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성탄예배(사9;6-7) 이근호 141224

아빠와 함께 2014. 12. 28. 10:35

성탄예배(이사야 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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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4-12-24 21:42 
2014년  성탄 수요예배  12월 24일  

                             한 아기

2014년 12월 24                           본문 말씀: 이사야 9:6-7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9:7)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것은 바로 '기묘자'입니다. 기묘하다는 말은 인간의 이해력으로는 포착되거나 파악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 이름이 있기 있지만 인간들의 입술로 백날 불러봐야 제대로 된 이름을 합당하게 부를 수가 없는 이름이라는 말입니다.

그만큼 인간들 세계에서 인간들 끼리 통용한 이름들 속에 감히 하나님의 이름도 하나의 이름으로 나란히 집어넣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이전에 이미 이스라엘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여호와'라고 불러대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름을 받으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도리어 그 이름을 부르는 집단이 멸망당하시는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바탕에, 인간들의 자신들의 자리를 인정하고 고수하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그 집단들이 결코 자기 긍정을 용납해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등장하는 시점은 하나님께서 '구원'이라는 취지를 본격적으로 가동하려는 시점에 같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인간은 그냥 에덴동산에 그냥 자기 나름대로 살면 됩니다. 구태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도 또한 그냥 하늘나라에서 천사와 더불어 같이 평안하게 안식 누리시면서 사시면 됩니다. 그런데 에덴동산에서 죄가 발생되고 죽음이 번지면서 하나님께서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라는 대립적인 두 노선을 가지고 본격적으로 '구원 프로젝트'를 실시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원래 창조하실 때의 목적은 '하나님의 이름'에 의해서 실행됩니다. 이렇게 되면 온 우주가 하나님께서 새로이 벌리시는 ' 구원 프로젝트'에 다 휘말려 들어가 있게 됩니다. 너, 나 할 것 없이, 악마나 천사나 할 것없이, 저주받아야 될 자나 이단이나 정통이나 구원될 자나 상관없이 모두 하나님의 중점 사업인 구원사업에 다 동원되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2:21의 말씀처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습니다." 즉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도 주의 이름을 모르면 구원되지 못하는 상황으로 세상은 진척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주의 이름 부르기'가 단순히 사람 명칭이나 호칭이나 외치는 것으로 성립되지 않는 이유는, 인간 나름대로 구축해놓은 자기 세계, 자기 역사에 같이 섞여 들어갈 인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이 기묘합니다. 모사입니다. 인간의 지략과 능력으로 포착 불가능합니다. 이는 하나님 이름을 제대로 부른다는 것은 인간이 그동안 구축해왔던 자신의 역사나 전통이나 자기 자리가 저주의 자리였음을 자인하는 현상이 동반해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9:23-26에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제자들이 듣고 몹시 놀라 이르되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부자청년은 나름대로 자기가 보기에 선한다고 자부할 만한 자기 역사, 자기 인생을 챙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유하다는 하늘의 축복이 자신의 가치를 선한 것으로 증명해준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버리라고 했을 때, 그는 영생을 포기하고 선하디 선한 자기 역사를 도로 챙기고 예수님 곁을 떠나게 됩니다.

그가 불렀던 '예수'라는 이름의 호칭은 결코 하나님께서 제시한 그 '하나님이 이름'도 아니요 기묘자도 아닌 것입니다. 이런 광경을 같이 봤던 제자들이 남의 일같이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따져들기 시작했습니다.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예수님의 평가를 듣고 더욱 안절부절합니다.

낙타가 아무리 억지로 바늘구멍으로 자신을 쑤셔 넣으려고해도 바늘구멍이 적극 저지합니다. 그런데 기이한 일은, 도저히 통과될 수 없는 그 상황에서 이미 통과된 자들이 생겨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두고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하시느니라"고 하십니다.

즉 하나님이 벌리시는 모든 일은 인간의 지략과 지혜를 차단하는 가운데 진행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야지만 인간의 한계가 천국의 구성로 영원히 살아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기묘함과 모사와 지혜는 사람의 몫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이름' 되시는 그분의 몫으로 지속시키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과연 이러한 납득될 수 없는 통과가 어떻게 이루어진 것입니까? 바로 이 기이한 통과로 관련된 분으로 하나님이 준비해두신 분이 '한 아기'입니다. 이 아기로 이런 구원업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출생이 남다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7:14에 보면, "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징조'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행하심의 증거물로서 등장된 사건이라는 말입니다. 그 사건은 바로 '처녀가 아기를 가짐'입니다. 원래 이 인간 세계의 모든 혈육은 남자와 여자의 동침으로 가능합니다. 그런데 이런 원칙은 하나님의 구원 작업이 개입으로 다른 방식이 따로 있음을 내치는 배경이 됩니다.

즉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삭은 혈육을 따로 태어난 자식이 아니라 '약속을 따라 난 자식'입니다. 이 말은 곧 '혈육이 아니고 약속 노선의 자식들'만이 영생의 나라로 구원된다는 뜻입니다. 즉 처녀 잉태가 단지 예수님에게만 일어날 일이 아니라 모든 영생 받을 자들도 이 방식으로 출생하는 것이 기본 모델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남녀가 동침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출산이 된다? 참으로 기묘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묘한 출생의 끝은 이 세상에서 결국은 사람들 손에 죽게 됩니다. 즉 근원적인 죄를 보여주는 '낯선 죽음'을 말하기 위한 출생이었다는 말입니다. 이 사실은 이 땅에 성도들의 새로운 출생방식으로 이어집니다.

즉 성도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다음과 같이 기이한 고백을 하게 됩니다. "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편 51:4-5)

지금 이 고백을 하는 이는 그 당시 이스라엘의 왕인 다윗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한 아기'가 앉을 자리가 결국 '다윗의 자리'라는 겁니다. 우리는 다윗과 다윗의 자리를 구분해야 합니다. 다윗의 자리는 다윗, 본인이 만든 본인의 역사가 아니라, 다윗을 그런 식으로 몰아세우신,  장차 다윗의 그 자리에 앉으실 '한 아기'의 자리입니다.

다윗은 밧세바와 간음하고 그의 남편인 우리아 장군을 비겁하게 죽이자만, 그런 식으로 자기 인생이 몰아세워져서 결국 자기 입으로 "나는 하나님에게만 범죄했다. 이렇게 된 것은 내가 범죄해서가 아니라 애초부터 죄인으로 태어나야 했던 그 결과들이다"' 참으로 기묘한 고백을 이끌어 내시기 위한 바로 하나님의 구원을 나타내는 자리입니다. 마치 이미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한 그 후에나 나올 고백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벌리시는 진찌 구원 사역 속에서는 인간은 그저 시체일 따름입니다. 그동안 인간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오해한 이유는, 어떻게 하든 자신을 살려내려고 하는 시도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6에 보면, "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시체에게는 예수님의 강림하실 때에 울려 퍼지는 천사들의 나팔소리가 약입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려면 우리는 자신이 시체인 것을 기정사실화해야 합니다. 시체에게는 나름대로 역사나 인생은 의미 없습니다. 자구책도 소용없습니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행동으로 인해 자기 인생에 유리하게 작용하는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합니다.

즉 그 어떤 경우라도 자기 인생을 부정하지 않으려합니다. 이런 인간들로 하여금 원래의 저주와 원래의 죽음의 자리에 돌아가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한 아기'를 주셔서, 일반인들과 달리 '낯선 죽음'을 실현시키시기 위해 태어나셔서 사신 분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이제 나만의 역사와 인생은 사라지고 오로지 예수님에 의한 역사와 인생만이 자기에게 작용함을 고백 드리게 됩니다. 이를 위해 성도에게만 성령이 찾아듭니다. 이는 곧 약속된 성령에 의해 출생된 ‘약속의 사람’이 갖는 기묘함입니다. 즉 성도는 매일같이 기묘함을 노출시키는 인생을 사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는 "앞으로 잘 하겠습니다."가 아니라 "그래서 처음부터 저는 죄인 맞군요"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매일같이 살아계신 주님에 의해서 살려지는 그런 살려주심을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근호 14-12-25 18:26 
이사야 9:6-7(성탄예배)141224-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이사야서 9장 6절에서 7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976페이지입니다.



이사야 9:6-7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사람들이 지상에서 각자 자기 일에 바쁘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하나님 나름대로 하늘나라에서 바빠요. 하나님이 그렇게 많은 일을 하시는데 그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핵심이 되는 것이 뭐냐 하면, 여기 좀 설명이 필요해요. 6절에 보면,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 이름은 기묘자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시고 인간은 하나님의 이름을 알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냥 인간은 이 지상에서 자기 나름대로 살고 하나님은 그냥 하늘나라에서 하나님 나름대로 일을 하시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름을 이야기한 그 시점은 어떤 시점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에 관한 일, 자기가 계획한 일을 벌이고자 하면서 드디어 하나님의 이름을 계시하게 되는 겁니다. 그 하나님의 이름이 계시되는 시점부터 뭐가 시작되느냐 하면, 구원이 시작돼요. 구원이 시작되려면 이름이 필요하다는 말이지요.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모르면 우리는 이 지상에 살다가 그냥 죽어요. 구원되지를 못합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하나님의 성령이 왔을 때 성령이 온 그 포인트가 뭐냐 하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 이름에 관한 문제입니다. 처음에 인간을 만들 때 그 이름을 알 필요가 없었어요. 인간은 그냥 에덴동산에 살면 되고 하나님은 하늘나라에서 천사와 더불어 살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의 이름을 알아야 될 시점은 어떤 시점이냐 하면, 인간 나름대로의 모든 세계는 죄로 인해서 다 깨져버리고 그 깨져있는 상황이 하나님이 벌이시는 구원 작업에 말려들어간 그 시점부터 주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주의 이름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이름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당하게 되어 있어요.



성령께서 우리에게 돈도 주시고, 부동산도 주시고, 행복도 주시고, 그러면 참 좋은데 유독 성령께서 주시는 것이 뭐냐 하면, 이런 것 저런 것 없다 할지라도 주의 이름, 하나님의 이름을 알게 하는 거예요. 그 이름을 알고 믿는 자는 영생을 얻고 구원을 얻는 그 작업이 우리의 아이디어가 아니고 인간이 범죄하고부터 줄기차게 내려오는 하나님의 숨겨진 자기 프로젝트인 겁니다. 그래서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은 범죄하고 난 뒤에 하나님이 벌이는 프로젝트에 말려들어갔습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둘로 나눠지면서 모든 사람들은 거기에 말려들어간 거예요.

한쪽은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눈치 챈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분류되는 겁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이 땅에서 살기 바쁜데 그 이름을 알아서 뭐할 겁니까? 전 사람 이름 잘 못 외우거든요. 정말 사람 이름 못 외웁니다. 그런데 사람 이름 몰라도 괜찮아요. 하지만 주의 이름 모르면 안 괜찮아요. 주의 이름 모르면 큰 일 나는 겁니다. 마태복음 1장에서 하나님께서 임마누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있다고 하면서 그냥 함께 있으면 되는데 그 함께 있다는 그것이 구원이 아니에요. 함께 있으면서 어떤 이름을 주는데 예수라는 이름을 줘요.



함께 있는 가운데서 예수 이름의 의미를 모르면, 예수 이름에 포함된 그 내용을 모르면 그 사람은 함께 있는 그 자체가 저주와 함께, 심판과 함께 있는 겁니다. 바쁘다고 해서 이 이야기를 우리가 모르고 넘어가서는 안 될 문제입니다. 이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그냥 말려들어간 거예요. 세상 모든 것이 주님의 구원에 말려들었고 구원되느냐 아니냐 하는 것은 그 이름을 아느냐 모르느냐로 결정된다는 그 작업에 모두가 말려들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그거야 쉽지요. 여호와잖아요.” 여호와라고 했으면 참 좋겠는데 여호와를 불렀던 그 이스라엘이 드디어 멸망되는 시점에 이르렀습니다. 그 말은 여호와가 이름을 부르는 그것은 제대로 된 구원에 합당한 이름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거지요. 그러면 여호와가 아니라면 이름은 뭡니까? 6절에 보니까 그 이름은 ‘기묘자’라고 되어 있어요. 기묘자. 제가 이런 이야기 하면 “참 쉽네. 기묘자라고 부르면 되겠네.”라고 하는데 기묘자자체가 이름이 아니고요 기묘자란 너희들이 이름을 모른다는 뜻이에요. 왜? 하나님께서 기묘하게 만들어놓았기에.



아무리 이름을 알고자 해도 너희들에 의해서 잡히지 않는, 너희들의 역량으로는 도저히 포착될 수 없는 참으로 기묘한 이름을 우리에게 주시는 겁니다. 그냥 문자로 ‘예수’라고 쓴다고 해서 그 예수가 이름이 아니에요. 고린도후서 11장에서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너희들이 다른 예수를 부른다고 했잖아요. 다른 예수. 예수라는 이름, 지저스, 어떻게 불러도 그 자체는 하나님의 이름에 해당되지 않는 겁니다. 왜 우리가 여호와, 예수, 이름을 불러도 구원이 안 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구원의 이름 뒤에는 하나님의 활동이 들어 있어요.



그 이름을 부르는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의 활동이 있어요. 우리가 평생토록 살아온 활동이 있다는 말이지요. 문제는 이 활동 가지고 저 이름이 갖고 있는 내용, 활동에 연결되거나 접속될 수가 없어요. 기묘자라 하는 것은 주의 이름을 부르려면 우리 이름이 깨져야 되는 겁니다. 우리 이름, 우리의 활동 자체를 부정해야 되고 부인해야 돼요. 우리는 뭐든지 괜찮은 이름을 다 끌어당겨요. 소피아로렌, 알랑들롱, 전지현, 우리가 아는 이름은 다 끌여 당겨요. 양준혁이 이런 거 있잖아요. 이승엽이. 박근혜. 그런 이름을 부르는 것은 내 인생이 안 다쳐요. 내 인생이 절대로 실패자가 아닌 겁니다.



우리는 많은 이름을 부르면서 이것을 바구니에 모아들임으로서 나를 더욱 굳히게 되고 나는 더욱 온전하게 되어버려요. 긁어모으는 거지요. 그렇게 되면 우리는 하나의 치장이 되고 포장이 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내치시는, 범죄 해서 내치시는 그 내치심의 내용이 우리 안에는 들어있지 않은 겁니다.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다시 하겠습니다. 다시 해도 좋아요. 하나님께서 자신의 구원하시는 작업을 벌이는 시점이 어느 시점이냐 하면, 인간이 범죄 한 그 이후의 시점입니다. 최초로 여호와 이름을 부르는 그것이 창세기 4장 뒷부분에 나옵니다. 가인과 아벨이 죽고 난 뒤에 “비로소 그들은 여호와 이름을 불렀더라.” 그렇게 되어 있거든요. 창세기 4장 26절에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 이름을 부른다는 말은 어떤 내용을 갖고 있느냐 하면, 인간은 땅에 살고 하나님은 하늘에 사는 그런 입장이 아니고 하늘과 땅이 지금 서로 뭉쳐졌다는 겁니다. 뭉쳐져서 하나의 프로젝트를 위해서 하늘과 땅이 같이 움직이는 시점에 돌입했다는 겁니다. 구원이 되려면 우리가 범죄 한 것이 뚜렷하게 등장해야 되고요, 범죄 한 것이 등장한다면 범죄 한 자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의하면 절대로 천국에 갈 수가 없습니다. 죄인은 천국 갈 수가 없어요. 죄를 의로 바꾸든지 해야 돼요. 이미 선악과 따먹고 난 후에는 천국에 못갑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는 것은 천국에서 쫓겨났다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쫓겨나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원래 인간을 만든 취지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새로운 일을 준비했는데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등장하면서 그 이름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망가져 있던 모든 창조 본래의 의미가 하나님의 이름에 의해서 다시 완성이 되는 프로젝트, 그런 계획에 돌입하게 된 거예요. 그래서 저는 이야기합니다. 그 하나님의 이름을 모르는 자는 구원될 수가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모르는 자는 구원될 수 없다는 말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구원된 사람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구원되었다는 것을 제대로 고백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나는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주의 이름 때문에 내가 여기 존재하게 되고 태어나게 되고 살게 되었다는 것을 제대로 고백하는 사람은 주의 이름이 우선이고 우리는 뒤에 소급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비로소 아는 사람이에요. 그렇게 돼 가는 겁니다. 그러면 내 이름은 부정이 되는 거지요. 만약에 내가 내 자신을 살리기 위해서 주의 이름을 부른다면 여호와, 예수, 성령, 이런 명칭만 부르면 된다고 생각해야 됩니다. 그러면 이사야 6장에 나오는 이 ‘기묘자’라는 이름은 생뚱맞은 거예요.



“이름이 뭡니까?” “안 가르쳐줘.” 이거거든요. 그게 사사기에 나오는데요. 사사기 13장 18절에, 마노아가정, 삼손 아버지가정에 천사가 내려왔습니다. “태어난 아이는 나실인, 하나님께 헌신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하니까 “누구십니까?” 내 이름을 묻지 말라고 합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를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니라.” 내 이름? 없는 것이 아니고 있는데 너희들의 역량, 너희들의 존재, 너희들의 입장에서는 내 이름은 파악될 수가 없다. 너희들이 이해하는 범위를 넘어선 이름이라는 말이지요. 너희들이 내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너희들 안에 그 이름의 힘이 들어올 자리가 없는 거예요. 나는 기묘자다. 분명히 있는데 기묘자다. 따라서 너희들의 힘으로서 그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힘은 너희에게는 없다는 겁니다.



기묘자라 하는 이것은 정말 어느 정도 기묘하냐 하면, 이사야 7장 14절에 보게 되면,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다. 얼마나 기묘합니까? 참, 일을 자연스럽게 해도 되는데 자연스럽게 해 버리면 우리들이 오해하기를 평소에 하던 그 일처럼 자연스러워버리면 우리는 마치 그 분이 누군지를 아는 것처럼 되어버려요. 이러면 기묘자가 아닙니다. 이러면 모사가 아니에요. 이것은 숨겨진 비밀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주의에 포착이 되어버리면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아닙니다. 적어도 어느 정도 돼야 되느냐 하면, 마태복음 19장에 나오는 정도가 돼야 되거든요. 마태복음 19장에서 부자청년이 영생 얻겠다고 예수님한테 왔다가 모든 것을 팔고 나를 따르라고 하니까 부자청년이 근심해서 돌아갔습니다.



그 뒤에 제자들이 걱정이 되어서 하는 말이 “그러면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라고 했어요. 제자들의 질문은 잘못된 질문이었지요. “누가 천국에 들어갑니까?”라고 제자들이 질문한 것은 “들어가기는 하는데 어떻게 들어갑니까?”라는 질문이에요. 그런데 그들의 질문이 왜 잘못되었느냐 하면, 너희들이 과연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있다, 없다, 하는 것을 본인이 먼저 점검을 해야 될 텐데 그들은 점검을 안 하고 ‘나는 들어가기는 하는데 어떻게 들어가지요?’라고 자기는 자동적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자동적으로 생각한 그것이 잘못된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어렵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낙타가 천국 간다면 바늘구멍이 나와서 막는다는 그 말이거든요. 낙타가 왼쪽으로 간다면 바늘구멍이 왼쪽을 막아버리고 낙타가 오늘 쪽으로 간다면 오른쪽으로 막아버리고, 세상에 이렇게 잘하는 수비는 없어요. 바늘구멍을 가지고 “바늘구멍 통과하면 넣어줄게.” 이거거든요. 이게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천국에 어떻게 들어갑니까? 왼쪽으로 갈까요?” 바늘구멍. “오른쪽으로 갈까요?” 바늘구멍. “정면으로?” 바늘구멍. “어딜 들어가!” 이런 뜻이거든요. 정말 기묘해요. 하나님의 나타남이 천국 넣어주기 위한 나타남이 아니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너희들은 천국 갈 자격이 안 되기 때문에. 천국 갈 입장도 못되고. 하나님이 알려주는 것은 너희들이 천국 간다는 것이 아니라 천국을 이야기해요. “너희들 천국에 넣어줄게.”가 아니라 천국은 이런 곳이다. 어떤 곳인가? 어떤 인간도 천국 오는 것을 막는 그것을 위하여 너희들은 존재한다는 겁니다. 내가 천국 가는 것을 막으시는 하나님이 만든 그곳이 바로 천국이라는 거예요.



우리가 깨달아서, 우리가 기묘를 극복해서, 우리가 기묘를 피해서 우리가 아는 식으로 간다? 그것을 다 막아버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걱정이 되어서 “그러면 누가 갈 수 있습니까?”라고 했어요. 예수님 말씀이 “사람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했습니다. 자, 잘 한번 보세요.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것이 아니에요. 낙타가 여기 있습니다. 바늘구멍으로 막습니다. 자,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느냐 하면, 분명히 바늘구멍 통과 못합니다. 그런데 바늘구멍으로 막고 난 뒤에 그 반대편 통과한 쪽에 낙타가 놓여 있어요. 이걸 하나님이 해내시는 거예요.



지금 교회 몇 십 년 다녔습니까? 이거 몰랐지요? 기도로, 헌금으로, 십일조로, 예배참석해서, 이걸로 뚫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다 실패한 거예요. 그것은 다 인간들이 하는 겁니다. 그거 다 지옥 가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는 다 지옥갈 수밖에 없어요. 그냥 머리로 들이밀면 천국 가는 것이 아니에요. 머리로 들이민다는 것은 낙타로 바늘구멍을 계속 미는 것이 되니까 천 미터를 밀어도 바늘구멍은 여전히 막고 있고 낙타는 바늘구멍 이쪽 편에 있습니다. 완전히 청도 소싸움이라. 계속 밀어붙이고 계속 막고 있는 거예요. 사람은 할 수 없습니다. 성령 안 받으면 이 말 안 나와요. 성령 안 받으면 이 말 못합니다. “너 어떻게 구원 받았어?” “난 한 게 없어요.” 이 말 나와야 돼요. 이 말이 나와야 성령 받은 겁니다. 정말 기묘해요. 하나님은 정말 기묘합니다. 뭔가 아기가 오셔서 뭔가 일을 했어. 우리가 못하는 것을 아기가 했어요. 그 아기라는 분이 하셨어요.



낙타가 밀어붙이는데도 바늘구멍이 막고 있어서 안 되는데 낙타가 이미 통과해서 건너편에 있습니다. 낙타한테 물어봅시다. “너는 어떻게 통과했는데?” “나도 몰라. 주께서 하셨어.” 그 다음 문제에요. “주께서 어떻게 하셨는데?” “한 아기를 주셨어.” 그 한 아기를 주셨다는 그 아기와 낙타가 그냥 이유도 모른 채 통과했다는 그것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1센티만 낮았어도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라는 말을 파스칼이라는 사람이 했어요. <팡세>를 쓴 중세 때의 유명한 사람인데.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1센티만 낮았어도 BC 38년경에 시이저와 연애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그 다음 안토니우스라는 장군과 연애하지 않았어요. 왜? 코가 낮다는 것은 못생겼다는 말이고 못생겼다는 말은 연애할 대상이 안 된다는 뜻이거든요. 그래서 파스칼이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어도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제가 클레오파트라 이야기를 갑자기 왜 하느냐 하면, 인간은 나름대로의 자기 고유의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그게 낙타에요. 자기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나는 교회 몇 년도에 나왔으며 그 뒤로 이렇게 신앙생활을 했으며……, 그게 자기역사를 이루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자기 역사에 맞추어서 집어넣으니까 그 이름은 전혀 실효성이 없는 이름인 거예요. 사람들이 자기 역사를 고집하는 이유가 있어요. 나의 역량으로, 나의 영향력으로 내 역사가 뭔가 변하기를 원하고 있어요. 자기가 일종의 신이지요.



내기 기도하기만 하면 내 소원대로 뭔가 세상이 달라지고 주변 상황이 달라지기를 바라요. 내 경건과 열심의 어떤 영향력이 나한테 유리하도록 조장하고 싶고 그렇게 작용하도록 하고픈 간절함이 있어서 교회 나오는 겁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절대로 자기 자신의 역사를 포기를 못하겠다는 이야기에요. 이것은 낙타입니다. 부자청년이 왔을 때 그 부자청년보고 “네 모든 것을 버리라.”고 한 것은 네 역사를 버리라는 뜻이에요. ‘내가 어릴 때부터 착한 일을 많이 해서 복을 받아서 이렇게 부자 되었다.’라고 생각했는데 그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나를 따르라? 이것은 자기 역사를 버리는 것이거든요.



우리가 아는 것은요? 처녀는 잉태하지 못한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반드시 여자가 잉태할 때는 남자하고 동침을 해야 되지 그렇지 않고서는 절대로 아기가 생기지 않는 법이거든요.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아기를 생산하기 위해서 여자를 데려오는 것이거든요. 19세기인가, 18세기 때 영국의 여자들은 남성의 소유가 되어 있습니다. 결혼해서 여자가 있는 사람은 나라에게 세금을 매깁니다. 왜 세금을 매기는가? 소유물이기 때문에. 형편상 남자가 그 여자와 살기 싫다고 한다면 남자가 여자를 팔아먹었습니다. 물건 내놓듯이. 인터넷 쇼핑몰에다 “우리 집에 괜찮은 물건이 있습니다. 나이는 38세. 체중 48킬로그램. 살림 잘함. 탕수육 잘하고 특히 떡국을 잘 끓임.” 이런 식으로 경매시장에 내놓는 거예요.



참 그 당시 남성들이 못됐다는 생각이 들지요. 놀라운 반전이 있어요. 뭐냐 하면, 그렇게 아내를 상품으로 팔 때 아내들이 한결같이 웃고 있어요. 나는 그걸 보고 놀랐어요. 여성들에게 가정이라는 딜레마가 얼마나 심한지 알았어요. 자식이 있기 위해서 여자가 있다는 것은 모든 인류역사에 다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옛날에 자식 없는 여성은 구박받게 되어 있고 정 자식이 없으면 씨받이를 통해서 자식을 낳고 항상 자식이 없으면 남자를 검사할 생각은 안하고 여자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더 놀라운 사실은 성경도 그렇게 되어 있어요.



아브라함을 해코지 하면 그 집안이 전부 임신을 못해요. 자식을 낳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복을 준다는 증거물로 생각했던 시대가 있었어요. 그런데 처녀가 아기를 낳았다?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들으니 어떤 생각이 듭니까? “처녀가 아기를 낳았구나. 참 기묘하네.” 그것은 “거 참 모사네.” 이런 뜻이지요. 그런 뜻이 아니고 처녀가 아기를 낳았다는 것은 누구든지 처녀처럼 아기를 낳지 아니하면 모든 사람은 시체다, 죽은 자라는 그 말입니다. 그 이유가 오늘 본문 이사야 9장 7절에 나옵니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여기 “다윗의 위에 앉아서”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다윗의 자리는 구원의 자리거든요. 영생 얻는 자리입니다. 혈육으로 아빠 엄마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영생의 자리, 이 다윗의 자리, 이 노선에 가입될 수가 없습니다.



처음에 제가 낙타는 바늘구멍으로 못 들어간다고 이야기했지요? 부자는 천국 못가는 겁니다. 그것도 정말 우리로서는 난감한 일인데 더 난감한 것은 다윗처럼 되지 아니하면, 다윗처럼 이렇게 출생하지 아니하면 아무도 천국에 못갑니다. 그것이 다윗의 자리에요. 다윗의 자리는 그 원형, 모델이 뭐냐? 처녀로부터 태어난 자식이어야 하는 겁니다. 지금 이 시간에 대구 동성로나 서울의 명동 보세요. 수많은 인파들이 왜 거리에 나섰지요? 뭐하려고 나왔지요? 그 많은 인파 중에 아빠 없이 처녀로 태어난 자식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요. 그러면 그 사람은 영생과 관계없는 사람이에요. 크리스마스와도 관계가 없는 것이고.



다윗의 자리가 만만한 자리가 아니고 왜 아무나 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냐 하면, 아브라함의 아들이삭이 어떻게 해서 태어났느냐 하면, 아빠 엄마에게서 태어난 것이 아니고 천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태어난 자식이 이삭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4장에 보면 언약에 두 가지 언약이 있는데 하나는 그냥 혈통으로 난 자식이 있고 또 하나의 혈통은 약속을 따라난 자식이 있는데 약속을 따라난 자식만이 “그들의 어머니는 하늘에 있는지라.” 바로 영생을 얻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서 “목사님, 우리가 뭘 행하면 복 받습니까?” 이런 식으로 묻는다는 자체가 클레오파트라의 코처럼 또 자기 역사를 다듬고 그걸 꾸미고 자기 역사를 포기 못하는 심보에서 나온 질문이고 성경 보면서 그걸 뽑아내는 거예요. 크리스마스 때 기타치고 노는 사람들하고 똑같은 거예요. 말을 저도 이렇게 하지만 대학 때 교회 안다녔기 때문에 크리스마스가 되면 친구 자취방에 가서 밤새도록 민화투 치면서 음악 틀어놓고 놀았는데 뷰티플선데이를 50번 들었어요. 1972년도에요. 다니엘 분이 불렀던. 새벽되면 라면 끓여달라고 해서 먹고. 먹고 나서는 또 기타치고 놀고. 용기 있는 친구는 술 먹고. 담배는 안 피웠습니다만.



그게 다윗의 자리입니까? 그 술자리가 다윗의 자리에요? 그게 하나님의 약속된 자리입니까? 처녀에서 아기를 낳는 그 원형이 오늘 본문 이사야 9장에 나옵니다. 6절에,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 그 권력이 뭐냐 하면, 심판하는 거예요. “너는 아니야. 너는 낙타야. 너는 안 돼. 너는 천국 못가.” 이렇게 분류하는 기준으로 오는 거예요.



하나님의 이름은 그 아기에게 담겨 있는데 그 아기 이름은 기묘자라. 기묘자라는 말은 우리가 다른 친구들 이름 부르듯이, 우리가 동료의 이름을 부르듯이 하는 거기에 해당되는 이름은 아닌 거예요. 우리가 감당할 수 있고 우리 안에 섞일 수 있는 이름은 아니에요. 그것은 기묘자가 아니니까. 기묘자라 하는 것은 우리끼리 아는 그런 이름 말고 다른 이름이에요. 우리가 아는 사람들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고 납득이 안 되는 정말 색다른 아기의 활동입니다. 그 활동의 진수, 그 본질은 어디 있느냐? 그 분은 이 땅에 와서 죽는다는 그 죽음이었습니다.



클레오파트라의 역사는 누구와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그런데 그 밑바닥은 뭐냐? 이렇게 해서라도 기어이 살아야 되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기묘자로 온 아기는 기어이 죽어야 되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죽음이 우리가 아는, 기묘자 아닌 일반사람들이 아는 그 죽음은 아니에요. 그런 죽음속의 하나가 아니고 도리어 소위 살았다는 자를 죽여 버리는 기묘한 죽음으로서 우리의 죽음을 지워버리는 죽음을 이 땅에 심어놓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분이에요. 처녀로 아기를 낳았는데 희한하게 그분은 이 땅에서 죽습니다.



죽으면서 홀로 그냥 죽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살았다는 이름은 있으나 실은 죽은 자라는 것을 폭로시키면서 죽는 죽음입니다. 정말 기묘합니다. 그러니까 애초부터 우리가 살고자해서 “어떻게 하면 천국 갑니까? 누굴 믿으면 우리가 구원받습니까?”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자격은 애초부터 죽은 자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질문이었어요. 해서는 안 될 질문을 하고 있는 거예요. 데살로니가 4장 16절에 보면,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이게 뭐냐 하면, 하늘에서 하나님이 강림하시고 나팔소리가 울리면 시체가 일어나는 거예요, 시체가. 여러분, 이 대목 아시지요? 하나님과 우리의 만남은 나팔로 이어지고 나팔소리를 들으면 시체가 일어납니다. 여러분이 현대묘역에 가서 나팔 한 번 불어보렵니까? 시체가 일어나는지? 천사들이 부는 그 나팔소리에 시체가 일어난다는 그 말은 뭐냐? 우리가 시체가 되어야 된다는 말이에요. 우리가 시체가 돼야 돼요. 그래야 주의 재림과 강림과 나팔소리가 다 우리한테는 의미가 있는 거예요. 시체가 자기가 알아서 털고 일어나면 안돼요. 주님의 나팔소리가 들릴 때 일어나 줘야 돼요. 그래야 하나님의 자존심이 살아요. 아들의 명예, 하나님의 모든 프로젝트의 명예와 가치가 이 시체와 더불어서 표출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철저하게 주님의 명예와 자존심을 위해서만 존재하거든요. 우리가 그동안 예수를 아무리 불러도 그게 의미 없었던 이유는 우리가 시체라는 사실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살아볼까, 하면서 불렀던 예수기 때문에 그 예수는 우리 역사에 들어올 수 있는, 우리 역사와 합류가 되어서 섞이는 가짜 예수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그 다윗의 자리는 우리한테는 없는 거예요. 다윗의 자리라는 것은 다윗의 자리를 두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어느 식당에 가서 방석을 깔고 앉았다 칩시다. 남들 보기에 방석 깔고 앉은 다윗이 식사를 하는 것으로 보이겠지요. 그 다윗이 식사를 마치고 갔다면 남는 것이 있어요. 다윗의 엉덩이 온기가 남아 있는 방석이지요. 그게 다윗의 자리에요.



다윗은 밧세바와 간통했고 다윗은 밧세바 남편을 비겁한 방법으로, 남자답지 못하고 아주 졸렬한 방식으로, 마치 “나 아무것도 안했거든.” 이런 식으로 밧세바 남편을 미필적 고의로 죽여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그 자리는 어떤 자리냐 하면, 다윗이 죄를 지었던 자리지요. 그 자리가 바로 다윗의 자리에요. 다윗을 잡아다가 사형시키면 다윗의 자리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다윗 이리와! 너 왜 밧세바 남편 죽였어? 너도 같이 죽어봐.” 이렇게 죽여 버리면 그 다윗의 죽음이나 일반 사람들의 죽음이나 동일한 죽음이 돼버려요. 이것은 기묘한 죽음이 아니고 같은 죽음이 돼버려요.



따라서 죽을 다윗을 죽이지 아니하고 살려줍니다. 살려주기 때문에 오히려 다윗의 자리는 죽었다가 살아나는 귀한 자리가 되지요. 아주 기묘한 자리가 되는 거예요. 물론 다윗 대신에 누가 죽어요?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그 아들이 죽습니다. 죽고 난 뒤에 다윗은 금식하지 않고 말끔하게 하고서 “이제야 주의 뜻을 알았구나.” 주의 뜻은 우리보고 착하게 살라고 닦달 내는 것이 아닙니다. “너 그렇게 나쁜 짓 하면 죽어.” 그걸 의미하는 것이 아니에요. 주의 뜻은 뭐냐 하면, 네가 하는 모든 행동을 잘못하면 죽는다는 뜻이 아니고 처음부터 너는 시체였다는 것을 알려주는 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일을 몰아세운 겁니다.



내가 잘못해서 죽어버리면 내 죄 값으로 죽는 거거든요. 그런데 내가 깔고 앉은 방석, 내가 나쁜 짓을 하기 이전부터 내가 죽었다는 말은 그 죽음은 나한테 속한 죽음이 아니고 장차오실 한 기묘한 아기의 죽음과 관련된 죽음이 되는 겁니다. 우리는 죽어도 살아요. 우리는 죽어도 산다고요. 다만 우리가 어디에 호출당하면? 우리가 다윗의 자리에, 그 방석에 같이 앉아 있으면. 그 방석은 죄 지어서 앉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죄짓는 가운데 처음부터 죄짓게 되어 있음을 고백하는 자리만 거기에 합류하는 방석이 되는 겁니다. 참 마음 같아서는 그 방석 하나씩 다 놔주고 싶어요, 정말! 그 전기방석을 다 나눠주고 싶어.



나쁜 짓을 하지 말라는데 나쁜 짓을 안 할 수가 없어요. 나쁜 짓을 안 할 수가 없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가 지어낸 나쁜 짓은 그건 나쁜 짓 아니에요. 그것은 반성할 여지가 있기 때문에 제대로 된 나쁜 짓이 아닙니다. 우리의 나쁜 짓은 반성할 여지가 없는 죄인 나쁜 짓이에요. 반성할 여지가 없는 죄. 어떤 것? 살아야 되겠다는 것. “주여, 저 낙타인데 어떻게 하면 천국 갑니까?” 이런 식으로 낙타가 되어서 계속 바늘구멍인 천국에 머리를 들이미는 이것이 바로 죄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기묘한 아기라는 이것은 우리의 출생 자체를 바꿔버립니다. 출생 자체가 바뀌어 버리면 우리가 어떻게 되느냐 하면, 내가 설칠 필요 없이 주께서 설치게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임마누엘, 처녀가 낳은 아이와 같은 노선으로 들어가게 돼요. 그러면 우리가 뭐가 되느냐? 우리가 주님과 동기생이 되어버립니다. 어떤 동기생? 아주 기묘한 동기생이 돼 버려요. 그러면 우리는 뭘 하면 되느냐? 우리는 날마다 기묘한 것만 바깥으로 끄집어내면 돼요. 어떻게? ‘나 같은 인간이 어떻게 구원받았지? 나 같은 인간이 어떻게 바늘구멍을 통과했지? 이 덩치 큰 내가 어떻게 바늘구멍을 통과했지? 갑자기 바늘구멍이 늘어났다가 다시 줄어들었나? 어떻게 내가 구원받았지?’



우리가 깔고 앉은 방석에서는 우리의 자랑거리나 우리의 의가 나오는 방석이 아니고 주님의 나팔소리, 그리고 주께서 해주신, 아기예수께서 해주신, 우리의 의논 없이 일방적으로 다 해주신 그 은총과 용서와 사랑인 아기 예수의 효과가 계속 나오는 겁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방금 이야기한 것 다 잊었다고 합시다. 안 그래도 다 잊어버리지만 다 잊었다 치고 우리의 역사를 주장하는 이유는 내가 어떤 행동을 하게 되면 바깥의 모든 것이 나에게 유리하도록 작용하기를 은근히 우리는 노리고 있습니다.



내가 교회 나오면 내 자식은 하는 일이 뭐든지 만사형통할 것이라는 거예요. 그 정도로 나의 역사는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다고 보는 겁니다. 어떤 기대나 희망이 없으면 우리는 교회 안 나옵니다. 기도할 필요도 없어요. 뭔가 내가 움직이고 풀썩거리면 움직일 때마다 거기에 대한 효과와 혜택, 불교에서 말한 어떤 업보라고나 할까요, 덕이 되어서 우리 가정의 앞일을 트이게 하는 그 행동의 중심에 내가 있다고 보는 겁니다. 내가 미국 가서 지적했던 중보기도라는 그것도 그 중의 하나지요.



그런데 그랬던 이 낙타덩어리가 이제는 바뀌었어요. 주님 하신 혜택을 우리가 입고 있는 거예요. 이게 기묘해요. “내가 이렇게 열심히 안했는데, 나는 이렇게 착하지도 않았는데, 나는 어릴 때부터 바르게 살지도 않았는데 나는 왜 이렇게 예뻐? 너무 예뻐서 미치겠어. 내가 봐도 눈부셔. 도대체 내가 이런 혜택을 입을 자격이 못되는데 왜 이런 혜택을 입지? 이거 참 기묘한 일이네. 아, 주의 이름으로 그렇게, 주의 이름을 증거 하라고 나보고 이런 상황을 만들어주셨구나.” 내 이름이 아니고, 내 역사가 아니고, 내 클레오파트라가 아니고, ‘내 코가 낮고’ 그게 아니고, 주님이 이 땅에 오시지 않았으면 이 세상 역사가 바뀌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죽지 않았으면 세상 역사는 바뀌었을 거예요.



이미 주께서 십자가 지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세계 모든 역사는 그걸로 고정되었습니다. 이제는 사적인 개인적 이름의 역사라는 것은 이제는 전부다 마귀가 만든 장난처럼 환상에 불과한 거짓이에요. 거짓! 이사야 9장은 말합니다.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7절 마지막에 보면,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이웃집 여인과 간음했고 자기의 죄가 들통 날까 싶어 자기가 계략을 꾸며서 밧세바의 남편을 죽였던 그 다윗, 그 다윗이 저와 여러분 당사자라고 보시기 바랍니다. 만약에 거기서 “주여, 내가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않겠습니다. 다시는 간음하지 않겠습니다. 다시는 살인하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나온다면 그 사람은 천국에서 땡, 탈락입니다. “주여, 제가 모친의 죄 중에서 만들어졌군요. 주께서 그렇게 하셨군요. 주께서 그렇게 등짝이 예쁜 여인을 보게 하셨군요. 그리고 나에게 그런 분노를 겪게 했군요. 주여, 제 안에 혼돈이 있습니다. 제 안에 분노가 있고 제 안에 울분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창조되기 이전에 갖고 있던 혼돈이었습니다. 이 혼돈을 끄집어내 주셔서 이 혼돈을 질서, 아기중심, 예수님 중심의 질서로 바꾸어주신 분은 오직 하나님의 열심입니다.”라는 아주 기묘한 고백이 저와 여러분의 입에서 나오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이 보는 것처럼 보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께서 아기로 태어나셔서 세상을 보던 안목이 저희에게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