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영원한 왕 다윗(겔37;24-28) 141112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4. 11. 14. 08:33

영원한 왕 다윗(에스겔 37:2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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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왕 다윗

2014년 11월 12일 본문 말씀: 에스겔 37:24-28

(37:24) 내 조상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니 그들에게 다 한 목자가 있을 것이라 그들이 내 규례를 준행하고 내 율례를 지켜 행하며

(37:25) 내가 내 종 야곱에게 준 땅 곧 그 열조가 거하던 땅에 그들이 거하되 그들과 그 자자손손이 영원히 거기 거할 것이요 내 종 다윗이 영원히 그 왕이 되리라


(37:26) 내가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고 또 그들을 견고하고 번성케 하며 내 성소를 그 가운데 세워서 영원히 이르게 하리니

(37:27) 내 처소가 그들의 가운데 있을 것이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37:28) 내 성소가 영원토록 그들의 가운데 있으리니 열국이 나를 이스라엘을 거룩케 하는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본문에 나오는 다윗은 하나님께서 ‘다윗 언약’이라는 이름으로 언약을 주신 사람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 모호하거나 추상적이거나 막연한 것이 아니라 ‘다윗’이라는 인물로 통해서 역사적으로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음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이 ‘다윗’이라는 자는 간음죄와 살인죄와 그리고 인구조사를 한 죄까지 저질은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언약은 받은 인물이 죄를 지었다고 해서 과연 ‘다윗 언약’까지 취소가 되느냐하는 문제가 고려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다윗이 죄를 지어도 다윗 언약은 지장 없다’ 정도가 아니라 ‘다윗은 다윗언약에 준해서 죄를 지어야 하는 죄인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 정답입니다.

그것은 다윗 언약이 ‘왕’ 위상‘ 만들기와 관련 있기 때문입니다. 왕이라는 것이 인물이 있다고 해서 그게 다가 아닙니다. 그 인물의 일대기를 통해서 진정 이스라엘의 왕이 이스라엘에 대해서 어떤 역할과 어떤 능력을 발휘하게 되느냐를 표출됩니다. 다윗은 먼저 하나님에게 성전을 지어드리겠다고 제안합니다. 그것이 사무엘하 7장의 내용입니다.

하지만 그 뒤 실제적으로 성전이 건립된 것은 열왕기상 8장, 솔로몬 시대에 건립됩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져야 했던가요? 역대상 28:2-3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에 다윗 왕이 일어서서 가로되 나의 형제들 나의 백성들아 내 말을 들으라 나는 여호와의 언약궤 곧 우리 하나님의 발등상을 봉안할 전 건축할 마음이 있어서 건축할 재료를 준비하였으나 오직 하나님이 내게 이르시되 너는 군인이라 피를 흘렸으니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즉 성전이란 모든 전쟁이 종료되고 난 뒤, 그 전쟁에 관여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기념하는 곳으로서 성전이 건립됩니다. 이것은 오늘 본문 26절에서는 ‘화평언약’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성전이 전쟁과 관련 있다는 말은, 다윗 언약의 내용이 곧 전쟁을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유발시키고 그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평정되는 내용으로 채워진다는 말이 됩니다.

이는 ‘전쟁 없이 평화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상대로 전쟁을 벌리시겠다는 겁니까? 바로 이점을 다윗이라는 실존 인물의 일대기를 통해서 보여주시고자 하십니다. 다윗의 위상은, 이스라엘의 왕의 위상입니다. 자기에게는 숱한 백성들이 예속되어 있습니다.

왕의 여부에 따라 나라가 망하기도 하고 나라가 흥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다윗은 피 흘려가면서 이스라엘의 참된 본질을 사수해야 될 책임자로서 왕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 책임자가 이방나라와의 전쟁 중에 간음죄를 범하게 됩니다. 성전을 제안한 사무엘하 7장과 실제로 성전이 세워진 열왕기상 8장 사이의 내용에서, 이 간음죄가 중요한 동기가 됩니다.

왜냐하면 실제적으로 성전을 세운 그 왕, 솔로몬이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이기 때문입니다. 사무엘하 12:24-25에 보면, “다윗이 그 처 밧세바를 위로하고 저에게 들어가 동침하였더니 저가 아들을 낳으매 그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선지자 나단을 보내사 그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심을 인함이더라”.

즉 다윗과 밧세바의 간음으로 밧세바가 임신을 하게 되는데 처음에 다윗은 그 임신된 아이로 인해 자신의 죄가 들통날까봐 후차적 조치를 취하게 되면서 벌어진 사건이 바로 밧세바의 본 남편인 우리아 장군의 죽음입니다. 그러니까 이 우리아 장군에게 있어 암몬 군대가 자신의 적이 아니라 다윗이 자신의 적이 된 셈이 되었습니다.

이는 곧 다윗의 죄가 하나님의 적이라는 말이 됩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점을 감안해서 ‘다윗 언약’이 다윗에게 주어졌기에 새로운 이스라엘은 바로 다윗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 드러난 자들의 집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다윗으로 하여금 ‘다윗 언약’의 적이 되게 하셨습니다.

참된 이스라엘은 다윗이 아니라 ‘다윗 언약’에 준해서 만들어져야 합니다. 그러려면 다윗 언약에 준해서 ‘이스라엘 왕’이 태어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아 장군의 아내인 밧세바로 하여금 다윗을 통해서 임신케 하는데 그 임신한 아이를 죽게 하므로서 다윗 언약 앞에 죄를 지은 죄가 구체적으로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의로운 ‘희생자’의 모습으로 등장됨을 알립니다.

바로 이 사실에 대해서 나단 선지자가 다윗을 찾아올 때에 다윗은 감을 잡게 됩니다. 즉 다윗 자신이 이스라엘 왕이 된 것은 의인의 자격이 아니라 아예 애초부터 죄인의 자격으로 왕이 되었다는 점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다윗 본인의 노력과 선함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윗 언약’의 연속성에 의해서 죄인으로 인해 ‘희생물 출현’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 ‘희생물 노선’이 바로 다윗 언약의 노선입니다. 그 죽은 아이를 대신하여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 새로운 아이를 허락하시는데 그 아이가 바로 솔로몬입니다. 곧 하나님의 성전을 건립하게 되는 다윗을 잇는 다음 이스라엘 왕입니다. 이 성전이 건립되기까지 다윗은 두 종류의 전쟁을 완료하게 됩니다.

하나는 주변 이방민족과의 전쟁에서 평정합니다. 하지만 다윗이 감당해야 될 또 다른 성질이 전쟁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윗 집안에서 일어나는 전쟁입니다. 이 전쟁은 ‘과연 다윗의 혈통이 진정 이스라엘의 왕 위상에 합당한가’를 따지게 만드는 전쟁입니다. 압살롬의 난을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해서 평정하고 사울 가문의 반란도 진압하게 됩니다.

솔로몬의 왕됨은 바로 이런 전쟁의 틈에서 솟아올라옵니다. 이는 희생물에 의한 ‘죄 용서’가 인간이 저지른 죄에 대해 승리한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이스라엘은 다윗의 범죄에 참여하면서 다윗언약 자체내에서 작용하는 희생물에 의존하여 생긴 백성들의 집합입니다. 그리고 그곳이 또한 거룩하고 영원한 성소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복음은 두 방면으로 전쟁을 벌립니다. 하나는 이슬람이나, 불교나 무종교와의 싸움입니다. 하지만 더 근원적인 전쟁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교회나 기독교의 전쟁, 곧 내부 전쟁입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지 아니하면 천국은 없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교회가 구원하는 것이 아니요, 십자가 진 적이 없는 목사가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유일하게 지신 예수님의 피 능력만이 구원할 수 있음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13강-에스겔 37장24절-28절(영원한 왕 다윗)141112-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37장 24절-28절입니다. 구약성경 1211페이지입니다.



에스겔 37:24-28



“내 종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니 그들에게 다 한 목자가 있을 것이라 그들이 내 규례를 준행하고 내 율례를 지켜 행하며 내가 내 종 야곱에게 준 땅 곧 그 열조가 거하던 땅에 그들이 거하되 그들과 그 자자손손이 영원히 거기 거할 것이요 내 종 다윗이 영원히 그 왕이 되리라 내가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고 또 그들을 견고하고 번성케 하며 내 성소를 그 가운데 세워서 영원히 이르게 하리니 내 처소가 그들의 가운데 있을 것이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내 성소가 영원토록 그들의 가운데 있으리니 열국이 나를 이스라엘을 거룩케 하는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신앙은 구제하거나 봉사하는 그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이라 하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봉사하는 것 쉽고 섬기는 것도 다 쉽습니다. 하지만 제일 어려운 것이 뭐냐?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오라고 할 때 제자들은 그걸 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십자가에 달린 분은 예수님 혼자밖에 없었고 다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 떨어져 나간 그들에게 주께서 다시 찾아오셔서 “네가 구원받는 것은 네가 나를 3년 동안 따라붙은 공로로 받는 것이 아니고 내 자비와 용서와 사랑으로 구원되었다.”고 언급하신 거예요.



그러면 제자들은 왜 붙어 있는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자기 구원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제자들을 통해서, 그들을 통해서 분명히 우리에게 보여준 겁니다. 예수님이 살았던 그 시대는 유대인들이 지배하는 시대였습니다. 알다시피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철석같이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에스겔, 이것도 구약성경에 해당되지요. 그들이 구약성경에 해당되는, 그리고 우리고 보고 있는 그 성경말씀을 그들이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도대체 에스겔을 그들은 어떻게 해석했기에, 우리가 보고 있는 이 말씀을 그들도 봤을 것인데 무엇이 틀어져서, 뭐가 잘못되었기에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고 그 예수님을 죽인 일을 하나님 앞에 잘한 짓으로 곡해를 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그 유대인들의 실수, 유대인들의 오류가 남의 이야기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합니다. 우리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야 되거든요. 유대인과 복음과 차이점이 뭐냐 하면, 유대인들은 여호와 하나님, 그 신을 직접 상대하고자 하지요.



그러나 신약에 나오는 사도바울이 전한 복음은 중보자 되시는 분이 우리를 먼저 만나게 된다는 그 점이 기존의 신 중심의 기독교와 다른 겁니다. 심지어 유신론종교와의 차이점이 그겁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를 상대하기 위해서 중보자가 오신 것이 아니고 너희들이 알고 있던 그 여호와 그것이 가짜였다는 겁니다. 참 신이 아니었다는 거지요. 그것은 너희들 속에 죄가 있고 죄가 너희들에게 문제를 일으켜서 성경에 있는 여호와 하나님을 본인이 믿는다고 착각을 했지요.



그런데 막상 그들이 여호와가 보내신 참된 메시아가 왔을 때, 중보자가 왔을 때 그들은 알아보지를 못했습니다. 이 점은 유대인들이 머리가 나빠서가 아니라 우리하고 똑같은 입장이에요. 그 사울이라는 사람이 머리가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그 사람은 가말리엘 문하에서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누구보다도 앞장선 사람이에요. 그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였다는 그 말은 이것은 인간의 한 실수라고 보지 않고 저는 모든 인간이 갖고 있던 기본적인 본성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 본성을 사울이라는 사람이 대신 다 보여줬어요. 그런데 그 사울이라는 사람이 구원을 받게 돼요. 하나님의 사도가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에 포인트를 맞춰야 하느냐 하면, 대체 사울이 바울 되는데 무엇을 경유했느냐를 봐야 됩니다. 사울이 바울 되면서 경유했던 그것을 바울이 되고 난 뒤에 자기 입으로 토해놓았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갈 2:20)는 그 십자가라는 것이 과거지사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과거일이 아니고 성령 안에서 십자가가 계속해서 반복되면 반복될 때마다 거기서 나 같은 새로운 성도가 창조되고 거기서 새로운 성도가 거듭나게 된다는, 그래서 그렇게 거듭난 사람들이 모든 그것이 바로 진정한 참 이스라엘이고 천국 갈 백성이라는 것을 하나님은 사울을 준비해서 우리에게 그걸 알려준 거예요.



유대인이 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고, 사울이 있다는 것도 역사적 사실이,고 십자가 사건도 역사적 사실이고. 따라서 누가 너무 허황되게 “여호와 하나님, 전능하시고 자비하시고……” 이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에스겔은 우리로 하여금 이 에스겔 당시에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있었는가, 역사적으로 어떤 것을 주께서는 미리 예언했던가, 라는 것을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보게 되는 겁니다. 보게 되면 여기서 중요한 키워드, 중요한 단어들이 나열되어 있어요.



그걸 보게 되면 25절에, ‘내 종 다윗’ ‘왕’ ‘야곱’ ‘다윗’ 26절에, ‘화평의 언약’ 26절에 ‘성소’ 그리고 27절에, ‘내 백성’ 이런 단어들이 등장해요. 자, 이런 단어들이 등장할 때 그런 단어들이 등장해야 될 그 취지가 뭐냐?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인간 쪽에서 봉사하고 섬기고 전도하고 애쓰고 노력하는 것, 그런 것이 신앙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말씀대로 하거든요. 그런데 그 말씀, 방금 제가 찾은 키워드, 중요한 포인트가 되는 단어를 짧은 본문에서 끄집어냈습니다. 다윗, 화평의 언약, 왕, 처소, 그리고 백성, 이런 단어들은 우리가 그것을 알아서 지켜서 완수해야 될 것이 아니고 하나님 쪽에서, 말씀을 던진 하나님 쪽에서 그 던진 말씀을 스스로 일구어나가는 가운데서 완성이 되어갈 때 우리는 그 일의 결과물로서 이 땅에 등장한다는 겁니다. 결과물로.



사울이 예수님 믿는 사람 핍박할 때 이런 계산을 하지를 않았어요. ‘내가 이렇게 예수님 핍박하게 되면 예수님 나타날걸.’ 이런 계산을 하지 않았을 거예요. 자기 뜻은 따로 있고 주의 뜻은 따로 있었습니다. 예수를 핍박하던 그 자를 주님께서 성도로 돌려세웠다는 말은 하나님은 너의 뜻을 감안해서가 아니라 바로 주께서 예언한 말씀대로, 말씀의 키워드대로 짜 맞추면서 일방적으로 완성을 한 거예요.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은 뭐냐 하면, 내가 “열심을 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말씀대로, 주께서 예언하신 그 예언대로 저한테 적용을 시켰기에 제가 구원받게 되었습니다.”라는 말로 고백이 되는 겁니다. 그런 고백이 신약성경에 가득 차 있거든요.



그렇다면 방금 이야기한 이 중요한 포인트가 되는 이 일들이 실제 역사 속에서 어떻게 구체화되는가, 하는 문제가 주어졌지요. 조각가가 하나의 대리석을 가지고 다듬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구경하는 사람이 볼 때 볼품없지요. ‘그냥 딱딱한 돌이네.’ 그런데 막상 미켈란젤로나 라파엘로의 작품을 보게 되면 “와! 이게 돌이야 천이야? 그냥 실크 같아.” 너무나 얇게 그래서 너무나 부드럽고 살아 있는 물체처럼 느껴집니다. 너무 아름답지요. 도대체 돌에다가 무슨 짓을 한 거야? 무슨 짓을 했기에 이렇게 마치 산 사람처럼 느껴지는가?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내 종 다윗’ 이런 이야기를 언급할 때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어떻게 해야 됩니까? 바르게 해야 됩니까?” 하는 그 신앙의 모델을 성경 바깥에서 찾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언급하기 위해서 다윗을 언급한 겁니다. 보통 신앙의 생활의 모델로 삼는 것은 큰 교회 당회장이라든지 김수환 추기경, 테레사수녀, 이렇게 언급하는데 그것은 성경에 나와 있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그 사람들은 전부 다 죄인일 뿐이에요. 신앙의 모델을 우리가 보는 성경바깥에서 찾아버리면 그 사람은 참 훌륭한 사람 되잖아요. 그런데 신앙의 모델을 성경 안에서 찾아버리면 그 성경 안에 나오는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본인들은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 사람들이에요.



대표적인 사람이 아브라함인데 아브라함은 아무 행한 것도 없이 의롭다 함을 받아서 구원을 받은 사람이에요. 로마서 4장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우리 보기에는 아브라함이 아들도 바치고 뭐 대단한 것을 한 것 같은데 성경은 이렇게 해석합니다. 아브라함이 어떤 행함과 관계없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대표적인 인물로 보는 겁니다. 우리는 모델을 성경에서 찾는 것이 아니고 바깥에서 찾다 보니까 ‘저 사람처럼 열심히 하면 구원 받겠지. 저 사람처럼 착하면 구원 받겠지.’ 하는데 그렇게 되면 그것은 계시가 아니에요.



참된 계시는 뭐냐? 죄인인 자를 구원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다윗 같은 이 사람은 간통한 사람이요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을 저지른 사람입니다. 이것은 살인자에요. 그것도 비겁하게 남자답지 못하고 얍삽하게 살인한 사람이에요. 그런데 그 사람이 이스라엘의 임금입니다. 그 분이 임금이라는 말은 그 밑에 있는 백성들도 얍삽해야 된다는 뜻이에요. 비겁해야 되고 자기 죄를 감추기 위해서 온갖 수작을 평생토록 해야만 하는 그런 인간들이 그 왕에 딱 맞춤 백성들이에요.



임금도 마찬가지고 그 밑의 백성도 마찬가지고 다 같이 얍삽하기 짝이 없는 인간, 그런 인간이 구원받았다는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로만 구원받게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이스라엘이에요. “세리와 창기가 너희보다 천국 먼저 간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회복시킵니다. 여기 24절에, “내 종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니.”라고 했습니다. 다윗이. 우리가 알기에는 이 시대에 다윗은 이미 죽은 자에요. 죽은 자인데 왜 다윗을 여기서 거론하는가?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무심코 사는 것처럼 느껴질 거예요. 모든 행동을 하는 것이 무심코 하면서 사는 것 같지만 사실 깊이 생각해보고 따져보게 되면 인간은 항상 고향의식을 가지고 살아가요.



집을 떠나서 멀리 가게 되면 그 멀리 가서 하는 행동은, 출장을 간다든지 회사일로 홍콩을 간다든지 중국을 간다든지 하게 되면 그 홍콩이나 중국에서 하는 모든 일의 손짓이나 몸짓의 그 행동 하나하나가 이런 것이 밑에 깔려 있어요. ‘빨리 여기서 일을 끝내고 집에 가서 쉬어야지.’ 이게 항상 있어요. 집 떠나면 개고생이라는 말을 하잖아요. 뭔가 집을 떠나버리면 후딱 원위치 하려는 본성이 있습니다. 항상 그게 있어요.



그러면 그 위치가 어디 있느냐? 그 위치에 가게 되면……, 제가 군대생활을 했는데, 저 같은 인간도 군대에 갔어요. 국방부에서 큰 손해지만 어쨌든 그것도 파악 못하고 가기는 갔는데 군에 가면서 제일 제가 힘들었던 것이 뭐냐 하면, 취사장이 우리 집 부엌이 아니었다는 그 점이 제일 힘들었어요. 그리고 잠을 자는 그 반원으로 되어 있는 막사가 원래 내가 잠자던 방이 아니었어요. 그게 힘들었어요. 낯선 것이 힘들었어요. 왜? 고향의식이 있으니까. 그리고 거기에 있던 그 병사나 선임자들이 내 친구들이 아니었다는 말이지요.



만나는 사람이 내 친구가 아니고 밥 먹는 장소가 우리 집 부엌이 아니고 내가 잠자는 그곳이 내 방이 아니니까 나머지 훈련이고 뭐고 간에 그게 제일 힘든 거예요. 거기에다 스케줄까지 내 맘대로 조정 못하고. 거의 34개월을 했는데, 아니 32개월을 했나? 32개월을 했어요. 교련특혜 2개월 받고 32개월을 했는데 그 32개월, 2년 반이 넘는 그 내내 ‘돌아가야지. 돌아가야지.’ 나만 그래요? 아니에요. 말뚝 박지 않은 사람은 다 마찬가지에요. 전부 다 마찬가지로 ‘어서 달려가야지. 어서 집으로 돌아가야지. 빨리 내 몸으로 익숙한 그곳으로 돌아가야지.’



이스라엘 민족들이 애굽에서 나왔을 때 아무리 모세가 약속의 땅, 약속의 땅을 언급해도 그들의 몸은 애굽의 삶에 익숙해져 있어요. 걸핏 하면 “애굽으로 돌아가야지.” 몇 번이나? 열 번이나 그렇게 했어요. “애굽으로 돌아가야지. 애굽으로 돌아가야지.” 이번 1월의 십자가마을 수련회는 민수기를 할 거예요. 민수기에 나옵니다. 그들은 열 번이나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했어요(민 14:22). 열 번이나 반항하면서.



그렇다면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 믿어라.” “예” “잘 믿어야 돼.” “예” 해 봤자 그들이 하나님 믿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그것이 하늘나라가 그들의 고향이 아니고 자기 고향은 이곳, 자기에게 익숙해진 그들의 삶이 고향이 되기 때문에 아무리 “하나님, 하나님!” 해도 항상 마음에 커다란 바위처럼 무게중심을 갖고 있는 것은 뭐냐 하면, “그냥 살던 식으로 살래요.” 이게 무게중심입니다. 그냥 살던 식으로 사는 거예요. 우리교인들 보세요. 예배 마치면 후다닥 다 가버리잖아요. 후다닥 다 집에 가버리잖아요. 살던 식으로 사는 거예요, 살던 식으로.



아무리 하나님, 하나님, 하늘나라 가고 싶다고 하지만 누가 와서, 강도가 와서 “하늘나라 보내줘?” 하면 “아니! 나중에 갈 거야. 딸 시집보내고 갈 거야. 지금은 때가 아니야.” 이렇게, “제발 부탁하는데 딸 시집보내고 그 다음에 죽을게.” 할 거예요. 옛날 극동방송에서 생중계할 때 그런 이야기 했거든요. 생중계니까 전화가 오면서 답변하는 가운데 어떤 목사님이, “목사님, 그렇게 교회가 헌금을 안 하게 되면 목사님은 뭐 먹고 삽니까?” 하기에 “목사가 하늘나라가 좋다면 먼저 가면 되지 왜 갑자기 목숨에 대해서 애착을 가지십니까?” 하니까 전화를 툭 끊어버려요. 생중계인데, 생중계에요 생중계. 극동방송, 북한부터 해서 중국까지 다 듣고 있는 생중계인데.



그 목사는 천국, 천국, 해도 그것은 하나의 상품에 지나지 않고 사실은 천국을 팔아서 자기가 여기서 살고 싶은 거예요. 이것은 그 목사뿐만 아니고 우리 모두가 그런 거예요. 하늘나라가 좋다, 좋다 하는 그것은 그냥 자기가 신앙인양 포장하는 포장용이고 실제는 천국보다 지금 눈앞에 있는 여기서 밥 먹고 잘 사는 이것이 희망사항이에요. 이게 사는 보람처럼 느껴지지 죽어서 천당 가는 것은 뭔가 실패한 것 같은 느낌이 들잖아요. 여전히 고향, 내가 돌아올 본향은 내가 살아온 내 가족들, 내 코앞에 있는 자식들이 전부지 이 자식들을 버리고 천국가게 되면 내 자식은 누가 돌봅니까? 내 자식이 고생할 것은 뻔한 데 그것은 참을 수 없지요. 천국 가다가도 뛰어내려올걸? 자식 고생하는 것 보면 뛰어내려올 수가 있어요.



이게 뭐냐? 인간은 귀소본능, 다시 자기의 살던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그 본능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는가 하면, 너희들이 평소에……, 이 이스라엘이 에스겔 당시에 망했거든요. 망하고 난 뒤에 너희들이 그리워하는 시절이 어디냐 하면, 그 때 다윗과 솔로몬 시절이 제일 잘나갔습니다. 다윗과 솔로몬 시대를 자꾸 그리워해서…… 이 에스겔당시는 이스라엘이 멸망해요. 멸망하고 지금 바벨론에서 포로 잡혀 있거든요. 그 바벨론 강가에서 울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니 그들은 자꾸 고향을 생각하는 거예요.



고향을 생각하니까 하나님께서 “네가 뭘 원하는가?”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내 종 다윗을 그들의 왕”으로 삼는 거예요. “너희가 지상의 다윗 때를 자꾸 그리워하는데 그 다윗을 내가 보낼게.” 이 말은 다윗이 오고 그 다윗이 지상에서 하늘로 올라간다면 그들도 덩달아서 땅의 이 고향을 찾지 않고 자신의 임금이, 왕이 가신 그 쪽으로 고향이 이동한다는 사실을 그들로 같이 느낄 수 있도록 그렇게 하나님이 조치하신 겁니다. “그렇다면 그 다윗임금이라는 분이 오셔서 우리를 데려가면 일이 간단하네.” 그렇게 되지요. 문제는 그거예요.



이스라엘이 왜 망했느냐 하는 이유를 알아야 됩니다. 자기가 망한 이유도 모르면서 그냥 메시아만 기다려버리면 자기는 마치 구원되어야 마땅하고 당연한 것처럼, 자기는 구원받아야 할 자격이 있는 것처럼 그렇게 오해한 상태에서 그냥 하나님은 자기를 구원하는 심부름꾼밖에 안되지요. 지난주일 낮에 설교에서 그걸 보험이라고 했지요. 보험. 7544-0444, 이런 보험 있잖아요. 사람이 보험을 들 때 자기가 죄인이라고 느끼고 보험 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보험금 낸 만큼 그만한 정당성이 있고 그 보험금에 내 노력을 기여했다고 생각하거든요.



구원이 보험이 되어버리면 그 동안 틈틈이 교회에 헌금한 것, 십일조 한 것이 모여서 만기환급금이 되어버려요. 이게 나중에 상급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나한테 돌아오는, 그 원금 다 찾는 식이 될 수가 있어요. 그렇게 되면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그 하늘의 구원의 원칙과는 어긋나게 된다고요. 자기는 동부화재에, 특정 업체 선전하는 게 되면 안 되는데, 하여튼 자차보험 다 들어서 사고 나면 보험금 탄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보험회사에서 하는 말이 “음주 운전하셨지요? 보험 안 됩니다.” 음주운전하고 무면허운전은 보험금적용이 안되게 되어 있어요. 그러다 사고 나면 보험금을 못 타게 되어 있다고요. 그걸 후딱 이야기해버리니까 못 듣지요.



자기 잘남으로서는 보험 들어봐야 천국에 못갑니다. 그거 보험 잘못들은 거예요. “내가 이렇게 봉사하고 헌금하고 예수 잘 믿었습니다.” 이런 것은 소용없어요. 제가 지금까지 교회를 보면서 제일 안타까운 게 그거예요. 쉬운 예를 들면, 어떤 애는 더울 때 아이스크림을 빨고 있는데 어떤 애는 아이스크림은 다 녹아서 없어지고 막대기만 빨고 있는 경우가 있어요. 제가 그걸 보면 제일 애통해요. 참, 참담하다고 하지요. 남은 맛있게 아이스크림을 빨고 있는데 저는 막대기만 빨고 있는 거예요.



한국교회 전체가 복음은 없고 막대기만 빨고 있어요. 복음을 빨아야 되는데 막대기만 빨고 있어요. “당신은 훌륭합니다.” 어쩌고저쩌고,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이런 되도 않는 소리를 해서 복음은 아니고 전부 다 지 잘난 맛, 내가 얼마나 가치 있는가, 그것만 자랑 질 하고 있는 거예요. 죄가 뭐냐? 자기한테 가치 있는 모든 것은 다 죄가 됩니다. 다윗은 다윗의 가치를 다 없애버렸어요. 그 분이 왕이라면 그 왕이 뽑는 백성은 왕 다윗처럼 자기가 무가치한 인간, 내 구원에 내가 한 게 아무것도 없음을 절실히 느끼는 사람, 그 사람만이 백성으로서 피 흘림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겁니다. 물론 성령이 와야 자기 죄를 깨닫게 되지만. 성령이 오기 전에는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니까요.



임금의 자리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오늘 본문에서 다윗이 왕이 되거든요. 22절에 임금이라 되어 있고 24절에 왕으로 되어 있어요. 다윗이 왕이 됩니다. 그 다음에 26절에 보면, “내 성소를 그 가운데 세”운다고 되어 있어요. 자, 그렇다면 여기서 다윗과 성소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를 봐야 돼요. 우리가 알다시피 성소는 솔로몬 때 세워집니다. 성전을 세우겠다는 제안은 다윗이 먼저 했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서라, 말아라, 하고 거부합니다. 자, 다윗이 성소를 제안할 때 이것이 사무엘하 7장이에요.



그 다음에 솔로몬 이야기는 열왕기하 8장입니다. 그 중간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하는 겁니다. 다윗이라는 그 존재 말고, 다윗이라는 존재는 그냥 죄인이에요. 하나님은 그 죄인이라는 존재 속에 뭘 만드느냐? 제대로 된, 하나님이 원하는 진짜 장차 올 메시아와 같은 왕의 자리를 죄인을 통해서 풍선처럼 부풀어지도록 왕의 자리를 만들어나갑니다. 만들어나가는데 거기에 다윗의 간음죄와 살인죄가 꼭 필요한 거예요. 꼭 필요합니다. 왜 필요한가 하면, 성전을 실제로 누가 만드는가 하면 솔로몬이 만들거든요.



그러면 성전을 짓는 솔로몬이 어디서 나오는가 하면, 다윗과 밧세바의 관계에서 나와요. 이것은 그냥 다윗과 밧세바의 만남이 아니고 죄인을 구원하시는 분이 다윗 속에 들어와서,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서 일으킨 그 죄를, 다윗 속에 들어와서 다윗언약의 모습으로, 다윗 언약을 이루는 왕의 모습으로 들어와서 그 죄를 용서해주는, 용서를 계속해서 해주는 그런 시스템, 장치를 만드는 그 작업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다윗으로 하여금 죄짓게 하시는 겁니다. 그렇게 될 때 성소라 하는 것은 어떤 지역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메시아가 오게 되면 메시아 안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죄인을 용서해주는 그러한 역량이 오실 다윗 속에서 계속 발휘가 되는 겁니다.



그 발휘가 되면서 그 발휘의 증거물이 뭐냐? 눈에 보이는 건물, 예배당이 아니고 어떤 성도라는 이름의 성전이 세워지는 거예요. 성전이 만들어지는 거예요. 바로 성도의 몸이 성전이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아기의 이름이 여디디아에요. 이 여디디아가 누구냐? 솔로몬입니다. 여디디아의 뜻이 뭐냐? 하나님께 사랑을 받았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거지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난 뒤에 솔로몬은 열왕기하 8장에서 하기를 “하나님이여, 아버지께 약속하신 그 성전이 드디어 완성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열왕기하 8장에서 “이 성전에서 우리가 어떤 죄를 지어도 이 성전에서 다윗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는 용서를 해 주옵소서. 다윗을 용서하신 그 하나님이 이제는 우리 다윗 언약 안에서 우리 죄를 용서하옵소서.”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야 이 키워드가 서로 연결이 돼요. 하나의 다윗이 다시 오는 것이 아니고 다윗이 갖고 있던 위상이 있어요. 그 다윗의 가치가 뭐냐? 왕이거든요. 왕인데 다윗을 통해서 만들어낸 왕이 어떤 왕이냐 하면,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죄를 하나님이 용서해주시는 그 효과, 그 능력, 그 시스템을 다윗에게 장착을 시킨 겁니다. 다윗이 왕이 된다는 말은 그 다윗이 아니고 다윗 안에 들어 있는 장치, 다윗을 왕으로 했던 그 장치가 마지막 때 오게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동안 이스라엘은 왜 망했느냐? 그 장치가 오기 전에 다윗이라는 혈통적인 왕들, 그 세습하는 왕, 그 세습 왕들이 자기가 이스라엘 왕이라고 나섰다가 다 깨져서 그래서 나라가 망한 겁니다. 그래서 다윗 언약이 뭐냐? 임금이 제대로 못하면 나라도 같이 날라 가버리는 겁니다. 그 말은 달리 이야기해서 “임금 하나 제대로 되어 있다면 그 나라는 영원하리라.” 그게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그 성소는 영원히 이르게 된다는 거지요. 그렇다면 그 성소가 이르기 전에 26절에, “내가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운다고 했거든요.



화평의 언약이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그 전에 다윗이 스스로 성전 세우지 못하고 아들 때에 세워야 되는 이유가 다윗이 피를 많이 흘렸어요. 전쟁하면서. 화평이라는 말은 뭘 전제로 하느냐? 전쟁하는 중에서는 성전이 세워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전쟁 중에는. 전쟁이 마감되고 끝났을 때 이미 모든 전쟁의 승리자가 될 때 그 때 비로소 임금은 영원한 임금이 되고 어떤 적수도 없는 거예요. 어떤 적수도 없을 때 모든 열방과 이스라엘은 찬양하고 무서워하고 두렵게 된다는 오늘 본문말씀이 그렇게 응답이 되고 성취가 되는 겁니다.



사무엘하 7장에서 다윗이 성전 세우겠다고 하고 그 다음에 열왕기상 그 사이에 다윗이 물론 죄짓는 것도 있지만 다윗이 전쟁을 하는 것이 있어요. 전쟁할 때 두 가지 전쟁이 있습니다. 하나는 외부의 전쟁, 블레셋, 암몬, 모압, 그것 치는 전쟁이 있었고 또 하나의 전쟁은 뭐냐? 이스라엘 내부의 혈통적 전쟁, 소위 압살롬, 자기 아들과의 전쟁, 혈통을 가지고 하나님의 지정된 왕이다. 내가 왕이나 마찬가지다. 왜? 아버지가 다윗이기에 나는 마땅히 왕이 되어야 된다는 왕자의 난, 현대그룹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의 왕자의 난, 왕자의 내부반란, 거기에다가 사울의 반란, 이런 모든 것이 다 평정이 되지요.



이 말을 요새말로 하게 되면 복음이 불교나 천주교나 이슬람교와 싸우는 그것이 기독교의 전쟁도 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전쟁은 소위 기독교 내부의 전쟁, ‘이게 복음이냐 아니면 교회냐?’의 전쟁, ‘교회를 믿을 거냐, 아니면 복음을 믿을 거냐?’의 전쟁, ‘교회를 믿어서 구원받을 거냐, 아니면 복음 믿어서 구원받을 거냐?’ 그 전쟁이 일어나야 돼요. 그 전쟁은 그 교회에 기여한 나 자신의 내부전쟁이기도 한 거예요. “하나님, 교회 봉사 이만큼 하고 목사로 이만큼 했으니까 구원받겠지요?”라는 그것이 하나님의 대적이 되고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했잖아요. 모델을 성경 안에서 찾아야지 바깥의 큰 교회, 그런데서 찾아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많은 선교단체가 복음전하고 선교한다고 외국에 가고 그렇게 하는데, 이슬람을 위해서 어떻게 한다고들 하는데 진짜 어려운 전쟁은 그 선교단체 내부의 전쟁입니다. 선교한다는 빌미로 그 자체가 회사가 아닌지 돌아봐야 되고 그 선교를 빌미로 자금을 끌어 모으는 단체를 키우려고 하는 자본주의적 생리를 가진 기업체가 아닌지의 그 전쟁을 해야 돼요. 어떤 스타에 의존하고, 스타목사에 의존하고 주님의 십자가를 봐야 하는데 십자가를 지지도 않은 인간에게 복종하고 그러지를 않았는지, 그 전쟁.



이것이 다만 선교사나 목사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 교인들도 마찬가지에요. 주님, 주님, 하지만 사실은 내 가정의 행복과 내 가정의 화목에 우선하지는 않았는지. 정말 사도바울처럼 이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고 싶은지 아니면 주께서 부르시면 “안 됩니다. 우리 딸 시집 아직 안 가서 안 됩니다.” 이런 식으로 고개를 젓지는 않았는지. 나의 정당성, “나는 훌륭했습니다. 나의 가치는 하나님이라도 손대면 안 됩니다.” 이런 것, 모든 인간이 다 이런 인간이거든요.



그런데 성령이 오시고 그 성령은 십자가 피로 왔을 때 진짜 임금은 내가, 나에 대해서 내가 임금이 아니고 임금은 따로 있는데 그 임금 앞에서, 피 앞에서 나는 그냥 내 새끼, 내 자식, 내 교회밖에 모르고 내 종교밖에 모르는 이것이 바로 피 흘려야 될 죄인인 것을 다시 한 번 느낄 때 그것이 바로 성령이 임한 하나님의 참된 다윗의 백성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오늘도 복음 듣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복음 이용해서 교회 잘 되려 하고 복음 이용해서 내 가정 잘되려 하는 이 모든 것이 옛날 이스라엘이 당했던 우상숭배의 죄에 해당되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