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분류(겔39;1-8) 이근호 141210

아빠와 함께 2014. 12. 17. 08:50
2014-12-10 20:51:31조회 : 121
분류 141210 이름 : 이근호

분류(에스겔 3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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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 류

2014년 12월 10일 본문 말씀: 에스겔 39:1-8

(39:1) 그러므로 인자야 너는 곡을 쳐서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로스와 메섹과 두발 왕 곡아 내가 너를 대적하여

(39:2) 너를 돌이켜서 이끌고 먼 북방에서부터 나와서 이스라엘 산 위에 이르러

(39:3) 네 활을 쳐서 네 왼손에서 떨어뜨리고 네 살을 네 오른손에서 떨어뜨리리니

(39:4) 너와 네 모든 떼와 너와 함께한 백성이 다 이스라엘 산에 엎드러지리라 내가 너를 각종 움키는 새와 들짐승에게 붙여 먹게 하리니

(39:5) 네가 빈들에 엎드러지리라 이는 내가 말하였음이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39:6) 내가 또 불을 마곡과 및 섬에 평안히 거하는 자에게 내리리니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39:7) 내가 내 거룩한 이름을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알게 하여 다시는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지 않게 하리니 열국이 나를 여호와 곧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인 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39:8)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볼지어다 그 일이 이르고 이루리니 내가 말한 그 날이 이 날이니라

예언의 최종 양상은 분류에 있습니다. 양과 염소와의 분류입니다. 만약에 예언이 없다면 분류될 일도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해하는 세상에는 콘크리트처럼 모두 하나의 성질로 단단하게 자리잡고 있다고 여깁니다. 그것은 과거로부터 현재를 이해하니까 그런 것입니다. 보다 기반이 안정되게 만들어놓은 작업에 온 인류들이 매달려서 열중했습니다.

따라서 사람 대 사람 사이에서 영원히 갈라질 것이라는 생각은 도저히 할 수가 없습니다. 갈라져도 다시 생각을 하나로 통하면 연합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로 이런 인간들의 성질로 인해 예언을 항상 인간 세상에서 무시당하고 배격 당하게 됩니다. 심지어 이스라엘 내부에서도 이런 현상이 일어납니다.

자기네들이 일방적으로 예언을 해석해놓고 그 해석해놓은 내용을 가지고 자체적으로 분류를 감행한 자들이 바로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마치 창세전에 하나님과 예수님만이 알고 있던 그 내용을 자기네들도 안다는 식으로 말씀을 풀이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언에 관해서 인간은 개입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과거로부터 현재를 거쳐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으로 세상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에게 있어 예언이란 이미 '확정'된 내용입니다. 잠언 16:33에 보면, "사람이 제비를 뽑지만 일의 작정은 여호와에게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제비를 뽑을 때 그 누구의 눈에도 그의 곁에 서서 하나님이 작업하신다는 모습이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 사람들의 결정은 결코 하나님의 작정하심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가 없습니다. 이는 인간들은 최종 분류에 자신들이 관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미래를 모릅니다. 이는 곧 최종 확정을 자기 것으로 당연히 가져 갈 수 없다는 말이 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부지런하게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예언된 입장에서 이런 노력에 어떤 의미를 붙일 수가 있을까요? 야고보서 4:13-17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즉 인간이 하고자 하는 모든 하나님의 예언에 의해서 최종 판정받게 되는 것입니다. 본인이 알아서 본인에게 판정내리는 것은 반칙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문제를 내고 답을 단다면 지옥 갈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상황에 대해서 인간들이 어떻게 대처하든지 그것은 틀린 답을 내어놓을 뿐입니다.

따라서 구원, 곧 구출의 의미가 비로소 예수님에 의해서만 의미가 성립합니다. 구출이란 스스로 탈출이 안되는 대상에 대해서만 의미가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건져냄을 당해야 구원되는 겁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을 죄인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죄인들이 하나님의 예언을 지켜서 구원되지 않게 하셨습니다.

천국이란 인간들이 개인별 솜씨를 자랑하는 데가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의 구원과 죄용서의 솜씨만 높이는 곳입니다. “이 모든 것이 여호와의 작정하심입니다.”를 내용으로 하여 찬양하게 됩니다. 이런 고백의 전제에는 “그 어떤 경우라도 우리는 주님의 뜻을 알아차려서 그 뜻대로 순종해서 구원이 성사될 수가 없었습니다.”를 전제로 한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 7절에서, 곡에 대한 심판의 근거가 나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거룩한 본질에 입각해서 심판하신다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심판받는 곡은 하나님의 본질에 부합되지 않다는 말이 됩니다. 이는 곧 그 어느 시대든 상관없이 심판받아야 되는 이유는 단 한 가지, 곧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이 나타내는 속성에 부합되지 않을 경우라야 심판받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그 일관된 하나님의 속성은 무엇일까요? 옛적 처음 이스라엘이 애굽에 나와있을 때, 애굽의 바로왕과 주민들은 히브리인들을 학대했다는 인간적 관계 때문에 10가지 재앙을 맞은 것이 아니라, 히브리인들을 구출하려 오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무지했기에 10가지 재앙을 받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경우는, 이스라엘에 대해서 곡이 함부로 대들다가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에서 하나님의 심판이 어떤 상황으로 인하여 받게 됩니까? 이 말은 하나님의 본질이 오늘날에는 어떤 식으로 나타났느냐와 같은 말이 됩니다. 이 점을 알기 위해서는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께서 최후의 심판을 감행하시면서 심판받은 세상이 어떤 형편으로 집결되어 있는가를 보면 될 것입니다.

오늘날의 사정은 요한계시록 18장에 의하면, 하나로 통합되어 있습니다. ‘음녀 바벨론’입니다. 이는 곧 이 세상을 다양하게 자체적으로 나누어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직업상, 기능상 분류되어도 공통적으로 성격이 통일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모든 인간들이 마지막 때에는 장사꾼들의 생리로 살아간다는 점입니다.

농사짓는 것도 결코 이윤을 남기 위한 장사용입니다. 교사도 마찬가지요 성직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군인이나 정치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 자신의 노동을 대가로 돈으로 환산하여 평가하려고 합니다. 즉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예수님의 속성으로 평가받게 됩니다.

그렇다면 최종적으로 누가 구원될 자들입니까? 마음 속을 하나님의 속성으로 갈아치워서 반듯하게 살아가는 자들이 아니라 도리어 이 세상의 분위기 속에서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알아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죄씻음의 작업에만 모든 것을 걸고 사는 자들이 마지막 때의 이스라엘입니다. 왜냐하면 그들과 더불어 주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들을 건드리는 것은 옛적 출애굽 당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건드린 것으로 간주되어 심판받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미 예정되었다는 그 사항으로 인하여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이 죄로 판정됨을 십자가 앞에서 도리어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17강-에스겔 39장 1절-8절(분류)141210-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39장 1절-8절입니다. 구약성경 1212페이지입니다.



에스겔 39:1-8



“그러므로 인자야 너는 곡을 쳐서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로스와 메섹과 두발 왕 곡아 내가 너를 대적하여 너를 돌이켜서 이끌고 먼 북방에서부터 나와서 이스라엘 산 위에 이르러 네 활을 쳐서 네 왼손에서 떨어뜨리고 네 살을 네 오른손에서 떨어뜨리리니 너와 네 모든 떼와 너와 함께한 백성이 다 이스라엘 산 위에 엎드러지리라 내가 너를 각종 움키는 새와 들짐승에게 붙여 먹게 하리니 네가 빈들에 엎드러지리라 이는 내가 말하였음이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또 불을 마곡과 및 섬에 평안히 거하는 자에게 내리리니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내가 내 거룩한 이름을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알게 하여 다시는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지 않게 하리니 열국이 나를 여호와 곧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인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볼찌어다 그 일이 이르고 이루리니 내가 말한 그 날이 이 날이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처음 자신을 드러낼 때가 애굽에서 출애굽 할 때,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끄집어낼 때입니다. 그 때에 애굽나라가 곱게 히브리인들을, 이스라엘 백성을 내 준 것이 아니고 열 가지 재앙으로 얻어맞았지요. 이렇게 이스라엘 중심, 이스라엘이 없었으면 애굽나라가 하나님께 얻어맞는 일이 없었을 겁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이 있는 곳의 주변 나라가 다 얻어맞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있는 것이 골칫거리에요. 이스라엘 때문에 주변 나라가 얻어맞고 멸망 받는 사태가 벌어지는 겁니다. 학교에서 공부 잘 하는 애 하나 있으면 주변 애들이 다 욕 얻어먹는 것처럼.



꼬박꼬박 숙제 다 해오는 애 하나 때문에 농땡이 부리는 애들이 회초리로 손바닥을 맞지요. 하나님께서 직접 키우시는 닭, 짐승들, 강아지 때문에 주변의 마귀가 키우는 강아지들이 다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없었으면 아주 조용하고 아주 고요하게, 이스라엘이 없었으면 서로 인간들끼리 평화롭게 살면 되는 세상인데 이 말썽꾸러기 이스라엘이 등장해서 그 때부터 균열이 일어나는 겁니다. 금이 갈라지지요. 롯데월드의 수족관에 금이 갈라지는 것처럼 이제는 금이 갈라지는 겁니다.



그걸 분류라고 하지요. 갈라진다. 구분 짓는다. 성경은 콘크리트같이 단단한 세상에 균열을 야기 시키는 책입니다. 균열을 야기 시키는 내용의 책이 바로 성경책인데 균열되려면 징을 박아 넣어야 되잖아요. 그 징 역할을 하는 것이 뭐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에요. 아브라함에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아브라함에게 저주를 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는 이야기, 이 이야기가 바로 아브라함을 어떻게 생각하고 아브라함의 후손되는 나라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은 양이냐 염소냐, 어느 쪽인지가 분류가 된다는 겁니다.



이제 12월이 되면 망년회도 있을 것이고 연말정산도 해야 하고 한 해를 마무리 한다고 상당히 바쁩니다. 그들에게는 아브라함이니 이삭이니 그것이 별로 의미 있게 다가오지를 않습니다. 12월 말이 되어서 크리스마스 지나고 연말에 망년회 하고 내년 준비하면 그만이니까요. 그들에게는 분류라는 것이 없습니다. 균열도 없습니다. “누가 감히 우리를 분류해? 누가 감히 우리를 쪼개?” 세상은 바로 그런 겁니다. 오늘 본문 1절에 보면, “그러므로 인자야 너는 곡을 쳐서”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예언하여 이르기를”라고 되어 있는데 우리가 이 시간에 예언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나타나며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가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난번에 숙제를 내드린 적이 있습니다. 가실 때 달력에서 감람산 눈 내리는 장면을 보시라고 했지요. 분명히 감람산에 눈이 와 있어요. 지금도 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감람산이란 예루살렘 서쪽에 있는 감람산에 눈이 왔습니다. 그런데 스가랴 14장 4절에 보니까 메시아가 두 발로 감람산에 선다고 했습니다. 감람산에 눈 내리는 것이 눈에 보이지요. 시각적으로 눈에 보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메시아가 감람산에 두 발로 서신 것을 보게 되는 경우라면 비로소 예언이 완성되느냐, 하는 그 문제가 발생되지요.



감람산에 눈이 온 것을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다. “아, 감람산에 눈 왔다. 너 봤지? 나도 봤어.” 그러면 감람산에 눈이 온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스가랴 14장 4절에, 메시아가 와서 감람산에 두 발로 선다는 그것을 너도 보고 나도 볼 때 비로소 메시아를 알아보느냐 하는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한 주 지났다고 해서 다 잊어버렸지요? 감람산에 눈에 온다면 그 눈은 산에 결합이 돼요. 그런데 메시아는 이 천지를 만드신 분인 동시에 이 세상을 멸망시키는 분입니다. 이게 결합이 안돼요. 한쪽이 불바다 되어버리는 겁니다.



산이라는 것은 땅이거든요. 땅에 눈 내리면 그대로 있어요. 그런데 메시아가 오게 되면 메시아를 감당할 수 있는 땅이라든지 어떤 환경이라든지 공간이나 시간은 없습니다. 감당할 수가 없어요. 다 없애버리지요. 불로 다 타버립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메시아가 온다 싶어서 감람산에다 CCTV 달아놓고 메시아가 언제쯤 오시는가 하고 그것 쳐다봐도 그것은 예언의 완성이 아닙니다. 산에 눈이 오는 것을 보는 것처럼 내가 눈으로 목격할 수 있는 메시아를 만나겠다는 그런 식이 바로 문자적 해석이라고 했고, 그것을 이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했고 오늘날 소위 요한계시록을 들먹이면서 하는, 전 천년주의나 후 천년주의류의 세대주의적해석법이라 해서 요한계시록을 글자 그대로 보겠다는 구천지인지 신천지인지 그 동네죠, 그런 식으로 해석을 하면서 사람들은 믿고자 하는 거예요.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분명히 사도바울이 전한 복음에는 십자가라고 언급을 했고 십자가는 사람의 지혜와 똑똑함으로 파악이 안 된다고 했어요. 그러면 감람산에 두 발로 서는 것, 감람산에 눈 오는 것은 십자가를 거론할 필요도 없고 들먹일 필요도 없잖아요. 그냥 시력만 좋으면 다 본다는 말이지요. 예수님이 감람산에서 산책하고 있으면 그거 보는 것은 십자가의영이 필요 없잖아요. 두 눈만 있으면 다 볼 수 있잖아요. “실례지만 누구십니까? 예수님이십니까?” “내가 예수다.” “야, 예수님 오셨다.” 얼마나 쉽습니까?



시력 좋은 제자들, 그것도 한 명이 아니고 열 두 명이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녔지만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시력이 나빠서가 아니에요. 예수님에 대한 내용, 예언의 내용을 감당할 수 있는 그릇이 되지를 못했던 겁니다. 하나님의 예언을 감당하려면 수용할 만한 그릇으로 우리 자신이 바뀌어져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바꿀 수가 없어요. 그것은 인간 속에 메시아와 예언을 거부하는 요소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게 마귀 때문에 그런 것인데 악마의 지배를 받고 난 뒤에 공중권세 잡은 자의 영, 또는 불순종의 영, 에베소서 2장 1절 이하에 나온 것처럼 불순종의 영을 받았기 때문에 내가 눈으로 확인하고 손으로 만지는 식, 내가 납득이 되는 식으로 해서 메시아를 얻고자 하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촉이 좋다고 하지요. 사람들이 촉이 발달해서 그 예민한 촉가지고 메시아를 점검하겠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문제가 생기느냐 하면, 분류작업에서 본인이 분류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고 분류하는 심사위원 자리에 앉아버려요. 이것은 말이 안 되지요? “하나님, 제가 저를 심사하겠습니다.” 이것밖에 안되잖아요. 수능 치는데 자기가 문제 내고 자기가 풀고. 수학 B, 3+5=8, “너무 쉬워.” 자기가 문제 냈으니까 다 정답이지요. ‘주의 말씀을 어떻게 지킬까?’ ‘옳지. 내가 이 말씀을 지켰다, 혹은 안 지켰다는 이것을 내가 문제내서 내가 실천함으로서 내가 지킨 것으로 하겠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안식일을 지켜라. 열 한 시에 예배참석, 안식일 지킨 것. 자기가 문제를 내는 거예요. 자기가 문제 내니까 열 한 시에 예배 참석해 놓고 안식일 지켰다는 겁니다. 아, 참! 그렇게 편리하고 쉬운 게 어디 있어요? 그게 바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자기들만, 자기들같이 한가한 사람만 실천하고 바빠서 못하는 사람들은 말씀도 안 지키는 개 같은 사람이라고 욕을 했던, 나름대로의 분류를 했던 그 작업들을 예수님 당시에 했던 겁니다.



그래서 이 예언의 문제가 처리되지 않으면 그 뒤에 나오는 2절, 3절, 4절의 내용에 대해서 제가 설명을 해도 잘 납득이 안 될 겁니다. 그래서 예언의 문제를 푸는데 있어서 인간은 어떻게 하나님의 예언에 대해서 어떤 자세를 취하게 되는지를 말씀을 통해서 먼저 언급을 해 드리겠습니다. 잠언서 16장 33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와요. “사람이 제비를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제가 어려운 말을 안 한 것 같은데 사실은 제일 어려운 말이지요. “사람이 제비를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사람이 두뇌에 의해서 근육을 움직여서 제비를 뽑아요. 눈 감고 하나를 뽑는데 누가 뽑았는가? 주체문제지요. 내 손가락, 내가 뽑았는데, 내가 뽑아서 “자 뽑았습니다.” 하니까 사람들이 “네가 뽑았구나.” 라고 해요. “예, 뽑기는 내가 뽑았는데 이 뽑힌 것은 내가 아니고 하나님이 하셨습니다.”라고 했을 때 그 뽑는 작업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거기에 하나님이 안 보입니다. 하나님이 보이지를 않아요. 이 말을, “사람이 제비를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이 말을 ……, 어렵게 안 하려고 했는데 또 어렵게 되어버렸는데.



뽑아 보니 하얀 공이 나왔어요. 하얀 공이 나왔는데 “내가 뽑아서 하얀 공이 나왔다.” 하는 이 말을 인간을 주체로 하게 된다면 “내가 하얀 공을 잡았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나는 까만 공이 아니고 하얀 공을 잡아냈다.” 그렇게 하는데 성경말씀대로 하게 되면 이렇게 돼요. 하나님께서 하얀 공이 나오도록 이미 예정하사 나로 하여금 아무리 까만 공을 집으려고 해도 갑자기 손이 떨리고 까만 공에 전류가 흐르면서 못 쥐게 되고 그래서 하얀 공을 쥔 셈이 되는 겁니다. 이게 예언이에요. 이게 예언이라고.



예언이라 하는 것은 과거부터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확정된 미래부터 거꾸로 되찾아가서 과거와 현재를 설명해주는 것이 예언입니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 작정될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의 예언 속에는 누가 빠져야 되느냐 하면, “내가 작심하고, 내가 작정했습니다.” 하는 그 입을 쳐야 돼요. 그것은 성립이 안돼요. 비슷한 예인데 ‘제비는 우리가 뽑아도 작정은 여호와께 있다’는 말씀을 방금 봤지요? 이것과 비슷한 이야기가 야고보서 4장에 나오는데 여러분이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야고보서 4장 13절에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아까 잠언서 16장 33절에서는 “우리가 제비를 뽑으나”라고 했는데 그 ‘제비를 뽑으나’라는 말을 약간 늘어뜨린 것이 뭐냐 하면, 우리가 어느 도시에 가서 일 년을 유하면서 장사해서 이를 보겠다는 그 말과 같은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성경은 시비를 거는 겁니다. 네가 그렇게 하는 것은 예언에 부합하지 않는 소리라는 거예요. 그런 말은 하나님의 예언을 도외시하고 하나님의 예언을 감안하지 않은 상태에서 나온 이야기라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의 예언을 끄집어 당기면 어떻게 되느냐? 아까 잠언서 16장 33절에서는 ‘제비는 뽑지만 작정은 하나님께 있습니다.’라는 고백을 내놓으면 되는 거지요. 그걸 현대식으로 말해서 “‘내가 아무 도시에 가서 장사해서 이득 보리라.’ 하는 마음을 먹더라도 살고 죽는 것은 주님 손에 달렸지 그렇게 마음먹는 자체가 하나님의 예언을 삭제한 채 이야기했기 때문에 그것은 죄가 됩니다.”라는 고백을 해야 되지요. 문장이 많이 길어져버리지요. 그걸 줄이면 “제비는 우리가 뽑지만 일을 작정하기는 하나님께 있다.” 간단한 문장인데 실생활에 가서 적용하려 하니 이야기가 굉장히 길어지는 거예요.



갑자기 화장실에 가고 싶어서 ‘갔다가 다시 와서 공부해야지’라는 생각조차도 주의 허락이 있어야 된다는 것을 언급하지 않으면 이것은 죄가 되는 거지요. 그래서 죄가 안 되려면 말이 길어져요. 죄가 안 되려면 이야기가 너무 길어져요. 코미디에서 양반 인사하는 것과 똑같은 식이에요. 양반들 인사하는데 30분 걸리는 거예요. 그런 코미디 프로, <웃으면 복이 와요>라는 것이 있었어요.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이제 예언에 대한 언급이 나왔는데 예언이란 뭐냐? 우리의 죄를 고발하는 것이 예언이에요. 간단한 거예요. 우리는 미래를 몰라요. 우리가 아는 것은 과거의 내 자랑거리를 끄집어내는 것, 우리의 24시간이 어떻게 하면 나를 남에게 과시하는 그 자랑을 누적하고 실천에 옮길 것인가, 어떻게 내가 남에게 할 자랑거리를 만들어낼 것인가, 여기에 몰입하면서 살아갑니다. 미래는 누가 아느냐? 미래는 주님만 아시니까. 주님만 아시는 그걸 예언이라 했거든요. 그 주님만 아시는 예언을 우리와 결합을 해버리면 미래를 모른다는 이유 때문에 졸지에 우리는 죄인이 되는 겁니다.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고 모르기 때문에 죄일 수밖에 없는 거예요. 따라서 이러한 말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만들어내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만들어내시기 때문에 구원, 구출이라는 말이 예언에 포함이 될 수가 있어요. 하나님이 죄를 만들지 아니하면 우리는 착한 사람으로서 자기가 주체가 되어서 자기를 구원하는 종교적인 방식 외에는 할 줄을 몰라요. “내가 선택하는 것은, 내가 제비를 뽑는 것은 나지만 결과도 내가 책임지겠습니다.”라는 식으로 구원되지를 않아요. 제비를 내가 뽑지만 작정은 하나님께 있다는 고백이 될 때 이게 하나님의 구원이 되는 겁니다. 제비를 뽑는 이 죄에 대해서 작정은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그 의가 덮쳐야 우리가 의인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막 살아라, 하는 말을 달리 이야기하게 되면 ‘범사에 늘 감사하라’는 이야기에요. 감사하면서 사세요, 라는 말을 해야 되는데 그 말을 하니까 사람들이 감사하는 행함을 해요. 감사하는 행함을 하니까, ‘오늘 3시부터 4시까지 감사하기. 십분 쉬고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감사하기.’ 이렇게 되니 감사 자체가 자기가 제비를 뽑는 식밖에 안돼요. 그래서 차라리 막 살아버려라. 막살게 되면 영에 속한 사람은 감사가 나올 것이고 막 사는데 육에 속한 사람은 막 사는 것으로 끝나고.



시작은 막 사는데 끝은 감사로 나오면 영에 속한 사람이고 시작은 막 사는 것이 시작이지만 끝도 역시 막 사는 것으로 나온다면 이것이 육에 속한 사람이고. 이것이 예언적인 분류법이에요. “당신은 왜 막 살라고 하느냐? 그러니까 우리가 막 살지 않느냐?”라고 하는 사람을 들추어내기 위해서 그렇지요. 그 이야기가 듣고 싶은 거예요. 목사 당신이 막 살라고 해서 우리가 막 살았습니다. “막살아보니 감사가 나온다.”는 이야기는 이것은 제 소관이 아니고 주님소관이고 “막 사니까 막 살게 되네요.” 이것은 막 살다가, 막 살다가 나중에 그냥 지옥에 가시면 되겠네요.



늘 예언은 분류용이고 늘 분류하십니다. 그러면 이 분류에서 인간은 죄인이 될 수밖에 없고 인간은 그 예언에 참여할 수가 없어요. 예언에 참여하는 것은 성부와 성자만의 고유권한이고 이것은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 간에 속닥속닥 두 분만이 알았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컨닝 해서 그 내용을 알아챌 수가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죄를 유발시키기 위해서 선악과를 심어놓았고 아담이 에덴동산에 있으면서 5일째 안 따먹어도 6일째는 따먹게 되어 있어요. 이것은 육천만년이 지나도 육천만 일 년이 지나면 그 다음에 따먹게 되어 있어요.



선악과가 있는 한 아무리 세월이 지나고 아무리 그동안 오래 참았어도 참는 세월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 교인들은 해당사항이 없습니다만 보통 연 초가 되면 술을 끊는다, 담배를 끊는다고 하잖아요. ‘내년에는 술도 안마시고 담배도 안 피워야지’ 했는데 6월까지 담배를 안 피우다가 7월 달 되어서 피웠다면 그 앞에 지킨 것은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휴, 담배가 왜 이렇게 맛있지?” 이렇게 돼요. 아무 소용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이 에스겔 39장의 예언을 하면서 먼저 언급하고 싶은 것은 예언의 내용에 인간은 개입할 수 없다, 인간은 알 수 없다, 인간은 따로 논다는 겁니다. 따로 노는 거예요.



인간은 따로 놀거든요. 인간은 따로 논다는 이것부터 상당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인간이 따로 논다고 할 때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대표자가 있어요. 거기에 등장하는 대표자가 로스와 메섹과 두발 왕 곡입니다. 갑자기 제가 설교를 천천히 하는 이유는 동영상 문제 때문에 기다린다고 천천히 하고 있으니 이해해 주세요. 또 너무 천천히 하면 지금 앞에서 듣는 분들 때문에 더 못 기다리겠는데 에스겔 오늘 본문 내용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예언을 하는데 그 예언에 곡이라는 왕, 로스와 메섹과 두발지역을 관장하는 왕이거든요. 그 왕에 대해서 예언을 한 겁니다. 그 왕과 마주치는 하나님 쪽에 서 있는 나라가 있어요. 2절에 보면 그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성경 보면서 이해할 것은 하나님의 예언에 대해서 구성할 때는 이미 미래에 확정적으로 분류를, 양과 염소를 분류를 하잖아요.



한 번 정리해봅시다. 제가 아까 하나님이 예언할 때는 아버지와 아들만 아는 내용이 따로 있다고 했지요. 이미 작정된 것이 있지요. 그 작정된 것을 하나님과 예수님만 알아요. 다른 사람은 몰라요. 모르는데 그 작정된 내용이 뭐냐? 분류입니다. 그 분류된 내용이 뭐냐? 이스라엘과 그 외의 나라로 분류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아브라함을 축복하면 복을 내리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면 저주받는다는 그 내용입니다. 그 분류된 상태의 내용을 에스겔 39장에 씌웠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이걸 전달합니다.



전달할 때 우리는 미래에 확정된 것을 모르고 이 성경내용을 보게 돼요. 보게 되면 이 성경에 맞추어서 우리가 처음부터 이스라엘 편에 서려고, 처음부터 이스라엘이라고 작정하고 이 성경을 보게 돼요. 그러면 성경해석이 잘못된 겁니다. 성경말씀이 나올 때 우리는 성경말씀을 이해할 수 있다는 그 자부심을 가지고 성경에 들이대기 때문에 성경해석과는 반대의 결론이 나와 버리는 겁니다. 성경을 지키기 때문에 갑자기 자기는 죄인이 아니고 잘난 사람이 되어버리고 말아요. 잘난 사람이 되어버리면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없이 본인이 해석을 잘해서 구원받는 셈이 되어버려요.



항상 그리스도가 빠져버리면, 주님의 공로가 빠져버리고 이런 사람들은 천국 가도 자기자랑밖에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그 사람은 천국에 못 들어갈 사람이에요. 반드시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때는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안에서 구원되기 때문에 “주님의 공로로 갑니다. 제가 잘나서 가는 것은 아닙니다.”라는 쪽으로 분류가 돼야 돼요. 구체적인 완성적 내용은 신약에 나오고 지금 우리는 구약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구약 속에서 무엇을 끄집어내느냐? 구약 속에서 예수님과 복음을 끄집어내는 해석만 하면 되는 거예요.



그러면 곡이라는 나쁜 왕, 부정적인 왕이 있고 이스라엘이 있다 합시다. 거기에 뭘 집어넣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집어넣는 겁니다. 집어넣게 되면 이 해석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를 우리가 생각해 봐야 되지요. 이 메섹과 두발과 로스의 왕이 어떻게 되느냐 하면, 3절과 4절과 5절을 보게 되면, “네 활을 쳐서 네 왼손에서 떨어뜨리고 네 살을 네 오른손에서 떨어뜨리리니 너와 네 모든 떼와 너와 함께한 백성이 다 이스라엘 산 위에 엎드러지리라 내가 너를 각종 움키는 새와 들짐승에게 붙여 먹게 하리니 네가 빈들에 엎드러지리라.” 이런 내용들이 나오지요.



이 내용은 한 마디로 말해서 벌 받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한테 대들다가 호되게 당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여기서 해석의 연결점을 찾은 거예요.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 이 본문 말고 앞에 있는 본문과 저 뒤쪽에 있는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 심판했는가를 찾아내면 되겠지요. 아까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출애굽 할 때는 애굽나라가 심판받았지요. 그 심판받는 이유가 뭐냐 하니까, 너희들이 히브리인들을 압박해서 심판받는 것이 아니고……, 이게 참 중요한 거예요.



애굽 사람들이 히브리인들을 압박해서 심판받는 것이 아니고 히브리인들을 찾아온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함과 속성을 부정하고 그 속성을 모독하니까 심판받는 거예요. 우리가 예수 믿는 어떤 사람을 미워한다고 심판받는 것이 아니고 그 예수 믿는 사람과 함께 있는 그리스도, 그 구원받는 사람과 함께 있는 주님을 모독하기 때문에 심판받는 거예요. 세리와 창기와 강도와 탕자를 무시하게 되면……, 물론 구원받는 세리, 구원받는 창녀를 두고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무시할 수밖에 없지요. 세리이고 창녀기 때문에 무시할 수밖에 없지요. 하지만 그들을 무시하게 되면 그들을 용서해주시고 그들을 씻어주신 예수님을 모독하게 되는 겁니다. 로마서 24장에 보면 형제를 함부로 모독하게 되면 그것은 구원받지 못한다고 되어 있어요. 아주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아주 간단하지요. 뭐냐?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을 알면 되겠네요?” 알면 되지요. 구약에서 보면 애굽에서 히브리인들이 노예생활을 하다가 학대를 했을 때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와 더불어 왔을 때 바로가 하는 말이, “여호와가 누군데?” 그랬거든요. “여호와가 누구냐?” 그렇게 되어 있어요. 여호와의 속성을 모독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우리가 옛날로 돌아가서 노예생활을 할까요? 채찍에 얻어맞고 아파할까요? 그것은 이미 지나간 방법이고 요한계시록에 나온 신약적인 방법이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되는 방식이에요. 그러면 신약적인 방식이 뭐냐 하면, 그들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벌을 받는가, 그 벌 받는 방식이 있어요. 요한계시록 18장에 보니까 바벨론이 나오고 전 세계를 한 도성의 이름 바벨론으로 통일시켜 놓았습니다. 모든 세상이 바벨론이에요. 여기에 상인들이 나오고 금, 은, 보석, 진주, 세마포, 자주옷감, 비단, 붉은 옷을 무역해요.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 심판을 하는데 심판해야 될 대상이 하나의 속성으로 통일되어 있어요. 하나의 본질로 통일되어 있어요. 오늘 본문에서 7절에, “내가 내 거룩한 이름을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알게 하여.”라고 되어 있거든요.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모독했기 때문에 벌 받는다고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 이름이 뭐냐? 속성이거든요. 하나님의 그 이름을 걸고 하나님의 속성을 펼쳐내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에 있어서 하나님이 속성이 뭐냐 하면, 그 속성이 뭐냐고 할 때 그 속성을 몰라요.



모르는데 벌 받는 쪽이 어떤 식으로 벌 받는가를 보면 알 수 있지요. 어떻게 벌 받는가 하면 모두가 상인들입니다. 상인들. 모든 인간은 전부 다 장사꾼들이에요. 판사는 법을 팔아먹는 장사꾼, 군인은 전쟁하는 장사꾼, 교사는 학생들 가르치는 장사꾼, 목사는 설교해서 가계 꾸려가는 장사꾼, 이 세상은 장사꾼들로 동질화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 마지막 때. 얼마나 물건 팔아서 이득을 남길 것인가에 모든 정신이 하나로 몰릴 때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 벌을 받는, 그 곡이라는 왕과 일치되는 속성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이 뭔지를 몰라요. 그것은 뭔지 모르지만 뭔가 치더라는 말이지요. 뭔가 심판을 해 버려요. 심판받는 쪽이 뭔가를 눈치 채서 ‘아,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은 이것과 정 반대되고 대비되는 것’임을 우리가 간파할 수가 있어요. 요한계시록 18장에서 모든 인간들이 한통속이 돼요. “목사님, 어떤 사람은 장사를 하지만 어떤 사람은 농사짓습니다.”라고 해버리면 요한계시록에서 ‘한 바벨론’이라는 자체가 의미가 없어요. 마지막 때는 이게 농사꾼인지 군인인지가 관계가 없어요. 목회자니 뭐니 관계없어요. 전부 다 장사하는 사람들이에요. 얼마나 많은 돈을 버느냐? 그게 인간의 가치를 결정하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 본질과 정 반대되는 본질이 있으면 되지요. 그러면 그 본질은 뭐냐? 예수님만이 갖고 있는 본질입니다. 우리도 그 본질을 가지면 되지 않느냐? 우리는 그 본질을 가질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미래를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에서 익숙한 이 장사, 교회를 나와도 이익만 생각하는 이런 속성을 가지고 그냥 앞당겨서 미래를 접하면서 그냥 죄인으로 들통 나면 되는 겁니다. 긴긴 이야기가 간단하게 끝나버렸지요? 주님의 본질과 속성을 본 받아서 우리도 변화되어서 새롭게 살면 된다는 그것이 아니고 그냥 노출하면 돼요.



왜냐하면 사람이라 하는 것은 뭔가 소유하려고 하는 겁니다. 소유, 괜찮은 것, 건전한 것, 고상한 것, 경건한 것, 자꾸 소유하려고 해요. 소유가 되어버리면 이것은 누가 구출해주는 것이 아니고 본인이 알아서 기어 나오는 것이 돼버려요. 이 세상에서 마귀가 있는 이상 아무리 노력해봤지 결국 이거 나옵니다. “하나님, 이만큼 노력했는데 한 달 수입이 이것밖에 안됩니까?” 그렇게 될 수밖에 없어요. 결국 그것으로 마감됩니다. “내가 이렇게 교회 충성 봉사했는데 집안 꼴이 왜 이렇게 정상이 아닙니까?” 반드시 장사 속을 표 내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작정까지 알면서 제비를 뽑았습니다. 그러니까 좋은 쪽으로 작정되어야 되지 않습니까?”라고 할 때, “네가 피고야 판사야? 네가 왜 너를 심판하지?” 여기 곡이라는 것이 등장하는 것은 사실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라고 보면 돼요. 예수님 빼놓고 모든 인간은 이 곡의 속성으로 살아갑니다. “행동에 대한 어떤 이득을 내다보면서 장사해서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네가 하나님의 뜻이면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한다. 네가 장사를 하기 위해서 일 년 유한다는 그런 것은 네가 할 소임이 아니고 지금 살아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을 증거 하기 위함”입니다.



착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주님만 착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나는 주님 앞에 오늘도 용서받고 은혜 받고 살아가는, 그냥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을 고백할 때 그 사람이 바로 분류된 사람, 이미 성도로 분류되고 확정된 성도인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곡이라는 왕이 벌을 받았습니다. 마지막 때 이 자본주의에 속한 모든 인간이 벌을 받습니다. 우리도 마땅히 벌을 받아야 되고 지옥가야 당연한데 십자가의 그 피의 용서로 말미암아 무조건적으로 용서를 받았사오니 이 용서가 늘 감사되게 되고 늘 탄복되게 되고 늘 고마워하는 십자가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