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강-신 5장 17절(살인하지 말라)15041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5장 17절입니다. 구약성경 270페이지입니다.
“살인하지 말지니라”
간단하죠. 이 본문을 딱 보는 순간 우리는 이런 마음이 듭니다. “하나님이여, 제발 살인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내 자녀가 살인자의 흉기에 희생물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여, 이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을 온 천지에 다 퍼뜨려서 더 이상 살인이 없는 이상적인 사회 속에서 남은 생을 행복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라는 그런 생각이 우선 들 거예요. 그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여,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을 저한테는 하지 마시고요. 저는 원래 살인 할 마음 없으니까. 착하니까. 흉악범에게만, 살인할 의도가 있는 사람에게만 그 말씀을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하는 그런 의도가 깔려서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살인의 희생물이 되지 않기를.
근데,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을 바로 우리가 잘못된 의도로 이해하기 때문에 제대로 된 의도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자기 몸에다가 적용시켰습니다. 그리고 그 몸이 가는 곳마다 모든 인간이 살인을 저지르고 있음을 들추어내는 일을 하신 거예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가신 그 길이, 오직 예수님만 구원되는 길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구원에서 탈락되는 그 길을 가신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의 지체가 된 우리는 어떤 인생으로 몰아세우시느냐 하면 예수님이 죽으셨던 그 경로를 따라서 가게 되는 겁니다. 이것 때문에 돌아가셨구나! 이것 때문에 돌아가셨구나!!
그래서 살인이라는 의미가 우리한테 주어진 것 같은데, 우리가 아니고 나중에 우리 안에 합류시킬 그 분을 겨냥해서 이 살인하지 말라는 십계명을 주셨는지, 우리는 그것을 되돌아보면서 그 전체, ‘살인하지 말라’의 완성이 우리에게 그냥 공짜로, 은혜로, 선물로 주어져서 우리가 이렇게 영생의 복을 누리는 겁니다. 그렇다면 살인하지 말라가 내 몸을 건드리는 것이 아니라 주의 몸을 건드리지 말라고 인간 세계에 당부하신 거예요. 그 주의 몸을 건드리지 말라는 그 말씀으로 인하여 인간들은, “내 몸이 중요하지 니 몸이 중요하냐?” 이래서 예수님 몸에 대해서 함부로 평하고 사지로 몰아세웠던 겁니다.
제가 서울 강의 때, 약간의 난해한 구조를 이야기 했어요. 그게 뭐냐, 본디오 빌라도에 대해서 언급을 했는데요. 그 내용이 이렇습니다. 디모데전서 6장 13절에 나오는 내용이에요.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 앞에, 양쪽 다 예수님은 서신 적이 있다는 대목이에요. 자,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 앞에 서셨는데, 서실 때 예수님 혼자 서신 것이 아니고 바나바와 더불어서 같이 섰어요. 바나바와 같이 서면서 본디오 빌라도가 뭘 했느냐 하면, “자, 어느 쪽을 살리든지 죽이든지 그 선택을 대중들에게, 너희 민중들에게 제가 넘기겠습니다.” 하는 조로, 바나바냐? 예수님이냐? 바나바를 살리면 예수는 죽게 되어 있고, 바나바를 죽이게 되면 예수는 살리는 것이다. 이렇게 선택권을 넘긴 겁니다.
그 대목을 보면서 어느 누구도 손들고 “본디오 빌라도여! 당신은 그런 선택권을 넘길 권한조차도 없습니다.” 라고 이야기 할 사람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 예를 들면 강도가 와가지고 “돈 내놓을래? 아니면 목숨 내놓을래?” 이렇게 이야기 할 때, “나는 돈 쪽을 선택할게” 하면 목숨 날아가 버리죠. 그럼 목숨을 선택하면 돈이 날아가죠. 하지만 강도 만난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해야 돼요. “당신은 그런 선택을 나한테 강요할 자격이, 권한이 없습니다.” 라고 이야기해야 되는데, 이야기 할 사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강도는 칼을 들고 있기 때문에.
따라서 인간이 말씀을 못 지키는 이유는, 살인하지 말라, 죽기를 무서워하는, 이미 살인이 저질러진 상황 속에서 죽기가 무서워서, 그 죽음이 이미 자기의 권력이 되고 만 것입니다. “본디오 빌라도여, 니가 뭔데 함부로 예수님을 재판해?” 하면 본디오 빌라도가 뭐라 합니까? “니 뭐야?” 말이 어렵게 되는데 한번 해봅시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당신이 뭔데 예수님과 바나바를 선택하라고 우리한테 강요합니까?” 할 때 본디오 빌라도가 “그걸 나한테 따지지 말고 바나바 죽이라고 하면 당신이 원하는 예수 살 수 있습니다.” 라고 본디오 빌라도가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겁니다. “예수님 살리고 싶어요? 그러면 바나바 죽이면 됩니다.” 라고 할 때 그걸 듣는 사람이 하는 말이 “내 말은 그게 아니고 그럴 권한이 없다는 거예요. 그럴 권한이.” 그럼 본디오 빌라도가 뭐라고 합니까? “당장 저 놈을 하옥하라!” 이래 나오죠. 보세요. 그럴 권한이 본디오 빌라도에게 있잖아요? 우리는 꼼짝달싹도 못하잖아요? 왜, 국가가 뭔데 우리를 옭아매죠.
도대체 나는 내 몸만 챙기면 되는데 갑자기 “검문 있겠습니다.” 하면 긴장이 되죠. 우리는 뭔가 낯선 세계에 와 있는 겁니다. 성도 입장에서. 성도 입장에서 낯선 세계에 와 있는 거예요. 이거는 옳지 않은 세계 속에 우리가 놓여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바늘로 뚫어서 오시는 거예요. 그러면 무슨 이야기냐, “세상에서 살아남을래? 하나님 앞에서 살아남을래?”를 묻는 겁니다. “니가 이 세상에서 살고 싶으냐? 아니면 이 세상에서 죽든 살든 상관없이 하나님 앞에서 영생을 얻겠느냐?” 그걸 묻기 위하여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을 주신 겁니다. 이 말씀이, 그만큼 우리는 하나님 앞에 살아남기 보다는 이 세상에서 백수하고 싶죠. 오래 백세 하고 싶은데, 제가 수요일에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만 히스기야가 15년 더 연장했지만, 연장했기 때문에 바벨론한테 망했다고요.
하나님께서 15년 연장함으로 말미암아, 15년 연장했던 때에 했던 행위로 이 유다 나라를 얼마나 조져놨는지를 보여주시는 겁니다. 일단 살고 보니까 신났죠. 하지만 그게 죄의 연장인데, 그게 죄의 확장인데요. 그래서 심방하면서 “아이고, 이 노인네 백수하세요.” 라는 뜻은 무슨 뜻이냐 하면 앞으로 “16년 동안 죄 많이 지으세요.” 그게 똑같은 말이에요. 지금도 많은 목사님들이 병원에 가서 죄지으라고 기도를 간절히, 온 교회가 간절히 기도합니다. “오래 사세요.” 차마 뒷말은 못하죠. “오래 사셔가지고 못다 지은 죄를 더욱더 증강시키기 바랍니다.” 그거하고 같은 말입니다.
살인하지 말라의 살인의, 진짜 그 죽음의 진수는 예수님만 알고 있어요. 왜냐하면 죽음이라는 것은 그냥 목숨이 떨어지는 것을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말씀에 입각한 죽음이 최종적인 죽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말씀에 입각한 죽음. 히브리서 9장에 보면 나오죠. 27절.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심판을 받기 위해서 인간은 죽어야 된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말씀에 입각한 죽음은 뭐냐 하면, 심판이라는 형식으로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냥 목숨 끊어지는 것이 죽음의 끝이 아니고 심판까지 이어져 가야 제대로 된 죽음의 맛을 보게 돼요. 영원한 죽음입니다. 이걸 가지고 요한계시록 20장에서는 뭐냐, 두 번째 죽음이라 했어요. 두 번째 죽음.
하여튼 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마음대로 갖고 놀아요. 말씀을 갖고 이래했다가 저래했다가, 전을 이리 뒤집었다가 엎었다가 하듯이 일방적인 말씀을 가지고 그렇게 해요. 두 번째 죽음이 있다고 우리한테 사전에 의논한적 없습니다. 일방적으로 그냥 하나님께서 자기 거라고. 일방적으로 그냥 두 번째 사망, 두 번째 부활. 우리는 몰라요. 성경 보기 전에는 두 번째 부활이 있는 줄 몰랐고요. 두 번째 사망이 있는 줄 몰랐어요. 우리는 장례식 때 죽으면 그걸로 끝인 줄 알았어요. 죽고 난 뒤에 심판이 있는 줄, 그것도 되살려서 심판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바로 그런 입장에서 살인하지 말라가 주어지는 겁니다. 이 말은 뭔 뜻이냐, 뭐 골치 아프게 할 것 없이 간단하게 정리해서 말씀해드리겠습니다. 그건 뭐냐 하면, 니가 아는 식으로 사람 죽이지 말라는 겁니다. 그걸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아는 식으로는 내가 죽어야 돼. 이거는 곧 기준의 문제거든요. 기준. 니가 평소에 사는 기준은 남 죽더라도 너만 살면 행복한 기준을 너에게 적용시켰다. 근데 그 기준으로 말미암아 정말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을 온전히 이루려는 그 분이, 니 기준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니 손에 의해서 살해당하고, 밉상 받고, 미움 받는,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 그러면 우리는 이야기해요. 왜, 하나님이여, 그런 현상이 일어나도록 방치하십니까? 그거에 대한 주님의 답변은 간단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바꿔치기 하기 위해서예요.
제 몸을요? 아니 니가 속해 있는 그릇을. 니가 속해 있는 이 항아리 같은 이 상황 자체를 바꿔치기 하는 거예요. 제가 강의하면서 오리알이라고 했는데, 오리알이라고 표현한 이유가 뭐냐, 오리알에다가 바늘을 꽂아버리면 오리알은 바늘구멍이 너무 작기 때문에 뭐가 왔다 갔는지 몰라요. 바늘이 쏙 들어갔는지 모릅니다. 오리알에다가 바늘 집어넣고 바늘 빼버리면 바늘 구멍이 주사바늘처럼 너무 작기 때문에 누가 다녀갔는지, 이 세상이 구멍 났는지를 몰라요. 예수님께서 다녀가시면서 생긴 구멍이 그게 십자가입니다.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나는 너희들이 그 바늘구멍 외에는 일체 알지 않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추방 돼야 될 분이 침투했다가 몰래 빠져나가버린 거예요. 그래서 모든 사람은 사나죽으나 이 세상에서 갇혀있어야 되는데 유일하게 한 분만 들어왔다가 빠져나가버린 겁니다. 그 빠져나간 그 구멍에서 바람이 솔솔 들어오는데, 그 바람을 가지고 성령의 바람이라고 합니다. 성령의 바람은 십자가라는 구멍을 통해서 들어오기 때문에 항상 그 성령 안에는 십자가 완성 내용만 가득하게 뿜어져 들어오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하는 말이 “나가자!” 더 극단적으로 말하면 “피할 곳이 없다.” “니 몸을 가졌느냐?” “예. 몸 여기 있습니다. 팔 여기 있고요. 다리 여기 있고요.” “너는 이제 전면적인 심판, 최종적인 하나님의 죽음을 니가 피할 길이 없구나! 이제 손잡고 나가자!” 이래 되는 거예요.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주께서 목자가 되어서 양을 잡을 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잡은 양은 이 세상에서 어떤 권세도 내 손아귀에서 빼낼 수 없을 것이다.” 아! 이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주께서 우리 손모가지를 얼마나 세게 잡았는지 손목에 멍이 다 들었어요. 안 놓으려고. 내가 준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 바깥에는 봄인데도 바람이 막 불어요. 그대여~그대여~ 봄바람 휘날리며~♪ 바람이 막 불어도 주께서 딱 잡은 이 손모가지는, 우리는 뭐 옆에 보면 고기 굽는 냄새 나고 흠흠~~ 어디 등산가자 하고 온갖 게 있는데, 주님이 이 손모가지를 안 놔주네. 이 손에서 빼낼 위인이 없을 것이다. 무슨 지랄 발작을 하라고 해. 온갖 공갈협박을 해라 해. 그러나 이 손모가지는 절대로 빼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나가자!”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오리알 속에 바늘이 들어왔던 바늘구멍으로 뭔가 들어온 겁니다. 이거는 사람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하시느니라는, 바늘구멍 이야기 할 때 그 대목이 나와요. 그러면 우리가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살인하지 말라 라는 것을 누구와 연관시키느냐 하면 예수님과 연관시키는 그 대목부터 풀어야 되거든요. 그게 창세기 9장에 보면 나옵니다. 6절에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 말은 살인하지 말라. 살인한 그 사람을 내가 살인할 것이다. 이런 뜻이에요. 이 땅에서 살인하지 말라. 다시 말해서 이 땅에서 니가 니 기준으로 사람을 죽이지 말라. 니 기준을 니한테 적용시킨 인간은 내가 결코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은 무슨 뜻이냐면 구원받은 사람은 기준이 바꾸어지는 현상이 일어날 것이다. 그런 말입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라멕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건방지기가 아주 하늘을 찔렀어요. “내 건드리면 내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이 말 했거든요. 가인을 위해서는 칠 배지만 나를 위해서는 칠십칠 배다. 이게 잘못된 기준이에요. 근데 그 잘못된 기준이 뭐냐, 아까 이야기한 본디오 빌라도로 보면 되요. 우리는 꿈쩍도 못해요. 꼼짝도 못합니다. 하여튼 명태하고 여자는 때려야 말을 듣는다는 말이 있잖아요. 옛날에. 요새 남편은 맞아가면서 살아야 살 수 있어요. 요새는 반대가 됐지만. 옛날에 그랬거든요. 그렇게 센 게 나오면 사람들은 꼼짝도 못하고 센 그 힘이 하나의 환경을 조성합니다.
그게 뭐냐, 인간 기준에서 만든 인간의 세계입니다. 인간의 세계를 링컨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오직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나라는 영원히 멸망하지 않는다. 그게 라멕의 세계에요. 내가 익히 아는 기준, 여기 모여라. 공동체 하자. 이게 인간의 세계에요. 우리 서로 살인하지 말자. 뭔 뜻입니까? 남의 나라는 살인 하자. 이 뜻입니다. 국가라 하는 것은 힘의 균형 문제기 때문에 내가 편하기 위해서는 내 일을, 내 노동을 대신 할 노예를 얻기 위해서 전쟁을 벌이지 않을 수밖에 없어요. 그 전쟁을 벌인 대가가 우리 국민이 잘 먹고 잘 사는 겁니다.
우리 국민들이 살인하지 않기 위해서는 살인을 해야 돼요. 이런 모순이 있습니다. 우리는 오리알 속에 존재합니다. 인간의, 라멕 같은 죄로만 인테리어 되어 있는 그 세상, 그 상황 속에서 우리는 그것이 전부인 줄 알고 있어요. 프로크루스테스 Prokrustes 라는 로마의 신화적 인물은 침대가 있는데요. 그 침대는 나그네를 잡아다가 침대에 안 맞으면, 침대보다 키가 작으면 늘려서 죽이고 침대보다 키가 크면 나온 만큼 끊어서 죽이고. 그렇게 했거든요. 그게 신화적 존재에요. 신화라는 것이, 로마신화, 그리스신화, 핵심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모든 세계의 총합은 우리 인간의 세계의 연속이다.
쉽게 말해서 천국은 지금보다 더 살기 좋은 세상이 천국이지, 저 낯선 세계는 아니다 하는 것이 우리가 꿈꾸는 하늘나라입니다. 그게 신화의 세계에요. 신화의 세계에 분수 있고, 여자들 많고, 골프장 있고, 이게 여호와증인 잡지 <깨어라!> 표지에 나오잖아요. 그 깨어라! 에서 깨어나야 돼요. 그게 환상이에요. 너무나 못살아서 힘드니까 주께서, 사랑의 하나님이 뭔가 좋은 거주겠지. 좋은 거라는 것은 내가 미흡한 것을 마저 채우면 완전케 된다는 거예요. 그게 얼마나 뭡니까? ‘살고 싶다’ 하는 거예요. 주께서는 그 살고 싶다는 그 기준을 니가 정하지 말고 정하신 분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님, 예수님이 정했다는 거예요.
그 분이 정하게 되면, 그 분에 의해서 우리가 어떤 식으로 구원받았다는 것을 압니까? 마지막 그걸 설명해야 할 텐데요. 예수님이 오셔서 하게 되면, 창세기 32장에 보게 되면 지명 이름 하나 나옵니다. 29절, “야곱이 청하여 가로되 당신의 이름을 고하소서 그 사람이 가로되 어찌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30절, “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내가 살았다. ‘브니엘’의 뜻은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이거든요. 하나님의 얼굴을 봤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얼굴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내 목숨은 유지가 되었다.
그렇다면 내 목숨은 하나님에게서 나온 축복의 결실물이 현재 내 몸속에 꿈틀거리고 살아있다는 겁니다. 근데, 나에게 축복한 그 분이 나에게 다른 이름으로, 다른 지체로, 몸을 바꿔주면서 이름도 같이 바꿨어요. 뭐냐 하면, 야곱이 아니고 이스라엘이에요. 이스라엘 이름은 누구냐, 야곱이 아니고 예수님이 이스라엘이에요. 요한복음 1장 끝에 나옵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이에요. 주님은 이름대로 기능합니다. 이름대로 완성을 해요. 그렇다면 우리 성도 이름은 이스라엘이에요. 지금 죽더라도 주와 만나면 오늘 밤에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가 된 성도를 성도라고 이야기합니다.
글쎄, 목사님 그 성도가 나인지 그게 궁금하다니까요. 우리는 그게 궁금한 거예요. 그게, 성경에 있는 그 말은 맞는데, 꼭 집어서 그게 나라는 것을 어떻게 확인하느냐 이 말입니다. 그걸 말씀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왔을 때, 예수님 특유의 공간과 시간관을 가지고 왔어요. 공간과 시간관을 가지고, 공간 현실과 시간 현실을 따로 챙겨서 왔기 때문에 사람들은 예수님이 말하는 것을 이해를 못했습니다. 그거는 가끔은 보여줬죠. 주님께서 오셔서 하인에게 손을 얹으면 낫겠습니다. 하니까, 내가 말만 하면 된다. 가보니까 그 말하는 시점에 이미 나아버렸어요. 시간과 공간에 전혀, 지금의 시간과 공간에 저촉 받지 않아요.
포도주가 떨어졌는데 포도주를 채워 달라.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그 포도주 채워주는 것은 제 소관이 아닙니다. 제 때가 아닙니다. 해놓고 물 떠가지고 포도주 되게 했어요. 그것은 뭐냐, 예수님의 흘린, 예수님의 포도주의 완성이, 포도주 정도가 아니라 우리에게 진짜 생명을 주는, 다시 말해서 포도주가 좋은 결혼식 되는 것이 아니고 ‘하늘나라’ 라는 결혼식이 살아났고 거기에 참여해서 영원히 사는 포도주를 주께서는 미리 앞당겨서 ‘가나 혼인 잔치’에서 베푸신 거예요. 이걸 일일이 설명하기가 복잡한데요.
자, 시간관부터 봅시다. 시간관은 뭐냐 하면, 기차 제일 뒤 칸에 서세요. 뒤 칸에 서게 되면 기차가 앞으로 가는데 우리는 뒤를 바라다보고 있어요. 서부영화에 그거 나오잖아요. 옛날 서부영화 보면 지나온 것이 다 보이는 겁니다. 전봇대 세 개 지나갔구나. 아이고, 터널 지나왔네. 우리 인생이라는 것은 전부 다 이미 미래에서 잡아당기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과거에, 과거를 경험하라고 살게 하신 거예요. 과거의 삶을 사는 거예요. 이걸 미래에 개방된 것을 과거에 재도입한다는 말을 합니다. 아이고, 어렵죠. 개방된 열린 미래가 과거에 재 진입을 하는 겁니다. 재 개입이 되는 겁니다. 과거로부터 미래가, 우리는 미래를 보는 게 아니라 과거를 보면서, 과거를 고백하면서 지금 미래에서 내 뒤통수를 땡기고 있다는 사실을 그런 식으로 고백해가는 거예요.
또 예를 들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할 때, 그때 베드로는 뭘 보느냐 하면 자기의 환상적인 현실을 보는 거예요. 환상적인 현실. 이 세계, 아까 본디오 빌라도가 권세 잡은 세계.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게 된 것은 뭘 의식했느냐 하면은 본디오 빌라도가 세력 잡고 있고 그 밑에 제사장이 내 말 한마디면 나를 잡아간다는 그 세력을 실제 현실로 간주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부인하고 난 뒤에 곁에 누가 있었느냐 하면, 꼬끼오~ 하고 울었어요. 아! 닭이 있었지. 닭이! 인간이 아는 현실 속에 닭이 있어요. 닭이 있는 거 알잖아요? 우리 양계장에 닭이 많은 거 알아요. 계란이 왔어요. 계란이~ 양계장에서 계란이 온 거 알아요. 하지만 그 닭이 주께서 배치한 닭이라는 사실을 알 때, 베드로는 새로운 현실관을 접합니다.
현재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우리 보기에는 내가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배정된 산물이 아니고 예수님이 구상한 하늘나라를 위해서, 마치 인간의 노동으로 얻은 것처럼 보이는 것들 속에 내가 하나의 일부로의 가구로서, 가구로서 여기 놓여있습니다. 가구로서. 그게 늘 스물 네 시간 느껴지지는 않아요. ‘앞으로 뭐 먹고 살지?’ 이건 되지, ‘내일되면 뭐 먹고 사는 걱정을 하는 과거를 내가 경험하였구나! 신난다.’ 하는 이런 사람 없습니다. ‘닭 울면 잡아먹어야지.’ 이렇게 생각하지, ‘저 닭이 베드로를 각성케 했구나!’ 그런 닭으로 보지 않아요.
하지만 우리가 뭔가 이 땅에서 내 일이 꼬이고 실망스러울 때, 그리고 세상이 실망스러운 것이 아니고 내 자신에게 실망스러울 때, 주여, 나 같은 인간 살려두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이제 니가 의미가 바뀌는구나. 니가 비로소 의미가 바뀌는구나. 그런 의미가 바뀔 때에 너 같은 인간의 손모가지를 내가 놓지 않았기에, 예수님만이 아는 시간과 공간을 너에게 잠시 맛보게 했느니라. 살인하지 말라 하는 것은 너는 바로 살인자고, 그 살인할 수밖에 없었지만, 살인했지만, 이제 오히려 살인한 자를 주께서는 구원하십니다.
따라서 우리 곁에는 늘 나를 살인자라고 죄를 지적하는 그것이 우리 곁에 늘 남아 있어야 돼요. 늘 그게 있어야 돼요. 십자가 지나서 딴 데 가면 안 돼요. 십자가 늘 있어서 나로 하여금 이렇게 이런 그 십자가가, 나의 이야기가, 나의 존재의 의미를 위해 십자가가 있기에, 그 십자가의 효과를, 우리는 그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얻은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죄인 되게 했던 그 모든 것을 우리 눈에 치우지 말고 우리 곁에 영원히 두셔서 주님 덕분에 살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살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늘 확인하는 즐거움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