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용익

우리교회 다녀간 이야기(오용익)

아빠와 함께 2013. 2. 3. 22:01

 

(오용익 040303)

 

"우리교회", 우리교회 다녀간 이야기

대구는 여기서 멀다. 그들이 전남땅의 서쪽끝자락까지 오는데 여섯시간이 넘게 걸렸다. 도로사정도 좋지 않고 길도 많이 밀렸다. 예배시간이 한시간도 넘게 지연되다 보니 조바심이 났는데 강사를 태운차가 길을 잘못들어서 목포 인근까지 가버렸다는 소식에는 맥이 풀렸다. 머리는 주께 맡기라고 하는데 그 머리를 떠 받치고 있는 내 몸이 도무지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 내 몸이 그들의 발걸음을 어찌 세겠는가? 내가 그들의 머리카락수를 어찌 세겠는가? 이 세상 어느 누가 내 몸의 발걸음을 세시겠는가? 나는 항상 나 잘될 궁리만 하는 나인데.

"아무런 연관도 없이 마구 늘어서 있는 것만 같은 성경의 행간들 밑바닥은 한구절도 예외없이 십자가로 관통되어 있다. 신약이든 구약이든 어느 행간을 들추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출렁거린다. 성도의 삶이 그러하다. 우리 인생의 어느 페이지 어느 행간조차 뜻없이 펼쳐지지 않는다. 발걸음을 세시는 주님의 사랑에 의해서만 펼쳐지고 읽어진다. 십자가 없이는 우리 인생도 해석이 불가능하다. 귀뚜라미보일러 주식회사가 자기들이 놓은 보일러의 에프터 서비스를 충실하게 이행하는 것과도 같이 성도의 평생에 가는 길이 한걸음도 예외없이 주님의 돌보심을 받는다. 망가져서 에프터 서비스를 받는 자기 주제를 제대로 파악하게 해주심도 포함된 서비스다. 그것도 모르고 말씀을 스스로 지켜서 의를 이루어 보겠다는 것은 십자가 앞에서만 파악되는 죄악이다. 세상에서 잘되기를 소원하는 정욕을 꺾어 주시면서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만으로 주어진 영생의 소중함을 일깨우시는 주님의 사랑이 언제나 성도의 발걸음을 인도하신다. 성도의 발걸음은 한걸음 한걸음이 전부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에서 나와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돌아간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이 그대로 성도의 현실이다. 우리의 인생을 종횡무진 누비고 다니는 분은 여전히 주님이시다"(2004년 2월 29일 주일밤 이근호 목사 설교요지)  

우리교회 식구들에 대해서는 뭐라고 표현할 말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사랑은 글이나 말로 제대로 표현될 성질의 것은 아닌것 같다. 주님 주신 살과 피가 내셨기에 그 살과 그피의 위력이 그대로 분출되는 모습들, 예수님이 너무 좋아서 도저히 가만 못있고 덩실 덩실 춤이라도 추지 않으면 못배기겠다는 식이다.

우리교회 식구들에게는 다 나름대로 깊게 배어 있는 상처자국들이 있는 것 같다. 복음을 앞세운 강도같은 거짓목자와 교인들에게서 받은 아픈 자국들이다. 주님은 말씀의 행간을 모두 틀어 쥐고 인생들의 발걸음을 세시는 수고를 지금도 하고 계신다. 주님의 수고를 죄악된 종교성에서 나오는 인간의 공로로 전환시키는데서 필히 따라오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밑에서 마음이 상하지 않는 인간은 성도라고 보기 어렵다. 수고하기 싫고, 헌금하기 싫고, 봉사가 싫어서가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를 모독하는 것이 견디기 어렵다. 성도가 세상 살면서 예수 이름으로 고난받았다고 해서 그것이 성도의 훈장이 될수는 없음도 복음은 분명하게 가르쳐 주신다. 성도는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이 끝간데 없이 펼쳐진, 너른 들판과 초장에서 뛰어노는 어린아이일뿐이다.  

발걸음을 세시는 주님! 예수님이 받은 상처앞에서 자랑할 인간의 상처는 있을수 없다. 다만 끝없이 용서를 받을뿐이다. 교회를 옮긴다고 그 더러운 인간성이 어디로 가겠는가? 은밀하게 자신의 수치를 덮으려고 예수와 목사와 교회까지 끌어다 덮으려는 일말의 종교성까지도 한점 남김없이 도말되도록 발걸음을 낱낱이 세시는 주님의 사랑은 계속 되리라.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주님의 살과 피만으로 모든의를 다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취하게 되리라는 것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더 지켜볼 일이다. 저 사람들이 얼마나 계속해서 저 모습을 유지할수 있을지 두고 보겠다는 비아냥이 아니다. 저 지독한 죄인들을 이 세상의 어느 인간이 과연 목회할수 있을까 기가막혀서이다. 복음만 좋아해서 모였다는 저 별종들을 맡을수 있는분은 오직 주님뿐이겠다는 것과, 주님이 내셨으면 주님이 끝까지 책임도 지실것을 것을 믿는다는 뜻으로.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구호들에 식상한지 오래다. 이상적인 교회상을 꿈꾸면서 달음박질 하는 목사, 혹은 교인들만 봐도 매력을 느끼도록 할만큼 교회는 매력을 상실했다. 그러나 그런 노력들이 비없는 구름을 만드는 것처럼 공허하게 보이는것은 왜일까? 심기지도 않은 나무를 쳐다보면서 열매를 따먹겠다는 억지로 들리기 때문이다. 복음을 싫어하면서, 복음을 빙자해서 자기를 사랑하면서 어떻게 복음이 내는 열매를 바라겠는가.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하면서 세상의 이목을 끌려고 할 때가 아니다. 더러운 짓이 아닌가? 다만 복음을 믿고 증거할 때이다.  

요일 3:1-3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것을 인함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나는 "우리교회"에 대한, 특히 이근호목사와 그에게서 배우는 사람들에 대한 뜬소문을 제법 많이 듣고 있다. 누가 그들에게 복음만 있고 사랑이 없다고 말했는가?  한번 가보라. 가서 복음도 듣고 그 복음에 의해서 붙잡힌바 된 못난이들의 현실을 들여다 볼일이다.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 바보들의 이야기라고(으흠---랄라, 얼쑤). 사랑이 보고 배운다고 될일인가? 베낀다고 될일인가? 초대교회처럼 돌아가자고 외쳐본들 없는 사랑이 어디서 나오겠는가? 서로 사랑하라고 기록된 말씀대로 행해본들 사랑이 나올것 같은가? 성경의 어느 누구처럼 사랑하자고 외치고 실천해보면 나오기라도 할 사랑인가? 너희가 사랑을 아느냐?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교회 김도영집사님의 댓글

기대이상의 매서운 바닷바람이 우리를 무진장 반겼다. 아이들도 어른들도 설레이는 만남이었는데,첨엔 바람땜에 고개숙여지고 시간이 흐를수록 오목사님 가정 살아가는 모습땜에 또 고개숙여지고, 그리고 또 내가 죄인이었음을 나누며 고개는 더욱 아래로 아래로 떨구어졌다. 각자 처하라고 명령받은 곳에서 예수님땜에 고개 다시들고 사랑으로 이어가는 날들이리라. 예쁜다인이,신이,단이,수진이,요한이 그리고 또롱이까지..모두모두 다시만나고 싶어라. 대구쯤에서 다음을 기약하며..      우란엄마 김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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