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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25강-부모 공경(신5;16) 150405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5. 4. 18. 07:16
2015-04-05 15:46:06조회 : 168         
   부모 공경 150405이름 : 이근호 (IP:119.18.83.69)   

부모 공경(신명기 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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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링크 : https://youtu.be/Iqdu1ORhBes, Hit:18
 이근호15-04-05 15:48 
부모를 공경하라 

2015년 4월 5일                             본문 말씀: 신명기 5:16 

(5:16)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가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공경’이 성립되려면 기존의 애굽에서의 생활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십계명은 곧, ‘애굽의 종되었던 자를 구원했다’는 조건이 전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애굽에서도 얼마든지 자식이 부모를 공경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부모 공경’에 부합되는 환경이 아닙니다. 

애굽인들, 즉 보통 스스로 인간이라고 여기고 실시하는 그런 부모 공경과 다른 요건을 갖추면서 ‘부모 공경’이 실행되기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부모가 있는 이상, 자식이 생길 수가 있고, 그 생겨난 자식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별로 이상하고 특별한 일처럼 느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애굽에 찾아오신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십니다.(출 6:3) 이 하나님에게는 새로운 부모, 새로운 자식, 그리고 새로운 공경을 유발시키십니다. 즉 부모 공경의 모델로 이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 찾아들어오셨고, 그 아브라함에게 일어난 일이 집단적으로 이스라엘에게도 요구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이라는 말은 ‘만인의 아버지’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명칭이 붙여주는 순간에 아브라함에게는 정실 부인에게 나온 자식이 없습니다. 종에서 나온 자식은 하나님께서 자식으로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자식은 전혀 없는 상황입니다. 자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벌써 만인의 아버지가 되어버린 겁니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설정해놓으신 그 ‘아버지’의 위상이 아브라함에게 유효하기 위해 그 위상에 합치되는 자식이 새롭게 주어진다는 것이 이어지는 하나님의 작업입니다. 이삭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자, 그렇다면 ‘부모공경’은 어떻게 나타날까요? 의외로 아버지가 자식을 잡아죽입니다. 

즉 자식이란 아버지가 아버지 노릇하는 그 와중에서 새롭게 발생되는 겁니다. 즉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란, 아버지가 비록 자식을 잡아 죽여도 자식은 군소리 없이 받아드릴 때, 비로소 제대로 ‘공경’이라는 것이 성립된다는 말입니다. 즉 제대로 된 자식과 그 공경을 통해서 제대로 된 아버지가 구현된다는 겁니다. 

이는 이 인간 세상에서 자식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자식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인간 세상에서 자식이란 자기 주체성에서 새로이 조립하는 부모상을 지니게 됩니다. 즉 본인이 보다 훌륭한 자식으로 포장하기 위해 거기에 부합되는 조건을 부모존재에다 붙이게 됩니다. 

‘내가 원하는 부모일 때만 공경이 제공된다’는 겁니다. 이 점은 부모에게도 예외가 아닙니다. ‘내가 원하는 자식일 경우에만 나는 공경이라는 말을 인정하겠다’는 겁니다. 이처럼 애굽같이 이 세상에서의 부모와 자식 관계란 각자의 주체성과 주체성의 만남에서 형성되는 겁니다. 

인간의 자아 주체성은 본인이 본인에게 제공한 노동의 양을 통해서 정립하게 되어 있습니다. 즉 “내가 지금의 나를 정립하는데 나의 노동은 몇 %이며 나 외의 타인들의 노동은 몇 %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정립하고 이렇게 정립된 틀 안에서 공경의 양을 결정하는 겁니다. 부모에게 잘해드리되 부모가 나에게 해준 정도로 하는 것이 균형에 맞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자식들이 처음부터 성인이 된 게 아니라 신체적으로나 특히 정신적으로 부모의 양육 과정을 겪게 됩니다. 이 와중에서 자식의 정신 내부는 부모를 자신의 라이벌로 간주하여 성향을 보이게 됩니다. 예를 들면, 이미 돌아가신 부모 묘소에 엎드리면서, “아버님, 어머님, 그토록 자식의 성공한 것을 보시기를 원하셨는데 지금 성공해서 돌아온 이 자식의 잘됨을 왜 마음껏 자랑질 못하도록 일찍 돌아가셨단 말입니까”하고 애통해합니다. 

즉 자식에게 있어 부모의 기대는 자신의 인생을 힘겹게 버티는 동기로 작용하게 됩니다. 이것은 일종에 부모 기대에 대한 보복이요 복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들 보기에 대단한 효자로 보이겠지만 실은 자식의 주체성을 다소 훼방시킨 부모의 형편에 원망하는 겁니다. 로마서 4장에서, 아브라함에 일어난 신앙이라는 이름의 하나님의 일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입니다. 이는 아브라함에게 일어난 현상이 동일하게 일어나는 자에게만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고 아브라함 계열에 합세된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나와 있는 신앙여부를 결정하는 내용이란 곧 아브라함 손에 의해서 이삭이 죽게 된 사실을  말합니다. 

즉 참된 부모란 자식을 잡는 부모요, 참된 자식이란 그런 부모에게 죽임을 당하는 자식이며 이런 관계만을 ‘공경’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자식이 부모 몸에서 나온 자식이 아닙니다. 이는 곧 아브라함과 이삭을 가지고, 숨어 계시는 하나님과 아들 예수님과의 관계를 드러내고자 하는 겁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이 태어났다는 것이 신앙의 내용이 아닙니다. 태어난 그 자식을 아버지 손으로 도로 죽일때, 비로소 여기서 ‘공경’이라는 의미가 발생됩니다. 공경이란 참 아들과 참 아버지에게만 통용되는 용어입니다. 아버지 손으로 자식을 잡는다는 것은 전에 아예 자식이 없는 그 시절로 되돌아가는 것을 말할까요? 

아닙니다. ‘낯선 죽음’이라는 새로운 자리가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그 만들어진 자리를 통해서 아버지와 아들과 그리고 그 둘 사이의 관계가 비로소 나타납니다. 아담으로부터 줄곧 이어져 내려오는 죄악의 줄기를 하나님께서는 아버지 이름으로 개입하셔서 끊어버리십니다. ‘아버지’로서 활동하시려고 이 땅에 아드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드님을 내어버려두십니다. 이는 곧 아버지로서의 하나님께서 자식으로서의 하나님을 내치시는 작업을 두고 말합니다. 그리고 아들은 고분하게 그 내치심을 자기 운명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 어느 사람도 이 땅에서 아들다운 아들은 없습니다. 죽으신 그 아드님을 하나님께서 살려내심으로서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유일하신 아버지로 소개하십니다. 

이로서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오직 예수님과 하나님에 의해서만 달성됩니다. 그리고 그 혜택은 ‘그리스도 몸’으로 소급해서 인정된 성도에게 주어집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공로로 의롭게 되었음을 새삼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5-04-10 13:37 
25강-신 5장 16절(부모 공경)15040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5장 16절입니다. 구약성경 270페이지입니다.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가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공동체가 있는데, 그 공동체는 부모를 공경하는 공동체로 하나님께서는 생각해 두셨습니다. 부모는 누구한테나 있지요. 부모 없는 자식이 없기 때문에. 문제는 뭐가 없느냐 하면 공경이 빠져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부모를 공경하면 될 게 아니냐?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부모를 공경할 것 같으면 우리가 애굽에서 나올 이유가 없어요. 애굽의 생활 자체가 공동체이기 때문에. 빠져나온다는 의미가 빠지면 안 되거든요. 애굽에서 부모 공경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런 이야기에요. 부모 공경 잘 하고 있는데, 부모 공경 하라고 새삼스럽게 이야기한다는 것은 니 선에서 부모 공경은 뭣을 생각하느냐 하면, ‘내가 이 동네 말고 저 동네 가야해. 이쪽은 아니야. 절대로 이쪽에 살아서는 안 돼. 영원히 살 곳은 이쪽이 아니야.’ 하는 그런 내용이 포함된 공동체 안에서 부모를 공경해야 돼요. 그냥 부모를 공경하게 돼버리면 자기 잘난 사람이 돼버립니다. 자기가 잘난 사람 돼버리면, 잘났는데 어린양이 피 흘려 죽을 이유가 없잖아요. 

그러면 성경에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이 말은 이런 뜻이에요. 자식이 없다는 거예요. 부모를 공경해도, 부모를 공경할 만한 자식이 없으니까 공경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해요. “태어났으면 자식이잖아요?” 라고 이야기하죠. 태어난다고 해서 자식이 아닙니다. 어린양을 경유해서 태어나야 해요. 그래야 자식이 되거든요.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주신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냐 하면, 성경에 보니까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에요. ‘아브라함의 하나님’ 내 양심의 소리 하나님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란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아브라함에서 무엇을 재구성해야 하냐 하면 아브라함에게서 아버지는 도대체 누구며, 자식은 누구며, 그 관계는 어떻게 아버지와 자식으로서 관계가 맺어지는가. 그것을 아브라함에서 다시 규정이 돼야 되는 겁니다. 만약에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지 않으면 ‘아브라함’은 ‘아브람’으로 끝나요. ‘아브라함’이 될 수 없어요. 본토 아비 집에서 우상 만들던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부름을 받았어요. 아브라함은 생각했어요. “어디로 갑니까?” 지금 “어디로 갑니까?” 라고 물었거든요. “주여, 어디로 데려갑니까?” 

하나님께서는 뭐냐 하면, “니가 어디로 가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현재 니 자리를 떠났다는 것이 중요하고, 떠나는 과정 속에, 한 발자국, 두 발자국 움직이는 그 속에서 예상도 못한 새로운 사실들이, 이것이 발췌되어 나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아버지가 나오고, 아들이 나오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도 그 속에서 나오는 거예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찾아옴으로써 하나님 자신을 아브라함의 하나님으로 소개합니다. ‘아브람의 하나님’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하나님.’입니다. 제가 발음이 안 좋아서 이래나 저래나 똑같이 들리는데. 아브람의 하나님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에요.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기존의 자식이었다는 자식을 제거해버리고, 아버지이었다는 아버지를 제거해버립니다. 아브라함이 언제 아버지를 공경했습니까? 공경할 것 같으면 후레자식처럼 가출하면 안 되지요. 아버지와 함께 우상 만들어야 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아버지 요셉 말 들었습니까? 이건 가출 아닌 가출. 가출인 듯 가출 같은 가출 아닌 가출.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요셉이 “아들아, 너를 찾는다고 나흘 동안 찾았다.” 하니까 “아저씨, 누구세요?” 우리 아버지가 하나님인데, 왜, 본인이 아버지라고 자처하고 나서냐 이 말이죠. 

세상의 모든 아버지는 아버지라고 행세하지만 사실은 자식들이, 아버지가 자식을 보는 안목과 자식들이 아버지를 보는 안목이 달라요. 아버지는 자식을 볼 때, 그 자식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고, 내 자식이라는, 내가 아버지 됨을 확인하기 위해서 일방적으로 자식이라는 규정을 만들어서 자식에게 강요를 해버리고, 특히 자식은 아버지를 생각할 때, 내가 기대한 아버지일 때만 아버지라고 대상을 취급해줍니다. 인간은요, 낳았다고 아버지가 아니고 자기가 아버지를 만들어 놔요. 자기가 아버지를 만들어 놓고, 만들어진 아버지와 자기 사이의 관계가 이어질 때, 자기는 옳은 자식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버지는 자기가 올바른 아버지라고 여기기 위해서 자식을, 원래 자식이 아니고 자기의 입맛에 맞는 자식으로 변경시켜놓고 “나는 아버지로서 참 훌륭했다”고 이렇게 주장하고. 자식은, 지가 옳은 자식인 것을 확정짓고 이걸 확인하기 위해서 아버지를, “나는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다했다.”에 맞춰 놓고 아버지를 따로 제작을 해요. 생산을 한다고요. 심지어 죽은 아버지까지 끄집어내가지고 따집니다. “아버지여, 내 성공을 못 보시고 그냥 가시면 어떻게 됩니까? 벌써 돌아가시면 어떻게 돼요? 내가 어릴 때 얼마나 공부 못 한다고 구박받았습니까? 그때부터 나는 복수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왜? 내 복수의 검을 받지 아니하시고 미리 돌아가십니까? 아이고! 이 원통함이여! 분통터짐이여!” 
  
인간에게 아버지라는 존재는 내 삶의 원동력이 돼요. 나에게 명령한 자가 되고, 저는 내 딸한테 명령한 적 없어요. 지금 듣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내 딸한테 명령한 적 없거든요. 그른데 딸은, 일방적으로 뭔가를 나에게 명령을 했고, 그 명령한 것이 얼마나 나에게 안 맞다는 것을, 틀어지고, 현실에 안 맞다는 것을 보여 주면서 진짜 현실은 이 자식인 내가 알고 있다는 식으로, 나름대로의 성공을 해서 나에게 아무것도 모르고 명령했던 그 아버지를 향하여 복수하고자 하는 심보를 누구나 다 갖고 있어요. 제 딸은 빼주세요. 누구나 그런 식으로 살아요. 

“아버지 전상서.” 또는 “불효자는 웁니다.” 불효자의 뜻이 뭡니까? 울고 있는 나는 지금 효도하고 있다는, 지 자랑하고 있는 거예요. 반성과 회개를 빌미로 한, 결국은 아버지보다 내가 훨씬 훌륭합니다, 라는 자기 몰두에 빠져있는 겁니다. 인간은 개판입니다. 아버지고 자식이고 뭐고 전부 다, 지 잘난 것밖에 몰라요. 그게 출애굽해서 가고자 하는 하늘나라 공동체의 모습이 기껏 그 모습입니까? 그거는 지옥이죠. 지옥. 사람들은 아버지를 공경하라는 이 대목도 외우기는 쉬워요. 5.16 혁명이 일어난 날. 신명기 5장 16절. 딱 외우기도 쉬워요. 

사람들은 말합니다. “지금 공경 잘 하고 있는데 더 이상 어떻게 잘 하라는 말이냐?” 하여튼 5월초만 되면 저는 걱정 아닌 걱정을 해요. 온 교회가 전부 다 아버지 공경하라고, 부모 주간이라고, 이 대목 끄집어다 다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듣는 교인들은 짜증나요. “공경 잘 하고 있잖아요? 지금? 더 이상 어떻게 해요?” 어버이 주일에는 전화 두 번씩 하고 평소에는 한 번씩 하고. 추석 때 찾아가 주고 설 때 찾아가 주고. 못 찾아 가면 용돈 더 드리고. 무슨 특별한 일이나 생일 있으면 용돈 더 챙겨드리고. 더 이상 뭐 어떻게 합니까? 더 이상 뭐, 어떻게 해요. 몰라, 손자 놓아서 손자 봐주면 고맙다고 할지. 지금 더 어떡해? 아버지한테 내 인생이 매여 있는, 그런 종속된 인생이 아니잖아요. 내 나름대로 인생이란 말이죠. 
  
그럼 아버지 곁에서 아버지 모시고 어머니 모시게 되면, 그럼 아버지, 어머니 그런 자식 좋아합니까? 꼭 좋아한 자식은 생전 오지도 않다가 용돈 들고 일 년에 두 번씩 오는, 그런 자식하고 며느리는 고생한다고 부엌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부모가 좋아하는 자식은 돈 잘 버는 자식 좋아합니다. 이거는 아멘이에요. 아멘. 뭐, 옆에서 봉양한다고 좋아하는 자식이 아니에요. 돈 잘 벌고 어디가도 부모의 자랑거리가 되는 자식. 옆에서 모신다고 지지리 궁상떨고 아이고 꼴 보기 싫어. 가끔씩 만나야 반갑죠. 자주 보면 반갑지도 않아요. 

사람들이 이 본문 보고 공경 잘하고 있는데, 거기다 더 공경하라고 하면, 뭐, 더 이상 어쩌란 말이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다시 말씀드리면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주신 거예요. 아브라함을 통해서 아버지와 자식이 어떻게 형성되는가. 아브라함의 언약을 통해서 아버지는 없습니다. 아버지가 없다는 말은 자식 같은 자식이 이 세상에 없어요. 로마서 4장에 보면 그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상당히 난해한 내용인데, 난해하지만 중요해요. 이게 왜 중요하냐 하면, 이게 로마서 4장에서 믿음의 조상이 나오거든요. 믿음의 조상이란 이 개념이 왜 중요하냐 하면, 아브라함과 같은 동질의 믿음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그건 아브라함을 조상님으로 못할 정도로, 그쪽의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가 없어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이거든요. 따라서 아브라함의 알고 있는 그 하나님이 아니면 하나님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 말이죠. 그러면 아브라함의 하나님과 동일한 하나님이라면, 아브라함에게 일어났던 동일한 현상이 똑같이 일어나줘야, 진짜 이거는 아브라함의 언약의 하나님도 인정하시는 내 자식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겁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모든 인간은, 자식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식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어요. 이것이 요한복음 14장 10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나는 아버지를 알지만 너희들은 모르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을 ‘숨어있는 아버지’라고 합니다. ‘숨어있는 아버지’에요. 

숨어있는 아버지를 어떻게 찾아가야 하는데, 어떻게 찾아가느냐, 찾아가는 방법은 인간의 아이디어로 되지를 않고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줄사다리를 솔솔 내려주듯이, 율법을 내려줘요. 그 내려준 율법의 하나가 5:16, 니 부모를 공경하라. 그게 하나 내려 온 거예요. 우선 자식치고 부모를 무시할 수 없게 되어 있어요. 원래 자식치고. 왜냐하면 어릴 때부터 교육받아 온 것이 아버지 없이 내가 없다는 것이 분명하거든요. 이거는 물론 생물학적으로도 그렇지만 여러 가지 경제적인 문제, 여러 가지 혜택 입은 것을 아무리 머리가 나쁜 아이라도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아버지와 어머니의 희생 없이는 자기가 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서 알기 때문에 자기 전체 몫 중에서 부모님 몫이 일부가 여전히 들어있다는 사실을 본인이 알고 있어요. 
  
인간은 자기 자신이 어떻게 구축되느냐 하면 자기 노동으로 구축돼요. 노동으로 구축되는데, 생판 하늘에서 떨어져서 지가 일해가지고 지금의 지가 된 게 아니잖아요. 내가 일할 수 있는, 자립할 수 있는 데까지 뭔가 밑바탕을 되어준 다른 분의 노동이 있는데, 그 다른 분이 누구냐, 부모님의 노동인 거예요. 따라서 자식들은 계산하는 겁니다. 자, 부모가 어디까지 도와줬느냐를 계산하죠. 애가 태어나서 대학까지 3억 듭니다. 상당히 냉정한 부모는 3억 내노라고 하죠. 그러나 그렇게 노골적으로 내노라고 하는 부모는 안 계시고요. 뭐, 내노라고 하면 자식들이 이렇게 하는데요. “부모님은 나 키운다고 그렇게 기쁨을 얻었으니까 그 기쁨 값으로 3억 때웁시다. 퉁 칩시다.”이래 나와요. “앞으로 부모님이 치매 걸려 힘들 때, 나는 기쁨이 아니고 억지로 하게 되면 그건 거기서 까나갑시다. 까나가는 것으로 계산합시다.” 
  
어쨌든 인간이라는 것은 내 건 내 것인데, 남의 것이 일부 포함되어 있으니까 이걸 배려한 이상은 내 노동해서 돈 버는 것과 내 노동하지 않고 주어진 것과 구분해가지고, 요것은 내 부모님이 어려울 때 도와줘야 되지 않겠느냐 해가지고 항상 미리 생각을 해놓아요. 물론 그것도 총각 때 일이고 결혼하게 되면 또 색시 들어오면 색시의 절대적인 모든 의견이 결정짓습니다. “안 돼! 여보.” 이렇게 하면 끝나요. 어쨌든 간에 인간은 부모한테 공경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제가 하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 보시기에 그 자식은 하나님 자식이 아니에요. 왜? 자기의 노동의 성과가 포함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려면 자기가 회사에 취직해서 자립까지 해가지고 고생한 그것까지 어디로 가져가야 하느냐 하면 부모 것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이거는 도저히 인간으로서는 납득이 안 되죠. 부모가 한 것은 기저귀 갈아주고, 분유 값 대주고, 학비 대주었는데, 그걸 돈으로 따져보면 그건 나의 일부지 전부가 아니라는 거죠. 그래서 내가 부모에게 효도하고 뭔가 생색은 내지만 절대로 부모라는 이름으로 나의 모든 것을 가져갈 수 없습니다. 라고 나오는 것이, 이게 바로 지옥 갈 자식의 특징, 아브라함의 언약 안에 못 들어간 자식의 특징입니다. 

 근데 아브라함의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와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 니 자식을 바치라고 했어요. 아버지는 어느 정도 권한이 있느냐 하면 멀쩡히 살아 있는 자식을 제물로 바치라고 해도 자식은 고분고분 해야 할 위치에 있을 때, 그게 부모와 자식과의 새로운 관계입니다. 그런 부모, 그런 자식, 이 세상에 없습니다. 차라리 자식이 뭔가 나서게 되면 “야야 놔둬라 내가 제물 될게.” 지가 나서는 법이지. 어떻게 아버지의 손으로 잔인하게 자식을 죽입니까? 아마 우리가 아브라함 같으면 이렇게 했을 거예요. “하나님, 차라리 저를 죽여주옵소서. 이 아무것도 모르는 이삭은 놔두시고 제가 돌 위에, 제단 위에 눕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니 물이 안 좋거든. 니는 한 물 갔어. 니 고물이야. 이 늙어빠진 게 누워가지고. 내 일을 방해하고 있어. 저리가. 생생한 니 자식 바쳐라.” 그러면 아브라함이 “하나님, 해도 해도 너무하십니다.” 하나님이 “이게 니 부모 공경이야.” 
  
그 부모는 자식마저 자기 노동의 대가로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식이라는 생각이 없이 내가 힘들어 키웠다는 겁니다. 이게 아버지도 문제네. 자식도 문제죠. 자식도 부모가 준 것과 내가 노동해서 공부 잘해서 한 것과, 시험 칠 때 부모가 대신 시험 쳐서 합격하면 물론 그 졸업은 부모가 졸업장 받는 것은 마땅해요. 앵그리맘처럼. 자기가 자기 딸 지킨다고 다시 학교에 입학할 수 있는 문제인데, 그렇지는 않거든요. 시험 치는 것은 자기 머리이지, 부모 텔레파시 받아 가지고 시험 치는 게 아니라는 말이죠. 이런 경우도 있어요. 우리 집안도 그런 집안인데, 아빠하고 엄마는 공부를 못하는데 자식은 공부를 너무 잘해요. 서울대학 갔어요. 얼마나 공부를 잘하는데, 이거 돌연변이도 아니고, 그럴 때는 부모가 자식 자랑하기가 곤란할 지경입니다. 왜, 자랑할 때마다 지 못난 게 상대적으로 부각이 되니까. 자랑하고 싶어도 말도 못하고. “쟤, 어디서 나왔노? 다리 밑에서 주워 왔노?” 이래된다 이 말이죠. 
  
다리 밑에서 주워 와야 구원받아요. 이게 문제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족속은 죄와 죄의 연결입니다. 따라서 도저히 천국을 못 갑니다. 누가 개입을 해줘야 돼요. 아브라함의 언약이 개입하면서 그 개입된 언약 안에 아버지도 들어있고 아들도 들어있어요. 들어있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아브라함에게는 아무것도 없어요. 로마서 4장에서 방금 이야기한 이야기를 다시 하겠습니다. 로마서 4장에서 아브라함을 뭐라고 했느냐 하면, 믿음의 조상이라고 한 거예요. 뭔가 이상한 일이 벌어진 자의 조상이라는 겁니다. 그 이상한 일이 똑같이 일어나야 한다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나타난 것은, 아기를 갖고 싶어도 갖지 못하는 가정입니다. 자식이 없어요. 자식이 없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졸지에 뭐가 될 수 없느냐 하면 아버지가 될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가 아니에요. 자식이 있어야 아버지인데. 그런데 놀랍게도 이름은 만인의 아버지에요. 이거 하나님이 장난쳐도 너무 심한 장난을 친 거예요. 옛날 <웃으면 복이 와요> 코미디에 보면 자식 놓고 오래 살라고 이름을, 좋은 이름을 다 갖다 지었다고 칩시다. 태어난 지 세시간만에 죽었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이름이 무색하죠. 

하나님께서는 이름을,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이름을 지었습니다. 이미 아버지부터 먼저 있어요. 자식도 없는데 아버지부터 먼저 했어요. 이제는 아버지부터 이름을 먼저 걸쳐놓고 그 다음에 그 아브라함이 아브라함 될 수밖에 없게 하기 위해서 아담부터 줄기차게 내려오는 죄 된 자식은 끊어버리고, 고갈시키고, 자식 없는데 하나님께서 천사 세 명을 보내서 자식 있다는 통보를 해주게 됩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특징은 뭐냐,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는 말은, 아까 기도한 내용처럼, 그 뭐냐, 믿음이라는 것이 그 믿음이라는 것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되어야 돼요. 

제가 금요일에 울산에서 강의하면서 이런 강의했습니다. “주여, 제가 예수 믿는데, 왜 제가 또 예수 믿게 되었습니까?” 라는 말을 했거든요. 내가 예수 믿는 것은 익히 납득이 되는데, 예수 믿는 내가 새롭게 예수 믿는 그 두 번째 믿음은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나는 예수를 잘 믿을 수 있는데, 왜 내가 그걸 배제하고, 그걸 제켜놓고 왜 예수를 믿어야 됩니까? 이 믿음은 나에게 나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주께서 이야기합니다. 그게 바로 로마서 4장의 말씀, 다시 말해서 믿음의 조상의 대열에 합류하려면 그런 이상한 일이 있어야 돼요. 자식이 없으면 자식이 계속 없어야 돼요. 있는 자식 갖다 바쳐야 됩니다. 하나님에게. 

하나님께 이삭을 갖다 바쳐야, “나, 원래 자식 없어요. 있는 자식도 나에게 나온 자식이 아니고 주께서 주신 자식입니다.” 그러니까 나라는 인생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마당놀이 판이에요. 완전히. 이거는 무대 허락도 없이, 무대 비워놓고 거기다가 마음껏 주께서 한바탕 춤사위를 벌이시는 겁니다. 난데없이. 아브라함은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아무 행한 것도 없이 의롭다 함을 받았다 이 말입니다. 행한 것도 없이 의롭다 함을 받았다. 이게 로마서 4장 첫 부분이거든요.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자식이 없는데 있게 했습니다. 있게 하시고, 고것이 전반전입니다. 후반전 남아 있습니다. 그게 뭐냐, 그 자식을 아브라함 손에서, 아버지 손에서 자식을 죽게 합니다. 

죽게 함으로 말미암아, 누가 죽인 걸로 되어 있느냐 하면, 숨어 있는 아버지가 아브라함을 시켜서, 니 자식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나님 자식을 죽인 걸로, 그렇게 아브라함 가정이 이해하도록 조치를 하십니다. 그렇게 되면 아브람 인생은 사라지고 아브라함 인생밖에 없는데, 그 아브라함 인생을 차지하는 속 내용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가득 차게 되고, 거기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 믿음이 생겨버림으로써 믿음의 계열에 합류하게 된 겁니다. 그 믿음의 계열에 합류하면서 나로부터 출발하는 모든 믿음은 믿음이 아닌 것으로, 이것이 사라져야 돼요. 내가 믿은 믿음은. 

그래서 믿는 자는, “나는 예수를 믿지 않습니다.”는 말로써 믿음을 표현해주어야 합니다. “우리 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 우리 예수님을 죽이게 된 사실은 바로 바리새인들이 자기 믿음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예수님을 죽였잖아요. 그런데 그 믿음은 자기가 마치 하나님을 알고, 그리고 하나님의 자식인 냥 행세를 했기 때문에 나온 엉터리 같은 믿음인 거예요. 우리는 하나님의 자식도 아니고요. 우리가 생각한 하나님은 아버지도 아니에요. 

아버지와 아들 사이는 숨어 있어요. 예수님과 하나님만 아들과 아버지가 성립이 됩니다. 그 숨어 있는 사실이 우리를 마당놀이 삼아서 우리를 차고 들어오십니다. 차고 들어오시면서 내가 하나님의 자식인 것, 내가 하나님이란 신을 아버지로 둔다는 것이 헛짓이고 쓸데없는 잡념에 불과하다는,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구원받는가. 주님께서 우리의 몸을, 오늘 아침에 한 건데요, 미래가 미리 와버려요. 미래가 미리 와버리면 소급해서 우리 몸이 아니고 주의 몸이 돼버립니다. 그러니까 주의 몸만 자식으로 인정받아서 자식 되고 구원받는 거예요. 

우리가 태어나서 오줌 싸던 그 신체가 나중에 알고 보니까, 마지막에 알고 보니까, 이미 주의 몸을, 주의 몸이 스스로 다루었기 때문에 오줌을 싸게 한 거예요. 살아온 것이 우리가 산 것이 아니고 주의 것으로 다루어져 왔던 겁니다. 이것이 성령을 통해서 미리 우리는 깨닫게 된 것이죠. 말씀을 통해서. 그럴 때 우리는 “제 것 아닙니다. 이거 주님 거죠.” 하고 내놓으면 그게 바로 믿음이에요. 그게 바로 나를 아브라함 되게 하시고, 이삭 되게 하시고, 야곱 되게 하신 것은 주님이 나를 하나의 방주로 삼기 위한 하나님의 언약적 조치였습니다. 이렇게 받아들일 수가 있는 겁니다. 

하여튼 우리는 자식도 아니고, 우리가 부르는 아버지라고 하는 것은 가짜 아버지에요. 진짜 아버지와 진짜 자식은 내 안에 들어 있는 별개의 몸이 분리되면서 내 몸이 내 것이 아니고 주의 것이라는, 인생이 분리되면서 떠오르면서 우리는 그의 주도권에 함몰되면서 하나님이 다루시는 주의 몸이고, 따라서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를 아들로 삼아서 양자된 몸이구나. 그러니까 이러한 기이한 말씀의 현상이 우리 속에서 벌어지는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부모를 공경하라 그거는 예수님만이 아버지를 공경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공경할 때는 새로운 공동체만 가능합니다. 우리가 그 공동체에 들어오게 된 거예요. 그래서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아버지와 나와 하나가 된 것처럼 마지막 때는 너희와 나와 아버지가 하나가 된다. 새로운 환경, 새로운 공동체가 형성돼요. 그 안에서 부모를 공경하라 하는 것은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의 아버지를 예수의 이름으로, 우리의 이름이 아니고, 예수님의 몸이란 자격으로 아버지를 아버지 되게 하는 겁니다. 

“아버지여, 참, 저를 잘 죽였습니다.” 라는 고백. “죽일 수 있는 권한 아버지에게만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죽은 우리를 살릴 수 있는 것도 아버지의 권한입니다.” 하고 예수님과 공통적인 고백을 내놓는 사람. 이게 로마서 6장에 나오는 주와 함께 죽고 주와 함께 산다는 이것을, 바로 이런 고백을 성도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몸이기 때문에, 놀랍게도 이런 놀라운 고백이 나오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숨어 있는 아버지께서 가짜 자식 안에서 진짜 자식을 심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제는 내 몸이 내 몸이 아니고 주의 몸인 것을 수시로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