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강-에스겔 38장 14절-18절(이방나라의 활용)141123-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38장 14절-18절입니다. 구약성경 1212페이지입니다.
에스겔 38:14-18
“인자야 너는 또 예언하여 곡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 이스라엘이 평안히 거하는 날에 네가 어찌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네가 네 고토 극한 북방에서 많은 백성 곧 다 말을 탄 큰 떼와 능한 군대와 함께 오되 구름이 땅에 덮임 같이 내 백성 이스라엘을 치러 오리라 곡아 끝날에 내가 너를 이끌어다가 내 땅을 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말미암아 이방 사람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어 그들로 다 나를 알게 하려 함이니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옛적에 내 종 이스라엘 선지자들을 빙자하여 말한 사람이 네가 아니냐 그들이 그 때에 여러 해 동안 예언하기를 내가 너를 이끌어다가 그들을 치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하셨다 하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곡이 이스라엘 땅을 치러 오면 내 노가 내 얼굴에 나타나리라.”
이스라엘 나라가 있고 그 북방에 곡이라는 나라가 있습니다. 곡이라는 나라와 이스라엘나라가 있는데 누가 누굴 치느냐 하면, 이스라엘이 곡을 치는 것이 아니고 곡의 나라가 이스라엘을 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치게 되는데 거기에 관여하는 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 관여하신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맞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있는 그곳이 하나님이 계신 곳이 맞는데 그곳을 곡으로 하여금 침범하고 공격하도록, 전쟁을 일으키도록 일부러 조치를 했다는 겁니다.
그렇게 조치하신 이유가 뭐냐? 16절 끝에 보면, “이는 내가 너로 말미암아 이방 사람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어 그들로 다 나를 알게 하려 함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스라엘이 있고 곡이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속으로 물어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이 여기 있고 하나님을 모르는 나쁜 나라가 있다 합시다. 그 둘 중에 어느 쪽에 속하고 싶습니까? 제가 이렇게 묻는다면 여러분은 이스라엘에 속하고 싶어 하겠지요.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백성으로 하여금 믿는 백성을 공격해서 그들을 파괴하고 힘들게 하겠다는데 그래도 이스라엘에 속하겠습니까? 하나님 편에 있다는 것은 어떤 이득이 있어야 하는데 오늘 본문 같은 경우에는 반대로 이야기해요. 하나님 편에 있다는 것이 손해가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쪽에 서시겠습니까?”라고 묻는 거예요. 아멘을 하시는데 그러면 한 번 당해보시렵니까?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 가정이 굉장히 괴로울 때, 사람들이 본심이 그래요. 하나님께서 일을 이렇게 일으켰으니까 어쨌든 살고보자는 식으로 나오는 겁니다. 어쨌든 살고보자 하는 식으로.
그래서 성경말씀을 찾고 교회에 충성하면서 ‘이런 어려움을 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다시 회복하고 이 어려움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기대나 어떤 희망도 같이 주셨는데 그 동안 내가 신앙생활 게을리 하고 제대로 못했기 때문에 얻어맞는 것이니까 여기서 개과천선해서 정신 차리면 다시 옛날처럼 편안한 생활로 이어나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촉구했다, 경고를 보냈다.’라는 식으로 보통 생각들 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거의 백 프로에요. 그런데 그것이 잘못이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성경은 “네가 이런 어려움을 당할 때 어떻게 빠져나갈 것인가를 생각할 것이 아니라 ‘여호와가 누구냐’에 대해서 새삼스럽게 관심을 가져봤느냐?”고 우리에게 묻는 겁니다. 상당히 우리 피조물 입장에서는 억울하고 상당히 당황스럽지요. 예를 들어서 자식이 있고 아버지가 있는데 아들이 공부 안하고 컴퓨터게임만 하고 있을 때 아버지가 아들 뒤통수를 탁, 치는 거예요. 칠 때 그 아들이 맞고 나서 스스로 생각하는 겁니다.
공부도 안 해. 옷가지 잘 벗어놓으라고 해도 뱀 허물 벗듯이 해놓고 고양이 똥 치우라고 해도 그것도 안 해. 밤 10시 넘어서 라면이나 끓어먹고 있고. 이렇게 하니까 아빠나 엄마가 와서 잔소리하고 뒤통수도 치고 옆구리도 후비고 할 때 애는 ‘아, 우리 엄마가 이젠 고 1이니 정신 좀 차리라고 날 반성시키고 깨우치기 위해서 저렇게 하는구나.’라고 생각하겠지요. 모든 사람들은 거의 백퍼센트 그렇게 생각해요. 그런데 게임하다 아빠한데 한 소리 듣고는 정신 차리겠다고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는데 그 다음날 아침에 또 한 방 때리더라는 말이지요.
그래서 그 애가 이렇게 말해요. “아빠, 어제는 게임해서 얻어맞는 게 당연한데 지금은 공부 열심히 하고 있는데 왜 때립니까?”라고 하면 아버지가 하는 말이, “그래야 네가 아버지가 누군가를 알리라.” 이 아들이 착각을 한 거예요. 잘못이 있어서 때린다고 생각을 한 겁니다. 예수 믿는 이유도 뭔가 잘못한 게 있기에 주께서 용서해주려고 예수 믿으라고 한 줄로 오해하는 겁니다. 그게 백 프로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은 이 땅에 살다가 천국가기 위해서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누구시냐’를 보여주기 위해서 믿게 하신 거예요.
예수님이 어떤 분이냐 하면, 숙제를 하든지 게임을 하든지 게으르든지 상관없이 무조건 자기가 택한 백성은 천국 데려간다는 그런 여호와 하나님인 것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일부러 오해를 유발하는 겁니다. ‘잘못했으니까 반성하고 반성했으니까 예수 믿으면 이제는 더 이상 얻어맞을 일이 없겠지.’라고 오해하는 가운데서, 그런 오해를 유발시켜놓고 “그런데 그게 아니거든.”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제가 미국 가 본 느낌은 이거예요. 한국에서 살 때는 교회 가보지도 않은 사람이 미국 가니까 왜 그리 교회 많이 나오는지. 뭔가 고국에서 안 좋은 추억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하나님께서 원상회복 시켜줄 줄 알고. 그것은 자기가 일방적으로 생각한 잘못된 하나님이고요. 그런데 잘못된 하나님이라고 했지만 모든 인간의 시작, 개시는 잘못된 하나님부터 시작해요. 잘하면 복주고 나쁜 짓 하면 벌 줘서 가정이 엉망이 되었다느니, 그렇게들 시작을 해요. 그런데 가만 보니까 살아 있는 것 만해도 이게 복인데. 내가 착해서 살아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제가 몇 해 전에 수련회에서 전도서를 강의했는데 수련회 참석한 사람들이 다 같이 느낀 점이 뭐냐? 전도서 내용을 보게 되니까 이런 내용이 굉장히 와 닿는 거예요. 착하다고 오래 살고 잘 사는 것도 아니고 나쁜 일 한다고 해서 잘 못살고 일찍 죽는 것도 아니고. 누가 부자 되고 누가 가난하고, 누가 일찍 죽고 누가 오래 살고는 하나님 오야 맘대로 라는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 맘 대로지 네 행동 따라서 오래살고 부자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사랑할 때가 있으면 미워할 때가 있고 태어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고, 이 모든 때는 주님께서 결정한 거예요. 그래서 전도서에서 하는 말이 “너희들이 이 세상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이 세상이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그 말이에요.
헛되다고 생각하면 안 헛된데 헛되지 않다고 생각하면 헛되다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지금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여호와가 누군지. 오늘 본문 16절 끝에, “그들로 다 나를 알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이 성경전체를 기록한 목적은 우리들이 성경을 이용해 볼까 하는 그 목적과 전혀 다릅니다. 얼마 전에 개봉한 영화에 라는 게 있어요. 분노라는 뜻인데 2차 세계대전 때 탱크 한 대하고 몇 명의 병사가 독일군을 다 쳐부수고 그 가운데 이등병 하나 살아남았다는 이야기에요.
그 전쟁 속에서 주인공인 전쟁영웅이 하는 이야기가 그거예요. “이 전쟁은 누가 일으켰으며 왜 일어났으며 전쟁은 어떻게 진행되는가?” 그 전쟁에 실제로 참전한 사람과는 전혀 관계없어요. 그것은 몰라도 되는 문제에요. 누가 언제 휴전을 협상하는지, 언제까지 계속될지, 왜 전쟁은 일어났는지, 그 전쟁에 참여한 군인들은 전혀 관계없고 그저 살아남아야 된다는 거예요. 이것은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무조건 살아남아야 돼요. 그 전쟁, 오늘날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태어난, 천구백 몇 년도라는 날짜를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난, 그 날이 되면 식당에서 가서 생일축하 한다고 노래 부르고 넘어가는 그 모든 인간들은 ‘이 세상은 누가 만들었으며 왜 있는지’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어요. 다만 중요한 것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나도 저들처럼 살아남느냐? 오직 그것 하나밖에 없어요. 묻지도 따질 것도 없어요. 어떻게 하면 살아남느냐?
세상은 왜 이렇게 만들었나? 그거 알아서 뭐하려고요? 그거 안다고 우리가 사는데 보탬이 됩니까? 전쟁은 누가 일으켰으며 전쟁의 원인은 어떤 경제적인 충돌 때문에 생겼다? 그런 것은 지금 탱크 몰고 있는 사람한테는 다 필요 없습니다. 탱크를 몰게 되면 탱크 안에서 밖을 내다보는 작은 창이 있는데 그 창으로 독일군이 앞에 보이면 그대로 쏘면 되는 거예요. 만약에 안 쏘았다? 그러면 대전차포가 날라 와서 이쪽이 다 죽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많은 동료들이 죽어나갔습니다. 탱크 겨우 한 대 남았어요. 남은 한 대마저 지뢰 밟아서 오도 가도 못합니다.
역시 그 다음문제는 딱 하나밖에 없어요. 그 안에 있는 다섯 명 가운데서 누가 살아남을 것인가? 그것밖에 없어요. 성경은 전혀 우리의 관심사를 충족시키지 않습니다. 우리의 기대도 부응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보는 우리 마음자체가 성경을 기록한 마음과 처음부터 어긋나 있기 때문에 맞지를 않아요. “하나님, 제가 이 성경 말씀을 지킬 테니까 제가 살아남는데 행운을 주시옵소서.” 이렇게 나오기 때문에, 성경 볼 때 그런 마음이 들기 때문에 전혀 상관없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본색이 하나님이 우선이 아니고 자기가 이 땅에서 살아남는 것이 우선인 것을 까발려주는 효과가 있어요.
그래서 성경 봐야 돼요. 우리는 성경 왜 봐야 되는가? 성경보고 오해해야 됩니다. 그게 우리의 본색이니까. 우리의 본심이니까. 성경 보면서 오해하다가 또 수정하고, ‘성경해석이 잘못되었나?’ 다시 수정하고, 잘못된 그것도 또 잘못되었으니까 그 다음에 또 수정하고 또 잘못되고. 평생을 그렇게 하면서 결국 성령을 통해서 깨닫는 것은 우리의 이런 어설픔이 오히려 주님을 더욱더 주님 되게 했다는 사실에 감사하게 되지요. 우리가 똑똑하지도 않고, 신학이 완벽하지도 않고, 성경을 달달 외운다고 해서 성경대로 살 수 있는 입장도 못되고. 로마서 2장에서 유대인들이 성경을 알았다, 하지만 사도바울은 그렇게 아는 것과 지키는 것은 다르다고 이야기합니다.
“너희들이 거짓말하지 말라고 남을 가르치면서 너희들은 왜 거짓말 하느냐?”고 하지요. “너희가 도둑질 하지 말라고 남은 가르치면 왜 너희가 도둑질 하느냐?” 그러면 그 소리 듣고 유대인들이 뭐라고 합니까? “앞으로 도둑질 하지 않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 하겠습니다.” 이렇게 나오겠지요. 사도바울이 하는 말은 그런 취지로 한 게 아니고 “네 속에 너 말고 죄가 들어있는데 그 죄는 네가 어떻게 할 수가 없다.” 하는 거예요. 모든 사람 속에 들어 있는 죄를 인간 본인이 조정하거나 관리하는 대상이 안 된다는 겁니다.
그 죄로 인하여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도 항상 곡해하면서 성경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곡해했기 때문에, 이 성경이 내가 기대하는 것, 내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가에 전혀 부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다시 성경 보면 비로소 보이는 것이 뭐냐 하면, 성경은 하나님 자신이 좋으라고 있는 것이지 우리 피조물 위주로 쓰인 책이 아니라는 것을 그 순간에 잠시 스치듯이 알게 되지요. ‘그동안 내가 살려고 부지런히 설쳐댔는데 내가 설쳐서 산 것이 아니고 주께서 설치게 하셔서 살게 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참새가 무슨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겠습니까마는 나름대로 살려고 애쓰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참새를 살게 하실 때 참새가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그 철없는 참새가 공중을 마음껏 나는 것을 통해서 이 여호와가 누군지를 알라는 겁니다. 이제부터 설교할 내용이 상당히 난해하더라도 여러분은 그 난해한 것을 알아야 돼요. 난해함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곡이라는 것이, 마곡 또는 곡이라는 것이 정체가 뭐냐 하는 겁니다. 마곡의 왕이 곡인데 마곡, 곡, 같이 써도 괜찮아요.
마곡이라는 나라 또는 곡이라는 왕이 나오는데 왜 하나님께서 곡에게 이런 식으로 하느냐는 말이지요. 14절에 봅시다. “인자야 너는 또 예언하여 곡에게 이르기를.” 이렇게 곡이 나오는데 이 곡은 분명히 이스라엘은 아니에요. 그리고 지난시간에 이야기한 것처럼 곡은 하나님께서 부정적 견해, “너는 아니야. 너는 엉터리야.” 한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이 질문을 다시 해 봅시다. 가룟유다를 왜 주님께서 택했느냐 하는 겁니다. 주님께서 가룟유다를 택해놓고 마지막 하신 말씀이 뭐냐,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을 뻔 했다고 했는데 이것은 부모가 자식보고 할 소리가 아니지요.
부모가 자식을 낳아놓고 곱슬머리니까 그걸 보고 “얘야, 차리라 넌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겠다.” 그 이야기는 듣는 자식으로 하여금 어떻게 대처할 수 있는 아무 여건도 없잖아요. “너는 날 때부터 쌍 커플이 왜 없어?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겠다.” 그럴 경우에는 희망이 있습니다. 수능 치고 난 뒤에 쌍 커플 수술 하면 되니까. 그런데 그게 아니고 키가 아주 작다든지 난치병이 있다 할 경우에 “얘야, 네가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을 뻔 했다.” 이것은 자식보고 할 소리가 아니고 벽을 보고 하면 이해가 돼요, 벽을 보고. “아이고 내 팔자야. 왜 저런 자식이!” 벽을 보면서 이건 되는데 자식을 보고 한다면 자기가 원인이 아니고 결과물일 뿐인데 태어난 결과물이 원인을 찾아가서 수정을 가할 수 있느냐 그 말이지요. 타임머신 탈 것도 아니고. 상대성원리 나와야 됩니까? 태어난 손녀가 할아버지 찾아가서 할아버지로 하여금 할머니와 헤어지게 만들어서 아예 내가 안 태어나게 하게 되면 되지요.
그것은 타임머신을 타든지 웜홀이든 블랙홀이든 무슨 조치가 있어야 되는데 그런 식은 안 된다는 그 말이지요. 가룟유다를 왜 만들었느냐는 말이지요. 이미 해답은 나와 있어요. 예수님이 누구냐를 알리기 위해서. 간단한 겁니다. 예수님을 경유해야 되는데 예수님을 빼놓고 이스라엘과 곡, 또는 나와 당신, 이스라엘을 쳐들어오는 곡을 보고 “당신들은 왜 쳐들어오지요? 그걸 마곡이라는 나라한테 물어봤자 그들은 어떤 해답이 없어요.” “그냥 당신 나라를 삼키고 싶네요.” 이렇다 이 말이지요. 당신이나 나나 목적은 어떻게 이 세상 마지막까지 살아남는가, 그게 목적인데 무슨 다른 이유가 있겠어요?
입장 바꿔서 당신이 큰 나라고 우리가 작은 나라라면 이스라엘이 우리를 치지 않겠습니까? 치지요. 똑같은 입장이라는 말이지요. 가룟유다가 예수를 팔아먹은 것은 3년 동안 허비한 것에 대한 보상이지요. 상처받은 자존심에 대한 회복입니다. 기대 잔뜩 하고 갔는데 스승이 맥없이 체포되니 자기의 희망이 날라 가버렸지요. 그러면 그 아픔은 어떻게 하겠어요? 그 상처가 있잖아요, 상처, 마음의 상처.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 같은 인간이니까. 오히려 예수님께서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았겠다고 하는 그 예수님의 이야기가 도리어 우리한테 이해가 안돼요.
우리 인간들끼리는 이해가 되는데 그 가운데 예수님이 끼어들면 이해가 안돼요. 그러니까 예수님 말씀을 이해하는 데는 성령이 필요한 겁니다. 주님의 영이 필요한 거예요. 인간들끼리는 이해 안되는 게 없어요. 다 이해가 돼요. 하지만 문제해결은 전혀 되지 않아요. 뛰어난 자는 갑이 되고 못한 자는 을이 되어서 밀린다. 이것은 우리가 평생토록 경험해보면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다른 이야기 합니다. 둘이 꽈당, 헤딩을 시켜 놓고 하는 말이 “그래, 내가 여호와인줄 알리라.” 완전히 하나님이 우리를 장난감 다루듯이 다룹니다. 그걸 우리 쪽에서 어떻게 제대로 이해를 할 수가 있느냐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것이 이해가 안 된다면 우리는 지옥가요. 그러니 이것이 딜레마입니다. 이해를 하려고 드니까 도저히 우리 인간수준에서는 이해가 안 되고 이해를 했다고 치니까 우리의 자존심, 우리의 존재의미, 이것은 완전히 나로부터 떠나버리고 정말 기분 상해서 구원 못 받아요. 기분이 참 더러워요. 구원은 받는데 기분이 아주 더러워요. 이상해. 그걸 가지고 기괴함, 기, 괴, 함. 이 세상에서 가장 기괴한 존재가 인간입니다. 인간의 마음이에요. 참새와 돼지, 조류독감 걸린 오리는 정상입니다. 그것들은 괜찮은데 가장 비꼬아지고 뒤틀리고 뭔가 수상해. 그게 바로 사탄이 역사해서 그래요.
사탄은 인간 마음에 역사해버렸어요. 우리 조상 아담에게 역사하니까 마음이 비비꼬였어요. 선과 악이 철책처럼 꼬여서 선인데 악이 되고 악인데 선처럼 행세하고 이렇게 돼요. 그래서 오늘 본문을 통해서 반드시 풀어내야 됩니다. 왜 곡이라는 나라는, 그리고 이 곡이라는 나라의 왕은 이스라엘을 침범해야 되느냐? 왜 그것이 침범이 되어야만 여호와께서 거룩을 나타내고 세상 사람이 여호와가 여호와인줄 아는데 있어서 그게 왜 조건이 되는지, 왜 그런 일이 없으면 사람들이 여호와를 모르는지, 꼭 그런 일이 있어야 여호와를 아는지 이유가 뭐냐 하는 겁니다.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 20절을 봅시다. “바다의 고기들과 공중의 새들과 들의 짐승들과 땅에 기는 모든 벌레와 지면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내 앞에서 떨 것이며 모든 산이 무너지며 절벽이 떨어지며 모든 성벽이 땅에 무너지리라.”라고 되어 있거든요. 여기 보면 고기, 새, 짐승, 벌레, 이것은 바로 천지창조의 제 4일째부터 있었던 것들로서 땅에서 움직이는 유기체들이에요. 피조물들이지요. 그 다음에 절벽과 성벽, 우리는 이것을 한꺼번에 다 원 속에 넣어봅시다. 이것이 대자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공격하게 해서 대자연의 큰 변화와 변동이 일어나도록 유발시켰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뭐냐? 어렵게 하지 않고 쉽게 가겠습니다. 피부에 피부암이라든지 검은 반점이 있으면 께름칙하잖아요. 다른 곳은 하얀데 가슴에 검은 점이 있다든지 아니면 어깨에 점이 있다든지. 그걸로 잃어버린 자기 딸을 찾는다는 그런 이야기도 있어요. 청담동스캔들이라고 있는데. 뭔가 반점이 있다는 것은 다른 것은 멀쩡한데 그게 문제가 되는 거지요. 주님께서는 여호와를 아는데 어떻게 아느냐 하면, 여호와는 전능하시고 자비하시고, 그렇게 아는 것이 아니고 이 대자연속에 피부암 같은, 어떻게 손댈 수 없는 불길한 장소를 만들어내요.
대자연이 뭔가 평화롭고 차분하면 괜찮은데 대자연이 어떤 대자연이냐 하면 뭔가 수상한, 낌새가 수상해요. 거기에 마귀가 작용하는 것 같아. 작용하는 그 마귀가 가만있으면 평화로운데 그 마귀의 앞잡이가 뭔가는 활동을 하면서 본성적으로 어딜 가는가를 보면, N이 S극을 찾듯이 또 S극이 N극을 찾듯이 이스라엘을 향하여 슬금슬금 다가와서 그걸 집어 삼키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생각하기를 ‘이스라엘 불쌍해라. 당하기만 하는구나.’ 이렇게 생각하겠지요. 그게 아니에요. 지금 북방의 나라가 스멀스멀 다가와서 이스라엘을 이유도 모른 체 무조건 공격을 하지요.
공격을 하는 동시에 이스라엘 내부에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하면, 우상을 섬기게 되는 겁니다. 우상을 섬겨요. 이렇게 보면 돼요. 이스라엘의 존재의미가 뭐냐? 이스라엘은 유일하게 숨어 있는 하나님과 내통하는 연결고리가 이스라엘입니다 그걸 어려운 말로 언약이라, 하나님의 약속이라, 이스라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으로 된 거예요. 언약이라는 말만 하면 다 골치 아프다고 하니 그 말은 빼버리고 어쨌든 간에 하늘과 땅이 유일하게 연결되어 있는 거예요. 유일하게 연결되어 있는 장소가 우상을 섬기게 되는 겁니다.
우상을 섬기게 되는데 하나님께서는 숨어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안보여요. 안 보이는데 언약의 백성이 언약을 위반할 때 어떤 조짐이 일어나는 겁니다. 다른 민족은 언약을 섬기든 부처를 섬기든 가만 놔둬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뭔가 여호와 말고 다른 신을 섬기게 되면 거기서 무슨 문제가 생겨버려요. 문제가 생기면 그 문제의 벌칙이 너무너무 심해요. 에스겔 5장에 보면, 심지어 어떤 벌을 내리냐 하면, “아들이 아비를 먹고 아비가 그 아들을 먹으리라.”(겔 5:10) 이런 참혹한 지경이 됩니다. 그 이유가 뭐냐, “내 성소를 더럽혔기 때문에.”(겔 5:11)
이스라엘이 마냥 평화로울 수가 없어요. 이스라엘 역사가 전쟁과 깨어지는 역사가 대부분입니다. 그 이스라엘 속에 뭐가 있는가? 이스라엘이 품고 있는 하나님의 성소가 있어요. 신약에 우리 성도를 하나님의 성전이라 하잖아요. 그 성전, 성소가 이스라엘 내에 있습니다. 뭔가 하나님 말고 다른 신을 섬기게 되면 조짐이 이상해요. 뭔가 틀어져요. 틀어지면서 갑자기 주변에 있는 이방나라, 이방민족들이 이스라엘을 기다렸다는 듯이 침범해서 엉망을 만들어버려요. 완전히 파괴시켜 버립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너희들이 내가 여호와인줄 알리라.”라고 되어 있어요. 여호와인줄 안다고 할 때 여호와는 키가 몇 센티고, 이런 것을 아는 것이 아니고 어떤 일을 벌이시는 거예요. 그 일을 체험하게 되고 경험하면서 여호와인줄 알게 되어 있습니다. 방금 제가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기면 하나님께서 가만두지 않고 벌을 내린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이스라엘만 하나님을 알아요. 그런데 에스겔은 뭐냐?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후이기 때문에 이제는 여호와를 알아야 될 대상이 이스라엘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온 우주로 번지는 겁니다. 온 우주로 번지면서 지구상에 있는 모든 사람뿐만 아니고 모든 동식물, 모든 대자연이 다 여호와를 알아야 되는 거예요.
그 여호와를 알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배치한 나라가 뭐냐? 이스라엘나라를 배치한 겁니다. 그리고 북쪽에 곡이라는 나라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곡한테는 너희들이 이스라엘을 치라고 이야기하고 이스라엘 내부에서는 너희들이 우상을 섬겼으니까 이방민족한테 침을 받고 얻어맞을 것이라고 해서 이 평화로운 세상, 그냥 봄여름가을겨울 모든 것이 평화롭다고 생각하는 이 세상에서 불길한 조짐이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이스라엘과 다른 민족 간의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벌어지는 겁니다.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이 바로 구약성경이에요.
그런데 성경은 구약만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신약성경까지 있습니다. 옛날에 곡이라는 북방 나라가 이스라엘을 쳤다면 오늘날은 어떤 시대인가 하면 구약시대가 아니고 새 언약 시대거든요. 새 언약 시대에서는 옛날 구약적인 방식이 새 언약이라는 틀 속에서 또 다시 반복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곡은 어느 나라를 말하느냐 하는 거지요. 새 언약이 없고 옛 언약만 있다면 지금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모든 이야기는 지금 현재 팔레스타인지방에 있는 이스라엘나라 중심으로 해석을 해도 옳을 거예요.
지진이나 태풍이나 자연재해 같은 현상들을 가지고 교회가 타락하면 난리가 일어난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 666이 어떻고 바코드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 마트에서 물건도 못산다는 등의 해석이 옳을 거예요. 그러나 새 언약시대에서는 교회가 잘못되어서 벌을 내린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그 모든 것이 마귀가 내린 해석이 되는 겁니다. 이 새 언약시대에는. 천년 후 천년 전 대 환란, 이 모든 것이 마귀가 내린 해석이 돼요. 예수 그리스도의 새 언약 적이 아니고 구약 적으로. 왜 그런가 하면 그들은 여호와를 알려고 애를 썼고 여호와를 핑계대고 자기가 어떻게 하면 이 마지막 때 살아남느냐가 문제였거든요.
그런데 설교 처음에 제가 뭐라고 했던가요? 살아남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 자체가 우리가 성경을 왜곡하고 잘못했기 때문에 ‘내가 이 마지막 때에 어떻게 살아남아서 천년왕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 이런 아이디어를 가지고 성경 보는 그 자체가 마귀가 알려준, 악령이 알려준 해석이 되는 겁니다. 새 언약시대에 곡은 바로 우리자신들이 돼야 돼요. 예수님 빼놓고는 전부 다 모든 인간들이 예수님을 대적하는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만이 이스라엘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이 세상 아픔을 통해서 상처를 입은 겁니다. 상처를 입고 상처를 품은 채 하늘나라로 올라가신 겁니다. 유일하게 하나님의 약속대로, 옛날 약속인 아브라함이나 이삭 말고 새 언약에 입각해서 유일하게 상처를 받으신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구한테 상처 받았는가? 바로 이스라엘한테 상처받은 거예요. 예수님이 대자연의 중심이었습니다. 옛날에는 이스라엘이 대자연의 중심이었다면 그 이스라엘이 이제는 예수님을 상처내고 예수님을 죽게 만든 불길한 악마의 앞잡이로 그들은 작용한 거예요.
예수님의 열 두 제자중 하나인 베드로가 하는 말이 “예수님, 그리 마옵소서.” 할 때 예수님이 베드로 보고 하는 말이 “사탄아 물러가라. 네가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사탄아, 물러가라. 네가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까가 관심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 설교의 핵심은 뭐냐? 옛날에는 “여호와가 누구냐?” 인데 지금은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주여, 누구십니까?”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다.” 사도바울은 “주님이 누구십니까?” 하는 거예요. “주님이 누구십니까?” 주님이 누구시기에, 건질 자만 건지고 안 건질 자는 안 건지는 권한이 어떻게 주님에게만 있습니까?
예수님은 우리가 잘살든 못살든 우리가 인생이 어떻게 꼬이든 말든 상관없이 주님을 주님으로, “십자가에서 네 죄를 위해 죽은 이가 바로 나다.”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주께서는 그러한 상황과 환경을 그동안 유발시켜 온 겁니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우리는 더욱더 감사할 것밖에 없어요. 작은 일에 감사하세요. 그러면 부자 되어도 얻을 수 없는 행복을 또 다시 느낍니다. 세상을 볼 때 예수 없는 사람은 저주받은 사람이에요. 변호사니 의사니 잘 살아도 예수 없는 곳에는 저주가 함께 있다 했습니다. 그걸 그렇게 부러워해서는 안 되지요.
우리교회 어떤 분이 질문했잖아요. 영업사원인데 자기 공로를 빼앗아갔다고, 그래서 약이 오른다고. 그래서 제가 답변했지요. 개가 사료 챙길 때 그 사료 먹는 것을 그렇게 부러워하느냐고. 같이 개 될 것 같으면 모르지만. 우리가 같이 개 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이왕 개인데 이 개 같은 우리가 예수님을 알았다면 하나님께서 그것이 바로 성도라고 불러주십니다. 주께서 이스라엘을 새롭게 만들어내기 위해서 그때는 여호와지만 지금은 “내가 누구냐?” 하고 예수님을 제대로 알려주시는 거기에 대해서 세상 모든 것이 주님 중심인 것을 믿는다면 그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옛날에 곡이 이스라엘을 무슨 의도로 쳤는지 모르겠지만 오늘날 우리는 아무 이유도 없이 징징대면서 주님을 원망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그 모든 것이 예수님이 어떤 분이고 얼마나 큰 사랑을 베풀었는지를 그 쪽으로 우리관심이 갈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