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신명기23강-우상(신5;7-11) 150322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5. 4. 18. 07:13
2015-03-22 14:50:57조회 : 196         
   우상 150322이름 : 이근호 (IP:119.18.83.91)   

우상(신명기 5: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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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15-03-22 15:42 
우상 

2015년 3월 22일                           본문 말씀: 신명기 5:7-11 

(5:6)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라 

(5:7) 나 외에는 위하는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5:8) 너는 자기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밑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5:9)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5:10)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5:11)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는 줄로 인정치 아니하리라 

‘우상’을 언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인간들은 ‘우상’에 대해서 아는 바 없습니다. 우상에 대해서 모르기에 인간에 우상을 늘 노출된 환경에 놓여 있습니다. 그냥 노출되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우상인 것과 아닌 것을 분리하고 규정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실천들이 더욱더 지독한 우상숭배로 이어지게 됩니다. 

사람들은 주변 환경을 보면서 자기 식대로 절대적인 판단을 내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중심에 있어 자신에 대한 걱정과 염려 때문입니다. 자기 미래를 걱정 안 할 위인이 있을까요? 천래적으로 없습니다. 따라서 미래에 짐이 되는 조건만 아니라면 인간은 뭐라도 할 태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우상을 섬기도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으면 3,4 대까지 징벌 받고, 만약에 나의 말씀대로 살면 천대까지 복을 받는다는 조건이 나와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제시된 조건에 대해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그래, 이제부터 우리 집안은 우상섬기지 말고 하나님의 이름을 경솔한 마음가짐으로 부르지 말아야지”라고 나옵니다. 

바로 이것이 일방적 생각입니다. 이 생각 속에는 마치 이미 자신들이 우상이 뭔지,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는 것이 뭔지 익히 확보하고 있다는 식입니다. 즉 인간은 자신의 말한 바로 그것이 자기 자신의 진실을 드러낸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인간은 홀로 움직이는 존재가 아닙니다. 홀로 결정하거나 일을 처리할 처지에 있는 게 아닙니다. 낮에 거실에 있는 물건을 하나 집어들어도 태양에서 쪼이는 햇빛이 필요합니다. TV를 보고 혼자 즐거워하고 싶어도 그 재미를 망치는 집안의 우환이 일단 없어야 합니다. 즉 인간을 둘러싼 환경이 결정적이라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인간은 환경이 밀면 밀리는대로 생각하고 울고, 불고, 노래하고, 춤춰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인간을 둘러싼 환경이란 인간이 임의로 선택하거나 결정지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면, 특수한 물질을 풀어놓은 수조안에 두뇌만 집어넣고, 그 두뇌 표면에 온갖 전기적 자극이 통해서 선들을 연결시켜 놓고 외부에서 임의로 세상 현상들을 조종하는 장치를 만들었다고 칩시다. 

그래서 두뇌만 남은 그 인체가 스스로 생각하기를, 자신이 사지가 멀쩡한 사람이라고 우긴다면 그 두뇌에게 말로서 반박하거나 설득할 방법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입된 정보에 따라 그 두뇌는 나름대로 세계관을 조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반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에 대해서 남들에게 아무리 설명해도, 그 설명된 내용을 가지고 말한 나를 제대로 연상시킬 수가 없습니다. 말한 ‘언술의 주체’는 그래서 해서 표현된 ‘언표의 주체’와 일치되지 않습니다. “나는 키가 몇 센티이며 몸무게는 얼마이며 성격은 이러하다”니 하고 아무리 설명해봤자, 그런 사람들 얼마든지 다른 사람에게 적용시킬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존재는 처음부터 일방적인 성격으로 활동하게 마련입니다. 설명되어지는 내용 속에 본인은 없습니다. 단지 ‘설명되어진 본인’만 들어있습니다. 이처럼 우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상을 언급하고 나타나야 하는지를 이스라엘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왜 우상을 섬기게 되면 3, 4대까지 저주를 받아야 하는지도 모르게 됩니다. 그것은 환경이 그 안에 담겨있는 내용보다 우선적으로 결정권이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궁창에는 새를 날게 하셨고, 바다의 물 속에서는 물고기가 뛰놀게 하셨습니다. 

즉 새와 물고기는 환경에 맞게끔 창조하신 겁니다. 인간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악과 과실을 먹지 아니하는 조건 하에 인간은 인간으로 존속할 수 없습니다. 만약에 선악과 나무가 훼손되면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 흙입니다. 하나님께서 천국에 받아주시는 존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디모데전서 6:11) 

이 ‘하나님의 사람’은 흙인 존재가 만들 수 없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은 하나님쪽에서 실시하는 환경이 조성되어야 합니다. 이 환경 조성은 즉흥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창세 전에 하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조성되어야 합니다. 그 말씀 안에 바로 십계명이 들어있습니다. 

십계명 안에 ‘우상 섬기지 말라’는 말씀이 들어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수행할 수 있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인간이 죽어 마땅함을 증명해줄 말씀일 뿐입니다. 로마서 3:4에 보면,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고 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 거짓됨에서부터 모든 것을 시작해야 합니다. 

즉 인간들의 거짓된 우상판단의 계기를 살펴봐야 합니다. 인간들은 신을 직접 만나기를 원치 않습니다. 간접적인 방식으로 만나면서 그 만남의 체제까지 인간들의 아이디어에서 비롯됩니다. 즉 신이 원하는 바를 인간들이 지어내는 겁니다. “이 정도 성의를 표하면 신도 분명 감동받을거야”는 식입니다. 

자신이 감동하는 것을 신도 같이 감동하고 합당한 조치가 주어질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17장에 나오는 음녀라고 지칭된 단일 체제의 인간 세계를 보게 되면, 그 안에서 뿜어져나오는 분위기는 바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입니다. 왜 그런고 하니 신과 직접 대면하지 않고 우회적으로 만남을 주선하면서 자신들이 좋아들 하는 것으로 그 중간 과정을 채워넣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많은 자들의 동참을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인간 세계는 모두가 한 통속이 되는 겁니다. 마치 두뇌가 죄만 가득찬 실험실 수조 안에 놓여 있는 식입니다. 이 사실을 밝혀줄 사태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왕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이 일을 완수하신 것입니다. “다 이루었다”(요 19:30) 즉 예수님만이 진정으로 우상을 섬기지 않으신 분이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지 않으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지금도 우리 속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능력이 나온다면 이미 우리는 예수님 수조 안에 놓인 자들이요 천대, 즉 영원토록 복받을 나라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우선이 아니라 말씀이 우선이며 우리는 그 말씀의 수조 안에  놓여 있음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5-03-26 18:51 
23강-신 5장 7-11(우상)15032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5장 7-11절입니다. 구약성경 269페이지입니다. 

“나 외에는 위하는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 너는 자기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밑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라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는 줄로 인정치 아니하리라” 

나 외에 다른 신을 우상이라고 8절에 나와 있는데, 이 우상이라고 언급을 한 것은 우리 인간 쪽이 아닙니다. 누구 쪽이냐, 하나님께서 우상을 언급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타나시기 전까지는 우상이라는 게 있는 줄도 모르죠. 그냥 신은 다 같은 신이기 때문에, 그냥 신을 섬긴다는데, 같찮은 인간이, 허무한 인간이, 한계에 있는 인간이, 전능하시고 자비로운 신을 섬기는 것은, 미흡한 인간으로서는, 그거는 장려 받아도 합당한, 훌륭한, 경건 된 모습이라고 다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근데 하나님께서 우상이라고 언급을 딱 해버리면, 신도 골라잡아야 되는가, 신도 제대로 믿어야 되는가, 이렇게 생각하기 마련이거든요. 근데 제대로 신을 골라서 오직 여호와, 예수만 믿겠다는 그것이 나중에 보면 이게 우상으로 등장합니다. 그게 우상으로 등장해요.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 하면, 우상을 언급하면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밑에 물 속에 있는 것이나 아무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했거든요.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창세기 1장에, 거기에 제 5일째 보면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시고 새를 날게 하시고 물고기 물에서 번성케 하시고 그렇게 되어 있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어떤 물고기나 새를 만들 때는 물고기, 새만 만든 게 아니에요. 물고기나 새가 놀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맞춰서 물고기 만들고 새가 날 수 있는 환경 만들어서 새를 거기다가 짜 맞추어서 거기다 집어넣은 겁니다. 

따라서 이미 범죄한 인간이 신을 제대로 섬기겠다는 것은, 환경은 고려치 않고 자기 자신만 고려하기 때문에 그 자체가 우상이 되는 겁니다. 새와 물고기 그리고 모든 자연 초목은 환경과 더불어서 생각을 해줘야 돼요. 쉽게 말해서 환경이 새를 새답게 하고 물고기를 물고기답게 한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인간이 인간답게 한다는 것은, 인간 이전에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환경이 찾아와야 해요. 그 환경은 바로 여호와께서 친히 만드시는 하나님의 언약 환경, 또는 십계명 환경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새 언약 환경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비어 있는 환경을 채우는 것을 복이라고 합니다. 먼저 하늘이 만들어져 있고 그 하늘에 날 수 있는 새가 나중에 만들어진 것처럼. 먼저 바다가 있고 바다 안에 살 수 있는 물고기를 나중에 만든 것처럼. 

이 땅에 환경은 인간이 살기에 적합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살기에 적합한 환경을 하나님께서 지금 분주하게 만들어내고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사람’과 ‘사람’과 이거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사람은 오지 마라. 왜? 내가 들여놓는 인간은 하나님의 사람이지, 그냥 사람이 아니에요. 

그냥 사람은 흙으로 이미 확정이 된 상태입니다. 운명이. 흙으로 왔으니 흙으로 가라. 아담 안에서 태어난 인간은 다 흙이다. 하지만 예수님에 의해서 새로운 피조물 된 자들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지칭되면서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환경은 감지가 되지 않고 오직 감지되는 것은 자기 자신밖에 감지가 되지 않아요. 

그러니까 내가 살고자 하는 것은 내 입맛에 맞는, 내 구미에 맞는 교회를 내가 선택하겠다는 거예요. 그 하나님을 내가 알아서 선택하겠다는 거예요. “내가 알아서 하겠다는데 니가 와 이라노? 니가 뭔데?” 생각해봅시다. 생각하는 나와 생각되어지는 내가 달라요. 이건 간단한 논리인데, “너가 누구지?” 물을 때, “나는 키가 170이고, 몸무게 68키로고, 나는 어느 학교 나왔고, 지금 직업은, 이렇게 월수입은 이렇다.” 그거 다 끌어 모으면 내가 됩니까? 일류대 출신이 한 둘 인가요? 많잖아요? 그거 다 요소 끌어 모으면 다시 나로 조립 되느냐 이 말입니다. 

그보다 더 노골적인 예를 들어서 실험을 해본다면 두뇌만 달랑 들어서 통속에 넣어요. 거기다 여러 가지 화학적인 액체를 집어넣어서, 분명히 그 사람은 두뇌만 있는데, 거기다 전기적 자극을 주어서 마치 내가 하나의 키가 170이고 인물은 잘생기고 뭐 인물은 이병헌 닮아서, 요새 이병헌 닮았다고 하면 안 돼요. 나는 어느 대학을 나와서 월수입이 얼마다. 이런 것을 머릿속에 상상을 할 때, 그런 영화가 있어요. 통속에 집어넣어서 인간들 배양시켜 복제해서 인간들 만들어내는 그런 SF영화가 있는데, 통속에 두뇌만 담아있고 위에 액체만, 영양분 있는 액체와 전기적 자극만 있는 인간이 신을 골라낸다면 어떤 신을 골라내겠느냐? 

그들은 들은 대로 다 해요. 여호와 믿으라면 여호와 믿고, 예수 믿으라면 예수 믿는데,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거는 사지도 없고 두뇌만 달랑 액체 속에 담겨있는 겁니다. 그러면 그걸 사람이라고 하나? 이 말입니다. 여기서 담겨 있다고 하는 게 중요한데, 인간은 자기가 자유의지로 선택할 입장이 못 돼요. 어디 담겨 있어요. 어디에 담겨 있느냐, 죄라는 액체 속에 담겨 있습니다. 죄 중에서 태어난 거예요. 시작부터가 이미, 시작부터가 거짓이에요. 

제가 전에 논문 발표를 한 적이 있어요. 어느 대학에서 하는데, 그 논문 중에 이런 것을 인용했습니다. 로마서 3장 4절을 인용을 했어요.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이걸 거론했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모인 곳이에요. 너희들 다 거짓되다. 이 말입니다. 이 본문을 한 것은. 따라서 출발을 어디서 해야 되느냐 하면, 신학을 할 때, “우리는 거짓되기 때문에 거짓된 신학만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라고 출발해야 그게 참된 복음이고 참된 신학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들의 표정이 뭐냐 하면, “우우~~ (엄지손가락 아래로 내리면서)우우우~~~”분위기가 이런 분위기에요. 혹시 그들이 너무나 바보라서 모를 줄 알고 일부러 또 개혁신학에 대한 언급을 했어요. “개혁은 거짓이고 위선이다.” 일부러 내 말을 못 알아들을까봐 일부러 집어넣었어요. 논문이 있으니까 집어넣었어요. 그들의 표정은 시작부터가 우우~~개혁주의를 왜 치냐? 이 말입니다. 개혁주의가 루터와 칼빈의 전통을 이어받는 참된 전통신학인데 이걸 왜 치느냐? 이거 아니면 이단 되는데 이걸 왜 치느냐? 하는 거예요. 

그 사람들이 뭘 모르느냐 하면, 주님이 등장할 때, 반드시 이단을 몰고 등장한다는 사실을 몰라요. 주님은 혼자 나타난 적이 없습니다. 주님은 반드시 마귀를 대동하고 오셔요. 이게 여호와의 천상회의의 구조입니다. 사탄 없이는 일이 안 된다니까요. 빛이 나타났잖아요? 반드시 거기에는 어두움으로 돌변해야 해요. 모든 환경이. 빛이 안 왔잖아요? 그럼 우리는 전부다 빛이라고 오해하는 형국 속에 살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의 말씀이에요. 빛이 왔으매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빛이 온 것은 어두움으로 하여금 더욱 어두움이 되게 하기 위해서 오신 겁니다. 죄인을 더욱 죄인 되게 하시려고 오신 겁니다. 우상 섬기지 말라고 하니까, 십계명에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2계명, 3계명에 쭉 나와 있거든요. 나와 있으니까 그때부터 사람들은 어디에 필feel이 꽂히느냐면, 여기 오늘 본문도 나와 있습니다만, 여기 9절에요.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10절에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이거는 “삼사대 저주받을래? 아니면 천대까지 복 받을래?” 양단의 결정을 놓고 사람들은 여기에 관심이 있어요. “가만히 있어보자. 삼사대? 혹시 내가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우리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때부터 뭐 문제 있었던 거 아니야? 그렇다면 이 가계의 저주를 내 손에서 끊어야지. 끊고 내 밑으로 천대까지, 한 대를 보통 결혼한 나이를 한 대로 보면 30이라고 보고, 30 곱하기 1000을 하면 30000년, 지금 서기 2015년이니까 32, 015년까지 이제 우리 가문은 걱정 없다. 전혀 걱정 없다.” 그렇게들 생각했던 것이 이스라엘이었어요. 

천대가 뭡니까? 천대까지 갈 것도 없었어요. BC586년에 망해버렸어요. 다 망해버렸어요. BC722년과 586년에 다 망해버렸어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약속을 어겼지 않습니까?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삼사대까지 저주가 이르고 천대까지 복을 준다면 어느 누가 우상을 섬기겠습니까? 그런데 이거 보고, 내 잘되는 것을 보고 우상을 섬기지 않겠다는 것, 그게 바로 뭐냐, 그게 우상을 섬기는 거예요. 통속에 두뇌만 있는 식이 되는 거예요. 죄 속에 있는 두뇌가 기껏 지어낸 것이, 내 집안 잘 되기 위해서는 여호와를 조건부로 믿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 주변에 죄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증명해주는 겁니다. 

왜, 사람이 우상을 섬기느냐 하면은요. 우상이 편하기 때문에 그래요. 우상은 무능해요. 무능하기 때문에 충분히 그 신을 존중해줍니다. 무능한 신이 마음에 부담을 안 줘요. 어느 교회가 이단인 것이 다 드러났잖아요. 어느 교회 목사가 돈 해먹고 횡령하고 갔잖아요. 그러니까 그 다음부터는 안심 푹 놓고 그 교회에 갈 수가 있는 거예요. 왜? 목사는, 잔소리하는 목사는 자기보다 인품이나 윤리적으로 못났기 때문에, 자기가 지적받지 않기 때문에, 세상에 그처럼 편한 교회가 어디에 있어요. 

사람은 자기 맘 편하면 최고에요. 따라서 자기가 충분히 비판할 수 있는 교회가 그렇게 마음에 와 닿는 겁니다. 좋은 겁니다. 만약에 어떤 삼십대 아줌마가 취미생활 한다고 노래교실을 갔는데, 가보니까 거기에 최하가 50대 60대고 최상이 90대 100대까지 있는 그런 할머니들만 계시다면 그 모임에 계속 나가겠습니까? “아이구 색시 그리하면 안 돼요. 이래 해야지.” 그 잔소리꾼들이 쫙 깔렸는데 거기에 다니겠습니까? 택도 없는 소리죠. 그런데 자기보다 젊은 20대들만 있는데 갔다. 그러면 자기가 마음 놓고 잔소리 할 수 있죠. “야! 물 좋으네.” 이래 가지고 가는 겁니다. 

우상을 사람들이 선호하는 이유는 있으나마나 하기 때문에 좋은 거예요. 신이라는 존재가 나한테 있으나마나한 존재. 더우면 옷 벗을 수 있을 정도로 일거수일투족을 간섭하지 않는 신이기에, 그리고 거리를 띄어도 되는 신이기에, 그리고 내가 존중해주면 존중했다고 좋다고 선물 줄 수 있는 신이기에, 우리는 맘 놓고 우상화된 신을 선호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신이 나한테 너무 가까이 온다면 그거는 거북스러워요. 부담돼요. 직접 내 모든 생에다가 다 관여하는 신이라면 우리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차라리 폭파됩니다. 멀찍이, 요기까지, 그대와 당신 사이는 267미터, 여기까지, 그냥 보일락말락 떨어진 것도 아니고 가까이 한 것도 아니고 그 정도의 선. 그 정도 지켜줄 때 종교생활은 편하게 할 수 있다. 이게 우리의 계산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바로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여호와를 멀찍이 할 수 있는 신이라고 그렇게 생각한 것이 그들의 큰 오산이었어요. 왜냐 하면은, 하나님은 직접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간접적인, 우회하는 식으로 찾아가는 방법들을 그들은 애굽에서 많이 배웠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섬기는 모든 송아지 우상이라는 것은, 직접 신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핑계로 자기 쪽에서 간접적으로 형상을 만들어서 신과 교류에 나섰습니다. 왜 그래야 하냐면, 그래야 그 경험된 모든 경험들은 내 쪽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직접적인, 체험 있는 신앙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그리고, 내가 그리워하는,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그것을, 그걸 유발시킨, 그것을 매개로 해서 신에게 찾아가는 겁니다. 예를 들면, 방언하고 싶다 할 때면 방언을 해버림으로써 나는 신앙이 있다는 티를 내게 되어 있어요. 고린도전서에 보면 방언 나오는데, 이 방언이라는 것이, 사도바울은 이걸 긍정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부정적으로 보는 겁니다. 방언이라는 말은 외국말인데, 그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을 왜 그렇게 하느냐? 니만 못 알아듣는 게 아니고 하나님도 못 알아듣는다. 고만해라 고만해. 그런 뜻으로 방언을 이야기 한 거예요. 그게. 근데 사람들은 직접적인 체험을 원하거든요. 

그 체험은 낯선 체험이 아닙니다. 자기가 은근히 기대한 체험을 같은 교인들한테, 그 교회에서 이미 배웠어요. 거기에서 시기가 난 거예요. “저 사람은 방언 터졌는데 나는 와 안 터지노?” 나중에 터지고 나서 “나도 넣어줘. 나도 신앙 있다.” 이러고 싶은 겁니다. 시작부터가 잘못되었어요. 시작부터가. 그러면 우상을 배제하고 참 신을 어떻게 섬깁니까? 물으면 그거는 섬길 방법이 없어요. 왜 없습니까? 물으면 우상이라는 언급을 한 거는 하나님께서 최초로 언급했다니까요. 다른 데 같으면 이것도 신이고 저것도 신이니까 섬겨라 하면 끝나는 문제인데,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시도한 그 쪽에서부터, 그걸 언술주체, 어려운 말을 써버렸는데, 말하는 주체와 나타난 주체가 인간은 달라요. 

나는 누구다고 이야기 하는 그 속에는 내가 없어요. 왜냐하면 나는 말만 했을 뿐이고. 남한테 설명하기 위해서 이런 저런 요소를 끄집어냈을 뿐이지. 그 안에 말해진, 상대방이 이해하는 그 속에는 나는 없어요. 그러니까 나는 나를 표현할 방법이 없습니다. 표현하는 방법이 없는데도 뭔가 나를 설명할 때, 그게 우상 적인 제 2의 내가 돼버려요. 인간은 자기의 말에 자기를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 속에서 자기 아들을 담아서 비로소 말씀 속에서 진짜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겁니다. 

그리고 진짜 하나님이 나타났고, 아까도 창세기 1장에서 말씀드렸지만, 나타난 하나님은 환경과 더불어서 나타납니다. 그 환경 속에 필히 뭐가 나타나야 하느냐, 마귀가 나타나야 되고 사탄이 나타나야 돼요. 그래서 에덴동산에 뱀이 침투한 것에 대해서는 그냥 침투한 것을 방치한 거예요. 아마 뱀 한 마리를 집어넣을 수도 있었을 거예요. “한번 꼬셔봐라.” 

선악과를 따먹지 마라한 언술주체, 말하는 주체, 주체가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그 선악과 주체에 대한, 죽음이라는 그 결과가 어떤 죽음입니까? 하는 그것도 하나님이 자기 말씀대로 자기 아들을 보내셔서 십자가에,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는 그 죽음을 통해서 진짜 죄의 정체와 죽음을 그 십자가에서만 증거케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십자가 외에는 다른 진리가 없어요. 

왜, 다른 진리는 전부다 인간이 상상하는 우상 적인 체험을 두고 이야기하거든요. 뭐 짜릿했다. 놀라웠다. 기도했는데 암에서 나았다. 뭐 기도하니 갑자기 집안에 운이 트이고 공부 성적이 올라가고 안 되던 취직이 되고 뭐 어떻고 저떻고 했다. 그러나 욥이 말한 체험은 그런 체험이 아닙니다. 욥이 말한 체험은 항상 이거에요. “왜 이래요? 이게 뭐에요?” 이거였지. 그러나 욥의 친구는 말하기를 뭐라 합니까?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 이거 뭐 최초의 다단계에요. 최초의 다단계에요. 욥의 친구가. 

“이 약 먹으면 효과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미 누가 그 이야기를 할 때, 그 약을 사먹으면서 그 책임은 자기가 지게 되어 있어요. 이제 말하는 언술의 주체는 날아가 버리고 내가 기대하는 체험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약 먹고 효과 없어요. 효과 없다는 소리를 안 합니다. 효과 없다 하면 지가 지한테 부끄러우니까. “약 먹으니까 어떻습니까?” “아이고 얼마나 효과가 좋은지.”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어 해요. 그래, 아홉 가지 효과 없더라도 한 가지만 들으면 거기에 고만 야! 이 약 좋은 약이다. 해서 거기에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항상 지가 기대하는 것을 지가 주워 모으면서 그걸 자기에게 다시 가져오면서 본인 스스로가 우상 적인 존재로 변화되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상을 설명하면서 조성된 새로운 환경입니다. 그 환경 속에 뱀과 사탄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역할이 요한계시록 17장인데 이것만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7장 3절에 보면 오늘 본문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했는데, 하나님이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하는 것을 가지고 사람들은 그것을 보면서 “그래 하나님의 이름을 제대로 불러야지.” 하는 거예요. 그건 니 생각이고요.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것은, 그거는 생각하기 나름이에요.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것을 아예 없애기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빼고 ‘주여’, 퀴리오스, 또는 아도나이, 주의 이름을 바꾸어서 아예 일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않았어요. 

왜, 행여나 이름을 부를 때 어떤 예쁜 여인을 생각하다든지, 이름 부르면서 집에 지금 공부하고 있는 애를 생각하다든지, 그러면 두 가지 일을 생각했기 때문에 주님 보시기에, 나도 아는데, 주님 보시기에 “이 떼끼놈! 어디 이름 부르면서 딴 생각을 해?” 하고 망령되이 부르면 삼사대까지 완전히 저주받을 일이 생겨버립니다. 그렇잖아요? 여러분들이 한번 실험해보세요. 여러분들이 평소에 주기도문 할 때, 주기도문 생각 안 납니다. 주기도문 하면서 뭐 생각하느냐 하면, “요거 끝나고 뭐해야 하지? 빨리 버스 428번 타야 되는데.” 항상 어떤 말을 할 때는, 거기에 몰입하는 게 아니고 “요거 끝나면 다음 뭐 할 건데?” 생각합니다. 

이거는 하나님의 이름 부를 때 “여호와 하나님이여!”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생각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 이름 부르니까 하나님 좋지요? 천대까지 복이 필요합니다.” 이걸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망령되이 일컫는 거예요. 인간은 망령되이 일컫는다는 말을 들어본 적도 없어요. 하나님이 그런 이야기하니까 비로소 야, 이름 부를 때 조심해야 하겠구나. 하는데 조심 할 문제가 아닙니다. 니는 무슨 이름을, 주의 이름을 어떻게 고상하게 불러도 니는 그게 전부다 망령되이 일컫는 말이 된다는 겁니다.  

그게 로마서 3장에 나오는 인간은, 모든 인간은, 그냥 인간이 아니고 모든 인간은 거짓되되 하나님은 참되시다. 그게 복음의 시작입니다. 복음의 시작이에요. 요한계시록 17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하나로 만들었어요. 그 하나를 음녀라고 이야기하고 또는 큰 성, 바벨론이라고 하는데 거기에 보면, 2절 “땅의 임금들도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거하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하고” 3절 “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참람된 이름들이 가득하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이름들로, 망령되이 일컫는 이름들로 가득 차 있었다는 겁니다. 문제는, 이 성경 본문을 하면서 문제는 음녀가 실체가 없다는 겁니다. 이게 어려워요. 여기서는 분명히 음녀라고 실체가 나와 있지만, 실제로 우리가 땅의 임금들은 알아요. 어느 나라 임금 누구다 아는데, 음녀는 어디에 있습니까? 왜, 음녀의 실체를 못 찾아내느냐 하면 우리는 전체를 외부에서 보는 입장이 아니고, 전체 안에 가두어진 입장이거든요. 

마치 통속에 두뇌만 달랑 들어있는 것처럼, 두뇌 안에 있는 두뇌가 자기는 사지 있고 멀쩡하고 온 몸 전체가 통합체로 있다고 그렇게 정보를 입력했다면, 남들 보기에는 두뇌만 달랑 있지만, 두뇌가 상상하기를 나는 정상이다고 상상해버리면 어떻게 설득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왜, 십자가 복음, 이 복음이 남한테 설득이 안 먹히느냐 하면, 본인은 죄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본인이 죄지을 때만 죄 짓고 바르게 살고 교회 잘 다니고 예수 잘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자꾸 우기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게 우상인데, 인간은 우상 아닌 적이 없었고 아닌 게 없어요. 왜? 인간은 거짓되고 하나님만 참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누가 우상숭배 안 하고 있는 사람입니까? 바로 거짓됨과 참을, 나를, 우리 자신을 새로운 주님이 만들어 낸, 십자가로 조성된 환경이라고 만들어버립시다. 그러면 내 속에 거짓이 나온 것은 그냥 나온 것이 아니고 주께서 주님 증거 하라고 일부러 거짓을 유발시켰다고 자기를 바라보게 되면 우리는 즐겁습니다. 우리는 행복합니다. 

십계명을 통해서 십자가와 연관시킵니다. 율법을 준 것은 죄를 죄 되게 하고 입을 막고 저주 아래 있게 함이고, 새로운 율법 외에 한 법이 있는데, 예수님의 십자가 화목 제물이 너희를 의롭게 했다는 것이 비로소 내 안에 왕왕 거리면서 이게 터져 나옵니다. 그게 바로 방언입니다. 복음적 내용이에요. 

우리는, 내가 그걸 언술적 주체로 받을 필요 없어요. 왜, 우리는 주님 안에 있기 때문에 내가 구태여 주체될 필요 없어요. 주께서 유발시키는 대로 우리는 표현만 할 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 말씀이 살아있고, 말씀이 들어왔고, 주님께서 성취하신 말씀이고 다 이루었다는 말씀이 우리 안에 있기에 우리가 달라졌습니다. 죄를 짓는 게 아니고 죄 안에서 주님의 생명, 십자가의 복음만 터져 나오는 이 기적이 주님 솜씨인 것을 고백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