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고린도전서79강-사랑이란(고전13;4-5) 160207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2. 8. 07:32
2016-02-07 12:39:01조회 : 58         
   사랑이란? 160207 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사랑이란(고린도전서 13:4-5)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Qo2ZUQh6PWo, Hit:4

 이근호 16-02-07 13:31 

사랑은?

2016년 2월 7일                          본문 말씀: 고린도전서 13:4-5

(13: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13:5)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사랑의 은사 이전에 교회에 가르치는 은사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게 됩니다. 사도나 선지자나 교사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쳐야 될 사명으로 주어집니다. 이 가르치는 은사로 인하여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을 받는 대상’이 구분됩니다. 즉 이 ‘가르치는 은사’는 그 대상자가 발생되게 마련입니다.

이 가르침 속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라. 예수님을 사랑하라. 이웃을 사랑하라. 십자가 복음을 믿으라, 예수님 재림하신다. 성령을 받아야 된다. 천국과 지옥이 있다” 등등의 여러 가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내용들이 들어 있습니다. 이런 가르침에 대해서 듣는 대상자는 이것을 자신의 이름으로 이루려고 시도하게 됩니다.

바로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을 받는 대상자’가 발생하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이 사랑의 은사에서는 이 ‘대상’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랑은 간음하지 아니하고’라는 내용이 없습니다. ‘이웃을 사랑하고’라는 내용도 없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사랑하라’라는 내용이 없습니다.

그것은 이 사랑의 은사는 ‘내용’이 아니라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즉 ‘반응’마저 자신의 육에서 나와야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신 선물, 곧 ‘은사’로서만 가능한 겁니다. ‘가르치는 은사’에 대해서 인간은 육적으로 반응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몸 자체를 하나님게서 그렇게 활용하시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가르친 것에 대해서 본인들이 나서서 의롭게 지키려고 실시하는 성향을 보이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의 육을 ‘선악적 상황’의 현실성을 보여주기 위한 하나님의 전략에 부합하게 됩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적인 인식으로 받아들이므로서 율법에 의한 ‘기소대상자’가 되는 겁니다.

‘율법망’에 걸려든 것이 됩니다. ‘이 걸려든 결과’는 ‘끊임없는 추락’입니다. 자멸입니다. 서서히 죽어가게 됩니다. 마치 커튼이 자기 무게를 버티다 못해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화려하고 아름다운 커튼의 무늬들이 흉하게 겹쳐져서 구겨지는 모양새를 보이면서 털석 주저앉는 식으로 말입니다.

법이 주는 무게에 비례에서 인간의 자아에게 두려움이 임하게 됩니다. 요한일서 4:18에는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사랑의 은사가 오지 않는 한, 인간은 평생이 두려움에 시달리고 쫓기듯이 살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실은 법으로 인간에게 들이닥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전략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시고 친히 전개하시는 이 세상은 법에 의해서 진행됩니다. 그 법은 생명나무 과실과 격리된 채 작용합니다. 몰락하는 저주를 동반하면서 법은 인간을 찾아오고, 인간의 자아는 거기에 대해서 선악 의식으로 방비하려고 애를 씁니다.

즉 “이 정도했으면 나는 벌맞지 않는 정도로 버틸 수 있겠지”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그런 고백은 곧 생명나무가 있는 곳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표시입니다. 율법으로 의롭다 할 위인은 없고 오직 가는 곳마다, 사는 곳마저 저주가 주는 두려움에 시달리게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들이 법망에 가두어져서 살아가게끔 되는 형편은 하나님께서 이미 의도하신 바입니다. 마태복음 5:17-18에 보면,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다 이루기 위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율법의 극한을 보여주시고자 하십니다. 그것은 곧 죄로 규정지음입니다. 요한복음 8:10-11에 보면,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순서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너를 고소하던 자가 어디 있느냐?”부터 언급하십니다. 여인은 말합니다. “없나이다” 즉 주님께서 다 없게 하셨음을 인정하는 새로운 자아상으로 예수님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평생을 두고서 이 ‘없나이다’를 반복해야 합니다.
Woman, where are those thine accusers? hath no man condemned thee?
이 반복이 거듭되려면, 율법망 안에서 법이 주는 저주를 인식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두려움입니다. 자기 것이 무너져내릴까봐 무서워하는 겁니다. 행여 선과 선의 흐름에서 느슨하거나 고리가 끊어진 구석이 있을까봐 조마조마하면서 걱정하게 됩니다. 하루 아침에 공든 탑이 무너져내릴까봐 염려됩니다.

평생에 쌓아올린 명성과 명예가 자신의 주책과 가족의 실수로 먹칠하게 될까봐 두려워합니다. 평생토록 고생하면서 소유하게 된 재산이 행여 누가 탐을 내고 강탈할까봐 염려하게 됩니다. 인간의 자아는 숱한 고생으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의 반대말은 고향이요 눈물입니다.

즉 자기에 대한 연민과 동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 외’의 의로 전환시키는 레시피를 가동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반복입니다.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옆에 두 강도가 같이 십자가 달렸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나예요’라고 고백되어야 합니다. 즉 예수님의 화목제물로 인하여 


‘율법’에서 ‘율법 외’에 넘어가는 과정에 우리들은 죄인으로서 가담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저주받은 죄는 예수님 본인의 죄가 아니라 대신 가져 가신 죄인들의 죄입니다.
그 죄가 언약의 피를 만나서 ‘화목제물’을 달성하게 되고
그 만족에 의해서 ‘율법 외의 한 의’가 드디어 현실적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을 실제화 하기 위해 성령의 은사로 해당되는 자에게 통고하게 되는데
여기서 성도는 이 은사로 인해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그 반응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은 귀 바로 옆에서 대포가 발사된 것처럼 멍멍합니다. 선과 악으로부터 초연하게 된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발생하게 된 초연함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사랑의 은사로 인해 자기를 부인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6-02-08 07:23 

177강-고전 13장 4-5(사랑은?)160207-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3장 4-5절입니다. 신약성경 278페이지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고린도전서 13장은 은사에 대해서 언급하는 겁니다. 은사라는 것은 우리말로 하면 ‘선물’이라는 겁니다. 선물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그 선물은 인간이 만들어낼 수 없는 선물이고 하나님이 선물로 줄 때만 얻을 수 있는 은사입니다. 선물이라고 할 때 사람끼리 주고받는 선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특별히 자기 사람에게만 주는 게 있어요. 하늘의 선물, 마지막 최종적으로 사랑이라는 선물을 이렇게 주시는 겁니다. 사랑의 선물이 마지막이라면 그 전에 주신 선물이 있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전에 주신 선물이 하나님의 하신 일을 가르치는 그 내용, 내용에 관한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 내용의 선물을 주시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28절에 보면,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이것은 전부 다“‘하나님은 이런 분이고, 세상을 이렇게 꾸려왔고, 지금 이런 식으로 일하고 계시고, 이런 식으로 천국을 만들고, 천국에 들어갈 사람들을 이런 식으로 창조하십니다.”라고 하나님이 일하신 그 내용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거예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이렇게 죽 나오는 그 이야기는 사람이 뭔가 행사할 때 그 대상자가 있어요. 가르친다는 것은 가르치는 자가 있고 가르침을 받는 자가 있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짝을 이루어서 그 은사를 발휘할 수 있는 대상자가 있는 반면에 사랑의 은사라 하는 것은 대상이 없어요.


이야기를 쉽게 하게 되면, 사도나 교사가 교회에게 이야기하기를, “하나님을 사랑하세요. 예수님을 사랑하세요. 십자가를 사랑하세요. 복음을 사랑하세요. 이웃을 사랑하세요.”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할 때 그 가르침 받는 사람은 ‘아, 하나님을 사랑해야 되겠구나. 예수님 사랑해야지. 이웃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말씀을 사랑해야지.’라고 내가 사랑해야 될 대상들이 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가르치는 은사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그런 대상이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사랑의 은사가 되면 대상이 없습니다.


예수 사랑하는 것이 사랑의 은사가 아니고, 하나님 사랑하는 것이 은사가 아니고, 복음 사랑하는 것이 주님의 은사가 아니에요. 사랑에는 대상 자체가 없어야 돼요. 우리가 알고 있고 가르침 받는 내용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 “사랑은 오래참고 사랑은 온유하고……” 이렇게 하다보면 가수 김세환이 생각나는데 그 가수가 부른 노래가 있어요.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할 때에 여기에 “사랑은 간음하지 아니하며”가 없습니다. “음란하거나 간음하지 않으며”라는 내용이 없어요. “간통하지 아니하며”가 사랑의 내용에 없습니다. “사랑은 살인하지 아니하고”가 여기에 없어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사랑의 은사가 아니라는 그 말입니다. 이웃에게 잘해주라는 것이 아니에요. 이 사랑의 은사, “사랑은 오래참고 사랑은 온유하고”라는 이 말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어떤 식으로 이웃을 사랑하라고 이미 사도나 교사나 선지자를 통해서 이미 교육을 받았습니다. 알아요. 그 내용에 대해서 다 압니다. 그 내용에 대해서 알지만 내용에 대해서 안다고 해서 이것이 구원되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 내용에 대해서 아는 은사뿐만 아니고 그 내용에 대해서 반응을 나타내는 은사도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야 돼” “그럼, 사랑해야지.” “누가?” “내가” “누굴 향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그것은 단지 아는 지식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사랑해야지.” “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으니까. 사랑하고말고.” “누가 사랑하는데?” “내가” “누구를 위하여?” “예수님을 사랑해야지.” 그러면 구원받습니까? 그래가지고 구원받지를 않아요. 나한테 어떤 사랑의 대상이 있다는 말은 그 전제로 내가 있다는 말인데 그 있는 나는 구원의 대상 자체가 안 됩니다. 내가 없어져야 되는데 자꾸 교회 와서 공부를 하고 지식이 늘어나니까 갈수록 내가 더욱더 철저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 보다 더 철저하게. 더 말씀대로. 더 착하게. 더 선하게. 절대로 남에게 악하면 안 돼.’ 그러면 그럴수록 강화되는 것은 뭐냐? 더욱더 콘크리트처럼 나 자신이 강화되는 거예요. 이것은 근본적으로 자기부인이라는 것과는 점점 더 거리가 멀어지는 겁니다. 지식의 은사로 구원받을 수 있을 것 같으면 마지막 제일 큰 은사, 제일 좋은 사랑이라는 은사가 필요치가 않아요. 하나님이 나한테 뭔가 지시를 했다는 것은 나한테 뭔가를 할 수 있는 역량이 있다는 의미이니 따라서 그 다음부터는 누가 귀한가 하면, 내가 귀한 거예요.


하나님께서 사랑의 은사를 구태여 자기백성에게 주시는 이유는, 인간이 자신이 하는 일과 반응에 대해서 초연할 수 있는지를 네가 한 번 해결해 보라는 겁니다. 이게 가능합니까? 제가 주변의 많은 목사들을 알고 있어요. 동기생들도 있고요. 그들 가운데 그야말로 순수하게 하나님만 사랑하고, 예수님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서 오직 말씀대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목회는 크게 못해요. 그렇지만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지만 더러 있어요. 바르게 사는 사람들, 세상과 초연하게 오직 자신의 길, “나는 나의 길을 가련다.” 하고 말씀 붙들고 말씀대로 살면서 살아가는 착한 동기생들이 참 많이 있어요.


그런데 신자가 아니에요. 왜냐하면, 자기가 하는 행위에 대해서 자기가 초연할 수가 없는 거예요. 때려죽여도 안돼요. 왜? 사랑의 은사, 성령의 은사를 받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신학교에서 공부도 잘하고, 전교에서 몇 등 할 정도로 공부 잘하고, 바르게 살고, 나쁜 짓은 일체 거부, 악한 행동과는 일체 거리가 먼, 그저 하나님 앞에 순수함 그 자체, 지고지순함 그 자체, 교인들이 오든 말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선포하면서 말씀대로 바르게 살자는 그것만 30년, 40년 줄 창 전하는 사람들.


저는 어디를 봐서 그들이 신자인지 모르겠어요. 전혀 신자가 아니에요. 사랑의 은사를 받아본 적이 없어요.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꽤 있어요. “한국교회가 썩었다. 우리는 그 쪽으로 가서는 안 된다. 오직 말씀 붙들고 살아야 구원받는다.”고 하면서. 신자 아닙니다. 사탄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성령의 은사를 받지 못하고 사랑의 은사를 받지 못하니까 기껏 그들의 사랑의 은사라는 것은 자기가 사랑의 은사를 꾸역꾸역 만들어내는데 진력을 다 하는 겁니다. 전력을 다해요.


마음속으로라도 어떤 여인에게 마음 둔 적이 없는, 혹시나 간음할까 싶어, 그 정도로 철저한 그런 사람들. 사랑의 은사를 받지 못한 대표적인 사람들입니다. 사랑의 은사는 하나님이 조성합니다. 왜?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우리보고 “성경말씀 이만큼 잘 가르쳐줬으니까 이제는 네 차례다. 네가 성경전체를 통해서 사랑의 은사를 만들어내 봐라.” 이렇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사랑의 은사에요. 선물이에요. 왜 가르침 받은 것으로 안 되는지, 가르침을 받은 그것으로 왜 안 되는지.


그게 왜 안 될까요? 모든 가르침은 우리에게 율법적 기능을 발휘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범죄현장을 조성하기 위해서 사도를 통해서, 선지자를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친 거예요. “예수님을 사랑하라. 이웃을 사랑하라.”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것이 범죄의 현장이 되게 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를 기소대상으로 삼는 거예요. 기소대상, 기소대상이 아닌 자는 사랑의 은사가 보이지 않는 자입니다.


법망에 포착되어야 되고 법망에서 빠져나올 수 없어야 돼요. “십자가를 사랑하라. 이웃을 사랑하라.” 그것은 우리를 향해 우리를 기소대상자로 만들어내는 하나님의 작업인데 그 작업이 은사가 유발된, 하나님의 선물이 주어진 그 결과물로 우리는 꼼짝 못하고 법망에 갇혔습니다. 육입니다. 우리가 바로 육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가 우리보고 뭘 요청하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자체를 없애버립니다. 우리자신이 거기에 반응해서 뭔가 해보고자 한다면 내가 나에게 하나의 대상이 되니까. 주님을 바라보는 척을 하지만 사실은 주님말씀을 잘 지키고 있는지를 바라보는 그 최종적 시선은 나에게 가 있어요.


내가 나의 사모하는 최후의 대상이 됩니다. 어느 인간이 자기연민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요? 꽃을 가꾸듯이 평생 우리를 가꾸어 왔습니다. 고생고생, 어릴 때, 젊을 때 고생한 그것 어디 가지 않습니다. 고생한 것이 이 육신에 스며들게 되면 우리는 무엇으로 갖춰져 있는가? 나의 단단한 자아라는 질서로 갖춰져 있는 겁니다. 어릴 때의 그 세계관이 나의 고생과 범벅이가 되어서 내 안의 온 세포 안에 스며들어 있어요.


사랑의 반대말은 자기연민입니다. 저는 이렇게 외칩니다. 사랑의 반대말이 뭐냐고 저에게 물으면, 물론 저에게 물을 사람도 없겠지만, 사랑의 반대말은 ‘고향’입니다. 또 사랑의 반대말은 같은 말로 ‘눈물’입니다. 내가 나를 불쌍히 여겨서 나를 향하여 흘리는 눈물, 그게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것인데 사랑에 대한 육적인 반응이 눈물흘림이지요. “주여, 이렇게 고생 되게 했습니다.” 어쩌라고? 나의 눈물이 하나님의 법에 의하면 기소대상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모르고 있습니다. 그게 범죄자의 모습입니다.


회개의 눈물이 범죄자의 모습인 것을, 그게 범죄 현장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감히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저 불쌍한 티를 내면 주께서 많이 봐줄 줄 알았지요. 우리가 자신을 불쌍하게 보면 볼수록 나는 더욱 더 고귀한 존재로 돌변해 버립니다. 주님보다 내가 더 고귀해져 버려요. 주님은 별로고 지옥 가는 내가 나에게 더 불쌍해져 버려요. 이것은 희한한 결과물이잖아요. 황당한 겁니다. 누구 말대로 정말 “어이가 없네.”


그동안 교회 와서 뭘 했는지 모르겠어요. 요한복음 8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현장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순서를 주목해 봐야 돼요. 10절에 보면,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순서가 먼저 묻습니다.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법망으로 묻지요. “너는 지금 기소의 대상이 되었는데 너를 고소하는 자가 어디 있느냐?” 그 때 여자가 하는 말이 정말 우리가 평생 한 번은 해야 될 고백을 해요. “없나이다.” 정말 이 “없나이다.”가 여러분의 고생에 찌든 젊은 날의 추억을 다 쫓아내야 됩니다. 나에게 연연하고, 나를 연민하고, 눈물 흘리고 동정했던 값싼 것을 다 쫓아내야 됩니다. “없나이다.”


독일에서 박사학위 받고 한국에 돌아와서 신학교 교수를 하고 있던 목사가 자기 딸을 때리다 보니 죽었는데 시체를 방에다 1년 가까이 방치했는데 왜 그렇게 죽은 애를 숨겨놓았느냐고 물어보니까 딸이 부활할까 싶어서 그랬다는 거예요. 구차한 변명인지도 모르지만. 왜 그렇게 했느냐 하면 두렵기 때문에 그래요. 죽은 것이 두렵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요한 1서 4장 18절에 보면,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고 했습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나니. 왜 그 목사는 자기 딸을 죽이기는 자기가 죽여 놓고 부활하기를 그렇게 소원했을까요?


혹시 남들이 “네가 네 딸 때려죽였지?”라고 하는 이야기가 두렵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두려움이 없습니까? 그 두려움은 어디서 나왔는가? 자기연민에서 나오고 자기 동정에서 나온 거예요. 직사하게 고생했던 자기 과거를 놓치기 싫어서 그런 거예요. 그 놈의 두려움이 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계속돼요. “내가 죽거들랑 이 재산가지고 형제들 간에 싸우지 말고 잘 나눠가지라.” 이렇게 유언하는 이유도 죽어가면서 두려워요. 왜? 죽어가면서 자기의 추억을, 자아 성을 죽을 때까지도 안 놓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죽는 그 순간까지도 “없나이다.”가 되지 않고 “있나이다.”가 되는 거예요. 다시 말씀드릴게요. 간음하다 잡힌 여인에게 예수님이 묻습니다. “너를 고소하는 자가 있더냐?” 여자가 하는 말이 “없나이다.” 얼마나 두려움이 없었으면 이런 이야기가 나왔겠습니까? 고소하는 자가 왜 없어요? 돌만 놓았을 뿐이지 살아서 돌아가고 나면 나중에 소문 낼 건데? 뒤에서 비난할 건데 왜 없다고 하는 거예요? 그 여인에게는 이제 없습니다. 스스로 자기를 지키고자 하는 것, 내 가정 내 것, 내 자식, 내 교회, 내 과거, 내 추억, 그걸 지키고자 하는 모든 것은 사실은 그동안 남의 시선이 무서워서 벌벌 떨었던 거예요. 남의 입맛에 맞추고, 남의 욕망에 맞춰보려고, 맞춰보려고, 맞춰보려고, 그들 눈에 보기에 사람답게 보이려고 쓸데없는 가면과 위선을 꾸미는데 평생을 다 허비했어요.


예수님은 그 선을, 그 흐름을 끊어버립니다. “네가 무슨 짓을 하든 누가 너를 정죄하더냐?” “주여, 그런 법망은 없나이다.” 그런 법은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 인간을 보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설교에서 제일 중요한 대목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주님이 만드셨거든요.
이 세상은 무엇으로 만들었는가? 말씀으로, 하나님의 법으로 만들었어요.
법으로 만들면서 법이 어떤 실효성을, 구체성을 갖고 있어야 되거든요.
그 법의 구체성을 증명하기 위해서 인간이 만들어졌습니다. 인간은 인간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에요.



인간이 만들어진 이유는 주님의 법 앞에 그 법을 지킬 위인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하나님의 거룩한 법 자체, 그 거룩 자체를 증명하기 위해서, 하나님에 합당한 인간은 따로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법을 적용시킨 겁니다. 따라서 인간은 몰락중이에요. 파멸중입니다. 추락하는 인간, 존재, 인간은 서서히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것보다 멋진 시는 없어요. 인간은 서서히 죽어가고 있어요. 끊임없이 몰락해요. 재래시장에서 제수상품 판매하면서 죽어가고 있고, 총선 치르면서 국회의원들은 죽어가고 있고, 북한은 로켓 쏘면서 죽어가고 있고 모두 다 서서히 지금 주저앉고 있는 겁니다.


매트릭스 숫자가 하늘에서 끊임없이 내려오면서 주저앉는 것 같아요. 주저앉으면서 끝까지 가면서도 기존세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서, 자기 자신을 처리해야 된다는 그 두려움을 벗어나지 못해가지고 “내가 죽거들랑 양지 바른 곳에 묻어다오.” 양지 바른 곳에 안 묻으면 일어나서 항의할건가? 참 지금 생각하면 우스워요. 우리 장인어른이 “내가 죽거든 절대로 화장하지 마래이.” 반드시 무덤에 넣어놓아야 부활 한다고 화장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 때 아마 화장 했을걸요? “내가 화장하지 말라고 했잖아.” 도대체 뭘 무서워하는 겁니까? 도대체 뭐가 그렇게 무서운 거예요?


이것은 뭐가 무서운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었어요. 모든 법에 대해서 무서움으로서 선악과 따먹은 악마의 티를 팍팍 내라고 그런 존재로 만들어놓은 거예요. 법에 대해서 안 무서울 사람이 없는 거예요. 다 무서워합니다. 포토 존에 서서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검찰 뒷문으로 들어가고요, “검찰에서 다 말하겠습니다.”하고 얼른 가버리고. 주님의 말씀의 순서가 법으로 물어요. “너를 고소하는 자가 있느냐?” “없습니다.” 없다는 말은 뭐냐? “주께서 그런 것을 다 차단시켜서 보냈습니다.” 하는 뜻이에요. “주님이 보냈잖아요. 나에게 간음했다고 하는 모든 손가락질을 주님이 끊어서 다 보내버렸잖아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으로 오신 것이 아니고 율법 외의 분으로 오셨어요. 율법이라는 노선이 먼저 깔립니다. 깔리게 되면 모든 주의 말씀,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웃을 사랑하라, 십자가사랑해라, 복음을 사랑해라, 모든 사랑에 대해서, 모든 말씀에 대해서 인간은 자아를 가지고 마중 나옵니다. “저 어때요? 이만하면 죽어서 천국 갈만한 괜찮은 대상자가 되겠지요?” 자꾸 끄집어내요. 그게 주님의 전략입니다.


가르치는 은사를 받았기 때문에 그 가르침에 대해서 숙제를 행하게 되면 숙제 잘했다고 칭찬 받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순간 걸려든 거예요. “네가 지금 선악과 따먹었다고 내 앞에서 자랑 질 하느냐?” 지난 수요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선악과를 따먹게 되면 생명나무는 없습니다. 선악과 따먹었다는 그 이유 때문에 생명나무와 갈라서게 되어 있어요. 그 균열된 증거물이 오늘날 우리 자신들입니다. 뭔가 착해보려고 함에도 불구하고 그 놈의 두려움은 평생 사라지는 법이 없네요. 착한 짓을 하는 현장에서도 이 착한 짓이 와르르 무너질까봐 두려운 그 두려움은 또 생기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신 거예요.


왜? 예수님과 교체되는 육신이 아니면 천국 갈 수 없음을, 예수의 나라에 갈 수 없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태복음 5장 17절에서 19절에 보면,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려 함이 아니라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다 이루리라고 하는 이 말씀이나 요한복음 19장의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그 말씀과 통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주신 그 율법,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율법 외, 둘 다 다 이루어야 되는 겁니다.
율법을 이루는 것은 우리를 죄인으로 만드는 작업을 통해서 율법을 이루고,
‘율법 외’를 이루는 것은 십자가에서 다 이룬 것으로 말미암아 율법 외에 주어진 하나님의 의로 만든 생산품,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은사로서의 성도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랑은 온유하고 사랑은 오래참고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고 …….” 이 말씀에 음란하지 말라니, 이웃을 사랑하라니, 그런 내용이 없습니다. “제가 지금 정말 주어진 사랑의 선물을 받았느냐?” 거기에 대해서 반응을 이런 식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한 살이나 6개월 된 갓난애가 엄마와 여탕에 갔다. 남자가 여탕에 가도 되느냐 마느냐 하는 선악적인 판단 같은 것이 그 애하고는 아무상관이 없어요. 거기 가서도 엄마만 바라보고 웃고 놀아요.


선악을 초월했습니다. 선악을 초월했다는 말은 혼자 있지 않고 엄마와 함께 있다는 거예요. 엄마와 함께 있으면 나는 없고 엄마가 내 대신이 되는 겁니다. 엄마가 여탕 가니 자기도 따라 간 거예요. 내가 없으니까 선악도 없는 거예요. 그 선물이 바로 사랑의 은사입니다. 사랑의 은사는 내가 잘했느니 못했느니 그 자체가 없어요. “누가 너를 정죄하더냐?” “없나이다.” 어린아이같이 되어버려요. 어느 정도냐? 바로 옆에서 대포를 꽝, 쐈다 합시다. 대포를 쏴버리면 귀가 멍멍하지요. 그 멍멍한 상태, 그게 사랑의 상태입니다.


비행기 탈 때 기압이 뚝 떨어지면 귀가 멍멍하잖아요. 누가 날 욕하면, ‘뭐라는 거야? 멍~’ 아무 느낌이 없어요. 이게 사랑의 은사입니다. 그게 뭐냐? “사랑은 오래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이것은 법이 아니에요. 이걸 지키라는 말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룰 때에 십자가에 예수님께서 홀로 올라가셨지만 양쪽에 두 개의 십자가가 함께 있었습니다. 그 양쪽에 선 두 강도, 그 사람이 바로 나에요. 예수님 옆에 있던 그 두 강도, 그 사람이 바로 나에요. 주님이 보시고 다 이루었다는 겁니다.


우리로 강도되게 하시는 그 사랑, 그 전략,
그게 율법에서 율법 외로 넘어가는, 오직 주님만이 선물로서만 넘게 하시는 그 은사,
한쪽 강도에게는 주지 않았고 다른 한쪽의 천국 가는 강도에게는 선물을 줬기 때문에
선물 받은 강도는 혼자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묻습니다. “당신의 나라에 저를 생각해 주세요.”
강도에게 자기 나라가 더는 없습니다.
“주님이 여기 같이 있듯이 거기서도 같이 있는 것이 맞잖아요. 다 알거든요.
주님나라 임할 때 저를 생각해 주소서.” 할 때
주님 하시는 말씀이 “네가 오늘 밤에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그 사람은 선물 받은 겁니다. 자기는 더는 없습니다. 나는 없고 평소에 내가 자아라고 생각한 것은 내가 내 욕망으로 과거의 추억을 가지고 조성한, 내 자신을 가짜로, 억지로 좋은 존재로, 우리 맘대로 편집하고 만들어 내놓은 드라마 같은 모습을 아직도 나는 쥐고 있어요. 진짜 내 모습은 성경 속에 있는데 십자가 옆에 있는 그 강도가 바로 나예요, 그게 바로 나인데 우리는 그거 말고 젊을 때 앨범 들출 때 나왔던 그 나, 결혼식장에서 주례선생님과 같이 찍은 사진의 그 나, 예쁜 웨딩드레스 입고 결혼할 그 때의 나, 그게 언제 적의 나입니까?


그게 나가 아니에요. 그것은 허상입니다. 허상은 몰락중입니다. 지금 그 허상은 추락하고 있어요. 커튼 위에서 끊어버리면 내려앉듯이. 나이 들면 점점 우리가 젊을 때 꿈꾸던 나의 모습은, 고무줄 있는 치마 고무줄 끊어지면 죽 내려앉듯이 지금 내려앉고 있습니다. 60대 내려앉고, 70대 내려앉고, 아직도 쓸 만하다고 노래하는 그 80대도 내려앉고, 주저앉는 중이에요. 그것은 가짜입니다. 우리 자신의 무게는 곧 내 욕망의 무게입니다. 그 욕망가지고 우리는 어떤 외부에서 오는 두려움 속에서 자기만의 세계를 형성해서 그 안에서 ‘나도 숨 좀 쉬어보자.’ 하는데 바깥에 나오는데 얼마나 겁이 많으면 숨 좀 쉬자 합니까?


나이 백 살 된 할머니가 80된 자식보고 차 조심 하라고 하는 그것, 계속 무섭다는 거예요. 백 살 된 엄마는 이렇게 이야기해야 합니다. “누가 너를 정죄하더냐?” 그러면 아들이 “없나이다.” 이런 대화가 있어야 될 것이 아닙니까? “네가 백수고 시집도 못 간다고 누가 욕을 하더냐?” “없나이다.” 이렇게 되어야 되는데 “얘야, 올해는 너도 취직도 하고 결혼도 해야지.” “왜요?” “사람들이 아직도 자식이 결혼도 안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할까봐서 무섭더라.” 거봐요. 무섭잖아요.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해야 되는데 그렇게 무서워해서 천국은 어떻게 가려고요? 못가지요.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어서 생명나무와 분리시켜 놓았습니다. 이것은 우리하고 의논한 것이 아니에요. 우리보고 물어본 것이 아니라 일방적인 조치입니다. 일방적인 그 갈라짐 때문에 우리가 아무리 애를 쓰고 말씀대로 살려고 해도 그것은 갈라짐을 더 가중시키는 것 밖에 안돼요. 내가 착하고, 위대하고, 멋있고……, 그런 식으로 자기를 한데 모아도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더 큰 두려움, 더 큰 무서움, 올라갈수록, 부자가 될수록 그 부가 하루아침에 다 날라 갈 수가 있다는 더 큰 두려움, 도둑이 오면 어떻게 하느냐 하는 그 두려움. 그동안 내가 욕한 번 안 얻어먹고, 파출소 한 번 안가고 착실하게 살았다는 말은 조그마한 누구의 흠집도 나의 전체를 밤새 잠 못 이루게 만들어버려요. 그 조그마한 흠집 하나 때문에.


너무나 완벽, 완벽……, 꼭 우리교회 교인 같아요. 설날부터 이런 선물주면 안되는데. 너무 완벽해. 말하는 내가 부끄럽습니다만. 너무 완전해. 사회적으로 하자가 없어요. 일등급이에요, 일등급. 그놈의 일등급에 두려움도 일등급으로 옵니다. 이게 하루아침에 훅 갈수가 있어요. 진즉에 훅 가야지요, 진즉에. 사랑의 은사라는 것은 주님의 연속된 조치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인간은 육이거든요. 육을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만들었어요. 우리보기에는 막 두려워서 벌벌 떨지만 하나님께서는 “레시피대로 요리 지금 잘 되고 있네.”


법의 무서움, 누가 무슨 소리 할까봐서 무서움, 그리고 평생 일군 내 체면과 자기영광, 내 자식이나 가문의 영광이 혹시 비난 받을까 두려움, 우리는 벌벌 떨고 있지만 주님 보기에 레시피대로 잘 되고 있는 거예요. 그런 나를 주께서는 두 조각을 내야 돼요. 두 조각 내지 않으면 생명나무로 갈 수가 없어요. 생명나무와 우리 자신을 두 조각내서 내가 고이고이 만들어놓은, 아까도 이야기한 지고지순한 그 사랑, 그 믿음이라는 것, 그 모든 것이 마귀를 통해서, 마귀와 합작한 합작품인 것을 우리로 깨닫게 하는 겁니다. 오히려 그렇게 하면 할수록 지옥에 더 가깝다는 사실을 알도록 더 큰 두려움으로 우리에게 찾아오게 합니다.


‘아, 내가 정말 점점 더 멀어졌구나.’ 내가 가고자 하는 천국이지만 천국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그동안 줄곧 해 온 거예요. “십자가 옆에 선 그 강도, 그게 바로 나에요.” 하는 말을 한 적이 없어요. ‘쪼다같이 십일조도 안 하고. 그러니까 강도질이나 했지.’ 나하고는 상관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그 작업을 하시면서 율법 외에 한 의로 옮겨가는 작업을 하십니다. 율법 외에 한 의로 옮겨간다면 옮겨가는 그 작업이 뭐냐? 성경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고 다 알려주거든요. 성경은 다 알려줬어요.


하나님의 율법에서 율법 외로 옮겨가는 방법은 로마서 3장 24절에 나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화목제물을 하나님이 스스로 제정하시고 그 화목제물을 성취하기 위해서 죄 된 우리를 거기에 집어넣어 버립니다. 그래서 화목제물 만드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피 흘림에 같이 섞이게 해요. 피 흘리신 것은 예수님이고 택한 자의 죄를 거기에 섞어버립니다.


섞는 것을 가지고 죄에 대해서 전가했다고 합니다. 네 죄를 주님이 전가하는데 주님의 죄는 없고 우리 죄에요. 우리 죄를 품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게 되면 그게 하나님이 원했던 하나님의 화목제물이 되고, 화목제물이 되어버리면 하나님의 의가 완성이 되면서 그 출렁이는 완성 안에서 우리가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그렇게 넘어가면서 뭘 해야 되는가? 벌벌 떠는 우리 자신을 우리는 아직도 육이 있으니까 쥐고 있지만 주님 쪽에서는 벌써 없어졌어요.


일본의 어떤 바둑대회는 이틀 동안 두는 것도 있어요. 실컷 신경 써서 바둑을 두어도 판이 끝나면 바둑판 위에 있던 바둑알들을 다 쓸어 담아 통에 집어넣으면 ‘무슨 일이 있었어?’ 하고 말끔하게 반짝거리는 바둑판, 고요한 바둑판 밖에 없어요. 그 전에 바둑판에 바둑알이 널려 있었어도 싹 치워버리면 그만이에요. 우리도 한평생 살 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다 보여줬다 싶으면 우리를 데려가시면, 싹 치워버리면 아무것도 없어요. 모든 것은 그리스도께서 레시피대로 그렇게 하신 거예요.


의가 없는 자를 의인되게 만드시는 주님의 자기 솜씨고 자기 증명인 겁니다. 이게 뭐냐? 네가 이런 내용에 대해서, 하나님의 이런 말씀에 대해서 네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 반응 보이면 선물 받은 자요, 반응 못 보이면 선물 못 받은 자입니다. 성령의 은사가 없는 사람은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을 또 지키려고 해요. 또 지키려고 합니다. 지켜버리면 내가 지금 어느 정도까지 수준이 올라갔는지 자기 자신에 대한 사수, 미끄러질 것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와 걱정거리가 또 늘어집니다.


타인 앞에서 어린애가 되시고 타인 앞에서 내가 없는 존재가 되세요. 아내가 잔소리를 하고 남편이 잔소리를 하면 그냥 대포소리로 들으세요. 꽝, 하고 터지면 ‘멍~’ 잔소리의 특징이 뭐냐? 그걸 지킨다고 해서 잔소리 안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잔소리를 자꾸 듣게 되면 그걸 터득하게 됩니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스스로 자기정리정돈 하지 마세요. 어차피 우리 육은 토대가 불안정합니다. 주께서 찢어지고 갈라지게 하는 겁니다. 마치 뒤꿈치 각질 갈라지듯이 아무리 약을 발라도 또 갈라지고 건조한 겨울철이 되면 또 갈라지고, 이 몸 저 몸 다 갈라지게 되어 있어요. 어차피 갈라질 거, 너 하나 가져가고 너도 하나 가져가라고 다 찢어주세요. 찢어지는 그것이 바로 바둑판 알들 확 쓸어버린 겁니다. 어쨌든 그건 내가 아니잖아요. 그것은 마귀가 만든 나라는 말이지요.


남의 말에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 마귀가 그런 짓 하면서 거기에 반응하라고, 율법에 반응하라고 나를 따로 만든 거예요. 육으로 만든 거예요. 너무 예민하게 반응을 하다 보니까 심지어 자살충동까지 느껴요. ‘아, 나는 정말 안 돼.’ 처음부터 안 되도록 되어 있는 것을 가지고 안 되는 것이 당연하지요. 차라리 “없나이다.” 이렇게 해야 되는데 ‘정말 안 된다, 안 돼.’ 그러다 일어서서 또 ‘말씀 바르게 지켜야지. 또 일어서야지.’ 일곱 번 일어서도 여덟 번째 확 밟아버려요. 천 번을 다시 태어나도, 하는 노래도 있지만 그런 식으로 아무리 자기 자신을 가꾸고 또 가꾸어도 그거 다 가짜입니다. 그거 손봐야 돼요. 나 자신에게 손을 놔야 됩니다.


자식을 잘 키웠다. 그 놈의 칭찬도 또 문제라. 욕하는 것도 문제지만 칭찬도 문제에요. 잘 키웠다는 그 소리 듣고 그 다음부터 더욱 더 자식에게 잔소리를 심하게 해요. 그동안 자식 잘 키운 것이 한꺼번에 무너질까봐서.


정리 들어갑니다.

사랑의 반대말이 뭐냐?
사랑의 반대말은 네피림이고 영웅입니다.
내가 영웅 되는 것, 내가 잘난 존재 되는 것,
그리고 자기 연민, 어릴 적 고향 생각하는 것,나의 눈물, 나에 대한 측은함, 동정,
아직도 선함으로 말미암는 마귀가 좋아하는 육을 그대로 사수하려고 애를 쓰다 보니
오히려 집 나간 두려움까지 다 불러들여요.집 나간 일곱 귀신 다 들어와요.
‘네가 기도 안 해서 그렇다. 네가 말씀을 안 봐서 그렇다.
주일 날 오전 예배만 보고 후 예배 참석을 안 해서 그렇다. 십일조 안 해서 그렇다.’
온갖 집나간 마귀는 다 들어옵니다. 마귀의 전당이에요.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마귀한테 말려들게 하셔서 그것을 십자가에서 찢어버립니다. 강도되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한테 이야기합니다. “그게 나에요.” 그 강도,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살아야 그게 영생이라고 로마서 6장에서 분명히 언급했는데 그 소리는 왜 안 들어오는지. 여러분, 그 소리, 그걸 지키려고 하지 말고 거기에 반응을 나타내면 됩니다. “주님이 율법 외에 준비하신 것은 주님의 뜻의 일관성을 증명하기 위해서, 율법이 아니라 율법 외에 그리스도를 증명하라고 이렇게 새롭게 저를 만들어놓았잖아요. 저는 저 혼자가 아니고 주님의 은사로 함께 있습니다.”


그게 바로 온유고 화평이고 무례함이 없는 겁니다. 자기 자신은 주님이 다 대신 가져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평생을 속고 속으면서도 누가 속였는지 몰랐습니다.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을 속이면서 살아왔습니다. 그 무거운 몸무게, 이제는 그만 내려놓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