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강-고전 10장 12-13(피할 길)150920-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0장 12-13절입니다. 신약성경 274페이지입니다.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저는 이 본문만 보면 <사운드오브뮤직> 그 영화가 생각이 나요. 마리아가정이 위기에 빠졌을 때 나치독일군을 피해서 수도원에 들어갔는데 그 때 수도원의 수녀가 하는 말이 “걱정 마세요.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피할 길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시험 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슬쩍 주십니다.”라고 언급하는 대목이 있어요. 제 친구 중에는 그 영화를 열여덟 번 봤다는 사람이 있어요. 그걸 보면서 오늘 본문을 다시 생각해 봤어요. “인생의 어려움을 당하고 계십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고린도전서 10장 12, 13절의 말씀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어려움이 있을 때 주께서는 피할 길을 주시기 때문에 기도하고 기다리면 ‘아,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이처럼 날 아끼시는구나.’ 하고 깨닫게 될 것이고 여러분의 모든 문제는 해소가 될 것이고 해결 될 것입니다.”라고 그렇게들 알아왔고 그렇게들 믿고 싶어 해요. 딴 소리 하면 듣기 싫어해요.
그렇게만 믿고 싶어 하는 데 오늘 본문 12절에서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조심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조건이 있어요. 뭐냐 하면, 자빠진 자, 주보에 있는 설교 제목대로 ‘아예 넘어진 자.’ 아예 자빠진 자에게만 해당 되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인생 살면서 어려움이 있을 때 하나님이 해결 해주시겠지.’라고 생각하거든요. 하나님은 문제를 해결하시는 분이 아니고 오히려 문제를 야기 시키는 분이라는 생각을 설교 초반부터 새롭게 합시다. 없는 문제를 만들어내셔요.
“너에게 이런 상황을 왔다는 것은 네 주제파악이 안 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네 주제를 파악토록 하기 위해서, 다시 말해서 네가 선 사람인지, 아예 자빠진 사람인지를 네가 모르지? 알게 해주마.” 하고 문제를 일으킵니다. 주께서 일부러 문제를 일으켜서 우리로 하여금 어려움에 직면해서 “하나님, 문제 해결해 주세요.” 라고 문제 해결을 요청하는 간곡한 기도를 하게 되면, “네가 아직 덜 자빠졌구나. 네가 아직 주제파악이 안되는구나. 아예 넘어져 봐. 아예 자빠져봐. 그럴 필요 없잖아. 아직 너는 네가 누군지를 모르는 거야.” 라고 언급을 해주시는 겁니다. 그게 해답이에요.
우리가 우리 자신이 누군지를 몰라요. 그냥 내 식대로 살다가 어려움이 있으면 “주여, 도와주소서.” 좀 도와줘서 문제 해결되었다 싶으면 또 헤헤거리면서 까불다가 좀 어려운 일 닥치면 “주여, 도와주소서.” 이것은 구약 사사기의 반복입니다. 주님 보시기에 철이 없어도 보통 없는 게 아니에요. 철(분)만 없는 것이 아니고 비타민을 비롯한 모든 영양소가 다 없어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네가 너 자신을 알아?”라고 하는 것은 그 모델이 있어요. 내가 나를 참하게 생각하는 내가 만드는 모델은 인정 안 됩니다. 그것은 허수아비고요.
하나님 보시기에 어떤가? 주님은 거기에 집중해서 그 모델을 만드는데 온갖 기적이라는 기적은 다 투입해요. 그 기적이 뭐냐?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원치 않는 것, 이질적인 것을 제공함으로 말미암아 내가 원하는 내 인간상을 포기해버리고 지금 하나님이 원하는 인간상으로 우리를 변모시키는 그 과제를 예수님은 안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은 자기가 어디까지 아는 지 그것을 몰라요. 내가 아는 그 이상의 것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몰라요. 왜 십대, 이십대, 청소년들 보고 어른들이 철이 없다고 합니까? 왜 초등학생들은 그렇게 철이 없지요? 어른들 보기에 네가 아는 것 이상의 것이 있거든요. 왜 추석이나 명절이 되면 어른들보고 인사하라고 하지요? 차 막히고 힘 드는데 왜 어른들 찾아보라고 합니까? 어른들이 다 예견이 있어서 그래요. “네가 어려울 때 친구가 도와준다고? 네 처가 집에서 도와준다고? 아니야. 네가 평소에 명절에 인사 잘 다닌 그 친척이 널 도와주게 되어 있어. 일가친척만한 게 없어. 명절이 좋은 기회잖아. (사과 한 짝 사서) 찾아가서 인사 하면 네가 어려울 때 도와준다. 딸 시집보낼 때 부조 어디서 나오는데? 다 거기서 나온다. 한 번도 안 찾아간 인간에게는 아무것도 오지를 않아. 꼭 찾아가야 오게 되어 있어.”
이 말은 뭐냐? 사람은 홀로 사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청소년들은 꼭 자기 혼자 사는 것으로 알아요. “그 딴 것 필요 없어.” 무슨 이야기만 하면 무조건 필요 없다는 식이에요.
우리가 아는 그 이상의 것을 하나님은 깨우치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인데 그 은혜란 우리를 자빠뜨리는 은혜입니다. 우리를 자빠뜨려서 서서 있는 인간을 엎드려서 살게 만들어요. 자빠져서 살게 만드는 거예요. 이 은혜 없이는 정말 천국 못갑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엉뚱한 모델로 착각하기 때문에 그런 모델로는 안 되거든요.
요한복음 8장에서 간음한 여인이 바리새인들에게 잡혀 왔을 때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나옵니다. 요한복음 8장 11절인데요. 저는 이 말씀 들을 때 마다 가슴이 울컥해요. 지은 죄가 많아서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 여러분, 신앙생활 몇 년 했습니까? 30년, 40년, 50년, 어떤 사람은 10년, 이렇게 했는데 자기가 교회 다니면서 봉사한 것은 안 잊어버리고 왜 이 말씀은 자꾸 잊어버리는지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나도 너를 죄 있다 하지 않겠노라.”
네가 그렇게 호들갑 떨면서 쫓기듯이 살지 말라는 뜻입니다. 인생을 제발 쫓기듯이 살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그냥 미리 심판주의 가슴팍에, 예수님의 넓은 가슴팍에 부딪히세요. 부딪히고 난 뒤에 우리 머리에는 혹 뿔이 나면서 뒤로 나자빠질 때 주님께서 내려다보면서 하는 말이 “나도 너를 죄 있다 하지 않으리라.” 이런 소리를 들어버리면 인생 뭐 있어요? 한 방입니다. 이거 한 방이에요. “나는 너를 정죄하지 않으리라.” 그런데 이 말씀을 자꾸 잊어버리게 만들고 놓치게 만드는 그 이유, 요인이 있어요. 그 요인이 딴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 내부에서 온다고요.
내 내부에서 내가 나한테 쫓기는 셈이지요. 나의 자존감 때문에 내가 쫓기는 셈이고. 뭔가 내 내부에서 하나님이 원하는 모델이 아니고 다른 모델을 자꾸 구상하고 있는 중에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복음을 투입하고 복음을 집중시켜서 우리를 자빠뜨리는데 우리는 자기가 뭐가 대단하다고 자빠뜨리면 “또 나는 섰다. 선줄로 여긴다.” 하고 자기가 또 서버려요. 그렇게 서게 만드는 그 내부적인 요인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나를 통 째로 죽어서 좋은 나라, 살아서도 축복받고 죽어서도 좋은 나라 가게 하려고 그렇게 애쓰기 때문에, 이 전체로 다 가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 전체를 보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일부에 주목하고 그 일부를 축출합니다. 뽑아내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자기의’라는 것, 자기 의를 뽑아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오시고 나서 형성된 그 분위기, 예수님이 만드는 그 말씀의 구조가 뭐냐 하면, 범죄와 처벌에 관한 구조거든요. 범죄와 처벌에 관한 구조.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의라는 그 말입니다. “네가 직업이 뭔가?” 그런 것을 묻는 것이 아니고 “네가 내 말에 의하면 이러이러 해서 너는 범죄자야. 죄수야.” 그 구조로 몰아세워버려요. “이렇게 너는 죄수가 맞아.” 몰아세워버립니다. 주께서 우리를 일방적으로 죄수로, 범죄자로 몰아세우는 것은 주님이 가지고 온 준비된 것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의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이 정말 얻고자 하는, 하나님이 정말 기대하는 하나님의 의인, 죄수를 의인으로 만드는 그 작업 때문에 주께서 이 땅에 오셨거든요. 그래서 하나님이 기대하는 의인, 또는 다른 말로 하면 거룩한 자, 하나님 보시기에 거룩한 자 만드는 작업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현장에서 간음한 자라도 “나는 너를 정죄하지 아니한다.”라고 언급을 한 거예요. 심지어 그 여자를 정죄하는 바리새인들, 울퉁불퉁한 남성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그 속에 가서 주께서는 그 여자를 죄 있다고 돌로 치는 그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그 험악한 사내들 다 물리치십니다.
이거 다 지금 우리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눈에는 뭐로 보입니까? 여러분을 비아냥대고 여러분을 개 무시하고 여러분을 모멸하는 그런 사람들이 자꾸 눈에 띄지요. 공부 못했다고 질책하는 엄마, 이런 사람들, 인물 나쁘다고 면접에서 떨어뜨리는 회사의 상사들, 판사라든지 나를 잡아넣은 형사들, 그런 사람들이 보이지요? 데쓰노트, 내가 손 봐야할 28명의 명단, 그런 것을 여러분도 작성하고 있지 않습니까?
왜 그 속에 그리스도는 안 끼워 넣는 거예요? 그리스도와 그들의 차이점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지 않습니까? 교회와도 마찬가지에요. “기도 똑바로 안 해?” 그렇게 질책하는 목사나 늦게 온다고 짜증내는 장로의 눈. 기존교회들의 장로석이 왜 따로 있는 겁니까? 교인들 감시하라는 거지요. 누가 늦게 오는지. 그걸 우리는 너무 의식해요. 그 속에 주께서 계시고 주님의 노림수가 있어요. “네가 생각하는 너 말고 네가 생각 못한 너 이상의 네가 따로 있는데 그것은 네가 모르고 내가 알아.” 주님 자신이 알고 주님이 안 그 인간은 하나님 보시기에 흠이 없는 거룩의 완전체, 그 완전체로 바꿔주는 겁니다.
복음 별거 없어요. 그거예요, 복음은! 하나님이 원하는 인간 만들기, 그게 복음입니다. 따라서 내가 생각하는 나, 이것은 탈락이에요. 아까 무시라는 말이 나왔는데 미국의 어떤 분이 장난삼아 제 이름가지고 농담을 한 것 같아요. 제 이름의 발음과 유사한 영어 단어를 가지고. 이 근호, Ignore, 우리 말 뜻은 개 무시. 제 설교가 막 무시하는 설교지요. 다시 해 봅시다. 우리의 소망은 뭐냐? 내가 가진 것, 학력, 재산, 토익점수, 이런 것 다 집어넣으려 해요. 총신신학교의 어떤 교수는 말하기를 “헨델의 음악은 천국 간다.” 했어요. 세상의 문화는 천국 못갑니다. 칼빈주의 문화도 천국에 못 집어넣어요. 갈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주님께서 주목하는 것이 따로 있어요. 다른 것을 주목해요. 그런데 인간들이 자기 자신에게 기대하는 것은 따로 있어요.
그리스로마 신화에 칼립소라는 바다의 여신이 있습니다. 이 여신은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을 제시해서 결국 인간을 파멸케 하는데 이 여신이 칼립소에요. 나중에 오디세우스와 친하게 7년 동안 지냈다는 내용이 있어요. 그 칼립소라는 여신이 “너는 죽지 않고 살 수 있다.”고 사람들에게 이야기한 거예요. 인간들은 죽지 않고 산다고 하니 거기에 대해서 희망을 갖는 거예요. 희망을 갖는데 문제는 이게 불가능하다는데 있어요. 가능치가 않아요. 오늘날 꼭 교회를 보는 것 같아요.
구원이 불가능해요. 그런데 교회는 가능하다고 자꾸 사기를 칩니다. 교인들은 그게 사기인줄 알면서도 왠지 그 사기만을 듣고 싶어 해요. 둘 다 똑같아요. 항상 듣고 싶은 것이 “뭘 행하면 되겠습니까?” 이것만 듣기를 원해요. “어렵습니까? 기도하세요. 피할 길을 주십니다.” “그러면 기도만 하면 돼요?” “기도하면 피할 길이 있습니다.” 마리아가정에게 수녀가 이야기한 것처럼 “이렇게 어려워도 주님은 피할 길을 주십니다.”
지금 피할 길이 문제가 아니고 모델이 잘 못되었어요. 내가 생각하는 그 나라는 모델이 잘못되었어요. 처음부터 다른 모델을 생각한 그것이 잘못이라니까요? 자빠지면 되는데.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고 난 뒤에 사도바울을 사도로 세웠잖아요. 그렇다면 그 사도에게 무엇을 집어넣었는가 하면, 주님 자신의 말씀을 거기에 집어넣어요. 집어넣게 되면 사도바울은 그것을 그 시대에 맞게 오늘 같은 본문으로, “사람이 선줄로 생각하거든 넘어질까 조심하라.” 이런 식으로 이야기한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이 내용을 설명하려면 이것만 달랑 설명하면 안돼요. 뭘 설명해야 하는가?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그 말씀의 취지를 담아서 설명해야 돼요. 지난 수요일에 설교를 하고 났더니 어떤 분이 말하기를 “목사님은 왜 성경 본문대로 하지 않습니까?” 본문대로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땅을 만드시고 보기에 좋았더라, 했는데 그것은 왜 빠뜨렸느냐는 거예요. 그 말을 종합해보면 설교를 이렇게 하라는 취지의 말입지요. “하나님께서 땅을 주셔서 살기 좋게 해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런 조로 설명하라는 겁니다.
그런 식의 설명은 주석에 다 나와 있어요. 주석에 다 나와 있거든요. 그건 설교 집에 다 나와 있어요. 그런데 우리가 뭘 모르는가? 땅이 가진 예언적 기능을 빠뜨리면 안돼요. 땅이 가진 예언적 기능이 뭐냐 하면, 땅 그것이 가짜라는 겁니다. 골로새서 3장에 보면, 진짜 땅은 저 위에 있어요.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우리의 주민등록증은 하늘 거기에 있고 자동차 면허증도 거기 하늘에 있는지라.
그런데 하늘에 있다고 해서도 안돼요. 왜냐하면, “땅에서 이렇게 살기 좋도록 해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라는 그 마음 자세가 땅을 망치게 만드는 마음자세에요. “우리가 잘살 수 있도록 이렇게 배려해주시다니요. 선선한 가을도 주시고.” 이게 문제라는 거예요. 이게 예언자를 피 흘리게 만들었어요. 이 사고방식이 예언자를 때려죽이게 만들었어요. 자기중심이니까. 땅에 사는 우리 모든 모델이 내 중심으로 만들어지는 거예요. 여러분이 어른이 되고 난 뒤에 청소년 마음을 잊어버리거든요. 청소년들은 자기보다 어린 초등학생의 마음을 모르고 초등학생은 두 살이나 세살 때의 아이 마음을 알지를 못해요.
어떤 동영상을 보니 여섯 살 먹은 언니가 다섯 살 먹은 동생보고 “네가 인생을 알아? 네가 나만큼 인생을 살아봐야 인생을 알지.” 이런 게 나와요. 여섯 살 먹은 애가 다섯 살 먹은 동생보고 하는 말이에요. 권위 잡는다고. 우리 어릴 때 마음이 어디 안 갔어요. 그대로 확장되었습니다. 어릴 때 마음이 뭐냐? 유아교육 이제 시작합니다. 세상이 모르는 유아교육, 성경에만 나오는 유아교육 잠시 소개하겠습니다. 아이들은 항상 법으로 쫓기게 되어 있어요. 애들이 엄마 눈에만 띄면 엄마는 애에게 잔소리 하는 재미로 엄마신분을 확인하려 하고 애는 엄마에게 잔소리 들으면서 스물네 시간을 보냅니다. 엄마 눈에 띌 때만 그래요.
부모와 자식의 대화라는 것이 뭡니까? 동창생 차원의 대화입니까? ‘나는 잔소리할 테니 너는 들어라.’ 그 대화지요. 엄마한테는 꿈의 대화지만 자식들로서는 피하고 싶은 악몽 같은 대화가 되지요. 엄마가 잔소리를 하고 지적을 하게 되면 꼭 뒤에 붙는 멘트가 있어요. “다 너 잘되라고 하는 소리야! 내가 잔소리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다. 네가 잔소리 안 들을만한 행동을 해라. 그러면 내가 잔소리 안한다.” 잔소리할만한 행동을 안 하게 되면 엄마는 잔소리할만한 행동을 찾아서 잔소리를 합니다.
거기서 애는 뭘 느끼느냐? 애는 예속, 그리고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은 애 마음속에 자유에 대한 소망을 갖고 있어요. 애는 예속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를 소망하면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는 입장에 있어요. 그게 애 마음이에요. 뭐든지 하고 싶은데 이걸 누르니까 엄마가 모르는 영역을 개발해서 그 영역에서는 어떤 자유를 느끼는 겁니다. 예를 들어 엄마는 참고서가격에 대해서 잘 모르잖아요. “엄마, 참고서 새로 사야 되는데 2만 5천원이래.” “갑자기 왜 그렇게 비싸졌냐?” “참고서 가격이 다 올랐대요.” 사실은 만 오천 원인데 만원 떼먹고 그 돈으로 떡볶이도 사먹고 하겠지요. 되바라진 애들은 담배 사 피우겠지만.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게 있을 때 숨을 쉬어요. 휴~, 살았다.
여기서 본격적으로 청소년들의 마음이 형성됩니다. 그 예속과 자유의 갈등 속에서 자유를 느끼는 그 자체가 이미 보이지 않는 시선, 응시를 의식하는 마음체제로 굳어져요. 쫓기지요. 두렵지요. 엄마가 보지 않는데서 자유를 느끼지만 자유가 몇 발자국 못가요. 엄마 없는데서 마음 놓고 거짓말 하고 나쁜 친구가 왔을 때 어디선가, 꼭 뒤통수에서 자기를 주시하는 어머니의 내면의 음성을 듣습니다. ‘내가 너무 막가는 것이 아닌가? 나중에 내가 잘못되면 엄마가 얼마나 실망할까?’ 감시를 받고 있는 겁니다.
이것이 보이지 않는, 비가시적인 그것은 그 현장에 존재하지 않아요. 비존재로부터 끊임없이 감시받고 있는 존재, 이게 인간입니다. 쫓기고 있어요. 무엇에? 법에. 그게 어린애거든요. 어른도 마찬가지에요. 이것을 일망감시체제라고 합니다. 일망감시체제의 특징이 뭐냐 하면, 감시하는 자는 어디엔가 있는데 감시 받는 자가 아무리 살펴도 보이지 않는 거예요. 칼립소입니다. 뭔가 알 수 없는 신의 영역이에요. 교회 나옵니다. 보이지 않는 분에게 간절히 기도하지요. 꼭 교회에서만 비는 것은 아니고 불신자들의 경우에는 밀라노에 가도 빕니다. 성당 앞에서 모자이크 소 무늬에 뒤 축대고 세 번씩 돌려가면서 우리 애 고 3인데 공부 잘 하게 해 달라고 빕니다. <유자식상팔자>에 그런 장면이 나왔어요. 이태리 가서 비는 장면이 나왔다고요. 안 빈다고 엄마들이 막 화를 낸 거예요. “난 너 좋으라고 비는데!”
이게 뭐냐? 일망감시체제에서 못 벗어나는 겁니다. 자유요? 보이는 사람 피하기는 쉬워요. 그러나 내 마음속에 보이지 않는 감시망을 무슨 수로 피합니까? 소위 양심의 가책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 양심 누가 만든 건지 알아요? 그동안 부모로부터 배운 누적된 법 체제가 나만의 양심이라는 것을 항상 재구성하고 있어요. 양심 꺼내보면 다 달라요. 각자 살아온 환경과 처지가, 인생 여정이 다른데 거기서 자기정당화 한다고 양심이라는 것을 만든 거예요.
보이지 않는 일망감시체제, 칼립소라 하든지, 예수라 하든지, 삼위일체라 하든지, 그것은 상관없이 인간은 누구나, 양심이라고 해도 마찬가지고, 쫓기듯이 살아갑니다. 예수, 칼립소, 양심, 다 내가 만든 허구적 현실입니다. 그것은 엉터리에요. 어떤 사람, 윤동주는 말하기를,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늘을 쳐다보기는 왜 쳐다보는데? 그냥 거울을 보고 이야기하지 거울이 가까운데 왜 하늘을 쳐다봐?
윤동주라는 사람이 비록 조선의 독립은 외쳤을지 몰라도 칼립소에서는 독립하지 못했어요. 일망감시체제에서는. “너 구원된다.” 자꾸 사기를 치는 거예요. 아까 장로님 기도하신대로 ‘착하게 살면 구원된다. 가인처럼 제사 드리면 복 주겠지.’ 누가 시키지도 않았어요. 우리교회 교인 몇 명 안되는데요. 교인 늘리려면 간단해요. 여기 돌 하나 놔두고 이 돌에 콧기름 찍어 바르면 소원 성취된다는 소문 돌면 우리교회 예배당 다시 지어야 됩니다.
이것은 대상이 누구냐가 아니에요. 칼립소든, 양심이든, 보이지 않는 신이든, 예수든, 부처든 관계없어요. 보이지 않는 나를 감시하는 체제, 어릴 때부터 엄마한테 감시받았으니까, “내가 정당하니 이젠 더 이상 나를 질책하지 마세요. 내가 죽음과 내 양심의 가책과 나를 범죄자 취급해서 징벌이 따라오는 그 속도가 나는 무섭습니다.” 어떤 사업을 벌인다든지, 무슨 일을 새로 한다든지, 시험을 친다든지, 여기도 공무원시험 친다는 분이 있습니다만, 뭔가를 할 때 행여나 안 될까봐서, 행여나 실패할까봐서…….
왜? 내가 그동안 지은 죄가 많은데 반드시 죄가 있는 곳에는 처벌이 있을 것이고 그 처벌이 하필 그 타이밍에 닥쳐서 시험에 떨어질까 봐, 내가 벌인 사업 잘 안 될까봐, 남편이 아파서 수술하는데 하필 그 동안 내가 지은 죄가 누적이 되어서 남편 수술이 잘못되어서 나만 과부될까봐, 이 모든 것에 이유도 모르는 채 우리는 맹목적으로 쫓기고 있습니다. 어린애부터 어른까지, 당회로부터 주일학교까지, 20대건 30대건 관계없어요. “걸음아, 날 살려라.” 하는 거예요. 조폭도 마찬가지에요. 조폭도 “하면 된다.”고 외치는 이유가 쫓기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자꾸 뭔가에 쫓겨요.
쫓기는 이유는 방금 설명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이래야 옳고, 이러면 그르다고 이야기했고, 그 그른 것에 대해서 책벌이 주어졌고, 나무람이 주어졌고 책망이 주어졌고, 그렇게 되면 나의 존재, 나의 거룩을 추구하는, 거룩을 표방하는 나의 그것이 흠집이 생기고 나는 망가진다는 것에 대해서 내 자존감이 용납을 안 해요. 인생 이렇게 고생하는 것을 내가 용납 못해요. 방금 제가 전체적으로 어린애 심리에 대해서 이야기했지만 사실은 모델이 잘못된 거예요. 우리가 모델을 잘못 책정한 거예요. 누가 그 모델을 이야기해 준 사람도 없어요. 타고난 거니까. 태어나면서부터 도망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제가 가락교회에서 그렇게 이야기했거든요. 죽어 있기 때문에 살고 싶어 하고 살고자 하기에 죽어가고 있다고 했어요.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이 하는 이 말은 뭐냐 하면, “그게 네가 생각하는 네 전부지?” “예, 그게 전부입니다. 이유도 없이 누가 자꾸 감시하는 것 같아요.” “그것은 네 이상의 것을 네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면 제 이상의 것, 내가 쳐놓은 이 현실이라는 이 경계선 말고 그것보다 더 큰 범위의 것을 알려주세요.”라고 하면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이야기한 그 안에 네가 생각하는 그것, 허구에 쫓기는 그것 말고 진짜 네가 여기에 담겨 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게 뭡니까?”라고 물으면 간단하게 말해서 “피할 길을 주신다.”는 겁니다.
피할 길이 뭐냐? <사운드오브뮤직> 영화이야기 다시 해 봅시다. 마리아 가정이 독일군에 쫓겨서 오스트리아 국경 넘어서 스위스로 이민가려고 했을 때 그 낌새를 챈 독일군이 쫓아왔을 때 마리아 가정은 수녀원으로 피신을 합니다. 독일군이 와서 수색합니다. 마리아식구들은 공동묘지에 숨어 있고 독일군이 수색하는 중에 어떤 병사가 알아챘어요. 그런데 그 병사가 트랩대령의 맏딸과 사귀는 사이라서 그냥 봐주고 넘어갔어요. 그래서 그들은 스위스로 피신했다가 미국으로 이민 가서 가족 합창단을 만들어서 찬송가를 부르면서 여생을 보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피할 길’이 뭐냐 하면, ‘걸음아 날 살려라.’ 그게 피할 길인데 이 피할 길이 뭐가 문제냐 하면, 그렇게 피해버리면 그 때 그 때 어려운 상황이나 모면하게 되면 내가 안 바뀌어요. 이것은 피할 길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태가 전혀 호전된 적이 없고 똑같은 상태에요. 그러면 하나님이 준비한 ‘피할 길’은 뭡니까? 하나님이 준비한 피할 길은 ‘무법자’가 되는 거예요.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줄곧 나와요. 고린도전서에서 사도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네가 어려울 때 주께서 감당할 만하게 피할 길을 주신다.’ 그것만 하고 그 ‘피할 길’이 뭔지는 여기서 이야기가 안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하지만 이 말씀은 사도 개인의 사견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계시로 준 거거든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서 말한 피할 길이 뭐냐? 도대체 우리가 어떤 모델의 인간형이 되어야 하는가? 보니까 세리와 창기와 도둑놈과 강도, 거기다가 장애자, 과부, 이방인인 백부장, 12년 동안 혈우병 들린 여자, 38년 된 병자, 이런 사람들이 나열되어 있어요. 우리는 사도바울을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다 지나고 보니까 이거 볼 때는 앞에 것을 다 잊어버려요.
그런 것을 다 결합시켜서 제가 친절하게 설명해 드리거든요. 38년 된 병자가 자기의 병에 쫓기고 있어요. 오늘 설교 정리해 봅시다. 모델이 잘못되었어요. 모델이 잘못된 거예요. ‘나는 38년 된 병자인데 남은 50년 된 병자라도 괜찮지만 나만은 이대로는 안 돼. 나만큼은 무조건 38년 된 병에서 벗어나야 돼. 이게 나 자신이야.’ 라고 자기 모델을 굳혔습니다. 베데스다 못가에서 그러고 있는데 여기는 영순위거든요. 임대주택 들어가려고 줄 서 있는 것과 같아요. 영순위로 먼저 들어가는 사람이 낫는데 아무도 자기를 그 연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는 거예요. 그게 뭐냐? 내가 나 되기 위한, 나를 쫓아오는 그 저주로부터 자유케 하는 나만의 법은 누군가 나를 데리고 베데스다 못에 집어넣는 방법, 이것, 이것이 끝입니다.
주께서는 “네가 생각하기에 그 방법 외에 없다고 보나?” 그러나 인간은 자기가 아는 것 안에서만 자기거든요. 그래서 철이 없다는 거예요. 나이 50된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보기에 철이 없어요. 모든 인간은 다 철이 없어요. 왜? 자기가 아는 것 안에서만 아는데 그 아는 것도 어릴 때 부모로부터 간섭받으면서 구축된 양심에서 나오는 제한된 마음일 뿐이고 그냥 쫓겨요. 데쓰노트 같은 것 만들어서 손 볼 사람들이나 적어놓고, 그게 자기가 아는 것의 전부에요.
그런 인간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 정죄하지 않겠다는 그런 분을 그 사람은 만난 적이 없어요. 그 사람만 못 만났습니까? 그 사람 잡아넣는 형사들도 못 만났는데. 일 계급 특진해서 경감된 그 사람도 아마 모를걸? 혹시 교회에서 들어는 봤는지 어쩐지 제가 거기까지는 못 알아봤습니다만.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그 방법 말고 있거든!” 그 방법이 뭐냐 하면, 내가 너의 병을 낫게 하는 거예요. 낫게 하는 순간 병이 나은 것이 아니에요. 자신이 예전에 갖고 있던 자기 자신의 모델이 함께 폭발해버리는 거예요.
무슨 말이냐 하면, 38년 된 병자인 자기 전체가 하나님 앞에 복 받기를 바라거든요. 쉽게 하기 위해서 화학실험실로 가 봅시다. 38년 된 병자를 비커에 넣고 밑에서 불로 가열해요. 가열을 하면 증발을 하고 거기에 농축액이 등장합니다. 그 농축액이 로마서 10장 3절에 나와요. 그게 ‘자기 의’에요, 자기의. 주님께서는 우리 전체를 보는 것이 아니고 “내가 도망쳐도 반드시 챙겨서 가는 자기 의가 어디에 있는가?” 그것에 집중해요. 그것에 집중하면서 우리를 꾸겨버려요. 우리를 꾸기면 딱 남는 것이 있어요. “나는 잘났다.”
대통령이고 국무총리고간에 관계없어요. 거지라도 난 잘났고, 내일 모레 곧 자살하면서도 자기는 잘났대요. 나는 잘났다는 이것이 핵심이 되어서 잘못된 모델을 만들고, 그 잘못된 모델은 어릴 때부터 교육을 그렇게 받아서 된 것이고, 부모도 죄 있는 부모로부터 그렇게 배웠고, 나는 그 부모로부터 또 배웠고, “너는 잘났으니 내 요구에 부응해야 돼.” 이런 식으로 가정교육 받았고, 어릴 때 부모로부터 받은 그 잔소리는 이제 날라 갔으나 어른이 되고 난 뒤에도 그 잔소리의 메아리, 일망감시체제, 이 현실세계에서 누가 나보고 지적 질을 하게 되면 못 견뎌 하고 또 힘들어 하는 그것이 잘못된 거예요.
재벌은 검찰에 들어갈 때면 온 몸에 붕대를 감고 침대에 드러눕든지 휠체어에 앉은 채로 들어가고, 나올 때는 기자들 눈 피해서 다른 길로 나오지요. 왜 그렇습니까? 자신의 의가 훼손되지 않기 위해서. 연예인들 인기 떨어지거나 문제 생기면 지리산에 들어가 버려요. 왜 그렇습니까? 자기 의가 남에게 훼손당하지 않기 위해서. 구원은 누가 방해하는지 알아요? 내 심지 속에 있는, 내가 손 못 대는 그것이 나의 구원을 방해해요. 그게 로마서 10장에 보면 ‘자기 의’입니다.
주님께서는 38년 된 병자를 그냥 낫게 합니다. 법 없이, 내가 설정한 법 없이 그냥 낫게 해버려요. 낫게 하고 뭐라고 하는가? “네 담요를 안식일에 들고 걸어가라.”는 주님의 법을 안겨줘 버립니다. 그러니까 그 38년 된 병자는 병 낫고 졸지에 자기라는 존재는 주님의 소유가 되고 말았어요. 내 소유에서, 내 잘남의 소유에서 “주님은 이렇게 잘난 분이다.” 주님의 잘남을 증거하고 증명하는 식의 새로운 소유주가 등장하면서 소유가 바뀌어버렸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유일하게 원하는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38년 된 병자에게 그렇게 했지요? 날 때부터 소경된 자에게는 “네가 죄 지어서 소경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소경되었다.” 그렇게 소경되게 해서 그 다음에 눈을 뜨게 해줬지요. 그러면 눈 뜬 사람 된 것이 아니고 예수 믿는 사람 되지요. 따라서 우리는 구태여 꼭 장님이 되어서 주님이 진흙 발라줘서 예수 믿는다는 복잡한 그 절차를 나의 법으로 가져오지 마세요. 이게 오늘 설교의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남이 구원받은 절차를 나의 새로운 법으로 수입하지 마세요. 가져오지 마세요. 이것은 마귀한테 속은 겁니다. 또 나옵니다. 막 사세요. 그냥 사세요. 그냥 사시는 것이 주님의 법입니다. 주님의 소유된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주님에게 맡겨진 채 살도록 한 주의 법이에요.
우리가 실수한다고요? 우리가 실패한다고요? 주님의 뜻은 딱 하나 뿐입니다. 예수님만 성공하면 우리는 거저 성공한 거예요. 히브리서 10장 10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제가 말씀 드리니 ‘단디!’ 아주 단단히 들으세요. “이 뜻을 좆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나의 거룩을 포기하시고 주님의 거룩을 수입하세요. 그러면 되는 겁니다. 내가 남에게 쫓기지 마시고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를 수입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저 명품만 직구하지 마시고요, 그런 것만 수입하지 마시고 “다시는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리니.”를 수입해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의를 집어넣게 되면 내가 생각했던 우리의 모델은 빈껍데기가 되어서 다 찢어져버립니다. 찢어진 그 자국들은 옛날에 나를 쫓아다녔던 귀신의 조각들이지요. 그것을 주님이 주워 모아서 하나님의 의의 완전체로 만들었습니다. 트랜스포머에요. 형태 바꾼 거예요. 그 뿐입니까? 세리 삭개오, 세리잖아요. 돈 밖에 모르던 인간이었습니다. 주께서 하나님의 의로 임하니까 삭개오는 남 도와주는 것이 문제가 아니에요. 안 도와줘도 구원 받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남에게 세 배나 갚아준 겁니다. 희한하지요? “안 내도 되는데 왠지 하고 싶네요.” 이렇게 해서 나는 법이 없는 무법자가 된 거에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 <무법자>입니다. 법이 없어요. 어떤 법도 나의 운명을 바꾸지 않습니다. 쫓기지 마세요.
교회 안 나가는 엄마가 명절에 찾아갔는데 구시렁거리거든 “엄마는 복음을 몰라.” 그렇게 하세요. “내 모델은 어릴 때 엄마가 생각하는 그 모델이 아니야. 내 모델은 주님이 다 가져갔어. 주님 증거 하는 모델로 바뀌었어.” 뭐, 이야기해봐야 알아듣지도 못 합니다만. 촌에 계시는 어머니가 알아듣겠습니까? ‘무슨 이상한 소리 하나? 미쳤나?’ 하겠지요. 사렙다 과부도 마찬가지고요. 과부 되어야 돼요. 남편 일찍 죽어야 되는 겁니다. 네 잘못으로 과부된 것이 아니에요. 네가 생각하는 네 인간형을 버리고 “무익한 종이니 할 바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는 새로운 인간형으로 바꾸기 위해서 너에게만 과부라는 주님의 소품이 가미된 겁니다. 그게 인간들이 몰랐던 칼립소에요.
비가시적이라고 여겼던 모든 진리, 주님께서 나타난 모습으로 옵니다. 세리, 창기, 강도, 강도는 어떻고요? 강도는 더하지요? 창녀는 더하지요. 창녀 되어야 했었어요. 그걸 흉내 낼 필요는 없어요. 그것은 네 방식, 나에게는 또 다른 방식이 있어요. 피할 길이 뭐냐? 무법자 되는 겁니다. 법 없이 네 마음대로 사는가? 아니요. 주께서 주시는 법이 있어요. 안식일에 담요 들고 가야 되는 법. 남들 보기에는 “아이고, 네 수준에 어떻게 그런 집에서 사는가?” 하지만 그 집에서 살아가야 될 주님이 주신 법. 반지하방에서 사는 그런 분들도 계셔요. 주께서 주신 법입니다. 어떤 사람은 백 평짜리 아파트에 사는 그런 고생을 사서 하는 분도 있어요. 하지만 그 백 평짜리 아파트에서 살아야 돼요. 어떤 사람은 벤츠를 모는 고난을 받아야 돼요. 가다가 시동 꺼져서 골프채로 차 때려 부수는 그런 일도 해야 돼요. 주님이 주시는 법이니까.
남의 법을 부러워하지 마세요. 주님이 알아서, 알아서 우리 인간형 바꾸어 주십니다. 자기 의를 뽑아내 주십니다. 비커에 놓고 밑에서 가열해서 증발시켜서 그동안 잘난 체 하는 모든 가식적인 것, 위선적인 것, 내가 복 받기 위해서 요령 부린 것 있잖아요. 내가 복 받은 멋진 인간되기 위해서 했던 짓들이 있잖아요. 여러분이 잘 아시잖아요. 목사 넥타이 사주기, 피아노 위에 꽃꽂이하기, 십일조 하기, 주일 지키기, 봉사하기, 선교회비 내기, 그동안 한 것들 가열시켜서 증발시켜서 다 날려버립니다. “그것은 네 방식이지 내 방식이 아니다.” 네 방식은 네가 어릴 때부터 잔소리 들었던 거기서 나온 거거든요. 착해야 구원받는다는 것, 말씀대로 살아야 복 받는다는 것, 이것은 네 방식, 네가 지어낸 마귀 적 방식이에요. 그 속에는 자기 의가 있어요.
이제는 그 자기 의를 바꿔야 돼요. 뭐냐? 주님의 의. 그러면 주님의 의는 어디서 나옵니까? 십자가에서 나오지요. 십자가에서, 십자가 피에서 나와요. 이사야 42장에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꺼져가는 등불을 우리가 스스로 끄면 안돼요. 꺼져가는 등불이 되어서 스스로 구원받겠다는 내 법을 또 만드는 것밖에 안되니까 그냥 사세요. 꺼져가는 등불로 취급해서 알아서 그걸 끄지 아니하시는 작업을 매일같이 합니다.
매일같이 주님께서는 은혜를 주십니다. 문제는 이질적이라는 거예요. 내가 예상 못하는 것들을 계속해서 복음으로 심어줘서 모든 것이 네 중심이 아니고 십자가 중심, 하늘나라 중심, 예수님의 십자가 의를 증거 하는 중심, 그리고 그 십자가 의를 받지 못한 자는 반드시 저주받아야 될 그 중심으로, 예수님 심판자 중심으로 이 땅을 살아갑니다.
끝으로 한 말씀 더 드리겠습니다. 인생 백날 이야기해도 소용없는 것 알아요. 또 일어서서 자기 잘난 체 합니다. 부딪히세요. 주님의 그 가슴팍에, 조인성보다 더 단단한, 현빈 보다 더 강한 가슴팍에 팍 부딪혀서 혹 뿔 나세요. 혹 뿔 나고 넘어질 때 피할 길을 주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으리라. 이미 너는 복 덩어리야.” 그거 한 방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더 이상 세상 법칙에 속아 넘어가지 않게 하여주옵소서. 그들이 속인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이, 나의 의가 속히는 식으로 그동안 헛된 짓 하면서 살아왔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주어진 모든 것에서 주께서 구원해내시는 그 용서의 흔적만 발견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