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용익

댓글

아빠와 함께 2013. 1. 29. 13:52

 

윤진님께서 '제 글 읽기는 읽었느냐'고 하신 것은 제가 헤어려보건대 복음적 글쓰기 안에는 이미 영적인 해석과 육적해석이 겸해서 들어가 있기에 제 삼의 답변, 그러니까 따로 인간 박윤진의 생각 혹은 임창길이나 이근호나 오용익의 생각같은 것이 따로 있을수 없고 그런 요구자체가 육적사고에 불과하다는 뜻이 아닌가 합니다.

'저는 이렇게 봅니다'라는식의 용어를 썼다고 문제삼는다는 것이 아니라 누가 전개하든 복음증거로서 합당하려면 반드시 십자가안의 안목과 밖의 안목이 같이 제시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주님이 세우신 천국과 지옥의 기준이 생생하게 살아나서 주님이 영광받으시는 글이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화평론이나 소설읽고 개인감정 표출하는것과 다를바가 없게 되겠지요.

십자가마을의 글들이 다 그렇습니다. 만약 그 마을에서 글이 삭제되었다면 이러한 복음의 취지에 부합치 않았다는 뜻입니다. 십자가마을사이트는 로그인을 하지 않더러도 모든 자료를 다 공짜로 열람하게 하는 곳입니다.

집사님, 누군가와 공개적으로 논쟁하려들지 마시고 조용히 공부하심이 좋을듯 합니다.
그리고 이 복음이 너무 좋거들랑 그 복음이 자랑스럽거들랑 내놓으시면 되고요.

이근호 목사님의 성경신학의 세계(1) 80쪽에 보면 "성경신학적으로 본 예정론"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저는 이 글에서 '이것은 아니오.'라는 문제점을 찾지 못했습니다. 집사님의 비판적 견해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읽으셨다니 수고하셨습니다.

1. "그런데 칼빈선택론과 칼바르트 선택론을 설명했을뿐이지 이근호목사님은 어느쪽 선택론이 맞는지는 결론이 없습니다 . 단순 그분들의 선택론을 설명한것뿐입니다. 별내용이 없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논문은 "칼빈과 바르트의 선택론을 설명한 뒤에 문제점도 아울러 제시하고 있습니다.

85쪽에 보면 칼빈과 칼바르의 신학소개와 함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칼바르트 선택론의 허점은 유기, 구원 이 두가지 상태의 양립이 하나님의 은혜를 훼손시킬 것이라고 믿는데 있다. 그래서 이 둘을 하나로 몰아감으로서 은총은 더욱 확대된다고 여기고 있지 하나님의 절대적 결정 자체가 은총의 지극히 큰 상태임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85)라고요.

또 '칼빈 선택론의 문제점은 예수 그리스도와 선택된 자들 사이의 관계에서 예수님의 자의적인 구속기능의 수행이 누락되어 있고 단순히 장소적 기능으로만 머문점이다. 즉 인간편에서 서서 행하는 일에 소홀한 곳이다. 그래야 유기의 의미도 분명해 질것이 아닌가(유기가 단순히 선택의 반대논리적으로 도출할 것이 아니라 유기될 자의 적극적인 구속사의 역할도 선명하게 등장시켜야 한다."(85)라고요.

이분들의 문제가 "예수 안에서"라는 말을 "선택의 중간매체"로(바르트) 혹은 "유신론적주권이해"(칼빈)로 잘못 이했는데 "예수 안에서라는 말을 이해하려면 반드시 구약의 언약안 의미를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어야 한다"(91)고 합니다.  


2.     "이근호목사님 예정론은 제가보기에는 창세전 예수님만 선택 예정 계시되었고 우리인간즉 성도는 예수님이 십자가사건이후 성도를 자기백성 삼고 선택한 선택론을 주장하고 있는것 같숩니다. 그러니깐 예수오시기전에는 성도는 하나님계획에 존재하지도 않았고 아예 성도자체가     존재하지않은 하나님의일하심을 주장하는것 같습니다."

라고 하셨습니다.

이 논문은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새언약 선택의 원리는 공간이나 혈통으로 정리할 것이 아니라 달리 정비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새언약 자체가 되는 그리스도와 연합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루어지는 선택행위란 선택받은 자의 조건이 어떠하냐가 아니라 어디를 향한 선택이냐로 진위가 판가름나야 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택이 중요한게 아니라 (칼빈은 이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사도바울의 강조와는 빗나갔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질서의 창조이다. 그 새로운 세계란 바로 그리스도의 세상이다 이 새 세상을 위하여 너희들이 선택되었다는 것이다. 그 안에서 새로운 계약이 적용되고 그 원리에 따라 통치되는 세계이다 선택받은 모든 이들은 그들의 관심을 오직 그리스도의 나라에 쏟아 부어야 한다. 하나님이 나를 선택했다는 것은 기본이다. 이러한 생각은 구원받지 못한 유대인들도 갖고 있었다 이미 선택받은 사람들의 관심은 내가 어디로, 무엇하기 위하여, 선택되었느냐에 있어야 한다"(89)

또 "개인의 구원을 집중적으로 강조하기 위해 예정이라는 개념을 끌고 들어와서는 안되고 그리스도에 의해서 새롭게 통일된 세상을 키우기 위해 하나님이 우리들의 참여를 예정하신 것이다. 예정의 관심사는 우리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머리 되는 몸이다. 종말에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 사전 계획과 공작이 있었다는 것을 예정이라고 표현한 것이다.(89-91)다.

이것을 밝히기 위해서 본론에는 구약이스라엘의 선택의 취지를 남은자개념과 결부해서 설명하고 그 남은자가 다윗언약의 성취 곧 새언약으로 발생하게 되면서 그렇게 발생된 남은자를 통해서만 밝혀지는 예정의 취지가 이 남은자가 툭툭 성령으로만 발생하는 이 종말에 그들에게만 이 종말의 비밀, 곧 예정의 취지란 그리스도중심의 새세상창조에 있음의 비밀이 밝혀진다고 합니다(본론 85-90까지) 바로 사도의 선택론이라고 하고요.
저도 다시 공부하게 됩니다. 찬찬히 다시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이왕에 내친김에 이번 십자가마을 수련회 강의도 다 들으시면(아니면 녹취라도 읽으시면) 좋겠습니다. 근간에 오고갔던 숱한 이야기들이 잘 정리됩니다.
2. 집사님의 성경해석들이 다 맞습니다. 집사님처럼 "예수안에서 예수님은 성도와 함께 계신다'는 식으로 정해놓고 그걸 입증하기 위해서 성경구절 동원하면 천개 만개도 갖다 부칠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해석들은 다 예수 밖에 있을때나 나올 해석입니다. 다 집사님의 개인 의견이기에 그러하고 그런 개인의견들은 성령받지 않은 어떤 개인들도 다 가능한 해석이 됩니다.

그걸 고린도후서 4장에서 '의문'이라고 한 겁니다. 또 그런 해석은 예수 밖에 있는 모든 자들에게 성령없이도 납득될수 있습니다. 예수 밖에 있는 자들의 성경해석의 근원적인 문제는 해석의 주체자로 나서는 본인에게 작용하는 자기보다 더 큰 악의 힘을 고려치 못한다는데 있습니다. 이들의 핑계는 '나도 틀릴수 있다고 나는 인정했다.' 라든지 '공정하게 하기 위해서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선배들의 해석과 인간의 선입견을 배제해야 되니 성령께서 하신 성경기록 자체에 충실하기 위해서 문법적해석을 해야 한다' 라고 합니다.

예수 밖에서 성경보면 신학을 하든 큐티를 하든 국어책 읽는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겁니다. 제가 읽어보시라고 권해드린 논문의 소제목중에 '사변적인 예정론'이라고 하는데 칼빈과 바르트 두 사람의 예정론을 소개한 것은 중세(카톨릭사상의)와 종교개혁(칼빈)과 근세(계몽사상)를 거치면서 예정과 관련된 사변적신학들이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지를 밝힌 겁니다. 특히 바르트 언급은 바르트가 칼빈의 예정론의 한계(하나님 주권에서 나온)를 그리스도중심으로 정초하려고 한 신학이기 때문입니다. 즉 대다수의 사람들의 예정에 관한 사변들은 이 두분 신학자의 논리안에 잠겨있는 겁니다. 물론 집사님은 신학자들의 이론에는 관심 없다고 하시지만 집사님의 사변들은 다 이 분들 신학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집사님은 논문읽으실때 이런 구절에 유념했어야 합니다.

"기존의 예정론 설명은 처음부터 인간의 무분별한 자율성과 독자성을 공격하기 위하여 신의 속성이라고 여겨지는 하나님의 주권과 자유성을 반대 위치에 놓는 방법을 취했다. 여기에 등장한 신의 주권과 자유성은 성경에서 나온 것이라기 보다는 인간편에서 이해하고 부러워하고있는 주권성과 자유성의 확대개념으로 봐야 한다. 즉 인간편에서 경험했던 속성을 신에게 일방적으로 안겨주고는 하나님의 것이라고 못박아 버린 것이다"(80)

"중세때의 사변철학은 신을 인간의 언어(이해력)로 설명하려는 노력에 몰두했다고 핻 과언이 아니다 종교개혁때도 반대파를 공격하기 위해 마찬가지로 사변적인 접근을 시도했다.'(81)

칼빈의 경우는 인간의 행위와 공로사상을 배격하기 위해서 모든 성경구절과 하나님의 주권적행위만을 강조해서 예정론을 구성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변에 그치고 말았다(81-83)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썼던 것입니다.

"복음적 글쓰기 안에는 이미 영적인 해석과 육적해석이 겸해서 들어가 있기에 제 삼의 답변, 그러니까 따로 인간 박윤진의 생각 혹은 임창길이나 이근호나 오용익의 생각같은 것이 따로 있을수 없고 그런 요구자체가 육적사고에 불과하다는 뜻이 아닌가 합니다.

'저는 이렇게 봅니다'라는식의 용어를 썼다고 문제삼는다는 것이 아니라 누가 전개하든 복음증거로서 합당하려면 반드시 십자가안의 안목과 밖의 안목이 같이 제시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주님이 세우신 천국과 지옥의 기준이 생생하게 살아나서 주님이 영광받으시는 글이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화평론이나 소설읽고 개인감정 표출하는것과 다를바가 없게 되겠지요."


1번에 대해서는 한마디로 "사도의 선택론"입니다. 논문 85-91까지 나와 있습니다. 이 부분이 이해가 안가는 경우가 있을수 있습니다.

1) 논문 어디에도 집사님이 보고 싶은 것(창세전에 성도는 예정된 것이 맞아)을 보여주거나 확증시켜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논문의 출발과 관심사는 바로 이겁니다. "남은자 집단속에 하나님의 희생이 들어 있다. 이 정신이 들어있지 아니하면 그것은 신약의 예정된 공동체와 본질이 다른 이교집단이 되고 이단이 된다."

2) 강조하는 의미에서 다시 써드리겠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택이 중요한게 아니라 (칼빈은 이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사도바울의 강조와는 빗나갔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질서의 창조이다. 그 새로운 세계란 바로 그리스도의 세상이다 이 새 세상을 위하여 너희들이 선택되었다는 것이다. 그 안에서 새로운 계약이 적용되고 그 원리에 따라 통치되는 세계이다 선택받은 모든 이들은 그들의 관심을 오직 그리스도의 나라에 쏟아 부어야 한다. 하나님이 나를 선택했다는 것은 기본이다. 이러한 생각은 구원받지 못한 유대인들도 갖고 있었다 이미 선택받은 사람들의 관심은 내가 어디로, 무엇하기 위하여, 선택되었느냐에 있어야 한다"(89)
"오목사님도 답변에 모순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집사님의 성경해석들이 다 맞습니다. 라고 해놓고 뒤에는 예수밖해석이라고 합니다 예수밖이란 예수와 전혀상관없는 버려진자 즉 불택자입니다
그럼 예수밖해석은 성경적해석이 틀립니다 성경적해석이라볼수없습니다
이렇게 나와야 되지않습니까."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모순이 이렇게 해결되는 자리가 '예수 안'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맞다고 여긴 모든 성경해석이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죄의 지배하에서 나온 성경해석이었군요. 그리고 앞으로도 어떤 성경구절을 해석해도 같은 결과만 나오겠군요. 십자가안에 들어오고보니 모든 성경이 다 십자가 피를 증거하고 있네요. 나같은 죄인을 무조건 용서하시는 십자가에서 쏟으신 주님의 희생만 보입니다."라고요.
"예수 안에서 보는 선택예정론"은

창세전(엡 1:4)   = 예수 안(엡 1:4, 7) = 비밀(골 1:26, 엡 1:9) = 십자가(고전 2:7,8, 1:17, 고전1:23,24, 엡 1:7, 2:13) = 성령으로만 이 비밀에 참여됨(고전 2:7-11, 엡 1:17, 18) = 인간은 본질상 죄인고백(인간의 모든 선택, 곧 전역사의 붕괴)과 함께 십자가만 자랑함(부활의 세계인 묵시의 세계가 이 지상에 얼굴을 내미는 유일한 흔적으로서/엡 2:1;7)에 해당되는 자들이 예정대로 무시로 발생,

아울러 예수님의 행함(십자가)만으로 천국과 지옥이 갈리는 그리스도 한분을 위한 예정된 현실에 대해서 인간 행함으로 훼방에 해당되는 자들도 예정대로 무시로 발생(딤전 1:19, 20) = 창세전 예정대로 천국과 지옥으로 분리(계 20:11-15) = 이 모든 것이 주로 말미암주를 통해서 주로 돌아감(롬 11:34-36 : 개입불가) = 창세전예정대로 주님의 행위만으로 완성(시 110:1, 빌 2:10, 엡 1:10, 골 1:16-18)

빌립보서 2: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에베소서 1장 10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골로새서 1:16-18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라.

위에서는 이렇게 써드렸습니다.

"사도의 선택론"입니다. 논문 85-91까지 나와 있습니다. 이 부분이 이해가 안가는 경우가 있을수 있습니다.

1) 논문 어디에도 집사님이 보고 싶은 것(창세전에 성도는 예정된 것이 맞아)을 보여주거나 확증시켜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논문의 출발과 관심사는 바로 이겁니다. "남은자 집단속에 하나님의 희생이 들어 있다. 이 정신이 들어있지 아니하면 그것은 신약의 예정된 공동체와 본질이 다른 이교집단이 되고 이단이 된다."

2) 강조하는 의미에서 다시 써드리겠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택이 중요한게 아니라 (칼빈은 이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사도바울의 강조와는 빗나갔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질서의 창조이다. 그 새로운 세계란 바로 그리스도의 세상이다 이 새 세상을 위하여 너희들이 선택되었다는 것이다. 그 안에서 새로운 계약이 적용되고 그 원리에 따라 통치되는 세계이다 선택받은 모든 이들은 그들의 관심을 오직 그리스도의 나라에 쏟아 부어야 한다. 하나님이 나를 선택했다는 것은 기본이다. 이러한 생각은 구원받지 못한 유대인들도 갖고 있었다 이미 선택받은 사람들의 관심은 내가 어디로, 무엇하기 위하여, 선택되었느냐에 있어야 한다"(89)
집사님의 문제성은 '뭔가 내 손에 딱 잡히게 집어달라.'고 하는 것인데 그런 사고방식을 가진 인간들의 손에 예수님이 살해당했다는것을 간과하는데 있습니다. 인간이 해석의 주체로 등장하게 되면 반드시 말씀이 살해당합니다. 말씀이 해석되는 경우는 말씀에의해서 그 말씀을 해석하겠다고 덤벼든 본인이 살해당하는 지점뿐입니다. 그 일은 십자가안에서만 성령으로만   가능합니다.


의가 뭐냐, 죄가 뭐냐, 개혁주의와 그동안의 성경해석이 다 그거잖습니까?

그래서 십자가마을 수련회 강의를 들으시라고 부탁드렸습니다.

마지막 대목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주의 종이 되었으면 의를 행하는데 의의 종인데 왜 자꾸 죄인이라 하느냐 시비 걸고 나오는데 그 의라는 것은 세상에서 우리가 알고 있던 죄의 반대말이 의가 아니고 우리의 전부를 십자가 앞에서 죄인 되게 하는 능력 자체를 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마을의 예정론이 뭐요? 손에 잡히게 주십시오, 하시는데

바로 그런 사고방식(우리의 이 예정론은 평생 지칠줄 모르고 피어납니다.)을 십자가앞에서 죄인되게 하는 능력자체가 주님의 의로운 예정(론),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항상 '나는 날마다 그리스도안에서 죽고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산다.'는 사도바울과 같은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내가 창세전 예정되었다'가 '오직 예정된 한 분을 죽였다'는 고백을 할밖에요. 그리고 그분의 죽음안에서만, 곧 나의 예정론이 죄라고 지적하고 책망하고 죽이는, 곧 예정된대로만 이루시는 주님의 열심으로만 구원되는 겁니다. 항상, 영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