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사(에스겔 39:14-16)
장례사
2014년 12월 17일 본문 말씀: 에스겔 39:14-16
(39:14) 그들이 사람을 택하여 그 땅에 늘 순행하며 장사할 사람으로 더불어 지면에 남아 있는 시체를 장사하여 그 땅을 정결케 할 것이라 일곱 달 후에 그들이 살펴 보되
(39:15) 순행하는 자가 그 땅으로 통행하다가 사람의 뼈를 보면 그 곁에 표를 세워 장사하는 자로 와서 하몬곡 골짜기에 장사하게 할 것이요
(39:16) 성의 이름도 하모나라 하리라 그들이 이와 같이 그 땅을 정결케 하리라
이스라엘이 거주하는 땅에 대해서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이 안일하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결, 정결”을 외쳐도 무심코 여겼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기록된 그 시기에 이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정결에 의해서 먼 나라로 추방된 형편에 있었습니다. 바로 이런 판국에 하나님의 작업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살던 땅으로 초점이 모아집니다.
‘하모나’라는 지명이 새로 생겨난다는 겁니다. ‘집단적으로 몰살당한 지역’이라는 뜻입니다. 집단이란 의미는 개개인간의 차이는 무시된다는 것입니다. 누가 덜 낫고 누가 더 낫고 에 따라 하나님께서 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 집단 모두가 세상 돌아가는 원칙에 집단적으로 무지에 빠져 있었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의 정결을 뿜어내는 땅을 건드린 것입니다. 그들이 집단적으로 죽고 난 뒤에, 장례사들이 바로 이런 사태를 증거하게 됩니다. 시신을 치우면서 말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정결하심이 인간의 죽음과 연결지으면서 등장된다는 뜻입니다. 인간들이 내놓은 각양 종교적인 행태들로서는 제대로 정결을 표현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신을 찾던, 신을 모르던 간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정결의 원칙은 ‘죽음’입니다. 이 죽음 앞에서 인간들 사이의 재능 차이나 실력 차이는 무의미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오해하기를, ‘산다는 것은 죽음을 향해 가는 여정’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정결을 아는 자들은 이런 생각이 틀렸음을 압니다.
죽음이란 인생, 저 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본격적으로 죽음이 인생을 통해서 자신의 본질을 드러내고 있다는 겁니다. 끝은 이미 개시되었습니다. 산다는 것은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끝’을 증거하는 일과 관련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주거했던 그 땅은 정결한 땅이라서 졍결다운 면모를 여지없이 발휘됩니다.
이미 이스라엘은 멸망당했습니다. 에스겔 37:1에,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재하시고 그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리고 에스겔 37:12-14에 보면, “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한즉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내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국 땅에 두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죽어 이미 바짝 마른 뼈들이 되어 있는 자들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큰 무리, 곧 군대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 이스라엘을 공격했던 곡이라는 집단은 큰 멸망당하는 집단이 되어버렸습니다. 어느 한쪽을 집단적으로 몰살시켜 버리고, 어느 다른 집단은 집단으로 일괄해서 살려내는 바로 그 작업이 모두 ‘졍결하심’에서 나온 힘이라는 겁니다.
전에 히브리인들이 홍해 바다 한가운데서 통과할 때에, 뒤따라온 바로의 군대들도 거침없이 홍해 바다 한 가운데로 뛰어들었습니다. 나중에 홍해바다 가에는 애굽 군대들의 시신들과 말들과 군장들이 그득했습니다. 왜 한쪽은 살게 되고 왜 다른 쪽을 죽게 된 것입니까? 그것은 그냥 땅이 아니라 졍결이 살아있는 땅이기 때문입니다.
바로왕이 히브리인들을 보면서 한 가지 빼먹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 중에 ‘졍결한 하나님께서 동행한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이 점만 고려하지 않는다면 누구나 열심내고 흉내내기로 천국에 이를 것입니다. 오늘날도 예외가 아닙니다. 교회 올 때에는 자진해서 온 자와 하나님께서 동행하셔서 오게 된 자가 사람들 눈에는 차이없이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은 따로 있습니다. 불신자들은, 자신의 최고 성의를 신에게 보이는 식으로 졍결한 세계, 곧 천국에 이르고자 시도합니다. 하지만 성도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자신은 뼈들에 불과한 것을 압니다. 그것도 집단적으로 말입니다. 즉 자신의 죽음, 곧 자신의 끝을 미리 성령님을 통해서 실제화 된 상태가 본인인 것을 압니다.
죽음, 곧 끝이란 더 이상 나아갈 길이 없고 끊어져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개인적 구원에 있어 ‘구원 그 이후’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구원 그 자체가 끝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구원이란 어떤 것을 그것의 본질에로 되돌려주어 그 본질이 비로소 본래적으로 나타나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구원밖에 있는 자들은 오늘도 최고를 추구합니다. 최고의 선, 최고의 미, 최고의 진리를 추구합니다. 하지만 그 결과로 인해 그들은 최악만 마주하게 됩니다. 곧 예수님의 피와 살입니다. 그들은 진작부터 그들이 당연히 죽어있음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반면에 성도는 자신이 처음 태어날 때부터 자신이 이단인 채로 태어났음을 차후에 알게 된 자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본인에게 있어 이미 벌부터 받고 시작한 인생입니다. 벌을 이미 받고 난 뒤, 왜 그런 벌을 받아야 마땅한 죄가 무엇인가를 살아가면서 체득하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이로서 성도에게는 새삼스럽게 ‘실수’나 ‘실패’라는 것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실수나 실패한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는 대상에게나 해당될 사항입니다. 성도는 이미 자신이 죽은 뼈에 불과하기에 그 남은 경로는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행하신 그 능력으로 채워집니다. 예수님의 경로란 죄로 인하여 죽어야 될 경로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이 땅에서 자신이 무슨 일을 해도 그것이 자신을 죽음으로 이끌게 하는 죄인 것을 고백하게 됩니다.
곧 성도는 ‘죽음’에 대한 허다한 증인들 속에 합류되어 있습니다. 이는 자기 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이 하나님이 정결 앞에서 시신이 되어야 될 대상인들 것이 눈에 들어오게 됩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모든 믿음의 선배들은 각자 하나님으로부터 사명들을 부여받지만 본인들은 결코 ‘메시야’ 그 자체가 아님을 인정합니다.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께서 가야할 사명이 있었다면, 에녹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동행했던 노아는, 인간이 죽어야 될 원인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인인 자신이 의인으로서 간주되어 영생의 나라에 가야 될 그 일에 대해서 ‘방주 만들기’ 작업을 통해서 증거하게 됩니다.
즉 “나는 결코 그 메시야가 아닙니다. 나는 죄인이며 단지 메시야로 인하여 용서받았습니다”를 증언할 증인인 것입니다. 바로 이런 집단들이 오늘날 하나님의 천국과 정결을 증언해줄 증인들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그 어떠한 악도 다 뽑혀서 들어올 수 없는 그곳에 오직 예수님의 용서로 돋아나게 하시고 심으신 자들만 모일 수 있음을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18강-에스겔 39장 14절-16절(장례사)141217-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39장 14절-16절입니다. 구약성경 1214페이지입니다.
에스겔 39:14-16
“그들이 사람을 택하여 그 땅에 늘 순행하며 장사할 사람으로 더불어 지면에 남아 있는 시체를 장사하여 그 땅을 정결케 할 것이라 일곱 달 후에 그들이 살펴보되 순행하는 자가 그 땅으로 통행하다가 사람의 뼈를 보면 그 곁에 표를 세워 장사하는 자로 와서 하몬곡 골짜기에 장사하게 할 것이요 성의 이름도 하모나라 하리라 그들이 이와 같이 그 땅을 정결케 하리라.”
이 짧은 문장 가운데서 어떤 일이 있었는가 하는 것을 짐작해 보면 전쟁이 있었고 그 전쟁에서 뭔가 패배자가 있었습니다. 그 패배자는 아주 전멸을 당했는데요. 그 패배자는 누굴 공격하다가 패배를 당했는가 하면, 하나님의 이스라엘 족속에게 달려들다가 그들이 패배했습니다. 그들이 이스라엘을 공격하다 패배를 한 경우는 오늘 본문의 경우뿐만 아니고 홍해 바다에서 이미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다 가운데로 들어가니까 자기들도 멋도 모르고, 똑같은 인간이니까, 다 같은 땅이니까, 같은 인간이고 같은 땅이니까, 저들이 걸어 들어가면 우리도 걸어갈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들이 빼먹은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이 동행한다는 그 점을 그들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겁니다. 하나님이 동행하시니까 히브리인들이 홍해를 건너간 것이고 홍해가 열린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빼버리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하면, ‘너 하는데 나는 못해?’ 이렇게 되는 거예요. 홍해 바다를 건너가는 그 이야기가 요한계시록에 그대로 나와 있습니다. 거기서는 불이 있는 유리바다로 되어 있습니다. 남들이 교회 가서 천국 가니까 지도 그냥 교회 가면 천국 가는지 알고 있어요.
내가 교회 나왔다고 절대로 구원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동행하셔서 교회 보내시고 동행하셔서 천국 보내는 자만 갈 수 있습니다. 교회 올 때 인위적으로 왔는지 자기가 알아서 자기 결심가지고 왔는지 아니면 주께서 보내셨는지는 교회에서 복음을 외칠 때 그것이 판정 나게 되어 있어요. 교회 까지는 왔는데 그냥 노는 재미에 빠져서 복음 자체가 관심이 없다? 그러면 그것은 자기 힘으로 교회 열심히, 악착같이 다녀서 천국 가겠다는 것인데 그것은 마치 그림의 떡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림 속에 떡이 있는데 먹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림속의 떡이라고도 할 수 있고 혹은 거울 속의 세계, 그렇게 표현해도 되지요.
거울을 손가락으로 파봐야 피만 나지요. 거울속의 세계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겁니다. 우리는 거울에 비췰 뿐인데 거울 속에 누가 들어가 있다면 그것참 신기한 일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영으로라야 파악이 되고 이미 예수 안에 있는 사람에게만 기쁨과 감사의 책이 되는 겁니다. 그렇지 않고 예수 밖에 있는 사람은 이것이 지키라는 법으로 보여서 바깥에서 열심히 지켜서 거울 밖에서 자기 의만 소복이 쌓았을 뿐인데 그것은 백날 해 봐야 예수 바깥에서나 할 수 있는 종교적인 일이 되는 겁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신약의 그리스도 안에서는 뭐가 없느냐 하면, 율법 자체가, 율법이라는 그 의미가 성도한테는 더 이상 적용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의 모든 적용은 그리스도에게 갔고 그리스도께서 완성한 하나님의 의가 성도에게 오다 보니까, 성도는 본인이 열심히 하거나 만들어내지도 않은 더 큰 의가 오다 보니까 그 때부터 성경을 보고 율법을 보면서 ‘내가 아무리 봐도 죄인인데 내가 어떻게 의인이 되었지?’라는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만 자기와 동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요. 그리스도가 동행한다면 그리스도가 하신 일이 자기에게 주어진 결과가 되는 겁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갔다면 그들도 갈 수밖에 없고 예수님께서 좁은 길로 갔다면 그들도 좁은 길로 갈 수밖에 없고 예수님께서 부활해서 하늘나라 갔다면 그들도 같이 하늘나라 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공생애 때 이미 그 점을 언질을 했어요. 언질을 했는데 그 중 하나가 누가복음 16장에 유명한 예로 나옵니다.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이야기. 그 거지 나사로와 부자 이야기를 보고 어떤 분이 저에게 중요한 질문을 하셨어요. 뭐라고 했느냐 하면, “거지 나사로가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아주 중요한 질문이에요. “부자가 어떻게 지옥 갔습니까?” 그것은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돈만 사랑하다가 지옥 갔다. 그 앞에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언급이 되어 있습니다. ‘돈 좋아하다가 지옥 갔구나.’
그러면 거지 나사로는 돈 안 좋아하면 구원 받는 것이냐, 하는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거지 나사로가 예수 믿었다는 이야기도 없는데 어떻게 구원받았느냐, 하는 아주 예리한 질문을 하셨어요. 미국에 계신 분입니다. 여선교사님인데 그런 질문을 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설명을 했어요. 나사로가 아브라함 품에 안겼습니다.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는 말은 아브라함의 언약의 조치에 의해서 나사로가 구원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그 아브라함의 언약의 조치라고 할 때 이렇게 언급했습니다.
“모세와 선지자의 글을 믿지 않으면 이미 너는 지옥에 왔고 아직 오지 않는 네 동생 다섯 명도 나사로가 죽었다가 살아나서 백날 보여 봐야 소용이 없고 여기 있는 모세와 선지자의 글을 믿지 않으면 그들도 너처럼 지옥에 간다.”고 언급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예를 드신 것은 “내가 하는 모든 것은 아브라함 언약, 다시 말해서 모세와 선지자의 글을 완성하러 왔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완성이 되면 거지 나사로도 구원을 받는 거예요. 따라서 거지 나사로는 아브라함 품에 안겼다는 말은 그는 비록 돈은 없지만 모세와 선지자의 글을 완성하실 분이 반드시 오신다는 것을 그는 아브라함언약을 통해서, 현재의 언약뿐만이 아니고 미래에 올 언약의 완성도 동반해서 같이 믿은 거예요. 그 완성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렇게 될 때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부자와 거지이야기는 오늘 본문과 관련이 되어 있어요. 어떤 관련이 되어 있느냐 하면, 신앙생활은 개인을 닦달 내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니다. 개인을 재촉하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닌 겁니다. 개인을 재촉했을 때 나오는 가장 큰 오해가 뭐냐? ‘구원 그 이후’에요. 남포교회 박영선 목사님이 그걸 언급하면서 책을 냈는데 굉장히 큰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구원은 개인 구원이라는 강한 인상을 주고 있어요. 구원은 개인구원이라는 게 없어요. “개인적으로 열심히 하세요. 그러면 구원 받습니다.” 하는 이런 구원자체가 성경에 없습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땅에 관한 거예요. 땅의 질에 관한 겁니다. 예수 안에서 구원 받는다 할 때 예수 안에서 내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 안 자체가 구원을 주는 거예요. 예수 안이라는 영토, 예수 안이라는 공간, 구약 적으로 말하면 그 땅, 하나님이 동행하는 그 땅이 구원이에요. 그 땅에서 거주하기만 하면 다 구원받는 겁니다. 문제는 그 땅이 홍해바다에서는 홍해바다 한 가운데라면 약속의 땅에서는 그게 정착지에요. 정지된 땅인데 이 곡이라는, 언약 밖에 있는 이 인간들이 멋도 모르고, 이스라엘의 거룩한 땅이 어떤 땅인지 분간도 못한 채 쳐들어 온 겁니다. 기존의 자기가 살던 땅과 동일한 땅인지 알고.
마치 애굽의 바로군대가 히브리인들이 홍해를 건너가니까 자기도 따라가면 통과할 수 있을 줄 알고 똑같은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거룩은 착한 일을 하는 것이 거룩이 아닙니다. 거룩은 하나님의 언약이 완성되고 그 언약이 실시되는 그것이 거룩이에요. 그것이 바로 구원이고. 구원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본질을 들추어내서 본질로 되돌아가는 것이 구원입니다. 우리의 본질은 내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에요. 주님 때문에 우리가 여기 있는 겁니다. 그 그리스도를 찾아가는 것, 그리스도하신 일을 바라보는 것, 그게 천국이고 그게 구원이고 그게 자유고 그게 하나님나라에요. 구원 그 이후라는 그것은 개인에게는 적용되지를 않습니다. 구원 그 이후라는 것이 개인에게는 성립이 되지를 않아요.
그러면 그 땅은 어떻게 되는가? 오늘 본문에 정결이란 그 땅에 대한 정결입니다. 신약에서는 예수 안의 정결, 그 땅에 대한 정결인데 정결하다면 여기에 두 가지가 있어야 돼요. 들어올 수 없는 자가 어떻게 큰 심판을 받는가를 보여주고 여기에 들어온 자는 어떤 혜택을 입는지를 보여주는 이 두 가지 의 것, 그러니까 여기 이 땅에 있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은 두 종류의 역할을 하는 거예요. 성도는 하나님께 사랑받는 역할을 할 뿐이고 구원받지 못할 사람들은 저주받는 역할을 할 뿐이고 결국 남는 것은 정결, 하나님이 함께 하는 그 땅의 거룩함과 정결함, 그것을 보여주는 역할로서만 피조물들이 동원될 뿐이에요. 개인구원은 없습니다. 개인구원이란 것은 성립이 되지를 않아요.
작가가 드라마를 쓸 때 주인공이 굉장히 빛나요. 주인공이 고생 끝에 착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 주인공을 스타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스타를 누가 만들어줬어요? 작가가 만들어줬잖아요. 스타는 누가 스타냐 하면, 작가가 스타에요. 우리 예수님이 스타지 성도는 스타가 아닙니다. 주께서 그렇게 만들었는데 왜 본인이 다 영광을 챙기는 난리를 피웁니까? 이미 그것은 우리가 마귀에 속했던 그 버릇이 그대로 이어져서 그래요. 오늘 본문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멋도 모르고 이스라엘한테 덤벼들다가 곡의 사람들이 전멸당해서 다 죽었어요.
얼마나 다 죽었는지 본문에 ‘하몬’은 집단적인 죽음이라는 뜻이에요. 그게 하나의 이름으로 정착되었다는 말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겁니다. 집단적인 죽음이 어디서 일어났는가? 이스라엘이 사는 그 땅에서 일어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집단적인 죽음의 역할, 드라마에서 예수님이라는 작가에 의해서 그것이 쓰이는 이유, 에스겔 37장에 보면 거기에 뼈들이 나와요. 거기에 인자가 개입하고 성신이 개입해서 뭔가 주고받고 대화 하다가 이 뼈들이 어떻게 되는가 보니까 이 뼈들이 하나님의 신이, 말씀이 임하니까 뼈들이 스스로 조립되면서 하나님의 큰 군대, 집단이 된 거예요.
같은 땅에서 이스라엘은 죽은 데에서, 뼈에서 부활되는 무리가 된 반면에 그 땅에 멋도 모르고 덤벼들었던 그 집단은 거기서 완전히 전멸당하는 겁니다. 같은 땅인데 한쪽은 죽은 데서도 살려주고 한 쪽은 멸망당하는 것은 그렇게 해서 이 땅이 얼마나 거룩한 땅인가, 그 질적인 모든 것을 노출시키는 그러한 기능의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같이 참여케 하신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핵심내용이에요. 여기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어떻게 보느냐가 굉장히 중요한데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보는 것은 이 땅이 중요하고 하나님의 관심사는, ‘어떻게 이 땅의 거룩을 유지하느냐, 정결하게 유지할 것인가?’ 하나님의 관심사는 그것뿐입니다.
한쪽은 죄에 대해서 합당한 심판을 해서 “내가 이만큼 거룩한지 몰랐지? 내가 이정도로 무서워,”라고 하면서 거룩을 보여주는 반면에 이쪽은 죄 지은 자를 하나님의 약속이 있어서, 사실은 예수님과의 사전의 조율이 있었지요,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이 대신 희생 덕분에 죽을 너희가 용서받아서, 사랑으로 너희가 이렇게 거룩하게 되었다.”라는 것도 보여주면서 거룩을 또 보여주는 거예요. 같은 거룩한 땅의 두 가지 속성이 그런 모습인 겁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제가 여러분에게 질문할 테니 그동안 배운 실력대로 답변해 보시기 바랍니다.
창세기 5장 24절의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죽음을 보지 않고 그냥 하늘로 올라갔지요. 죽었더라, 죽었더라, 연속되더라도 “에녹은 육십 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삼백 육십 오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 5:21-24) 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질문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 그 뒤에 노아가 나옵니다. 노아는 왜 죽입니까? 노아도 죽이지 말아야지요. 노아도 동행했잖아요.
에녹은 살려놓고 노아는 왜 죽입니까? 우리가 만약 소설을 쓴다면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은 에녹이 시발점이 되어서 그 다음 동행한 사람은 죽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고 다 하늘로 가야 돼요. 그런데 노아 죽습니다. 왜 죽이십니까? 여기서 개인구원, 사적인 구원을 따지면 거기에 해답이 없습니다. 개인구원을 따지는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바로 구원파고 신천지거든요. 개인구원, 그들이 어디서 나왔는가? 개혁주의에서 나왔어요. 한국교회의 신학에서 나왔어요. 어쩌면 기독교 2천년역사 속에서 사생아들이 나왔어요. 기독교역사 자체도 내가 보기에는 이상해요.
왜 하나님께서 동행한 에녹은 살려놓고 그 뒤에 같이 동행했으면서도 노아는 왜 죽이시는가 하면 ……, 우리가 어디서 오해를 하느냐 하면, 우리가 죽으면 나이 많아서 죽는지 알고 있어요. 죽는데 이유가 있습니다. 로마서 6장에 보면 죄의 값은 사망이니까 죽이는 것은 죽음 그 자체를 체험케 하려고 죽이는 것이 아니고 죽게 된 이유가 죄에 있음을 보이기 위해서 죽이는 거예요. 인간은 죽는 역할을 해야 하는 그 역할을 보여주기 위해서 왜 죽을 수밖에 없는가의 그 막중한 사명, 노아는 이미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았지요, 살았기에 막중한 임무 때문에 죽을 수가 있는 겁니다.
이미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생명을 얻었기에 사도바울은 충분히 고생해도 괜찮아요. 고생해도 괜찮다고요. 사람은 사는 게 죽음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성경에서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죽음을 향하여 달려가는 것이 아니고 본격적으로 죽음을 새로 시작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거예요. 자, 진짜 죽음은 이미 알았다. 이제 어째서 이 죽음이 왔는지를 본격적으로, “주여, 우리 자신을 통해서 죽음을 본격화하여 주옵소서.”라는 식으로 시작하는 거예요. 구원 그 이후가 아니라 그 말을 바꿔야 돼요. ‘끝’ 이후, 끝, 그 이후에 뭐가 있느냐? 끝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는 그런 기간이 남아 있습니다. 이게 성도담당, 성도가 해야 될 담당입니다.
성도는 이미 자기가 십자가 성령을 통해서 그냥 늙어 죽는 것 말고 죽어야 될 이유를 알아요. 남들은 늙어 죽어야 죽음에 가깝다 하는데 성도는 십자가에 자기 죄를 누가 대신 가져감으로 말미암아 내 죄를 가져간 그 경로를 파악해요. 그러면 나의 죄가 어디에 도착하느냐 하면, 십자가에 딱 도착이 돼요. 누가 가져갔는가? 예수님이 내 허락도 없이 일방적으로 와서 내 죄를 가지고 아버지 앞에 섰습니다. 아버지가 심판 주거든요. 서니까 위에서 퍼부어지는 것은 마지막 저주가 여기에 퍼부어졌어요.
그러면 이미 성도는 자기 끝을 체험한 겁니다. 끝의 특징, 끝이란 말, 죽음이라는 말은 길이 없다는 거예요. 길이 끊어졌다는 겁니다. 거기서 구원을 언급한다는 이것은 말도 안 되는 거예요. 구원 그 이후라는 것이 사적으로는 없어요. 구원 자체가 끝인데 그 이후에 뭐가 있겠습니까? 구원 그 이후는 사적으로는 없어요. 다만 하나님에게는 있어요. “끝을 봤나?” “끝을 보았습니다.” “이제 그 끝을 증거 하라.” 그 증거자가 오늘 본문에 장례사들이에요. 오늘 설교 제목이 ‘장례사’인데 장례 치르는 사람들은 증인들이에요.
무슨 증인들이냐 하면, 이 땅에서 까불다가 하나님께 벌 받아 죽었다는 그 증인들입니다. 그 증인들이 어떻게 증인노릇 하느냐? 사람의 시체를 치우면서 증인노릇 하는 겁니다. 이 일, 오늘날 우리 성도한테 맡겨졌습니다. 성도의 임무는 간단합니다. 사람이 왜 죽어야만 하는가? 그걸 증거 하는 일을 하는 겁니다. 죽은 시신을 다루는 거예요. 대통령이나 대한항공부사장 앞에서 겁내지 맙시다. 시신입니다. 목사나 어떤 장로 앞에서도 겁내지 마세요. 하나의 시신입니다. 히브리서 12장 1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허다한 증인들이라고 했지요. 그 허다한 증인들이라고 대표적으로 소개한 것이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선배, 선지들입니다. 많은 선배들이 11장에 나와 있어요. 우리는 이 선배들을 보며 까르르, 까르르, 하고 있지요. 그 선배들이 허다한 증인들이에요. 바로 장례사들입니다. 인간의 바닥을 전부 체험한 사람들이에요. 나름대로의 바닥, 끝을 체험한 겁니다. 나이는 얼마 되지 않아도, 아직 수명이 남아 있더라도 미리 당겨서 그들은 인간의 바닥을 못 겁니다. 안 죽어도 죄를 알게 되면 이미 끝을 경험한 게 돼요.
어느 정도로 경험했는가? 그들은 양 잡아도 소용없고 방주 만들어도 소용없고 아들 바쳐도 소용없고, 오직 그런 것은 믿음의 부분이지 믿음의 진짜 최후의 근거는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들은 알았습니다. 방주를 만들어도 왜 방주 만든 노아가 메시아가 아니며 양을 잡았던 아벨이 왜 메시아가 아닌가 하는 겁니다. 훌륭했던 다윗이 왜 메시아가 아니며.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시키는 대로 했지만 그들은 죽었고 죽었습니다. 자기 백성과 고난 받기를 바로의 왕자 됨보다 더 원했던 모세도 메시아는 아니에요. 다만 메시아를 증거 하는 증인입니다.
그 당시에 자기도 더불어서 같이 죽어가는 사람들 속에서 죽음을 처리하는 장례사같은 허다한 증인들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다 같이 즐겁게 죽읍시다.” 그것이 그들의 고백이었어요. 그게 그들의 믿음이었습니다. 심지어 히브리서 11장 36절에 보면,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34절에 보면 불의 세력, 칼날, 심지어 37절에는,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그것이 바로 그들이 허다한 증인이 되는 겁니다. “그래, 이게 바로 내가 증거 해야 될 죽음의 진수야.”
“어떻게 내가 살아납니까?”가 아닙니다. ‘자신이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하면 내가 알려주지?’ 상대를 볼 때 시선으로 봐야 된다는 거지요. 시선으로. 그러나 세상은 그렇습니까? 오늘 나온 이 하몬이라는 일단의 무리, 홍해 바다가 어떤 바다인지도 모르고 까불고 들어가다가 다 전멸당한 애굽 바로의 군사들처럼 이들에게 있어서의 생애라 하는 것, 그들은 최고의 선, 최고의 진리, 가장 좋은 것을 추구했습니다. 진, 선, 미지요. 제일 좋은 것, 제일 훌륭한 것, 제일 맛있는 것, 제일 좋은 옷, 제일 높은 빌딩, 제일 넓은 주택과 차, 제일 큰 부동산, 제일 큰 교회, 제일 큰 당회장 목사, 큰 교회 장로, 그런 것들을 추구하고 있지요. 믿음 1등, 전도 왕, 이런 것, 최고의 좋은 것.
그런데 그것이 최악인 줄 그들은 상상도 못했지요. 인간이 가장 무엇을 원하는지? 주님께서 일부러 그것을 자극을 시킨 적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6장 이야기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무한대의 고기와 떡을 준 적이 있어요. 소위 오병이어라 해요. 물고기 두 마리 보리떡 다섯 개의 무한대, 그 무한대라는 표현은 양이 넘쳐난다는 뜻이 아니고 필요 이상으로 남아 있다는 것으로 무한대로 하는 거예요. 열 두 광주리가 남아 있잖아요. 그들이 원하는 것을 제공했기에 임금 삼기 위해서, 그들이 추구하는 최고의 자리는 임금이거든요, 그 임금 삼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라 왔습니다.
그들이 제일 좋아하는 것을 추구할 때 그 끝, 그 끝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합니다.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생명이 없다.” 너희들이 가장 좋은 것은 바로 내가 죽는 이 죽음과 마주치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너희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 때문에 나는 살을 찢어야 되고 피를 흘려야 된다는 거예요. 그들은 모두 다 사적인 구원, 개인적인 구원에 빠져 있습니다. 내게 좋은 것이 아마 하나님께도 좋을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평생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니고 평생 동안 자기 잘남을 증거 하는 증인으로 살아온 거예요.
자신의 죽음, 자신의 최악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죄를 증거 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잘났음을 증거 하는 거지요. 그것은 자기 증인이지 죽음의 증인이 아니고 죽음에 대한 증인이 아닌 겁니다. 그들은 그 땅 마저, 약속의 땅마저 개인적 소유로 생각한 거예요. 내가 가는 곳이 바로 나의 것이 된다는 그 사고방식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뼈에서 삶으로 말미암아 너희들은 뼈에 불과했다는 거예요. 뼈에서 다시 하나님의 군대가 될 때 뼈에서 군대가 되는 그 경로에서는 인간이 죽은 자이기에 죽은 뼈에서 스스로 뼈를 맞추고 힘줄을 연결하는 힘을 자기 쪽에서 끄집어 낼 수가 없어요.
우리가 구원받는데 우리는 아무 힘도 가미할 수가 없어요. 들어갈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내 구원은 내 구원이 아니고 주님의 자기일이기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작품 안에 있는 역할이지 그 작품을 내 소유로 만들어서는 안돼요. 천국은 내 것이 아니에요. 천국은 주님의 것이고 그 주님의 것 만드는데 있어서 우리가 거기에 그냥 참여당한 것뿐이에요. 하나님에 의해서 참여당한 겁니다. 참여 당하면서 우리는 죽음이라는 것이 뭐며 그 죽음이 어디서 왔는가를 증언하는 허다한 증인의 역할을 우리가 맡은 겁니다. 그게 전부 다 다르겠지만.
그래서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통해서 에스겔 37장에서는 이스라엘을 뼈에서 살렸지만 하나님과 동행의 의미를 모르는 곡한테는 아주 집단적인 무덤을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러한 기능이 작용하는 땅 자체가 정결한 땅이 되고 그 정결한 땅에서 만약에 살아남는다면 그야말로 정결한 백성이요 흠 없는 백성이요 거룩한 백성이 바로 너희들이라는 겁니다. 이러한 정결을 결정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방식은 바로 솎아내는 방식, 저는 그렇게 표현하는데요, 솎아낸다는 것은 가라지를 솎듯이 솎아내는 거예요.
솎아낸다는 이 표현을 위해서 제가 한 예를 든다면 태풍이 쳐서 나무뿌리가 뿌리 채로 뽑혔다면 그 자리에 나무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지요. 뿌리 채 뽑혔으니까. 바로 주께서 말하는 정결한 세계, 거룩한 세계, 쉽게 말해서 천국이지요. 이 천국은 악한 자가 뿌리 채 뽑혀서 그 땅에는 악한 자가 언제 있었나, 할 정도로 흔적도 없이 날라 가 버립니다. 태풍이 와서 뿌리 채 뽑히니까. 하나님의 이러한 작업에는 실수나 실패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거기서 버티고 남은 사람이 성도 아니겠습니까?”라고 할 텐데 성도는 버티고 남아서 성도 되는 것이 아니고 새로 심은 사람들이에요.
새로 심었다는 이 생각을 하기 위해서는 소위 우리마저도 사실은 뿌리 채 다 뽑혀져야 돼요. 내 것이 남아 있으면 ‘아, 그동안 참 버틴다고 애먹었다.’ 그렇게 돼버리잖아요. 그러면 조금이라도 주님의 공로 자리에다 우리의 그 잘남이 스며들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뽑히지 아니하면 우리는 기어이 자기의 자존심 때문이라도 뭐 하나 건지려고 애를 쓸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방법은 어떤 방법이냐? 이거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로 하여금 일치감치 벌을 주시고 시작하는 겁니다. 벌을 주시고 그에 합당한 죄를 짓게 하시는 겁니다.
인간은 날 때부터 이단 되는 거예요. 본인이 이단이라는 사람은 구원 받은 사람이고 이단이 아니라는 사람은 구원 못 받은 사람이에요. 이미 이단이 돼 버리면 이단인 체로 하는 모든 일에 대해서는 실수나 실패라는 게 있을 수가 없습니다. 아, 이거 머리 좋은 사람이나 아는 이야기입니다. 자, 처음부터 빵점, 수학 빵점과 영어 빵점인 아이가 있습니다. “얘 철수야! 네가 어디서 틀렸느냐?” 처음부터 빵점짜리한테는 어디서 틀렸느냐 하는 질문자체가 성립이 안돼요. 그래서 성도는, 기쁜 소식 하나 드립니다. 성도는 인생 실수나 실패가 없어요. 인생의 실수나 실패라는 게 애초에 성립자체가 되지를 않습니다.
실패나 실수 없는 인간이 얼마나 자유롭고 얼마나 가뿐한 이 존재의 가벼움입니까? 실수나 실패한다는 것은 아직도 자기한테 미련이 있다는 뜻이거든요. 주님께서 우리 죄를 다 가져갔기에 예수님이 성공했으면 그 다음부터는 실수나 실패라는 그 개념자체가 우리한테는 적용이 안 됩니다. 날 때부터 빵점이고 날 때부터 죄인이기 때문에, 날 때부터 이단이기 때문에. 이단이기 때문에 나의 구원에는 조금도 나의 노력과 나의 의가 삽입될 수가 없습니다. 이게 바로 동행입니다. 노아요? 실수했어요? 아니에요. 그러한 역할이었습니다. 이미 구원받은 자, 동행했으면 에녹처럼 이미 산 사람이에요. 에녹은 그냥 별 볼일 없이 산채로 갔지만 노아는 살아 있지만 죽어야 되는 역할 속에서 인생 살면서 노아 속에서 장차 그리스도가 대신 죽어야 된다는 그 역할을 에녹보다 더 깊이 삽입을 시켜서 그 사명을 감당했기 때문에 산채로 그냥 죽어간 겁니다.
엘리야는 자기 역할 속에 불 수레를 타고 올라갔지만 그 엘리야보다 두 배, 곱빼기로 기적을 베푼 그 엘리사는 그냥 죽었어요. 그만큼 그리스도와 가깝다는 뜻이에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 그냥 올라갈 수도 있는데 “주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죽음을 몸소 체험한 거예요. 그게 아버지로부터 받은 역할입니다. 성도는 이미 사태를 파악해요. 이미 땅의 질이 본격화된 것을 압니다. 우리가 갈수 없는 땅이 천국인 것을 알아요. 그렇게 알게 된 것은 이미 내가 사는 땅이 저주받도록 작정된 땅임을 아는 겁니다.
그런데 주께서 우리를 죽이지 않고 아직까지 살려두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대한 증인 노릇하라는 거예요. 세상눈에 보이는 사람이 다 시신이다. 시신을 수습해라. 그들이 왜 죽었느냐? 그리고 성도는 이미 죽었다가 주님의 성령으로 살아났기 때문에 그들이 살아난 것은 그들의 착함도 선함도 아니고 노력도 아니라 성령께서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살아났다는 것, 그 십자가의 능력을 증거 하라. 이것이 성도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거룩한 땅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겁도 없이 어떤 땅인지도 모르고 덤벼들다가 전멸당한 그 곡의 백성들의 마지막을 보았습니다. 우리도 똑같은 사람인데 우리는 성령을 통해서 미리 알게 되었습니다. 죽어 마땅한 뼈에게 성령이 임하셔서 하나님의 군대가 되게 하셨사오니 허다한 증인노릇 하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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