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강-고전 13장 1-3(사랑의 은사)160131-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3장 1-3절입니다. 신약성경 278페이지입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여기 나오는 방언, 예언, 지식, 믿음, 구제, 이 이야기는 12장 끝에 나오는 하나님의 은사인데 이 은사는 사도, 교사, 이렇게 전부 다 말씀과 관련되어 있거든요. 그 다음에 병 고치는 은사, 봉사지요, 그리고 통역, 은사가 이런 일들을 일으킬 때에 사람들은 이런 일을 하는 것을 통해서 자신이 주의 종이고, 하나님의 성도고, 그리스도의 교회고,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라고 자부가 돼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들어오게 되면 그것으로 결판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네가 방언을 하고, 교사가 되고, 사도가 되고, 남을 돕고, 병 고치는 능력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천국 가는 백성이라고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12장 마지막에 보면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그것은 바로 사랑이라는 겁니다. 방금 이야기한 것을 정리하게 되면 사랑 앞에서는, 내가 이것을 했다, 내가 병을 고쳤다, 내가 방언했다, 내가 사도다, 내가 교사를 한다, 라는 것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사랑이 없을 경우에는 내가 했다, 내가 꺾꽂이했다, 내가 봉사했다, 내가 선교했다, 내가 헌금했다, 내가 충성했다, 내가 교회 세웠다, 내가 설교한다, 이것이 성립되는데 실컷 해봐야 그것은 일종의 업소지요. 교회라는 이름의 업소에 불과한 겁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거든요.
사랑의 은사가 주어지게 되면 2장의 끝의 말씀이 고백이 되어야 됩니다. 그것도 공통적으로.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가 나와야 돼요.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가 안 나온다면 실컷 봉사하고 헌금하고 전도했는데 나는 그것을 통해서 아무것도 아니었음이 들통 났다는 고백이 나오지 않으면 천국 못갑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몸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교회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왜 그런가? 내가 열심히 했고, 내가 희생했고, 내가 아팠는데, 내가 남에게 구제하고 고아원 방문해서 주의 이름으로 봉사했는데, 빵도 사왔는데, 분명히 내가 한 것이 눈에 보이는데 왜 내가 한 것이 아닌가?
그게 눈에 보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겁니다. 아무리 뭘 해도 마지막 시선이 부메랑처럼 나에게 돌아오는 시선이라면 그것은 자기에게서 나갔지 하나님에게서 온 은총의 결과물은 아닙니다. 소위 능력이 있다는 것, 병 고치는 능력이 있다는 이것은 굉장히 위험한 말이에요. 마태복음 7장에서 “내가 주의 종으로써 이런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병도 고치고 전도하고 목사로써 복음을 전하고 목회를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너무 단호합니다. 너무 냉철해요. “누구지 너는? 너 누구야? 나는 너 몰라. 너는 내 이름을 빙자해서 장사해먹었지 나는 너를 몰라.”
교회라는 이름의 장사를 해먹은 거예요. 아무 상관이 없는 겁니다. 왜 그것이 먹혀들었는가 하면, 그것이 나한테도 눈에 보이고 다른 사람한테도 눈이 보이니까, 그래서 사람 숫자가 모이고 교회라는 간판이 걸리니까 ‘아, 하나님이 그렇게 했나보다.’라고 오해를 유발시킨 겁니다. ‘하나님께서 저렇게 많은 사람이 모이게 한 모양이다.’ 본인들이 그렇게 주장하니까, 주의 능력으로 모였다고 주장하니까 그렇게 모인 모양이구나, 서로가 서로에게 사기 친 겁니다. 서로 속인 거예요.
정말 어떤 사람이 주의 종이라면 “여러분이 우리교회에 이렇게 보이고, 헌금은 얼마고, 이렇게 예배당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이거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것이 우리를 구원하지를 않습니다.”라는 이야기가 매주 터져 나와야 돼요. 집회 때마다 매주 나와야 돼요. 보이기 때문에 위험한 거예요. 그러면 그 이유가 뭐냐? 왜 그렇게 사도바울 이 사람이 목회를 하는 사람인지 목회를 방해를 하는 사람인지 모르겠는데, “잘한다, 잘한다.” 이렇게 격려하고 독려를 해야 할 텐데 아무것도 아니라고 칼 들고 설쳐대는 이유가 있어요.
그게 뭐냐? 12장 27절에 보면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라고 되어 있거든요. 이 그리스도의 몸 말고 가짜 몸이 있는데 그 몸은 우리 자신의 몸이 되는 겁니다.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와 충돌을 일으키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 주님이 하셨는지 아니면 만져지는 내가 했는지의 싸움, 내가 해서 이룬 교회는 그냥 가짜인 정도가 아니고 진짜 교회를 핍박하고 공격하는 사탄의 앞잡이가 되는 겁니다. 내가 철야기도해서 세운 교회, 내가 돈대고 부동산 대서 만든 이 교회, 이것은 나 아니면 생겨나지 않는 교회, 내가 헌금해서 개척교회 했기 때문에 내 공로를 인정하지 않으면 헌금 돌려줘.
그리스도의 몸이라 하는 것은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 한 번이 아니라 계속해서 진행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가? 그리스도의 몸, 이게 교회인데요. 이 교회가 어디서부터인가? 구약 때부터 있는 겁니다. 구약에서의 그 바탕, 기초가 뭐냐 하면,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하는 겁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의 반대가 뭐냐? “하나님을 믿읍시다.”입니다. 놀라운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믿읍시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안 믿었습니까? 이제부터 믿읍시다.” 그게 바로 우상이에요. 하나님 믿어서 뭐하려고? 누구 좋은 낙 보려고? 누구 이익 보려고?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나님이 요구한 적이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들은 자기가 하나님을 만들어내게 되어 있어요. 자기의 이상적인 모습을 하나님이라고 간주해놓고 거기다가 자기의 모든 정성과 성의표시를 하고 심지어 귀한 것을 다 바쳐가면서 자기를 위한 자기 신을 스스로 만들 줄 아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의 진짜 하나님은 “너희들이 평소에 늘 하나님을 믿어왔다……” 심지어 지옥에 간 가인도 하나님을 만들고 믿었어요. “……그 하나님을 아는데 그 하나님 말고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했어요.
이 말은 뭐냐? 네가 좋아하는 하나님을 네가 포기할 마음준비가 되지 아니하면 나를 믿을 수 없다는 것, 진짜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는 겁니다. 내가 믿어서 이익 되는 그런 하나님을 내팽개치지 아니하면 진짜 하나님은 꿈도 꾸지 말라는 이야기에요. 그동안 교회 왜 왔습니까? 이익 보려고 왔지 손해 보려고 온 게 아니잖아요. 그러면 전부 다 교회라는 간판이 있더라도 이것은 절이고 우상입니다. 불교에요.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때부터 오해를 하기 시작한 거예요. ‘아, 다른 민족의 신의 이름은 여호와가 아닌데 우리 민족 신은 여호와라는 이름을 가진 신이기 때문에 여호와를 부르면서 시키는 대로 율법 지키고 시키는 대로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겠지.’라고 오해를 한 겁니다. 요즘 말로 번역하면 ‘교회라는 곳은 예수 믿는 곳이다. 예수 믿고, 예수님 주신 말씀대로 바르게 살고, 인간이 바뀌게 되면 나중에 천국에 가겠지.’라는 오해와 옛날 구약 선배들이 한 오해와 똑같은 오해입니다.
예수 믿어서 뭐하려고? 왜 믿는데? 예수 믿어서, 또는 하나님을 믿어서 이익 보겠다는 어떤 대상이 따로 있어버리면 그게 우상이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요.”가 그 가운데서는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역시 하나님이 나의 가치를 알아주는구먼.” 그것은 명백한 가짜입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니까 그들은 열심히 지켰습니다. 지켰는데 그 결과가 뭐냐? 꽝이었습니다. 꽝, 하니까 생각이 납니다. 어릴 때 문방구에서 설날 받은 용돈으로 풍선 떼기 하잖아요. 해보면 대부분 꽝이에요.
우리 인생이 마찬가지입니다. 해보면 대부분 꽝, 이에요. 전부 다 자기를 위해서 자기가 결정내리고 선택한 것밖에 없기 때문에. 결혼, 취직, 모든 것이 다 누구 좋아서? 나 좋으라고 결혼했고 나 좋으라고 취직했고, 다 그런 겁니다. 기도를 빡세게 하지요. “주여, 어느 길로 가야합니~까?” 백날 해 봐야 결국 누구 좋으라고? 자기 좋으라고 한 선택일 뿐이었다는 그 말이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었는데 꽝이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멸망당했습니다. 그들은 자기 쪽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열심과 정성을 다해서, 순전한 마음으로, 진짜 어린애 같은 믿음으로 안 믿었기에 이런 현상이 생겼다고 스스로 착각들을 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빡세게 기도 안 해서 그렇다, 헌금을 적게 해서 그렇다, 이렇게 생각한 거예요. 교회 봉사 더욱 더 안 해서 이렇게 망했다고, 전부 다 그런 사기에 다 넘어간 거예요.
그런데 신약 때 와서 하나님께서 스스로 교회 만들 때 유대인들을 사용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시편 118편 22절의 말씀을 성취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버림받는 그 집단만이 그리스도의 몸이 되고 교회가 된다는 겁니다. 버림받으라는 겁니다. 왜? 예수님도 아버지에게 버림받았어요. 똑같이 네가 믿는 하나님한테 버림받아야 되고 진짜 하나님한테도 버림받아야 되고,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면서도 뭔가 가치 있다고 껄떡대는 것, 그거 버림받는 과정을, 그 코스를 밟아야 돼요.
버림받아야 돼요. “나는 너를 인간으로 생각한 적이 없다. 네가 어디를 봐서 인간인데?”라는 소리를 들어야 돼요. 아, 내가 죽는 이유가 죄 값으로 죽는다는 사실을, 늙어서 힘 빠져서 죽는 것이 아니고 죄 값으로 죽는다는 사실을, 주님의 거룩한 눈길로 보시기에 마땅히 망해야 된다는 사실을, 안 망하려고 아등바등 애쓰지 마시고, 안 망하려고 교회오지 마시고, 교회 나오나 안 나오나 인간은 처음부터 망하게 되어 있다는 이 지당한 결과인 것이 수용이 돼야 돼요. 예수님도 망했는데 우리가 뭔데 안 망합니까? 우리가 예수님보다 나은 것이 뭐가 있다고요.
그래서 진짜 하나님께서 교회를 만드는데 어떻게 만드는가?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인간들이 자기 가치 있는 집을 짓는다고 하면서 “에이 이런 것 쓸데 없어.” 하고 갖다 버린 것이 있을 거예요. 그 버린 돌을 주워서 하나님께서 그것으로 성전의 모퉁이의 머릿돌로 만드신 겁니다. 그러니 이 코스를 밟아야 돼요. 사람에게 버림받아야 돼요. “너는 아들도 아니야. 너는 아버지도 아니고 엄마도 아니야. 너는 삼촌도 아니야.” 이렇게 버림받아야 돼요. 사람 취급을 받지 말아야 되는 겁니다.
왜 그런가 하면, 처음부터 우리는 사람취급 받을 수 없는 그런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알아서 우리 자신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습니다.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는 그 작업, 하나님께 버림받는 그 작업,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마지막 사랑하는 대상이 나 자신이기 때문에 나를 포기한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가 행하지 못하는 것을 어떻게 행하느냐 하면, 율법을 가지고 행하시는데 로마서 3장 21절에 보면,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하나님의 법 말고, 법 지켜서 의롭게 되어서 구원받는 그 길 말고 다른 길이 나타났으니, 라고 되어 있어요. 실컷 십계명 주고, 말씀 실컷 주고 난 뒤에, 지키라, 지키라, 지키라고 주고 난 뒤에 이걸 지키려고 덤벼들게 되면 “네가 지켜도 결국에는 못 지키는 것만 줬다. 나는 네가 어떻게 나오는가를 봤다. 네가 지켜서 의롭게 되는 것처럼 오해를 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율법을 줘 놓고는 이제는 그 율법 외에 다른 의를 준” 겁니다. 여기서 ‘외’라는 것은 뭐냐? 그 중심이 드러나면 그 나머지는 자동적으로 폐기되는 것을 말해요.
“십계명 지켜서 구원받을까요, 아니면 십계명 안 지켜서 구원받는 겁니까?”라고 할 때 하나님께서는 “율법 외에 한 의” 그러니까 십계명 지키면 복 받고 안 지키면 저주받는다는 그러한 범위……, 오늘 설교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입니다. 지키면 복 받고 안 지키면 저주받는다는 그러한 범위가 날라 가버려요. “지키든 안지키든 상관없어.” 이렇게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율법을 지켜도 문제고 안 지켜도 문제가 되는 것은, 율법을 지키면 내가 지킨 것이 되고 율법을 안 지키게 되면 내가 안 지킨 것이 돼요.
지키나 안지키나 여전히 자기 자신이 자기에게 중요한 존재가 되고 마니까 주께서는 그걸 갖다 버리라는 겁니다. 설교 이 쯤 되면 벌써 잊었지요. 13장 2절 끝에,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가 성사되려면 “나는 십계명도 못 지킨 죄인입니다.” 그것도 갖다 버리세요. “교회 나온 지가 수십 년인데 담배도 하나 못 끊고……” 그것도 갖다 버리세요. 그것도 의미 없어요. “제가 이렇게 십계명 잘 지킵니다.” 그것도 의미 없어요. 그것 말고, 그것을 통째로 분리수거 쓰레기통에 갖다 버리고, 그것 말고 현장에 나타난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네가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보낸 자, 메시아, 중보자가 알아서 다 한다.” 이게 복음입니다. 이게 복음이에요. 제가 세상에 대해서 “성경말씀을 지키지 마세요.” 할 때 화를 내는 사람이 굉장히 많아요. “성경 말씀에 ‘하라’고 엄연히 나와 있는데 하나님도 아닌 네가 하지 말라니?” 하고 화를 내는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은 성경말씀에 관심 있는 것처럼 보이지요. 관심 있는 척 할 뿐이고 사실은 그게 아닙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과 미련을 아직도 버리지 못한 티를 확 내버린 겁니다.
주께서 마태복음 16장에 베드로와 이야기하면서 “베드로야, 너는 한 돌, 반석이 되어라.” 그 돌이 어떤 과정을 거치느냐 하면, 예수님과 똑같은 과정을 걸어요. 그 반석, 베드로가 주님을 배반합니다. 배반했기에 그게 교회의 반석이 되는 겁니다. 주님을 배반하고 주님이 싫어서 도망갔기에 비로소 참다운 교회의 기초에 합류할 수 있는 돌이 되는 거예요. 왜 주님을 배반하게 되었는가? 결국은 아무리 주여, 주여, 하나님, 삼위일체, 백날 해도 결국 인간이 마지막 쥐고 있는 것은 자기 자신 외에는 아무것도 쥐고 있지 않아요. 나한테는 내가 전부에요. 나보다 더 날 사랑하는 사람은 없어요.
이런 인간이 천국 가봐야 자기 잘났다 할 것이 뻔하고 천국 가서도 촛불집회 할 것이 뻔한데. “나는 왔는데 내 딸은 왜 안 옵니까?” 이런 시위할 것이 뻔한데. 가짜거든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네 몸 말고 딴 몸.” 하니까 “무슨 몸이요?” “그리스도의 몸” 그리스도의 몸만 천국가지 네 몸은 천국에 못가는 겁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몸은 어디에 있습니까? 제가 등록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등록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몸은 내 몸이 아무것도 아님을 아는 어떤 능력이 와야 돼요. 그런 어떤 힘을 받아야 돼요. 내가 개뿔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그러한 하나님의 은총이 와야 됩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나를 이제는 놓아주세요. 내가 나를 버리세요. 그거 쥐고 있어 봐야 똥 됩니다. 그 나를 버리세요. 왜 사도바울이 오늘 사랑을 언급하면서 사랑은 이것도 아니요, 저것도 아니요, 라는 말을 왜 했느냐 하면, 지독한 나의 사랑, 이런 가짜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그래요. 선교 했다고 자랑 질하고, 방언 한다고 자랑 질하고, 신학박사 했다고 자랑 질 하고, 신학박사가 없으니 맘대로 말합니다만. 구제한다고 자랑 질하고 교회 충성한다고 자랑 질하고, 이런 인간들, 가짜들이 너무 많아서 그래요. 교회가 누가 많이 내는가를 시합을 시키는 거예요.
헌금해서 부자가 되었다 한들 그게 누구를 위한 부자입니까? 자기 자랑 질 밖에 안돼요. 1년에 전도를 한 백 명 했다. 누구를 위한 전도겠어요? 결국 그 교회 자기지분을 많이 확보해서 집사에서 장로로 고속승진하려는 노림수 때문에 그런 거예요. 인간의 사랑은 천국에 못갑니다. 그런데 인간의 사랑은 부메랑처럼 자기에게 다시 돌아올 사랑밖에는 나오지를 않아요. 이 사랑은 한계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사랑은 대상이 있고 시선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시선이 있고 대상이 있기 때문에 자꾸만 바라보면 미워져요.
평생을 살면서 제가 느낀 거예요. 뭐든지 아무리 좋은 것도 자꾸만 바라보면 미워져요. 음식도 자꾸 먹으면 맛이 없는 것처럼. 같은 음식 자꾸 먹으면 맛없거든요. 같은 자기 아내나 남편을 자꾸 보게 되면 미워진다니까요? “좀 알아서 다른데 가줘. 언제까지 내가 너만 바라보고 살겠나?” 처음 첫 사랑은 풋풋해요. 하지만 얼마 안가서 시들해집니다. 도파민이 어쩌고 세로토닌이 어쩌고들 하는데. 자꾸만 바라보면 뭐든지 미워지거든요. 그게 왜냐하면, 내가 변동이 되었어요. 내 욕망, 내 사랑이 이제는 너로 만족하지 못해서 그래요. ‘너 말고 다른 사람으로 알아서 좀 바꿔줘.’ 그런데 저쪽도 마찬가지에요. 심지어 자식도 마찬가지에요. 자식이 두 살, 세 살, 네 살까지는 손에 잡혀요. 그런데 다섯 살부터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요. 자식이 내 손에 쥐어지지 않아요. 다 빠져나가요.
부부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은근히 손에 쥐었다고 생각하지만 아내가 애 낳고 난 뒤에는 다 빠져나가지요. 남편도 마찬가지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하더니만 이제는 시키는 대로 안하고 다 빠져나가요. 그래서 인간들의 자기사랑은 한계가 있는데 기껏 그런 사랑가지고 남기고자 하는 것이 뭐냐? 그나마 그것가지고 아름다운 추억이나 만들자고 나와요. 결국은 추억이 아름다워. 인생이 뭐냐? ‘무정부루스’에요. 딱 그 말이 맞아요.
자꾸만 바라보면 미워지겠지
믿어왔던 당신이기에
쏟아져 흐르는 눈물 가슴에 안고
돌아서 오는 이 발길
사랑했던 기억들이 갈길을 막아서지만
추억이 아름답게 남아 있을 때
미련 없이 가야지
결국 만났던 모든 사람은 내 아름다운 추억, 내 연대기, 내 아름다운 추억을 형성하기 위한 재료에 불과한 겁니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 내가 만났던 모든 것들은. 나의 선택의 옳았음, 나의 결정이 반듯했음, 자기영광과 자기를 신으로 추앙하기 위한 재료들로 한평생을 편집합니다. 남는 것은 추억밖에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모든 인간의 사랑과 하나님사랑은 미움부터 출발해야 돼요. 율법 외에 한 의가 거기서 나온 겁니다. 내가 미워져야 돼요.
요한복음 12장 25절에 보면,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성경에 분명히 나옵니다. 남 미워하지 말고 자기와 헤어지라는 거예요. 징글징글한 자기 자신과 헤어져야 돼요. 사람이 자기 자신과 헤어지지 아니하면 항상 하나님 앞에 나와서 징징댑니다. 기도하면서 징징대고 “주여, 주여……” 징징. 주님께서 새벽기도 나온 사람보고 물을 거예요. 성령 받은 사람 같으면 그 사람에게 “너는 뭐 때문에 이렇게 새벽마다 잠도 안자고 이렇게 나와서 이러느냐?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데? 네가 뭘 원하는데? 왜 이렇게 징징대는데? 햇빛 주고 달 주고 다 줬잖아. 그런데 왜 징징대는데?” 에베레스트 산에 올라가 보세요. 산소가 얼마나 귀한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산소 같은 사람으로 만들어놓았는데 우리는 완전히 탄소 같은 사람이 되어버렸어요. 시커먼 인간이 되었어요. 마태복음 10장에도 마찬가지입니다. 35절에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마치 자기 집안 식구가 원수인 것처럼 그렇게 해놓고 사실은 그게 원수가 아니고 조금 더 들어가 보면 자기 자신이 나의 원수라는 거예요. 내가 나의 갈 길을 가로 막아요. 아름다운 추억에만 목매고 있는 내가 나를 건지려는 주님의 사랑을 내가 가로막는다니까요? 저돌적으로 반발합니다. 주께서 내 인생 이렇게 조져놓았으니 책임지라고.
생각하는 것이 전부 다 그거예요. ‘신이 있다면 나를 이렇게 망칠 리가 없다. 신이 있다면 나한테 한소리 들어야 해.’ 이런 식으로. 신과 대결상태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게 바로 옛날 구약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믿으면서 늘 그런 식으로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우리를 도와주세요.” 하는 식으로 자기를 위한 여호와 하나님, 우상이지요, 자기를 위한 여호와를 섬겼던 겁니다. 베드로가 반석이 되고 반석이 돌이 되고 돌이 교회가 되고 교회가 새로운 몸이 되고 몸에서 은사가 나오거든요.
그 은사 중에 최종은사가 뭐냐? 사랑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 사랑을 한마디로 하면, 오늘 제일 중요한 대목인데요, 그 사랑이 어디에 있느냐? 우리는 잡을 수 없어요. 그런데 그 사랑이 등장하게 되면 나 외에 다른 분이 늘 같이 동반해서 나온다면 사랑받은 겁니다. “주님이여, 제가 행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지요.”라고 나 외에 다른 분, 예수님이지요, 나 외에 예수님이 나온다면 사랑받은 겁니다. 이 일은 제가 한 것이 아니고, 나 외에 다른 분. 왜냐하면 나는 12장 2절의 말씀처럼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아무것도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께서 사랑을 주셨기 때문에 이 사랑은 내가 소지하는 사랑, 내가 소유하는 사랑이 될 수 없어요.
성도 자체가 사랑이어야 돼요. 사랑을 가지면 안 되고 너 자신이 사랑이 되어야 된다니까요. 그리고 사랑이 된 사람 속을 들여다보면 거기는 뭐가 남아 있는가? ‘아무것도 아님’만 들어 있어요. 영어로 NOTHING,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런데 그렇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이 사실을 우리가 안다고 할지라도 사랑이 은사기 때문에 은사는 계속해서 우리에게 덮쳐야 되거든요. 은사를 소지하지 말라고 했는데 우리는 돌아서면 ‘하나님이 주신 아가페사랑을 내가 받았다.’ 이렇게 소지하려고 해버려요. 그렇게 소지하게 되면 어떤 부작용이 생기는가? 그 부작용을 제가 한 글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하나의 글을 읽어드릴 텐데 이 글이 여러분이라는 생각이 들거든 이것은 잘못된 사랑을 소지하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이것은 잘못된, 엉터리 사랑이에요.
“사랑이란 그 말은 못해도 먼 곳에서 이렇게 바라만 보아도 모든 걸 줄 수 있어서 사랑 할 수 있어서 난 슬퍼도 행복 합니다.” 이거 가짜 사랑이에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도 그대 웃어준다면 난 행복할 텐데 사랑은 주는 거니까 그저 주는 거니까 난 슬퍼도 행복합니다.” 이거 가짜 사랑이에요. 그런 사랑 없습니다. 이 글은 이 승철이 부른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의 가사인데 이 ‘또’를 빼버려야 돼요. 아예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이게 가짜 사랑이에요. 퍼주는 사랑, 밥 퍼주기, 이게 전부 다 사기입니다.
진짜 사랑은 뭐냐? “나는 나만 챙기고, 나만 사랑하고, 누가 죽든 말든 나는 나뿐입니다. 그래서 나는 NOTHING!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될 때 진짜 사랑받은 사람이에요. 지금 “아멘!” 하니까 겁이 납니다. 3절에 보세요.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찌라도” 여기서 멈춰버리면 가짜사랑이거든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이게 사랑의 끝이 아니에요. 이것은 “사랑이 없으면”이라는 거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그거 가짜입니다.
“그러면 목사님, 우리가 진짜 사랑은 언제 가집니까?” 진짜 사랑은 가지는 게 아니에요. 저쪽에서 박살을 내는 것이기 때문에 가질 생각 하지 말고 얻어맞으면 돼요. 얻어맞으면 되고 또 나는 뭐하면 되는가? 나는 늘 가짜 사랑의 표상으로서 살면 되는 겁니다. 참 쉽지요? 우리는 평소에 하는 것이 나밖에 모르잖아요. 천국은 이렇게 쉽게 가는 거예요. “나는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내 모든 것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헤헤! 이게 가짜거든요.” 이렇게 뒤에 덧붙이면 돼요. “당신과 결혼한다면 내가 당신 손에 물을 묻히지 않게 하겠습니다.” 해 놓고 “헤헤, 이게 가짜거든요. 당신을 꾀이기 위한 수법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걸 언급하는 거예요. 왜? 인간은 거기서 못 벗어나기 때문에. 이것을 성경은 이렇게 표현해요.
로마서 5장 14절에 보면, “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다른 말로 하면 아담은 마지막 아담 예수님의 표상이라고 되어 있어요. 오늘 전 용렬 목사님의 설교 문을 보니 참 좋은 예가 나왔어요. 송편은 추석의 표상이라고 되어 있어요. 아주 좋은 표현을 했어요. 송편은 추석의 표상이다. 그러면 나는? 죄의 표상이 되는 겁니다. 가짜 사랑으로 평생 계속 갈 수밖에 없는 죄인의 표상으로서, 하늘나라 송편으로서 우리를 채택한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경우라도, 성경을 천 번 만 번을 봐도 절대로 우리는 예수님을 대신 할 수가 없다는 것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라도 예수님을 대신 할 수가 없어요.
오늘 낮에 이야기하는데 총신 시험 쳤다가 떨어졌다는 거예요. 만약에 되었으면 좀 더 메시아적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사람이 자기감정을 이기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죄란 이성적으로 다스릴 수 있는 것이 죄가 아닙니다. 내가 아무리 정신 차리고 “하나님이여, 다시는, 내가 다시 이런 짓을 하면 내가 개입니다. 내가 다시 이런 짓을 하면 자살할 거예요. 정말 이런 짓은 안하겠습니다.” 천 번을 다시 반복해도 그 짓 또 하게 되어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은 절대로 달라지지 않아요. 왜? 영원한 송편, 영원한 하늘나라의 송편이 되어야 하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는데 왜 우리하고 협의하지 않고 율법 외에, 율법을 잘 지키고자 하는 우리를 제쳐놓고 왜 우리 말고 예수님을 대신 희생함으로서 우리를 구원하는 이유는 살아가면서 한 번이 아니고 두고두고 계속 나와야 돼요. 끝없이 계속 나와야 됩니다. 이만하면 성도되었겠지, 이만하면 인간되었겠지, 그런 것을 기대하는 자체가 잘못된 겁니다. 주님의 사랑과 우리를 엮으려고 생각하지 마세요. 절대로 엮여지지 않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은사로, 선물로 그냥 주어지는 것이지 우리가 그걸 모방하거나 흉내 낼 수가 없는 겁니다. 주께서 우리를 아예 죄 짓는 전문가, 죄 짓는 기계로 만들었어요. 그래서 주께서 하신 말씀이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거예요. 아까 장로님 기도하신 것처럼 탕자를 기다리는 거예요. 탕자가 집에 온다고 면도하고 이발하고, 그럴 필요 없어요. 그냥 오세요. 죄지은 상태 그냥 오라고. 더 보태지 말고요. 자기를 꾸미지 말고. 이렇게 꾸미나 저렇게 꾸미나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 개나 소나 똑같은데 꾸민다고 해서 자기만 사랑하는 그 속성이 어디 가겠습니까? 맨 그 안에 들어 있는데.
신학교 가고, 목사 된다고 해서 자기 사랑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잖아요. 세상에 되어지는 모든 것은 주께서 손가락질 하도록, “너는 입이 백 개라도 죄인이야.” 그걸 지목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그런 사건들을 일으킵니다. 환란과 곤고와 핍박, 그 가운데서 우리가 로마서 8장에서 아는 것은 주님의 사랑, 환란과 곤고와 핍박가운데서 끊어지지 않는 것은 주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내 것이 아니고 관계, 사랑은 관계입니다. 주님이 나로 하여금 더욱 더 죄인되게 하시는 그 고마운 관계가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받으면 받을수록 우리는 고린도전서 13장 2절 끝의 말씀이 자꾸 다시 나오지요.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이게 자꾸 반복이 되는 겁니다. 제 아내가 외국에서 마트에서 물건을 사는데 독일 말을 못하니까 아는 영어를 쓴 거예요. “FISH, 오백유로?” 이렇게 한 거예요. 물고기를 가리키면서 그렇게 한 거예요. 물고기를 영어로 한 것은 알아들었는데 오백유로, 이 말은 못 알아들은 거예요. ‘오백’이 한국말이었어요. 그리고 돈 이야기를 했는데 “1유로에 얼마입니까?” 한 거예요.
우리 사랑하고 주님하고 매치가 안돼요. 내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이 송편에서 나오는 것은 죄밖에 안 나오거든요. 죄가 뭐냐 하면, “신이여! 당신이 나한테 해준 것이 뭐가 있다고!” 이게 죄거든요. “평생 내 힘으로 살았지 나한테 해준 것이 뭐가 있다고!” 그게 신자든 신자 아니든 다 나와야 돼요. 안 나온다고 하는 그게 더 수상합니다. 그게 가짜입니다. 나오면서 어디로 가야 되느냐 하면, 그러니까 “아무것도 아니요.”라는 이 성경말씀, 고린도전서 13장 2절의 말씀을 내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환경적으로 나를 압박을 가하게 되면 우리는 참다참다 결국 터져 나옵니다. “하나님, 너무 합니다. 제가 어떻게 더 하나님을 믿고 살라고 이런 식으로 나옵니까?”
그러면 주께서 “빙고! 드디어 나왔다. 고린도전서 12장 2절 나왔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이것이 실제화되고 현실화되는 겁니다. 성경말씀을 내가 지키는 문구가 아니라 주께서 이런 식으로 몰아가는 현실 그 자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겁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고, 내가 주 앞에 반발하게 된다면 그 순간만큼은 다른 신을 섬기지 않습니다. 내 이익이 되는 신에게 버림을 받았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을 믿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믿지 마세요. 그리고 예수 믿지 마세요. 우리는 나 자신 외에 어떤 선택도 믿지 않습니다. 나는 내 결정만 믿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 것이 타고난 우리 자신인데 그게 송편이에요.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니고 우리 조상 아담 때부터 늘 그래왔었습니다. 그리고 성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만드신 분이 말씀대로 하시기 위해서, 주님의 사랑이 소유할 수 없는 사랑인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주께서 또 이렇게 이런 현실 속에 우리를 집어넣으셨군요. 이게 바로 사랑의 은사입니다. 나 외에 다른 길, 나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끝으로 이 말씀 하고 마치겠습니다. 방언과 천사의 말, 그 다음에 예언하는 능력, 그 다음에 모든 비밀과 지식, 산을 옮길만한 믿음, 그 다음에 구제하고 모든 것을 불살라서 희생하는 모든 것, 그거 다 하지 마세요. 이거 하지 마세요. 하지 않게 될 때 그게 통역이고, 그게 방언이고, 그게 천사의 말이고, 그게 구제입니다. 고아원에 가서 구제하지 않는 그게 구제입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그렇게 가게 하신다면 그 고아원이라는 것은 나보다 못난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고 그보다 더 못한 나를, 네가 저 사람보다 더 못되게 살아간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께서 만나게 하는 현장입니다.
전에는 어려운 사람을 동정했는데 동정 받을 사람이 남이 아니고 내가 바로 동정 받을 사람입니다. 따라서 시선이 주님 주신 시선만 있고 내가 바라보는 세상이라든지, 내가 보는 배우자, 내가 보는 상대방, 내가 보는 어떤 이웃, 이런 것은 전부 다 없어져야 돼요. 주님의 말씀에 포함된 이웃이 나고 주님의 말씀의 사랑의 대상이 나기 때문에 내 쪽에서 따로 나름대로의 어떤 시선을 줘버리면 이게 해석이 되고 이게 오해가 되거든요. “너는 나 때문에 살았어.” 이렇게 된다니까요. 내 쪽에서 나오는 시선, 그걸 삭제, 끊어버려야 돼요.
“주께서 나와 그 사람을 만나게 했습니다. 이런 사람을 만나게 했고, 이런 자식을 낳게 했고, 이렇게 살게 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주로부터 시작해야 돼요. 그렇게 왜 살게 했는가?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그게 성경말씀에 나와 있다는 사실, 주께서 율법 외에 다른 의로 구원시키는 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이미 구원받은 상태에서 말씀의 세계에 걷게 하시고 가게 하시는 겁니다. 그 가운데서 내가 가진 사랑은 전부 다 나의 잘남과 뽐냄, 자기 자랑하고 스스로를 신으로 승격시키는 행동밖에 안 나온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주께서는 “아니요! 아니요! 아니요!” 계속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도 계속해서 인생 가운데서 내가 잘난 체가 될 수 있는 모든 것을 아니요, 아니오, 이렇게 제쳐두시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아신다면 이미 그리스도의 몸이요 천국 가는 성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뭐가 되려고 시도하는 그 버릇은 지금껏 내가 평생 살아온 버릇이었고 관행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남은 것은 나만 챙기고 나만 신이 되는, 내가 나만 섬기는 그런 존재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마땅히 그랬어야 된다는 사실을 이제 깨닫게 되었사오니 예수님의 의를 보여주는 하나의 송편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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