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하나님의 얼굴(겔39;21-24) 141231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5. 1. 16. 18:01

2014-12-31 20:41:35 조회 : 167         
   하나님의 얼굴 141231 이름 : 이근호   

하나님의 얼굴(에스겔 39: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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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4-12-31 21:21 
하나님의 얼굴

2014년 12월 31일                             본문 말씀: 에스겔 39:21-24

(39:21) 내가 내 영광을 열국 중에 나타내어 열국으로 나의 행한 심판과 내가 그 위에 나타낸 권능을 보게 하리니

(39:22) 그 날 이후에 이스라엘 족속은 나를 여호와 자기들의 하나님인 줄 알겠고

(39:23) 열국은 이스라엘 족속이 그 죄악으로 인하여 사로잡혀 갔던줄 알지라 그들이 내게 범죄하였으므로 내 얼굴을 그들에게 가리우고 그들을 그 대적의 손에 붙여 다 칼에 엎드러지게 하였으되

(39:24) 내가 그들의 더러움과 그들의 범죄한 대로 행하여 그들에게 내 얼굴을 가리웠었느니라

이름과 그 이름에 부합되는 인물의 실재 여부는 얼굴을 보이므로서 확인될 수 있습니다. 인간 사회에서 늘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만약에 얼굴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이름’만 있을 뿐인 허구요 망상의 산물이 될 수가 있습니다. 이름과 더불어 그 이름에 일치되는 존재의 등장은 참된 갖추어야 될 필수 조건처럼 여겨집니다.

세상의 모든 민족들의 종교는 신의 얼굴, 곧 신의 형상을 제작해놓고서 그 앞에서 엎드려 빕니다. 여기서 특정 장소에 강조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신의 형상의 원본은 곧 인간의 얼굴입니다. 인간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신을 극대화하기 위해 인간들 모습 가운데 가장 어질고 자비로운 성품을 뿜어나오도록 형상을 만듭니다.

이러한 작업을 행하면서 그들은 자신들의 이러한 행위가 전혀 죄악되고 더러운 짓이라는 것을 상상도 못할 것입니다. 최고 중의 최고의 가치와 품위와 존귀함을 다 담아서 신의 형상을 창안했기 때문에 그것보다 못한 인간 주제에 감히 비판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인간의 어진 마음과 어진 신의 형상 사이에 연결점을 깔아놓고 있습니다.

단절보다는 찾아갈 수 있게 만든 겁니다. 마치 기암절벽이 가득하고 신선들이나 기거할 것같은 이상향 초월적 세계도 실제로 자세히 살펴보면 사람들이 어떻게 하든 기어이 꼭대기까지 올라가 접수해버린 등산로가 실재하기 마련입니다. 즉 인간을 신을 믿는다는 것은 인간 본인의 건전함과 고상함과 거룩함의 발로입니다.

하지만 이런 이방민족들의 종교 경향과는 달리, 이스라엘에 있어 하나님의 이름과 합치되는 얼굴은 철저하게 죽음의 힘으로 나타납니다. 출애굽기 20:23-24에 보면, “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나 금으로나 너희를 위하여 신상을 만들지 말고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네 양과 소로 네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모든 곳에서 네게 임하여 복을 주리라”

하나님의 이름을 사람의 목소리로 낸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얼굴에서 나오는 그 영광의 빛의 관점으로 볼 때, 이 세상은 철저하게 어두움이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4-5)

즉 빛이 나타나지 않는 이상, 인간들은 자신들이 어두움이라고는 상상도 못합니다. 인간들의 자신의 건전성과 고귀함으로 신과 관계 맺을 것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하늘의 빛 앞에서는 그것이 도리어 악의 극한 상태입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자신을 최종 규정한 가치 환경을 본인들의 손으로 구축해놓고 그것을 자기들에게 덮어씌우면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천문학자들이 밤하늘을 만원경으로 관찰하면서, 이 푸른 빛 도는 지구야말로 가장 복된 행성이라고 자부할 것입니다. 바로 이런 태도를 유발시킨 인식의 환경이 바로 예수님 보시기에 ‘어두움’ 그 자체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 세상을 비추는 손전등으로 사용하시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에게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하셨고, 그 이름에 따라 얼굴 빛을 그들 쪽에서 비추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하나님의 얼굴 빛에서 나오는 그 빛이 닿인 그곳만이 제대로 된 빛이 작용하는 자리인 동시에 그 빛을 받은 그들만이, 자신들이 극한 어두움에 둘러싸인채 살아가고 있음을 감지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은 어느 인간도 직접 보면 죽습니다.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 33:20) 그러면서도 시내산 위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자신의 영광을 나타나신 것은 모세로 하여금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중보자적인 역할을 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모세는 산에게 내려오면 얼굴에 한량없는 영광이 서러있었습니다. 산 밑에 백성들이 모세의 얼굴을 곧바로 볼 수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모세는 자기 얼굴을 수건을 덮어씌워야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얼굴에서 나오는 그 영광의 빛의 반사가 모세의 얼굴마자 눈부시게 했습니다.

이로서 하나님의 이름은 중보자를 통해서 그 영광된 얼굴과 연결짓는 입장에 있게 됩니다. 즉 하나님에게 합당한 이름과 모세라는 대리인을 통해서 나타난 빛은 이 세상 전부가 어두움일자도 그 어두움 어느 장소에서는 빛이 손전등에서 나온 것처럼 비추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름을 부르는 장소는 곧 흠없는 제물이 백성의 죄로 인해 살해당해 피흘리는 곳입니다. 따라서 그것이 이 어두운 세상에서 유일하게 빛의 영광의 본질을 보여주는 지점은 흠없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양이 죽는 사건이 일어나는 곳입니다. 그 곳은 곧 ‘어두움의 극한 지점’이기도 합니다.

세상의 모든 신은 곧 인간들의 자기 잘남을 신의 이름을 빌려와서 자랑질하는 자리입니다. 이런 자기 잘남으로 인해 피해 입은 모습으로 최종 어두움의 극한을 보여주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사람들은 본인들이 어두움의 힘에 눌려 산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 어두운 힘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본인들의 그 악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지 못합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만나고 외칩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다” (사 6:5) 이사야는 바로 하나님의 얼굴 빛에서 나오는 거룩한 영광의 빛으로 인해 그 시대의 중보적인 사명을 떠맡게 됩니다. 자신이 얼마나 추한지를 알았기에 그는 세상의 그 어떤 이들의 만남이나 사태 앞에서 자유로웠습니다.

이것이 바로 빛의 증인의 모습이요 자녀의 모습입니다. 인간들은 자칭 자신을 아들로 여기도 자신의 가치에 맞는 식으로 신을 바꿔나갑니다. 하지만 참된 아들이신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영광은 ‘독생자의 영광’입니다.(요 1:18) 아버지로부터 도리어 버림받으셨고, 아버지가 내리치시는 저주의 무게로 인해 고통스러워서 일그러진 그 얼굴이 바로 이 땅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얼굴의 영광’입니다.

이는 곧 모든 인간의 신은 다 우상이다는 말입니다. 아들의 고난을 외면하고 멋있고 인자로운 아버지를 찾는 바로 그 작태가 곧 스스로 자기의 가치를 유지하려는 전형적인 우상숭배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극한 어두움으로 초대받음이 곧 영광의 나라의 백성되는 과정인 것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5-01-01 17:25 
119강-에스겔 39장 21절-24절(하나님의 얼굴)141231-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39장 21절-24절입니다. 구약성경 1214페이지입니다.



에스겔 39:21-24



“내가 내 영광을 열국 중에 나타내어 열국으로 나의 행한 심판과 내가 그 위에 나타낸 권능을 보게 하리니 그 날 이후에 이스라엘 족속은 나를 여호와 자기들의 하나님인줄 알겠고 열국은 이스라엘 족속이 그 죄악으로 인하여 사로잡혀 갔던줄 알찌라 그들이 내게 범죄하였으므로 내 얼굴을 그들에게 가리우고 그들을 그 대적의 손에 붙여 다 칼에 엎드러지게 하였으되 내가 그들의 더러움과 그들의 범죄한대로 행하여 그들에게 내 얼굴을 가리웠었느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하고 행했던 것이 사실은 우리 이방인의 입장에서는 남의 이야기처럼 들릴 겁니다. 우리 이야기가 아니고 옛날 이스라엘과 그들이 믿는 하나님과의 사적인 관계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 우리는 상관이 없고 우리가 몰라도 되는 남의 현실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느냐 하면, ‘얼굴을 그들에게 나타내지 않는다.’ 또는 ‘가리운다.’ 또는 반대로 ‘나타낸다.’는 이야기가 나와 있습니다. 얼굴을 나타낸다고 할 때 성경구절을 통해서 이것만 알고 있으면 돼요.



하나님의 얼굴에는 하나님의 숨겨진 자기 영광을 나타낸다고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나타낸다고 할 때 그 얼굴은 사실은 하나님 쪽에서 나타내게 되면 그것은 영광이 되지만 사람이 그 얼굴을 보고자 하는 것 ……, 사람들이 하나님 얼굴을 보겠다는 것은 과연 실존하는지, 현존하는 것인지, 그냥 막연하게 있다고 치고 불러보는 것인지, 실제로 눈으로 확인하는 식으로 그 얼굴을 봐야 안심이 되겠다는 겁니다. 그냥 전화로 외국에 있는 딸과 통화하는 것보다 얼굴을 보면서 하는 화상통화가 더 확실하잖아요.



그처럼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은 주셨는데 그 이름과 일치되는 그 현존하심, 존재하심을 확인할 때는 얼굴을 보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되면 인간은 반드시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출애굽기 33장 20절에서 하나님이 모세를 만났을 때 “내 얼굴을 보고 살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은 하나하나 설명하려면 굉장히 복잡한데요, 제가 간단간단하게 처리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본 자는 다 죽는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본 자는 다 죽는다면 하나님의 얼굴을 나타낸다면 결국 다 죽인다는 뜻인지, 그게 상당히 궁금하지요.



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그 얼굴을 나타낼 때에 그 얼굴과 함께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 하나님 쪽에서 자신의 얼굴에 있는 영광을 비추게 되면 그 때부터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얼굴은 못보고 다만 영광만 접하게 되는 방식을 그들은 받게 돼요.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는 못했지만 하나님과 함께 있던 모세의 얼굴은 볼 수 있어요.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이 반사된 그 얼굴을 가지고 산에서 내려오면서 모세는 수건 가지고 자기 얼굴을 덮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우리가 같은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평소에 산 밑에서 늘 봤던 저 얼굴이 뭔가 어딜 경유해서 다녀오니까 우리가 못 볼 얼굴로 돌변되어 있다. 그렇다면 하루하루 우리 이스라엘을 인도하기 위해서 기껏 중보자로서 내세운 모세의 영광이 그 정도라면 하나님의 영광은 상상도 못할 정도지요. 하나님의 얼굴을 대하면 죽는 것이 맞다는 거예요. 그러면 죽어야 되는데 왜 모세를 보냈느냐? 죽어야 되는 가운데서 살려내기 위해서 모세를 중보자로 보낸 겁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싶어서 인간들이 목각으로, 또는 돌로 형상화 시키는 모든 이방민족과의 차이성을 두는 거예요.



이방민족들은 하나님의 얼굴을 어떻게 묘사하는가 하면, 자기들 가운데, 같은 인간들 가운데 치킨 집 할아버지같이 생긴 분처럼 인자하신 분이라든지, 산타클로스처럼 수염 난 분이라든지, 금복주의 달마 얼굴, 그런 얼굴을 하나님 대체용으로 사람들은 사용합니다. 그런 얼굴은 인간이 감당할 수가 있어요. 인간이 하나님을 믿을 때 그 신의 현존, 얼굴이 있어야 된다는데 인간이 그런 식으로 신의 현존을 감지하면 그것도 신앙에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이렇게 생각하는데 여기서 하나님에 대한 근원적인 오해가 발생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자리를 건전하고 괜찮은 곳이라고 생각하고 그 자기 자리에서 신을 찾게 돼요. 그러면 지금 내 존재 자체로도 괜찮은 존재인데 게다가 하나님 믿고 예수님까지 믿으니까 얼마나 스스로 생각해도 대견스럽습니까? 나 같은 인간 천국 안 보내주면 천국 갈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장담하는 거지요. 그런데 뭘 바꿔야 돼요. 뭐냐 하면, 낯선 우주적 환경을 배경부터 바꿔야 돼요. 그 배경 바꾸는 것이 요한복음 1장 4절에 나옵니다. “빛이 왔으매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갈릴레이 같은 경우에 자기 안경의 유리를 뜯어서 망원경을 만들어서 목성의 행성이 두 개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거든요. 그 때부터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것을 알았는데 천문학자들이 망원경을 가지고 아무리 봐도 지구는 환한데 바깥은 어두워요. 우주에 그렇게 별들이 많은데도 어두운 이유는 우주가 팽창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빛보다 빠른 속도로 팽창하기 때문에 우주는 어두운 겁니다. 물리적인 상식에 속하는 겁니다. 하늘이 파랗게 보이는 것은 빛의 반사 때문에 그렇듯이.



망원경 가지고 우주를 보게 되면 지구만이 축복받은 장소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얼마나 자기중심적 사고방식입니까? ‘내가 건전하고 내가 훌륭하니까 훌륭한 내가 나처럼 훌륭한 하나님을 섬기겠다.’ 라는 것은 이방민족의 종교입니다. 그것은 다 엉터리에요. 요한복음에서 “지구에 속해 있는 네가 정말 빛이냐?” 그 말입니다. 빛이 아니고 그 자체가 어둡다는 겁니다. 진짜 빛이 등장해야 밝은 것이 아니고 진짜 어둡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거지요. 연말연시에 백화점에 한 번 가보세요. 얼마나 밝은지 몰라요.



모든 것을 다 갖춰놓은 백화점을 보고 세상이 어둡다고 한다면 그 사람이 바보 같아요. 롯데백화점에 가서 ‘왜 이렇게 어둡지?’ 그렇게 생각하겠습니까? 디오게네스라는 사람은 밝은 대낮에 등불을 들고 다니면서 “세상이 왜 이렇게 어둡지?” 하면서 세상 불의를 역설적으로 고발한 철학자입니다. 그런 사람도 있는데 주님 보시기에 이 세상은 어두움이에요. 그러면 주님 보시기에 우리가 광도가 몇 룩스가 되어야 밝은 거예요? 주님 보시기에 주님의 얼굴에 비추이지 않은 것은 다 어두움이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일종의 손전등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스라엘이 손전등이 되어서 이스라엘 속에 주님의 이름이 있고 얼굴이 있다면 비로소 세상은 제대로 어둡다는 것이 들통 나지요. 세상이 어둡다면 유일하게 어둡지 않은 곳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곳, 하나님의 얼굴을 드러내는 곳이고 유일하게 밝은 곳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볼 때 우리의 배경, 환경자체가 바뀌어져야 되기 때문에 우리는 ‘자기는 밝고 건전하고 자기의 마음은 환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하지 말고 일단 우리가 어두움이 뭔지 알아야 돼요. 어두움을 알고 빛을 바라보게 되면 우리가 전에 아는 것처럼, ‘이 세상은 어둡지만 나는 밝다.’는 그러한 망상은 버리게 돼요.



빛은 내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주님이 와서 비춰줘야 되는 겁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돌에 맞을 때 그 얼굴이 뭐와 같았냐 하면, 천사의 얼굴이 되었거든요. 돌이 날라 오는데 천사의 얼굴이 되었어요. 그걸 그대로 우리한테 적용시키면 얼굴이 천사의 얼굴이 되지 않으면 어두움에 속했다, 극단적으로 보면 그렇게 되지요. 그걸 민낯이라고 하는데 아침의 부스스한 얼굴, 이건 성령 안 받은 것이 돼요. 천사의 얼굴이 돼야 될 텐데 과도하게 메이크업을 하고 뭔가를 많이 할 때 비로소 천사의 얼굴이 된다면 그것 자체도 어두움의 작용이 아닐까요?



그래서 못생긴 여자라면 화장에 게을러서 못생겼다는 논리가 성립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우상을 섬겨서 하나님의 얼굴빛을 비추지 않는다는 거예요. 이스라엘에게 얼굴빛을 준다는 것은 사실은 우리에게 유일한 희망입니다. 세상적인 어두움 말고, 이 조명 불 끄는 어두움, 촛불도 꺼버린 그 어두움 말고 진짜 하나님 앞에서 어두움이 뭔가를 경험한다는 것은 진짜 하나님 앞에 빛이 뭔가를 경험하는 하나의 대비상태에 놓인다는 뜻이에요. 쉬운 예를 든다면 누가복음 2장에서 모든 세상이 캄캄한데 조명발이 밤중에 양을 치는 목자에게 비추니까 이 조명이 미 8군 헬기 조명이 아니고 정말 이상한 거예요.



얼마나 놀랐는지 엎드려서 죽은 자 같이 되었어요. 뿐만 아니고 마태복음 17장에 변화산에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예수님의 제자 중에 임원진들 세 명이 올라갔거든요. 회장 부회장 총무가 올라갔는데 그 때 갑자기 예수님 얼굴이 해같이 빛났는데 사실은 해보다 더 빛났겠지요. 엘리야도 마찬가지고 모세도 그렇고. 모세도 그렇고 엘리야도 그렇고 그렇게 인물이 좋았던 적이 없었거든요. 민낯이라도 얼굴이 그렇게 빛난 겁니다. 주님과 함께 있으니 너무 좋아서 초막 셋을 짓겠다고, 콘도 사업을 할 일이 있나, 베드로가 그런 제안을 했지만 한순간에 그것이 확 날라 가지요.



우리가 자기가 극한적인 어두움인 것을 깨닫지 못하면 자꾸 우상을 만들게 되어 있어요. 자꾸 지어내고. ‘저 정도 인자하면 하나님일까? 저 정도 잘 생겼으면 꿈에 본주님이 주님일까?’ 꿈에 본 것은 전부 다 마귀라고 보면 돼요. 어떤 사람은 어느 정도로 속아 넘어가느냐 하면, 눈밭에 허연 30대 초반의 인물이 나타났다고 거기서 예수님을 봤다는 거예요. 예수님 보고 싶다는 것도 잘못이고 예수님 얼굴 보면 죽어요. 그런데 그 사람은 그걸 몰라요. 예수님 보고 싶다는 것도 문제고 그걸 카메라로 찍은 것도 문제고 그걸 집안에 걸어놓고 “이 집의 주인은 예수님이다.” 하면서 빈 밥그릇도 올려놓고.



게슈탈트 심리학에서 배경과 전경의 혼란이 일어나게 되면 구체화된 것은 빼놓고 나머지는 배경으로 바뀐다는 겁니다. 그런 사진 찍으려면 요령을 알려줄게요. 도배 새로 해놓고 도배지를 가만 보세요. 거기서 사자도 나오고 원숭이도 나오고 김일성이도 나와요. 오바마도 나오고 심지어 내 얼굴도 나오고. 우리 머릿속에 있는 것을 유추해서 억지로 끄집어내면 그 모습 아닌 게 없어요. 더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에게 수염이 없다는 사실이에요. 예수님의 수염 난 얼굴은 AD 500년경부터 나왔지 그 전에는 수염이 없었어요.



얼마나 보고 싶어 해요? 소비자가 보고 싶어 하니까 장사꾼들이 그걸 생산해서 팔아먹은 겁니다. 어두움이 주님을 본다는 것은 성립이 안돼요. 죄인이 볼 수 있는 것은 뭐냐? 극한 어두움만 봐야 돼요. 그게 우리 할 일이에요.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그것만 있으면 돼요. 이사야가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할 때 주님께서 “그래, 이제 알았구나. 다 지옥가거라.” 그런 분이 아닙니다. 그 극한 어두움을 경험했다는 것은 이미 구원의 노선에 속해 있다는 뜻입니다. 모세가 시내산 올라가서 주님의 얼굴을 못 봤다는 것은 이미 모세는 구원 받았다는 이야기에요.



“너 하나님 봤어, 못 봤어?” “못 봤어.” “에이! 구원에 실패했구나.” 그게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는 그것, 곧 하나님은 내가 보는 식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못 보게 함으로서 전적으로 못 보게 하는 그 상황이 나를 구원하는 상황이라는 것을 모세는 받아들인 겁니다. 그걸 가지고 ‘모세의 온유’라고 해요. 모세의 누나가 모세의 재혼문제에 관여했어요. 모세의 어머니 대신이니까. 모세가 구스 여인과 혼인한다고 하니까 누나가 “근본도 없는 것이 어디서 이 가문에 시집오려고 하느냐?” 이런 식으로 한 거예요. “이 천박한 것이 어딜 우리 집안에 들어오느냐?” 그렇게 된 거예요.



모세는 이겁니다. 누나는 하나님을 안 봤기 때문에 우리가 천박하게 여기는 그것보다 더 어둡다는 사실을 모르는 거예요. 누가복음 18장에서 성전에 보면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내가 이레에 두 번 씩 금식하고 십일조를 하고 구제했습니다.” 하니 옆에 있는 세리는 엎드려서 “주여, 제가 죄인이라서 얼굴도 못 들겠습니다.” 할 때 주님께서 즉석순회재판을 열었어요. 장차 재판하기 전에 먼저 재판을 열었어요. “피고는 고개를 들라.” 춘향이는 고개를 들라는 식으로. “피고(세리)는 고개를 들라. 네가 천국이다. 그리고 피고(바리새인)는 고개를 들라. 네가 지옥이다.”



마지막 심판을 미리 당겨서 해버렸어요. 바리새인이 십일조를 하고 교회 착실하게 나오고 그렇게 하니까 자기는 대단한 사람인줄 알고 있었어요. 극한 어두움이라는 사실, 교회 나오고 십일조 하고 예배드리는 것도 극한 어두움에 속한 일부라는 사실을 본인이 몰랐던 겁니다. 그런 일을 하게 되면 자연적으로 자기 영광이 더 세져요. 자기 영광이 강화되고 커지게 돼요. 자기 영광 자기 의가 커지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 앞에 땡깡 부립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이 정도 했으면 내가 원하는 출세, 내 앞길도 해결해 주셔야 되지 않습니까? 그만큼 헌금을 먹어놓고는 입 싹 닦아 버리고, 이렇게 나온다면 우리가 동업할 수 있겠습니까?”



협박도 아니고 공갈도 아니고 “이래서는 우리가 동업을 못합니다. 줄 것 주면 받을 것을 챙겨야 하나님을 믿을 재미가 있지요.” 이런 식의 공갈로 막 나와요. 새벽기도 나오고 철야를 하게 되면 나는 걱정이 돼요. 저걸 근거로 공갈을 칠까 싶어서 또 걱정이 돼요. 남보다 배나 했는데 뭘 해달라는 거예요. 목자가 천사의 영광을 보고 난 뒤에는 그 때부터 목자에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세상 어떤 인간에게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사도바울이 삼층천에 올라가고 난 뒤에 세상에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게 중보자적 기능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온 것은 혼자 구원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바로 모세 같은 기능을 이 세상에서 하라는 겁니다. “여러분! 어두움입니다.” 이사야가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하고 주의 영광을 보고 난 뒤에 이사야 20장에 보면 이사야는 벌거벗은 채로 그것도 3년 동안이나 애굽에 가서 복음을 전했지요. 3년이라 하면 남자한테는 트라우마같은 거예요. 군대생활 3년. 제대하고 나서의 30년보다 군대 3년이 더 길어요. 심리적 시간이 그래요. 군에서 제대하고 난 뒤에 달력에 가위표를 하는 인간 없습니다. ‘언제 또 예비군 훈련 나오나.’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군에 간 사람은 전부 다 가위표를 해요. 제대 언제 하는지.



애굽에서 이사야는 주님 지시에 의해서 그렇게 했을 때 억지로 하라고 하면 못합니다. 그러나 이미 알았어요. 빛의 세계는 따로 있다는 겁니다. 빛의 세계는 따로 있기 때문에 이 어두움의 세계에서 어둡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본인의 주특기라고, 이것은 어렵지 않다고 본 겁니다. “야, 너 어두워. 너 끝났어.” 이걸 아주 쉽게 할 수 있었던 겁니다. “누가 이 어두운 세계에 갈꼬?” 손들고 “제가 가겠나이다.” 전설에 의하면 이사야는 처참하게 죽었어요. 톱으로 켜서 죽였다고 되어 있어요. 전설에 의하면. 그것은 성경에 안 나오니까.



히브리서 11장에서 “톱으로 켜는 것과” 할 때 그게 누군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성도는 자기 일을 하는데서 그런 수모를 당하는 겁니다. 양을 쳐야 될 목자가 양을 버려두고 베들레헴의 아기 태어난 곳으로 갑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영광의 효과에요. 주님의 영광이 함께 있습니다. 도대체 두려운 것이 없어요. 겁나는 것이 없습니다. 뭘 봤거든요. 하나님의 영광을 봤거든요.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이 있어요. 이제부터 좀 어려운데요.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그들에게서 얼굴을 돌린다고 할 때 얼굴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현존하심의 증거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현존하심은 주의이름을 부를 때, 주의 이름을 부르면서 주의 이름에 부합되는, 그 이름에 합치되는 존재가 계시다는 것을 얼굴로 드러내는 겁니다. 참 어려운건데 어쨌든 쉽게 해보려고 애를 쓸게요. 지금 인간들은 자기가 극한적인 어두움에 있지 않다고 생각하고 남들은 썩어도 자신은 깨끗하다고 생각하는 가운데서 주의 이름을 부르거든요. 보통 인간들은 타고나면서부터 자기밖에 모르니까. 자,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그렇게 이름을 부르는 너도 어두워.”라는 것을 알려 주면서도 진짜 본래 하나님의 환경 바꾸기, 이 낯선 세계 바꾸기도 실시를 해야 되니까 이 작업이 굉장히 복잡한 작업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깔끔하게 정리하면 이렇게 되는 겁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면 거기에 부합해서 주의 얼굴을 이름 부르는 쪽으로 돌리는 방식을 채택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사람들이 “그러면 주의 이름을 부르면 부를 때마다 ‘주여’ ‘여기 있다.’ 참 쉽네.” 이렇게 되는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여호와를 부른다고 이름 부른 것이 되는 게 아니에요. 우리 인간끼리 부르는 것 같이 하지 않습니다. 이 어두운 세계에서는 전부 다 어두운 것도 모르고 자기가 잘난 존재이기 때문에 쉽게 이름을 불러요.



연말이면 우정을 다진다고 하면서 우정이란 마치 산길 같아서 다니지 않으면 잡초가 무성해진다는 이야기들을 하거든요. 이건 뭐냐? 우정이란 그냥 자주 만나고 자주 얼굴 보면 돼요. 이름 부르면서 얼굴 보면. 그런데 주님 얼굴을 보면 죽는다고 했어요. 죽어버려요. 이름 부르는 사람은 죽어버린다고요. 그러니까 주께서는 이스라엘을 손전등으로 만들기 위해서, 주의 증인으로 만들기 위해서 살려내는 작업과 동시에 자기 영광스런 얼굴을 비춰줌으로서 모든 세상은 어둡지만 이스라엘, 주님의 손전등인 이스라엘만큼은 빛이 쏟아져 나오게 하는 그 작업을 해야 되는 겁니다.



그 작업을 할 때 이름 부르기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보통 인간들 사회에서 이름 부르듯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출애굽기 20장 24절에 보면,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제가 24절을 읽었습니다. 23절을 보면, “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 신상이나 금으로 신상을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고.”라고 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제시한 조건을 봅시다. 하나님이 제시한 조건은 신을 버려야 돼요. 신을 버리고 스스로 하나님이 자기를 때려서 희생하는 지점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흠 없는 제물이 죽어가면서 그게 바로 너희들이 보기에 너무나 낯선 환경이지요. 낯선 환경, 이질적인 환경, 생각지도 못한 환경입니다.



우리가 이 대자연, 이 대자연은 어두움이고 어둡다고 지적하는 빛의 세계는 어두움의 세계 바깥에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 말은 맞아요. 맞는데 그 바깥에 있는 빛의 세계가 이 지상에 어떤 오점, 하나의 지점을 정해놓고 거기에 온다면 그 모습은 어떤 모습이냐? 그냥 빛의 모습이 아니고 희생의 모습이고 피 흘리는 모습이고 어떤 억울한 피가 흐르는 그 지점, 아벨의 죽음이고 선지자의 죽음, 그 죽음이 이 어두운 세계에 유일하게 빛이라고 할 수 있는 지점이 되는 겁니다. 그 예가 동방박사죠.



동방박사에게 난데없이 낯선 별이 등장합니다. 별은 창세기 1장에 보면 빛의 발광체에요. 별이 움직인다는 것은 낯선 빛이 왔다는 것이고 낯선 빛이 왔다는 것은 이 세상이 몽땅 어둡다는 겁니다. 그래서 빛이 온다는 것은 이 세상이 어둡기에 심판도 해야 되고 동시에 빛이기 때문에 심판하더라도 하나님의 약속된 백성, 택한 백성만은 빛의 세계로 데려가기 위해서 별이 온 거예요. 그래서 그 별은 이스라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손전등.



하나님께서 이름을 부를 때 그 이름을 부르는 지점이 바로 제사 드리는 지점이거든요. 거기까지는 이해가 되지요? 그 다음에 제사를 드리면서 이름을 부르면 하나님의 얼굴이 나타나지 않습니까? 나타나지요. 성경에서 최초의 하나님의 얼굴이 나타나는 지점이 어디냐? 놀랍게도 하나님의 얼굴이 아니고 천사의 얼굴이에요. 그게 어디 있냐 하면, 제사 지내는 제일 중심부에 스랍이라는 천사가 속죄소에 두 얼굴을 맞대고 있는 지점이 나와요. 그리고 그것이 나중에 커지면 성전이 되고 성전은 에스겔 1장에 보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성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바퀴가 있고 온 우주의 소리보다 더 큰 울림과 소리가 보좌에서 흘러나옵니다. 요한계시록 1장에 보면 주님이 말할 때 무슨 소리? 물소리 같다고 하지요. 그 물소리 같다는 것은 뭐냐 하면, 땅이 있기 전에 바다밖에 없을 때의 그 바다의 소리의 총합입니다. 예수님만이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게 이 우주가 있게 된 빛의 배경이고 환경이에요. 이제 중요한 것은 그걸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그 뜻을 품고 이 지상에 뭔가 움직이는 손전등을 찾아야 돼요. 캄캄한데 그것만 움직이는 손전등.



원래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이스라엘이 그걸 했어야 되는데 시편에 보면 “너희가 우상을 섬기면 내가 얼굴을 돌린다.” 하는 대목이 많이 나와요. 다시 말해서 우상을 섬기는 곳에서는 이름을 불러도 소용이 없어요.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담의 족속이라 하나님 섬긴다고 하지만 내용을 까보면 전부 다 바알이에요. 아세라고. 나만 복 받으면 된다는 거예요. 내가 세상 적으로 원하는 것을 달라고 그런 식으로 철야하고 기도하는 거예요. 그것은 멸망되어야 됩니다. 멸망되고 난 뒤에도 그 역할, 하나님의 약속은 끊어져서는 안 되기 때문에 멸망한 그 이스라엘 자리에서 새롭게 피어나는 분이 누구냐? 이스라엘 손에 의해서 살해당한 분이 이스라엘 속에서 사흘 만에 부활되는데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옛날 모세 역할, 엘리야 역할을 이제 아들이 하는 거예요. 여기서 아들이야기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뭐냐가 중요하거든요. 이제는 하나님과 이스라엘관계가 하나님과 아들관계로 끝나는 겁니다.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아들을 본 자가 아버지를 보았거늘 왜 자꾸 아버지를 보이라고 하느냐?” 이렇게 되어 있어요. 끝끝내 아버지 얼굴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에 아들의 얼굴을 보라는 거지요. 아들의 얼굴 같으면 그 당시에 비디오가 있었으면 좋았겠네요. 예수님 얼굴을 다 찍으면 되는데.



자기가 어둡다는 것을 깨닫지 못할 경우에는 선볼 때 사진 보듯이 내가 사진만 있으면 알아 먹는다는 그 자체가 지극한 어둠의 성질이에요. 예수님은 봐서 믿어지는 분이 아니에요. 봐서 믿어지는 분이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예수님을 알게 하는가? 예수님을 모르게 하면서 알게 하셔요. 이게 또 무슨 되도 않는 소리인가? 예수님을 아무리 해도 모르게 하면서 예수님을 알게 하는 방법이 뭐냐? 제가 아까 어두움에 속했으면서도 어두움에 속한지를 모르게 하는 그것이 구원하시는 작업 속에 포함이 되어 있다고 이야기를 했지요.



편하게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이 자식이다. 그런데 드라마에 보게 되면 현재 있는 엄마하고 드라마에 나오는 멋있는 엄마가 있을 때 어떤 생각이 드느냐 하면, ‘엄마를 한번 바꿔봐? 나도 저런 엄마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 들지 않습니까? 어떤 코미디 프로에 이런 게 있어요. 동생은 착한데 형은 백수고 맨 날 사고만치는 거예요. 그래서 동생이 있다가 “형, 형 같은 인간은 쓸데없는 인간이니까 우리 집에서 나가!” 하니까 형이 하는 말이, “아버지, 나갑시다.” 지보고 이야기했는데 누워있는 아버지보고. 아버지가 화가 나서 막대기를 들고 치는 대목이 나오거든요. 상당히 재미있는 대목이에요.



감기 걸리고 늘 아픈 그런 엄마 말고 잘 살고 예쁘고 내가 원하는 것 다 해주는 엄마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할 때 엄마가 바뀌는 순간 자기 자신도 바뀐다는 것을 놓친 거예요. 엄마 바뀌는데 자식이 안 바뀔 리가 있습니까? DNA가 다 다른데. 본인은 바꿀 생각을 안 하고 엄마만 바꾸면 부모 자식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지한 거지요. 인간들이 우상 섬긴다는 말은 자기는 안 바뀌고 ‘산타클로스 같은 신이면 좋겠다.’ 고 신만 바꾸려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아버지와 더불어서 아들이 아버지를 바꿔달라든지 신은 이래야 된다고 요구할 자격이 없음을 분명히 합니다.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 하나님의 아들은 자기는 안 바뀌고 신만 자기 마음에 맞는 신으로 바꿔지기를 원하는 그 모든 존재를 가짜 아들로 규명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예수를 못 믿는 거예요. 왜냐하면 진짜 아버지는 아들을 죽기 까지 내치고 버려버리는 아버지인데 인간들의 아버지는 아무리 밉더라도 나가 죽으라고 저주하는 아버지는 아니거든요. 본인 자신이 상상한 아버지하고 예수님의 아버지하고 다르니까 예수님이 와도 믿을 위인이 없어요. 아무도 예수님을 아들로 받아들이지를 않습니다. ‘예수님 제키고 아버지부터 믿지.’ 그것은 안돼요. 왜냐?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갈자가 없”기 때문에.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하느냐? 아무도 믿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면서 돌아가십니다.



그리고 살아나셔서 어떻게 하는가? 오늘 본문에 나오지요. 오늘 본문 에스겔 39장 29절에 보면, “내가 다시는 내 얼굴을 그들에게 가리우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내 신을 이스라엘 족속에게 쏟았음이니라.” 하나님의 신인 성령이 오게 되면 ‘아하, 전에 우리가 어두움이었네. 내가 알던 하나님은 엉터리였네. 나는 예수님 제키고 아버지하고 바로 상대하면 되는지 알았지.’ 내가 바뀌어야 된다는 것, 내가 근원적으로 어두움에 속한 자가 되고 내가 죄인이 되어야 된다는 사실, 나를 죄인 되게 하시는 그것이 바로 나를 구원하시는 진짜 살아계신 하나님의 엄청난 복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목자가 되면서 세상에 아무것도 무섭거나 두려워할 것이 없어요. 이미 이 땅에 십자가, 빛이라고 할 수 있는 지점을 봤기 때문에, 그 피와 살을 먹고 마시기 때문에, 그것이 귀한 줄을 알고 그것이 양식인 줄 알고 그것을 먹고 마시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으리라. 정말 누가 그걸 알았으리. 아무도 알지 못하는 그 십자가의 복음을 사도바울은 전했던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름만 불렀지 어떻게 실존하는지를 몰랐던 우리, 그 이름에 합당한 영광은 찬란한 영광이 아니고 독생자의 죽으시는 영광인 것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하나님 아버지, 멋있는 하나님 보다 추하게 죽으시고 희생당하시고 피 흘리신 그 분이 우리의 구세주인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