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고린도전서73강-한 몸과 한 성령(고전12;12-13) 151227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1. 22. 07:40
2015-12-27 12:47:16조회 : 639         
   한 몸과 한 성령 151227 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한 몸과 한 성령(고린도전서 12: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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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5-12-27 13:30 
한 몸과 한 성령

2015년 12월 23일                           본문 말씀: 고린도전서 12:12-13

(12:1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성령은 인간 세계에서 생산되지 않는 이질적인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령을 자신의 삶의 영역권 속의 실재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만으로 엮어가는 그런 세계에 만족하려 합니다. 하지만 성경을 펼치면 ‘성령’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우리 인간들만으로 움직여나가는 세계관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겁니까? 만약에 성령의 존재를 도외시하고 못본척하면 우리의 미래가 불상사라도 일어나는 겁니까? 이 점이 몹시 신경거슬린다면 성령에 대해서 알아봐서 일단 소유해놓고 볼 일입니다. 하지만 성령은 인간이 갖고 싶다고 마음대로 가질 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즉 이 세상에 있지만 이 세상에 포함되지 않은채 활동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령님의 개입 동기에 대해서 알아봐야 합니다. 성령이 없다면 무엇이 불가능한가를 알아봐야 합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인간의 무능력함’에 대해서 알아봤습니다. 이번 시간은 ‘인간의 무가치성’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합니다.

즉 원래 가치 있는데 단지 무능력에서 구원이 안되는 것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무가치한 존재가 우리 자신인지를 정립해야 합니다. 성령의 개입은 바로 이점을 분명히 해주시면서 찾아듭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인간의 몸에 직접 하늘에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몸을 경유해서, 그 안에서 나오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편하게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섬길 때, 착하고 바르고 성실하고 순전한 마음으로 섬기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영광받으신다”고 말입니다. 이것은 잘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서, 성령 안에서만 영광받으십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성도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요 일부임을 분명히 해두시는 쪽으로 작용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령 앞에서 ‘개인의 자격’이란 소용없습니다. 개인의 자격으로 드리는 기도나 헌금이나 봉사나 전도나 찬양이나 예배는 의미없습니다. 개인의 자격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인간하시는 인간은 ‘새로운 백성’으로서의 인간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성령께서 먼저 예수님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요단강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하늘이 열리면서 성령께서 비둘기같이 찾아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성령께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죄인의 길을 가게하시는 방식으로 ‘의(義)를 이루기’하십니다. 이 말은 곧 예수님께서 친히 이 지상에서 하시는 방식 외에는 이 세상은 어떤 식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다는 말입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세우게 하셨고 죽으시고 난 뒤 사흘만에 살아나시게 하셨습니다. 이는 곧 예수님께서 담당하신 그 죄인의 위치에 합류하지 않는 자에게는 영광스러운 부활이란 없다는 말입니다. 성령께서 예수님을 친히 인도하시면서 보여주시는 그 죄의 길, 즉 예수님의 말씀과 기적을 통해서 들추어내신 인간의 근원적 죄성을 자신의 죄성으로 인정하지 않는한 영광스러운 천국에 합류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인간들이 이 사회에서 내세우는 혈연적 차이와 직위적 차이들이 나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라는 대목이 이 대목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신분적, 직위적 간판은 모두 개인적인 가치를 유지하게끔 합니다. 성령님께서 이런 개인적 가치성을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몸에서 시작해서 그리스도 몸으로 합체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몸의 연장으로서 새로운 몸이 나오는데 이 몸은 예전에 그 인간이 기대한 연속성상에 있는 그런 몸이 아니라 ‘하나님 백성’의 입장에서 새롭게 의미를 부여받는 몸이 됩니다. 인간의 몸에서부터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하려고 시도한다면 기존의 개인적 가치를 자꾸만 잃고 싶지가 않게 됩니다.

즉 타인과 차이나는 그 무엇을 나라는 개인을 구원하는 데 있어 보탬이 되고 싶은 생각을 없앨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면, “나는 예수 믿는다‘는 그 고백이 실제로 자신이 구원되는데 도움이 된다고 여기고 싶어합니다. 나의 고백으로 인하여 내가 구원되는 결과를 낳는 것을 내가 평소에 원하고 있는 겁니다.

바로 성령께서는 이런 것까지도 죄로 규정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오심으로 인간의 모든 것이 죄로 드러났고, 또한 그것을 죄로 드러나게끔 이 땅을 예수님이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 먼저 예수님에게 임하시는 것은 오직 구원자는 하나님 뿐임을 말씀하시기 위함입니다.

호세아 13:4에 보면,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느니라 ”고 되어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이 말씀을 포탄처럼 가슴에 품어시고 우리에게 폭격해버립니다. 그렇다면 그 결과 우리는 다음 두 가지 요건이 발생됩니다. 하나는, 나는 이 세상과 어울러 살 사람이 아니라 이질적 존재라는 것과 둘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서 탈출을 할 그 어떤 능력도 나에게 없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이런 ‘무가치적’ 존재에서 비로소 “구원자는 주님뿐입니다”는 고백이 낳게 됩니다. 성령님이 찾아오시는 길목에서 우리의 모습은 그야말로 가관입니다. 평소의 인간의 본성은 호세아 12:4에서 야곱이 보여줍니다.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즉 야곱은 그 누구에게도 지기 싫어하는 본성을 유감없이 발휘했습니다.

마치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차 앞에서 그 어떤 것도 막아서면 여지없이 부딪치게 되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연약한 모습으로 야곱의 앞길을 막아섰습니다. 마치 예수님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지는 약한 분으로 우리의 죄의 본능 앞에서 자진해서 죽음의 사고를 당하신 겁니다.

자기만을 최후까지 사랑하고 그 외에 어떤 것도 마음을 끝까지 줄 수없는 이 야곱같은 심정이 오늘날 인간의 보편적 성질인 것으로 예수님이 우리가 앞길을 가로막으시면서 보여주십니다. 더 이상은 개인적 가치는 없습니다. 용납하시지 않습니다. 내가 기대한 나는 사라지고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새로운 가치에 맞는 존재로 성령께서 다루어주십니다.

평생 살아가는 힘은 오직 예수님의 희생의 덕분인 것을 알려줄 때 개인적 가치는 의미없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비록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구원의 하나님을 만난 기쁨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5-12-28 05:47 
171강-고전 12장 12-13(한 몸과 한 성령)151227-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2장 12-13절입니다. 신약성경 278페이지입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오늘 말씀에 보면 성령이 나오는데요. 성령은 난데없는 겁니다. 인간세상에서 나는 것이 아닙니다. 농사짓는다고 성령 나오는 것도 아니고 고기 잡는다고 성령도 같이 잡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난데없이 돌발적으로 여기서 왜 성령이 튀어나오느냐는 말입니다. 평소에 우리는 성령이 없는 세상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성령이 없는 세상, 성령은 보이지 않으니까 만일 성령이 있다면 있는 증거를 내놓아야지요. 절에 가면 성령이 나옵니까? 중학교 2학년, 고등학교 2학년 때 대개 수학여행을 가는데 불교집안 애들 같으면 평소에 절에 가지도 않다가 절에서 손바닥 위로 쳐들고 기도하잖아요.



그럴 때 불교라는 이 모든 것은 눈에 보이는 인간을 위한 종교, 뭘 빌더라도 비는 본인을 위한 것, 그것이 전부에요. 그런데 성경을 보면 성령이 나온다 이 말이지요. 난데없이 성령이 나오니까 성령이 나온다는 말은 성령과 우리가 관련이 없게 되면 뭔가 우리 쪽에서 손해나는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경에는 성령이 나와 있고 그에 반해 성경 바깥의 우리가 사는 세상이나 가정, 교회도 마찬가지고, 성령 없이 살아가는 식의 사고방식, 성령 무시해도 얼마든지 사람답게 살아가고 있는, 사는데 아무 지장이 없는 그런 세상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사고방식도 성령이라는 이런 것은 무시해도 취직과 결혼과 출세에 아무지장이 없는 그런 식으로 세상에 적합한 인식을 가지고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만 펼치면 성령이 나온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성경을 해석하기가 굉장히 껄끄러운 겁니다. 우리한테 무슨 도움이 되는 쪽으로 해석을 해야 될 텐데 성령이 와버리니 우리는 단박에 ‘그러면 성령을 고대하지 않고 설게 되면 나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가? 나의 운명은 결정적으로 파탄에 이르는가?’ 은근히 걱정이 되는 거지요. 성령은 원래 인간 세상에 없는 겁니다. 성경이라는 것은 인간 세상에 원래 없는데 성령이 언제 개입 되는가, 그걸 알아차려야 되지요. 오늘 본문에서 이게 중요합니다.



성령은 원래 인간 세상에 없습니다. 없는데 성령이 여기에 투입이 된 겁니다. 성령이 언제 왔느냐는 말이지요. 오면서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왜 왔느냐는 말이지요. 국회동의도 안 받고 왜 오셨고, 대통령의 허가도 없이 왜 오셨으며 북한에도 성령이 있을까요? 러시아에도 있을까요? 필리핀에도 있느냐는 말이지요. 성경에는 성령이 나오는데 왜 뉴스 시간에는 성령이 안 나오느냐 하는 겁니다. 그런가 하면 성령이 아예 범벅이로 있는 동네도 있어요. 순복음인가 뭔가 하는 그 동네, 거긴 또 성령이 아예 넘쳐가지고 너무 많아서 탈이에요. 교회 들어갔다 나오면 랄랄랄, 이렇게 되어서 다 튀어나오잖아요.



고린도전서 14장에 죽 보게 되면 방언 나오고 통역도 나오는데 고린도전서 14장에는 방언 하지 말라는 내용이 있어요. 우리가 지금까지는 방언을 하라는 뜻으로 알고 있는데 원 언어가 방언 같은 것은 해석이 안 되거든 그런 것을 하지 말라는 뜻으로 이야기하고 있단 말이지요. 방언, 통역, 이 모든 것이 사람이 할 수 없는데 성령이 오심으로서 하게 된 현상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설교를 다시하게 되면, 그냥 우리가 사는 이 평범한 세상에는 성령이 없는데 성경에는 성령이 나온다. 따라서 이왕 교회 나와서 성경의 뜻이 뭔가를 알고자 한다면 성령을 알아야 되는데 이 성령이 왜 인간 세상에 개입되어야 되느냐는 그 말이지요.



성령 없이도 하나님만 잘 믿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제가 중요한 이야기했어요. 성령 없이도 양심껏, 정성을 다해서 하나님 잘 섬기면 되잖아요. 윤리 도덕적으로 최선의 노력을 다해서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 구태여 성령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이 영광 받고 기뻐하면 되지 않습니까? 성령은 우리가 개인적으로 바르고 착하게 살아서 하나님께서 영광 돌리는데 성령이 개입되는 것이 아니에요. 성령은 뭐냐?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이 대목에서 성령이 중요해요.



다시 말해서 많은 지체가 있는데 그 지체가 한 몸을 이룬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성령이 이 땅에 개입되어야 되는 겁니다. 각자 자기 잘난 체 하는 것이 세상이기 때문에, 너는 너고 나는 나고, 너도 인간이고 나도 인간이고, 그걸 세자로 하면 ‘유아인’ 다 같은 인간이라는 말이지요. 제가 처음으로 개발한 개그에요. 각자 자기 잘난 것으로 살아가면 되는 겁니다. 사람이 누구와 한 몸 된다는 것은 굉장히 부담돼요. 왜냐? 그 사람의 종이 되든지, 포로가 되든지, 안 그러면 그 사람에게 갑 질을 한다든지, 그런 경우가 되면 하나가 안 되거든요.



갑 질하는 것도 귀찮아요. 지난 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연세 많아지면 남이 귀찮아지고 연세가 더 많아지면 나 자신조차 귀찮을 정도에요. 그렇게 되는데 뭘 너와 내가 하나가 돼요? 너와 내가 하나가 된다는 그런 것은 젊을 때, 성탄절에 동숭로 싸돌아다닐 때나 하는 이야기고 나이 한 60되면 크리스마스고 뭐고 없어요. 우리교회가 크리스마스가 어디 있습니까? 다들 나이가 많은데. 재롱잔치나 하면 모를까. 우리교회는 송구영신예배니 그런 것도 없어요. 그냥 연말에 잠 오면 밀린 잠이나 자면 되지 평소에 하지도 않던 기도 연말에 교회 가서 뭘 달라고 기도하는 거예요? 내 인생 내가 알아서 혼자 살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구태여 합체해야 된다, 완전체, 합체해야 된다는 겁니다. 내가 내 자존심과 가치를 넘어설 수 있는 능력이 나에게는 없어요. 나는 내 주먹 흔드는 것이 전부입니다.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냐?” 우리는 맨 날 자기가 만든 거울을 앞에 두고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는 겁니다. 지난 시간에 설교 주제는 무능력자였어요. “능력 없다고 전해라.” 무능력자지요. 오늘 설교의 주제는 무가치성입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언제 포기하느냐 하면, 본인이 전혀 가치 없다고 여길 때 포기하게 되어 있어요. 사람이 자기가 가치 있다고 여기면 따로 자기가치를 가지고 내뺍니다. 도망칩니다.



오늘 설교의 결론부터 미리 말씀드릴게요. 하나 됨이 어디서 형성되느냐 하면, 주님 피해서 각자 도망치는 그 집결된 장소에서 비로소 하나가 됩니다. 당신도 위대하고 나도 위대하고, 그 위대한 것끼리 만나봐야 절대로 하나가 안 됩니다.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기 때문에 잘난 사람끼리 모아봐야 그거 화합 안 됩니다. 다 같이 너나 나나 못난 사람이 될 때에 하나가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구원하는 방식이에요. 그게 어디에 나오는가? 구약 호세아에 나옵니다. 호세아 13장 4절에 보면, “그러나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나 밖에 네가 다른 신을 알지 말것이라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느니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다고 되어 있어요. 나 외에 구원자가 없다는 이 사실을 성령께서 그대로 자기 안에 품어 담아요. 담아가지고 성령께서 이 땅에 오시면서 호세아 13장 4절의 말씀을 가지고 우리한테 폭격해서 퍼붓습니다. 나 외에 구원자는 없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성령께서 “나 외에 구원자가 없다.” 할 때 주의 이름 외에 구원할 이름은 없다는 뜻이거든요. 오순절에 성령이 올 때 특징이 있었어요. 그게 뭐냐?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을 부르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얻는 거예요. 구약에 나오니까 주 외에는, 여호와 외에는 구원자가 없다는 이것을 안고 우리에게 폭격을 하려면 우리는 일단 구출 되어야 살 수 있다는 인식이 이 땅에 형성되어야 합니다. 갇혀 있다는 인식, 갇혀 있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빠져나가야 된다. 여기서는 숨이 막혀서 못살겠다. 이곳은 내가 살 곳이 아니다.” 다른 말로 하면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이 세상이 이상하게 내 몸과는 맞지를 않는다는 거예요. 코드가 맞지를 않아요.



뭔가 낯선 동네에서 사는 듯한 느낌, 그 느낌은 성령께서 그렇게 조정을 해주십니다. 분위기가 그렇게 돌아가요. “너는 이 땅에서 살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니야. 너는 다른 데 가서 살아야 돼. 이곳에서 너는 나그네고 이방인처럼 될 수밖에 없어.”라는 낯선 인식을 우리에게 퍼부어 주십니다. 나는 이방인이다. 그러면 어떤 식으로 구원되는가? 구원될 능력이 없어요. 지난시간에 했듯이 우리는 무능력자거든요. 이번시간은 뭐냐? ‘무가치’ 우리는 스스로 나를 구원할 수 있는 가치가 나 자신에게는 없는 겁니다.



그 두 가지, 첫째는, 나는 이 땅에서 구출의 대상이 된다는 것. 두 번째는, 구출이 되어야 하는데 내 힘으로는 구출이 불가능하다는 이 사실. 그럴 때 이 두 가지 요건이 갖춰져야 그 다음에 “주님 외에는 달리 구원자가 없네요.”라고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주의 이름을 교회에서 불러서는 곤란해요. 교회 오면 구원 안 된다는 뜻이 아니고 교회 왔는데 예배 15분 만에 홀라당 불탈 때, 전기합선 때문에 불이 나서 예배당 없어졌을 때, 예배당 없어지자 목사는 도망가고 수십 년 다듬어온 것들 다 날라 갔을 때, ‘아, 교회 예배당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구나.’라는 것을 깨달을 때 “주님 외에는 구원자가 없습니다.”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거예요.



방금 예를 든 예배당 불났을 때, 그 다음에 다니던 공장 불 탈 때도 괜찮고, 또 자기 집 불탈 때도 괜찮고, 그 다음에 마지막 믿던 남편이 배신했을 때도 되고, 하여튼 여러 가지로 “주 외에는 나의 구원자가 없습니다. 주님 외에는 나는 희망이 없습니다.”라는 식의 상황으로 몰아넣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욥기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죠. 자식 열 명이 있었는데 다 죽었고 재산 다 날라 갔습니다. 하나님 외에는 달리 구원 받을 자가 없지요. 여러분이 주일학교 애들이 잘 부르는 노래에 하박국 3장 17절의 가사로 된 것이 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여기까지 끝, 성경에 여기까지만 나왔다고 봅시다.



한 해 농사 망친 거예요. 비가 안 왔든지, 병충해로 망쳤든지, 안 그러면 가축전염병이 번졌든지 해서 다 안 된 거예요. 도시로 이야기하면 가게를 열었는데 가게에 손님이 안 온다는 것도 마찬가지죠. 개척교회 열었는데 교인들이 하나도 없다는 것도 마찬가지죠. 그런데 18절에 보면,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이게 인간의 가치를 채우는 보람으로 살아가는 인간에게 자기 힘으로 성사될 수 있는 상황입니까? 이것은 없습니다. 모든 성경은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것이 성경이에요. 성경은 천국의 청사진입니다. 천국의 계획서입니다. 천국에 들어갈 몸은 어떤 몸이냐 하면, 무능력해야 되고요, 무가치해야 돼요.



일반교인들처럼 2016년도 교회표어, 이런 것을 내세운다면, 저보고 그런 것을 하자고 요구한다면, 우리교회 기둥도 없지만 기둥 두 개에 목표를 정해서 붙이자고 한다면 이쪽은 ‘무능력성’ 이쪽은 ‘무가치성’ 끝나는 거예요. 왜냐하면 나 외에 다른 구원자가 없다는 그것을 바라볼 수 있는 방법은 내 몸이 무능력해야 되고 무가치할 경우에만 오직 주님만이 할 수 있는 거예요. 심지어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능력도 우리한테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 능력도 없을뿐더러 예수를 믿고 따를 수 있는 그런 능력도 우리한테는 없어요.



이게 성령이 아니면 우리는 그것을 거부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더라도 성령이 안 오게 되면 우리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도망치게 되게 되어 있어요. 그런 말씀이 안 들리는 곳으로 도망칩니다. 사실은 그게 하나님의 작전입니다. “도망쳐라. 도망쳐라. 실컷 도망쳐라.” 결국 도망쳐서 막다른 길에 부딪히게 되면 그곳에 뭐가 있는가? 십자가가 있습니다. 주님이 피 흘리고 있습니다.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생명이 없느니라.”



이 말은 뭐냐? 처음부터 너희에게는 생명이 없었다는 겁니다. 처음부터 천국에 갈 수 있는 몸이 아니라는 거지요. 그래서 “오늘 본문이 뭡니까?” 한마디로 물으면 여기에 그리스도 몸이 나오는데 그리스도 몸이나 그 주체는 현재 우리 몸을 말하는 것이 아니기에 천국 갈 수 있는 몸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12절 끝에 보면,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그리스도의 몸으로 교체되는 거지요. 그런데 왜 우리 몸은 안 됩니까? 우리 몸은 자꾸 어떤 가능성과 가치성을 계속 뿜어내고 있는 거예요.



인생 실패하더라도 자기 자신에 대한 어떤 긍정이나 희망 같은 것을 기어이 끄집어내고 마는 겁니다. 현재 있는 성경말씀을 현재 있는 자기 몸의 가치를 불 지피듯이, 꺼져가는 불꽃을 피우듯이 다시 거기에 말씀을 집어넣어서 환하게 다시 타오르는 몸이 되기를 원하는 간절한 소망을 갖고 성경을 보는 거예요. 봄철에 보통 교회에서 대 심방을 하지요. 목사님들이 잠언서를 가지고들 많이 하지요. 잠언서에 보면 우리의 가치를 높여주는, 가치를 키워주는 듯한 성경구절이 굉장히 많아요.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뭐냐?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이런 대목가지고 멘트 던져버리면 봉투에 5만원 딱딱 나올 수 있는 거예요. “그 우편 손에는 장수가 있고 그 좌편 손에는 부귀가 있나니.” 이런 구절 보면 양쪽 다 잘 되는 것, 부자 되고 오래 살고, 부자인 채로 백세인생, 이것은 나의 가치가 번쩍번쩍 빛나지 않습니까? 성령께서 왜 개입하셨는가? 성령은 우리 몸에 직접 오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 몸에 오기 전에 다른 몸을 거쳐서 와요. 그 다른 몸이 뭐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똑같이 살면서도 비참하고 처참하게 망가진 그 몸을 경유해서 우리에게 찾아오는 겁니다. 그 몸이 누구냐?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을 때 하늘이 열리면서 비둘기같이 성령께서 오신 그 분, 바로 예수님의 몸입니다.



예수님의 몸에 비해서 우리의 몸은 하나의 허깨비에요. 하나의 그림자 같습니다. 예수님의 몸이 죽고 사흘 만에 부활했으면 그분의 몸은 첫 부활이 되는 겁니다. 그분의 몸은 첫 번째 부활이 되고 그 다음은 우리가 되는 거지요. 부활만 손에 쥐려고 하지 마시고 부활이 되기 전에 먼저 거쳐 갔던 몸이 무슨 몸이냐 하면, 바로 죄인 된 몸이에요. 따라서 성령께서 우리에게 작용하는 것은 뭐냐? 우리로 하여금 상한심령 되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죄인 중에 괴수되게 하시는 작업을 수시로 우리에게 성령을 통해서 계속해서 주시는 겁니다. “너는 가치 없다. 너는 능력 없다.



우리로 하여금 교만하고 오만한 마음을 계속해서 천국에 갈 수 있는 몸으로 바꾸기 위해서 낮추고 낮추는 겁니다. 13절에 보면,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유대인, 헬라인, 종, 자유자, 각종 직업들, 그 모든 직업들은 각자의 고유한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소위 간판이죠. 그 간판은 자기의 체면이고 가치고 그 간판과 합치되는 존재로 살아가기 위해 애를 씁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간판을 쥐고 있으면 천국에 갈 수 있는 몸이 되지를 못해요.



천국에 못가는 몸을 무슨 몸이라고 하느냐? 쓸데없는 몸이라고 합니다. 무가치한 몸이에요. 천국에 무슨 삼성, 현대, 에스케이, 엘지, 천국에 무슨 그런 것이 있습니까? 천국에 종합상사들이 있고 재벌들이 많아요? 재벌자격으로 천국 가는 것이 아니잖아요. 재벌의 이름으로 천국 가는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나는 뼈대 있는 집안이다. 나는 경주 이 씨다.” 혹은 “나는 안동 권 씨다.” 하는 그렇게 하는데 천국 가면 종친회 합니까? 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천국 가는 몸은 오직 한 몸 밖에 없어요. “네가 죄인이냐?” 너를 죄인으로 바꿔놓고 천국 보내주십니다.



왜 그런가 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죄 없으신 분이 대체하기 위해서, 죽어야 할 자를 대신 데려가기 위해서, 예수님처럼 닮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죄인 되어야 되는 거예요. 죄를 더 지어서 죄인 되는 것이 아니고 그냥 살던 식으로 살아가게 되면 그게 죄인 되는 겁니다.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의 열매를 맺을 것이고 그러면 이 몸은 보다 더 착하고 가치 있는 것이 되는 이것이 당연한 논리가 아닙니까, 라는 인식을 누구나 가질 수가 있어요. 그런데 그게 바로 잘못된 해석이고 그게 인간의 욕심에서 나온 겁니다.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라고 한 자체가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게 성령 받지 않으면 도저히 나올 수가 없는 고백이에요. 성령의 열매가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과 형제우애, 여러 가지인데 그것을 윤리도덕으로 목표삼아서 합체한다고 달성되는 것이 아니에요.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히면 저절로 나오는 겁니다. 온유 따로 나오고, 양선 따로 나오고, 형제우애가 따로 나오는 것이 아니에요. 그 말은 뭐냐?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과 형제우애의 열매를 맺는데 열매를 못 맺어서가 아니라 우리 속에 그 열매를 맺는 것에 저항하고 반항하는 어떤 장애가 있는데 그 장애가 뭐냐? 독자적으로 나만의 가치와 나만의 능력을 자랑 질 하려고 하다 보니까 남들 보기에는 윤리도덕이 나오는 듯해도 주님 보시기에는 전혀 성령의 열매가 아닌 거예요. 교회 와서 기도한 자랑, 헌금한 자랑, 봉사한 자랑, 그런 자랑만 내놓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교회에 오면 자랑 하나도 없어요. 해야 뭐 누가 알아주기를 하나. 인위적으로 마음을 낮출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마음 낮추기는 어떻게 하면 됩니까?” 제가 알려드리겠습니다. 정말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낮추는 방법. 도 닦고, 뭔가 바치고, 기도 오래하고, 이런 것 필요 없습니다. 성경 백독 잃고 쓰기 하는 이런 것 필요 없어요. 선교회비 내고 선교사로 아프리카 나이지리아 가서 죽고, 그런 것은 필요 없어요. 방법,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이기시면 되는 겁니다. 이것이 호세아 12장 3절부터 나옵니다. “야곱은 태에서 그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장년에 하나님과 힘을 겨루되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을 이기면 돼요. 하나님을 이기면 내가 얼마나 평소에 하나님의 적이었으면 하나님을 나의 적으로 오인해서 하나님과 맞장 뜰 정도로 건방졌는가가 드러나는 겁니다.



하나님을 이기는 방법은 뭐냐? 하나님을 안 믿으면 되는 거예요. 마음을 낮추는 방법은 뭐냐? 하나님을 안 믿고, 교회 안 나오고, 성경 안보고, 그냥 자기 잘난 맛에 그냥 남에게 기죽지 않기 위해서 열심히 자기 힘을 키우는 쪽으로 전념하고 매진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 있는 곳에서 될 수 있으면 멀리 떨어지고, 도망치고, 그렇게 하면 됩니다. 교회 나와도 마찬가지에요. 교회 나와도 교회에서 하는 모든 기도와 간구를 내가 잘되기 위한 쪽으로 기도하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서 보란 듯이, “하나님, 이 정도로 이렇게 내가 괜찮은 존재입니다. 내가 이렇게 잘나갈 수 있는 인간입니다. 이 정도로 나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 정도로 나는 뛰어난 존재입니다.”라고 하나님 앞에서 자랑 질하기 위해서 마음껏 하나님을 이용하는 식으로 하는 것이 하나님을 이기는 방법이에요. 이게 어렵지 않아요. 왜? 인간은 날 때부터 다 그러니까.



남들 보기에 신앙 있는 척 하지만 그 신앙의 힘으로 하나님마저 그 콧대를 꺾어버리고 하나님 앞에서도 큰소리치기 위한 자체적인 힘을 키우면서 이젠 나는 나로 인한 재미로 살겠다는 것, 내가 이렇게 잘되었다는 그 재미로 평생을 살아보겠다는 그런 오기, 기도해서 이런 병이 나았고 기도해서 이렇게 부자가 되었다는 것, 그 사실, 교회 봉사해서 이렇게 훌륭하게 되었다는 그걸 밑천으로 삼아서 평생을 살아보겠다는 그거, 그것을 이미 우리 선배 야곱이 했어요. 야곱의 특징, 그 이름 자체가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사람이에요. 우리를 닮았어요. 우리 모습을 닮았습니다. 남에게 지기 싫어해요.



야곱이 사람을 다 이긴 것은 좋은데 문제는 나가도 너무 나갔어요. 무협영화에서 칼질을 하는데, 칼질을 하면서 앞에 걸리는 인간들을 다 베어서 쓰러뜨리면서 나가는데 문제는 너무 나가다보니 자기가 지켜야 될 부모마저 그 칼질에 날라 가는 그런 경우, 그런 경우가 실생활에도 많이 있습니다. 야곱이 우리 인간의 감추고 감춘 우리의 야곱적인 본성, 공통적인 요소, 하나님을 믿는 이유가 하나님을 라이벌로 여겨서 하나님 앞에서도 자체적으로 당당할 수 있는 존재로 전환되기 위한 용도로서 하나님께 한 수 배워서 하나님과 좋은 관계 맺어서 이제는 하나님과도 터놓고 지내는 당당한 사람 되고 싶어서 믿는 그 본성을 고맙게도 하나님께서 야곱을 내세워서 우리를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그 야곱, 잘나가도 너무 잘나가서 하나님마저 이겼습니다. 이겨놓고 내가 무슨 짓을 했는고 하고 하나님 앞에서 울었습니다. “제가 정말 잘못되었습니다.” 내가 하는 이 성질머리, 성향, 이 모든 것을 주님이 그 앞길을 가로 막고 있었던 거예요. 폭주하는 차 앞에서 연약한 모습으로 “이 길은 아니야. 이 길은 지옥이야.” 하고 가로막으니까 우리는 그냥 치고 들어간 거예요. 그냥 밟고 들어간 거지요. 밟고 들어간 그 현장에 등장한 것은 십자가 피였습니다. 성령께서는 십자가 피를 경유해서 우리에게 오는 겁니다.



잘나가던 야곱이나 너나 똑같다는 겁니다. 그런 야곱 가지고는 절대로 천국 들어가는 사람이 될 수 없어요. 사람들이 교회 나오는 이유가 뭐냐? 딱 나옵니다. 이 몸을 천국에 집어넣기 위해서 교회 나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경유하지 않으면, 성령이 오지 않으면 그렇게 돼요. 그러나 성령이 와버리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나는, 이 몸은 영원히 천국에 못가고 천국에 가는 몸은 내 몸이 아니라 주의 백성 된 몸으로서 새롭게 만들어져요. 쉽게 말해서 이 몸 가지고 주의 몸 상대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니고 주의 몸의 연장체로, 주의 몸이 죽죽 늘어진, 주의 몸이 문어라면 우리는 그 머리에서 늘어진 여덟 개의 다리처럼 주님의 머리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몸, 그 몸은 더 이상 브랜드가 내 몸이 아닙니다.



그냥 주의 백성이 되는 거예요. 임금님 따로 계시고 우리는 임금님 좋을 대로 하는 백성, 이렇게 되면 마음 높이고 낮추고 그렇게 할 필요도 없어요. 마음 안 낮춰도 됩니다. 낮추나 안 낮추나 백성이에요. 마음을 낮춰서 구원받겠다는 것은 아직도 마음 낮춘 몸에 대해서 어떤 애착과 미련을 갖고 있는 겁니다. “혹시 이 정도 낮추면 천국 넣어주시겠습니까?” 이캐요? 이캐요? 이 정도 나를 낮추면 예쁘다고 천국을 넣어줄 것인지, 아직도 자기 구원에 미련을 갖고 있습니다. 그거 이단입니다. 그런 식으로 교회사기에 말려들지 마세요.



마음을 낮추는 것은 오히려 반대입니다. 노골적으로 대드세요. 그리고 여러분 성질대로 막 사세요. 2015년도 끝 설교가 결국 “막 사세요.”로 끝나네요. 하나님은 놀랍게도 거짓말 안한 에서는 지옥 보내고 막 살면서 질주본능, 시속 2백 킬로로 질주하는 그 차를 쾅, 하고 막아섰을 때 그 야곱을 하나님은 창세전부터 사랑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사랑한 것은 야곱이 아니고 야곱 속에 있는 예수님의 대신 희생하심을 사랑한 겁니다. 오죽 못났으면 대신 희생이겠습니까? 네 속에 나 같은 인간을 위해서 대신 죽으신 사랑, 그 사랑이 있어야 돼요.



요한 1서 4장에 보면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령은 하나도 놓치지 않습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는 이렇게 큰 소리로 외칩니다. “저는 주님을 사랑한 적이 없습니다.” 반드시 이것이 전제의 바탕으로 들어가야 돼요. “그리고 사랑하고 싶은 마음도 없습니다. 왜? 나는 내 사랑에 너무 지독하기 때문에. 나는 내 사랑을 접을 의사도 없고 그것을 포기할 의사도 없습니다. 아마 지옥가도 나는 내 사랑 포기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독생자를 보내셔서 노선을 바꾸는 거예요. “나 잘났다.” 하는 노선을 다른 노선, “저의 죄를 용서하소서.”하는 예수님노선으로 해서 주께서 거기서 응답해버렸습니다. 응답하고 난 뒤에 주님께서 응답한 그 분의 몸에서 성령이 나옵니다. 예수님 몸에서 성령이 나오게 되면 그 성령이 우리를 먹구름처럼 덮치지요. 덮치게 되면 비로소 우리는 얼마나 나밖에 모르는 존재, 어떤 경우라도, 아무리 은혜 줘도 우리는 잠시 “감사합니다.” 하지만 결국은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는 존재인 것을 확연하게 비춰주지요. 비춰주게 되면 우리는 나 자신이 무능력자고 무가치한 죄인인 것을 알게 됩니다.



죄인인 것을 알면 이제는 바르게 살아야 될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습니다. 죄인인 것을 아는 것은 그 때 그 뿐이고 하루를 더 살고 이틀을 더 살게 되면 점점 더 오늘에 몰랐던 죄를 내일에 더 들춰질 죄가 거기서 또 밝혀집니다. 60이 되면 60이 되도록 발굴 된 죄, 70이 되면 거기서 또 죄가 발굴될 거예요. 80되면 발굴되고 90이 되면 또 발굴되고. 알아서 가겠다고요? 알아서 갈 필요 없어요. 백세 될 때까지 그 넘어서까지 계속 발굴됩니다. 발굴 당할 때 그 발굴하는 포클레인, 피 묻은 삽날, 피 묻은 손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그러면 우리 몸은 왜 안 되고 주의 몸은 되는가?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오순절에 성령이 와요. 성령이 오면서 베드로가 하는 말이 이것은 요엘 선지자의 예언대로 왔다고 합니다. 그러면 요엘 선지자의 어떤 경우 때문에 성령을 보냈는가? 요엘 2장 28절에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라고 되어 있는데 중요한 것을 우리가 빠트리면 안 되는 것이 31절에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라고 되어 있어요.



우리 몸과 예수님 몸의 차이점이 뭐냐? 우리 몸은 아무리 기도해도 기도응답 안됩니다. 우리가 착한 일을 한다고 해서 오래 사는 것도 아니에요. 착한 일 하고 일찍 죽은 사람이 한 둘이 아닙니다. 이것은 제 말이 아니고 전도서에 나오는 말이에요. 공부 많이 한다고 해서 오래 사는 것도 아니고.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된 거예요. 이 세상에 태어난 우리 몸은 헛된 이 세상과 함께 허무하게 날라가 버려야 돼요. 그런데 예수의 몸과 우리 몸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예수님의 몸은 자연환경을 새롭게 바꿉니다.



예수님의 몸에 부합되는, 예수님의 격에 맞는 새로운 하늘과 새 땅이 마련되고 우리 몸은 아무리 기도하고 발광해 봐야 우리 처지가 손톱만큼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기도해서 응답받았다는 그것은 교회의 상투적인 사기에요. 이 말 하려고 목회 30년 이상 하고 있어요. 모든 기도응답이란 다 사기입니다. 응답도 되지 않는데 응답인 것처럼 억지로 끄집어내서 조작하고 날조한 거예요. 성경에 나오는 기도응답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죽으라.” 내가 죽여주는 대로 죽으라는 것이기 때문에 죽으면 되는 거예요.



사업이 잘되고 뭐가 잘된다고요? 그것은 그 타이밍이 그래요. 운이 그런 거예요. 나 하나 잘되기 위해서 나머지 열 명은 울고 있어요. 세상은 경제문제고, 서로 밀고 당기고 타이밍 맞춰서 잘되고 못되는 것이지 개인적으로 잘되고 못 된다는 이것은요, 전체적인 주님의 몸이 잘되는 것하고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한순간 웃었다고 해서 내가 구원받는 것 아니에요. 개인이 없어져야 돼요. 개인이 없어지고 그리스도의 몸 덩어리가 되어야 됩니다. 그 덩어리가 지체가 돼야 돼요. 지체가 되려면 기도하면 응답받는다든지, 이런 나만의 행위의 가치를 부지하지 말고, 나는 뭘 해도 무가치하고 뭘 해도 무능력하다는 그런 사람들의 집단, 집합, 그것이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겁니다.



우리 중에 누가 기도해서 구원받는 사람 아무도 없고 헌금하고 십일조 해서 구원받은 사람 아무도 없어요. 오직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이 기도해서 된 겁니다. 중보기도는 오직 예수님만 할 수 있지 아무도 다른 사람은 못해요. 예수님은 지금도 기도하십니다. 지금도 기도하시고 지금도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2015년을 돌아보세요. 우리가 뭐 잘났다고 숨 쉬고 있습니까? 햇빛과 공기를 얻는 일에 우리가 세금 낸 적 있습니까? 우리가 기도한다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되었던가요?



자연환경은 그리스도와 관련되어 있지 내 기도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차타고 가다가 사고 났는데 다른 사람은 죽었는데 나는 살았다. 구사일생이다 물론 하나님의 기적 맞아요. 하지만 그 기적을 통해서 우리는 “휴, 나는 살았구나.” 할 것이 아니라 지금껏 살려준 것도, 오늘날 사고 중에 살아난 이것처럼 계속해서 기적의 연속이었는데 왜 나는 그것을 모르고 차사고가 꼭 나야 “아이고, 하나님 덕분입니다.” 왜 그 순간만 그렇게 고백을 하느냐, 이 철없는 인간! 그동안은 뭐였습니까? 하나님도 이겨보려고, 하나님 앞에서도 당당해 보려고 내 자존심과 내 가치 세우는데 전력을 다한 겁니다.



모든 시간을 내 잘난 맛에 살아간 거예요. “이 말 들었으니 이제 바르게 살겠습니다.” 하지 마세요. 두 시간도 안 지나서 다 잊어버립니다. 다시 그 행세, 야곱의 본색이 어디 갑니까? 어디 안가요. 똑같아요. 평소 살던 그 모습이 야곱의 살던 그 모습이고 거기에 대해서 주께서 자꾸 가로막지요. 바바리맨처럼 자꾸 앞길을 가로막아요. 그러니까 성도가 성령을 받게 되면 첫 번째 현상이 뭐냐? 짜증납니다. 원망이 되고 불평이 나옵니다. “주님이여, 왜 내 뜻대로 안 됩니까?” 하면 주님의 말씀이 “네 뜻대로 안 되는 그것이 바로 내 뜻이다.”



네 뜻대로 안되어야 개인은 사라지고 주님이 그 개인을 대신하는 겁니다. 나라는 인간을 대신 해준 나,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몸인 것을 성령이 올 때 비로소 아는 겁니다.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직업과도 상관없이 천국 백성 만드는 데는 오직 하나, 그 집결장소가 중요합니다. 마지막으로 그 집결장소를 소개하고 마치겠습니다. 마태복음 20장에 포도원비유가 나옵니다. 아침 열시에 온 사람, 열두시에 온 사람, 오후 세시에 온 사람, 그리고 퇴근 시간 한 시간 남겨둔 오후 5시에 와서 일한 일군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품삯 줄 때 제일 나중에 온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을 줍니다. 먼저 온 사람은 나중 온 사람보다 더 받을 줄 알았는데 똑같이 한 데나리온 줍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하시면서 “천국은 이와 같으니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 얼마나 평소에 너의 노동의 대가를 네가 원했던가? 네가 구원받는 것은 주님의 노동의 대가지 너의 노동의 대가로 천국 가는 것이 아니잖아요. 우리가 교회 오고 안 오고, 주님이 발걸음을 세셔서 교회 오신 거예요. 일거수일투족 한평생 살아가는 것이 주님의 은혜 아닌 것이, 주님의 희생 아닌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주님의 희생덕분에 살았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이 온 그 순간만 은혜가 아니라 다시 뒤돌아서 소급해서 그동안 태어나서 살아온 그 모든 것으로 뒤돌아가서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로 삽니다.”라고 다시 한 번 감사하지요. 몇 초 안 가는 것 알아요. 야곱의 본성이 어디 안가고 죽을 때까지 가니까 은혜가 몇 초 안갑니다. 하지만 다시 막아서게 되면 다시 원상태로 다시 태어나서 “처음부터 주의 은혜로 살아왔습니다.” 하다가 다시 끼 부리고 잘난 체 하고, “주의 은혜로 잘 살았어요.” 하고 또 주의 은혜를 빙자해서 잘난 체를 하고 그러지요.



그때마다 주의 성령께서 “아이고, 인간아! 인간아!” 하고 탄식하시면서 계속해서 찾아오시는 겁니다. 왜? 자기 백성이기 때문에, 주님의 자기백성이기 때문에. 이제는 나의 자격이 아니고 주님의 백성의 자격으로 주님과 교제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태파악 다시 하게 해주시기 원합니다. 세상 나 좋으라고 있는 세상이 아니고 이미 끝장나라고 있는 세상인데 우리는 아직도 이 세상이 그렇게 좋고, 그 안에 사는 내가 좋고, 내가 일구어낸 결과물이 그렇게 좋고, 그 좋은 결과물로 우리는 보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십자가 피 흘린 모습으로 막아설 때에 멸망의 길로 가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십자가 피로 이미 구원되었음을, 이미 주의 백성 됨을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