳤지만, 영생주기 위해서 온 그 언약을 스스로 돌 던져서 깨버렸잖아요. “니들이 영생을 받아, 니그 애비가 하나님이라고? 니 애비는 마귀야!” 언약이 있어줘야 우리 애비가 마귀라는 것을 아는 겁니다. 십자가 앞에 서야 우리가 버림받아야 될 마귀 자식이라는 것을 아는 거예요.

이걸 안다는 것은 아까 했잖아요. 성령이 하는 일을 알 때, 제일 마지막은 뭡니까? 용서가 되기 위해서 바로 우리가 이런 마귀 짓을 하는 거, 죄 지은 것을 잊으라 하니까 못 잊으니까 대신 뭐하느냐, 대신 착한 일을 많이 해서 나는 착한 의인이라고 행세하고 싶은 그건 것들, 그런 죄를 짓게 하시지요. 엎친 데 덮친 격이라 하지요. 죄 지은 것도 죄지만, 죄 지은 것을 의로 바꾸기 위해서 착한 일 노력하는 것도 뭐가 된다? 죄가 되는 거예요. 자기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도 범죄입니다. 왜냐, 자기가 절대자가 아니기 때문에. 이래 놓고 그 다음 마지막에 이거 없으면 안 되지요. “내가 너보고 용서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의 피보고 용서해 줄게.”  

그것은 머리가 이미 예수님이기 때문에 몸에 붙어있는 뾰루지에 해당되는 우리들도  머리에 붙어있다는 이유 때문에 성령께서 그냥 방치하지 아니하시고 머리가 시키는 대로 그 말단 사지까지 가서 용서의 효과가 오는 겁니다. 이렇게 교회의 모임이나 행사할 때, 저도 많이 해봤는데 결혼식에 가서 주체해 놓고 선물줄 때, 항상 앞자리부터 주지를 않아요. 제일 끝에 말단에 있는 사람부터 선물을 줘야 안 놓치게 돼요. 앞에는 선물 받아갈 사람이기 때문에 이거는 결국 받아갈 사람이에요. 끝에 온 사람은 안주면 그만이고 하는 생각으로 오기  때문에 항상 끝부분부터 먼저 챙겨주는 거죠.

성령께서 우리가 아무리 멀리 있다 해도 주의용서는 용서의 선물은 빠지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모임에 있는 사람은 다 자기 자랑하는 게 아니고 받은 걸 자랑하죠. 받은 게 뭐라 했어요? 용서하심. 그걸 두자로 ‘교회’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교회의 감독자가 할 일은 뭐죠? “혹시 주님께 받은 거 내보세요.” 감독하는 거예요. 당신 솜씨 내어보라는 게 아니고 달란트 내놓으라는 소리가 아니라, “우리가 받은 도시락 있지요? 그거 한 번 들어보세요.” “예, 됐습니다. 됐습니다. 하나님께 영광돌리겠습니다.” 이게 로마서예요.

일 한 것도 없이, 일 아니하실지라도 경건도 없는데 그것 묻고 따지지 아니하고 이 순재 보험이라, 묻지도 따지지도 아니하고 그냥 용서라는 도시락을 줘버렸으니까 “니, 까먹었나?” “네, 잘 까먹었습니다.” 하는 거예요. 그 용서가 매일같이 용서되기 위해서 똑같이 우리는 뭡니까? 세상에 나가서 죄 짓게 하고 또 죄 지은 것을 잊으라하고 우리는 잊을 수가 없지요. 못 잊는다는 나름대로 자기체면 차린다고 죄 지은 게 부끄러우니까 의로 커버하려고 또 착한 짓을 해.  착한 짓~ 해서 욕 되게 얻어먹고.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8절 봅시다.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이리 되어 있지요. 8절에 보면, 하나님의 보좌에 관해서는 하나님의 보좌가 영영하다, 이게 아니고, 앞에 뭐가 나옵니까? ‘아들에 관하여는’ 해 놓고 뒤에 나오는 이야기가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이렇게 돼 있어요. 그러니까 아들은 뭔가 일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에요. 나, 아들이다! 해서 아들이 아니에요. 무슨 일을 해야 아들이에요.

그럼 아들이 하는 일은 주의 보좌가 영영히 만들어 내는 일을 하기 위해서 영원하지 않은 것을 만드시고 부수십니다. 그게 10절에 나와요.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이렇게 돼 있지요. 지금부터 이걸 설명하겠습니다. 난해하더라도 어렵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망한다는 말을 다른 말로 바꾸면, 현실적으로 바꾸면, 이렇게 돼요. 인간은 갈 데가 없어요. 갈 데가.

트루먼 쇼라는 영화가 있거든요. 인간을 태어날 때부터 생중계를 하는 거예요. 어떤 이가 태어나면서부터 생중계를 하는데 태어나는 그 무대가 가설무대로 인공적으로 만들어 놓은 무대예요. 저 바다도 사실은 차려 놓은 무대예요. 상당히 현실 고발을 이용하거든요. 유명한 영화인데. 인간은 진짜로 목적도 의미도 없이 산다는 것을 고발한 거예요. 갇혀 있는 거예요. 이걸 제가 갈 데가 없다. 이런 멘트를 끄집어내는 것은 아까 지하철역에서 어떤 70대 된 할아버지가 전화를 하면서 “야, 야, 요새 갈 데가 없다.” 나이 70쯤 되니까 갈 데가 없는 거예요. 모든 인간을 다 적용시켜 버리면 갈 데가 없는 게 왜냐 하면, 처음부터 일단은 갈 데가 없게 만들어졌어요.

그걸 자기 딴에는 몸체가 얼마 안 되니까  세상은 넓으니까 갈 데는 많은 줄 알았는데 인생을 70쯤 살아보니까 목포가도 뭐 하겠노? 좋다고 소고기 사먹겠지~ 제주도에 가봐야 소고기 사먹기밖에 안 해요.  유럽 가봐야 그 사는 인간들 아침마다 돈벌이하는 관광객 맞이하는 그 사업이나, TV봐도 똑같은 이야기예요. 스위스 호반에 가도 장사치들 와서 또 돈 빼먹으려하는 그거나 아프리카 정글에 가서 아직도 열대우림이 있구나! 하면 여기 입장료 얼마입니다. 하면 또 장사하는 그거나, 어디가도 돈! 돈! 전부다 모든 게 돈 버는 구석밖에 없어요. 금강산 관광도 마찬가지로 돈벌이에 지나지 않은 겁니다. 갈 데가 없는데, 갈 데가 있도록 만든 사람들이 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얘, 이제는 갈 데 많으니까 가봐라.” 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군대로 만들어버려요. 하나님의 군대라 하는 것은 지휘관이 없으면 갈 데가 없어요. 마찬가지예요.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사람도 갈 데가 없고, 하나님의 군대로 모집된 이스라엘도 갈 데가 없어요. 출애굽기 12장 41절 보면, “사백 삼십년이 마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 보세요. 이스라엘을 뭐라고 합니까? 여호와의 군대지요.

그렇다면 쉽게 설명해서 평소에 여행을 좋아하는 19살 젊은 장정이 있다 합시다. 지금 배낭여행 하려고 하는데 통지서가 왔네. 논산훈련소 1주일 내에 집합! 드디어 호출 왔어요. 그러면 여행을 취미로 하는 그 장정은 더 이상 여행을 못하고 갈 데가 없지요. 논산훈련소 밖으로는 갈 데가 없지요. 그런데 그 장정이 논산훈련소에서 훈련받아서 아프가니스탄 파견부대로 갔다할 때, 여행간 거예요? 그것은 자기가 원하지 않지만 어떤 자격으로? 개인의 배낭여행, 개인의 자격이 아니고 군대의 자격으로 가지요. 그러니까 제가 하는 말은 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군대가 되게 되면, 분명히 갈 데가 없고 막혔다고 여긴 것을 군대를 사용해서 주께서 일을 벌이면서 그 틈이 조금씩 벌어지면서 오! 갈 데 생겼네.‘ 라는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낸 작업에 그들이 동참된 겁니다.

그리고 그 많은 도시에 우리가 있을 곳은 점점 무너지는 겁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만들었지요. 하지만 그것은 영원한 보좌를 위해서 만들어졌다가도 완전히 멸망해야 될 것으로 만들어진 거예요. 그런데 멸망하는 무너져 가는 그 선반 위에 우리가 놓여 있다면 사실은 우리는 뺑뺑이 돌고 갈 데가 없어요.  갈 데가 없는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뭐로 만들었다? 하나님의 군대로 만드니까 군대 만들기 전에는 갈 데가 없다고 여겼는데, 세상에 그 새로운 세계가 군대가 되어서 주의 이름이란 이름의 지휘관이 이끄시는데 보니까 갈 곳이 생겼어요.

분명히 홍해바다는 사람이 들어가게 되면 죽게 돼 있어요. 물고기가 아닌 이상, 그런데 하나님의 군대가 나와 보니까 세상에, 홍해바다가 갈라져서 듣지도 보지도 못한 생각도 못한 바다 속의 땅을 밟을 줄이야, 그리고 건너가서 비로소 하나님의 새 하늘과 새 땅이 있다는 사실, 젖과 꿀이 있다는 사실, 그럴 때 그 사람은 하나님의 군대가 되는 겁니다.

디모데후서2장4절, “하나님의 군사로 모집된 사람은 자기 일에 얽매이지 않는다.” 좋은 게 있는데 뭐하려고 그것가지고 신경 쓰느냐, 이 말입니다. 아옹다옹 갈 데도 없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그것보다도 지금 갈 곳을 마련해준 그 쪽 세계가 족히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좋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군대라 하는 것은, 하나님 군대의 무기가 뭐냐, “나, 갈 곳 있거든!” 이게 무기예요.

“그래, 그래, 니 잘 먹고 잘살고 이명희가 또 고소해서 불복해서 또 고소해고 유산 내놓으라고 동생보고 또 고소했거든요. 그래, 형제간 잘 먹고 잘 살고 인지대 5백만원 내라, 다른 사람 세금 받아 잘 살자, 대법원까지 가서 싸워라, 하지만 우리는 갈 곳이 있거든! ”나도 갈란다.“ ”일단, 군대가 돼야 돼” 군대 같으면 하나님의 언약을 받아야 돼요. 아브라함이 언약을 받아야 만왕의 천사가 왔고 그 때 이름이 이스라엘의 싸우는 나라로 전환됩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하면, 하나님의 군대의 등장은 갈 곳이 없는 줄 알고, 너희들만 빼줄게. 그렇게 되는 겁니다. 소돔과 고모라에서의 하나님의 군대는 누구지요? 롯과 그 두 딸이었어요. 그런데 군대라고 여기고 따라온 사람이 있었지요. 롯의 처. 롯의 처는 군인인 줄 알았는데 군인이 아니었어요. 뒤돌아 봤지요. 언약을 위반했다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마지막 때, 제자들 보고 “롯의 처를 생각하라.” 사실은 롯의 처가 남편보고 따라오려고 했지만 뒤에서 머리가 길었는지, 당기는 것이 씹던 껌에 걸린 것 같아요. 머리에 껌 붙은 모양이라, 소돔과 고모라의 제품에 껌을 붙여가지고 뒤돌아보지 않을 수밖에 없었어요.

아까 너희 애비는 악마다, 했잖아요. 우리는 아브라함 자손인데 우리는 죄의 아들이 아니다, 하니까 혈 육적으로 백날 해야 그것은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말이에요. 구약에서는 혈육적인 모임이 아브라함 혈통이 군대처럼 보이지만, 그건 하나의 모형이고 진짜 군대는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언약소리 듣고 모여라! 할 때, 듣고 몽유병환자처럼 옷을 주섬, 주섬 입고 바깥에 기어나가서 언약의 집합, 너도 몽유병, 나도 몽유병처럼 주의 언약소리 듣고 모일 때, 그게 군대입니다.

십자가의 음성을 듣고 모일 때, ‘하나님의 피로 세운 교회’라 했어요. 하나님의 피가 비밀이고 이게 호출 소식입니다. 십자가로 모여든 사람들, 비밀결사단체들, 그게 바로 교회입니다. 10분 쉬고 하겠습니다.

 공은주 (IP:61.♡.205.105) 13-03-02 09:02 
안양20130215b히1장10절(아들과 천사)-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군대가 될 때, 비로소 멸망하는 나라와 같이 멸망 하지 않고 영원한 나라에 주께서 주의 보좌가 계신 거기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중요한 이유는 유일하게 이스라엘이 언약과 연관돼 있다는 점에서 하늘과 땅, 땅과 하늘이 유일하게 통하는 입구와 출구 그 역할을 이스라엘이 했습니다.

이스라엘이란 이름 자체가 야곱의 이름에서 나왔고 야곱의 머리 위에 사다리가 있었고 그 야곱의 사다리는 그냥 사다리가 아니고 하늘과 땅이 연결되는 사다리지요. 요한복음1장에서 예수님께서 인자 위에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 내리락한다 했지요. 이제 육적인 사다리는 철거, 해체해 버리고 예수님 자신의 몸체가 새로운 이스라엘로 하나님의 군대가 등장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군대가 된다고 했는데, 군인들이 평소의 하는 일이 뭐냐 하면, 평소에 훈련하는 거죠. 훈련은 그냥 훈련자체를 위해서 훈련하는 게 아니고 어떤 사태가 일어날 걸 예상해서  전제로 해서 훈련하느냐 하면 전쟁입니다. 새로운 나라에 가는 건 좋은데 사람들은 뭐를 싫어하는가 하면, 전쟁은 싫어해요. 전쟁의 가장 확실한 면을 보여주는 것이 도박판입니다. 카지노 같은데. 다 먹던지 다 털리던지 해야 돼요. 그야말로 도박에 빠진다는 것은 게임하는 재미, 전쟁하는 재미, 전쟁이 게임이거든요.

요새 전쟁은 전자게임이 돼서 미국해병대는 헷갈린다 하잖아요. 앉아서 게임하는 거나 실제전쟁과 다를 바가 없으니까 인명살상을 아주 쉽게 생각하는데서 오는 자괴감 같은 게 있어요. 양심에 가책이 안 되면서 결과적으로는 엄청난 사람을 죽였다는데서 오는 양심의 가책이라는 것. 자기 정체성이 깨지기 시작하는데.

전쟁을 하기전 까지는 뭐가 발생되느냐 하면 나 또는 나는 여기 있다, 내가 먹는다,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다, 나는 지금 노래 부른다. 본능이 나에서 나오잖아요. 전쟁이 벌어지면 적을 파괴하기 이전에 스스로 자기를 파괴하지 않으면 스스로 전쟁무기가 될 수 없습니다. 전쟁의 기계가 돼야 돼요. machine. 축구선수가운데 축구머신 있지요. 누구 있지요? 차두리. 하나의 기계, 터미네이터처럼 기계로 만든 것, 모든 부속이 쿵쿵쿵 하면서 굴러가는데 전부 다 하나의 기계로 움직이는 겁니다.

구약성경 나훔 찾아보겠습니다. 3장1절~3절, “화 있을진저 피의 성이여 그 안에는 거짓이 가득하고 포악이 가득하며 탈취가 떠나지 아니하는도다 휙휙 하는 채찍 소리, 윙윙 하는 병거 바퀴 소리, 뛰는 말, 달리는 병거, 충돌하는 기병, 번쩍이는 칼, 번개 같은 창, 죽임 당한 자의 떼, 주검의 큰 무더기, 무수한 시체여 사람이 그 시체에 걸려 넘어지니” 보세요. 여기 ‘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나의 아름다운 나의 어릴 때 꿈이 있습니까? 기계와 기계의 충돌 아닙니까? 이걸 가지고 어려운 말로 ‘순수한 부정성’이라고 합니다.

전쟁은 순수한 부정성, 부정은 아니다, 라는 뜻이에요. “아니야, 아니야, 그것도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에 가장 순수한 상황이 벌어지는 곳이 바로 전쟁입니다. 더 이상 인간이기를 끝내는 거예요. 그래서 장정들이 군대 가면 제일 먼저 하는 것이 뭡니까? 머리를 깎지요. 머리를 깎는다는 말은 자기의 얼굴에 얼굴을 보여주는 모습이 되는 겁니다. 사람이 얼굴을 면상을 지워버린다는 것은 자아가 드디어 없어집니다. 드디어 자아를 생각하면 안돼요. 머리를 홀라당 깎음으로서 하나의 직위로 바뀌는 겁니다. 총만 전쟁 기기가 아니라 총을 든 나 자신이 하나의 기계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논산훈련소 제일 먼저 하는 게 총 쏘는 것부터 하는 것이 아니고 제식 훈련하는 거예요. 제식 훈련이라 하는 것은 앞으로 갓, 뒤로 갓, 좌로 돌아 갓, 우로 돌아 갓 해서 개인을 말살하고 오직 명령과 명령에 움직이는 기계, 선반기계, 공작기계, 기계로만 존재하는 거예요.

기계는 또한 다른 명령자에 의해서 기계가 되겠지요. 철저하게 기계가 되어야지만 그것은 순수하게 전쟁에 동원시킬 수가 있습니다. 옛날 제가 아는 낙후된 코메디에 보면 이런 게 있잖아요.  그 훈련소 하는데 보니까 자기 아는 사람이 동네 형벌쯤 되는 이가 오니까 단체인데도 불구하고 “뒤로 돌아 갓!”해야 되는데 “뒤로 돌아 가이소.“ ”앞으로 가이소.“ 코메디입니다. 실제로 그리하면 안 되지요. 자아가 말살돼야 되는데 아는 동네 형님은 자아가 말살 안 되잖아요. 만약에 아버지가 뒤늦게 군에 왔고 아들이 교관이라면 어떻게 되겠어요? ”아버님, 뒤로 돌아가시옵소서. 통촉하나이다.“ 이런 소리 안하겠지요. 여전히 ”뒤 돌아 갓!” 왜? 하나의 말살이에요. 이걸 냉동 동결한다고 했잖아요. 겨울수련회에서. 완전히 기계로 만드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군대가 된다는 말은 더 이상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말은 기계의 명령자가 누구라는 말입니까? 오직 예수님이라는 말이에요. 예수님 앞에서 우리는 자아가 말살해야 되는데, 말살하는 방법이 전쟁을 통해서 말씀합니다.

이것부터 난해하기 시작하지요. 어떻게 전쟁을 하는데 자아가 말살하고 자기가 부인돼야 되는가? 여러분, 전쟁이 혼자서 하는 전쟁이 없지요. 전쟁에서는 반드시 적이 있잖아요. 최소한 대립되는 두 패가 있어야 전쟁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가끔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유흥업소에 있는 여자들이 아침에 손님 없을 때, 다리 내놓고 치마 휙 걷어 올리고 화투 치는 거 나오잖아요. 한복입고. ‘오늘도 한 번 점괘나 보자.’할 때 누구하고 칩니까? 술집마담이 누구하고 쳐요? 혼자 쳐요. 혼자서. 전쟁은 대립이 될 때 전쟁을 하게 됩니다.

다시 한 번 반복합니다.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의 군대가 된다 했지요. 야곱이 형 만나기 전에 ‘마하나임’이라는 천사의 집단을 만났는데 마하나임 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군대란 뜻입니다. 하나님의 군대라는 천사중의 한 분이 얍복강가에서 야곱을 하나님의 원수로 간주해서 씨름을 하게 되는 거죠. 자기가 복 받는 줄 알았는데 하나님의 군대한테 충돌해야 될 잘못된 개념이에요.  전쟁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새로운 인간으로 야곱은 죽고, 야곱이 죽은 그 현장에서 누가 산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인간에게는 상처가 있어야 돼요. 상처라 하는 것은 상처당한 그 자리에서만 치료된다고 주일날 얘기했잖아요. 주님으로 인하여 십자가로 인하여 상처 받고 십자가로 인하여 용서받고 구원 받는 영생을 얻는 유일한 지점은 십자가밖에 없어요. 십자가로 상처를 줬다 하는데 상처를 줘야지요.  상처가 있어야 구원이 비로소 눈에 보입니다. 환난가운데 소망 있듯이.

여기서 어렵다하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얼마나 어려운지 나열해 볼게요. 이 세상은 갈 데가 없고 무너진다. 예수님의 주의 보좌는 영원하다.  그럼 무너진다면 그냥 무너지라고 기다리는 인간 아무도 없고 나름대로의 노력을 하게 되거든요. 그냥 이야기하는 겁니다. 한 인간이 살아있다고 여겼는데 살아있는 나를 계속 살리기 위해서 주변의 자연환경을 기대게 됩니다. 자연환경 가운데 날씨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땅, 하늘 다 포함되는 겁니다. 땅이 있어야 농사를 짓고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땅은 내 말을 듣는 것이 아니고 자연의 말을 들어요. 돼지, 소 키우는 사람이 힘든 것은 뭐냐 하면, 돼지 값, 소 값 내려갈 때 힘들지만 이건 자리를 비울 수가 없다는 거예요. 왜냐 사료줄 때 제때 주지 않으면 사료 값도 안 나오고 손해가 나는 거예요.

그러니 이게 뭐냐, 돈 벌기 위해서 결국 돼지가 하루에 한 끼만 먹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 거는 내 마음이고. 돼지는 자연의 말을 들어요. 말이 뭐냐, 하루에 세끼를 먹어야 돼요. 계속. 돼지는 내가 키우지만 사실은 나나 돼지나 전부 다 누구의 법칙 따른다? 대자연의 법칙을 따르는 거예요. 자연의 법칙에.

딸만 있어 아들을 원하는 사람들이 답답한 게 그거잖아요. 내가 아들 원한다고 아들 낳는 게 아니고 낳으면 딸, 딸, 딸, 전부 딸 낳으니까 언제쯤 아들을 보겠느냐 이렇게 된다 말이거든요. 그러니 인간이든 돼지든 누구든 간에 전부 다 이미 인간이 아무리 똑똑해도 대자연의 법칙을 벗어날 수 없어요.

그래서 인간은 살아있는데 더 살기 위해서 자연과 타협을 하다보니까 나온 게 뭐냐 하면, 어제 내가 국가라고 얘기했지요. 국가는 바로 정치가 되는 겁니다. 정치라는 것은 질서 잡는 거예요. 한 사람이 너무 많이 부자 되지 말고 가난한 사람에게 도와주고 이게 정치거든요. 지금 제가 무슨 이야기하는가 하면, 언약에 의해서 하나님의 군대가 있는 반면에 인간이 살기 위해서 자연과 더불어 정치가 있다 이 말이지요.

이런 국가도 있고 저런 국가도 있다. 그러면 그 나라 그 땅은 안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는가 하면, 이 언약이 있는 군대를 누구하고 전쟁을 붙이는가 하면, 일반 국가와 전쟁을 벌이시는 거예요. 그러니 보통 심각한 게 아니지요. 제게 이야기해 보세요. 내가 살아있다. 살아있는 내가 하루만 살고 그만 죽을 거 아니잖아요. 살아있는 것이 추진력이 있어 가지고 살다보니까 계속 살고 싶네요. 자전거는 달리고 있으면 계속 달리고 싶은 거예요. 장애가 있을 때만 멈추지만 그렇지 않으면 계속 달리고 싶은 거예요. 나는 계속 달리고 싶어요. 계속 살고 싶어요.

사는 방법은 자연환경, 땅이 있어야 되고 비가 적절이 와야 되고 햇빛이 있어야 되고 그리고 내가 약한데 내 옆에 도둑놈이 오면 안 되고 고추농사 500만원, 800만원 몽땅 날리면 안 되잖아요. 지금도 경상북도에서는 지금도 많이 일어나요. 그러니까 그 도둑놈을 잡아주고 CCTV로 잡아주고 하는 국가가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질서가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게 정치라 했지요. 정치. 토지보상금 문제, 국가유공자인데 장학금 몇 대까지 줍니까? 이거 전부 다 누가해요? 국가 공무원들이 해야 될 일 아닙니까? 의료보험인데 이빨 고치는 거는 왜 안 되고 치석제거는 왜 안 됩니까? 이런 문제, 이건 하자하는 이런 결정도 정치가 하는 거예요. 그러니 우리가 정치가 좋아서 수용하는 것이 아니고 누가 살기 위해서? 내가 살기 위해서 여유롭게 안정되기 살기 위해서 정치하는 국가가 필요하다 이 말이죠. 바로 이 나라가 우리가 알고 있는 보통국가에요. 그런데 하나님의 군대가 이 보통국가를 옹호해 주는 것이 아니고 언약에 의해서만 생겨난 하나님의 군대와 이들의 군대와 전쟁을 벌려 나가면서 그동안 눈에 띄지 않는 생명나무에 있는 천국이 이 틈 사이에 보이게 하셨다, 라는 말이지요. 이제 감 잡으셨습니까?

주의 보좌가 전쟁의 틈바구니에서 보좌가 새록, 새록 냄새를 피우면서 등장하기 시작한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떻게 오해했는가 하면,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군대야. 이것은 딱 이스라엘 여기다가 이름을 새겼어요. 이스라엘.

그리고 다른 나라는 언약이 없기 때문에 ‘아, 그거는 이방나라’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의 군대는 이기고 결국은 저들의 나라는 멸망한다, 모든 구약성경에 다 적혀있으니까 그러니까 메시아는 누구 편에 선다? 우리 이스라엘 편에 선다. 그러니까 이방나라야, 너희들 죽기 싫거든 할례 받고 안식일 지켜라, 우리 유대에 편입은 시켜주되 정식은 아니고 계약직으로 해줄게. 이런 식으로 했던 요런 아이디어, 예수님은 이런 아이디어를 갖고 있는 사람보고 “너희 애비는 악마다.” 이게 보통 어려운 문제가 아니지요.

그들은 구약을 달달 외우다시피 삽니다. 실컷 외우고 해석 다했는데 주님께서 평가하기를 심판주가 평가하기를 “너희 애비는 악마다.” 그러면 이 해석 말고 달리 해석할 수 있는 방법이 인간에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안 나오지요.

간음한 여인 현장에서 돌로 쳐라, 라고 해서 돌로 치는데 결국은 결과적으로 아무도 그 여자를 향하여 돌 던질 자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 이 무슨 조화입니까? 우리가 아는 상식선에서는 성경말씀 지키면 율법 지키면 언약백성 되어 우리는 구원받고 나머지는 다 탈락해서 지옥 간다고 알고 있는데 그게 아니라면 그게 옳지 않다면 그럼 뭐가 옳은데요? 그럼 우리가 이쪽편도 아니고 어느 편을 서야 되는 돼요? 이런 구조를 어떻게 그려야 되는 돼요? 무엇이 진리인지 어떻게 그려야 되는데? 우리가 구약성경을 건성으로 읽었다 이 말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군대라고 여겼던 이스라엘의 내부가 적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이 내부전체가 언약으로 하나가 돼 있어야 돼요. 이 점을 놓치면 안 되는 거예요. 적들이 물러가고 패배하는 것은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그냥 효과에 불과한 거예요. 이 쪽 내부가 온전하게 언약에 의해서 지배를 받느냐가 관건이지 이스라엘나라는 그냥 이스라엘나라 되면 적들은 그냥 애초부터 없는 존재가 돼서 허물어집니다.

대표적인 것이 여리고성 함락작전 아닙니까? 우리 사람들보고 여리고성 돌라 하면 여리고성 돌면서 얼마나 고함지르겠어요. 돌을 던지면서 “너희들 말이야, 알아서 해!” 했겠지만 제사장은 어디에 몰두하라, 지금 몇 바퀴 돌았느냐 거기에 몰두하는 거예요. 나팔소리에 몰두하고 앞에 우리 중간에 언약궤가 있다는 것에 몰두해라, 왜냐 하면 이 전쟁은 우리가 치를 전쟁이 아니라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기 위해서는 보는 우리를 보이지 않도록 하는 작업이 필요했던 겁니다. 나 자신을 생각하지 않는. 아까 그것을 말살이라 했지요. 나 자신을 생각하지 않는 그런 장치를 하려면 바로 제사라는 것이 나 대신 앞장세워져야 된다는 겁니다. 제사는 바로 “너는 죽어야 돼!” 이게 제사 아닙니까? 양을 안수할 때 양을 그냥 보내는 게 아니고 양에다가 손을 얹고 양을 안수한다 이 말이지요. 그럼 양은 메에~하면 우리도 손을 얹었기 때문에 우리도 따라간다 말이지요. 그러니까 양이 제단위에 올라가면 우리도 같이 사실은 이미 실질적으로 제단 올라 가지고 밑에서 불을 확 질러서 양이 악~하고 꼬면 우리도 같이 꼬는 게 된다 말이지요. 성령께서 그렇게 하시지요. 예수님의 죽으심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되게 한다 말이지요.

중요하니까 다시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군대가 하는 전쟁은 결코 나의 전쟁이 아니무니이다가 돼야 돼요. 또 하나의 예를 들면, 기드온이 전쟁하기 위해서 사람 모집하니까 2만 2천명이 왔어요.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최종적으로 300명만 남았지요. 비율이 어느 정도인지 계산해 봅시다. “73명 중에 72명 집에 가” 달랑 1명꼴로 채택된 거예요. 기드온은 환장할 지경이에요. 기드온이 만약에 개척교회 목사 한다면 22,000명이라는 교인이 크게 확장할까, 말까하고 있는데 밤에 꿈에 나타나가지고 300명만 남기고 다 보내라, 할 때 22,000명의 큰 교회 목회자는 그 자존심은 어떻게 돼요? 그리고 나머지 “300명에게 전부 다 지시해“ “주여, 어떻게 지시할까요?” 일을 아니하실지라도 경건치 않은 자도 일한 것도 없이 삼종세트 외쳐야 돼요. “하나님, 그렇게 하면 진짜 일 안합니다.” 그렇잖아도 일을 하라고 해도 안하는데, 일을 아니하실지라도 하면 아무도 일 안합니다. “잔소리하지 말고 해!”

“여러분, 일을 아니하실지라도 구원받습니다.” 했다 합시다. 제가 전에 예를 들었지요. 300명모인 교회에 복음전하니까 7가정 남았다가 다 갔지요. 나머지 300명도 다 갈 가능성이 있어요. 비록 목사는 목회에 많은 상처가 있어야 상실이 있어야 비로소 천국이 보입니다. 그동안 교회가 목회가 뭘 막았습니까? 자기 천국 가는, 자기의 고향을 막아 놓은 거예요. 망해가는 그 타향이 앞을 가린 거예요.

아까 홍콩이야기 했잖아요. 홍콩 이야기하니까 갑자기 홍콩의 전경이 생각나는 거예요. 영화에 ‘도둑들’보면 마카오 홍콩 나오지요. 그 홍콩의 화려함, 그것 때문에 혹시 천국을 가리고 있지 않은가 퍼뜩 생각이 났습니다. 몰라도 머리가 길어가지고 엄마도 홍콩 가서 살래, 좋겠다! 홍콩이 세계에서 집세가 제일 비싼 곳이에요. 그 좁은 땅에 보세요. 300만 살라하면 얼마나 비싸겠어요?

하나님의 군대라 하는 것은 기드온이 결국 300명가지고 총을 쥔 것도 아니고 칼을 쥔 것도 아니고 이건 대장간의 쇠 굽는 것도 아니고 왠 횃불, 어디 발렌타인데이 축제하는 겁니까? 할로인데이, 호박 들고 사탕주세요. 귀신놀이 하는 것도 아니고 칼이 있어야 사람을 죽이지요. 이건 도저히 상식이 안돼요. 하나님의 군대는 시편에 나오듯이 나는 칼 의지하는 것도 아니고 옛날에는 기병대가 최고였어요. 징기스칸이 왜 큰 제국을 이루었는데요? 마상, 말을 타면서 활을 쏘아대는 거예요.  정지된 대포하고 빨리 움직이는 대포하고 누가 이깁니까? 대포로 누비면서 다 부셔버리는데. 그게 헝가리까리 밀려왔어요. 훈족이. 그래서 헝가리 나오면 훈에서 나왔다고 헝가리에요. 폴란드 헝가리까지 밀려온 거예요.

그 횃불하고 항아리 들고 있었잖아요. 그게 무슨 전쟁이 됩니까? 이쪽에서는 인간의 승리라 하는 것은 힘의 집결, 하나의 움직이는 기계, 아까 나왔지요. 굉굉, 휙휙, 활 쏘는 소리 쉭쉭, 그리고 빠르게 움직이는, 군대는 제식 훈련할 때 “앞으로 가!”할 때 일사불란하게 같이 움직여야 되지, 앞으로 가하는데 하나는 가고, 뒤에는 영구 없다! 해서 바보 같은 인간이 따라오면 일이 안돼요. 적들이 “거기 아무도 없지” 하는데 바보가 “저, 여기 있는데요.” 하면 완전히 몰살당합니다. 군에서는 옳고 그름이라 하는 게 판정을 자기가 판단하지 말라, 해요.

군에서 자살하고 군에서 힘들어하는 사람 있지요. 그게 뭐냐, 자기를 몽땅 잃어버리는 게 싫어서 그래요. 자고나면 자기 것이라는 것을 쥐고 싶어서 그런데 견딜 수가 없는 거예요. 계속 압박으로 그것마저 손 놓으라고. 양복도 못 입고 전부다 군복입고, 군화신고 이렇게 만드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시편에 보면 나는 말이나 병거를 의지하지 않고 애굽의 말도 의지하지 않고 난 누구만 의지한다? 총사령관 이름이 누굽니까? 주의 이름이지요. 아들이지요. 천사로부터 존경받는 하나님이 친히 낳았다는 그 아들, 그 아들이 주의 이름으로 이미 구약부터 군대를 조직한 거예요. 군대를 조직했을 때, 하나님이 여호와가 대상이 되는데 누가 이기리요. 그런데 적들은 문제가 되질 않아요.

광야에 들어갈 때, 내피림이 있었지요. 내피림의 특징은 뭡니까? 보통사람의 키보다 큰 사람들이에요. 창세기5장에 보면 내피림이 급성장합니다. 어떤 사람은 홍수로 내피림이 다 멸절했는데 왜 살아있지? 이런 이야기를 해요. 그건 기존의 DNA를 자꾸 생각해서 그런데 성경은 DNA를 생각하는 게 아닙니다. 지역으로 생각해요. 내피림이라는 지역에 사는 사람이 내피림이고 주께서 키를 키워주면 더 크게 가는 거예요.

하나님의 군대를 할 때, 그들은 장대 같고, 이쪽은 메뚜기 같지요. 하나님께서 이왕 들여보내 주시는 거 좀 쉽게 안 가게 하시고 그렇게 들어간다면 가지, 왜 쉽게 안 해줍니까? 다 들어갈 사람은 이다? 아니다? 다 아니다. 우리는 혈통적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맞습니다. 아니거든요. 혈통적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 아니거든요. 내부적으로 혈통적 이스라엘을 옹호하는 믿는 사람과 우리 혈통이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아니라는 것이 내부에서 싸움이 벌어져야 돼요. 전쟁이라 하는 것은 바깥에서 전쟁하지만 실제로는 언약의 바른 취지 안에서 전쟁이 일어나야 돼요.

“칼 들고 칩시다.” “기드온은 횃불과 하나님만 있으면 된다.” “기드온님, 횃불과 항아리가 왜 전쟁에서 이기는지 논리적으로 설득해 보세요.” 기드온이 하는 말이 “나도 설명 못해. 왜? 내가 사령관이 아니거든. 나는 사령관의 졸다구다!”

사도 편지에 제일 첫 마디에 뭐로 돼 있던가요? 예수 그리스도의 뭐다? 종이죠. 종이 왜 그리 신경 씁니까? 이상해요. 예수그리스도의 종이잖아요. 그러니 누가 중요해요? 예수님께서 로마서대로 일한다가 중요하지 사도바울은 이런 견해를 갖고 있다는 것이 안 중요해요. 하나의 종이라 하는 것은 종을 보지 말라고 종으로 세운 거예요. “여러분, 누가 보여요?” “사도 바울님이 보입니다.” 그러니까 날 보지 말라고 이런 뜻이란 말이지요.

고린도전서1장에 보면, 나는 내가 십자가 안 졌다. 내 이름으로 세례 준적도 없어. 그런데 왜 자꾸 나를, 나는 사도바울에게서 세례 받았다. 해서 정당을 형성하느냐, 파를 만드느냐 말이지요. 감리교는 뭐고, 침례교는 뭐고, 합동측은 뭐고, 통합측은 또 뭡니까?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이름밖에 없어요.

주의 이름이 적들을 칠 때, 내부의 주에 이름이 결국은 내부적인 전쟁을 늘 상 한바탕 이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군대가 될 경우에는 승리가 돼요. “그럼 목사님, 그들이 하나로 일치단결해서 군대가 된 적이 언제 있습니까?” 언제 있었느냐 하면 두 자로 ‘금식’있지요. 사울 때, 사무엘 때, 막강한 블레셋이 왔을 때 그들은 지레 짐작 나자빠지지요.  하나님은 해도 해도 너무 하신다. 우리 숫자가 얼마 안 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갑자기 들이닥칠 때, 남편 월급 얼마 안 되는 줄 뻔히 알면서도 갑자기 빚이 25억 있다. 어쩌라고? 감당이 안 되잖아요. 그 때 그쯤 되면 못했던 기도를 몰아서 다 하지요. 당일치기해서 시험 치는 격이지요. 그 때는 사람의 기도는 한다고 하는 게 아닙니다. 안 할 수 없게 만들어요. 그동안 억눌린 거, 하나님 앞에 서러운 거.

오늘 채 두식 가정 만났는데, 6살 먹은 딸애가 얘기해요. “목사님, 하나님은 왜 내 기도 안 들어 주시는데요?” 이리 하는 거예요. 왜 하나님은 내가 그렇게 기도하고 간절히 예쁘게 기도했는데 왜 내 기도는 하나도 안 들어주는 거예요?“ 제가 이렇게 답변했어요. ”먼저 기도한 착한 애들이 더 있었기 때문에 그래, 니가 착해? 그러면 니가 미리 예약해야 돼. 니보다 더 착한 애가 니 기도하기 전에 착한애가 먼저 기도를 했기 때문에 그 애의 기도를 먼저 들어주신 거야.“ 제가 그렇게 하니까 차타고 가던 아빠, 엄마 말이 ”얘야, 이 세상은 망하게 돼있고 ....“ 복음을 말해버려요. 6살 아이에게 충격을 줘버려요. 그래서 수습에 나섰지요. 수습에 나선 것이 ”하나님은 이미 줬는데 니가 자꾸 준 것을 버리고 안 줬다고 생각하고 자꾸 기도하니까 이미 너에게 준 것을 찾아보라고 하신단다.“ 허겁지겁 수습에 나섰어요. 자칫하면 6살 먹은 애가 허무주의에 빠질까 해서.

하나님의 군대는 이런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 잘 믿습니다. 백날 말해도 하나님은 안 믿어요. 하나님은 우리 자신을 너무 잘 알아요. 믿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막상 우리 힘으로 안 되는 센나라 의도적으로 강성한 폭풍이 오게 해서 전에는 건성건성 기도했다가 이거는 진실 되게 기도하게 되면 그 진실 된 기도가 뭐냐 하면, 주 앞에 반항입니다.

진실 된 기도란, 못 다한 주님에 대한 욕설입니다. 울고불고. 이럴 수가 있습니까?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합니다. 나보고 더 이상 어쩌란 말입니까? 기도하라하면 기도해, 헌금하라하면 헌금해. 복음하라 하면 복음 해. 어떻게 이런 일이. 더 이상 제가 할 수 있는 건 뭐가 있습니까? 로마서 4장 잊어버렸지요. 일을 안 할지라도 경건치 않은 자, 그 때는 안다 했는데 막상 현실문제로 들이닥치니까 “에이, 내가 다시는 성경 보나 안보나 보자. 로마서4장 에이~씨, 내가 성경 보면 성을 간다.” 이런 식으로 악에 받쳐서 나오지요. “나온다. 나온다. 드디어 방앗간에서 떡이 나오는구나!” “그래, 죄 덩어리가 나오는구나!” “그래, 나는 죄를 생산하는 성령이다.” 용서가 뭔지 이야기하기 위해서 그동안 죄도 안 짖고 용서받으려하는 그 염치를 없애버리고 충분하게 죄 지어서 본색 그 7귀신이 외마디 외치는 그 비명소리 그게 속에서 경쟁하듯이 튀어나옵니다. 가만있어봐 내가 이야기할게. 하나님 이렇습니다. 아니야, 내가 할게. 왜 자식은 이렇고 남편은 이렇고, 저렇고 온갖 거 다 튀어나옵니다. 그게 우리가 그동안 세상에서 망해야 될 미련이 롯의 처와 같은 미련이 우리의 긴 머리카락이 여전히 씹던 껌으로 감기고 있었던 거예요. 강렬하게.

주께서는 항상 주님의 준 문제는 우리의 예상을 빗나가는 문제를 내요. 그래서 우리의 신앙심가지고 이겨내 보려고 하는 그걸 당황하게 만듭니다. 당황하게 만들면서 우리한테 상실을 오게 해요. “나, 이제 믿음생활 안 해요.” “언제는 믿었나?” 안 믿었거든요. 여기서 우리에게 구멍을 만들지요. 인간은 껍데기는 번질 하지만 들쳐보면 누구나 허한 구석이 많아요. 그걸 감추는 것이 세상이라는 것. 그런데 이 쪽 세계에서는 뭐로 감춥니까? 정치로 감추지요. 윤리와 도적으로. “나는 법은 지켰습니다.” “나는 파란불에는 건너가고 빨간불에는 절대로 건너가지 않았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가는데 양쪽이 빨간불이라, 그런데 남편이 용감하게 걷는데 권사님은 건너지를 않아요. 뭔가 법을 지키는 것이 나 같다는 생각인데 법을 지키면 뭐합니까? 40억, 60억 부도나는데. 부도 앞에서 법 지키는 것이 무슨 효력이 있습니까? 목사 넥타이 사드리고 목사 잘 섬기고, 막상 집안에 차사고 나니까 이게 효과 있던가요? ‘차라리 괜히 사줬어.’ 이런 거.

이 이방나라의 요소와 전쟁을 붙이는 이유는 이 적이 사실은 여기 하나님의 군대 안에 이미 여기도 잠식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그래서 뭔가 전쟁을 한다는 것은 적이라고 보면서 같은 동질성을 느끼는 ‘제게 바로 적인데도 불구하고 예수 안 믿는 거 빼놓고는 똑 같네.‘ 노는 사고방식이 똑같은 거예요.

사람이 결과를 미리 알게 되면 굉장히 아무리 착한 것도 후회해요. 괜히 착했어. 안 착해도 되는데. 애가 시험을 치는데 내일 발표인데 갑자기 부모의 행동이 경건해집니다. 나쁜 마음  먹지 않고, 나쁜 생각 안하고, 갑자기 기도 시간이 길어지고, 행동도 조심하게 되고, 욱 욕하다가 아니야, 내일 시험이야, 그런데 막상 해보니까 그것과 전혀 상관없이 애가 합격했어요. 그럴 거 같으면 어제 욕 할 건데. 욕하나, 안 하나 결과와는 상관도 없는데 이미 애는 시험 봐서 문제가 이미 대학당국 사무실에 들어갔을 거고, 내가 욕한다고 시험문제가 78점에서 98점으로 바꾸는 것도 아닌데 괜히 욕 안했어, 마음껏 나쁜 짓해도 괜찮은 거 가지고 괜히 졸았네. 이리 나온다고요.

그런데 앞으로 또 그런 일 생기면 갑자기 또 경건해지지요. 이런 인간적인 요소, 이런 변덕쟁이, 저는 옛날 가요 가운데 이 노래가 아직도 궁금증이 풀리지 않은 게 있어요. ‘돈 없으면 집에 가서 빈대떡이나 부쳐 먹지 돈 없는 건달이 요리 집이 무어냐, 기생집이 무어냐’ 이리 되잖아요. 돈 없으면 집에 가서 빈대떡이나, 할 때 빈대떡이 얼마나 비쌉니까? 그게 아직도 풀리지 않는 거예요. 옛날 정서에서 빈대떡이 헐었다는 이야기잖아요. 구약성경을 보게 되면, 구약성경 나름대로의 그 시대의 정서가 있어요. 정서가.

그게 성경에 표현되어 있으니까 성경해석하면서 바로 그런 것을 감안해야 돼요. 이걸 너희들이 하라, 하는 말은 이것은 못했다는 징벌로서 하라는 말이에요. 하나님을 안 믿었기 때문에 기껏 이런 짓들을 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정서를 모르고 마치 그 짓 안하면 복 받 는 줄 알고,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니가 왜 안식일날 금식하면서 왜 고아와 과부를 돌보지 않으면서 금식해봤자 그게 안식일 지킨 것이 아니라는 것 나와 있지요.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그걸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면, 고아원을 돌보면 그게 안식일을 지킨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신약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어떻게 나와 있습니까?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지요. 십계명을 준 것은 그 당시는 십계명을 지켜야 이게 축복이고, 못 지키면 저주받는다는 그 당시 정서였잖아요. 그런데 아직도 그걸 이해못해가지고 ”하나님, 이제 성령 받아서 지킬게요.“ 하고 나온다면 그것은 전혀 엉뚱한 소리예요.

십계명은 우리는 바로 못 지키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십계명이 있는 거예요. 지키지 못할 법을 보고 니가 백날 지켜봐라,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한 것은 우리가 행하지 못한다는 걸 명령한 거예요. 하나의 행하지 못한 것을 행하라, 이게 명령입니다. 율법의 명령. 율법의 명령이란 니가 하지 못한 것을 행하라는 뜻이에요. 말이 좀 이상하지요. 너가 하지 못할 그것을 어떻게 하라? 행하라. 그럼 나오는 것은 뭡니까? 결국 나는 못했습니다가 나와야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 이 정도는 하기 싫다.” 이리 나오니까 율법의 취지와 다른 거예요. 하나님의 군대라 하는 것은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우리는 이미 죄인인 걸 알아요. 그런데 누가 모르느냐, 본인이 몰라요. “아, 저 어린 양이 매일같이 연기 피우며 죽지?” “뭐, 쓸데없는 짓 하고 있어. 돈이나 주지.” “아, 돈이나 주지, 어린 양은 왜 죽이는데?” 우리는 모른다고요. 그게.

나중에 진짜 성령 받고 보면, 아! 돈으로는 못가요. 하나님의 나라. 못가도 좀 주지. 이 집이 500억이라는데 270억이라도 좀 주지. 어제 제가 만났던 분이 헬스장을 한답니다. 돈 많은 사람이 온답니다. 오는데 한 결 같이 뭐냐 하면, 돈을 더 벌어야 된다는 거예요. 이래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다 잘살고 여유 있는 사람인데. 맨날 돈, 돈 때문에. 그렇게 고민이 많답니다. 주의 보좌는 영영하지만, 이 세상은 옷과 같이 낡아가지고 문드러진다는 사실을 그들은 모르고 자체적으로 갈 데도 없으면서 그냥 자전거 타고 뱅뱅 도는 것처럼 돈, 돈하며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서 유일하게 벗어난 사람이 있었으니 이름이 ‘하나님의 군대’ 그런데 하나님의 군대라 해가지고 “우리는 군대다!”하는 것은 하나님의 군대가 아니고 주님이 언약으로 군대 되게 할 때만 군대인데, 주님의 군대 되게 할 때는 반드시 혼자서 도 닦아서 되는 게 아니고 우리가 감당 못할 엄청난 적을 앞에 붙여서 우리가 그동안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는 그 믿음이 아무짝도 소용없다는 사실, 우리가 원하는 효과를 낼 수 없는 그런 것들을 마치 믿는 것처럼 여겼다는 사실 “우리는 믿음조차도 없습니다.“ 라고 무너질 때 비로소 우리 앞에 용서가 보이는 겁니다. 십자가가 보입니다.

십자가를 믿었다는 것을 포기할 때, 비로소 십자가가 보일 때 그걸 ‘믿음’이라고 하는 거예요. 주의 이름이 보는 견해와 우리가 주와 함께 있다고 자기 자신을 염두에 두고 생각하는 견해가 이렇게 달라요. 어제 했잖아요. 나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고. 진짜 사랑받은 사람은 ‘아이고, 나 같은 것을 왜 사랑했어요?’ 이리 나와야 된다니까요. ‘정말 짜증나, 나 같은 것을 왜 사랑해서 나를 왜 천국가게 하는데요? 진짜 골치 아프게.’ 모든 일을 범사에 만족하려 하는데, 자꾸 적들을 보내 가지고 내가 감당 못할 적들을 보내는 겁니다. 아까 유치원 애가 하는 이야기는 결국 “왜, 하나님은 우리 뜻대로 되지 않습니까?” 라고 하는 그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우리 뜻대로 안되고 주의 뜻대로 잘돼가고 있는데 이게 내 뜻하고 안 맞는다고 짜증을 내고 있다 이 말이지요. 이게 무슨 앙탈입니까? 그 나라가 내 나라입니까? 주님의 나라, 주님이 마음대로 하는데 우리가 거기서 앙탈을 부리느냐 말이지요. 로마에 왔으면 로마법을 따르듯이 천국 같으면 천국에 합당한 예복을 입어야 됩니다. 예복 주는 것도 안 입고 그냥 가다가는 진노를 받습니다.

자, 그 다음에 넘어가 봅시다. 13절,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 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느냐” 말씀이 어렵지요. 말씀이 어렵다는 말은 이 말씀을 왜 여기다 넣어야 되느냐 그 이유를 아는 게 어렵다 이 말입니다. 주님의 우편에 있다는데 주님의 우편에 있겠지. 이게 어려운 게 아니고 왜 우편에 계셔야 합니까? 왜 좌편은 안 됩니까? 하고 따지는 것이 중요한 거예요. 주님이 날 사랑하겠지, 이러면 안 되고 ‘왜 저 같은 인간을 사랑하십니까?’ 이리 나와야 그게 성령으로 반응보이는 선지자지, “주님이 우리 사랑한데.” 이게 뭐예요? 마치 오늘 아침에 가니까 “우리 엄마가 가스에 중독되어 죽었어.” 옆집 아줌마 죽은 것처럼 생각한다면 엄마와 진짜 아들사이 아니잖아요. “엄마! 왜 이리.....” 몸부림치면서 반응이 저절로 나타나야 ‘아, 진짜 자기 엄마 죽었구나!‘ 하지, ’어, 어, 엄만데. 눈 안 뜨네. 아우, 빨리 치워야겠다.‘ 이리 나오는 거예요.

그게 유명한 소설 까뮤의 ‘이방인’이라는 소설입니다. 자기 엄마가 죽었는데, 재판장이 “니 엄마가 죽었는데 왜 안 우는데? 남자 주인공이 ‘뫼르소’입니다. 그 주인공이 하는 말이 ”엄마가 죽었는데 내가 왜 울어야 되지?“ ”내가 엄마가 아니잖아.“ 욕 많이 얻어먹었지요. 그리고 주인공이 해변 가에 있다가 아랍인을 권총으로 쏴 죽였어요. 당연히 살인죄로 체포됐지요. ”아무것도 관계없는 아랍인을 왜 죽였어?“ ”내가 죽인 게 아니에요.“ ”누가 죽였는데?“ ”바닷가의 여름 태양이 너무 눈부셔서 죽였어요.“ 노벨문학상 받았어요. 햇빛이 따가 와서 죽였어요. ”그게 무슨 소리야?“ 재판장이 ”도대체 그게 말이 되는 소리야?“ 주인공이 ”실제로 그래요.“ 햇빛이 따가 와서 그냥 쏘고 싶어서 쏜 겁니다. 따가 우니까 아무나 권총 들고 쏘고 싶어서 쏜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 교도소에 갇히지요. 사형언도 받아요. 왜냐 하면, 사형 안 시키면 또 나와서 눈부시다고 또 쏠 거 아닙니까? 그래서 사형을 시켰는데. 사형을 시킬 때, 조그만 창가에서 빛이 들어옵니다. 그 때 주인공 뫼르소는 진리를 압니다. ‘그래, 나는 하나의 별이었구나!” 끝까지 이상한 소리하고 끝납니다.

그걸 뭐라고 하는가 하면, 부조리라고 합니다. 부조리란 합리적이지 않지요. 세상이라 하는 것은 안다고 하지 마라, 모든 것은 부조리하다. 내가 아랍인을 안 죽이게 되면 마치 그게 합리적인 것처럼, 저 사람은 내가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죽일 이유가 없다고 합리적인 생각을 하잖아요. 그게 부조리라는 거예요.

내가 안 죽일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안 죽이겠다는 것이 이게 무슨 도리이냐 말이지요. 엄마가 죽었다고 울 때, 엄마가 죽었는데 울어야 될 합당한 이유가 내놓고 울면 내가 인정하겠는데, 엄마가 죽었다고 내놓을 이론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 말이 뭔 뜻인가 하면, 왜 엄마는 70세의 할머니잖아요. 왜 자기 엄마 죽은 것은 우는데, 울려면 옆집 70세 먹은 할머니 죽어도 울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 논리를 연결시키지 못하면 그 것조차 부조리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합리적이고 지성적이라고 여기는 것도 따지고 보면 전부 다 뭐다? 다 부조리다. 그러면 다 부조리인데 결국은 뭐냐, 진실을 그 부조리가 진실을 감췄다. 그러면 진실은 뭐냐, 우리는 그냥 하늘에 무심하게 떠있는 그냥 별이에요. 별보고 왜 쐈냐고 재판하면 안 되지, 태양이 그냥 있는 것처럼 권총도 그냥 있고, 내 피부도 그냥 있고, 당기는 손가락도 그냥 있는 거예요. 아라비아 사람도 오라한 것도 아니고 지가 그냥 해변 가를 걷는 거고 총알이 나와서 빗나갈 수도 있는데 맞춘 것도 모든 것이 따로 따로 하나의 별들이다 이 말이지요. 별들.

부조리가 곧 진리가 되는 겁니다. 진리를 찾고자 하는 그 자체는 진리가 아니고 그냥 있는 그대로가 뭐다? 진리다. 이게 실존주의 철학이라 하는 거예요. 이게 무슨 나라? 결국은 이게 이방나라고 이러한 사고방식이 어디에도 있다? 하나님의 군대라고 자처한 이스라엘도 바로 그러한 집단인 거예요. 이 되도 않는 이 집단을 주께서는 하나로 정신을 모아서 천국에 보내주는데 모으는 집결 렌즈가 뭐냐, 어린양의 죽음,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들로서 십자가를 이룰 때 비로소 다 이루었다! 할 수 있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 중심으로 생각하면 자기가 진리처럼 생각되지만 참 주님 보기에 어설프기 짝이 없는 자기변명에 지나지 않고, 자기 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망해 가는데 같이 안 망해가고 나만 살겠다는 시도, 그게 육적인 생각이고 주님 죽을 때 이미 우리 생명도 얻게 됐다는 그 기쁨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