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501b 울산강의-출애굽기 34장 : 언약 세우기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언약을 세울 때 방주 만들라. 얼마나 간단해요. 포클레인으로 만들고 나무 찍고 얼마나 쉬운데. 언약을 세우면서 헷 사람, 브리스 사람을 쫓아내는 언약을 세운다고 하니까 왜 그들을 쫓아내는 게 언약을 세우는 것일까? 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렇게 해야 되느냐? 차라리 뭘 만들라 하면 만들지요. 멀쩡한 사람을 내쫓으라. 얼마나 강하겠어요.
그 이유가 뭐냐? 그들이 사는 게 진짜 사람 사는 것 같이 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초코파이 선전할 때 뭐라고 합니까? 정이죠. 사람은 정으로 사는 게 기본이에요. 정 주고 정 받고.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은 그야말로 사람에 의한 사람을 위한 정으로 똘똘 뭉친 민족들이에요. 어떤 일도 다 사람을 위해서, 어떤 일도 사람에 다 유익 되라고. 서로 협조하고 서로 도와주고 서로 희생하고 서로 돌봐주고 배려해주고 사랑해주고 아껴주고, 그게 사람 사는 것 아니겠어요?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 아이디어, 인간의 행복이 뭐냐? 그 행복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것 다 하면서 봉사할 때는 봉사하고 양보할 때는 양보하고 남한테 배려할 때는 배려하면서 행복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위해서 사람 같이 사는 민족이, 헷 사람, 아모리 사람, 가나안 사람, 여부스 사람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사람에게 내쫓으라. 또는 내가 쫓아내리라고 하신 것은 이미 히브리, 이스라엘 사람이 그들과 똑같은 사고방식으로 지금 세상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내쫓으라는 거예요. 이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네 속에서 너를 쫓으라는 말과 같은 말이에요. 네 속에서 가장 너다운 것을 내어 쫓으라, 이것과 똑같은 겁니다.
제가 그냥 이야기해 볼 테니까 듣기만 해보세요. 인간이란 둘레에 전통이 대대로 내려오죠. 그 전통은 부모와 일가친척을 통해서 어릴 때부터 학습이 되고 세뇌를 주게 돼있어요. 역사와 전통을 혈통공동체라 하고 민족이라 하는 겁니다. 그리고 집안, 가문, 가계라고 표현해요. 그래서 인간이 갖고 있는 정신구조라는 것은 이미 위에서 전래, 내려온 것들이에요. 앉을 때는 똑바로 앉고, 양반다리 해서는 안 되고 신발은 바로 하고. 왜 그래야 되는지 물으면 안 돼요. 우리 집안은 이렇게 해야 돼. 그래야 우리 집안에서 살아남아. 우리 집안사람이 되는 거야. 그렇게 안 하려면 호적 파서 나가라는 거예요.
어떤 단체에서 나라는 것은, 나 말고 타인들, 외부인들이 나에게 강요한 그것으로 인하여 내 정체성으로 내가 누구인지 내용으로 들어오게 돼있어요. 그래서 사람은 행동할 때 그냥 행동하지 않고 나에게 이런 내용을 집어넣어준 사람의 눈치를 보게 돼있습니다. 그들의 응시된 시선을 항상 염두에 두게 돼있어요. 내가 술을 마시면 우리 아버지가 보시면 어떻게 하실까? 내가 이런 행동을 하면 엄마가 얼마나 싫어할까? 반드시 그렇게 돼있어요. 나답게 만들었던 모든 교육을 시켰던 그분을 항상 생각하면서 거기에서 나오는 법이 형성돼요. 그 법대로 살 때 나는 주변 식구들에게 인정을 받게 되고 인정받게 되는 것이 주체로서 정립되는 거예요. 너는 착한 아이야. 너는 훌륭한 아들이야. 훌륭한 내 딸이야. 내가 훌륭한 딸이구나. 훌륭한 아들이구나. 훌륭한 아내/남편이구나.
그래서 사람이 목숨 끊어지는 것도 죽음이지만 죽음보다 더 가혹한 죽음이 고립이에요. 사람이 식구 중에서 죽을 때 왜 그렇게 서럽게 우는지 알아요? 고립 때문에. 너 없이는 못 산다는 겁니다. 왜 못 삽니까? 마트에 가면 쌀 팔고, 반찬 팔고, 미역국도 다 돼있는데 왜 너 없이 못 사는데. 왜냐하면 미역국 끊일 때 물어보고 끊였거든요. “여보, 미역국 해줄까?” 지금 우리가 말 상대하는 대상이 있단 말이죠. 말 상대하는 대상을 의식하면서 미역국을 끊였고, 이렇게 짜게 하면 못 먹을 건데, 싱겁게 하면 싫어할 건데. 항상 염두에 두면서 어느새 자기가 자기답게 맞춰 가는 거예요.
아이들이 레고 랜드에서 놀면서 레고 맞추듯이. 맞출 때 그냥 맞추는 것이 아니고, “엄마, 이것 어때? 잘 만들었지요.” 반드시 관찰해달라는 겁니다. 그쪽에서 너는 예쁘다고 할 때 비로소 살아가는 의미가 발생되기 때문에.
우리가 평소에 그냥 그렇게 살다보니까 이런 걸 따지는 것을 생각 못했잖아요. 나는 나 혼자가 아니에요. 주변에 나를 이렇다고 하는 사람에 둘러싸여서 내가 되는 겁니다. 행동하는 것이요? 함부로 행동하지 않아요. 우리가 이런 행동하게 되면 남들이 뭐라고 하겠느냐? 집안 식구가 뭐라고 하겠는가? 내 자식이 얼마나 나쁜 엄마라고 하겠는가? 항상 염두에 두게 돼있어요. 왜 집에서 기도할 생각 못합니까? 왜 교회 나와야 되지요? 교회 나올 때 교회 사람들이 나를 보는 따스한 시선과 칭찬어린 말들이 내가 평소에 생각했던 나와 근접하게 일치되기 때문에 우리는 사는 보람을 느끼는 겁니다.
만약에 교회 나왔다. 아무도 누구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벽만 쳐다보고 있다가 인사해도 누구도 받아주지 않고 밥도 안 먹고 가게 되면 집에 있는 거나 교회 오는 거나 차이점이 없이 똑같잖아요. 절대로 그렇게 되지 않죠. 그리고 정말 그렇게 한다면 누가 욕해도 귀에 안 들어와야 돼요. 그러나 욕하면 귀에 왜 그렇게 잘 들어오는지, 누가 험담하면 왜 그렇게 잘 들어오는지.
생각해보세요. 욕이란 것이 주먹으로 치는 게 아니잖아요. 그냥 말을 초속 340미터 음파가 귀전에 울리는 거잖아요. 그런데 욕 얻어먹었다고 밥맛이 없지요? 똑같은 조미료 쓰고 똑같은 탄수화물, 단백질 들어갔는데 왜 밥맛이 안 나지요? 희한하지 않습니까? 평소에 아들 앞에서 밥을 잘 먹다가 아들 오고 난 뒤에 밥맛이 없지요? 반찬에 양념을 안 해서 그래요?
나라는 것이 육체만 내가 아니에요. 내가 아는 것까지 포함해서 내가 되는 거예요. 내가 아는 사람까지 포함해서 나의 영역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것을 뭐라고 하느냐? 게임이라 해요. 왜 이걸 게임이라 하느냐 하면, 게임엔 반드시 규칙이 있어요. 게임을 누가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돼요. 누가 만들었는지는 전혀 상관없어요. 이미 만들어진 게임대로 살게 되면 게임 맨이 되고 게임에 합하면 그것이 제2의 천성이 됩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기차나 버스에서 학생들 보세요. 전부 다 뭐하고 있어요? 스마트폰 보고 있다고. 그런데 어떤 선생님 빼앗아 가면 선생님한테 달려들고 그러지요. 학교에서 스마트폰 다 회수합니까? 민주주의 학교네. 수업시간에도 보고 수업 끝나면 보는 거예요. 만약에 스마트폰이 발생에 안 됐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뭘 봐요? 새로운 게임의 룰이 들어오는 거예요. 스마트폰을 애플이 만들었다는 건 필요 없어요. 이미 만들어진 게임이 자기 몸이 거기에 빠져서 제2의 천성으로 변해버린 거예요. 변한 이상 스마트폰을 빼앗으면 나의 일부에 대해서 공격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겁니다. 이미 몸은 거기에 물들어 있으니까. 담배 피우다 끊어보세요. 못 참지요. 술 먹다가 술 끊으면 못 참아요.
인생이 뭐냐? 그게 인생이에요. 그냥 게임이에요. 내가 만든? 아니에요. 남이 만든 게임에 적응하다보니까 제2의 천성, 제3의 천성이 된 채 이유도 목적도 없어요. 그렇게 살아가야 되는 줄 알고 그냥 무조건, 무조건 살아가는 거예요. 효도 왜 해야 되는데? 효도 안 하면 남이 욕할까봐. 제2의 천성이 됐으니까 남이 없더라도 효도하는 그것이 자연스럽게 되고 그게 나한테 적성에 맞아요.
아침에 문안 인사드리고 어머님에게 전화하는 것, 적성에 맞아요. 그런데 이웃집에 누가 이사 왔는데 전화하고 문안드리는 정도가 아니고 매일같이 부모님 샤워시키고 목욕시킬 때 그 사람은 돌아버립니다. 지금까지 자기 게임에서는 효도였는데 옆에 효도 도사가 오고 난 뒤에 그것은 효도가 아니고 성의 없음, 불효막심이 돼요. 따라서 둘 중에 하나에요. 그 사람을 미워하든지, 아니면 그 사람 보면서 흉내 내서 내 효심을 업그레이드 시키든지 둘 중에 하나에요. 그 사람의 효도 게임에 빠진 게 되죠. 이해되십니까?
그런데 그 사람이 이사 가고 다음 사람이 왔는데 이건 부모 찾지도 않아요. 설날, 추석에 오만 원 주면 끝나. 그런데 주식하면 주식 대박나고, 땅 사면 땅 값 오르고, 자식을 공부 잘하지. 땅 하나 사면 개발한다고 보상금 받고, 아이들 공부 잘하고, 부인은 미인이고, 승진 잘 되고. 그건 뭡니까? 지는 열심히 효도했는데 승진은커녕 이번에 구조조정대상이고. 효도하면 복 받는다고 어른들이 이야기했거든요. 그게 게임이라니까요. 효도 안 하면 이상하게 일이 안 될 것 같지요. 왜냐하면 이미 게임이 내 천성이 돼있으니까 그 천성을 위반하게 되면 벌 받을 것 같아. 그게 게임이에요.
여러분, 우리가 만든 현실에 스스로 속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아무 상관없는 거예요. 그것은 이방민족들이 도사에요. 이방민족들이 자연스럽게 형성된 그런 천성을 똑같이 하나님 백성들도 그대로 모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게임을 하나님께서 다른 용어로 이야기합니다.
15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여러분이 읽어보세요. “너는 삼가 그 땅의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지니” 됐습니다. 너는 삼가 그 땅의 거민을 언약을 세우지 말라고 했지요. 뭐냐? 그들의 노는 게임에 합세하지 말라는 말은, 이미 그들과 똑같은 게임을 지금 네가 하고 있다. 다를 바 전혀 없어요. 하나님 말씀이요? 전혀 그런 것은 내 천성이 아니에요. 이웃 사람 말씀, 내 천성입니다. 이웃이 뭐라 하는가, 그게 교회에서 성경 말씀이 뭐라 하는가보다 우선시 돼요. 성경 말씀 전혀 귀에 안 들어옵니다.
3층 아줌마, 아이들 좀 조용하게 해주세요. 이게 귀에 더 들어와요. 쿵덕쿵덕 하지 마세요. 아파트 1층의 아줌마 이야기가 더 귀에 들어와요. 주의 말씀 들어오지 않습니다. 왜? 그건 우리 천성이 아니니까.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이 우리 천성을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뭐로 산다? 아까 초코파이 이야기했는데, 정으로 사는 거예요. 정 주고 정 받고 사는 거예요. 사랑은 젊을 때 이야기고, 사랑으로 결혼했다, 정으로 사는 거예요. 그게 부부에요. 사랑해서 사는 게 아니고 그놈의 정 때문에 사는 거예요. 이 나이에 무슨 사랑이 있어요.
이미 그 집안의 게임에 말려들었습니다. 여자가 시집간다? 무슨 뜻입니까? 시집에서 노는 게임을 위하여 친정에서 노는 게임을 버리라는 말이거든요. 처음에는 안 버리려고 친정 자주 가고 하다가 나중에 아이 낳고 시아버지, 시어머니가 아이 봐주면 친정 맨인지 시집 맨인지 구분이 안 돼. 나중에 둘 다 똑같이 치매 걸리면 친정 엄마보다 시어머니를 먼저 챙기게 돼요. 시집에 살다보니까 제2의 천성이 되어서.
이미 그 게임이 물들었어요. 따라서 주께서는 이 게임을 갖고 있는 이방민족을 너희들을 통해서 치겠다는 말은,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과 대적하거나 칠 수 없다는 것을 익히 아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거예요. 여기 15절에 보면, “너는 삼가 그 땅의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지니”라고 했잖아요. 이게 뭔 뜻이겠어요? 이미 너희들은 그들과 동일한 언약을 세우고 동일한 게임 속에서 그들이 믿는 신으로 이미 장착돼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하는 겁니다.
16절 봅시다. “또 네가 그들의 딸들로 네 아들들의 아내를 삼음으로 그들이 딸들이 그 신들을 음란히 섬기게 할까 함이니라 너는 신상들을 부어 만들지 말지니라” 이런 말씀은 다 인간들한테는 헛소리에요. 해도 소용없어요. 안 듣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우선순위에서 밀립니다. 보이는 인간이 우선순서에요.
사람은 정 때문에 살지 하나님 보고 사는 게 아니에요. 가까운 이웃의 정이, 불교신자든 교회 안 가도 관계없어요. 그저 떡만 나누면 친구 돼버립니다. 그들 앞에서 예수 이야기도 안 해요. 마음 상할까봐. 나한테 불이익 될까봐. 사람은 옆 사람이 도와주면 점점 더 신나요. 사는 게 재미나요. 도와주는 사람 많고 친구 많으면 사는 게 편해요. 제가 아까 했잖아요. 고립되면 못 산다고. 사람은 혼자서 못 살아요. 어떻게 지가 스스로 머리 깎습니까?
미장원에서 주인과 싸워보세요. 싸울 때는 신났지. 그 근처 다음 미장원은 15킬로미터인데. 꼴 보기 싫어서 15킬로미터 가려면 기름값만 더 들고 차비만 더 드는데. 지만 손핸데. 참을 걸. 괜히 성질나서 무슨 당, 정치인 이야기하다가 그만 삐져서 둘이 정치적 성향이 달라서 멀리 15킬로미터 갔는데 머리도 이상하게 나오고. 하나 이익 보려다 여럿 손해 보는데. 거기서 배운 요령이 뭐냐 하면, 종교를 떠나서 그저 좋은 게 좋은 거예요. 그게 우리의 천성이 됐다니까. 어떻게 이 천성을 변화시킵니까? 이걸 버리라고? 버리면 죽으라고.
안 믿는 사람과 결혼해서 당신, 연애할 때 교회 나간다고 약속했잖아. 처음에는 나와 줘요. 그 다음에 피곤하다고 자고, 등산 간다고 안 나오고, 6개월에 한 번 나가고, 크리스마스 때 나가고 일년 때우고 그래요.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아내가 어이, 나와 주지. 그러다가 성령이 임해야 되는 거지. 아는 신학, 복음 다 동원해서 비겁한 변명을 해대는데. 그 다음부터는 여보, 교회 가지 말고 놀러가자. 전도? 등산 전도라. 남편과 싸울 필요가 뭐 있어요. 친하게 지내도 행복할까, 말까 한데. 잘해주고 친하게 지내면 최고지요. 누가 그래요? 내 몸이 그걸 요구해요. 내 몸이 편한 게 최고에요. 종교고 복음도 나중이라니까. 죽을 때 돼봐야 아는 거고. 살 때 편하게 살아야지. 행복이 최곤데.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은 언약을 세울 수 없다는 거예요. 인간이 갖고 있는 아담의 태생에서 나오는 행복, 그게 목적이지 언약 세우는 것이 인간의 목표가 아닙니다. 목표가 아니기 때문에 인간은 그런데 관심 없어요. 복음이고, 예수 관심 없습니다. 그저 지 편한대로 사는 게 행복하면 최고에요. 안 됩니다. 안 되는 걸 주께서 되게 하십니다. 구원하십니다. 안 되는 걸 되게 하셔요.
어떻게? 12절에 나옵니다. “너는 스스로 삼가 네가 들어가는 땅의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라 그들이 너희 중에 올무가 될까 하노라” 올무가 되게 한다. 함정이 되게 한다. 뜻은 빼도 박도 못하게 만든다. 얽히고설킨 게 너무 많게 한다. 이 말은 이미 주도권이 그들에게 넘어갔다. 그들이 나를 어떻게 사람 대우해주고 사람으로 인정해주느냐에 따라서 우리는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는 그런 인생으로 전락했어요. 남들이 나를 알아주면 행복하고 남들이 나를 싫어하면 불행해지고 이미 우린 그런 몸으로 정리정돈 돼버렸어요.
하나님, 구색에 불과합니다. 예수, 아무 의미 없습니다. 내 몸이 세상적으로 요청하고 있습니다. 나를 행복하게 해준다면 얼마든지 하나님께 감사하겠다. 이미 내 몸이 그런 식으로 비언약적으로 구성이 돼있어요. 그걸 제가 게임이라 했지요. 게임에는 룰이 있어요. 법칙이 있습니다. 그 게임의 룰에 어긋나게 되면 탈퇴당합니다. 탈퇴당하면 우리는 그 다음부터 죽음을 느끼고 못 사는 거예요.
사람들은 편하게 생각해요. 누구와 연애하다 헤어지면 부모가 뭐라고 합니까? 세상에 남자가 그 사람밖에 없나? 부모는 몰라도 너무 몰라요. 그 남자와 그냥 일대일로 사귄 것이 아니고 그 남자와 제3의 게임을 만들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 남자가 떨어진 게 문제가 아니고 그 남자와 더불어 만들어진 게임을 내가 구해야 된다는 이게 너무 죽고 싶은 거예요. 너무 아픈 거예요.
남자가 여자한테 빠져있는데 여자가 헤어지자고 했다. 전화도 안 받고 이사 해버리고 연락도 안 될 때 그 남자 미쳐버립니다. 술 먹고 와서 밤중에 놀자고 온 아파트 단지에 고함지르며 공개 망신 시켜서 복수하는 이유가, 내 게임 내놔라. 너와 만들었던 아름다운 추억 내놔라. 나는 거기에 올인했다는 거예요. 몸 바쳤다는 거예요. 돈만 날린 게 아니에요. 나는 모든 정과 사랑을 거기다 쏟아 부었다. 그 게임 내놔라. 봉창 좀 열어봐라. 얼굴 좀 보자. 봉창 열었는데 그새 다른 남자가 있다면 그때 미쳐버려. 게임을 자신의 행복을 위한 게임입니다. 모든 게임은 오직 나밖에 모르는 나만 잘 되면 된다는 게임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왜 이방민족을 내치라고 하느냐? 우리가 내칠 수 없기 때문에. 우리 힘으로 그들을 떨칠 수 없습니다. 안 되는 걸 주님이 해내시지요. 주께서는 말씀을 해주셨으면 우리에게 하라는 게 아니고 안 되는 걸 뻔히 알면서도 하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안 되는 실패자로 주께서는 언약대로 해내시는 겁니다. 어떻게 해내시는가? 궁금하죠. 이것 꼭 아셔야 됩니다. 그게 18절부터 나옵니다. 그걸 용어를 간단하게 하겠습니다.
죽음의 반복을 심어놓습니다. 축제, 절기, 아빕월 기한에 무교절, 유월절, 맥추절, 수장절 그리고 나팔절, 속죄일 그리고 초막절, 이게 바로 이스라엘에 하나님 언약 속에 있는 절기입니다. 그런데 아까 제가 인간은 게임이 빠졌다고 했지요. 절기는 주님이 만들어낸 게임입니다. 게임에는 규칙이 있는 것 아시지요. 주님이 즐거워하는 게임이 우리 게임 속에 침노하는 거예요.
마태복음 11장에 보면, 천국은 세례 요한부터 침노를 당한다고 했거든요. 거기 천국이란 기존에 인간들이 생각하는 천국이고, 세례 요한이 와서 그걸 박살낸다는 뜻이에요. 침노하는 자마다 빼앗는다. 새로운 천국으로 장악한다는 뜻이거든요. 그러니까 이건 공격이에요. 공격이란 사전에 통보 안 합니다. 사전에 우리의 의견을 물어보지 않습니다. 그냥 검찰청에서 수색영장 발부해서 쳐들어오는 것처럼, 산 속에서 도박하는 현장에 경찰들이 덮친 것처럼 갑자기 하나님이 자신이 즐기는 게임으로 우리가 몸에 익힌 게임 속에 들어와 버려요.
그게 출애굽의 반복입니다. 출애굽 할 때 그들이 어떻게 나왔습니까? 칼 들고 나왔습니까? 화투치다 나왔습니까? 어린양의 피로 입구에 발랐지요. 그것은 집안 전체가 어린양의 죽음이 덮친 거예요. 그리고 유월절은 평소에는 양을 물에 삶아 먹어요. 그러나 그 날은 구워먹어야 되고, 음식도 비스듬히 누워서 먹었는데 서서 먹어요. 나물도 데쳐서 양념해서 먹는 게 아니고 쓴 나물 먹어요. 몸에 좋으라고 갱년기에 좋으라고 백수오 먹는 게 아닙니다. 기존의 게임을 포기하라는 거예요. 네 게임을 유지하게 되면 찾아오는 죽음의 천사가 죽여 버린다는 겁니다. 네가 죽음을 알아? 그 동안 인간들 게임에서 죽음이란 이웃사람한테 밉상 받는 게 죽음이에요. 극한 죽음이에요. 숨 끊어지는 건 기본이지만.
하지만 인간들은 뭘 경험 못했느냐 하면, 하나님 앞에서 죽어봤어요? 하나님 앞에서 소외 돼봤어요? 하나님 앞에서 밉상 받아봤어요? 그건 하나님이 찾아와야 느껴지는 거예요. 그럼 하나님이 어떻게 찾아오느냐? 언약을 통해서 찾아와요. 양 피를 유월절에 발라라. 여기에 위반하게 되면 그들은 언약 게임에서 탈락되는 겁니다.
자, 이 게임을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도 몰라요. 그러니까 침략이고 그냥 일방적으로 들이닥치는 거고, 수색영장 발부받아 들어오는 거예요. 도둑님이 오듯이 쳐들어오는 겁니다. 내 자존심과 명예심, 행복 이런 것 전혀 고려하지 않아요. “주님, 그렇게 신발 신고 들어오면 단란한 가정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대들 수 없어요. 그냥 쳐들어와요.
뭘 가지고? 칼 들고? 아니요. 몽둥이 들고? 아닙니다. 낯선 죽음을 들고 옵니다. 네가 지금 놀고 있는 게임은 하나님의 저주를 유발하는 게임이다. 그런데 너는 이 소식을 듣는다 할지라도 결코 네 힘으로 그 게임을 접거나 그 게임에서 탈퇴할 수 없게 돼있다. 왜? 나라는 정체성은 어디서 형성됐는데? 인간들 게임에서 형성되었기 때문에 그 게임에서 벗어난 순간 누가 없어요? 나다운 내가 없어요. 붕 떠버려요.
여러분들이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중국 국경과 마주하고 있는 북한 경비 군인들이 군복 입은 채로 국경을 넘어간다는 겁니다. 그런데 기껏 가봐야 민간인 몇 명 죽이고 그뿐이에요. 군복이 어느 게임이 속합니까? 인민군에 속하는 게임이거든요. 이 게임 복장을 하고 중국으로 가봤자 이건 티가 나도 너무 티가 나. 그쪽 게임이 넣어주질 않아요. 신고 들어와요.
군인들이 가끔 휴가 갔다가 늦게 가고 복귀하기 싫어도 군복 입은 채로 시내 돌아다녀보세요. 갈 곳은 군대 내무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자기 주체는 현재 군인 신분이기 때문에. 주님이 찾아오고 성령이 찾아오고 백날 해봤자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주여, 그래서 어쩌란 말입니까? 금식할까요, 맨날 기도원에 가서 살까요, 직장 때려치울까요, 가정하고 이혼할까요, 예수 믿는다 치고 교회에서 살까요? 아니. 그런 것 하지 마.
지금 몸은 이 세상 게임에 푹 젖어있고 주께서는 십자가 죽음으로 쳐들어오면 그 양쪽에 끼인 나는 어떻게 할까요?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럼 주님께서 네가 하던 게임이나 충실해라. 지금 고스톱 치는데요? 고스톱 잘 쳐라. 그대로 하는 거예요. 왜 그대로 하느냐 하면, 그게 우리가 잘 해요. 평소에 했던 게 그 생활이기 때문에 아주 자연스럽게 너무너무 잘해요. 아무 의식함이 없어. 아무 거리낌 없이 마음껏 몸 편한대로 움직이는데 대해서는 이것을 막을 어떤 법도 없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네 마음대로 하시는 거예요, 왜 그렇게 했을까요? 그 이유를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주님이 하시는 게임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게임이 아니에요. 법을 배우면 되지 않습니까? 그 법을 배우면 위선이에요. 그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위선이에요. 주님 게임의 특징은, 인간이 해낼 수 없는 게임이에요. 그 법칙을 해낼 수 없어요.
그럼 어떻게 하느냐? 우리는 아무리 주의 말씀대로 살아봤자 어설프기 짝이 없어요. 그러다보니까 우리는 죄가 더 죄를 짓는데 어떤 죄를 짓느냐? 죄 지어놓고 이걸 믿음의 이름으로 더 큰 근본적인 악을 지어버려요. 차라리 네가 하던 대로 하란 말이죠. 어떻게 하느냐? 주께서 따라 붙으면 되잖아요. 계속해서. 돌아보면 따라 와 있고, 돌아보면 따라 와 있고. 화장실에도 목욕탕에서 따라 와 있고 식당에 가도 계시고, 잠자리에도 계시고, 영화관에도 주님 거기 계시고, 직장에 가도 거기 계시고, 가정에서도 아이와 함께 거기 계시고, 아예 우리 꿈속에도 계시고.
우리 마음에 계시면 주님의 게임이 우리한테 침노하는 식이 돼버려요. 항상 옆에 계시니까. 그걸 동행이라 하는데. 동행하시면서 뭘 하느냐 하면, 잘 들어보세요. 중요하니까 천천히 하는데, 남들이 알지 못하는 이질적인 느낌을 우리로 하여금 갖게 하십니다. 이걸 구약으로 하면 힘들기 때문에 제가 누가복음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거지만, 누가복음 보기 전에 강도 이야기 먼저 해보면, 오스트리아 유학생이 저한테 질문했지요. “강도도 구원받았는데 살인이 뭡니까?”라는 질문을 했고 그걸 십자가마을에 올려놨지요.
강도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이 구원받았지요. 강도가 자기 게임 포기했습니까? 개과천선해서 착한 일하고 귀농해서 농사지었습니까? 강도가 언제 체포됐습니까? 강도질하다 체포되었겠지요. 끝까지 강도질한 거죠. 자기가 강도질해야 사는 게 제2의 천성이에요. 본성이에요. 그것 외에는 다른 게임을 할 줄 몰라요. 그런데 강도가 옆에 있는 예수님에게 “예수여 당신의 나라가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할 때 주님이 하신 말씀이,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했지요.
강도가 놀란 것이 주님 게임의 일부로 편입됐다는 사실을 본인이 수용한 겁니다. 내가 나 된 것은, 내가 강도된 것은 주의 뜻이다. 내가 강도란 의미를 삭제하고 주께서 강도되게 하셨잖아요, 하는 거예요. 내가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생각되게 할 때 생각되게 돼있어요. 나는 수동태니까. 나는 능동이 아니고 수동이니까. 주께서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주께서 이런 아이를 낳게 하셨습니다. 주께서 여기 모이게 하셨습니다. 항상 주체를 주님 쪽에 주어를 두고 나는 서술어가 돼버린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 게임밖에 모르죠. 우리 게임은 정 주고 정 받는데 그렇게 하도록 주께서 의도적으로 하신 거예요. 정 주고 정 받는 생활하도록 만드신 겁니다. 그걸 차후에 소급해서 그것이 발견되는 거예요. 그게 언제까지? 2015년 5월 1일 저녁때까지 한 거예요. 그럼 내일 되면? 5월 2일 한 것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도록 조치한 거예요. 그걸 5월 2일에 알거든요. 5월 3일 되면? 5월 2일까지 한 것을 5월 3일에 아는 거예요. 그러다가 늙어 죽기 직전에 어떻게 됩니까?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성경대로 되잖아요. 언약 세워졌잖아요. 나라는 몹쓸 쓰레기 같은 인간을 통해서 주께서 십자가를 드러냈으면, 십자가가 뭡니까? 마지막 언약이잖아요. 언약 드러났잖아요. 됐잖아요. 뭐요? 끝났잖아요. 갑자기 문제 해결되니까 이상하죠.
지금 제가 문제를 시작한 것은 뭐냐 하면, 우리는 우리 게임밖에 모른다. 나는 이 세상 사람과 사고방식이 똑같다. 나 아픈 것은 길길이 뛰고 남 아픈 것은 신경 안 써요. 내 아이가 공부 못한 것은 난리 나고 원망하고 남 아이 공부 못하는 것은 감사하고. 우린 그런 식이에요. 남 못 되는 건 그렇게 좋고. 방송에서 서세원이 이혼한다고 하는 건 기분 좋고. 왜? 나보다 잘 살았으니까. 나보다 잘 살고 나보다 멋있는 것이 불행해줄 때 그쪽의 불행이 나의 기쁨이 되는 거예요. 이게 나쁘다, 좋다와 관계없어요. 천성이 그렇다니까. 우리의 타고난 천성이에요.
무슨 인간이 새 사람 없어요. 우리는 맨날 내 행복만 상상해요. 천국도 나 행복해지는 나라를 천국으로 간주해요. 언약이란 우리가 상상한 천국 말고 이 땅에서 나로 만들어내요. 강도 들어가는 나라, 창녀도 들어가는 나라, 천국 만드십니다. 단 어떤 조건이냐 하면,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인정하는 조건 하에 들어가게 하시는 거예요.
자, 그렇다면 그래도 언약을 지켜야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 게임의 룰을 지켜야 되지 않습니까? 그 점을 설명 드리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하나의 게임을 지킨다는 것은, 예를 들어서 바둑은 돌을 번갈아 놓는 게임이에요. 한쪽만 놓는 건 게임이 한 됩니다. 장기에서 포는 타 넘는 거고, 차는 똑바로 가는 거고, 졸은 한 칸만 가는 거고, 이게 게임이거든요. 장기, 바둑을 인간이 할 수 있는 이유가, 그 룰은 우리가 할 수 있는 룰이기 때문에 하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아까 하나님의 게임, 하나님의 언약은 우리가 할 수 없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들은 할 수 없는데 하나님께서 어떤 언약을 이야기해주셨다. 그 언어, 단어 하나가 인간 세계에서 통용되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거든요. 언어란 단독으로 있는 게 아니고 거기에 얽히고설킨 의미의 교차로 안에서 개념이 성립돼요. 단어 하나에 의미가 그걸 중층결정이라 하는데, 단어의 의미가 겹쳐있다고요. 그래서 그 단어가 쓰이는 장소에 따라서 단어의 의미가 그때그때 달라요. 어떤 단어와 만나느냐에 따라서 새로운 의미로 등장이 된다니까. 문맥이 완전히 다른 문맥이 되고 그래요.
하나의 예를 들어볼게요. “사모님, 날씨 좋네요.” 이 짧은 문장이지만, 목사님이 기분 좋아서 하는 이야기일 수도 있고, 지금 시비 건다고 할 수도 있는 문제고. 날 좋으니까 빨리 끝내자는 이야기인가, 날 좋으니까 내일 놀러가자는 이야기인가. 뉘앙스가 다 달라요.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셔도 그 말 자체가 인간이 쓰는 언어로 해버리면 이미 여기에 뭐가 준비돼 있느냐 하면, 그 단어를 평소에 썼던 사례들이 깔려있어요. 깔려있어서 기분 따라 뽑아내요. 지 기분 따라 필요한 대로 뽑아서 쓴다 말이죠. 그 단어의 의미를 뽑았다는 말은 그 단어에 적힌 대로 자기가 실해에 옮길 가능성이 보인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게임의 단어가 내 게임 속에 와버리면 내 게임에 의해서 우리는 실행에 옮길 수 있다고 자부하게 돼요. 그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주의 말씀을 지키자고 한 것이 그것 때문에 그런 거예요. 지금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지만. 주의 말씀 지킵시다. 왜? 지킬 수 있기 때문에 준 말씀이니까 지키자고 나오는 거예요. 절대로 지킬 말씀 아닙니다.
살인하지 말라. 오스트리아 유학생이, “살인하지 말라는 의미가 뭡니까?”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살인죄입니다. 마태복음 5장을 언급했거든요.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그 말을 못 알아듣는 거예요. 살인은 칼 들고 피를 내고 죽인다는 뜻이지 그냥 때리는 것은 살인이 아니에요. 상처 내는 거지. 그게 인간 세계, 게임에서 통하는 용례, 단어의 용법이라니까요. 거기다가 때리는 것도 살인이라고 하면 혼란스러워서 안 돼. 인간 게임이 무너져요. 의사소통이 안 되니까. 그 게임에서 반칙이 돼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줄 때 인간들은 가만있는 게 아니고 그것을 지킬 수 있다고 그걸 붙잡아요. 붙잡는 순간 하나님의 뜻을 잘못 이해했다고 공격대상이 되는 겁니다. 저주를 받게 돼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말씀을 줬다는 것은 지킬 수 있다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얼마나 평소에 인간적인 사고방식 속에 찌들어 있다는 것을 폭로시키는 계기로써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신 거예요.
간음하지 말라니까 저는 평생 간음 안 했어요. 이럴 줄 알고 그런 말 한 거예요. 마음속으로 음란한 생각한 것도 간음죄다. 이미 마태복음 5장에서 추가적인 해석을 더해버리죠. 그러면 어떤 사람이, “하나님, 저는 나이 육십 되도록 마음속으로도 여자 보고 음욕을 품은 적 없습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겠습니까? 십 년 더 살아봐라. 생기게 해줄게.
사람들은 자기 본색과 남의 본색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여러분, 다르다면 정이 안 통합니다. 인간이 인간에게 정을 준다는 것은 본색이 똑같다는 이야기입니다. 전부 다 한 욕조에서, 한 풀장에서 나온 성격을 나눠가진 거예요. 신자나 불신자나 성질 똑같고 행복추구 똑같고 이기주의 똑같고 전혀 다를 바 없습니다. 다만 성령이 임하게 되면 그렇게 하신 분이 의도적으로 따로 계시는데 그분이 언약을 세우기 위해서 예수님 자신의 공로를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그런 품성을 허락하셨다는 걸 믿는 사람, 나는 죄인 중의 괴수인 것을 고백하는 사람, 그 사람이 언약 안에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한테 와서 설움 받고 오해 당하신 그분이 도리어 우리의 구세주인 것을 이제 알았사오니 십자가 앞에서 늘 자신의 모습을 부끄럽게 생각하면서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