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강-고전 12장 4-7(은사의 실체)151220-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2장 4-7절입니다. 신약성경 277페이지입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은사라는 것, 이것이 개인의 것이라면 “은사는 여러 가지고 사람도 여러 가지다.” 이렇게 되어야 될 텐데 여기에 “은사는 여러 가지나”라고 해서 사람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여러 가지가 아니고 한 분의 나타남이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라고 해서 사람들이 “이 직임은 내거야.”라고 나의 고유한 것이라고 우겨도 그 우김은 잘못이라는 겁니다. 직임이 사람마다 각자 있는 것 같은데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주님의 것이요,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역사, 그 일하는 모양새는 여러 가지고 다 다르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여러 가지로 여러 사람들의 개성 따라 차이나는 그 모든 것을 여러 가지에서 하나로 모을 수 있는 것이면 그것은 은사고, 여럿에서 다시 여럿으로 그냥 유지된다면 그것은 날조된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서 ‘왜 나의 은사가 나의 것으로 와서는 안 되는가?’ 주님의 은사라고 이야기를 해야지 내가 받은 나의 은사라는 말을 왜 해서는 안 되는지를 우리가 알아야 돼요. 교회에서 은사를 뭐로 바꾸는가 하면 달란트로 바꾸어버려요. 교회에서 달란트를 요구하지 은사를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은사라고 하고 성경에 나오니까 은사가 마치 달란트가 같은 것이라고 도매금으로 넘기고 말아요. 그러며 그 동네는 은사가 없이 달란트만 있는 셈이에요.
은사라 하는 것은 달란트 자체를 없애버리는 기능이 있어요. 달란트를 언급한다는 것은 은사를 싫어한다는, 은사라는 것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그 의도를 내는 셈이 되어버립니다. 왜 은사를 싫어하느냐하면, 은사는 모든 것이 하나로 되거든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은사를 달란트처럼 취급해버리면 달란트는 각자 받은 것이 따로 있다는 말이지요. “네 달란트는 몇 개인데?” 이런 식으로요. 옛날 어릴 때 딱지치기하잖아요. “네 딱지 별 몇 개인데?” “나는 별이 네 개다.” 이런 식이죠. 각자의 고유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내 것으로 와서 계속 내 것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의사가 있는데 은사는 그것을 부정해 버립니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아요.
어릴 때 여름철에 먹던 아이스깨끼가 있잖아요. 얼마나 맛있습니까? 한참 햇볕이 쨍쨍 내리쬘 때 그거 사들고 집에 오는데 나중에 다 먹고 남는 것은 바짝 마른 작대기 하나 달랑 들고 옵니다. 처음 샀을 때는 크고 맛있어 보이지만 다 먹고 나면 막대기 하나밖에 남지 않지요. 소모가 되고 없어질 수 있는 그것은 달란트도 아니고 은사도 아닙니다. 그것은 그냥 자기 뽐내는 재주에 불과합니다. 주보에 보면 “재주를 가지고 있는 것과 은사를 받는 것하고는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인간들의 재주는 인간과 인간과의 차이를 나타내지만, 은사는 영원토록 반복해서 하나님과 인간의 차이를 나타냅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제일 중요한 단어는 “반복해서”라는 단어에요. 은사는 한마디로 뭐냐? 하늘에서 땅과 접촉하는데 하늘에서 보는 안목이 이 세상의 그 끝이거든요, 그 끝을 경계로 만들어서 하늘이 주저앉는 거예요. 주저앉는데 왕복해서 주저앉아요. 위에서 끝이라고 만든 이 경계선을 침범하고 다시 올라갔다가 반복해서 내려오고. 주물공장에 고압연마기가 있어요. 실컷 불에 달군 철광석을 집어넣고 위에서 강한 고압의 연마기가 반복해서 내려오면서 탁탁 칩니다. 치게 되면 단단해지면서 모양이 만들어지거든요. 그렇게 해서 염산에다 집어넣고 그런 작업을 거쳐서 단단하게 만드는 겁니다.
위에서 왕복, 반복해서 내리치는 거예요. 세상은 끝이다. 끝인데 그냥 끝이 아니고 경계선, 칼날처럼, 성도가 은사를 받으면 성도의 존재자체가 ‘세상은 이미 끝났네. 세상은 멸망 받아도 마땅하네. 아, 세상과 하늘나라의 차이점, 그 차이를 내는 경계선을 성도를 보면 알 수 있겠네.’라는 경계선 만들기를 반복해서 위에서 내리치듯이 계속되는 그 현상이 일어나는데 그 현상이 은사의 현상입니다. 써먹을 생각하지 마세요. 그것은 재주부리는 겁니다. 흔히 교회에서 말하는 달란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은사 안에 그런 능력이 있는 이유는 고린도전서라는 이 신약에 오기 전에 구약이 먼저 있었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 전체 줄거리의 그 마지막대목은 이스라엘의 멸망입니다. 이방나라는 곁들여서 멸망하지만. 그 이스라엘, 하나님이 친히 만들었다는 그 나라를 하나님이 친히 부셔버립니다. 자신이 세워놓고 자기가 세운 나라를 부셔버리는 그 멸망의 능력이 고린도전서 12장에서는 은사 안에 담긴 채 오는 거예요. 위, 아래, 위, 아래, 왕복하는 것처럼 이 세상이 끝났음을, 이 세상이 끝났음을 보여주는 그 능력이 성도에게 담겨서 성도로서 천국과 지옥의 경계선을 보여주는 형태로 성도에게 은사를 준 거예요.
성도가 은사를 가지고 어디가도 써먹겠다는 아예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무데도 써먹을 데가 없어요. 날카로운 칼날 같은 존재가 성도에요. 무딘 것 같으면 타인과 대화할 수 있는 소통의 영역이 있기 마련인데 이게 칼날이 되면 늘 올라설 자리가 없어요. 미끄러져 버려요. 은사를 받은 성도와 성도가 아닌 불신자와의 대화는 결국은 미끄러져요. “복음 이야기는 하지 말자. 다른 이야기나 하자. 그래, 정치이야기나 하자. 이 이야기는 하지 말자. 백세 인생, 그런 노래이야기나 하고 복음 이야기는 하지 말자. 분위기 살벌해서 못한다.”
세상은 성도라는 칼날이 없으면 두 조각으로 구분되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제대로 은사를 발휘해 버리면 교회는 세 조각 네 조각 나버립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은사 안에 담긴 능력이 무슨 능력입니까?”라고 물으신다면, 물론 물을 사람도 없습니다만 내가 묻는 거예요. 그렇게 묻는다면 하나님이 친히 세우신 교회를 작살내는 능력이 은사입니다. 교회를 어떻게 해보겠다고 하는 달란트, 그것은 사기고 진짜 은사는 하나님이 만든 이스라엘을 친히 멸망시키는 구약적 힘이 신약에 오면 성도를 가지고 위에서 내려온 끝을 보여준 경계선으로 활용하기 위해서 은사가 주어지는 겁니다.
왜 그래야 됩니까? 은사가 다양하게 오는 것은 소유하라고 다양하게 오는 것이 아니고 어떤 인간이라도 다이너마이트 폭발할 때처럼 조각조각내서 전부 다 하나로 만드는 거예요. 은사는 다양하나 그 회수하는 마지막 지점은 성령 오직 한 분뿐이어야 하기 위해서는 개인을 용납하지 않는 그 칼날 같은 작업이 은사 안에 들어 있는 겁니다. 병 고치는 은사, 방언하는 은사, 여기 본문에 여덟 가지 은사가 나오거든요, 믿음의 은사, 능력 행함의 은사, 영분별의 은사, 어떤 은사라도 그 은사 안에서 활용당하고 있는 당사자는 한 마디로 말해서 “병 고치는 은사가 대단하십니다.”라고 한다면 “나는 그 일로 인해서 죽었어요. 그 일로 인해서 나는 끝입니다.” 하는 식으로 나를 잡지 않고서는 은사가 나타나지 않게 되어 있어요.
이스라엘이 멸망되지 아니하면 이스라엘과 함께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힘이 바깥으로 나오지를 않습니다. 교회를 부수지 않으면 교회 안에 담겨 있는 진짜 교회를 인도해왔던 그 주님이 바깥으로 나오지를 않아요. 교회를 부수면서 부셔진 그 상황을 통해서 바깥으로 나오게 돼요. “목사님은 말을 왜 그렇게 험하게 하십니까? ‘달란트 개발하세요. 달란트를 개발해서 봉사하는 그것이 하나님나라의 확장입니다.’라고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의 죽으심, 하나님 아버지가 자기 아들을 죽게 하는 능력이 예수님의 연장된 활동기능가운데서 은사로 현재화되고 지금 계속해서 반복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버지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그 인도하심의 능력이 이제는 성도까지 이어져서, 성도가 그리스도의 몸이고 지체니까, 머리되시는 주님의 같은 몸에 붙어 있는 사지니까, 그 머리가 당했던 내력이 구원의 내력, 복음의 내용으로서 발휘가 되는 겁니다. 은사의 내용은 복음밖에 없어요. 복음은 십자가밖에 없고요. 십자가는 주님이 알아서 스스로 죽는 겁니다. 아버지 지시 따라서 스스로 죽어가는 겁니다. 뭘 더 기대했습니까? 달란트 제조하는 그거요? 은사 받았다고 하니까 “나는 이런 재주 받았다!” 하는 식으로 표창장 받는 줄 압니까?
칼날과 칼날, 왜 칼날을 받는가?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났으면 태어난 나를 절대로 포기할 맘은 손톱만큼도 없습니다. 딱 깨놓고 노골적으로 말해서 그렇습니다. 신앙이고 달란트고 은사고 하나님이고 다 귀찮아요. 사람 사는 것은요 자기 몸 하나 편하면 되는 겁니다. 설교 끝! 날 추운데 교회 왜 나오는데요? 누가 뭐 보는 사람이 있나요? 모든 것이 귀찮을 때는 만사가 다 귀찮아요. 따뜻한 구들장에서 등이나 지지고 젊은 애들 같으면 만화책이나 보든지, TV 보든지, 그저 편안하게 십 원짜리 고스톱이나 치든지, 그저 몸이나 하나 편하면 그게 내 신앙이고, 그게 내 하나님이고, 나의 종교고. 솔직히 그게 다가 아니에요? 교회 다니는 것이 내세를 위해서 보험 드는 식밖에 안되잖아요. 딱 깨놓고 솔직하게 이야기해서 이 몸이 요구하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저 편안하게 눕고 맛있는 것 먹으면서 살다가 편안하게 가는 겁니다. “못 간다고 전해라. 알아서 내가 날짜 받아서 갈 테니까.”
그게 얼마나 솔직한 거예요? 왜 우리에게 은사라는 것을 알기를 강요하고, 하나님 믿고 예수 믿는 것을 왜 쓸데없이 나에게 왜 강요하는데? 나는 내 몸 편한 그것이 최고인데. 그것이 솔직함인데. 모든 인간은 아무리 신앙생활 수십 년이라는 것을 장식처럼 해 놓아도 나중에 몸 아프고 불편하면 다 떨어지기 마련이에요. 다 떨어지게 되면 “그래, 편한 것이 최고다. 배부르고 등 따시면 최고다.” 차마 신앙인으로서 그런 말은 못하니 속에 꾹 눌려 있고 밖으로는 “주여!”라고 하지요. 제가 광주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손바닥을 이런 식으로 해서 빌면 무속신앙이거든요.
소녀의 기도처럼 이렇게 손을 모으면 그게 기독교라는 겁니다. 이게 뭐예요? 이렇게 하면 소녀의 기도라서 응답 받고 정화수 떠놓고 남산위의 노루새끼처럼 잘 뛰어놀게 해달라고 손바닥을 이런 식으로 비비면서 빌면 지옥 가는 겁니까? 두 손을 이렇게 모아서 비나 이런 식으로 비비면서 빌든지 다 등 따시고 배부른 것을 목표로 하잖아요. 그것뿐이잖아요. 그 이상의 되도 않는 성경용어를 내 귀에 들리게 말지니라. 안 듣겠다고 전해라, 못 듣겠다고 전해라, 이러면 끝나는 문제입니다.
왜 사도바울은, 예수님을 직접만난 사도바울은 은사를 왜 언급합니까? 주님이 너를 활용하겠다고 전해라. 네가 원하는 것이 네 몸 하나 배부르고 등 따신 것이라는 것을 알지요. 인간이 태어나서 원하는 것은 그것뿐이에요. 껍데기 같은 종교 다 떨어지고 나면 남는 것이 그것 하나뿐인데, 그거 아는데 그런 너를 방치하지 않고 그런 너를 사용하겠다고 전해라는 그 말이에요. 주께서 너를 사용하겠다는 겁니다. 사용한다면 사용료를 주시면 되지 않습니까? 사용료는 없어요. 끝, 끝을 보여주는 경계선으로 사용하려고 합니다. 인간은 어떻게 살아도 아무 의미 없음을 보여주는 용도로 사용하는 겁니다.
그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서 우리보다 먼저 선배가 있어요. 그 선배가 이스라엘입니다. 그 나라를 만들어놓고 없애버린 겁니다. 본인이 만들어놓고 본인이 없앤 거예요. 본인이 만들어놓고 본인이 없앰으로서 하나님이 얻는 이익은 뭐냐? 그것은 속에 있는 것을 바깥으로 끄집어내고 그 바깥에 끄집어낸 것을 쓰레기라고 지적할 수가 있어요. 이스라엘을 만들어놓고 이스라엘을 홀로 방치하고 내팽개친 것이 아니고 거기에 하나님께서 동행하셨거든요. 하나님이 동행하심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동행하신 하나님의 생각을 알고픈 마음은 없고 자기바깥에 펼쳐져 있는 너무나 잘 먹고 잘사는 이방민족이 부러웠던 겁니다.
도대체 너희들은 어떤 식으로 신과 교제했기에 그토록 잘 먹고 잘 사는가? 이슬람나라들이 석유도 안 나고 그야말로 다들 빈국이라면 알라신 믿을 사람 없어요. 석유도 나오고 복 받고 잘 사니까 믿은 겁니다. 한국에 기독교 처음 들어왔을 때에 선교사들이 밀가루 주고, 설탕주고, 학교에 공짜로 보내주고, 신식의료기술 베풀지 않았으면 그들이 교회 나올 이유가 없습니다. 그들이 유학 안 보내줬으면 교회 나올 이유 없었어요. 뭔가 새로운 것이 이익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겁니다. 5.16 이후에 교회가 번창했던 이유도 잘만 하면 잘 살수 있다는 그것을 믿음의 내용으로 삼은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은사의 내용은 내가 어떻게 열심히 믿으면 누구들처럼 잘 살수 있다는 그 희망을 교회가 심어준 거예요. 멸망이나 이런 의식은 전혀 없습니다. 교회 다니면 복을 받는데 그 복은 뭐냐? 내가 잘되는 복을 받는다. 그거였어요. 그래서 교회가 그래서 번창한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하고 전혀 상관없는, 그런 짓을 새삼스럽게 우리가 한 것이 아니고 구약의 선배들이 이미 한 겁니다.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신의 욕구와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기회로 삼은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멸망시켰습니다. 이스라엘을 멸망시킴으로 말미암아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진짜 본질이 그동안 그들이 원했던 세상 축복 때문에 가려져 있었는데 그 위치를 바꾸는 거예요.
속에 들어 있던 분을 바깥으로 끄집어내고 바깥에 있는 것을 안으로 집어넣습니다. 안으로 집어넣어보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이 되어버리고 바깥에 나오신 분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진짜 하나님의 의인은 우리한테 밉상 받았던 그분이, 우리한테 싫어버린바 된 그 분이, 또는 우리 손에 배척받고 무시당했던 그 분이 도리어 우리를 건져내시는 유일한 구세주인 것을 바깥으로 보여주는 그 내력, 경로, 그 과정이 은사로 내려 우리에게 오는 겁니다. 은사, 주님의 구원의 힘을 은사라고 합니다.
주님의 구원의 힘, 그 구원의 힘의 방식은 바깥을 안으로 집어넣고, 바깥에 나오는 우리의 노림수를 죄로 규정하고, 우리 때문에 멀리하고 싶었던 주님의 모든 소식이 유일하게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바탕이 된다는 것을 우리의 행동을 통해서 발산되게 하는 것이 은사 받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사도행전 3장 12절에 성전미문에 어떤 앉은뱅이가 있었거든요. 우연히 거기에 베드로와 요한이 지나가다가 마주쳤습니다. 그런데 이 만남은 우연이 아닙니다. 사도가 수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하나의 만남을 가지고 하나님의 구원의 진수를 알려주는 사건으로 활용될 때는 이것은 우연이 아니고 필연이에요.
거지가 요구한 것이 뭐냐? “돈 주세요. 돈 없어서 거지되었으니 돈만 있으면 사람 될 수 있습니다.”라는 자기의견을 제시한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사도는 섭섭한, 누가 들어도 섭섭한 발언을 합니다. “네가 달라기에 나는 줄 수가 없다. 네가 금과 은을 달라고 하니 줄 수가 없다.” 이것을 오늘 본문의 말로 하면 이렇습니다. “은사 주세요.” 하니까 “네가 달라고 하는 은사이기에 내가 줄 수 없다.”고 하는 겁니다. 어렵습니까? 더 어렵게 말씀 드릴게요. 말하는 주체와 말의 내용의 주체가 다르다는 말입니다. 더 어렵지요?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될 때 “이 이스라엘이 영원하게 하옵소서.”라는 그 요구를 이스라엘이 한다면 그것은 말하는 주체에요. 그러나 그 말하는 주체 안에 이스라엘의 진짜 주인공, 진짜 주인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게 달라요. “하나님이여, 내 인생 천국가게 하옵소서.” 할 때 절대로 천국 넣어주지 않습니다. 내가 천국 가고 싶다고 해서 천국 간 사람은 천국에, 단언하건데 단 한사람도 없습니다. 예레미야요? 엘리야요? 모세요? 아브라함이요? 어떤 사람도 자기가 요청한 구원자는 없습니다. 자기가 요구한 구원은 성사되지를 못합니다.
가인이 제사를 드렸잖아요. 가인이 제사를 왜 드립니까?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드린 겁니다. 추수감사제를 드린 거지요. 실패했습니다. 하나님이 요청하기 전에 본인이 요청한 것 때문에 실패한 거예요. 제가 이런 이야기 하면 많은 사람들이 저에게 그런 질문을 해요. “그러면 목사님,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가만히 있으면 되겠네요.” 가만히 있는 다고해서 구원받겠다는 요구가 사라지는 겁니까? 가만있는 방식을 사용했을 뿐이지, 설치는 방식 대신에 가만히 있는 그 방식을 사용했을 뿐이지 ‘나 기어이 구원받고 말겠어.’ 하는 이것은 전혀 변동 없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되겠네요?”라고 할 때 그 사람은 모든 사람의 신발에는 신발밑창이 있다는 것을 몰라서 그래요. 인간의 존재밑창이란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뜻으로 우리가 이 땅에 인간으로 출발했다는 겁니다. 스스로 인간이 된 것이 아니거든요. 할아버지가 손자를 보는 인상은 손자가 할아버지를 보는 인상과 달라요. 갓난애가 눈인지 코인지도 구분 안 되는 모습으로 처음 나왔을 때 그걸 처음 보는 할아버지로서는 잊을 수가 없어요.
그리고 난 뒤에 한 7, 8년 지나서 할아버지가 손주를 보면서 하는 말이 “많이 컸네. 핏덩이 같았는데 많이 컸다.” 하는 것은 그 차이를 봐요. 잊을 수가 없으니까. 이게 에스겔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네가 피투성이라도 내가 건졌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보고 한 이야기입니다. 할아버지는 그 처음 자리와 지금의 차이를 이야기하는데 그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이유가 뭐냐? 처음 자리를 알기 때문에 하는 거예요. 처음을 알고 지금도 알고, 그래서 그 차이를 뽑아낼 수 있는데 그 소리 들으면 손주들은 기분 굉장히 나빠해요.
왜? “할아버지 지금의 나가 나입니다. 어릴 때의 나와 자꾸 비교하지 마세요. 지금 저 많이 컸어요.” 이러거든요. 이 말은 뭐냐? 그 애는 자기가 살아오는 동안 자기 어릴 때를 계속 삭제해 온 겁니다. 사람과 예수님이 만남이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 이유가 인간은 얼추 자기가 인간되게 되면 과거를 잊어버려요. 좋은 것만 기억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든 신발에 밑창이 있는 것처럼 우리의 밑창을 절대로 잊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네가 몸도 안 아프고 편하게 살고 고난도 없이 살았다 할지라도, 이것은 시편 73편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탈도 없고, 고난도 없고, 하나님을 안 믿으면서도 아무 일도 없이 만사가 형통이고, 모든 것이 웃음이고, 건강하고, 편안하다 할지라도 모래위에 지은 집과 반석위에 지은 집은 결과가 다릅니다. 끝이 달라요.
겉모습은 안 봅니다. 중심을 보십니다. 사람은 자기의 기초를 몰라요. 기초를 안다 할지라도 주께서 최후로 던져주시는 마지막 심판에 견딜 수 있는지 없는지를 본인이 판단을 못합니다. 저는 가끔 성경 보면서 장난스러운 생각을 해보는데요. 노아에게 만약에 방주가 없었더라면 방주 없는 상태에서 마지막 비 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노아가족은 무슨 짓으로 자기를 구원하려고 몸부림 쳤겠는가? 1번, 우산 준비한다. 2, 높은 곳으로 피한다. 아마 나름대로의 몸부림 칠거예요. 그게 바로 교회생활입니다. 아무 쓸데없는 짓을 해요, 지금.
마지막 최후의 주의 방법은 우리의 기초와 관련해서 조치를 했는데 우리는 많이 컸다고, 많이 성장하고, 성화되고, 착해진 이 상태에서 마지막 심판을 돌파해서 구원받으려고 쓸데없는 시도를 하는데 거기다 교회에서 장단을 치면서 “달란트를 개발하세요.” 이렇게 나오니까 그게 구원의 능력입니까? 은사를 개발하라니 은사가 개발용입니까? 이쯤 하면 지금까지 설교한 것 다 잊었을 거예요. 다시 하겠습니다. 은사란 왕복해서 칼날, 마지막 끝이 우리 속에 장착되어서 이 세상을 향하여 이미 세상은 인간의 어떤 수단과 어떤 몸부림과 방법으로도 천국 갈 길은 끝났다는 그걸 보여주는 기능이 은사에요.
성전 미문의 금과 은을 달라고 했을 때 사도가 은사를 발휘합니다. “나는 네가 달라는 것 때문에 줄 수 없다.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나한테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가지고 앉은뱅이가 새 생활을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받아서 걸었던 그 앉은뱅이의 운명과 팔자는 그에게 먼저 찾아왔던 베드로와 요한의 팔자와 같이 된 거예요. “앉은뱅이는 앉은뱅이고 사도요한은 사도요한이고 은사는 다르잖아요. 한쪽은 사도고 한쪽은 평신도인데 같을 리가 있습니까?” 다르지요. 다른데 같다는 이야기가 오늘 본문 내용이에요. 다른데 같아요.
하나는 사도로 기능을 하고 한쪽은 앉은뱅이로 있다가 이제는 낫겠다는 그 기능뿐이지만, 다르지만 하나가 돼야 돼요. 다르지만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다른 것을 가지고 하나로 수렴하는, 그것을 모으는 그 경로를 우리는 찾아야 됩니다. 이거 안 찾으면 소용없는 겁니다. “당신은 피아노 반주하고 나는 꽃꽂이 하니까 재주가 다릅니다.” 그러나 주님 보시기에는 “다 똑같아.” 왜? 피아노반주자는 반주하면서 ‘나는 죄인이다. 죽어 마땅해.’ 이러면서 하거든요. 그렇습니까? 무조건 한다고 해요. 지금 분위기상. 이거 친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은 아니니까 틀리더라도 봐주소, 그런 뜻이거든요.
베드로와 요한은 말합니다. “이거 내가 한 거 아닙니다. 왜들 이래요? 이 사람 낫게 한 것이 제가 아닙니다. 아, 나 정말 미치겠네. 하나님이여, 이런 수모를 꼭 당해야 되겠습니까? 제가 한 게 아닌데 왜 이렇게 제가 했다고 분산을 떱니까? 제가 한 것도 없는데 유난을 떠십니까?” “아이고, 사법고시도 합격하시고.” 합격자가 하는 말이 “미치겠네. 제가 한 게 아닙니다.” “머리도 좋으시고 공부를 하루에 열여덟 시간씩 했다고 하니, 참.” “제가 한 것 아닙니다. 다른 거 할 것이 없어서 한 거예요.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제가 한 것이 아닌데 제가 했다고들 하니 세상 참 살기 싫다. 세상 끝장나야 돼.”라는 투로 나올 때 그게 은사입니다.
사도행전 3장 12절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이렇게 합니다.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사도가 포함되어 있는 그 시대상황, 그 분위기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그 분위기와 동일한 분위기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경계선이거든요. 이미 구원을 받은 사람 쪽에서는 예수님이 희생했던, 예수님이 이 땅에서 죄인을 위해서 대신 의인으로 죽어야 했던 그 능력으로 우리를 구원하는 그것을 우리는 알고 있기에 우리는 어떤 행함도 자기 구원에 더 보탤 필요가 없음을 아는 겁니다.
이것을 가지고 무능력이라고 해요. 우리는 무능력으로 구원받았어요. 무능력으로 구원받은 것을 로마서 1장 17절에서 “믿음에서 믿음으로”라고 하는 거예요. 노아가 방주를 만들었다? 믿음에서 믿음으로 만든 겁니다. 아브라함이 선지자 노릇했다? 믿음에서 믿음으로 한 겁니다. 모세도 마찬가지고 엘리야도 마찬가지고 그들의 모든 공통점은 그들이 어떤 기적과 능력과 은사를 발휘했어도 그들에게서 마지막 나오는 것은 “우리는 무능력자”라는 그 하나에 집결됩니다.
제가 처음에 설교할 때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오늘 설교가 어려워서 반복합니다.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는 그 하나님이 처음부터 이스라엘 속에 품어 있다고 했지요. 이스라엘 속에 있는 분이 바깥으로 나오면서 필히 이스라엘은 망해야 됩니다. 이스라엘이 망하는 과정을 통해서 그동안 이스라엘을 이끄시던 그 하나님이 바깥으로 나오는 겁니다. 그 바깥으로 나오면서 좋게 나오지 않고 함께 있던 그 사람들을 멸망시켜버립니다. 그 능력이 예수님에게 들어가게 되면 예수님 본인이 이스라엘이에요. 예수님 본인이 야곱이라는 말이지요. 인자위에 오르락내리락 한다고 요한복음 1장 끝에 나옵니다. 나다나엘 이야기 나올 때 야곱이 꿈꾸었던 그 내용을 반복해서 보여주거든요.
그 말은 뭐냐? 내가 죽는 것은 이스라엘의 죽음의 본 의미를 이스라엘 속에 담겨 있는 분이 바로 나이기에 내가 과거에 이스라엘이 멸망한 그것을 다시 되풀이 하는 겁니다. 그분이 하나의 머리가 된다면 머리가 먼저 생기고 그 다음에 지체는 머리에서 새롭게 연장되게 되어 있어요. 머리부터 먼저 있고 나머지는 그 머리에서 뻗어 나오게 되어 있어요. 그 뻗어 나온 줄기가 바로 오늘 본문의 은사입니다. 은사는 머리가 있는 이상 없어지지 않아요. 소모 형이 아닙니다. 한번 은사는 영원한 은사에요. 이게 없어지지 않아요. 그런데 뻗어 나온 은사 속에 작용하는 것은 뭐냐?
예수님께서 새로운 관계를 새로 만들었다는 거예요. 어떤 관계를 만들었느냐? 바울서신에 오기 전에 공관복음이 있거든요. 예수님생애 중에 제자들과 함께 있던 그 일을 하나의 예로 들어서 새로운 관계인 은사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어떤 과부가 있었는데 그 과부가 원한이 있었고 그 과부가 원한에 대해서 평소에 재판관에게 재판해 달라고 왔지만 불의한 재판관은 귀찮다고 늘 내쳤습니다. 그래서 이 과부는 계속 재판관에게 요청을 했지요. 그 불의한 재판관이 ‘저 과부가 하도 나를 귀찮게 하니 번거롭더라도 무슨 일인지 물어나 보자.’ 해서 그 과부가 응답을 받았다는 내용이지요.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 18:6-8) 이 대목입니다.
많이들 알고 있는 대목이에요. 기도할 때 중도포기하지 말라는 식으로 쓰이는 구절이거든요. 한두 번 해보고 응답 안 된다고 포기하지 말고 간절히 붙들고 기도하면 기어이 응답받을 수 있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그 대목인데 그 대목이 그런 식의 해석이 바로 교회가, 이스라엘이 멸망되어야 할 이유를 말해주는 겁니다. 이 대목은 그런 대목이 아니에요. 얼마나 평소에 자기 욕망대로 해석을 해서 사람들에게 눈가림을 해왔는지 그걸 여러분이 아셔야 돼요. 이 내용은 뭐냐? 과부가 주인공이 아니라 불의한 재판관이 핵심입니다. 불의한 재판관의 자리에 하나님이 앉아계셔요.
이상스럽게 하나님이 나타날 때는 나쁜 의미로 나타나는 거예요. 왜? 이미 기존의 세계에서 나쁘다, 좋다, 이것을 일방적으로, 엉터리로 정해놓았기에 “그럴 것 같으면 내가 나쁜 쪽에 서겠다. 자진해서 나쁜 하나님이 되겠다.” 하는 거예요. 이 세상 인간들은 나쁘다, 좋다, 이걸 자기 맘대로 정해놓고 나쁜 것은 내치고 좋은 것은 껴안고 있는 거예요. 그들이 내친 나쁨 쪽에 주께서 투입합니다. “너희들이 나쁘다고 내버린 거기에 내가 뛰어들겠다. 그래 내가 나쁜 재판관이다.”라는 조로 설명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들을 귀 있는 자만 들으라는 거예요. 들을 귀 빼버리면 이것은 누구나 이해되는 말이에요. 이방민족도 다 아는 이야기에요. 열심히 붙들면 신도 감동한다. 정성이 지극하면 하늘도 감동한다. 이것은 다들 아는 이야기잖아요. 씨 뿌리는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씨 뿌리면 열매 맺을 것은 맺고 씨앗이 잘못되는 환경에서는 열매가 안 맺힌다. 이것은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찌어다.”라는 말을 붙일 필요도 없이 모든 귀 가진 사람은 다 알고 있는 이야기에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걸 붙이는 이유가 반대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 마귀적 속성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이 본문의 내용은 이겁니다. 그 귀찮아하는 재판관이 어느 누구하고도 관계를 맺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과부가 와서 번거롭게 하면서 원한을 가지고 오니까 재판관이 새롭게 그 과부와의 관계를 만든 거예요. 불의한 재판관이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새롭게 만든 겁니다. 과부 같은 것은 무시해도 되는데 재판관은 무시해도 상관없는 그 과부와 자기를 연관시킨 겁니다. 새로운 관계의 수립, 왜 그렇게 단정할 수 있는가?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예수님에 대해서 원한을 풀어줄 대상이라고 그 누구도 생각을 못하는 모습으로 이 세상을 떠나시기 때문에 그래요.
별 볼일 없는 예수, 그저 배부르고 등 따시면 되기에 “날 귀찮게 하지 말라.” 하면서 떠미는 대상으로서 예수님은 가신 겁니다. 따라서 그 누구도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없는 그런 시대가 올 것인데 그런 시대라도 내가 불의한 재판관이야기를 통해서 한 맺힌 과부를 새롭게 생산하고 만드는 작업을 이제는 예수님 나부터 새로 시작하겠다는 겁니다. 네가 한 맺힌 과부가 되어서 나에게 찾아오는 경우는 없어요. 한 맺힌 과부되기는 너의 소관이 아니고 이 예수의 소관입니다. 왜? 예수님은 말하는 주체이면서 동시에 말의 내용의 주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모든 사람들은 말하는 것과 말 속에 들어 있는 것, 그 안과 밖에 틀려요. “내 소원대로 해주세요. 내 뜻대로 해주세요.” 이렇게 돼버리면 말하는 그 본인을 위해서 말하는 내용을 자기가 다듬어내고 만들게 돼요. 그런 일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은사는 뭐냐? 분명히 내 것으로 줘놓고 내 것이 아닌 것을 말하는 것이 은사거든요. 아주 간단한 예가 마술사의 예입니다. 마술사가 신문지를 찢어서 입에 넣어요. 입에 넣고 난 뒤에 신문지가 나올 줄 알았는데 끝없이 색 테이프가 나오는 거예요.
나올 때 관중들을 박수치면서 놀라지요. 물론 이런 것은 식상한 마술이니 잘 놀라지도 않지만 마술을 볼 때 관중들은 놀라는 거예요. 놀래키려고 마술사가 예상 밖의 마술을 하잖아요. 분명히 신문지를 넣었는데, 그러니까 허접스러운 내가 있는데 내 안에서 “나 아니고 예수님”이라는 그 이야기가 색 테이프처럼 계속 나오는 거예요. “이것은 제가 한 것이 아닙니다. 피아노 반주 제가 한 것이 아니고 설거지도 제가 한 것이 아니고……저는 그거 나온다고 죽었어요. 칼날에 잘려 죽었어요.” 너는 재주 있고 저 사람은 재주 없고, 너는 달란트가 있고 저 사람은 없고, 이런 사고방식을 늘 프레스로 잘라버리는 겁니다. 늘 나를 자르는 거예요. “내가 한 것이 아닙니다. 내 경건과 거룩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이 아닙니다.”라는 말을 동반시키면서 주님이 살아 있음을 계속 내 보이는 겁니다.
말하는 주체와 말의 내용의 주체가 다른 것은 뭐냐?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나 같은 허접스러운 인간도 이렇게 살았습니다.” 그것만 하기를 원할 때 그게 바로 은사입니다. 본문에 은사가 여덟 가지로 되어 있거든요. 8절부터 보면,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렇게 여덟 가지, 어떤 경우는 아홉 가지라고 해서 죽 나오는데 이 능력은 그 당시에도 “나 예수님은 안 죽고 부활해서 살아서 이런 허접한 너희들을 가지고 일을 한다.” 하는 그 당시에 필요한 복음의 색 테이프를 뽑아내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걸 번역해서 우리에게 적용시킨다면 어떤 사람에게는 TV보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축구하는 은사를, 어떤 사람은 밥 먹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드러누워 잠자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예배에 늦게 오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예배에 참석 안하는 은사를…….
지난 시간에 했잖아요. 살아가는 것이 고생이라고. 성도는 이리 굴러도 은사고 저리 굴러도 은사입니다. 왜? 무능자기 때문에. “나 무능합니다.” 그게 은사의 모습이에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나 구원받는데 나는 손톱만큼도 한 것이 없습니다. 나는 오히려 방해만 했고 자기 자랑만 했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내 영혼을 거두어가도 괜찮습니다.” 70대에 쓸 만하다고요? 쓸 만한것 하나도 없습니다. 80대에 부르지 말라고요? 데려가도 괜찮아요. 알아서 간다고요? 필요 없습니다. “쓸모없다고 전해라!”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죄인 중에 괴수요 하는 것이라고는 자기자랑밖에 할 줄 모르는 이 패역한 죄인을 주께서 이 세상이 이미 끝인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활용해주시고 주의 복음의 용도로 사용해주시니 그저 우리의 경건과 우리의 믿음으로 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거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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