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교회111103-요한계시록16장(땅에 대한 폭격)26강a-이 근호 목사 제 26강a
"또 내가 들으니 성전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일곱 천사에게 말하되 너희는 가서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대접을 땅에 쏟으라 하더라“ 이렇게 돼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천사에게 명령을 하는데 일곱 대접을 어디다 쏟으라 했습니까? 쏟는 장소가 어디죠? 땅이죠. 일곱 사발이 1, 2, 3, 4, 5, 6, 7, 일곱 대접이 쏟아 붓는 장소가 , 목적지가 하늘이 아니고 땅에다 쏟습니다.
땅에다 쏟으라 한 것은 땅에 무슨 문제가 있다는 말이거든요. 땅에 무슨 문제가 있느냐 하면, 땅이 뭐냐 하면 ‘믿음의 대상’이 되는 거예요. 믿음의 대상! 인간들이 땅만 믿고 살 수밖에 없는 그런 안 좋은 분위기가 이미 땅에 충만하게 있는 겁니다. 그럼 땅만 믿는 사람들은 뭘 지금 잊어버리느냐 하면, 땅은 일곱 대접에 의해서 작살난다는 사실을 그들은 잊어버리고 애써 그 소식을 안 들으려고 노력을 하고 있는 겁니다. 타고 나면서 자기는 땅의 것으로 인하여 자기가 살고 땅으로 돌아간다는 그것으로서 자기들은 만족하고 충족하고 싶은 거예요.
여기서 이런 말이 어렵기 때문에 쉽게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어릴 때 여러분들이 고향에 있다 합시다. 여러분들이 뒷동산 올라가면 저 멀리 산들이 보이잖아요. 그런데 어릴 때는 저 산 넘어 길이 끊어져 있다 말이죠. 이 길 넘어 뭐가 있는지를 어릴 때는 알겠어요? 모르겠어요? 모르죠. 그러니까 어릴 때는 꿈이고 비전이고 자꾸 세상을 아름답게 보는 거예요. 저 산 넘어 저 고개 넘어, 소녀 같으면 장날에 갔던 오빠가 고무신 사들고 온다는 오빠생각이라는 노래가 있어요. ‘뜸북뜸북 뜸북 새 논에서 울고, 라는 노래가 있어요. 요게 뭐냐 하면 요 어린아이의 세계의 한계가 되는 겁니다. 요 바깥의 세계가 꿈의 세계고 자기 꿈을 펼칠 수 있는 미지의 세계가 되는 거예요. 이 길 끝나는 너머에 신비로운 세계가 뭐냐 자기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세계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요 이야기에서 자세히 보세요. 현재 이 선, 지평선 바깥의 세계를 이 소년 소녀가 안다 했어요? 모른다 했어요? 모르죠. 결국 이 바깥의 세계를 안 가 봐서 모른다는 말은 현재 이 안의 세계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모른단 말입니까? 파악해 봐야 그게 한계가 있죠. ‘나는 저 꼬부라진 길 넘어서 나는 멋진 공주님 될 거야, 또는 연속극에 나오는 재벌 2세가 돼서 성공할 거야, 봄 되면 성공한 내가 자가용 몰고 늙으신 어머님 모시고 아버지 모시고 산소 가서 절하고,’ 이런 꿈들을 꾸는 거예요. 그런데 나중에 장성해서 산 넘어 도시로 가서 살아보세요. 도시 가서 장성해서 어른이 돼서 다시 고향에 올 때는 고향에서 살겠습니까? 안 살겠습니까? 재미없고 지긋지긋하고 여기서 한 달 수입이 몇 푼이 나오겠나, 빨리 떠나야지, 추석 때 후다닥 이틀 만에 가버리잖아요.
바깥세상에서 볼 때 그 어릴 때 꿈은 그냥 개꿈이었고 아무것도 아니었다 말이죠. 인간이란 것은 그냥 눈에 보이는 세계가 그게 전부로 보는 거예요. 만약에 이 소녀가 12살 반쯤 될 때 죽었다 합시다. 그런 이 사람이 죽을 때 소녀가 꿈꾸던 머릿속에 갖고 있는 두뇌 영상 이미지 세계는 이 길 바깥의 세계는 아무것도 모르고 기껏 뭡니까? 이 세계 더하기 자기가 꿈꾸는 미지의 세계, 그 미지의 세계는 여기서 동화책 보면서 생각하는 백설 공주가 왕자님 생각하는 그런 세계뿐이라 말이죠. 그러니 이것이 다른 사람보기에 철없이 죽은 거죠. 세상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고, 이게 바로 구약 성경 전도서 내용 아닙니까? ‘인간아, 니가 뭐 아노, 니가 뭘 알아, 니가 몇 년을 살았다고 알겠느냐,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니가 살아서 공부를 해봤자 니가 책을 많이 써봤자 피곤한 일이고 니가 부귀를 누려봤자 그것이 더 나은 부귀 앞에서 니는 스스로 자기 자신을 초라하게 볼 것이다.’ 잘 먹고 잘 살면서도 더 나은 부자 앞에서는 기죽고 자괴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인간이잖아요.
이게 뭐냐 하면 결국은 우리가 전체 우주 창조의 전체 세계, 공간적으로 전체 세계, 시간적으로 긴긴 세월을 그걸 우리가 어느 세월에 다 알겠습니까? 모르잖아요. 모르니까 여기서 결국 무지한 채로 살아가면서 나오는 세상 관, 이것은 믿을 것은 눈에 보이는 이 땅의 세계밖에 믿을 게 없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를 폭격을 해요. 누가? 일곱 천사를 통해서 일곱 펜텀 기가 폭격을 해버립니다. 그러면 여기에 두 종류의 떠남이 있어요. 첫 번째 떠남은 죽는 거예요. 죽을 때는 어떻게 합니까? ‘아이고, 어른 세상 떠났습니다.’ 하죠. 죽을 때 이건 본의 아니게 세상을 떠나고 남은 식구들은 떠나보내는 의식을 행하잖아요. 그게 장례식이죠. 돌아가신 고인을 세상에서부터 격리시키는 작업, 주로 태우든지 아니면 태워서 연기로 보내든지 아니면 땅에 묻어서 안 보이는 곳에 두면서 ‘떠났다’라는 것을 기정사실화 시키고 고인이 남겼던 흔적들을 태워버리죠. 이젠 없다. 여기 계시지 않습니다. 떠났습니다. 어디로? 그건 모르죠. 그냥 자기 주위에서 떠나면 그만 이예요.
두 번째 성경에서는 떠난 것도 죽음이지만, 미련두지 않기, 사실은 두 번째가 더 중요하죠. 이 세상에 미련 두지 않음으로써 너는 땅의 것을 생각지 말고 하늘의 것을 생각하라는 골로새서 3장의 말씀을 우리한테 적용 시킵니다. 니 생명은 이미 이곳에 어디 봐도 니 생명은 없어. 현재 니 갖고 있는 니 목숨은 생명이, 생명이 아니고 그건 헛방이고 헛 다리야, 그건 닳아 없어지는 양초 같이, 양초에 불 피우면 나중에 아침에 보면 어떻게 돼 있습니까? 남아 있는 건 뭐밖에 없습니까? 퍽 퍼져있는 딱딱하게 굳어있는 양초 물밖에 없죠. 그리고 시커먼 타다 남은 심지밖에 없죠. 그게 인간 아닙니까?ㅎ 그런 양초하기 위해서 에너지를 주워 모을 필요가 없다 이 말이죠.
그래서 누가 이야기했잖아요. 불꽃처럼 피우리라‘ 했잖아요. 윤시내의 열애, 이미 우리는 이 땅에서 생명나무가 없는 곳에는 생명이 아닙니다. 그래서 생명나무가 있는 곳은 천국이고, 제가 교회 봉사나 목회하는 취지는 하나밖에 없어요. 누가 구원을 받을 자인가, 그거 확인해 주는 일 이외는 다른 게 없습니다. 목회라 하는 것은 ’당신은 천국 갈 사람이다.‘라는 확인인데 그 확인 방법은 뭐냐, 폭격 이외는 아무것도 없어요. 내 것이 아니니까 나만의 것이라는 것, 나 됨, 나의 됨됨이, 이걸 폭격 해버리는 거예요.
나의 됨됨이가 어디 있습니까? 다 같은 아담인데 똑같은 인간인데 나다움이 어디 있습니까? 나다움이라는 것은 하나의 고집이고 개성인데 그게 산 넘어 길 돌아서면 무슨 세계가 있는지 무지한 상태에서 조립된 거 아닙니까? 인생을 살면서 자기 기억을 수집하고 만나는 사람들 모아놓고 그렇게 해서 수집된 게 뭐냐 하면 나다움이잖아요. 노인들 노는 노인정 가보세요. 그 사람들 나이 많다고 겸손한 줄 압니까? 고집 세요. 평생 지는 나다움을 유지해 왔다는 거예요.ㅎ
나다움을 폭격할 수 있는 그것이 오늘 분문에 나오는 일곱 천사의 일곱 대접의 취지입니다. 천사들을 동원시켜서 폭격을 하는데 왜 폭격을 하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오셨다 가셨던 그 취지를 못 믿게 만들은 능력에 대한 폭격이에요. 나는 나다움을 유지하다 보니까 예수님다움에 대해서는 믿지 못하고 관심이 없어요. 그러니 이것을 폭격을 시도해 버립니다. ‘누구야? 나다움을 이렇게 황폐화 시킨 게,’ ‘나다, 왜?’ 이거거든요. ‘누구십니까? 나로 하여금 말에서 떨어지게 한 사람이 누구십니까?’ ‘나는 니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다.’ ‘누구십니까? 내 눈을 완전히 멀게 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그래서 제가 얼마 전에 글을 썼지만 무슨 글을 썼습니까? [목소리와 현상]이라는 글, 쟈크 데리다의 글을 썼잖아요. 거기에 이렇게 써 놨어요. 근본적으로 이 세상에 살면서 자기 나다움을 구축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자꾸 ‘Who is this' 이것이 무엇이냐, 그것이 무엇이냐, 자꾸 물어요. 이것이 무엇이냐, 이 버릇이 교회와도 마찬가지예요. 구원이 무엇이냐, 천국이 무엇이냐, 성도가 무엇이냐, 중생이 무엇이냐, 하나님이 누구시냐, 물어요. 이걸 알게 되면 이걸 아는 지식을 자기 나다움에다가 자꾸 집어넣어서 나다움을 더욱 더 융성하게 해서 나다움을 확대시키고 카우려는 시도밖에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정작 구원받은 사도바울은 뭐라 합니까? 누굴 만났어요. 누굴 만났으면 문을 똑똑 두드리면 ‘저 문이 무엇일까’ 이렇게 묻지는 않죠. 똑똑 치면, 우리 마음을 치면 ‘내 가슴은 무엇일까’ 이러지 않죠. ‘누구십니까’ 묻는 거예요. 방문하지 않으면 우리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마치 이 세상에 배치돼 있는 세간살이와 같아서 도둑놈이 담타고 와서 우리 세간을 완전히 보쌈 해서 데려가지 아니하면 우리는 이 땅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우리가 이 땅에서 하는 것은 나다움을 키우기 위해서 상대방과 경쟁관계에 있어요. 소위 Battle, 시합, 경쟁과 시합, 시합과 경쟁, 사업을 해도 마찬가지고 인물이고 뭐고 진짜 성형 수술을 해도 누가 더 쌍꺼풀이 더 잘나왔나, 모든 것이 눈만 뜨면 시합이고 눈만 뜨면 경쟁이라니까요. 누가 손자 잘 키우나 경쟁하고,ㅎ 모든 것이 눈만 뜨면 시합이죠. 이것은 뭐냐 하면 내가 부족 돼 있는 신이 어느 정도 발견될 수 있는가, 그걸 타인을 통해서 측정을 하려고, 남과 비교해서, 혼자서는 다 도사니까 진짜 붙어봐야 ‘아! 내가 이거밖에 안 되는구나, 몰라봤습니다. ’ 하고 이렇게 되는 거예요.
오늘 다음(Daum)에 사진을 보니까 이런 게 있어요. 현대 자동차에서 비정규직 사원들이 정규직 사원들이 출근을 하니까 나란히 죽 서서 큰 절을 하는 거예요. 왜냐 하면 비정규직 사원들이 데모할 때 같이 협조해 달라고 큰 절하고 있는 거예요.
‘주여 누구십니까?’ 그렇게 묻지를 않는 거예요. 이건 왜냐 하면 아무도 자기를 방문한 적이 없기 때문에 살아도 내 힘으로 살아야 되고 버텨도 내 힘으로 버텨야 되지, 큰 절해서라도 굴욕적으로 무릎을 꿇어서라도 어떻게 정규직 옹호해서 큰 절한 게 아니고 종이라서 큰 절한 게 아니고 나 살기 위해서 내 절 받고 절 값 해 달라 이말 아닙니까?
사업할 때도 뭔가 손 내미는 것도 내가 이정도로 양보하니까 양보한 값을 당신이 치러 달라 그 이야기잖아요. 목사가 교인들 신방 뻔질나게 할 때는 ‘신방 한만큼 다음주일에는 교회 좀 나와 줘’ 그 이야기 아닙니까? 이게 다 목사는 목사다움, 사장은 사장다움, 나다움을 치중한다는 거예요. 나다움을 치중하다 보니까 어떻게 되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다녀온 것이 당체 믿고 싶지가 않은 거예요. 나다움이 동그라미 세계라면 예수님은 어디서 오셨느냐 하면 나다움의 바깥에서 오셨거든요. 나다움의 바깥에서 이렇게 오셨는데 우리는 예수님을 이야기하면 예수님이 나다움에 도움이 되는 예수님이냐, 아니냐, 해서 나다움을 훼방하는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추방시켜 버려요. ‘나가’ 추방시키고 두 번 다시 안 봅니다.
복음이라는 것도 어제 수요일 날에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마는 복음도 자꾸 들으면 권태롭다고. 왜냐 하면 복음도 나다움을 키우기 위해서 복음을 듣다가 복음도 자주 들으면 이것도 싫증나서 ‘나가 잇’ 복음도 추방시켜 버려요.
성령을 받게 되면 성령께서는 계속해서 수시로 우리 허락도 없이 이것(나다움)을 폭격을 시킵니다. 뭐로, 일곱 대접이라는 그 말씀을 가지고 나다움의 내가 구축한 영토를 허락 없이 들어와서 아예 폭격을 해서 싸그리 황폐화 시켜서 우리가 그것을 나다움을 믿을 가치가 전혀 없음을 우리한테 자꾸 보여주는 거예요.
제가 주일 아침에 그런 설교를 했죠. 수영을 처음 배우는 사람이 손 놓으면 물에 뜬다 해도 안 믿는 거예요. 계속 발을 땅에 딛고 있는 거예요. 땅에서 발을 떼라 해서 떼면 이번에는 뭘 하느냐 하면 강사님을 붙드는 거예요. 물에 안 빠지려고. 이게 왜 그러느냐 하면 평소에 내 힘으로 살았던 그 버릇이 교회 나와도 그 버릇이 어디 갑니까? 계속해서 자기가 자기를 살리는 옛날 방법을 그대로 되풀이해서 반복해서 자기한테 성과 화 시키는 거예요. 그걸 제가 반복학습이라고 했죠? 자꾸 교회에서 반복학습 시켜서 그걸 축적하고 정체를 하면 그게 자기한테 쌓이면 그게 쌓인 나로 인해 내가 구원받는다고 그렇게 생각을 하고 싶어 하는 겁니다.
성령 안 받은 사람은 이런 말 할 때만 이해가 돼요. ‘아! 교육의 효과로 구원을 받는구나. 내가 목사한테 교육을 안 받았구나.’ 자꾸 이것만 유지하는 거예요. ‘그 따위 교육 받은 그것을 버려라‘ 해도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는 겁니다. 사람이 교육받은 것이 자꾸 누적돼 버리면 그건 결국은 예수 믿는 것이 아니고 나다움, 자기다움을, 자기를 믿는 것이 돼요. ’나도 내 안에 복음 들어있다. 뭐 들어있다. 뭐 들어있다.‘ 좋은 거 다 들어있죠. 다 들어있는데 무거워서 물에 뜨지를 못해요. 너무 많은 걸 가지고 있어서 뜨지를 못해요.ㅎ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는 가벼운 존재가 되지를 못해요. 존재가 얼마나 무거운지, 이렇게 뜨지를 못하는 사람은 천국에 못 가거든요. 그래서 목사가 목회하면서 오직 생각하는 건 하나밖에 없어요. ‘저분이 뜨겠느냐. 저분이 뜨겠느냐.’ 헌금 해놓고도 ‘헌금 제가 안 했습니다.‘ 할 정도로 헌금한 자기 나다움도 버릴 수 있는 전도하고도 ’주님이 했죠.‘라고 자기 무게를 토하고 비워낼 수 있는 사람, ’내가 나 된 것은 은혜고 내가 살아온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공짜로 주께서 살려주니까 삽니다.‘ 그걸 가지고 뭐냐 하면 ’사람은 말씀으로 산다.’는 거예요.
그게 오늘 본문과 관련돼 있어요. 어떻게 관련돼 있느냐 하면, 요한계시록에서의 땅 개념은 구약개념과 연관시켜야 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일곱 대접에 나오는 모든 재앙들이 이미 구약에서 나왔던 재앙들입니다. 일곱 인은 하늘의 4분의 1이 작살나고 일곱 나팔은 3분의 1이 작살났는데 완전히 일곱 대접은 모든 게 작살나버려요. 이렇게 4분의 1이 작살났을 때는 하나님께 원망을 안 해요. 3분의 1이 작살나도 하나님께 원망이 덜합니다. 그런데 모든 게 작살났을 때는 비로소 감춰진 본색이 나와요. 하나님께 원망합니다. ‘하나님이면 다냐, 하나님이면 하나님이지 깡패 하나님이냐, 왜 내 걸 건드려, 내 인생 내 곱디고운 내 인생 왜 건드려,’ 고왔던 나다움.
옛날에 이런 노래 있잖아요. ‘꽃이 지면 같이 울고 꽃이 피면 같이 웃고, 산 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 꽃이 지면 같이 울고 꽃이 피면 같이 웃는다는 이 말은 그것이 자연과 더불어서 이 땅과 더불어서 꽁꽁 그 안에서 만든 묶여져 있는 그 바깥으로 절대로 나갈 수 없는 그 안에서만 나다움이 있는 모습을 그 유행가 가사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낙엽 발길로 툭툭 차면서 눈물 흘리고 바바리 깃 팍 세우고 몇 개월이 지나면 새싹이 피어오르고, 슬픔 조차도 내가 내 안에서 조성된 슬픔으로 사람들은 울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야기해요. ’너는 너 때문에 울지 말고 진짜 울려면 나 때문에 울어라, 신랑을 빼앗길 때가 오나니, 그때 금식하고 그때 울어라.‘ 이 말 이예요.
나 때문에 울고 웃어도 나 때문에 웃고 그러니 이런 일 저런 일 전부 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서 이미 주께서는 요한계시록의 이 원칙을 적용시켜 왔었어요. 요한계시록의 이런 입장에서 보지 못하니까 마태, 마가복음도 그게 해석이 안 돼요. 예수님께서는 떡을 줬다가 떡을 줬으면 영생도 줄 일이지, 왜 또 내 살과 내 피를 마시라 쓸데없는 이야기해서 다 쫓아내 버리고 왜 이러나, 그러니 성경 해석 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 겁니다.
이 땅에서 생성된 나다움은 예수 그리스도의 다녀간 것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그것을 안 믿어지는 것으로 만들어 버려요. 그래서 구약에 있었던 재앙은 신약에 그대로 주어지는데 그러면 우리가 여기서 알아야 될 것은 그 관계성, 구약과 신약의 관계성을 따져봐야죠. 이게 좀 약간 복잡한데 여러분이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다 아시는 거지만 정리할 테니까 여러분도 정리해 보세요. 구약에 초점이 있어요. 그건 없는 나라입니다. 없는 나라가 생겨요. 문제는 없는 나라가 어디서 생기느냐, 있지도 않은 나라가 생기는데 어디에서 생기느냐 하면 애굽 나라에서 생겨요. 그러면 없는 나라는 없는 나라 이전에 무슨 나라가 있어야 됩니까? 애굽 나라가 먼저 있어야 되는 거예요. 이렇게 애굽 나라 먼저 있고 거기서 없었던 나라가 생기면서 이름이 이스라엘이 되죠.
그렇다면 애굽 나라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이스라엘 나라 생기는 요러한 장치, 과정을 통해서 뭘 이야기하느냐 하면 언약을 이야기하려고 하고요. 좀 어렵게 이야기하면 언약은 땅과 관련된 거예요. 하늘에서는 언약이라는 게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언약은 꼭 땅에서 만들어지는데 애굽이 있어야 만들어 져요.
사단이 가룟 유다한테 들어가지 아니하면 예수님 십자가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꼭 십자가에 사단이 관여를 해줘야 돼요. 그래서 우리가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사단이 지배하는 세계에 갇혀 있습니다.’ 라고 동의가 돼야 돼요. 우리는 십자가 아니면 못 빠져 나온다는 말은 그동안 사단에게 매였습니다. 또는 공중권세 잡은 자에게 매였습니다. 또는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그때는 진노의 자녀라 불순종 가운데 역사하는 영이라. 우리가 그것을 십자가를 통해서 다 수용을 해줘야 돼요.
애굽 있고 이스라엘 나라가 있는데 이스라엘 나라가 이겼다. 이러면 언약이 안 돼요. 나 집에 있었는데 교회 나와서 구원되었다. 이러면 그건 성도가 아닙니다. 나 집에 있었는데 교회 가서 성도 되었다. 교회 등록해서 성도 되었다. 이건 성도가 아니에요. 성도라 하는 것은 우리 집에도 없었고 나에게도 없었고 교회도 없었어요. 다만 교회라는 애굽에 가서 ‘아! 성도는 교회와 상관없이 예수님의 영이 임해야 성도 되는구나’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필히 교회를 거쳐야 돼요.ㅎ
지금 이 모든 세상이 교회 화 됩니다. 왜냐 하면 교회란 이 세상에서 달리 부름을 받은 모임을 교회라 하잖아요. 그런데 요한계시록은 그 교회가 이제는 세상을 대변해주는 단체가 돼요. 세상의 대표자는 교회, 마귀가 있는 곳은 교회, 예수님을 대적하는 곳도 교회, 이렇게 돼요. 그것도 일곱 교회, 일곱 교회를 분석해 보니까, 일곱 교회를 뜯어보니까 그 안에 뭐가 들어 있습니까? 바로 사단이 들어있죠. 일곱 교회는 다 망하잖아요. 뭐 대충 찾겠다. 소용 없어요. 완벽하게 흠이 없어야 되는데 그것은 이 세상에선 이룰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은 가만 두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계속해서 이 세상은 애굽이 돼야 되기 때문에.
다시 보겠습니다. 애굽 나라에서 없는 나라가 생겨서 이스라엘이니까 결국 이스라엘은 어디서 나온 겁니까? 이스라엘에서 이스라엘이 나온 게 아니고 어디서 나왔습니까? 애굽 나라에서 그 다음에 그냥 나왔다 하면 안 되고 애굽 나라에 언약이 투입되니 이스라엘 된 거예요. 이 언약의 완성을 무슨 언약이라 하느냐 하면 ‘새 언약’이라 하거든요.
제가 어려운 대목을 다시 이야기할게요. 어려운 대목 나오는데 애굽 나라에서 언약이 들어가니까 이스라엘이 나왔죠. 그러면 언약의 완성이 새 언약이니까 새 언약이 들어오게 되면, 십자가 들어오게 되면 이 나라에서 애굽 나라 새로 생겨야 되고 거기서 나왔던 이스라엘이 새로 발생돼야 됩니다. 이것(구약 때)은 무효예요. 이 애굽이나 이스라엘은 무효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그 유대인이 원래 사단의 나라예요. 요한계시록 3장에 보면 나와요. 그들은 유대인이라 하나 사단의 회라‘ 그 자칭할 것도 없어요. 그 당시 유대인이라는 자체가 이미 유대인이라는 구분 자체가 예수님 이후에는 의미가 없기 때문에 교회가 참된 이스라엘이고 나머지는 이스라엘을 핍박하는 단체가 되겠죠.
그래서 여기서 어렵다는 게 뭐냐 하면 요한계시록의 모든 개념은 십자가에 준해서 애굽을 어떤 식으로 만들어 내느냐와 관련된 요한계시록의 개념이 투입되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의 언어는 해석하기가 정말 어려워요. 그래서 성령 없이는 해석이 안 됩니다. 구약에서는 땅 덩어리 있으면 애굽 아닙니까? 나일 강 있고 삼각주 있고 카이로 있고 그러면 애굽 이잖아요. 거기서 벗어나면 애굽에서 벗어난 거로 돼 있잖아요.
그런데 이 땅에 새 언약 이후에는 우리가 애굽에서 벗어날 길이 없어요. 왜, 새 언약 자체가 전 우주를 커버하기 때문에 전 우주를 커버하면서 애굽에서 나온 최초의 인물이 누굽니까? 예수님이잖아요. 예수님을 최초로 탈출시킨 그 세계가 이유 없이 무조건 애굽으로 풀이되는 겁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예전에는 애굽 땅 안에서 따로 모세가 이끌고 나오면 고것만 이스라엘인데 새 언약 시대에서는 예수님이 탈출했던 그 땅 자체가 애굽이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애굽이 되면서 그 땅이 애굽이어야 하는 이유를 추가적으로 요한계시록 개념들이 한 트럭으로는 안 돼요. 여러 덤프트럭으로 계속 갖다 붓는 거예요. 이건 소돔이라 하고 애굽이라 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 그래서 모든 개념들이 이것은 역사를 초월해서 묵시적으로 하늘에서 우박 떨어지듯이 묵시적 개념이 우박 떨어지듯이 쏟아지는 거예요.
그래서 묵시는 진화를 거치지 않는다는 말이 있어요. 진화한다는 말은 차곡차곡 변천하는 것을 진화라 합니다. 다윗의 진화론 나오잖아요. 그런데 묵시는 진화를 거치지 않아요. 처음도 묵시고 끝도 묵시예요. 숨겨진 의미가 나오는 거예요. 십자가는 뭐라 합니까?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고 사람들이 지혜로는 발각되지 않는 곳에 있죠. 그렇죠? 그런데 그 십자가가 가만히 있습니까? ‘날 잡아봐라’ 하고 가만히 있는 거예요? 아니죠. 분명히 인간 속에서는 발각되지 못하지만 스스로는 자신을 발산하고 드러내 보입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이 구원받은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 ‘나는 십자가를 알려고 연구 안 했는데,’ 가만히 있는데, ’내 자리 지진이 일어나라.‘ 그래서 지진이 일어난 게 아니거든요. 가만히 회사에 있는데 뭔가 갈라져서 보니까 땅이 갈라지듯이 내가 있는 자리가 들썩들썩해서 솟구쳐 올라온 거예요. 물론 석유 터지면 부자 되겠죠. 석유나 온천 터지면 좋겠는데 십자가 터져서 영생을 얻었죠. 십자가 터지니까 그때부터 이 사람은 무슨 꼴이 됐느냐 하면 혼자 보물을 발견한 농부 꼴이 돼 버려요. 이게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이야깁니다. 농부가 혼자서 밭을 갈다가 척척 금속소리가 나니까 파보니까 그 안에 보물이 들었다 이 말이죠. 농사 질 마음이 나겠습니까?ㅎ 살짝 덮어놓고 그 다음부터는 편안한 마음으로 출근길이나 퇴근길이나 편안한 마음이죠. 이게 성도의 남은여생이 이래야 됩니다. 봤거든, 신 봤다. 이미 신 봤기 때문에 남은여생이 꼴아 박든 거지가 되었든 노숙자가 되든 상관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이 세상을 떠나는 거예요. 할거 다 하면서 즐길 거 다 즐기면서 편안하게, 그렇다고 술 너무 많이 마시면 안 되고,ㅎㅎ 편안한 마음으로 떠나는 거예요. 싱글싱글 벙글벙글 하면서.^_^
그런데 성령 받아서 구원을 받은 사람은 눈에 뭐가 보이느냐 하면 구원을 받으려고 십자가 믿으려고 ‘십자가’ 외치는 그 안타까운 못 볼 인간을 보게 되죠. ‘아이고, 인간아, 집요한 오락이다.’ 십자가 믿고 행함을 해야 될까, 말아야 될까, 연구하고 난리가 나 버려요.ㅎ 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행함 갖다 붙이면 교인들이 돈 더 줄줄 알고, 자기 나됨을 유지하려고. 농부가 나의 나됨으로 보물을 얻은 겁니까? 이제는 나의 나됨도 기억도 없어요. 왜냐 하면 나는 농부에 불과하니까. 농부하고 보물하고 무슨 관계있습니까? 아무 관계없어요. 강도하고 천국하고 관계없죠? 강도 짓해서 구원받은 건 아니잖아요. 아무런 상관없는데 창녀하고 천당 가는 거하고 관계없죠? 아무 관계없는 거예요.
나의 나됨과 내가 구원받는 것은 밑에서 온천 터져서 석유 터져서 구원받은 것이지, 나의 나됨과 나의 노력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겁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창세전에 이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주께서 택했다는 거예요. ‘창세전에 미리 아시고 예정하사 나를 택해서 나를 주의 사도로 삼으시니,‘ 이 말들이 무슨 뜻 이예요? ’내 밑에 온천 터졌다. 이 뜻이거든요. ‘난리 났다, 난리 났어.‘ 웬 기적이다 이 말이죠. 온 몸으로 기적 받은 거예요. 내 대신 돌아가셔서 그 피로 말미암아 그 피가 작용하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우리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누가 산다? 그리스도가 산다는 말을 아주 편안하게 할 수 있어요. ’이거 당연한 거 아니야,‘ 당연한 거거든요. ’나 남자‘가 당연하듯이 ’나는 성도‘ 당연한 거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았다. 당연하다 이 말이죠.
그래서 항상 우리는 누구하고 거래하는 거예요. ‘누구십니까? 날마다 내 것을 매일같이 와서 이런 말씀으로 권면하시고 또 다시 돌아서면 내 것이라 챙기는 것을 때려 부수시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마네 시 같아요.ㅎ
이제 좀 어렵습니다. 애굽 나라에서 없는 나라 이스라엘이 생길 때 없다는 말을 왜 이렇게 강조하는가 하면 이것이 언약 자체가 이 땅에 없었기 때문에 없다는 거예요. 언약이 있고 난 뒤에 이스라엘이 생겼기 때문에 언약이 없다면 이스라엘도 없는 거예요.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서 언약이 온 게 아니고 언약이 이 세상에 나타나기 위해서 그 결과물로 나타난 것이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이 있다고 하지 말고 ‘언약이 있었구나.’하면 돼요. ‘나 구원받았다.’ 이야기하지 말고 ‘예수님 다녀갔다.’하면 돼요. 예수님이 오신 거예요. 그래서 수요일 날 그런 설교 했잖아요. ‘내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그 이야기를 설명 했잖아요. 누가 바깥에서 음성이 나면 그분이 현존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모든 이들이 내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는 말은 지금 지구상에 모든 이들과 더불어서 누구도 현존하고 계시다? 예수님이 계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모든 이가 내 음성을 들을 때, 산 자나 죽은 자나 상관없이 내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지금도 그 음성이 The Sounds of Silence, 침묵의 소리, 침묵의 소리로 계속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달과 별은 알아듣는데 우리는 몰라요.
애굽 나라에 있는 이스라엘이 아니고 이스라엘이 애굽 나라에 내장된 것이 아니고 애굽 나라에 이스라엘이 옴으로서 애굽 나라가 언약을 보여주기 위한 먼저 있어야 될 나라로 여기에 등록이 된 겁니다.
이걸 신약에 와서 보면 새 언약을 위해서 멸망돼야 될 땅이 필요한 거예요. 귀신도 필요하고 악마도 필요하고 새 언약을 위해서 필요한 거예요. 선악과도 있어야 되고 선악과 따먹기 위해서 선악과도 있어야 되고 생명나무도 있어야 돼요. 여러분, 선악과 따먹은 것을 안타까워하지 말고 모세가 40일 동안 하나님 만나고 가져 온 것이 뭐죠? 돌 판이죠. 그 돌 판 어떻게 됐습니까? 돌 판 밑의 사람은 구경도 못했습니다. 모세가 깨어버렸어요.
모세가 들고 온 돌 판이 깨어졌다는 말은 처음부터 땅 밑의 인간과 하나님 사이는 언약 적으로 깨어진 언약 적 관계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거든요. 밑에는 여호와 축제 벌이고 난리가 났어요. ‘여호와, 여호와,’하고 있는 거예요. 막상 여호와가 내려 올 때는 여호와가 내려오는 게 아니고 언약을 들고 온 거에요. 신약에는 새 언약, 십자가를 앞장세우고 오는데 그들은 신약도 모르고 새 언약도 모르고 그냥 ‘여호와, 하나님.’하고 축제를 벌이고 있는 거예요.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고.
그럴 때 그들에게 보여줄 그들이 믿는 하나님이 엉터리라고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증거가 새 언약에서는 뭡니까? 십자가로 구약 때는 깨어진 돌 판이죠. 공통점은 둘 다 피가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 피를 출애굽에서 애굽 나라에서 이스라엘이 갈라질 때 여기 뭐가 개입됐느냐 하면 바로 피가 개입됐습니다.
오늘 강의, 제일 중요한 대목이니까 잘 들으세요. 우리는 애굽 나라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아니죠. 언약이 와야 이스라엘이 된다니까요. 내가 구원 못 받아요. 뭐가 밑에서 온천 터지듯이 석유 터져야 돼요. 그게 뭡니까? 예수님의 피가 있어야 우리는 이스라엘이 되는 거예요. 그 말은 뭐냐 하면 애굽 나라의 모든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이미 뭐로 결정 났습니까? 만나는 접선 지점은 뭐로 결정 났느냐 하면 바로 ‘피’를 통해서만 만난다. ‘내 살과 내 피를 마셔라.’ 피를 통해서만 만나고 그 외에 만나는 길이 없습니다. 찬양, 기적, 암에서 낫는 것, 헌금하면 복 받는 것, 전부 다 거짓말 이예요. 전도 많이 하는 것, 방언 한 것, 아닙니다.
오직 접선 지점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피로만 만납니다. 그리고 그 피는 우리보고 ‘넌 죽어야 될 사람’이라고 알려주는 피요, 그 피는 죽어야 될 너 때문에 같이 죽었다는 피요, 같이 죽었던 네가 살아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피가 되는 거예요. 피 안에서 하나로 묶여야만, 하나로 묶인 그 사람만 부활의 날에 참여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메시야라 하는 것은 한 자로 이야기하면 결국 자신의 피를 앞장세웁니다. 이게 바로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 교회라 하는 것은 이 피만 증거 돼야 돼요.
사람들은 피를 비껴가려고 해요. 왜, 나의 나됨을 포기 못해서, 나의 나됨을 평생 동안 키워왔기 때문에, 평생 집에서 키운 개를 누구한테 도둑맞아 보세요. 얼마나 아깝다고요. 애정과 정성으로 키웠는데. 모든 애정과 정성, 내 사랑이 모두 거기 가 있는데.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만날 때 어떻게 만났습니까? ‘아들을 죽여라. 피로 죽여라.’ 그래서 만났어요. 그 아들을 죽이라는 말은 뭡니까? 그는 자기를 대신하는 거예요. 정성과 사랑과 애정과 그것도 사랑하는 독자, 미운 독자, 이스마엘 같으면 얼른 바쳤을 거예요. 그 자기가 제일 사랑하는 독자, 그 하나를 니 손으로 죽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받는 것은 바로 하나님 아들 이외는 아무 가치가 없는 거예요. 너의 정성, 애정도 가치 없고 너희 열심도 가치 없고, 너희 헌금, 기도 가치 없어요. 가치 있는 것은 아들의 피밖에 가치 없어요. 주께서는 피 안에서만 사람과 만나고 피 안에서만 구원하십니다. 온 사방의 벽이 다 피다 이 말이죠. 그게 ‘피’라는 책에 나와요.
그 다음에 진도 나가봅시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애굽 나라에 이스라엘이 혼자 있지 못하고 이스라엘은 뭐가 머물고 계십니까? 어린양의 피가 떠나지 않고 함께, 피와 함께 동행 하죠. 지난 수요일 날에 했죠. 사람은 둘 중에 하나라고. 예수님의 어린양의 피와 동행하는 사람과 또 한사람은 뭐라 했습니까? 돈과 함께 동행 하는 사람이라 했죠. 돈이 함께 동행 하면 돈이 나의 가치를 대변해 주잖아요. 이쪽에서는 피가 나의 가치를 대변해 주는 거예요. 피와 함께 동행 하면!! 태진아가 그런 노래 불렀잖아요. 돈 보다 사랑이 더 좋다고. 거짓말 하고 있는데.ㅎ 여자 돈 없어 보세요. 남자가 좋아하는가, 반대도 마찬가지, 돈 없는 남자하고 어떻게 삽니까? 그건 철딱서니 없는 20대에 낭만적일 때나 하는 이야기지, 30대만 접어들어도 돈 없는 남자는 결혼도 못합니다. 그래서 30대 넘으면 결혼을 못하는 이유도 있어요.ㅎ 이제 철이 났거든요. 사람은 남편과 동행하는 게 아니고 돈과 동행하거든요. 돈 없이는 못 살아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어떤 누구도 피와 동행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언약이 들어오고 보니까 그때부터 희한한 현상이 일어났는데 피와 동행하는 희한한 민족들이 생겨났는데 그 이름이 네 자로 이스라엘이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교회입니다. 죽어도 산다는 거예요. 자꾸 하나님이 우리를 죽이는 이유는 니가 죽어도 사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죽이는 거예요. 돈이 없어 죽을 지경이고 자식이 애먹여서 죽을 지경이고, 사업 안돼서 죽을 지경이고 자꾸 죽이는 거예요. 매일같이 확인 작업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매일같이 ‘누구십니까’ 물을 수밖에 없죠. ‘누구십니까?’ ‘주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알겠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피로서 등장하게 되면 신약으로 옮겨 버리면 새 언약 시대에 모든 세상이 애굽이라 했습니다. 자, 애굽에서 첫 번째로 빠져나온 이스라엘은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 빠져 나왔죠. 그래서 예수님을 이스라엘이라 하고 또는 야곱이라 하죠.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말씀이죠. ‘당신이 야곱보다 크니이까’하잖아요. 요한복음 1장 51절에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이것은 뭐냐 하면 나다나엘에게 ‘내가 바로 야곱이다.’ 언약의 구심체고 중심체다 이 말이죠. 이 말은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이 세상에 복이 없다 이 말 아닙니까? 이건 그야말로 언약으로 투입된 것이기 때문에, 언약으로 투입됐다는 말은 무엇을 예상할 수 있습니까? ‘하아! 없는 나라 만들 수 있구나.’ 내가 생각도 못하고 내가 기약도 못하고 내가 예상치도 못한 나한테도 낯선 나도 예상 못한 농부가 이쯤에 보물이 있을 거라고 예상 했습니까? 그냥 파다가 보니까 보물이 튀어나온 거예요. 그게 횡재한 거죠. 그 횡재를 주시는 분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여기서 어렵다는 게 뭐가 어려우냐 하면 애굽에서 이스라엘이 빠져나왔으면 뭐가 어려우냐 하면 애굽이 계속 애굽화 되어줘야 계속 애굽이라는 게 예수님 때문에 건졌다면 옛날 이스라엘의 그러한 모션과 티를 흠뻑 젖는 성도들이 나와야 되기 때문에 이 땅에서는 철저하게 애굽 돼야 된다는 거죠. 애굽 돼야 될 이유는 애굽 될 때 비로소 요한계시록에 옛날에 애굽의 재앙의 의미를, 같은 개념을 이 요한계시록 16장에서 일곱 대접을 통해서 할 때 ‘아하, 내가 애굽에 살고 있구나, 그리고 떠나야 될 곳이구나.’
만날 나이 많아서 여행만 왔다 갔다 하지 말고 여행 백날 해봐야 그 동네가 그 동네고 그럽디다. 아테네 가봐야 데모하느라 바쁘고 일본 가봐야 경제 어려워서 애로가 많고 미국 가봐야 월가 데모하는 것 똑같이 어디 가도 항상 돈 없이는 못 산다는 법칙은 이건 알래스카 가도 돈 없이는 못 살아요.ㅎ
이 세상은 애굽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밖에 없어요. 참 제가 본의 아니게 유럽에 갔다 왔습니다마는 가면서부터 실망했는데 올 때까지 실망했어요. ‘내가 뭐하려고 왔던가, 왜 내가 뻔히 애굽인데 뭐 이리 좋다고 라인 강이 뭐고....’ 그래서 내가 느낀 것은 사람은 돈 없으면 못 산다는 그것, 아무리 좋은 나라도 돈 있어야 좋은 나라지. 돈 없으면 그거 나쁜 나라고 힘든 나라예요.ㅎ 그것은 평소에 우리가 얼마나 땅에서 익혀온, 땅에서 철저하게 배워온 그 감각, 삶의 감각, 생활 감각, 인식 감각, 얼마나 철두철미하게 온 몸에 염색됐어요. 자본주의 독성이 팍 몸속에 퍼졌어요. 이거 안 빠집니다. 이 독성이 양잿물로 해야 빠지지 않아요. 자본주의 때가 죽을 때까지 들어있어요. 안 빠져도 걱정하지 마세요. 매일같이 폭격합니다. 매일같이 말씀대로 폭격하시는 분이 계시기 때문에 그분 때문에 우리는 삽니다.
10분 쉽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