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강-신 2장 24-25(붙이시는 전쟁)14121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2장 24-25절입니다. 구약성경 263페이지입니다.
“너희는 일어나 진행하여 아르논 골짜기를 건너라 내가 헤스본 왕 아모리 사람 시혼과 그 땅을 네 손에 붙였은즉 비로소 더불어 싸워서 그 땅을 얻으라 오늘부터 내가 천하 만민으로 너를 무서워하며 너를 두려워하게 하리니 그들이 네 명성을 듣고 떨며 너로 인하여 근심하리라 하셨느니라”
성경을 보면서 저만 보는 것이 아니거든요. 여러분들도 함께 보고 있습니다. 제가 바라기는, 제가 보는 성경을 여러분들도 보고 계시니까 여러분 쪽에서 여러분도 이 성경을 해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그래서 설교 시간을 통해서 제가 하는 방식을 참작을 해주시면 되겠습니다. 그럼 성경 볼 때 어떻게 해석하면 됩니까? 인간을 수동적으로 돌리고 능동적인 것은 하나님의 몫으로 돌리면 됩니다. 굉장히 쉽지요. 오늘 오전도 쉽다고 이야기했는데 과연 쉬운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오후 초장부터 쉬워요. 성경해석 어떻게 합니까? 나를 수동적으로, 피동적으로 돌리고 능동적인 것은 주님에게 다 맡기면 되는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창조의 바탕 자체가 창조된 자들이 다져논 바탕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창조된 것에서 솟아나오는 모든 원리와 원칙이, 우리가 창조 이전의 원리원칙이거든요. 창조 이전의 원리원칙을 가지고 그걸 보여주기 위해서 창조물, 피조물을 만들어 놓았다면, 그럼 피조물 속에 무엇이 포함되는 것이 상식이냐 면은 창조 이전의 원리원칙이 작용되고 있어야 이게 합당한 정답이 되는 겁니다. 그 작용하는 원리에 대해서 골로새서 1장16절에서는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 분으로 말미암아 만들어졌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성경을 딱 보면서 이미 해답은 나와 버렸어요. 이 성경 해석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뽑아내면 되는 겁니다.
주의할 것은 성경 해석을 통해서 교회가 뽑아져 나오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건 하나의 눈에 보이는 것은 고정되고, 고정된 것은 우상이 되기 때문에. 그래서 그 성경 해석을 통해서 나의 잘남이 나오면 안 돼요. 왜냐하면 나의 잘남은 내가 나에게 우상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경에서는 자랑할 것은 그리스도만 자랑하라고 되어 있단 말이죠. 예수 믿는 나를 자랑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근데, 성경을 해석하는 방식에 대해서 제가 방금 언급했습니다. 참 쉽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근데, 튕겨져 나온 현상들이 있어요. 제가 방금 이야기한 해석이 어떤 점이 못마땅해서 튕겨져 나올까요? 그것은 바로 내가 자랑할 수 없는 존재라면 내가 미쳤다고 교회 나오냐, 이래 나오는 거죠. 내가 하나님 믿는 이유가 내 잘난 맛에 믿는데 그리는 못하겠다는 강한 저항이 나옵니다.
근데, 그 저항이 나올 때 반가워해야 됩니다. 바로 그것이 내 속에 있는, 내가 미리 간파하지 못한 악마의 모습을 말씀이 와서 우리를 지적해 주는 하나의 계기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약에 내가 성경에 들어가기 전에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면, 영어로 하면 낫씽nothing이 되겠죠. 하나만 알면 다 돼요. 미국 가서. 낫씽nothing,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이죠.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 한다면, 그 아무것도 아닌 것부터 출발해가지고 그것이 기쁘고 즐거우면 되는 거예요. 근데,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내가 너무 비참하다고 생각한다면 자연스럽게 성경에서는 눈이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눈이 돌아가게 되어 있고. 어떤 교회에 가냐 하면, “여러분 잘났습니다. 여러분 낫씽 아닙니다. 여러분 대단합니다.” 그걸 부추겨주는 교회로 가기 마련이에요.
그러면 그 교회는 숫자가 많겠죠. 숫자가 많으면 자기 교회가 낫씽이 되지 않고, 아무것이 아닌 게 되지 않고, 야! 우리 교회는 하나님이 살아 있다고 이렇게 생각하겠죠. 벌써 그런 자들의 문제성이 모여서 바로 그 주님을 가려버리는 교회가 되는 겁니다.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는 거죠. 그러면 그 교회에서 설교한 내용이 뭐겠습니까? 성경을 백날 읽어봐도, “여러분 이렇게 하시면 여러분들이 원하는 것을 채워줄 수 있습니다.” 하고 자기에게 관심을 두는 설교로서 1대지, 2대지, 3대지 그렇게 나오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고 성경 속에서 알아서, 우리는 피동적이니까. 우리는 결과물이니까. 우리는 결실물이니까. 우리는 하나의 하나님의 작품에 불과하면 되는 거예요. 다른 것을 나름대로 또 생각하지 마세요.
중요한 것은 성경 속에서 하나님의 어떤 활동을 했느냐. 그것만 찾아내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오늘 실습을 해보겠습니다. 실습을. 오늘 본문 24절에 보면, “너희는 일어나 진행하여 아르논 골짜기를 건너라 내가 헤스본 왕 아모리 사람 시혼과 그 땅을 네 손에 붙였은즉” 붙였다는 말이 나와요. 붙였다는 말은, 두 개의 머리가 빠방하고, 남자 친구끼리 장난치면서 둘이 머리를 꽝 박지요.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지루하다 싶으면 두 애 불러다 놓고, 요새는 그리 못하지만 옛날에는 빠방 많이 하잖아요. 둘이 붙이는 거예요. 요걸 붙이는 거예요. 붙이려면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외부의 힘이 둘이 빠방하고 박치기를 해야 되는 겁니다. 충돌하는 거예요. 차사고 나듯이. 붙인다는 이 면이 바로 우리는 피동적이고 능동적인 것은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가 여기서 찾아낼 수가 있습니다.
근데, 그 다음에 봅시다. 우리는 피동이고 주님은 능동이다.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니에요. 붙여줄 때는 그 만한 의도와 목적이 있는 거예요. 의도와 목적을 끄집어내서 장차 예수님과 연관시키면 해석은 끝입니다. 빨래 끝. 해석은 끝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여기 붙여주신다고 했는데, 붙여주시는 의도와 목적이 뭐냐, 그것은 그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우리가 자랑하고 싶은 것을 집어넣으면 이거는 또 해석이 안 돼요. “하나님 붙여주시면 우리한테 뭐 줄래요?” 이런 식이면 또다시 자기한테 관심사이기 때문에 이것도 안 돼요. 이것도 빠져야 돼요. 붙이시는 원리가 앞서 나오는 하나님의 약속에 관한 게 나옵니다. 엑소더스라는 영화가 지난 월요일부터 개봉을 했는데, 저는 목요일에 개봉하는 줄 알고 바빠서 금요일에 보고 줄거리를 올려놨습니다. 사실 영화보고 줄거리 올려놓으면 영화사 입장에서는 참 반칙이죠. 줄거리 다 읽고 재미없다고 안 갈 수가 있기 때문에.
어찌되었든지 엑소더스라는 영화를 보면서 잘 만든 걸작이라고 느꼈는데, 특히 열가지 재앙을 그래픽으로 묘사해놓고 홍해가 합쳐지는 그런 것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을 눈으로 보면 오래 기억남을 거예요. 출애굽 전체의 내용이 그래픽으로 그려지니까 아마 오래 갈 겁니다. 근데 거기에서, 영화가 특이한 것이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에서 하나님을 어떻게 묘사했느냐 하면, 꼬마, 아이로 묘사했어요.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왜? 작가는, 왜? 감독은 여호와를 아이로 표현했을까? 낮아진 자, 가난한 자, 뭐 그런 순결함. 세상 물에 젖지 않는 그런 단아함, 뭐 그런 것. 순수, 그걸 표현하기 위해서 했을까? 라고 한번 생각했는데. 그것은, 아이로 표현한 것은 큰 잘못이에요. 잘못입니다.
왜냐 하면은, 하나님은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취지를 그 감독이 몰라서 그래요. 사람이 누굴 보게 되면 과거의 기억에, 해마 부분에 잠기게 되고, 잠기게 되면 그 개념에 대해서 기억을 끄집어내서 현재의 그것으로 대체해버려요. 그러면 뭐가 문제냐, 지금의 피동이 날아가 버려요. 내가 능동적으로 옛날에 은혜 받았던 것을 끄집어내버리면 오늘 주신 은혜가 날아가 버리고 옛날에 은혜 받았다고 하는 그 자신이, 그 자체가 하나의 믿음의 대상이 돼버립니다. “나 5년 전에 은혜 받았어.” “나는 6년 전에 기도원에서 큰 은혜 받았어.” 이것이, 6년 전에 은혜 받은 것을 지금 끄집어내는 것은, 지금 은혜 받은 나 자신을 좋게 보는, 나 자신을 우상화시키는 작업에 또 들어가거든요.
계속해서 피동적이어야 하는데, 한번 피동 했다고, 은혜 받았다고, 그 다음에 능동으로 내가 끄집어내려고 하기만 하면 끄집어낼 수 있다는, 이러한 저장고에 있는 것처럼. 내 선택의 의지에 의해서 끄집어낼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오해를 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것이냐. 하나님은 그런 우상들을 만들라고 유도해놓고 그것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여호와죠. 그게 바로 붙여주는 전쟁입니다. 감독이 그걸 알 리가 있겠어요. 이런 것 모릅니다. 붙여준다는 말은 사람이 전쟁을 할 때에 자기 나름대로의 포부가 있고 계획이 있어요. 스케줄이 있어요. 그걸 기피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아, 전에는 이런 식으로 전쟁에서 이겼으니까 고걸 또 써먹어야지. 그게 바로 피동에서 능동으로 전환되는 순간이거든요. 그 순간을 주께서는 제거하는 방법으로 내가 붙여줄 때까지 가만있어. 니가 옛날에 승리했던 그 방식이 지금, 오늘에 써먹을 수 없도록 내가 일부러 조치했다는 거죠. 왜냐하면 한번 승리했으면 그 다음에 그 방법을 또 쓰려고 하니까 그렇습니다. 소년 다윗이 골리앗 이길 때 돌팔매질 했지요. 그때부터 이스라엘은 돌로 총무장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 전부다 창 버리고 돌 들고 있었습니까? 아마 그렇게 나왔다면 사울의 군사들은 전부다 이마 부분을 다 가렸을 거예요. 한번 써먹은 것은 더 이상 써먹을 수가 없습니다. 홍해바다를 건너온 사람이 요단강 만났을 때, 그 요단강에서 백날 기다려보세요. 물이 갈라지나. 안 갈라지죠. 새로운 방식으로 들어갑니다. 새로운 방식으로.
바로 인간은 과거의 산물이고 하나님은 미래에서 찾아오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미처 모르는 방식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방식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구원하는 겁니다. 앞자리에 앉으면 은혜 받는다. 안 되지요. 그럼 뒷자리에 앉으면, 그거는 은혜 받고 안 받고는 하나님 맘대로죠. 왜냐하면 피동적이니까. 그럼 우리가 뒷자리에 앉으면 구원받겠네? 그것도 이미 예상한 거잖아요. 앞자리에 앉아도 은혜 받지 못한다는 것이 하나의 능동을 취할 수 있는 방법으로 나한테 장착이 돼버리면 뒷자리에 앉으면 되겠네가 또 하나 생겨버리죠. 십일조 안 해도 구원받는다면 그럼 십일조 안 하는 것이 구원의 방식이 돼버려요. 막 살아도 구원된다면 막 살았기 때문에 구원되는 방식처럼 작용을 해버린다니까요.
뭐, 이제 와서 딴소리합니까? 이제 와서 딴소리 한 게 아니에요. 처음부터 그 소리 한 거예요. 처음부터. 막 사는 것은 과거에 알던 막 사는 개념이 아니고 새롭게 주어지는 막 사는 개념이 새롭게 나한테 덮어져, 덮쳐 와야 한다는 그 말입니다. 그래서 이걸 붙여준다는 건데, 붙여준다는 말은 뭐냐, 전쟁마저 니가 살기 위한 전쟁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죠. 하나님의 하나님 됨을 드러내는 전쟁입니다. 그래서 엑소더스의 잘못은 하나님의 언약을 빠트렸다는, 약속을 빠트렸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약속은 미래에서 주어지기 때문에 항상 인간들이 예상한 새로움은 그 새로움이 아니고 인간들이 놀랄 수밖에 없는 낯선 새로움이 주어지면서 “내가 알아챘다니까” 그런 소리 못하게 만들어서 “주여 이것은 붙여줬기 때문에 발생된 사태군요.” 라고 새롭게 고백하게 하죠. 하나님께서. 그게 진정한 피동적이라는 겁니다.
내가 아는, 뭐 겸손해라, 마음을 낮춰라, 어린아이처럼 순결해라, 이거 전부다 엉터리에요. 그 자체가 우상이라니까요. 그러니까 예상 못하고 막 살게 되면 진짜 막 살 수밖에 없는 것이 나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막 살면서 오는 은혜를 또 받게 되죠. 그럼 이 붙여주는 전쟁에서의 내용이 뭐냐 하면, 언약이라고 했습니다. 언약의 내용은 신명기 7장 2절에 나옵니다. 붙여준다는 내용이 나와 있어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붙여 너로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무슨 언약도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 3절, “또 그들과 혼인하지 말지니 네 딸을 그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 딸로 네 며느리를 삼지 말 것은” 4절,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로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
요, 신명기 7장 2절에서 4절 내용은 문장은 요렇게 밖에 되지 않지만 안에 내용은 성경 전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서가 어떻게 어떤 경로로 계획이 쭉 진행되어 진다는 것을 다 보여주는 겁니다. 제가 이것을 설명하면서 제일 먼저 언급하고 싶은 것은 진멸입니다. 뭐냐 하면은,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죽여라. 다 죽여라. 어린 아이고 뭐고 동정심을 품지 말고 다 죽여라. 전에 여호수아 할 때도, 여호수아 10장 19절, 20절도 그렇게 되어 있죠. 하나님께서 붙이신지라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다 죽였다고 돼있고. 특히 여호수아 11장 20절에 보면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그들로 저주 받은 자 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진멸하려 하심이었더라”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는 길었지만 간단하게 방정식을 만들어 보면 ‘하나님의 전쟁은 진멸.’ 간단하죠. ‘하나님의 하신 일은 진멸.’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죽이는 것.’ 왜? 다 죽여야 하기 때문에 다 죽이는 겁니다. 제가 오늘 아침에 어린양이야기 하면서 하나도 보충해야 될 내용이 있는데 그게 뭐냐면 하나님께서 모든 애굽의 장자를 다 칠 때, 각자 자기 아들이 있을 거 아닙니까? 맏아들. 맏아들이, 우리가 보기에는 각자 자기의 아들이에요. 독자적인, 사적인, “쟤 얘는 니 집 얘고 이 얘는 우리 얘야.” 라고. 독자적으로 있죠. 그러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남의 애를 내 애라고 할 수 없거든요. 그런 것은 드라마나 나오지. 키워 준 엄마가 어떻고 낳아 준 엄마가 어떻고 울고불고 싸우는 그거는 스캔들이죠. 청담동 스캔들.
저 쪽의 애하고 이 쪽의 애는 독자적으로 다른 애라 말이죠. 내게 속한 거예요. 제가 낮에 설교하면서 사적인 구원은 안 된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성경에 보면 분명히 다른 앤데, 다른 앤데 하나님께서 모든 애를 다 죽여 버려요. 일반인들의 모든 애까지. 임금부터 죄수에 맏이까지. 심지어 히브리인들의 맏이까지. 인간이라고 생겨먹은 아들은 다 죽여 버립니다. 그게 진멸이에요. 하나님께서 나는, 인간은 죽어 마땅함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붙여주는 전쟁을 통해서 그 내용을 노출시키는, 하나의 지점, 그것도 고정된 지점이 아니고 이스라엘이 움직이니까. 무빙moving, 움직이는, 어떤 특정 이상한 지점이 움직이는 거예요. 아주 기이한 흔적이죠. 흔적.
그리고 살 수 있는 것은 바로 아들이기 때문에 살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니 집 아들은 죽어야 되고 내 집 아들은 살아야겠다.” 이게 아니고 같은 지역이기 때문에 다 죽어야 하는 것은 마땅한데, 어린양 피가 있으면 살고 어린양 피가 없으면 죽는 거예요. 그 어린양이 확대되면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살아나야 하고 이스라엘 말고 다른 민족은 다 죽어야 된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 붙여주는 전쟁을 해야 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이걸 오해해가지고 우리가 이기고 우리한테 덤벼든 적들은 진다. 이렇게 오해를 한 거예요. 이게 오햅니다. 큰 오해가 되는데, 하나님께서 그 오해가 오해일 뿐인 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레위기에 보면 그런 것이 있는데, 제가 여기서는 뭐, 길게 하지 않겠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만약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를 버리면 이번에는 반대가 돼요. 다른 민족한테 이스라엘이 붙임을 당해서 그쪽은 무조건 막 패는 거예요. 파바팍 인디안 밥!! 하면서 등허리를 막 때리는 거예요. 때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니가 뭔데 나를 때리노?” 하지 말고 “주께서 우리가 다른 신을 섬겼다고 붙여주셨구나!”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붙여주는 전쟁에서는 하나님은 내편이라는 게 성립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어디까지나 하나님편이지 절대로 내편이라는 게 없어요. 우리가 하나님은 내편이라는 것은 과거 기억 때문에 그렇습니다. 과거 기억 때문에 하나님은 한편 됐다고 그 다음부터는 내가 무조건 잘난 존재라고 자기를 우상시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도는 한 때 구원받았다고 성도가 아니에요. 그거는 죽은 유병언한테 배우세요. 박옥수나, 박옥수 돈 200억 횡령했다고 검찰에 고발당하고 그러는데, 박옥수나 그런 사람한테 하라 이 말이죠. 성도는 날마다 주님을 증거 하는, 주님을 뽑아내는 하나의 사물로, 물체로 이용할 뿐이에요. 그럼 이용당하면 결과적으로 그게 구원받은 사람이 되고 성도가 되는 겁니다. 구원이 소유용이 아니에요. 구원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주 앞에 늘상 피동적으로 활용당하는 거죠. 제가 이래 이야기하면 여러분들이 근심이 있어요. “목사님. 그렇게 10년 동안 활용당하다 11년에 활용당하지 않으면 우리 코너 끝나는 게 아닙니까?” “이 코너 끝나는 게 아닙니까?” 그거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미래를 땡겨서 믿어가지고 그 미래를 또 우상시하는 거예요. 미래를 현재에 또 쳐다보는 겁니다.
그냥 살아가시면 늘 신기한 일이 벌어집니다. 그게 뭐냐 하면, 안 믿어도 되고, 믿는다고 누가 돈 안 주고 누가 칭찬 안 해주는 그 예수라는 분. 그 예수라는 분이 우리 대신 일을 다 처리했다는 것이 믿어지는 겁니다. 내가 꿋꿋하게 믿는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는 거죠. 내가 열심 낸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일을 이미 처리했기 때문에 구원받는 겁니다. 이 붙여주는 전쟁에서 승리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다윗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붙여주는 전쟁의 용사는 예수님 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여기 붙여주는 전쟁의 효과는 뭐냐,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패배했다는 겁니다. 처음부터 그들은 승리할 것 같았는데, 결국은 당사자들이 패배를 하게 됩니다. 그 패배하게 된 예 중의 하나가 아주 재밌고 즐거워요. 사무엘상 15장에 보면 거기 나옵니다. 사무엘상 15장의 내용이 이런 내용입니다. 사울이 아말렉하고 전쟁하러 갔는데, 전쟁하면서 분명히 다 진멸하라고 했거든요. 3절,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약대와 나귀를 죽이라” 다 죽이라고 했는데, 막상 그들이 하나님의 붙여준 전쟁에서 승리하고 난 뒤에는, 자, 여러분 같으면 어떤 사람들을 살려둘까요? 만약에 여러분들이 전쟁에 나갔다. 주님께서는 다 진멸하라고 할 때에는 어떤 정신으로 해야 하냐면, 이 말 안 들으면 오히려 내가 진멸 당한다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해야 될 텐데. “우리는 하나님편이니까. 하나님하고 동업자니까. 우리의 조치가 하나님의 조치겠지.” 근데 막상 죽이려하니까 어린애가 “아저씨 살려주세요.” 이래 나오더란 말이죠.
그럼 어떡해합니까? 진멸하라는 이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양심에 호소하는, 인간의 존엄성에 호소하는, 그럴 때 갈등하다가 “그래, 야는 나중에 키워서 잡아먹어야지.” 그래 가지고 살려줘 버렸을 때, 나중에 사무엘이 큰 화를 냅니다. 특히 그 살려 주면서 여자를 잡았는데 이 여자가 이뻐. 그러면 이야기 끝난 거예요. 뚱뚱하고 못생겼다. 이거는 주의 지시 이전에 내가 용서 못해. 얼마나 쳐 먹었으면 이런 인간은 단칼에, 이런 인간은 지구를 황폐케 하고 지구의 온난화의 나쁜 주범이다고 대번 죽이겠는데, 그런데 너무 이뻐. 그것도 너무 마음씨 착해. 꼭 이영애 같애. 얼굴도 요만하고 얼마나 요리를 잘하는지. 나중에라도 쓸모짝이 있는 것 같아 살려 줬다. 이게 바로 사울입니다. 사울은 착하고, 사울은 여인을 보호할 줄 알고, 사울은 어린아이한테 동정심을 갖고 있고. 그래서 사울은 지옥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양상처럼 성경에 묘사되어 있는 겁니다.
제가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붙여준 전쟁에서 승리한 자는 예수님밖에 없다고 했죠.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뭐, 또 과장되게, 심하게 이야기한다고 하는데 실제로 여러분들이 주님의 그 현장에 있다면 우리는 사울처럼 그렇게 인간적인 양심이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눈에 보이는 애는 울면서 “아저씨 살려줘요.” 이것도 아니에요. “흑흑흑 아저씨 살려 주세요.” 이렇게 애처롭게 하는데. 홧김에라도 빌면 살려주는데. 아이구 그걸 죽여? 그 어린애를 죽입니까? 얼마나 모진 마음이 있어야 해요.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시키신 대로, 붙여주신 전쟁을 온순히 행할 수 있는 마음가짐은 어떤 인간에게도 구비되지 않습니다. 인간은 계속 동정심에, 그리고 자기가 이뻐 보이고 나중에 쓸모짝이 있는 것은 남겨둡니다.
남겨뒀기 때문에 나중에 사무엘이 찾아와서 “당신은 왜 하나님의 전쟁을 마치 당신의, 능동적인 당신의 전쟁인줄 착각했습니까?” 하고 포로 잡힌 아각왕을 데려와서 보는데서 아각왕을 찍어버렸다고 되어 있습니다. 사무엘상 15장 33절에 아각왕을 도끼로 찍듯이 찍어버렸어요. 아주 잔인하게 죽여 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잔인과 분노와 용서하지 않음을 우리가 이해할 수가 없어요. 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너무 동정하니까. 우리 자신을 너무 보호하고, 우리 자신에 편에 서서 자기한테, 자기 자신에 대해서 큰 자비심으로 무장되어 있으니까.
그러니까 누굴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진멸한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이제 성경해석 마무리입니다. 어떤 성경해석을 할 때는, 저쪽을 진멸하라고 할 때는, 붙여준 전쟁에, 무조건,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지만, 만나는 사람은 다 진멸하라. 붙여줄 때는 다 죽여 버리라 하는 것은, 니를 하나님이 그렇게 진멸해도 되는 대상으로 지금 보고 있다는 뜻이에요. 내 사적인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개인이 일을 벌이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 구원받기 위해서 기도하고 이런 일을 하시고 있는 것이 아니고, 이미 구원받은 자로서 우리 인간들이 모르는 주님의 진노하심과 그리고 진노하심에서 건져주시는 무상의 용서하심을, 그 양면을 다 보여주시기 위해서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교회 온다고 천국갈 수 없죠. 그 이유가 뭐냐.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의 양심으로 폴짝 뛰어서 천국 못 가는 거예요. 남녀가 만나서 사랑해서 결혼할 수 있어요. 하지만 예수님의 신부가 될 수는 없습니다. 예식장 잡고, 부조하고, 광고해도 결코 예수님의 신부가 될 수 없어요. 그거는 다른 문젭니다. 어떤 인간이 신부되느냐. “주여, 저 같은 인간이 어떻게 신부됩니까?” 라는 생각이 드는 아주 기이한 현상. 이거는 미처 내가 생각 못한, 나를 이 정도로, 낫씽,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내가 전에는 나를 봤던 적이 있던가? 라고 본인이 스스로 놀랄 정도로. 내가 정말 아무것도 아닌 생각이 든다면, 그 사람은 지금 그리스도의 일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자신에게 너무 동정심을 갖고 자신이 우수한 존재라고 착각할 때부터 이미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외면하는 순간인 것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말씀을 읽으나 안 읽으나 지금 현실은 말씀대로 진척되고 있음을 우리가 온 몸으로 체험하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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