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강-고전 12장 1-3(신령한 것)151213-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2장 1-3절입니다. 신약성경 277페이지입니다.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이 대목, 성경의 어떤 문장이 딱 등장하게 되면 사람들의 마음에 딱 드는 것이 이런 겁니다. “천국에 어떻게 하면 갈 수 있습니까?”라는 마음가짐으로 성경을 보기에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면 천국 가는 사람이고, 예수님을 저주라 하지 않는 사람도 물론 천국 가는 사람이고, 예수님을 주라고 못하는 사람만 지옥에 가는 사람이라, 그렇게 오늘 읽었던 대목을 이해하고 싶어 해요. 그런데 그렇게 이야기해 버리면 오늘 본문 뒷부분에 나오는 것과 안 맞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주님입니다.” 이것은 유치부 애들도 할 수 있고 어른들도 할 수 있고 그야말로 돌아가시기 직전에도 할 수 있는 문제거든요.
그렇다면 누구나, 특히 옆에서 자기를 돌봐주고 사랑하는 사람이 “아버지, 돌아가시기 전에 마지막 자식으로서 소원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편찮을 때 우리부부가 돌봐드렸으니 마지막 소원하나 그냥 들어주세요.” 그러면 아버지가 “그래, 마지막 소원 하나 못 들어주랴. 무슨 소원 들어줄꼬?”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한 마디만 해 주세요.” “그래, 까짓 거 그거 못하나? 예수님은 주님이다.”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는 교회 와서 “우리 아버지 평생 불교신자로 살았지만 죽을 때 예수님을 주라고 시인했기 때문에 장례는 교회에서 장례식 일체를 집례해주시기 바랍니다.” 김영삼 대통령처럼 원불교식으로 하지 말고 일체를 기독교식으로, 그렇게 하고 싶어 해요.
“예수는 주십니다.” 달랑 일곱 글자잖아요. 이거 못합니까? 공짜가 아니고 돈 몇 푼 쥐어준다면 그거 못하겠어요? 노숙자라도 할 수 있지요. 그런데 그렇게 되면 뭐가 문제냐 하면, “누구든지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를 주라 할 수 없느니라.”는 이 대목과 안 맞아요. 입이 있으니 입 벌려서 예수는 주라고 외우기는 했는데, 이것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것인데 구태여 뒤에 “성령이 아니고서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라고 할 수 없다.”는 이 단서를 왜 굳이 붙이는지, 차라리 이 구절을 뺐으면 전도하는데 얼마나 도움 되겠습니까?
노골적으로 말을 못할 것 같으면 노래를 만들면 돼요.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라.” 이런 식으로 노래를 부르면 노래 부르는 것으로 구원 받은 사람 다 되어버리는데요? 간편한 이런 방법이 있는데 구태여 사도바울이 전도를 하라는 것인지 말라는 것인지 분간이 안 돼요. 이 대목, “성령이 아니고서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라고 할 수가 없다.”는 이 대목을 차라리 뺐으면 보다 많은 고객이 확보가 될 텐데 이것을 집어넣었다는 말은 예수님은 주님이라고 말하더라도 그 말을 믿지 말라는 겁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영 믿을 것이 못 된다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11장에 들어가면 아예 고린도교회 전부가 다른 예수, 다른 성령, 다른 복음에 통제되고 굴복되고 말았어요. 고린도교회 전체가, 이 편지를 받는 교회 전체가 그렇게 되고 말았어요.
사도바울이 아마 예언을 한 것 같아요. “예수를 주라고 한다고 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진정으로 예수를 주라고 할 수가 없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네가 예수를 주라고 하는 그것을 네가 스스로 한 번 판단해봐라. 그 주님이, 그 성령이 무슨 의미인지 알기는 알고서 그 말을 내뱉는가?” 다시 오늘날 우리에게 되묻고 있습니다. 그저 전도하는데 바빠서 자기만 달랑 교회 나오고 자기 식구들은 안 나오니까 그것이 자존심 상해서, “우리 식구들도 다 예수 믿는다.”는 그것을 대외적으로 자랑하고 싶어서 세일하듯이, 그야말로 그냥 퍼주듯이, 공짜로 신자를 양산하기 위해서 성령 없이도 예수 믿는 사람 만들려고 얼마나 허겁지겁 애를 썼습니까? 남들 보기에 전도했다는 티를 내려고.
이 지상에서 백날 티내면 뭐합니까? 천국에서 안 받아주는데. 원서접수처에서 안받아주는데. 백날 원서 한 200백장 쓰니 뭐합니까? 접수처에서 접수가 안 되는데요. 천국에서 받아주지를 않는데 우리가 천국 간다고 광고해봐야 평생 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그러면 목사님, 어떤 사람이 천국가고, 예수는 주시라는 진짜 고백은 어떤 사람을 주고 하는 이야기입니까?” 막 저보고 따지고 싶지요? 잠잔다고 따질 맘도 없지만 따지고 싶지요? 사도바울이 할 말은 “성령을 경유해서 오세요.”라는 그것밖에 없어요. “성령을 경유해서 오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뒤에 할 말이 또 있지요. “성령을 경유한다고 할 때 어떤 경우를 두고 성령을 경유했다고 할 수 있습니까?” 또 따지고 싶은 거예요. 교회 나오면 그냥 신자라고 봐주고 속 편하게 넘어가는 것이 좋지 하나하나 따지고 “성령을 통해서 주라고 고백했습니까, 안했습니까?”를 따져버린다면, 교회 억지로라도 나온 사람을 붙들 생각은 안하고 내쫓을 생각만 하느냐고 역으로 따질 수가 있어요. 그러면 성령을 경유해서 나온다는 그 고백은 어떤 고백인가? 이것은 사도바울의 전체 편지를 보면 알 수 있어요.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2장에서 분명히 이야기했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린도전서 2장 2절에서 분명히 했고, “십자가라는 것은 인간의 지혜로서는 알 수 없는 것이다. 알 수 없는 정도가 아니고 인간들은 이 십자가복음을 어리석고 이것은 되지도 않는 소리라고 반발할 수밖에 없는 자들이 바로 인간들이다. 유대인들은 기적을 원하고, 쉽게 말해서 교회 와서 행운과 기적이 오기를 원하고, 헬라인들, 소위 배웠다는 사람들은 ‘신이 무엇이며 예수가 어떤 존재인지’의 그 정보나 지식을 원하지만 내가 너희에게 원하는 것은 그런 기적도 아니고 정보도 아니고 오직 십자가의 죽으심, 그 죽음, 우리 대신 누가 죽었다는 그 죽음에 대해서 알기를 원한다. 이 죽음에 대해서 꽂히는 사람은 성령이 아니고서야 그럴 수가 없다.”는 겁니다.
이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 처음부터 무슨 이야기를 했느냐 하면, 복음이야기를 한 거예요. 이 복음 이야기, 십자가를 알기만 원한다는 복음이야기, 예수 그리스도 죽은 것만 알기를 원한다는 이 복음이야기를 했을 때에 우리는 생각하기를 ‘복음만 알면 천국 가는데 아무 지장이 없이 합격한 것이 맞지요?’하고서 곧장 평소대로 자기업무에 복귀해서 충실합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의 편지를 보게 되면 분명히 복음 알기를 원한다고 해놓고는 다른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늘어뜨리고 있어요. 복음이라고 해놓고 복음에서 죽죽 잡아당겨서 복음에서 흘러내려온 여려가지 경우들을 계속해서 쓰고 있다는 말이지요. 이 말은 뭐냐? 나를 위해서 복음이 있는 것이 아니고 복음을 위해서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만이 제대로 성령을 받아서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하는 바로 그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 복음, 성령에 의해서 비로소 알 수 있는 복음, 십자가복음, 그걸 다른 말로 ‘신령한 것’이라고 했어요. 신령한 것의 반대말은 뭐냐? 이것은 적어놔야 돼요. 중요해요. 신령한 것의 반대말은 나의 것입니다. 나의 것이에요. 신학교 입학생치고, 또는 신학교졸업생치고, 또는 목사가 될 때 전부 다 표방하는 것이 있어요. “하나님, 복음을 위해서 살겠습니다.” 전부 다 “복음을 위해서, 오직 복음만을 전파하겠습니다.” 외치고 ‘한국 교회는 썩었어. 교회는 개혁되어야 해. 나는 이 한국교회를 본받지 않을 거야. 오직 복음만 외칠 거야.’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큰 소리들을 치면서 “빈들에도 가오리다. 아골 골짝에도 가오리다.” 막상 가면 다 내뺄 거면서 찬송가에 나오니까 그 노래 부르면서 큰 소리 칩니다. 그러나 복음을 표방했던 그 목회일이 3개월도 안가서 나의 것으로 도피합니다. 내뺍니다. 그 나의 곳이 어디냐? 교회에요. 일방적으로 목사만 비난해서는 안 되겠지요? 일반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 복음이 나를 살렸군요. 십자가가 나를 살렸군요. 십자가를 위해서, 이 복음을 위해서 제가 존재하는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이렇게 감격하면서 자주 교회에 얼굴 비치더니만 얼마 안가서 취직했다고 다시 나의 것으로, 따로 장만한 나의 것으로 숨어버리고 그 속에 빠져버렸어요.
결국은 자기본색, 나는 내 것으로 산다는 것, 그래서 복음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의 티낸 것이고 그냥 나는 내 것으로 사는 그것이 나의 가장 근본적인 속성이었다는 것을 유감없이 발휘하게 되지요. 사도바울이 신령한 것을 언급한 것은, 그리고 성령이 아니고서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라고 고백할 수 없다는 말은 한 마디로 쉽게 말해서 이겁니다. 이것은 결론이기도 한데 뭐냐 하면,
“신령한 것을 포기하세요.” 그 말입니다. 왜? 그 신령한 것을 찾아봤자 나를 위한 신령한 것이 되기에 이것은 가짜입니다. 나를 위한 신령한 것은 모두 가짜에요.
신령한 기도, 신령한 은사, 신령한 헌금, 신령한 전도, 신령한 나의 남은여생, 포기하세요. 이거 다 육적인 겁니다. 가짜입니다. 어디에 근거해서 그렇게 확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느냐 하면, 오신 예수님은 전혀 신령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진짜 요단강에서 성령 받은 예수님은 전혀 신령하지 않았어요. 참혹하리만큼 이 땅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그린 성화에 나온 것처럼 머리 뒤편에 아우라, 후광 같은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림 팔아먹기 위해서 동그란 원광 그려놓은 것이지요. 그건 부처도 그려져 있고 웬만하며 다 그려져 있어요. 심지어 달마도에도 그려져 있는 그 아우라, 우리 주님한테서는 뺍시다.
십자가, 그렇게 영광스럽지 않습니다. 예수님 십자가 바로 옆에 강도 두 명이 달렸거든요. 그 십자가 동일한 나무십자가입니다. 재질이 똑같아요. 다 똑같은 재질의 나무였지 주님이라고 금 십자가에 매인 것이 아닙니다. 너무나 평범한 삶이었습니다. 쉽게 해서 종교를 버린 겁니다. 따라서 우리도 종교를 버린 겁니다. 기독교신자 되지 마세요. 그것은 일종의 신령한 거예요. 신령한 유사품입니다. 기독교신자라는 그것이 하나의 얼굴 팩처럼 나의 본 얼굴을 가렸어요. 그걸로 그동안 하나님 앞에서 장난질을 쳐온 겁니다. 왜 인간들은 그럴 수밖에 없는가? 심지어 예수님의 열 두 제자부터 해서 예수님을 수종들었던 막달라 마리아, 그 어느 누구도 왜 인간은 예수님처럼 그렇게 신령한 존재가 되지 못하는가? 그것은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십자가만 알기를 원한다.’ 하는 복음을 전하면서 그 뒤에 내내 뽑아내는 부분이 있어요.
뽑아내는 내용이 뭐냐 하면, 신령을 흉내 내고 천국을 그리워하고 뭔가 바라는 그것조차 꼬깃꼬깃 감춰진 육의 진수였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신령을 표방하는 그것이 바로 진짜배기 죄악 덩어리였던 거예요. 왜 사도바울 입에서 그게 나오느냐 하면, 사도바울 이전에 긴긴 이스라엘 역사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긴긴 역사, 이스라엘 조상들의 역사가 뭐냐 하면, 자칭 신령한 역사였어요. 다른 민족 앞에서 자랑 질 할만한 신령한 역사, 하나님이 친히 동행한다고 자랑 질 할만한 역사였는데 그 역사가 육의 진수였습니다.
육의 사골 고아놓은 것, 10시간 고아놓은 사골국물, 고우고 고우니까 이스라엘 되었고 이스라엘의 손에 의해서 메시아가 처형당합니다. 요한복음 8장의 말씀대로
”너희 아비는 마귀니라.”
너희들이 하나님의 법을 지킨다고 하는 그 종교적인 품새, 그게 악마가 마지막까지 인간을 끌고 가는 모습이 그 모습이에요. 경건의 모습, 거룩의 모습, 그게 바로 마귀가 인간에게 계속 충동 질하고 부추긴 것이 그 짓이에요. 그것이 뭐냐? 나의 것입니다. 나의 것. 그게 나의 것이거든요. 복음이 좋은 게 아니에요. 내가 이렇게 훌륭할 수 있다는 그것이 좋은 거예요. 내가 이렇게 사람 되었다는 그게 좋은 거예요. 복음이 좋은 게 아닙니다. 내가 나한테 반하고 내가 나한테 감동 먹어요. ‘이렇게 착할 수가 있나? 이렇게 경건할 수가 있어? 이렇게 자기부인이 되다니. 이렇게 아낌없이 돈을 교회에 바칠 수가 있다니!’ 이게 바로 마지막 악마가 만들어내는 작품이에요.
짐승은 짐승의 새끼를 양산합니다. 그게 짐승의 새끼에요. 성경에서 짐승은 자기 정체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왜? 바다에서 올라오기 때문에, 그리고 인간의 육지의 존재기 때문에. 이것은 겨울수련회 때 요한계시록에서 해야 될 것을 지금 미리 합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우리가 이유도 없이 이렇게 되는 이유는 육지 끝에 바다의 원천이 있고 그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이 종교를 만든 겁니다. 기독교를 만든 거예요. 2천년 역사를. 거기에 우리는 홀라당 속아서 빠진 거예요. 거기서 무슨 이야기하던데? “여러분을 여러분 생각 이상으로 위대한 인간으로 만들어주겠습니다.” 그걸 상품으로 교회에서 내 건 거예요. “당신들은 이렇게 천박하게 살 사람들이 아닙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성화되고 거룩한 존재로 만들어질 수 있는 가치 있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이게 바로 교회에서 이야기했던 상품들이에요. 거기에 걸려든 겁니다. 말려든 거예요.
천박하다고요? 전에 교회 안 다닐 때가 천박하다고요? 더 내려가야 돼요. 더 천박해야 돼요. 상당히 물질적이고 돈 밖에 모르고 육적이었다고요? 옛날에요? 더 돈을 밝혀야 돼요. 더 육적이어야 돼요. 종교라는 얼굴 팩을 떼버리세요. 민낯, 맨얼굴, 그 맨얼굴을 들고 와야 돼요. 교회 오면 안돼요. 어디로 가는가? 맨 얼굴 들고 십자가 앞에 나서야 돼요. 그거 우리 힘으로 불가능합니다. 성령이 하셔요. 성령께서 그렇게 해주십니다.
요한복음 16장에 보면, 성령 이야기할 때 이 사람 저 사람의 다양한 주관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객관적인, 어떤 사람도 공통으로, 성령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공통적으로 뽑아낼 수 있는 객관적인 기준이 나옵니다. 그 기준은 요한복음 16장 8절부터 10절에 나오는데 그 내용은 한마디로 책망입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제가 안양모임에 가니까 어떤 집사님이 그런 이야기를 해요. “요즘 목사님 설교를 듣고 성경을 안 읽게 되었습니다. 아마추어가 읽어봐야 뭐합니까? 알지도 못할 것을.” 초반에는 “목사님 설교 듣고 기도를 안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현상을 보이다가 이 현상이 어디까지 가느냐 하면, “목사님 설교 듣고 성경을 아예 안 보게 되었습니다.” 이래요. 그래서 제가 수습을 급하게 해야 될 것이 아닙니까? “잘 했습니다.” 할 수는 없는 거거든요. 성경을 안보는 그것이 무슨 잘한 일이 되겠어요? “제 설교 들으면 거기 성경구절들이 나오지요?” 이렇게 급하게 수습을 했습니다만.
사실은 그래요. 성경을 볼 때만 성경을 만나는 순간이 아닙니다. 촌의 중국집 가면 아직도 이런 것이 있어요. 중국집 문에 치렁치렁 구슬로 꿰어진 발을 쳐놓았어요. 그것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일상이 말씀의 천 조각들이 우리의 얼굴을 때립니다. 모든 일이 그래요. 성경을 보지 말라고 설교를 하는 것이 아니고
문자로 된 이 성경이 다가 아니라 그 성경이 실제로 이 현실을 만들어내고 있음을 이제는 밖에 나가서 직접 소나기를 맞듯이, 실제로 눈비를 맞듯이 실제로 한 번 만나보라는 말이지요.
드라마를 보면서도 드라마를 보지 마시고 나의 얼굴에 떨어지는 말씀덩어리로 보시라는 그 말입니다. 이 전체가 우리는 말씀의 풀장에서 살고 있는 거예요. 우리의 현실은 교회 현실 따로, 내 직장 현실 따로 있지만 주님은 그런 현실이 없어요. 직장이든 교회든 가정이든 그런 것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전체를 말씀의 장으로 전환시키고 말았습니다. 괜히 우리가 착각하고 오해해서 그런 거예요. 그 원인이 어디 있는가, 그 원인을 제가 지금 설명하려고 합니다.
자, 설교를 다시 하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천국 갑니까?’ 사람들은 그런 마음으로 성경을 보는데 예수를 주라고 시인하면 구원된다니까 그 때는 기분 좋았다는 말이지요. ‘아, 예수님을 주라고 시인하면 천국 보내주는구나.’ 그걸 끝난 줄 알았는데 그 뒤의 단서가 상당히 수상해요. 그 뒤에 단서가 뭐냐? “누구든지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를 주라고 할 수 없다.”라고 하니까 성령으로 말할 수 있는 주님과 내가 스스로 이야기한 주하고 그 차이점을 사도는 알고 있다는 말이지요. 사도가 그 차이점을 알고 있으니까 우리도 같은 성령을 받았다면 우리도 그 차이점을 알아야 되는 거예요. ‘에이, 우리는 몰라도 돼.’ 이렇게 어물쩍 넘어갈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 다음에 제가 이야기한 것이 뭐냐? “그러면 성령으로 아는 그 주님은 어떤 주님인가?”라고 했을 때 사도바울의 편지 성경전체를 보니까 오직 십자가복음만을 이야기했더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십자가복음,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는 너희가 알지 않기를 원한다.” 이렇게 돼 있거든요. ‘그렇다면 그것만 알면 되겠네.’ 하는데 그것이 아니고 십자가 죽음부터 해서 그 다음의 세세한 모든 행동까지 계속해서 줄줄이 나오는 겁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내가 성령 없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나의 것이 따로 챙겨져 있어서 이 나의 것을 어떻게 천당에다 올려 보내는가, 이것이 우리의 관심사가 되어서 교회에 나오신 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잘못이었다는 겁니다. 이게 나의 것이 우선되면 안 되고 복음을 위하여 나의 것이 후차적으로 나의 것이 여기 존재하고 있었던 겁니다.
복음이 먼저 있고 그 복음을 위해서 내가 있어야 되는 겁니다. 제가 목사 이야기를 예로 들은 이유가 뭡니까? “복음을 들고 빈들에도 가오리다.”라고 해놓고는 나중에는 그저 교회, 내가 담임하는 이 교회, 내 교회가 이만큼 부흥되었다는 그 자기소유, 자기 것. 그러면 목사만 그렇고 장로는 안 그래요? 내가 기도해서 내 집을 팔고 전세살고 나머지 돈을 바친 그 내 교회. 교인들도 마찬가지에요. 제가 교회에 돈 내지 말라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돈 내 봐야 돈이 어디로, 하나님께로 가는 것이 아니에요. 교회라는 사업체에 투자한 것이 돼요. 주식부자가 돼요.
큰 교회 목사가 아들 신학교 보내요. “얘야, 직장에서 얼마 받나? 500만원이라고? 그것도 월급이라고. 그 직장 그만 치우고 네가 내 뒤를 이어서 당회장 되어라.” 그걸 주위에서 요구하잖아요. 저한테는 아들이 없어서 천만다행입니다. 그걸 요구하기 전에 본인이 그 교회에 돈을 왜 냈어요? 본인은 그럴 맘이 없어요? 그 교회에서 나가라고 하면 그 교회에 낸 십일조만 복리로 계산해도 그게 얼만데? 돈 낸 것이 아까워서 못나가잖아요. 그동안 부조 깔아놓은 것이 있는데, 한 달 뒤에 딸 결혼식 하는데, 교인들 부조만 해도 그게 얼만데 그게 아까워서 못나가지요.
사도바울이 “복음이 우선이지 너의 것이 우선이 아니다. 내빼지 말고 숨지 마라. 너의 것 자체가 너를 파탄시키고 너를 지옥으로 보낸다. 오직 십자가다.”라고 자꾸 언급을 하는 이유는,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살까요? 그냥 모든 것을 버릴까요?” 하는 식으로 버린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은 아니잖아요. 뭐냐? 복음 때문에 내가 여기 있다는 것, 그 연관성, 관계성을 분명히 하라는 그 말이에요. 그 복음 때문에 내가 있다. 그런데 그게 안 되고 있거든요. 그게 안 되고 있는 이유가 뭐냐? 내 속이 수상해요.
이 세상에 마귀가 없고, 이 세상에 악이 없고, 이 세상에 중성적이고 중립적이라면 “십자가 믿겠습니다. 오직 성령에 의해서 예수님만 주라고 고백하겠습니다.” 쉽게 되겠는데 내 속을 선점, 먼저 내 영혼을 장악한 쪽이 있어요. 그게 뭐냐? 원인도 모르는데 요한계시록에 보니까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 악마가 나로 하여금 자기를 닮은 새끼로 양성을 한 겁니다. 그러면 그 양성한 지점을 제가 이 자리에서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지요. 어떤 식으로 마귀는 우리 속에 자기를 닮은 괴물을 양성했는가?
그것은 칸트라는 철학자가 잘 설명을 해줬어요. 그 전에도 다 알고는 있었지만 칸트라는 철학자가 잘 설명을 했습니다. 이 설명은 철학이라고 듣지 마시고 우리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들어보시면 쉽게 납득이 돼요. 인간은 두 가지 욕구가 있다. 하나는 생리적인 욕구가 있고 또 다른 욕구가 있는데 생리적인 욕구라는 것이 뭐냐? 내가 먹고 살아야 되겠다.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어요. 고상한 가치고 의미고간에 일단은 내가 밥이나 먹고 살아야 되겠다는 그 육체, 생리적인 욕구가 있어요.
또 하나의 욕구가 뭐냐? 그것보다 더 단단하고 절대적으로 박힌 욕구가 있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내 속에 도덕적인 욕구가 있다는 겁니다. 비록 돈이 없어도, 비록 남에게 욕을 얻어먹는다 할지라도 나는 착한 쪽에 서야 한다는 그것, 이것은 어떤 대가를 바라는 것이 아니에요. 칸트 이야기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악해도, 교도소를 열 번을 들락거려도, 어떤 대가나 명예를 바래서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그런 일도 많이 있겠지만 근원적으로 우리 속에는 하나님이 집어넣어준 가장 근본적인 것이 있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거짓말 하지 말라.”고 할 때 이유를 따지지 말라는 거예요. 거짓말 하지 말라는 그것은 이유를 불문하고 따질 것도 없이 무조건 나쁜 짓이니 안해야 된다는 생각, 절대적인 욕구가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깡패세계도 그렇고 IS세계도 마찬가지에요. 그들도 의리 있어요. 아무리 남들이 욕을 해도 저희들 내부에서는 의리가 있어요. 아무리 못 먹어서 굶어죽는다 할지라도 착한 것은 여전히 착하다는 그 생각이 보다 더 근원적이고 절대적으로 박혀 있다는 겁니다.
칸트라는 사람은 이걸 가지고 ‘절대적 주체’라고 한 거예요. 어떤 주체인가? 절대적 주체에요. 신이 우리에게 집어넣은 거예요. 이제 악마가 인간을 충분히 농락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된 겁니다. 그 절대적인 주체를 가지고 신과 연결시키면 되지요. ‘내 속의 양심이라는 것, 내 속의 착한 양심이라는 그것을 가지고 나는 이처럼 선을 추구하는데 아마도 하나님은 선의 추구정도가 아니고 선의 달성자가 되기에 하나님도 선에 대해서 추구하고 나도 이 땅에서 아무리 먹고 살려고 나쁜 짓을 많이 했지만 근원적으로 나는 선한 쪽, 착한 쪽에 섰기에 둘은 통하는 것이 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바리새인들이었어요.
그걸 개발하는 겁니다. 어떻게? 주신 말씀가지고 개발하는 거예요. 그게 기독교, 종교라는 겁니다. 이것이 신령한 것으로 전환되는 겁니다. 그 주체, 그 주체가 시도하는, 유대인들이 시도하는 그 앞에서 초라한 행색으로 오셔서 너희들은 길이 없다고 외쳤던 그 예수님은 어떻게 그들 눈에 비췄겠습니까? 쓸데없는 존재, 나의 거룩과 착함을 훼방하는 존재, 그래서 그들이 내린 결론이 뭐냐? 예수는 귀신들린 자고 예수의 모든 능력은 바알세불이라는 귀신의 왕이 시켜서 한 이단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람들 눈에 비친 예수님의 진실 된 이미지고 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를 우리가 믿어요? 그 당시 유대인들이 바보입니까? 사람 확인도 안하고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그런 몰상식한 자들이었어요? 아닙니다. 분석하고, 분석하고, 따지고, 따지고, 연구하고, 연구하고, 그래서 내린 결론? 예수는? 예수는 미친 인간, 아무것도 아님, 메시아 아님, 내린 결론이 그것이었습니다. 십자가처형은 정당한 것이었고 사회소요죄에 걸려서 사형당한 겁니다. 기껏 쫓아온 인간들은 비실비실한 세리, 창기, 저는 자나, 저주받은 중풍병자나, 문둥이나, 소경, 그리고 하나님도 모르는 이방인들이나 빛 없는 어둠의 자식들인 갈릴리사람들이나 주님을 따라다녔지요.
뭐예요, 결국? 성령이 예수님의 영으로서 온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제발 인간들 속에서 나오는, 절대적 주체에서 나오는 그 신령한 것, 얼굴 팩 같은 그 것들 다 치워버리라는 거예요. 그 전력을 고엽제전략이라 합니다. 고엽제가 뭐냐 하면, 1964년에 일어난 베트남전쟁에서 쓰던 미군의 화학무기였어요. 베트콩들이 밀림에 숨어드니까 보이지를 않는 거예요. 고엽제라는 물질을 써서 밀림을 다 말라비틀어지게 했어요.
그러니까 악마의 새끼들은 유대교라는 그 종교라는 것을 만들었어요. 거기에 최고로 앞장선 사람들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이었어요. 그들의 아비는 악마라고 주께서 직접화법으로 직설적으로 날려버립니다. “이래도 날 죽이고 싶으면 죽여라. 차라리 죽이는 것이 너희들의 본성이다.” 그게 오늘 본문에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라는 이 대목에서 나옵니다. 성령께서 그냥 우리에게 오는 것이 아니고 우리하고 똑같은 성정, 똑같은 아담의 몸을 성질을 갖고 있고 기본적인 도덕심, 절대주체를 갖고 있는 유대인들을 거쳐서, 유대인들과 예수님의 충돌사건을 그대로 가지고 와서 오늘날 우리에게 성령을 줘버립니다.
줘버리면 예수를 저주한 자들의 심령과 우리의 심령이 동일하다는 사실을 우리 속에서 발각시킵니다. 왜 결국 우리가 주님을 배척할 수밖에 없는가? 나의 것, 절대적인 나의 것을 내가 사수해야 되기에 그렇습니다. 디모데후서 2장 9절에 보면,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의존교회에서 이 대목을 강의했는데요. 여기 보면, 예수님이 가는 길은 고난이 있어요. 그러나 취미생활에는 고난이 없습니다. 이게 취미생활과 성령생활의 차이점이에요.
힘들면 교회 안 나오면 그만이에요. 자존심 상하면 교회 안 나오면 그만이에요. 처음부터 즐기기 위해서 온 생활인데 힘들게 즐길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골프 10년을 쳐도 더 이상 치기 싫어요. 늘지를 않으니까. 바둑도 늘지를 않고 뭘 하든 늘지를 않으면 그거 손 빼야 됩니다. 그것은 안 맞는 거예요. 고난 받으려고 신앙생활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고난은 날 위해서 주는 것이 아니에요. 고난은 복음을 위해서 주는 겁니다. 네 인생 네 것이 아니라고.
인간들이 자꾸 신령한 것을 찾는 이유가 내 속에 있는 악마의 심성이 그걸 요구하기에 그렇습니다. “네가 신령함으로 초월하라.” 이것을 자꾸 요구하는 거예요. 절의 중하고 똑같은 거예요. 보다 신령한 것, 보다 신령한 것, 거룩의 끝은 어디인가, 순교의 끝은 어디인가, 최고의 거룩함은 어떤 모습일까, 이걸 자꾸 목표로 삼는 거예요. 주께서는 ‘내가 얼마나 천박한가?’ 이걸 목표로 삼으라고 하는데 우리는 교회 나와서 ‘더 훌륭한 것, 더 예수 닮기, 더 성령 닮기, 주기철 목사 닮기’ 계속해서 이게 나오는 거예요.
바리새인들이 하는 짓을 똑같이 오늘날 반복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제가 여러분에게 부탁드립니다. 신령한 것을 포기하세요. 그래서 서울강의에서 제가 중요한 말을 했지요. 하나님의 주권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마귀들이 만든 겁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주권이 아니고 주님이 주권이에요. 사람들에게 비난 받았던 분의 주권,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님을 위해서 있다는 골로새서 1장 16절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음미해보시기 바랍니다.
모든 피조물, 심지어 마귀까지 모든 피조물들은 예수님을 위해서 만들었지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을 위해서 만든 게 아니에요. 하나님은 우리의 목표가 되지만 어느 누구도 십자가 달린 분이 우리의 목표가 된 사람은 아담후손 치고 아무도 없습니다. 주께서는 아무도 없는 인간을 기어이 성령 보내서 천국백성 만드는 그 경로, 그 과정을 성령께서 우리에게 일부러 집어넣은 거예요. 사람들은 말합니다. “교회 와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자.” 기다려봤자 내가 기다린 것 때문에 오지를 않아요.
첫눈 내리는 날 안동역 앞에서 누구를 기다리기로 했어요. 그런데 눈은 왔는데 사람은 안와요. 그 노래 가사에 보면 “안 오는 건지 못 오는 건지.” 진성이가 불렀던 노래거든요. 제목은 <안동역에서> 안 오는 건지 못 오는 건지. 둘 다 아니에요. 여자 입장에서 생각해 보세요. 갈 필요가 없거든요. “눈만 실컷 맞아라.” 주께서는 기다린다고 오는 게 아닙니다. 만들어나가요. 성령이 온 것은 뭐냐? 이미 천국 갈 백성은 이 땅에서 정말 쇳덩이 같은 물체덩어리, 천박하기 짝이 없는 인간을 다른 것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새사람으로 만들어버린 겁니다.
로마서 8장 9절에 보면,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했거든요. 오늘 설교 끝나면 다른 것은 기억 안 나고 ‘안동역에서’ 그것만 기억날까 싶은데…….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한 거예요. 그 다음에 11절, “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죽은 예수를 살리신 그 영이 너와 함께 있으면 죽을 너희 몸도 살리신다고 할 때 오직 이유는 성령이 있기 때문에 살리는 겁니다.
우리가 교도소 안 갔기 때문에, 행동을 똑바로 했기 때문에, 헌금을 드렸기 때문에 살리는 것이 아니고 묻거나 따지지 않아요. 아무것도 묻거나 따지지 않고 오직 성령이 있다는 것 때문에, 자기가 집어넣은 것 때문에, 자기 것을 스스로 회수하기 때문에 딸려 나온 것이 성도에요. 딸려 나오면서 우리는 압니다. 내가 바로 내 것 챙기는 그것 때문에 예수를 자꾸 밀친다는 것, “이제 그만 하세요.” 하고 자꾸 주님과 멀어지고 싶은 충동의 사람이라는 사실, 그런 인간이라는 사실을 성령 받았기에 알게 되는 겁니다.
‘아, 이런 인간인데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오직 성령, 십자가의 영, 십자가의 피만으로 건지는구나.’ 오직 복음 때문에 건지지 인간됨됨이 때문에 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는 겁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교회 되려면 돈이 있어야 돼요. 돈만 있다고 됩니까? 사람이 있어야 또 덜 외로워요. 교회는 결국 사람과 돈, 돈과 사람, 그 둘만 있을 뿐이에요. 거기서 더 나가서 신령한 것도 상품으로 제시합니다. 신령한 것, 사람, 돈, 그것을 여러분이 다 걷어 치웠다고 칩시다. 그것을 치우면서 여러분 속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신자 아닙니다.
그런데 그걸 치웠는데도 불구하고 그래도 남는 것, ‘그래 맞아, 나는 교회 놀러갔어.’ 나의 그 진솔한 내 모습이 남을 때 이것은 바로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그저 얼굴 팩만 덕지덕지 많이 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겁니다. 이 버릇이 교회 안 나오고 다른 데 간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고 평생 우리는 스스로를 위장하고 스스로를 가리는 거짓말을 할 거예요. 하지만 그 짓과 십자가복음과 연계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직접 성령을 받은 사람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말합니다. ‘예수님은 주’라고 하지 않아요.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합니다. ‘예수를 주’라고 하는 사람은 수상한 사람이에요. 신자 아닐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나 진짜 주님 앞에 다가가면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하고 오히려 자기 자신의 진솔한 면, “나는 죄인 맞습니다. 뭘 해서 죄인이 아니라 날 때부터 나는 아담의 자손으로서 죄인 맞습니다.” 하면 “당신은 누구보고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몰라도 돼.”
우리가 그렇게 고백할 분이 이미 건졌기에, 이미, 이미, 벌써 성령의 사람으로 만들었기에 어떤 환란과 곤고가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주님과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 그 관계에 있기에 우리가 기다릴 필요가 없어요. 주께서 이미 이 땅에서 대신 하기 때문에 그 대신 하신 분이 말씀대로 오실 겁니다. 주께서 다시 오시지요. 우리가 죽어서 가든지, 주께서 오시든지 그것은 별 큰문제가 안되지요.
이미 자신이 십자가 복음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한다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살아가면서 아, 시골 중국집입구에 드리워진 발처럼 촌스럽게 꿰어진 그 구술더미가 얼굴에 철석 부딪히듯이, 말씀의 맞바람을 받으면서 온천지가 나의 유혹거리고 나를 죄인 되게 만든 것들인 것을 얼굴로 맞닥뜨리면서,
“주여, 맞습니다. 주님만이 의인이고 저는 죄인 맞습니다. 그런데 그 의인, 주님만 간직해야 될 그 의인이 어떻게 죄만 짓는 우리에게 주님의 의를 삽입시켜 주십니까? 이 능력은 오직 주님만 하실 수 있는 겁니다.”
라고 고백 될 때 그게 바로 사도바울이거든요.
끝으로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 말씀, 나면서 생전 처음 봤다는 말씀으로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생전 처음 들은 겁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예수님의 영이지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무슨 뜻일까요?
“주님이여, 제가 주님 많이 괴롭혔습니다. 제가 주님 참 귀찮게 했고 싫어했습니다. 이제 주님의 사람이 되고 보니 이제야 그런 고백이 나오네요.”
이것이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의 것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자 하는 우리의 속성, 그러면서도 내가 내 힘으로 완벽한 인간 만들어서 천국에 들어가려는 욕심, 욕구, 이런 것 때문에 얼마나 주님을 다른 예수로 바꾸어놓았습니까? 이제는 저를 마음껏 욕해주시고 마음껏 살려주시고 사랑해주시는, 아무것도 묻거나 따지지 않는 그 주님을 주님이라 고백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