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강-고전 11장 30-34(주의 만찬의 효과)151206-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1장 30-34절입니다. 신약성경 277페이지입니다.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찌니 이는 너희의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함이라 그 남은 것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귀정하리라.”
집에서 먹는 것 하고 따로 예수 믿는 사람 모여서 먹는 게 같은 음식인데 결과가 다르다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이걸 증명하기가 곤란해요. 음식에 독을 탄 것도 아니고 같은 음식인데 성도끼리 모여서 먹으면 그것이 왜 문제가 되느냐 하는 겁니다. 그게 다 이유가 있어요. 단백질과 탄수화물과 지방의 영양분을 갖고 있는 그 음식이 있고 그것을 섭취해야 될 60조개의 세포로 구성되어 있는 우리의 육신이 있지요. 그 육신이 음식을 먹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은 영생이 아닙니다. 그것은 목숨부지, 기존의 생명을 연장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집에서 먹을 때는 ‘아, 이거 먹고 내 배고픔을 해소해야겠다. 먹고 살아야 또 일을 하지.’ 우리의 정신은 그 정도로 그치지요. 그런데 어떤 모임, 동창회에 나갔다. 동창회에 가서 음식을 먹게 되면 그 음식은 ‘내가 동창회에 나왔으니 동창들과 음식을 사이좋게 먹음으로써 혹시 동창가운데 내 앞길에 어떤 도움이 될 수 있는가? 좋은 인상과 호의를 남겨서 장래 내 인생을 대비하는데 상부상조하면 좋겠지?’라는 생각으로 음식을 먹어요. 그러니까 집에서 음식을 먹을 때와 다릅니다. 집에서 음식을 먹으면 배고픔을 해소하면 그만인데 동창회에 나가서 음식을 먹을 때는 상대방의 눈치를 봐야 돼요. 그것이 그 쪽에서 통하는 정신세계입니다.
그런데 음식을 가지고 성도끼리 모이는 교회에 나가서 음식을 먹었다? 이럴 때는 동창회 나가서 음식 먹는 것과 달라요. 어려운 것은 뭐냐? 일반모임, 동창회나 계모임에서 음식 먹는 것과 교회에 나가서 음식 먹는 것과의 차이를 구태여 둬야 되느냐 하는 것, 왜 차이를 둬야만 되는지의 그 이유를 찾아내기가 굉장히 힘들어요. 다 똑같은 인간인데, 계모임이나 교회나 차이점이 뭔데? 아무리 분석해도 같은 인간들의 모임이라는 점이 달라지지 않기에 추가적인 의미를 거기서 찾아내기가 굉장히 힘이 듭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교회에 와서 음식을 먹어도 ‘그래, 교회에 와서 음식을 먹게 되었으니 예의를 차려야지. 허겁지겁 먹으면 안 되지. 음식에 대해서 너무 욕심을 낸다는 인상을 주면 뒷담화가 들어오게 되면서, 저것은 성도도 아닌 것 같고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 같다는 소리가 나올라 치면 그 교회라는 문화단체에서 처신하는데 있어 말발이 안 설지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에티켓을 차리면서 점잖게 음식을 먹습니다. 하지만 그런 정신 상태로 음식을 먹는다면 그것은 계모임에서 음식을 먹는 것이나 교회 모임이나 별 차이가 없어요. 약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친구끼리 모여서 수영장에는 갈 수 있어도 나는 교회가 단체로 수영장 가는 것 못 봤습니다. 수영복 입고 뱃살 비어져 나오는 것 보이면 안 되잖아요. 차이가 있다면 그 정도 차이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 그 정도 차이가 아니에요. 주님의 음식을 잘못 먹어서 병든 자도 있고 약해진 자도 있고 심지어 침상에 누워서 죽어버린 사람도 있다는 겁니다. 고압선 잘못 건드려서 부지직, 하는 거지요. 불타는 케이블에 맞아서 소방서대원이 죽었잖아요. 그 정도로 뭔가 기존의 인간단체에서 나타날 수 없는 다른 현상이 성도들의 모임에는 잠재되어 있고 상주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 쪽에서 그것을 밝혀낼 수가 있느냐는 겁니다. 만약에 그것이 계속해서 이어진다면 우리는 겁나서 교회 못갑니다. 교회 점심식사시간 없애야 됩니다.
물론 간편식으로 일 년에서 두 번 성만찬을 폼 잡듯이 하면 되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흉내나 내는 것이고, 고린도전서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이것은 오늘날의 간편화된 성만찬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모여서 식사하는 거예요. 교회로 모여서 점심이나 저녁 때우는 식인 거예요. 일단 오늘날의 교회 성만찬은 성경과 무관한 겁니다. 그것은 장난질치는 것이고. 문제는 성도끼리 모여서 식사할 때에 식사예절이 잘못되어서 죽었느냐 하는 거예요. 네 눈에는 사람만 보이느냐, 하는 그 문제를 우리가 따지는 겁니다.
“네가 교회 갈 때 누구를 만나는가?” “목사님, 장로님, 집사님을 만나러 갑니다.” “네 눈에는 어떻게 사람만 보이느냐?” “당연히 사람만 보이지요.” 시력 1.5 가지고 사람만 보이지 뭘 더 보겠어요? 따진다는 그것이 오히려 답답할 정도입니다. 교회에 사람이나 보이지 다른 것 안보이잖아요. “다른 것은 안 보이는데요? 그러면 당신은 사람 말고 뭐가 보이던가요?” 시력이 얼마이기에 또 다른 것을 봐요?
울산의 황전도사님이 금요일 성경공부 마치고 저를 울산역까지 데려다 주는 동안에 이야기를 하는데 사우디에 가 있는 아들가족이 있어요. 다섯 살인가 여섯 살인가 먹은 손자 민준이가 있는데 가끔 전화를 한답니다. 질문이 이거예요. 사우디에 있는 한인교회에 가니까 “주님은 살아계시고 우리와 함께 일합니다.”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그걸 듣고는 민준이가 하는 질문이 “삼촌이 살아 있으면 눈에 보이고, 할머니가 살아 있으면 눈에 보이고, 그렇게 눈에 보이는 아버지가 살아 있는데 살아 있다고 하면서 하나님은 왜 안보입니까?”라고 했어요.
얼마나 노골적인 질문입니까? 마치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하는 것과 같아요.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을 생각해 볼 시간을 주기 위해서 그 답변에 앞선 이야기를 먼저 할게요. 여러분도 답변을 준비해 놓으세요. 평소에 늘 궁금했지만 해답은 없던 질문, 차마 신앙생활 50년 했다는 것을 들키기 싫은 질문, 차마 목사입네, 하는 것을 감추고 싶은 질문, 이것은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왜 심어놓았나?’ 하는 그것보다 더 어려운 질문입니다.
민준이가 하는 말이 “할머니, 제가 조금 있으면(12월 말경) 휴가 가는데 저보고 ‘모닝’ 타라는 이야기는 하지 마세요.” “왜 모닝은 안타려고 하는 건데?” “모닝을 타는 것은 좀 곤란해요.” “왜 곤란한데?” 자꾸 곤란하다는 거예요. 사우디에 가보니 다니는 승용차들이 다 큰데 모닝은 경차잖아요. 격에 맞게 놀겠다는 거예요. 그리고 하는 말이 “할머니, 나는 매일 큐티를 해요.”라고 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할머니가 듣고 있다가 화가 나서 “큐티 하지 마라!” 백날 큐티를 해도 모닝 타기 싫어할 정도로 교만해져 버렸으니 큐티가 아무 소용이 없게 되었어요.
그 애가 하는 질문은 오늘 본문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왜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데 주님은 살아 계신다고 하면서도 눈에 안 보이는가? 그것은 상징이 상징 아닌 척 했기에 그렇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 주인공인데 다들 눈이 보이기 때문에 보이는 그걸로 그들은 모든 현실을 종결시킨 겁니다. 이것까지, 보이는 인간들이 만든 역사까지가 현실의 전부, 이렇게 보는 겁니다. 본다고 하니까 안 보이는 거예요. 사람들을 보면서 ‘하나님, 설마 이게 다가 아니겠지요?’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돼요. ‘설마 이게 다가 아니겠지요.’
지난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왜 성만찬이 이렇게 위험한가 하면, 성만찬은 하나의 상징입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것은 실체가 아니에요. 성만찬에서 아무 능력도 안 나옵니다. 구원의 능력이 안 나와요. 그런데 오는 교인들의 한계가 눈에 보이는 것을 통해서 마술 같은 신기한 능력을 기대하다보니 교회가 영업을 하기 위해서 날조를 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이 성만찬 마음 단단히 먹고 참여해야 됩니다. 이 성만찬, 자기를 살피지 아니하고 주의 잔을 대하다 죽은 사람이 한 둘이 아니고 아픈 사람이 많습니다.” 이렇게 공갈협박을 하는 거예요.
대체 자기를 살핀다는 것은 성만찬 하기 며칠 전부터 살펴야 되는 겁니까? 일주일 전? 한 달 전? 일 년 전에 뭘 잘못했는지 다 검토해야 돼요? 이러면 되겠네요. 성만찬을 일 년에 두 번 하니까 6개월 단위로 끊으면 되겠네요. 6개월까지의 성만찬은 해결 했고 그 이후의 해결 안 된 죄는 성만찬직전에 해결하면 되겠네요? 마치 고난 주일 지키면 일 년치 죄 미리 당겨서 다 용서받는 것처럼 말이지요. 이게 전부다 조작된 거예요. 조작되었다는 말은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해서 이게 다 우상행위에 해당됩니다. 성만찬 자체가.
기껏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실적, 업적을 통해서 주님나라 흉내를 내고 있으니 그걸 극복할 수 있는 영안이 있어야 하는데 영안이 없으니 그것이 관행이 되고, 관습이 되고, 상투적인 문화행위, 교회라는 것이 문화행위에 속해버린 거예요. 신앙이라 하는 것이 전부 다 조작된 것이고 가짜인 겁니다. 누구 시선이 더 의식되는 거예요. 보이는 목사 장로의 시선이 더 의식되고 주변의 집사들이 더 의식되고 실제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은 전혀 의식되지 않으니 이게 동창회고 친목단체지 그게 무슨 교회이겠습니까? 장난치러 온 거예요. 문화 활동 해온 겁니다, 그동안.
그러면 오늘 본문을 보고 그 당시의 성도들이 식사하는데 함부로 식사해서 죽은 사람도 적지 않고 아픈 사람도 있다는 이것은 사실은 이 말씀 자체, 이 사건자체가 우리 현대인을 향하여 시비를 거는 것이고 고발하는 사건이 됩니다. 시비 걸고, 지적하고, 고발하게 되면 우리는 어떤 반응을 필연적으로 나타내느냐 하면, 거기에 대해서 무시하고, 배척하고, 밀어내는 반응을 나타냅니다. 뭐 이런 게 다 있나, 이 말이지요. “뭐 이런 게 다 있어? 이것은 과학적으로 설명이 안 돼. 과학적으로 설명이 안 된다면 이것도 일종의 미신 아니야?” 하고 우리는 강력하게 저항하고픈 충동이 생깁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주님 재림할 때까지 계속 이 역사 속에 해석 불가능한 영역을 조장해 냅니다. 그게 현재 눈에 보이는 공간 말고 빈 공간이 공간 안에 또 삽입되어 들어오는 겁니다. 삽입되어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뭐든지 과학적으로 안다고 했는데 안다고 하는 순간 늘 모르는 구석을 새롭게 출몰시키지요. 만들어내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취지가 뭐냐 하면, 교회를 망하게 하는 그것이 하나님의 취지에요. 교회를 망하게 함으로써 있는 교회를 교회 아니라고 없애버리는 그 작업, 그 작업 속에서 진실 된 교회가 거기서 출몰합니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자기를 제대로 살피면서 제대로 성도의 식사를 할 수 있는 능력자가 인간 속에 아무도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느 정도까지 살펴야 성만찬 끝나고 난 뒤에, 식사하고 난 뒤에 감기정도도 안 걸릴 수 있느냐, 그 메뉴얼을 제시할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그 기준을 제시할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도 누구의 기준이 아니에요. 이것은 돌발적인 사태고 사건입니다. 어떤 사건? 내가 날 위해서 사는 나를 날마다 부정시키는 사건이 찾아오게 되면 그거 누가 뭐래도 진짜 성령이 함께한 교회 맞습니다. 주께서 친히 그 교회를 부셔 주시는 교회만이 진짜 교회에요.
교회를 왜 부수는가? 교회를 부수어야 그 교회를 부수는 과정에서 함께 부서진 사람의 잔해, 그 남아 있는 사람이 복음을 형성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회 부수고 복음 만들기 입니다. 복음은 지식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고 내가 의지하고 싶은 교회가 무너지는 그 과정 속에서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한 복음의 진수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지요. 그래서 구원은 교회가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성만찬이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민준이가 그렇게 궁금해 한, 지금도 살아계신 분이 우리를 직접 십자가능력으로 구원하는 겁니다.
방금 제가 십자가라는 용어를 썼지요. 십자가라 하는 것은 너는 늘 가해자였고 나는 늘 피해자였다는 겁니다. 십자가라 하는 것이. 십자가라 하는 것은 우리를 빼놓고 벌어진 일이 아니고 지금 우리에게 적용시켜버리면 정당하다고 생각한 우리가 가해자로 돌변할 수 있는 능력으로서 십자가가 우리에게 찾아오지요. 가해자라 이 말이지요. 여기서 우리는 자연적으로 반발합니다. “제가 어째서 가해자입니까? 순수하게 예수 잘 믿는데 왜 제가 가해자입니까?”라고 우리는 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 시간에도 했지만 우리 자신이 진짜가 아니고 가짜이면서도 진짜인양 살아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은 우리 잘못이 아닙니다. 사실은 우리 부모의 잘못이고 우리 부모의 잘못도 아닌 그 부모의 부모의 잘못이고, 결국 끝까지 가면 누구의 잘못인가? 아담의 잘못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제일 먼저 일어난 현상은 수치였습니다. 아담이 하는 행동은 그 수치를 가려서 자기존재 자체를 자랑거리로 전환시키는 데에 제일먼저 머리가 돌아간 겁니다. 그러니 아담이 그 수치를 바꾸어서 자랑인 것처럼 여기는 그 속성이 아담의 자손들에게 계속해서 전달, 전달된 겁니다.
수치를 자랑거리로 바꾸는 인간의 방식은 한 자로 ‘옷’이었습니다. 현대는 옷을 잘 입는 것이 자랑스러운 것이고 아무리 잘 살아도 옷을 잘 못 입으면 천박한 사람이에요. 외부에 보일 수 있는 최고의 아름다움은 옷에 투입됩니다. 그리고 옷뿐만 아니라 몸에 걸치는 가방과 목걸이와 보석, 이것은 인간의 노동이 집약된 거지요. 사람은 왜 사는가? 남한테 잘 보이기 위해서 살아요. 그런 부부를 쇼윈도부부라 하지 않습니까? 실제로는 싸우면서 남에게는 ‘우리는 늘 웃고 있지요.’ 라고 웃음을 보여주는 그것.
다시 한 번 정리합시다. 진도 확 나가버렸는데. 개인의 욕심은 그냥 목숨유지책이에요. 그런데 이것이 사회를 형성하면서 남들의 눈을 의식하면서 자신이 개인적으로 갖고 있는 그 수치를 얼마나 교묘하게 감추는지 그 기법들을 전시하고 자랑 질 하는 집단, 이게 사회입니다. 그게 계모임이고 동창회고 그게 바로 교회라는 거지요. 사람들의 집합체, 교회. 그런데 그 교회는 수치를 교묘하게 위장한 것들의 무리가 되고 집단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인간이 아담의 속성을 입었기 때문에, 이것은 우리가 나빠서가 아니라 본성 자체가 그러니까 이 본성을 스스로 거스를 수가 없어요. 이것은 나이를 아무리 먹어도 교묘하게 기술적으로 감출 뿐이지 절대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쉽게 말해서 “나는 어디를 가지고 나를 지키는 이 작업을 멈출 수가 없다.”는 겁니다. 어느 모임에 가서도 마지막 나의 최후의 사명은 나를 지키는 거예요. 뭘 지키는가? 나의 수치가 들키지 않도록 나를 지키는 것, 그게 나의 존재이유입니다.
존재의 이유, 존재의 이유라고 하니 갑자기 노래가사가 생각이 납니다. 그 노래 듣고 얼마나 울었는지요? 어쩌면 남자의 심정을 그렇게 잘 이해하고 있는지. 그 존재의 이유라 하는 것은 “나는 네 앞에 나설만한 가치가 있으니 좀 알아줘.” 그게 존재의 이유에요. 인간의 모든 행동은 날 무시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거 자랑 질 하려고 교회 다니는 겁니다. “내가 이 정도 믿음이고, 이 정도 방언하고, 이 정도 기도 오래하고, 이 정도로 헌금하는 사람이니 날 무시하지 마라. 아마 하나님도 날 무시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교회가 위험한 것이 뭐냐? 차라리 교회 안다니면 덜 위험해요. 자기의 수치를 위장한 가짜 인간들의 집단이 무엇을 요청하느냐 하면, 삼위일체를 요청하고, 구세주를 요청하고, 하나님을 요청해서 그 하나님, 삼위일체, 구세주 예수가 진짜인줄로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는 거예요. 어떤 지식과 정보를 알고 교리를 알면 천국 가는 듯이 서로가 서로에게 사기를 치고 있었던 겁니다. 성경을 달달 외워도 소용없어요. 왜? 자기 자신들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성경을 아무리 봐도 나를 경유하기 때문에, 나를 경유하게 되면 나를 자랑하기 위한 예수, 내 자랑을 위한 기도하기, 내 자랑을 위한 헌금하기, “봐라. 지난번에 성만찬 했는데 내가 멀쩡하게 돌아왔잖아. 그러니까 내가 죄지은 것이 없다고 하나님 쪽에서 확인해줬어.” 이거 자랑 질을 하는 거예요. 성만찬 그거 자체도 장난질이지만 성만찬을 이용해서 자기 자신이 죄를 짓지 않았다는 사실을 하나님 쪽에서 이미 확인해줬다는 그 사실을 뿌듯해하면서 자기의 수치를 더욱더 깊은 곳에 집어넣지요.
평생 동안 도대체 교회 와서 무슨 짓들을 하고 있는지 기가 찰 노릇입니다. 교회가 있다는 그 자체가 화근이었습니다. 왜 교회 없이 신앙생활 할 줄을 모르냐는 그 말이지요. 바보에요? 성경말씀이 있잖아요. 초대교회는 교회가 없었거든요. 사도들이 무슨 교회가 있었습니까? 사도들이 어느 교회 다닙니까? 이 질문을 스스로 해 본적이 있어요? 사도들이 어느 교회 다녔지요? 사도들은 교회가 없어요. 성경에 나오는 교회는 그 교회밖에 없기 때문에 나머지는 가짜인 것을 뻔히 아는데 무슨 교회를 하겠어요? 일곱 교회 중에서 어느 교회 다녔습니까? 일곱 교회는 다 날라 가버린 겁니다.
“그러면 목사님, 진짜 교회는 어디 있습니까?” 진짜 교회는 교회라고 우기던 패잔병들의 집합, 그게 진짜 교회거든요. 교회라고 우기다가 패잔병 된 거예요. 기도하고 땅 사서 주차장 넓혀서 거기에 대한예수교장로회라고 교회간판 걸었다가 그게 가짜인 것으로 들통 난 자들의 잔해들, 이게 교회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죄를 씻어주는 소독제가 아니고 성경은 검출시약이에요. 네 속에 뭐가 있는지를 검출, 끄집어내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가 잘못된 것이 아니고 이것이 아담으로부터 타고난, 우리가 스스로 해결할 수없는 우리의 죄악 된 본성입니다.
죄가 있는 곳에 수치가 있고, 수치가 있는 곳에 그것을 감추려고 하는 시도가 있게 되고, 그 시도한 그것을 우리의 자랑거리로, 자기존재의 대변자로서 앞장세우면서 남에게 보여주는, 쇼윈도처럼 보여주는 자아를 위해서 진짜 자아를 희생하면서 살아왔잖아요. 그 놈의 자존심과 체면이 뭔지. 주님 앞에 통하지도 않는 체면, 그저 인간들 눈이 무서워서 그냥 유지한 체면들, 그런 사람들에 있어서 이 고린도전서 11장의 오늘 본문은 밀어내야 될 사태입니다. 그래서 아담의 본성이 뭐냐고 묻는다면, 진실을 밀쳐내는 본성들을 갖고 있습니다.
밀쳐내는 인간, 파고드는 주님, 얼마나 감사합니까? “아무리 밀어내봐라. 너로서는 해석이 불가한 영역을 네 속에 심어놓을 거야. 십자가사건을 집어넣어서 가해자로 돌변시키고 피해자는 나밖에 없음을 보여줄 거야.” 이것이 실재하는 십자가능력입니다. 아까 민준이가 했던 질문 다시 해보겠습니다. “삼촌은 보이고, 할머니도 보이고 만나지는데 왜 주님은 안보입니까?” 정답은? 네가 문제다. 네가 문제에요. 너 자신은 보이지 않는 것을 대변하는 하나의 상징물이거든요. 심벌이라는 말이지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땅에 떨어진 태극기를 발로 밟으면 5천만 대한민국 사람들이 윽, 하고 다 가슴 아파서 웁니까? 태극기는 천 조각이잖아요. 상징에 불과합니다. 내가 우연히 잘못해서 밟는다고 할지라도 이웃이나 청와대 직원들이 가슴 찢어지고 그런 것이 없습니다. 상징은 어디까지나 허구거든요. 허구를 밟아봐야 실재는 멀쩡하다는 말이지요. 따라서 어떻게 자기를 살펴야 내가 건강하냐, 안하냐를 생각한다는 그 시도자체가 죄악 된 의도를 가지고 시도하기에 그렇습니다. 좀 어렵지요? 좀 어렵습니다.
오늘 본문에 성도들이 식사할 때 자기를 살피지 않고 먹으면 어떤 사람은 병든 사람도 있고 죽어가는 사람도 있다고 할 때 우리 본성상 제일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 뭐냐 하면, ‘나는 안 아파야지. 나는 안 죽어야지. 나는 건강해야지.’라고 하면서 ‘나는 죽어 마땅하다.’는 이 자기 본색을 감추는, 이 수치 성을 감추는 방법으로 “내가 어떻게 하면 음식 먹기 며칠 전부터 반성문을 써야 됩니까?” 이런 자기반성, 자기회개를 통해서 안 아프겠다는 목적을 이루려고 하는 거예요. 목적은 무조건 안 아파야 돼요. 왜? ‘이유는 몰라. 너는 아파도 나는 안 아파야 돼. 왜? 나는 내가 중요하니까.’
그 사고방식을 무슨 수로 뜯어고칩니까? 평소에 그렇게 살아왔는데. 오직 그것 밖의 일은 아무것도 모르고 살아왔는데. 그러한 욕망과 충동의 지시를 받아가면서, 사실은 마귀지요, 그런 마귀의 지시를 받아가면서 “너는 네가 잘난 존재로 살아라.” 이런 지시를 받아가면서 살아왔는데 그걸 어떻게 하루아침에 고칩니까? 못 고치지요.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말씀은 우리가 해석해서 천국 가는 용도가 아니라 검출시약이라니까요. “너는 이것밖에 안 돼. 너는 네 운명을 네 힘으로 바꿀 수가 없어.” 네 현실이라 하는 것은 사람에 의해서 바꾸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왜? 바꾸어질 현실을 주께서 주신 적이 없어요. 인간이 바꾸었다고 우기는 이 모든 역사는 전부 다 상징에서 상징으로 전환되어 형태만 바뀔 뿐이지 실제로는 진리의 세계에 도달된 적이 없습니다. 4.19, 5.16, 광주항쟁, 촛불집회? 뭘 해보세요. 혁명 끝나고 난 뒤에 맨 그 인간이 그 인간이에요. “못 살겠다 바꿔보자.” “바꿔봐야 소용없다.” 이런 거지요. 상징에서 상징으로 바꿔봐야 가짜에서 가짜로 바꿔치기 한 것밖에 없습니다. “목사님, 교회 왔습니다. 내 인생 바꿔보렵니다.” 바꾸지 마세요. 오히려 왜 바꾸는 것이 실패하는지를, 그 본질을 찾아내면 돼요. ‘아, 바꾼다고 해서 바뀔 대상이 아니구나.’
등산합니다. 왜 산에 올라갑니까? 산이 거기 있기에. 상투적인 말이지요. 그러면 거기 그냥 있지 왜 도로 내려옵니까? 내려오는 이유는 몰라요. 올라갔다는 그 보상금 받을 일이 있는 모양입니다. 결국은 산이 있는 것이 아니고 산에 가 봐야 네가 있어요. 네가 있는 거예요. 미국 이민가면 인간되겠다고? 미국에 가면 미국이 있는 것이 아니고 거기에 내가 가서 괜찮은 미국도 버려버려요. 내가 가면 그곳에서 문제를 일으킨다니까요. 어디 간다고, 환경 바꾼다고 사람 달라지지 않습니다. 아담이 살기 싫은 곳에 가서 죄를 지었습니까? 최고의 환경에서 죄를 지었잖아요. 환경 탓, 부모 탓 하지 마세요. 바로 우리자신이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괴물을 모시고 살고 있는 겁니다. 우리 안에서.
그런데 그 괴물을 모시고 살면서 나오는 죄 중에 가장 독한 죄가 뭐냐 하면, 자기 힘으로 자기를 천국에 보내겠다고 설쳐대는 그 양상이 가장 나쁜 죄가 되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주님의 준비된 아이디어는 뭐냐? 십자가사건이라 하는 것, 아까 고압선이라는 말을 했는데 그 고압선은 우리가 손댈 문제가 아니에요. 손댈 문제가 아니고 주께서 십자가사건을 성령을 통해서 반복해서 일으킵니다. 주님께서 살아계시니까요. 절대로 사람 눈에 띄지 않도록. 사람 눈에 띄게 되면 그걸 또 붙잡았다고 하기 때문에 사람 눈에 띄지 않으면서 흔적들을 남깁니다.
흔적들을 남기게 되면 인간은 그 흔적들을 덥석 쥐면서 자기 죄의 본색을 드러내는 계기로 하나님이 사용해요. 내 속에 어떤 괴물이 들어있는지를 모르는데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 등장하니까 그걸 덥석 쥠으로써 얼마나 평소에 자기 잘난 체 하는 것이 그 때에 들통 나고 노출되도록 검출하는 용도로써 주께서 세상을 계속 다스려 온 겁니다. 쉬운 말로 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잖아요. 재림에 대한 사람들의 제일 큰 오해가 뭐냐? 여기 나 있는 곳에 주께서 오신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여기 나 있는 곳에 주께서 오시는 것이 재림이 아니고 재림은 우리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네가 있는 곳에서 손을 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재림이에요. 다시 말해서 “가짜하고 그만 놀아도 되잖아. 이제 가짜하고 그만 놀아.”라는 것이 재림이에요. 왜? 실재는 이미 주님께서 영광중에 계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재림의 양상은 요한계시록 1장 8절에서 사도요한이 이미 봤어요. 이것은 지상에 있던 그 예수님의 모습이 아니었어요. 영광스런 모습이에요. 그 영광스런 모습으로 지상에 눌러 있는 사람에게는 오시는 것으로 보이지만 주님의 안목에서는 뭐냐? “이미 포기했는데 왜 자꾸 거기 눌러 살고 싶어 하느냐? 내가 속히 가서 너를 잡아당길 거야.”라는 뜻이 재림이에요.
주님이 움직인다고 생각하지 말고 내가 움직여야 된다고 생각하면 재림의 의미가 확실하게 드러납니다. 있지 않아야 할 곳에 우리가 있는 것이고 살지 않아야 할 곳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 있는 모든 교회, 성만찬, 이 모든 해석은 다 반대로 바뀌어야 돼요. 여기 있는 나는 내가 아닌 나를 위해서 여기 있다는 것을 알아야 돼요. 내가 나를 위해서 여기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아닌 분을 위해서 내가 여기 있는 거예요.
그 당시에 교회에서 식사를 하고 난 뒤에 아픈 사람도 있고 죽어가는 사람도 있는 이런 희한한 현상이 일어났거든요. 이것을 희한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상당히 믿음 좋은 사람이에요. 왜냐하면, 식사하고 난 뒤에 아픈 경우는 딱 한 경우, 식중독밖에 없어요. 그런데 식중독이 아닌 원인을 다른 곳에서 끌어당긴다는 것은 나는 이곳에서 해석할 수 있는 권리와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나는 잘못된 해석밖에는 내놓을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게 돼요. 그렇다면 이 해석의 원천은 뭐냐? 나 말고 다른 분에게서 왔을 것이고 그 다른 분과의 끈이 이어져 있는 사람에게만 눈이 확 열리는 겁니다.
그렇다면 성도하고 식사할 때만 하나님이 계십니까? 성경에 수많은 성경구절이 있고 그렇게 말씀이 많은데 사람들은 왜 그렇게 간증집회라는 것을 좋아하는지, 신기한 것을 왜 그리도 좋아하는지 저는 진짜 모르다가도 알겠어요. 알다가도 모르겠는 것이 아니라. 예를 들어봅시다. 아내가 옆에서 자고 있습니다. 자다가 잠시 잠에서 깼습니다. 아내가 옆에서 쌕쌕거리면서 숨 쉬면서 잠을 잘 자고 있어요. 그러면 그 호흡이 있잖아요. 그 호흡이 누구 겁니까? 들이쉬고, 내쉬고, 들이쉬고, 내쉬고, 그 호흡이 누구 거예요? 초음파 검사할 때 “숨 들이 마시세요……, 내 쉬고요.”
그 호흡이 누구 겁니까? 왜 교회에서 신기한 기적들을 찾아요? 이사야 2장 22절에 보면,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호흡은 바로 주님의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이 몸 전체가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의 주시는 은혜로, 힘으로 지금도 하루하루를 살아온 거예요. 그래서 모이는 겁니다. 주께서 주시는 호흡가지고 살아와놓고 주님이 덩어리, 주님의 덩어리, 주님의 말씀의 실현덩어리로 살아와놓고는 자기 자랑하고 자기 수치 가리고, 신상품이라고 옷 자랑하고, 넥타이 자랑하고, 그게 일평생의 버릇이에요. 일평생의 버릇, 동창회나 계모임 가서 하듯이 남들 의식해야 밥 먹고 사는 그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온 버릇을 가지고 어디를 가요? 천국을 가요? 무슨 천국이 자본주의 시장입니까? 거기를 왜 가는데요? 누가 넣어주는데? 인간자체가 달라지지 않는데 자기 맘대로 들어갑니까?
호흡이라는 것이 열심히 링거 꽂고 밥 집어넣는다고 호흡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숨 내쉬고, 들이쉬고, 주께서 이렇게 하시는 것은 “너 보기에는 네 인생 네가 책임지는 것 가지만 내가 보기에는 네가 모르는 다른 현실, 민준이네 삼촌이나 할머니를 만나는 세계 말고 다른 세계가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증거로써 네 노력에 의하지 아니하는 호흡을 매일같이 너에게 쏟아 부어 주었다. 너는 내가 준 은혜의 풍선, 은혜의 캡슐덩어리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아무것도 받지를 않습니다. 사도행전 17장에서, 하나님은 친히 주시는 분이지 아무것도 안 받아요.
지난 금요일에 헌금이라는 제목으로 울산에서 강의를 했습니다. 헌금할 때 어떻게 하는가? 봉투에 ‘감사합니다.’ 쓰시고 한 5만원을 넣으세요. 누구한테 하는가? 당신이 당신한테 헌금하시고 “잘 드립니다. 나에게.” 그렇게 해서 잘 받아서 헌금봉투에서 돈 꺼내서 쓰면 돼요. 내가 나한테 헌금하라는 말이에요. 왜?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기 때문에. 지금 헌금 받을 자가 없는데 헌금을 누구한테 한다는 말입니까? 십일조를 받는 주체가 없는데 누구한테 십일조를 해요? 십일조 자체가 없는 이유가 받는 주체가 없기 때문에 그래요.
헌금은 내가 받아야 될 이유가 나는 상징물이기 때문에 내 주인공은 따로 있어요. 나는 십자가에 죽고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기에 이미 우리의 등록은 그리스도 이름으로 내 것이 아닌 주님 것으로 등록이 된 이상은 우리가 평소에 콩나물 사먹고 피아노 레슨 받는 이 모든 것은 주님의 돈을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월급받기 위해서 노동하는 그 노동의 힘도 호흡이 있어야 되지 산소마스크 쓰고 노동합니까? 주님 주신 힘 가지고 노동하면서 거기서 나온 결과물도 다 하나님의 은혜인데, 살아온 모든 것이.
오죽했으면 주님께서 가룟유다보고 이런 이야기를 했겠습니까? 차라리 너 같은 인간은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을 뻔 했다고.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더면 제게 좋을뻔 하였느니라.”(마 26:24) 실컷 태어나놓고는 자기가 자기 주인노릇을 하니까 너 같은 인간은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문제는 그렇게 주님 주신 은혜 모르고 내가 내 인생이 주인공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99.99퍼센트라는 이것이 문제가 된 거예요.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사회 전부 다, 교회고 절이고 관계없이 전부 다에요, 전부 다! 거기서 주인이 내가 아니라고 바꾸는 것, 나는 나를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성령의 은혜 받은 사람뿐입니다.
은혜 받으면 어떻게 하는가? 오늘 본문에 나오지요. 징계를 받아야 되지요. 징계라 하는 것은 미리 받았던 그 심판을 유지시켜서 징계용으로 사용하시는 겁니다. “네가 이런 벌을 받아야 마땅하지만 봐줬다.” 이렇게 되거든요. 징계를 받으면서 십자가의 은혜를 반복시키는 겁니다. “그러면 징계는 어느 정도 돼야 징계입니까? 감기도 징계입니까? 독감정도는 돼야 징계입니까? 어느 정도 돼야 징계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저는 이렇게 합니다. 한평생 사는 것이 징계입니다. 세상에 고생 안하는 사람이 누가 있어요? 버스 조금 만 늦게 와도 고생하는데.
모든 상황이 너는 있지 않아야 될 지옥에 살고 있다는 겁니다. 있지 않아야 될 세상에 살면서 살아보려고 애쓰는 자체가 이것은 스스로 징계 자체로 느껴지는 겁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주여, 후딱 좀 데려가주세요. 좀 후딱 좀.” 주께서는 “할일이 남아 있는데 너를 왜 데려가?” “살려주옵소서.”가 아니라 “후딱 데려가옵소서.” “아직 할 일 남았어. 너는 너 편하자고 있는 것이 아니야. 남을 위해서 존재하는 거야.” 남을 위해서 존재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발 부모 아플 때 산소마스크 씌우지 말고, 링거도 좀 빼고, 그렇게 해서 제발 사람 좀 살려주세요. 죽어가면서도 고생 질질 20년 더 끌지 말고. 그게 효도가 아닙니다. 효도하겠다는 것은 자기 수치를 도리어 자랑하고 싶은 위장된 도덕이거든요. 시편 136편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모든 신에 뛰어나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모든 주에 뛰어나신 주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홀로 큰 기사를 행하시는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지혜로 하늘을 지으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땅을 물 위에 펴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큰 빛들을 지으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해로 낮을 주관케 하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케 하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36:106)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마지막 꺼져가는 세상에서 달과 별, 우리 동창생들은 잘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광 돌리고 찬양하고 있는데 소위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랑 질하고 있는 인간은 달보다도 못하고 꽃보다도 못하잖아요. 주님의 인자하심을 왜 발현하지 못합니까? 이게 안 깨져서 그래요. 덜 깨져서 그래요. 사도바울의 소원은 빨리 죽는 것이었지만 너희들 때문에 아직 여기 그냥 있다고 하는 그런 마음, 그게 바로 이미 당겨서 받은 심판, 이미 심판에서 면제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하나님의 자유성입니다. 자유입니다. 미련 둘 필요가 없고 연연해 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너의 과거와 너의 추억에 너의 낭만에 연연해하지 마세요. 최백호라는 가수가 낭만에 대해서, 어쩌고 노래하는데 낭만이고 뭐고 다 지나간 것이고 중요한 것은 상상도 못한 주님의 영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걸 어떻게 아는가? 매일같이 징계를 받거든요. 그걸 통해서 다른 세계가 있음을 우리를 통해서 증명하고 싶은 것이 주님이 일으킨 십자가사건의 반복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자기 자신의 가치를 유지하면서, 자기 수치를 감추기를 반복하면서 살아온 한평생, 이제는 그 무거운 짐을 십자가 앞에서, 주님께 들통 나서 다 놔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제는 무거운 짐 벗어버리고 가벼운 십자가의 영생만 우리의 몸을 통해서 마음껏 방출하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