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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58강-사건의 거울(고전10;7-11) 150913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5. 9. 15. 08:27

2015-09-13 12:41:00 조회 : 132         
   사건의 거울 150913 이름 : 이근호 (IP:119.18.86.67)   

사건의 거울(고린도전서 1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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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5-09-14 09:11 
사건의 거울 

2015년 9월 13일                             본문 말씀: 고린도전서 10:7-11

(10:7) 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10:8)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

(10:9)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

(10:10)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10:11)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과거의 있었던 일이 반복이 되려면 다른 현실로서 기존 현실을 덮치는 방식 외에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밖에 없는 현실관 속에서 과거는 어디까지 이미 흘러가서 없어진 추억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추억거리’에 지나지 않는 그것을 지금의 현실로 나타나도록 조치해버립니다.

즉 과거가 현재가 되어버리면 이는 곧 인간들이 지니고 있는 현실관에 대한 부정과 거부를 의미합니다. “너희들은 엉터리 세상관을 지니고 있다”가 됩니다. 이 엉터리 세상관의 주범은 바로 ‘나’입니다. 현실이 계속 의미있는 이유는 나만이 나에게 최종 의미있는 내용이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과거를 교훈삼아 지금의 나를 하나님에게 징계받지 않는 존재로 계속 버티려고 간음하지 않는다든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자 하는 것은 어디까지 본인이 일방적으로 조성한 현실이지,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반복시키는 그 원판의 현실이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광야의 특이성을 살펴봐야 합니다.

출애굽하기 전에 히브리인들은 애굽인으로 애굽에서 살았습니다. 출애굽 사건으로 말미암아 모든 애굽인들의 장자는 다 죽었습니다. 하지만 히브리인들은 구별되어 애굽 땅에서 장자가 죽지 않았습니다. 그랬던 그들이 광야에 들어오면서 다 죽습니다. (두 사람 빼놓고서) 이는 ‘광야’라는 특수성을 이스라엘의 죽음을 통해서 구성하고 정립하고 창조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즉 ‘광야’는 앞으로 두고두고 반복되어야 될 사건으로 삼고자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존재라는 것은 시각적으로 늘 눈에 보이고 만져지지만 ‘사건’이란 바람과 같아서 어떤 효력만 일시적 남기고 사라집니다. 그래서 자기 존재에서 역사를 구성하는 인간의 입장에서는 과거에 문제 일이, 무슨 사건이 일어났든지 간에 지금 자기 존재만 멀쩡하면 잊혀도 상관없다고 여깁니다.

이는 곧 ‘그 과거의 광야’는 어디까지 ‘과거의 광야’이지 지금의 광야가 될 수 없다고 믿게 됩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오늘날 아무리 간음을 해도 새벽에 모텔에서 나오는 불륜의 남녀는 죽어서 나오지 않습니다. 분명히 오늘 본문에 단 ‘하루’에 2만 3000명이 죽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광야에서의 ‘사건의 시간단위’는 ‘하루’입니다.

‘하루’가 지나면 다른 사건, 즉 새벽에 만나 내리는 사건으로부터 새로운 하루와 새로운 광야가 조성되고 창조됩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하루만에 간음했다고 해서 몰살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오늘날에는 하나님께 원망한다고 해서 갑자기 불뱀들이 엉금엉금 사무실 안으로, 농장 안으로, 교회 안으로 들어닥치지 않습니다.

이는 곧 인간이 아무리 애를 쓰고 하나님께서 기다리고 계시는 그 사건 속으로 들어갈 재주가 없다는 말입니다. 고린도전서 2:9에 보면,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마음으로서 십자가 사건 속으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흔히 말해 ‘십자가’ 안다는 것은 사건 속으로 들어간 게 아니라 자기 존재에서 십자가를 하나의 대상체로 보고 있는 것 뿐입니다. 즉 지나간 과거의 추억으로 간주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존재가 여전히 더러운 우상체가 된 채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십자가 안다고 우기면서 지옥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어느 인간 존재도 구원될 없는 이유는 고린도후서 5:14에 나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즉  예수님의 죽은 사건은 계속해서 반복이 되는데 그 반복된 사건의 관점에서 이미 모든 인간은 죽은 겁니다.

따라서 인간은 자기 죽음보다 더 중요한 사건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자신의 죽음조차 십자가 사건을 소개하고 증거하기 위한 사건의 일부로 편입되는 겁니다. 광야에서 어떻게 살아남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간음했다고 하루에 2만 3000명을 죽이시는’ 바로 그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그런 조치가 광야로 하여금 광야되게 하는 사건정립의 필연적 내용입니다. 그 광야 사건 안에서 구원된 성도는 ‘거울’이 됩니다. 거울이란 모든 시간을 응축에서 현장화 시킵니다. 즉 현재로 만들어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자아가 거룩을 비쳐보니는 것이 아니라 ‘거울로서’ 등장되는 자입니다.

광야라는 반복적 사건 안에서 말입니다. 이 광야라는 사건은 십자가 사건의 전파의 일환으로 사도 바울을 통해서 계시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반복적인 광야 사건 적용은, ‘무엇이 죄며 무엇이 의냐’를 말하기 위해서 반복되는 겁니다. 즉 성도는 광야에서 간음하고 원망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쓰레기 취급받고 버려지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왜 그래야 하느냐 하면 총괄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십자가 사건 안에서 예수님은 자기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도 그 동일하게 반복되는 사건 안에서 ‘예수님의 버림받으심’을 증거하는 증인이 됩니다. 마태복음 27:46에 보면, “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예수님의 버림받으심 사건으로 인하여 그 안에 담겨 있는 ‘호세아에서 나타난 사랑의 사건’이 역시 반복적으로 적용됩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행실 나쁜 아내와 혼인하라고 지시받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자식을 셋을 낳게 되는데 그 자식들이 바로 이스라엘이라는 집단을 뜻합니다.

‘이스르엘’이라는 아들과 ‘긍휼을 받지 못할 자’라는 딸과 ‘내 백성이 아니다’는 아들을 잉태합니다.(호세아 1장) 이게 광야의 효과입니다. 구원받았다고 자부하는 그들을 제대로 ‘쓰레기’로 드러나게 하십니다. 개인구원도 없는 전체 구원도 없습니다. 오직 ‘없는 자’를 구원하십니다. 십자가 사건으로만 새롭게 사건의 다발로 구체화된 그들에게만 구원이 생깁니다.

십자가 사건으로 말미암아 뭘해도 죄가 되어 지옥가야만하고, 뭘해도 의도 전환되어 천국가야만 하는 두 종류의 민족으로 분류됩니다. 바로 이 분류작업을 위해 여전히 세상은 두 현실관의 다툼이 반복됩니다. 다 복음 사건 때문에 유발된 사태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속에서 날마다 죄와 의를 가름하는 십자가 사건만 터져 나오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5-09-15 06:49 
56강-고전 10장 7-11(사건의 거울)150913-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0장 7-11절입니다. 신약성경 274페이지입니다.



“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성경 본문에 나와 있는 이 세계는 우리가 들어가고 싶어도 못 들어가는 세계입니다. 왜냐하면 간음하다 하루에 2만 3천명이 죽은 그런 것이 드러나는 다른 세계거든요. 간음한다고 죽지를 않습니다. 어젯밤에도 우리나라에 있는 모텔에서 간음이 많이 일어났을 겁니다. 아침에 다 모텔에서 죽어나오지를 않았습니다. 그리고 원망한다고 죽지를 않습니다. 특수한 세계에요. 간음한다고 죽고 원망한다고 죽는 세계는 비현실적인 세계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이 세계를 찾고자 해도 우리 힘으로는 이 세계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간음한다고 죽고 원망한다고 죽는 그런 세계, 우리 능으로, 우리 힘으로 이 세계를 구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세계는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사건으로 제공된 특수한 현실이고 세계입니다. 그러면 우리하고 별로 상관없지 않은가? 이 세계는 우리하고는 별로 상관이 없는 세계인데 문제는 이 세계에 들어오지 아니하면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다는 것이 문제가 돼요. 어차피 죽으면 인간은 주님 앞에,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계시를 우리에게 준 것은 죽을 때 만날 하나님을 이 계시 안에서, 주어진 이 주어진 특수한 현실 안에서 미리 당겨서 만나야 된다는 거예요. 진짜 하나님을. 그러면 그 하나님의 현실에 들어가려면 뭘 포기해야 되느냐 하면, 우리가 지금 내 현실, 내 중심의 현실이라는 그것이 잘못된 현실이고 엉터리라는 것을, 우리가 만들어낸 현실이라는 것을 우리가 인식을 해줘야 되거든요. 그래서 이 고린도전서 10장에 나오는 이 현실만이 참된 현실이고 다른 것은 참된 현실이 아닌 겁니다.



그러면 이 세계에 들어가지 않으면 진짜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다고 언급을 했는데 그 이유가 있습니다.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그러면 죽은 자만 계산하지 마시고요, 누가 죽이는가? 누가 나를 죽이는가, 그 죽이는 분을 만나는 것이 관건이에요. “간음했다고 하루에 2만 3천명을 그냥 죽이시는 당신은 대체 누구시라는 말입니까?” 그게 더 중요한 문제거든요. 그분을 만나려면 그분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다른 현실이 있어요. 그런데 그 현실은 이게 사건으로만 우리에게 덮쳐오는 겁니다. 주어진 사건 속에서만 그 현실이 있어요.



만약에 우리가 불신자라면 고린도전서 10장의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면 ‘에이, 그건 옛날이야기잖아.’ 그러고 그냥 맙니다. “옛날에 그런 일이 있었단다. 이스라엘이 광야를 통과할 때 그들이 하나님 버리고 간음하다가 2만 3천명이 죽었대.” “아, 옛날에 그런 일이 있었구나.”라고 돼버려요.



그러나 사도바울은 그 옛날이야기를 성경에다 이렇게 기록한 이유가 뭡니까? 그 옛날이라는 것이 계속해서 지금도 반복이 된다는 겁니다. 반복이 된다고 하니 불신자 입장에서는 뭐냐? ‘반복되면 간음한번 해 볼까? 간음하고 나서 죽는지를 한 번 시험해 봐?’ 이렇게 나온 거예요.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간음해도 안 죽어요. 본문에 보면 원망하다가 뱀에게 물린다고 했는데 하나님에게 다 같이 원망해 볼까요? 뱀 수천마리가 2층으로 기어오르는 것을 목격을 해야 됩니까? 그런 일이 일어나겠어요? 턱도 없는 이야기잖아요.



그러면 이것은 거짓말이잖아요. 하나님께 원망하다가 뱀에 물려 죽었다는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반복을 하는 이유는 그 사건이 반복될 경우에만 불 뱀 보내시고 2만3천명 죽이신 그 하나님을 죽기 전에 당겨서 만날 수가 있다는 것을 언급하시는 거예요. 이러한 모든 것이 하나의 사건이 된다는, 그것이 지금도 반복이 된다는 그 증거가 어디에 있느냐? 그것이 11절에 나옵니다. “저희의 당한 일이 거울이 되어.” 거울이 된다는 거지요. 거울은 모든 것을 현재로 만들어버립니다.



거울을 보는 순간 과거도 미래도 없고 현재 보이는 것만 거울에 투명하게 보이잖아요. 보통 사람들은 내가 거울을 본다고 이야기하잖아요.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내가 거울을 보게 되면 내 모습만 나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시는 뭐냐? ‘거울을 보는 나’가 아니라 거울로서의 나, 거울 자체가 되는 나로 바꿔줌으로서 드디어 너는 계시 속에 편입되어 계시 속에서, 낯선 현실 속에서 움직이는 역할을 맡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겁니다. 그럴 경우에 간음했다고 2만 3천명을 죽인 그 하나님과 대면하게 되고 원망했다고 불 뱀을 보내시는 그 하나님과 죽기 전에 미리 대면이 가능한 겁니다.



그렇게 하나님과의 만남, 하나님과의 사귐이 가능해지면서 뭐가 바뀌는가? 내가 하나님의 말씀의 현실 속에 들어오기 전에 내 중심으로 현실을 꾸미고 그 현실에서 통하던 단어, 용어와 개념들의 의미가 달라집니다. 뭐냐 하면, 하루에 2만 3천명이 죽었다고 할 때의 그 죽음 자체가 ‘간음해도 안 죽었는데 뭐.’ 그게 아니고 이미 인간은 간음하기 전부터 하나님이 거울 속의 세계에서 볼 때 인간은 이미 죽어 있는 겁니다. 제 이야기가 아니고요, 고린도후서 5장에 보면 그 이야기가 나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4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이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진짜 현실에서 볼 때 이미 인간은 죽은 거예요. 이미 죽은 인간이기 때문에 안 죽으려고 애쓴다는 것은 다 착각에 불과하고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네가 죽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거예요. 네 죽음보다 더 중요한 것은 너를 죽은 자로 확정짓고 규정시킨 십자가 사건이 사실은 너보다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따라서 너는 네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십자가 지신 분을 증거하고 증명해야 될 그런 연관성이 있다면 비로소 너는 하나님 보시기에 의미 있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동안 우리의 의미는 뭐냐 하면, ‘나는 살아 있다. 더 살아야지. 나는 살아 있다. 더 살아야지. 오늘도 살았구나. 내일도 살아야지.’ 자기 사는 것이 의미의 중심센터였어요. 어떻게 하면 사는가? ‘아하, 오늘 성경 고린도전서 10장에 보니까 간음하다가 죽었대. 간음하지 말아야지. 원망하다가 뱀 물려서 죽었대. 하나님이 무서운 분이구나. 원망하지 말아야지.’ 그렇게 이해한다면 결국 그 노림수가 뭐예요? ‘간음 안 해서 살아야지. 원망 안 해서 더 살아야지.’ 이렇게 돼버리면 그게 지옥 갈 사람들의 해석이에요.



놀라운 사실은 그 지옥 갈 해석이 교회사에 등장하는 모든 본문해석의 전부입니다. 성경해석 자체가 ‘나 지옥 갑니다.’ 하고 그걸 떠벌리는 해석만 주석에 나와 있어요. “옛날에 이렇게 망했습니다. 그것이 경계가 되어서, 그것이 오늘날 우리의 거울이 되어서, 그 말씀을 경계로 삼아서 우리는 원망하지 말고 간음하지 맙시다.” 이것은 누가 들어도 ‘그래, 간음 안해야 살아. 원망 안해야 살아.’라는 자기의 본색이 유감없이 발휘돼요. 내가 누군지를 몰랐는데 고린도전서 오늘 본문을 읽는 순간, ‘그래, 나는 간음 안 해서 기어이 살아남아야지. 심지어 하나님 앞에서도 살아남아야지.’라는 자기의 원래 잠재되어 있던, 잠복되어 있던 나 밖에 모르는 본색이 툭 튀어나와버렸어요.



나는 이 순간에 진짜 말씀에 박수치고 싶습니다. 말씀을 보는 순간 ‘나는 이걸 목적으로 살아갑니다.’라는 것을 감추지 못하고 그만 툭 튀어나와 버렸어요. 그것은 낯선 세계 속의 인간이 아니고 주님 바깥에 있는, 주님에게 거부당한 자들의 공통점입니다. 제가 아까 그런 이야기를 했지요. 광야라는 이것이 하나의 우리 현실에는 없는 현실이에요. 없는 현실인데 하나님께서 이것을 반복을 시킨다는 말은 뭐냐? 이것을 사건 화시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은 것은 십자가사건이 되거든요.



주님께서는 그 사건을 계속해서 반복을 해버려요. 사건이 쳐들어와서 반복을 한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현재 너라고 하는 그 자아라는 것, 너라는 몸, 하나의 덩어리가 존재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존재로 있는 것이 아니고 사건의 다발로 자아가 있는 거예요. 하나의 예를 들면, 본문 8절에 보면,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여기서 ‘하루’에 2만 3천명이 죽었지요, 하루에. ‘하루’는 시간의 단위입니다. 광야에서는 하루라는 시간단위로 쪼갰어요. ‘간음했다’는 이것은 원인이 되거든요. 그 다음에 ‘시험하다가’ 이게 원인이 되는 겁니다. ‘시험하다가’ 그 다음에 ‘원망하다가’ 마지막에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당했다.’ 이게 그 사건의 결과입니다.



그러니까 이 광야라는 이것이 우리 현실세계에서는 없어요. 없는 세계인데 이 옛날에 있던 광야가 사도에 의하면 이것이 하나의 사건이 돼요. 옛날 지나간 역사가 아니고 하나의 사건이 되어서, 지금도 우리에게 거울이 되어서 반복시키는데 그냥 반복시키는 것이 아니고 원인과 결과를 한꺼번에 묶어서 우리에게 던져버린다는 그 말이지요. 한꺼번에 하나의 사건이.



그러니까 ‘간음하는 것은 우리 몫이고 멸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다.’ 그렇게 보지 마세요. 간음하는 것도 주께서 하게 하시는 사건에 휘말려야 이게 간음이 돼요. 그래서 오늘 본문은 결론적으로 “간음합시다.”가 되는 겁니다. 간음하시고, 원망합시다. 그래야 그 내가 생각하는 나라는 것은 애초부터 없었다는 것을, 내가 이미 죽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사후적으로 파악이 되는 겁니다. 지금 내가 하는 이야기가 무슨 말인지, 여러분도 무슨 말인지를 모르겠지요? 그래서 이걸 지금 설명해 드리고자 하는 거예요.



이걸 설명하려면 서론적으로 좀 많은 이야기가 필요한데 여러분이 그걸 견뎌주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왔잖아요. 애굽에서 나올 때 그냥 나온 것이 아니에요. “안녕히 계십시오.” “예, 잘 가시고요.” 이렇게 좋은 인사를 하면서 나온 것이 아니고 그들이 죽었어요. 애굽의 장자들이 죽었다는 그 말이지요. 그 말이 뭐냐 하면, 하나님 앞에서 애굽이 쓰레기에요. 그런데 거기서 나온 이스라엘은 ‘저쪽은 쓰레기고 우리는 백성’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애굽은 애굽에서 버린 쓰레기고 이쪽 이스라엘은 광야에 와서 버려질 쓰레기입니다.



쓰레기가 어떤 오해를 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릴 구원한다는 오해를 하게 된 거예요. 여러분이 컴퓨터 앞에 있으면 휴지통이 보일 거예요. 컴퓨터를 모르는 사람은 컴퓨터 옆에 휴지통을 놓아두었나, 하겠지만 그게 아니고 컴퓨터 안에, 바탕화면에 휴지통이라는 것이 있어요. 그 휴지통은 뭐냐? 컴퓨터의 화면 안에만 들어 있다는 말이지요. 광야 안에 들어가야 우리가 쓰레기인 것을 알아요. 그래서 오늘 본문은 뭐냐? “쓰레기 아니라고? 쓰레기 아니면 구원을 못 받는데? 쓰레기가 되었다고? 그러면 당신은 구원받았어요.” 그 이야기를 지금 사도바울이 하고 있는 거예요. 제발 본인이 쓰레기인 것을 알라는 말이지요.



쓰레기가 뭘 더 살아야 해요? 쓰레기인데. 쓰레기의 기능은 뭐다? 버려지는 겁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쓰레기인줄 모르는가? 다른 엉뚱한 현실을 품고 사니 그런 거지요. 꿈을 품고 사는 젊은이가 아름답다고? 뭐, 꽃보다 아름답다고? 아이고 참! 꽃보다 아름다운 것은 가수가 이야기한 것이고,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한 것은 운동권 가수가 이야기한 것이고 우리는 우리가 쓰레기인줄을 모르지요. 모르는 것은 사건 속에 안 들어가서 그래요. 다시 말해서 기적 속에, 언약이 유발하는 기적 속에 안 들어가서 그래요. 하여튼 눈만 뜨면 ‘살아야지, 살아야지.’ 그것밖에 몰라요. 쓰레기는 그 무게가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쓰레기 인생은 삶이 가벼워요. 존재가 그렇게 가벼운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깃털 같아요. 훅 불면 날라 갈 것 같아요.


스페인에 순례길이 있습니다. 산티아고에서 출발하는 그 순례길이 약 820킬로미터쯤 되는데요, 그게 순교했다는 야고보의 무덤을 찾아가는 순례길이에요. 전 세계에서 많이 와요. 옛날 10세기경부터 사람들이 많이 찾습니다. 원래 올레길이 유럽에서부터 시작됐어요. 게스트하우스도 거기서 나옵니다. 순례 객들에게 음식도 팔고 숙소를 제공하는 업소들이 생겨났어요. 순례 길의 코스에는 피레네산맥을 넘는 것도 있는데 그 많은 순례 객에게 “왜 당신은 순례를 합니까?”라고 물으면 “나의 자아를 찾기 위해서 합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뭐냐 하면, 그 취지가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기존의 모든 일상으로부터 벗어나야 돼요. 천주교도 부흥회 비슷한 것이 있어요. 소위 불교의 템플스테이 비슷한 것이 천주교에 있다는 말이지요. 일정기간동안에 기존의 자기 삶에서 벗어나서 한적하고 정적인 삶, 참선의 삶을 사는 거예요. 일상에서 벗어나게 되면 기존의 모든 것의 얽매였던 것들에서 다 끊어질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정숙의 생활을 하게 되면 성숙이 돼요. 정숙의 성숙이 된다고요. 정숙이 성숙이 되어서 나오는 것이 뭐냐? 깨달음이 생기고 그 깨달음을 가지고 다시 귀환하는 것, 이게 인생이라는 겁니다.



천주교에서는 사사로운 정을 피한다고 해서 ‘피정’이라고 합니다. 성당 다니는 사람은 다 알아요. 그게 바로 ‘내가 지옥 갈 인간’이라고 표내고 티내는 겁니다. 순례길이요? 쓰레기가 무슨 순례길이 필요합니까? 쓰레기가 성숙할 것이 뭐가 있어요? 쓰레기는 성숙이 없어요. 빠짝 마른 뼈가 무슨 성숙이 있습니까? 정숙이고 성숙이고 순자고, 그런 것이 없어요. 전부 다 존재입니다, 존재, 내 존재, 나의 존재.



자기존재로부터 출발하니까 예수님도 존재가 되고, 삼위일체도 존재가 되고, 하나님도 존재가 되고, 전부 다 그 용어가 나의 존재를 엿가락 늘이듯이 늘여서 ‘나 여기 존재한다.’는 존재개념을 상대방에게 그대로 집어넣어서 ‘신이시여, 존재하시지요? 삼위일체여, 존재하지요? 예수여, 거기 계시지요? 존재하지요?’ 전부 다 자기가 존재한다는 그 존재의 개념을 동일하게 적용시켜서 존재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 존재가 십자가를 믿으면 그것은 이단 돼요. 그것은 우상숭배입니다. 십자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존재가 되면 반복이 안돼요. 역사 속에 묻혀 날아가 버립니다. 십자가는 반복이 돼야 돼요. 사건이 돼야 돼요, 사건이. 사건은 바람같이 왔다가 바람같이 날라 가버립니다. 소유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히브리인들을 애굽에서 같이 죽이지 않습니까? 그것은 애굽은 땅이고요, 이스라엘이 온 것은 땅이 아니고 광야기 때문에 그래요. 광야는 특수현실입니다. 광야는 하나님의 언약에 해당되는 사람에게만 경험되는 독특한 경험, 사건적 경험만 부여합니다.



광야에서는 인간의 존재는 뭘 로 해체되는가? 전부 다 하루치의 사건의 다발로 다 잘라집니다. 만나로 다 잘려요. 만나로 다 잘라버려요. “하루만 먹고 살아라.” 하루하루가 너를 살리기 위한 일이 아니고 너는 여기서 광야가 무엇인가, 광야를 생산하는 하나의 재료로서 너는 활용될 뿐입니다. 광야 자체가 하나의 사건이 되고 오늘날 우리 같으면 십자가사건, 십자가사건을 계속 반복시키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존재인 나를, 존재기 때문에 살려고 하는 존재인 나를 잘라서 그걸 뭘 로 바꾸는가? 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십자가라는 것을 알려주는 사건 속에 우리가 사건의 다발로서 같이 편입이 되는 겁니다.



그 안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뭐냐? 이미 우리는 존재로서는 죽었다는 거예요. 다만 살려주는 사건 안에서만 반복적인 살려냄을 통해서 우리는 살았다는 겁니다. “목사님, 왜 그래야 됩니까?”라고 저에게 묻는다면 예수님의 일생의 존재의 반복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마태복음 27장 4절에 보면, 유명한 말씀이 나오지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시는 말씀이 뭐냐 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게 버림받음이에요.



여러분은 죽음을 뭐로 생각합니까? 죽음을 사라지는 것이라고 생각하지요. 오해입니다. 죽음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존재가 사라지는 것이 죽음이 아니에요. 제가 알려 드리겠습니다. 죽음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버림받는 거예요. 버림받는 사건이 죽음 사건이에요. 그 근거는 바로 마지막 아담, 마지막 우리의 대표자가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았기에 그 사건이 반복이 되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임이 확인이 되고 증명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은 예수님 존재의 자기증명이에요. 예수님이 어떤 일을 했다는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가 들어갈 수 없는 세계에 예수님이 집어넣은 겁니다. 그냥 들어가지 못하고 우리를 완전히 쪼개버려요. 너보다 더 중요한 것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쪼개서 사건화 시키는데 쪼갠다는 말은 네가 네 덩치로는 못 들어간다는 그 말이거든요.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따지지요. 자, 지금까지 한 것은 잊었다 치고 다시 한 번 해 봅시다. 오늘 본문을 어떤 사람이 봤다고 합시다. 성경 처음 본 사람이 오늘 본문을 딱 보면서 하는 말이 ‘하나님에게 원망하다가 불 뱀한테 물려 죽었다.’ 제일 먼저 느끼는 감정이 뭐냐? “너무 심한 것 아닙니까?” ‘간음하다가 2만 3천명이 죽었다.’ 이 사람들이 서서히 늙어죽은 것이 아니거든요. 하루에 다 죽여요. 하루에 2만 3천명을 죽인 거예요.



늙어서 죽은 것이 아니고 하루에 죽었다는 말은 광야의 사건에 의미가 있다는 뜻이에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강한 의지를 가지고 실시한 사건이라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이것은 너무 심한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되는 거예요. 우리가 이 본문을 보면서, 우리 교회 교인들이야 그런 생각 안하겠습니다만, 이 본문을 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도대체 오늘 본문이 무슨 뜻입니까?” 그렇게 돼야 돼요.



그런데 이 본문을 이야기하면 다른 교인들은 다 알아요. ‘옛날에 나쁜 짓 하다가 벌 받았으니까 나쁜 짓 안하면 벌 안 받고 오래 산다.’ 그걸로 해석 다 되거든요. 그런데 그게 엉터리라는 말이지요. 간음하다가 하루에 2만 3천명 죽고 하나님께 원망하다가 불 뱀이 나와서 죽었다는 그것이 당연하게, ‘야, 역시 우리 아버지답네.’라고 당연하게 느껴질 정도가 돼야 하나님과 한 패 먹었다고 할 수가 있는 겁니다. ‘너무 심한 것 아니야?’ 이렇게 되면 그 자체가 원망이 되거든요.



성경이 얼마나 친절한지 왜 이것이 낯설어 보이는지 그 이유까지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그것을 지난번에 했는데 고린도전서 2장에 보면 나와 있어요. 고린도전서 2장 9절에 십자가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눈으로 보지 못합니다. “귀로도 듣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합니다.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한다. 그렇다면 보통 사람들이 천국 가려고, 하나님 만나려고 하는 모든 시도는 출발점이 어디입니까? 바로 사람의 마음입니다.



아까 산티아고 순례 길을 사람들이 왜 가는 겁니까? 내 마음을 낮추기 위해서, 내가 나를 찾아가기 위해서 40일 숙박 하면서 간다고 했지요? 그게 내가 하는 내 마음 공략이에요. 그거 해도 소용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어떤 기능을 하느냐 하면, 천국 못 가게 만드는 기능을 하는 거예요. “천국 못 가게 하는 기능을 한다고 당신은 어떻게 자부하는가?” 십자가사건을 이해 못하게 하는 기능이 우리가 평소에 내 마음에 기대를 거는 자체가 십자가를 가로막는 기능이 되는 겁니다.



우리는 마음에 모든 것을 올인 하거든요. 마음을 건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지극하게, 순수하게, 솔직하게, 그리고 마음 낮춰서 순진하게, 정성을 다 하여, 열심을 다하여 신에게 경배하고 기도하고, 헌금하고, 봉사하고, 예배출석하고, 성경공부하고, 우리 마음으로 할 수 있는 진정성 있는 것은 다 해요. 그 진정성 전부가 우리를 우상숭배자로 만드는 주님의 의도적인 기능이라니까요?



그리스로마 신화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곡물의 여신이 있어요. 데메테르라는 곡물의 여신이 있는데 그 여신에게 예쁜 딸이 있습니다. 지금 신화 이야기입니다. 그 딸 이름이 페르세포네인데 저승의 신인 하데스가 있어요. 제가 그리스로마신화를 계속 읽고 있지만 이름이 어려워서 수십 년 동안 읽고 있는데도 짜증이 나요. 이름이 왜 그리 복잡한지. 하데스라는 저승신이 예쁜 페르세포네를 꾀어서 납치를 해서 저승, 지옥으로 데려갔습니다.



그런데 이 페르세포네의 아버지가 신중의 신인 제우스신입니다. 제우스신이 저승 신을 보고 “내 딸 안내놔?” 그러니까 저승신이 “다시 살려내겠습니다.” 해서 돌아왔는데 문제는 먹지 말라는 저승의 석류 씨를 네 개를 먹었어요. 네 개를 먹은 상태에서 다시 살아온 겁니다. 데메테르는 곡물의 여신이거든요. 풍요하게 곡식이 여물게 하는 여신인데 그 때부터 겨울 4개월 동안, 석류 씨를 네 개를 먹었으니까 4개월 동안에는 대지가 너무 차가워서 곡물을 내지 못하고 따뜻한 봄만 되면 온 씨앗이 땅에서 부활이 되어서 풍요로운 결실을 맺는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가나안종교, 바알종교가 전파되어서 그런 거예요. 부활의 종교입니다.



이시스, 오시리스라는 이집트의 신도 부활의 종교에요. ‘지상의 눈에 보이는 삶이 다가 아니다. 죽고 난 뒤에는 천국이 있다. 그 천국 가려면 신의 아들인 바로의 법을 따르면 부활해서 갈 수 있다. 갈 때 영혼이 빠져나오기 때문에 그 영혼을 담을 그릇은 네가 준비해라.’ 그래서 미이라 만들어서, 물론 귀족에게나 해당되지만 미이라를 만들어서 영혼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을 만들어서 가는 거예요.



이게 뭐냐? 고린도전서 1장에 나오는 대로, 마음으로도 내가 나라는 존재를 죽음이라는 것을 넘어서서 죽음 이후의 세계까지 기어이 집어넣고 싶은 그 우리의 마음을 극단적으로, 절대적으로, 궁극적으로 보여주는 최종 것이 그거예요. ‘나는 내가 구원하리라. 내가 어떤 수를 써서라도, 예수를 믿든지, 십자가를 믿든지, 언약을 믿든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는 나를 기어이 건져서 나를 불멸의 존재로 만들고 말리라.’ 이게 인간의 마음이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기독교지요. 불교고 기독교고 종교에요. 교회가 아직도 이 짓 하고 있어요. 2천년동안 이 짓하고 있어요. 로마신화 짓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이집트 종교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쓰레기입니다. 부활 같은 소리하고 있네. 무슨 부활될 가치가 있어요? 부활될 가치 없어요. 천국 갈 가치 없습니다. 쓰레기에요.



유월절 어린양 죽을 때 이미 죽은 자입니다. 광야에서는 왜 네가 죽어야 되는가를, 네가 왜 쓰레기인가를 이제는 보여주는 배경적인 상황이 주어지는데 그걸 광야라 하고 그 광야를 후대에 반복시키기 위해서 그 다음에 나오는 모든 성도들은 거울이 되어야 돼요. 거울은 과거나 미래가 없어요. 거울에 비친 모습은 오직 현재로만 집중이 되고 응축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걸어 다니는 하나님의 계시가 되게 하는 겁니다. 걸어 다니는 광야가 되게 하는 거예요. “나 니들이 모르는 하나님 알았지~롱!” 자랑하세요. 그러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 말고 네가 믿는 하나님은 뭔데?” 하면우리가, 내가 간음해서 이미 죽었단다.” 그걸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그것도 하루 만에 죽었단다.” 이걸 자랑해야 되고 “내가 취직 못하고 생활이 어렵다고 해서 원망하고 나니까 아침 아홉시 반인가, 불 뱀이 스물 댓 마리가 와서 나를 물어 죽였단다.” 그걸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자랑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매일 같이 나는 불 뱀에 물린단다.” 그걸 자랑하세요.



그러면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합니까? “미쳤~어! 내가 미쳤~어!” 완전히 미친 거예요. “불 뱀이 어디 있는데? 사진 찍어서 가져와라.” “사진 찍어도 안 찍힌다.” 왜 존재, 피사체가 있을 경우에만 촬영의 대상이 됩니다. 이것은 사건이거든요. 사건이 나의 존재보다 우월하거든요. 내가 이미 죽었다는 그것이 그렇게 기쁘고, 내가 이미 간음했다는 사실이 그렇게 기쁘고, 내가 매일같이 하나님께 원망한다는 사실이 구원받은 기쁨으로, 희열로 터져 나와야 돼요. 그게 성도에요. 기적은 뭐냐 하면, 쓰레기가 아닌데 내가 쓰레기로 파악이 되었다는 사실, 이게 기적입니다. 내가 쓰레기란 사실을 왜 진작 몰랐지요?



컴퓨터에 휴지통이 그렇게 많은데. 휴지통 비우시겠습니까, 하면 휴지통 비울 때 나도 같이 비워야 되는데 그것만 비웠어요. 주님께서는 매일 같이 휴지통 비우고, 다음날 되면 또 비우고, 매일같이 비웁니다. 왜? 내일이 되면 사건이 안 되기 때문에, 존재로 변하기 때문에. “나는 3일전에 은혜 받았다.” 이것은 이미 존재덩어리에요. 그러나 그 존재를 사건의 다발로 잘라서 다시 합체해 보세요. 그게 지금의 자아입니다. 3년 전에 구원받았다고 자랑 질 하는 그것이 하나님께 원망이 되고 그게 바로 우상이에요. 왜? 사건으로 출발해야 될 세계를 벌써 은혜 받았다고 존재로 고형화, 존재로 굳혀서 “3년 전에 은혜 받았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사건으로 된 것이 어느새 존재가 되고 말았어요.



스왈츠제네거가 나오는 영화 <터미네이터 3>에 보면 액체인간이 나와요. 총을 쏘니 구멍이 나면서 부서졌어요. 휙 돌아서서 보니 액체인간이 되어서 슬그머니 뭉쳐져서 다시 원상 복구되거든요. 우리의 주체가 액체주체에요. 주님 앞에 그렇게도 쓰레기로 당해놓고도 벌써 우리는 주님 앞에 “제 존재가 어때요? 제 믿음 좋지요?”라고 나서는 괴물이 됩니다. 주님께서, 스왈츠제네거 하듯이 돌아서서 또 “탕!” 하고 쏴버립니다. “제발 사건으로 남아 줘. 사건으로 변해 줘.” 너라는 인생은 너의 생각으로 의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광야에 있었던 모든 사건들로 하여금 너의 남은 인생이 반복해서 채워지는 거예요.



호세아 1장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선지서 이야기하면 여러분이 골치 아프니까 알기 쉽게 이야기하겠습니다. 호세아 선지자가 옛날에 살았습니다. 이 호세아 선지자는 아주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착한 사람인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셨습니다. “너는 가서 이 세상에서 제일 나쁜 여자와 결혼하라.” 착한 호세아 목사님이 이 세상에서 제일 나쁜 여자와 혼인하라고 하나님께서 지시를 내렸습니다. 호세아목사님은 잠시 주춤하다가……, 주춤할 수밖에 없지요. 지도 남자인데. 잠시 주춤하다가 주께서 시키는 대로 이 세상에서 제일 나쁜 여자와 혼인을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바람 많이 피우는 여자 나오시오.” 광고내서 결혼했어요.



결혼하고 났는데 그 여자 성질이 어디 갑니까? 결혼 하자마자 다시 그리운 옛날 남자하고 연애질을 해서 임신을 했어요. 그런 식으로 애를 셋이나 낳았습니다. 아들, 딸, 아들, 이렇게 셋을 낳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박수를 치면서 “호세아야! 참 잘했어.” 하고 박수를 치면서 애들 이름을 붙이는데 첫째인 아들의 이름은 ‘이스르엘’이고 그 다음 둘째로 낳은 딸의 이름을 붙이는데 그 이름이 뭐냐? ‘로루하마’라고 해서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한다.” 막내아들의 이름이 나와요. ‘로암미’라고 해서 “내 백성이 아니다.” 그 못된 여자 이름이 고멜이거든요.



호세아 선지자 지옥 갑니까? 왜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에, 하필이면 그 선지자 가정에 제일 행실이 더러운 여자로 하여금 자식 낳게 하셨습니까? 그게 바로 “내 긍휼을 입지 못하는 자.” 그게 이스라엘이고 “내 백성 아니다.”라는 것이 이스라엘이에요.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너희들은 나에게 버림받아도 마땅하다. 지옥가도 군말하지 말라.” 라는 겁니다. 이스라엘에 언약이 있기 때문에 온 인류를 대변해주고 하나님 앞에 독대하는, 숨어 있는 하나님과 유일하게 만날 수 있는 민족이거든요. 그 민족을 통해서 하나님은 자기의 본 의지와 본 뜻을 다른 민족은 제쳐두고 이스라엘에게만 전달했는데 그 뜻이 뭐냐? “내 백성이 아니다. 너희는 자비를 받지 못한다.”라는 식으로 일괄적으로, 모든 인류에 대해서 아담의 후손들에게 평을 내린 겁니다.



그리고 값을 주고 그 여자를 데려오지요. 제가 아까 고린도전서 1장 이야기를 했잖아요. 마음으로도 알지 못해요. 우리는 마음으로도 알지 못한다는 그 말에서 스톱이 되고 말았어요. 더 이상 해석을 못하고. 마음으로도 알지 못한다는 그 말, 거기서 스톱하면 안돼요. 호세아로 다시 의미를 추가해야 됩니다. “아하, 나는 긍휼함을 입지 못하는구나. 나는 백성이 아니구나.” 이것까지 더 연장이 돼야 돼요.



그렇다면 우리 입에서 구원, 천국, 영생, 그 입을 닫아야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취지를 모르는, 전혀 하나님을 모르는 인간에게서 나오는 하나의 자기욕망, 존재의 욕망에 불과한 겁니다. 진짜 말씀을 본다면 우리에게서 구원, 영생, 이런 말은 쑥 들어가야 됩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백성이면서도 긍휼을 받지 못하고 백성이 아니라는 그 말은 버림받은 거예요. 그런데 그 버림받음이 놀랍게도, 그 버림받음이 어디로 이어지는가 하면 장차 오실 메시아, 예수님한테 이어졌습니다.



십자가에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되어 있어요. 그렇다면 예수님, 하나님의 독생자가 아버지에게 버림을 받았다면 그 버림받은 사건, 그 십자가사건이 나중에 사흘 만에 부활로 이어진다는 말이지요. 다시 살아나요. 그러면 우리는 십자가를 내가 믿으면 안돼요. 내 존재가 믿는 십자가는 가짜입니다. 그것은 자기 잘난 체밖에 안되고 십자가사건 안에 들어가야 돼요. 십자가사건 안에 들어가 버리면 마땅히 죽은 자에게, 호세아 1장에서 보면 값을 주고 사거든요, 그 십자가 대신 죽으시는 그것이 지불하는 카드 값이에요.



마땅히 죽어야 되는데, 마땅히 내 백성이 아닌데 누가 내 대신 버림받음으로 값을 치르고 그 다음부터 백성 아닌 자가 백성이 되고 긍휼을 안 받아야 될 자가 긍휼을 입는 사건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게 뭐냐? 십자가가 아닙니다. 십자가사건이에요. “목사님, 십자가하고 십자가사건하고 차이점이 뭡니까?” 십자가라는 그 역사적인 사건을 우리는 기억만 하면 그만이에요. ‘옛날에 그런 일이 있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보면, 사도바울이 십자가사건이 있은 지 20년이 지났는데도 하는 말이 뭐냐?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이렇게 했다고요.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이렇게 하면서 하는 말이 “왜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 하느냐?” 이렇게 했다는 말이지요. 그 말은 뭐냐? 십자가 안에 뭐가 들어있는가?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의가 들어 있어요. 하나님의 의. 하나님이 얼마나 까탈스러운데요? 천국에는 이만큼의 죄만 있는 사람도 못 들어가요. 오직 완벽한 의, 완벽하게 거룩한 사람만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의가 ‘십자가’가 아니고 ‘십자가사건’안에 휘말려 들어간 사람에게만 주어진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휘말려 들어간 사람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아느냐 하면, 나의 존재로 행하는 모든 것은 쓰레기라는 사실을 기쁘고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이미 십자가사건 안에 들어와서 십자가사건의 구체화로서 그 사람존재가 그렇게 되는 겁니다. 사건의 울렁거림, 사건의 이동, 액체인간.



날마다 총으로 쏴도, 말씀과 십계명으로 정죄를 해도 그것이 어느새 뒤돌아보면 의로 달라져 있어요. 매일같이 간음하고 매일같이 원망하는데 뒤돌아보면 어느새 하나님의 의로 달라져 있습니다. 왜? 본인이 잘해서? 본인이 회개해서? 아닙니다. 그 안에 본인을 지배하고 있는 주님이 십자가사건을 가지고 반복시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설교 내용은 한 마디로 해서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로 들릴 거예요. 제가 어떤 때에 강의를 하니까 두 시간 강의 후에 20분 동안 질문 받는데 그 중에 인문학교수가 앉아 있었어요. 박사인지는 모르겠지만. 시민강좌에서 인문학 강의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시간 계산을 잘못해서 내 시간에 들어와서 강의를 듣게 된 거예요. 다 듣고 나서 하는 말이 “염세적으로 사는 분들도 있지요. 허무주의로 사는 사람들도 있는 거지요.” 하면서 틱틱대는 거예요.



그래서 이야기했어요. “허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중요합니다.” 앉아 있는 사람들이 자기 강의도 같이 듣는 학생들 입장이니까 물들지 말라고 가하는 압력이 뭐냐 하면, “산책하면서 아름다운 시를 외우면 그것이 행복입니다.” 그런 소리 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모르는 거예요.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를 몰라요. 그것은 이방인은 몰라요. 대표적으로 이스라엘만, 진짜 이사야가 대표적으로 만났을 때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그야말로 어떤 인간이 어떻게 행해도 그 무서움 앞에 우리는 버틸 수가 없습니다. 그 무서움, 우리가 경험하지 않은 죽음을 예수님이 단독으로 아버지 앞에서 경험했습니다.



이미 죽음을 경험했는데 그 죽음 사건이 우리에게 오니까 멀쩡하게 잘 살면서 재벌 3세처럼 까불던 그 인간도 성령이 오니까, 십자가의 영이 오니까 내가 쓰레기인 것을 아는 거예요. 쓰레기인 것을 알면 어떻게 되는가? 사람의 모든 것이 안정이 되어 있어요. 제가 강의도 다니고 하면서 사람들을 만나보면 제일 먼저 감이 오는 것이 뭐냐? ‘저 사람은 참 안정이 되어 있다.’는 것이 감이 와요. 굉장히 안정되어 있어요. 다른 말로 하면 대가 세다고 할 수 있는데요. 대가 세기로는 우리 교회 권사님들보다 더 하겠습니까만, 굉장히 모든 것이 정서적으로 안정이 되어 있어요.



그런 사람은 정말 편해요. 쓰레기인데요 뭐. 최 쓰레기, 김 쓰레기, 박 쓰레기. 쓰레기만큼 안정된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착해보려고, 말씀대로 지켜보려고, ‘간음하다가 죽는다. 간음하지 말아야지.’ 이런 인간들은 참 힘들어요. 그런 분들은 없지만, 그런 분들 있다고 하면 또 “접니까? 저보고 하는 이야기입니까?” 이럴 텐데 그게 아니고 그런 분은 없지만, 불신자에게 있지요. 말을 떼기가 싫어요. 너무너무 불안정해가지고.



우리는 거울을 볼 필요가 없어요. 내가 거울 되면 돼요. 거울이 얼마나 안정됩니까? 배 째라고 강도가 오든 누가 오든 비추기만 하면 되니까. 우리는 나를 자랑하지 말고 내 속의 사건, 십자가사건, 간음사건, 간음하다가 2만 3천명, 민수기에는 2만 4천명으로 되어 있는데 그렇게 죽은 이야기, 그 다음에 불 뱀 나온 이야기, 배 째서 우리 안에 들어 있는 사건다발만 내 보이면 되는 겁니다. 왜? 우리는 어차피 쓰레기니까.



제발 이 세상 안정되게 살아갑시다. 만약에 안정된 존재를 굳히려고 한다면 여러분은 불안정해져요. 그런데 주께서 “네가 살고 죽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네 안에서 작렬하고 있는, ‘이미 네가 뭘 해도 의인이다.’라는 것, ‘나는 사람에게 죄 지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다.’는 그 십자가” 나는 이미 죽은 자로서 광야에 있던 사람의 역할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한 말씀 드리는 것은, 어떤 분이 그런 질문을 했어요. “개인구원입니까?” 이렇게 하는데 성경에서는 우리는 구원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없는 사람만 구원이 돼요. 있는 사람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없는 사람을 사건이 나서서 새로운 ‘너희’라는 용어에 해당되는 사람을 사건다발로 만들어 내놓고 그렇게 만든 자체가 그 사람에게는 구원으로 주어지는 겁니다. 나의 구원되지 말고 날마다 주님의 의, 주님이 구원의 다발체가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하나님의 은혜로 하루하루 살아갑니다. 아무것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무슨 일을 해도 죄가 됨에도 불구하고 그게 하늘나라에서는 의가 된다고 자랑 질을 하는 그리스도만, 십자가만 자랑하는 그런 사람 된 것을 주 앞에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