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강-신 5장 18절(간음하지 말라)15041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5장 18절입니다. 구약성경 270페이지입니다.
“간음하지도 말지니라”
이 말씀을 할 때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간음 했다고 여기는 사람의 견해와 간음하지 안 했다고 여기는 사람의 견해가 서로 다릅니다. 간음하지 안 했다고 여기고 이 본문을 볼 때 어떤 자신감 같은 것, 흐뭇함 같은 게 있어요. 안 했지롱~ 나는 안 했지롱~ 이것은 보편 가운데, 평범 가운데, 특수성을, 자기를 주인공으로 내세워서 특수성을 끄집어내는 방식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돌을 들고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니가 주인공이냐 하는 그 문제를 다루시는 겁니다. 모든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모든 것에서 율법이 있다는 것은 율법을 주신 자에 한에서만 율법에 대해서 책임지고 지키거나 거기서 심판할 권한이 있습니다.
근데, 우리는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을 우리가 제정하지 않았어요. 제정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내가 나를 특수한 존재로, 남들은 간음해도 나는 간음하지 않는 특수한 존재로 간주하게 되는 겁니다. 그 간주한 순간 우리는 심판주로 드디어 행세하기 시작합니다. 마치 자기가 돌판에 직접 글을 쓴 것처럼. 간음하지 말라는 말을 자기가 제정해서 쓴 것처럼 그렇게 행세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한테 저촉되지 않는다고, 간음하지 말라에 대한, 거기에 대한 해당되는 벌칙만은 나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 속에서 우리는 뭘 찾아야 되느냐 하면 이 말씀을 제정하신 분이 제정할 때, 그 안에 어떤 성취성을 품고 이 말씀을 주었는지를 우리는 찾아가야 돼요. 하나님께서는 간음하지 말라를 가지고 온 인간의 세계에 휘젓고 다니십니다.
원래 간음하지 말라는 것은 사실은 책임이 하나님한테 있어요. 왜냐하면 아담이 한명이었을 때는 간음하지 말라가 성립이 안 돼요. 근데 사람이 한 명에서 두 명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게 문제네. 이게 문제였어요. 이 세상에 여자 한 명 있고 남자 한 명 있다면 간음이라는 자체가 할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근데 남자도 왜 그리 많은지. 그것도 잘난 남자도 왜 그리 많은지.
그리고 예쁜 여자도 한 명만 있는 게 아니라 왜 그리 많은지. 다 늙어 가면 소용없지만. 왜 그리 많은지. 예쁘다, 안 예쁘다, 못났다 하는 것은 이미 많은 다수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다수 사이에서 경쟁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경쟁을 해놓고 예쁘면 간음 대상이고, 안 예쁘면 간음 대상이 아니고, 라는 자체가 이미 간음죄에 대한 원래 뜻을 훼손하고 있는 겁니다. 그 비교를 누가 나서는가? 특수하다고 여기는 자기 자신이 나서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이 간음하지 마라는 말씀을 줬잖아요. 기다리지 않습니다. 그걸 확대시켜 나갑니다. 레위기 20장 10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반드시 죽일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고 난 뒤에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어요? “죽더라도 하겠다.” 이래 나오면 할 말이 없잖아요? “죽을게. 그래. 나는 저 여자만 사랑할 수 있다면 나는 내 목숨도 내놓겠습니다.” 하면 이런 사람을 말릴 수가 없어요. “그저 그 여자만 허락하소서. 주여.” 임재범의 고해에 나오는 가사처럼. “뭐든지 할 테니까 저 여자만 허락하소서.” 이거는 그 여자를 위해서 목숨을 바쳐야 되겠다는데요. 간음죄의 이런 협박도 별로 통하지 않은 거 같아요.
신명기 22장 22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남자가 유부녀와 통간함을 보거든 그 통간한 남자와 그 여자를 둘 다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이 말씀을 딱 하게 되면 “죽이라 죽이라!” 이래 나오고. “죽지 뭐. 까짓것 죽지 뭐.” “저 여자와 하룻밤만 보낼 수 있다면 내 목숨 값도 내놓겠다.” 이런 용감한 사람이 나온다면 그 사랑, 되게 대단한 사랑처럼 보이겠네요. “나한테 어떠한 실패와 어떠한 지적과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나를 흉본다 할지라도 그 여자와 사랑할 수 있다면 나는 아낌없이 내 명예와 과거를 다 던지겠다.” 이래 나오면 “이 말씀 주셨는데도 야, 세네! 통하지도 않고.” 이래 나온다 말이죠.
자, 그랬던 주님께서 로마서 13장을 보겠습니다. 8절,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9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갑자기, 로마서 8절, 9절을 보면서 우리가 갑자기 마음이 안심이 된다는 느낌은 웬 느낌이죠? 아이고 살았다는 느낌!
어느 말씀이 더 세냐? 하는 거예요. 간음하지 마라 죽인다는 그 말씀이 셀까요? 아니면 사랑만 한다면 니가 어떤 간음과 어떤 살인을 할지라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겠다. 너를 의인으로 간주하겠다. 어느 쪽이 우리한테 더 세게 느껴집니까? 바로 자기 내부에서 어떤 특수성도 삭제된 채, 특수성이 없이 될 경우, 그런 사람에게만 오직 주님의 사랑만 바라보게 되는 겁니다. 나는 괜찮은데, 나는 특별난데, 나는 우수한데, 남들은 죽여라. 그런 사람에게 오히려 화를 돋우는 것이 바로 어떤 용서라는 혜택 자체를 하나님께서 그만 장치를 준 것에 대해서 불만스러운 거예요.
누가 누가 잘하나 끝까지 가보자 이런 식이 오히려 마음에 와 닿는 거예요. 왜? 자기는 죄를 지은 기억이 없기 때문에. 너무 봐줘도 너무 봐준다는 느낌 들잖아요. 그래서 간음이라는 문제를 푸는 것이 굉장히 그렇게 난해한 거예요. “나는 레위기 20장보다, 신명기22장보다, 나는 신약에 로마서 13장 8,9절 그걸 택할래. 줄 쫙쫙 그어놔. 나는 이걸 택할래.” 우리가 여기서 문제를 해결해야 돼요. 어떻게 해서 레위기에 협박 공갈이 나오고, 협박 공갈은 아니지만, 간음하면 죽인다고 했던 하나님이, 같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로마서 13장에서 마치 율법이라는 것이 있으나마나한 것처럼, “뭐 참조로만 해라. 니한테는 적용 안 된다.” 이런 식으로 풀어놔버리면 그 가운데 도대체 무슨 일이 있기에 그걸 풀어놔버리느냐 이 말입니다.
그걸 찾아내야 하거든요. 로마서 2장 21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하느냐” 22절,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하느냐” “가르치는 너가 그 말씀을 가르치면서 어떻게 그 가르친 말씀에 스스로 위반자가 되느냐” 라고 언급했어요. 로마서에서.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서 해답을 얻었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은, 가르친다는 게 문제가 되네요. 가르친다는 게. 가르치려면 자기는 완벽하게 그 말씀을 지킬 자에게만 그걸 가르쳐야 돼요.
근데, 분명히 과거에는 어기지 않았다 할지라도 앞으로는 어길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 말씀을 가르칠 수는 없습니다. 가르칠 자격자가 이 세상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그럼 말씀을 가르칠 자격자가 없다면 어떻게 되는가. 말씀은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스스로 움직여서 말씀 자체 내에서 과정을 만들어요. 이 과정이라는 말이 오늘 설교의 제일 중요한 말씀인데, 과정을 만드는데 무슨 과정이냐 하면, 간음했던 자가 나중에 간음했음에도 불구하고 용서받게 된 그 과정을 담아서 표현할 수 있고 증거 할 수 있는 사람을 새롭게 발굴하고 찾아내는 거, 이게 주의 말씀의 기능입니다.
지적하고 정죄하되, 그 지적과 정죄가 나중에는 용서로 바뀌면서, 그 과정을 익히 온 몸으로 그것을 지금 누리고 있는 사람, 그 온 몸 속에서 반응이 되고 활동이 되는 그 사람이 하나님의 성도인 겁니다. 과정입니다. 아침에도 이야기했지만 이미 우리는 나밖에 몰라요. 끝까지 나밖에 몰라요. 그 나밖에 모르는 자를 값을 주고 주의 일에 쓰게 하셨다면 성령의 역할은 뭐냐, “글쎄 그게 바뀌었지.” 그 과정을 우리의 몸을 통해서 새롭게 낯설게 보여주는 그 자가 하나님의 성전이에요. 어렵지 않죠. 과정입니다.
‘이미’, ‘아직’이 아니고 이미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나같은 인간이 구원받다니! 이거는 말도 안 돼.’ 그 말도 안 되는 것을 삶을 통해서 보여줌으로써 주께서 내가 구원받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이미 구원해 준 주님의 자기희생을, 그것을 발현하고 드러내고 증거 되게 하는 그것이 주의 목적입니다. 그래서 먹고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이미 구원받은 기쁨과 희락을 느끼는 것, 희락을 느끼는 거예요. 그게 하늘나라에요.
자, 그렇다면 그 작업을 위해서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루어야 하는데, 그 과정을 집어넣기 위해서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데, 그 다루는 방법이 뭐냐, 그것은 뭐냐 하면 사람이 법을 위반하는 것이 아니고, 위반이 새로운 사람을 만들어낸다는 법칙입니다. 법에 대한 위반을. 그 위반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어떤 현상을 보이느냐 하면은, 나는 그래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best do it. 최선을 다했습니다.” 라는 자기 특별남을 하나님께서 뾰루지처럼 항상 드러내게 돼있어요. “나는 세 명까지 여자하고 잤지만 남들은 일곱 명하고 잤습니다.” 이런 식으로. 자기는 최선을 다했다는 거예요. “남들은 소주 두 병 깠지만 나는 두 잔 먹으면 얼굴 벌개져서 더 이상 못 먹습니다. 나는 그래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는 거예요.
간음하지 말라는 이 말씀이 우리에게 직접 주어지게 되면 우리는 거기서 마치 나의 구원을 위해서 내 잘남을 위해서 증명하듯이 말씀을 준 것처럼 그렇게 오해가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이 말씀이 올 때는, 말씀이 돌판에 새겨져 있고, 돌판이 올 때는 다른 십계명, 아홉과 더불어서 어떤 곽, 상자에 담기게 되어 있어요. 상자를 제켜버리고 그냥 그 말씀을 봐 버리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하면 내 마음 속에 있는, 선악적인 원리에 지배를 받는 내 마음이 발작을 일으킵니다. 어떤 발작을 일으키느냐 하면, “나 저 말씀 지켰어.” “나 저 말씀 최선을 다해서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어.” “옛날에는 못 지켰는데 지금 지키고 있어.” 이게 로마서 7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내 속에 어떤 율법이 오게 되면 율법에 대해서 내 잘난체하는 악이 도사리고 있다가 “그래 봐라 그러니까 간음하는 자는 다 죽여 버려야 돼. 나는 아직까지 간통 한 번 한 적 없어.” 라는 자기의 본래의 모습이 드러나요. 그러니까 이걸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께서 말씀을 적용시킬 때는 반드시 대 악마, 악마의 존재를 들추어내는 식으로 이 말씀을 주께서 다루시는 겁니다. 우리 속에 악마 있는 줄을 몰랐죠? 그리고 악마가 모습을 드러낼 때는 어떻게 드러내는 줄 몰랐죠? 이렇게 드러납니다. “주여, 저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요런 식으로 드러나요. “최선을 다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주의 피 값이라는 것은 저한테 안 찾아도 괜찮습니다. 저는 피 값 없어도 저는 괜찮은 존재입니다.” 라는 거예요.
그러나 주님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미 죄를 안 자만이 죄를 이야기할 수 있다 이 말입니다. 이미 죄를 짓고 있음을 아는 사람만이 죄에 대해서 제대로 언급할 수 있는 거예요. 주께서는 죄를 언급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를 언급하라고 우리로 하여금 죄 짓게 만드는 작업에 본격적으로 나서는 겁니다. 그것이 뭐냐, 과정인데, 그 과정이 무슨 과정이냐, 예수님의 물세례에서 예수님의 불세례, 십자가 세례를 불세례라고 합니다. 물세례에서 불세례까지의 과정을 우리한테 적용시켜 버려요. 적용시켜 버리면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을 때 죄 속에 들어왔어요. 죄 속에 들어왔습니다.
우리 보기에는 그냥 물에 빠진 것 같죠.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인간의 죄 속에 들어와 버린 거예요. 죄 속에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예수님도 어쩔 수 없이 죄 값을 치러야 돼요. 이 죄 지은 자에게 주어진 무수한 벌을 받는데, 그 죄 값이 뭐냐, 간음한 죄, 살인한 죄, 모든 탐내는 죄, 모든 십계명이 있는 그 죄 값을, 죄도 없는 분이 그 고난과 아픔을 다 겪는 겁니다. 수모와 아픔을. 그 비웃음을 온 몸으로 다 받는 거예요. 그 과정을 우리한테 겪게 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맨 몸으로 그걸 다 받으시고 나중에 그걸 상자, 피 묻은 박스로 그걸 둘러쳐버렸습니다. 그게 뭐냐, 하나님의 법궤가 돼요. 그것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죄와 피의 만남으로 이게 하나님의 의로 바뀌어요.
그냥 무죄로 바뀌면 안 됩니다. 무죄로 바뀌면 또 죄 지어요. 용서가 무효가 되니까 무죄가 아니고 아예 적극적으로 의인이 돼버려요. 의인. 죄 없음이 아니고, 니는 훌륭한 사람이라는 딱지를 우리 이마에다가 도장을 박아버려요. 의인. 그리고 우리의 손목을 잡고, “자, 온 동네마다 이 의인을 보아라!” 라고 이야기해요. 우리보고 이 의인을, 마치 탕자가 집에 오고 난 뒤에 아버지가 탕자 손모가지 잡고 옷 입히고 가락지 끼워가지고 “내가 좋아하는 이 아들, 가출해서 재산 다 날린 이 멋진 아들을 동네 사람들아 한 번 보소!” 라고 하면서 잡고 돌아다니고 있으니까 아들은 부끄러워서 고개를 못 들고 있어요.
“아버지 고만 합시다.” “뭘 고만해 자랑스러운데.” “아버지, 고만 합시다. 나 부끄러워 죽겠습니다.” “뭐 부끄러워 자랑스러운데.” “아버지 나 부끄럽습니다.” 이게 뭐냐, “나는 특수한 존재가 아니다.” 라는 뜻이에요. “나는 특별한 존재가 아닙니다. 주여! 저는 손 놔도 괜찮은데 주께서 강제로 잡았습니다.” 누굴 위해서? 주님의 자신의 행하심. 은혜가 뭔지를 똑똑하게 보여주기 위해서 은혜 없이 못 사는 인간을 잡아놓고서 “야가 집 나간 가출아인데, 그때 돈 얼마 가져갔더라? 이천칠백삼천오백만원 기생한테 돈 다 날렸어요. 다 날렸어요.” 이걸 큰소리로 돌아다니면서 이야기하는데, 세상에! 이 자랑스러운 아들을 지금 자랑하는 건지 아들을 흉보고 있는 건지 모르지만 하여튼 다 돌아다니는 겁니다.
똑같은 현상이 다윗에게 있었습니다. 다윗이 자기하고 같이 바람났던 밧세바의 손모가지를 잡고 “이 내 사랑하는 내 아내. 우리 그날 밤에 목욕하고 같이 잠자리 잤던 여자. 보세요. 나는 이 여자 아니었으면 나는 지옥 갈 뻔했습니다. 아이고, 고마워라 이 여자야.” 하며 끌고 자기의 본부인으로 삼아버렸어요. 여기서 간음한 자, 아까 언급했지만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이미 간음했다고 여기고, 나는 젊을 때, 군대 가기 전에 사창가에 갔다고 여기는 사람들, 그 사람들의 문제가 뭐냐 하면, “그때 한 번 뿐이다.” 이게 문제인기라. 그때 한 번 뿐이다. 나중에 퇴직해서 나이 80이나 먹어가지고 다방아가씨하고.. 그때는 우에 할래? 그때 한 번 뿐이라고요?? 이게 또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특수성으로 만들어버렸어요.
그것은 바로 로마서 13장 8, 9절에 나오는 주의 사랑을 자기의 잘남으로 뒤바꾸고 가려버리는 현상입니다. 이거는 주님의 증인이 아니고 자기 자신의 증인입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을 곽(상자)에다가 담는다는 이 사실을 놓치지 마세요. 그리고 피를 만난다는 사실을 놓치지 마세요. 이거는 우리 잘난 체, 우리의 우수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말씀 준 게 아니고 예수님의 자신의 우수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미 선악과를 따먹은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러면 예수 빼놓고 나는 잘났다고 여기는 악마가 우리 안에 존재하고 있어요. 그러면 주님께서 “빨리 기어 나와! 마귀 빨리 나와! 잘났잖아? 잘났으니까 나와!” “나는 이 말씀 어기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오죠. 유명한 말씀인데, 그 대목 한 번 보겠습니다. 27절에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8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 하였느니라” 로마서 7장에 이어서 마음은 우리의 관리대상이 안 된다 이 말이죠. 왜냐 하면 마음은 나는 간음하지 않았다 하는 순간 눈앞에 뭔가 지나가게 되면, 예쁜 사람 지나가게 되면 거기에 간음이 자동적으로 유발되기 때문에, 이러한 본성을 어느 인간이, 지가 자제가 됩니까? 안 되지요. 안 되는 거예요. 왜냐면 마음 문제이기 때문에.
근데, 여기에 대한 대책이 나와요. 31절,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32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 함이니라” 이것은 그 당시에 마귀의 앞잡이 역할을 하고 있는 바리새인과 유대인들이 하는 행동을 봐서 거기에 보조를 맞춰서 새로운, 더 확대된 의미가 여기서 만남을 이루는 겁니다. 만남을 이루는 거예요.
왜냐하면 간음하지 말라는 십계명을 지켜내기 위해서 유대인들은 이미 마음속으로 누가 그런 간음할 의사가 있기 때문에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데, 그러면서도 간음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에, 그래서 한 처리가 뭐냐 하면, 이혼을 했을 경우에, 모세의 말에 이혼을 했을 경우에는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해도 그것은 간음죄가 안 된다고 저그들 마음대로 정해놓은 거예요. 아내가 있는 상태에서 결혼하면 간음이 되지만 아내와 이혼한 상태에서 그 여자와 결혼하게 되면 간음이 안 되는 거예요. 근데 이혼의 목적이 뭐냐 하면 그 여자와 결혼하기 위해서 이미 마음에 결심을 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이거는 현재 여자와 살면서도 이미 사실은 간음하고 있는 거예요.
어떤 드라마에 보니까 이런 말을 해요. 어떤 여자가 상상을 하는데 “당신과 나는 이미 신뢰가 깨어졌기 때문에 이혼합시다.” 이래 여자가 나왔어요. 상상하기를 남자가 매달리면서 “여보! 진짜 잘못했어.” 이렇게 하는데, 그런데 상상 말고 실제는 뭐냐, “이틀이나 삼일 말미를 다오.” 이래 나왔어요. 내일 저녁 압구정 백야 보면 진짜 어떻게 되는지 나올 건데. 신뢰가 깨어졌으니까 이혼하자고 나왔습니다. 그러면 바람피운 쪽은 남자가 피웠기 때문에 여자 본인은 뭐만 하면 된다? 이혼만 하게 되면, 이혼하는 게 정당하다가 된 거예요.
그러면 주의 뜻은 이렇습니다. 부부는 한 몸이기 때문에 헤어져서는 안 된다고 되어 있어요. 그러면 뭐냐, 바람을 백 번 피우든 상관없이 이혼만은 안 된다는 거예요. 이혼만은. 근데 압구정 백야에서 그 여자가 하는 말이 신뢰 깨어졌으니까 이혼하자는 겁니다. 그러면 그 결혼은 주인공이 누구냐 하면, 주님의 말씀이 주인공이 아니고 신뢰가 유지되는 한 살 수 있다는 그 조건하에 본인이 그 집의 아내로 나는 살아가고 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혼해서는 안 된다. 간음하지 마라. 그 말씀을 누가 매기느냐 하면 본인이 이미 그것을 결정을 해버렸어요. 본인이 심판주가 되었어요. 본인이 주님을 대신할 수 없는데 이미 본인이 주님을 대신하고 있어요.
그러면 “목사님 이혼하지 말아야 됩니까? 신뢰 깨져도?” 오늘 말씀 이제 하이라이트 들어갑니다. 진짜 진실이 궁금하지요? 알려드릴게요. 아담이 한 명 이었습니다. 여자 하나 나와서 두 명 됐죠. 그래서 자식 낳으면 많아지기 시작합니다. 1에서 2가 된 것은 도로 1로 가져가야 돼요. 1에서 2가 된 것은 도로 1로 가져가야 한다. 모든 것이 주로부터 와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가야 돼요. 이게 아까 이야기한 과정입니다. 과정을 놓쳐버렸어요. 과정을 놓쳐버리면 마지막 과정이 그쳐버리면 스톱이 되죠. 스톱이 누구한테 되느냐 하면, 나한테, 나의 잘남 앞에 스톱이 돼버려요. 세상 모든 되어가는 일은 나의 행복을 위해서. 이게 스톱이 된다고.
주의 일에 스톱 거는 사람, 그게 마귀에요. 악마입니다. 처음부터 우린 태어날 때부터 악마가 이미 내장되어 있어요. “모든 것은 니 행복을 위해서 있는 거야. 정신 차려. 니 남편 바람 피워? 그럼 이혼해!” 모든 것은 내 앞에 스톱이 되어 있어요. 나한테 구멍이 뚫려서 바람이 통해야 돼요. 나, 나, 나에게 뭔가 구멍이 뚫려야 돼요. 뚫려야 한다고 해서 또 남편 바람피우라고 할 것 없고. 구멍이 뚫리는데 뚫리는 방법이 뭐냐 하면, 나를, 나로 하여금 주님의 사랑이 임하게 합니다. 사랑이 임하게 되면 1에서 2가 되고, 2가 그냥 1로 못 갑니다. 제로가 됩니다. 나는 없는 존재인데 남편 되신 우리의 주님이 신부로 맞이한 거예요.
주님은 하와를 만든 것이 아니고 교회를 만든 겁니다. 교회를. 우리는 하와로서 중지하면 안 돼요. 아담으로 그치면 안 돼요. 그게 과정이죠. 그게 하나의 과정이라니까요. 여자와 남자, 이거는 이 세상에 있을 때뿐이지, 천사되면 여자도 남자도 없어요. 천사와 같아서 거기서는 결혼도 안 합니다. 천국 가서 멱살 쥐고 “니가 나 몰래... ” 끝났다. 연극은 끝나고 무대는 끝났어. 끝났어요. 이 땅은 하나의 과정에 불과한데. 우리는 수시로 과정에서 누가 브레이크를 거냐 하면, 내가, 나의 행복이 브레이크를 걸어버렸어요. “주여, 이러면 나 불행합니다. 이러면 나 못삽니다. 이러면 내가 어찌 살라고요? 차라리 내가 죽을까요? 나 죽어버리렵니다.” 자기 목숨을 담보로 해가지고 기어이 이 세상을 자기 행복한 세상으로 하는데, 그것이 바로 선악과를 이미 따먹어서, 선과 악을 나름대로 안다고 여기는 우리들이 기껏 마지막으로 해내는 것이 그것밖에 없어요.
따라서 로마서 13장 8절, 9절 다시 해석해드립니다. 사랑이 임하면 간음이고 살인이고 뭐고 전부 사랑이 다 이루었다 했지요? 그렇게 되려면 우리는 사랑에 의해서 주님의 신부로서만 이 땅에서 결혼 하든, 안 하든, 신부로서, 이미 신부된 자로서 살아야 됩니다. “주여, 주님이 남편이신데 남편의 어떤 모습입니까?” “니 집에 가봐라. 니 남편 있지? 니 남편하고 다른 분이 나야.” “니 남편하고 다른 분이 내야. 너는 너를 신뢰 못 시키지? 너를 행복하게 못 하지?” 그걸 통해서 너를 무조건 사랑함으로 니가 어떤 짓을 해도, 마음속으로 간음을 천 번 만 번 해도, 어떤 짓을 해도, 너는 하나의 나를 위한 신부로서, 과정을 증거 하기 위해서 너로 하여금 인생을 살게 했다. 이것이 하나의 율법의 완성으로써의 주님이라는 이름의 사랑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찾으세요. 뭘 찾는가? 내가 주님을 사랑한 거 찾지 마시고, 내가 얼마나 주님을 싫어하고 미워하고 떠밀고 있는지를 찾으시면, 바로 그 속에, 틈 사이에서 영원한 남편 되시는 분이, 남편으로서 우리에게 작용할 것입니다. 니밖에 모르는 너를, 나는 신뢰 떨어졌다는 그런 소리 하지 않고, 나는 너와 헤어지지 않겠다고 주께서 찾아드실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죽인다는 그 말씀, 간음도, 내 중심 앞에서는 별 힘을 못 쓰는 것처럼 우리는 굳건하게 나밖에 모르는 존재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얼마나 하면 내가 행복해질까? 어떻게 하면 내가 만족스런 인생을 살까? 를 생각하는 그 순간, 우리는 주의 증거인이 아니고 나의 증인 됐다는 사실을, 마귀적인 요소가 있음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주시고, 그런 인간을 신부로 맞이해 주신, 그 죽음보다 더 강한 사랑이 항상 우리를 새로운 인간으로 만들어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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