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강-고전 11장 27-29절(죄를 먹고 사는 자)151129-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1장 27-29절입니다. 신약성경 277페이지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찌니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주일날 설교가 어렵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곰곰이 생각해 봤습니다. 제 설교보다 성경이 더 어렵거든요. 성경자체가 더 어려워요. 오늘 본문도 만만치 않습니다. 사실은 성경이 우리 인간으로는 감당이 되지를 않아요. 너무나 어려워요. 이 어려운 것을 어렵게 여기는 사람도 있고, 놀랍게도 이것은 신기한 이야기인데, “이 성경말씀이 뭐가 어려워요?”라는 사람도 있어요. 그래서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두 종류가 있어요. 민수기 강의할 때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원통이 두개가 돌아가고 있어요. 작은 원통이 돌아가고 있고 그 바깥에 큰 원통이 돌아갑니다. 이 두개의 원통이 돌아가는데 바깥의 원통과 안쪽의 원통이 서로 만나지 않고 따로 돌기 때문에 바깥원통에 묻혀서 살아가는 사람은 안의 원통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에요. 세상중심은 처음부터 하나님중심으로, 예수님중심으로 돌아갔는데 이게 원통이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 바깥에 인간이 범죄하고 난 뒤에 자기들끼리 돌아가는 어떤 공동체적원통이 있어요. 마르크스 이야기까지 할 것도 없고 그 바깥에 돌아가는 인간의 원통은 이겁니다. 자기 노동으로 자기 소유화시키는 원통, 이게 세상입니다. 자기 노력으로 자기 소유화시키는데, 이게 인간의 범죄하고 난 뒤에 도시마다 국가마다 그랬는데 이게 자본주의가 되다 보니 시장원리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노력해서 내 소유 삼으면 되겠는데 그걸 위해서는 시장에 나가서 자기 노동도 하나의 상품으로 팔아야 되거든요. “제 상품 어때요, 제 노동 가치가 어때요?”라고 하다 보니 이제는 내가 소박하게 텃밭 가꾸고 사는 입장이 아니고 남들의 눈치를 봐야 돼요. “여러분이 원하는 노동의 질은 어떤 건데요? 제가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자유를 부르짖고 평등과 박애를 부르짖어도 내가 지금 하는 일이 남들에게 인기 있을까, 없을까를 생각하고 고려하게 되는 겁니다. 내가 노동한 것 가지고 내 것으로 삼는데 이 내 것이 그냥 내 것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고 남들로부터 평가와 시선과 판단을 받아야 되는, 그것도 매일 그렇게 되는 시장바닥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남들 구미에 맞추기 위해서 자기가 노동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고자 하는데 힘이 없으니까 교회 나와서 하나님께 비는 거예요. “하나님, 남들에게 인기 있는 사람 되게 하옵소서. 남들이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 되게 해주세요.” 아주 고상하게 이야기해서 ‘교회와 국가와 민족에 필요한 사람 되게 해 달라.’는 식으로 해보지만 그런 식으로 마음가짐을 갖고 있는 이상 성경은 아무리 봐도 어렵다, 모르겠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바깥에 있는 원통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고 안쪽에 있는 원통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다보니까 바깥에서 안쪽으로 들어가야 되는데 이 들어가는 방법은 타인의 시선을 끊어줘야 돼요. 타인의 시선이 아닌 중심에서 나오는 시선과의 연결고리를 가지고 그것을 하나님의 의라 하는 겁니다. 이 세상, 바깥의 원통은 내가 윤리도덕으로 착해야 남들도 착하다고 하거든요. 왜냐하면, 그 윤리도덕의 원칙이 남들로부터 요구된 원리원칙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안에 있는 원통은 희한하게도 아무런 대가를 요구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이 행한 의를 그냥 파이프로 꽂아주기만 하면 그 사람이 하나님의 의가 돼버려요.
아무것도 내 것으로 중무장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이미 성령 받은 사람은 참 듣고 싶은 이야기고 ‘그게 성경 이야기야!’ 하고 참 쉬운데 교회 와서 남들이 요구하는 시장에서의 상품화, 자기가치를 더 높이기 위해서 온 사람은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행하면 남들이 나를 우수한 존재, 상품이라고 봐주겠는가?’ 이런 관점으로 오게 되면 ‘도대체 설교가 너무 어려워서 모르겠다. 도대체 뭘 하란 말인가?’ 이렇게 어렵게 되는 거예요.
이렇게 이야기해서 기초를 닦았으니까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오늘 본문에 들어가 보겠습니다. 과연 안 어려운지, 더 어려운지? 아마 더 어려울 거예요. 오늘 본문에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하는 이 말은 인간으로서는 감당 할 수 없는 어려운 말입니다. 그래서 이 어려운 말을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떡과 사람이 일치된다는 이야기에요. 포도주와 인간이 일치된다. 어느 원통 안에서? 안쪽에 있는 원통 안에서 일치가 돼요.
떡을 먹고 밥을 먹는다 하는데 떡을 먹고 밥을 먹고 포도주스를 먹고 하는 그 대상은 치우고요, 뭘 먹는다는 것, 뭘 집어먹는다는 것이 내가 먹는 것이 아니고, 내 몸이 배고파 할 때 먹고 난 뒤에 그 다음에 내 몸의 자아가 ‘나는 뭘 먹기로 결심했다.’ 하고 뒤늦게 그렇게 정리를 해버려요. 어렵게 해서 죄송합니다. 몸이 먼저고, 몸의 욕구가 먼저고 그 다음에 내가 뭘 했다, 판단했다, 하는 그것은 뒤치다꺼리하면서 변명조로 정리되는 거예요.
서울대학에 들어간 어떤 학생이 약을 올리듯이 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어떻게 그 어려운 시험에 합격했습니까?” 하니까 “나는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하는 거예요. 그 사람은 솔직하게 이야기했어요. 공부가 제일 쉬운 거예요. 그 말은 ‘공부를 해야지.’ 해서 공부한 것이 아니라 몸이 공부하는 몸이라. 그래서 ‘내가 공부를 해서 좋은 대학에 가야지.’가 아니에요. 그것은 이미 일이 벌어지고 난 뒤에 정리하는 식이지 몸은 공부하는 것이 만화 보는 것보다 더 재미있는데 어떻게 해요? 그러니까 이것은 저절로 되는 거예요. 몸이 배고프면 밥을 먹고 난 뒤에 “나 밥 먹었어.”라고 뒤에 자기중심으로 하다 보니 그렇게 정리된 겁니다.
성경 볼 때 바깥원통, 내가 결정한다, 내가 뭘 한다, 내가 공부를 한다, 나라는 것을 항상 주체자리에 놓고 ‘나는 내가 관리해야 해. 남이 관리 못해.’ 이런 식으로 바깥원통에서 살아간 우리 입장에서 오늘 본문의 경우,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라고 이야기가 들어올 때 “도대체 죄를 짓지 않고 주의 몸과 피를 마시는 방법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할 수밖에 없지요. 그 질문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애초부터 네 몸 자체가 주의 몸이라고 생각하면 문제는 간단하게 끝날 것을 가지고 ‘내 몸 따로 있고 주의 몸이 따로 있는데 내가 주의 몸을 먹고 마실 때는 조심스럽게 해서 내가 병들거나 죽거나 하는 일이 없어야 된다.’ 이렇게 자꾸 머리를 굴려요.
내 몸 따로 있고 주의 몸 따로 있으면 그 주의 몸과 내 몸이 같은 성질이 아니거든요. 지난 시간에 제가 언급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떡을 뗄 때 떡을 가지시고 자기 떡을 떼어서 지점 혹은 분점 세우듯 나누어줬다고 분명히 언급했습니다. 이 말은 뭐냐? “네 몸이 네 몸으로 보이냐? 그렇게 보여? 그것은 네가 잘못 생각한 거야. 네 몸은 네 것이야.”라는 식으로 자기 몸을 떼서 준 거예요. 자기 몸의 확대입니다. 아담이 자기자식을 낳듯이 예수님이 자기자식을 낳은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그런 생각을 못하는 것은 어릴 때부터 “네가 행동을 똑바로 해야 나중에 네가 밥이라도 먹고 산다.” 이런 식으로 가정에서, 학교에서, 교회에서 계속 교육을 받아 왔어요. ‘아, 내가 나에게 어떤 조치를 하지 않으면 내 인생은 보장받지 못하고 실패로 빠지고 절망에 빠지는구나.’ 이렇게 돼버려요. 그런 식의 사고방식에서 제일 나쁜 경우가 뭐냐? 예수 내가 믿어서 구원받는다는 이런 사기, 이런 거짓말이 2천년동안 교회마다 계속되어 온 거예요. 내가 믿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되는 것은 이미 주께서 “너는 내 것이야.”라고 통보하는 것을 확인함으로써 구원이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겁니다. 과거완료로서 확인할 뿐이에요.
확인을 어떻게 하는가? 내가 한 것은 자랑 질밖에 안 된다는, 죄밖에 안 된다는 것을 성경으로 확인하는 거예요. 내가 기도하고 뭘 해도 이것은 내가 뭔가 했다는 아담의 죄짓는 습관이 그렇게 발현된 거예요. 그래서 저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거예요.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도 여러분이 살고 있잖아요. 누가 살려준 거예요? 주님이 살려준 거예요. 사람들은 누가 옆에서 나를 살려주면 기분 되게 나빠해요. “살려주는데 왜 이런 식으로 살려주십니까?” 주께서 “그런 식이 어떤 식인데?” “키가 너무 작잖아요.” 주문생산 했습니까? 자기가 주문했습니까? 주께서 만들어준 대로 그냥 살다가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에스더처럼 그냥 가면 돼요. 이것이 내 것이라고 하기 때문에 미래가 걱정되고 불안불안한 겁니다. 그 불안을 이용해서 교회 목사들이 또 사기를 치고. “이렇게 하면 여러분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십니다.” 이것은 주님하고 전혀 반대편에 있어요. 이제는 그만 속아 넘어가세요.
문제는 이거예요. 어쨌든지 간에 우리에게는 바깥원통이 전부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그런 식으로 교육받았고 내가 천당하고 지옥 가는 것은 내 손에 달렸다는 그것이 오히려 편하게 느껴지고 납득이 잘 되고 그래요. 문제는 바깥원통에서 어떻게 안쪽원통으로 가느냐 하는 그 문제가 남았습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 흔히들 주님의 사랑으로 한다는데 이 사랑이라는 이게 거짓말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구약을 통해서 아는 사랑은 우리 자신의 현실을 뭉개버리는 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사랑이라 하지 말고 정답을 이야기하게 되면, 주님 쪽에서는 사랑이지만 우리 쪽으로 오게 되면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게 뭐냐? ‘사랑보다 깊은 상처’ 상처로 와요.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사 53:1) 상처로 와요. 나로 인하여 피해 입은 주의 상처가 내 몸의 중심부에 박혔을 때 우리는 바깥원통에서 안 원통으로 이미 들어온 거예요. 사랑보다 깊은 상처라는 것을 바깥세상에서 좀 놀아본 사람들은 무슨 뜻인지를 압니다. “♬오랫동안 기다려왔어. 내가 원했던 너였기에.” 임재범이 불렀던 노래입니다. 여기에 중요한 가사가 나옵니다. 나는 상상했다는 겁니다. “나는 상상했었지 나의 곁에 있는 널.” 그렇다면 우리가 바라는 현실, 우리가 원했던 현실은 나의 상상의 산물이라는 말이지요. 내 몸도 내가 상상했고 내 신체를 비롯해서 내 주변의 눈에 띄는 것 전부를 우리는 현실로 알지만 사실은 우리의 상상의 산물이에요. 그것을 심벌, 상징이라고 합니다. 모조리 상징이었어요.
제가 상징이라고 할 때는 어떤 뉘앙스냐 하면, 허구라는 뜻입니다. 그게 성경에 나옵니다. 로마서 5장 14절에 이렇게 나와 있어요.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아담은 오실 자를 표현하는 상징이라고 되어 있어요. 아담이 상징이라는 겁니다.
어떤 분이 저에게 상담 비슷한 것을 해요. “저는 죽으려고 몇 번이나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죽지 마세요. 그렇게 일찍 죽지마세요. 가만있어도 주께서 다 죽여주시는데 그렇게 부러 자살하지 마세요.” 했어요. 왜냐하면, 사람은 안 죽어요. 죽어서 고통이 없어지게 되면 죽으라고 권하고 싶은데 자살해도 안 죽어요. 그게 문제에요. 우리는 실재하시는 주님의 상징물이기에 주께서 활용하기 나름입니다. 죽어봐야 주께서 다 호출해내요.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요 5:28) 다 불러냅니다. 죽음마저 실재가 아니에요. 우리보기에 숨 끊어진 것뿐이지 다른 대기 장소로 집합한 거예요. 이 성경만이 실재에요. 그 외에는 상징입니다.
젊을 때는 모든 것이 신비하고 신기해요. 어릴 때 사는 동네에 긴 골목이 있었어요. 옛날에 달성동에 살았는데 골목이 길었어요. 그 골목 끝으로 나가면 거기에 딴 세상이 있는 줄 알았어요. 모를 때는 모든 것이 신기하고 신비로워요. 해외여행가서 실망하는 이유가 그것 때문이잖아요. TV로 볼 때는 그렇게 아름다워요. 그런데 막상 가보면 그 동네 사람 사는 것이나 내가 하루 사는 거나 똑같아요. 신기하고 신비로운데 지나가보면 모든 것이 몸의 피곤으로 쌓이고 허탈한 마음으로 오게 되어 있습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에요. 모르니까, 내가 40이 되면, 50이 되면, 60이 되면……, 이렇게 하지만 막상 살아보면 시시하고요 별게 없어요. 그래서 그걸 가지고, 모든 것이 하나의 상징이었다, 내가 원하는 정답은 거기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겁니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하고 아무리 여행을 많이 해도 거기에 정답이 없어요. 제 이야기가 아니고 전도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공부해야 피곤만 할 뿐이고 공부한 만큼 새로운 신비가 욕망이 되어서 찾아오게 되어 있고, 또 새로운 것을 알아야 된다는 부담만 느낄 뿐이지 또 그 현장에 도달하게 되면 모든 것이 몸의 피곤으로 누적이 되면서, 이런 식으로 산다는 것이 의미도 없고 목적도 없어요.
“목적과 의미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으시면 제가 알려드리겠습니다. 상징이었습니다. 오실 분,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물로서 이 땅에 잠시 등장했다가 나중에 연극무대 끝나면 대기상태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호출하십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9) 영생의 부활로 나오는 사람이 있고 저주받을 부활로 지옥가기 위해서 호출될 사람이 있습니다. 성도는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기 때문에 그 호출하는 그 상태조차 사도바울에 의하면 예수 안에서 영생을 누리다가 호출당한다고 되어 있어요.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죽으면 곧 주와 함께 있으면서 몸의 영원한 변화, 주께서 모든 것을 마감할 때 영원한 천사의 몸을 입고 영원히 살게 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한 번 만든 인간을 절대로 도중에 버리는 법이 없습니다.
죽었던 많은 사람 지옥 가서 고생하고 있고 부자도 고생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변화 산에 나타날 때 모세와 엘리야, 이 사람들은 이미 주와 함께 영원히 살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뭘 더 보여줘야 됩니까? 예고편만 보여주면 되지 뭘 본편까지 다 보여 달라고 해요? 성경을 감당을 못해요. 그게 실재에요. 리얼리티, 실재입니다. 그러면 이 땅은 뭐냐? 그냥 상징입니다. 상징의 역할은 뭐냐?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해서 예수님이 어떤 속성을 갖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기능만 하면 돼요. 따라서 주님 앞에서는 자기가 어떤 재주를 가지고 있더라도 주님은 다 제거해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된 기능만 뽑아내는 식으로 그 사람을 사용합니다.
그 예가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29절에 보면,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상당히 관념적이고 추상적이라서 우리로서는 이게 무슨 이야기인지 몰라요. 그런데 30절에 보면 그 실제예가 나와 있습니다.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잠잔다는 것은 죽었다, 그 말입니다. 예수님의 몸과 살을 함부로 먹다가 병들고 약해지고 갑자기 돌변사하는 자들도 적지 않으니,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라고 되어 있어요.
이 대목을 아마추어들이 보면서, 프로도 마찬가지지만 아마추어들이 보면서 얼마나 겁을 집어먹었겠어요? 성만찬하는 게 겁나요. 괜히 성만찬제도 만들어놓고 잘못 먹었다가 하나님 앞에 저주받아서 졸지에 죽는 수가 있고, 아픈 수도 있고, 죄의 경중에 따라 다른데 죄 많이 지은 사람은 그냥 돌변사로 죽고 좀 적게 지은 사람은 감기정도의 병에 걸리든지, 이런 공포스러운 성만찬이 되고 마는 겁니다. 그래서 성만찬 끝나고 난 뒤에는 서로를 살펴야 돼요. “아무 일 없었어요? 종기가 난다든지 그런 일이 없었어요?”
이게 근본적으로 성만찬해석을 잘못해서 그렇습니다. 성만찬이라는 것, 지난시간에 했습니다만, 제가 생각해도 지난시간 설교가 참 어려웠습니다. 사는 것 자체가 성만찬이라는 취지로 말씀드렸거든요. 성만찬을 구태여 한다는 그 자체가 수상스럽다는 거예요.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본인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살아가고 있는데 왜 성만찬이 필요하냐는 말입니다. 그것은 자기방어태세, 어렵게 말해서 나라는 인간을 존재적 차원에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나라는 존재가 여기 있다. 내가 건강하고 복 받는 모습의 존재로 있을 때 나는 구원받은 사람으로 확인이 되고, 내가 몸이 아프게 되면 지옥가거나 천국 가더라도 빌빌거리면서 가고 있다는 식으로 자기 존재를 가지고 확인을 하고자 하는 이것이 근본적인 문제가 되는 겁니다.
이점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설명한 것은, “인간은 상징에 불과합니다. 상징에 불과하기에 주체는 따로 있어요. 예수님의 상징, 오실자의 표상, 모든 아담의 후손들은 예수님 한 분의 상징물입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상징물이니까 저 뒷자리, 서술의 자리에 있어야지 주인자리를 우리가 꿰차고 있으면 안돼요. “주님으로 인하여, 주님으로 말미암아, 주님 때문에 제가 있습니다.” 그렇게 돼야 돼요.
그렇다면 주께서 십자가를 반복하는 것도 내 쪽에서 반복하는 것을, 형식과 제도를 만들어내지 마시고, 성만찬하지 마시고 이미 주님께서 사건들을 반복해요. 그 사건의 범위가 오늘날 우리가 주님의 성만찬, 죽으신 날 밤의 반복성 안에 이미 놓이면서 우리는 지금 대구에 살고 있고, 서울에 살고 있고, 이렇게 살고 있는 겁니다. 주님과 끊어졌어요? 아니지요? 그러면 주님과 이어졌습니까? 그렇지요. 그러면 여러분 속에 주의 말씀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내가 지키는 말씀이 아니고 주께서 집어넣어서 그것을 현실화시키는 활동이 있습니다.
그 현실화는 내 속에 하나의 상처로 계속 쌓이는 거예요. 우리라는 껍데기가 너무 자본주의에 물든 껍데기가 되어서 안에 있는 진짜 원통은 주께서 상처로 우리 안에 박혀 있게 했습니다. 빼고 싶어도 빼지를 못해요. 지옥가고 싶어도 지옥을 못갑니다. 이상한 상처, 무슨 돌멩이 하나가 날아들어서 박혀가지고 이게 자꾸 우리로 하여금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오히려 주님을 더 의식하게 만드는 요인이 발생되게 만들어요.
무심코 술 담배 할 수도 있는데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자꾸 드는 거예요. 건강상 이유가 아니고 내 몸이 내 몸 아니라는 그 느낌이 자꾸 온다는 말이지요. 내가 단독적으로 내 의미를 찾으려니 허탈한데 성경을 보게 되면 주께서 날 다룬다는 느낌이 오는 것을 말릴 수가 있어야지요. 남들 눈치 보면서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심어놓은 거예요. “당신이 이 회사에서 왜 일합니까?” 할 때 옛날에는 “이 일해서 성공……” 어쩌고저쩌고 했는데 그게 아니고 “주께서 그 일을 시켰네요.” 간단한 말이에요. 주인의 자리, 주의 자리에 자기를 비워버렸어요. 자기를 비우고 자기는 그 주인 때문에 발생된 어떤 결과물이에요. 결실물이고. 그런 관계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런 주의 관계가 평소에 인식이 되는지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설명해 봐야 더 어려워지니까. 제 딸이 초등학교 3학년 때입니다. 지금이나 그 때나 아주 순진했어요. 사촌이 있었는데 그 애가 진주한테 “야, 산타클로스가 없단다.” 했어요. 그래서 제 딸이 “엄마! 산타클로스가 없는 게 맞나?” “아니야, 있어.” “거봐, 있잖아.” 제 딸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이 왔어요. 제 아내가 크리스마스 준비한다고 몰래 시장에 다녀왔습니다. 엄마가 시장에 다녀오면 그 애가 제일먼저 풀어 봐요. 뭘 샀는지 보는 거지요.
그날도 방심하다 보니 먼저 그 짐을 딸이 풀었어요. 거기서 크리스마스와 관련된 선물이 나왔단 말이지요. “엄마, 이거 뭔데?” “크리스마스선물이다. 산타클로스할아버지가 준거다.”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를 어디서 만났는데?” “화양(시장)에서 만났다.” 산타클로스가 없다고 한 그 사촌아이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없다고 한 그 순간부터 더 이상 선물이 끊어졌어요. 이게 중요한 겁니다. 믿음이 없으니까 선물도 덩달아 그 순간 날라 가버렸어요. 바보에요, 바보. 똑똑한 게 탈이라. 세상 모든 일은 진리를 알기 위해서 열심히 하잖아요. 그 진리를 안다는 그 모든 시도가 다 어리석은 짓이에요. 왜냐하면 바깥원통에서 안 원통으로 가는 길을 주께서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 똑똑이, 네 똑똑이 너를 지옥으로 만드는 거예요. 바보가 되면 될 것을, 이 성경말씀대로 믿으면 될 것을, 성경말씀이 그런가 하고 따진다고요. 따질 것이 뭐가 있어요?
“우리의 몸은 예수님의 상징이다.” 그러면 ‘내 주인은 따로 있구나.’ 이게 어렵습니까? 이 이야기가 어려워요? 이게 어려운 이유는 어릴 때부터 우리가 배운 과학, 진화론적 사고가 있어가지고 “네 눈에 확인되지 않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 미신이다.”라는 식으로 계속해서 교육을 받아왔고 또 과학적인 교육을 해줘야 자본주의시장바닥에서 가치 있는 존재가 되어서 남에게 쓸모가 있어요. 그러니까 남이 원하는 대로, 타인의 욕망대로 따르다 보니 스스로 똑똑한 인간인데 그게 바보가 돼요.
분명히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은 바보였습니다. 아담은 선악에 대해서 알 필요가 없어요. 그런데 아는 순간 에덴동산 그 선물 자체가 날라 가버렸어요. 그 똑똑한 것 가지고 기껏해야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어서 살아봐야 땀이나 줄줄 흘리면서 살다가 결국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물론 그 죽음마저 나중에 상징이 됩니다만. 죽음마저 상징이 된다는 그 말은 우리 몸마저 상징이라는 그 말이에요. 이 세상에 진실은 아무것도 없어요.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의 자기자아라 하는 것은 새로운 상황이 와서 내용물을 계속 주입시키게 되면 그때그때 자아가 자꾸 달라져요. 성질내면 성질내는 이것이 내 모습인지? 또 누굴 예뻐하면 예뻐하는 이것이 내 자아인지, 내가 원래 이렇게 자비심이 많은 인간인지?
맨날 그 상황 따라서 내용이 달라지기 때문에 어느 것이 나인지를 몰라요. 아무것도 나가 아니에요. 왜냐하면 애초부터 몸만 있었지 나라는 것은 그 몸을 억지로 표현하기 위해서 ‘나’라고 내가 붙인 거예요. 이 몸이 누구라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통보해주면 되는 겁니다. 권사님께서 참 중요한 질문을 했어요. 부끄럽다고 비밀글로 했는데 내용이 너무 중요한 질문을 했어요. “어차피 천국가면 이 자아가 없어질 텐데 목사님 말씀대로 막사나, 열심히 사나, 성실하게 성화론 부르짖고 사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어떻게 살아도 이 땅에서 필요한 자아고 그것은 없어질 것은 다 마찬가지이니 어떻게 살라는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라는 거예요. 부끄러워서 메일로 답변해 달라고 비밀글로 올리셨는데 이렇게 답변해 드렸습니다.
성령을 받게 되면 자아가 두개의 자아가 생겼다는 사실을 본인이 미리, 천국가기 전에 알게 돼요. 사도바울이 그런 사람입니다. 사도바울은 옛사람 따로 있고 새사람 따로 있어요. 새사람은 뭐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라는 주께서 새롭게 만들어주신 자아도 알고 또 사도바울은 디모데전서에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8)하는 자아도 있어요.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나의 자아가 날라 가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옛사람이 날라 가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또렷하게, 그리고 살면 살수록 ‘아, 나는 이런 인간이었구나.’라는 것이 오히려 더 살갑게 느껴지는 거예요. 두개의 자아가 되고 난 뒤에 사도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하는 말이 “주여, 소원이 있는데 빨리 죽어서 새로운 자아에 합당한 새로운 장막을 입기를 원합니다.” 고린도후서 5장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고후5:1-4)
빌립보서 1장에 보면, “사는 것과 죽는 것 사이에 끼어 있는데, 내 소원은 죽는 것이 더 나은데 너희들을 위해서 주께서 안 죽이고 너희에게 봉사하라고 계속해서 살려두고 있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찐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1:21-24)
사도바울의 입장도 그렇게 스데반집사의 입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돌이 날아들 때 아파요. 그러나 스데반집사님은 주님과 함께 있기 때문에 이렇게 합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 7:60) 보통 사람들한테는 주님이 딴 동네 있지만 스데반집사는 같은 거실에, 소파에 같이 앉아 있어요. 주님 앞에 앉아 있고 스데반은 여기 앉아 있습니다. 상징인 인간들이 상징적인 돌멩이를 들고 던져요. 그들은 자기들 시각에 보이는 스데반집사의 모습이 전부입니다. 그들의 눈에는 누가 안 보이는가? 예수 그리스도가 스데반집사와 함께 있는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이 다메섹으로 내려갈 때 우레가 울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냥 우레가 울었다고 했는데 사도바울은 우레가 아니고 주님과 대화 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요. 그들은 상징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러나 사도바울의 상징은 뭐냐? 주와 내통되어 있고 파이프로 연결되어 있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주여,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예수다.” 다른 사람들은 옆에서 “저 사람이 지금 뭐라는 거야? 미쳤어? 저거 왜 그래? 뭐라고 하는 거야?” 다른 사람들은 사도바울 보고 미쳤다는 거예요.
고린도후서 5장에서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그래, 미쳤다. 미쳤지만 나는 주의 사랑에 미쳤다.”고 해요. 주의 사랑에 미쳤다고. “나는 너희가 모르는 것을 이야기한다. 나는 너희를 설득하거나 납득시킬 의사는 전혀 없다. 주께서 외치라고 하니 외칠 뿐이다. 주께서 살라고 하니 살 뿐이다. 너희는 바깥원통에서 실컷 살아라. 나는 그 바깥에서는 이미 죽은 자다. 나는 죽었던 자아, 저주받을 자아가 뭔가를 나는 코앞에 똑바로 보고 있다. 그것은 내 몸에서 나온 자아다. 아직도 떠나지 않고 있는 내 몸, 내 몸의 욕구는 아무리 정신적으로 바르게 살고 싶어도 나는 자랑 질 하고 싶고, 부자 되고 싶고, 큰 목회하고 싶고, 인기 많고 싶고, 돌이 떡 되게 하고 싶고, 세상 모든 부귀영화가 갖고 싶어.”
살아갈수록 이게 없어지지 않고 또렷이 다가옵니다. 그게 옛 사람인 것을 또렷하게 안다는 그 사람은 바로 성령의 사람, 새사람이기에 그것이 보이는 거예요. 다른 사람은 보이지를 않아요. ‘성만찬 떡 조심해서 먹어서 내가 안 아파야지.’ 이게 옛사람이에요. 주님과 내가 이미 하나가 되어 있기에 이 성만찬을 통해서 “주님이여, 내가 뭘 어떻게 합니까?”가 아니라 “주께서 어떻게 하시는 그 결과물이 지금 이 현장의 나입니다. 따라서 주께서 어떤 기능을 보여주고자 제가 성만찬하고 난 뒤에 몸이 아파야 한다면 그 아픈 기능을 저를 통해서 실시해 주옵소서.” 그래야 돼요. “침대에 누우라면 눕게 해 주시고 죽어야 된다면 죽게 해 주옵소서.”
참 이런 말까지는 안하려고 했는데 할 수 없어요. 고린도전서 5장에 어떤 사람이 아비의 아내를 취했다가 졸지에 죽은 사람이 있습니다. 여자 밝히다가 죽었다는 그 말이거든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고전 5:4) 이 대목입니다. “바람 피워도 구원받습니까, 목사님?” 묻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 한 거예요. 바람피우는 것은 죄짓는 것이고 바람피우는 것은 나쁜 짓이에요. 그러나 바람 안 피우는 것도 나쁜 짓이라는 겁니다. 어떤 경우라도.
내가 바람피워도 술부의 자리에 있는지, 안 그러면 주의 자리에 있는지. “바람을 안 피워도 내가 알아서, 정신 차려서 바람 안 피웠습니다.” 하면 지옥 갑니다. 왜 아멘이 안 나오네요. 마음속으로 어떤 여자를 그리워할 때 “주께서 그렇게 하셨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할 때 여자는 여자대로 밝히고 천국은 가고, 꿩 먹고 알 먹고……, 이게 진짜 꿩 먹고 알 먹는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꿩 먹고 알 먹는 상태에요. 왜 그런 자유가 없습니까? 주님한테 종속되라는 그 말입니다. 매사를 나를 주인공 삼으니까 자기가 벌벌 떠는 거예요. ‘내가 이런 짓 하면 벌 받지 싶다. 내가 이런 짓 하다 사업 망하지 싶다.’ “사업 망하든 말든 주께서 주신 것인데, 네 것이 아닌데 네가 벌벌 떨고 있느냐?” 이것은 바깥원통의 그 성질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그래요.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나를 망했다고 욕하겠지. 그렇게는 난 못살아. 나는 죽고 말거야.’ 남에 따라서 죽고 산다는 이것이 말이 돼요? 인간은 상징물인데, 주님의 상징물인데. 주님이 없으니까 자기 자신만이 유일한 현실이 되고 말았던 겁니다.
마귀가 주님을 반대하는 이유를 아시겠지요? 눈에 보이는 그것이 전부라고 마귀는 이야기하고 성경은, 안에 있는 원통은 말합니다. “네가 있는 네 몸은 네 몸이 아니고 주께서 십자가 달렸던 그 사건의 결실물, 결과물이 지금의 네 몸이고 네가 속해있는 존재상황”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네가 뭘 먹든지 마시든지 주님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라 해서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입니다. 주기도문이 그거잖아요. 간단해 보이는 주기도문, 모든 것의 마지막이 주께 영광을 돌리는 것, 이것이 주기도문입니다.
그 중간이 뭐냐? 내 죄를 사해주시고 내가 내 주인의 자리에 앉지 않게 해 달라는 것. 모든 것이 결과로 주어진 은혜로 사는데 이게 원래 자리에요. 새삼스럽게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피조물의 자리가 원래 자리에요. 이게 아담이 상실한 자리입니다. 아담이 놓친 자리에요. 놓쳐버린 아담의 자리를 우리에게 다시 집어넣은 겁니다. “너는 나의 영광을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나야만 했고 몇 월 몇 시에 죽어야만 했고, 그러나 그 죽음은 그냥 잠자는 것이고 영원한 죽음은 지옥이 영원한 죽음이고 반대쪽에 있는 영원한 생명은 네가 천국에서 사는 것이 영원한 생명이다.”
목숨 떨어지는 것이 죽음이 아니에요. 목숨 이어가는 것이 생명이 아닙니다. 어떤 상황,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이 생명입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하는 말씀이 그 뜻이거든요. 그걸 사도바울은 이미 알았다는 거예요. 이미 알아서 사도바울은 지금 제대하고 싶어서 난리에요. 달력에 줄 그어가면서 언제 제대하나 하고 있는데 제대 못하고 있는 것은 남들에게 봉사하라고, 남을 위해서 봉사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상담한 그 분이 “모든 것이 다 안 되니 자살하고 싶다.” 이런 조로 이야기하기에 “그러지 마시고, 가만히 있어도 죽으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나로 인하여 도움 받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늙어죽을 때까지 죽지 마세요. 나로 인하여, 이 허접한 나지만, 내가 보기에 내가 마음에 안 들지만, 이것이라도 ‘나는 당신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 했습니다.’ 하고 필요한 사람을 분명히 맺어주고 나타날 거예요. 그러니 그 분을 위해서 봉사한다는 마음에서 그냥 사세요.” 하고 헤어졌어요.
내 몸이 아픈 것이 아니고 주의 몸이 아픈 거고요, 내가 실패한다고 하는데 주님한테는 실패가 없고 성공입니다. 이 모든 것은 내 존재가 아니고 주께서 주님의 전쟁, 주님께서 마귀와 싸웠던 그 전쟁이 어떤 내막을 갖고 있는지를 자기 백성, 성도에게 파노라마처럼 좍 펼치는 겁니다. 펼치게 되면 “내 힘으로 이길 수 없었던 전쟁을, 내 힘으로는 이길 수 없었던 그 죄와 낭패를 주께서 단번에 십자가로 의롭게 했다는 이 승리는 주님의 몫이지 제 행함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필요한, 이 내용이 필요한 분들을 주께서 여러분들과 만나게 해주실 거예요.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여러분 살아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에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남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남에게 밉보이지 않기 위해서, 자존심 상하지 않기 위해서 버티고 버틴 그 모든 것이 다 우리를 힘들게 했고 우리를 괴롭게 했고 마귀한테 우리를 더욱 더 예속되게 하고 속박되게 했습니다. 이런 속임수와 사기에 그만 속고, 이제는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새사람의 모습으로 옛사람이 어떻다는 것을 남에게 증거 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