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고린도전서74강-지체의 다양함(고전12;14-17) 160103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1. 22. 07:41
2016-01-03 12:40:15조회 : 431         
   지체의 다양함 160103 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지체의 다양함(고린도전서 12: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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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6-01-03 13:25 
지체의 다양함

2016년 1월 3일                           본문 말씀: 고린도전서 12:14-17

(12:14) 몸은 한 지체뿐 아니요 여럿이니

(12:15)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12:16)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12:17)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뇨

인간의 몸에 지체가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당연함이 사람들의 상식적 생각이 옳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배척’을 낳는 계기가 됩니다. 듣기에는 당연하지만 결론적으로 배척하고 싶은 존재로 느껴지게 하는 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방식입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라고 해서 편한 말이지만 사람들의 정체를 폭로시키는 의도가 전달되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예외가 아닙니다. 분명 몸에는 여러 가지 다른 지체들이 박혀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세상 그 누구도 자신을 누구의 몸에 붙어있는 지체 정도로 알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비록 작은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본인에 있어 본인이 전부입니다. 그리고 최종적입니다. 궁극적 가치와 의미는 오로지 본인이 결정짓고 구성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남들에게 아무리 좋아도 나에게 도착한 그 가치는 오직 나를 위한 가치이어야 합니다. 바로 이런 인간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즉 인간은 자신의 주체성을 떠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누구의 부분이 되기보다는 본인이 머리가 되는 그런 몸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주체 싸움으로 이어집니다. 교회사에 나오는 모든 교회나 교단이 이런 식입니다. 각자 자신들이 주체가 되어 있는 몸들이 아무리 집합해봤자 그저 ‘집단’에 불과합니다.

인위적 조직체 불과합니다. 그 내부에 아무리 강제성 있는 법으로 굴복시켜봤자 그 교회는 각자 자체의 변형체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말하는 오늘 본문은 몸은 이런 인공적인 몸, 인위적인 몸이 아닙니다. 죽음을 경유한 몸을 말합니다. 성도는 예수님 같은 무덤을 사용한 자들입니다.

창세기 49:30-33에 보면, “이 굴은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에 있는 것이라 아브라함이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밭과 함께 사서 그 소유 매장지를 삼았으므로 아브라함과 그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었고 이삭과 그 아내 리브가도 거기 장사되었으며 나도 레아를 그곳에 장사하였노라 이 밭과 거기 있는 굴은 헷 사람에게서 산 것이니라 야곱이 아들에게 명하기를 마치고 그 발을 침상에 거두고 기운이 진하여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그 부인이 거기에 묻혔고. 이삭과 그 부인도 거기에 묻혔고,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야곱도 자신이 거기에 묻힌다는 겁니다. 이 막벨라 굴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이 실질적으로 성취가 되면서 지상에서 업무가 마감될 때, 그 마감되었다는 증표로서의 무덤입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께서 이 땅의 생애를 마감하시면서 하시는 일이 완료되었음을 언급하시는 것은 곧 십자가 못박히시는 그 순간입니다. 곧 예수님의 죽음에 합류되지 아니하면 교회도 아니요 예수님의 몸의 지체도 아니다 는 말입니다. 이는 인간의 주체는 인간의 혈연관계의 종결을 통해서 언약의 최종 주인공이신 예수님의 주체로 바뀌어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주체라는 것은 에서 비롯된 이론입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할지라도 내 몸이 아픈 것은 남이 대신해 줄 수가 없습니다. 치과를 다녀올 일이 생긴다든지 아니면 목욕을 갔다 와야 한다든지 아니면 아이를 해산해야 될 경우라든지 이발을 해야할 경우에 그 누구도 나를 대신해 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달리 말씀하십니다. 인간의 주체는 누군가에 의해서 대신 바꿔진다는 겁니다. 그 분이 채찍에 맞게 되면 내 몸이 나음을 입을 수가 있는 겁니다.(사 53:5) 이 바꿔지는 유일한 영역은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혈연관계에 머물러 있는 한, 이런 주체 변동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간은 본인에 대해서 본인이 책임지고 싶어하는 주체적 의무성이 타고난 것처럼 가까운 가족에 대해서 단지 ‘나의 가족’이라는 이유 때문에 본인이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을 낳게 됩니다. 이 범위를 확대시켜 나가면 보다 넓은 세상에 대해서 인간은 책임을 지려고 나서게 됩니다.

즉 주체가 바뀌지 않는 상태에서 아무리 본인의 영향력을 발휘해봤자 나타나는 것은 ‘인위적 집단’, ‘인위적 교회’만 생겨날 뿐입니다. 마태복음 12:46-50에 보면,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 모친과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한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섰나이다 하니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간들이 내밀고 시도하는 모든 것은,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짐’이라는 원칙의 확대에 불과합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 제 쪽에서 어떤 식으로 보이면 저를 천국에 불러올리겠습니까”라고 나오는 겁니다. 하지만 혈연관계가 청산되지 아니하면 나중에 천국 가서도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자가 지옥가고 영원토록 신음한다면 그 사실을 알고부터 과연 천국 삶이 마음 편안 한 삶이 되겠습니까? 어림도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미 지상에서부터 죽음으로 인해 주체가 예수님 주체로 바뀌는 현상이 성령의 은사로 일어나야 하는 겁니다. 즉 타인이 결코 본인의 타인이 아니라 예수님의 타인으로 될 경우에만 본인이 본인의 부담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성도와 성도의 만남이란 직접적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가운데 거대한 중심구멍을 두고 서로를 보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상대방 성도는 나의 성도가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주체를 제거하고 불러주듯이 저 맞은편의 인물도 주님에 의해서 주체가 제거된 입장에서 오직 예수님 하실 일만 증거하면서 만남이 이루어지고 이것이 바로 지체의 다양함입니다. 몸은 하나이듯이 서로 연결맺는 관계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뿐입니다.

결코 나의 주체적 사랑으로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내 사랑, 내 소망, 내 믿음은 주체의 죽음과 더불어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를 가운데 놓고서 주님의 지체를 만나는 기적을 체험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6-01-03 22:26 

172강-고전 12장 14-17(지체의 다양성)160103-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2장 14-17절입니다. 신약성경 278페이지입니다.



“몸은 한 지체뿐 아니요 여럿이니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찌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찌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뇨.”



예수님이 하는 말씀이 얼른 들으면 매우 쉬워 보입니다. 오늘 본문 같은 경우에도 예수님이 사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생각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롭게 만든 몸이 어떤 몸인가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인간의 몸을 가지고 설명하니까, “전체가 눈 같으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 있으며 만약에 전체가 코라면 보는 곳은 어디에 있겠느냐?”라고 해서 굉장히 쉬워 보이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런 뜻으로 이야기한 것이 굉장히 많은데요. “농부가 씨를 뿌렸다. 어떤 씨앗은 새가 와서 먹어버렸고 어떤 씨앗은 바위가 씨앗을 막아서 싹이 트지 않았다.” 들으면 우리가 다 아는 이야기인데 주님께서는 거기에 단서를 붙여요.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찌어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나 사도가 하는 말씀이나 성경에 나오는 말은 특수한 귀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특수한 눈이 필요하고.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예수님의 몸에서 나오는데 그 몸에서 나오는 말씀은 아담에 속한 네 몸과 네 두뇌로서는 연결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의 은사가 필요한 거예요. 제가 지난시간에 했지요. 성령의 은사는 교회를 부수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교회라는 것이 사람들이 모이다 보니 같은 사람들끼리 모여서 단체를 만든 이 단체는 아무리 숫자가 많아도 붙지 않아요. 그리스도의 몸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될 수가 없는데 사람들은 억지를 부리지요. 여기에 법을 집어넣고.



그래서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면 교회가 아니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이 모여서 조직체 만들었다고 해서, 거기에 대한예수교 장로회라고 쓰고 괄호 열고 합동 측, 그거 집어넣었다고 해서 그걸 교회라고 우기게 되면 그것은 들을 귀 없는 자들의 집합에 지나지 않습니다. 볼 수 있는 눈들을 가지지못한 자들의 모임에 지나지 않아요. 그리고 2천년교회사에서 줄곧 그런 교회들밖에 없었습니다. 거기서 교리 만들어내지요. 삼위일체신학 만들어내지요. 신학자배양하지요. 그렇게 만들어놓고 그걸 기독교라고 하고 누구하고 싸우는가? 불교하고 싸우고 이슬람교하고 싸우고. 정치적 놀음을 하고 있는 겁니다. 정당 만드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그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몸이 아닙니다. 인간이 아무리 모이고 공감을 드러내도 왜 교회가 안 되는가? 인간은 어떤 경우라도 자기를 누구의 부분으로 간주하지를 않습니다. 본인이 전체입니다. 본인이 전체기 때문에 내가 누구의 귀가 되고, 누구의 팔이 되고, 누구의 코가 되고 입이 되는 것을 본인이 용납할 수가 없어요. 나는 나로 인해서 살거든요. 나는 나 자신으로 인해서 산다고요. 내가 누구에 붙어서 사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배알도 없고 자존심도 없습니까?



그런 것을 어디서 알 수 있느냐 하면, 치과에서나 아니면 해산할 때 알 수 있어요. 평소에 욕 한번 한하던 아내가 아기 낳을 때는 욕을 막 한다는 거예요. “내가 이렇게 아픈데 너는 뭐하는데?” 이런 식으로. 치과에 가면 나는 이렇게 아픈데 같이 사는 부부라도 한쪽은 전혀 아프지를 않아요. 이게 몸이 달라서 그렇거든요. 이걸 아주 고상한 말로 실존주의라 합니다.



실존주의란 내 이발을 누가 대신 해줄 수가 없고, 남이 목욕했다고 해서 내 몸이 “아이고, 개운해라.” 할 수 없는 이것을 실존주의라 합니다. 실존주의란 내가 아무리 그럴 싸 하고 교양 있게 살고 싶어도 내 몸이 나를 힘들게 한다면 나의 정신과 감정 이 모든 것도 힘들어질 수밖에 없는,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현실이기 때문에, ‘나는 경건해야해. 나는 착해야 해. 나는 늘 행동 바르게 해야 해.’ 아무리 우겨도 몸이 아프면 찡그리게 되어 있고, 배고프면 물건 훔치게 되어 있고, 탐나는 것이 있으면 갖고 싶게 되어 있어요. 힘들면 쉬고 싶어요.



이걸 누가 대신 할 수 없는 것을 실존이라 합니다. 누가 내 인생을 대신할 수 없는 거예요. 나대신 누가 치과에 갔는데 내 이빨이 낫는다든지 그런 것은 없습니다. 이것은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거거든요. 실존주의니 뭐니 철학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것은 상식 중에 상식이에요. 그런 성경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대신죽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얻고 대신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의롭게 된다는 거예요. 이게 들을 귀 있는 자나 듣지 누가 알아듣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도바울의 이야기는, 진짜 교회는 실존적으로 내가 나에게 있어서 전체라고 여기는 사람은 절대로 어느 교회에 가도 그것은 교인이 아니고 성도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 사람이 교회를 몇 군데 다니든 상관이 없어요.



그리고 기존의 모든 교회가 다 없어져도 그리스도 몸은 영원합니다. 십자가 마을에 있는 사람들보고 “너만 교회냐?” 그런 소리들을 해요. 저보고도 그런 이야기 하는 사람이 있어요. 성경에 나오는 교회는 없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왜 못 믿는지? 아마 성경을 안 봤기에 못 믿겠지요. 뭔가 눈에 보이는 조직되어 있는 교회 그것이 교회인줄 알고 그것을 짠, 하고 없애버리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성경 오늘 본문 나오는 이 몸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거든요. 이 교회는 세상 어떤 권세도 없앨 수 없는 교회고 이것만이 진짜 교회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라 하는 것은 인간들이 모여서 이런 교회를 만들 수가 없어요. 집사, 장로, 권사 세운다고 해서, 목사 세운다고 해서 성경에 나오는 이교회가 만들어지지를 않습니다. 이것은 성령을 마셔야 돼요. 성령의 은사가 와야 이 교회가 되는 겁니다. 성령의 은사가 와서 교회가 될 때 뭐가 바뀌는가? 주체가 바뀝니다. 그동안 인간이 실존적으로 내가 나의 주인이라 여겼던 것은 어디까지나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나밖에 없는 이상은 나 여기 있으면 내 주위에 있는 것은 남, 타인이 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뭐냐 하면, 고린도전서입니다. 고린도전서는 그 앞에 뭐가 있느냐 하면,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이 있어요. 제 말 맞지요?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예수님께서 먼저 이 땅을 방문했기에 오늘 우리가 보고 있는 고린도전서의 이 편지가 나타난 겁니다. 분명히 이것이 맞는 이야기거든요. 그런데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이미 죽으신 분이에요. 그 말은 뭐냐 하면, 예수님과 같은 무덤을 사용하지 아니하면 교회가 될 수 없고, 그리스도 몸이 될 없고, 지체가 될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우리가 왜 교회가 안 되는가 하면, 우리가 안 죽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의 요지가 뭐냐 하면, 예수님이 사시다가 죽었다는 거예요. 죽고 난 뒤에 죽음을 경유해서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하신 분입니다. 부활해서 만들어진 것이 뭐냐? 그리스도 몸이 부활의 몸으로 만들어진 거예요. 부활의 몸에 결부되어 있는, 연결되어 있는, 같은 무덤을 사용해서 같이 되살아난 사람들을 지체라고 불러주는 겁니다. 지체라고 호명하면서 그 지체에 대해서 오늘 본문은 언급하고 있는 거예요.



이미 이렇게 되면 내가 주체라는 이것은 날라 가버립니다. 주체는 예수님이 나의 주체가 되고 그러면 나는 내가 아니에요. 내가 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내 안에서 예수님이 ‘나는 나’라고 하는 경우에 한해서 나가 되고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하신 분이 여호와거든요, 그래서 예수님만 나고 예수님만 나가 되면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의 남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나한테는 남이 없어요. 나라고 하는 주체가 없기에 나한테는 남이 없어요. 제가 이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거예요. 자기 자신이나 남에게 대해서 책임지지 마세요. 2016년 올해 표어입니다.



자기 자신의 인생이나, 세상이나, 남에 대해서 일체 책임지지 마세요. “인생 이렇게 살아서 이렇게 실패했다.” 그렇게 책임지지 마세요. 본인의 인생은 없습니다. 본인의 인생을 책임진다는 것은 아직도 주체가 살아 있다는 뜻인데 이러면 예수님과 같은 무덤을 사용 안했어요. 예수님의 무덤 속에 들어갔다가 기어 나온 사람만이 교회고 그게 지체에요.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죽음을가지고 우리에게 집어넣은 겁니다. 그게 성령의 은사에요.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자기 얼굴에 대해서 책임지라고 하는데 자기 얼굴에 책임 못 집니다. 시간 따라 늙어 가는데 아무리 책임지려고 해도 부작용만 나오지 책임질 수가 없어요.



책임은 지고 싶은데 책임질 수 없어서 자기변명이 안 되니까 하는 것이 남 탓이에요. 남들이 그러니까 내가 따라갔지, 이런 식으로 맨 날 남 탓 하고 있어요. 그 의식에는 뭐가 깔려 있는가 하면, ‘내 인생은 내가 끝까지 책임져야지.’ 이게 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성도가 살아가면서 제일 힘든 것이 뭐냐? 죄와 마귀와 싸우는 것이 힘든데 그 죄와 마귀와 싸우는 그 방법을 우리가 알아야 돼요. 그 방법이 뭐냐? 자꾸 내 얼굴, 내 인생, 나의 세상에 대해서 책임을 지려고 하니까 우리는 번번이 마귀에게 지고 죄에 지게 되는 겁니다.



‘내가 낳은 자식 내가 책임지고 내가 결혼한 아내는 내가 책임지겠다.’ 결혼식 할 때는 만세 세 번 부르고 장가 잘 갔다고 하는데 저는 그걸 이렇게 생각합니다. 인생이란 한 때의 기분이다. 인간의 사상이나 논리, 이런 것은 한때의 기분이에요. 사상도 배부를 때 사상이지 상황 바뀌면 사상이고 뭐고 간에 당장 밥 먹고 살기 바쁜데 세계 평화가 어디 있어요? 공산주의가 어디 있으며 자본주의가 어디 있으며 사회주의가 어디 있어요? 자기가 주체인데요. 내가 아니면 나에 대해서 책임질 사람이 없다고 여기는 그 판국에 사상이라는것도 자기 죄를 감추기 위한 변명입니다. 인간의 죄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자기를 개인적 존재로 간주하는 것이 죄입니다.



중년의 아주머니가 옛날이야기를 해요. 자신은 어린 딸이었고 자기 어머니 젊을 때 시어머니 모시고 시집살이를 하는데 자기 어머니가 열심히 방을 쓸고 닦았답니다. 그런데 그걸 본 시어머니가 다짜고짜 다가와서는 귀싸대기를 때려버린 거예요. 자기 어머니도 놀라고 그 딸인 자신도 얼마나 놀라겠어요? 갑자기 폭력이 날라 왔으니까요. 방청소 하는 것이, 쓸고 닦는 것이 뭐가 나쁘냐고 물으니 시어머니가 하는 말이 “쓸고 닦으면 복이 나간다.”고 한 거예요.



방바닥에 복이 깔려 있는 거예요. 벽지에 복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데 그걸 쓸고 닦아버리면 복이 뜯겨져 나간다고 보는 겁니다. 우리는 그걸 쉽게 ‘옛날에나 있었던 한물간 미신이겠지.’ 이렇게 생각하거든요. 그걸 보편화시켜 보세요. 내가 내 인생에 대해서 책임지고자 하는 그것이 바로 죄에요. 그게 미신입니다. 내가 확고하면 남이 생겨버리고 그 남에 대해서 내가 책임지려고 시도하게 되면, 계속해서 책임을 지려고 하게 되면 그것은 “내가 남편으로서 책임 다 했다.” 이렇게 돼버리면 자기라는 것을 더 공고히 해야 되고 단단히 해야 돼요.



“나는 목사답게, 나는 장로답게, 집사답게 할 일 다 했습니다. 그러니까 나보고 군소리 하지 마세요. 내가 할 도리 다 했습니다.” 이게 바로 마귀에요. 이게 바로 죄가 된다는 거예요. 이게 무슨 교회입니까? 자기 자랑하는 데지 그게 무슨 교회에요? 오늘 본문이 중요한 이유는,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는 예수님과 무덤을 같이 사용해서 이미 죽었다가 살아난 그 영혼들, 그 영혼들의 단체, 집합이거든요. 이미 주체들이 날라 가버렸어요. 그렇다면 “주님께서 그렇게 만들었다면 구태여 고린도전서가 필요 없지 않습니까?”라는 말이 나올 거라는 말이지요. 주께서 알아서 다 만들었는데 이 고린도전서가 왜 필요합니까?



예수님 있을 때, 그리고 그 이후에 계속해서 가짜 교회들, 유사품들, 모방품들이 교회라는 이름으로 자꾸 만들어지거든요. 주체가 죽지 않고 성령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십자가 복음도 모르면서 그저 괜찮은 집단 만들면 주께서 전세버스 보내서 단체로 천국으로 데려갈 있는 것처럼, 정통신학, 정통교리, 삼위일체 지키면 천국 보내줄 거라고 공감을 나타내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가짜교회를 만들고 있잖아요. 전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지실 때부터 이미 유대교라는 이름의 가짜 하나님교회가 있었잖아요. 예수님 십자가 지고 난 뒤에도 사울이라는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들 이단이라고 잡아 죽이려고 하다가 다메섹에서 예수님에게 걸려서 “주여,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했잖아요. 그 분위기 자체가 아무리 예수님이 다녀가도 여전히 인간들은 자기가 상상하고 싶은 하나님, 자기가 믿고 싶은 하나님을, 산타클로스 같은 하나님을 만들어내고 있어요. 그게 인간들의 종교성이거든요. 가짜잖아요.



그런데 이 가짜라 하는 것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는 곳에 가짜가 겸하여 노출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요한계시록이에요. 참 아까 광고하는 것을 빠트렸네요. 다음 주 대전에서 십자가마을 수련회가 있습니다. 주제는 요한계시록입니다. 하나님의 계시, 예언이란 감추어놓은 악마의 모습을 들추어내기 위해서 주신 겁니다. 오늘 본문도 계시잖아요. 이 본문 가지고 사람들이 흉내 낸다고 난리도 아니에요. “목사님, 저는 눈에 해당됩니까? 아니면 코에 해당됩니까?”



그래서 어떤 교회 조직 표에 보면 목사는 교회 머리가 돼요. 머리 밑에는 장로가 되고 갈빗대쯤에는 집사를 만들어놓고 모가지 옆으로 비어져 나오는 것은 부목사나 협동목사에요. 이건 허수아비도 아니고. 모든 카리스마는 위를 향하여, 오직 목사를 향하여. 왜 목사를 향하라고 하느냐 하면, 요한계시록 2장에 나오는데 목사가 주의 사자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사기가 먹혀든다는 거예요. 왜? 다 같이 성령 받은 적이 없기에. 교회 열심히 다녀서 그것으로 나라는 주체가 교회에서도 생생하게 살아 있고 죽어서 천국 가서도 나라는 주체가 생생하게 살아 있기를 원하고 있는 겁니다.



저는 그런 사람 놀리기 위해서 늘 이렇게 하지요. 천국 갔더니 귀한 아들이 지옥 가 있다면 꼴 참 좋지요. 지옥 간 아들 생각하게 되면 마음이 편할까요? 지옥에서 아들이 고생하면서 “아버지!” 하고 있는데 본인은 천국 가서 마음이 얼마나 심난 하겠습니까? 천국 가도 밤잠을 못 이룰 거예요. 잠 못 이루는 밤이 될 겁니다. 천국 가도 문제라. 천국 가도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 지옥 가 있으면 맘 편히 못사니 그것이 천국 간다 해도 지옥 맛이지요. 천국이 뭔지 지옥이 뭔지, 누가 이야기를 해줘야 되는데 본인도 모르고 아무도 몰라요.



설교 다시 하겠습니다. 이 본문 내용은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에게만 해당됩니다. 몸은 하나요 지체는 여럿이라도 하나의 몸을 이룬다. 그런데 그 몸이란 주체가 내 몸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주체가 이미 그리스도로 되어 있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런 식으로 만드는 거예요. 그리스도 몸이 어디에 있느냐고 찾지 마세요. 우리의 지체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몸을 볼 수가 있는 거예요. 그런데 봐도 뭐합니까? 볼 눈이 있어야 보이고 들을 귀가 있어야 알아먹지요. 기껏 보이는 것은 뭐냐, 내가 주체인 이 몸에서 나오는 시력과 눈과 귀로써 보려고 하니까 교회라는 것을 인간들 모이고 간판 걸면 그것으로 교회되는 줄로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인간들이 기껏 하는 짓거리가 자기와 자기인생에서 책임지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나는 내가 책임자가 되는 겁니다. 내가 책임자가 되기에 무엇을 생각하느냐 하면, ‘내가 무엇을 행할까요?’ 또는 “내가 무엇을 하면 천국에 넣어주겠습니까?”라고 묻는 겁니다. “예수 믿으라면 예수 믿고, 삼위일체 믿으라면 삼위일체 믿고, 하여튼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가 뭘 하게 되면, 교회에서 목사님 말씀대로 뭘 하게 되면 천국 가겠습니까?” 그 이야기만 하라는 거예요.



오늘 본문은 뭐냐? 너는 없다는 거예요. 왜? 네가 머리 부분이 아닌 이상 너는 없는 존재가 되어버려요. 우리가 팔이 된다면 있다는 말은 팔에 붙이는 것이 아닙니다. 머리가 있음에 있는 거거든요. 몸이 있음에 있지 팔이 있다, 코가 있다, 눈이 있다, 이런 식으로 ‘있다’를 붙이면 안돼요. 어디에 붙어 있다, 어느 덩어리 있음에 거기 붙어 있다고 해야 되는 거예요. 이게 성령 받은 모습입니다. 내 인생 내가 책임 안 져야 될 이유가 책임지시는 분이 따로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한 평생 자기 얼굴에 왜 책임져야 되고 자기인생에 왜 책임져야 됩니까?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데. 내가 술 먹고 남의 집 담벼락에 오줌 싼 것까지 지나간 과거가 다 은혜인데. 군에 입대하기 전에 총각딱지 뗀다고 이상한데 간 것도 주의 은혜고. 좀 이상한 논리지만. 십일조 하려다가 아까워서 반 떼먹고 한 그것도 주의 은혜고.



살아온 과거가 다 주의 은혜입니다. 사도바울이 예수 믿기 전에 예수 믿은 사람들 잡아 죽인 그것도 주의 은혜였어요. 내가 살아온 것이 주의 은혜였습니다. 창세전부터 이미 예정되었기 때문에. 내가 그 짓을 해야 되고, 강도짓을 해야 되고, 예수 믿는 사람 핍박 해야만 했다는 겁니다. 앞으로 두 번 다시 난 내 인생에 책임지지 않는다. 내가 나한테 책임지지 않는다면 나에게 붙어 있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내가 책임질 수 없는 거예요. 누가 누굴 사랑해요? 사랑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인간에게는 사랑 없습니다. 인간에게 사랑 없어요. 일시적 흥분상태지 사랑이 아닙니다. 이것은 정욕이지요. 신경전달물질의 현상이에요.



인간의 주관, 주체, 이게 안 바뀌네요. 바뀌지를 않아요. 머리 부분은 놔두고 다른 것으로 대체하려고 하는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네 자로 사이보그라고 합니다. 휴머노이드하고 사이보그와 달라요. 사이보그는 로보캅이고 휴머노이드는 터미네이터고, 그렇게 달라요. 터미네이터는 모든 구조가 초합금으로 되어 있어서 두뇌를 포함해서 모든 것이 기계인데 인간처럼 감정을 느끼는 것을 휴머노이드라고 합니다. 사이보그라는 것은 로보캅인데 내부 장기라든지 중요한 것 몇 개 빼놓고는 전부 다 기계로, 금속물질로 다 바꾼 거예요. 앞으로 산업은 사이보그를 만드는 게 돈이 되는 겁니다. 심장도 기계로 바꾸고 모든 것을 사이보그로 다 바꾸는 거예요. 심지어 선이 없는 상태로 이 두뇌까지 조종해서 울고 웃게 만드는 거예요. 믿음 없는 사람도 주사 한 대 맞으면 “믿습니다.” 하는 시대가 와요.



그런데 문제는 여전히 자기가 주체라는 겁니다. 여전히 자기가 주체가 되어 있다는 겁니다. 왜 자기가 주체가 되고자 하느냐? 자기 외에는 자기를 책임질 사람이 없고 세상을 자기로 인하여 바꾸는 어벤져스, 영웅이 되고자 하는 거예요. 아까 태민이가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었어요. 그 놀고 있는 장난감이 요새 품귀현상을 빚고 있는 유명한 상품이에요. 요즘 애들 그거 없으면 놀지를 못합니다. 그 이름을 물어보고 하도 어려워서 적어왔습니다. 프린스 콩, 타이탄, 나백작, 테로, 이건 무슨 방언도 아니고.



이 장난감 로봇을 왜 갖고 놉니까?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누가? 내가, 내가 책임지고 싶어서. 어릴 때부터 내가 세상을 변화시키면 내가 내 할 도리를 다 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강한 자의식. 이 주관, 성경보고 교회 몇 번 나오고 설교 몇 편 듣는다고 바뀔 주관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제 주께서는 이 주관을 어떤 식으로 바꾸는가? 바꾸는 방법이 있어요. 우리가 쓸 수 있는 방법은 아니고 하나님께서 쓰시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 방법을 창세기 49장에서 읽어보겠습니다. 창세기 49장 29절에서 31절에 보면, “그가 그들에게 명하여 가로되 내가 내 열조에게로 돌아가리니 나를 헷 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우리 부여조와 함께 장사하라 이 굴은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에 있는 것이라 아브라함이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밭과 함께 사서 그 소유 매장지를 삼았으므로 아브라함과 그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었고 이삭과 그 아내 리브가도 거기 장사되었으며 나도 레아를 그곳에 장사하였노라.”


막벨라 굴입니다. 아버지 아브라함과 이삭과 그리고 지금 이야기한 요셉까지 전부 다 한 굴, 동일한 매장지에 집어넣는다는 이 말은 혈연관계의 단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체를 죽여 버리고 거기에 예수님의 주체를 집어넣는 방법은 혈연관계를 끊는 거예요. 혈연관계가 끊어집니까? 마태복음 12장 4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설교하고 계실 때 제자들이 말했습니다. “예수님 뒤에 형제들과 모친이 와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여기 있는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아버지의 뜻대로, 그러니까 아버지가 머리 부분이에요. 아버지가 주체가 됩니다. 주체를 나라고 할 수 있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나라고 하는 예수님의 하나의 부분으로서 들어가지 아니하면 우리는 예수의 나라에 갈 수 없어요. 인간이 상상하는 그것은 하늘나라 아닙니다. 그것은 가짜입니다. 진짜 하늘나라는 하나님나라가 아니고 예수의 나라에요. 모든 사람에게 미움 받았고 모든 사람에게 배척받았던 사람으로부터의 영원한 상처를 함유하고 있는 그분, 그분의 나라입니다.



내가 주체라는 이유 때문에 상처받는 분, 내가 내 인생 책임진다고 교회 나왔기 때문에 진정 나로 인하여 가려졌던 그분의 십자가복음, 나 잘난 맛에 살아가기 때문에 시답지 않다고 천시 받은 그 분, 그분의 나라에 우리가 어떻게 합류하겠습니까? 나를 천시해야지요. 나를 무시해야 돼요. 그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나를 무시하고 천시하려니까 주위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보지를 않는데요. 너는 누구 집 아들이고, 누구의 집 손자며, 장한 아들이며, 어떤 지위를 가지고 있고, 목사면 네가 목사답게 해야 되고, 장로면 장로답게 해야 되고, 집사면 집사답게 해야지, 이런 식으로 자꾸 어떤 책임을 강요하는 그런 분위기가 있는데 그걸 어떻게 탈피합니까?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는 길을 어떻게 갈 수 있어요?



주께서 가게 하십니다. 문둥병 되게 했거든요. 마태복음 11장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세례요한은 도무지 믿기지를 않는 거예요. 구름타고 와야 되는데 구름이 보일 기미도 없어요. 그래서 세례요한이 물었어요. “오실 분이 당신이 맞습니까?”라고 물었더니만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마 11:4,5) 남들 보기에 정말 소경이 눈을 뜹니다. 남들 보기에 귀머거리의 귀가 열려요. 남들 보기에 앉은뱅이가 걷게 됩니다.



그런데 남들 보기에는 그런데 본인은 눈이 떠져도 그 사람은 눈이 뜬 채로 소경이 될 가능성이 많아요. 문둥병자 열 명을 다 깨끗하게 했는데 한 사람만 돌아왔거든요. 소경 열 명이 와도 한 사람만 진짜 눈이 뜨일 수가 있어요. 그냥 육체적인 눈 뜨는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왜? 주체가 안 바뀌었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을 대하면서 우리가 예수님 앞에서 절름발이였던 것을 알아야 되고, 우리가 소경이었으며, 우리가 죽은 자며, 우리가 귀머거리 인 것을 예수님 십자가 앞에서 인정을 해야 됩니다.



우리가 소경이면서도 소경 아닌 체 하고, 귀머거리이면서 귀머거리 아닌 체 하는 것이 뭐냐 하면, 이 주체부분을 마귀가 점령해서 그래요. 내 머리 부분을 내가 아닌 다른 괴물이 지배했기 때문에 맨날 우리는 “내 인생 내가 책임져야 해. 내 미래는 내 손에 달려 있어.” 맨날 하는 소리가 그거예요. “내가 기도를 안 하면 응답도 없어. 올 한해도 애들 남산 위의 노루새끼처럼 잘 되게 하소서.” 소원이 뭐냐고 물으면 “그저 우리 가족 건강한 것 외에는 다른 것 없습니다. 하는 일도 잘 되면 좋고요.”



똑같은 해가 뜨는데 그날만 유난스럽게 응답의 능력이 있는 건지. 해가 문제가 아니고 달이 문제가 아니고 주체가 문제에요. 괴물이 그렇게 시켰어요. 예수님을 싫어하는 괴물이 들어앉아가지고. “아무도 너를 책임지지 않아. 네 인생은 네가 책임져야 돼. 네가 복 받는 것은 네가 기도하기 나름이야.” 이런 식으로 사기를 치고 있다는 말이지요. 복 받으려면 헌금해야 되고 복 받으려면 예배 참석해야 되고, 복 받으려면 목사 말 들어야 되고, 이런 사기를 쳐도 우리가 같은 주체이기 때문에 그것이 납득이 되고 이해가 돼요. 누가 대신 책임진다는 생각을 우리는 못하고 있는 겁니다.



인류의 모든 역사, 우리도 그중에 포함되어 있는데 그 인류의 역사가 뭐냐 하면, ‘내 인생 내가 책임지기’로 만드는데 그것이 확대가 되면 ‘내 가족 내가 책임지기’거든요. 그걸 확대시키면 ‘내 민족 내가 책임지기’가 됩니다. 더 확대하면 ‘내 사회 우리가 책임지기’가 돼요. 그래서 소통, 인문학강좌에서 소통이 나오는 겁니다. 이게 어디서 나왔는가? 로마에서 이미 나온 겁니다. 네 번째 짐승인 로마에서. 요한계시록강의 맛보기로 미리 합니다. 로마에서 용기, 지혜, 절제, 덕이 있어야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게 영웅으로서 인간답게 사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이의를 걸 수 있는 사람은 주체가 예수님으로 바뀐 사람밖에 없습니다. 아무도 이의를 못 겁니다. 그 바뀐 사람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요한복음 8장 56절,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아브라함이 지혜로웠습니까? 절제했습니까? 용기가 있었습니까? 덕이 있었어요? 아브라함은 “주여, 제가 주체가 아닙니다. 제 아들 이삭의 혈연관계는 제 아들이 아니고 주님의 아들입니다. 예수님 바라보기를 원했던 거예요. 여러분, 맨날 용기 가지시고 절제하시고 지혜가지시고 덕 가지세요. 그래서 지옥가세요.



지옥사세요, 가 새해 첫 주일 덕담이 되어버렸는데 그거 가지시고 지옥 가세요. 그러나 아브라함은 예수님 보기를 원했습니다. 본인이 어떤 자질을 키우는가? 본인이 어떤 괜찮은 주관을 갖고 있는가? 이것은 우리 속에 있는 괴물이 그렇게 지시한 거예요. 거기에 말려들면 안 됩니다. 얼마나 내가 영웅이 되느냐? 프린스 콩, 타이탄, 나백작, 테로, 얼마만한 능력을 사이보그처럼 갖고 있느냐는 이것은 전혀 복음과 관계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기를 원하는 거예요. 얼마나 못났으면. 이미 나의 주체를 홀라당 가져가신 분, 내가 그전에 갖고 있던 나라는 것을 빼앗아서 “네가 나가 아니라 오직 나만이 나야.”라고 가져가신 분, “나는 나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 영원히 나로 계시는 분은 나밖에 없어.”라고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져가는 것, 그분에게 끌려가는 것.



그럴 때 우리는 나의 주체가 주님의 주체로 바뀌게 됩니다. 이 말을 달리하게 되면 교회는 가운데 구멍이 있어야 돼요. 중앙에 큰 구멍이 있어야 되고 중앙부분을 놓고 서로를 마주봐야 돼요. 중국집에 코스요리 먹으러 가면 테이블이 중앙을 두고 돌게 되어 있지요. 커다란 구멍이 교회 중앙에 나 있어야 되고 서로를 볼 때 직접 보면 안 되고 구멍을 경유해서 봐야 되고 십자가를 경유해서 상대를 봐야 됩니다. 이렇게 볼 때 내가 보는 것이 아니고 내가 보고 싶어도 십자가를 통해서 보면 주님의 지체로서, 주님이 코로서, 주님의 눈이 된 내가 주님의 코를 바라보게 되고, 주님의 발이 된 내가 주님의 눈을 바라보게 돼요.



그러면 그것은 주께서 모이게 하신 것이고 주께서 건져내신 사람의 집합, 다시 말해서 우리는 다 같이 공통된 하나의 무덤, 막벨라 굴을 사용하고 있는 겁니다. 아브라함도 들어갔고 이삭도 들어갔고 야곱도 들어갔고 요셉도 들어갔던 그 무덤, 그 죽음의 무덤을 통해서 내 인생 내가 책임진다는 그 주체는 날라 가버리고 누가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책임자가 따로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그 구멍을 통해서 바라보게 됩니다. 어제 어떤 사람은 술 먹고 우물에 빠졌다는데 술 먹고 우물에 들어가지 말고 십자가의 우물에 빠져야지요.



나는 죽고 그 다음부터 사는 것은, 스스로 기어 나올 수가 없는데 주체를 죽이고 주체의 머리 부분이 날라 간 상태에서 건져줬다면 우리는 건져준 분을 위해서 살아가는 그것, 이것이 이방인에게 온 성령의 은사고 이것을 가지고 성령의 세례라고 하는 겁니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책임졌다고 하지만 스스로 뭘 책임졌기에 이만큼 사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증인 되라고 아직도 이렇게 살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주여, 더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마시고 이렇게 기도하세요. “왜 저를 아직도 살려두십니까?” 살아봐야 자기 잘난 맛, 떠벌이는 재미뿐인데요. 살아봐야 사는 것이 오락이고 놀이 아닙니까? 나로 인해서 즐거운 놀이.



인생 뭐 있어요? 그냥 제풀에 재미로 사는 것이지요. 그게 인생이잖아요. 그저 재미있는 일만 찾아다니는 거지요. 영웅이 되겠다는 그것도 젊을 때 일이고 나이 들면 하루하루 재미있는 일만 있다면 감지덕지 사는 거지요. 이런 나를 예수님의 사람으로 바꿔주기 위해서 내가 나를 그리스도로 인하여 보는 것처럼 이상하게 나는 나로 인하여 사는 것이 아니고 주님 덕분에 살았다는 이상한 사람들을 만나게 될 때 “너만 잘났나? 나도 잘났다.” 그것이 아니라 둘이 만나는 순간 갑자기 둘 사이에서 큰 십자가를 우물이 발생될 때 이게 바로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말하는 그 말씀, 그 말씀의 실제화가 이렇게 일어나는 것을 체험할 수가 있어요.



아하, 성경말씀이 그냥 행하라는 명령이 아니고 이미 지금 진행되고 있는 실제상황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그리스도로 인하여 사는 것처럼 다른 사람도 그리스도로 인하여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 둘 사이의 공간을 엮어주는 것은 이유 없는 낯선 사랑입니다. 사랑이란 말은 이렇게 사용하는 거예요. 주체가 날라 간 상태에서 주님 거저주신 사랑만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맺어질 때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 계명 하나, 사랑이라는 계명 외에는 아무것도 우리와 서로를 엮어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눈에 보이는 교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동안 스스로 책임지고 남 앞에 그럴싸한 인간으로 변모하고자 애썼던 모든 것이 대신 죽은 십자가를 모독하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우리 자신을 변두리에 두고 중심에는 십자가만 둘 수 있는, 그야말로 지체가 지체답게 보일 수 있는 그런 성도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