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곡의 땅(에스겔 38:1-6)
마곡의 땅
2014년 11월 19일 본문 말씀: 에스겔 38:1-6
(38:1)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38:2) 인자야 너는 마곡 땅에 있는 곡 곧 로스와 메섹과 두발 왕에게로 얼굴을 향하고 그를 쳐서 예언하여
(38:3)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로스와 메섹과 두발 왕 곡아 내가 너를 대적하여
(38:4) 너를 돌이켜 갈고리로 네 아가리를 꿰고 너와 말과 기병 곧 네 온 군대를 끌어내되 완전한 갑옷을 입고 큰 방패와 작은 방패를 가지며 칼을 잡은 큰 무리와
(38:5) 그들과 함께 한바 방패와 투구를 갖춘 바사와 구스와 붓과
(38:6) 고멜과 그 모든 떼와 극한 북방의 도갈마 족속과 그 모든 떼 곧 많은 백성의 무리를 너와 함께 끌어 내리라
하나님과 인간이 어떻게 만나게 될까요? 인간들의 영원한 궁금증이었습니다. 인간의 지혜일까요 아니면 인간의 뜨거운 기도와 동정심일까요 아니면 사랑의 실천일까요? 그 어느 것도 아닙니다. 한낱 역사로 보이는 오늘 본문 내용은 그저 지나간 에피소드가 아닙니다. 인자(人子)라고 호칭되는 선지자의 등장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친히 일을 꾸미시고 실현해 나가시는 일이 따로 있음이 드러납니다.
즉 사람들이 편하게 옛날 이야기라고 간주되는 내용이 오늘날도 성도에게 그대로 반복적으로 적용될 내용으로 다가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마곡 땅에 사는 민족들에 대해서 부정적 견해를 갖고 계십니다. 과연 이들이 하나님에게 저주받을 짓을 했는지 여부를 같은 인간이 우리가 찾아낼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곡이라는 지역이 만약 우리가 태어난 고향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저주는 일방적 저주로 느껴질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마곡이라는 지역은 지금의 코카서스 지방으로서 터키 북쪽에 자리잡은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의 지역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난데없이 이 지역 민족에게 군대 동원령을 내리십니다.
그들이 전쟁하고 싶어 환장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의한 일방적 조치로서 그들은 전쟁에 돌입하게 됩니다. 입장 바꿔서 그들이 일원이라고 간주해서 자신네들 민족이 연합해서 전쟁이 나서는 이유가 뭘까요? 그것은 오직 하나 영토를 넓히기 위함입니다.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장하기 위함입니다.
그들은 이들의 이런 움직임은 이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이 세상 모든 민족들도 계가가 되면 다들 목표로 삼는 일이기도 합니다. 땅을 넓히고 싶고 그것도 좋은 땅을 차지하고 싶은 마음은 마치 요즈음 사람들이 할 수 만 있다면 더 많은 돈을 벌고 싶은 심정과 같은 심정입니다.
사람이 되어서 하는 일이 뭐겠습니까? 편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은 겁니다. 그것이 이 땅에서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욕심들로 인하여 충돌이 발생된다면 이 전쟁에서 필히 이기고 싶을 것입니다. 이런 희망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전혀 이상할 일이 아니라고 여겨질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이 마곡 지역의 민족들에 대해서 “나는 너를 대적한다”고 하십니다. 이는 곧 인간이라고 간주되는 모든 자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대표적으로 대적을 선포하는 바가 같습니다. 인간이 최우선적으로 행하는 것이고 가장 잘하는 것이 땅에 대한 집념입니다.
이것마저 비난한다면 비난받지 않을 위인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인자되시는 메시아적 기능을 찾아내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다른 세계를 말씀하신다는 점입니다. 이 눈에 보이는 세상 말고 말입니다. 히브리서 11:6에 보면,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사람들이 정작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기보다는 본인들이 뭘 원하고 있는지를 항상 우선 순위가 된 채 활동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뻐하시게 하는 것은 중보자의 하신 일에 대해서 믿는 바로 그것 외에 하나님의 일은 따로 없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인자되는 에스겔을 통해서 알려주시는 겁니다.
요한복음 6:29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의 내용은 그냥 지나가 버린 역사의 일부가 아니고 그 안에서 일하시는 메시아께서 지금도 여전히 이 마지막 때에 동일한 일을 벌리고 있음을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12:3에 보면,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고 되어 있습니다. 복과 저주를 가름하는 기준이 따로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시고 그것이 이 역사 속에 집어넣어버린 이상, 인간들이 본인들이 원하는 기준은 다 무용지물입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자신들이 정해놓은 기준을 고수하기 위해 하나님의 정해놓으신 복과 저주의 기준을 공격하는 식으로 자신의 본질을 드러낸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국가 형태를 이룬 것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지금 마곡 지역에 있는 민족들은 ‘곡’이라는 왕의 지휘아래 여러 민족들이 연합을 이루어 이 이스라엘을 공격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강제로 그 일을 시키십니다. 이렇게 되면 곧 복과 저주를 가름하는 기준 자체에 대한 도전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초기 역사 속에서도 이스라엘에 대한 대적이 가나안 땅에서 빈번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여호수아 시절에 가나안 열 족속은 애굽에서 올라온 민족 이스라엘과 치열한 전투를 해야만 했습니다.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그 가나안 땅을 접수하려 온 겁니다. 하지만 그곳 가나안 땅 원주민의 입장에서 보면, 이스라엘의 이러한 주장은 터무니없는 구실에 불과한 것입니다. 땅없는 떠돌이 집단이 그저 마구잡이식으로 평화로운 자신들의 세계를 침략한 침략군에 불과한 겁니다.
가나안 민족들이 과연 저주받고, 또 멸망을 당해야만 하는 타당성을 그저 자체적으로 정립할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그들이 조상 대대로 살았던 그 땅을 부지하면서 평화롭게 사는 것은 인간으로서 누릴 최소한의 권리처럼 간주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하나님의 눈에는 그것마저 저주받을 태도로 비치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의 세상관과 가치관과 종교관이 우선시되다 보니 복과 저주의 기준으로 움직이고 있는 이스라엘의 가치를 우습게 보는 태도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쌍방 간에 각기 다른 세계관과 기준에 의해서 충돌이 야기되는 현상은 오늘날에게 여전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복음만이 복과 저주를 가름하고, 또한 그 사실을 믿는 일만이 하나님을 기뻐시게 한다는 원칙이 확립되었다고 성도가 믿고 고백하는 그 순간부터 주변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대적자로 간주될 수밖에 없습니다. 비록 그들이 의리하고 정을 나눈 친구와 일가친척과 가까운 가족이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성도의 팔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으로부터 미움 받더라도 너무 서러워하거나 슬퍼하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이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14강-에스겔 38장 1절-6절(마곡의 땅)141119-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38장 1절-6절입니다. 구약성경 1211페이지입니다.
에스겔 38:1-6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너는 마곡 땅에 있는 곡 곧 로스와 메섹과 두발 왕에게로 얼굴을 향하고 그를 쳐서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로스와 메섹과 두발 왕 곡아 내가 너를 대적하여 너를 돌이켜 갈고리로 네 아가리를 꿰고 너와 말과 기병 곧 네 온 군대를 끌어내되 완전한 갑옷을 입고 큰 방패와 작은 방패를 가지며 칼을 잡은 큰 무리와 그들과 함께 한바 방패와 투구를 갖춘 바사와 구스와 붓과 고멜과 그 모든 떼와 극한 북방의 도갈마 족속과 그 모든 떼 곧 많은 백성의 무리를 너와 함께 끌어 내리라.”
성경을 보게 되면 마치 역사책을 보는 것 같습니다. 역사책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부담을 느끼지 않아요. 옛날 강감찬이나 을지문덕이나 연개소문 이야기를 할 때, “선생님! 우리가 저걸 믿어야 됩니까?”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 없어요. 역사 선생님이 옛날 이순신장군 이야기하면서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했다든지 “신에게는 아직도 열 두 척의 배가 있습니다.” 할 때 학생이 듣고 있다가 “선생님! 저걸 믿으면 구원받겠습니까?” 하지 않지요.
역사라 하는 것은 믿음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 지식에 관한 문제가 되는 겁니다. 전혀 부담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지식을 우리가 취직하기 위해서 외우기는 하지만 평소에는 별로 지나간 역사에 대해서 관심두지 않게 되지요. 성경에서 역사 이야기가 나오니까 사람들은 갑자기 마음이 해이해져서 ‘알면 더 좋고 몰라도 괜찮다. 구원받는데 옛날 역사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 내가 예수만 믿으면 되지 에스겔 28장에 나오는 곡이니 마곡이니 그런 이야기는 몰라도 되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들을 해요.
그런데 이걸 생각해 보세요. 신약에 예수님이라는 분의 긴 그림자가 에스겔이라면, 지금 예언하시는 에스겔 선지자 이 인자 속에 이미 그리스도 영이 들어가 있거든요. 선지자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들어 있다는 것은 베드로전서 1장 10-11절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이미 선지자속에 그리스도 영이 있어서 장차 오실 예수님의 고난과 영광에 대해서 미리 예언했다고 되어 있어요. 그렇다면 우리는 마태, 마가, 복음서에 나오는 그 예수님만 딱 잡았다고 해서 예수님의 전부를 안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구약 때부터 예수님이 오시게 될 수밖에 없었던 그 내용들이 구약 때부터 차곡차곡 쌓여서 열차처럼 달리고 있다는 말이지요. 이순신 장군 같으면 이 순신 장군으로 끝나요. 강감찬 장군 같으면 강감찬 장군으로 끝납니다. 평강공주, 그 사람이 실제로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것으로 끝나지요. 안중근 의사가 권총으로 이토오 히로부미를 죽였다. 그 안중근하고 우리하고 별로 관계없어요. 우리가 안 씨 집안도 아닌 바에야 별로 관계가 없다 이 말이지요. 그걸로 끝나지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 단독 존재만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오시기전의 구약에서부터 이미 예언대로, 말씀대로의 모든 내용들이 예수님 안에 들어가 있거든요.
들어가 있는 예수님을 우리가 믿음으로서 예수 안에 들어가게 되면 거기서 뭐가 기다리고 있느냐 하면, 구약성경 전체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구약세계, 구약에 있던 전체세계와 요한계시록도 함께 있어요. 우리가 역사적으로 봤을 때는 창세기는 과거고 요한계시록은 미래고,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우리가 갖고 있는 역사의식인데 예수님 안, 묵시 안에서는 창세기하고 요한계시록하고 같이 붙어 있어요. 놀라운 사실은 엘리야하고 모세하고 나이차가 700년 가까이 나는데 변화산에서는 막 먹습니다. 예수님하고 모세하고 엘리야하고 같이 이야기하고 있어요. 예수님 별세에 대해서 같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별세하지 않으면 우리는 구원 못 받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만큼 우리들보기에 훌륭한 업적을 쌓고 많은 주의 일을 고난 가운데 했다고 하지만 모세나 엘리야조차도 예수님 십자가 피 없이는 구원을 못 받아요. 심지어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바치는 대단한 믿음의 모습을 보여줬음에도 불구하고 아들 바쳐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 보기를 기다렸고 예수님 보고서 기뻐했다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예수님 보고 기뻐했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예수님 안에서, 그 세계에서, 천국 안에서 같이 공유하고 있다고 그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역사라 하는 것은 알아도 그만이고 몰라도 그만이지만 에스겔에 나오는 이 내용은 하나의 역사이야기로 끝나버리면 안됩니다. ‘아, 옛날에 이런 일이 있었구나.’ 아니오, 아니오. 지금 이 일이 우리에게 주어진 일입니다. 지금의 일로 받아줘야 돼요. 그러면 에스겔 38장, 이것은 과거의 이야기거든요. 이 과거 이야기 속에서 지금 현재의 우리에게 작용하고 있는 하나님의 원리와 원칙을 뽑아낼 줄 알아야 됩니다. 어떻게 뽑아내는가? 그게 굉장히 어렵고 골치 아픈 이야기죠.
그 뽑아내는 방식을 같이 한 번 생각해 봅시다. 38장 1절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라고 되어 있어요. 뽑아내는 방식은 여기 “인자야.”라고 나옵니다. 인자라 하는 것은 우리가 알다시피 신약에서 예수님이 자신을 향하여 호칭할 때 인자라고 했습니다. 제자들보고 이야기했지요. 마태복음 16장에서 인자를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시고 그 다음에 너희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서 차이를 두게 하시는 겁니다.
“세상 사람은 예레미야 같은 선지자중 한 사람입니다.”라고 해서 세상 사람들은 자기들이 알고 있던 옛날 훌륭했던, 영웅적인 일을 했던 선지자와 과거의 인물 중에 연속된 인물이라고 봤는데 베드로는 하는 말이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 말은 과거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고 앞으로도 계실 분이라는 뜻이에요. 그렇다면 여기 인자라는 용어를 쓴 것은 제가 아까 처음에 이야기 했듯이 인자 에스겔 속에 그리스도가 들어 있다는 거지요.
자, 그러면 이미 결론 나왔습니다. “목사님, 에스겔 38장을 어떻게 해석하십니까?”라고 물으신다면 38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끄집어내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정답입니다. 창세기를 어떻게 해석합니까? 창세기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끄집어내면 되는 거예요. 왜? 이 세상에 다른 이름으로 구원 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기 때문에. 이것이 창세기든 레위기든 민수기든 거기서 그리스도만 끄집어내면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 당시 창세기, 레위기, 민수기를 썼던 분이 그리스도 영으로 썼기 때문에 쓰신 분이 그리스도 영으로 썼다면 읽는 사람도 그리스도 영으로 접근해야 그 본질을 끄집어 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가 역사적 존재기 때문에 역사적인, 현재 내가 여기 있다는 것 가지고 접근해서 구약을 본다면 “에이, 이건 과거에 지나간 일이잖아.”라고 해서 구약에서 전혀 그리스도를 끄집어내지 못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한 대표적인 해석이 성경을 과학적으로 보는 과학적해석이 되겠지요. 창세기 1장, 2장, 3장을 통해서 진화론과 성경의 차이점을 끄집어낸다든지 창세기 2장에서 인간을 만드는 것을 통해서 크로마뇽인 이야기를 끄집어낸다든지, 이런 식으로 해버리면 그것은 고고학이고 과학이고 일반학문이지 그것 해가지고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거든요. 복음이 아니고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합니다.
내가 많이 하나님의 지식을 구비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고 히브리서 11장에서 했을 때 그 믿음의 주체는 바로 예수님을 이야기합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예수님께서 관여하지 않는 바가 없습니다.” 하는 것을 고백할 때 “우리는 예수님이 하신 일의 결과물입니다.”라고 수용이 되는 겁니다.
에스겔 38장 해석에 있어서 어떻게 보면 하도 난해하기 때문에 결론부터 먼저 언급을 한 셈이 되지요. 그러데 결론을 끄집어내기까지의 그 과정이 너무나 복잡하기 때문에 결론부터 먼저 말씀드린 겁니다. 에스겔 속에서는 그리스도가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그 활동의 취지는 장차 오실 예수님이 십자가 지신 그 복음, 복음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복음이 무엇이냐 부터 먼저 말씀드리면 복음은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하신 것, 예수님 자신이 하신 업적을 대신 했다는 이름으로 택한 백성에게 뒤집어씌워서 죄인을 의인 만들고 자신도 의인되고 그래서 의인들만 갈 수 있는 천국에 넣어주는 그 작업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로마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방금 했던 이야기, 인간이 하지 못했기에, 인간이 도저히 이룰 수 없다는 것을 뻔히 아시기에 대신 예수님이 일을 처리해서 하나님 앞에 합격증을 받는 겁니다. 합격을 받는데 같이 합격을 받는 것으로 처리하시는 그 일의 작업 중의 하나가 이 에스겔 38장속에 숨어 있는 겁니다. 그걸 끄집어내서 찾아내면 되는 거예요. 더 간단하게 말해서 이런 겁니다. 우리가 에스겔 38장을 보기 전에 먼저 하나님 앞에 물어야 될 것이 있어요. “하나님이여,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은 어떻게 만나집니까?” 굉장히 중요한 문제거든요. 물론 수능에는 안 나옵니다. 수능에는 안 나오는데 굉장히 중요한 문제에요.
하나님과 인간이 어떻게 만납니까? 2천년 기독교 역사 가운데 이것이 의문점이었어요. 어떤 이는 신의 존재증명으로 해서 인간의 이성으로 만나면 된다고 하는데 그것도 아니에요. 어떤 사람은 기도로, 감정으로, 뜨거움으로 호소하면 된다고 하는데 그것도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마더 테레사처럼 착한 일을 하고 사랑을 베풀면 만난다고 하는데 그것도 아니에요. 지, 정, 의. 지식, 감정, 의지, 그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은 만나지지 않습니다. 어떻게 만나는가? 인자로 만나는 거예요. 중보자로 만납니다, 중보자로.
중보자로 만날 때 인간의 이성과 감정과 의지를 묻거나 따지지를 않습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너는 그냥 가만있어. 내가 알아서 할게. 네가 뭘 해도 그것은 아담에 속했기 때문에 죄가 되고 내가 알아서 할게.” 인자가 대신 나서서 아버지 앞에 우리가 구원될 수 없는 모든 조건들을 주께서 알아서 다 처리를 한 겁니다. 그 처리하실 때 주님께서 책을 발간한 것도 아니고 그냥 물위를 걸은 것도 아니에요. 예수님께서 산상설교를 하고 난 뒤에 “잘 알아들었나? 이것 시험에 나온다. 나는 이제 하늘로…….”
이렇게 산상설교 하고 하늘로 가신 것도 아니고, 물위를 걸으시고 가신 것도 아니고, 오병이어 떡 떼 주고 가신 것도 아니고, 주께서 하늘로 가신 것은 십자가 지고 난 뒤에 “다 이루었다.” 하고 하늘로 가셨거든요. 따라서 주의 일의 마감이 된 것은 십자가지 산상설교 아니고, 오병이어 아니고, 병 고침이나 귀신 쫒아냄도 아닙니다. 귀신 쫓아냄이 아니에요. 진짜 기적은 십자가 죽으심이에요. 십자가 죽으심일 때 여기서 그걸 누구도 알았느냐 하면 마귀도 알았어요. 그래서 마귀는 어쨌든 간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죽도록 그렇게 한 겁니다.
제 이야기가 아닙니다. 마귀가 베드로를 앞장세워서 이야기한 거예요. “내가 죽고 난 뒤에, 고난 받은 뒤에 사흘 만에 살아난다.”고 하니까 베드로가 하는 말이 “예수님 그럴 필요 뭐가 있습니까? 제가 있잖아요.” 할 때 주님께서는 “사탄이 물러가라. 너는 내 작업을 아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서 아예 성취하지 못하게 하는구나.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했어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베드로보고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그 대목을 통해서 결국 사탄이 노리는 것은 뭐냐 하면, 사탄은 모든 것을 허용하고 용납하되 대신 용서하는 그 십자가만큼은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 그 죽음 자체를 ‘아무 의미 없다. 소용없다.’ 이렇게 그것만 정리하게 된다면 사탄으로서는 승리하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엘리야와 모세 입장에서는 주님께서는 어떤 일을 해도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별세, 예수님이 돌아가신 것, 주님이 일을 마감하고 떠나는 그 별세의 일만, 십자가에 죽는 것만 한다면 모세와 엘리야 입장에서는 대 성공입니다. 이러한 십자가의 의미로 말미암아 고린도전서에는 이 세상 그 누구도 자기 힘으로, 자기 지혜와 자기 똑똑함으로 십자가를 알 수 있는 대단한 존재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고 했습니다. 아무도, 인간의 마음으로도 깨닫지 못하는 것, 십자가는 호락호락 인간의 지혜와 지능의 똑똑함으로 발견될 수 있는 사항이 아닙니다.
꼬깃꼬깃 숨겨져 온 거예요. 아무도 찾아낼 수 없는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해요, 비밀, 감추어진 비밀. 감추었기 때문에 그 감추어진 비밀을 내놓는 것은, 그 감춘 것을 누구에게 집어주는 이것은 하나님의 그 사람에게만 주시는 특혜고 차별대우입니다. 저는 그걸 편애라고 해요. 편애. 편파적으로 사랑하는 것. 성도는 차별대우 받는 사람이에요. 편파적인 사랑을 받은 사람이에요. 몰라도 되는데 알게 해 줘버렸으니까, 그리고 난 뒤에 다시 세상을 보니까 비로소 에스겔이 이해가 돼요. 예레미야가 이해가 되고.
그들 본인이 선지자 하겠다고 손들고 나온 사람들이 아닙니다. 극한 어려움과 시련과 혹독한 고난 가운데서도 인자라고 불림을 받았기에 장차 올 예수님을 부분으로 보여줘야 되기 때문에 자기 맘대로 살아올 수 있는 인생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맘대로 계획 잡을 수 있는 인생설계라는 게 아무짝도 소용없었어요. 자기도 왜 이렇게 살아야 되는지를 본인도 몰랐습니다. 예레미야 같은 경우에는 항의를 했지요. “내 인생은 왜 이렇게 살아야 됩니까? 그러나 주의 뜻이라면 제가 감당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감당했지요. 오늘날 성도에 관한 이야기도 되는 겁니다. 이게 옛날 에스겔이나 예레미야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오늘날 성도에게도 해당되는 거예요.
본문에 마곡이라는 것은 서울 강서 김포공항 근처 마곡지구가 아니고 이 마곡이라 하는 것은 카스피 해와 북해 사이 코카서스 지역을 말합니다. 지금은 세 나라로 나뉘어 있는데 본문에도 세 민족이 나와 있어요. 로스와 메섹과 두발, 세 민족인데 옛날에는 국가라는 개념이 없고 민족개념이에요. 영토개념이 없고 그냥 민족개념인데 이 세 민족연합의 왕을 가지고 곡이라고 합니다. 인자야, 이 인자 속에 예수님의 영이 들어 있으니까 말을 바꿉시다. 예수님께서 누굴 언급하느냐 하면, 마곡의 왕, 곡이지요, “로스와 메섹과 두발의 왕 곡아! 너를 대적한다.”
결국 이 말은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인자되는 에스겔을 통해서 알려준 바에 의하면 이 마곡에 사는 곡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다는 겁니다. 부정적 견해를 갖고 있다는 것이 ‘아, 그 사람들이 어지간히도 나쁜 짓을 했구나.’ 이렇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출생지가 만약 로스와 메섹과 두발이고 카스피 해와 북해사이라면 여러분의 하루 생활을 카메라로 찍어보세요. 지금 ‘세상은 넓다’ 이런 방송국프로그램에서 많이 찍어놓았어요. 그 동네 생활상을 보면 아침에 일어나서 종일 양치는 목축에 종사하는 겁니다.
산악지역인 그곳에서 목축하는 그 모습을 24시간 찍어서 방영해 보세요. 그들이 무슨 저주받을 짓을 했는지를 살펴봅시다. 코카서스 지방에 어떤 목동이 있는데 그 목동의 일상을 24시간 찍어서 방영을 해 봅시다. 방영을 해 보면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양치고 점심때 또 양치고 도시락 먹고 저녁 되면 피곤해서 자고 그 다음날 또 일어나서 양치고. 뭐, 뭐가 문제입니까? 이런 모습을 어떻게 하나님에게 원수노릇이라고 우리가 찾아낼 수 있겠어요? 그래서 이 본문 패턴이 어렵다는 말을 제가 처음에 한 겁니다.
성경에서는 결론부분으로 나는 너희들의 대적이라고 언급을 하는데 우리는 그 이야기를 듣고 자기가 인자입장도 아니면서 “그래, 너희들은 죽어 마땅해.”라고 생각하는데 막상 여러분의 친척이나 아는 사람이 그곳에 가서 또는 본인의 출생지, 본적이 그곳이라면 하루 일과를 조사해보자는 말이지요. 그러면 과연 하나님 앞에 저주받아야 될 그런 짓거리를 한 적이 있는지? 없어요. 그냥 일상생활 합니다. 그들의 일상이나 서울에 사는 사람의 일상생활이나 똑같아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부정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뭘 의미하는 거예요?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자체에 대해서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다는 뜻이에요. 인간자체에 대해서. 예수님 빼놓고 모든 인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부정적 견해를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너희는 저주받아 마땅하다.” 하는 뜻이에요. 우리는 에스겔 38장을 그냥 옛날이야기로 넘겨버리면 안됩니다. 지금 우리에게 적용되는 겁니다. 이유도 없이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부정적으로 보는 거예요. 아까는 코카서스지방의 어떤 목동의 24시간을 촬영했다면 이번에는 서울의 한 독서실에서 경찰시험 준비하는 한 학생, 노량진에서 학원도 다니는 그 학생을 24시간 따라다니면서 촬영 했다 합시다.
제가 만약 선지자라면 “인자야! 너는 저 독서실에 가서 경찰공무원 준비하는 저 학생을 대적하여 예언하기를 ‘나는 너를 대적한다.’고 이야기하라.”고 한다면 제가 “뭐? 뭐? 아니, 공무원시험 준비하는 그것이 뭐가 문제인데? 공무원 시험 준비하는 그것이 뭐가 문제인데?” 잘못한 게 있어야 시비를 걸지. 지방에서 서울 올라와서 공무원시험 준비한다고 학원 다니면서 그렇게 애를 쓰는데 거기서 하나님을 대적할 만한 어떤 요인을 찾아낼 수가 있느냐는 말입니다. 찾아낼 수가 없습니다. 왜? 우리는 같은 동지기 때문에 찾아낼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왜 마곡과 그리고 곡이라는 왕에게 왜 이렇게 부정적으로 대적한다고 하는 겁니까? 그들은 땅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땅에서 무슨 기대를 걸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참 재미있지요? 마곡이라는 이 사람들이 한 민족을 이루었습니다. 신라, 고구려, 백제, 모두 다 자기 지역에 부족국가를 이루어서 살았어요. 부족국가라는 말은 그냥 그 땅에서 양식 얻기 위해서 애쓰고 노력하고 산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게 하나님 보시기에 대적거리고 원수거리가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왜 너희는 땅만 쳐다보고 사느냐?” 그 말입니다.
땅만 쳐다보고 살아야지 그러면 뭘 보는데? 가끔 하늘도 보겠다. 비 오는지 안 오는지. 하늘을 쳐다봐도 결국 되돌아오는 것은 땅이에요. 땅에서 곡식이 나고 그 곡식을 먹어야, 지방, 탄수화물, 단백질을 얻어야 60조개의 세포가 살고. 살면? 살면 사는 거지 뭐. 사는데 이유 있나? 없어요. 여러분, 사는데 이유가 없습니다. “왜 삽니까?” 물어보면 간단해요. 죽지 못해 사는 거예요. “왜 일하십니까?” 안 죽으려고 일하는 거예요. 이것은 코카서스가 아니라 미국이고 브라질이고 한국이고 관계가 없어요. 세상 모든 인간들은 살려고 사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대적의 요인, 주님 보시기에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는 겁니다. 기가 막힐 일이지요. 이걸 오늘날 교회에 적용시키면 살기 위해서 새벽기도 하는 그것도 전부 다 원수가 돼요. 새벽기도 하는 내용을 한 번 녹음해 봅시다. 녹음한 내용을 쫙 한 번 보세요. 그리고 목사들이 교회에서 부흥되게 해 달라, 이런 것을 다 녹음해 보세요. 목사가 “주여! 부흥되게 하옵소서.” 하면 주께서 옆에 있다가 “부흥돼서 뭐하려고? 뭐하려고? 부흥이 되어서 뭐하려고?” “부흥되면 좋잖아요.” “내가 언제 좋다고 했는데? 너는 기본을 몰라.”
기본이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기쁘게 한다는 것을 모르고 내 교회가 부흥되고 숫자가 많아야 기뻐한다는 그 사고방식은 네가 속한 이 땅, 네 영토, 이 소유된 이 숫자 양적으로 많아지는 것, 그게 바로 마곡입니다. 그게 바로 곡이에요. 마곡, 곡은 모든 인류를 대표해서 하나님한테 대적으로 여김 받은 집단이라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4절에 보면, “네 온 군대를 끌어내되 완전한 갑옷을 입고 큰 방패와 작은 방패를 가지며 칼을 잡은 큰 무리와 그들과 함께 한바 바사와 구스와 붓과 고멜과 그 모든 떼와……” 이렇게 전쟁을 하게 되는데 바사라 하는 것은 페르사를 말하지요, 극동지방, 구스라 하는 것은 지금의 이집트지역, 붓이라 하는 것은 터키 저 끝, 고멜이라 하는 것은 터키 북쪽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이고.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하면,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극동 극서 극남 극북, 이걸 이야기합니다. 그런 것들과 연합군을 이루어서 왕은 누가 하는가? 곡, 이름도 희한해요. 곡이 왕이 되어서 누구에게 쳐들어오는가? 이스라엘을 치러 온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에 쳐들어오는 이유가 뭐냐 하면, 영토를 넓히기 위해서, 땅을 넓히기 위해서입니다. 왜 땅을 넓히는가? 땅을 넓혀야 그들은 곡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곡식을 왜 얻으려고 하는가? 그래야 자기가 편하게 밥 먹고 잘 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 밥 먹고 잘 살기 위해서 그렇게 하느냐?” 한다면 뭐라고 하겠어요? “그걸 몰라서 물어요? 너 같으면 안 그러겠나?”
지방에서 서울 올라와서 경찰이나 공무원시험 준비한다. “젊은이여, 왜 이렇게 밤늦게까지 사법고시 준비합니까?” “밥 먹고 살기 위해서 합니다.” “밥 먹고 살아서 뭐하는데?” 그러면 그 고시생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너는? 네가 그걸 나에게 지적질 하는데 그러면 너는? 너는 왜 사는데?” 이런 점에서 모든 인간은 똑같아요. 이 땅의 것을 얻을 때 우리는 안심하고 평화를 누리자. 그게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님의 기쁨이냐고 물으시는 겁니다. “이 땅에서 내가 이렇게 잘 살았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기쁨이냐, 하나님께 영광이냐 하는 거예요.
창세기 1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복과 저주를 구분했어요.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복이라는 게 아브라함이 없을 경우에는 내가 잘 먹고 잘 살면 복이고 내가 힘들게 살면 저주라고 여겼는데 아브라함이 등장하면서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경우에만 복이 되고 아브라함을 저주하게 되면, 복을 안 빈다든지 믿지 않는다든지 저주를 해버리면 저주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것은 창세기 12장부터 모든 것을 내 중심으로 생각하는 그 사고방식이 일절 하나님 앞에 인정받지를 못한다는 이야기입니다.
특정인간을 복과 저주의 기준으로 내세웠다는 말은 네가 무엇을 가지고 복이라 하는지 혹은 무엇을 가지고 저주라고 하든지 간에 그것은 다 무효가 되는 겁니다. 이 아브라함을 가지고 아브라함 언약이라고 하거든요. 아브라함 언약, 하나님의 약속. 결국 약속과 내 마음과의 싸움이에요. 내 마음, 나 좋은 쪽으로, 나 편한 쪽으로, 내가 부자 되는 쪽으로, 내가 행복한 쪽으로. 내가 행복한 쪽으로 하려면 전쟁을 해서라도 갑옷과 투구를 쓰고 큰 방패를 가지고서라도 이 전쟁은 나에게 정당화되는 겁니다.
내가 잘 먹고 잘살기 위해서 전쟁하는 이것이 뭐가 나쁘냐는 말이지요. 내가 취직하고 결혼해서 사랑하는 자와 잘 살기 위해서 내가 고시공부 하는 이것이 뭐가 나빠요? 하지만 그 사람이 놓친 것이 있어요.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는 그 사항을 놓쳐버린 겁니다. 옛날 구약 때는 아브라함을 축복하지 않으면 저주받는 거예요. 그 아브라함 후손이 커져서 이스라엘이 되었던 거예요. 그 이스라엘을 지금 누가 공격하느냐? 이 곡이 공격하게 되어 있어요.
아, 우리가 세상을 쉽게쉽게 가자고 하는데 우리끼리라면 좋은 게 좋아요. 우리는 어떤 대적이나 충돌, 분쟁, 이런 것이 싫습니다. 될 수 있는 대로 분쟁의 요소를 해소하려고 애를 써요. 어떻게? 남자들은 술 한 잔 먹고 여자들은 같이 쇼핑하고 손잡고 화장실에 몇 번 갔다 오면 다 풀어져 있어요. 여자들은 화장실에 갈 때 왜 같이 가는데 아직까지 의문인데. 우리는 어떤 다툼이 있게 되면 긴장이 되고 스트레스가 되기 때문에 그냥 푸는 게 좋고 좋은 게 좋은 거예요. 우리 인간들끼리는.
그런데 그 인간들 끼리에 못 끼는 분이 계셔요. 그게 누구냐? 인자되시는 예수님께서는 인간들 게임에 섞이지를 않아요. 섞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끼어들지 마, 하고 배척하면 그만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예수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으니까 이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마치 아브라함을 축복하지 않으면 복을 받지 못하고 저주 받는 그 일방적 원리원칙을 주께서 이 땅에 심어버린 겁니다. 이게 보통 큰 문제가 아니에요.
여러분이 사사기 때 가나안 족속이 열 족속이 있는 것을 아실 겁니다. 성경을 보면서 우리는 당연히 우리가 하나님 편이라고 생각을 해서 그들을 물리칠 때 우리는 신난다 하고 박수를 쳤지만 입장 바꿔서 생각해 보세요. 열 족속이 우리의 일가친척이고 내가 그 열 족속에 속한다면 어디서 굴러온 돌이 잘 살고 평화롭게 살고 있는 이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는데, 그래서 항의하기를 “평화롭게 잘 살고 있는 이 마을에 왜 쳐들어왔습니까?” 하고 물으니까 그들이 하는 말이 너무나 엉뚱해요. “여호와 이름으로 접수하러 왔다.” 하는 거예요.
이것은 조폭입니다. 접수하는 이것은. 여호와 이름으로 접수하러 왔다는 거예요. 듣는 사람은 너무나 억울하지요. 그 억울한 심령이 뭐냐? 지금의 팔레스타인사람들이에요. 그 사람들이 블레셋사람들인데 옛날부터 조상들이 살고 있던 땅이에요. 이스라엘이 2차 대전 이후에 와가지고 이 땅을 접수하겠다는 거예요. 왜 접수 하냐고 하니까 “이것은 우리 여호와 하나님이 ‘내 땅’이래.” 세상에 이게 무슨 깡패도 아니고 조폭도 아니고 뭐 이런 인간들이 다 있어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그러면 팔레스타인이 기가 차서, “그러면 우리가 당신을 거부하면 어떻게 되는데?” 그쪽에서 하는 말이 “이스라엘을 거부하는 것은 저주를 받는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성경에 나온다는 거예요. 그것은 너희들 경전이고 우리들 경전에는 그런 것이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한 번 붙어볼까?” 그게 6일 전쟁이에요.
이것은 이성적으로 말이 통할 수가 없어요. 우리가 성경을 믿는다는 것은 이성적으로 논리에 맞지 않는 터무니없는 짓을 하는 겁니다. 인간의 존엄성? 무슨 존엄성이 있어요?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이 존엄성인데 이스라엘의 전쟁에, 여호수아전쟁에 무슨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이 있습니까? 그런 것 없어요. “그들이 정복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기 위함이다.” 여호수아가 외치고 들어갑니다. “너희들이 우리한테 당해야 될 이유는 너희들이 저주받는 민족이라고 우리가 믿는 여호와께서 그렇게 정했다.”고 하는 거예요.
듣는 사람의 동의도 구하지 않습니다. 일방적으로 쳐버리는 거예요. 아브라함의 자손이 커져서 이스라엘 되었지요. 그 이스라엘 집단을 축복하지 않으면 저주받습니다. 그 이스라엘이 가만있는 것이 아니에요. 움직여요. 움직이면서 애굽에 있던 이스라엘이 광야를 거쳐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 버리면 이게 활력소를 얻습니다. 활력소를 얻는 것이 그들이 전쟁하고 싶어서 환장한 것이 아니고 그들 가운데 있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진동시켜 버리지요. 그 중의 한 예가 뭐냐 하면, 블레셋 나라가 사울 왕 때 쳐들어왔을 때 무려 키가 3미터가 넘는 장군을 앞장세웠어요.
사울 왕이 벌벌 떨었습니다. 그때 싸가지가 없는 소년 하나 등장합니다. “형님! 내가 처치할게.” 해서 물맷돌 돌려서 골리앗 이마에 박아서 죽였습니다. 칼도 없어서 그 골리앗의 칼로 골리앗을 죽였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이유가 딱 한가지입니다. 뭐냐 하면, 우리는 할례를 받고 그들은 할례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죽어 마땅하다는 겁니다. 무슨 그런 논리가 다 있습니까? 이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께서 블레셋과 다윗의 전쟁을 계속 진동시키고 반복시키고 있는 중입니다. 왜? 앞으로 이 땅, 이 역사가 끝나는 마지막 때에는 하늘에서 오신 다윗 같은 예수님과 하나님께서 지상에 있는 모든 인간을 상대로 전쟁을 벌인다는 것을 에스겔 38장을 통해서 미리 예언해주신 겁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못하는 자들은 이 세상에서 맴매해야 돼요. 매를 맞아야 돼요. 저주 받아야 돼요. 예수님의 일방적인 주장입니다. 그래서 이슬람은 예수를 싫어합니다. 왜? 자신의 존엄성을 건드렸기 때문에. 그러나 주님 앞에서는 인간의 존엄성이라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 모든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저주받아야 마땅하기 때문에. 따라서 예수 믿는 사람은 이 땅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일종의 미친 소리를 들어줘야 돼요. 완전히 미쳤다는 소리를 들어야 해요. 사도바울도 고린도후서에서 “네가 미쳤구나.” “그래 미쳤다. 하지만 사랑에 미쳤다.”(고후 5:13) 하는 이야기를 했어요.
사도바울 자체가 미친 사람입니다. 그 말을 믿는 사람도 같은 동지에요. 같이 미친 인간이에요. 말로 설명하고 언어나 논리로 서로 소통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소통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지금 전쟁 중에 있으며 전쟁에서 하나님이 뭘 기뻐하느냐, 그것은 이스라엘 건드리면 너희들은 당한다는 그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 가만 있는 마곡민족을 아가리……, 이 아가리라는 말이 욕이 아니고 4절에 나옵니다. “너를 돌이켜 갈고리로 네 아가리를 꿰고.” 갈고리로 아가리를 꿴다고 하니까 노량진 수산시장이 생각나요.
갈고리를 가지고 큰 아가리, 상어나 고래의 아가리를 꿰어서 질질 끌어당기면서 전쟁하기 싫어도 너는 나와서 연합군을 만들어서 저 남쪽에 있는 이스라엘을 공격을 해야 돼요. 공격을 해놓고 된 통으로 얻어터져야 돼요. 왜? 이스라엘이라 하는 것은 여전히 복과 저주를 규정하는 기준이 된다는 것을 인자를 통해서 알려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겁니다.
오늘 이 상황, 똑같은 상황이 21세기의 우리에게 들이닥칩니다. 친한 친구가 갑자기 십자가 복음 가지고 시비 걸면서 달려들 때 그 아가리에 갈고리가 꿰었다고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명절에 큰댁에 모였을 때에, “잘 있었나? 건강하지? 착하고 예쁘고 …….” 이렇게 하다가 갑자기 종교이야기만 나오면 각자 원수가 되어서 헤어지는 경우, 주께서 갈고리 가지고 아가리 꿰어서 전쟁 벌인 겁니다. 우리가 그런 팔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영적 전쟁 있다고 사도바울이 이야기했지만 우리는 전혀 감을 못 잡고 있다가 난데없는 복음 때문에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유 없는 핍박과 미움을 받게 되는 경우를 통해서 다시 한 번 에스겔 38장의 경우가 반복됨을 느낍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일부러 시킨 일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그런 가운데서도 도리어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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