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130215a히1장10절(아들과 천사)-이 근호 목사
히브리서1장 계속해 봅시다. 어제 우리교회에 질문하나 들어왔지요. 안상홍에 다니는 사람이 질문을 했는데, 하나님을 어머니하나님으로 믿으면 안 되느냐, 하는 질문이 들어왔어요. 그래서 답변을 했는데, 요지는 그겁니다. 예수님한테는 어머니하나님이 없다는 사실이에요. 예수님이 어머니하나님이라고 부른 적이 없지요. 뭐든지 질문을 했을 때, 성경적으로 복음적으로 정답을 내놓으려면 예수님께서 아버지하고 어떻게 했는가, 그게 정답이에요.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도 있고 또는 어머니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했는가가 중요한 이유가 원래 하나님은 예수님만 알게 돼있고 다른 사람은 하나님을 모르게 돼 있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하나님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종교라는 것이 다른 말로 하면 우상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사람이 자기가 믿고 싶은 신을 자기가 만들어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분명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잖아요. 그 말은 하나님은 예수님만 아시고 그리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실 분도 오직 예수님만 부를 수 있어요. 이것은 분명히 성경에 나와 있는데, 사람들은 성경내용을 어떻게 읽었는지 이 사실을 모릅니다.
하나님이라고 부르면 아들 되는 줄 알고 있어요. 그림으로 설명할게요. 하나님이 여기 계십니다. 있는데 사람한테는 어떤 생각이 있느냐 하면, 사람에게는 아버지가 있고 자기 있고, 자기 아들도 있겠지요. 아버지란 의미가 뭐냐, 자기를 낳아준 분이다. 아버지는 있을 때, 자기는 없었고 아버지가 자기를 낳았을 때, 비로소 자기는 존재했고, 따라서 요 관계가 아버지라고 사람들은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을 가지고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무엇이 확대됐는가 하면, 아버지와 나 사이의 관계를 확대, 확대, 확대 키워나가면 결국 하나님이 우리보다 먼저 있었고 그 분에 의해서 만들어지게 되면 우리는 자동적으로 아들의 관계가 된다, 라고 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우상이고 이게 바로 엉터리에요. 이게 엉터리 우상이에요. 이게 왜 엉터리냐 하면, 나로부터 출발해서 내가 알고 있는 아버지, 어머니 이런 관계를 그냥 키워나가면 그것이 하나님에게도 통하지 않겠느냐하는 생각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런데 이미 사람은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입장이래서 생각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되지를 못합니다. 로마서 3장 23절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사람들이 죄를 범했으매’ 그 다음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이르지 못했다, 분명히 나오지요. 사람이 죄 지을 때만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인간이 죄를 범한 이상은 인간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신학을 하고 어떤 공부를 해도 어떤 행동을 해도 영광이 되지를 못 합니다. 틀렸다는 말입니다. 정답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은 뭐냐, 이러한 아버지와 아들 관계는 하나님께만 통하는 아버지와 아들 관계는 따로 있어요. 하나님 아버지, 또는 하나님의 아들, 누구한테만 해당 되느냐, 예수님에게만 해당되고 우리한테는 해당이 안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들은 누구만 아들이다? 예수님만 아들이고, 우리는 아들이 아니에요.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하면 믿지를 안 습니다. 전혀 믿지를 않아요. 그러니까 처음부터 난관에 봉착해요. “우리는 하나님을 모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닙니다.” 이리되면 화를 낼 수밖에 없는 게 모든 출발점을 하나님 아버지가 만들었으니까 하나님 아버지 아들 맞습니다, 하고 출발했던 그 자체가 거부당하니까 그 다음 이야기는 아예 들을 생각을 하지 않는 거예요.
우리는 하나님을 모르게 돼 있고 하나님을 몰라요. ‘하나님을 알되’ 하는 것은 하나님도 아닌데 하나님이라고 우긴다는 뜻입니다. 로마서1장에 보면, 저희가 하나님을 알되, 영화롭게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지 맘대로 정해 놓고 전혀 영광 돌릴 수도 없는 자기 자체의 딜레마에 빠졌다하는 그 이야기를 로마서1장에서 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을 아는 게 하나님을 안다고 우기지요. 아들이 아닌데 어떻게 아버지를 알아요. 그리고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을 모르면서 무슨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버지를 모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데, 하나님께서 아들을 이 땅에 보냈습니다. 보내니까 이 아들을 핍박한 자들이 누구인가하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우기는 자들이 하나님 아들을 핍박했어요. 이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우기는 근거는 어디 있느냐, 출애굽기 4장22절에 보면 나오지요.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출애굽기 4장 22절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이라, 했으니까 “우리는 이스라엘이니까 하나님의 아들 맞잖아!” 라고 한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요한복음 8장 44절에서 “너희 아비는 마귀다.” 이리 하신 거예요. 자, 너희 아비는 마귀니까 마귀와 같은 말이 악마란 뜻이에요. 귀신하고 악마는 다릅니다. 귀신은 악마의 졸개들이고, 마귀, 옛 뱀, 악마, 사단, 같은 동의어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뭐라 하느냐 하면, 너희들은 악마의 아들이다. 유대인들은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자, 서로 의견이 다릅니다. 두 가지 의견이 나왔어요. 여러분에게 물어볼게요. 둘 중에 여러분들이 그 당시 사람들이라면 어느 쪽을 채택하겠습니까?
너희애비는 마귀다, 이쪽을 좋아하겠습니까? 유대인들처럼 우리는 성경의 출애굽기4장에 의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어느 쪽을 하겠습니까? 분명히 우리는 유대인하고 동조가 되겠지요. 유대인과 동조가 되는 순간에 우리는 무엇을 차버리느냐 하면, 결코 우리 애비는 악마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자기의 주장을 드러내는 거예요. “예수님이여, 당신은 우리 애비가 악마라고 하는데 나는 생각하기를 절대로 우리 애비는 악마가 아닙니다. 우리 이로서 헤어집시다.” 이리 하겠지요.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이렇게 인간 쪽에서 하나님께 나아 올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부산강의에서 역사에서 묵시로 점프하는 길이 없어요. 이게 신학자들은 제일 큰 딜레마입니다. 비행기의 활주로는 달리는데, 이상하게 비행기가 뜰 줄을 모를 때, 활주로는 시속 1000Km를 달려도 이게 뜨지를 않네. 계속 열심히 날기를 시도할 뿐이지요. 천국가기를 열심히 애쓰는데 이게 날지를 않네요. 날지 않는 것은 날개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날개가 뭐냐, 성령입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성령으로 나면 나는 정도가 아니고 본인이 안 날고 싶어도 땅에 다니는 게 귀찮아요. 닭은 나는 게 귀찮고, 던져봐야 찌~익 해서 날개 다 찢어져서 지붕위에 턱 앉아 있지요. 그런데 공중에 나는 독수리는 앉는 게 귀찮아요. 나는 게 더 재미있어요. 성령 받은 사람은 특징이 나는 재미입니다. 날면서 밑을 내려다보는 재미에요. 저기 의왕이고, 저기가 과천이고, 보는 재미가 있어요. 그 즐거움으로 문자 보내면 반응이 오지요. 친구들한테서. 헐~하는 사람도 있을 거고 빠져도 너무 빠졌구나, 하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어쨌든 채택가운데서 결정을 해야 되는데 진짜 우리 아비가 악마인지, 그래서 악마의 자식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자식인지, 분별을 해야 되는데, 문제는 이거에요. 하나님은 인간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수용이 되는데, 악마가 사람을 만든다? 악마가 아비니까. 악마가 사람을 만든다? 이것은 도저히 납득이 안 되지요. 아무리 예수님 말씀이지만 너희 애비는 악마니라, 할 때 악마가 어떻게 사람을 만들지? 그것은 좀 거북스럽다 이 말이지요. 역시 손톱, 발톱 만든 것은 하나님 쪽이 만들었지, 악마 전공은 만드는 게 아니고 꾀는 게 전공인데, 만들었다 하니까 이 문제가 어떻게 해결되는지 봅시다.
그 해결점이 여기에 히브리서 1장5절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네가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이렇게 나와 있지요. ‘너를 낳았다.’고 했을 때, ‘만들었다’ 하고 ‘창조했다’ 하고 ‘낳았다’ 하고 하나님은 구분하십니다. 하나님이 낳아야 아들이고, 그냥 만드신 것은 아들이 아니에요. 만드신 것은 아들이라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을 만들었다고 해서 그 사람을 아들이라고 칭하지 않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취지입니다. 상당히 중요한 문제에요. 하나님이 낳아야 아들이지, 하나님의 아버지 되기 위한 조치로서 아들이어야 되지, 만들어졌으니까 아버지라고 부르면 새삼스럽게 아들관계가 엮여지는 건 아니라는 말입니다. 엮여지는 게 아니에요.
우리 인간 사회도 그렇잖아요. “내가 니 애비다.” 하면 자식이 드라마에서 뭐라 합니까? “애비 됐으면 애비 구실을 해야 날 길러줘야 애비지, 다른 여자와 도망가 놓고 날 버리면 이게 애비입니까?” “얘야, 내가 니 엄마다. 너를 낳아준 엄마야.” “나의 사전에 엄마는 없습니다. 나의 엄마는 길러준 엄마가 나의 엄마입니다.” “날 낳아 놓고 도망쳐버린 그런 엄마는 엄마가 아닙니다. 엄마라고 부르지 마세요. 이 아줌마야!” 그리 나오잖아요. 정답을 말씀드릴게요. 하나님의 언약대로 실천에 옮겨야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존재론적으로 신의 존재 있고 그 존재로서 우리가 세포분열 하듯이 모세포 있고 딸세포 있어서 따로 떼어내면, 이게 아들이다, 이게 아니고 아들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에 맞춤, 언약에 합치해야 아들입니다. 언약에 합치해야 아들이 나오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실 때, 아들 만들기를 시도한 거고 그 아들을 만들 게 되면 왜, 아들을 만드는가? 아버지가 아버지 되기 위해서 아들이 있어야 돼요. 이 이야기는 오직 하나님과 예수님, 그 두 분에 대한 관계이지, 우리는 빠집시다. 인간은 거기에 개입이 안 됩니다.
그러면 방금 정답 나왔어요. “목사님, 그러면 사람은 왜 있습니까?” 사람은 아들을 아들 되기 위해서 있는 겁니다. “아, 우리가 아들이다. 이 말이죠?” 그 말이 아니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진짜 아들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들러리로 우리 인간들이 만들어진 겁니다.
전에 이야기했지요. 선악과, 생명나무가 사람보다 우선이라고. “아이고, 요 이쁜 거 생명나무, 선악과나무” 이렇게 이야기하지, “아이고, 이쁜 거 인간”이렇지는 않거든요. 정신이 미친 부모가 장난감을 사왔다 말이지요. 브라우니 인형을 사왔다 합시다. 그러니까 아들은 오해한 거죠. ‘엄마가 나를 너무 이뻐해서 개 인형을 사줬구나!’ 이렇게 오해를 한 거예요. 그런데 개 인형 사가지고 아들이 화나는 게 있어서 개보고 화풀이하고 때리니까 엄마가 완전히 돌았지요. “아이고, 불쌍한 내 개야. 왜 때려? 왜 때려? 집 나가!” 그게 창세기 3장 이야기에요. “니, 나가 생명나무 따먹으면 안 돼! 나가!” 우리가 생각했던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는 타락이후에 하나님을 생각하기 때문에 ‘설마 하나님이 직접 우리를 만들어 놨는데, 우리보다 더 귀한 게 있을까“ 이리 생각한 거예요. 성경에 보니까 오히려 그 생명나무가 뭐라고, 우리가 나무보다 못한 인간입니까? 나무가 뭐라고 나무 다칠까 싶어서 선악과나무과실 따먹고 다쳤다고 그것도 화나고, 생명나무도 다칠까봐 ”나가, 나가“ ”아니, 인간을 이렇게까지.“ ”니는 인간도 아니야. 흙이야.“ 스스로 하나님의 창조를 무효화시켜 버려요. 흙에서 인간을 창조했잖아요. 그걸 하나님이 화가 얼마나 났던지, 창조의 과정을 역행해 버려요. 다시 환원시켜 버립니다. 뒤로 돌아 갓! 흙아!
이름도 뭡니까? 흙, 아담. 너는 흙이니까 흙으로 돌아가라, 너는 아담이니까 아담으로 돌아가. 그러면 여자는? 여자는 남편에서 나왔기 때문에 여자도 역시 흙으로 돌아가는데 여자 이름은 생명이라고 해서 뭔가 하나님이 그냥 아무것도 건지지도 않고 에이~ 흙으로 돌아가라, 이게 아니고 흙으로 돌아가게 하면서 흙으로 돌아간 훼손된 창조의 영광을 약속이라는 뱀의 후손, 여자의 후손, 약속의 영광으로 이걸 바꿔치기 하면서 죽어가는 것을 재료로 해서 그걸 어제는 폐기물이라 했지요. 폐기물을 재료로 해서 약속의 영광을 돌출해내는 손해 보지 않는 장사를 주께서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손실되는 일이 없어요.
어쨌든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은 인간 위주가 아니었다는 것. 하나님은 인간 위주가 아니고 약속 위주였다는 것. 그게 신명기 9장에 나옵니다. 내가 이스라엘을 인도하고 지켜주고 보호해 주니까 너희들은 마치 너희가 잘나서 보호해 주는 줄 아는데, 그게 아니고 너희들은 목이 굳은 백성이고 죄 많은 인간이다. 하지만 너희들을 가지고 적들을 물리치고 보호해 주는 것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내린 하나님의 약속, 약속은 하나의 캡슐 같아요. 누가 들어 있게요? 예수님이 들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버지가 아들을 낳아서 아버지와 아들의 세계에 필요한 조치들을 해놓았는데 그 중에 하나가 인간이 만들어진 겁니다. 그리고 천사들도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5~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네가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뇨 또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든 천사가 저에게 경배할찌어다 말씀하시며 또 천사들에 관하여는 그는 그의 천사들을 바람으로, 그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시느니라 하셨으되“ 5절, 하나님께서 그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그리고 6절 끝에 보면, 하나님의 모든 천사가 그에게 경배하지요. 7절에 보세요. 천사들에 관하여 나와 있지요.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이여, 내가 성경 볼 테니까 나한테 복주세요.‘ 하는 그런 기분으로서 보다가 인간은 자꾸 안 나오고 빠지고 이 대목에서 자꾸 천사가 들어가니까 살짝 기분 나쁠 뻔 한다 말이지요. 아니 인간이 중요하지 왜 천사가 중요 하냐, 천사가 중요한 게 아니고 우리보다도 더 중요한 게 있으니 예수님이다 말이지요.
그러면 우리는 내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잊어야 하는 겁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일의 순서를 적어드릴게요. 성령이 우리를 찾아오게 되면, ①번째, 죄를 짓게 하고 ②번째, 그 지은 죄를 잊어라, 요구하게 되고 ③번째, 못 잊어서 잊는 방법을 만드는 죄를 짓게 하고 마지막으로 용서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모든 우리의 움직임을 통해서 죄를 생산해 냅니다. 그러면 사람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자꾸 선한 쪽으로 자기를 몰아가려고 하거든요. 그런데 내가 원치 않는 죄가 내부에서 자꾸 발생되잖아요. 선을 원하지만 나보다 더 센 괴물이 있어가지고 결국 죄를 짓게 하는 거예요. 성령께서. 율법을 보내던지 어떤 사태를 보내서.
우리는 선하고 싶은데 죄가 나오니까 자체적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거예요. 해결을 어떻게 합니까? 더 많은 의를 해서 선한 것을 해서 더 많은 의로 상쇄시키려는 그러한 시도를 하게 됩니다. 그걸 가지고 뭐라 하는가 하면, 지은 죄를 잊고 싶어 하는 거예요. 잊고 싶다고 또 성령이 요구하고.
죄를 잊어라, 죄를 지어라 하는 것보다 잊어라하는 게 더 무서운 명령이에요. 지를 지을 때는 무심코 짓지만, 지은 죄는 잊어지던가요? 안 잊혀 지지요. 그러니까 주께서 무리한 요구를 하는 거예요. “죄 지었나? 잊어라.” 무슨 수로 죄를 잊습니까? 이미 했는데. 20년 선한 생활하다가 단 한번 거짓말한 것은 그 다음 20년 동안 시효가 만료되지 않습니다. 틈만 나면 “니 20년 전에 거짓말했잖아.” 그 때부터 신뢰도가 확 떨어졌다. 뭘 해도 나 안 믿는다. 이런 식으로.
그걸 보상하고 잊으려고 명품사주고 잘해주고, 얻어먹는다고 잊어집니까? 그걸 못내 못 잊어서 상처가 됐던 걸 가지고 트라우마 라고 하지요. 정신적인 상처, 프로이드에 의하면. 주일 낮에 이런 설교가 있어요. 인생이라 하는 것은 유리창에 있는 먼지와 같아서 한번 비바람 불면 말끔히 다 씻겨내려 가잖아요. 그러니까 아무리 잘나도 비오면 다 없이 되고 해변 가에 글씨 썼다 했지요. 눈 그리고 코 그리고 입 그리고 점하나 까지 그렸지만 파도가 치면 싹 쓸려가지요. 그것처럼 우리도 내 죄지은 것을 싹 쓸어 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상처가 있어요.
성령께서는 상처를 냄으로 말미암아 다 모든 게 쓸려가도 상처는 안 쓸려가게 만드는 거, 니가 죄인이라는 사실, 마치 모래에 박혀있는 말뚝과 같아서 파도가 쳐서 딴 것은 쓸려가지만, 말뚝 근처에 한 나의 낙서는 쓸려가도 말뚝은 건재 하는 것처럼. 뭔가 깊이 있는 상처. 그 상처가 내 상처가 되면 안 되고 하나님과 아들과 함께 받은 상처가 될 때, 쓴 잔인데, 그럴 때는 사도바울이 내가 십자가와 같이 못 박혔다 해서 말뚝을 박아 둔 것이지요. 십자가와 못 박혀서 이제는 내가 죽이신 분이 당신입니다. 라는 그 말뚝, 실제로 사도 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 죽였고 또 그렇지 않더라도 예수님에 대해서 육신인 채로 아는 모든 사람은 예수님을 모독하게 돼요. 육체로 아니까. 고린도후서 5장 16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나는 옛날에는 예수님을 육체로 알았다.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모든 내 근거리부터 생각하서 해 뜨고 해 지는 것이 십자가에서 나온 은혜인 줄을 몰랐다 하는 거예요.
유대인들은 해 뜨고 해지고 비오고 하는 것을 노아의 은혜로 알았던 거예요. 그런데 노아한테 물어 보세요? 노아 할아버지, 당신의 은혜지요? 하면 노아가 뭐라 합니까? “장차 오실 예수님의 은혜입니다. 그 분이 십자가 지심입니다. 내가 드린 제사는 장차 오실 십자가를 앞당겨 보여주는 모형으로서 제사를 지냈습니다.” 이럴 거 아니겠습니까? 노아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것은 “아이고, 아브라함씨, 믿음 좋습니다. 어떻게 아들이삭을 바쳤습니까?” 하면 “그렇지요. 내가 아들이삭을 바쳐서 구원 받습니다.“ 이렇게 말하겠어요? 아브라함이. 우리 후대 사람은 창세기22장보고 ‘그래, 아브라함이 아들이삭을 바쳤더니만...’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아브라함은 누구를 기다립니까? 예수님 오기를 기다렸다가 보고 기뻐했다 했지요. 요한복음 8장에.
사람들은 지가 해석하면서 엉터리로 해석 하는지 모르겠어요. 제가 주일 낮에 설교한 것처럼 아브라함 같은 사람, 다윗 같은 사람, 일한 것도 없이 일을 아니할지라도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일을 아니하실지라도 경견치 않은 자를 일한 것도 없이 3종 세트 아닙니까? 구원의 3종 세트.
아브라함이 이삭 바치는 게 얼마나 큰일입니까? 큰일인데, 복음에 보면 그건 일을 한 거다? 안 한 거다? 일 안한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일 시킨 거예요. 참, 말 어렵다. 그렇지요? 실컷 일 해놓고 하는 말이 “주여, 저 일 안했습니다.” 라고 하는 거예요. 왜? 그게 자기의 상처가 되어야 될 일이기 때문에. 내 잘남을 보여줄 일이 아니고 이 일은 마땅히 나를 끌어내야 되고 뜯어내야 될 그 일을 한 거예요.
아브라함이 결국 일한 것은 “나는 일했다는 것을 저장하거나 실적을 누적할 자리조차도 나는 합당치 않습니다.” “나는 할 때마다 죄가 겹으로, 겹으로 양파껍질처럼 쌓여 있다는 것을 알아서 감히 그 입으로 내가 일 했다는 소리를 못 합니다.” 할 때 그게 믿음의 조상이에요. 믿음의 조상이라 하는 것은 그만큼 폐기물입니다. 아브라함처럼 자기를 폐기물로 여기지 아니하면 구원 못 받는다는 뜻입니다. 아들을 바칠 때, 아브라함은 실은 내가 버림받아야 된다는 사실, 이것은 오늘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버림받을 때, 그걸 보면서 사실은 내가 버림받아야 됩니다, 하고 믿는 사람 그게 바로 십자가에 있을 때, 백부장의 믿음이었습니다.
성경이 이렇게 두꺼워도 털어내고 떨어내고 뜯어내면 결국 남는 게 뭐냐 하면,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이게 진솔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벌거벗은 듯이 말끔하게 다 나옵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예수님의 그 십자가를 가지고 내가 전한 복음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이악한 세대에서 저주를 받으리라,
이 세대 자체가 그동안 가려왔던 거예요.
하나님과 아들사이를 가려왔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내가 아들이라고
마구 선전한다고 아들 되는 게 아니고
십자가 버림받음으로서
진짜 아들은 어두움의 세계에서는
어두움을 충분히 드러내는 식으로
억울하게 죽는 죽음으로서,
대신 죽는 죽음으로서
하나님의 언약을 완성시킨 겁니다.
여러분들이 잊어버릴까 다시 말할게요. 하나님의 아들이란 낳았다고 아들이 아니고 언약을 완성해야 아들입니다. 우리 인간과는 관계없는 거예요. 우리 인간세계는 아버지가 아들 낳으면 아들이 아들답지 않더라도 아들로 간주하잖아요. 그런데 하늘나라는 그게 통하지 않습니다. 아들로서 언약을 완성할 때, 아들 되는 이유가 비로소 그 때, 아버지가 아버지 값을 하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 본인이 아버지 되기 위해서 아들은 아들로서 언약을 완성해야 됩니다. 이게 바로 그동안 몰랐던 창세부터 비밀로 유지돼 왔던 그 비밀의 핵심입니다. 천기누설이에요.
그러니까 천사라 하는 것은 천사의 자존심을 위해서 천사가 있는 것이 아니고 천사는 전부 다 한 결 같이 고개 들고 한 곳을 보라고 천사 만든 거예요. 우리가 아는 천사라 하는 것은 착하다, 이쁘다, 그 정도잖아요. 그런데 하늘나라 진짜 천사는 한 곳만 쳐다본다고 천사에요. 누굴 쳐다보겠어요? 예수 그리스도를 쳐다보는 거예요.
이게 바로 6절에 보면, 하나님의 모든 천사가 저희에게 뭐한다? 경배한다. 그러니까 뭐냐, 천사처럼 돼라, 이 말입니다. 천사처럼 돼라하면 모두 나쁜 짓 안하고 착한 일하고 고운 것만 생각하고 아름다운 것만 생각하는 그런 것이 아니고 예수님만 쳐다보는 것이 천사에요. 물론 날개 있으면 날개 짓도 해가면서.
7절에 보면, “또 천사들에 관하여는 그는 그의 천사들을 바람으로, 그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시느니라 하셨으되” 이 말은 아들이 스스로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모든 천사를 관리 하에 두고 있다 이 말입니다. 우리가 성경 한 번 찾아봅시다. 요한복음 17장2절,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차사고, 비행기 사고, 애인을 죽이는, 남아프리카의 장애자 선수,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누가 손댔습니까? 예수님이 영생 줄자에게 영생 주기위해서 남아프리카에 그런 사건을 일으킨 거예요. 경찰관이 자기를 해고한 것에 동료경찰관과 간부 경찰관의 딸을 죽이고 그거 왜 일어나는가? 영생 받을 자에게 영생주기 위해서 저 멀리 태평양 건너 그런 일들을 일으킨 거예요.
미국에 있는 경찰관이 살해한 것과 예수님과 관련해서 논리를 연결시켜 볼까요? 요 구절이지요. 요한복음 17장 2절.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바시락~ 하는 풀잎 소리 하나도 영생 줄 자에게, 자기 백성입니다. 생명책 명단에 있는 백성에게 영생주기 위해서 풀잎소리와 아침이슬이 있게 하시는 겁니다. 그 모든 권한은 주님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풀잎에다 이슬을 만든 겁니다.
옷깃에 스치는 모든 바람, 그래서 히브리서 1장 7절에 보면, “천사를 바람으로” 하는데, 다른 말로 하면 천사의 모든 활동이 얼마나 생생한지 바람과 같다 이 말입니다. 바람이 시도 때도 없이 늘 상 불듯이 주께서 부리는 천사도 시도 때도 없이 잠도 안 자, 천사가 잠자는 거 봤습니까? 천사만 잠 안자는 게 아니에요. 40일 동안 안 잔사람 있어요. 불려가서 시내 산 에서. 밥도 안 먹고 물도 안마시고 거기서 뭐했어요? 혼자서 TV보고 책을 보고 혼자서 영화보고 혼자서 노래하고 울고불고 그런 거 했어요? 그냥 천사와 같이 누굴 쳐다봤어요? 그냥 하나님 쳐다보고 주님 쳐다본 거예요. 듬뿍 종합선물 안고 내려왔지요. 오다가 다 팽개쳤지만, 영생주기 위해서 온 그 언약을 스스로 돌 던져서 깨버렸잖아요. “니들이 영생을 받아, 니그 애비가 하나님이라고? 니 애비는 마귀야!” 언약이 있어줘야 우리 애비가 마귀라는 것을 아는 겁니다. 십자가 앞에 서야 우리가 버림받아야 될 마귀 자식이라는 것을 아는 거예요.
이걸 안다는 것은 아까 했잖아요. 성령이 하는 일을 알 때, 제일 마지막은 뭡니까? 용서가 되기 위해서 바로 우리가 이런 마귀 짓을 하는 거, 죄 지은 것을 잊으라 하니까 못 잊으니까 대신 뭐하느냐, 대신 착한 일을 많이 해서 나는 착한 의인이라고 행세하고 싶은 그건 것들, 그런 죄를 짓게 하시지요. 엎친 데 덮친 격이라 하지요. 죄 지은 것도 죄지만, 죄 지은 것을 의로 바꾸기 위해서 착한 일 노력하는 것도 뭐가 된다? 죄가 되는 거예요. 자기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도 범죄입니다. 왜냐, 자기가 절대자가 아니기 때문에. 이래 놓고 그 다음 마지막에 이거 없으면 안 되지요. “내가 너보고 용서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의 피보고 용서해 줄게.”
그것은 머리가 이미 예수님이기 때문에 몸에 붙어있는 뾰루지에 해당되는 우리들도 머리에 붙어있다는 이유 때문에 성령께서 그냥 방치하지 아니하시고 머리가 시키는 대로 그 말단 사지까지 가서 용서의 효과가 오는 겁니다. 이렇게 교회의 모임이나 행사할 때, 저도 많이 해봤는데 결혼식에 가서 주체해 놓고 선물줄 때, 항상 앞자리부터 주지를 않아요. 제일 끝에 말단에 있는 사람부터 선물을 줘야 안 놓치게 돼요. 앞에는 선물 받아갈 사람이기 때문에 이거는 결국 받아갈 사람이에요. 끝에 온 사람은 안주면 그만이고 하는 생각으로 오기 때문에 항상 끝부분부터 먼저 챙겨주는 거죠.
성령께서 우리가 아무리 멀리 있다 해도 주의용서는 용서의 선물은 빠지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모임에 있는 사람은 다 자기 자랑하는 게 아니고 받은 걸 자랑하죠. 받은 게 뭐라 했어요? 용서하심. 그걸 두자로 ‘교회’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교회의 감독자가 할 일은 뭐죠? “혹시 주님께 받은 거 내보세요.” 감독하는 거예요. 당신 솜씨 내어보라는 게 아니고 달란트 내놓으라는 소리가 아니라, “우리가 받은 도시락 있지요? 그거 한 번 들어보세요.” “예, 됐습니다. 됐습니다. 하나님께 영광돌리겠습니다.” 이게 로마서예요.
일 한 것도 없이, 일 아니하실지라도 경건도 없는데 그것 묻고 따지지 아니하고 이 순재 보험이라, 묻지도 따지지도 아니하고 그냥 용서라는 도시락을 줘버렸으니까 “니, 까먹었나?” “네, 잘 까먹었습니다.” 하는 거예요. 그 용서가 매일같이 용서되기 위해서 똑같이 우리는 뭡니까? 세상에 나가서 죄 짓게 하고 또 죄 지은 것을 잊으라하고 우리는 잊을 수가 없지요. 못 잊는다는 나름대로 자기체면 차린다고 죄 지은 게 부끄러우니까 의로 커버하려고 또 착한 짓을 해. 착한 짓~ 해서 욕 되게 얻어먹고.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8절 봅시다.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이리 되어 있지요. 8절에 보면, 하나님의 보좌에 관해서는 하나님의 보좌가 영영하다, 이게 아니고, 앞에 뭐가 나옵니까? ‘아들에 관하여는’ 해 놓고 뒤에 나오는 이야기가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이렇게 돼 있어요. 그러니까 아들은 뭔가 일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에요. 나, 아들이다! 해서 아들이 아니에요. 무슨 일을 해야 아들이에요.
그럼 아들이 하는 일은 주의 보좌가 영영히 만들어 내는 일을 하기 위해서 영원하지 않은 것을 만드시고 부수십니다. 그게 10절에 나와요.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이렇게 돼 있지요. 지금부터 이걸 설명하겠습니다. 난해하더라도 어렵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망한다는 말을 다른 말로 바꾸면, 현실적으로 바꾸면, 이렇게 돼요. 인간은 갈 데가 없어요. 갈 데가.
트루먼 쇼라는 영화가 있거든요. 인간을 태어날 때부터 생중계를 하는 거예요. 어떤 이가 태어나면서부터 생중계를 하는데 태어나는 그 무대가 가설무대로 인공적으로 만들어 놓은 무대예요. 저 바다도 사실은 차려 놓은 무대예요. 상당히 현실 고발을 이용하거든요. 유명한 영화인데. 인간은 진짜로 목적도 의미도 없이 산다는 것을 고발한 거예요. 갇혀 있는 거예요. 이걸 제가 갈 데가 없다. 이런 멘트를 끄집어내는 것은 아까 지하철역에서 어떤 70대 된 할아버지가 전화를 하면서 “야, 야, 요새 갈 데가 없다.” 나이 70쯤 되니까 갈 데가 없는 거예요. 모든 인간을 다 적용시켜 버리면 갈 데가 없는 게 왜냐 하면, 처음부터 일단은 갈 데가 없게 만들어졌어요.
그걸 자기 딴에는 몸체가 얼마 안 되니까 세상은 넓으니까 갈 데는 많은 줄 알았는데 인생을 70쯤 살아보니까 목포가도 뭐 하겠노? 좋다고 소고기 사먹겠지~ 제주도에 가봐야 소고기 사먹기밖에 안 해요. 유럽 가봐야 그 사는 인간들 아침마다 돈벌이하는 관광객 맞이하는 그 사업이나, TV봐도 똑같은 이야기예요. 스위스 호반에 가도 장사치들 와서 또 돈 빼먹으려하는 그거나 아프리카 정글에 가서 아직도 열대우림이 있구나! 하면 여기 입장료 얼마입니다. 하면 또 장사하는 그거나, 어디가도 돈! 돈! 전부다 모든 게 돈 버는 구석밖에 없어요. 금강산 관광도 마찬가지로 돈벌이에 지나지 않은 겁니다. 갈 데가 없는데, 갈 데가 있도록 만든 사람들이 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얘, 이제는 갈 데 많으니까 가봐라.” 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군대로 만들어버려요. 하나님의 군대라 하는 것은 지휘관이 없으면 갈 데가 없어요. 마찬가지예요.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사람도 갈 데가 없고, 하나님의 군대로 모집된 이스라엘도 갈 데가 없어요. 출애굽기 12장 41절 보면, “사백 삼십년이 마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 보세요. 이스라엘을 뭐라고 합니까? 여호와의 군대지요.
그렇다면 쉽게 설명해서 평소에 여행을 좋아하는 19살 젊은 장정이 있다 합시다. 지금 배낭여행 하려고 하는데 통지서가 왔네. 논산훈련소 1주일 내에 집합! 드디어 호출 왔어요. 그러면 여행을 취미로 하는 그 장정은 더 이상 여행을 못하고 갈 데가 없지요. 논산훈련소 밖으로는 갈 데가 없지요. 그런데 그 장정이 논산훈련소에서 훈련받아서 아프가니스탄 파견부대로 갔다할 때, 여행간 거예요? 그것은 자기가 원하지 않지만 어떤 자격으로? 개인의 배낭여행, 개인의 자격이 아니고 군대의 자격으로 가지요. 그러니까 제가 하는 말은 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군대가 되게 되면, 분명히 갈 데가 없고 막혔다고 여긴 것을 군대를 사용해서 주께서 일을 벌이면서 그 틈이 조금씩 벌어지면서 오! 갈 데 생겼네.‘ 라는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낸 작업에 그들이 동참된 겁니다.
그리고 그 많은 도시에 우리가 있을 곳은 점점 무너지는 겁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만들었지요. 하지만 그것은 영원한 보좌를 위해서 만들어졌다가도 완전히 멸망해야 될 것으로 만들어진 거예요. 그런데 멸망하는 무너져 가는 그 선반 위에 우리가 놓여 있다면 사실은 우리는 뺑뺑이 돌고 갈 데가 없어요. 갈 데가 없는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뭐로 만들었다? 하나님의 군대로 만드니까 군대 만들기 전에는 갈 데가 없다고 여겼는데, 세상에 그 새로운 세계가 군대가 되어서 주의 이름이란 이름의 지휘관이 이끄시는데 보니까 갈 곳이 생겼어요.
분명히 홍해바다는 사람이 들어가게 되면 죽게 돼 있어요. 물고기가 아닌 이상, 그런데 하나님의 군대가 나와 보니까 세상에, 홍해바다가 갈라져서 듣지도 보지도 못한 생각도 못한 바다 속의 땅을 밟을 줄이야, 그리고 건너가서 비로소 하나님의 새 하늘과 새 땅이 있다는 사실, 젖과 꿀이 있다는 사실, 그럴 때 그 사람은 하나님의 군대가 되는 겁니다.
디모데후서2장4절, “하나님의 군사로 모집된 사람은 자기 일에 얽매이지 않는다.” 좋은 게 있는데 뭐하려고 그것가지고 신경 쓰느냐, 이 말입니다. 아옹다옹 갈 데도 없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그것보다도 지금 갈 곳을 마련해준 그 쪽 세계가 족히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좋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군대라 하는 것은, 하나님 군대의 무기가 뭐냐, “나, 갈 곳 있거든!” 이게 무기예요.
“그래, 그래, 니 잘 먹고 잘살고 이명희가 또 고소해서 불복해서 또 고소해고 유산 내놓으라고 동생보고 또 고소했거든요. 그래, 형제간 잘 먹고 잘 살고 인지대 5백만원 내라, 다른 사람 세금 받아 잘 살자, 대법원까지 가서 싸워라, 하지만 우리는 갈 곳이 있거든! ”나도 갈란다.“ ”일단, 군대가 돼야 돼” 군대 같으면 하나님의 언약을 받아야 돼요. 아브라함이 언약을 받아야 만왕의 천사가 왔고 그 때 이름이 이스라엘의 싸우는 나라로 전환됩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하면, 하나님의 군대의 등장은 갈 곳이 없는 줄 알고, 너희들만 빼줄게. 그렇게 되는 겁니다. 소돔과 고모라에서의 하나님의 군대는 누구지요? 롯과 그 두 딸이었어요. 그런데 군대라고 여기고 따라온 사람이 있었지요. 롯의 처. 롯의 처는 군인인 줄 알았는데 군인이 아니었어요. 뒤돌아 봤지요. 언약을 위반했다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마지막 때, 제자들 보고 “롯의 처를 생각하라.” 사실은 롯의 처가 남편보고 따라오려고 했지만 뒤에서 머리가 길었는지, 당기는 것이 씹던 껌에 걸린 것 같아요. 머리에 껌 붙은 모양이라, 소돔과 고모라의 제품에 껌을 붙여가지고 뒤돌아보지 않을 수밖에 없었어요.
아까 너희 애비는 악마다, 했잖아요. 우리는 아브라함 자손인데 우리는 죄의 아들이 아니다, 하니까 혈 육적으로 백날 해야 그것은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말이에요. 구약에서는 혈육적인 모임이 아브라함 혈통이 군대처럼 보이지만, 그건 하나의 모형이고 진짜 군대는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언약소리 듣고 모여라! 할 때, 듣고 몽유병환자처럼 옷을 주섬, 주섬 입고 바깥에 기어나가서 언약의 집합, 너도 몽유병, 나도 몽유병처럼 주의 언약소리 듣고 모일 때, 그게 군대입니다.
십자가의 음성을 듣고 모일 때, ‘하나님의 피로 세운 교회’라 했어요. 하나님의 피가 비밀이고 이게 호출 소식입니다. 십자가로 모여든 사람들, 비밀결사단체들, 그게 바로 교회입니다. 10분 쉬고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