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혼란의 중심(겔38;18-23) 이근호 141203

아빠와 함께 2014. 12. 17. 08:47
2014-12-03 20:36:50조회 : 151
혼란의 중심 1412103 이름 : 이근호

혼란의 중심(에스겔 38: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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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란의 중심

2014년 12월 3 일 본문 말씀: 에스겔 38:18-23

(38:18)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곡이 이스라엘 땅을 치러 오면 내 노가 내 얼굴에 나타나리라

(38:19) 내가 투기와 맹렬한 노로 말하였거니와 그 날에 큰 지진이 이스라엘 땅에 일어나서

(38:20) 바다의 고기들과 공중의 새들과 들의 짐승들과 땅에 기는 모든 벌레와 지면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내 앞에서 떨 것이며 모든 산이 무너지며 절벽이 떨어지며 모든 성벽이 땅에 무너지리라

(38:21)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내 모든 산 중에서 그를 칠 칼을 부르리니 각 사람의 칼이 그 형제를 칠 것이며

(38:22) 내가 또 온역과 피로 그를 국문하며 쏟아지는 폭우와 큰 우박덩이와 불과 유황으로 그와 그 모든 떼와 그 함께한 많은 백성에게 비를 내리듯 하리라

(38:23) 이와 같이 내가 여러 나라의 눈에 내 존대함과 내 거룩함을 나타내어 나를 알게 하리니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자연세계의 체계는 자연물 자체적으로 원인과 결과로 연결된다는 것이 현대인에게는 상식입니다. 물리적인 운동의 법칙이 그러하고, 열이나 에너지에 관한 이론들도 그러합니다. 여기에 하등의 인격이 개입할 여지가 없습니다. 심지어 인간의 몸을 해부한다든지 병을 치료하는데 있어 인체는 그저 물컹한 사물덩어리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대자연에 대해서 달리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물에서 ‘곡’이라는 왕이 이스라엘을 침범하게 되니 하나님이 분노하시면서 대자연에 큰 변동이 일어납니다. 지면의 벌레부터 시작해서 절벽이 무너지고 폭우와 우방과 불과 유황이 하늘에서 떨어집니다. 그러니 대자연이 어떤 인격자의 얼굴처럼 작용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감정을 드러내기 위해 대자연이 움직인다는 겁니다. 바로 이 점을 왜 인간들은 끄집어낼 수가 없을까요? 그것은 인간들이 알고 있는 자연은 진실된 자연이 아니라 인간들의 주관에 의해서 재구성된 제2의 자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들은 자연의 변화를 가지고 법칙을 만들고, 그 만든 법칙을 가지고 자연을 자기 생존에 편리하도록 이용할 뿐입니다.

즉 달은 따로 거기 있고, 해도 따로 거기 있고 별도 따로 거기 있듯이 인간도 따로 존재한다는 논리를 인간은 근원적으로 갖고 있습니다. 자연은 자연이고 나는 나다는 겁니다. 자연과 인간과 각각 따로 있다는 말은 곧 대자연에 둘러싸인 채 인간은 신으로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요, 인간은 인간이라는 겁니다. 즉 대자연 안에 인간처럼 화내고 사랑하고 일하시는 그런 인격적인 존재가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신은 따로 있고 자연은 따로 있고 인간은 따로 독립적으로 있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대로라면 인간들은 큰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 됩니다.

자연은 결코 인간들이 보는 것처럼 그렇게 독립적으로 스스로 있는게 아니었던 것입니다. 얼굴 안면 근육이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듯이 대자연은 하나님의 심성을 나타내면서 움직입니다. 대자연 속에 누군가가 계십니다. 이 누군가를 나타내기 위해 특별한 특정 민족을 하나님께서는 만드셨습니다. 그 민족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면서 그들은 ‘어린양’을 잡아 피를 담았고 그 피를 가지고 문지방과 문설주에 발랐더니 어느날 밤에 모든 애굽의 장자들이 죽었으니 오직 그 어린양의 피를 발라놓은 그 집안만큼은 장자가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이 말은 곧 대자연 안에는 대자연을 특정 목적대로 움직이는 분이 계시다는 말입니다.

그 분을 드러내기 위해 희생된 양은 인간들 제 2의 자연관에 의할 것같으면 전혀 특별한 것이 없는 보통 양이며, 그 양이라는 가축도 다른 여타의 가축 중의 한 종류일 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 어린양의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그저 자신의 생존을 위해 하나님께서 자신을 살려두셨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습니다. 시내산 앞에서 비로소 그들은 대자연 안에 들어있는 그 분을 보여주기 위한 사명차원에서 매일같이 어린양으로 제사드려야하는 업무가 주어졌음을 알게 됩니다. 즉 대자연의 중심이 인간이 아니었던 겁니다. 인간말고 다른 분이 계신데 그 분은 제사를 드리는 분이십니다.

히브리서 10:3에 보면, “그러나 이 제사들에는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라고 했습니다. 즉 제사를 반복적으로 드리는 이유는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곧 이 대자연 속에 죄를 유발시키고 그 죄가 어떤 식으로 해결이 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하나님께서 어린양을 희생시켜 낯선 나라인 이스라엘을 만드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자연 속에 물체들 외에는 어떤 분도 없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대자연의 움직여, 그 속에 어떤 분의 계심을 나타내는 식으로 활동하십니다. 곧 대자연은 마냥 아름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대자연 속에는 ‘그분의 죽음’이 들어있습니다. 대자연의 찬란하고 아름다운 관이요 그 관에 죽음을 안고 누워계신 분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께서 3일 만에 도로 살아나심으로 인해 대자연은 썩어짐을 덮는 거죽으로서의 역할을 끝이나 버렸습니다. 인간들의 안복으로서 대자연이 그렇게 아름답고, 젊은이들의 청춘이 아름답지만 몇 센티 피부만 파고들어가기만 해도 거기에 썩어짐이 쉬지않고 작렬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8:21에,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모든 인간도 썩고 메시야마저 이 대자연 안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처음부터 대자연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위하여 예비되고 창조된 피조물입니다.

창세 전에 하나님 아버지와 아드님은 의논하기를,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만 예수님이 주님이 되시는 원리를 완성하시기로 약속해 놓으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나 선지자의 모든 예언에는 대자연의 변화를 특정 인물들의 행위와 결부시켜 놓았습니다. 마태복음 21장에 나오는 무화과 나무 저주사건은, 아직 열매 맺을 계절이 되지도 않는 나무에 대한 것으로서 인간들의 일반적 상식을 엎어버립니다.

즉 무화과나무나 인간이나 홀로 있는 입장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싱싱한 무화과 나무는 그저 썩어짐을 잠시 감추기 위한 거죽에 불과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하는 제자들은 참으로 두려운 마음을 품고 의아해했습니다. 행여 자신의 운명이 저 무화과 같지 않기를 바랬을 것입니다.

스가랴 14:4에 보면, 메시야께서 감람산에 서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감람산에 눈이 오는 것을 인간들이 보는 것처럼 메시야께서 감람산에 오는 것을 간파할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왜냐하면 메시야의 강림은 모든 지구 사람들이 다같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들의 과학적 안목에 입각한 자연관을 통해서 대자연 속에서 일하신 메시야의 희생을 눈치 챌 수가 없습니다.

이미 메시야께서는 인간들의 눈에 띄지 않는 방식으로 다녀갔습니다. 자신 속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담겨있는 자만이 지금 그리스도 안에 함께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썩어짐을 기정사실화 하게 하옵소서. 하늘의 형상만을 고대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16강-에스겔 38장 18절-23절(혼란의 중심)141203-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38장 18절-23절입니다. 구약성경 1212페이지입니다.



에스겔 38:18-23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곡이 이스라엘 땅을 치러 오면 내 노가 내 얼굴에 나타나리라 내가 투기와 맹렬한 노로 말하였거니와 그 날에 큰 지진이 이스라엘 땅에 일어나서 바다의 고기들과 공중의 새들과 들의 짐승들과 땅에 기는 모든 벌레와 지면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내 앞에서 떨 것이며 모든 산이 무너지며 절벽이 떨어지며 모든 성벽이 땅에 무너지리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내 모든 산 중에서 그를 칠 칼을 부르리니 각 사람의 칼이 그 형제를 칠 것이며 내가 또 온역과 피로 그를 국문하며 쏟아지는 폭우와 큰 우박덩이와 불과 유황으로 그와 그 모든 떼와 그 함께한 많은 백성에게 비를 내리듯하리라 이와 같이 내가 여러 나라의 눈에 내 존대함과 내 거룩함을 나타내어 나를 알게 하리니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오늘 본문에서 곡이라는 것은 마곡지역의 왕을 말합니다. 곡이라는 왕이 등장하고 그 곡이 이스라엘 땅을 치게 되는데 곡이라는 왕이 눈에 보이지요? 다른 민족이니까. 눈에 보이는 다른 민족의 왕이 이스라엘 땅을 치는데 그 이스라엘도 눈에 보입니다.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 땅을 치러 오게 되는데 그 다음에 본문에 ‘내 얼굴’이라고 되어있는데 여기서 ‘내’라는 것은 하나님이거든요, 하나님은 보이지를 않습니다. 보이는 어떤 민족이 보이는 이스라엘을 치는데 정작 하나님의 얼굴은 보이지를 않아요.



하나님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데 본문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분노를 드러내겠다고 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분이 분노를 드러낼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20절부터 23절까지 보면 곡이 “바다의 고기들과 공중의 새들과 들의 짐승들과 땅에 기는 모든 벌레와 지면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내 앞에서 떨 것이며.” 그 다음에 “바다의 고기들과 공중의 새들과 들의 짐승들과 땅에 기는 모든 벌레와 지면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내 앞에서 떨 것이며.” 그 다음에 22절에 보면, “온역과 피로 그를 국문하며 쏟아지는 폭우와 큰 우박덩이와 불과 유황” 이 모든 것들은 역시 눈에 보이는 겁니다.



이것들은 눈에 보이는데 정작 화를 내시는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를 않아요. 그래서 이 본문을 해석하려면 우리가 생각하는 자연과학적인 세계관이 수정돼야 되는 겁니다. 어떻게 수정돼야 하냐면, 인간이 자연을 바라볼 때 인간은 자연 그대로를 바라본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고 자연에서 나오는 감각 가지고 다시 한 번 자기주관으로 재구성을 한 것이 자연세계에요. 예를 들면 인디언의 경우에 곰이나 벌레도 못 죽여요. 거기에 자기조상이 있기 때문에. 독수리도 못 죽입니다. 자기 5대조 할아버지가 독수리로 변했기 때문에.



똑같은 독수리를 보면서도 그 사람들은 독수리를 5대조 할아버지로 보고 현대과학교육을 받은 사람 보기에는 독수리는 동물세포로 되어 있거든요. 동물세포. 5대조 할아버지는 거기에 계시지를 않아요. 독수리는 동물세포로 되어 있고 독수리에는 5대조 할아버지가 없다는 말이 맞느냐? 아니면 독수리는 5대조 할아버지고 노루나 사슴이 7대조 할아버지라고 하는 것이 맞느냐? 그럴 때는 어느 것이 맞다고 하지 말고 우리가 갖고 있는 우리의 과학적 주관에 의해서 조립하게 되면 그것은 동물세포로 보이고 과학적 인식이 아니고 영이나 기(氣)로서 통합해서 보는 사유체제에서는 죽은 조상이 거기서 뛴다고 보는데 그것은 틀렸다고 하지 말고 다르다고 이야기해야 된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이렇게 보면 되지요. 자연이라는 것은 들어오는 감각은 같지만 뭐가 다른가 하면, 우리가 평소에 살아가는 문화적인 주관, 줏대, 사고방식, 사유체제, 이런 것이 다르기에 자연을 표현할 때 다르게 표현하는 겁니다. 그런데 과학적 인식에 있어서는 자연은 자연이고 인간은 인간이에요. 인간과 자연은 따로 구분됩니다.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지요. 옛날에는 달에서 토끼가 방아를 찧고 있다고 했는데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옛날에 이랬다저랬다 하는 그것이 아니고 성경본문이 문제거든요.



하나님이 화를 내는데 왜 자연의 우박이 떨어지지요? 우박은 북태평양 고기압과 찬 기류가 만나서 유박이 떨어지는 거지요. 번개가 떨어지는 것은 음전기와 양전기가 만나서 번개가 치는 거지요. 그런데 그렇게 하면 에스겔 38장 19절의 말씀이 설명이 되지를 않아요. 과학적으로 모든 것을 따진다. 과학적으로 따지는 이것이 맞다고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이 자연을 가지고 우리를 천국에 보내주시고 우리를 용서해주시는 주님의 계획과 만날 수가 없어요. 만나지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이 이 자연을 운행하시는데 그 자연을 운행하시는 목적이 따로 있어요. 그 원리원칙이 딴 데서 나옵니다. 인간의 과학의 목적이 뭐냐 하면, 자연을 어떻게 편리하게 이용하느냐에 달린 거지요. 물이 위해서 떨어진다. 물이 위에서 떨어지면 동양화에서 보듯이 위에서 물 떨어지는 그림 그리면 끝나는 거예요. 중국이나 한국의 옛 조선시대에서는 그림이나 그리면 되는데 유럽에서는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중력이 있는데 그 중력의 에너지에 의해서 물은 떨어지고 그 에너지를 이용해서 터빈을 돌리면 밤에도 훤하게 불을 켤 수 있는 전기가 생산된다, 이렇게 본 거예요.



절벽에서 물이 떨어지고 무심하게 한가롭게 낚시를 드리우고 있는 동양과는 다른 원리로 서양은 산거예요. 어느 것이 맞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둘 다에서 하나님의 분노를 찾아낼 수 없다는 것이 문제가 돼요. 자연을 이용하든 아니면 유유자적하게 자연을 보고 그림을 그리든 관계없이, 동양적으로 보든 서양적으로 보든 우리 자신은 그리스도가 세상 바라보는 그 관점하고는 틀립니다. 다릅니다. 이것은 오류이고 죄가 되는 겁니다. 히브리서 10장 13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제사를 반복하는 이유가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제사를 반복하는 겁니다. 그 제사를 어디서 드렸는가? 하나님이 인정하는 제사는 이스라엘에서 드렸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 전에 무슨 조치를 했느냐 하면,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열 가지 재앙을 내렸었습니다. 열 가지 재앙 내릴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해했어요.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탈출시키려 할 때 애굽 왕이 우리를 안 보내주니까 강제로 파리, 이, 개구리, 강이 피바다가 된다든지, 우박이 떨어지고 해가 갑자기 캄캄해지는 등의 자연에서 이상한 일들이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서 시내산 밑에서 최초로 뭘 했는가? 제사를 드렸거든요. 제사 드리기 위해서 그들은 애굽에서 나왔고 나오는 과정에서 자연세계가 이스라엘에 맞추어서, 대자연이 정착하는 이스라엘을 구성하는 데에 맞추어서 호응을 해준 겁니다.



그러면 이 대자연에 중심이 있어요. 그게 뭐냐? 제사입니다. 제사에요. 애굽에서 나올 때에 홍해도 갈라져서 길을 내었습니다. 홍해가 갈라졌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설명이 되지를 않아요. 어떤 사람은 지진설, 지진이 일어나서 갑자기 갈라졌다. 바다가 갈라질 수 있어요. 그런데 물이 절벽이 된다는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거든요. 오는 물이 왜 멈춰요? 왜 절벽이 됩니까? 양쪽에 절벽이 생겼고 그 계곡 사이에 길이 나서 건너왔습니다. 구약까지 갈 것도 없어요. 갈릴리 바다에 풍랑이 일어났을 때 제자들이 허겁지겁 물 퍼낸다고 바빴습니다. 예수님은 주무시고 있었고 제자들이 물 퍼내다가 안 되니까 예수님을 깨우면서 불렀어요.



오룡호나 세월호에는 예수님이 안 계셨던 것 같아요. 예수님을 깨워서 “예수님! 우리가 다 죽게 되었나이다.” 예수님이 풍랑을 보고 잔잔하라고 바다를 꾸짖으니까 바다가 잔잔해졌다는 거예요. 언제부터 바다와 예수님이 그렇게 친했습니까? 뉴튼의 과학,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로는 그것이 도저히 해명이 되지를 않아요. 루카스라는 철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게 제 2의 자연이라 해요. 원래 자연이 있는데 그 원래 자연을 우리가 주관으로서 재구성해서 두 번째 자연……, 첫 번째 자연은 우리가 몰라요.



하여튼 자연이라 하는 것은 해와 달이 있고 천문학이 어떻고 물리학이 어떻고, 라고 해서 구성된 그 자연은 제 2의 자연에 불과하고 제 1의 자연은 우리가 알 수가 없다는 겁니다. 다만 느끼는 것은 우리의 주관이 ‘저걸 어떻게 이용해 먹고, 어떻게 사용하고…….’ 라고 생각하고 마치 자연이 우리가 움직이는 대로 움직여주니까 원래부터 자연이 그러려니 했지요. 그러려니 했던 그 자연이 에스겔 38장에서는 무너지는데요? 절벽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고 우박이 떨어지고.



왜? 누가? 무엇 때문에? 왜 이게 무너지지요? 곡이라는 왕이 이스라엘을 공격했기 때문에 무너진다는 겁니다. 학교에서 우리가 교육받을 때는, 자연은 자연이고 인간은 인간이고 자연 자체를 인격화 하는 것은 물활론이라 해서 옛날의 미신에 해당되거든요. 옛날의 인디언,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사고방식이지 오늘날 과학시대에서는 자연이란 어떤 인격이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혹시 모르지요. 저 안드로메다에 외계인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외계인은 자연 중에서 우리같이 사는 외계인이지 자연 그 자체가 인격은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성경에 보니까 곡이라는 왕이 이스라엘을 공격할 때 이런 인격적인 요소로 인하여 자연에 변화가 유발된다는 말이지요. 대체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이 해석은 요한계시록의 재앙문제와 관련되어서 중요한 해석이 되는 겁니다. 그 해석을 제가 알려드리겠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왔을 때 제사를 드렸습니다. 제사를 드리는 그 가운데 있는 짐승이 어린양이지요. 그 어린양이 우리 보기에는 대 자연 속에 있는 여러 가지 짐승들 중에서 하나의 것, 염소도 있고 소도 있고 여러 가축도 있고 코끼리도 있고 대 자연 속에 여러 동물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양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인간들 생각이고 주님 생각은 그게 아니에요.



애굽에서 나왔을 때에 죽음에서 인간이 살게 된 것은 염소도 아니고 소도 아니고 어린양을 잡아서 그 피를 문설주와 문지방에 발랐더니 장자가 죽지 않았다는 겁니다. 물론 그 죽은 양을 쪼개서 해부해보면 별 다른 것이 없어요. 유럽에 그런 동화가 있잖아요. 닭이 매일같이 황금 계란을 낳는 거예요. 그 금계란 팔아서 생활하면 되는데 욕심이 나서 대체 얼마나 금 계란이 많이 들어있기에 매일 금 계란을 낳나 싶어서 배를 갈라 보니까 똑같아! 보통 닭과 다를 것이 없어요. 백숙이나 해먹고 황금이고 뭐고 다 끝났습니다.



왜 그 닭을 절개합니까? 제 2의 자연관 때문입니다. 제 2의 자연관. 주님이 다루는 자연이 아니고 인간들이 밥 먹고 살려고, 생존에 필요한, 하나님 보시기에 맞지도 않는, 우리가 이용해 먹기 위해서 일방적으로 조립하고 구성한 그런 자연관을 우리는 진짜 자연의 목적이고 취지고 이유라고 확신하고 있었던 겁니다. 이것은 애굽도 마찬가지고 이스라엘도 마찬가지고 다 마찬가지에요. 여기에 특수한 임무가 주어집니다. 특수한 사명이 주어지는데 이상한 일이 벌어져요. “어린양의 피를 발라라. 그러면 너희들의 장자는 살 것이다.”



여기서 인간들이 알고 있는 원인과 결과, 그 원인과 결과를 가지고 연결해 보세요. 이것은 수능 만점 안 나옵니다. 아무도 못 맞춥니다. “양을 잡았는데 사람이 살았다. 그 이유를 대라.” 이것을 어떻게 풉니까? 이것은 수능교재에 나오지를 않습니다. 양을 잡았는데 왜 사람이 삽니까? 여기 무슨 비밀이 있는 거예요. 무슨 비밀이 있다는 정도가 아니라 그 비밀로 인하여 그동안 인간들이 뭔가 오해하고 있었고, 죄 짓고 있었고, 착각하고 있었고, 하나님이 주신 자연 속에 살면서 정작 자연은 보이면서도 하나님의 분노와 하나님의 사랑은 그 자연 속에서 찾아내지를 못하고 있는 인간에 대해서 뭔가 문제 있다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서 그런 일들이 벌어지는 겁니다.



이것은 다른 민족, 다른 종족은 제쳐두고 오직 이스라엘에게만 그 임무가 주어진 거예요. 시편 136편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오지요. “해로 낮을 주관케 하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해를 백날 쳐다봐 보세요. 눈만 나빠지지. 거기서 무슨 인자가 나옵니까? 해라는 것은 수소와 헬륨이 융합되면서, 수소폭탄원리로서 융합되면서 거기서 계속해서 빛과 열이 나오는 거예요. 에너지가 다하게 되면 적색거성이 되면서 축소되어서 블랙홀로 변해요. 현대과학에서 그렇게 이야기한다는 말이지요. 별이 폭발하듯이 초신성이 되어서 나중에 폭발해 버려요. 천문학에서는 그걸 적색거성이라고 하거든요.



그런데 뭐가 인자하심입니까? 동그란 해에서 소주에 그려 있는 금복주 할아버지, 안 그러면 맥도날드 상표의 할아버지가 나오던가요? 그런 착각을 할 수는 있지만. “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케 하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찾아내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그걸 아는 것들이 있어요. “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시 19:1-4) 자기들끼리는 잘 통하고 있는 거예요.



인간만 빠졌어요. 인간만 몰라요. 인간만 빠졌는데 인간을 대표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자연 속에 있는 원리를 그들에게만 주는데 그 원리가 뭐냐? 제사라는 겁니다. 제사를 하는 이유가 뭐냐? 히브리서 10장 3절에 의해서 그들은 제사를 하면 할수록 그들의 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다시 말해서 인간은 자연을 통해서 뭐를 배워야 하느냐 하면,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배워야할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물론 이것은 택한 백성인 이스라엘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이에요. 이스라엘에게만 주신 임무가 되는 겁니다.



자연에 대해서 죄를 깨닫게 한다는 이 말은, 우리가 보기에는 아름다운 자연이지만 사실은 아름다운 자연 속에 아름다움과는 정반대가 되는 썩어짐과 죽음이 들어 있는 자연이라는 겁니다. 이게 로마서 8장에 보면 나와요. 로마서 8장 20절에,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모든 피조물은 썩어가고 있습니다. 썩어가고 있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면 왜 그렇게 아름답습니까? 그것은 거죽을 덮어놓았거든요.



눈 오면 아름답잖아요. 그러나 눈이 녹으면 질퍽질퍽해서 꼴 보기 싫지요. 자연 속에 더러움이 있고 그 더러움은 거죽으로 덮어놓은 거예요. 덮어놓은 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이걸 응용하면 “술은 술이고 물은 물이다.” 그렇게 돼요.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자연은 영원하고 인생은 자연 속으로 편안히 돌아간다.” 이렇게 하거든요. 그것은 개코같은 소리에요. 거죽을 덮어놓으면 그 안에 썩은 것이 들어있는 거예요. 마치 회칠한 무덤이 페인트칠을 해놓아서 아름답지만.



제가 오스트리아의 길갱이라는 곳을 여행한 적이 있는데, 거기에 교회가 있는데 그 교회 자체가 공동묘지에요. 너무너무 아름다워요. 꽃으로 장식을 했는데. 하지만 지진이라든지 산사태가 일어나서 무덤이 해체되어 보세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밥맛이 떨어지지요. 썩어진 거예요, 썩어진 것. 전지현이가 예쁘다, 김태희가 예쁘다고 하는데 죽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것은 뼈에다 그냥 발라놓은 거예요. 물론 물고기가 아름다워요. 고등어나 꽁치나 갈치나 다 아름다워요. 하지만 발라먹을 때 보세요. 다 해체시켜서 발라먹잖아요. 그게 아름답습니까?



자연세계는 자기가 썩어간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인간만큼은 착각을 해서 곧 썩어 죽어가고 있으면서도 인정할 줄을 몰라요. 그래서 대신해서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렇게 죽는 거라고 죽잖아요. 대자연속에 예수님 들어 있었던 겁니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대자연속에 예수님의 죽음이 들어 있는 거예요. 주님의 십자가가 이미 대자연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하나님과 예수님사이에 의논해서, 십자가에 죽어야 주가 된다는 그 정보를 위하여 차후에 자연세계, 피조세계가 만들어졌습니다.



안식이라는 것, 그것은 예수님이 십자가 죽고 부활 할 때 안식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죽고 부활하게 되면 겉은 사라지고 속에 있는 것이 겉이 되면서 천국을 이룹니다. 그런데 우리는 “뭐 물로 멸망했어? 불로 멸망해? 수천 년이 흐르는 동안 자연은 그대로다. 물은 물이고 산은 산이고 그대로인데 무슨 심판이 있고 무슨 멸망이 있어?” 이러고들 있는 거예요. 그것은 겉에 덮인 가마니만 보고, 덮여진 포장만 보고 그 안에 썩어지는 것은 못 봐서 그래요. 주님께서는 그걸 들춥니다. 들추니까 그걸 “악!” 하고 안 보려고 ……. 주님의 말씀을 왜 이해를 못하느냐 하면, 너무 극단적으로, 부정적으로 이야기를 하니까 우리가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거예요. 자연은 인간에게 봉사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을 뽑아내기 위해서 설치된 쇼윈도와 같다고 보거든요. 그러면 그 안에서 뭐가 신이 되냐 하면, 인간이 신이 돼요. 절대자가 되는 겁니다.



자연은 인간이라는 절대자를 풍요롭게 하기 위해서 얼마든지 이용할 필요가 있다는 이것이 바로 과학이고, 철학이고, 학문이고, 우리가 배웠던 모든 겁니다. 환경운동 하자고? 환경운동 하자는 것은 자연 위주가 아니고 이 자연을 오래 써먹기 위해서, 너무 빼먹지 말고 천천히 빼먹자는 수작이지 자연위주라는 것은 없습니다. 자연은 우리 말 안 들어요. 자연은 주님말씀 듣지 우리 말 안 듣거든요. 로마서 8장에서 썩어짐의 종노릇 하는 그 자연이 인간을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기다렸어요. 예수님을 기다린 겁니다. 주님의 재림 날에 모든 것이 새롭게 변한다는 말이지요.



이미 마태복음 21장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걸 암시를 해 줬어요. 마태복음 21장 19절에 보면 이 대자연이 누구 때문에 있는지의 예가 나와 있어요.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얻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라고 되어 있어요. 자, 먼저 무화과나무에 대한 인간들의 생각을 보겠습니다. 인간들의 생각, 제자들의 생각부터 먼저 언급해 드리겠습니다.



무화과나무 한 그루가 있다고 합시다. 그러면 무화과나무 너는 너고 나는 나에요. 한 5월이 되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맺힙니다. 열매가 맺히는 철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나무에 열매가 맺히면 인간들은 자기가 목마를 때 따먹으면 되는 거지요. 무화과나무 열매는 절대자인 인간이 목마를 때 따먹으라고 주는 것이 무화과나무열매라고 생각하는 거지요. 그래서 무화과나무의 존재, 그 있음을 존중해주는 겁니다. 만약에 5월에 열매를 맺는데 1월에 열매가 없다고 도끼를 들고 그 나무뿌리를 쳐버리면 누가 손해냐 하면, 인간자체에 손해가 돼버려요.



그래서 무화과나무를 생각할 때는 언젠가 열매가 맺히기를, 그래서 따먹을 수 있을 때를 기다리는 겁니다. 그게 바로 인간들이 생각하는 무화과나무였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를 어떻게 보시는가 하면, ‘무화과나무 너는 너고 나는 나다’가 아니고 지금 당장 무화과나무의 열매를 요청하는 셈입니다. 아직 열매 맺을 때가 안 되었어요. 이제 싹이 좀 나왔을까, 잎사귀밖에 없어요. 아직 열매가 없어요. 주님께서는 그 무화과나무를 저주해버렸습니다. 저주를 하니 무화과나무가 곧 말라버렸습니다.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이걸 시행했거든요.



결국 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함은 무엇에 대한 저주냐 하면, 제자들 너희들이 지금 세상을 잘못보고 있고 세상을 잘못보고 있는 이유가 세상을 너 중심으로 보고 이 예수님 중심으로 안 보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서 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해버린 겁니다. 누가 놀랬느냐 하면, 제자들이 놀래버렸어요. 자기가 무화과나무도 아니면서 이상하게 자기오금이 저린 겁니다. 형제가 둘이 있는데 아버지가 술을 먹고 와서는 동생 보고 “야! 숙제를 왜 안했어? 성적은 왜 떨어진 거야?” 하면서 상을 엎고 매를 가지고 막 때리니까 맞고 있지도 않은 형이 벌벌 떨고 있는 거예요. 꼭 그런 식이에요. 무화과나무를 저주해버리니까 그 저주의 원인과 결과, 그 저주의 타당성을 도무지 알지를 못하는 주변의 제자들 입장에서 볼 때 저 무화과나무가 저주받을 짓을 한 적이 없거든요.



왜? 열매를 맺을 때가 되어서 열매가 없다면, “에이, 이런 나무는 아주 썩어버려도 돼. 없애버려야 돼.” 이렇게 해도 되는데 아직 계절이 열매 맺을 계절이 아니에요. 누가 억지를 부리냐 하면 주님이 억지를 부려요. 주님은 이런 일을 하면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요. “너희들 눈에 내가 지금 억지를 부리는 것으로 보이느냐?” 지금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자연은 ‘해는 저기 있고, 달은 저기 있고, 나는 여기 있다.’는 그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위해서 해가 있고 주님을 위해서 달이 있듯이 너는 너 홀로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 인간들이. 홀로 있는 존재가 아니에요.



뭔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할 수 있는 용도로써 이 땅에 창조된 겁니다. 골로새서 1장 16절의 말씀처럼 모든 피조물들은 그리스를 위하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는, 이 구약 같은 경우에 뭐냐 하면, 무화과나무는 무화과나무고 해는 해고 달은 달이고 나는 나고, 달은 달이고 나는 여기 있고. 내가 달을 그린다든지 달에 간다든지 무화과나무열매를 따 먹으면 비로소 무화과나무는 나에게 의미가 되고 나에게 꽃이 되고, 뭐 그런 거요.



전 우주가 하나님의 분노를 표현하기 위해서 대기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인간들은 도저히 감 잡을 수 없는 겁니다. 그만큼 인간들은 죄인이고 그 죄로 말미암아 왜곡된 자연관 속에서 그것이 진리라고 여기면서 또는 진리가 뭔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스가랴 14장에 보면 장차 메시아가 오는 지명이 나와 있어요. 감람산입니다. 감람산이 둘로 쪼개져요. 그리고 거기에 메시아가 오신다는 거예요. 우뚝 선다는 거예요. 그러면 제가 물어보겠습니다. 감람산에 눈이 오는 것과 감람산에 예수님이 오는 것을 사람들은 같이 봐요.



감람산에 눈이 오게 되면 이것이 눈에 보여요. 나가실 때 달력을 보세요. 12월 달력 보면 감람산에 눈이 오는 장면이 있을 거예요. 마지막 잎 새처럼 마지막 장이 남았습니다. 감람산에 눈이 오면 그 눈 오는 것이 보이듯이 스가랴 14장의 말씀대로 감람산에 메시아가 오게 되면 메시아가 감람산에 오는 것을, 내가 눈이 오는 것을 보는 것처럼 볼 수 있다고 여깁니다. 그게 잘못이에요. 감람산에 이미 메시아가 왔었어요. 와도 못 알아봐요. 감람산에 눈 오는 장면을 사진 찍어 놨는데 그것처럼 감람산에 예수님 오시게 되면 우리가 파악할 수 있다고 여기는 그것이 7년 대 환란 같은 이론들이에요. 요한계시록을 엉터리로 해석하는 것들입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거예요.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본인이 잘못되었는데? 본인이 엉터리인데? 엉터리인 본인이 문자적으로 해석해봐야 그게 다 엉터리인데요?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구름타고 와야 된다는 거예요. 주께서 이미 오셨는데 구름타고 와야 된다는 겁니다. 구름타고 오는 것은 배트맨이나 스파이더맨, 그런 사람들밖에 없어요. 바지위에 팬티를 입은 그거 누굽니까? 슈퍼맨 같은 것.



주님이 지구상 모든 인간이 볼 수 있도록 오신다는 그 말을 지구가 둥근 입장에서는 해명이 되지를 않아요. 감람산에 주님 오시면 우리는 망원경을 들고 봐야 됩니까? 비행기 타고 쫓아가야 돼요? 감람산에 눈이 오고 그 눈 오는 속에서 주님의 인자하심을 발견하려면 우리 자신이 우리가 감람산에 있든 집에 있든 우리 주님이 여기 함께 있을 수 있음이 믿어져야 돼요. 그러면 함께 있음을 어떻게 아느냐? 우리가 죄인임을 느끼면서, 우리가 십자가 앞에서 죄인임을 느낄 때 그렇게 느끼는 것, 성령 안에서 그걸 느끼고 믿게 하실 때 주님이 성령 안에서 함께 있는 겁니다. 그게 바로 모든 자연을 주님 입장에서 해석하는 방식입니다.



곡이라는 나라가 이스라엘을 쳤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북방 나라가 남쪽 나라를 쳤다는 그것으로 끝나지요. 자연, 산이나 땅 이런 것은 아무 연관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보면 모든 것이 무너집니다. 무너진다는 것은 원래 곡이 치는 이스라엘은 주님 계신 곳이고 곡이라는 것은 복음을 반대하는 모든 세력들, 악마에 속한 모든 세력들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래서 무너지는 것은 이 세상 모든 거죽이 철거되는 것이고 주님 재림하실 때 지구상의 모든 것이 유황불로 녹아버리는 그 사실을 이러한 구약이라는 지리적 환경의 무대를 자기고 미리 당겨서 설명하신 거예요.



여기서는 절벽이고 우박이라고 되어 있지요. 신약에 가게 되면 그냥 지구가 불에 타버려요. 우박 같은 것으로 뭘 할 것도 없어요. 그냥 타버려요. 요한계시록은 이 구약용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그 표현자체는 구약이에요. 따라서 요한계시록 전체는 뭐냐 하면, 밧모섬에서 사도요한이 이미 주님께서 이 자연을 망하도록 조치를 하셨고, 그래서 그 조치가 확정되었고 그 이유에 대해서, 이 역사라는 것이 남아 있어서 한 꺼풀 두 꺼풀 벗겨질 때마다 왜 이 세상이 유황불로 망해야 되는지에 대해서 조금씩조금씩 개시(開示)되는 역사가 남아 있을 뿐입니다.



주님의 역사는 나와 관계없이 이루어집니다. 내 위주로 이루어지는 역사는 없어요. 나와 전혀 상관없이 이루어져야 되는 이유가 주님 중심이기 때문에, 주님 중심이기 때문에, 이 세상 자연과 역사가 다 주님 중심입니다. 그렇다면 구태여 나 중심일 필요는 없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지금 내가 여기 있는 것은 주님의 은혜인 것을 알게 되면 그것이 주님과 역사에 대해서 제대로 보고 있는 성령의 안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도 속에 지금도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가 있다면 그 제사가 계속해서 반복되면서 우리의 죄가 계속해서 용서가 되는 놀라운 현상들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자를 성도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그동안 누구한테 속임수를 받았는지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고 우리는 우리’라고 단절시켰던 모든 것이 이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통합되어 있음을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죽어야 할 것은 죽어져야 하고 썩어질 것은 썩어져야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반기면서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