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고린도전서76강- 함께하는 영광(고전12;25-27) 160117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1. 22. 07:44
2016-01-17 12:43:46조회 : 150         
   함께하는 영광160117 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함께하는 영광(고린도전서 12:2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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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6-01-17 13:34 
함께 하는 영광

2016년 1월 17일                                  본문 말씀: 고린도전서 12:25-27

(12:25)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12:26)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12: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지금의 우리 육신으로는 다른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함께 고통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상대적으로 신이 나고 기분이 좋아집니다. 차라리 우리의 고통은 남은 예상 밖으로 잘되는 상황이 벌어질 때입니다. 사람이 사는 재미는 남을 씹는 재미입니다. 설사 함께 고통받고 싶어도 몸이 떨어져있기에 동일한 공감대를 형성할 수가 없습니다.

결국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인간의 행함으로 달성할 수 있는 말씀이 아닌 것입니다. 즉 행함과 행함이 모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리스도 몸’ 되기에 관한 내용이 아닙니다. 차라리 그리스도 몸의 현재화는 인간의 손에서 벗어나는 가운데서 실현됩니다. 말씀이 말씀대로 실시되는 것은 인간의 행함이 아니라 주님의 행하심입니다.

즉 성령의 임하심입니다. 고린도전서 12:13에 보면,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성령을 받는 자들만이 그리스도 몸을 이루는 겁니다. 그렇다면 성령받은 자를 통해서 어떻게 ‘한 지체가 고통당하면 같이 아파’할 수가 있을까요?


실제로 그런 사람이 있기는 있단 말입니까? 요한복음 3:8에 보면,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령님을 우리 인간이 붙잡을 수 없는 것은 마치 바람을 붙잡아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성령으로 난 사람이 실제로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사람이 누구입니까? 구약부터 봐야 합니다. 열왕기상 22:19에 보면, 미가야 선지자가 나옵니다. 그는 ‘천상회의’를 본 사람이라서 지상의 그 어떤 정치적 압력이나 회유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시느냐가 중요하지 인간이 뭐라고 하는 것은 그에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또 있습니다. 예레미야 23:18-19에서, 예레미야는 거짓 선지자를 의식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여호와의 회의에 참여하여 그 말을 알아들었으며 누가 귀를 기울여 그 말을 들었느냐 보라 여호와의 노여움이 일어나 폭풍과 회오리바람처럼 악인의 머리를 칠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성경은 철저하게 영과 육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이제 그 사람의 내부에는 예수님이 점령하셨다는 말입니다. 마치 아이들의 자석놀이와 같습니다. 종이는 원래 쇠가루가 붙지 않습니다. 하지만 종이를 중앙에 띄우고 밑에는 쇠가루를 뿌려놓고, 종이 위에서는 자석을 움직이며 종이 아래 쇠가루가 붙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도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성도 내부를 예수님이 접수하셔서 자기 영역으로 거주하게 되면, 외부에서 작용하는 말씀에 대해서 성도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게 됩니다. 성도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말씀 준수자는 성도가 아니라 성도 안에 계시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성도에게 성령이 오셨다는 말은 ‘죽은 자로부터 연락왔다’는 식이 됩니다. 죽으신 분으로 점령당한 몸이 바로 성도의 몸입니다. 이 성령이 오므로서 비로소 성도는 본인의 몸을 그동안 악마가 가지고 놀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악마는 집요하게 따라다니면서 인간의 고유 가치를 절대로 남에게 넘겨줘서는 아니된다고 말합니다.

즉 너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네 뿐이다 는 겁니다. 그래서 누가 아프다할지라도 도무지 우리는 같이 아파할 방법을 모릅니다. 실은 처음부터 불능한 문제입니다.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오면서, 예수님은 ‘귀신을 쫓아내시는 일’을 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귀신이 나간후 달라진 사람들의 고백은 한결같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보다 더 귀한 분’이 계시는다 는 사실입니다. 사실 모든 인간, 모든 인류는 각자 자기 자신의 가치성을 최고 귀한 보물로 여깁니다. 자기보다 더 귀한 것은 없는 법입니다. 그런데 그런 최고의 가치마저 포기케하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과 사귀면서 도리어 자신의 악마성만 부각되었습니다.

예수님에게 대들고 미워하는 것이 본인들이 의지요 뜻인줄 알았습니다. 실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인간 내부를 장악한 악마였습니다. 악마의 노림수는 오직 하나, 예수님을 최고의 가치자리에 두는 것을 도저히 참을 수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강력하게 저항하게 됩니다. 이런 모습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들은 나름대로 ‘마음의 손거울’을 하나씩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어떤 인간이어야 하는 것을 본인이 묻고 본인이 답합니다. 하지만 성령이 임한 성도는 새삼스럽게 하나님에게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본인들은 예수님의 업적의 답,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즉 본인 위주로 본인의 팔자를 개선해보려는 시도는 부질없는 짓이다 라는 말입니다. 인간 본인이 나서면, 실패와 성공을 따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에게는 실패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공도 없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자신의 신세에 대해서 실패니, 성공이니 하면서 따질 입장에 있지 아니합니다.
신약에 들어와서 성령님께서는 성도들이 자기 자신에게 묻고 답하지 않게 하십니다. 도리어 십자가 피 앞에 세우십니다. 그곳에서 성도의 위상은 뭐라해도 ‘죄인임’을 분명히 해두십니다. 그리고 그것이 고정 신분입니다. 그래서 평소에 자신의 가치를 떠벌이는 것은 분명 성령님의 일이 아니라 자아가 자기하고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악마는 인간의 가치를 부추겨줍니다. 너의 가치를 포기하지 말고 좌절하지 말라. 빛 볼 때가 언젠가 온다고 격려해줍니다. 하지만 이러한 악마의 수법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이 절대적 죄인이다가 확정지어졌음을 애써 부인하게 만듭니다. 성도 본인이 요지부동으로 죄인임을 알 때, 비로소 같은 그리스도 몸의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함께 고통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성도의 주체자가 본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즉 예수님이 아픔이 전달되는데 이는 단순히 이성적 행위가 아니라 충동으로 일어나게 됩니다. “주님 제가 형제의 아픔에도 반갑고 즐거워하는 죄인 맞습니다”라는 식으로 고통을 함께 나누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몸에 작렬하는 ‘자기 의’를 챙기라는 악마의 수법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6-01-18 05:59 
174강-고전 12장 25-27(함께 하는 영광)160117-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2장 25-27절입니다. 신약성경 278페이지입니다.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성경 보면서 대충 넘어가면 안 됩니다. 주의 일일수록 정확히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 지체가 고통 받으면 다른 지체가 고통 받는 일은 이 세상에서는 없습니다. 우리 인간세계에는 이런 일이 없습니다. 내일도 신경 못쓰는데 남의 일까지 신경 쓰는 게 어디 있어요? 성경 정확히 생각해야 돼요. 한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다른 지체가 즐거워하지 않습니다. 나만 영광스러워야 내가 즐겁습니다. 그게 우리 사는 것이지요. 성경에 나와 있다고 근처도 안 갔는데 자꾸 그걸 흉내 내고 억지를 부리시면 안 됩니다.



천국 가는 것이 억지 부린다고, 떼쓴다고, 어린양 부린다고 넣어주는 것이 아니거든요. 성령께서 성경을 가지고 정확하게 “천국은 이런 식으로 간다.” 분명히 이야기했으면, 되지도 않고 있을 수도 없는 것을 가지고 끼워 맞추려고 그렇게 무리수를 써서는 안 됩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한 지체가 고통 받으면 다른 지체는 좋아합니다. 씹는 재미가 사는 재미에요. 남이 못되는 재미가 행복을 가져다줍니다. 무슨 한 지체가 고난 받으면 같이 우는 그런 것은 없습니다. 우리 그런 것 없기. 그런 짓 안하기. 이게 우리 본성에 맞아요.



남 부자 되었다는데 좋아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콩고물 떨어지면 그 때 좋아하지요. 남이 잘되었다는 말은 내가 주저앉았다는 말인데 남 잘되는 것은 배 아픈 일입니다. 이게 정확한 거예요. 이게 팩트(fact)입니다. 어떻게 한 지체가 고통 받는다고 해서 내가 같이 아파요? 언제 봤다고? 무턱대고 교회 다니시고 무턱대고 성경보시면 안됩니다. 정확하게 해야 돼요. 따라서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이 대목을 자기에게 적용시키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 누구도 성경을 내가 지켰다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분명히 하고 가야 됩니다. 손잡고 어깨 동무해가면서 “사랑하는 형제자매.” 노래 불러가면서 해 봐야, 사랑하는 형제는 돈 빌려주는 형제 외에는 사랑하는 형제는 없습니다. 전부 다 돈과의 관계에요. ‘부모님사랑’ 하지만 유산 남겨주는 부모가 최고의 부모고 빚 남겨주는 부모는 제일 미운 부모에요. 전부 다 돈과 돈이 연관 뿐에요. 이 성경 몇 번 봤습니까? 고린도전서, 이 성경 백번도 더 봤을 거예요. 백번 보면 뭐합니까? 나하고 상관없는데.



상관없는데 억지를 부리는 거예요. 교회 광고하기를, “여러분, 아무개가 몸이 아픈데 기도해주세요.” 자기 기도도 안하는데 남 기도할 새가 어디 있어요? “우리교회 아무개 집사님이 사업이 잘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다 축하해주시기 바랍니다.” 다른 교인들이 ‘치, 헌금이나 많이 내라.’ “이번에 아무개집사님 자녀가 서울대학에 들어갔습니다.” 하면 “에이, 너는 뭐하고 있나?”하고 자기자식 쥐어박기 바빠요.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는다.” 어림도 없는 이야기, 현실성 뚝 떨어지는 이야기, 전혀 우리한테 해당되지도 않는 이야기.



그래서 성경입니다. 그래서 지켜서는 구원 못 받게 하시는 게 성경입니다. 아무리 노력하고, 신앙생활 50년하고, 목사 장로 되고, 신학박사가 되면 뭐합니까? 이거 하나, 26절, 이 본문하나도 제대로 못 지키는데. 이것도 못 지키면서 기도는 또 잔뜩 해요. “죽으면 천국가지요? 오늘밤에 낙원에 가지요?” 네 마음대로 어딜 가요? 맘먹는다고 다 되는 줄 아십니까? 성경에서 이런 말씀을 제시하는 것은 천국 가거든 기적인줄 알라는 거예요. 정말 이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 벌어진 줄 알라는 겁니다.



이제부터 제가 있을 수 없는 일을 이야기합니다. 방금까지는 있을 수 있는 일을 이야기했습니다. 늦게 오신 분위해서 다시 이야기합니다만, 있을 수 있는 이야기가 뭐냐? 한 지체가 고통 받으면 다른 지체는 고통 같은 것은 어림도 없다는 것, 이것이 있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 “한 지체가 고통 받으면 다른 지체도 고통 받는다.” 하는 그것의 스타트, 출발점이 있어요. 고린도전서 12장 13절에 있습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이걸 현대버전으로 바꾸면 “우리가 IS나, 알카에다나, 한국 사람이나, 인도네시아사람이나 한 성령을 받으면 한 몸이 되었고.” 그 이야기입니다. 김정은에게 속한 사람이나 남쪽에 있는 사람이나 한 성령 받으면 한 몸이라는 그런 이야기에요. 제가 “한 지체가 고통 받는다고 해서 다른 지체가 고통 받는 일은 우리에게 있을 수 없다.”고 누누이 말씀드리는 것은 이것은 성령의 세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지 우리가 행하라고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초반부터 기쁜 소식 들어가지요? 우리가 행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이것은 성령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행하는 것과 성령의 이야기가 어떤 점에서 차이가 나기에 그 차이를 두는가?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들어내고 우리를 튜브로 만들어요. 훌라후프를 보면 둥글게 되어 있지만 그 속은 비어 있지요. 튜브도 마찬가지고요. 거기에 어떤 액체 같은 주체가 흐르는데 저는 그걸 액체주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의 주체가 그 빈 훌라후프, 액체주체 속을 돌아다니는 겁니다. 성경은 바로 그걸 지목하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나의 손모가지 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네가 이렇게 행하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네 속에 이질적인 것, 낯선 것, 예상도 못한 요소, 나 말고 다른 주인공이 나를 훌라후프처럼 사용해서, 나를 튜브처럼 만들어서 그 속에 뭔가가 흐르고 있는 거예요.



포석정에 술잔 띄워서 흘러가게 하듯이. 경주에 있는 포석정 알지요? 귀족들 술 먹고 놀 때 게임했다는 그 장치처럼 우리 속이 하나의 포석정처럼, 우리가 주도하거나 우리가 붙잡을 수 없는데 늘 상 흐르고 있어요. 어릴 때 하던 자석놀이가 있습니다. 쇳가루를 뿌려놓습니다. 그리고는 종이를 위에서 붙여 봅니다. 본래 종이와 쇳가루는 서로 붙지 않습니다. 그러데 종이 위에 지남철을 두게 되면 안 붙는 그 종이에 쇳가루가 들러붙지요. 우리 몸이 종이라면 붙을 수 없는 천국 가는 영생이 이 되지도 않는 우리 몸에 달라붙어서 우리로 하여금 성령의 사람 되게 하는 거예요.



우리는 다른 지체가 고통 받는다고 해서 함께 울 그럴 위인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나 잘 되는 것 밖에 생각

안 해요. 그런데 그게 다인 줄 알았는데 우리 속을 다른 분이 들어오셔서 그 다른 분이 내가 지킬 수 없는 성경말씀을 홀로 지켜내면서 우리 안에 주인공으로 자리 잡는 것, 이거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내 인생 끝났어요. 내 인생 후벼 팠습니다. 호박 파야 호박 안에 뭘 넣든지 하지요. 다 파 들어가는 거예요. 그동안 내 자랑, 내 잘난 맛에 살아갔는데 그걸 다 파는 겁니다. 파고 내 안에 성경말씀에 합당하게 사시는 분이 내 안에 자리 잡습니다. 이걸 가지고 예수의 사람, 성령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3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 6절부터 제가 읽어드리면 ‘이건 수천 번 들었다.’ 하실 거예요. 수천 번 듣기는 들었는데 글쎄요.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8절에 보면,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제가 8절을 말씀을 강하게 언급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성령은 바람같이 온다는 그걸 강조하기 위함이 아니에요. 성령이 바람같이 임의로 분다는 그것은 여러분이 아시는 것이고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그것도 아시는 것이고 제가 여기서 오늘 본문과 관련지어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겁니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하는 그 대목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이니까 하나님 뜻대로 그렇게 일한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한다 치는데 성령으로 난 사람이 실제로 있다는 겁니다. 이게 신기한 거예요.



성령으로 난 사람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게 희한한 일이에요. 인간은 다 거기서 거기 아닙니까? 그만그만한 인간들 아닙니까? 그게 다 죄인이고 그뿐이잖아요. 그런데 요한복음 3장 8절에 보면, 인간들이 다 죄인인 것은 맞는데, 다 육인 것은 맞는데 성령으로 난 사람도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이 본문을 강조하는 것은, 그런 사람이 성경에서는 있다고 하는데 그런 사람이 어디 있는데요? 혹시 보신 적 있습니까? 집 나간 성령 받은 사람을 찾습니다. 성령으로 난 사람을 보신 적이 있어요?



구원이야기는 내가 구원받고 싶다고 손든다고 될 문제가 아니고 이 이야기, 요한복음 3장 8절부터 이야기가 돼야 돼요. 육으로 난 것은 하늘나라 갈 수 없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라 성령으로 난 사람도 있는데 그들도 간다. 이렇게 돼야 돼요. 그러면 성령으로 난 사람을 찾아야 되는데, 본인이 성령으로 난 사람인지 그것도 파악해야 되겠고요. 하여튼 성령으로 난 사람이 누군지를 찾아야 되겠는데 특징이 있어야 되거든요. 성령으로 난 사람의 어떤 특징이 있어야 찾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특징이 뭐냐? 착한 일을 많이 하고, 기도를 많이 하고, 교회 봉사 많이 하고, 랄라라, 이런 이상한 소리로 기도하는 사람 아닙니까? 그것은 아니지요. 구약성경에 보면 열왕기상 22장에 미가야 선지자가 나옵니다. 미리 말씀드립니다. 성령으로 난 사람이 있어요. 있는데 아무 특징이 없어요. 그걸 말씀드리고자 하는 겁니다. 열왕기상 22장 20절에 보면, 미가야 선지자와 거짓선지자가 400대 1로 붙었습니다. 400명이 전부 다 예, 라고 할 때 미가야는 혼자 아니오, 라고 나선 사람이에요. “노회 총회 목사님들이 다 ‘예스’라고 하는데 네가 뭘 믿고, 네가 우리보다 잘난 것이 뭐가 있는데 ‘노’라고 하는가?”라고 하니까 미가야가 이렇게 합니다. “미가야가 가로되 그런즉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내가 보니 여호와께서 그 보좌에 앉으셨고 하늘의 만군이 그 좌우편에 모시고 서 있는데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가 아합을 꾀어……”



천상회의를 본 거예요. 누가? 미가야가. 미가야선지자가 천상회의를 볼 때 몸단장하고, 이발하고, 정화수 떠놓고 빌고, 전혀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성령을 따내기 위해서 사전에 헌금하고, 봉사하고, 전도하고, 그런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성령을 받기 위해서 회개하거나 반성했다는 그런 것도 전혀 없었어요. 성령을 받기 전에 어떤 특징 같은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냥 천상회의를 본 거예요. 그리고 남이 보지 못한 천상회의를 그냥 이야기하는데 그게 성신이 임한 사람의 특징입니다.



예레미야 23장 18절도 마찬가지에요. “누가 여호와의 회의에 참예하여 그 말을 알아들었으며 누가 귀를 기울여 그 말을 들었느뇨.” 예레미야가 지금 거짓선지자를 향하여 이야기하는 거예요. “네가 천상회의 참석해봤어? 해 봤어?” 이렇게 하는 거예요. 구약 때 선지자들은 성신을 받았는데 그 성신 받은 것이 뭐냐? ‘자기가 성령을 받으면 이럴 거야.’ 하고 예상한 어떤 기대, 그런 결과를 낳기 위해서 빡세게 기도하고, 자기를 학대한다든지 전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야말로 성령이 임의로 불매, 그냥 지나가는 바람이 불어 닥친 것뿐이에요.



그래서 성령을 받은 사람의 특징이 뭐냐? 자기의 소원대로 받은 적이 없다는 것, 자기가 예상하지도 않았다는 것, 기대치도 않았다는 겁니다. 가서 툭, 치듯이 그냥 툭 쳤는데 보니까 땅의ㅏ 일이 아니고 하늘의 일을 받은 거예요. 세례요한도 말합니다.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요 3:27) 주겠다는데 안 받는다는 것도 이상하잖아요. 그러니까 세례요한 본인이 그렇게 되고 싶어 한 것이 전혀 없어요.



정리해 봅시다. 나는 성령 받아서 구원 받고 싶다. 일체 사전에 그런 욕심 부리지 않기. 아예 그런 것 없기. ‘성령 받아서 주의 일 하면서 영광 돌리다가 나중에 천당 가야지.’ 그런 것 예상 안하기. 그런 것은 자기가 쓰는 소설이에요. 그런 것 없기입니다. 이게 구약이에요. 그러면 신약은 어떻게 되는가? 신약은 이렇습니다. 이미 죽어버린 자에게 연락이 오는 것, 이게 성령 받은 겁니다. 누가 봐도 죽은 자에요. 예수님은 누가 봐도 죽은 자입니다. 마치 이순신 장군에게서 연락이 오면 기가 막힐 것이 아닙니까? ‘박수무당이라도 해야 하나?’ 이렇게 될 거 아닙니까?



이미 죽은 분에게서 어떤 연락이 올 때 그게 성령 받은 거예요. 본인도 미치고 환장할 지경입니다. 죽은 분과 연락하려고 애쓴 것도 아니에요. 그냥 연락이 닿은 거예요. “잘 있었나? 사울아!” 이런 식으로. “사울아, 사울아! 네가 나를 핍박하는구나.” 괜히 저쪽에서, 주님 쪽에서 연락이 와요. 예수 믿는 사람 잡아 죽이려고 가던 그 길목인데 괜히 저쪽에서 연락이 왔다니까요. 연락이 오게 되면 전혀 외형 같은 것은 바뀌지 않습니다. 뱃살이 들어간다든지, 근육이 생긴다든지 전혀 외형의 변화는 없어요. 똑같아요. 똑같은데 사람이 바뀌었어요.



사람이 그야말로 이상하게 바뀌었어요. 그 전까지는 남들과 똑같이 내가 중요해요. 그런데 주님으로부터 연락받고 난 뒤에는 “너보다 예수님 내가 더 중요하다.” 하는 겁니다. 나보다 더 귀한 것을 알게 된 사람,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귀한 분을 내가 점유해서 다룰 수 있는 능력은 나에게는 없습니다. 왔다 가시든지 갔다가 또 오시든지 그것은 내가 관여할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한번 성령이 오게 되면 두 번 다시 영원토록, 천국 가서라도 영원토록 떠나지 않는다는 일방적인 약속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해 주셨습니다.



가만있는데, 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그냥 쑤시고 들어온 거예요. 왜 그런 약속을 주님이 하셨느냐 하면, “나 예수다. 알았지? 노트에 적고 공부 열심히 해야 한다. 난 간다.” 이게 아닙니다. 그것은 구약 때 그래요. 구약 때는 성신이 왔다 갔다 했어요. 신약 때가 되면 주님께서 성령으로 인 치심을 해 버리면 우리의 허름한 몸을 성령이, 예수님이 자기 자리라고 접수해 버려요. 앞에 있는 문패가 바뀝니다. 브랜드가 바뀌고. “값을 주고 샀으니 너는 내 것이다.” 하고 통째로 접수해 버렸어요. 이제 죽이 되든지 밥이 되든지, 반죽을 해서 수제비를 하든지, 칼국수를 하든지, 뭘 하든지 간에 너는 끽소리 말고 내가 주무르는 대로 그냥 있어야 돼요.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성령으로 난 자가 다 이러하니라. 이렇게 빚어서 꽃병을 만들든지, 어떤 사람은 천한 질그릇을 만들든지 그것은 다 주님소관이에요. 어떤 사람은 가난하게 하고, 어떤 사람은 부자 되게 하고, 어떤 사람은 일찍 자식 죽게 하고, 어떤 사람은 자식이 잘 되게 하고, 그것은 주님 소관이지 “이것 주세요, 저것 주세요.” 마트에 가서 물건 장바구니에 담듯이 할 입장이 못 됩니다.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기도가 스톱이 돼버려요. 기도가 스톱된다는 말을 하니까 또 기도가 스톱된 것을 보니 성령 받았다고 자랑 질 하지 말고요. 그런 억지 부리지 마시고요.



기도가 스톱이 되면서 이제는 내가 이성적으로 따져서 하는 기도 말고 충동적으로, 내 허락도 안 맞고 튀어나온 기도가 있습니다. ‘내가 미쳤나? 무섭지도 않나? 내가 이런 기도를 왜 하지?’ 이게 튀어나옵니다. 성령에 의해서 기도하는 거지요. 성령에 의해서 기도한답시고 하늘에 붕붕 떠서 하는 그런 것 말고요. 감기약 두병만 먹으면 붕 떠요. 약물 과다 복용하면 천국 갑니다. 그런 것 말고요, 성령의 기도는 나의 아픔을 동반하면서 이루어지거든요. 성령이 오기 전까지는 몰랐지요. 성령이 오게 되면, 과연 우리 자신 속에 뭐가 있었는가? 귀신이 내 몸을 자기 욕구대로, 자기 욕망대로, 욕심대로, 탐욕대로, 쾌락대로, 자기 향락을 만족시키는 쪽으로 꾸준히 다루어온 거예요.



기쁨중의 최고의 기쁨, 최고의 희열, 향락은 뭐냐? 내 가치가 극대화되고 내 자존심이 최고가 되는 그것이 마귀가 제공하는 가장 큰 기쁨입니다. 그 기쁨이 어떤 종류의 기쁨인가? 아침부터 이런 예를 들려고 하니 복음을 위해서 좀 참아주시기 바랍니다. 천주교의 어떤 수녀는 문둥병자의 몸을 씻은 그 물을 마십니다. 그게 바로 최고의 쾌락입니다. 그러다 그 수녀가 문둥병에 걸리기는 걸렸는데. 바로 이런 짓거리까지 해요. 마치 남들 보기에는 지고지순한 신앙덩어리처럼 보일 거예요. 마귀가 제공하는 최고의 쾌락이 바로 그겁니다.



그 단계는 자아실현의 단계라고 하는데 그 단계 이전의 단계가 뭐냐? 시시한 것들이 있잖아요. “나 부자 되었다.” 이런 단계는 저 끝에 있는 것. “부자 되었다.” 이것보다 더 높은 단계는 그 부자 된 것을 아낌없이 사회에 환원하는 이 쾌락, 이게 더 마귀 적이에요. 그것보다 한 단계 높은 것, 한 단계 더 나아가게 되면 정의사회 구현하는 이런 것. 민주화 투쟁하다가 교도소가서 사형당하는 이런 쾌락. 마귀가 하는 쾌락의 특징이 뭐냐? 인간이 지어낼 수 있고 예상할 수 있는 그 극단의 것을 마귀는 실현시킨다는 겁니다.



제가 왜 막 살라고 하는지 알아요? 이 마귀를 알거든요. 마귀를 알아요. 내가, 내가, 이게 계속 나옵니다. 끝까지, 내가 어느 지경까지 그리스도를 닮을 수 있고 그리스도 근처까지 접근해 갈 수 있는가를. 이거, 마귀가 내민 최상의 카드가 이 카드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한 분으로 족합니다. 의인은 한 분으로 족해요. 그리고 튜브같이 내속에 흐르는 그 주체는 예수님 한 분으로 족해요. 내가 거기서 끼어들 입장이 못 됩니다. 우리는 그 의인에 끼어들지 마세요.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마귀가 가장 추구하는 것은 뭐냐? 자기 의를 키우고 포기 못하는 것.



설교 다시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에서 성령 받은 그리스도의 한 몸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리스도 몸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이게 너무나 우리하고는 상관없는 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동안……성령이 왔으니까 성령이 왔다 치고, 정말 왔다면 좋겠습니다, 왔다고 치고, 성령이 오게 되면 내 몸은 내가 주인공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나를 주인공이라고 자꾸 밀어주는 마귀가 실제적인 나의 주인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래서 “너는 어떻게 하든 네가 네 인생의 주인공이 돼야 돼.”라고 계속해서 우리를 격려하고 독려해 온 겁니다.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째 손 내밀어 일으켜 주는 거예요.



“언젠가 너는 성공해야 돼. 구원에 성공해야 되고 사회적으로 성공해야 되고 남한테 인기 있는 사람 되어야 되고 네가 남에게 사람답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도록 너는 분투노력해야 돼.” 계속해서 우리를 격려합니다. 실패하지 말고 성공하라고. 그런데 성경에 보면 실패라는 것이 없어요. 왜냐하면 성공이 없기 때문에. 이미 주체, 호박을 다 파냈기 때문에 내 쪽에서 나를 보고 성공이니 실패니 할 수 있는 대상 자체가 이미 물 건너 가버렸습니다.



구약에서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에 오기 전까지 그 가운데 뭐가 있었는가? 바로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이 있어요.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이 있습니다. 그 많은 일들 중에서 마태복음 10장 8절에 보면, “귀신을 쫓아내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고 심지어 제자들도 귀신을 쫓아냈는데 귀신을 쫓아냈다는 그 이야기를 우리가 성경에서 분명히 보고 있거든요. 보고 있으면서 우리는 귀신 쫓아내는 일을 오늘날 정신과의사들이나 하는 일인 줄로 알고 우리하고는 상관없다고 생각해요.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냈다는 말은 귀신을 쫓아내고 난 그 다음에 그 사람이 어떤 모습인가? 그 모습과 현재의 네 모습과 비교해보라는 겁니다. 자기 딸이 귀신들렸던 여인은 주님 앞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주여, 제가 개가 맞습니다.”라고 했다고요. 이게 귀신이 나가고 난 뒤에 주님께서 손댄 그 여인에게서 나오는 고백입니다. 마태복음 8장의 백부장의 경우는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나이다.” 삭개오의 경우에는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마 19:8) 막달라 마리아의 경우에는 울면서 갖고 있던 향수를 다 뿌리면서 “이것을 나를 위해서 쓸 이유가 없습니다. 이것은 주님을 위해서 쓰여야지 날 위해서 쓰는 것은 안 됩니다.”



정말 귀신 나간 특징이 뭐냐? 겸손했다, 자기를 낮추었다, 내려놨다, 그런 상투적인 말은 때려치우고요. 한마디로 말해서 이렇습니다. “주님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하는 그 고백이에요. 무슨 말이냐 하면, 성경을 볼 때 우리는 해석하잖아요. 해석을 우리가 하지 마세요. 해석은 주님이 하고 그 해석한 답이 뭐냐? 그 답이 우리 자신이에요. 이미 해석이 끝났어요. 내가 새삼스럽게 분석해서 어떤 행동을 맞추려고 할 필요가 없어요. 주님이 해석하시고 해석에 맞춰서 주님이 어떤 결연한 행동을 하셔서 오늘날 우리 같은 인간이 된 겁니다.



그 사실을 성령 받은 사람은 알기에 “주님, 제가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주의 은혜 맞지요? 그렇지요?”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는 그 작업이 사도행전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사도행전 8장에 보면 거기에 성령이 옵니다. 귀신이 나가는 정도가 아니고 본격적으로, 노골적으로 성령이 와버립니다. 성령이 와버리면 귀신이 나가고, 병을 고치고, 문둥병이 낫고, 앉은뱅이가 낫고, 그런 세트, 삼종이나 사종세트가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어차피 이 몸은 분리수거해서 버릴 몸이니까 버릴 몸이 꼭 건강해야 될 필요는 없잖아요.



성령으로 난 사람 같으면 문둥병이 되었든 감기가 걸렸든, 그것은 주인공이 바뀌었기 때문에 병이 걸리든, 병이 낫든, 그것은 주님이 알아서 할 문제이기 때문에 내가 병 나으면 성공, 별 걸리면 실패, 성공과 실패를 내가 따질 입장이 못돼요.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 지고 난 뒤에 죽으신 분에게서 연락이 오게 되면 그 사람은 성령이 임한 사람이고 예수님 자신이 일하시는 현장인데 그 현장에 성령이 오게 되면 그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구원받았으니까. 더 이상 구원이라는 말을 안 하고 이제 주님의 구원이 어떠한 능력이 있는가를 세상을 향하여 쓰시는 기능인으로 활용을 해주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남을 모방할 필요가 없고 흉내 낼 필요가 없어요. 어떤 사람은 기도 2시간 하고 어떤 사람은 5초 한다고 5초짜리가 2시간을 따라갈 필요는 없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헌금을 5원하고 어떤 사람이 10원을 한다고 해서 5원이 10원을 따라갈 필요는 없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술 끊고 담배 끊었다고 해서 그 사람 따라서 술 끊고 담배 끊을 필요는 없는 거예요. 갑자기 기쁜 소식이……? 왜 그런가 하면, 어차피 술 끊고 담배 끊는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오게 되면 “내가 술 담배 하는 그것도 주께서 시켜서 한 일이 맞지요?” 이렇게 나온다는 말이지요.



그걸 흉내 내면 또 안돼요. 술을 좋아서 먹으면서 ‘음, 나도 저러면 되겠네.’ “주님이여, 나도 술을 먹는데 주께서 시키신 거지요?” 그 이야기가 사도행전 8장의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하다가 얻어맞은 사람이 있어요. 베드로가 기도할 때 성령 받는 것을 보고는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얼마면 돼?” 돈 주고 성령 주는 능력을 사려고 했어요.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안수를 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성령이 오니까 유대인의 제사장 스게와와 일곱 아들이 그 흉내를 내요. 그 때 귀신이 나가면서 그냥 나가지 않고 그 가짜한테 덮치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아주 유명한 말을 했어요.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악귀 들린 사람이 그 두 사람에게 뛰어올라 억제하여 이기니 저희가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행 19:15-16) 너희는 누구냐. 아, 영적세계가 이렇게 무섭지요. 제거되어야 될 자가, 성령도 안 받은 자가 성령 받은 사람 흉내 낸다고 해서 그게 하늘나라 테스트에 통과되겠습니까? 귀신도 아는 이야기인데 주님이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다시 말씀드립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나보다 더 귀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겁니다. 나보다 더 귀한 것. 그리고 주님은 나를 위해서 일하지 않고 나보다 더 귀한 것을 위해서 나를 활용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한 현장은 항상 이렇습니다. “자, 봐라. 너보다 더 귀한 것이 여기 있잖아. 봐라. 너만 최고야? 너만 잘나면 되겠어? 아니지? 너보다 더 귀한 것이 있어. 그게 누구냐? 너야.” 이 말이 어려워요. 너보다 더 귀한 것이 너라는 겁니다. 처음의 너라는 것은 내가 붙잡는 나인 반면에 성령이 왔을 때는 안 붙잡아도 이미 모든 것이 해결 난 나, 주님 안에 있는 나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주님 안에 있는 여러분에게 제안합니다. 오늘부터 손거울 보지 마세요. 물론 육체의 거울을 보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마음의 손거울을 보지 마세요.



성령이 오게 되면 손거울을 빼앗아 버립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자신과 끊임없이 대화하는 이것이 문제에요. 자기 자신과 끊임없이 대화해요. 내가 지금 잘났나, 못났나, 난 저 사람보다 성공했나, 저 사람은 잘 되었는데 나는 왜 일이 안 풀리나, 모든 것이 자기 자신하고 대화하는데 그게 뭐냐 하면, 그게 손거울입니다. 그 손거울을 확 빼앗아 버립니다. 사람이 왜 보석을 그렇게도 좋아하는가? 평소에 보석 없는 나가 보석을 걸친 나를 목표로 삼아서 어떻게든 그렇게 해보겠다고 할 때, ‘나는 ……다.’라고 할 때, 내가 보석도 없는 여자라고 하는 것은 이미 내가 생각하는 거울 속에 있는 보석이 있는 나를 염두에 두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 염두에 두고 있는 손거울을 빼앗아버립니다. 제가 지난 수요일에 그런 설교를 했습니다. 몇 명 오지도 않았어요. 왜 사람들이 목사, 장로, 국회의원, 장관, 재벌2세, 3세, 왜 그걸 붙잡는가 하면, 진짜 본래의 주께서 지정한 자리가 뭐냐 하면, 십자가 앞에서 죄인이거든요. 그걸로 자리가 이미 끝났어요. 우리는 뭘 해도 이미 죄인입니다. 그런데 그 죄인의 자리가 얼마나 귀한 줄을 모르고, 그것은 시답지도 않고, 귀하지도 않고, 내가 되고 싶은, 맨날 책보고 거울 보면서 ‘나는 이런 인간이 되어야지.’ 그러한 가짜 나를 목표로 삼다 보니까 ‘봐라. 내가 목표대로 재벌이 되었잖아. 봐라 국회의원 되었잖아. 봐라. 목사 되었잖아.’ 이걸 가지고 남 앞에 내세우는 거예요. 그게 바로 내 속에 있는 주님의 성령에 대한 저항입니다.



이것은 마귀와의 싸움이에요. 그걸 염두에 두고 주께서 뜯어내는 겁니다. 귀신이라는 유령, 나라는 유령이 제일 무서운 유령이거든요. 다른 유령은 떠나도 문둥병이 씻은 물을 마시는 그 위대한 나, 그 귀신은 못 떠나요. 누구도 뜯어내지도 못해요. 그 수녀 내가 보면 다 뺏어버릴 참이에요. “수녀 하지 말고 아줌마 하세요.” 성령이 와서 그걸 빼앗아버려요. 내가 구상할 수 있는 최고의 거룩함과 성스러움을 주께서 빼앗아버립니다. “너는 죄인이야. 죄인이면서 왜 자꾸 고상한 의를 추구하느냐?” “주여, 어떻게 제가 죄인입니까?” “같은 형제가 아파해도 너는 안 아파하잖아.” “그러네요.” “그러니까 네가 죄인이잖아. 남 잘되면 네가 시기나지? 그러니 죄인이잖아.” 성령 받게 되면 그리스도 몸이 되는 거예요. 그리스도 몸에게는 주께서 말씀을 주십니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즐거워하나니.”



우리는 될 수가 없지요. 왜 될 수가 없는가? 우리는 이렇게 내가 되고자 원하는 대로 그 손거울을 내가 쥐고 있어요. 내가 나하고 대화하고 있는 거예요. 내 속에 있는 나의 유령과 나하고 대화하고 있는 거예요. 이것을 빼앗아버려요. 빼앗아버리면 십자가 앞에서 나는 죄인이 되는 겁니다. 죄인의 입장에서 이 사실이 함께 확 한꺼번에 우리에게 쏟아져 들어옵니다. 이런 말이 있지요. “참 발이 아름답네요.” 평소에 이런 대화를 하잖아요. “참 발이 아름답습니다.” 혹은 “머리가 아주 예쁘게 나왔습니다.” 이런 이야기들 하지요.



발이 아름답습니다, 머리가 예쁘게 나왔습니다, 하는 이 말은 머리만 예쁘다는 말이겠습니까? 발만 예쁘다는 말이겠어요? 나머지는 말할 것도 없다는 뜻이에요. 작은 것이 영광스럽다는 이 말은, 이 죄인을 주께서 영광스럽게 본다는 말은 내가 보기에 밉상이라도 주께서 영광스럽게 보고 있다는 사실을 십자가를 경유할 때, 성령을 경유할 때, 온 지체가 함께 공감할 때 그게 바로 오늘 본문의 성취입니다. 문제는 각자 자기 잘되고 혹은 안 되고, 이런 손거울을 갖고 있는 이것이 오늘 본문을 가리는 거예요. ‘나는 이렇게 잘났는데 너는 나보다 못났다.’



이 손거울을 성령이 와서 “에라, 어디서 유령을 보고 이야기를 해? 하고 빼앗아버려요. 빼앗아버리면 졸지에 ‘아, 내가 십자가 앞에서 죄인이 맞지. 돈 없어도 그만이고,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죽는다고 해도 잘하신 것이고, 몸이 아파서 온 몸이 욥처럼 종기가 난다고 할지라도 주께서 다루시고 활용하는 기능이고, 이런들 저런들 주께서 하신 것’이라고 할 때 이제는 같은 형제들이 발견됩니다. ‘나처럼 저분도 저렇게 쓰시는구나. 저분 아픈 것도 저분 잘못이 아니야. 조상의 죄도 아니고, 가계의 저주가 흘러서도 아니고, 본인의 잘못도 아니고 주께서 저렇게 쓰고자 하기에 저 사람에게 저런 눈물이 흐르는구나.’



그렇다면 내 눈에 눈물이 흐를 때에도 주께서 그렇게 쓰시는 거예요. 이로써 우리는 그분의 아픔을 십자가를 통해서 공유하게 되는 겁니다. 문제는 그겁니다. 죽은 자로부터 연락이 왔습니까? 전화벨소리가 울려서 수화기를 들어보니까 “나 예수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이런 연락을 받았습니까? 메시지를 받았습니까? 그 메시지 받은 것을 어떻게 아는가? 다시 이야기합니다. “나보다 더 귀한 그분이 계시다. 그 귀한 분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 나보다 더 귀한 분, 나는 이제 그분이 다루시는 지체가 되었다.”



이것이 인정되신다면 “성령이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에 해당되는 사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누가 뭐라고 해도 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고 뻐기면서, 그것을 평생의 인생관으로 확고하게 붙잡으면서 살아왔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바로 마귀의 손거울인 것을 이제 알았사오니 성령께서 오셔서 그 손거울을 우리 손에서 잽싸게 빼앗아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