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두 막대기(겔37;15-17)141029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4. 10. 31. 08:55

111강-에스겔 37장15절-17절(두 막대기)141029-이 근호목사

두 막대기(에스겔 47: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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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4-10-29 21:08 
두 막대기 

2014년 10월 29일                         본문 말씀: 에스겔 37:15-17

(37:15)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37:16) 인자야 너는 막대기 하나를 취하여 그 위에 유다와 그 짝 이스라엘 자손이라 쓰고 또 다른 막대기 하나를 취하여 그 위에 에브라임의 막대기 곧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쓰고

(37:17) 그 막대기들을 서로 연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 네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

하나님께서 막대기 둘을 준비하라고 하십니다. 따로 이름을 쓰라고 하십니다. 하나는 요셉의 나라로 지칭되는 북이스라엘이요 다른 하나는 유다의 나라로 지칭되는 남이스라엘입니다. 그리고 이 두 나라가 인자의 손에서 도로 한 나라가 되게 하시겠답니다. 이처럼 하나의 나라가 될 것 같으면 애초에 두 개의 나라로 쪼개질 필요가 꼭 있었을까요?

우리들은 괜찮은 결과물에만 눈독을 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과정은 곧장 잊으려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숨겨진 과정에 눈독들이시는 겁니다. 패역하고 타락한 그 과정에 주목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영광이란 인간은 철저하게 배제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 4:11에 보면,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라고 되어 있습니다.

일은 겉보기에 인간들이 다 하는 것 같은데 정작 하나님께서 영광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입니다. 따라서 인간들의 ‘나로 인한 영광’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영광’으로 바뀔 필요가 있습니다. 이 작업을 위해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영광을 도리어 가리는 기능을 위하여 이 당에 태어나야했습니다.

즉 인간들이 생각하는 ‘지기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의식은 애초부터 허용될 수 없습니다. 인간은 범죄하기 위해서 만들어졌으면 과연 선악과 열매를 기어이 따먹고 흙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흔히 세상 사람들이 자신이 마치 ‘인간’인줄 알고 자기 안목에서 복음을 판단하고 평가하려 합니다.

그러나 사실 인간이라는 여기는 존재는 없고 모두 죄인일뿐입니다. 인간은 오직 예수님에게만 붙어야 마땅합니다. 참 인간, 참 사람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들어진 인간들을 범죄로 몰아세우시는 이유는, 그 과정을 통해서 예수님만이 참된 인간, 참된 주님으로서 등극되는 절차가 실시되는 환경이 되기 때문입니다.

죄 속에서만 참된 인간, 참된 생명이 피어나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 자신들이 우기는 그런 인간 아닌 인간, 하나님께서 참으로 영광 돌리는 그 인간이 피어납니다. 두 개의 막대기로부터 새로이 출발해야 하는 여기에 있습니다. 흔히 두 개의 막대기 중에서 남쪽 유다 지파는 통합된 후에도 상대적으로 북 이스라엘에 비해 자기의 가치를 높일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이스라엘이 처음으로 두 개의 나라로 갈라진 그 지점을 살펴보면 그 이유가 짐작됩니다. 열왕기상 11:29-33에 보면, “그 즈음에 여로보암이 예루살렘에서 나갈 때에 실로 사람 선지자 아히야가 길에서 저를 만나니 아히야가 새 의복을 입었고 그 두 사람만 들에 있었더라  아히야가 그 입은 새 옷을 잡아 열두 조각에 찢고

여로보암에게 이르되 너는 열 조각을 취하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나라를 솔로몬의 손에서 찢어 빼앗아 열 지파를 네게 주고 오직 내 종 다윗을 위하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뺀 성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솔로몬에게 주리니 이는 저희가 나를 버리고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과 모압의 신 그모스와 암몬 자손의 신 밀곰을 숭배하며 그 아비 다윗의 행함같지 아니하여 내 길로 행치 아니하며 나 보기에 정직한 일과 나의 법도와 나의 율례를 행치 아니함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솔로몬 왕이 우상숭배했다고 나라를 둘로 나뉘시겠답니다. 그런데 망할려면 애초에 이방민족에 한꺼번에 한 나라로 다루어져서 망하지 않고 왜 둘로 나누어 차별되게 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그것은 예루살렘 속에서 새로운 이스라엘을 건립할 메시야를 끄집어내시겠다는 겁니다.

예루살렘 자체에 특별히 언약적 의미를 두어 그 완성을 하나님 손에 의해서 마무리지어시겠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북쪽 요셉 나라는 망해도 남쪽 유다 나라는 안 망하는 셈이 됩니다. 시편 78:67-68에 보면, “또 요셉의 장막을 싫어 버리시며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유다 지파와 그 사랑하시는 시온 산을 택하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에스겔에서는 두 나라를 합치겠다는 겁니까? 아예 북이스라엘은 망하도록 하시고 유대나라만 키우면 왜 아니되는 겁니까? 여기서 우리는 창세기 끝부분에 야곱이 열 두 지파에서 축복의 예언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거기에서 12지파 가운데 유독 돋보이는 두 지파가 있습니다.

하나는 유다지파요 다른 지파는 요셉지파입니다.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요셉의 활이 도리어 견강하며 그의 팔이 힘이 있으니 야곱의 전능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그로부터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나도다”(창세기 49:10,24)

이 예언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역사 자체가 이 말씀을 이루지 못하고 망하는 절차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예언을 말씀을 자신들의 관리하에 적용될 성질의 말씀이 아님을 분명히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주님만이 이 예언말씀대로 성취시킴을 분명히 하기 인간들의 예언에 대한 이해도는 실패로 마무리 되어야 합니다.

이 예언에 의할 것 같은 왕은 유다지파에서 나오지만 목자는 요셉지파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아는 바로는 예수님께서는 왕도 되시고 목자도 되십니다. 즉 왕과 목자는 동일인물이신 겁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얼른 이 예언이 빗나간 것처럼 여겨질 것입니다. 하지만 사싪에 있어서, 예수님의 목자됨과 왕되심의 과정에서 인간들의 기대들이 무너져내려야 합니다.

요한복음 13:36-37에서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장담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하지만 베드로의 결심은 여지없이 예수님에 의해 거절당합니다. 그래놓고서 요한복음 14:2에서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즉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받을 영광을 그 어떤 피조물에게도 양보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인간들의 실제적 만남에서, 예수님께서는 비록 남쪽 유다 지방에서 다윗의 자손으로 태어나셨지만 성장지역은 북쪽 요셉지파 지역, 곧 어둠에 속한 분으로 움직이면서 마지막으로는 남쪽 예루살렘으로 내려가 거기서 모든 아버지 뜻을 이루십니다.

그래서 참된 이스라엘은 기존의 이스라엘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예수님과 함께 그 이스라엘 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실패하는 가운데 등장하시는 구세주를 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37장 15절-17절입니다. 구약성경 1210페이지입니다.


에스겔 37:15-17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너는 막대기 하나를 취하여 그 위에 유다와 그 짝 이스라엘 자손이라 쓰고 또 다른 막대기 하나를 취하여 그 위에 에브라임의 막대기 곧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쓰고 그 막대기들을 서로 연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 네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


둘이 하나가 될 것 같으면 애초부터 하나가 계속 유지되게 하시면 되는데 하나님께서 막대기를 둘을 준비해 놓고 그것을 하나로 연합되게 하십니다. 그것은 결과만 중요한 것이 아니고 결과에 이르는 그 과정 속에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너희가 어떤 절차, 어떤 과정을 밟아서 도로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결과만 보고 하나님을 섬기겠습니다, 하는 것이 아니고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으면 우리는 도로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하나가 될 수 없었다는 것을 이스라엘로 하여금 새삼 깨닫게 하는 겁니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가 형처럼 가출하지 않고 그냥 집안에 있었으면 탕자는 전혀 아버지가 준비한 가락지와 좋은 옷 같은 것을 얻을 수가 없었을 겁니다. 집을 나와서 아버지의 재산을 허랑방탕 다 날려줘야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이야기합니다. 인간이 존재하는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기 위함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창조된 것이 아니고 인간들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기 위해서, 가로막기 위해서 창조된 거예요.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이러쿵저러쿵 이야기들 합니다. 어떤 사람은 따지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비난하기도 하는데 기독교에 대해서, 복음에 대해서, 성경에 대해서 대드는 사람의 특징이 있어요. 본인들이 사람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이 세상에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되어 있고 인간은 인간이라고 잠시 나타났다가 도로 흙으로 전환되어야 되고요. 그래야 그런 과정을 통해서 오직 예수님만 인간이지 다른 것은 인간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런 인간처럼 생긴 이것을 뭐라고 하느냐? 그것을 죄인이라고 해요. 인간은 죄인일 뿐 인간은 없습니다. 인간의 존엄성, 인간의 가치? 그런 것은 없어요. 자기가 인간이라고 생각하니까 자기가 인간이라는 것을 전제로 깔고 하나님을 거론하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어쩌고저쩌고 그런 소리가 나오는 겁니다. 창세기 3장 17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와 있거든요. 우리가 흔히 놓치기 쉬운 말씀인데요.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그 다음 말을 놓치기 쉬워요.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땅이 저주받는 이유가 인간 때문에 저주받는 겁니다. 이 말은 세상은 아담 속에 있었다, 라고 보면 돼요. 세상은 인간 속에 있다는 이 말은 새로운 아담이 등장하게 되면 그 새로운 아담 속에 새로운 세상이 그 안에 품어져 있다는 말과 같은 말이 되는 겁니다. 인간 때문에 저주를 받았으면 그 인간을 대체하는 인간이 등장한다면 더 이상 저주 없는 세상이 될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려야 되고 죄를 지어야 되고 선악과를 따먹어야 되고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실패하고 그래서 도로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쉬운 말인지 어려운 말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창조가 무효화되는 과정을 거쳐서 제대로 된 창조를 나중에 보여주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완성을 마무리 지었습니다. 만들어놓고 없애버리는 겁니다. 여러 번 제가 이야기했습니다만 히브리서 1장 10절에 그 내용이 나와 있지요.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바라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세상은 주께서 친히 만들었는데 그 친히 만든 것을 주께서 멸망시켜 버린다. 멸망시키기 위해서 만들어져야 된다. 그 이유가 뭐냐?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해야 될 이유가 있기 때문에, 훼손해야 될 존재이기에.


흔히 교회에서 “인간이라 하는 것, 인간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자꾸 하다보니까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그것을 자기가 파괴되고, 죄짓고, 범죄하고, 자기가 하나님께 대드는 그러한 과정 없이 현재 있는 이 모습 이대로 영광을 돌리겠다고 어떤 방법을 자꾸 강구하다 보니까 그게 바로 마귀가 뒤에서 부추기는 꼴이 되고 말았어요. 완전하게 망해버려서 영광 돌리고 싶어도 영광 돌릴 어떤 빌미나 건더기도 전혀 없을 때, 그래서 마귀도 “이제 너는 다 써먹었다.” 할 때 인간의 힘으로 영광 돌릴 어떤 건더기가 완전히 사라졌을 때, 그 때 그 과정, 완벽하게 실패한 그 과정을 통해서 주께서 이제 작업을 하는 겁니다.


그 주의 작업을 통해서 인간이 할 수 없었는데 주께서 하셨기에 오직 주님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겁니다. 그게 베드로전서 4장에 나오는데요. “네가 무슨 말을 하거나 무슨 봉사를 할 때 하나님 주신 힘으로 하라. 이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그래서 그리스도 없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법은 없어요. 지난주일 낮에 중보자 이야기를 했는데 중보자 없이는 영광 돌리는 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중보자 없이 본인의 입장에서 영광돌리겠다고 나서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기는 영광 돌린다는 빌미 하에 자기는 실패해서는 안 되고, 사업도 잘 되어야 하고, 인생살이도 건전하게 나가야 되고, 우환도 없어야 되고, 그렇게 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하는 겁니다. 특히 20대 젊은 대학생들이 교회 가서 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이여, 결혼도 하고 취직도 하고 그래서 영광 돌리게 하옵소서.”


취직에 실패하고 결혼에 실패해서 그래서 영광 돌릴 건더기도 없고 나는 아예 영광 돌릴 입장이 안 된다는 그 과정을 밟아야 되는데, 겪어야 되는데 그런 과정도 없이 “하나님 믿으니까 영광 돌리자.” 그런 식으로 나와요. 그런 식으로 하다가 자기 신상에 우환이 생기고, 자기 가정이 파탄이 나고, 사업이 안 되고, 취직도 안 되고, 그렇게 되면 그 때부터 하나님께 대드는 겁니다. “영광 돌리려고 했는데 하나님이 안도와주고 안 받쳐주니까 영광돌리기가 힘듭니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안 해주면 하나님도 손해고 나도 손해입니다.” 이런 식으로 협박 공갈조로 나온다 이 말이지요.


<개그콘서트> 프로에 이런 코너가 있어서 굉장히 요새 은혜를 받아요. 장가 프로젝트라는 코너가 있는데 그거 꼭 볼 필요는 없어요. 거기 보니까 “여러분, 제가 외제차를 샀습니다. 돈 모아서 집도 샀습니다.”라고 하니까 어떤 사람이 “그러면 이 코너가 끝나는 것이 아닙니까?” 하니 “이 한심한 놈아! 그래 집 샀어? 뭐! 그게 뭐야? 그게 뭔데? 이 한심한 놈아!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데?” 기도하기를 “가정에 우환이 있고 사업이 잘 안됩니다.” 하면 하나님께서 “이 한심한 놈아! 뭐가 없어? 뭐가 없는데? 그래서 어쩌라고.”


하나님의 영광을 빌미로 해서 사실은 자신의 야욕과 욕망을 채우려는 방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믿겠다는 것, 그것은 처음부터 하나님을 몰라도……, 모르는 것도 아니지요. 사실은 은연중에 하나님을 믿으면서 여기 있는 내가 마치 사람인양, 뭔가 자기가치가 있는 양 오해해서 그런 거예요. 진짜 그런 사람은 한심한 놈입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그래? 전 인류가 다 타락했는데 네가 실패 안해야 되고 네가 빠져야 되는 이유가 뭔데? 그런 것은 없어요. 우리 성경 다시 봅시다. 십자가 앞에서 다시 봅시다.


십자가 앞에서 모든 인간은 당연히 망해야 됩니다. 당연히 저주받아 합당합니다. 왜냐? 창세기 3장 17절에 “너로 인하여 온 세상에 다 저주받게 된다. 네가 저주를 유발시킨 요인, 원인제공자다.”라고 주께서는 그렇게 잡아 제치는 겁니다. 그렇게 몰아넣으시는 거예요. 왜 그런가? 그렇게 인간이 난처해줘야, 그렇게 인간이 실패해줘야, 인간되기에 성공하지 못해 줘야 그 실패했던 그 과정을 도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을 변화시키는 또 다른 인물, 주님의 영광이 빛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가 개입해서 도저히 영광을 돌리지 못하는 자로 하여금 그들을 데리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한다면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비로소 아버지께 영광이 되는 겁니다. 이것은 빌립보서 2장 11절에도 나오는 말씀입니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에스겔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분명히 막대기가 하나라면 구태여 둘로 나눠놓고 그걸 새삼스럽게 둘로 이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처음부터 둘 안 되게 하시면 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막대기를 둘로 만들어놓았어요. 그 다음에 그 막대기 둘은 절대로 하나가 될 수 없어요.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막대기 둘을 나누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 둘이 나중에는 하나가 된다는 겁니다. 그 막대기 하나가 뭐냐 하면, “유다와 그 위에 유다와 그 짝 이스라엘 자손이라 쓰고” 또 다른 막대가 뭐냐 하면, “또 다른 막대기 하나를 취하여 그 위에 에브라임의 막대기 곧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쓰고.”


이 두 가지 막대기를 연합하는데 그 하나 되는 장소가 있어요. “네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 네 손에서. 여기 네 손에서 ‘너’란 인자를 말합니다. 장차 오실 예수님께서 자기를 호칭할 때 불렀던 그 호칭이 인자입니다. 일부러 둘을 만들어놓고 그 둘이 하나가 되는 그 과정을 주시하고 주목해 보라는 말이지요. 그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어떤 인자됨의 개입 없이는 절대로 둘이 하나가 될 수 없는 그런 처지에 너희들이 놓여 있다는 겁니다.


그 당시 유대입장에서는 그래요. 북쪽 이스라엘이야 죄 지어서 망해도 좋지만 하나님이 친히 살펴주시고 택해주신 이 유다는 우리끼리 유다만 남아도 상관없습니다, 라는 것이 그 당시의 유다백성들이 생각이었습니다. “이방민족한테 자빠졌던 그들은 잘 망했다.” 요즘 식으로 쉽게 하면 북한이 중국에 드디어 점령되었다고 한다면 남쪽에서는 “잘됐다, 잘됐어! 같은 공산당끼리 잘 만났다. 우리 남쪽이야 IT산업 개발해서 잘 먹고 잘살면 되지.” 이런 쪽이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럴 것 같으면 애초부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전체로 만들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네가 옛날에 한 이스라엘이 둘로 갈라질 때 무엇 때문에 갈라졌는가 하는 그 대목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는 겁니다. 갈라질 때 뭘 로 갈라졌는가 하는 거지요. 열왕기상 11장 29절에 보면, 그 갈라진 이유가 나옵니다. 솔로몬 시대에 솔로몬이 우상숭배를 했지요. 여기 아히야라는 선지자가 있는데 그 선지자가 우연히 길에서 여로보암이라는 높은 신복, 솔로몬의 신복을 만나게 됩니다.


만나서 일방적으로 이런 예언을 합니다. “그 즈음에 여로보암이 예루살렘에서 나갈 때에 실로 사람 선지자 아히야가 길에서 저를 만나니 아히야가 새 의복을 입었고 그 두 사람만 들에 있었더라 아히야가 그 입은 새 옷을 잡아 열 두 조각에 찢고.” 그러고 난 뒤에 “여로보암에게 이르되 너는 열 조각을 취하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나라를 솔로몬의 손에서 찢어 빼앗아 열 지파를 네게 주고 오직 내 종 다윗을 위하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뺀 성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솔로몬에게 주리니.”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두 지파만 유다에 남기고 나머지 열지파가 다 떨어져 나가도록 하는 겁니다. 그 때 나라가 둘로 나눠졌던 거예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열왕기상 11장 33절에, “이는 저희가 나를 버리고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과 모압의 신 그모스와 암몬 자손의 신 밀곰을 숭배하며 그 아비 다윗의 행함 같지 아니하여 내 길로 행치 아니하며 나 보기에 정직한 일과 나의 법도와 나의 율례를 행치 아니함이니라.” 그러니까 우상숭배를 해서 나라가 나눠졌다는 거예요. 이 대목이 상당히 어려운 대목입니다.


우상을 숭배했는데 누가 숭배했느냐? 솔로몬이 숭배했어요. 그 당시 솔로몬은 누구의 대표자냐 하면, 이스라엘 전체의 왕입니다. 솔로몬이 우상숭배 했으면 누가 망해야 되는가? 이스라엘 전체가 다 망해야 되는데 하나님께서는 열 조각과 두 조각을 나눠놓은 거예요. 어디를 중심으로 해서 나눴는가? 예루살렘에 강조점을 두면서 나눴거든요. 이 말은 우상숭배를 한 이스라엘이라 할지라도 그 이스라엘 범죄가운데서 예루살렘을 중심해서 새로운 이스라엘을 만들어낼 과정을 이제 본격적으로 개시하고 가동시키고 시작을 하겠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면 애초부터 솔로몬에게 우상숭배를 못하게 하면 되지 않겠는가? 이걸 알아야 돼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라고 할 때 그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이 아니에요. 인간들이 살고 있는 이스라엘이 아니고 이스라엘이 망한 자리에서 나온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인 겁니다. 그래서 지난 주 오후설교에서 교회는 망해야 된다는 이야기를 그렇게 한 거예요. 생전 처음 듣는 사람, 특히 부산에서 온 사람은 깜짝 놀랐을 거예요.


교회는 망해야 된다는 거예요. 이스라엘은 망해야 돼요. 망해야 망한 이스라엘에서 다른 이스라엘이 나오는데 그 다른 이스라엘은 망했던 이스라엘이 정신 차리고 회개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그 안에서 새로운 중보자가 나와서 그 중보자가 인간이 실패한 것을 분명히 다지고 다져서 더 이상 네가 새로운 이스라엘 건립에 전혀 기여한 바 없음을 분명히 다져놓은 뒤에 새로운 이스라엘을 끄집어내야 모든 새로운 천국의 공로는 사람에게 돌아가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유일한 인간인 예수님에게만 공로가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시나리오입니다.


쉽게 말해서 뭐냐? 망하자는 이야기입니다. 망하자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막살자, 같은 말이에요. 또 나옵니다, 막살자는 말, 이 말은 지겹지도 않은 모양이에요. 계속하는 말이에요. 망하자는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예수 믿고 망하자는 겁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망해도 좋습니다.” 하는 사람만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내가 망해줘야 주님의 공로를 우리가 탈취하지 않고 이것을 손대지 않아요. 내가 훌륭하고 내가 잘나버리면 우리는 예수님 공로 영광이라고 말은 그럴싸하면서도 사실은 내가 교회 봉사하고 주께 봉사한 그것을 근거로 해서 정작 내가 원하는 것, 이 땅에서 복 달라고 뒤쪽으로 손 내밉니다.


“이렇게 봉사했는데, 이렇게 충성했는데 왜 내 뜻대로 안 해줍니까?” 주께서 뭐라고 했습니까? “이 한심한 놈아. 그래서 뭐? 뭘 어쩌라고?” 하나님께서는……, 여기서는 좀 어려워져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 어렵다는 이유가 여기 시편 78편 67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또 요셉의 장막을 싫어 버리시며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유다 지파와 그 사랑하시는 시온산을 택하시고 그 성소를 산의 높음 같이, 영원히 두신 땅 같이 지으셨으며 또 그 종 다윗을 택하시되 양의 우리에서 취하시며.” 이렇게 되어 있어요.


분명히 여기 보면 하나님께서 에브라임 곧 요셉지파를 하나님께서 갖다 버립니다. 이 본문만 보면 북쪽 이스라엘 열지파가 있든 없든 그런 것은 상관없어요. “나는 유다지파와 베냐민 지파만 있으면 돼.”라는 것처럼 보여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와서는 그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분명히 택하지도 않고 버렸다는 그 에브라임과 요셉지파 그 이스라엘을 다시 막대기에다 글자를 써가지고 둘이 딱 붙게 하는 거예요. 인자의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게 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유다지파의 주도권이 날라 가 버리게 되지 않느냐, 여러분 생각에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유다지파에게 기대를 걸었다. 북쪽 너희는 택하지 않았다. 너희는 죽든 말든 나는 몰라. 하지만 유다지파에게는 기대를 걸었다.”라고 칩시다. 그래서 유다지파에서 메시아가 났습니다. 그러면 우리 같으면 유다지파만 잘되면 좋겠는데 에스겔 본문에 의하면 “유다지파에서 메시아가 났기 때문에 전에 내가 버렸던 그 애들도 다시 데려와. 다시 그 막대기에 글자를 써서 하나로 만들어서 온 이스라엘이 되었다.”라고 할 것 같으면 어떻습니까? 우리가 만일에 유다지파라면 옴메 기살아, 할 것이고 우리가 만약에 북쪽 요셉 지파라면 하나 되기는 하나가 되는데 기가 죽어서 “미안합니다.” 할 거라 그 말이지요. 과연 그런가, 과연 그렇게 되는가 하는 겁니다.


만약에 이런 식대로 한다면 다른 지파는 을이 되어서 유다지파가 다른 지파에 대해서 갑이 되어서 갑 행세를 할 수밖에 없는 역사가 계속 이어져야 했을 때는 방금 제가 한 이야기가 맞는 이야기가 되겠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그렇지가 않아요. 분명히 유다지파 때문에 나머지 이스라엘 지파가 산다고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유다지파가 이스라엘보다 우월하다는 조건이나 이야기는 없어요. 그렇잖아요? 북쪽과 남쪽이 똑같은 입장에서 두 개의 막대기가 인자의 손에서 하나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유다지파의 우월성은 어디서 찾느냐 하는 겁니다. 제가 하는 말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시겠습니까? 교회 싫다고 삐져서 나가놓고 아무리 봐도 그 교회가 복음을 전하거든요. 그럴 때 “그때 내가 철이 없어서 잘못 생각했다. 이제 복음 다시 알았습니다.” 하고 기어들어올 때, 기어들어오는지 어떻게 들어오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기어들어올 때 기존에 있는 사람이 얼마나 우월감을 갖겠느냐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대로 하면 유다지파가 우월감 갖고 요셉 지파는 옴메 기죽어, 하고 들어와야 맞는데 그게 일체 없다는 말이지요.


지금 유대인들이 오해하면 안돼요. “역시 우리 지파 아니면 너희들은 다 죽었어.” 이렇게 나중에 하나가 되고 난 뒤에 주도권을 자기들이 쥐는 것을 하나님이 용납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제가 드리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그 유다지파의 주도권이 어디로 갔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제 말의 취지를 아시겠지요? 그걸 찾아내야 되거든요. 안 그러면 유다지파가 역시 잘난 체를 하니까. 거기에 대해서 간단한 해결책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지금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장 2절에서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했지요. 그런데 그 앞서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 베드로가 자기 목숨을 바쳐서 주님을 따라가겠다고 할 때 주님께서 “아서라 말아라, 베드로야! 네가 갈 수 없는 곳이다.”라고 베드로를 배제해버리잖아요. 만약에 베드로가 목숨 바쳐서 하늘나라 따라갔다면 베드로는 하늘나라에서 뭘 쥡니까? 주도권을 쥐고 있을 거라는 말이지요. “거봐. 너희들은 감히 못하는 짓을 했잖아. 나는 목숨 바쳐서 주와 함께 승리했단 말이야. 너희들은 벌벌 떨었지. 나는 목숨 바치고 들어왔어.”


이렇게 되면 주님이 온전히 받을 영광을 베드로가 양분한 셈이 돼요. “주여, 저 예쁘지요?” 이렇게 된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베드로보고 오지 말라고 했다는 말이지요. 베드로가 무슨 지파입니까? 유다지파지요. 유다지파도 천국에 못갑니다. 유다지파도 천국에 못가요. 분명히 하나님께서 솔로몬 이후에 “유다지파 예루살렘은 남겨놓아라. 예루살렘은 은혜를 주겠다.” 했거든요. 예루살렘에 은혜를 준다는 것은 뭐냐? 다윗 언약을 예루살렘을 통해서 계속해서 진행시키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소리를 듣고 남쪽 유다지파가 얼마나 자부심을 느끼겠습니까? “그렇지. 북쪽, 북한 버려도 남쪽의 남한은 하나님이 사랑하는구나.” 이런 식이 될 것이 아니냐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 유대지파마저 예수님 오실 때 아서라, 말아라, 하고 오지 말라고 말렸다는 말이지요. 말리고 난 뒤에 주께서 하시는 말씀이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고 이야기했어요. 그러면 오지 말라고 해놓고 거할 곳이 많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요? 그 뒤에 나오는 요한복음 14장 3절, 내가 가서 처소를 마련해서 처소가 마련되면 다시 너희에게 올게, 라는 말씀을 봐서 남쪽이든 북쪽이든 똑같은 입장이고 똑같은 처지에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어느 누구도 유다지파라서 자긍심을 가질 하등의 이유가 없는 거예요. 자, 그걸 방금 에스겔에서 찾아봅시다. 에스겔에서 찾아볼 때에, 37장 24절에, “내 종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니.” 할 때 문자적으로 보면 이 다윗이라는 것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유다지파에서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봐라. 유다지파에서 임금이 와서 버림받은 너희 북쪽까지 끌어당겨서 한 나라로 한 거야. 그러니까 유다지파에게 감사해.”라고 할 것 같은데 이 유다지파의 다윗은 다윗이 아니고 바로 장차오실 예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뭡니까? 유다지파의 이 유대인들조차 예수님의 공로에 참여 대상이 안 된다는 겁니다. 주님의 공로는 주님만 가져야지 그 출신이라는 이유 때문에 거기 합세할 수가 없어요. 그 이야기를 왜 에스겔에 미리 깔아놓았느냐 하면, 바로 인자라는 것, 에스겔을 부를 때 ‘인자야.’라고 하는 그 인자가 품고 있는 내용이 기존 유다 이스라엘을 언급하지만 사실은 기존의 혈통과 전혀 상관없이 별개로 하늘에서 인자가 오셔서 단지 그 지파와 혈통을 그냥 이용만 할 뿐이지요. 이용만 할 뿐이에요.


다윗의 자손이라고 해서 거기서 다윗이 어떤 행세를 해서 어떤 자기 공로를 거기에 가미할 수 있는 자격이 못돼요. 될 수가 없어요. 그렇게 해놓고 마지막으로 우리가 보고 싶은 것이 있어요. 창세기 49장입니다. 창세기 49장은 야곱이 마지막으로 열두 아들에게 축복하는 대목입니다. 그 축복했던 대목 안에 열 두 지파가 있는데 그 열두지파 가운데 유독 투톱처럼 우뚝 솟은 막대기 같은 것이 두 개가 있어요. 하나는 유다지파의 관한 것이고 또 하나는 요셉지파에 관한 겁니다. 그러면 유다지파에 관한 것부터 먼저 읽어드리면 창세기 49장 10절에,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홀이라 하는 것은 임금, 왕이 있는 지팡이거든요. 왕이 유다지파를 떠나지 않는다? 진짜 유다지파가 기대하는 그 임금이 올 때까지는 계속해서 유다지파는 유다지파 속에 장차 임금님 오시는 요소가 거기에 내장되어 있다는 겁니다. 잠재되어 있는 그 요소가 결국은 진짜 임금님과 매치될 때 유다지파에서 나오는 그 잠재된 요소에 의해서 메시아가 온다는 그 이야기거든요. 그러면 창세기 49장 10절만 보면 메시아가 어디서 오는가? 유다지파에서 오는 것이 맞잖아요. 끝났네요. 그러면 나머지기 열 한 지파는 그 앞에 굴복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창세기 49장 24절에 보면, “요셉의 활이 도리어 견강하며 그의 팔이 힘이 있으니 야곱의 전능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그로부터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나도다.” 요셉지파에서는 목자가 나오고 유다지파에서는 왕이 나오고 어느 쪽이 더 의미 있는 출생이 되느냐 하는 일종의 경쟁관계가 되어버려요. 유다지파에서 왕이 온다는 이 구절만 있으면 간단해요. ‘아, 유다지파에서 왕이 와서 나라가 다시 통합되겠구나.’ 이렇게 쉽게 이해가 되겠는데 이스라엘 반석인 목자가 요셉지파를 통해서 나타난다면 주도권싸움에 들어가는 거예요.


목자에 더 힘이 실리는가, 즉 목자가 더 중요시 되는 인물인가 아니면 왕이냐 하는 그 패가 갈릴 수밖에 없겠지요. 왜 그 흐름이 하나로 이어지지 않고 갑자기 둘로 나뉘는가 하는 말이지요. 목자와 왕이 한 분인 것을 우리가 알잖아요. 그런데 왜 역사 속에서는 왕따로 목자 따로 나와 있느냐 하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목자라 하는 것은 희생하는 모습, 누구의 희생, 유다의 죄와 북쪽 이스라엘의 죄, 그 모든 죄는 요셉지파로부터 나온다고 하는 겁니다. “우리는 왕의 가문이야. 왕족이야.”라고 했던 그런 건방짐 때문에 피해를 보는, 상대적으로 죄인 취급받는 그 지파를 통해서 고난 받는 목자의 모습으로 오시는데 사실은 그분이 다윗이 고향에서 태어난,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유다지파의 자손이었습니다.


유다지파에서 태어나서 성장과정은 갈릴리에서 성장해서 결국은 예루살렘을 장악해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주도권을 가질 수가 없는 이스라엘이 될 때 모든 공로는 오직 주님만, 인자되시는 주님만 가져야 된다는 것이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흐르는 하나님의 웅대한 계획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못났다고, 못났다고 하는 가운데서도 잘난 구석 따로 챙기는 것이 우리의 못된 버릇입니다. 주님만 영광이라고 하면서 그 영광을 빌미로서 내 영광 따로 챙기는 것이 우리의 못된 버릇이었습니다. 이 마귀적 속성을 주께서는 눈치 채시고 저희들로 하여금 십자가 앞에 날마다 세우게 하셔서 정말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진심으로 고백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