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강-고전 12장 28-31(참된 교회의 은사)160124-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2장 28-31절입니다. 신약성경 278페이지입니다.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세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성경에서 이렇게 교훈적인 이야기가 나오면 목사가 설교하기가 참 편해요. “여러분도 알고 계시지요.”라는 전제를 깔 수가 있어요. “여러분 맘속에 나쁜 것은 나쁜 것이고 좋은 것은 좋은 것이라는 생각은 여러분도 익히 알고 계시지요?”라고 공감을 나타내면서 이야기가 되는데 오늘 본문 같은 경우에는 난감하기 짝이 없습니다. 왜냐? 여기 하나님의 교회라는 것이 28절에 처음 나옵니다. 하나님의 교회라고 딱 나오면 세상 사람들은 “어느 파입니까?” 혹은 “어느 교단입니까?”이렇게 이야기가 되더라는 말이지요.
그것은 교회가 아닌데. 그것은 종교 놀이하는 곳이거든요. 그건 교회가 아니에요. 종교놀이해서 돈 받아먹고, 목사 생계유지하고, 저희들끼리 친목도모하면서 경제적인 이권을 약간씩 얻고, 세상 살아가는 팁 얻고, 서로 편리보고, 좋은 것 있으면 서로 소개하고, 그런 친목모임에 지나지 않습니다. 서로 잘난 체하고, 착한 척하고, 기도재주 부리고, 사람 꾀이는 전도재주 부리는 것, 그리고 권력단체가 되어서 사회에서 발언깨나 하고 힘깨나 쓰는 것, 그것은 그냥 친목모임이기에 성경과 아무 상관이 없어요.
그래서 오늘 본문의 경우가 어려운 거예요. 본문에 은사라는 말이 나오기 때문에 어려운 겁니다. “교회라 하는 것은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다.” 그거 아니거든요. 그것은 땡입니다. 그것은 잘못된 거예요. 교회란 사람이 모여서 만든 것이 아니라면 교회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은사를 가지고 나타냅니다. 이게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정답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은사를 가지고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은사라는 것이 뭐냐? 하나님의 은사라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재주를 무로 돌리고 거부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소위 달란트라고 하는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은사가 되는 거예요. 교회에서 재주부리고 꺾꽂이하는 그런 것을 의미 없는 것으로, 찬양하는 것을 의미 없는 것으로, 기도하는 것, 헌금 내는 것, 예배 참석하는 그것을 전부 다 의미 없는 것으로 돌리는 힘, 그게 바로 은사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꾸만 종교라는 이름의 친목단체를 만드는 것을 쉬지를 않기 때문에 그래요. 그 친목단체의 중심에 누가 있느냐? 나의 행복과 나의 정신적인 안정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교회가 아니고 본인이 그 교회에 다니기 때문에 자기교회가 되어버린 거예요. 은사가 그런 것을 저항하고 방지를 하는 겁니다. 저는 이렇게 심하게 이야기해요. 은사라 하는 것은 뭐냐? 거울 앞에서 나를 보려고 거울에 나를 비췄는데 내 쪽에 없는 것이 거울 안에 들어가 있을 때 그게 바로 은사에요.
내가 반사하기 위해서, 반영하기 위해서 봤는데 이쪽에 없는 것이 추가적으로 그쪽 안에 들어 있을 때 “야! 너 어떻게 거기 들어갔어?” 꼭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가 같아요. 거울 안에 그게 왜 들어갔는지를 몰라요. 그런데 그게 들어가 있을 때 그게 바로 현존하는 교회입니다. 성령의 은사로 된 교회에요. 네 자로 말해서 불가능함입니다. 교회란 불가능한 겁니다.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낼 수 없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진짜 교회는 무엇과 싸우는가 하면, 인간이 만들어낸 교회와 싸우는 것이 진짜 교회에요.
교회와 교회가 싸움하는 겁니다. 진짜 교회와 가짜 교회의 싸움. 그러면 하나님께서 진짜 교회만 만들면 되지 않겠는가? 왜 가짜교회를 하나님께서 방치하는가? 방치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짜교회를 양산함으로써 그게 아니라고 이야기할 근거를 마련하시는 거예요. 가짜를 만들어서 계속해서 체크하는 거예요. 아니고, 아니고, 아니고, 아니고……. 에베소교회 아니고, 사데교회 아니고, 라오디게아교회 아니고, 버가모교회 아니고, 특히 서머나 교회 아니고, ‘특히’라는 말을 붙여서 좀 이상합니다만 하나 더 붙여야겠네요. 특히 우리교회 아니고.
계속 아니고, 아니고, 이렇게 삭제시키는 힘이 바로 거울 안에, 예상도 못하게 나올 그 안에 있는 그것, 은사가 그 일을 벌이는 거예요. 그러니까 오늘 본문을 설교한다는 것이 굉장히 어렵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 설교하기 어려운 이유가 우리는 평소에 메시아 없이 살잖아요. 우리의 연대기, 우리의 역사는 메시아 없는 연대기에요. 메시아 없어도 잘 살고 오히려 메시아 없는 것이 더 잘 살게 만들고 행복의 지름길처럼 느껴집니다. 메시아를 집어넣을 필요가 없어요.
그런데 본문 27절에 보면,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라고 했는데 이 그리스도를 다른 말로 하면 메시아입니다. “너희는 메시아의 몸이요.” 이걸 유대인한테 하면 알아듣지만 우리 같은 이방인, 단군의 자손한테 이 이야기 하면, “메시아? 한 근에 얼마 하는데? 전통시장의 어느 가게에 가면 살 수 있는데? 메시아가 왜 필요한데? 나의 행복의 삶에 메시아가 왜 끼어들어야 하는데? 그냥 교회 와서 재미나게 지내면 되지 왜 평소에, 월, 화, 수, 목, 금, 토, 일요일까지 메시아가 끼어들어야 할 이유가 뭔데?”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로마서 5장 15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원래부터 메시아 없는 존재였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메시아 없는 존재이어야 하는 그 인간들 속에 메시아 있는 인간들을 내가 발생시켜버렸다.”라는 이야기가 로마서 5장 15절에 나옵니다. 우리 인간입장에서는 아무 메시아가 필요 없어요. 어린애는 태어날 때부터 그야말로 만민의 주고 만왕의 왕입니다. 요즘 제가 실감하고 있어요. 갓난애가 가만있다가 조금씩 칭얼대요. 누워 있는 거 일으켜 달라는 그 말이지요.
그 옆에서 엄마하고 외할머니가 가만있거든요. 칭얼대는 것이 점점 심해지다가 으앙! 하고 울어버려요. 만유의 주가 따로 없어요. 상전중의 상전, 세상에 그런 갑 질이 없어요. 갓난애가요. 자기가 주고 신이 되었는데 무슨 메시아가 필요합니까? 로마서 5장 15절에 “그러나 이 은사는 ……” 은사가 나옵니다. 15절 끝에 보면,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이미 인간은 죄의 지배를 받고 있는데 그러나 이 은사는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이 은사는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다른 말로 하게 되면 범죄조차도 은사의 일부를 위해서 필요하다는 그 말입니다.
왜 죄를 지어야 하고 왜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죄를 지어야 되는가? 오실 은사를 그런 바탕위에, 그런 배경위에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어떤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데 옆에서 지켜보니까 바탕에 노란 칠을 해요. 파스텔화를 그리는 화가인데 파스텔만 가지고 여행지에 가서 즉석에서 풍경화를 그려요. 그런데 일단 화면에 노란 칠을 먼저 해요. 노란 칠을 먼저 해 놓고 색을 그 위에 입히니까 모양새가 나왔어요. 전 세상의 모든 인간들은 시커먼 죄로 깔아야 돼요. 시커먼 파스텔을 먼저 깔아야 됩니다.
깔아놓고 거기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빛 된 은사를 그려내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죄짓는 것도 은사입니다. 이런 이야기해서 기분이 좋은데요. 우리가 죄짓는 것도 솜씨에요. 모든 인류, 이슬람이고 부처고 힌두교고 간에 모든 인류는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렇게 죄를 지어야 돼요. 힌두교라는 죄를 지어야 되고, 이슬람이라는 죄를 지어야 되고, 기독교라는 죄를 지어야 되고, 신부가 되고 목사가 되는 죄를 지어야 돼요. 왜?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해서. 15절에 보면,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 거울 안의 낯선 것이 거울 바깥으로 건너오는 것이 은사거든요. “너 이런 것 없지? 없을 수밖에 없지. 네가 죄지었으니 너한테 무슨 영생이 있겠어? 네가 어떻게 죽어서 천국 가겠어?” 하지만 너에게 없는 것이 거울 안에 담겨 있고 거울이 그 경계선, 이쪽에서 건너갈 수 없는 그곳을, 이쪽에서는 건너 뛸 수 없는 그곳을 저쪽에서 이쪽으로 건너와서 우리에게 낯선 은사,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영생을 우리에게 허락해주시는 겁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우리 쪽에서 건너갈 수 없다는 거예요.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 쪽에서 은사를 소유하거나 획득할 수 없다는 거예요. 은사를 얻어내는 어떤 방도도 우리한테는 차단되고 없습니다. 어떤 경계선을 형성해요. 교회가 교회된다는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교회 와서 그냥 노세요. 그냥 놀고 친목단체하고 그렇게 사세요. 그 교회가, 대한예수교장로회, 괄호 열고 합동 측, 괄호 닫고, 대한민국한반도 그림 붙여놓고 해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통합 측에서 한반도 그림 붙여놨어요. 새로 이사 온 사람들로 하여금 “이 교회는 통합 측 교회니까 안심하고 등록하세요.” 그런 의미로 붙여놓은 거예요. 프랜차이즈라고 보면 됩니다. 처가댁 통닭, 이런 거예요.
그 교회가 성경에 나오는 교회 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가당치도 않은 거예요. 그래서 교회 충성하는 사람은 교회 놀이만 평생 했다는 거예요. 권사, 장로, 집사, 목사, 다 같이 교회 놀이 한 거예요. 심방 다니는 놀이, 구역 예배하는 놀이. 은사가 있어버리면 그게 교회가 아님이 폭로가 되어버리니까. 은사는 ‘나도 이만큼 살만하고 나도 이만큼 잘난 존재’라는 것을 날마다 방해합니다. 그것은 왜 그런가 하면, 인간은 전부 다 가면들을 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초창기 하나님이 아담에게 준 은사가 뭐냐 하면, 죄 짓는 은사였거든요.
자꾸 써보니 기분 좋네요. 죄짓는 은사를 유도하기 위해서 주께서 선악과 따먹게 했습니다. 아담이 만들어지자마자 막 기어가서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 아니에요. 나름대로 엄청 참을 대로 참았습니다. 그 선악과가 자꾸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는 것 같아요. 어떻게? 먹음직도 하고, 보암 직도 하고, 탐스럽기만 한 것 같아요. 마치 ‘언제 따먹을래? 언제 따먹을래?’ 10년 동안 참았다? 아무소용 없습니다. 20년 참았다? 소용없습니다. 결국 따먹을 수밖에 없었고 또 따먹는 것을 유도하기 위해서 주께서 뱀까지 치밀하게 집어넣었어요.
그 때는 뱀이 기지 않았거든요. 뱀이 와가지고 날마다 “먹어라. 따 먹어라. 맛있단다. 언제까지 을이 될래? 갑 질해야지.” 계속해서 와가지고 “너도 신이 될 수 있다. 너도 신이 되고 싶지 않느냐?” 이렇게 하거든요. 결국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마치 커튼 뒤에 뭐가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커튼을 확 제쳐보니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속았지요. 뱀한테 속았고 하나님한테도 속은 거예요. 아무것도 없어요. 가면이었습니다. 가면 뒤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거예요. 서로의 가면만 자랑 질하고 가면 가지고 경쟁한 겁니다.
그런데 로마서 5장에서는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거지요. 그것이 하나의 은사의 시작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저 모든 인간을 새까맣게 칠해야 된다는 거예요. 모든 것을 새까맣게 주께서 붓질을 해야 돼요. 이걸 가지고 ‘육’이라 합니다. 육은 그저 육신이 있다는 것을 끝나는 것이 아니에요. 육은 계속해서 뭔가 튀어나오는 기제, 또는 기계에요. 저 뒤에 있는 난방기 교체했습니다. 휴게소에서 쓰는 것과 같은 기종으로 바꿨습니다. 우리 교회는 광고 이렇게 합니다. 계속해서 우리는 어떤 기계인가 하면, 뭘 해도 죄가 되는 기계로 주께서 사용하십니다.
그런데 그것이 가면인 줄 몰라요. 내가 이렇게 사는 이것을 나라는 인간은 종결되고 정립이 된다고, ‘나는 이런 것이구나.’ 하고 확정되는 것으로 오해했지요. 언제까지? 다른 은사가 올 때까지, 메시아가 올 때까지 ‘나는 그저 나대로 태어나서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다.’ 이렇게 생각했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죽음이 끝이 아니야.” 하고 사흘 만에 부활할 줄은 누구도 예상 못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상 못했어요. 이야기해줘도 예상 못했습니다. 부활을 믿은 사람은 예수님이 부활되기 전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성령이 오기 전에는 아무도 믿지를 않았어요.
이것은 모든 인간이 봐도 거울 안에 들어있지 않은 것이 새롭게 예수 그리스도가 거울 이쪽 편에서 저쪽 편으로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거기에 새로 생긴 것이 뭐냐? 은사입니다. 교회 되는 은사, 예수님의 몸이라는 새로운 은사의 발생입니다. 그러니 이쪽에 있는 사람들은 가면과 가면끼리의 경쟁이 되는 거지요. 하나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신성일이 잘생겼지요. 70이 넘어보니까 역시 잘생겼어요. 잘 생겼는데 잘 생긴 채로 지옥 갑니다. 이게 가면의 기능이에요. 잘 생긴 가면을 썼는데 그게 지옥 가는 은사에요.
그러면 반대로 이야기해 봅시다. 아무개는……, 여기서 누구라고 직접 지목하면 큰일 납니다. 아무개는 못생겼어요. 아무개는 못생겼는데 천국 갑니다. 그러면 못생긴 것이, 은사가 그 가면이 되는 거예요. 한 가지 예가 더 남아 있습니다만 차마 말씀 못 드리겠습니다. 차마 말씀 못 드리겠다고 하고 그만두면 찝찝하니 말씀 드리겠습니다. 잘생겨가지고 천국 가는 수도 있어요. 요거, 요거 꼭 이야기해야 되겠습니다. 어쨌든 가면은 가면인데 세상의 모든 고민과 걱정은 가면끼리의 헛된 경쟁에서 비롯됩니다. 가면의 유혹에 빠지지 마세요. 어차피 가면이에요. 그 가면 벗겨보세요. 없습니다. 죄밖에 없으니까 그 죄를 황급히 감추기 위해서 후딱 다른 가면가지고 교체해 버리지요.
‘나? 이런 존재였어.’ 그런데 그게 또 실패로 끝나면 또 다른 가면을 얼른 다시 깔아버립니다. 왜 그런 짓을 하느냐? 왜 그런 짓을 하느냐를 제가지목해서는 안되고 우리 주님에게 맡겨야 되겠지요.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6장 53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다시 한 번 읽어볼게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평생 50년, 60년 교회 놀이해봐야 거기에 생명이 없다는 그 말이에요. 인자의 살과 인자의 피를 마셔야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마실 방도가 없어요. “이 떡볶이나 먹어라. 그리고 된장찌개 먹어라.” 하면 이것은 충분히 먹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인자의 살과 인자의 피를 마셔라.” 이것은 도저히 먹고 마실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이 말씀을 하고 난 뒤에 60절에 보니까,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 대.” 불가능성이지요. 그래서 61절에,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가라사대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결국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다 떠나갑니다.
그들은 왜 떠나갈 수밖에 없는가? 평소에 하던 행세가 육으로는 경계선을 넘어 거울 쪽으로 넘어가려고 하는 거예요. 은사 없이 구원받으려고 하는 거예요. 은사 없이 교회 다니려고 시도하다가 예수한테 걸려들어서 다 실패자로 떨어져 나간 겁니다. “가거라!” 그리고 예수님이 옆에 있던 제자들 보고 “너희들도 가지 왜?” 주님은 이야기했습니다. 제자들도 못가요. 그래서 예수님이 요한복음 6장에서 정답을 내리지요.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결국 내게 올 수 없다는 것을 계속 밀어붙이는 거예요.
“내게 올 수 없다.”가 텅, 텅, 텅, 오는 거예요. 멀리 있어도 내게 올 수 없었고 가까이 코앞에 있다고 해서 내게 올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아무리 예수님을 보고 연구해도 그리스도 몸이 될 수가 없습니다. 육과 영 사이에는 경계선이 있어서 육이 경계선을 넘어 영으로 갈 수가 없어요. 텅, 텅, 텅, 귀신이 오듯이 그냥 다가오는 겁니다. 우리는 움찔, 움찔, 물러나지요. 그렇게 물러나도 난감하기 짝이 없습니다. 건너갈 수가 없어요.
아까 이야기했지요. 세상은 메시아 없는 삶을 산다고. 그러면 메시아를 집어넣으면 되지 않겠는가? 집어넣을 방도가 없는데요? 왜? 우리의 육신에 있는 죄가 이 메시아가 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요. 일요일에 어쩔 수없이 교회는 오지만 월, 화, 수, 목, 금, 토는 내가 주인공 되고 싶은 삶이 우리의 사는 행복이고, 나의 연대기고, 나의 역사고, 나의 사는 보람이 되는 겁니다. “내 힘으로 인생 이렇게 이루었다!” 이렇게 외치고 싶어요. 그리고 그게 가면인데 평생 가면과 가면의 대결에서 남에게 기죽지 않고 살고 싶은 것, 그것이 우리의 소박한 소망이 되고 말았습니다.
불가능성만 제가 계속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들고 이렇게 오늘 본문가지고 약을 올리는가? “그리스도 몸이란 은사가 나오는데 은사를 받은 사람만이 그리스도 몸이다.” 이것은 백날 이야기해야 소용없는 거예요. 원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싫다고 해서 끝나버릴 문제도 아니에요. 계속 밀어붙이니까. 예수님을 두 번째 아담이라고 하거든요. 천국 가는 하나님의 은혜와 은사는,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옵니다. 이 이야기 하면 속으로 ‘그건 우리가 이미 알고 있습니다.’ 막 이렇게 하고 싶지요. 그거 알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죄는 의와 결합이 안돼요. 따라서 죄를 죽여 버려야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의로 오신 것이 아니고 죄 속에 들어와요. 죄 없으신 예수님이 죄 속에 들어옵니다. 죄 속에 들어와서 어떻게 죄를 마감 짓는가 하면, 본인이 죽어버려요. 죄 없는 분이, 죄의 세력에 의해서, 죄한테 공격을 당해서 죽어버립니다. 그러면 죄는 나를 공격한다는 방정식이 확립이 돼요. 예수님을 죽이는 것도 죄지만 예수님은 내 죄 때문에 죽었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이 더 큰 죄가 되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우리한테 죽고 난 뒤에 “네가 나를 죽였잖아.” 하고 다시 들어와 버려요. 그러면 계속해서 예수님을 죽인 자가 되면서 우리는 뭘 로, 죄인으로 확정이 됩니다. 간음, 살인, 그런 것으로 죄가 되는 것이 아니고 마지막 죄는 “내가 주님을 죽였습니다.” 하는 것으로 확정되는 겁니다. 사실은 내가 죽인 것이 아니지요. 내 속의 아담의 범죄가 죽인 거지요. 나는 죄의 하수인으로서의 역할을 하면서 의에 대해서 “내가 죽였습니다.”라는 것이 심겨질 때 비로소 예수님의 은사가 우리 속에 들어온 것이 돼요.
예수님이 죽었기 때문에 산 사람은 예수님의 죽음 세계에 들어갈 수가 없어요. 불가능해요. 마치 거울 속에 들어갈 수가 없듯이. 거울은 비춰주기만 할 뿐이지 거기에 들어가지는 못하거든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못 들어가는 것을 주께서는 죽음을 통해서 해내시고 다시 이쪽으로 건너왔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건너왔느냐 하면, 성령의 은사로 건너왔거든요. 장례식 할 때 관을 천으로 덮잖아요. 그 천을 은사로 보면 됩니다. 그 천이 죽은 자로부터 계속해서 만들어져서 한 사람에게는 복음 전하는 자로 덮어씌우고, 또 한 사람은 통역하는 자로 덮어씌우고, 또 한 사람은 통역하는 자, 또 한 사람은 병 고치는 자, 또 한 사람은 교사로, 이렇게 덮어씌우는 거예요.
덮어씌워버리면 이것이 우리와 함께 죽고 난 다음에 덮어씌운 관이기 때문에 그 은사가 은사를 발휘하고 있는 나를 가만두지 않고 늘 죽여 버려요. “너는 이미 죽었잖아. 정신 차려! 너는 이미 죽은 자야. 이미 이 땅에서 좀비야.” 우리가 유령이 아니면 가면을 써야 되거든요. 그런데 은사는 우리가 쓴 가면이 의미가 없다는 것을 벗겨내는 죽음의 힘으로 계속해서 소위 살았다는 우리 위에 작렬하게 돼요. 참 제가 희한한 말을 해서 죄송합니다만 어쨌든 이 말이 맞아요. 이 말이 맞다고 제가 장담하고 싶은 것은 예수님을 언급할 때는 그냥 언급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우리 손에 죽었다가, 이미 죽음세계로 건너갔다가 죽음세계에서 다시 나타나신 현존하신 분으로 우리에게 은사라는 것을 가지고 텅, 텅, 텅, 다가오고 있다는 그 말이지요.
그리고 그런 자들의 모임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몸, 그걸 두자로 하면 교회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는 교회가 될 수가 없어요. 누가 교회를 파괴시키고 죽여줘야 교회가 돼요. 있는 교회가 살아 있는 교회를 죽여줘야 그게 교회가 된다니까요. 모든 일 하는 것이 산자가 일하는 것이 죽은 자가 일해요. 어제도 집사님들이 대전 다녀와서 피곤할 텐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추운데도 끝까지 일 했어요. 실은 그들이 죽은 자들입니다. 죽은 자들이 일을 한 거예요. 어떻게 아는가? 티내지 않거든요. 유난떨지 않고, 나대지 않고. 은사란 그런 겁니다.
뭘 했는데 내가 한 것이 아니고 죽은 나를 산 하나님이 가지고 살아 있는 하나님이 일했기 때문에 죽은 나는 거기서 조금도 공로를 떼 낼 수 있는 어떤 자격이 박탈되어 있어요. 이제부터 좀 어렵습니다. 정신 차려야 돼요. “그렇다면 그 일이 왜 신약에서 예수님 때문에 일어나는가?”라고 하신다면 이것이 오늘날의 일이 아니고 옛날 구약 이스라엘에 이미 있었습니다. 구약 이스라엘에 있었던 일이란 뭐냐 하면, 메시아와 함께 하는 삶이었습니다.
제가 아까 설교하면서 우리는 메시아 빠진 인생을 산다고 했지요? 그러니까 구약의 하나님, 진짜 하나님과 관련성 없는 인간인거예요. 그러니까 일요일에는 교회 놀이, 잠깐 동안 교회 친목놀이 하다가 월요일부터는 자기일 한 거예요. 메시아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겁니다. 그런데 구약에는 이미 메시아와 동행하는 삶을 살았어요. 이스라엘 자체가. 그 이스라엘은 열두 지파로 되어 있고 열두 지파는 누구의 아들인가? 야곱의 아들이에요. 야곱이 하는 고백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창세기 47장 9절에,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험악한 세월을 보냈나이다. 나그네 세월이었습니다. 나그네 길이었습니다.”라고 고백해요. “130년을 내가 끌고 온 것이 아닙니다.” 나그네로 살아왔다는 말이지요. 이 말을 지금의 버전으로 바꾸면 이렇습니다. “60되어서 날 데리러 왔거든 진즉에 가고 싶었다고 전해라.” 이렇게 되는 거예요. “안 그래도 언제 불러주는가 기다렸다고 전해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못 간다는 것이 아니고. “진즉에 좀 오지.” 그런 뜻입니다. 그게 나그네 삶이에요. 그런데 그 나그네 삶을 우리가 흉내 내면 안돼요. 왜? 야곱은 이런 고백이 나오기까지 자기 맘대로 살았어요. 그래서 제가 여러분 보고 마음대로 살라고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이게 어려워요. 주님과 동행하면 사람들은 상식적으로 주의 말씀을 순종하려고 합니다. 그게 땡입니다. 그게 바로 죄에요. 인간은 율법주고 십계명 주면 그대로 살려고 해요. ‘적어도 나는 그리스도의 성도다. 나는 성령 받고 하나님 믿는 백성이기에 전에는 막 살았지만 이제부터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게 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겠는가?’ 그게 바로 죄의 은사입니다. 그게 아담의 죄라고 보면 돼요. 살인, 간음, 그것만 죄가 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죄의 자투리고 진짜 죄는 뭐냐? 말씀에 순종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행위를 하겠다는 이것이 바로 꼬깃꼬깃 감추어놓은 악마의 발톱이에요. 악마의 발톱.
왜 그 악마의 발톱을 교회가 전하는가? 그래야 교회가 장사가 되고 영업이 된다니까요. “여러분, 예수 믿음으로 구원 끝!” 이러면 장사가 안 된다니까요. “여러분, 성화가 남아있는데 왜 그냥 도망갑니까? 성화해야지요.” “목사님, 성화 어떻게 하면 됩니까?” “시간과 봉사를 바쳐야지요.” 구체적으로 돈 바치라는 그 말이에요. 돈 내라는 그 이야기에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없이 무슨 교회가 되겠어요? 어떤 이야기도 결국 돈으로 연결돼요. 왜냐하면 그 교회가 목사의 가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목사의 신성일이거든요.
자기가 얼마나 잘난 존재인지를 정립하기 위해서 교회 온 사람들, 그 악마의 발톱에 다 말려듭니다. 야곱은 막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막산 야곱, 요셉도 마찬가지로 막 살았어요. 아브라함은 물론이고요. 약속하지도 않은 자식인 이스마엘을 낳았잖아요. 그리고 명령하지도 않았는데 애굽에 가서 자기 아내를 성상납 했잖아요. 그리고는 막대한 재산을 확보해서 돌아왔잖아요. 모든 행동이 자기 맘대로 사는, 육신대로 사는, 막사는 인생이었습니다.
동행이란 말을 오해하지 마세요. 주님과 조율해서 사는 것이 동행이 아닙니다. 순종해서 사는 것이 동행이 아니에요. 너는 너대로 막살고 나는 나대로 막 사는 것이 동행입니다. 누가 나와 함께 동행을 할까, 그것은 최성수가 이야기한 것이고 주와 함께 동행을 한다 해도 소용이 없어요. 우리가 동행이라고 해도 그것은 그냥 말 뿐입니다. 동행이란 말은 자기 맘대로 사는 것이 미안해서 말만 붙이는 것이고 동행이라는 말 백날 해도 돌아서면 자기 맘대로 살아요.
그리고 하나님 알고, 복음 알고, 성령 받아도 역시 그 행세 어디 갑니까? 교회 나오고 목사가 되고 해도 역시 속은 부글부글, ‘내 맘대로 사는 것이 제일 편하더라.’ 그래 네 마음대로 살아. 네 맘대로 그냥 살면 되는데 ‘그래도 성도니까 찬송할 때는 박수도 열심히 치고 일찍 예배당에 와야지.’ 그래, 언제까지 가는가 한 번 보자. 제가 전에 여러 번 이야기했잖아요. 교회 처음 등록하고 난 뒤에는 열 한 시 예배인데 열시 반에 나온다고요. 두 번째 나올 때는 이십분 전 열 한시에 나오지요. 세 번째는 십분 전 열한시에 나오고. 한 달 지나면 이제는 열한시 오 분에 나와요. “차가 밀려서……”
이 이야기 괜히 했네요. 이 이야기로 여러 사람이 다칠 것인데. 잘 하신 겁니다. 두 달에 한 번씩 나와도 되고 석 달에 한 번씩 나와도 괜찮아요. 왜? 그게 나한테 편하니까. 편한 대로 사시면 돼요. 문제는 누가 안면, 목사의 시선, 교인들의 시선, 이제는 거기서 해방되세요. 오늘도 복음 나갑니다. 자유하세요. 제발 교회라는 데서 벗어나세요. 교회로부터 탈피하세요. 가면에 립스틱 칠한 것밖에 안돼요. 가면에 메이크업 한 것밖에 안됩니다. 위선에 위선을 추가한 것밖에 안돼요. 그런 짓 제발 우리교회는 그만 합시다. 그만, 그만, 제발 그런 짓 그만합시다. 은사가 여러분을 30분 일찍 나오나, 석 달 만에 나오나 주의 은사는 한 결 같이 너는 없고 너는 나의 포대기다. 나의 죽음, 예수님의 시신을 덮은 포대기로서 휘젓고 살아가게 되어 있어요. 은사가 있으면.
은사의 특징이 있습니다. 나는 개판인데 이 개판은 주님의 잘남에 대한 하나의 재료가 되고 밑천이 되고 그게 하나의 성분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 은사의 종류가 나오는데 이 은사는 그 당시가 계시가 종결되기 전까지의 은사기 때문에 이것은 말씀전파와 관련된 은사들을 본문에 나열한 거예요. 본문에서 사도나 선지자나 통역하는 것, 이 모든 것은 이 복음, 하나님의 말씀전파와 관련된 겁니다. 물론 그것이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지요. 사도행전 20장 28절에 보면,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여러 번 이 대목을 강의에서 많이 한 적이 있어요. 교회라 하는 것은 성령이 보낸 그 감독자가 가진 복음에 의해서만 교회가 되는데 그 복음의 핵심이 뭐냐? “자기 피로 사신 교회”에요. 인간이 재주피워서 만든 교회와 한번 비교해 보라는 겁니다.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것, 인간이 할 수 있는 것과 주님이 피로 사신 교회와 한번 비교해 보라는 겁니다. 인간의 교회는 모든 것이 가능성, 가능성, 가능성 가지고 밀어붙입니다. “여러분, 왜 노십니까? 왜 순종 안합니까? 왜 헌금 안하십니까? 왜 충성 안하십니까? 할 수만 있으면 아름다운 교회 될 수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 사랑하면 사랑의 교회가 됩니다.”
그게 바로 가짜 교회에요. 여러분, 평소에 여러분 맘대로 막 사시지요? 막 살아보세요. 막 살아보시면 거기서 여러분은 스스로 진짜 교회라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이게 진짜 교회에요. 이 이야기 하는데 속이 왜 이렇게 시원한지 몰라. 예수님과 살과 피를 누가 먹습니까? 죽인 자만이 먹을 수가 있어요. 예수님을 본인이 죽였다고 수긍하는 사람만이 예수님의 피가 생명이 되는 것을 압니다. 왜? 나는 시체 되기를 싫어하기 때문에. 내가 싫어하는 것을, 내가 못하는 것을 주께서 미리 앞당겨서 주께서 저쪽 죽음의 세계에 가셔서 그 죽음의 세계에서 부활하셔서 천국을 마련하셨어요. 그래서 그 마련하셨다는 티를 은사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건너와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이 건너가신 그 경로를 계속해서 우리에게 이야기합니다.
야곱은 자기 인생을 나그네 길이라고 했습니다. 그 나그네 길을 좀 더 구체적으로 한다면 방향 바꾸기를 주께서는 쉬지 않았습니다. “아니야, 그쪽 아니야. 그거 아니야, 아니야.” 계속해서 방향을 틀어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막살고, 막사는데 내 뜻대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고. 그게 방향틀기입니다. 그리고 수시로 순간순간 우리가 고백하는 것은 “주여, 제가 나그네 길인데 우리 조상들 간 곳에 합세하라고 이렇게 주께서 관여하시는군요. 주께서 이렇게 관여안하면 제가 무슨 수로 그 길을 찾아가겠습니까?” 그저 가면 바꾸는 것, 평생토록 한 것이 ‘나는 이래서 잘난 놈이다.’ 그거 증명하는 가면바꾸기로 일관된 인생, 주께서는 “하늘나라에서는 너 벌써 죽은 자로 간주해. 그 가면 소용없어.” 나중에 죽을 때 되면 힘 빠져서 그 가면도 쥐고 있다 놔버려요.”
감사하기는 우리로 하여금 가짜로 살게 하시면서, 그게 감사하기는 내가 가짜인 것을 어렴풋이 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미완료 속에 완료가 이미 들어와 버린 거예요. 우리는 오늘은 이 인생, 내일은 저 인생 살면서 자꾸 완료가 안돼요. 결국 나그네 인생, 정체되어 있으면서 그게 완료가 안 되고 완료라고 착각하지만 돌아서면 또 그게 아니고 다른 것을 찾게 되어 있어요. 우리는 항상 미완료밖에 없는데 이 미완료를 미완료로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완료가 우리 속에 삽입이 되어 있을 경우에만 그게 가능하다 그 말이지요.
갈 때까지 가보지. 그것은 불교입니다. 그것은 은사도 아닙니다. 그냥 도 닦는 사람들이 하는 짓이고 진짜 은사 받은 사람은 “참 모든 것이 내 맘대로 사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구나.” 이것은 이렇게 안다고 해서 내일이 개선될 여지는 없어요. 내일 되면 또 마찬가지로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은사라 하는 것은 죽은 신의 도래, 찾아온 거예요. 그 뒤에 우릴 위해 남겨진 그 무엇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은사에서 매일 그 경로가 이탈되고 있다는 것, 그런데 은사가 경로의 이탈 된 것을 고정시켜 주거든요. 그게 31절에 나옵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미리 해답을 드립니다. 그게 바로 사랑입니다. 이어지는 고린도전서 13장을 사랑장이라고 하지요. 김 세환이라는 가수가 부른 노래가사가 죽 나옵니다. 그 사랑은 우리 몫이 아니고 주께서 주시는 겁니다. 따라서 사랑이 미완료된 우리 속에 들어오면 우리는 인생을 어떻게 살았든, 어디서 뭘 하면서 어떻게 살았든 그것마저 다 합체되어서 그게 사랑이 되는 겁니다.
주께서 이런 나를, 이렇게 제멋대로인 나를 이미 처리했다는 그것을 통보해주는 그 사랑. 그래서 우리는 내가 어떤 인간이었기에 십자가 어린양의 피로 그냥 건너뛰듯이 구원받았는가? 그것은 앞으로 한평생 살아가면서 그 때 그 때마다 새롭게새롭게 맘대로 무슨 짓도 다 하게 되면서 그 안에게 녹녹하게 발췌하게 될 것입니다. ‘아, 이러니까 주께서 사랑하셔야 되는 구나.’라는 것을 날마다 느끼며 살아가는 사랑의 그리스도의 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육이 어떻게 영의 나라에 가겠습니까? 그냥 흉내 내고, 우리끼리 장난치고 놀이하면서 가짜로 간다, 간다, 천국 간다, 헛소리 하고 있었지만 정작 그것마저 죄라는 사실, 마귀의 장난인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나를, 나그네 길을 방향 잡아줌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더욱 더 죄 되게 하시는 그 의의 은사가 우리에게 넘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