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한 임금(겔37;22-23) 141105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4. 11. 7. 08:24
2014-11-05 20:48:04조회 : 63
한 임금 141105 이름 : 이근호

한 임금 (에스겔 37: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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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임금

2014년 11월 5 일 본문 말씀: 에스겔 37:22-23

(37:22) 그 땅 이스라엘 모든 산에서 그들로 한 나라를 이루어서 한 임금이 모두 다스리게 하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아니하며 두 나라로 나누이지 아니할지라

(37:23) 그들이 그 우상들과 가증한 물건과 그 모든 죄악으로 스스로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내가 그들을 그 범죄한 모든 처소에서 구원하여 정결케 한즉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새로운 이스라엘이 나타난답니다. 그것은 한 임금의 등장의 효과입니다. 이스라엘이 자체적으로 새로운 임금을 옹립해서 나라를 재건하는 방식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어떤 준비된 한 임금님을 보내셔서 갈라진 이스라엘을 새로 정비하여 통합된 이스라엘 되게 하시겠답니다.

그렇다면 그 새 임금님이 하실 일은 분명해집니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이 남, 북 두 개의 나라로 갈라져야만 했던 그 요인을 임금님의 역할 속에서 자체적으로 해소를 시킨다는 말이 됩니다. 오실 한 임금님이 이스라엘이 분열되어야만 한 그 죄책을 홀로 떠맡으신다는 것입니다.

그 오실 임금님은 누구일까요? 여기서 다음과 같은 사항을 고려해봐야 합니다. 죄를 지어 나라가 둘로 분리된 그 상황에서 과연 또다시 그들의 이해에 부합되는 임금님이 등장한다면 이는 곧, 기존의 실패했던 여러 임금들처럼 오해와 오해를 낳게 될 뿐입니다. 즉 그 당시 사람들이 아무리 정신을 차려서 오실 임금을 고대한다 할지라도 또 메시아 알아보는데 실패할 것이 뻔합니다.

그것은 그들의 죄를 지적하면서 하나님께서 ‘우상숭배’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상숭배의 죄는 특수한 죄요 죄 중에서 가장 기본적입니다. 왜 우상숭배가 근원적이냐 하면 인간이 스스로 죄를 파악하는데 있어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즉 죄인에게 자기 죄를 지적하고 끄집어내어 보라는 것은 그 끄집어내는 행위 자체가 죄가 되기에 실패로 마감될 뿐입니다.

즉 인간들이 전적으로 죄인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인간들의 하나님에 대한 섬김이 필연적으로 우상숭배 죄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요소를 자체적으로 지니고 있음을 하나님께서 지적하시는 겁니다. 우상이란 이스라엘에 있어 ‘언약이 없는 신’을 두고 말합니다. 반면에 우상이 아닌 신은 언약이 있는 하나님입니다.

문제는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기지 않기 위해 언약이 있는 신을 선택할 수 있는 그런 입장에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자기 딴에 언약을 앞장 세우시는 참 하나님을 선택했다고 하지만 곧장 그 자체가 우상숭배로 전락되고 맙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그 이유는 바로 인간의 육적 세대 자체가 아예 죄에서 출현되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의 자기 선택을 인정하려는 성향은 자신이 곧 역사를 지배하는 위치에서 산다고 자부하는데서 비롯됩니다. 즉 인간은 과거를 거울 삼아 미래를 개척하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아무리 역사를 길게 끌어가도 그 전부가 ‘사람의 세대’요 ‘사람들의 때’에 불과합니다. 인간은 아무리 탐구해도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따라서 죄나 의로움에 대한 최종적 위상도 알지 못하면서 꾸역꾸역 자꾸만 자신들의 판단과 의지와 선택을 정당화하는 경향을 보이게 됩니다. 그들이 고대한 메시야는 그들의 속해있는 역사적 이스라엘의 회복이요 회귀입니다. 그들의 문자적 해석은 그들의 시간 의식을 바탕으로 시행됩니다.

이러한 경향은 예수님 때에도 변함이 없고 오늘날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든 역사의 시작이요 종결입니다. 알파도 오메가가 된다는 말씀입니다.(요한계시록 1:8) 신약에 실제로 오신 참된 메시야의 입장에서 봐서 인간이 육이라는 점에서 인간 자체가 곧 우상으로 들통나버린 겁니다.

우리는 이 안목으로 다시 에스겔을 찾아가서 재해석되어야 합니다. 문자적 해석이 아니라 복음적 해석, 곧 영적 해석을 해야하는 겁니다. 왜 죄의 근본이 우상숭배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왜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믿는 것이 우상숭배의 죄에 해당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애초부터 인간이 ‘나 외에 다른 신’의 대변자로 이 땅에 출현했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의 시작이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인 이유는, 모든 죄란 실은 인간들 자체들이 이미 자칭 신으로 행세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장차 일어난 십자가 사건에 근거해서 지적하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 나라의 분열과 멸망은, 인간이 아무리 몸부림쳐도 자신을 신봉하는 우상숭배자의 성질을 변모시킬 수 없음을 확인시키기 위함이요 증거로 남겨두기 위함입니다. 오실 한 임금님께서는 자신의 몸에다 이 증거와 흔적을 새기고 반복적으로 역사 끝날까지 드러내야 합니다.

장차 통합될 이스라엘은 이런 인간 자체의 우상숭배의 죄를 피하려 이루어집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 몸과 의논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자신의 몸으로 아버지의 명령에 따르므로서 더 이상 우상숭배가 되지 않는 영역을 확보하는 작업과 관련있습니다. 에스겔에서 ‘한 임금님’이라고 묘사한 것은, 모든 백성은 오직 한 분 되시는 임금과 하나님과 관계달성으로만 생겨나는 백성이 되기 때문임을 말씀하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임금님이 새로운 이스라엘을 건설하는 방식은 요한복음 15:13-15에 나와 있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친구란, 친구라고 지칭되는 대상자의 모든 약점과 허점과 부족함을 대신 다 가져가는 관계를 말합니다. 못 본척 내버려두지 않는 사이라는 겁니다. 비록 임금님이면서 실제적인 작업은 친구 수준에서 진행시켰습니다. 이는 구원받을 자가 자기 인생을 책임질 필요가 더 이상 없다는 말입니다.

일방적인 조치가 예수님으로부터 발행되는 이유는, 인간은 자신에 대해서 아는 것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령을 받고 난 뒤, 예수님께서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 친구 차원에서 일을 다 처리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면 그 사람은 더 이상 자신의 행함으로 구원작업에 보탤 필요가 없음도 아는 자입니다.

차라리 예수님을 임금님으로 담백하게 고백하고 사는 것이 정말 임금님을 제대로 섬기는 모습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제대로 알게 도와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12강-에스겔 37장22절-23절(한 임금)141105-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37장 22절-23절입니다. 구약성경 1211페이지입니다.


에스겔 37:22-23


“그 땅 이스라엘 모든 산에서 그들로 한 나라를 이루어서 한 임금이 모두 다스리게 하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아니하며 두 나라로 나누이지 아니할찌라 그들이 그 우상들과 가증한 물건과 그 모든 죄악으로 스스로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내가 그들을 그 범죄한 모든 처소에서 구원하여 정결케 한즉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구원이라 하는 것은 죄에서 정결하게 되어서, 깨끗한 존재로 변형시켜서 하나님이 데려가는 것이 바로 구원 작업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죄에서 너희를 정결케 한다.” 오늘 본문에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말씀을 받아들이려면 죄가 무엇인지 알아야 되고 그 다음에 정결함이라는 것이 어떤 상태로 달라짐이 정결함인지도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겁니다. 그래야 그 과정에 투입되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서 우리가 동의하게 되고 감사하게 되거든요.


그런데 문제는 과연 ‘인간이 자기 죄를 아느냐?’ 하는 그 문제입니다.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겼어요. 오늘 본문에도 나옵니다. 그들이 우상을 섬겼다고 되어 있는데 우상을 섬긴 이유가 그들은 그게 죄 아닌 줄로 알았지요. 더 쉽게 말해서 여호와 섬기는 것이 죄가 아닌 줄로 알았던 거예요. 하나님 섬기는 것이 죄 아닌 줄 알았던 거예요. 요즘 말로 하면 예수 믿는 것이 죄 아닌 줄로 알았던 겁니다. 예수 믿는 것은 선하고 예수 안 믿으면 악이다, 그렇게 생각을 했는데 그것은 어떤 경우는 그것이 성립이 되느냐?


우리가 처음부터 죄인이 아니고 우리가 중립상태에 있으면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선이 되고 예수를 안 믿으면 죄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처음부터 죄인이라면 죄인의 마음에서 예수 믿는 그 예수가 과연 진짜 예수이겠느냐, 하는 것을 스스로 한 번 생각해 본적이 있느냐는 말이지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보가 아니에요. 이스라엘사람들은 세상에서 제일 천재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인데 예수님께서 그 점에 대해서 인정했습니다. “너희가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간다.”(마 5:20)는 그 말씀은 세상 내로라하는 모든 선한 인간도 바리새인 뒤에 줄서라는 그 말입니다.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간다는 말은 천국과 비교해 볼 때 인간들 중에서 그나마 제일 천국에 접근했다고 간주한다면 그것은 바리새인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바리새인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은 그 뒤에 줄서 있는, 그 다음 차례에 줄 서 있는 모든 자는 자동적으로 다 밀리지요. 바리새인이 영순위인데 바리새인이 아파트에 못 들어가면 나머지도 다 아파트에 못 들어가는 거지요. 분양 못 받는 겁니다. 베드로요? 베드로도 목숨 바쳐도 못 들어갔어요. 처소가 있어야 들어가지요. 베드로마저 처소가 없다는 거예요.


처소가 없으면 못 들어가지요. 가 봐야 있을 자리가 없는데 어떻게 들어갑니까? 결국 하늘나라는 인간이 들어갈 곳이 못됩니다. 왜? 처음부터 인간이 들어갈 자리가 마련되지를 않았습니다. 인간은 그냥 에덴동산에 살다가 에덴동산 무너지면 그냥 망해야 될 운명이죠. 그걸로 족해야지요.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죄가 뭔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나는 죄가 아닐 거라고 시작해서 여호와를 믿었는데 결과는 우상숭배로 나왔다면,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이라면, 오늘날 우리가 이 본문을 해석하고 보면서 또 우리 자신을 다시 한 번 되비쳐 보면서 이스라엘사람들은 실패했지만 우리는 실패하지 않는다는 그러한 자신감은 허풍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에스겔이 성경에 아직도 이렇게 있다는 말은 네가 직접 예수 믿으려 하지 말고 에스겔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에스겔 쪽에서 예수 그리스도 메시아를 다시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가져야 된다는 겁니다. 가지게 될 때 그들은 다시 한 번 메시아라는 것이 죄악 되고 욕심 많은, 우리가 원하는 메시아는 우상적 메시아라는 것을 우리가 짐작을 해야 됩니다. 짐작을 하는 방법으로서 오늘 본문이 나와 있습니다.


오늘 본문 내용은 이렇습니다. 한 임금님의 다스림의 효과로 새로운 이스라엘이 나온다. 이렇게 단출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한 임금님이 등장하는데 그 한분의 임금님이기에 나라도 하나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말은 뭐냐? 이스라엘이 있고 임금님이 오는 것이 아니고 임금님이 등장해서 그 임금님에 의해서 새롭게 이스라엘이 와버리면 그 이스라엘은 두 번 다시 갈라질 이유가 없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임금님은 어디를 배경으로 해서 오느냐 하면, 이미 이스라엘이 둘로 갈라진 입장에서 임금님이 오거든요. 그렇다면 오실 임금님이 해야 될 일이 있습니다. 그 해야 할 일이 뭐냐? 이스라엘이 갈라지고 분열이 되었던 그 이유와 요소를 자체적으로 해석을 했다는 바탕위에 하나님께서는 그 임금에게 새로운 나라를 제공해 주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과 아들과의 약속이고 다른 사람은 끼어들지를 못해요. 성부와 성자만의 계약입니다. 다른 사람은 근처도 가지 마세요. 만약에 구원 받는다면 예수님과 아버지와의 계약이 체결되었고 완료가 된 그 효과를 보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는 겁니다. 지금까지 설교한 것을 요약하게 되면 인간은 처음부터 죄인이었다. 죄인이었기에 그 죄의 결과는 결국 이스라엘처럼 나라가 둘로 쪼개질 수밖에 없다. 쪼개진 나라는 이스라엘로 취급을 안 하니까 그것은 허사였다. 쪼개지면서 그들은 우상을 섬겼던 죄가 나올 것이고.


문제는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면 이 쪼개진 나라문제를, 쪼개진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알아서 해결할 문제가 아니고 결합될 문제도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은 새로운 임금이 오게 되면 인간에 의해서 쪼개진 나라를 새로운 임금이 등장해서 인간이 미처 봉합하지 못한, 봉합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그것을 오실 임금님이 다시 그 나라를 봉합시켜서 한 나라가 되게 하십니다. 그런데 봉합시킬 때는 나라가 쪼개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내력과 과정을 온 몸으로 다 감수를 해서 스스로 아버지 앞에서 해소가 된 상태에서 임금님이 그것을 완수했을 때 새로운 나라가 거기서 등장하지요.


이것이 바로 에스겔 입장에서 장차오실 어떤 메시아를 바라보는 눈입니다. 그렇게 될 때 여기서 백 프로 이 본문을 보게 되면 오해하기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에스겔 당시에 그 이스라엘은 역사적 이스라엘이거든요. 실제로 이스라엘이 BC 722년에 북쪽이 망했고 BC 586년에 남쪽이 망했습니다. 실제로 그 나라가 있었어요. 실제로 역사 속에 그 나라가 있으니까 그 나라입장에서 인자라고 불리는 에스겔이 실제로 거기에 투입이 되어서 이 말씀을 지금 예언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그 당시 사람들의 입장에서 백 프로 듣게 되면 “그래, 이 깨어진 우리나라가 하나가 되는 거야.”라고 생각할 거예요.


쉽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2014년도에 한반도는 두 개 나라로 쪼개져 있습니다. 하나는 북쪽이고 한 쪽은 남쪽이고. 그럴 때 가야산에 어떤 선지자가 나타나서 하는 말이 “장차 메시아가 올 텐데 그 때는 한반도가 두 나라가 아니고 한 나라가 될 것이다.”라고 이야기를 했다면 그 이야기를 2014년에 듣는 우리 입장에서는 ‘아, 지금 저 북한과 남한이 한 민족을 이루어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되는구나.’라고 백이면 백 생각하잖아요. 그게 잘못이라는 말이에요. 그게 잘못이에요.


신약에서 오셨던 메시아는 에스겔 당시에, 오늘 본문 37장 당시에 고대했던 자기나라 하나 됨이 아니고 묵시에 속한 새로운 이스라엘, 그들이 아는 아브라함의 혈통에 따른 열두지파가 아니고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에 따른 새로운 교회라는 이름의, 새로운 영적모형으로서의 열두 지파에 해당되는 이스라엘이 14만 4천이라는 상징적인 숫자와 더불어서 그들만 천국 가서 열 두개의 보석으로 된 문이 만들어진 그 예루살렘 성에서 그들은 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신약성경 요한계시록 21장에 나오는 그 내용이에요.


계시록 21장에 나오는 것과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고대하는 것과 매치를 시켜보세요. 맞는가? 안 맞지요. 맞지를 않는 거예요. 그래서 고린도후서 3장에서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성경은 문자로 봐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겁니다. 성경은 문자로 봐서는 안 되고 영으로 해석이 된다고 했습니다. 육으로 해서는 안 되고, 문자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베드로후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자로 해석해서는 안 되고 영으로 해석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영으로 해석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문자로 해석하는 것을 부정해야 됩니다. 스스로 그것을 죄라고 쳐내야 되는 겁니다.


이 말은, 문자로 해석을 하세요. 다 했지요? 해놓고 쳐내라는 말이지요. 이게 참 굉장히 어려운 거예요. 글이 있기에 글대로 했다는 말이지요. 임금이 온다기에 그 임금이 오실 테지요. 스가랴에 보면 메시아가 감람산에 오신다고 해요(슥 14:4). 감람산이 그 감람산이고 메시아가 거기에 우뚝 선다니까 우뚝 서는지 알았지요. 지금도 유대나라 그 감람산에 메시아가 온다는 거예요. 감람산이 어디냐? 예루살렘 근처 북쪽 산이 감람산이거든요. 그 감람산에 메시아 오기를 고대하고 있어요.


그게 바로 문자적 해석이에요. 그러면 그 해석 말고 다른 해석이 나올 리가 없지요. 왜 나올 리가 없는가? 성령을 받아야 영적 해석을 하는데 성령을 받지 않는 상태에서는 결국 문자적 해석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러면 그렇게 이야기하는 당신의 성령의 해석은 어떻게 해석하는가? “당신 성령의 해석, 영적 해석을 내놓아봐라.” 이렇게 한다면 이렇게 되는 거예요. 예수님으로부터 출발해서 거꾸로 구약을 해석해나가면 영적해석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예수님 본인이 요단강에서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신 모든 한 발자국 그 타이밍이 그냥 자기가 설치다고 될 문제가 아니고, 조급해서 될 문제가 아니고 “때가 되매, 때가 되매, 때가 되매.” 계속 때를 언급하면서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했더니만 나온 결과는 십자가에서 자기백성의 죄를 다 씻어내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 완성이 되고 말았어요. 성령의 도움으로, 성령의 스케줄 따라서 고분고분 따랐더니만 결국은 예수님이 주님이 되신 겁니다. 그러면 나머지 인간들은? 제자들이고 뭐고 나머지 인간들은 육적 해석밖에 못하지요. 다 떨어져 나가잖아요. 다!


그러면 이 말 다시 하면, 예수님부터 거꾸로 소급해서 에스겔을 봐야 된다는 겁니다. 심지어 예수님 당시에도 마찬가지에요. 요한복음 2장에 가나안혼인잔치 이야기가 있어요. 거기에 마침 결혼식이 있는데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예수님 어머니가 예수님 보고 이야기합니다. “아들아! 이 집에 포도주가 떨어졌다.” 하니까 예수님께서 얼마나 엄마에게 퉁명스럽게 이야기하는지. 효도를 해요? 얼마나 퉁명스럽게 이야기하는지 “여자여! 포도주 떨어진 것과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이렇게 했어요.


하시는 말씀, 그 이유가 뭐냐? “내 때가 되지 않았습니다.” 지금 동문서답 하고 있는 거예요. 마리아는 ‘이 집, 이 결혼식에 포도주가 떨어져서 지금 하객들의 불만이 대단하다.’ 마리아가 그 결혼 주최 측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포도주가 떨어져서 “지금 포도주가 필요하다. 네가 어떻게 알아서 해결 좀 해 봐라.” 했는데 “여자여! 포도주 떨어진 그것과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지금 이 포도주가 떨어진 이 혼인집의 역사적 상황과 나는 아무 상관없이 이 땅에 오신 존재라는 겁니다. 포도주 떨어진 것을 해결하려고 이 땅에 온 것이 아니에요.


그게 바로 육적이고 역사적 관점에 매여 있는 인간들의 육적인 모습이에요. 그것을 이야기하면서 예수님 하신 말씀이 “내 때는 아직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마리아라면 “예수여? 포도주 준비하려면 몇 시간 기다려야 되는데?” 이렇게 물어야 되는데 예수님께서는 마치 그렇게 물을 줄을 아시고 내 때가 되지 않았는데 그 물이 포도주 되는 이적을 그 혼인잔치에서 베풀고 말았어요. 이것은 때의 중첩이에요. 인간들이 생각하는 문자적 해석, 과거에서 현재로 오는 지금 이 때는 포도주 떨어진 그 때와 ……, “나는 포도주 떨어진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온 것이 아니고 내 때는 따로 있습니다. 내가 인간이 못하는 것을 되게 하는, 그래서 죄인도 정결하게 될 수 있는 그 때를 위해서 내가 왔습니다.” 하면서 그 미래의 때를 앞당겨서 보여준 것이 뭐냐? 물이 포도주가 되는 거예요.


그냥 포도주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고 물을 뜨라고 했습니다. 누가 봐도 물이에요. 누가 봐도 물인데 그 물이 사람들이 가서 보니 이게 포도주가 된 겁니다. 사람들도 놀랐지요. 이게 어디서 온 포도주인가? 미래에서 온 포도주입니다. 별에서 온 그대. 비슷하지요. 미래에서 온 포도주. 예수님 때에서 인간의 때로 전달된 그 포도주. 따라서 포도주 먹는다고 구원받지는 못하지만 포도주 주신 분을 믿으면 구원받는, 때가 브리지처럼 연결된 때의 중첩 그 가운데 메시아가 있습니다.


그 메시아가 지금 인자라는 이름으로, 에스겔 이름으로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본문에 투입되어 있습니다. 투입된다면 예수님께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봉합시키는가? 대체 분열될 때 그 분열된 이유가 뭐냐?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23절에 보면, “그들이 그 우상들과 가증한 물건과 그 모든 죄악으로 스스로 더럽”혔지요. 이스라엘이 둘로 쪼개진 것은 우상숭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말은 굉장히 깊은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어떤 의미가 들어 있느냐 하면, 제가 설교 처음에 이렇게 했지요. 인간은 자기 죄를 모른다고 했지요. 인간은 자기 죄를 몰라요. 자기 죄를 모르는 것을 미래에 오실 메시아는 자기 죄를 모르는 자들에게 미리 알려주는 작업을 때의 중첩으로 알려줍니다.


그 알려주는 방법이 뭐냐? 드릴, 죄를 뚫어서 알게 하는 그 방법이 뭐냐? 그게 바로 우상숭배에 관한 십계명에 첫 번째 나오는 조항입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우리가 생각하는 죄는 내가 남에게 피해를 주고 내가 양심상 거리끼는 것, 그런 것을 죄라고 하지요. 그런데 그런 것을 죄라고 한다면 우리는 우리 가운데 죄가 아닌 것이 여전히 많은 퍼센티지를 차지할 수가 있습니다. “주님, 제가 천사도 아니고 하나님도 아니기에 죄를 짓습니다. 죄를 짓기에 제가 지은 죄를 용서해주옵소서.” 이렇게 나오지요.


“내가 뭘 해도 죄입니다.” 이렇게 나오지는 않아요. “살다보니 죄를 지었습니다.” 이렇게 나오는데 다윗처럼 아예 죄 가운데서, “어머니의 모태에서부터 내가 죄 덩어리인 채로 모친의 죄 중에서 내가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라는 말을 안 하지요. 그러니까 그게 바로 죄가 되는 거예요. ‘물론 인간이기에 죄를 지었다. 하지만 전적으로 죄만 있는 것은 아니고 착한 일도 한다.’라는 것이 우상숭배에 해당되는 죄인 줄 몰랐던 겁니다. 자, 그 다음문제입니다. 어떻게 우상숭배가 아무도 알고자 해도 모르는 그 죄를 어떻게 밝혀낼 것인가, 하는 그 문제가 남은 거지요.


하나의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발을 씻어줄 때에 베드로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스승이 제자의 발을 씻어주면 안 되잖아요. 제자가 스승의 발을 씻겨줘야지요. 이게 바로 우상숭배에요. “스승님 발을 씻겨주는 그 정도의 예의범절은 우리가 갖추어져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아무리 모자라고 못되어도 그 정도 선함은 우리 안에 내장되어 있습니다.”라는 그 주장이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이 말 앞에서 다 뚫려져야 돼요. 이거 참 진짜 어려운 문제지만 여러분이 감당 된다고 생각하고 이야기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우상이 뭐냐 하면, 우상이라는 것은 언약이 없는 것을 우상이라고 합니다. 언약이 없는 것, 하나님의 약속이 들어있지 않은 신을 우상이라고 해요. 그러면 약속이 들어 있는 신과 약속이 없는 신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면, 우리 같으면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신과 없는 신이 따로 있어서 우리는 ‘아, 약속 없는 것이 우상이니까 택하지 말고 약속 있는 여호와를 믿자.’ 이렇게 하게 되지요. 약속 있는 하나님이 나타나면 그게 우상이 되는 거예요. 이스라엘 역사 내에서 내내.


그러니 약속 있는 진짜 하나님은 우상과는 다른 방식으로 등장합니다. 어떻게 등장하느냐? 언약적인 하나님은 어떤 형체나 모습으로 보이지를 않아요. 보이지를 않으면서 세상의 모든 신들을 우상이라고 배제하고 내리치는 사건적 형식으로만 나타나는 거예요. 지금 이 이야기가 정말 어느 정도로 어려운 이야기냐 하면, 이런 겁니다.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도 진짜 못된 선생님이 있었는데 선생님이 학생들 보고 뭘 하라고 하면 학생들이 따라서 할 수가 있잖아요. 그 선생님은 일체 학생들보고 하라고 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 것은 없고 뭐든 보기만 하면 지적질만 해요. “내가 하지 말라고 했지, 하지 말라고 했지, 하지 말라고 했지?” 학생들 보기에 그 선생님은 항상 부정적이에요. 뭔가 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는데 뭘 하라는 이야기는 없어요. 꼭 경상도 가장, 가부장적 아버지 같아요. 권위 세운다고. “아이고, 내 자식 예쁘다.” 생전가도 그런 소리 안합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이런 소리는 70평생토록 한 번도 입에 담는 적이 없어요.


“내가 그러지 말라고 했지? 이렇게 하면 안 된다고 했지?” 그냥 지적질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권위적인 아우라를 형성하는 그 방식으로 가정을 카리스마 있게 다루려고 하는 것이 경상도 아버지들의 특성이에요. 자식한테 칭찬해주고 아내에게 사랑한다고 하면 이것은 도저히 남자 입에서 차마 나올 수 없는, 이것은 허접한 남자들이나 하는 짓이지 점잖은 어른은 절대로 그런 소리 하는 것이 아니라고 내내 쇠뇌를 받았는지 아니면 본인의 본성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렇게 무게 있는 척 하는 그것, 적극적으로 뭘 하라는 소리는 안하고 뭐든 부정해버리는 거예요.


사울이 전쟁하기 전에 제사 드린다고 사무엘 오기를 기다렸다가 사무엘이 오지 않으니까 율법을 지킨다고 제사를 본인이 드렸지요. 사무엘이 와서 하는 말이 “순종이 제사보다 낫습니다.”(삼상 15:22) 율법 지킨다고 하는 그것마저 땡, 탈락시켜버리니까 뭘 어떻게 해도 다 안 맞아요. 하나님의 성에 이게 안차요. “나는 지금까지 어떤 여자와도 몸을 섞은 적이 없습니다.” 이렇게 하니까 주님하신 말씀이 “마음속으로 간음한 것도 간음죄다.”(마 5:28) 뭐 어쩌라고? “하나님이여, 나는 최선을 다해서 착하게 살았습니다.” 하니까 주께서 하는 말이 “네 오른손이 범죄하거든 찍어 내버리라.”(마 5:30) 열 두 제자들 손모가지가 근질근질 했을 거예요. 갑자기 손 뒤로 감춘다과 바빴을 거예요. “네 눈을 빼버려라.” 할 때는 전부 다 눈 안 빠지려고 눈 다 가렸을 거예요.(마 18:9)


“남을 비판하면 그 비판으로 도로 네가 비판받는다.”(마 7:2) 대체 뭘 어떡하라고요? 그래놓고는 뒤에 가서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마 7:15) 비판하지 말라면서 거짓 선지자는 어떻게 구분하는데요?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에요. “형제를 보고 미워하는 것도 살인죄다.” 아이고, 그러면 우리는 전부 다 최소 15에서 20년, 혹은 사형선고를 받아야 돼요. 이 말은 뭐냐? 속에서 나오는 것이 더럽다는 겁니다. 네가 우상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보고 여호와, 혹은 신을 섬기라는 말을 해놓고 그 여호와가 어떻게 네 속에 있는 죄로 말미암아 우상으로 변형되고 있는지를 역사를 통해서 낱낱이 보여주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이스라엘나라가 둘로 쪼개진다는 겁니다.


이제 남은 문제는 그거예요. 해결책입니다. 지적질하는 것은 좋아요. 어차피 이스라엘은 망하니까. 그런데 어떻게 그것이 다시 만들어지고 하나가 되고 다시 천국갈 수 있는 정결한 나라가 되느냐, 그걸 어떻게 오실 임금님이 해결할 것인가, 그 문제가 있습니다. 그 문제 알려 드리겠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3절에서 15절이요, “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분명히 에스겔에서는 임금이라고 되어 있어요. 여기서 임금이라고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나라가 되고 안 되고, 망하고 안 망하고, 기어이 나라가 온전하게 이루어지고 천국가게 하는 그 책임은 네가 아니고 임금인 나에게 달렸다는 의미에서 임금이에요. 아까 이야기 다시 하겠습니다. 임금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아서 파견되었기에 임금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이스라엘은 두 번 다시 이스라엘 백성에게 책임을 추궁하는 것이 아니에요.


아버지와 임금사이에 모든 일이 온전하게 완성되게 되면 그 효과로 백성이라는 것이 생겨나게 되고 나라가 생겨나기 때문에 그렇게 생겨난 백성은 그 임금님만 쳐다보면 되지 본인이 자책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람이 자기를 채찍질 하고 채근하는 것은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 흐름을 따라가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오실 임금은 미래에서 우리를 완전히 장악하기 때문에 과거에서 우리가 실패하고 실수한 이 모든 것을 미래의 죄용서가 다 함몰해서 덮어버리고 눈사태나 산사태처럼 덮어서 처리해주기 때문에 정말 그것을 믿는다면 자기를 자책하는 우상숭배 짓을 해서는 안돼요.


인간이 자책하는 그 자체도 본인이 우상이라는 뜻이에요.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그 벌칙에 해당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미래에 무슨 근거로 우리가 내가 우상이고 나밖에 모르는 인간을 덮쳐서 우리가 온전한 이스라엘로 천국가게 하시는가? 그것은 에스겔에서는 임금이거든요. 임금이라는 것은 임금 한 분 때문에 효과 보는 자들이 백성이다. 따라서 백성이 스스로 자기를 책하거나 채찍질 하거나 하지 말라는 거지요. 임금을 가지고 그리스도라 합니다. 예수님 보고 그리스도라 하는 것은 “나의 임금님이시고 나는 임금님에 의해서 생성된 백성이옵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예수님도 요한복음 10장에서 그걸 아시기에 “내 양은 목자를 알고 목자는 자기 양을 알고 어떤 권세로부터도 절대로 빼앗기지 않는다.”고 분명히 다짐에 다짐을 해 놓았습니다. 문제는 그분이 언제 다녀갔느냐 하는 문제거든요. 임금님이 온다니까 그 당시 유대인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다니엘에 있듯이 구름타고 임금님이 오는 줄 알고 기다렸거든요. 기다렸는데 막상 오신 분은 촐랑촐랑 나귀타고 오셨고 그것도 애들이나 좋아하지 사람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요.


그 임금님이 요한복음 15장에서 뭐라고 하느냐? “나는 친구로 왔다.” 하는 겁니다. 친구로. 친구가 뭐냐 하면, 친구란 나의 모든 허물을 대신 다 담당해줘서 책임져 주시는 위치가 친구에요. 친구라 하는 것은 우리의 사정을 익히 알고 우리가 해결할 수 없고 해결할 능력이 없는 것을 익히 아시고 친구 같은 차원에서 우리의 허물과 우리가 천국 가는데 부족한 모든 것, 우리의 죄까지 전부 다 책임지고 자기 것으로 넘겨오게 하시는 그 위치가 친구의 위치입니다. 그게 요한복음 15장 13절에 나오지요.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이것은 너희들이 이렇게 하라는 말이 아니고 “예수님이 이렇게 해서 한 효과를 너희들이 받게 될 것이다.”라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너희들의 친구가 되었기에 너희들도 서로 친구사이가 되어서 너희들이 모인다면 오직 내 이야기, 예수님 이야기만 할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너희, 우리 모두가 친구라는 관계로서 이것이 형성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친구가 부활하고 난 뒤에는 그 에스겔이 말한 임금님, 다니엘에서 말한 구름타고 오실 메시아로, 재림의 메시아로 이제는 자기의 본색을 드러내게 됩니다. 그 메시아가, 하나님이라는 메시아가 여기서는 친구로서 같은 친구의 문제를 해결하러 오신 분입니다.


다 받아내는 거예요. 우리가 절대로 지옥가지 않도록 모든 조치를 다 해주시는 겁니다. 차사고 나면 보험회사에서 다 해주고……, 말만 해주지 해주는 게 뭐가 있어요. CF에는 나와요. 다 해준다고. 다 해준다는 겁니다. 왜냐? 친구잖아! 그런데 그 친구는 제자들이 선택한 친구가 아니고, 제자들이 선택한 친구라면 예수님을 버릴 수도 있고 안 버릴 수도 있고 친구 관계가 끊어질 수도 있는데 일방적으로 주님께서 선언하고 쳐들어오신 거예요. 친구가 될 수도 없는 사이인데 주님께서 친구라는 말을 하시면서 우리의 모든 허점을 다 가져가셨는데 진짜 가져가셨는지 아닌지를 당신이 어떻게 아느냐고 물으신다면 가져갔기에 우리 친구 되시는 분이 죽으시고 사흘 만에 하나님한테 인정받아서 부활하셨잖아요.


죽으심과 부활 그 이상의 증거는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바울이 전하는 복음입니다. 십자가와 부활, 더는 필요 없다는 말이지요. 더는 필요 없다. 누가 병 낫고, 사업 잘되고, 교회 부흥되고, 그런 것은 다 진짜 복음을 가리기 위한 마귀의 장난치기, 장난에 불과합니다. 그런 것 다 걷어내야 돼요. 다 걷어내시면 우리의 생존문제가 아닙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은 자기의 생존문제 때문에 말은 여호와고 속은 이방의 바알을 섬겼어요. 그러나 진짜 이스라엘, 통합된 이스라엘은 생존문제가 아니고 죄 문제입니다.


인간들은 자기의 죄 있으면서도 죄 있는 줄을 몰랐지요. 그저 살기만 하면 자기는 행복을 얻는다고 생각한 겁니다. 사는 것 자체가 복이라고 생각한 거지요. 하지만 죄 문제는 어떻게 할 건데? 죄를 알아야 죄 문제 해결하지요. 친구 되시는 분이 바로 우리가 우상인 것을 깨우치면서 네 문제는 네가 해결하는 것이 아니고 친구인 내가 해결한다고 하시면서 이제는 진짜 구원 못 받는 이유가 못살거나 가난해서가 아니라, 욕심 많아서가 아니라, 이 죄 문제를 유독 아시는 주님께서 죄 문제 해결하시고, 바로 십자가 죽으시고 부활해놓고 그것을 다시 소급해서 오늘날 우리에게 반복시키는 겁니다.


“내가 다 이루었다. 이제 이룬 것이 무엇인가를 내가 너희를 계속 살게 하면서 계속해서 너로 나오게 할 것이다.” 바로 너 자신이 우상인 것을, 우상숭배의죄를, 옛날 이스라엘을 망하게 했던 그 죄를 살아가면서 느끼면서, 그게 나온다는 말, 내가 그걸 끄집어낸다는 말은 이미 내가 해결했기에 인생은 재방송하듯이, 녹화방송 보듯이, 우리로 하여금 구원받은 처지에서 주께 감사하도록 우상의 길을 가게 하시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더 이상 우리가 할 게 없는데 할 게 없다고 설치는 그 자체가 바로 우상숭배인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임금님인 임금님의 가치를 높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